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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조선에 온 두번째 개신교 선교사

 

비극으로 끝난 토머스 선교사 숭고한 도전

귀츨라프에 이어 한국을 방문한 두 번째 개신교 선교사는 회중교회의 토머스 목사(Rev. 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였다. 웨일스의 회중교회 목사 아들로 출생한 토머스는 아홉 살 때 아버지의 목회지를 따라 하노버로 이사했다. 1859년에는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 입학하게 되는데, 언어능력이 탁월했다.

이미 라틴어, 그리스어 등 고전어와 프랑스어 등 유럽 언어를 이해하고 있었다. 1863년 이 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해 5월 29일 캐롤라인 갓프리와 결혼하였고, 그해 6월 4일 하노버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7월 21일에는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파송으로 중국으로 향하게 된다.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가 중국선교를 지원한 것은 중국이 런던선교회의 중요한 선교지역이기도 했지만 인도와 중국은 당시 젊은이들의 관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도 런던선교회의 첫 중국 파송 선교자인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43)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민경배 교수는 토머스가 귀츨라프의 조선 방문기를 읽고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토머스의 제1차 조선 방문

토머스는 4개월에 걸친 여행 끝에 1863년 12월 부인과 함께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사역은 길지 못했다. 중국에 온 지 4개월 만에 아내가 사망하였고, 런던선교회 상하이 지부장인 무어헤드와의 관계도 불편했다. 1864년 12월 런던선교회를 사임한 그는 조선에서 천주교도들이 심한 핍박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때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파송을 받고 만주에서 일하고 있던 알렉산더 윌리엄슨과 접촉하게 되었고, 그의 주선으로 1865년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즉 토머스는 9월 4일 산둥성 지푸를 떠나 ‘허락되지 않는 땅(terra incognito)’으로 향했고, 그달 13일 한국의 서해안에 도착하였다. 어떤 기록에는 이곳이 황해도 옹진 자라리(紫羅里) 근포(近浦)였다고 말한다. 한글을 공부하며 한문 쪽복음서를 나누어 주며 은밀하게 전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 2개월 반 동안 조선에 체재한 후 1866년 1월 초 베이징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이 제1차 조선 방문이었다.

토머스의 제2차 조선 방문

베이징으로 돌아간 그는 조선의 사신들을 만나 교제하기도 했다. 이들을 통해 한글을 배웠고 조선의 천주교 상황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 비록 상당한 위험이 상존했으나 그는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조선으로 가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에 승선하고 조선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 범선은 톈진(天津)에서 화물을 내려놓은 후 

‘조선이 필요로 할’ 면직의류, 유리 및 양은 그릇, 천리경(千里鏡), 바늘 등을 싣고 통상 개시의 가능성 유무를 시탐하기 위하여 파견된 무장 상선이었다. 이 배는 1866년 7월 29일 톈진을 떠나 8월 9일 지푸를 거쳐 조선으로 향하였는데, 이때 토머스는 통역관 및 항해 안내자의 자격으로 승선했다. 동시에 스코틀랜드성서공회(NBSS)의 파견원 자격이기도 했다. 승선원은 미국인 3명, 토머스를 포함한 영국인 2명, 그리고 중국인과 말레이시아인으로 구성된 19명 등 총 24명이었다. 이 배는 백령도를 거쳐 평양으로 항해해 8월 20일 대동강 하류에 있는 강서군 초리면(草里面) 포리(浦里)에 닻을 내렸다. 여기서 하루를 지낸 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백령도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문성경과 전도 문서를 나눠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토머스의 제2차 조선 방문이었다.

토머스의 ‘무모한 도전’

제너럴셔먼호는 교역을 요구했다. 조선 관리는 국법에 의해 금지된 점을 말했으나 배는 8월 22일 평양 만경대 근처의 두로도를 지나 27일에는 한사정(閑似亭)으로 향했다. 셔먼호는 조선 영토에 불법으로 침입한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온 조선인 관리 이현익(李玄益)을 인질로 잡고 발포하는 등 행패를 부리며 평양성 수비병과 대치하였다. 대동강 하류로 이동하던 중 양각도(羊角島) 서쪽 쑥섬에서 이 배는 좌초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수비병의 화공(火攻)으로 배는 불탔고 선원들은 살해되었다. 이때가 9월 4일이었다. 토머스 목사도 이때 사망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토머스는 두 차례의 조선 방문을 통해 약 4개월간 조선 영토에 체재했으나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다. 물론 토머스의 전도와 그 결실에 관한 몇 가지 확인할 수 없는 주장들이 있으나 신뢰하기 어렵다. 토머스가 조선으로 왔던 때는 천주교 금교령이 내려지고 12명의 프랑스 신부 중 9명이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등 천주교 박해가 심각했던 때였다. 이런 박해 상황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장한 상선을 타고 입국한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어떤 이는 토머스 목사가 무장한 상선을 타고 입국하였고 한국에서 구체적인 선교사역이 없었다는 점에서 순교자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비록 무모한 도전이기는 했으나 그 자신은 선교사이기를 원했다. 윌리엄슨으로부터 지원받은 ‘많은 양의 책’을 전파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했다. 비록 뚜렷한 결실은 없었으나 그는 은둔의 나라에 대한 열정을 가진 선교사였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서의 첫 개신교 순교자’로 불린다. 제너럴셔먼호는 미국 국적의 배였기에 미 해군은 이 배의 행방을 추적하였고, 뒷날 신미양요(辛未洋擾)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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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신교 전래의 준비(1832 - 1884)

 

상업과 정치적이 목적으로 조선과 연관을 맺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입국한 칼 귀츨라프 선교사, 런던 선교회 소속 로버트 토마스, 그리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하거나 한국선교를 측면에서 지원한 이들이었다.

 

독일에서 발흥한 경건주의 운동의 저변 확대, 요한 웨스리 형제의 조지휫필드를 통한 영국의 부흥운동, 그리고 1740년대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도은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고, 이와 같은 영적인 생명력은 선교열을 가속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귀츨라프, 토마스, 그리고 윌리엄슨의 한국선교의 준비 역시 그와 맥을 같이한다.

1832년 7월 통역인, 의사 및 선교를 위해 로드암허스트호를 타고 충청도의 홍주 고대도시에 정박한 귀츠라프는 선교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따라서 그의 입국은 비록 직접적인 결실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선교를 목적으로 한 순수한 입국이었다. 또한 1866년 대동강에서 순교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와 그를 배후에서 지원하면서 한국선교의 장을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알렉산더 윌리엄슨 선교사 모두 한국개신교 선교의 문호를 여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는 외구과의 개항의 문제가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줄기차게 지기되었다. 문호개방은 단순히 조선이 외국과 수교를 시작했다는 의미 그 이상이었다. 외국과의 개항 문제를 두고 우리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안 미국에서는 해외 선교열이 고조되고 있었고, 이미 일본과 청나라에 입국해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선교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조선선교는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미 그 전에 존 로스 선교사를 통해 성경이 번역되고, 그를 통해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이 매서인이 되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은 한국인들 사이에 조용히 저변 확대되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한국선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복음을 전하기에 좋은 토양이 조성되었고, 따라서 복음을 수용할 준비가 이루어진 적기에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강화도 조약과 그후의 정치적 대립, 개항의 문제를 두고 전개되는 영미의 해외선교운동, 존 로스와 맥킨타이아, 그리고 의주 청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만주에서의 복음의 준비, 이수정을 통한 일본에서의 선교 준비는 한국개신교 선교의 장을 여는 직간접적인 전기가 되었고, 국내선교를 저변 확대시키는 중요한 정치적, 종교적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

 

주변국에서는 한국선교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문호개방이 진행되고 있었다. 강화도조약 후 정치, 경제적인 일본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라도 문호개방은 이제 피할 수 없었다. 강화도조약에 따라 1880년 원산항을 개항하고 3년 후인 1883년에는 제물포항을 개항하였고, 이들 항구를 통해 자행되는 일본 경제의 국내 침투에 대해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일본인들의 독자적인 무역으로 인한 국내 시장의 잠식, 일본인들의 경제적인 수탈, 일본 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국내 화폐의 통화장애, 점점 더 강화되는 일본의 정치, 경제적인 개입에 대해 더 이상 좌시만 할 수 없다는 여론이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차제에 열국과의 과감한 개항을 통해 그들이 힘을 빌려 일본의 세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정서가 일부 정부 지도자들 사이에 강하게 일고 있었다. 개항을 반대하던 이들도 일본의 정치, 경제적인 개입이 강화되자 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원하든 원치 않든 서양열국에 문호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에의 문호개방은 곧 서양 문물과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한국선교는 개항, 특히 조미수호조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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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선교사, 조선에 온 목적은 성경 보급”

순교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서 ‘제국주의’ 폄하 시각에 반박

 


박용규 총신대 교수는 5일 서울 동작구 총신대에서 열린 ‘토마스 선교사(1839∼1866·사진) 순교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토마스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조선에 입국했고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다 숨졌다. 그렇다면 그를 순교자로 봐야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역사적 평가: 토마스, 그는 순교자가 아닌가’라는 발제문에 “평양 선교의 개척자인 사무엘 마펫에 따르면 그로부터 성경을 전해 받은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었고, 그 복음이 씨앗이 되어 교회까지 세워졌다”며 “그의 죽음 이후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입국하고 적극적인 선교가 가능해졌다면 우리는 그를 순교자로 평가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은선 안양대 교수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와 한국선교의 연관성’이란 발표문에서 “토마스의 입국 목적은 성경을 널리 보급하는 것이었다”며 “선교사적, 신앙적 관점과 한국교회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죽음의 참된 의미를 계승하자”고 제안했다. 그동안 교계 일부에서는 토마스 선교사에 대해, 침략주의에 근간을 둔 ‘힘의 선교’를 시도했다고 비판했다.


1863년 영국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중국 상하이에 파송된 토마스 선교사는 1865년 조선 선교를 위해 두 달여 조선 연안을 탐사했다. 이듬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에 통역자로 승선해 중국 지푸항에서 조선으로 입국했다. 제너럴셔먼호는 1866년 9월 대동강에서 조선 관군의 공격을 받아 불탔고 토마스 선교사 역시 관군에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2016.9.5. 국민일보/ 강주화 기자) /국민일보 httt://www.kmib.co.kr

 

​토마스 목사 ‘순교자’ 여부 논란 재점화‘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 “순교자 맞다” 반박

 

150년 전인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입국했다 그해 9월 관군(官軍)에 의해 살해당한 토마스 목사(1840-1866)의 죽음이 순교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재가열되는 양상이다.

 

토마스 목사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선교사로 불리며 한국교회로부터 순교자로 이해돼 왔다. 비록 배에서 내려 복음을 전한 적은 없지만 그가 선교를 목적으로 왔고, 죽으면서 넘겨 준 성경으로 인해 여러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는 기록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여기에 대한 도전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이만열 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가 1985년 ‘한국교회사특강’에서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평가하는 것에 강한 이의를 제기한 이후 올 6월 옥성득 박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자들이 동조하고 나섰다.

 

토마스 목사의 제너럴 셔먼호 승선을 제너럴 셔먼호의 입국과정 및 입국 후 행동과 동일시해, 중무장을 하고 불법으로 들어온 제국주의 침략선인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온 사람이 어떻게 선교사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연한 논리로 순교자일 수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토마스 목사가 죽으면서 성경을 전해고, 이로 인해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나타났으므로 순교자로 봐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것이 기록된 역사적 사료에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참고로 이들은 이만열을 비롯해서 김승태, 한규무, 김명호, 옥성득 등 한국기독교역사학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굳이 분류한다면 상대적으로 진보적 계열의 민족주의적인 국사학자들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기독교사연구소(소장 박용규)가 5일 서울 사당동 총신대 종합관에서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열고 다수의 발제자를 통해 ‘토마스 목사는 순교자로 봐야 한다’며 반박에 나섰다.

 

이날 발제에 나선 박용규 교수(총신대),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이은선 교수(안양대) 최상도 교수(호남신대) 등은 복음을 전파하려는 선교 열정을 가지고 왔던 점이 다른 요소들로 인해 제대로 평가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박용규 교수는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적 사고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면서 “그러나 그런 제국주의적 영향 때문에 토마스의 입국이 선교적 동기가 아니라거나 그의 활동이 선교활동이 아니었다거나 그의 죽음이 순교가 아니라는 주장은 상당히 주관적 평가며 또 다른 비약”이라고 반론했다.

 

이영식 박사는 “저들은 ‘토마스가 조선에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것은 맞지만, 조선인들은 그것 때문에 토마스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면서 순교를 부정한다”면서 “그러나 이 논리라면 죽이는 측의 동기나 이유가 순교냐 아니냐를 좌우하게 된다. 즉 어떤 선교사가 식인종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사명을 감당하다 죽임을 당한다면, 이 경우도 원주민들의 입장에 의해서만 순교냐 아니냐를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박사는 “또한 저들은 토마스 선교사의 최후의 장면에서 오문환의 증인들을 통한 증언이나 기존의 전통적인 한국교회의 인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데, 별다른 자료 제시 없는 문제제기는 혼란만을 제기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박용규 교수는 “저들은 토마스의 죽음의 극적 장면의 역사성을 문제 삼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표면적인 이유”라면서 “토마스를 침략적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한 힘의 선교의 전형으로 이해하는 이만열-한규무-옥성득의 시각은 공교롭게도 제너럴 셔먼호를 바라보는 진보주의 국사학계의 시각, 심지어 북한의 시각과 상당히 일치한다”고 밝혔다.

 

이에 이은선 교수도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순교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민족주의 사관, 반제국주의사관, 후기 식민주의 사관의 입장”이라며 “선교사적인 관점과 신앙적인 관점과 한국교회의 기원으로서의 관점에서 가지는, 그의 순교로서 참된 의미를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2016.9.6. 당당뉴스/ 이병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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