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언어교육원 중국선교 사명자)
중국교회와 한국교회를 통한 세계복음화 운동
서론
중국의 선교 전략과 활동을 논의하는 것은 2가지 이유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첫 번째 중국은 엄청나게 큰 땅과 많은 인구 그리고 복잡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서 현대 중국선교에 대한 모순적인 증언들이 모두 옳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중국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고 가정교회들에 대한 박해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증언이다.
예를 들어서 베이징의 대형 가정교회(쇼우왕교회)는 2011년 4월에 중국정부에 의해서 폐쇄되었고 교회 건물을 몰수되었다. 담임목사였던 진 티안밍과 다른 목회자들은 모두 가택 연금되었다. 반면에 다른 지역의 가정교회들과 신학교들 특히 중국 남부에는 제한적인 종교적 자유 속에서 다양한 활동을 위해 공개적으로 모일 수 잇다.
두 번째, 외국인 교회 지도자들은 보안상의 이유로 인해서 공개적으로 중국교회를 논할 때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인 시진핑의 체제 아래서 많은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감옥에 갇혔고, 외국인 선교사들, 특히 많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최근에 중국에서 추방되었다. 이론적으로 중국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중국 정부가 선교사 비자를 발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는 수천명의 선교사들이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는 세계 선교에 있어서 중국교회의 중요성을 지적하기 원한다. 그 이유는 앞으로 중국교회가 세계복음화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경제성장과 더불어서 교회의 급격한 성장으로 중국은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인이 살고 있다. 중국교회의 역할을 특히 이슬람 세계의 복음화에 매우 중요하다.
본 논문의 주요 논지는 현대 중국교회의 핵심 사안이 중국의 성장하는 교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위한 지도자 교육이다.
중국교회가 물질주의에 물들기 전에 앞으로 10-20년동안 700개의 신학교를 위해서 수백 명의 중국인 신학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중국의 신학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개혁주의 교회들 중에서도 기독교 교육을 특별히 강조하는 한국 장로교회는 중국의 지도자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할 필요가 있다.
비록 중국의 모든 개신교 교회들이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라는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지지만 미래에는 여러 교단들이 세워질 것이다. 한국의 개혁주의 교단들은 중국교회의 지도자 훈련과 외국인 선교 동원이라는 두 가지 주요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Ⅰ. 중국 교회 역사
A. 5번의 기독교 선교의 시도
중국교회의 역사에서 19세기 초반에서부터 시작된 2번의 개신교 선교를 포함하여 5번의 주요한 기독교 선교가 시도되었다.
1. 네스토리우스파 선교(7세기)
역사적으로 5세기에서 6세기에 네스토리우스파가 중국에 접근하였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증거들이 있다. 예를 들면, 셀레우시스-크레시포네의 대주교인 알치우스(411-415)와 네스토리우스파의 총대주교인 실라스(505-520)는 중국에 수도좌를 세웠다. 하지만 고고학적인 첫 번째 발견은 1625년 다아나라의 수도인 시안에 있는 네스토리우스파 비석이다. 비석에는 631년에서 681년까지 중국에 네스토리우스파 선교가 있었음을 역사적으로 보여준다. 비석은 시리아인 선교사, 아로펜이 635년 중국에 왔으며 당나라의 화제인 태종(627-649)에 의해서 받아들였으며 중국에 경교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도교를 신봉하는 우종 황제는 845년에 기독교인과 불교도들을 박해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두 번째 전래는 13세기에 몽골의 침략기 중에 이루어졌다. 9세기 중엽과 13세기의 두 시기 사이에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눈에 띄게 사라졌으며. 거의 정보가 남아있지 않다. Kenneth S. Latourette 박사는 네스토리우스 교회가 사라진 세 가지의 이유를 제시한다.
1) 중국에서 기독교는 외국 민족의 종교로 인식되었다.
2) 당시에 중국은 특별히 외국의 종교를 받아들여야 할 만한 필요가 없는 시기였다.
3)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은 고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2. 로마카톨릭 수사들(13세기)
교황 이노센트 4세는 중국에 수사들을 보내서 몽골의 황제를 살피고 복음을 전하도록 했다. 플라노 카르피니의 요한은 1245년 3월에 “고울의 리옹을 떠났다. 그는 ”몽골의 역사“라는 책을 썼는데 몽골인은 비록 많은 우상을 가지고 있고 해, 달, 불, 물과 같은 자연을 숭배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일신교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1247년 3월에 칼피니가 교화에게 돌아왔고, 1253년에 플레밍의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수도사인 루브룩 윌리암이 몽골 위구르와 중국 서부인 타타르로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수많은 네스토리우스파 사제들을 보았다.
몽골인들은 강력한 이슬람 세력이 몽골인들이 유럽과 접촉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윌리엄은 몽골의 황제 만구와 황비가 교회에 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1294년에 이탈리아의 수사 몬테카비노 요한과 그의 네 명의 동료들은 캄발루크(북경)에 가서 2개의 교회를 세우고 6,0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마르코 폴로는 24시간 24년간(1271-1295년)의 긴 여행을 통하여 중국을 방문하여서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을 보았다. 그리고 “중국 남부에는 망기라고 부르는 700.000 가구가 이 법(그리스도의)을 따르고 있다”라고 말했다.
3. 예수회의 선교(16세기)
마테오 리치는 1599년 북경에 도착해서 유교를 믿는 상류층 사이에서 사역을 하였다. 1599년과 1601년에 기록한 그의 책 “Commentari” 에는 그의 선교사역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616년에 포르투갈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가 680명이고 유럽에서 온 선교사가 740명이었다. 그들의 사역은 중국의 교육 영역에 특히 효과적이었다. 예수회의 마지막 선교사는 1814년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그 외에 프란시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의 선교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조상숭배에 대한 논란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조상숭배를 허용하였지만 다른 로마 카톨릭 수상들은 조상숭배를 반대하여 천주교에 혼돈을 가져오게 되었다. 교황 피우스 12세가 1939년 조상숭배를 용인함으로 이 문제를 매듭짓게 되었고 현재까지 천주교는 조상숭배 형식을 허용하고 있다.
4. 개신교의 선교(1807-1949)
중국의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는 런던선교회의 로버트 모리슨이다. 그는 1807년 홍콩에 도착해서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1834년까지 그곳에서 사역하였다. 허드슨 테일러는 1853년 중국에 입국하여서 1863년 중국내 지선교회를 세우고 1905년까지 중국에 머물면서 사역을 하였다. 모택동 주석이 1949년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중국에는 중국내지선교회 선교사가 1300명이 있었으며, 외국인 선교사를 모두 합하면 거의 6000명에 가까운 선교사가 있었다.
중국에는 북미에서 온 유명한 장로교 선교사들이 있었다. 북장로교회 선교사, 존 네비우스(1829-1893)는 1854년 상해에 들어와서 1877년 산동지역으로 들어갔다. 네비우스가 산동 지역에서 사역을 하는 도중에 1900년 6월 한국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들의 초청으로 한국에 들어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자치, 자립, 자생)을 선교사들에게 소개했다. 이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한국 교회의 급격한 성장에 주춧돌이 되었다.
미국 의학박사인 존 그래스고 커(1824-1901)는 1856년 홍통에 들어와서 1858년 광저우에 병원을 세웠다. 이 병원은 중국에 초기 현대 병원들 중에 하나이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인 칼빈 마틸(1836-1908)은 1864년 산동 지역에 도착하였으며 기독교 교육 영역에서 사역을 하였다. 그는 신학과 법학에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에 기독교 교육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 주석이 중국을 차지할 무렵 중국에는 1,811,100명의 개신교 기독교인(0.67%)과 11,470개의 교회, 48개의 신학교, 21개의 성경학교, 18개의 기독교 종합대학, 70개의 기독교 병원이 있었고 3백 3십만의 로마카톨릭 신자들이 있었다. 이후로 중국 교회들은 공산주의 아래서 엄청난 박해를 경험하였고 중국 정부는 정부가 통제하는 삼자교회를 통해서 기독교를 통제하였다.
5. 근대화 속에 중국교회(1979-)
1979년 등소평 주석이 중국을 차지하고 네 가지 영역에서 중국의 근대화를 주장하였다. 네 가지 영역은 농업, 산업, 교육, 국방력이었다.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문을 열기 시작해서 병든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수천 명의 선교사들이 비록 중국 정부가 선교사 비자를 발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곳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다.
3가지의 긍정적인 요인이 기독교와 관련하여 중국 사회에 나타났다.
1) 중국 공산 정부는 중국 교회로부터 서구 식민적인 선교사의 영향을 분리하였다. 중국 교회는 외국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2) 중국의 많은 학생들이 북미, 유럽, 호주/뉴질랜드 그리고 아시아에 그들의 교육을 위해 나가서 처음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듣기 시작했다.
3) 18세가 되기까지 공산주의 교육 아래서 무신론자로 교육을 받은 중국인들이 윤리적 기준의 중요성과 영적인 가치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B.중국 기독교의 고통
중국의 개신교인의 인구는 1949년 이전까지 약 140년의 선교에도 전체 인구의 1%를 넘기지 못했다. 1948년 전에는 “거북이 교회성장” 이라고 불렸던 것이 현재에는 “들불 교회성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몇 가지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1. 서구 식민주의 “서양 마귀들”
청나라(1644-1912) 시대에 거대한 국가였던 중국은 여러 지역을 다스리는 여러 영주들로 인해서 지방 분권화된 국가로 변화했다. 청나라는 1860년에서 1894년 사이에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엽에 영국의 군대는 중국에까지 미쳐서 첫 번째 아편전쟁(1839-1842)을 일으켰다. 1852년에 영-불 군대는 두 번째 아편전쟁에서 중국을 물리쳤다. 중국은 외세에 의해서 조각으로 나뉘었다. 상해의 공원 입구에는 “중국인과 개 입장금지”라는 푯말이 걸리기도 했다.
중국 정부의 양쯔강 유역은 영국 식민 지역이었다. 중국 남부의 위난 지역은 프랑스 군대에 의해서 통제되었고 중국 동부의 산동 지역은 독일이 그리고 중국 북부의 몽골 지역은 러시아가 차지하였다. 외국 특히 서양의 마귀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폭발은 1900년에 55일 동안 베이징을 포위했던 의화단 사건을 야기시켰다. 의화단은 236명이 외국인 선교사들과 130명의 개신교 선교사들을 포함하여 23,000명의 중국 기독교인을 살해하였다. 의화단은 기독교가 서구 식민제국의 선두주자라고 믿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중국 상류층 사람들은 기독교를 거부하였다.
일본의 군대 역시 중국에 진출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을 한국에서 벌여서 중국을 물리쳤다. 일본 군대는 1918년 만주와 시베리아를 침공하면서 중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1937년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중국을 침공하였다. 이것이 중국인들이 당시에 기독교를 포함해서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외세와 국민당을 이끌던 장개석 대통령의 수하에 비리 공직자들을 대적하고 모택동의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역사적 이유이다.
2. 공산주의의 기독교 박해
중국은 1951년까지 모든 외국인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삼자 교회의 지도자들인 우야중 목사(YMCA의 총서기)와 중국기독교협회 총무 등광훈 목사를 선두에 내세우고 삼자교회를 강화시키며 반삼자교회들을 박해하였다. 삼자교회를 반대하는 어떤 기독교 지도자라도 바로 구금되었다. 위치만 리와 왕명도는 박해로 인해서 고통을 받았다. 셀 수 없이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박해로 고통을 받았고 강제노동수용소로 쫓겨났다.
현재 가정교회와 삼자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지난날 공산정부 치하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받았던 고난의 결과이다. 북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의 터툴리안(170-220)은 사형집행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 1979년 이후로 구금되었던 지하가정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부분적인 자유가 주어지면서 중국교회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다. 전 세계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중국의 고통받는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의 시간과 재정을 들여서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선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3. 가정교회 VS 삼자교회
가정교회와 삼자교회 간의 수십년 동안의 해묵은 갈등과 불신은 많은 가정교회의 지도자들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으며, 이러한 갈등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문제는 1937년 한국교회에 있었던 신사참배를 떠올리게 한다.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교회의 지도자들은 수감되었지만 일본정부의 요구에 응했던 지도자들은 그들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 감옥의 성자들과 타협자들의 갈등은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면서 발생하였다. 결과적으로 1951년 수감되었던 지도자들은 한국장로교회 내에 새로운 교단(부산의 고려파)을 세우게 되었다.
삼자교회는 중국의 국가종교사무국의 철저한 통제 아래에 있다. 모택동의 시대(1948-1976)에 중국정부는 모든 주요 기독교 활동을 관리하였다. 삼자교회는 교회 내에 공산당의 앞잡이라고 가정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삼자교회는 가정교회의 지도자들을 박해했다. 중국정부가 가정교회를 박해하는 동안에는 이 두 공동체간에 갈등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과거에 중국의 가정교회들은 교육수준이 낮은 시골의 주민들 사이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비등록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적은 숫자가 모이지만 생동감이 있고, 감격이 있으며, 그들의 신앙은 살아있다. 현재 가정교회는 중국 전역의 도시들 가운데서 확산되고 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중국의 수도인 북경에 존재하는 3000개의 가정교회를 포함해서 중국 전역에 80000개의 가정교회가 있다고 보고했다. 가정교회들 중에 많은 수는 중국 외부의 다양한 기독교 단체와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할 경우에 가정교회 가운데 다양한 종류의 교단들이 세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Ⅱ. 중국 교회에 대한 바울의 선교전략
역사는 발전을 겪으면서 종종 반복된다. 역사에 대한 동양적 관점은 삶을 순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런 의미 없이 출생하여서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생, 노, 병, 사의 역사관”이었다. 반면에 역사에 대한 서구의 세속적인 관점은 “나사모양의 역사관”으로 농경사회에서 봉건사회를 거쳐서 자본주의와 현대주의 그리고 결국에는 후기현대주의에 이르기까지 문명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1세기의 사도 바울의 선교전략은 21세의 선교전략가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준다. 1세기의 교회와 사회는 중국 교회와 사회의 현재 상황과 매우 중요한 유사점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만약 사도 바울이 현재에 살았더라면 그는 분명히 에베소를 주목하고 에베소교회를 위한 그의 선교전략을 중국교회의 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1. 현대 중국과 1세기 에베소의 유사점
1) 많은 인구 : 500,000명
에베소는 1세기경에 커다란 항구와 시장과 도서관을 갖은 소아시아의 가장 큰 도시였다. 에베소는 상업적, 문화적, 교육적으로 중심도시였다. 마찬가지로 중국은 13억 인구를 가지고 있다. 에베소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사도 바울에게 엄청난 선교의 도전이었던 것처럼 중국의 소수 기독교인(5%)이 대다수인 93%의 비기독교인 인구에 다가가는 것은 엄청난 선교의 도전이다.
2) 종교적 도시 :
아테미(그리스 식)이라고 불리는 여신 다이애나(로마식)의 거대한 신전은 에베소의 외각에 위치해 있었다. 이 신전은 높이가 342피트, 넓이가 164피트였으며, 높이가 56피트인 여러 기둥들에 의해서 지지되었고 빛나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제단이 있었다. 아테미 여신은 신전 안에 모셔져서 숭배되었다(행 19:27-28).
마찬가지로 중국의 전통, 종교인 불교, 도교, 유교 그리고 조상숭배가 오늘날 되살아나고 있다. 무신론 공산주의 정부는 지난 65년간 중국에 수많은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을 만들어냈다.
3) 죄악의 도시 : 윤리적 가치의 상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부도덕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그들이 감각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9). 마찬가지로, 불의, 뇌물, 모든 종류의 부도덕함은 오늘날 중국 사회에 만연해있다.
4) 박해 :
사도행전 19장 23절에 에베소에 아테미 여신상을 만들어서 돈을 벌던 은장색 데메드리오는 에베소인들을 동원하여서 “에베소의 위대한 아테미여!”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사도 바울과 그가 전한 복음에 대항하여 농성을 벌였다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았고 “카타콤의 기독교인들”로 불렸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중국의 문화혁명(1967-1976) 당시에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아시아의 기독교인 박해는 우리에게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313년)을 통해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기 전까지 초대교회가 경험했던 극심한 박해를 떠올리게 된다.
2. 에베소 복음화를 위한 사도 바울의 선교 전략
그 외에도 에베소 교회와 중국 교회의 사이에는 수많은 유사점들이 존재한다.
첫째로, 중국에서 13억 명의 인구에서 기독교인이 아주 적은 소수(5%)를 차지하는 것처럼 에베소 교회도 아주 적은 수의 기독교인이 있었다.
두 번째, 에베소 교회에서 할례당(유대인)과 무할례당(이방인) 기독교인들 간에 불화가 있었던 것처럼(엡 2:11) 중국 교회에는 많은 방언과 지역주의, 지역 간에 격차로 인해서 불화가 있다
세 번째, 에베소 교회는 영적인 아이를 낳을 훈련과 교육이 부재했다(엡 4:14). 중국 교회에도 오늘날 숙련된 기독교 일꾼들이 너무나 부족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에베소 교회에 대한 선교 전략은 교회의 지도자(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 교사의 영적 은사를 강조함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훈련된 영적인 지도자들은 전도와 학생 사역, 사회운동 그리고 많은 다른 사역들을 일으키기 위해서 그들의 교회 일반 성도들을 동원해야 한다. 그것이 지역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현대적인 “제자훈련 프로그램”이다.
어떻게 중국의 소수인 기독교인들이 절대 다수인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을까? 사도바울의 선교 전략인 지역 교회의 지도자 훈련이 바로 정답이다. 현대 중국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이 말씀으로 양육되어야 한다. 영적인 열정으로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불신자들과 효과적으로 나눌 수 있다.
Ⅲ. 중국 교회의 중요 사랑
1. 중국, 기독교인들에 의한 “중국의 기독교화”(민족복음화운동)
중국인들에 의한 “중국의 기독교화”라는 개념은 중국 기독교인들은 자국민의 전도에 대한 우선적인 책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 전통적인 서구의 선교 지도자들은 종종 서구의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세계 선교를 하는 것을 목표로 강조하였다. 비록 그들은 현재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성경 교육기관과 신학교들을 세우기는 했지만, 세계복음화를 위한 “민족복음화운동”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그들은 21세기에 제3세계 선교사들이 서구의 선교사들의 숫자를 넘어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외국 선교사들과 중국 교회의 관계도 과거의 “부자지간”과 같은 관계에서 “동역자”의 관계로 그리고 현재의 “원주민교회 산하”로 전환되었다.
선교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더 많은 선교사들을 보낸다고 해서 항상 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일본은 45년이 넘는 선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1억2천7백명의 인구 중에서 641,351명의 개신교 기독교인(0.4%)을 포함해서 오직 110만 명(0.8%)이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교해 볼 때 일본은 33개의 나라, 245개의 선교단체에서 파송된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3,500명) 있다. 추가적인 선교사 파송은 일본을 복음화하기 위한 해답은 아니다. 해답은 8,023개의 교회에서 백만 명이 넘는 일본 기독교인들을 세워서 자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민족복음화운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민족복음화” 의 문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수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중국 교회의 지도자 양성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중국 기독교인들은 정부의 선교사 비자 거부 때문에 외국 선교사에게 의존하지 않고 일반 자국 자신의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중국교회는 여전히 자국민을 전도해야 하는 엄청난 과업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국내에 13억의 세계 최대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71,385,700명의 중국민족이 전 세계에 살고 있다. 미국에 1,215개, 홍콩에 1,250개, 대만에 3,728개의 교회들 합쳐서 총 9,609개의 중국교회들이 화교 중국인들 사이에 존재한다. 홍콩에 있는 세계 선교 중국 협력센터(CCCOWE)는 6개의 대륙에 있는 중국교회의 연합사역을 하고 있다. 해외 중국 기업과 함께 하는 오늘날의 중국의 경제력과 전 세계에 퍼져있는 중국 교회들은 중국 교회의 세계 선교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수의 기독교 인구를 나타내고 있다. 중국에는 6천만 명의 개신교 기독교인들이 있다(1천6백만 삼자교회 성도들을 포함). 80,000개의 가정교회 또는 36,000명의 사역자들이 모일 수 있는 교회가 있다. 중국에서 매일 기독교로 회심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2만 명이다. 이 환상적인 교회의 성장은 하나님께서 모택동 주석의 공산주의 법에 의한 통제에서 박해당하고 순교한 많은 기독교인들의 열매를 수확하시는 것이다. 확실히 지금은 하나님께서 중국에서 일하셔서 수많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계시는 때다.
저자는 중국 교회와 한국 교회가 기독교인이 겪은 고난과 빠른 교회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여러 가지 유사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교회성장 폭발”, "들풀교회 성장"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한국교회 성장 폭발”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장로교)와 호레이스 아펜젤로(감리교)는 1885년에 한국에 함께 들어왔다. 그들은 다른 많은 선교사들과 함께 교회를 세우고, 인기 있는 남학교와 여학교를 세우고, 병원과 고아원을 세웠다. 그들은 기독교 대학과 신학교를 통해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했고 한국 교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일제 식민시대(1910-1945)와 한국전쟁(1950-1953) 시간에 고통스러운 박해의 경험은 수천 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위해서 감옥에 갇히고 사형을 당하게 했다. 그들은 일본의 신사참배와 공산주의에 저항하였다. 한국 교회는 “고통당하는 교회”로 알려졌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결과적으로 순교자들로부터 열매를 수확하였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민족복음화운동”을 강조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이 한국의 복음화에 중대한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1990년에는 1천2백만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한국 CCC의 설립자인 김준곤 목사는 “민족복음화 운동”의 핵심 운영자다. 서구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의 토대를 닦았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조국을 복음화 시키는 주된 책임을 갖게 되었다.
중국 교회는 40년 전의 한국 교회로부터 배울 점이 잇다. 1970년대에 일어났던 한국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빠른 경제 성장과 세속주의로 인해서 1990년대부터 쇠락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교회를 떠나는 젊은 세대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최근에 서울에서 어떤 한국 목사가 설교 중에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영국을 이미 떠나셨고, 현재 미국을 떠나고 있으며, 한국을 떠나려고 준비 중이시다.” 그러나 다행이도 한국 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바탕으로 이미 250개의 신학교로 많은 수의 사역자들을 키웠다는 점에서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 교회의 정치적 상황은 한국 교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2. 연장신학교육(TEE)을 통한 교회 지도자 양성
분명히 지금은 중국교회 안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으로 수많은 중국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고 있는 때이다. 중국교회는 나날이 성장하는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로 말미암아 중국의 교회성장이 가로막히기 전에 수많은 가정교회들이 필요한 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을 제공하고, 그들을 양육시켜야 하는 때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다”(마9:37). 학식 있는 신자가 있는 도시에서 더 많은 가정교회가 성장하는 이때에 중국교회는 말씀으로 제대로 훈련된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해야 한다. 이것이 가정교회와 삼자교회의 공통된 화두 중에 하나이다. 지도자 훈련은 두 가지 갈래로 구분된다. 일반 평신도 수준에서 지도자 훈련을 하는 것과 사역자들(목사, 선교단체 지도자, 신학 교수)을 위한 훈련이다.
연장신학교육(TEE) 훈련 프로그램 또는 장거리 교육(Distant Education)은 매우 중요해졌다. 냉전 기간(1950-90) 중에 TEE는 공산국가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광범위하게 조직되었다. TEE 프로그램에 따르면 성경교사는 매주 소그룹을 만나서 준비된 연장교육 교과서(Programmed Instruction Materials)를 사용하여 성경말씀을 가르쳤다. 이 PIM 교과서는 각자 다른 수준의 학위에 맞도록 준비되었다. 오늘의 TEE사역은 현대 매스미디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과 수많은 종류의 교육 자료(문서, 인터넷, DVD, 라디오, 스마트폰)를 갖게 된 것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OMF, WEC, SIM과 같은 많은 전통적인 선교단체들은 중국을 포함하여 접근제한국가(Restricted Access Nations)에서의 교회개척을 매우 강조해 왔다. 그러나 앞날의 선교전략은 숙련된 기독교 사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 사역이다. 그러므로 많은 선교단체들은 중국의 TEE사역과 신학교육을 도모하는 좀 더 영적이고 학문적인 자질을 갖춘 선교사들을 모집해야 한다.
3. 신학 교수들에 대한 간절한 필요
홍콩의 국제중국성경신학교의 학장인 토마스리 박사는 2012년에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선교협회(Asian Society of Missiology) 세미나에서 중국에는 21개의 삼자교회의 다양한 수준의 신학교를 포함하여 총 700개의 신학교와 성경학교들이 있다고 말했다. 많은 가정교회 신학교들이 도시에 있으며, 그들의 교육 사역을 공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반면에 최근 5년간(2008-2012) 삼자교회는 240만 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5,195개의 교회를 세웠고 1,057명의 목사에게 안수를 주었으며, 482명의 견습 목사를 세우고 1,443명의 장로를 세웠다. 21개의 삼자교회 신학교에는 292명의 교수가 가르치며 4,36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신학 학위를 가진 신학 교수들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은 중대한 문제이다. 오늘날 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중국에서 가르치고 있는 중국인 신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중국 외부에서 많은 중국신학자를 양성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소요될 것이다.
최근 중국의 많은 가정교회 신학교들이 그들의 학문적인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Asia theological Association(ATA) 인가를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학위가 아시아와 서양의 다른 신학교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10-20년은 중국교회에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중국교회는 성장하고 있는 교회의 수요에 맞춰서 중국 내, 외부에서 더 많은 교수와 목사를 훈련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내면에 물질주의가 싹트기 전에 수많은 목회자와 신학 교수들을 배출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와 중국교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중국의 공산주의 정부는 종교적 자유를 제한한다는 점이다. 지금은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 그리고 필리핀에 있는 신학교들이 중국 목사와 신학자들을 훈련시켜야 하는 시기이다. 해외에 있는 중국 신학교들, 특히 북미와 호주, 뉴질랜드에 있는 신학교들은 더 많은 중국인 신학자들을 배출하기 위해서 아시아 신학교들과 같이 협력하여 동역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에, 신학박사 학위나 기독교교육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한국 신학자의 수가 2,000명 이상이다. ATA 인증 재평가 팀은 2013년 10월에 4개의 신학교(총신 신학대학원,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횃불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백석 대학교)를 방문하였다. 총신 신학교(합동)의 사당동 캠퍼스에 700명의 대학원생(Ph.D., D. Ed., Th. M.)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대학교에는 Ph. D과정(20명), Doctor of Theology(10명), Doctor of Biblical Studies(3명), Doctor of Lifelong Edcation(28명)이 있다. 횃불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대학교에는 40명의 Ph.D. 과정 학생들이 있었다. 백석대학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는 Ph.D. 학생(56명), Th.D. in Ministry(35명), Th.M.(71명)이며 지금까지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졸업생이 Ph.D.(34명), Th.D. in Minstry(49명), Th.M.(72명)이 배출되었다. 이 외에도 적어도 10개의 다른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진행 중인 학생이 적어도 400-500명이 될 것이다.
지금은 한국인 신학자들이 박사 학위를 가지고서도 한국에서 교수직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교회에는 목사와 신학교 교수들이 풍성하게 공급할 수 있는 반면에, 중국과 타 아시아 교회들은 자질을 갖춘 목사들과 신학자들을 찾고 있다.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은 지역 교회들을 동원해서 25,000명의 한국인 선교사들을 170개의 나라에 파송했지만 신학교와 신학 교수 사역에 대한 선교비전은 아직 유아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한국인 신학자들을 대상으로 신학교수 선교대회가 필요하며 또한 신학 교수와 기독교대학 교수들을 위한 선교단체가 세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 성장하고 있는 가정교회 신학교들은 ATA 인증을 받아서 그들의 학문적 수준을 향상시키고 아시아의 다른 신학교들로부터 학위를 인정받으려 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아시아의 ATA를 비롯한 6개 대륙(아프리카, 남미, 중미, 유럽, 북미, 호주/뉴질랜드)의 신학교 인증협회로 구성된 국제복음신학교육협회 (International Council of Evangelical Theological Education-ICETE)로부터 인정을 받기 원한다. ATA는 중국의 정치적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중국 신학교들이 국제 신학교들과 협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 이유는 중국교회와 신학교들은 국제기독교 사회와 아주 오랜 시간동안 고립되어 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네 가지 신학 학위(Ph.D, Ed.D, D.Min, Th.M)를 수여할 수 있는 중국 아시아 신학대학원(AGST-Chinese)을 세울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As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AGST)는 1984년 홍콩의 ATA 이사회에서 창립되었다. 1985년부터 AGST-Philippines, AGST-Japan, AGST-Alliance 그리고 AGST-Indonesia에서는 200명이 넘는 졸업자들을 배출하였다.
AGST-International(한국)은 2013년 조직되었으며 1972년에 하와이에 창설된 Hawaii Theologicl Sminaary 에서 관활하게 되었다. ATA가 인증하는 11개의 한국 신학교가 협력하고 있다. 아시아 각 나라의 AGST 프로그램은 ATA의 인증을 받고 있다.
4. "Back to Jerusalem" 운동
"Back to Jerusalem Movement(BJM)"의 기원은 1921년 중국 산동 지역의 예수 가족 공동체의 ‘징띠엔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중국전역의 가정교회 운동으로 퍼졌다. BJM의 기본 신념은 1세기에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중세기를 지나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거쳐서 17세기에 북미로 건너가고 18세기에 서구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를 거쳐서 제 3세계를 복음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BJM은 이제 중국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다시 중동과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중국서부에 있는 신장성 지역에 1천6만의 위구르를 포함에서 2천5백만 이상의 무슬림(2%)이 살고 있다. 중국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대사명에 따라 중국내에 무슬림들과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한 비전을 품어야 한다.
제4회 BJM 국제선교대회가 1910년 에딘버그 선교대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0년 6월 1-4일 예루살렘에서 개최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화교선교단체(The Great Commission)의 창립자이니 토마스왕 박사와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Ambassador for Christ 의 총무 데이빗주 박사 외 많은 중국교회 지도자들이 BJM을 열렬히 후원하고 있다. BJM 예루살렘 선교대회의 선언문의 7가지 사항 중 하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무슬림과 유대인, 타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아마도 사도 바울이 직면했던 것과 비슷하게 영적인 갈등이 더 심각해 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빌 1:30)
BJM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신학교들이 선교비전을 품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생들에게 선교를 가르치고 중국교회에서 선교를 촉진시킬 더 많은 중국인 선교학 교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서 중국교회가 많은 수의 선교사들을 해외로 파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삼자교회와 가정교회 모두에 선교를 강조해야 하는 때가 찾아온 것이다.
Ⅳ. 중국복음화를 위한 한국교회 선교전략
현재 중국기독교의 급속도 성장과 더불어 중국교회의 시급한 문제는 영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목회자와 신학교 교수를 충분히 배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 지도자 양성의 과제는 중국교회 내에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침투하기 전에 앞으로 약 10-15년 내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수천만 명의 중국기독교인이 충분한 신학적으로 훈련받은 목회자와 신학교교수가 부족하게 된다면 중국교회는 혼돈과 교회분열과 이단교리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한국과 중국은 수 세기에 걸쳐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교회와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 유사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중국이 한국의 이웃에 있는 대 국가이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중국교회와 함께 동역해야 한다.
예를 들어, 총신대 신학대학원과 신학원은 3백만 성도와 11,456교회, 140노회, 19,829명의 목사 2,600 선교사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이 장로교 합동교단에 속해 있다. 총신의 재학생은 700명의 대학원생과 1,700명의 M.Div학생, 4,000명의 대학생이 있고 모두 합해서 6,400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다. 이 신학교는 한국에서 뿐 아니라 아시아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 신학교다.
한국의 다른 대형교단 신학교들도 수많은 교역자와 신학교수를 배출하였다. 한국장로교(통합)는 280만 신도와 8,305 교회를 소유한 한국의 제2대 교단으로 이 교단에 속한 장신대신학 대학원은 3,000명이 넘는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현재 한국내 Ph.D/Th.D 학위를 소유한 한국 신학자의 수가 2,000명이 넘으며, 이제는 한국 내에서 교편을 찾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다. 한국의 신학교수들은 선교의 비전을 갖고 특별히 중국신학교육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선교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1. 한국교회에 드리는 제안
1) 큰 교단신학교들은 중국어 신학교 프로그램을 설치하기를 원한다. 현재 한국에 중국 학생을 위하여 중국어로 강의하며 M.A.,M.Div. 학위를 수여하는 신학대학원이 2개가 있다. 서울중국신학교(안성)와 세계선교신학교(수원)는 2014년 9월에 Asia Theological Association 인가심사를 받았다. 양평에 있는 ACTS도 우심화 교수를 중심으로 중국 연구원이 개설되었고, 대전에 있는 침신대에서도 2014년 중국어 M.Div. 프로그램을 설치하려고 노력했으나 한국정부의 비자 문제로 연기되었다. 총신(합동)도 중국어 신학프로그램을 시작할 계획을 갖고 있다.
장신대, 백석대, 서울신대, 횃불트리니티 신대 외 다른 신학교와 기독교대학들도 표준 중국어 신학교육 프로그램을 설치하기를 제안한다. 현재 제주도는 중국인이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으므로 중국신학교육을 위한 유일한 장소로 사용될 수 있다.
2) 외국에서 신학교육을 받는 신학생들을 위하여 As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AGST) International(한국)이 2013년에 창설되었고 4개 학위(M.A. Th.M., Ph.D., D.Min.)를 수여하게 되었다. AGST International은 하와이에 있는 Hawii Theological Seminary가 ATA인가를 받은 한국 신학교들과 협조해 운영되고 있다. AGST International이 중국어 신학프로그램을 개설해 최고 수준의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신학교육을 한국과 중국에서 마련하기를 제안한다.
3) 한국과 북미에 있는 한국 신학교들은 연장신학교육(TEE)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신학교수 및 선교사들과 협조해 TEE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하고, TEE 교육자료(책,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 커리큘럼 등)을 개발해야 한다.
4) 한국에 250개 신학교와 북미에 100개 한인신학교가 존재하고 있다. 이 많은 신학교와 기독교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 선교의 비전을 가져야 하는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한국교회 선교는 지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고 신학교 레벨에서는 대단히 미약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교 교수를 위한 선교대회가 필요하며 한국에서는 KWMA, 북미에서는 KWMC/KIMNET과 협조하여 선교대회를 격년에 걸쳐서 매번 다른 신학교에서 개최하기를 원한다. 한국의 GMS, OMF, SIM과 같이 신학교 교수들로 이루어진 선교단체를 조직하여 신학교와 기독교대학에서 선교의 동력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5) 한국의 대형교단 신학교에서 Korean International Mission for Church growth Institute-KIMCHI(한국 교회 성장과 선교세미나)를 마련해 중국의 중요 신학자와 교회 지도자를 한국에 초청해 한국교회의 성장, 신학교육, 선교운동을 소개하며 친교를 갖기를 제안한다. KIMCHI는 충현교회 전 담임목사 이종윤 박사가 창설했으며, 매년 외국교회 지도자를 국가별로 약 30명 초청해 1주일간 한국교회 성장을 소개했다. 비용은 중국대표단이 이동경비를 부담하고 한국 신학교에서 숙식비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 북미 한인교회에 드리는 제안
1) 한국교회와 중국교회의 협조를 도모하기 위하여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와 월드미션동서센터(East West Center for World Missions)는 북미에 있는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국신학생을 풀러에 정기적으로 초청해 한국교회를 소개하는 세미나를 갖도록 제안한다.
예를 들어, 보스턴 근처에 있는 고든코넬 신학교(Gordon Conwell Theological Seminary)는 2014년 5월26-29일 북미의 13개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약 50명 중 중국신학생을 초청해 세미나를 가졌다. 이러한 세미나를 통해 장래 중국교회 지도자가 되는 중국신학생에게 한국교회의 성장, 신학교육, 선교활동을 소개하며 한국교회와 친교를 나눠 아시아 복음화에 동참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2) 북미에 있는 4,00개 한인교회와 1,300개 중국교회의 동반자 관계를 도모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북미의 중국교회는 CCCOWE-북아메리카와 연결되어 있으며 홍콩에 본부를 두고 있는 전 세계중국교회협의회(Chinese Churche Coordination Office for Works Evangelization-CCCOWE)와 연결돼 있다. 북미에 두 개의 중요한 중국선교단체를 소개하기를 원한다. 캘리포니아(Sunnyvale)에 있는 The Great Commission Center(Thomas Wang)과 Pennsylvania(Paradise)에 있는 Ambassdor for Church(David Chor)이다 북미의 한국교회 지도자와 중국교회 지도자의 긴밀한 동반자 관계는 특별히 중국교회 지도자 양성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
역사적으로 한국교회는 기독교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현재 중국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훈련된 사역자와 신학교 수의 심각한 부족으로 인해서 교회 지도자 영성과 같은 강력한 개혁주의 전통의 힘이 필요하다. 즉, 한국의 개혁주의 장로교회는 중국교회(가정교회와 삼자교회)와 함께 동역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신학교육과 해외선교에 있어서 중국교회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중국교회가 세계적으로 많은 수의 기독교 인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 복음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국교회와 중국교회는 모두 박해와 고난을 경험했고 최근에 폭발적인 교회의 성장도 경험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와 중국교회를 사용하셔서 45억 아시아인(전 세계의 60%)과 다른 대륙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하실 것이다.
/노봉린 박사(ATA International Senior Advisor, Th D)
/미주크리스찬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