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의 발흥과 기독교의 사회개혁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한국을 중국과 러시아의 지배로부터 분리시키고 영국과 미국의 양해 하에” 보호조약과 합병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일합방 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 “36년 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 황국신민화정책으로 그 통치방법이 변화되어 왔지만 식민지 지배와 수탈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어용사가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틴 대제의 통치에 아부했던 것처럼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일본의 한국 합병을 예찬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양심의 소리는 있었다. “조선합병”이라는 글에서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를 잃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손실을 위로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일은 곧 또 하나의 폴란드를 합병한 일이며, 결국 이 먹이를 완전히 소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바랄 수 없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한일합방과 국권의 상실로 한국기독교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어려움 가운데도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간다. 이런 기독교의 활동은 일본 정부로 하여금 한국 개신교인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차가운 눈총을 보내기 시작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안, 밖으로 저항을 하면서 한국 기독교는 한국근대화와 민족계몽을 통한 민족주의 사상의 고취에 크게 기여한다.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본 정부는 통감부를 통해 새로운 학교령을 공포하고 신민지 교육시책을 강요함은 물로 관공립 보통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폐지시키고 사립학교 설립을 인가제로 전환시켜 일제의 관할 하에 두면서 학교 설립을 규제했다. 이에 대해서 한국에 파송 된 선교회는 내용적으로는 비정치화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예찬하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 선교사들은 일본의 한국 통치를 정당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일제의 기독교 탄압의 가속화로 한국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입장은 저항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과 일본의 무력에 의해 수난 당하는 현장을 목도하던 국내의 외국 선교사들 중에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무단정치를 우려하며 그것을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 감리회 소속 케이블 선교사는 1908년에 일제의 무단정치를 폭로하는 한 보고서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다. 일제가 한국기독교에 대해 가했던 폭행과 살해 사건은 일제가 교회를 어떻게 보았으며, 그들이 얼마나 반기독교적 탄압정책을 썼는지를 말해 준다. 일제는 선교사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그들의 선교구에 있는 한인교회들에게 박해를 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지를 전달했고 이와 같은 기독교 박해는 통감부가 설치된 후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105인 사건은 대부흥 운동을 거치면서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한국기독교가 일본 식민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적 반정부 단체라는 일제의 인식에서 기인되었다. 한국 선교의 개척자 제임스 게일이 전환기의 한국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은 정치적 존재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선교사들의 세계에서는 제일류의 세력”으로 인정받을 만큼 세계 기독교계로부터 주목 받는 대상이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1909년 백만인 구령 운동을 통해 세계 선교지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놀랍게 성장한 데다 신학교 설립, 노회와 총회의 설립 등으로 하나의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큰 세력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1884년 알렌에 의해 시작된 한국선교가 과거 “지배권 쟁탈을 다투는 강대국들의 포성이 두 번이나 진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25주년이 지난 후 “1910년대의 기독교는 정립된 종교요, 기독교회는 큰 능력을 내포한 민족적 기관으로” 발돋음한 것이다.
3·1운동 당시 마침 극동을 방문, 현장을 확인한 블랜드가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지적한 것처럼 3·1운동은 일본의 무단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민족국가의 출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선언에 자극 받아 일어난 한국 민족의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결집력은 “민족 종교와 같은 특징을 지닌, 민족의 자유,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기독교에서 나왔다.
3·1운동 이후, 제임스 부컬크가 말한 “반기독교 운동”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여 1922년에 정점에 달했던 것이다. 특히 반 기독교적 성격을 지닌 휴머니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발흥으로 젊은이들 사이에는 반기독교적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었고,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젊은이들과 기성세대의 충돌, 자유결혼, 여권운동,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가 중요한 시재적 현안으로 부사했다. 또한 경제 공항으로 젊은이들의 심리상태는 극도로 불안했고,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어 교회의 영적침체가 더욱 심화 되었다. 더구나 진화론과 고등비평의 유입으로 전통적인 창조론과 성경관이 일대 도전을 맞기 시작했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조직된 조선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 김장호의 자유주의 사건은 그 전형적인 예다. 3년간의 미국 연구를 마치고 1912년에 돌아온 연희전문학교의 벡커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 청년들 사이에는 “격세의 감”을 느낄 정도로 커다란 사상적 변화가 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사조들의 유입과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는 일본의 한국 식민정책 속에서 교회는 이러한 대내외적인 문제들에 대처해야 했고, 동시에 변천하는 사회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적응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중적인 사명을 부여받았다.
한일합방 이후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되자 한국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인 소망 대신 종교적인 소망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한국교회에는 사회적인 책임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신앙을 내향화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교회에는 세대주의 종말론이 놀랍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성경 중심의 기독교가 더욱 강조되었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발흥은 한국의 개신교, 특히 선교를 주도했던 장로교, 성경교, 대한기독교, 동양선교회 등의 신앙을 타세적인 신앙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보의 아니게 하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3·1운동의 전후로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와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처럼 교회 밖으로부터의 기독교 비판이 강하게 일어나던 그 즈음, 교회 내부에서도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강한 도전이 일어났다. 그것은 자유주의 도전과 이단의 발흥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의 사회 경제적 혼란, 3.1운동의 실패,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발흥, 일제의 통치에 편승하는 어용 교단의 출현 등 끊임없이 계속된 사회적 혼란을 틈타 자유주의와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고 주류에서 벗어난 수많은 종파들이 태동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등장한 이단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마치 예일 대학의 교회사가 시드니 알스트롬이 그의 저서 미국의 종교사에서 미국 제 2차 대각성운동 이후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하는 그 시대를 가리켜 “이단의 전성시대라고 명명했던 것과 같은 시대상이 출현한 것이다. ”
1919년, 브라운은 자신의 극동의 정복에서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경을 사랑하고 구령의 열정에 불타고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교회라고 인정하면서도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사회적 적용에 비교적 무관심”하고, “교회의 사상이 내세에 고정”되어 있으며, “현 세상은 너무도 완전히 상실되어 이 세대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브라운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 선교사에게 “사회 개혁의 방식에 대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질문하자 그는 “전혀 못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에 너무 바쁩니다.” 라고 답변했다. 브라운은 한국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가 선교사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191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고 있었다. 원산부흥운동과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이어 진행된 백만인 구령 운동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를 주도했던 교회의 모습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1917년 춘원이 한국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촉구했고, 1922년 이후 동아일보가 사설을 통해 이 문제를 끊임없이 환기시켰으며, 1928년 예루살렘 국제 선교협의회에서는 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1918년 남감리교가 사회신경장정을 편입시켰고, 1920년 장감연합공의회는 사회봉사실현 프로그램을 확정했으며, 1912년에는 만주와 조선 주재 장로교 선교사 100명이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5일 간 회합을 갖고 조선인 교역자의 미국 유학 프로그램을 논의했고, 1925년에는 조선야소교 연합공의회에 사회부를 상설했고, 1·932년에는 사회신경을 채택했다. 그 시대 속에서 이와 같은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의식은 교회의 기독교문화 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전기가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간접선교와 직접선교의 균형의 필요성을 재인식한 것이다.
이렇듯 한국장로교회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도전, 교회 밖으로부터의 비판, 교회내부로부터 이단의 도전을 받고 있는 동안 한국에 파송 된 선교사들 가운데 특히 평양 주재 선교사들과 서울 주재 선교사들 사이에 뚜렷한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고 있었다. 이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곳에 학교를 옮기는 문제와 교단의 색이 반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교회와 사회의 계몽운동, 절제운동, 농촌운동, 진흥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에 이르러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로부터 시작된 영적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으로 한국교회는 엄청난 양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이와 함께 청소년운동과 주일학교운동에 관심을 갖기에 이른다. 이는 젊은이들을 깊은 영적 잠에서 깨워서 교회와 사회에 위대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복음 본래의 성격들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운동은 YMCA, YWCA등이 주도해 나갔다. 한편 주일학교도 활성화 하여 아이들 신앙교육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방학 중에 수련회를 통해서 이들을 교육하였다. 이밖에도 출판문화운동, 대 사회사업운동을 전개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 운영을 하였고 나환자들과 폐결핵 한자들을 위한 수용소와 병원의 설립 운영과 같은 사회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는 한국교회가 사회 속에서 단순히 복음만 전한 단체가 아니라 복음을 통한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책임의 실천을 통해 사회와 문화 속에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하나의 장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대 대사회적인 책임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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