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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교리] 구원론(구원)  


죄에 대한 연구는 우리에게 구원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연구는 "구원론(Soteriology)"이라고 하며, 이 단어는 "구원자(Soter)"를 뜻하는 헬라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고 승리를 외치셨습니다(요19:30).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은 모든 사람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며 다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예비해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의 주요한 면을 요약하고 있는 낱말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대속(substitution)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이르기를,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18:20)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율법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제는 사랑이 하나님의 거룩한 합법적인 요구들을 만족시켜주는 방법을 찾아내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죄지은 자를 위해 기꺼이 죽을 대속물이 필요했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죄인은 자기 죄로 인해 죽어야 했으며 그러므로 그에게는 구원이 없었습니다.


한편 이 대속물은 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보기엔 이 외에 뭔가 다른 계획도 가능할 것 같지만,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려야만 합니다. ② 정죄받은 사람과 동등해야 했습니다. 짐승은 사람보다 열등합니다(히10:4). 천사는 사람보다 더 뛰어나지만 순수한 영일뿐 육체가 없으므로 죽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적합한 대속물은 바로 사람이라야 했습니다. ③ 죄가 없어야 했습니다. 자기 죄가 단 하나라도 있는 사람은 아무도 다른 사람을 위한 대속물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죄를 위해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④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무죄한 어떤 사람을 억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죽게 한다면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 못되실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셨다면 마귀는 곧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고소했을 것입니다. ⑤ 무한한 생명을 지니고 있어야 했습니다. 죄가 없더라도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 단 한 명만 구하기에 족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생명은 생명으로"(신19:21)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무한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완벽한 대속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어느 누구도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성령으로 더불어 동등하신 분입니다.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이자 동시에 사람이셨던 주님께서 기꺼이 버리신 생명은 무한한 생명이었습니다. 이에 구원받은 피조물들의 찬송과 경배는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대속물"(substitute)이란 말을 흠정역 성경에서 찾을 수는 없어도, 대신해서 고난을 당한다는 개념만큼은 흠정역 전체에서 두루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짐승제물들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으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아벨의 양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피 없는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창4:4,5). 하나님께서 친히 이삭 대신 죽을 숫양을 공급하셨습니다. 레위기의 제사제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 말 그대로 수백만 마리의 짐승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대속의 진리는 이사야가 이사야서 53장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우리 허물을 인해(5절), 우리의 죄악을 인해(5절),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해(8절), 속건제물로서(10절), 범죄자를 위하여 죽을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12절).


신약성경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주시고, 우리를 위해 그 피를 흘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22:19,20). 바울과 베드로는 대속의 진리를 거듭 거듭 가르쳤습니다(롬5:8, 갈3:13, 벧전3:18).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으며 이는 곧 죄인들을 대신해, 그들을 위해, 그들의 유익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또 죄 때문에 죽으시되 친히 그 형벌에 대한 책임까지도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으로서 이상적이며 합당하신 그리고 유일하신 대속물이십니다!

다음은 구속(redemption)입니다. "구속하다"라는 말은 "무엇을 사다" 또는 "되사다"는 뜻합니다. 구속은 죄와 또 거기에서 풀려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 한 사람이 병이나 가난 때문에 자기 재산을 팔아야 할 처지에 놓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구속자(goel) 혹은 유업을 무를 자라고 하는 그의 친척에게는 그 재산을 언제든 도로 사서 되찾아 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사람과 그 친척은 자기 집안의 재산을 지키게 되었습니다(레25:23-25). 룻기4:1-10과 예레미야32:6-12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신약에는 "구속하다", "값을 주고 사다" 등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동사가 다섯 가지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절차를 보여주며, 또 그리스도의 사역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완벽하게 예비된 것으로 오직 믿는 자들(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만 효력이 있고 유용할 뿐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 첫 번째 낱말로 "시장에 자주 가다" 혹은 "시장에서 사다" 라는 뜻을 가진 것이 있습니다(마13:45,46, 눅9:13). 모든 사람, 즉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까지도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셨다는 점에 있어서 모두 속함을 받고, 사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벧후2:1). 믿는 자의 몸은 값으로 사신 바가 되었습니다(고전6:20). 우리는 피로 사신 바 되어 나라와 제사장들이 됩니다(계5:9,10).
두 번째 낱말은 첫 번째 것과 비슷합니다만 접두사(ex)가 붙음으로써 판매대상에서 제외되고 과정을 되돌릴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낱말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받아들인 신자들에게만 쓸 수 있습니다(갈3:13, 4:5).


세 번째 것은 속전을 받고 풀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1:18,19은 이 속전(값)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가리키고 있으며, 디도서2:14은 우리가 불의로부터 구속받아서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네 번째 동사는 세 번째 것과 비슷하나, 접두사(apo)가 붙어 있어서 "무엇으로부터 떨어져" 풀려난다는 뜻이 더 강하며 로마서3:24과 에베소서1:14에는 명사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섯번째 것은 앞의 낱말들과는 어근의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만 사도행전20:28에 "사셨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담긴 뜻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취하시고 또한 돌보셨다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나 죄로 말미암아 다른 것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 속전을 지불하셨습니다. 사실 그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곧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며 이렇게 하심은 "극히 값진 진주(사랑하시는 교회)"를 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상 우리가 살펴본 낱말들은 교훈을 얻기 위한 것이므로, 이 은유적인 말들을 성경에서 인정하고 있는 범위를 벗어나 지나치게 강조하여서는 안됩니다. 가령 성경은 그 속전을 누구에게 지불했는지 말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사단에게 주시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피로 대속하셨다"는 이 위대한 교리를 생각해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찬송이 구속자께 드리는 찬양과 구속받은 자들의 영광으로 가득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닌 것입니다!

 

화목제물(propitia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에 대해 구속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또는 화목)하게 해드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렸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의와 거룩함, 공의를 저버리지 않으시고도 죄인들을 대하여 사랑으로 행하실 수 있게 해드렸습니다. 성부는 늘 진노하시고 온유하신 성자 예수님은 그 성부의 마음을 달래드린다고 하는 사상은 정말이지 생각해 볼 가치조차도 없습니다. 실상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동기가 바로 사랑때문이란 것을 요한일서4:10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하신 요한일서 2:2 말씀은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린 것의 효력이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진노는 하나님과 화목되지 못한 결과로 임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사용된 헬라어 "속죄소"(히9:5)와 "화목제물"(롬3:25, 그리스도를 가리킴)은 구약의 동일한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속죄소는 죄를 가리는 것과 의의 거룩한 표준이 요구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가복음18:13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와 화목해주시옵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으로 만족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이루신 일은 단 한 번으로 완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히9:28). 화목제물로 인해 하나님은 자유롭게 그리고 정당하게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고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의롭다고 하실 수 있게 되었으며, 모든 은혜와 영광을 죄인들에게 베푸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다는 사실과 예수님과 그분이 이루신 사역에 완전히 만족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그러하십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성경에는 또 화목(reconciliation)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죄에 대한 대속, 구속,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셨다는 화목, 그리고 이제 사람편에서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으로써 이루신 주요 공로들입니다. 우리는 죄론에서 죄의 성품에 대한 심판을 위해 준비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그분은 위대한 두 가지 다른 업적인 죄사함과 정결함의 근본이십니다. 흔히 범하는 실수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사람과 화해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의 가르침은 화해가 필요한 당사자는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화해라는 말을 쓸 때 피차 사이가 불편하던 두 사람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화해는 입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흠정역 로마서 5:11에 "대속"{"화목"(개역성경) : [역주]}(atonement)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실상은 "화해"를 가리키는 헬라어 명사를 영어로 옮긴 것입니다. 10절을 보게되면 이 단어의 동사형은 "화목되었다"로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대속"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사역에 대해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용어이지만 신약에서는 단 한 번 쓰일 뿐입니다(그리고 바로 이때도 "화해"라는 뜻의 단어를 쓸 자리에 잘못 들어가 있는 경우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죄를 "덮는다"는 개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둘 것 같으면 대속이라는 용어를 써도 하등 문제가 없습니다. 화목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적대적인 위치에서 다정한 관계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해 얻어진 이 화해에는 잠정적인 측면과 실제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잠정적인 측면에서 온 세상은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고후5:14,15, 19). 이것은 세상이 지금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지금 구원받은 상태라거나 온 세상이 구원받게 되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온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제적인 화목은 고린도후서5:20에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될 때 모든 것이 새롭게 되며 그의 지위 또한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바뀌고 죄에서 의로 옮기게 됩니다. 죄에 대한 대가는 지불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존재하게 되며,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은 자가 됩니다. 하늘에 속한 것들, 곧 보좌들과 정사들과 권세들도 화목되었다는 것 또한 주목하시기 바랍니다(골1:16,20).

 

택정하심

택정은 문자적으로 "선택하는 것", "골라내는 것" 또는 "정하는 것"으로서 성경의 가장 어려운 가르침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도를 깨달을 의무는 없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택하기 전에,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그 사람들을 골라내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사람의 "선택"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유의지의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사 구원받게 하신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주시기 위해 선택하셨습니다(요6:37).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누가 잃어버린 자가 되기로 택함을 받았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불못은 마귀와 그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그곳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은 선택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이지만,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에 대한 말씀은 아닙니다. 여기서 천사들, 이스라엘, 또 그리스도까지도 모두 "택함받은 자"로 말씀하고 있습니다(딤전5:21, 사45:3-4, 벧전2:6). 그리스도인들이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곳은 롬8:33, 골3:12, 벧전1:2입니다. 아무도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이가 없기 때문에, 설사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구원받게 하시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두신다고 해도 이는 부당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그 사람들은 자기 의지로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로서 책임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목적을 갖고 있다고 믿는 자들에게는 그 "택하심"이 격려가 됩니다. 택함받았다는 것은 섬김의 동기가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택하심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면 성구사전의 도움을 받아 "택함", "선택", "예정" 등의 낱말들을 상고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정은 미리 정하심(롬8:29)과 양자 삼으심(엡1:5,11) 보다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부르심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롬8:30). 부르심의 수단은 복음입니다(살후2:14).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자기에게 모으시는 행위를 말합니다. 부르심에는 일반적인 면과 실제적인 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부르심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초청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과 관계 있습니다(요12:32). 많은 사람들은 누구든지 오라는 이 일반적인 부르심을 거절하고 있는데 반드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히12:25). 실제적인 부르심은 확실한 구원을 얻게 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6:37,44에 나오는 "이끄심"과 관계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에게 주신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분을 영접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강요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택함을 받은 자들은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영광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롬8:39). 부르시는 분은 분명히 이 일을 하실 것입니다(살전5:24).
부르심의 결과는 확실하지만 그 방법은 복음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전도해야만 합니다.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과 양심, 또 오래 전부터 알려진 진리 중 일부 남은 것들(많은 오류 가운데서도 조상때로부터 보존되어진 많은 문화)로부터 받은 빛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는 이런 이교도 백성들에 대해서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책임은 많은 복음적인 교회와 기독교 라디오 방송과 기독문서 등이 있는 나라에서 그리스도를 배척한 사람들의 책임보다 훨씬 적을 것입니다.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님의 역사

성령님의 역사가 없으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그대로, 육에 속한 채로 있다면 이 사람은 죄 가운데서 죽은 자이며(엡2:1-3), 사단에 의해 눈먼 자입니다(고후4:3,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며(고전2:14) 이들 중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롬3:10-18). 기도를 해주거나 복음을 전하지는 않고 그저 믿으라고 압박만 가했을 경우 결국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 고백은 합니다만 실제는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령님은 오늘날 전 세계의 죄인들에게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책망하는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요16:8). 이렇게 책망을 듣고 죄를 깨달은 죄인들이 반드시 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자기들의 죄가 무엇인지는 인식하게 됩니다. 맨 먼저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다는 이 큰 죄에 대해 책망을 받습니다(요16:9). 다음에는 의에 대해 책망을 받는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입니다(10절).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 그분의 의를 입증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그리스도는 죄인처럼 저주받은 나무 위에서 죽으셨지만 무죄하신 분이셨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영광의 몸을 입은 분으로서 의의 표준이 되십니다. 10절의 이 말은 또 그리스도께서 땅에 계실 때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일을 하셨으나 지금은 성령님께서 이 일을 계속하시고 있다는 뜻인 것으로 보입니다. 세번째로 사람들은 심판에 대해 책망을 받습니다(11절). 이것은 십자가에서 사단에 대한 심판을 가리킵니다. 죄의 주모자가 그렇게 심판받았다면 그를 따르는 자들도 그가 만들어 놓은 세상의 제도에 참여한 것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이 틀림없습니다(자기가 사단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알았는지 여부는 관계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실제적인 교훈은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이러한 책망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제대로 살지 않는다면 죄를 책망하는 성령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이것이 구원의 "조건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온갖 행위와 의식(儀式)들을 이 단순한 복음에 더해보려고 갖은 애를 써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여본들 결국 구원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아무것도 더할 게 없다는 사실만 부각될 뿐입니다(엡2:8). 회개는 믿음의 일부입니다. 과거에 대해 마음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믿는다거나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단지 마음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회개하면 감정의 변화가 아울러 따르기도 합니다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회개할 때 울어야 되고 통성기도를 해야한다는 생각은 사실적인 근거나,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 고백하는 것, 물 침례를 받는 것, 그리스도의 주재권과 또 그 외 여러 가지를 구원의 일부로 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구원받으면 나타나는 합당한 결과이긴 하지만 오직 믿음 하나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구원을 주시는 통로가 됩니다. 이것 외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보통 내리는 정의는 "다른 사람이 선언한 것에 마음으로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에는 그저 동의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것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을 나타내셨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해줄 때, 만일 듣는 자가 머리로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이 복음을 믿으면 그에게는 믿음이 생깁니다. 신뢰, 확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쉬는 것 등은 믿음이 가진 여러 면모들인 것입니다. 믿음은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미는 마음의 손입니다. 오직 성령님께서만 사람에게 참된 믿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취하시고 사람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읽는 것도 포함함; 롬10:17).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대해 증거하신 것에 기초한 것입니다(요일5:7-9). 복음을 말하거나 설교할 때 우리는 듣는 이에게 그들의 믿음을 맡길 수 있는 어떤 것,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해주어야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인품을 통해 죄를 책망하시기보다 오히려 말씀 그 자체를 통해서 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특권은 바로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는 꼭 강단에서가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분명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맡기신 일, 즉 우리 죄인들을 위한 대속물로, 죄에 대한 구속으로, 하나님께 대한 화목제물로, 사람을 위한 화목으로, 자신을 드리신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십자가 위에서 이루셨는지 보았습니다. 또한, 이러한 드리심이 성령님의 책망을 듣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효과를 나타내는가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인들이 그 아들을 믿을 때 성부께서 어떻게 죄인들을 구원하시는지, 즉 위대한 구원사역 안에서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완전한 사역에 대해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론에서, 구원이 그저 지옥에서 벗어나는 "비상구" 이상의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이와 같은 사실에 훨씬 더 큰 증거를 더해줄 것입니다. 췌이퍼(L.S.Chafer) 박사는 죄인이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해주시는 일 서른 세 가지를 목록으로 만들어서 설명하였습니다!(췌이퍼의 조직신학 제3권 "하나님 은혜의 부요함"). 여기서는 그중 몇 가지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칭의(稱義:justification).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입니다. 무엇인가를 없애주는 용서는 소극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 무엇을 더해주는 칭의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롬4:5). 이 말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믿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뜻입니다. 의롭다하심은 의롭게 만든다거나 현재 의로운 상태라는 것이 아니며 법적인 의미에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의롭다" 와 "옳다"는 분명히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가 됩니다"(롬3:24). 칭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을 그 기초로 합니다. 갈라디아서에도 칭의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나오긴 합니다만, 로마서가 칭의 교리에 대한 대표적인 책입니다. 로마서는 어떻게, 어떤 수단에 의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인지 말씀해줍니다. 이것은 은혜로 말미암습니다(3:24).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은 또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5:1). 곧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피로 말미암습니다(5:9). 곧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치르신 값입니다. 또 칭의는 의로 말미암는데(5:18,19)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순종하신 것입니다. 의롭다하심을 얻은 결과로서 로마서에 나와 있는 것들은 화평(사32:17, 롬5:1), 정죄로부터 벗어남(롬8:33,34), 후사가 됨(딛3:7, 롬8:17), 영화롭게 됨(롬8:30)입니다.
야고보서2:21,25에 묘사되어 있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의롭게 됨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이며, 오직 경건으로 일관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때에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의롭다함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는 오직 행위와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하심을 받은 후에라야 가능합니다.

중생(重生:regeneration).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것을 "영적으로 죽었다"고 봅니다. 이는 죄의 결과입니다(엡2:1).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은 아담이 가졌던 것과 똑같은 육에 속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생명은 지구에서, 또 특별한 조건을 갖추면 우주에서 사는 데도 적합할 수도 있지만, 천국에서 살기에는 전혀 적합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거듭납니다(요3:5, 벧전1:22). 우리는 혈통으로나(자연적인 출생), 육정으로나(스스로의 결심이나 스스로의 노력), 사람의 뜻에 의해서(누군가 다른 사람의 행위에 의해, 가령 제사장의 중보나 침례)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이러한 권세를 얻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이름을 믿음으로써 얻습니다(요1:12,13).
거듭남에 의해 우리는 거듭나고 새 생명을 얻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옛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 것으로 됩니다(고후5:17). 우리는 새 사람을 입습니다(골3:10).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고 또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후사들이며(갈4:7), 그리스도와 더불어 유업을 받을 자들입니다(롬8:17). 유업을 이을 자로서 우리는 아버지의 징계를 받게 되는데 이런 징계는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위해 베푸시는 것입니다(히12:6).


이제 요약해 보면 거듭남, 즉 두 번 나는 것은 영생을 나누어받는 것이며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은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그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며(약1:18), 유업을 이을 자가 되게 하고(벧전1:3,4) 선한 일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엡2:10).

 

양자(養子:adoption). 이 용어는 바울의 서신에만 나옵니다. 이 용어를 오늘날 친자식이 아닌 아이들을 자기 아이로 삼는 "입양"한다고 하는 것과 절대 혼동해서 안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거듭난 자기 자녀들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업을 이을 모든 권리를 가진 자녀들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속해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양자가 되는 것도 구원받는 순간 얻게 되며, 이는 믿는 자가 이 교리에 대해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없이 되는 것입니다(마치 훌륭한 집에 새로 태어난 아이가 그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도, 육체적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그 이후까지 출생으로 인한 모든 혜택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른 바 "제2의 은총"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자녀가 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는 우리의 이와 같은 신분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양자의 영을 소유하고 있지만 이것이 완전히 드러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롬8:15,23).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증거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롬8:14), 세상과 분리되는 것(고후6:14-18), 이기는 삶(계21:7), 그리고 아버지의 징계하심이 있습니다(히12:6-8).

 

성화(聖化:sanctification). 성화에는 매일 실제로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과 또 구원받을 때 얻는 지위 상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분리(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볼 때 신자는 죄의 형벌로부터 분리되었고, 현재는 죄의 권세로부터 분리가 되었고, 미래에는 죄의 존재로부터 분리됩니다. 이 분리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초는 모든 믿는 자가 하나님의 "성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이러한 신분에 맞게 살아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순서를 바꿔놓고 말하기를 "지금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나중에 가면 성자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10:10-14은 이 신분상의 성화는 단번에 완전히 주어진 것이며 다시 반복할 수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함은 절대적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거룩함이 되시기 때문입니다(고전1:30). 모든 믿는 자는 구원받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구별(거룩하게)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믿는 사람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점점 더 "거룩하게 될(죄에서 분리될)" 의무가 있습니다(요17:17, 벧전1:15,16).

 

용서(forgiveness). 칭의는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의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반면에 용서는 죄로부터 풀려나는 것이요, 불의가 우리에게서 제하여지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우리 일상 생활에서 그와 상응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곧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분적인 면에서 볼 때 용서는 우리가 믿을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엡1:7, 4:32, 골1:14, 3:13). 하지만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우리가 실패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우리 죄를 자백해야만 하는 것입니다(요일1:9). 어떤 이들은 자기의 미래의 죄까지도 이미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당시에는 우리의 모든 죄가 미래의 것이라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었을 때 우리의 모든 죄는 주님이 다 가져가셨습니다(완전히 용서받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용서받았기 때문에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엡4:32).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잊어주신 것처럼 잊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8:12). 죄를 용서받은 결과는 큰 기쁨과 평안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감. 이것은 하나님의 존전(尊前)에 들어가는 권리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무한한 복을 누리게 해줍니다(롬5:2).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한 성령에 의해 아버지의 존전에 나아가게 됩니다(엡2:18).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목케 하시는 역사에 기초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때 온전한 담대함이 뒤따르게 됩니다(엡3:12, 히4:16, 10:19,20).

 

율법으로부터 해방됨. 율법은 경건치 않은 자들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딤전1:9), 결코 구원의 길이 아니었는데, 이 점은 구약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은혜 아래에서도 규범이 있지만(신약성경은 계명으로 가득 차 있지만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정하는 법조항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생활규칙과 같은 법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롬8:2). 즉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었으며(롬7:4) 또한 율법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롬7:6).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구원받을 때 일어났으며 이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역의 다른 부분들도 더불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모세의 윱법을 존중하지만, 은혜는 율법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삶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확신(Assurance)과 안전(Security)

신약에서 가장 큰 위안을 주는 교리 중 하나는 사람이 일단 구원받으면 다시는 잃어버린 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확신입니다. 또 자기가 "영원토록"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안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자는 가지고 있지만 후자는 불가능하다거나 혹은 받기엔 너무 염치없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불행하게도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이 진리에 대한 문제들의 대부분은 잘못된 가르침, 타고난 두려움, 그리고 구원이 정말 무엇인지 오해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생깁니다.

확신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요일5:13, 3:1과 요3:36, 5:24을 주의해서 상고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들은 확신에 대한 유명한 구절 중 일부입니다. 물론 더 있습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주로 확신을 얻게 됩니다. 우리 구원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만, 우리 확신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친히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나 보내신 이를 믿는…").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거나 마음을 바꾸실 수가 없는 분입니다.
구원의 또 다른 두 가지 증거로 그리스도인의 체험과 성령님의 내적인 증거입니다. 체험은 우리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우리 감정은 날씨와 건강과 환경에 따라 변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깊이 의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일 누군가 가진 교리가 잘못되었다든지 혹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떠나서 살고 있다면 물론 그가 겪는 체험은 별로 격려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에는 형제 사랑과(요일3:14, 롬8:29), 성경을 이해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것(고전2:14), 죄에 대해 책망을 받는 것(요일1:5-10, 3:7-14), 착한 행실(약2:14-16),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임을 의식하는 것(마11:27)과 자기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것(고후13:5),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가지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 등이 들어갑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하시는 사역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케 하는 것과(롬5:5), 우리를 인도하는 것과(롬8:14),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것(롬8:16)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회심할 때 느낀 감정이나 우리가 들은 설교방식이 나 또는 우리가 복음을 완전히 이해했는가 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는 구원의 복음을 믿었습니까? 우리가 믿음의 손을 내밀어 주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만일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안전에 대해 상고해 보겠습니다. 지금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고 새 생명의 증거들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의문을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곧 "진실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혹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나?"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타락한 사람"은 구원을 잃고 지옥에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무조건적인 영생을 확신한다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계속 죄를 지으며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징계하시되 때로 죽게도 하시며 이렇게 하심으로써 자기 자녀들의 죄를 다루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부정한 자와 호색하는 자는 다만 거짓 신자요 십자가의 원수일 뿐입니다(엡5:5,6, 빌3:18,19).
성경은 안전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할까요? 요10:27,28과 벧전1:5, 요11:26, 딤후1:12, 히7:25, 유24절을 읽어보십시오. 이 구절들 중 맨 마지막 말씀에 나오는 "능히… 하실 자"라는 부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안전의 참된 열쇠입니다. 신자들은 그 믿음 가운데서 인내해야 됩니다. 신자는 실제로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보존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내의 이러한 양면성은 빌2:12,13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인내함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은(수학문제 풀이처럼)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디모데후서2:19에서도 말씀하기를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사람 편에서). 이는 주께서 자기 백성들이 누구인지 아시기 때문입니다(하나님 편에서).
사람이 일단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다른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구원이 조건적이라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조차도 모순이 되고 말 것입니다. 로마서8:31-39은 네 가지 수사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과 더불어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도 제시하고 있으며 이 모두는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다른 구절들로는 요6:37,39, 롬11:29, 고전1:8,9, 빌1:6, 엡4:30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일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것은 문맥을 무시한 채 그 구절들만 따로 떼어 이해할 때 생기는 오해일 따름입니다.
마태복음24:13은 흔히 그 문맥을 무시한 채 인용하여 교회시대에 대해서 잘못 적용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구원받은"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건짐받은"이란 단어와 동일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이 자행하는 대학살과 환난을 견디어내는 유대인들이 건져내어질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정말 믿는 자들임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그들이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에스겔 33:7,8을 써서 만일 우리가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에게 경고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의 영혼도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스라엘을 경고하라고 선지자 에스겔에게 가르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에게 말씀하는 것도 아니며, 에스겔이 자기 영혼의 구원을 잃게 될 것이란 말씀도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잃어버린 바 된 영혼들에게 경고해야 되지만, 에스겔서가 그렇게 해야할 증거를 담고 있는 책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4:1,2은 배도자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믿는다고 거짓으로 고백하지만 실제로 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구절에서 "그 믿음"이라 한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개인적인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배도자들에게는 이 개인적인 믿음이 없음), 기독교인다운 신앙을 가리키는 것임을 주목하십시오.
베드로후서2:1-22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은 단지 잠정적인 측면에서만 사신 바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이 사람들이 실제로 거듭난 적이 있었는지 전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이 개들이라고 불리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먼저 이들이 부정한 이방인임을 보여줍니다.
믿는 자의 영원한 안전을 부인하고 있다고 제시되는 많은 구절들이 사실은 단지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나 개심(改心)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으며 이들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13:1-8은 넘어지는 자들에 대한 예를 들고 있지만 이들이 진짜 구원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말씀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15:1,2와 히3:6에 있는 굳게 지키는 것이 구원받았다는 증거이기는 하지만 구원받는 조건은 아닙니다.
요15:6은(어떤 사람들에게) 가지가 제하여져서 잃어버린 바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리스도는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 열매 맺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지 구원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가지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열매맺는 자리에서 쫓겨나 던지우게 됩니다.
히브리서6:1-8은 믿는 자들이 구원으로부터 "떨어져서" 잃어버린 바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흔히 사용되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히브리서 전체의 맥락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지 얼마 되지 않아 유대 배경을 가진 신자들에게 쓴 것이며 몇 가지 매우 특별한 권면과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서신은 믿는 자들에게 유대교의 의식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실재성 속에서 성장하라는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히6:1-3). 이 서신에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거짓으로 고백하는 유대인들에게 주는 매우 심한 경고도 몇 가지 들어 있습니다(히2:1-3, 3:7-13, 6:4-8, 10:26-31). 이런 사람들은 지적으로는 복음의 비췸을 얻었습니다(그러나 영적으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고, 겉으로는 성령에 참여하였으며,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능력 있는 역사와 이적들)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영적인 기회를 가졌으면서도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복 받기를 거부하고 유대교의 죽은 의식으로 돌아가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런 사람들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이들은 의도적으로 자기들에게 베풀어진 기회의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간에 서서 이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쪽을 택했으며 그리하여 현저하게 그리스도를 욕보였습니다(히6:6 하반절).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기독교를 연구하고 자기 주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목도(目睹)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거부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더 이상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갈라디아서5:4은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로 사는 고차원적인 삶에서 율법주의라는 열등한 삶의 원리로 추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떨어진다"는 말에 들어있는 개념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골1:21-23이나 고전9:27, 그리고 요13:8과 같은 구절들도 가끔 이것과 관련해 인용되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 구절들은 믿는 자들이 상급을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교제가 끊어지게 되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각 위께서 지니신 속성과 하시는 일이 영원하고 확실한 구원을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성격 자체가 영원한 안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택정받은 것과 연관이 있으며 또한 이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내세울 것이 있어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슨 부끄러운 점이 있다고 해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요19:3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안전을 주신 것은 그분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일에 분발케 하기 위함이며(유24,25: 벧전1:3-5),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자극제로서(엡4:30, 시55:23), 또 그분을 섬기려는 동기가 일어나게 하려고 주신 것임을 친히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고전15:58). 우리의 영혼과 섬김에 대한 상급은 안전합니다. 우리는 "결코 멸망치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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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모습

 

 

 

1) 구약 성경의 아버지

다니엘 7/9~10 내가 본즉 보좌들이 놓여 있고 옛적부터 계신 이가 앉아 계시는데 그분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분의
머리털은 순결한 양털 같으며 그분의 보좌는 맹렬한 불꽃 같고 그분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으며 불이 강같이 흘러
그분 앞에서 나오고 그분을 섬기는 자들은 천천(千千)이요, 그분 앞에 서 있는 자들은 만만(萬萬)이라. 그분께서 심판을
베푸시는데 책들이 펴져 있더라.

잠언 16/31 흰머리를 의의 길에서 얻으면 영광의 왕관이 되느니라.

다니엘이 이상 중에 하나님 아버지를 뵈었는데 보좌에 앉아 계시고, 눈 같이 흰 옷을 입으시며, 백발을 하고 계십니다.
잠언을 보면 '흰 머리'(백발)는 의의 길에서 얻게 되는 영광의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보좌가 불꽃 같고, 바퀴들이 타오르는 불 같으며, 불이 강같이 그분 앞에서 흘러 나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는 수 억의 섬기는 자들이 있고, 보좌 앞에는 영혼을 심판할 책들이 펴져 있습니다.

 

2) 구약 성경의 예수님

다니엘 10/5~9 그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보니, 보라, 어떤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그 허리에는 우바스의 정금으로
띠를 둘렀더라. 또한 그의 몸은 녹주석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개 모양 같고 그의 눈은 등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의 색깔은
연마한 놋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말소리 같더라. 나 다니엘이 홀로 이 환상을 보았으니 이는 나와 함께한 사람들에게
큰 지진이 임하므로 그들이 이 환상을 보지 못하고 도망하여 몸을 숨겼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홀로 남아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게서 힘이 빠졌으니 이는 내 아름다움이 내 속에서 변하여 썩은 것이 되었고 아무 기력도 남지 아니하였음이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의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의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으로 향하고 얼굴을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

다니엘이 강가에서 예수님을 뵈었는데, 아버지는 주로 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예수님은 서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 정금 띠를 둘렀으며, 몸은 녹주석 같고, 얼굴은 번개 같이 빛나고, 눈은 등불 같고,
팔과 발은 연마한 놋과 같고, 말소리는 무리의 음성 같이 울립니다.
다니엘 외의 다른 사람은 환상을 보지 못하고 무서워 도망갔고, 다니엘도 준수한 의인이었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아름다움이
변하여 썩은 듯이 느껴졌고, 예수님의 권세에 압도 당해 힘이 빠져 깊이 잠들게 됩니다.

 

3) 신약 성경의 아버지

계시록 4/2~5 이에 내가 즉시로 영(靈) 안에 있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가 놓여 있고 그 왕좌에 한 분이 앉아 계시더니
앉으신 분의 모습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보좌 둘레에 무지개가 있어 보기에 에메랄드 같더라. 또 보좌 둘레에 스물네
자리가 있고 내가 보니 그 자리들 위에 스물네 장로가 흰 옷을 입고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더라. 그 보좌로부터
번개들과 천둥들과 음성들이 나오고 보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타고 있으니 이것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사도 요한이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뵈었는데 역시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보좌 둘레에 에레랄드 같은 무지개가 있습니다.
보좌 둘레에 스물네 장로가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스물네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아버지의 보좌로부터 번개들과 천둥들과 음성들이 나오고, 보좌 앞에는 하나님의 일곱 영인 일곱 등불이 타고 있습니다.

 

4) 신약 성경의 예수님

계시록 1/13~18 이 일곱 등잔대의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으신 이가 발까지 내려온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계시는데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같이 희고 눈같이 희며 그분의 두 눈은 불꽃 같고 그분의 두 발은 용광로에서
달구어낸 정제(精製)된 놋 같으며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그분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있으며 그분의
입에서는 양날 달린 날카로운 칼이 나오고 그분의 용모(容貌)는 해가 세차게 빛나는 것 같더라. 내가 그분을 볼 때에 그분의
발 앞에 쓰러져 죽은 자같이 되니 그분께서 오른손을 내 위에 얹으시며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나는 살아 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볼지어다,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를 가지고 있노라.

사도 요한이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을 뵈었는데 역시 긴 옷을 입고, 금띠를 두르며, 백발을 하고 계시고, 두 눈이 불꽃 같고,
두 발은 정제된 놋 같으며, 음성은 많은 물소리(폭포수 처럼 우렁참) 같습니다.
그분의 오른 손에는 일곱 별이 있고, 입에서는 양날 달린 날카로운 칼이 나오고, 용모는 해처럼 강하게 비췹니다.
요한 역시 예수님을 보자 힘이 빠져 쓰러지니 예수님이 손을 얹으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처음과 마지막이고, 전에 죽었으나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며, 지옥과 사망의 열쇠를 갖고 계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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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국내에서의 성경번역 신약

 

언더우드·아펜젤러, 성경번역 첫 단추 끼우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경이 전래된 때는 1816(순조 16) 95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정부로부터 조선 서해안 해도(海圖) 작성 명령을 받은 해안 탐사선 알레스트호와 리라호가 충남 서천군 서면의 마량진(갈곶)에 상륙했는데, 함장 머레이 맥스웰과 바질 홀 대령이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현감 이승렬에게 화려한 장정의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이것이 한반도에 전해진 최초의 성경인데, 흠정역(KJV) 성경이었을 것이다.

 

 

그 후 18327월 귀츨라프와 186566년 토마스에 의해 중국어 성경이 조선에 소개됐다. 성경의 도래와 함께 1880년대 만주와 일본에서는 은밀하게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성경이 번역되었고 오늘 우리 손에 들려지게 되었을까?

 

국내 첫 번역성경은?

 

내한한 선교사들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는 성경 번역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던 5명의 선교사들, 곧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스트랜톤, 그리고 헤론은 188727일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번역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들이 펴낸 첫 성경이 1887년 간행된 마가의 젼한복음셔 언해였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은 이수정의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해’(1885)의 개역본이었다. 한글성경이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잠정적으로 이용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위원회 차원에서 역간 작업은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으나 아펜젤러의 보라달로마인셔(保羅達羅馬人書)’(1890), ‘마태복음젼’(1892), 게일의 사도행젼’(1892), 펜윅(M C Fenwick)요한복음젼등 사역본(私譯本)이 발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성서공회는 한국성서위원회에 로스역 성경의 수정을 요청했다. 번역보다는 수정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 요청에 부응해 아펜젤러가 로스역 누가복음을 수정했는데, 이것이 1890년에 나온 누가복음전이다. 수정본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자 성서번역위원회는 국내에서 완전한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이 일이 위임되었다. 그러나 작업은 지연되었고 후에는 언더우드 대신 게일이, 아펜젤러 대신 스크랜톤이 이 일을 추진해 1892120마태복음전이 나왔다. 이 책은 기존 성경의 수정본이 아니라 국내에서 번역된 첫 한국어 성경이었다. 이 성경은 30만부 간행됐다.

 

성경번역자회의 조직과 열매

 

한국어 성경번역사에 있어 중요한 변화는 18935상임성서실행위원회가 조직되고 그 휘하에 성경번역자회를 설립한 일이다. 언더우드 게일 아펜젤러 스크랜톤이 번역위원이었고, 1895년에는 레이놀즈가 추가됐다. 1895년 성서공회가 설립된 일 또한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번역위원들은 분배된 신약 책들을 그리스어 성경과 영어개역성경(RV)을 대본으로 번역하되 한국인 조사들은 한문 및 일본어 성경 대본을 참고해 선교사들을 돕고, 번역을 완성하면 다른 번역자들에게 보내 의견을 청취하고, 이를 다시 원번역자들에게 보내 검토하게 한 뒤 전체 번역자들이 참가하는 번역자회에서 토론과 표결을 거쳐 번역자회에서 통과된 대본을 시안본으로 채택하기로 했다.

 

이런 번역 과정이 충실하게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노력의 결과로 1895년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이 간행됐다. 마태복음은 아펜젤러가 1892년 번역한 마태복음젼을 번역자회가 시안본으로 승인한 것이지만 마가복음(아펜젤러), 요한복음(게일), 사도행전(게일)은 개인 역본이었다. 곧 누가복음(1896), 갈라디아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이상 1897),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요한1, 2, 3서와 유다서(이상 1898), 에베소서(1899), 그리고 요한계시록(1900)이 번역됐다. 신약의 모든 책이 번역되자 낱권을 묶어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됐다. 이것이 국내에서 번역된 최초의 신약전서인 신약젼셔’(1900).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는 번역자회의 공식적인 의결을 거친 시안본이었으나 그 이후의 책들은 개인 역본들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초로 신약을 완역한 일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이를 기념해 190099일 서울 정동감리교회에서 신약성경 봉헌감사예배가 드려졌다.

 

성경 번역 헌신했던 아펜젤러, 결국 순직

 

비록 신약전서가 출판되었으나 고린도전서 이후의 책들은 번역위원회의 수정이나 독회를 거치지 않은 개인역에 불과했으므로 출판과 함께 수정 작업이 시작됐다. 이 일은 아펜젤러, 레이놀즈, 그리고 게일에게 위임됐다. 이 작업을 위해 아펜젤러는 인천을 출발해 번역자회가 모이는 목포로 가던 중 조난 사고로 한국인 조사 조성규(趙成奎, 趙漢奎라고도 불림)와 함께 순직했다. 1902611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장로교 선교부는 게일과 언더우드를, 남장로교는 레이놀즈를 성경번역 사업에 전념토록 배려했다. 결국 이 세 사람의 노고로 수정 작업이 추진돼 1906년에는 성경번역자회가 공인한 공인역본 신약젼서가 출판됐다. 이 성경이 1938개역신약성서가 출판되기까지 한국교회 강단과 성도들이 사용했던 공인본 신약성경이다. 성경번역 사업은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한국인 조력자의 수고 또한 적지 않았다. 아펜젤러의 어학선생이자 조사였던 조성규, 게일의 일생 동안의 동료였던 이창직(李昌稙) 정동명(鄭東鳴), 언더우드의 조사였던 송덕조(宋德祚), 레이놀드의 조사였던 김정삼(金鼎三) 이승두(李承斗) 등이 바로 그들이다.

 

(고신대· 이상규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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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 복음에 자신의 삶을 드린 사람

 

신약의 역사를 일군 복음의 사람

 

 

두말할 나위 없이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바울은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적어도 13권, 그러니까 권수로 보아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기록했다. 사실상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이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유일한 소식이 되도록 공헌했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없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킨 것은 흐트러짐 없이 십자가의 복음에 집중한 그의 헌신적인 삶이었다. 바울을 통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로서 믿어야 할 신앙의 교리와 삶의 교훈을 배울 수 있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복음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교회가 만들어진 이 신약시대를 설명하려면 바울을 고려하지 않고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바울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룬다는 것은 처음부터 범위를 넘어서는 작업이다. 때문에 범위를 좁혀 바울을 바울 되도록 한 결정적인 회심의 사건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는 도전을 적용해 보고자 한다.

 

주님 만나기 전에는 신앙도 길을 잃어

 

신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도 바울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사도행전 9장에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이른바 ‘다메섹 회심 사건’ 이후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을 탐구하면서 회심 이후의 모습을 찾아보고 정리하는 데 보다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인다. 당연하기도 하고 필요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바울을 보다 충분히 이해하고 또 우리가 올바른 배움을 얻으려면, 그의 회심 사건 이전의 모습을 최대한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회심하기 이전에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단지 인간적인 선택이나 고집 같은 것이 아니었다.  회심 이전의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열정으로 예수를 대적했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것이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3).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행 22:4).

 

이처럼 다메섹 사건 이전 바울의 모습은 매우 살벌하다.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를 대적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사람이었다. 바울이 이처럼 십자가의 원수(행 9:1, 참조 빌 3:18)로 행했던 이유는 그가 철저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바울이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었다는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려면 복음서를 떠올리면 된다. 즉,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갈등과 대립을 바울도 고스란히 공감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바리새인으로서 바울에게 나사렛 예수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과 같은 존재일 수 없었고, 이런 예수님의 주장은 그야말로 최고의 신성모독이었다(요 10:36). 게다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메시아라는 주장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신 21:23, 갈 3:13).

 

참된 새로움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그러던 그가 사도행전 13장 이후 후반부에서 보여 주듯이, 그리고 그의 서신서들에서 밝혀 놓았듯이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롬 1:1), 십자가의 복음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다(고전 1:18~31; 빌 1:18~28).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기꺼이 하는 사람으로(고전 4:15; 갈 4:19) 바뀌었고, 마침내는 그 예수 때문에 이제는 자신이 박해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행 20:24; 고후 1:3~11; 딤후 4:5~8).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이처럼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박해하던 자리에서 복음을 위해 박해받는 자리에 기쁨으로 서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 혁명적인 변화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바울이라는 인물을 단지 어떤 ‘변화’의 카테고리로 설명하기에는 아쉬움이 매우 크다. 바울은 사실상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이었고, 십자가의 복음에 삶을 온전히 드린 사람이 되었다(행 20:24, 21:13, 26:24; 고후 5:13 등).

 

 

그랬기 때문에 이른바 ‘고난 목록’이라고 하는 고린도후서 1장 8~10절과 11장 23~27절 등에 기록된 고난이 그의 복음 전도를 막지 못했다. 일찍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반대하고 그 따르는 무리와 교회를 박해하던 것에 정반대로 바울은 바로 그 십자가와 복음을 위해 위협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했다. 마침내 신체적인 핍박과 위협 가운데서도 그것들이 바울을 어찌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빌 1:18, 2:17; 딤후 3:6~8). 

게다가 바울은 이렇게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대한 전도자로서의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참된 목사였다. 바울은 해산의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그리스도인들을 믿음으로 세우고자 힘을 다했다(갈 4:19; 살전 2:7). 목사로서 성도들과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을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의 고백이 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고후 11:28~29). 바울에게는 교회를 향한 자신의 염려가 그 모든 실제적인 고통보다도 오히려 더한 것이었다. 사도 바울의 모습이 역력하다.

 

폭행자에서 순교자로 만든 것은 말씀

 

 

마침내 사도 바울은 말 그대로 죽을 고생을 하며 다녔던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마감할 때 즈음, 주후 58년경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법 아래 재판을 받는 죄수의 몸이 된다(행 21:33, 25:11). 그로부터 3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로마 감옥에 투옥되고, 모진 박해와 위협의 시절을 거쳐, 주후 67년 순교해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고대하던 주님 품에 안겼다.

 

 

십자가 복음에 대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바울은 그 복음을 위한 전도자요 고난 받는 자요 눈물의 목사로서 산 인물이다. 바울 탐구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날 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변화를 가져오는 주님과의 만남은 그분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은혜로 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복음에 헌신하는 삶을 향한 도전을 받는다.

 

 

참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따라서 십자가의 복음을 만나는 것이 진정한 새로움의 출발이다. 성경 말씀을 통해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참 변화를 향한 시작이 가능하다. 유의할 점이 있다. 바울은 그냥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사상가가 아니었다. 또 추론을 거듭해 궁극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사색적인 사상가도 아니다. 그의 모든 사고는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의 모든 사역과 가르침은 성경에서 계시로 받은 것에 굴복하고 순종했다. 이런 점에서 성경적 계시의 말씀은 바울이 생각하고 기도하는 도구였고, 그는 성경대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는 유진 피터슨의 관찰은 적절하다.

 

 

말씀과 함께 오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변화가 아니라면 바울과 같은 변화는 불가능하다.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에 의한 변화가 아닌 변화는 참된 변화가 아니다. 매일 말씀을 제대로 만나는 은혜가 모든 독자에게 있기를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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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

- 장흥길 -

 

■ 들어가는 말 

예배자가 예배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의미 있는 예배를 드리게할 뿐만 아니라 예배자의 예배 자세를 결정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며 감상주의적이거나 무속 신앙적인 예배의 현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예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 때 감격적인 예배를 경험할 수 있으며 경건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 예배의 용어적인 의미


1. 히브리어로 '예배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샤카(shachah)'와 '아바드(abadh)'인데 '샤카'는 엎드려 절하다 또는 경배하다라는 뜻이고(신 26:10 참조) '아바드'는 섬기다 또는 봉사하다(service)라는 뜻이다(출 8:1 참조).즉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숭배, 순종, 봉사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2. 헬라어에서는 예배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셋이다.

(1) 프로스퀴네오(proskyneō): 존경의 표시로 "절하다" 또는 "굽혀 엎드리다", "입맞추다"라는 뜻으로, 지상의 통치자에게 신체적으로 굴복 또는 순종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2) 라트레이아(latreia): "하나님께 대한 봉사", "거룩한 예배의 수행" 등 이 단어는 예배에 있어 예배자의 봉사를 뜻하는데,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을 섬겨야할 신분을 확인시켜 준다.

(3) 레이투르기아(leitourgia): 이는 예배의 의식과 관계 있는 말로 본래는 "백성을 위하여 일하다"의 뜻이나, 기독교에서는 성례전이나 특별한 의식이 행해질 때 예배자들이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3. 요약

용어적인 의미에서 예배는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께 대한 부복, 순종, 섬김, 봉사를 뜻한다.


■ 예배의 성경적인 의미


1. 구약성경-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예배적 특징을 살펴보면,

(1) 한분이신 야웨 하나님께만 경배해야 한다(출 20:3).

(2)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형상으로든지 표현해서는 안된다(출 20:4. 5).

(3) 예배에 대한 세심한 제의적 규례가 철저하였다.

(제사, 제사장, 장막에 대한 제사법)

(4)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다(레 1-7장)

(5) 형식에만 치우친 제사를 드릴 때 예언자를 통해 호된 비판과 경고를 받았다(암 5:21-24).


2. 신약성경

(1) 예수님의 가르침(요 4:20-24)

① 특정 지역에서만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요 4:21)

② 확실하게 아는(믿는) 하나님께 예배하라(요 4:22)

③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요 4:23)

④ □□ 과 □□으로 예배하라(요 4:24).

(2) 사도 바울의 가르침(롬 12:1-2)

① 몸으로 영적 예배를 드리라(롬 12:1-2).

②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를 드리라.

③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라.

 

 


■ 예배의 신학적인 의미


1. 기독교 예배는 그 대상과 중심이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창 12:9). 은혜 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은 예배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기인한다. 은혜 받기 위함은 예배의 동기나 예배의 결과일 수 있으나 예배의 목적일 수 없다. 은혜 받기 위함이 목적일 때 그것은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인간 위주의 예배이다. 은혜 받았기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예배를 드리면 그 결과 하나님께서 예배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2. 예배 시간에 하나님은 임재하신다.

예배는 예배 드리는 자와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함께 있을 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배 순서를 받으실 뿐 아니라 말씀으로 모든 예배자들에게 응답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예배 속에서 예배자와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영광을 받으신다.


3. 예배는 계시와 응답이 만나는 지점이다.

예배는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자의 응답이다. 인간을 만드시고 타락한 죄인을 용서하시고 용서한 죄인과 만나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림이 곧 예배이다. 인간을 찾아 오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사모하는 예배자의 만남이 예배요, 그 만남의 광장이 예배당이다.


4.예배의 원동력은 성령이다.

예배의 현장에서 예배를 역동적으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예배는 형식적인 의식에 불과하다.성령의 교통과 역사 없이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불가능하다.


5. 예배는 공동체적 행위이다.

예배의 공동체는 언제나 단수적인 개념보다는 복수적인 개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기독교 예배는 언제나 예배 공동체인 교회와의 관계에서 형성되었고 교회의 순수성은 예배의 순수성에서 보존되었다.


6. 예배는 순환 구조를 갖는다.

예배의 완성은 축도가 아니라 선교적인 삶 속으로 연장되며 선교적인 삶의 열매를 가지고 다시 예배 드리러 나오는 순환 구조를 갖는다. 예배자는 선교의 사명을 띠고 세상에 파송되며 그 선교의 열매를 가지고 다시금 하나님께 예배 드리게 되는 것이다.

 

■ 맺는 말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예배란 그리스도인들의 삶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직무로서 마음과 말과 행위와 물질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섬김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룩된 구원 사역에 대한 거듭된 발견으로 인한 감격적인 응답이 곧 예배이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으며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깨닫고 앞으로 무엇을 하실 것인가를 기대해야 한다. 그럴 때 예배자의 미래가 오늘처럼 내일도 하나님에 의해 지켜질 것이기에 더욱 기쁨에 찬 감사와 평안의 찬미를 드릴 수 있으며 희망찬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 결단과 기도


1. 예배가 무엇인지 적어 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예배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 세 가지만 열거하라.

①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②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③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예배에 대한 용어적, 성서적, 신학적 이해를 통해 바른 예배관을 정립하고, 바른 예배를 위해 고쳐야할 점을 세 가지만 간추려 적어 보라.

①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②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③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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