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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의 발흥과 기독교의 사회개혁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한국을 중국과 러시아의 지배로부터 분리시키고 영국과 미국의 양해 하에보호조약과 합병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일합방 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 “36년 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 황국신민화정책으로 그 통치방법이 변화되어 왔지만 식민지 지배와 수탈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어용사가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틴 대제의 통치에 아부했던 것처럼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일본의 한국 합병을 예찬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양심의 소리는 있었다. “조선합병이라는 글에서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를 잃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손실을 위로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일은 곧 또 하나의 폴란드를 합병한 일이며, 결국 이 먹이를 완전히 소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바랄 수 없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한일합방과 국권의 상실로 한국기독교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어려움 가운데도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간다. 이런 기독교의 활동은 일본 정부로 하여금 한국 개신교인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차가운 눈총을 보내기 시작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안, 밖으로 저항을 하면서 한국 기독교는 한국근대화와 민족계몽을 통한 민족주의 사상의 고취에 크게 기여한다.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본 정부는 통감부를 통해 새로운 학교령을 공포하고 신민지 교육시책을 강요함은 물로 관공립 보통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폐지시키고 사립학교 설립을 인가제로 전환시켜 일제의 관할 하에 두면서 학교 설립을 규제했다. 이에 대해서 한국에 파송 된 선교회는 내용적으로는 비정치화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예찬하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 선교사들은 일본의 한국 통치를 정당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일제의 기독교 탄압의 가속화로 한국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입장은 저항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과 일본의 무력에 의해 수난 당하는 현장을 목도하던 국내의 외국 선교사들 중에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무단정치를 우려하며 그것을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 감리회 소속 케이블 선교사는 1908년에 일제의 무단정치를 폭로하는 한 보고서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다. 일제가 한국기독교에 대해 가했던 폭행과 살해 사건은 일제가 교회를 어떻게 보았으며, 그들이 얼마나 반기독교적 탄압정책을 썼는지를 말해 준다. 일제는 선교사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그들의 선교구에 있는 한인교회들에게 박해를 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지를 전달했고 이와 같은 기독교 박해는 통감부가 설치된 후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105인 사건은 대부흥 운동을 거치면서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한국기독교가 일본 식민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적 반정부 단체라는 일제의 인식에서 기인되었다. 한국 선교의 개척자 제임스 게일이 전환기의 한국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은 정치적 존재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선교사들의 세계에서는 제일류의 세력으로 인정받을 만큼 세계 기독교계로부터 주목 받는 대상이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1909년 백만인 구령 운동을 통해 세계 선교지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놀랍게 성장한 데다 신학교 설립, 노회와 총회의 설립 등으로 하나의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큰 세력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1884년 알렌에 의해 시작된 한국선교가 과거 지배권 쟁탈을 다투는 강대국들의 포성이 두 번이나 진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25주년이 지난 후 “1910년대의 기독교는 정립된 종교요, 기독교회는 큰 능력을 내포한 민족적 기관으로발돋음한 것이다.

 

3·1운동 당시 마침 극동을 방문, 현장을 확인한 블랜드가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지적한 것처럼 3·1운동은 일본의 무단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민족국가의 출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선언에 자극 받아 일어난 한국 민족의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결집력은 민족 종교와 같은 특징을 지닌, 민족의 자유,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기독교에서 나왔다.

 

3·1운동 이후, 제임스 부컬크가 말한 반기독교 운동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여 1922년에 정점에 달했던 것이다. 특히 반 기독교적 성격을 지닌 휴머니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발흥으로 젊은이들 사이에는 반기독교적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었고,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젊은이들과 기성세대의 충돌, 자유결혼, 여권운동,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가 중요한 시재적 현안으로 부사했다. 또한 경제 공항으로 젊은이들의 심리상태는 극도로 불안했고,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어 교회의 영적침체가 더욱 심화 되었다. 더구나 진화론과 고등비평의 유입으로 전통적인 창조론과 성경관이 일대 도전을 맞기 시작했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조직된 조선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 김장호의 자유주의 사건은 그 전형적인 예다. 3년간의 미국 연구를 마치고 1912년에 돌아온 연희전문학교의 벡커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 청년들 사이에는 격세의 감을 느낄 정도로 커다란 사상적 변화가 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사조들의 유입과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는 일본의 한국 식민정책 속에서 교회는 이러한 대내외적인 문제들에 대처해야 했고, 동시에 변천하는 사회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적응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중적인 사명을 부여받았다.

 

한일합방 이후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되자 한국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인 소망 대신 종교적인 소망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한국교회에는 사회적인 책임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신앙을 내향화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교회에는 세대주의 종말론이 놀랍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성경 중심의 기독교가 더욱 강조되었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발흥은 한국의 개신교, 특히 선교를 주도했던 장로교, 성경교, 대한기독교, 동양선교회 등의 신앙을 타세적인 신앙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보의 아니게 하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3·1운동의 전후로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와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처럼 교회 밖으로부터의 기독교 비판이 강하게 일어나던 그 즈음, 교회 내부에서도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강한 도전이 일어났다. 그것은 자유주의 도전과 이단의 발흥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의 사회 경제적 혼란, 3.1운동의 실패,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발흥, 일제의 통치에 편승하는 어용 교단의 출현 등 끊임없이 계속된 사회적 혼란을 틈타 자유주의와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고 주류에서 벗어난 수많은 종파들이 태동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등장한 이단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마치 예일 대학의 교회사가 시드니 알스트롬이 그의 저서 미국의 종교사에서 미국 제 2차 대각성운동 이후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하는 그 시대를 가리켜 이단의 전성시대라고 명명했던 것과 같은 시대상이 출현한 것이다. ”

 

1919, 브라운은 자신의 극동의 정복에서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경을 사랑하고 구령의 열정에 불타고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교회라고 인정하면서도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사회적 적용에 비교적 무관심하고, “교회의 사상이 내세에 고정되어 있으며, “현 세상은 너무도 완전히 상실되어 이 세대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브라운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 선교사에게 사회 개혁의 방식에 대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질문하자 그는 전혀 못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에 너무 바쁩니다.” 라고 답변했다. 브라운은 한국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가 선교사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191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고 있었다. 원산부흥운동과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이어 진행된 백만인 구령 운동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를 주도했던 교회의 모습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1917년 춘원이 한국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촉구했고, 1922년 이후 동아일보가 사설을 통해 이 문제를 끊임없이 환기시켰으며, 1928년 예루살렘 국제 선교협의회에서는 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1918년 남감리교가 사회신경장정을 편입시켰고, 1920년 장감연합공의회는 사회봉사실현 프로그램을 확정했으며, 1912년에는 만주와 조선 주재 장로교 선교사 100명이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5일 간 회합을 갖고 조선인 교역자의 미국 유학 프로그램을 논의했고, 1925년에는 조선야소교 연합공의회에 사회부를 상설했고, 1·932년에는 사회신경을 채택했다. 그 시대 속에서 이와 같은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의식은 교회의 기독교문화 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전기가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간접선교와 직접선교의 균형의 필요성을 재인식한 것이다.

 

이렇듯 한국장로교회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도전, 교회 밖으로부터의 비판, 교회내부로부터 이단의 도전을 받고 있는 동안 한국에 파송 된 선교사들 가운데 특히 평양 주재 선교사들과 서울 주재 선교사들 사이에 뚜렷한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고 있었다. 이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곳에 학교를 옮기는 문제와 교단의 색이 반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교회와 사회의 계몽운동, 절제운동, 농촌운동, 진흥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에 이르러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로부터 시작된 영적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으로 한국교회는 엄청난 양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이와 함께 청소년운동과 주일학교운동에 관심을 갖기에 이른다. 이는 젊은이들을 깊은 영적 잠에서 깨워서 교회와 사회에 위대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복음 본래의 성격들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운동은 YMCA, YWCA등이 주도해 나갔다. 한편 주일학교도 활성화 하여 아이들 신앙교육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방학 중에 수련회를 통해서 이들을 교육하였다. 이밖에도 출판문화운동, 대 사회사업운동을 전개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 운영을 하였고 나환자들과 폐결핵 한자들을 위한 수용소와 병원의 설립 운영과 같은 사회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는 한국교회가 사회 속에서 단순히 복음만 전한 단체가 아니라 복음을 통한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책임의 실천을 통해 사회와 문화 속에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하나의 장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대 대사회적인 책임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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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예배를 향하여

 

개혁주의 예배관 / 개혁주의를 말하다

이성호 교수

 

1. 서론: 예배의 대상이신 삼위 하나님

예배의 현장에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예배를 드리는 그의 백성이 존재한다. 둘 중에 누가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온전한 예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오늘날 예배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예배를 받는 분에 대한 논의는 진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마치 예배를 받는 분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배를 받는 분에 대한 논의가 없으니 예배학이 하나의 인간학이 되어 버린다. 예배학이 범주 상 신학에 속한다면 예배의 주된 관심사도 예배를 받는 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예배와 나쁜 예배를 나누는 기준도 내가 얼마나 예배 속에서 은혜를 받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나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는가?”가 되어야 한다. 또한 예배학에 있어서 핵심 질문도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릴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예배를 받으시는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를 거짓 종교와 구분 짓는 핵심교리이다. 이 교리가 이해하기 힘든 교리라고 해서 아예 제쳐 놓아서는 안 된다. 비록 이해하고 설명하기는 힘들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체험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예배는 그것을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이다. 예배의 부름 속에서 삼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당신이 베푸신 잔치로 초대하시고, 우리는 송영을 통하여 그 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삼위 하나님은 설교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분에게 찬송과 기도로 응답한다; 삼위 하나님은 성찬 속에서 굶주리고 배고픈 우리의 영혼에게 참된 양식과 음료를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 양식을 받아 먹는다; 삼위 하나님은 축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한다. 예배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예배는 왕이신 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함께 누리는 언약적 친교(covenantal communion)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신학과 예배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된 목적에 대해서 질문한다. 여기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고신교회의 진정한 고백이라면 예배는 교회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위치한다. 참된 예배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소교리문답이 가장 첫 질문에서 예배가 신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라는 것을 두드러지게 교회에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교리문답은 교리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교리 혹은 신학은 예배를 위해서 존재한다.

 

신학과 예배는 분리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예배가 신학이고, 신학이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을 테오로기아(theologia)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theos)’(logos)’의 합성어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혹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로 번역될 수 있다. 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예배야 말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들은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으로 응답하기 때문이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신학은 이성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예배는 경험적 혹은 체험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신학적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보다 분명하고 풍성한 이해를 가지고 예배에 임하게 되고, 그 예배의 결과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신학에 대하여 보다 굳건한 확신을 얻게 된다.

 

예배가 본질적으로 체험적이기 때문에 올바른 신학적 작업이 없다면 원래의 순수성에서 벗어날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다. 이것은 성경 자체가 그렇게 증거하고 있고, 교회 역사 속에서도 입증되어 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의 늪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하였으며, 신약 이후의 교회에서도 순수한 예배 속에 세속적인 누룩이 항상 침투해 들어 왔다. 중세 로마 교회가 교리적으로 타락했을 때, 문제는 교리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타락으로 이어졌다. 만약 교리 자체만이 신*구교 사이에 문제였다면 종교개혁은 단지 교리의 개혁으로 끝났을 것이고 교회의 분열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개혁파 교회가 출현하게 된 결정적이 이유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고 싶은 거룩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전의 예배 형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예배가 교회에서 드려지게 되었고, 참 성도는 그 예배 안에서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3. ‘오직 성경과 예배

 

일반적으로 종교개혁 당시 카톨릭과 개신교의 근본적인 교리의 차이를 이신칭의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들은 성찬에서 찾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그룹의 본질적인 차이는 권위에 관한 것이 분명해졌다. 개신교의 교리가 맞는지 아니면 로마교회의 교리가 맞는지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최종 권위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사소한 교리적 문제도 해결될 수가 없었다. 두 그룹이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최종 권위에 대한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 두 그룹은 모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으나 카톨릭은 성경의 충분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인정하였다. 반대로 개신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충분하며, 모든 종교적 논쟁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데, 언뜻 보면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원리 때문에 두 교회가 결국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직 성경은 특별히 예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개혁교회는 이전에 전통의 이름으로 관습화되어 왔던 예전들을 비평적으로 검토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거나 부족한 것이 있으면 철저하게 개혁을 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개혁교회의 예배는 철저하게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예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개혁교회의 예배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성경에 충실한 예배라고 할 수 있겠다. 개혁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 예배를 교회 안에 올바르게 정착시키기 위한 긴 투쟁의 역사였다.

 

4. 규범적 원칙(Regulative Principle): 개혁교회 예배원리의 독특성

 

오직 성경의 원칙을 교회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특히 이것은 예배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였다. 개신교 교회가 모두 오직 성경의 원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각 교파들 사이에 예배는 다양성이라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루터파와 개혁파의 예배가 다르고, 개혁파와 재세례파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이 말은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을 각 교파마다 달리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파의 경우 성경의 명시적인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는 한 성경이 허용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 결과 루터파는 성경의 가르침과 상충하는 로마교회의 화체설은 거부하였지만 로마 교회의 성만찬 예식은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편 재세례파의 경우에는 성경이 직접적으로 명령한 것만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성경에서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가르침이 없는 유아세례는 예배에 있어서 거부되었다. 반면, 개혁파는 성경이 명시적으로 명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성경의 전체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고,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추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필연적이고 선하다면 성경의 가르침으로 인정하였다. 유아세례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 특히 언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나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예배에 대한 논쟁은 영국교회에서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영국교회의 교권주의자들은 예배의 일치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영국교회는 영국 안의 모든 교회들이 따라야 할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작성하였다. 이름과 달리 이 책 속에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예배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예배 형식에 관한 세세한 규정을 담고 있는데 영국교회의 머리라고 불린 영국 왕들은 모든 영국교회 회원들이 이 책의 규정에 따라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엄하게 명하였다.

 

공동기도서는 내용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반성경적 혹은 비성경적 예배를 배척하였고, 심지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대륙의 개혁교회의 영향을 많이 반영하기도 하였지만, 보다 더 철저하게 예배가 개혁되기를 원하였던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이들은 청교도라고 불렸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공동기도서의 가장 큰 문제는 개 교회의 자유가 박탈당하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청교도는 성경이 명시적으로 규정한 것만이 신자의 양심을 구속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개 교회의 자유에 맡겨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규범적 원칙이라고 하는데,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모토가 예배의 영역에 적용된 것이다.

 

예를 들어 성직자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는 성경에서 침묵하고 있는 비본질적인 영역(아디아포라)이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각 교회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각 교회에 주신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반면 영국교회 지도자들은 각 교회에 그와 같은 자유가 주어지게 되면 교회의 가시적 일치가 상실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기 때문에 성경과 명백히 상충하지 않는 한 비본질적인 문제는 교회의 지도자, 보다 구체적으로 주교회의에 의해 결정되어 통일성 있게 실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예배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을 하였고 마침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예배모범에서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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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기독교 전파와 초기 수용자들

 

 

·하층 중심 전도가 기독교 대중화 이끌어

 

한국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을까? 한국의 천주교는 양반중심의 공동체로 출발하였으나 조상제사 금지와 신해박해(1791)를 거치면서 차츰 중인층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문규현에 따르면 1784년부터 1791년에 이르는 기간 활동했던 권일신을 비롯한 12명의 지도층 인사 가운데 3분의 2가 양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791년부터 1801년 사이 활동했던 38명의 지도층 인사들 중 중인계급이 21명으로 55%에 달했으나 양반은 9명으로 24%에 지나지 않았다. 양반 중심의 구성이 점차 중인계급으로 이동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개신교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기독교(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주로 중산층과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점은 일본과도 대조를 이룬다.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지식층이라 할 수 있는 무사(武士) 계급으로 유입돼 주지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기독교는 중·하층민으로 유입돼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점차 상승운동을 통해 상류층으로 확산됐다. 물론 소수 엘리트 그룹의 기독교 영입운동이 없지 않았고, 이들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상류층보다 중·하층민이 타깃

 

이런 점은 당시 선교정책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장로교선교공의회는 1893년에 모인 첫 회합에서 네비우스 정책에 기초한 10가지 선교정책을 채택했다. 이 문서는 한국에서의 기독교 전수통로(transmission)에 대한 선교사들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 중심 사상은 제1항에서 명시하듯이 상류층보다 하류층을 일차적인 전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모든 종교서적은 한글로 출판한다는 점이었다. 성경번역도 그러했다. 천주교는 처음부터 국·한문 혼용 성경을 발간했으나 개신교는 처음부터 순한글로 성경을 번역해 한문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물론 점차적으로 상류층의 입교자가 생겨났지만 처음부터 중·하층민이 선교의 주된 대상이었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도 양반층보다는 전도가 비교적 용이한 중·하층민에 우선권을 두었다. 이것은 당시 보편화된 유가적(儒家的) 가치체계에서 불가피한 모색이었을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도 제목 중심의 간명한 설교가 중심을 이루고, 많은 예화가 사용되었던 것은 교회 구성원의 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구스타프 바르넥은 특정 계층을 주된 선교 대상으로 하는 것은 건전한 국민층(die gesunden Volkselemente)’ 교회를 설립할 수 없다 하여 이상적인 정책일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으나 한국에서의 경우 중·하층민 중심의 교회가 상당한 성장을 가져왔다. 이는 한국에서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1세기 기독교에서도 동일한 상황이었다(고전 1:2629 참고). 독일의 파피루스 학자인 아돌프 다이스만(Adolf Deissmann)은 초기 기독교는 절대 다수의 하층민들로 구성된 교회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에 따르면 어떤 집단의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은 그 집단의 종교적 성향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는 하층 계급의 집단일수록 새로운 사상, 이념, 종교에 보다 수용적이라고 분석했다. 그것은 새로운 이념이나 가치를 통해 신분 상승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기독교 신앙은 사회적 신분 상승을 추구하는 하층민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평양을 비롯한 관서지방이 서울·경기 등 중부지방보다, 서울·중부지방이 경상도나 전라도보다 복음에 대해 더 수용적이었던 것은 그 지역의 사회적 신분집단과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 근대화와 자주독립의 도구

 

초기 한국에서의 기독교 수용은 중·하위 계층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소수 엘리트 계층의 기독교 영입운동이 없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들이 주로 개화지향적 민족자강론자들이었다. 급진 개화론 혹은 온건 개화론(東道西器論)의 전통을 잇는 이들은 기독교를 서구문화에 대한 도관으로 보아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고자 했다. 이런 인식은 청일전쟁(189495) 이후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기독교를 근대성(modernity) 혹은 문명의 기호(a sign of civilization)로 인식했다. 이런 인물이 서재필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같은 엘리트들이었다.

 

기독교를 통해 입헌민주국가를 건설하고,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된 이후에는 자주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보았던 이들도 기독교를 도구로 인식했다.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을 중심으로 설립된 독립협회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독립협회는 다수가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었고 안창호, 길선주 등은 평양지부에 속한 인물이었다. 189811월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중심인물이 투옥되었는데, 이들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승만 이상재 이원긍 신흥우 김정식 등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들 외에도 개화지향적인 혹은 민족자립과 독립을 추구하던 조만식 김구 등 다수의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한국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대표적인 두 집단은 다수의 중·하위 계층과 개화지향의 민족자강을 추구하는 엘리트 그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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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개신교의 예배

 

개신교에서 예배(Service of worship)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매우 중요한 기독교 의식 중 하나이다. 정기적으로 혹은 비정기적으로 행해지며, 가정 예배 또는 기도 모임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목사나 전도사와 같은 성직자들의 인도 아래 교회에서 시행된다. 평신도들이 예배를 이끄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는 않지만, 교회의 질서유지를 위해 특히 축복기도는 목사, 강도사(말 그대로 설교의 권한이 있는 개신교 성직자. 한국 장로교회의 경우 일부 교단에서 강도사 고시로 선발한다.)가 한다. 설교의 경우는 교회에 따라 일반 신자도 예배에 설교를 할 수 있는 교회가 있으나, 보통은 전도사 이상의 경우만 설교를 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파별 예배

개혁주의(장로교)

개혁주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절’을 예배의 본질로 삼는다. 개혁신학에서는 예배를 찬송, 기도, 말씀, 헌상, 성례전과 더불어 여섯 가지 은혜의 방도 중 하나로 규정하는데, 다시 말해 예배는 찬송, 기도, 말씀, 헌상 또는 성례전을 모은 종교 의식이 아니라, 다른 은혜의 방도들과는 구별 되는 독특한 의미와 본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정성을 다해 찬송과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성찬에 참여하고 헌금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예배는 찬송, 기도, 말씀, 성찬 등의 모듬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가르치는 교회와 듣는 교회를 구분하는 로마 가톨릭과는 달리 개혁교회는 그러한 구분이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여기며[1] 개인도 혼자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럿이서 모여서 공적인 예배를 할 때엔 예배 식순을 따르기도 한다. 개혁신학의 예배론의 독특한 점은 예배에 허용되는 형식이나 내용이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이다.

루터교

루터교에서는 종교 개혁의 전통에 따라 예전적 예배를 드리는데, 루터교 예전은 입당성가, 본기도(공적인 기도), 죄의 고백과 사죄 선언, 영광송, 성서독서(루터교의 성서독서는 제1독서/구약성서와 제2독서/서신서로 구분된다. 사용하는 성서정과는 RCL/개정성서정과에 근거하며 목사가 담당한다.), 층계성가(제1독서와 복음서 독서사이의 성가), 찬양의 화답, 복음서 독서, 신앙고백(사도신경), 설교, 감사의 예물, 성찬(루터교의 성찬전례는 루터교 목사에 의해 제단에서 집전되며, 로마 가톨릭교회와 성공회의 성찬전례처럼 면병과 포도주가 거룩해지도록 축성하고, 예수의 성찬제정을 재현하는 성찬기도, 쌍투스(Sanctus, 거룩하시다)성가, 하나님의 어린양(Agnus dei)성가, 시므온의 성가, 면병과 포도주를 받음,감사의 기도로 구성된다.)와 축복기도를 거친 뒤, 마지막으로 주님을 섬기라는 권고와 신도들의 감사 응답으로 구분된다. 말씀과 성례전을 은혜의 방도로 이해하는 루터교의 교리에 있어서 성만찬은 은혜의 방도로서 지닌다고 가르친다. 루터교에서는 교회력에 따른 성서정과를 사용한다.

감리교

감리교에서는 공식적으로 교회력에 따른 성서정과와 감리교 예배서에 나온 예배양식에 따라 예전적 예배를 집례한다. 이는 감리교가 존 웨슬리 신부의 복음주의 운동으로 성공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회이기 때문이다. 감리교 예전은 크게 말씀중심의 예전(‘하나님 앞에 나와 옴’, ‘말씀의 선언’, 감사와 응답, 세상으로 나아감)과 말씀과 성만찬이 함께 있는 예전(하나님 앞에 나와 옴’, ‘말씀의 선언’, 감사와 응답, 성만찬, 세상으로 나아감)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반적인 개신교회의 예식 순을 사용하는 교회가 적지 않은 편이기도 하며, 찬양 예배도 도입되어 있다.


예배 구분

형태에 따른 구분

현재 대한민국의 개신교회에서 드려지고 있는 예배는 크게 ‘일반 예배’와 전반부에 찬양을 중심으로 인도하는 ‘찬양 예배’로 나눌 수 있다. 다음은 두 종류의 예배를 대략적인 순서로 나타낸 것이다.

일반 예배
•묵상 기도 (묵도, 조용한 기도)
•사도신경
•찬송
•교독문
•송영 (맞이)
•기도
•성경 봉독
•찬양 (성가)
•말씀
•찬송
•헌금
•새신자 소개 및 광고
•찬송 (또는 송영)
•축도 / 주기도문

찬양 예배
•찬양 (20분 ~ 1시간)
•기도
•(특송)
•성경 봉독
•찬양 (성가)
•말씀
•헌금
•새신자 소개 및 광고
•찬송
•축도 / 주기도문

참고: 교파, 시간, 장소, 예배의 특성에 따라 순서가 바뀌거나 특정 순서를 생략하거나, 특별히 순서가 더해질 수 있다.

목적에 따른 구분

교회 안의 예배

형태적 구분 말고도, 예배가 어떠한 시간에, 어떠한 목적으로 드려지는가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주일 본예배
•주일 학교 예배 : 유치부 (유아부), 유초등부 (초소년부), 중고등부 (청소년부), 청년부로 구성되며 각 계층의 수준대로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구성되는 예배를 말한다.
•주일 저녁예배
•영어 예배
•수요 예배 : 낮, 저녁 두 번 드리는 경우가 있다.
•청년찬양예배 : 토요일이나 주일 오후에, 청년이나 청소년들의 감성에 맞는 찬양을 중심으로 운영함으로써, 좀 더 새롭고 헌신적으로 청년들에게 도전할 목적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찬양 예배의 형태로 운영된다.
•금요 철야 : 과거에는 말 뜻 그대로 금요일 밤에 예배를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에 마쳤으나 현재는 금요일 밤에 시작하여 자정 전에는 모두 마친다. 기존 예배의 형태보다는 부흥회 형식으로 빠른 박자의 찬양과 약간의 설교, 그리고 개인 기도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보통 교회들은 개인 기도 중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직접 한 사람씩 기도해 주시기도 한다.
•새벽 기도 : 거의 매일 새벽마다 드리는 기도 모임 형태의 예배이다. 기존 예배의 형태로 드려지며, 특별히 예배가 끝난 뒤에 기도가 많이 이루어진다.
•부흥회 ◦전도 부흥회
◦신유 부흥회
◦심령 부흥회 : 대부분의 부흥회가 취하는 형태이다.

•사경회 : 특정한 일자에 모여서 말씀을 공부하는 모임이다. 교파에 따라 교회들이 연합하여 하기도 한다.
•심방 예배
•특별 예배 ◦결혼식 : 교회에서 결혼할 때 드리는 특별 예배이다. 다만, 이 경우엔 보편적으로 신랑과 신부 두 명 모두 개신교 신자여야만 한다.
◦장례식
◦세례식 : 유아 세례와 일반 세례가 있으며 유아 세례는 아기의 부모님이 모두 교회를 다니거나 하여 부모의 믿음대로 목사님이 직접 세례를 집전한다. 일반 세례는 초신자가 교회에 등록하여 일정한 시기가 되면 받는 세례를 받는 것을 말한다.
◦임직식 : 교회의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과 교회 내 기관장 등을 임명하는 예식이다. 연회에서 교회들을 통솔하는 자 (감독)에게 주는 경우도 있다.
◦안수례 : 일정한 자격을 거쳐 목사로 적임하다고 판단된 사람들에게 기존 목사가 새 목사에게 안수하고 임명하는 예배이다.
◦은퇴식 : 일정한 시기를 넘은 목사 등의 교역자, 장로들이 적령한 연령을 넘어 은퇴하게 되었을 때 치르는 예식이다.
◦헌당 예배 : 교회 건축이 끝났을 때 드리는 예배이다.
◦파송 예배 : 교회 밖으로 선교사나 교역자를 어떠한 지역으로 파송할 때 드리는 예식이다.

•수련회 : 교회에서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을 훈련하고 쉼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하여 교회를 벗어나 다른 곳에서 (주로 2박 3일 ~ 3박 4일간) 하는 집회. 새벽, 아침, 밤에 부흥회 스타일의 말씀과 집회가 이루어지며, 그 외의 시간에는 수련회의 성격에 따라 훈련 시간이나 휴식 시간을 가진다.

교회 밖의 예배

아래에서 뜻하는 ‘교회 밖의 예배’는 ‘장소’를 뜻하는 것이 아닌 교회 이외의 단체가 드리는 예배를 뜻한다.
•개강 예배 : 미션 스쿨에서 개강할 때마다 여는 예배.
•개강 부흥회 : 신학교에서 개강할 때마다 신학생들의 영성을 돕기 위해 여는 부흥회.
•채플 : 미션스쿨이나 신학교에서 학생들의 경건을 위해 강제적으로 드리게 하는 예배. 기존 형태와 찬양 예배의 형태가 섞여 있다.
•가정 예배 : 가정에서 날마다 경건한 생활을 위해 아침이나 밤에 드리는 예배이다.
•모임, 또는 집회 : 예수전도단 화요모임, 올네이션스 목요 모임, 마커스 목요 모임 등의 경우에 해당된다. 이 경우 예배 중에 찬양사역자들이 작곡한 새로운 찬양들이 잇달아 나오는 것이 특징이며, 따라서 경배와 찬양 운동을 이끄는 선교 단체 형태의 단체들이 주로 드리지만, 일반 지역교회(삼일교회나 제자교회의 경우)에서도 찬양 사역자들을 중심으로 드리는 경우가 있다. 예배 중 가장 파격적인 형태 (찬양-말씀-헌금-광고-기도)로 이루어지며, 서울 지역의 경우,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된 예배 장소는 교회이지만 간혹 특별히 별도의 목적으로 이 예배를 대규모로 기획할 경우 대형 체육관을 빌려 모두 일어선 상태로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이런 집회의 경우 말씀 선포와 찬양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모임에서 이루어진 찬양이 음반으로 출시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찬양 집회 : 예배 형태는 위의 ‘모임’과 같다. (찬양-말씀-헌금-광고-기도) 다른 점은 찬양집회는 각 교회 청소년부(중등부, 고등부 또는 중고등부)나 미션스쿨의 기독 동아리에서 한 해에 한 번(많으면 두 번) 정도 특정한 주제를 갖고 드리는 예배이다.
•연합 수련회 : 수련회의 형태와 비슷하나 여러 교회의 성도나 선교단체에 소속된 사람끼리 모여 말씀과 찬양을 통해 자신을 수련하는 모임이다. CCC의 경우는 연말에 금식 수련회를 개최하기도 하며, 선교한국과 같이 특정 목표를 위하여 선교단체들이 연합한 수련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성회 : 특정 주제를 가지고 교회나 공공시설을 빌려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 형태의 예배. 부흥회와 비슷하지만 찬양예배와 비슷하게 말씀과 찬양의 비중이 높은 편이며, 은사주의 사역자들이 이용하는 형태이기도 하다.

각주
1. 자주 인용되는 구절들로 요한복음 4:23 및 9:37,3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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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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