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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Dawn Prayer Meeting Sermon)

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


누가복음 24장 25∼35절

무언가를 본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기 위해선 잠시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름다움을 모르는 건 둘째 치고 눈을 감고 움직이면 여기저기 부딪치게 돼 생활하기가 매우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의 영적인 안목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본문엔 영안이 열린 자와 닫힌 자가 나옵니다. 둘의 차이는 큽니다. 닫힌 자에게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은 슬픔과 죽음, 실의와 좌절의 길입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눈이 아닌 영적인 눈이 열린 엠마오로 가는 길은 천국, 생명, 기쁨, 희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이 영안으로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들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닫힌 영안은 세상적인, 자기중심적인 정보만을 제공합니다. 그들의 눈엔 십자가형을 받은 나사렛 목수가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열린 영안에는 부활한 예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 메시아 예수가 보입니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 곁에서 대화하는 것은 영안이 열릴 때나 닫힐 때나 똑같습니다만, 예수님이 보이고 깨달아지는 건 닫힌 영안이 열릴 때에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깨달음이 있길 바랍니다. 엠마오에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들이 본 것, 바로 예수의 다시 사심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인 부활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목회자 빌리 그레이엄은 “빈 무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신앙이 생명과 부활과 대속의 신앙이 됩니다.

어느 종교 창시자가 부활했습니까.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우리 주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고치시다가, 끝내 주님 스스로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피터슨 스미스는 “인간에게 죽음은 없다. 다만 불신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증거가 있을까요.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성경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가 됩니다. 사복음서 안에 쉰여덟 번, 사도행전에 스물두 번, 바울 서신서 안에 육십 번 이상 예수님의 부활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로마 시대의 정치가, 역사가들도 예수님의 사심을 문헌으로 기록한 바 있습니다. 또한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이 다투어 예수님의 사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났고, 또한 체험했습니다. 이 증거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이 박해 가운데서도 기쁘게 순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 부활이라는 말은 ‘다시 일어난다’는 말을 기원으로 합니다. 부활의 믿음과 그 신앙으로 우리는 생의 갖가지 좌절과 낙심을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과 그에 대한 영적인 안목이 우리의 삶을 그대로 패배치 않게, 낙담치 않게, 실망치 않게, 분노치 않게, 격동치 않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믿으며 전진하는 우리들은 사건 앞에서도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고, 슬픔을 찬송으로 바꿉니다. 그것을 우리는 욥에게서, 아브라함에게서, 바울에게서, 요한에게서, 빌립에게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어느 곳에 있던지 감사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사건이 2000여년 전 오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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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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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설교 / 성경 스타일의 삶 ( Dawn Prayer Meeting Sermon)

사도행전 1710~15

 

극단적인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극단적 말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라는 무늬만으로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상엔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복음, 예수님의 진리가 삶의 결론이 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여전히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 없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득실거립니다.

 

그러나 이대로는 안 됩니다.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예수님만으로 충분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실제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갖는 믿음이 부도 맞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하며, 천국과 지옥이 반드시 실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내 이름표 달고 나대신 죽으신 예수님처럼 살아가려는 것이 우리의 핵심가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로만이 아니라, 내 생각과 지식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현장으로 내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스타일의 삶입니다. 성경 스타일의 삶이란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우리를 보고 ! 저 사람 성경대로 사네? 스타일이 완전 성경스타일이네?”라고 말하는 삶입니다. 말씀을 항상 적용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과 실라가 2차 전도여행 중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쫓겨 가서 말씀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다 유대인이며 상당히 영향력도 있고 품위도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들이 말씀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이것이 진리라는 결론에 이르자 날마다 성경을 연구했다고 말합니다. 나름 배운 사람들이었고 귀족 출신들이며, 고상하고 품위를 갖춘 사람들이었는데 말씀 앞에서 진지하게 반응하더라는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말씀을 듣지만 믿음도 생기지 않고 자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성경의 단편적 지식들이 머리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뭘 좀 깨닫는가 싶다가도 말씀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듣기 때문에 제자리걸음만 계속합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 변화됩니다. 말씀을 절대 결론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요.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말씀이 결론이 되지 못하니까 그렇습니다. 진리가 결론이 되게 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입니다. 결론 났으면 결론으로 삼아야지 토를 달고, 내 상황에 꿰맞추려 하거나 이리 저리 빠져나갈 궁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말씀은 영원합니다. 내 형편이 어떠한가를 상관하지 않고 말씀을 결론으로 받아 순종했던 사도바울처럼 사는 삶이 성경스타일의 삶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후 12:19)

 

우리의 신앙이 가짜이거나, 말씀이 머리에만 돌고 있거나, 천국과 지옥이 실제가 되지 않으면 망합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16:46)처럼 예수 생명 붙잡고 성경스타일로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신앙과 생활에서 모두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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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보물창고를 여는 4가지 열쇠

야고보서 1:5-8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아버지를 만났느냐에 따라서 사는 것이 다릅니다. 가난한 아버지를 만난 자녀는 가난하게 삽니다. 부자 아버지를 만난 자녀는 자기가 가진 것이 없어도 부자로 삽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적인 고아가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부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하늘의 보물창고를 주셨습니다. 그 창고에는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우리는 그 하늘 창고를 열고 그곳에서 필요한 것을 꺼내서 쓰면 됩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시 23:1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이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기를 바라시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활 속에는 부족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 부족하고, 어떤 사람은 정신적으로 부족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족관계가 부족하고 또 어떤 사람은 지혜가 부족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에 부족함이 있고,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부족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이시고 그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부족함이 많은 것일까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보물창고를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 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창고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 창고는 열쇠가 없이는 아무도 열수 없는 튼튼한 자물쇠로 채워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창고의 열쇠를 제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이 창고 열쇠를 분실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아들을 위한 창고에는 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열쇠를 분실한 제 아들은 아무것도 쓸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모든 것에 부족한 것입니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어떤 사람이 어느 날 너무 피곤한 몸으로 퇴근을 했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할 수 없이 22층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22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후유!” 어서 방에 들어가서 샤워하고 따뜻한 음식을 먹은 뒤에 쉬고 싶어 문을 열려고 하니 열쇠가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기억이 났습니다. 혹 손님이 올까봐 아침에 경비실에 열쇠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오지 않았습니다. 밖에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고 몸은 피곤하지만, 그 문 안에만 들어가면 샤워도 하고 따뜻한 음식도 먹고 따뜻한 방에서 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열쇠가 없으니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보물 창고에는 부족함이 없는 지혜가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돈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건강이 있습니다. 엄청난 축복이 쌓여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물 창고의 열쇠를 분실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불쌍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창고에 있는 지혜와 축복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열쇠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열쇠를 사용하기만 하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창고에 있는 풍성한 지혜와 넘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고를 여는 열쇠 4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자신의 부족을 알아야 합니다(5절).
   5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누가 하나님께 구하여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까?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은 은혜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야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하나님의 풍성한 응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그가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존귀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낮추시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기도가 없었습니다. 매달림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도가 처음 나오는 곳이 창4:26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이 에노스를 낳고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불렀다는 말은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셋이 왜 에노스를 낳고 기도했을까요? 에노스는 ‘사람’ 이라는 뜻도 있지만 ‘병약한 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이 약한 것입니다. 아들이 곧 죽을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아들이 약한데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셋이 그때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제 아들 모세가 유치원에도 가기 전 일겁니다. 저녁에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자다보니 몸에서 열이 펄펄 나면서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정없이 우는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응급실에 쉽게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돈이 있어야 응급실에라도 가지요. 가진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아이는 울다가 경기를 합니다. 눈도 뒤집히고 곧 죽을 것 같은데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의 무능함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를 붙잡고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사태는 시급하고 저는 무능하니 기도가 간절해지더군요. 아이를 붙잡고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다보니 아이 몸에서 열이 떨어지고 울음소리도 잦아졌습니다. 제가 그 때 그 사건을 생각하면서 느끼는 것은 내가 부족하니 하나님을 찾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삼손이 힘이 장사일 때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힘으로 오히려 쾌락에 빠졌습니다. 삼손에 관한 내용이 사사기 13-16장에 나옵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삼손이 딱 두 번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두 번 다 자기의 무능함을 절감할 때였습니다. 한 번은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고 나니 목이 마르기 시작하는데 물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장사여도 물이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삼손이 목말라 죽게 생기니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의 기도를 들으시고 엔학고레라는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또 한 번은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가는 신세가 되었을 때 조롱거리가 되었을 때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삿 16:28에 보니 이번 한 번만 나를 강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삼손이 자기의 부족함을 느낄 때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약함은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는 시작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 때문에 세 번이나 기도하고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제가 40일 금식을 두 번하고 20일도 10일도 금식했던 것은 제게 무슨 영적인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제가 부족해서 하나님께 매달렸는데 주님은 저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십시오. 말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부족함을 인정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보물창고를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풍성함을 알아야 합니다.
   5절에 보니 하나님은 ‘모든 것을 후히 주사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모든 것을 후히 주실 수 있는 풍성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거지도 하루아침에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재벌도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울산에 사시는 한 여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시장에서 동태 장사를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집을 사랑해서 교회를 짓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할머니가 오시더니 “이것은 내 평생에 모은 동전인데 이 동전을 받고 그 동태 한 짝을 줄 수 있겠소?”라고 하셨습니다. 동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 같아서 “할머니, 그러지요.”라며 동태 한 상자를 주었습니다. 집에 가서 동전을 헤아리는데 이상한 골동품 같은 것이 있어서 골동품 가게에 가지고 갔더니 그것은 그 당시 600만 원이나 하는 값진 것이었습니다. 거금 600만 원을 받은 집사님은 너무 감사해서 400만 원을 떼어 건축헌금으로 드리고 200만 원을 가지고 ‘하나님,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지요?’라며 기도하는데 환상이 떠올랐습니다. 집사님의 환상 중에 자갈이 반짝반짝 빛나는 자갈밭이 보였습니다. 그때 집사님에게 ‘자갈밭을 사라.’라는 감동이 왔습니다. 이튿날 어떤 아저씨가 와서 “아주머! 니, 땅 하나 사시지요.”라고 하여 따라가 보니 환상 중에 본 그 자갈밭이었습니다. 그래서 200만 원을 주고 그 땅을 샀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두 신사가 와서 그 자갈밭을 천만 원에 팔라고 했습니다. 천만 원에 팔면 팔백만 원이 남으니 당장 팔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사님은 팔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두 신사가 일억에 팔라고 했습니다. 집사님이 그래도 팔지 않았습니다. 그 땅이 어떤 땅인지 아십니까? 현대 자동차 회사에서 정문으로 내려고 계획한 땅이었습니다. 나중에 집사님이 그 땅을 29억에 팔아서 2억을 헌금하여 그 돈으로 교회를 잘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 27억으로 무엇을 할까요?”라고 기도하다 넓은 땅을 사야겠다는 감동이 와서 넓은 땅을 샀더니 그것이 대 아파트 단지가 되어서 수천억 재벌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광야생활을 40년 했습니다. 그들의 광야생활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신앙적인 원리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①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불기둥구름기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②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불기둥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고,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를 통해서 인도하셨고, 천사를 통해서 인도하셨습니다. ③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낮에 더위도 밤의 추위도 이스라엘을 넘어뜨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을 쓰러뜨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호자이셨기 때문입니다. ④자기 백성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광야는 물도 구할 수 없는 곳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셨고, 하늘에서 꿀 썩은 과자 같은 만나를 내려주셔서 양식으로 삼게 하셨습니다.
   민 11장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니 하늘의 창고를 여시고 메추라기를 보내주셨는데 사방 하룻길에 2규빗이 쌓이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나가서 메추라기를 주었는데 적게 거둔 자도 10호멜이었습니다. 1호멜이 227리터이니 1호멜이면 1.5리터 페티병으로 150병 정도 됩니다. 10호멜이면 1.5리터 페티병 1500개이니 얼마나 많은 양입니까? 적게 거둔 자도 10호멜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가 그 당시에 200만-300만명 정도 되었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풍성하신 분입니까?
   저는 제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고 싶어도 제가 가진 것의 한계 때문에 그 한계 이상 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제 주머니 사정을 잘 모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인데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모든 것에 풍성하신 분입니다.
   고후 9:8에 보면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공급하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아는 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이 하늘의 보물창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3. 기도해야 합니다(5절).
   5절에 보면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은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은 지혜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금요기도회가 끝난 후 제 차로 최지혜 자매를 집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요즘 직장 생활하는 것을 보니 너무나 힘들어 보입니다. 늘 퇴근시간이 늦더군요. 제 아내가 자매에게 “야근수당 받도록, 월급이 오르도록 기도해라”고 하면서 자기가 직장 문제로 기도했을 때 받았던 응답을 간증했습니다. 제가 소망교회를 개척하고 몇 년 만에 아내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주의 일에만 전념하려고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막상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교인들은 조금 있었지만 교회에서 제 생활비를 줄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 한 후 3-4년 동안 받은 교회에서 받은 돈이 5만원 이었습니다. 그것도 제가 40일 금식하고 난 후에 보호식을 하기 위해서 받은 돈이었습니다. 제 아내가 직장생활하면서 번 돈은 교회로 다 들어갔고, 최은심 집사님이 저희를 거의 먹여 살렸습니다. 최은심 집사님이 제 아내 눈치를 보고 돈이 필요한 것 같으면 자주 찔러주었습니다. 최집사님이 열심히 도와주었지만 그래도 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겨울에 구두 밑창 뚫어진 것을 한 달을 신고 다닌 적도 있었습니! 다. 하루는 제 아내가 지나가는 말로 “하나님 회사에 다시 복직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는데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그 말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날 바로 회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다시 회사로 돌아와서 일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회사가 외국계 대기업이었는데 그 회사 역사상 처음으로 퇴사자에게 복직 요청을 한 것입니다. 아내는 속으로는 회사의 복직 요청이 기쁘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교회를 개척해서 바빠서 갈 수가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회사 윗사람들이 계속 돌아가면서 전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내는 회사에 복직이 되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아내의 형편을 고려해서 하루에 몇 시간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해주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6년 전인데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대우로 회사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급료도 시간당 5,200원으로 그 당시에는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너스와 퇴직금을 합한 것 보다 더 풍성하게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제 아내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에도 풍성하게 응답! 해 주시는 분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기도하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감동에 순종하셔서 하나님의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시고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감동이 중요합니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우리들에게 감동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사에 보면 존경할만한 분들이 많습니다. 일제시대에 한국교회의 별과 같은 목사님이 한상동 목사님이십니다. 한상동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1941년 8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한상동 목사님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입니다. 심한 고문과 감옥의 나쁜 환경으로 한 목사님은 폐병이 다시 도져 그의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고 죽음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몸의 고달픔과 괴로움을 느끼며 몸부림치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습니다. 그 때 잠결에 선명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 목사!”, “예” 한 목사님은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기도하라” 성령의 음성이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가누기 힘든 몸으로 밤늦게 까지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3일째 밤에도 기도 후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잤습니다. 한 목사님은 그 날 밤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보니 파란 잔디밭이 끝없이 펼쳐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잔디밭에 서 있었습니다. 웃옷을 벗은 몸에는 살이 통통하게! 올랐고 팔뚝에 힘이 솟았습니다. 한 목사님은 눈을 뜨고 주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건강을 다시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 후 몸에 피로가 없어지고 오후마다 오르던 미열도 없어졌습니다. 기도하라는 성령의 감동에 순종해서 사흘을 기도하다가 목사님의 병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깨끗이 치료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기도하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으십시오. 이제 곧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은 전교인이 새벽기도도 하시고, 금식기도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은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하늘의 보물창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4.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6-8절).
   6-8절에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물결이 요동하듯이 요동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보물창고를 열수 없습니다.
   어느 사람이 산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합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날이 훤히 밝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되게 안 믿어지네”라고 하더랍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내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내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구하는 것이 자기에게 실상으로 나타날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의 특징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구하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것을 상상하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자녀 교육에 관한 책을 쓰신 류태영 박사님을 아실 것입니다. 그분의 간 증 중에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간증이 있습니다. 류교수님은 정말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초등학교 5학년 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산골 마을의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는데, 서울에서의 고등학교 시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된 생활이었습니다. 구두 닦기를 하면서 공부를 하며 매일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학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좋은 것 같아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바로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류태영 학생은 빌 4:13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을 확신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한지 10년이 지나면서 어느 나라에 가서 공부할 것인지가 문제였습니다. 그가 기도한 후에 내린 결론은 ‘가난한 농촌을 잘 살게 하는 길이 무엇인지 배우자. 그러기 � ㎸漫��선진 농업국가인 덴마크로 가자’였습니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한국의 농촌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농촌의 현실과 함께 그의 사상을 피력한 글과 덴마크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편지를 영어로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누구에게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가 문제였습니다. “하나님, 나는 배경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유일한 배경은 하나님이시며 지도교수는 바로 주님이시오니 길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는 고민을 하다가 ‘가장 높은 사람에게 보내라’는 마음의 확신이 들었습니다. 덴마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던 그는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확인한 결과 프레데릭 황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편지봉투에 적었습니다. [프레데릭 9세 국왕. 코펜하겐. 덴마크]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반드시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13년 동안이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왔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불가능이 없다.”라고 믿고 그 편지를 우체국에 가서 붙였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기도한지 40일이 지난 어느 날 편지 한 통 날아� 督윱求� 그것은 바로 덴마크의 국왕 보좌관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할� 섭獰� 또 며칠 후에는 덴마크의 외무성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왕복 비행기표까지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시골뜨기 소년에게 해외 유학의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 당신의 크신 사랑이 넘치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덴마크의 국왕이 구두 닦기 청년을 초청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 덴마크에서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바라봄의 법칙을 이용해서 이스라엘에 가서 공부한 후에 건국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13년 동안 믿음으로 바라보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고 그가 바라본 대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믿음대로, 우리의 보는 대로 축복하십니다. 우리의 꿈꾸는 대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두 번째,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을 입으로 시인합니다. 믿음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해주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긍정의 힘]으로 유명한 미국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어머니는 1981년, 몇 주 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피골이 상접하고 얼굴이 노랗게 되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지만 큰 소리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집에 돌아와 젊고 행복했던 시절의 사진을 방안에도, 화장실에도, 부엌에도, 거실에 붙여놓고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기는 건강하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입으로 시인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고백한 대로 병을 씻은 듯이 치유해 주시고 건강한 몸을 주셨습니다.
   옛날 [까르멜 수도원]의 원장은 ‘맨발의 수도사'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린이들을 가르칠 때 늘 모자를 벗어서 머리를 숙이고 어린이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하는 말이 “지금은 어린아이들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이곳에서도 국무총리도 생기고 장군도 생기고 학자도 생겨나고 위대한 실업가도 생겨날 것이니 존경해 마지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자기 믿음을 입으로 시인한 것입니다. 과연 까르멜 수도원의 원장이 가르친 제자 중에 세계의 영적 기운을 바꿔 놓은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태어났습니다. 맨발의 수도사의 믿음의 고백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고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상상하며 입으로 고백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물창고의 열쇠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곧 여러분이 바라보는 것, 여러분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실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물창고는 항상 풍성합니다. 그런데 그 보물창고는 열쇠가 있어야만 열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물창고를 여는 열쇠를 사용하십시오.
   제 1열쇠 자신의 부족을 아는 것입니다. 제 2열쇠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아는 것입니다. 제3열쇠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4열쇠는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생각하시고 입으로 선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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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묵상은 삶을 형통케 한다. 수1장7절

 

오래전에 어느 재벌회장이 소 5백 마리를 이북으로 보냈을 때 북한정부가 얼마 후에 그 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원인은 남쪽에서 의도적으로 소들에게 불순물을 먹여서 보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돕느라고 보낸 것인데 소들을 트럭에 태우기 전에 의도적으로 죽을 것들을 먹여서 보냈겠습니까? 말이 안 되는 억지 주장입니다.

 

우리 인생의 고통은 대부분 이 지나침에서부터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한다고 칼을 내리쳐 말고의 귀를 잘랐던 베드로를 책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검을 집에 꽂으라. 네가 그런다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억지를 부리고, 치우치는 기질을 부려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래야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이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조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할 것이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엄청난 축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화가 나도 중도에 멈출 줄 알고, 억지를 부리며 주장하다가도 하나님께 맡기며 엎드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길을 형통하게 하시는 주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형통하는 비결을 말씀하시면서 반복하여 말씀을 묵상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왜 이것이 형통하는 삶의 비결이 됩니까? 여러분! 사람은 옳지 않은 것이라도 반복하여 접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배우고 맙니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저나 여러분이나 지금까지 좌로 치우치고, 우로 치우치는 모습들을 너무 많이 보고 살아왔습니다. 이것을 깨뜨리는 삶의 길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다른 종류의 반복을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일처럼 반복하여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새로운 종류의 반복입니다.

 

얼마 전, 저희 교인 중에 한 젊은 부부가 부부싸움을 했답니다. 저녁 먹을 시간인데 부인이 화가 나서 밥도 안 짓고 이층 자기 방에 올라가 문을 잠가버렸습니다. 저녁도 못 먹게 되어, 도리 없이 이 남편과 두 아이들이 그 방 앞에 가서 문 열어달라고 하다가, 아내가 교회 제자훈련에서 성경암송 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던 생각이 나서 이렇게 문에다 대고 암송을 했답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랬더니 잠시 후에 문은 열지 않고 다음과 같은 암송소리가 튀어 나오더랍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한 구절이지 않습니까! 이 부부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 함께 밥도 먹게 됐습니다. 물론 성경암송을 그렇게 써서는 안 되겠지만 번쩍하는 교훈이 있었습니다. 서로 억지를 부리고 저마다 고집하면 문이 잠기고 밥도 먹지 못하나, 주의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반복하여 묵상하면 형통할 길이 열린다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민족과 교회가 형통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하여 따라가는 길 뿐입니다.이제 더 이상 치우치지 말고, 이 진리대로 형통하게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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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소망(빌1:20~21)

 

 

사람은 누구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대학을 마치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소망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농부의 소망은 씨앗을 뿌려 백배의 열매를 맺어 거두는 것입니다. 군인의 소망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애국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업가의 소망은 사업에 성공하여 많은 물질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삶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기에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영국의 의사 겸 작가였던 토머스 풀러(Tomas Fuller;1654~1734)는 “위대한 희망은 위대한 인생을 만들어 낸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소망이 있을 때 삶이 풍성해지고 소망이 사라질 때 절망이 오며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1770~1850)는 “희망이 풀잎에 맺힌 이슬 같아도 사람들은 그것을 붙들고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소망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 20절에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라고 말씀하면서 성도로서의 소망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길 소망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빌1:20)”라고 했습니다. 성도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언제나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죄에서 용서 받은 자들로 죄와 상관없이 생활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언제 어디서나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하루를 행복하려면 목욕을 하십시오.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새 옷을 사 입으십시오.3개월을 행복하려면 말을 타십시오.3년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십시오. 그러나 일평생을 행복하려면 정직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일평생 정직한 데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부끄럽지 않게' 사는 생활이 행복한 삶입니다.

 

둘째 바울의 소망은 `사명을 위해 죽을 것도 각오'하는 소망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죽을 것을 각오하는 사람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생명을 걸고 싸우는 병사가 가장 용감하게 싸웁니다. 사자가 맹수의 왕자가 되는 것은 한번 싸우면 목숨을 걸고 싸우기 때문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사각오'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부활 진리위해, 복음전파 위해, 이웃을 위해 일사각오”했기에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성경은 죽으면 산다고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12:24)고 하였습니다.“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씀처럼 죽을 각오로 사명에 충성하는 성도가 됩시다.

 

셋째 오직 예수(Only Jusus)소망이었습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었습니다.27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하였는데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입니다. 믿음의 질문과 믿음의 해답과 믿음의 주제는 오직 예수입니다. 말씀 따라 사는 길, 순종하며 사는 길은 오직 예수 중심의 삶입니다. 주님의 명령만 지킬 때 참된 신앙의 길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의 명령에만 순종하고 예수의 말씀만 따라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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