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설교 말씀

 

 


고난 뒤에 있는 축복   (벧전 5:7-1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
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
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전서 5장 7절-11절)


1. 모든 사람들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고, 그것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습니
다.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나라 뿐만은 아닙니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다 있습니다.
그렇게 풍요로운 나라라는 미국에서도 보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편하게 사는 사람들 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도‘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라는 찬송을 부릅니다.
이 세상은 험하고 나는 약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터전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디를 가 보아도 안전한 삶의 터전은 없습니다.
<흔들리는 터전>이라고 하면 실감이 나지 않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한번 <지진>이 날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진이 날 때 보면 땅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아무리 높은 건물도 터가 흔들리니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의 삶의 터는 어디에 가 살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 탈북자들을 일컬어 <새터민>이라고 부릅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이란 뜻일 것입니다.
저들이 천신만고 악몽과 같은 생활의 터전에서 탈출하여 <새터민>이 되었지만, 정작 남한에 와 보니 역시 세
상이 그렇게 살기가 쉽지만은 않음을 절감할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에 새 터를 마련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민 가서 고생하지 않고 자리를 잡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성공한 사람들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눈물날 정도로 고생한 분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어딜 가나 모두 힘든 세상임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인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차이는 이 세상 안에서도 구별됩니다.
신앙인은 터가 흔들릴 때도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위에 찬송가처럼,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지만 늘 기도 힘쓰면 큰 능력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도 비유적으로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집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무너지지 않을 반석위에 지은 집이 있고, 다른 하나는 모래위에 짓는 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반석이 바로 믿음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왜 필요한가?
잔잔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파도가 일어나 몰려오기 시작하면 닻이 필요합니다.
<닻>을 내리면 파도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똑같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가정은 무너지지 않는데, 어떤 가정은 무너져 내립니다.
믿음이란 닻줄이 없거나 끊어졌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2. 믿음의 터가 견고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의 터는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육체도 튼튼해지려면 단련해야 튼튼해집니다.
팔뚝의 힘도, 다리의 힘도, 반복된 운동을 통하여 견고해집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왜 기성세대에 비하여 약해졌습니까?
고난의 연단이 없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6.25 세대들을 보면 모두 삶의 연단을 통해 단련된 사람들이었기에 지금 세대들 보다 강하게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있었습니다.
왜 군대에서 해병대가 강하다고 합니까?
훈련을 강하게 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까지 이르도록 훈련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고난은 삶의 터를 견고케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셋째,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난 중에 근신하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하고, 마귀를 대적하지 못하고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술 취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낙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방탕하는 일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들이 낙심할 환경에서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포기하는 환경에서 정면으로 대결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낙심케 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끄는 마귀를 대적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낙심하면 들어 누워 버립니다.
술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제대로 걸음걸이를 못합니다.
그리고 남의 얼굴을 그어 버립니다.
폭력을 씁니다.
주먹을 휘두릅니다. 
그래서 다시 감옥으로 갑니다.
그러다 나오면 다시 반복해 그런 길을 걷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흔들리는 터전에서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붙들어 맬 수 있는 믿음이란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닻줄이 있는 사람에게는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폭풍이 지난 후에 떠오를 태양을 바라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신앙의 눈으로만 보여 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눈을 통하여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요셉도 이 눈을 통하여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보았습니다.
에스더도 이 눈을 통하여 담력과 힘이 생겼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현재의 고난을 보면서 낙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고난 뒤에 오는 축
복을 바라보는 영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3.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영적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는 현세에서도 100배나 얻고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님과 복음을 위한다는 고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고리입니다.
그 고리에 닻줄을 매어 놓으면 어떤 세상의 어떤 풍랑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복음 성가 중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후렴>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참으로 가사에 은혜가 되는 복음성가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우연하게 들으면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눈물이 왈칵 났었습니다.
참으로 돌아보면 험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봅니다.
우리 세대가 다 그런 험한 세상을 만난 세대들이었지만, 전쟁, 죽음, 배고픔, 가난의 험한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그런 중에도 힘들고 어려운 목회의 길에서 이제까지, 이 자리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라는 말은 자꾸만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고난만 보지 말고,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영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벌써 우리 보다 앞서간 성도들의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면서 승리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고난 중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미리 감사 하십시요.
우리의 믿음의 터는 이 고난을 통하여 더욱 더 견고해 질 것입니다.
모쪼록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 서십시요.
일어서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의 팔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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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주일예배설교, 감사하는 자의 복

 

 

 

제목 : 감사하는 자의 복

말씀 : 시107:1~7

1.감사는 현재를 행복하게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누굽니까?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굽니까? 그것은 권세나 지식이나 재물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키가 크고, 인물이 훤칠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정말로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요,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이요,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100여세대가 살고 있는 15평짜리 낡은 아파트 단지가 있다고 칩시다. 여기에 모여사는 사람들은 물론 특별한 경우도 있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기본 재산도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월급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재산도 월급도 많지 않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속극에 나오는 넓고 호화스러운 집과 멋진 청춘남녀들과 그들이 다니는 멋진 직장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무슨 복이 많아서 저렇게 좋은 집에서 좋은 직장을 다니며 너무나 멋지게 생긴 사람들과 사는데 내 꼴은 이게 뭐냐고 탄식하며 원망하며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집에 들어갈 때마다 감사할 것입니다. 비록 작지만 열심히 일하고 돌아와 안식할 수 있는 이 귀한 보금자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비록 많은 월급은 아니지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비록 넉넉지는 않지만 우리 가족 먹을 것, 입을 것, 편히 누워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엿새동안 힘써 일하고 주일 하루 쉬면서 예배드리고 가족과 함께 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똑같이 기본 재산이나 월급도 많지 않고 15평짜리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전자의 사람은 그나마 그 작은 아파트도 진정으로 소유하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가난뱅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이 많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누릴 줄 아는 부유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개를 가지고도 백가지를 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백개를 가지고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부자입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물론 한 개를 가졌어도 백가지 천가지를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백개 천개를 가졌어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만가지를 주어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하는 가난뱅이인 것입니다.

인터넷의 어떤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내 손에 펜 한 자루 쥘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펜으로 그림도 그릴 수 있고, 사랑의 편지도 쓸 수 있으니까요. 내 입으로 말 한마디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입으로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으니까요. 내 발에 신발 한 켤레가 신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신을 신고 집으로도 일터로도 갈 수 있고, 산책도 할 수 있으니까요.

내 귀로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내 코로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은은한 꽃향기와 맛있는 음식 냄새와 사랑하는 이의 체취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내 곁에 부모형제와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서로 의지하고 기대고 마음을 털어놓으며 따뜻한 위로의 말도 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해도 손에 펜만 한 자루 쥘 수 있어도, 말만 할 수 있어도, 들을 수만 있어도, 걸을 수만 있어도, 냄새만 맡을 수 있어도, 내 곁에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뭔가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기쁨을 찾는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가진 것을 진정으로 누릴 줄 아는 사람의 것입니다. 지식이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라도 감사할 줄 아는 자의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격언에는 천국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고, 지옥은 불평하는 자들로 가득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특별히 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없는 거, 모자라 거, 약한 것, 부족한 것 생각하며 원망 불평 낙심 절망하지 말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살전5:18절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풍성한 계절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멀쩡한 사지를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유와 평화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을 달라고 하기전에 먼저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저와 여러분은 감사와 은혜가 충만한 심령으로 기쁨이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감사는 행복한 미래를 보장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오늘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내일의 복을 보장해 주는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이기도 합니다. 감사할 때에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지만 감사할 때에 힘도 생기고 지혜도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긍정적 적극적 에너지 넘치게 됩니다.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게 됩니다. 그래서 앞길이 열리고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사지가 없이 머리와 몸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좌절과 원망이 아니라 이런 아들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열심히 키웠습니다. 그에게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반학교에 보내 정상적인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하고 그들과 함께 농구도 하고 축구도 했습니다. 대학에 가서는 정상적인 학생들보다 더 많은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히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으로, 잡지사 기자로, 방송사 캐스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 오토다케의 부모나 오토다케 본인이 없는 것을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 속에 있었다면 이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생에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아들을 주셨습니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왜 이런 꼴로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왜 남들 다 가지고 있는 팔다리도 내게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원망하고 불평하였다면 이 사람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보나마나 저 길거리 한 모퉁이에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얻어먹는 거지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토다케의 부모나 그 자신이나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불리한 여건보다는 그들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을 때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감사하며 위대한 일을 감당하며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원입니다. 감사는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께 대하여 만족감을 느끼게 합니다.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게 만듭니다. 사랑과 기쁨과 용기와 자신감을 가져다줍니다. 갈등과 미움과 저주와 불평과 원망 등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없애버립니다. 또한 감사는 정신적, 육체적 긴장을 완화시켜 줍니다. 면역력을 높이고 활력을 주어 육체의 건강을 지켜줍니다. 질병에 잘 걸리지 않게 하고 설령 질병이 와도 감사와 긍정속에 사는 사람은 치료가 잘 됩니다. 마음이 편해지고, 혈압이 떨어지고, 소화를 잘되게 만듭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런 사람은 잘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잘 되지요, 힘과 의욕이 생기지요, 마음이 편해지고, 육체의 신진대사도 잘 되지요, 옆에 있는 사람도 기쁘게 하지요, 어려움이 와도 낙심절망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헤쳐 나가지요, 모든 일에 긍정과 적극성과 성실성을 가지고 임하게 되지요, 그러니 어떻게 잘 안되겠습니까?

그래서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은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 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50:23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을 통하여 자신과 이웃에게 힘과 의욕과 활력과 기쁨을 주고, 매사에 적극성과 긍정과 열심을 가지고,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을 감동시키고 그래서 오늘이 행복하게 하고 내일의 축복이 보장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감사가 곧 믿음의 척도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서남북 사방에서 모아서 구속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심을 믿는다면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감사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로, 이렇게 신비한 존재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셔서 우리의 죄과를 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걸 알고 믿는다면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창조, 인도, 거룩, 의, 선, 구원을 믿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감사 곧 믿음이요, 믿음이 곧 감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죄는 감사하지 않는 죄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모른다면 어찌 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먹고 입고 잠자고 게다가 천국의 은총까지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이고, 믿음이 곧 감사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고, 믿음이 있는 자도 감사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주실 것에 대한 믿음으로 감사하며 사심으로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할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구원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감사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감사할 수 밖에 없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요건들이 있지만 설령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감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을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2절부터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들 즉 죄와 마귀와 어둠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우리가 주리고 목마름으로 피곤할 때 우리를 부르셔서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정 갈 바를 알지 못하던 인생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가 생명의 길인지, 어디고 천국길인지 천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살던 인생이었습니다. 죄와 무지와 어둠의 세력에 붙잡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치닫던 인생이었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커녕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다만 건져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거할 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마귀와 죽음의 권세에 억눌려 있는 자가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큰 은혜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나아가 저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은 더할 나위없이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오늘과 내일의 행복을 보장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은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이 있으면 감사하겠다하지 말고 지금 이미 주어진 것에서 감사거리를 찾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해지면 감사하겠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조금 힘든 일이 있어도 거기에 함몰되지 말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가운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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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부활절):전인적 부활

 

 

 

제목 :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성경:마28:1~6

 

1.놀라운 축복의 사건, 부활

 

할렐루야! 오늘은 정말 너무나 감격스럽고, 너무나 큰 기쁨과 감사와 은혜와 소망이 충만한 날입니다. 오늘은 정말 세상의 그 어떤 날과도 견줄 수 없는 가장 크게 기쁜 날이고 축복의 날입니다. 육체가 병들어 죽다가 살아난 것보다도, 금덩어리를 산더미처럼 얻게 된 것과도, 세상의 가장 큰 권세를 얻게 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이요 축복의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 어둠의 권세,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깨트리시고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을 열저 젖히고 나오심으로 예수님이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동참하는 모든 자들은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승리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건강이나 권세나 모든 부귀영화는 며칠 후면 다 사라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6:5에서는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믿고 그 분을 심령속에 모셔들인 자는 그의 부활에 연합하여 모든 죄와 사망과 어둠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 부활절에는 모든 어둠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더욱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속에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들 모두는 진실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여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세상의 모든 어둡고 추하고 칙칙하고 절망적인 것들을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고 생명의 기쁨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전인적 생명을 부활시키신 사건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무덤권세, 사망권세, 사탄의 권세, 모든 어둠의 권세 다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 혼자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한 생명을 주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여러분, 오늘 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여기 계시지 않다고 하십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무덤입니다. 더럽고 냄새나고 으스스하고 캄캄하고 절망과 두려움과 공포와 어둠만이 있는 곳입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곳입니다.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덤속에서 당할 그 고통과 절망과 캄캄함과 두려움과 공포와 저주를 대신 받으시기 위하여 잠시 무덤의 권세 아래로 스스로 들어가셨지만 그러나 그분은 언제까지 거기 계실 분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하셔서 잠시 맛보아야 할 과정일 뿐이요, 예수님께서는 그 더럽고 냄새나고 절망적인 무덤의 권세아래 억눌려 있을 수가 없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이심을 명백히 보여 주셨고, 그 부활의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새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죽으신 게 아니라 죄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장사지내는 일이었습니다. 절망과 고통을 장사지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죽음과 절망과 고통을 장사지내 버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은 영과 혼과 육신이 다시 살아 전인적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 이상 무덤가에서 예수님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돌아가신 예수님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들을 이기시고 승리하시고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또한 지금도 여전히 성령을 통해서 승리의 주님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그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 승리하신 예수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이 우리 가운데 힘을 쓰지 못합니다. 더 이상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절망과 더러운 것들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승리의 주님이 그런 것들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상황과 어둠의 세력과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더 이상 무덤가에서 예수님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와 사망과 고통과 슬픔과 절망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 등의 마귀사탄의 권세에 억눌려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신 살아계신 예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 인도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죄와 사망과 고통과 연약한 것과 절망적인 것들을 정복하고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믿음을 부활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믿음이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온갖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시는 주님을 친히 보고,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목격하기 전에는 형편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앞에서 모두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끝났다고 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그들을 만나 주셨을 때,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셨을 때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나 절망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위대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혹은 십자가위에서, 혹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혹은 굶주린 맹수의 밥이 되어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는 분이심을 명백히 보여 준 사건입니다.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요20:28절에서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고백했지 않았습니까?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주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인도에 가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주님의 뒤를 따라 순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믿음을 온전히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을 온전히 회복해야 합니다. 그 잘난 지성과 이성과 경험과 논리를 접어두고 천지의 창조주로써 생명의 주관자로서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고, 손으로 만져본 사건입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 만져 본 것을 기록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걸 믿지 못하는 자들은 오직 그들 자신이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갇혀 있을 따름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그때에는 완전한 부활의 능력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런 분명한 부활 신앙을 살아가실때에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기쁨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사랑을 부활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귀의 이간질로 시작된 인간사이의 갈등과 미움과 고통을 깨트리시고 사랑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인간 사이의 갈등과 불화와 미움과 저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마귀사탄의 역사였습니다. 사탄은 먼저 하와를 꾀어 선악과를 따먹게 합니다. 그리고 더 부추겨서 하와로 하여금 아담을 꾀어 먹게 함으로써 결국 아담을 공범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아담은 사랑하는 아내 하와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마귀는 선악과를 통하여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과 갈라놓았을 뿐 아니라 아담과 하와 사이에 갈등과 미움의 씨를 뿌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갈등과 미움은 집안 전체에 누룩처럼 퍼집니다.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큰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와 질투로 죽이게 됩니다. 가족관계가 깨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 왜곡된 관계는 더 나아가 이웃과 이웃사이에 불신과 미움과 갈등을 유발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는 가정, 지역사회, 국가 그 어느 공동체를 막론하고 투쟁과 갈등과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시기와 미움과 갈등이 편만해 있는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원수조차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에게 몹쓸 채찍질을 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에게 침을 뱉고, 뺨을 치며 온갖 희롱을 다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상)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결국 사랑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움과 증오와 멸시천대까지도 가지고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다 떨쳐 버리고 위대한 사랑의 승리자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인간과 인간사이의 사랑을 부활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이 부활절을 보내면서 이점도 깊이 묵상하여 모든 미움과 저주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주님의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에게 혹시 미움이나 시기나 저주나 질투나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남아 있다면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모든 생명과 사랑과 은혜를 부활시킨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여 우리의 심령속에 주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부활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부활의 기쁨이 더욱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소망을 부활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은 한마디로 하늘나라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셨던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죄를 용서해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쫓아주시고, 배고픈 자에게 떡을 나누어 주시고, 죽었던 자를 살려 주심으로써 천국의 모형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하늘나라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맛보는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해 주실 새로운 세계에서나 완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것만이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있는 인생이 받게 될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만으로는 천국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물리쳤으면 이제는 새생명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죄를 깨끗이 씻어버린 다음에 그 깨끗하게 씻어진 공간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끗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로 생명으로 거듭나 영원한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갔던 제자들, 고기나 잡으러 가련다하고 낙향했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이 끝이 아님을 알고,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희망과 소망 속에 다시 모였습니다. 주님의 분부대로 모여 기도에 힘썼습니다. 드디어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의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우리의 소망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망과 꿈과 생명을 주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행4:33절에서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비겁하게 다 도망갔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진정한 생명의 주님이시오, 부활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희망을 주고 소망을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원수는 패한 것입니다. 죄도 패하고, 마귀사탄도 패했습니다. 죽음도 패하고, 미움도 시기도 질투도 원수도 절망도 다 패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는 예수님의 것만이 아니라 그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활절을 보내며 우리의 유일한 생명이신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찾아 오셔서 우리를 모든 죄의 짐으로부터 건져주시고, 새생명을 주시고, 사랑과 믿음을 회복시키고 천국의 소망을 주시는 주님과 더욱 온전히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심령속에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소망으로 가득 채워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어둠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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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교회의 사명( The mission of the church)

 

 

 


사무엘상 4장 19∼22절

오늘 본문은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정시대로 진입하던 역사적 전환기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제사장 엘리와 두 아들이 이스라엘을 이끌다 가문이 몰락하고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한 참담한 상황입니다.

 

한 가문이나 한 시대의 흥망성쇠는 어느 민족에서나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 평범한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사람인 성경 기자는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적 시각으로 보고 해석합니다. 이 익명의 선지자는 제사장 엘리 가문의 몰락 이유를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 가문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스라엘의 패망 원인도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민족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교훈합니다(21절).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 없이 사는 죄를 범했고, 엘리는 이런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나머지 책망과 교훈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 앞에서 오만하게 행동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탐욕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제사를 멸시하고 제사장을 돕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일을 저지르며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2장 17, 22, 30절). 또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을 전하고 보여주는 사명을 외면했습니다.

이 시대를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3장 1절). 엘리 가문은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합니다. 오늘의 교회, 곧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중히 여기며 신앙생활과 사명을 감당해야 할지를 교훈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과 자랑은 예산이 많은 것이나 교인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크고 웅장한 건물이나 편리한 시설, 좋은 교육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교회의 영광과 자랑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계신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 사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예배하며,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바르게 전하고, 하나님의 이상 곧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가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실현되는 평화의 세상을 위해 목회하고 선교하는 교회 상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줘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물질과 인적 자원과 세상 권세까지 가진 막강한 조직과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과 온유와 관용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세상에 구현하는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신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을 우리는 개인을 위해, 교회만을 위해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굶주리고 가난한 형제와 나누라고 주신 물질의 축복을 내 말을 듣고 내 편이 되어야만 준다고 형제의 자존심을 짓밟지는 않습니까?

하늘의 영광과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으로 오시지 않고 순례자의 도상에, 말구유에, 가장 작은 자로, 약한 자로, 낮은 자로 오셨습니다. 그 뜻을 받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강원구 목사(서울 효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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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주일예배설교  / 가장 큰 기쁨의 소식

 

 

 

 


제목 : 가장 큰 기쁨의 소식, 부활

성경 : 행5:27~32

1.가장 큰 기쁨의 소식, 부활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이라는 인류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생명의 주가 되심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전 우주 공간과 역사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절은 세상의 그 어떤 명절이나 절기보다도 가장 위대하고 기쁘고 복된 절기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시다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것도 다시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을 영광의 몸을 입으시고, 그래서 시공을 초월하시는 몸을 입으시고 살아 나셔서 그 영광스러운 몸으로 두둥실 떠올라 승천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광스러운 새 생명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굉장하고 놀랍고 신비하고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세상의 정말 별것 아닌 이성과 지식과 경험과 과학을 운운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신화처럼 여기고, 부활과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면 허황되고 유치한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저 고상한 윤리적 종교적 철학적 차원에서 믿거나 아니면 그저 세상사는 동안에 복이나 좀 받아보려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활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그래서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하게 증언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막8:31절에서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요11:25절에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마28:6절에서는 말씀대로 살아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확실히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살아나셨는데 예수님과 자신의 부활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한다든지 또 믿는다고 하면서 마치 부활을 모르는 사람처럼 기쁨도 능력도 소망도 없이 살아간다면 어떻게 주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겠습니까?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다시는 그 죽음의 권세와 시간과 공간과 상황과 어두운 세력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완전히 영화로우신 몸으로 다시 사신 예수님, 그래서 그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도 주님의 부활의 능력에 동참하여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며 어찌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 속에 살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이 놀랍고 위대하고 엄청난 소식을 증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30,3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여러분, 보세요.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 그리고 구주로 삼으셨다고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 뭐 당연하지 않느냐고요? 네 물론 당연하지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여러분, 당연한 이야기인데 문제는 지금 상황은 그렇게 당연하게 말하기가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27,28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보십시오. 지금 유대의 집권자들이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공회에 끌어다가 놓고 ‘예수에 대하여 가르치지 말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예수의 가르침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느냐? 그가 죽은 책임을 우리 책임으로 떠 넘기려고 하느냐?’면서 또 그러면 잡아 가두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금 제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감옥에 갇힐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무슨 헛소리냐?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으냐? 우리는 오직 주님께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말할 뿐이다. 너희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주님은 분명히 살아나셔서 우리의 임금과 구주가 되셨다.’고 당당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사도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목격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 부활의 능력과 의미와 자신들의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감격과 기쁨과 소망과 확신 속에 외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고, 물론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리고 물론 부활한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완전한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물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 속에 천국의 은총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더욱 소망과 감사와 기쁨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과학이니 이성이니 문화니 지식이니 하는 별것 아닌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이나 우리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 가운데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고 오직 부활만이 우리에게 가장 큰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을 주는 가장 큰 능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생명의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못할까요?

2.육체적 안목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이토록 확실한 사실이고,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크고 놀랍고 엄청난 일이고 우리에게 가장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는 가장 큰 능력이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도 않고 믿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부활이 주는 그 엄청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물론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은 그저 육체적인 안목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멀어지고 영혼이 죽어감으로 오직 육체가 되어 모든 것을 육적 물적 가치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나 천국을 이야기하면 허황되게 들리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창6: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대홍수로 노아 가족이외의 인류를 멸망시키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노아 가족 외에는 다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셨느냐하면 그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육체가 된 게 뭡니까? 전에는 육체가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럼 뭡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겨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인생의 본분도 알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지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오직 육체적 만족과 기쁨과 영광만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죽은 영혼을 가지고 죄와 무지가운데서 그저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욕구만을 채우는데 급급하며 살다보니까 영적인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허황된 이야기로 생각하며 웃고 조롱하며 자신이 얼마나 무지 속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세상 것만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세상에 예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두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주여, 무슨 말씀입니까?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감히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제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된 꾸지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눅24:11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즉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천사에게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에게 달려가 전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허황된 말처럼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제자들이 언제 변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자신을 보았음에도 아직도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너희가 아직은 믿음이 연약하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러니 내가 가면 성령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니 성령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그러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고 그러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열흘만인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다른 언어를 말하며 강력한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집권자들이 위협하고 감옥에 가두고 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고,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며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육체의 사람이었는데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주님의 부활과 천국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와 영생복락을 온전히 믿고 그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육의 사람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온갖 죄와 무지와 추함과 어리석음과 한계 속에 있는 육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생명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그 길로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 속에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감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8:6절을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여러분,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영이 죽어 있으므로 오직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의 생각을 따라 살기 때문에 부활이고 천국이고 영생이고 영광의 나라고 도무지 관심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믿어지지도 않고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 인생인줄 압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받으면 영이 살아나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갑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동행함으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과 기도와 찬양 생활에 힘씀으로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성령을 받은 분은 더욱 충만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주님의 부활이라고 하는 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고 엄청난 사실에 대한 온전하고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부활 신앙은 생명력이 넘치게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은 우리 인류에게 영원하고 완전하고 온전한 생명을 주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분명히 그 삶이 달라집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삶에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소망이 넘쳐나게 됩니다.

제자들이 그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부활의 주님과 동행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실히 알게 되었을 때 인생이 백팔십도 달라졌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세상 영광과 즐거움을 위하여 살던 사람에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능력과 은혜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삶에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위협과 유혹 앞에서 도망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세상과 타협하던 삶에서 죽음을 무릎 쓰고 부활의 주님의 증인이 되어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며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좌절 할 것이 무엇입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헐뜯고 때리고 빼앗고 죽이고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부활이 있는데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또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할 때에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데, 그래서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세상에서 얼마든지 생명의 은혜가운데 살 수 있는데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요11: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 보세요.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고 하였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죽기는 죽되 죽는 게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데 그냥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과거에도 일어났고, 미래에도 일어날 일이고 동시에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말 그대로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면 지금도 계속해서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소망과 능력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는 그 순간 거듭나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고, 부활의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소망으로 채워주심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능력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힘차게 증언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물론 주님 다시 오실 때 완전한 부활로 주님 앞에 서게 되고, 그때에 완벽하고 영원한 승리자로서 세세토록 완전한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금번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시고 살아감으로써 부활의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활의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능력을 마음껏 맛보며, 이 놀라운 부활의 소식을 힘차게 전함으로 세상에 부활의 생명과 소망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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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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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Sunday worship preaching

 

 

 


제목 : 언제나 소망은 있습니다

말씀 : 애3:19~26

 

1.우리에게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근간에 우리 교회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 있습니다. 무슨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상황들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농어촌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인데 농촌사회가 초고령화, 동공화되다보니 교회도 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어 천국으로 가시는 분은 많고 들어오는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지난 1월 말에는 정병호 장로님이 소천하시고, 지난 주에는 최윤익 집사님이 소천하셨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지 8년 좀 넘었는데 제가 직접 장례예식을 치러드린 분이 15분이고, 그밖에 우리교회 다니시다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셔서 소천하신 분이 너댓분이 계셔서 약 20명 정도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큰 교회라면 20명이 적은 숫자인지 모르겠지만 전체성도라야 50여명 정도인 교회에서 20여명은 40%에 해당되는 수치이므로 큰 수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 성도님들 중에도 연로하시거나 육신의 질고 또는 사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우들도 많습니다. 이재성도는 지난해 10월에 쓰러져 지금까지 넉 달 이상은 누워계시고, 지난 주에는 김춘옥성도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어깨관절을 크게 다쳐 인공뼈를 넣는 대 수술을 받았습니다. 또 고상진집사님도 건강이 좋지 못한 가운데 있고, 김병철집사님을 비롯해서 여러분들이 몸과 마음이 약하여 생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김춘옥 성도님과 이재 성도님 문병을 다녀왔는데 김춘옥 성도님은 적어도 몇 개월은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고, 이재성도님은 의식은 회복한 것 같은데 본래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분이라서 사람이 가면 그저 힘없이 손을 겨우 잡고 아는 것 같은 반응만 보이고 있습니다. 그 날 중환자실에서 면회를 하고 나오려하는데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저를 계속 응시하는데 그 눈빛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새벽 기도 시간에는 얼마나 울면서 기도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저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하나님, 어찌하여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셨는데 이 불쌍한 사람을 통하여 어떻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려 하십니까? 하나님, 이 불쌍한 사람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데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도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좀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할 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가노라면 정말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 그저 눈물 흘리며 기도할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서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 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애3:49,50절에 보면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를 기다리며 그저 눈물 흘리며 기도할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말씀속에서 우리는 소망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지금은 고난속에서 그저 기도하며 눈물 흘릴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고 은혜를 내려 주실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절망적이라도 분명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날이 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낙심하며 눈물 흘리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의 역사를 진행시키고 계십니다. 절망의 그림자가 아무리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고 할지라도 머잖아 절망의 그림자는 물러가고 마음껏 감사와 기쁨과 은혜의 찬양을 할 수 있는 날이 곧 다가옵니다. 혹시 조금 시간이 걸린다해도 그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고, 그날이 오면 모든 아픔과 고통과 절망의 탄식소리는 사라지고 기쁨의 찬가가 울려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35: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할 때입니다. 그래서 낙심과 절망과 고통이 그들을 짓누르고 도무지 희망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곧 해방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맹인의 눈이 열리고,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리며, 저는 자들이 사슴 같이 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어떤 사나운 짐승이나 근심 걱정 염려 불평 탄식거리는 근처에도 얼씬 거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으로 춤추며 찬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세상,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바벨론 포로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었지만 아직은 광야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 영원한 가나안 복지인 천국에 가기까지는 고통과 아픔의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순간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탄식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시계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탄식이 변하여 기쁨의 함성이 되며, 고통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사막이 변하여 낙원이 되고,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어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그 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혹 힘든 순간이 있더라도 그저 겸손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과 은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문제들을 반드시 이기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고통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고난의 현실이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래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렸고, 자연도 온전한 상태를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온갖 거짓과 폭력과 질병과 전쟁이 있습니다. 자연의 질서도 상당히 왜곡되어 온갖 자연재해와 질병과 기근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이 만든 온전치 못한 문명의 이기들이 도리어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와같이 사람도 자연도 사람이 만든 문명도 온전치 못함으로 사람과 자연과 문명의 이기들을 통하여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고 받을 때가 너무나 많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안에서 그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그 현실을 이기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19~2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러분, 보십시오. 21절에 보니까 이것을 내 마음에 담아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소망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럼 마음에 담아 둔 것이 뭡니까? 내 고초와 재난입니다. 그래서 울며 탄식하고 있는데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히려 소망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소망이 생겼습니까? 22절, 24절에 있습니다. 22절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4절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즉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온전히 진멸 된 것은 아니어서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진멸 당할 수 밖에 없는데 지금까지 살려주셨고, 그 자비와 긍휼로 이후로도 우리를 살려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고난의 현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큽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진작에 진멸 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로도 그런 은혜로 우리가 진멸당하지 않고 결국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기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현실 앞에서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항변할 것이 아니라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천배만배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욱더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욥의 고난을 아시지 않습니까? 솔직히 지금 어떤 고난을 당해도, 어떤 억울한 일을 만나도 욥의 고난과 억울함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됩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엄청나게 받아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소가 천 마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되는 거부였습니다. 아름다운 아내와 열명의 예쁜 자녀를 둔 다복하기 한량없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말 그대로 졸지에 폭삭 망했습니다. 세상에 망해도망해도 이렇게 망할 수가 없고, 원통하고 절통해도 이럴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도적떼의 습격을 받아 재산은 몽땅 빼앗겼습니다. 열 명의 자녀가 하루 아침에 모두 죽었습니다. 아내는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며 죽으라면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온 몸에는 종기가 나서 재 가운데 앉아서 몸을 긁고 있는 처량하기 짝이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도 한때는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죽어서 나왔더라면, 내가 낳던 날이 없었더라면, 내가 낳던 날에 빛이 없었더라면, 어찌하여 내게 생명을 주셔서 이 험한 꼴을 보게 하셨는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참담하고 캄캄하여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하면서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가 그렇게 끝내 무너져 내렸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의인이 아니지요. 욥23:10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나는 눈도 귀도 마음도 어두워 하나님을 보이지 않고 음성도 들리지 않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의 고난을 알고 계시며 뭔가 계획을 갖고 계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정금같이 나오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고, 마침내 시련의 기간이 끝나자 두 배의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이라도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만한 능력과 사랑과 지혜가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현실이 어렵고 낙심이 될 때에라도 그 고난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저 겸손히 무릎 꿇고 주님의 뜻을 물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역사하심을 믿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모든 고난의 현실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소망 중에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현실을 인정하고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길이 보입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오늘 24~26절을 보겠습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비록 고난의 현실이 쑥과 담즙처럼 쓰고 아프지만 여호와께서 나의 기업이 되심으로 나는 여호와를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선하시기에, 여호와께서는 전능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므로 분명히 긍휼히 여기사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잠자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그 작은 생각과 이성과 판단으로 함부로 떠들어대지도 않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원망과 불평과 좌절 속에 빠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과 구원과 섭리를 믿고 조용히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꽤 오래전에 미국에서 15살 난 한 소녀가 심한 구타를 당하여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도무지 범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떤 목격자가 나타나 래리 밀러라는 사람을 지목하며 이 사람이 사건 현장에서 그 아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래리 밀러가 살인범으로 체포되었는데 사실은 이 사람이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시간에 사건 현장에 있지 않고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 뚜렷한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아 이 목격자의 증언으로 래리는 3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분통이 터질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한 목사님의 편지 중 한 귀절에서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형제여!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은 우리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 위로를 받은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성실하게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교도소에서 실시하는 성경공부에 열심히 참여하였습니다. 그러자 몇 년 후에 그의 신실한 믿음과 열정이 인정되어 성경공부반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교도소 내에서 실시하는 고교 졸업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죄수들도 열심히 가르쳐 많은 사람들이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과 중등과정을 가르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며 사는 동안의 그 자신도 삶의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12년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진범이 체포되어 래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무려 12년 동안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해보면 정말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출옥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하게 되었고, 그래서 나만 알던 삶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타인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만약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런 삶을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12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그 안에서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 나갔을 때 결국 그는 승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요셉과 같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습니다. 사람도, 자연도, 사람이 만든 문명도 심히 왜곡되고 혼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현실 속에는 어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분통이 터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어둠의 순간에도, 아무리 절망감이 짓누르는 순간에도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분명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현실이 어떻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겸손히 엎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엎드려 주님의 뜻을 물으며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분명히 주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하하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은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현실을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서도 주의 은혜를 누리다가 마침내 영원한 영광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복된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학환 목사 (하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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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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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복된 만남을 위하여

 

 

 

말씀 : 눅10:30-37

제목 : 복된 만남을 위하여

1.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태어나서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의하여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도 잘 만나면 좋습니다.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와 게다가 인품까지 좋은 부모를 만나면 자식의 삶이 평안하고 부요하고 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술주정뱅이에다가 인품까지 고약한 부모를 만난다면 자식의 삶이 험난할 것입니다.

물론 배우자도 그렇죠. 그런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와 출중한 외모와 훌륭한 인품을 가진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쥐뿔도 없는데다 성품까지 고약한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삶이 힘들고 고달플 것입니다. 물론 친구나 이웃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면 많은 유익과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고약한 사람을 만나면 정말 피곤하고 힘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물론 다 기왕이면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야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좋은 사람이 못되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면 속된 말로 도둑놈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소위 황금율이라 불리는 마7: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당연하잖아요? 나는 남을 대접해주지 않으면서 나는 남에게 대접받으려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내가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데 누가 나를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 대하겠습니까? 나는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배우자에게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말 만남이 중요하므로 여러분도 좋은 분을 만나되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씀으로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만남이 되어 서로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2.남에게 끔찍한 불행을 준 사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 말씀에 보면 자기는 좋은 것을 누리려고 하면서 남에게 너무나 끔찍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주는 아주 나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오늘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러분,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입니까? 서로 생명을 살려주고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어도 시원찮을 판에 이 무지 몽매한 강도는 돈 몇푼 얻으려고 다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심지어 다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강도는 잘먹고 잘살려고 이런 몹쓸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정말 행복과 기쁨과 가치를 가져다주겠습니까? 뭐 빼앗은 것을 사용할 때에 잠시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그 심령이 평안할 리도 없고 성령 평생 그 짓을 해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할지라도 평생 동안 온갖 비난과 욕을 얻어먹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아가는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한 인생에 불과한 것이요, 결국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너무나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과 상처는 어떻겠습니까? 물건을 빼앗겨 물질적으로 많은 손해를 본 것은 고사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받았고,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후의 삶도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이 미련한 강도의 짓은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게 만드는 심히 어리석고 무지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또 크든 작든 또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나 절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하나님께도 책망듣고, 사람들에게 욕먹고 멸시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무시당하는 어리석고 무지하고 더럽고 추하고 볼품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 해야 할 것은 내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시에 나 스스로가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론 때론 불가항력적인 불행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그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구하며 그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데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마음에 새기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자기 마음대로 왜곡된 길로 잘못된 길로 다니다가 마귀의 밥이 되어 봉변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강도를 만난 사람도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에께 끔찍한 고통을 준 강도는 엄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죄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닥 봉변을 당했는데 그 길은 본래 매우 험한 길이라서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우범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길을 가기를 꺼렸고 부득불 가야 할 때는 여럿이 함께 다니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대책도 없이 혼자 그 길을 가다가 그만 봉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우리 인생길 전체에서나 혹은 인생길의 어떤 한 과정에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 나혼자 내 마음대로 하다가는 그런 불행한 일을 만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며 말씀 안에서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생길을 걸어가며 무엇인가를 추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내 마음대로 자신만 믿고 자기 생각대로 주님께서 동행하지 않는 길로, 심지어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길로 가면 자칫하면 이런 봉변을 당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캄캄한 밤길, 으슥한 길에 숨어 있는 강도처럼 숨어 있다가 우리 영혼과 정신과 물질과 육신을 덮침으로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실패나 아픈 기억들이 엎드려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삶을 영위했더라면 대부분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아픔이 아니었을까요? 그냥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길로 자기 마음대로 갔기 때문에 당했던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초한 불행과 아픔과 상처는 아니었을까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불행을 자초했던 것러첨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내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내 마음대로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우리의 완전하고 유일한 보호자이시며 인도자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동행해야 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안전하고 그 길이 복되고 그 길이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자신의 생각과 능력과 경험만을 의지하며 자기 마음대로 다니지 말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따라 겸손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사람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지나쳐간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31절, 32절을 보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 강도를 만난 사람은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때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이 사람을 못 본척하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당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걸 접촉하면 자신도 부정하게 됨으로 피해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금방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아 아직 강도들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보고 서둘러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무언가 급한 일이 있어 이런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이 지체되거나 성가신 일이 생길까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경우든 그들의 행동은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상황이나 안위나 평안함만을 구하는 무지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은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안타깝게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사람은 생명을 구함 받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반대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며 고통 받는 생명을 살림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복된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복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린 정도가 아니라 이건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 아니 굳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림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사람을 직접 해치거나 고통을 주지는 않았지만 마땅히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아픔과 고통을 당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적극적인 악만이 죄가 아니라 소극적 악, 즉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마땅히 선을 행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것도 악입니다. 그래서 약4: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여러분, 보세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하지 않으면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잖아요. 선을 행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가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거나 아픔을 겪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죄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유익을 주어야 할 때에 수수방관함으로 결국 죄를 짓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선과 진리와 의를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며 결국은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준 사람

앞에서는 여러 가지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는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33~3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강도 만나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드디어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하던 중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신속히 응급조치를 취한 다음에 주막으로 데려다가 주고는 치료비까지 내어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자기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고 멋있는 사람입니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강도 만나 다 죽어가던 사람은 새 생명을 얻음은 물론 비록 한편으로는 이 아픈 기억으로 말미암아 힘들 때도 있겠지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의 마음도 갖게 되고 새로운 희망과 소망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은 육체의 생명을 살릴 뿐 아니라 영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는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일을 한 것입니다. 또 사실 그 자신도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는 생명을 사랑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드려 살려 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게 되고 그래서 그 자신도 더욱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만남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던 적이 있다면 환경이나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먼저 스스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구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 내 생각과 경험과 의지와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내 코가 석잔데 남에게 도움을 줄 여유가 어디있느냐며 합리화시키고 변명하면서 하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이제 후로는 먼저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만나 교제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환경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밀접한 만남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주님의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과 마음을 공격하는 마귀사탄의 공격을 물리침으로 절대로 강도 만난 인생이 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강도를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학환목사( 하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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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설교]부활의 생명으로

 

 


제목 : 부활의 생명으로

말씀 : 눅24:30-35

할렐루야! 오늘은 정말 감격스러운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가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준 날입니다. 진정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이상 어찌 할수 없을만큼 참혹하고 처절하고 끔찍한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그러나 그 어둡고 절망적인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세상의 그 어떤 날보다도 기쁜 날이고 축복의 날이고 은혜의 날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탄생한 날과도, 세상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더 얻은 날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은혜의 날이요, 큰 축복의 날입니다.

여러분,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러한 부활의 의미를 다시한번 깊이 되새기며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 부활절에는 모든 어둠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더욱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속에 모시고 살아갈때에 더욱 부활의 생명이 충만한 삶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나 인간의 부활에 대해서도 이러킁 저러쿵 말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끊어졌던 생명이 다시 살아난단 말인가? 어떻게 죽어서 썩어 흙이 된 인간이 다시 살 수 있단 말인가하면서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이 이해하거나 말거나, 믿거나 말거나,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든지 말든지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인간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살이 찢기시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당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군병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창으로 찌름으로 온 피를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의 묘지에 장사지내었습니다.

그러나 3일후에 가보니 그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안식후 첫날에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와 살로메에게 천사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노라고.... 그리고 베드로에게, 제자들에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500여 문도에게 여러번 나타나셔서 함께 말씀도 하시고 함께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감람산에서 사도들과 제자들이 함께 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고 당신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처럼 장차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영광의 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팔목과 발목에 대못이 박혀서 십자가에 6시간 동안 못박혀 있었는데, 더구나 군병들이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가 다 쏟아져 내렸는데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 감추어 놓고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I.Q.가 두자리 숫자도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다.」라고 하는 복음을 전하다가 11명 모두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어떤 이는 사자의 밥이 되어, 어떤 사람은 칼에 맞아, 어떤 이는 돌에 맞아,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 놓고 부활을 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아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바보가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겠습니까?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위하여 온갖 모욕과 핍박과 죽음을 당하는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기에, 그들의 귀로 들었고, 눈으로는 보았고, 손으로 만져보았기에 그래서 그 예수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이였기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내걸고, 속된 말로 때려죽인다해도 「예수는 부활하셨다.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런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는 부활이 없으면 말짱 헛일입니다. 사랑도 좋고, 선고 좋고, 거룩도 좋지만 그러나 부활이 없으면 그거 다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사랑이니 선이니 의니 거룩이니 이런 것들은 다른 종교나 철학이 윤리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사망권세 억눌려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심을 명백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께서는 이러한 부활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 때 부활하신 주님의 새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오늘날 기독교가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가치관이 혼돈되고 말세가 가까워오면 올수록 진리는 비진리에 의하여 더 많은 도전과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앞으로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 질 것입니다.

요즈음 무슨 다빈치 코든지 뭔지 때문에 교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래서 한기총에서는 법원에 이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 소설과 영화에서는 예수님과 마리아가 결혼을 했고 그 후손들이 지금 살고 있다느니 뭐 이따위 허튼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이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그린 그림 속에 암호처럼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시온수도회에서 그런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이런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그들을 핍박하고 죽였지만 아직 그들중 일부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소설과 영화 속에 무슨 역사를 들먹이며 교묘하게 역사성이 있는 것처럼 위장해서 말하고 있으나 다 허구입니다. 교묘하게 자신들의 논리를 역사에 대입시켜 우리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시키려는 마귀의 장난인 것입니다.

또 며칠전에 뉴스에 보니까 유다복음서가 공개되었는데 이 복음서는 성경에 있는 복음서의 내용과 다르게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예수님의 지시에 의하여 그렇게 했다고 해서 교계에 논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허튼소리입니다. 정통 신학자들이 연구해보니 그것은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쓴 책입니다. 영지주의란 신비한 영적지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들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합니다. 물론 당연히 십자가의 죽음이나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절대자의 신령한 영으로 오신 분으로 그 예수님과의 신비한 영적인 교통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다 이단사설에 불과합니다. 그저 인간의 철학일뿐이지요.

여러분, 복음서가 성경에 있는 사복음서만 있는게 아닙니다. 도마복음, 베드로복음, 마리아복음, 요셉복음등 등 성경외의 많은 복음서와 많은 서신서가 있습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구약성경외에 많은 성경과 비슷한 문서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어떤 것은 가짜이고, 어떤 것은 이단자들이 쓴 것이고, 어떤 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읽어도 별 문제는 없으나 성경에는 미치지 못하는 문서들입니다. 이러한 문서들은 거의 성경과 동시대에 쓰여졌기 때문에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가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진리와는 무관한 것들입니다.

여하튼 여러분, 세상의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소리에도 현혹되지 마세요. 세상의 다른 어떤 소리에도 귀 기울지말 고, 여러분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에도 맡기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누가 뭐라고 현혹한다해도 오늘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에 정녕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여러분의 삶이 생명과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한 삶이 되기를 다시한번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바로 그런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처음에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하고 낙심중에 낙향하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새로운 희망과 소망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된 두사람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제자 즉 글로바라는 사람과 이름을 알수 없는 다른 한 사람의 제자가 예수님을 참혹한 죽음속으로 보낸 뒤에 좌절과 실의속에서 터덜터덜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대한 아주 각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능력 많으신 스승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와 가난과 다른 모든 고통에서 구원해 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고, 눈먼 자를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심지어는 죽었던 사람까지도 살리는 이분이라면 능히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들의 기대는 십자가 앞에서 그만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도 권능 있으셨던 주님이 그만 로마 병정들에게 온갖 조롱과 희롱을 당하시면서도 저항한번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침을 뱉아도, 채찍으로 내리쳐도, 가시면류관을 씌워도 가만히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 참을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아무런 힘도 못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온갖 희롱과 조롱을 퍼부어대도 주님은 그저 무기력하게 매달려 있을 뿐이엇습니다. “어이, 자네가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만에 지을 수 있다면서. 한번 지금 그 힘을 발휘해 보시지. 아니, 자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그럼 한번 너 자신을 먼저 구원해 보시지 그래. 자기도 못 구하는 주제에 남을 구하겠다고. 정말 웃기는구먼.”

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희롱하며 말했습니다. “이봐, 남은 구원해 주었다며 자네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뭐,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럼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래. 그럼 좋아, 지금이라도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럼 우리가 믿어주지.” 그러나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그냥 매달려 계셨고, 끝내는 그 십자가위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시고 참혹하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실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메시야라고 여겼던 예수, 이스라엘의 구원자라고 여겼던 예수, 이 가난과 압제에서 건져주실 분이라고 믿었던 예수, 그가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으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이제 예수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실망과 좌절속에서 힘없이 낙향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실망과 좌절 속에서 낙향하고 있을 바로 그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찾아가셔서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말을 겁니다. 「너희가 길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그러자 글로바는 기가 막혀서 말했습니다. 「아니 당신이 보아하니 예루살렘에서 오는 것 같은데, 근일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을 모른단 말이요?」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느냐?」

글로바가 다시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의 일이오. 그는 권세있는 말로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했고, 엄청난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병과 죽음에서 구해주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다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것으로 믿고 따르고 있었다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가 엊그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고 말았소. 그런데 이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어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그러자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들아,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는 줄 너희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더냐?」라고 하시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자신에 관한 말씀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들의 심령속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절망과 불신으로 얼어붙어 있던 그들의 마음속에 어디선가 한줄이 빛이 찾아들었습니다. 그러자 어둠이 물러갔습니다. 의심의 안개도 걷혔습니다. 내가 너희위하여 죽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도 기억났습니다. 결국 바로 자신들과 이야기하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돌이키게 됩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소,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단 말이오, 우리가 엠마오로 가다가 그분을 보았소,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다시 살아나야 인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하셨소.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가 다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소.」 그리하여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은 결국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때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면서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감당해 나갈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형벌과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이기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형벌과 저주와 고통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가 그 저주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모든 어둠과 실의와 좌절과 불안과 공포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모든 어둠과 절망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이 날, 다시금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고 그분과 동행하심으로써 모든 죄의 권세를 벗어던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현혹에도 흔들리지 말고 오직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보혈로 온전히 죄사함의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사망 권세를 보기좋게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 그 부활의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좌절하게 하던 모든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영원한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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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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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감사의 축복 /Sunday worship preaching

 

 

 

 

 

말씀 : 잠3:9,10

제목 : 감사의 축복

1.감사가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 줍니다.

어떤 기독교인 처녀가 불신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결혼하기 전에는 옛날에 교회를 다니다가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못다니고 있지만 결혼하면 즉시 교회에 다니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다음에 나가겠다고 미루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결혼 후 얼마 있다가 술을 먹기 시작하는데 거의 매일 술에 취해 밤 늦게 집에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아내도 남편에게 짜증을 내고 소리도 지르고 하여 가정이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이가 생겨 부부가 싸울 때마다 아이들은 불안에 떨곤 하였습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남편을 위해 늘 기도 했지만 그렇게 몇 년을 지나도 변화가 없자 드디어 이혼을 결심하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한 일년만 더 기다려보자며 그 대신 지금부터는 불평이나 원망 대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남편에게도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정성껏 대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그때부터 마음을 바꾸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남편에게도 최선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그나마 나와 아이들이라도 교회에 다닐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술주정뱅이일지라도 그나마 생활비라도 벌어다 주니 감사합니다. 그나마 일년열두달 365일 계속 술취해 있지는 않고 가끔은 나와 아이들을 생각해 줄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살집과 먹을 것이 있고 이 아이들을 통하여 희망을 갖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많은 조건들을 생각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선은 아내 자신이 살 것 같았습니다. 남편 때문에 늘 답답하고 화가 나고 속이 부글거리며 화병이 날 것만 같았는데 그 후로는 마음이 한결 평안해졌습니다. 또한 큰 소리가 그칠 날이 없던 집안이 평안해지고 그러자 툭하면 엄마아빠가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바람에 불안에 떨던 아이들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웬수같이 여겨지던 남편도 점점 측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교회를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남편이 물었습니다. “여보, 어디 가는 거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아니, 우리가 어디 가는지 잘 아시면서 뭘 새삼스럽게 물으세요?”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나도 교회가면 안될까?” 아내는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아니 여보, 안되다니요? 되고 말구요. 우리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하실 거예요.” “정말 그럴까? 이런 술주정뱅이에다가 맨 날 당신 속만 지긋지긋하게 썩이고, 아이들을 불안에 떨게 했던 이런 못난 사람은 하나님이 받아 주실까?”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이 많으셔서 심지어는 살인강도도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다 받아 주세요.” 그래서 그 날 이후로 이 술주정뱅이로 아내의 속을 다 썩게 만들었던 남편이 누구보다도 열심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우선은 자신을 살게 합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에게 평안과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물론 옆사람에게도 행복 바이러스를 퍼지게 합니다. 그래서 감사할 때 복이 오고, 은혜가 임하고,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후4:15절을 보십시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감사가 있는 곳에 더욱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정말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서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충만한 삶이 되는 거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함으로 정말로 은혜와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감사는 구원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구원의 기쁨과 능력을 확실하게 누리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여러분, 시50:23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진정한 구원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일단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같은 것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주시고, 예수님은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십자가의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으로 저 마귀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을 생각할 때에 어찌 기쁘지 아니하며 어찌 찬양하지 않으며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에 더욱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욕심과 욕망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볼때에 세상의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됩니다. 무슨 원망 불평 미움 질투 시기 따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평안과 소망과 기쁨속에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누려야할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릴 때 그 삶에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돈과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과 욕망과 시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절망과 한탄 따위는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믿음과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으로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감사가 넘쳐나고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자로서 이 땅에서의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그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복되고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이미 주신 은혜들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과 육과 혼이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은혜를 맛보며 전인적인 구원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감사하면 더욱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더 많은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면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자녀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었을 때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그것을 잘 사용해서 자신도 행복하게 남에게도 행복을 주며 산다면 준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얼마나 더 주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맨 날 받기는 받는데 감사할 줄도 모르고 자꾸만 더 달라고만 하고 도리어 적게 준다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준 것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다면 준 것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누가 그런 사람에게 더 주고 싶겠습니까? 더 주기는커녕 이미 주었던 것마저 확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눅19:24~26절을 보십시오.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잘 활용할 줄 알며 그래서 자신도 남도 기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너무 좋아서 더 많은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감사하지도 않고 올바르게 활용할 줄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준 것도 아까워 준것도 도로 빼앗아 감사와 기쁨으로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뭐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었는데도 감사할 잘도 모르고 자꾸 불평불만이나 한다면 준 것이 아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준 것도 빼앗아 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감사하며 성실히 살아갈 때에 준 사람도 기쁨이 있고 준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더 주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더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성실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잘돼도 감사, 안돼도 감사. 형통해도 감사 불통해도 감사. 돈이 많아도 감사 없어도 감사, 내 마음 내 뜻대로 되어도 감사 안되어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감사하며 사는 자들에게 채워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은혜가 가득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가정이 잘 되고, 직장이 잘되고, 교회가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감사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자에는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감사하는 자는 세상을 이기고, 마귀사탄을 이기고 대적자들을 이기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대하20:21절을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이 말씀은 여호사밧 왕때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족속이 연합군을 이루어 침공했을 때의 일로 이때에 여호사밧은 성가대를 앞세워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적국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며 자멸해 버리고 이스라엘은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전리품만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까? 찬송하며 감사할 때, 감사하며 찬송할 때... 이 또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라도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을 믿으며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고 감사하며 찬양할 때 어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해결하지 못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은헤와 능력과 섭리와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이후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약하고 부족한 것들과 모든 도전과 유혹과 모든 어둠의 권세와 기타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은총을 고백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심으로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며 더욱 많은 은총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감사할 때 물질의 복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영혼의 복도 주시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시고 그러면 육신도 더욱 건강해 지고, 더불어 물질의 복까지도 주십니다. 그래서 감사하면 할수록 자꾸만 감사한 일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기뻐하는 하는 사람에게 기쁜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불평불만하는 사람에게는 자꾸만 불평불만할 일이 생깁니다. 원망하면 자꾸 원망할 일이 생깁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기고, 투덜거리며 투덜거릴 일이 생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도 한번 두번 안오면 자꾸 교회에 못 올 일이 생깁니다. 마귀사탄이 자꾸만 이래서 못가고 저래서 못가고 하면서 가지 못할 일만 보이게 만듭니다. 교회에 오려고 하면 꼭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 못 올 일이 생긴 게 아니라 얼마든지 교회에 올수 있는 상황인데 내가 교회에 가지 못할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에 열심히 오면 자꾸만 교회 갈 일이 생깁니다. 이래서 가야 되고, 저래서 가야 되고 그러면서 교회에 계속 가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도 그렇습니다. 십일조헌금 감사헌금 한번 두번 안하다보면 자꾸만 헌금을 할 수 없는 일만 생깁니다. 이래서 할 수 없고, 저래서 할 수 없고... 그런데 사실은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마귀가 자꾸만 지금은 헌금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속삭여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점령을 앞두고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가서 똑같은 장소를 보고 왔는데 10명은 거기 들어갈 수 없는 상황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못 들어가고 저래서 못 들어가고...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갈 조건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가고..... 그래서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열명의 정탐꾼과 그들에게 동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동안 실컷 고생만하다가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간다며 들어갈 조건만 헤아렸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꾸 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자꾸 감사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자꾸 사랑해야 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교회에 올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헌금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복을 쌓는 일이요, 그게 은혜를 쌓는 일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더욱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9절,10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그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강조합니다.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라는 것은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앞서 우선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왜요? 본래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주셨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니까,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네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찰 것이다.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칠 것이다. 농사가 잘되고, 곡식이 풍성하고, 장사가 잘되고, 직장에서 인정받게 되고 그래서 물질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면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릴 줄 아는 인생에게 어찌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늘 감사하며 사는 인생에게 어찌 복이 찾아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죠. 부모님께 감사하죠. 이웃에게 감사하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대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성실하게 일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복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지난 상반기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 아니 지금까지 살아 숨쉬는 동안 모든 은혜로 채워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감사한다면 내게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축복거리를 하늘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올림으로 여러분의 삶에 더욱 은혜가 쌓이고 기쁨이 쌓이고 축복이 쌓여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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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제목: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말씀: 암 9:1-15


아모스서의 말씀을 읽으면 심판과 징계의 하나님이 무섭고 가혹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특히 9장 1-5절 말씀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칼을 명령하여 죽이게 할 것이라"은 섬뜩하기마저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무섭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본 마음은 죽이고 멸망시키고 싶은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고 회복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파멸시키는 죄의 속성을 정확히 아시기에 죄를 절대로 용납하실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죄에 엄격하신 것은 하나님 사랑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절대로 적당히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악함과 죄와 더러움의 껍질을 벗기시기 위해 체질하시며 연단하십니다. 9절에 이러한 하나님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입니다.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에 하나님의 속마음이 묻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11-15절 말씀처럼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날에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다시 회복시키고", "그들이 만국 백성을 기업으로 얻게 하겠다."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나 쉽게 포기하곤 합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 징계하시기는 할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내 생각, 내 기준으로 마음대로 단정 짓고 포기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 때로는 징계하고 경고하면서도 회복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기다려주는 마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마음, 이 마음으로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품을 수 있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내 삶을 향해 꿈을 가지고 계시고 한 번도 그 꿈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신데 나는 그 꿈이 희미하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대충, 살아지는 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요동칠 때가 있다. 현재의 내 모습, 현실 상황에 메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다시 힘을 내야겠다. 사춘기 딸아이를 바라볼 때도 오늘의 말씀이 큰 힘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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