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설교] 감사하면 행복해 집니다

 

 

 

제목 : 감사하면 행복해 집니다.

말씀 : 마20:1~16

1.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미고사’캠페인을 벌였다고 하는데 참 좋은 캠페인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말은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의 약자인데 참 좋은 말 아닙니까?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스러운 말입니까?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런 말을 잘 할 수 있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따뜻해지고, 사랑이 넘치고, 행복해 지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세상에 이보다 쉬운 일이 어딨습니까?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든지 아무 때나 공짜로 할 수 있고 시간도 1초도 안 걸립니다. 이렇게 돈과 시간과 노력을 안들이고 서로에게 위로와 따뜻함과 평안함과 행복을 주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지난 6개월 동안 가족이나 교우나 직장 동료나 이웃이나 국가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의 말을 하셨는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한번 해 보실까요? ‘성도님,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집사님,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여보,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엄마아빠,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아들아,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세월이 자꾸만 이와는 반대로 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되었으면 이제는 좀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만도 한데 자꾸만 불만의 소리만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툭하면 싸우고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이혼도 쉽게 하곤 합니다. 회사에서도 그만하면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지 툭하면 거리로 뛰쳐나와서 결사항쟁을 외칩니다. 국회의원들은 또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툭하면 머리에 띠 두르고 거리로 나와 난리를 치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 지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감사와 은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꾸 부정적이고 어두운 곳에 포커스를 맞추기 때문입니다. 누리고 있는 은혜는 생각지 않고 자꾸 부족한 것만 생각하고, 자신의 잘못은 생각지 않고 자꾸 남의 탓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얼마나 귀한 존재로 창조되었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뭔가 좀 모자라고 부족한 것만 생각하니까 자존감을 가지지 못하고 열등감속에서 쉽게 상처를 받고 좌절하고 낙심하곤 합니다. 그래서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파서 시기하고 질투를 합니다. 그러니 원망과 불평과 갈등과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들은 정말 나도 불행해지고 남도 불행하게 만드는 심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고 축복해야 하고 서로 격려하고 남이 잘되면 기뻐해야 합니다. 그게 옳은 일이고, 자신도 복을 누리고 남에게도 복을 가져다주는 지혜로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만 그 반대로 하니까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기쁘게 살 수 있는 상황에서도 행복하지 못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살전5:18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그게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길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그 밖의 모든 사회 속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여러분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해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늘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2.감사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늘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가려면 우리의 생각을 감사의 관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감사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감사이지만 불평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불평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먼저 오늘 말씀의 내용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있었는데 포도 수확 철이 되어 이른 아침 즉 해 뜰 때에 장터로 나가 일꾼을 구하여 포도원에서 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손이 부족했든지 제3시 즉 오전 9시에 또 한사람을 불러왔습니다. 그래도 일손이 부족했든지 다시 제6시 즉 정오에 또 한 사람, 그리고 제9시 즉 오후3시에,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심지어 제11시 즉 해지기 한 시간 전에 또 한 사람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후6시에 일을 마치고 품삯을 주기 시작하는 데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 즉 오후5시에 와서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1데나리온 즉 노동자 하루 품삯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먼저 온 사람들은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을 1데나리온이나 주는 것을 보고 그 사람보다 몇 배 더 일한 자신들에게는 적어도 몇 데나리온은 줄 것으로 잔뜩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자기들도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똑 같이 한 데나리온 밖에 안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이 불평불만을 터트린 것입니다. ‘아니, 저 사람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1데나리온을 주고 우리는 그보다 몇 배를 더 일했는데 왜 똑같이 주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당신이 하루 종일 일한대가로 본래 정해져 있는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무엇이 불만이냐?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한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인데 그럼 이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 내가 잘못한 것이냐?’ 그러자 아무소리 못하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불평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일한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뭐가 불만입니까? 남에게 더 주었다고 자기가 손해 봤습니까?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잘못입니까?

여러분, 그러면 이 사람들이 왜 불평을 했습니까? 감사의 관점, 은혜의 관점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정당한 대가를 받았으면 일할 수 있는 터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일을 시켜준 주인에게도 감사해야 하고,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지혜가 있음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고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같은 노동자의 처지에서 주인이 얼마나 고마운 분입니까? 지금도 그런 분들이 계시지만 당시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일할 데가 없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늦게 일할 기회를 얻어서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은혜를 베풀어 한 데나리온을 받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으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들은 자신의 것을 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남이 좀 많이 받는다고 여기며 배가 아파 감사해야 할 일에 불평을 터트린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걸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사에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게 대해서나 감사와 사랑과 은혜의 관점으로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자신도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 되고 남에게 복을 가져다주고 주님도 기쁘게 해드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수없이 감사할 것을 명령하시며 특별히 골3:1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여기에 보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즉 모든 것을 감사의 관점으로 보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감사할 것이 천지고 그러면 감사의 찬양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 따지고 보면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태어나고 먹고 입고 자고 생활하는 것 중에 은혜를 입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있습니까? 부모님과 가족의 은혜 없이 살 수 있습니까? 또 이웃의 은혜 없이 살 수 있습니까? 누누이 말씀 드리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1초도 살 수 없습니다. 부모님과 가족의 은혜 없이도 우리는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저 잘나서 제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 같지만 실상 이웃의 은혜가 없어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평생을 감사하며 살아도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감사거리가 있는데 왜 하필이며 불평불만 거리를 찾아 자기도 힘들고 남도 힘들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매사를 감사의 관점으로 보고 해석하고 적용함으로 자신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주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감사하며 살기 위해서 또 하나 가져야 할 태도는 비교의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찍 온 일꾼들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은 것도 바로 감사의 관점은 없고 남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자신이 적게 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보세요.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 사람에 비해서 나는 일을 많이 했으니까 더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나 자신이나 그보다 몇 배 더 많이 일한 자신이나 똑 같이 받으니까 상대적으로 자신이 손해 봤다는 생각에 그만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평불만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건 전혀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자기는 정당한 대가를 다 받았지 않았습니까?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게 비난 받을 일입니까? 오히려 불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주인에게 존경을 표해야 할 일이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받은 것처럼 여기고 배가 아파 불평이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사람들이 왜 행복하지 못합니까? 이 정도면 잘 먹고 잘 사는데 자꾸 못살겠다고 아우성입니까? 비교의식때문입니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 고생 안하고 호의호식하며 편하게 잘 먹고 잘사는 데 왜 나는 쎄가 빠지게 일해도 맨 날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생각하고, 누구는 신랑 잘 만나서 명품 백 들고 다니며 자랑 질을 해대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이냐고 생각하고, 누구는 똑같이 일하고 한 달에 500만원 받는데 왜 나한테는 100만 밖에 안주냐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불평과 미움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늘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여기며 또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살아가는 태도는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원망과 불평과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싸움의 덫에 걸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론 나나 너나 우리 모두에게 평안과 기쁨은 점점 멀어져가고 결국 모두 함께 불행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뿐인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본래 죄와 무지가운데 있어서 부조리한 현실이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고, 때론 투쟁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그러한 피해의식이나 비교의식을 버리고 먼저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불공평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받은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모든 것을 감사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은 설령 세상이 불공평할지라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고 진실하고 의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혹시 사람은 몰라줄지 몰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솔직히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은 사람들도 알아보고 귀하게 여겨주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공연히 남과 비교하지 오직 믿음 안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모든 상황과 여건을 떠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감사와 기쁨과 가치와 보람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보상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먼저 온 사람들이 불평을 터트린 또 하나의 이유는 보상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은 나중에 온 사람보다 더 많이 일했기 때문에 당연히 더 많은 것을 받아야 한다는 보상심리가 있었는데 그게 좌절되니까 그만 불평을 터트렸던 것입니다. 물론 정당한 보상심리는 악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열심히 일한만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감사와 은혜의 측면은 무시하고 그저 더 많은 것으로 보상 받으려고 하는 왜곡된 보상심리가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불명 불만을 늘어놓은 사람들이 바로 그랬던 것입니다. 10절을 다시 보실까요?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보세요. 그들은 ‘더 받을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덜 주니까 그만 엉뚱한 불만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본래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겁니다. 그러면 지금 그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여건을 주신 하나님께나, 오늘 하루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주인에게나, 또 일을 할 수 있도록 내조해주고 동기부여를 해준 가족들에게나 우선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을 시기하며 자기에게 더 많은 보상을 해주지 않은 주인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자꾸만 더 달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보다는 자꾸만 권리만 주장하기가 쉽습니다. 할 일은 작게 생각하고 받아야 할 것은 크게 생각을 합니다. 내가 남을 대접해 주지 못한 것은 생각지 않고 남이 나를 대접해 주지 않은 것만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왜 때때로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까? 그것은 다른 아닌 비교의식과 보상의식 때문입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저 사람보다 먼저 와서 더 많이 일했다고 여기고, 내가 이 교회를 세우는데 많은 공로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 서운하고 화가 납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 그러면 제가 뭘 얼마나 했다고 하면서 고까운 마음이 듭니다. 나는 이제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네가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이미 보상심리와 공로의식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눅17:10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당연하지 않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려주셔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생명을 바치고 전 재산을 다 바친들 할 만큼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한들 주님의 은혜의 천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나 같은 것 불러 주심에 감사해야 하고, 주님의 일을 시켜 준 것에 감사하고, 내 미약한 힘이나마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데 조금이라도 필요해서 사용할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뿐이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많은 적든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면 불평불만과 갈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국가는 평안하고 행복해 집니다.

그러므로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매사를 감사의 관점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교의식을 버리고 주어진 삶의 자리가 어떤 곳이든 감사와 기쁨으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보상심리와 공로의식을 버리고 무엇이든 우리가 일할 수 있고, 기여할 수 있고, 누구에게인가 도움이 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되새기며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 속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의 자신의 삶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이웃들에게 행복을 주며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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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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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예배 설교] 풍성한 은혜


 

 


제목 : 은혜를 풍성하게 합시다.

말씀 : 고후8:1~7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안 다니는 사람들이나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에서 헌금을 은근히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헌금 때문에 교회 오기를 꺼려하기도 하고 성도들 중에도 헌금으로 말미암아 스트레스를 받거나 때론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사실 돈에 관한 문제는 교회 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상당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친구나 이웃 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형제간이나 심지어는 부모 자식 간에도 돈 문제는 가장 말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도 헌금에 관한 문제는 가능한 회피하고 싶고 가급적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헌금함도 돌리지 않고, 강단에서 헌금하신 분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강단에서 이름을 부르면 헌금한 것을 광고하는 것 같기도 하고 드리지 못한 분은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헌금하신 분을 확인해 드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주보에는 싣고 있습니다. 이렇게 헌금은 이래저래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계속 침묵할 수는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계속 덮고 간다면 직무유기이기 때문에 부득불 말씀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십일조나 기타 헌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순종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입니다. 그래서 신14:22에서는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라고 말씀하셨고, 레27:32절에서는 “모든 소나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 번째의 것마다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고 하셨고, 눅11:42절에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으로 모셨다면 그 말씀에 순종하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곧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종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요 생명이요 은혜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히 하나님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복의 근원이십니다. 분명히 진리이시고 생명이십니다. 따라서 그 말씀 안에 우리가 살길이 있습니다. 복받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 따라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 따라서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릴 줄 아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 할 때에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2.헌금은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헌금의 두 번째 의미는 헌금은 돈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문제요, 믿음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6:21절을 보겠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있는 곳에는 몸도 물질도 시간도 열정도 따라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제 큰 아들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오실 거라고 여겼던 분들 중에 못 오신 분도 계셨습니다. 우리 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물론 다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왠지 좀 서운했습니다. 왜 서운했을까요? 축의금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분들의 저에 대한 마음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가 그들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면 다른 이유를 일단 접어놓고 왔을 터인데 나라는 존재가 그들이 다른 것을 포기할 만큼 크지는 않았기 때문에 못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자녀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농사일이나 기타 다른 모든 일을 젖혀 놓고 가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내 자녀가 농사일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내 삶에 있어서 예수님이 가장 크고 소중하고 가장 사랑하는 존재라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의 다른 모든 일을 젖혀두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우리 몸과 물질과 시간과 열정이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유행가에 보면 무조건이라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가사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당신이 부르면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넘어 무조건 달려가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이 부르면 열일 젖혀 놓고 그곳이 어디든 저 땅 끝까지라도 달려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별도 달도 다따주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지옥까지 따라가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해도 결코 지옥까지는 따라가면 안됩니다.

여하튼 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마음과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마음의 표현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며, 또한 세상의 것은 곧 썩어져 사라지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런 믿음과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몸과 물질과 시간이 그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정녕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이 가지 않겠습니까? 정녕 모든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있다면, 또한 세상의 것은 곧 썩어 없어지는 것이고 저 하늘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그래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산다면 어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그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나를 위하여 생명까지 내어 주신 주님,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주님앞에 드리는 삶을 통하여 주께 영광 돌려드리고 여러분도 진정 자유와 기쁨과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헌금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며, 우리 마음과 믿음의 표현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런 말씀인데요,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한 마게도냐 교인들을 칭찬하면서 고린도교회도 이 은혜에 동참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헌금의 의미를 깨우쳐 주고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은혜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는 은혜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먼저 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또 4절에서는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라는 말씀이 있고, 6절에서는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또 7절에서는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조건없이 베풀어주신 혜택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인들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조건없이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총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됩니다. 구원받은 것 뿐 아니라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인 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되면 또 어떻게 됩니까? 할렐루야 찬송이 나오고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이렇게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되면 또 어떻게 됩니까? 물론 주님을 사랑하고 영광을 돌리고 감사와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귀히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도 힘들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힘껏 헌금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보십시오. 극심한 가난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였다. 힘대로 할 뿐 아니라 도리어 힘에 넘치도록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신들도 어려운데 힘에 넘치도록 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받은 바 너무나 큰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넘치는 기쁨과 감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셨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감사와 기쁨이 없겠습니까? 이런 감사가 있다면 어찌 응답이 없겠으며 어찌 섬김과 헌신과 드림이 없겠습니까? 이런 은혜를 받으면 세상의 것들은 실상 그렇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살아 숨쉬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상의 지식 권세 명예 물질 없어도 그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감사하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그래서 물질 따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드리고 어찌하든지 조금이라도 더 드리고 싶어서 안달이 납니다. 그런 삶에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천국의 은총을 여기서 앞당겨 누리다가 마침내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바로 이런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난 속에서도 정말 기쁨과 감사함으로 힘에 겹도록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받은 자의 모습이요, 이것이 바로 마게도냐 교인들이 받았던 가장 큰 은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은헤중의 은혜입니다. 예수님 믿게 된 것이 은혜중의 은혜요, 예수님 믿고 보니 내 맘속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많이 얻은 것이 은혜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마음 속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차는 것이 진정한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가장 부요한 사람이고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들은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자신을 사용할 줄 아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정말로 마음속으로 영혼속으로 온전히 깊이 깨닫고 느끼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의 심령이 은혜로 가득 채워지고 그래서 심령이 더욱 부요해져서 정말 감사 충만, 은혜 충만, 기쁨 충만한 인생이 되시고 나아가 주님께나 이웃에게도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헌금은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요, 마음을 드리는 것이요, 은혜에 대한 응답이며 나아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드리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그들은 우리가 바라던 것 이상으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그들 자신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주님께 드렸기에 우리를 위해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마음의 문제요, 은혜에 대한 응답의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더 본질적으로는 존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의 소유인지에 대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생명을 주신 주님께 자신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드렸고 자신을 드렸기 때문에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주님께 드렸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명도 시간도 물질도 능력도 지혜도 이성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아니 원래부터 주님의 소유입니다. 이걸 알고 인정한다면 감사와 기쁨으로 헌신과 헌금과 섬김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헌금이나 헌신이 왜 힘이 듭니까?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소유권을 바르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내가 노력해서 내가 열심히 수고해서 내가 번 돈이기에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상29:14절을 보십시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실제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생명, 지혜, 능력, 의지, 육신, 땅, 하늘, 공기, 물 다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이 주시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도 없고 생명을 이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분명한 사실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애써 부인하면서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하지도 못하고 올바르게 사용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농부가 암소 한 마리를 길렀는데 어느 날 송아지 두 마리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가 기분이 너무 좋아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소가 기특하게도 송아지를 두 마리나 낳았어. 그래서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릴 거야.” 신앙이 별로 없던 남편이 그런 소리를 하니까 아내는 기분이 너무 좋아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남편이 이제 믿음이 좀 들었나 봅니다.”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남편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 송아지 한 마리가 죽었어.’ 그래서 부인이 누구 송아지가 죽었느냐고 묻자 남편은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하필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을까요? 우리도 그럴 때가 많지 않을까요? 뭔가 무슨 변명거리를 만들어 일단 내 몫을 먼저 떼어 놓고 주님의 몫에서 제해 버리는 거지요. 그러나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주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생명주신 것을 기억한다면 주님의 몫은 그대로 놔두고 내 몫에서 제해야 되지 않을까요?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조금 무거운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냥 회피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문제요, 신앙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요, 존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무엇에 우선권을 두는지, 무엇을 중요시 여기는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는지를 알려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께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다면, 우리가 누릴 저 영광의 나라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럽고 굉장한 것이라면 감사와 기쁨으로 드릴 줄 아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이 주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은혜로운 마음, 넉넉한 마음, 풍성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세상 누구보다도 부요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주의 역사 이루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진정으로 부요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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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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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감사의 축복

 

 


제목 : 감사의 축복

말씀 : 골2:6,7

1.이미 받은 은혜를 누립시다.

지난 주간에 저는 서울 장신대에 목회자아카데미에 다녀왔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해 주셔서 후원해주셔서 오랜만에 모교에도 가보고 또 교수님과 유명 강사들의 강의를 들으며 영적, 지적 양식을 새롭게 채우는 유익한 시간으로 잘 보내고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가지 새삼스럽게 배운 것이 있는데 역시 내 집이 좋구나하는 것입니다. 물론 내 집도 아니긴 하지만 여하튼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좋구나. 역시 가정이 정말 고마운 곳이구나하는 것들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집 떠나면 철 든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집을 떠나보니 가정과 가족과 특히 아내가 정말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라는 걸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좀 쑥스러웠지만 전화로 좀 더 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말로 했으면 무언가 행동으로 좀 보여주어야겠다 싶어서 오다가 일부러 영천 시내를 한바퀴 돌아 겨우 꽃집을 찾아 빨간 장미꽃을 한 다발 사다가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안하던 짓을 하니까 좀 쑥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주는 마음은 역시 기뻤습니다. 여러분도 아무쪼록 있을 때 잘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이냐, 은혜가운데 있으면 은혜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떤 은혜속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은혜를 느끼지도 못하고 그래서 잘 누리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록 좋은 집이 아니더라도 집을 나가보면 내집이 좋은 줄 알게 됩니다. 비록 진수성찬이 아닐지라도 집 나가보면 엄마가 혹은 아내가 지어주는 밥이 그리워 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공기 좋고 물 맑고 초목이 우거진 아름다운 환경 속에 살고 있을 때는 이게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곳에 있다가 저 광야지대에 한번 나가보십시오. 그러면 그때서야 비로소 이 아름다운 고향산천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존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종종 샤워를 하면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며 속으로 중얼거리곤 합니다. 하루종일 앉아서 설교준비나 기타 사무적인 일을 하다가 좀 끈끈한 몸을 이끌고 들어가서 샤워기를 틀고 물을 뿌리면 얼마나 기분이 상쾌해 집니까? 야, 이렇게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콸콸 나오다니 참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우리나라 좋은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감사하곤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는 너무나 많은 축복속에 살고 있습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생각해 보면 정말 너무나 감사한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너무나 많아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늘 그런 은혜속에 살고 있어서 그걸 모르고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기는커녕 뭐가 그렇게 부족하고 불만인지 맨날 싸우고, 머리띠 띠고 결사 투쟁을 외치고, 파업을 하고, 촛불을 들고 난리를 치는지 정말 저는 안타깝습니다. 이만하면 얼마든지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 수 있는데 왜 그럴까? 왜 이미 주어진 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자꾸만 더 달라고만 아우성을 치는 것일까, 그거 주면 보나마나 또 다른 것 내 놓으라고 난리를 칠텐데 왜 그럴까하며 정말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다고다고 하는 사람은 평생 그러다 죽습니다. 여러분, 이미 주어진 것들을 먼저 감사함으로 누릴 줄 아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세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여러분, 잘 보세요. 그냥 감사하라는 것도 아니고 감사함이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함이 넘친다는 뜻이 뭘까요? 아주 알기 쉽게 말한다면 100원어치를 받았으면 1,000원어치를 감사하고, 1,000원어치를 받았으면 10,000원어치를 감사하라는 뜻이 아니겠어요. 다시 말해 받은 것, 가진 것 그 이상으로 감사하라는 거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100원어치 받으면 1,000원어치 감사는 고사하고 왜 고작 100원어치만 주느냐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100원어치를 받았는데 그 받은 사실 조차도 알지 못한다는 거지요. 이런 사람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은혜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정말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받았습니다. 건강을 받았습니다. 지혜를 받았습니다. 물질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도 받았습니다. 그럼 이제 뭐가 더 그렇게 필요한가요? 이만하면 너무 많이 받은 것 아닙니까? 우리가 받은 것도 사실은 이미 돈으로 환산한다면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것을 받고도 받을 줄도 모르고 도리어 원망하고 불평하고 짜증내며 산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생각해 볼 일) 어떤 집사님 가족이 같은 교회 집사님의 초대로 식당에 가서 저녁 대접을 받게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초대를 받은 집사님은 식사를 하기 전에 정성껏 식사기도를 하였다.

이때 이 모습을 물끄럼이 바라보던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들이 말했다. ‘아빠,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보면 모르니? 감사기도 드리고 있잖아.’ 그러자 아들이 다시 말했다. ‘아빠, 집에서는 안하시면서 여기서는 왜 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야, 넌 그것도 모르니? 우리 집에서 먹는 건 우리 돈 들여서 먹는 거고, 이건 공짜잖아.’ 그랬답니다.

여러분, 사실은요, 다 공짜로 주신 겁니다. 땅도 하늘도 바다도 태양도 비도 내 몸도 내 생명도 물질도 다 은혜로 주신 거지요. 그런데 밥 한그릇 얻어 먹은 것은 고마워하며(물론 그것도 다행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정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받은바 은혜를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여러분은 다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감사는 더 큰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여러분, 감사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게 할뿐더러 더 나아가서는 또 다른 축복을 가져다 준다는 측면에서도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주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두 사람에게 똑 같은 물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걸 그렇게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그걸 잘 활용해서 행복하게 삽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에게 얼마나 더 주고 싶겠습니까? 주는 사람도 신이 나서 자꾸만 주고 싶겠지요.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감사한 줄 모릅니다. 기뻐할 줄도 모릅니다. 도리어 왜 요만큼만 주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하면서 욕심만 많아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에게 주고 싶겠습니까? 주고 싶기는커녕 준 것도 빼앗고 싶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누릴 줄 아는 자에게 주십니다.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은혜를 은혜로 알고 감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이를 고쳐준 사건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와 멀리서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우리를 고쳐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열명의 문둥병자가 다 고침을 받았는데 그들중 아홉명은 예수님께 감사의 말씀도 드리지 않고 집으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한명의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이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8,19)하시며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이 예수님의 은혜로 눈을 뜬 소경은 사실 직접적으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내가 믿노라고 고백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고침을 받고 자신 앞에 엎드려 감사드리고 있는 이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와 믿음을 동일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이건 다시 말하면 감사할줄 모르는 사람은 믿음이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면 어찌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게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셨다는 것을 안다면 어찌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소경되었다가 눈뜬 사람은 감사할 때 그것으로 믿음으로 인정해 주셨고, 그래서 그는 결국 육적 소경에서 뿐만아니라 영적 소경에서도 건짐받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몰랐던 다른 아홉명은 비록 육적 눈을 떠졌을망정 영적 눈은 떠지지 못함으로 영원한 축복을 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심령에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고, 더 큰 축복이 찾아옵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도리어 원망하고 불평하는 심령에는 기쁨도 없고, 만족함도 없습니다. 복이 오기는커녕, 은혜가 임하기는커녕 있던 복도 달아납니다. 받은 은혜마져도 다 까먹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심령에는 성령이 역사하시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심령에는 마귀가 역사합니다. 당연한 거지요. 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총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감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이라면 그래서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나님의 뜻안에서 감사하며 사는 심령에 어찌 성령이 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원망과 불평과 시기는 마귀의 조종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게 만들려는 마귀의 수작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서로 짜증나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들고 낙심하게 만드는 사탄의 궤계입니다. 그러기에 그 자체로 이미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임과 동시에 그것은 마귀가 더욱 역사하도록 빌미를 제공하는 어리석은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살전5:16~18절 말씀을 보세요.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라고요? 항상 기뻐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지요. 말하나마나 당연한 게 아니겠어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울면서 짜증내며 불평하며 원망하여 살기를 바라십니까? 그럴 리가 없겠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울며불며 짜증내며 불평하며 낙심하며 맥아리없이 축 쳐져서 생기도 없이 의욕도 없이 살기를 바라시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감사하며 은혜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고, 그 하나님의 뜻가운데 살아갈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더 큰 것으로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즐거워하며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은헤를 충만하게 덧입어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와 은혜와 기쁨과 능력과 생기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감사는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결국 감사하는 사람은 이기게 되고, 원망과 불평과 낙심하는 자는 지게 됩니다.

1620년 102명의 영국의 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천고만신 끝에 신대륙 아메리카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아메리카는 처음부터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지 얼마 못되어 그들 중 절반 이상이 굶주림과 풍토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해마다 겹치는 흉년으로 고생이 막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기도를 선포하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금식기도를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어려움이 계속되자 한 농부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하나님께서 아직 응답해 주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생각을 달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비록 흉년이 들고 형제자매들이 병으로 쓰러지고 했지만 이런 상황속에서도 분명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식량이 풍족하지 않고 여건이 저 유럽보다 못하지만 신앙의 자유가 있고 정치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또 우리 앞에는 얼마든지 개척할 수 있는 광활한 대지가 열려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금식 대신에 감사의 기간을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농부의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금식기도를 중단하고 대신에 감사를 선포했습니다. 이제부터 감사합시다.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감사의 예배를 드립시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마음껏 찬양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광활한 대지가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힘들지만 머잖아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믿고 감사합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결국 그들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정신이 바탕이 되어 오늘날 미국이 건설되었습니다. 물론 요즘은 너무 풍요롭다 보니까 미국도 좀 변질된 모습도 있긴 합니다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신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래서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믿고 감사할 때 하나님은 분명을 어떤 어려움도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행16장 바울과 실라 이야기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거의 죽을만큼 맞고 착고에 채워져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쯤되면 원망과 불평과 탄식과 절망이 나올만도 한데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했고, 그러자 감옥문이 열리고 도리어 간수가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즉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원망과 불평대신 감사와 찬양을 드렸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영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으로도 동일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원망하고 불평하고 짜증내고 화를 내면 우리 몸에서 독소가 분출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막 화를 내고 짜증내며 밥을 먹어 보십시오. 밥이 얹힙니다. 소화가 안됩니다. 신물이 막 올라옵니다. 위가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소화액도 잘 안나오거나 반대로 과도하게 나와 위를 망가뜨립니다. 혈액순환이 안됩니다. 세포의 활동이 약화됩니다. 그러면 온몸에 힘이 빠집니다. 병균이 침입하면 저항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만 병에 걸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밥을 먹으면 밥이 꿀맛 같습니다. 위가 왕성하게 움직입니다. 적당량의 소화액과 소화효소가 나와 말끔히 소화를 시킵니다. 혈액 순환이 잘됩니다. 그래서 산소와 영양분을 온몸으로 골고루 날라다 줍니다. 신진대사가 원활하게 됩니다. 그러면 세포가 생기가 넘칩니다. 심지어 춤을 춘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온몸이 활력이 넘칩니다. 병균이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가버립니다.

여러분! 스티븐 호킹 박사에 대하여 들어보셨습니까? 그는 우주물리학 분야에서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과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21세에 루게릭병 즉 근위축증이라는 병에 걸려 불과 1,2년 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재 66세인데 아직도 생존하며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는 걸을 수 없는 것은 물론 고개도 가누지 못하고 육체적으로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몸으로 생명을 지탱하며 연구활동을 할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저서 ‘시간과 역사’라는 책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매일 매일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 또 그 힘 때문에 살아간다.”

바로 그것은 감사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그 몸을 가지고도 하나님앞에 겸손히 엎드리며 그저 생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육체는 아무 쓸모없는 것처럼 되었지만 지적인 능력은 그래도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며 살았을 때 그는 다른 어떤 정상인보다도 더 위대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가 바로 행복의 원동력입니다. 감사가 승리의 원동력입니다. 감사는 영혼을 살립니다. 감사는 물질의 복도 가져옵니다. 감사가 우리의 육신의 건강도 지켜줍니다. 감사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이웃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주신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참으로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어떤 상황속에서도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가시는 진정한 행복자가 되시길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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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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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축복받는 새해


 

 

주일낮설교 / 생명의말씀  


말씀 : 잠3:1~10

제목 : 축복받는 새해

지하철에서 어떤 아저씨가 칫솔을 팔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너무 좋은 물건 하나 소개해 드리려고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물건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칫솔입니다. 왜 가지고 나왔습니까? 물론 팔려고 가지고 나왔습니다.

자, 칫솔이 이렇게 다섯 개가 한 묶음으로 되어있습니다. 얼마일 것 같습니까? 단돈 천원입니다. 뒤에 보면 made in korea라고 쓰여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수출품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수출이 잘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망했습니다. 잘 되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자, 어쨌든 백문이 불여일견, 하나씩 드릴테니 찬찬히 구경해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몇 분이나 사실까요? 저도 모릅니다. 잠시 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 네. 점잖은 신사 분 한분이 구입하셨습니다. 더 구입하실 분 안 계십니까? 네, 많은 분들이 저를 믿지 못하고 망설이고 계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만 팔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몇 개를 팔았습니까? 네, 한 개입니다. 그럼 제가 얼마를 벌었습니까? 1,000원입니다. 아니 원가를 빼면 300원 벌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실망했을까요? 네, 아주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여기서 포기할까요? 아닙니다. 저는 다음 칸으로 갑니다. 남은 하루도 즐거운 시간 되시고 안녕히 가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음 칸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는 아저씨입니까? 비록 지하철에서 칫솔을 팔고 있지만, 비록 수입은 많지 않지만 얼마나 여유가 있고, 얼마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혹시 실망할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다음 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는 혹시 좀 실망스럽고 힘든 일이 있다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희망과 긍정 속에 한 해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주님 말씀따라 한걸음 한걸음 앞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분명히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한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복된 한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한해를 정말 은혜가 충만한 시간들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가운데 살려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나 긍정의 생각이라고 내 마음대로, 세상 가치관대로의 긍정은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긍정하는 것이 올바른 긍정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죄와 어둠 가운데 있고 하나님은 빛이시오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긍정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 뭐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1:8절을 보십시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보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라. 지키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할 것이라. 형통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생명과 축복과 평강과 위로와 기쁨의 근원자이십니다. 모든 우주만물과 그 질서와 규칙과 규범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주만물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모든 우주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당연히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따라가면 그 인생이 생명과 진리와 은혜로 충만해 질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빛이신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을 따라가면 빛의 은혜, 생명의 은혜를 누릴 것이요, 어둠과 사망에 속한 마귀 사탄을 따라가면 어둠과 사망의 그늘 속에 살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와 어둠속에 있는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자기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마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인생의 참된 생명의 양식이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규범이며, 규칙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성경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서 인간이 스스로 만든 룰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이 정해주신 룰만이 하나님께 통하는 길이며 그것만이 인간의 생명을 보장하고 풍성케 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성경만이 인간의 삶에 유일하게 완전한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규칙이요, 규범이요, 가이드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의 영과 육과 정신에 관한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은 오직 성경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천지창조 때부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알고 인간 존재에 대하여, 인간이 살아가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하여 규칙을 정할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모든 인생은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실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안의 그 어떤 존재도 우주와 인간과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다 알지도 못하고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제시할 수 없고, 모든 우주의 질서를 정할 수도 없고, 규범을 만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바르게 알고 그 가이드라인을 따라, 그 설명서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이드라인으로 삼아 육신을 사용하고 시간을 사용하고 물질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새롭게 밝아온 이 새해에는 오직 우리 인생의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이며 등불이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한해 동안도 말씀이 여러분을 지키고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말씀 안에 있는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의 은총이 풍성한 삶을 살려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그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6절 말씀 보십시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 이 말씀에서 특별히 범사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범사, 즉 모든 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밥 먹을 때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직장에서 일을 할 때로 인정하고, 장사를 할 때도 인정하고, 공부할 때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잘되고, 건강하고, 형통하고, 축복받을 때도 인정하고, 잘 안되고, 건강하지 못하고, 불통해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만나도, 불만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해 못할 일이 벌어져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와 환경과 상황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과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나 내게 주어진 시간이나 물질이나 재능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고 그러면 반드시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인정하면 어찌 예배와 찬송과 기도에 열심을 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어찌 내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며, 나아가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님과 나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하며 살아갈 때에 어찌 그 인생이 별처럼 빛나지 않겠습니까? 그 인생이 어찌 아름답고 복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여러분,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음을 믿고 그저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 할뿐입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도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정말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때에 그 인생이 어찌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움과 은혜를 인정하고 예배드리고 찬송드리고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우리의 육신이나 정신이나 물질이나 시간이나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사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들고 이해가 안되고 억울한 일을 만나도 그저 하나님께 맡기며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존중히 여김을 받으며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가득한 이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그 은혜를 누리려면 하나님의 지혜는 나보다 천배 만배 억배 더 크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 7절 말씀 보십시오. “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자기가 똑똑한 것처럼 생각하며 제 고집대로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다고 내 놓을만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비록 피조물들 중에서는 제법 지혜롭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우리 인생이 아는 게 얼마나 됩니까? 우리가 경험한 것이 얼마나 됩니까? 배웠으면 얼마나 배웠습니까? 알면 얼마나 압니까?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 욥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너무 답답해서 따져 묻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나는 정말 나름대로 선하고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오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악한데도 잘 먹고 잘 사는데 난 정말 억울하다고 하소연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내게 대답하라.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거기 있었느냐, 바닷물이 넘치게 하였느냐, 네가 아침이 오게 하였느냐, 네가 별들을 매어 묶을 수 있느냐, 네가 눈과 비를 내리었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네 가슴속의 지혜는 누가 주었느냐, 네가 염소의 새끼를 낳을 때를 아느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러자 욥은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욥42: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렸고,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욥을 고난에서 건져주시고 다시금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인품이 좋고 선하고 잘나도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처럼 여기고, 하나님앞에서 의로운 것처럼 여기는 인생은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마귀사탄에게 철저히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 우주 공간속에서, 천지가 창조되고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는 길까지, 영원한 세상이 지속되는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한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자신과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는 이 복된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4.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진실로 하나님을 공경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9절 말씀 보세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제일 먼저,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아가서 십일조를 비롯한 모든 감사예물을 드릴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여호와를 인정하는 일이요, 바르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게다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는데, 게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일에 사용되는 것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하늘 곳간에 쌓는 일인데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고 공경한다면 어찌 하나님께 먼저 드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인가 힘써 노력해서 얻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야, 말합니다. ‘너, 정말 수고 많았다. 너 정말 대단하다. 이제는 좀 쉬면서 먹고 마시고 놀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부모님이 날 낳아 주시고 열심히 키워 주신 덕분이라며 부모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곁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던 친구나 선배나 기타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리며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면 우리도 여전히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육신으로 물질로 시간으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었다해도 근본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터전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생명과 육체과 지혜와 능력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햇빛과 비와 공기와 토지를 주셔서 그 안에서 활동하며 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다른 모든 것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공경할 때 그 믿음과 신실함을 보시고 더욱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0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이 귀한 말씀들을 기억하며 올 한해 동안도 정말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결코 자신이나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규범이며 잣대이며 안내자인 하나님의 말씀의 안내를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물질과 육신을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창고가 가득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은총과 귀중이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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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설교 / 성령을 받아라

 

 


제목 : 성령을 받아라

말씀 : 행19:1-7


1.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유명한 지도자 가운데 지금 천국에 가 계신 고 이중표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의 설교의 주제는 별세 신앙이었습니다. 별세 신앙이란 말 그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로서 더 이상 내 생각과 고집과 이성과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 속에 살면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이런 유명한 목사님이 된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는데 그는 한국교회를 위해서 크게 사용되는 종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유명한 목사님들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 때 한가지 발견한 것이 유명한 목사님들은 대부분 낙동강이나 대동강이나 두만강이나 큰 강변에서 자랐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경직, 김창인, 박조준, 김선도, 곽선희 목사님은 대동강 물을 마시며 자랐고, 김재준, 강원용목사님은 두만강 물을 마시며 자랐고, 이종성, 이상근 목사님은 낙동강 물을 마시며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한국교회 유명한 목사님들은 다 큰 강물을 먹고 살아서 저렇게 훌륭한 목사님들이 되었는데 저는 이 전라도의 작은 강 만경강물을 먹고 자라서 이렇게 키도 작고 능력도 부족합니다. 그래도 저도 한국교회를 위하여 큰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종아, 걱정 말아라. 압록강이 크면 얼마나 크겠느냐? 낙동강이 길면 얼마나 길겠느냐? 너는 압록강이나 낙동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생명의 강물을 듬뿍 마시거라. 그러면 큰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은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성령의 생수를 듬뿍 마셔서 결국 한국교회의 유명한 목사님 중의 한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론 세상의 조건도 인생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욱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생명의 강물을 마셨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생명의 강물을 마셔도 적게 마셨느냐 많이 마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강물을 마신 자는 물론 그 영혼이 살아나고 정신이 살아나고 가치관이 살아나고 능력이 살아납니다. 적게 마신 자는 겨우 살아나고 많이 마신 자는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수 강물을 마시지 못한 자는 그 영혼이 죽어있음으로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은총과 능력가운데 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여러분, 여기서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보고 던진 질문입니다. 누구에게 던진 질문이라고요? 제자들에게.... 그러면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 믿을 수 있는데 그러면 제자라면 예수님 믿는다는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성령을 받았어야 하는 건데 왜 새삼스럽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진정으로 믿은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을 받아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그래서 자신이 죽고 거듭나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서 거기에 걸맞은 생각과 가치관과 삶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고 그냥 종교적으로 인간적으로 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교회 생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정말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뭐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즉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즉 이성과 지성과 마음으로 훌륭하고 능력 있고 선하시고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분이라는 그런 종교적 차원의 고백이 아니라 정말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가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유일한 구세주가 되심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 자아와 고집과 이성과 가치관이 깨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히 거듭난 존재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온전한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다른 좋은 것들도 얻기를 힘쓰기 전에 먼저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자신의 죄와 무지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 믿고 거듭난 생명으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써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은 왜 받아야 합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면 왜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물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그래서 비로소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길은 오직 성령을 받는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잖아요. 죄와 무지와 어둠과 한계 속에 있는 인생이 우주만물과 인간과 영원한 세계에 대하여 어떻게 압니까? 누구에게서 배워 압니까? 어떻게 연구해서 압니까? 설령 죄와 무지가운데 있지 않더라도 인간의 지혜는 정말 작은 것으로 그것으로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말할 것도 없이 이 세상 우주만물과 생로병사에 대하여도 알 수도 없고 어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고 유식해도 하나님과 인생과 우주만물을 바르게 알려면 오직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배우기 위해서 물론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그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함으로 말씀을 들어도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동시에 우리 심령 속에 깨달음과 믿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하나님과 인생과 우주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하여 알고 깨닫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2:10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또 요14: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즉 성령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시는 분이시오, 동시에 그것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고 믿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만 비로소 하나님을 알고 믿고 구원받고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그래서 제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에 힘쓰다가 성령 충만함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특별히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오직 성령을 받아야 우리 영혼이 살고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걸 기억한다면 인간의 그 작은 생각과 경험과 지식을 다 내려놓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과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감사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은 어떻게 받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함을 받습니까?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성령의 임재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오직 성령을 받아야 새 생명을 얻고 생명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임재하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가정을 방문하고 싶은데 그 집에서 여러분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면 갈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래도 억지로 갔는데 반가워하기는커녕 시큰둥하게 여기고 귀찮게 여기면 그 집에 오래 머물겠습니까?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의 오심을 정말 다른 무엇보다도 반가워하고 간절히 기다리고 사모하고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고 하는 그 영혼 속에 찾아 가시고 거기 오래 머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07:9절에서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죽어라고 세상의 별것 아닌 것을 사모하며 그것에 온 정열을 바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말고 정말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를 주시는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여 그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기 위하여 열심히 주님 앞에 자신을 세움으로 생명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릴 때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심령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애타게 기다려도 심령이 더러워져 있으면 성령께서 찾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만약 귀한 손님을 초청해 놓고는 씻지도 않고 더러운 옷을 입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방에는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어서 냄새가 풀풀 나고 한다면 귀한 손님이 와서 그 집에 들어갈 마음이 나겠습니까?

성령님도 그렇습니다. 우리 심령이 불신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원망과 불평과 분노와 음란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 등의 온갖 악하고 추하고 냄새나는 것들로 차 있으면 성령님이 찾아오시지도 않고 설령 찾아 오신다해도 금방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사모한다면 정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하며 깨끗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아름답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님이 기쁘시게 찾아오시고, 계속적으로 함께 하시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24:3,4절에서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동시에 우리 심령을 거룩하고 의롭고 깨끗하고 정직하고 아름답게 함으로 성령께서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속에 기쁨으로 찾아가심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성령 충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 그러면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기본적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인생을 알게 되고 그래서 주님을 믿고 거듭나 새 생명을 얻음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그러나 물론 그렇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 그대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당연히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도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의의 길로 잘 달려가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상태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마치 술에 취한 사람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물론 결과가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고, 아니 결과는 반대인데 원리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술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용감해 집니다. 전에 있던 교회 사택에 바로 아랫집에 술주정뱅이 아저씨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은 술을 안 먹었을 때는 말도 안하고 누구한테 해로운 소리 한마디 못하는 색시 같은 양반인데 술에 취하면 돌변합니다. 부인한테 행패를 부리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때로는 사택 앞에 와서 혼자서 막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러면 우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술취한 사람 상대해봐야 나만 손해니까요. 그러면 혼자 소리지르다가 제풀에 꺾여 돌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술 때문에 감각이 무뎌져 겁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술 취하면 죄를 짓는데도 용감해 집니다.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걸고 싸우고 음란한 짓을 합니다.

성령에 취해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 취하면 나쁘게 용감하지만 성령에 취하면 진리 안에서 용감해 집니다. 마귀사탄 따위가 두렵지 않습니다. 가난도 멸시도 환난과 핍박도 심지어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도들은 유대관원들이 또 다시 예수를 전하면 잡아 가두겠다고 위협해도 하나님 말씀 듣는 것과 너희 말 듣는 것과 어느 것이 옳으냐면서 용감하게 예수님을 전했고,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순교를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집니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있듯이 술취하면 평소에는 못하던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하고, 또한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면서 진절머리 나게 붙들고 이야기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물론 쓸데없고 추한 말이 많아지는 게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말이 많아집니다.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느라고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감각이 무뎌져서 힘든 일들을 조금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진짜로 근심걱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무디어져서 아픔을 잘 느끼지 못함으로 누리는 일시적이고 결과적으로 더 큰 아픔을 초래하는 왜곡된 평안입니다. 그래서 술이 깨면 더 괴롭고 후회스럽고 수치감만 느끼게 됩니다. 더구나 그런 과정에서 온갖 죄와 악 속에 빠지게 되고, 자기 몸 다 망가뜨리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돈을 악을 사용하는,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미련하고 악한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하면 진짜로 세상 근심 걱정 염려 원망 불평이 없어지게 됩니다. 생명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영이신 성령께서 평강과 위로와 기쁨을 주시기 때문에 진정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게 됨으로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5:22,2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래서 또 엡5: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헛된 것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에 취해야 합니다. 여러분, 요즘에 보면 심지어 교회 안에서 조차도 술 먹는 것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순전히 마귀 사탄의 역사에 놀아나는 일입니다. 여러분, 좀전에 말씀드린 엡5:18절에서 술취한 것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방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잠23:31,32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같은 잠23:20절을 보십시오.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을 즐겨하는 자들과 사귀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나실인 즉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사람은 독주는 물론 포도주나 심지어 포도나무 소산도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뭐 그밖에 술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윤리적으로 가정적으로 얼마나 큰 폐해를 가져다주는지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도 먹고 서양교회에서도 먹는데 하면서 괜찮은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남들이 도둑질하면 같이 도둑질 할 건가요? 여러분, 우리는 세상이 다 그래도 심지어 교회가 다 그래도 오직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말씀만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오직 거기에만이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특별히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즐거움이나 그 어떤 다른 것을 사모함보다도 성령의 임재하심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고 깨어 기도하며 말씀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심령을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우리 교회 위에 성령이 충만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거룩하고 의로운 삶으로 주님의 향기를 발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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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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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진정한 소망

  
 


 
제목 : 진정한 소망

본문 : 딤전6:17~19

1.진정한 소망

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정말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기대하며 사십니까? 부자 되는 것, 자식이 출세하는 것,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것도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서도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게 되면 무슨 뾰죽한 수가 생길까요?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고 날마다 싱글벙글하며 살아갈까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가보면 똑같아요. 뭐 많이 배우고 돈많고 출세하고 건강하면 맨날 좋아 죽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똑같이 걱정하고 불안하고 염려하고 싸우고 갈등하고 지지고 볶고 삽니다. 그래서 뭐 전직 대통령, 전직 총리, 장관, 재벌 총수, 무슨 팝의 황제니 골프의 황제니 하며 불리던 사람들이나 유명 연예인이나 할 것 없이 자살도 하고 잡혀 가기도 하고 가정불화도 겪고 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의 것은 죽을 둥 살둥 달려가서 얻었다고 하는 순간 이미 멀어지기 시작해요. 세상의 것으로 누리려는 행복은 잡았다고 하는 순간 저만치 날아가서 날 잡아봐라 하면서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아 다니다가 결국 인생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도 모르고 세상 것 좇아 다니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한 인생이 되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써 나아가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주님안에 만이 진정한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는 이세상에서도 모든 상황을 초월해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가 있으며, 더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대한 기대와 소망속에서 사는 자들만이 완전히 후회없는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오늘 17절 말씀 보세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무엇에 소망을 두지 말라.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무엇을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두라.

왜요? 재물은 정함이 없으니까. 정함이 없다는 게 뭡니까? 정해져 있는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즉 불확실하다는 거지요.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거라는 거지요. 내께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무슨 소리냐 영원토록 내꺼다. 실컷 쓰고 누리고 살다가 죽으면 그게 내꺼지 누구꺼냐 그럴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생명도 돈도 내일을 장담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도 결국 놓고 가야하고 그거만 믿고 산 인생이라면 결국 영원한 고통 밖에는 남아 있을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소망은 다릅니다. 주님께 있는 소망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온전합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것만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19절 보세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뭡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터를 쌓는 것이고,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생명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육체적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완전한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쌓는 지혜로운 인생이다, 그런 인생속에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정함이 없는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세상의 즐거움을 기대와 기다림과 소망으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참 소망이신 주님을 소망께 대한 소망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결코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세상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2.선한 사업에 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소망이 다른 사람은 삶의 목적도 다르고 삶의 방향도 다릅니다. 돈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사용합니다. 그저 부자되고 건강하게 잘먹고 잘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그저 돈이나 모으고 제 몸 하나 잘 입히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준비하며 삽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목적도 다르고, 돈과 시간과 재능과 육신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돈과 지식과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는 목적이 다릅니다.

그게 뭡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나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그래서 결국 주님과 나와 이웃이 함께 기뻐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삶이 이생에서나 저생에서나 가장 복되고 기쁘고 아름답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깊이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그렇게 의미가 있겠어요? 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큰 가치를 만들어 내겠어요? 그렇게 해서 자신이 무엇이 그렇게 크게 즐겁겠어요? 여러분, 좋은 것은 함께 나눠야 더 좋아지고 더 많은 가치가 있는 거예요.

자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어요. 저 혼자 독차지하고 앉아서 먹으면 무슨 맛이 그렇게 있어요? 여럿이 같이 먹으면 얼마나 더 맛이 있어요. 너무 너무 좋은 일이 있어요.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좋아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웃고 축하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면 얼마나 더 기뻐요? 호화판 유람선이 있어요. 저 혼자 타고 다니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타고 다니며 서로 웃고 즐거워하면 얼마나 더 기쁘겠어요? 좋은 집이 있어요. 저 혼자살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살 때 즐거운 거지요.

여러분, 사람은 원래 관계적인 존재예요. 가족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거예요. 본래 그런 존재로 지음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절대 혼자 행복할 수 없어요. 혼자 배터지게 먹고 혼자 대궐 같은 집에서 살고 혼자 좋은 입고 하면서 행복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행복하다면 그 인생은 죽은 인생이요, 병든 인생이요, 죄와 무지의 종이 된 인생이예요. 결국 영원한 지옥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예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 말씀 보세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선한 일이란 포괄적으로 좋은 일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아보고, 절망속에 있는 자를 위로하는 등 모든 어렵고 고통받는 이웃을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는 것은 그런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인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들을 위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는데 인색하지 말고 넉넉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눠주기를 좋아하라는 것은 억지로 마지못해 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런 일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된 인생의 올바른 가치관입니다.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19절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길이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눌 때 그것이 결국은 자기 생명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지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라는 뜻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너도 살고 나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너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주님도 기쁘고 결국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자기 혼자 잘먹고 잘사는 거 그거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도 없고요, 있다 해도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은 죄와 무지속에 있는 인생의 모습이요, 영적, 정신적, 인격적, 체적 미숙아의 삶입니다.

여러분, 갓난아기 보세요. 갓난아기는 남을 모릅니다. 그냥 자기밖에 모르죠.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성장하여 성인이 되면 남을 배려하게 됩니다.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 인격적, 영적으로 자꾸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 지금은 대강절 기간입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 속에 기쁨으로 거하시도록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심령속에 기쁨으로 거하시겠습니까? 어떤 심령속에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기쁘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자는 부자가 아닙니다. 권력자가 아닙니다. 지식인이 아닙니다. 단순히 윤리적으로 깨끗한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거기에 욕심을 두지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기쁨으로 오십니다.

또한 그렇게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그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자에게 기쁨으로 찾아 오셔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목적인 것입니다. 대강절은 바로 그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별거 아닌 돈과 명예와 지식을 바라보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거기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기쁨이며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더불어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메시야라는 점을 기억하며 그저 겸손히 엎드려 그 분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정말로 주님을 기대하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산다면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살피고 이웃을 돌아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 모든 것들을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여러분 심령속에 가득하여 주님과 이웃을 기쁘게 해드리며 여러분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축복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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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범사에 감사하라

 

 

 

민수기 11장 4∼15절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군대에 쫓기다 홍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당신이 우리를 끌어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내 이같이 하느냐” “애굽에서 당신에게 우리를 내버려두라 했고,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했느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게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고 길을 터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선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온 회중이 굶주려 죽게 됐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도 남을 충분한 만나를 새벽마다 주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만나가 끊길 수 있다며 또 불안해했습니다. 르비딤에서는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 우리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샘솟아 나오는 기적을 통해 그들의 갈증을 해결했습니다.

1년 후 바란 광야에선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땐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었다. 이제는 우리 기력이 다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이미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 장엄한 광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격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음에도 그들은 이런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저녁마다 메추라기 떼를 공급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처음 그들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이 많은 식량을 공급하심에 경외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 같은 음식에 싫증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슬과 함께 내린 만나, 저녁마다 진에 덮인 메추라기, 그 기적의 산물을 보면서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간사한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 아닐까요. 감사하는 일에도 조건부 감사와 범사에 감사하는 게 있습니다. 조건부 감사가 하나님의 응답과 풍성하게 채워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라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감사와 영광을 돌렸겠지요. 일종의 조건부 감사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기대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사할 일이 있을 때 잊지 말고 감사하라’고 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에 순종하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알고서 믿는 게 아니라 믿으면 믿을수록 더 알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일이 있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허현 목사(양주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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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사순절을 보내면

 

 

 

제목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말씀 : 요13:1-17


예수님이 누구신가? 오늘 16번째 설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 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책 이 요한 복음입니다. 요한복음 중에서도 13장부터 17장은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고 가장 진하게 보여 줍니다. 그 중에서도 요13장은 예수님의 사랑의 모습을 가장 진하고 가장 강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신" 분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 여기 "끝까지"라는 말은 시 간적으로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 가장 진하고 가장 뜨겁게 사랑하셨다 는 말입니다. "마지막까지 그리고 최고로"(To the end and to the uttermost)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한계가 있고 질적으로 한계가 있 습니다. 조건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무조건적입니 다.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으로 마지막까지 최고로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여기 "자기 사람들"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그래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 주로 믿게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에 믿었던 사람들 뿐 아니라 앞으로 믿게 될 모 든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러분들과 저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 이별의 때가 이른 줄을 아셨을 때 예수님의 사랑은 더욱 더 뜨거워졌습니다. 이별은 마음을 슬프게도 하지만 사랑을 더 뜨겁게 만듭니다. 저는 이별 의 아픔과 슬픔을 이따금씩 경험합니다. 몇 년전 영국에서 공부하던 딸 혜원이를 영국에 두 고 비행기를 탔을 때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몇 년전 항가리에서 선교하는 박윤 애 선교사를 항가리에 두고 비행기를 탔을 때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최근에 한 주간 동안 사랑을 함께 나누던 뉴질랜들의 성도들과 귀여운 어린 아이들을 뉴질랜드 공항에 남겨 두고 비행기를 탔을 때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이별의 때가 가까이 이르렀 음을 아셨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슬픈 마음과 함께 뜨거운 사랑을 느꼈습니다. 예수 님의 사랑은 더욱 더 간절해 졌고 뜨거워졌습니다. 끝까지 최고로 사랑했습니다.

2. 예수님은 "행동으로 사랑하신" 분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 의 발을 씻기시고"(4,5). 진정한 사랑은 몸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사람 을 손으로 만지고 싶어하고 그리고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 주고 싶어 합니다. 말 로 하는 사랑이 은과 같은 사랑이라면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는 사랑은 금과 같은 사랑입니 다. Word is silver, deed is gold. Preaching is silver, life is gold. 예수님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 을 손으로 만지시며 거룩하신 손으로 더러운 발을 씻어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의 발 을 씻는 행동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나 있었습니다. 첫째는 더러운 것을 씻어 주시는 죄 사함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미 죄사함과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목 욕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날마다 죄를 범하는 죄인들이었습 니다. 날마다 발이 더러워지는 죄인들이었습니다. 날마다 씻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었고 날마다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들의 허물과 죄를 씻어주 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고 죄를 씻어 줍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거룩하신 주님의 손으로 만지시면서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손은 우리들의 모든 병을 고치시고 우리들의 모든 죄를 사하고도 남는 거룩하신 손입니다. 그 거 룩하신 손, 십자가 못에 박히신 손, 피 묻은 손으로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피 묻은 손으로 날마다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는 행동은 둘째로 겸손과 섬김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겸 손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섬김을 받아야 구원을 얻습 니다.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 니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것은 종의 차림을 한 것입니다.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 을 씻긴 것은 하인들이 하는 섬기는 일을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사랑은 입으로 하는 설교로 나타나지 않았고 손으로 하는 섬김의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죄 씻음 의 행동과 섬김의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3. 예수님은 "서로 발을 씻으라고 분부하신 분"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는 것이 옳으니라 "(14).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보고 서로 발을 씻으라고 분부 했습니다. 왜 제자들보고 서로 발을 씻으라고 분부했을 까요? 우리들이 예수님처럼 행동하 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닮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들의 손과 삶이 거룩해 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성자처럼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 문입니다. 우리들도 성 프랜시스처럼 또는 손양원 목사님처럼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셨기 때 문입니다. 우리들이 마귀처럼 행동하기를 원하시지 않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발을 씻으라"는 분부는 우리들을 괴롭게 하는 분부가 아니라 우리들을 복되 게 만드시는 분부였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서로 발을 씻는 것 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불행한 일이 아니라 행복한 일입니다. "너희 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여러분들 그렇게 믿으십니까? 지난 5월에 장로로 임직을 받으신 두분 장로님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부인들도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서로 발을 씻는 것이 주님을 닮아 가는 복된 일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앞으로 나와서 서로 발을 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남편이 먼저 아내의 발을 씻고 그 다음 아내가 남편의 발을 씻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나의 더러운 발을 먼저 씻어 주옵소서. 나도 주님의 분부를 따라 발 을 씻어줍니다 이렇게 기로하는 마음으로 서로 발을 씻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발을 씻는 행동에도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 는 의미가 있고 서로를 섬긴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 고 서로를 섬길 때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구원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서 일어납니다. 주님이 하신 그 일을 우리가 하게 됩니다. 죄 씻음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집니다.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훈계나 강의나 설교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발을 씻는 사랑과 겸손과 봉사의 행위로 이루어 집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끝까지 사랑하신 분입니다. 행동으로 사랑하신 분입니다. 발을 씻는 겸손과 봉사의 행동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서 서로 발을 씻 으라고 분부하신 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 서로 발을 씻는 일을 실천하십 시다. 북한 동포들의 발을 씻어야 하며 수재와 고난을 당한 사람들의 발을 씻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체면이나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서로 발을 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끄러움을 극 복하시면서 우리들의 더러운 발을 손으로 물로 그리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깨끗하게 씻 어 주셨습니다. "주님, 우리들의 발을 날마다 씻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도 서로 서로 발 을 씻어 주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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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성숙한 그리스도인

 

 

 

말씀 : 고전2:14-3:3

제목 : 성숙한 그리스도인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사람은 사람을 다음과 같은 세 부류로 구분을 했습니다. 첫째는 거미 같은 인생입니다. 거미는 거미줄로 집을 지어놓고 거기에 걸려드는 것을 잡아먹는 곤충입니다. 그러므로 거미같은 인생이란 덫을 놓고 남의 등이나 쳐먹고 살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개미 같은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개미는 부지런한 곤충으로 사람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개미같은 인생이란 긍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은 남에게는 줄줄 모르고 그저 자신만을 위해서 모아 들이는 이기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꿀벌 같은 인생입니다. 꿀벌은 물론 꿀벌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열심히 모아서 남에게 다 줍니다. 심지어는 요즘에는 자기 생명을 받쳐 벌침으로 사람들을 고쳐주기도 줍니다. 그래서 꿀벌 같은 인생이란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어떤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지는 제가 말씀드리지 여러분들께서 더 잘 아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러한 세상적인 관점에서의 세종류의 인간상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의 세종류의 인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는 육에 속한 사람이요, 다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요, 그 다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에 대하여 말씀을 나눌 때에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을 향하여 좀더 달려감으로 주의 생명의 은총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1.육에 속한 사람

오늘 본문에 보면 먼저 육에 속한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14절을 보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이란 yucikov"(프쉬키코스)인데 이는 육적인, 천성적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혼에 속한 사람,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죄와 무지를 그대로 가지고 죄된 육신의 소욕대로, 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이 죽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생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과 육과 혼을 가진 존재로 지음 받았는데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음으로 육과 혼도 죄와 어둠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이것을 회복시켜야 영혼을 살려야 하는데 성령을 받지 못하여 영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일을 거부합니다. 깨닫지도 못합니다.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도리어 믿는 일을 미련하고 어리석고 연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좀전의 14절 말씀 다시 보세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성령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거지요. 복음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미련하고 황당하다고 여깁니다. 그런게 어디있느냐며 도리어 생명에 속한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고 핍박하고 해요. 당연하지요. 인간의 죽은 영혼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진리를 알고, 성령의 일을 아는데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으니 다만 미련할 뿐이요, 어리석게 여겨질 뿐인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는 진리를 알고, 주님을 알고, 생명의 길을 아는데 성령이 없으니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거지요. 영이 죽어 있어서 성령을 체험할 수가 없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 대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전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죄된 육과 혼의 요구대로 삽니다. 육과 혼의 본능을 따라,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사는 거 뿐이예요. 비록 정신적으로 나름대로 고상한 가치를 추구한다해도 그러나 육은 육이고, 혼은 혼일 뿐이예요. 결국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다가 죄의 심판을 받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된 육신의 본능을 따라 사는 삶은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죄된 육신의 본성을 따라 사는 인생은 결코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설령 세상에서 좀 고상하고 선하고 가치있는 삶을 산다해도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만에 하나 육과 정신이 최상의 가치를 드러내며 산다고 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지옥의 고통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은 한분도 절대로 이 편에 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편에 서 있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천만다행으로 단순히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육신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과 유사해서 좀 혼돈이 됩니다만 성경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오늘 3:1절의 말씀의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하노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특별히 후반절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그 말씀이요. 고린도 교인중에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거예요? 밖에 있다는 거예요? 안에 있다는 거지요. 안에 있긴 있는데 어린아이같은 자들, 성숙하지 못해서 어린아이 같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들어오긴 했는데 아직은 육체적인 삶을 다 벗어던지지 못한 사람, 영보다 육의 지배를 더 많이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럴 수 있습니다. 자, 보세요. 남자가 20세가 되면 군에 입대합니다. 입대하자마자 군인은 군인입니다. 그런데 군인으로서의 모습은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군인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데 아직 군인 노릇을 잘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는 태어나면서 사람입니다. 아니 엄마 뱃속에 잉태할 때부터 사람입니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구실 제대로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젖을 먹고 이유식을 하고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고 오래 기간 훈련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사람구실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바로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들어오긴 했지만 아직 어린아이라서 주님의 모습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어린아이들처럼 대하며 젖을 먹였던 것입니다.

2절이지요.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린도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나 어린아이와 같아서 차마 밥을 먹이지 못하고 젖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밥을 먹이면 체 할 것 같아서, 단단한 밥을 먹이면 배탈이 날 것 같아 못 먹이고 계속 젖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곁의 성도들이 좀 부족하고 연약해도 너무 타박하지 마세요. 그럴 수 있느냐고 몰아세우지 마세요. 그럴 수 있습니다. 뭐 솔직히 다 도토리 키재기 아니겠습니까? 내가 성숙했으면 얼마나 성숙했겠어요. 내가 믿음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 서로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 많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감싸주고 덮어주고 격려해주고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젖은 무엇이고, 밥은 무엇입니까? 젖은 부드럽고 넘기기 쉽고 영양가가 많은 음식입니다. 밥은 무엇입니까? 단단합니다. 그냥 안 넘어 갑니다. 씹어야 합니다. 자기가 침으로 삭혀서 넘겨야 합니다. 거친 것도 있고, 쓴 것도 있습니다. 맵고 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젖과 밥이 있습니다. 젖은 부드럽고 달콤한 말씀들, 소화가 잘되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주님이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등의 주로 은혜에 관한 말씀들입니다. 밥은 단단하고 넘기기 힘들고 소화가 잘 안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로 책망이나 헌신의 요구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이런 말씀은 씁니다. 소화가 잘 안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배탈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목사의 고민이 깊어집니다. 성도들에게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할까? 어떤 양식을 먹일까? 어떤 분에게는 부드럽고 달콤하고 술술 넘어가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에게는 단단하고 거칠고 맵고 쓴 말씀도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아직도 어린아이이고, 어떤 분은 한참 일할 나이이고, 어떤 분은 이미 노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어떤 말씀은 어떤 분에게는 고단백 영양분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분은 먹고 배탈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 큰 어른들에게 매일 젖만 먹일 수도 없습니다. 또 단단한 음식만 먹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하며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달콤한 말씀만 바라지 말고 혹 쓴 말씀이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혹은 너무 초보적인 말씀을 한다고 그거 다 아는 건데 라고 생각하지 말고 믿음으로 아멘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 말씀에서 큰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됩니다. 정말 부족하고 연약하더라도, 아직도 세상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해도 주님을 시인한다면 우리는 비록 어린아이이긴 하지만 주님의 자녀라는 것 때문입니다. 천만다행히도 주님께서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의 모습도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된 모습이 많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나는 구원받았다는 그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이 더욱 생동감이 있고, 활력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육신에 속한 사람, 즉 영적 어린아이와 같은 삶은 물론 구원을 받긴 했지만 우리가 머물러 있어야 할 위치는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성장하여 자신의 몫을 감당하고, 그러는 가운데 더욱 은혜와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주의 역사를 펼쳐 가기를 원합니다. 거기가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위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인 영에 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2:15절 보세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서 ‘신령한 자’가 바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말그대로 육과 혼의 지배보다는 영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라고 100% 영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과 혼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100% 신령하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정확하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구분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육 보다는 영에 더 많이 지배를 받는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요, 영의 지배를 받긴 받지만 아직은 영보다는 육과 혼의 원리에 더 많이 좌우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 즉 아직 성숙하지 못한 크리스찬이 아닐까하고 말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어떻게 삽니까? 오늘 15, 16절을 보세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먼저 15절 보면 아주 신나는 말씀이 있어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대요. 이게 무슨 말씀이예요? 나는 남을 마음대로 판단하지만 남에게는 절대 판단 받지 않는다는 말이예요?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령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은 남에게 판단 받을 만한 일을 잘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주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향해 힘써 달려가기 때문에 남에게 정죄받고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16절절 보세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잘못하면 주님을 가르친다는 말처럼 들을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준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죽어가는 영혼을 바라보며, 또 아직도 미성숙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영혼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사람이란 주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기에 남에게 판단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에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따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으면 약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임은 맞습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기에 머무를 수만은 없습니다. 계속해서 아기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쫄병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젖만 먹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밥을 먹여줄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보살핌을 받고 있을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그 자신에게는 기쁨과 감격과 은혜와 생명력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먼저 정말 여러분이 육에 속한 사람, 즉 성령을 배제한 채 그저 육신의 본능을 따라 사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무엇보다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만에 하나 아직도 그저 육신의 본능만을 따라 살고 있다면 속히 영에 속한 사람 쪽으로 자리를 옮기시기 바랍니다.

혹시 아직도 온전히 영에 속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육신에 속한 사람 즉 믿음의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 속했다해도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한 단계 더 나아가 영에 속한 사람으로써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 갈 때에 기쁨과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는 풍성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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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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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살아있는 교회

 

 

 


제목 : 살아있는 교회

말씀 : 행 2:1~4

1.혼이 담겨 있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6, 70년대에 영국에 '비틀즈'라는 락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Yesterday, Let it be, Love me do 등의 수많은 곳을 히트시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수십억달러의 돈을 벌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965년 이들의 외화획득의 공적을 인정하여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틀스가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할 때의 일입니다. 공연장에는 수만 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한참 공연이 무르익어 열창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무대위로 뛰어올라서는 권총을 겨누면서 빨리 노래를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쏘아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삽시간에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다행히 경찰의 침착한 대처로 이 사람은 잠시 후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범인을 잡아놓고 보니까 이 사람은 괴한도 깡패도 아닌 유명한 음악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경찰이 어이가 없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묻자 그 교수는 비틀즈를 보면서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 음악에는 혼이 배어 있질 않아. 그런 혼도 없는 속된 노래를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라.’

즉 이 음악교수는 노래에 자신의 진실과 마음과 혼까지 담아 음악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그런 순수한 음악, 그런 영혼이 담겨있는 음악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틀즈라는 락 그룹이 그러한 혼이 담겨져 있는 순수한 음악이 아니라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노래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그래서 순수음악을 더럽힌다고 여겨 그런 과격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건속에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에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진실이 있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고 그저 상업적으로 그린다면 그 그림은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웅변술을 가지고 열변을 토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있지 않고 진실성이 없다면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회사에 다닐 때 한 2,3년동안 서예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서예도 마찬가집니다. 글씨에도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가 있고, 그저 기교적으로 쓴 글씨가 있습니다.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져 오고, 힘이 있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기교로만 쓴 글씨는 왠지 천박해보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기에 혼을 담고, 진실을 담고, 정성을 담을 때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신앙생활은 더더욱 혼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담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아무리 귀한 직분을 가졌어도, 아무리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영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찬양을 잘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세상적인 노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 혼을 담지 못하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혼이란 내 자신만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주관하시고, 성령님께 붙들린바 된 그러한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근원이신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그러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속에 그 살아있는 영혼을 담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 생명과 은혜가운데 거하며 참된 가치를 누리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4:24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146:1절에서는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진정 혼을 담아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 바 된 그 영혼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가정 생활하고, 직장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온전히 진정성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영위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감동시킴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존중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삶에 진정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매사에 영혼을 담아 하려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로잡힌 바된 진정 살아있는 영혼으로 무엇을 할 때 그게 진정한 혼으로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내 정성만 담는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인격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혼을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기 때문에 그 혼만을 담아서는 진정으로 나를 드리는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 사로잡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전체에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영위함으로 진정 살아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인데 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에 힘쓸때에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힘써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우리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진정한 생명력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때에 그러한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그 일을 기억하며 오늘에 되살려보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날의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오늘 우리도 경험하며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보자는 그러한 취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영혼속에 담고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는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질때에 우리는 복음의 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최권능목사님은 본래의 이름은 최봉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얼마나 권능이 많으신지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유의 은사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별명으로 최권능목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전도할 때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돌아다니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무슨 교리나 말씀이나 원리나 이치 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치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어떻게 보면 정말 무식하게 전도했는데 이분의 전도를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시냇물을 건너려는데 어떤 양반 하나가 담뱃대를 길게 물고 둑에 점잖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이때도 예외없이 둑에 앉아 잠시 쉬고있는 영감님에게 귀에다 대고,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징검다리를 건너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점잖은 양반이 깜짝 놀라서 「저, 저 저런 고얀놈이 있나.」하면서 소리를 쳤지만 목사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징검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도 어쩔 수 없이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집에 도착해서 지내고 있는데 자나깨나 자꾸만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고, 잠을 자면 꿈속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양반이 예수 귀신 붙었다고 하면서 그 지방에서는 제법 용하다고 하는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굿을 해도 계속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양귀신은 서양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야된다고 해서 교회를 찾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누구냐 하면 그분이 바로 고당 조만식 선생님의 부친인 조을선씨였고, 이 한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해서 조만식 선생이 믿게 되고, 조만식 선생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이라는 말속에 무슨 철학이 있습니까?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그럴듯한 웅변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들을 불러모을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최 권능 목사님은 그 말 한마디로 수천명의 사람을 전도하였고 수십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천당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야, 세상은 참 어수룩 했으니까. 그때야 가난하고 못배워 사람들이 좀 단순하고 순진했으니까. 그때야 무슨 재미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냥 예수천당만 해도 믿었지 지금 세상은 그렇게 안됩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오늘 최권능 목사님이 이 안강땅에 오셔서, 저 시장 바닥과 저 일터를 다니면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라고 다니신다면 분명 이 안강지역에도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저 서울 바닥에 가서, 저 부산 바닥에 가서, 저 유흥가와 환락가에 가서 최권능목사님이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쳐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그 단순한 말속에는 비록 철학도 이론도 교리도 없지만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예수의 혼, 예수의 영,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최권능 목사님 속에 주의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유치한 말이지만 그가 혼을 다해서, 영혼을 다바쳐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안 믿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그 안에서 차 있을 때 그의 삶은 성령이 담겨져 있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성령이 인도하는 그러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기에 그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았고 동시에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이라야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살아 있어야 생육하고 번식을 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것은 자체로서도 별 의미가 없거니와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사로잡힌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신앙인만이 참된 생명의 가치를 누리게 되거니와 동시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어떻게 성령충만함을 받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이처럼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살아서 펄펄 뛰는 물고기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차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쓰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속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정녕 살아있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충만이 무엇입니까? 충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와 생명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인격을 지배하고, 내 자아를 지배하고, 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넘쳐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 가득하니 이제는 내 욕심, 내 못난 자아, 내 짧은 소견, 내 미련한 인생관 이러한 것들은 죽고 맙니다. 그 대신 성령님안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과 은혜와 진리가 나를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배하니 내 인생의 가치관, 내 성품의 기질이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혼이 나를 지배하니 나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살리겠습니까? 무엇이 우리 교회를 더욱 힘있게 하겠습니까? 무엇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속에 진정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가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릴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렇게 생명력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성령에게 붙들릴 때, 속된 말일지 모르지만 거룩한 영이신 성신으로 신들릴 때 우리안에 우리 가정안에 우리 교회안에 이 지역사회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쁨과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려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진리안에서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되며,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 모든 헛된 욕심들을 버리고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가운데 정녕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에 충만할 때 봉사하며, 전도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속에 진정으로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속에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에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요, 생명의 영이요, 은혜와 사람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과 우리의 모든 가정들과 모든 성도들 생명 속에 이 하나님의 혼이 살아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속에 그리고 우리의 가정속에 교회속에,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혼이 살아서 역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생명이 역사합니다. 은혜와 사랑이 역사합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모든 우고와 질환이 물러갑니다. 추하고 더럽던 것이 아름답고 깨끗하게 됩니다. 혼돈된 것이 질서를 찾게 되고, 죽어 가는 것들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얼어붙은 동토에도 생명의 싹이 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성령충만함을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데는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함을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과 어둠과 미움과 욕심과 저주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우리 가정안에서 우리 교회안에 생명의 역사가 은혜의 역사가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기 위하여 더욱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덧입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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