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진정한 소망

 

 

 

 

제목 : 진정한 소망

본문 : 딤전6:17~19

1.진정한 소망

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정말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기대하며 사십니까? 부자 되는 것, 자식이 출세하는 것,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것도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서도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게 되면 무슨 뾰죽한 수가 생길까요?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고 날마다 싱글벙글하며 살아갈까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가보면 똑같아요. 뭐 많이 배우고 돈많고 출세하고 건강하면 맨날 좋아 죽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똑같이 걱정하고 불안하고 염려하고 싸우고 갈등하고 지지고 볶고 삽니다. 그래서 뭐 전직 대통령, 전직 총리, 장관, 재벌 총수, 무슨 팝의 황제니 골프의 황제니 하며 불리던 사람들이나 유명 연예인이나 할 것 없이 자살도 하고 잡혀 가기도 하고 가정불화도 겪고 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의 것은 죽을 둥 살둥 달려가서 얻었다고 하는 순간 이미 멀어지기 시작해요. 세상의 것으로 누리려는 행복은 잡았다고 하는 순간 저만치 날아가서 날 잡아봐라 하면서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아 다니다가 결국 인생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도 모르고 세상 것 좇아 다니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한 인생이 되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써 나아가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주님안에 만이 진정한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는 이세상에서도 모든 상황을 초월해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가 있으며, 더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대한 기대와 소망속에서 사는 자들만이 완전히 후회없는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오늘 17절 말씀 보세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무엇에 소망을 두지 말라.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무엇을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두라.

왜요? 재물은 정함이 없으니까. 정함이 없다는 게 뭡니까? 정해져 있는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즉 불확실하다는 거지요.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거라는 거지요. 내께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무슨 소리냐 영원토록 내꺼다. 실컷 쓰고 누리고 살다가 죽으면 그게 내꺼지 누구꺼냐 그럴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생명도 돈도 내일을 장담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도 결국 놓고 가야하고 그거만 믿고 산 인생이라면 결국 영원한 고통 밖에는 남아 있을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소망은 다릅니다. 주님께 있는 소망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온전합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것만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19절 보세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뭡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터를 쌓는 것이고,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생명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육체적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완전한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쌓는 지혜로운 인생이다, 그런 인생속에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정함이 없는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세상의 즐거움을 기대와 기다림과 소망으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참 소망이신 주님을 소망께 대한 소망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결코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세상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2.선한 사업에 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소망이 다른 사람은 삶의 목적도 다르고 삶의 방향도 다릅니다. 돈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사용합니다. 그저 부자되고 건강하게 잘먹고 잘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그저 돈이나 모으고 제 몸 하나 잘 입히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준비하며 삽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목적도 다르고, 돈과 시간과 재능과 육신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돈과 지식과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는 목적이 다릅니다.

그게 뭡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나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그래서 결국 주님과 나와 이웃이 함께 기뻐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삶이 이생에서나 저생에서나 가장 복되고 기쁘고 아름답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깊이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그렇게 의미가 있겠어요? 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큰 가치를 만들어 내겠어요? 그렇게 해서 자신이 무엇이 그렇게 크게 즐겁겠어요? 여러분, 좋은 것은 함께 나눠야 더 좋아지고 더 많은 가치가 있는 거예요.

자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어요. 저 혼자 독차지하고 앉아서 먹으면 무슨 맛이 그렇게 있어요? 여럿이 같이 먹으면 얼마나 더 맛이 있어요. 너무 너무 좋은 일이 있어요.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좋아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웃고 축하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면 얼마나 더 기뻐요? 호화판 유람선이 있어요. 저 혼자 타고 다니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타고 다니며 서로 웃고 즐거워하면 얼마나 더 기쁘겠어요? 좋은 집이 있어요. 저 혼자살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살 때 즐거운 거지요.

여러분, 사람은 원래 관계적인 존재예요. 가족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거예요. 본래 그런 존재로 지음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절대 혼자 행복할 수 없어요. 혼자 배터지게 먹고 혼자 대궐 같은 집에서 살고 혼자 좋은 입고 하면서 행복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행복하다면 그 인생은 죽은 인생이요, 병든 인생이요, 죄와 무지의 종이 된 인생이예요. 결국 영원한 지옥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예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 말씀 보세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선한 일이란 포괄적으로 좋은 일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아보고, 절망속에 있는 자를 위로하는 등 모든 어렵고 고통받는 이웃을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는 것은 그런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인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들을 위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는데 인색하지 말고 넉넉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눠주기를 좋아하라는 것은 억지로 마지못해 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런 일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된 인생의 올바른 가치관입니다.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19절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길이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눌 때 그것이 결국은 자기 생명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지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라는 뜻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너도 살고 나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너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주님도 기쁘고 결국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자기 혼자 잘먹고 잘사는 거 그거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도 없고요, 있다 해도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은 죄와 무지속에 있는 인생의 모습이요, 영적, 정신적, 인격적, 체적 미숙아의 삶입니다.

여러분, 갓난아기 보세요. 갓난아기는 남을 모릅니다. 그냥 자기밖에 모르죠.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성장하여 성인이 되면 남을 배려하게 됩니다.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 인격적, 영적으로 자꾸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 지금은 대강절 기간입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 속에 기쁨으로 거하시도록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심령속에 기쁨으로 거하시겠습니까? 어떤 심령속에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기쁘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자는 부자가 아닙니다. 권력자가 아닙니다. 지식인이 아닙니다. 단순히 윤리적으로 깨끗한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거기에 욕심을 두지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기쁨으로 오십니다.

또한 그렇게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그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자에게 기쁨으로 찾아 오셔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목적인 것입니다. 대강절은 바로 그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별거 아닌 돈과 명예와 지식을 바라보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거기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기쁨이며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더불어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메시야라는 점을 기억하며 그저 겸손히 엎드려 그 분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정말로 주님을 기대하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산다면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살피고 이웃을 돌아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 모든 것들을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여러분 심령속에 가득하여 주님과 이웃을 기쁘게 해드리며 여러분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축복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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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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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말씀 /주일낮설교 : 감사 충만한 삶

 

 

 

제목 : 감사 충만한 삶

말씀 : 신16:13-15

 

1.우리는 감사할 것이 너무 많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시골 사람이 서울 구경을 갔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에 들어가 설렁탕 한 그릇을 시켜놓고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게 하시고, 좋은 날씨 주셔서 구경도 잘하게 하시고, 또 때가 되어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먹고 건강해서 더욱 하나님 일도 잘해서 해 주시고, 돌아가는 발걸음도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드리고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식기도가 좀 길었는지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조롱하듯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보아하니 시골 양반 같은데 촌에서는 다 그렇게 음식을 놓고 졸다가 먹습니까?’ 그러자 이 시골사람이 말했습니다. ‘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런데 물론 다 그렇지는 않지요. 우리 집 돼지우리에 있는 돼지들은 음식을 갖다 주면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게걸스럽게 먹는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감사할 줄 모르는 자는 돼지와 같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가 너무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생각해봐도 감사의 조건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약 내가 돼지로 태어나 돼지우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사육당하다가 잡혀먹는 신세가 되었다면 어쩔번 했습니까? 사람으로 태어났다해도 저 헐벗고 굶주리는 땅 그래서 병들어 죽고, 배고파 죽는 그런 곳에 태어났더라면 그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고 비참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버젓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으로, 그것도 이 복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에서 먹을 것, 입을 것이 지천으로 쌓여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이 어찌 큰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이 자유, 이 평화, 이 질서, 사랑하는 가족들, 편히 쉴 수 있는 집, 수고 할 수 있는 일터,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 그 밖에 온갖 종류의 문명의 이기들, 게다가 나 같은 것이 어찌 이렇게 큰 은혜를 입었는지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백성이 되었으니 이 어찌 크나큰 축복이 아니며, 이 어찌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이 많은 은혜들 가운데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가진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다 하나님의 은혜요, 다 너무나 귀한 우리 가족이나 이웃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감사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올바른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 하겠습니까?

 

물론 살다보면 어렵고 힘든 일들도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 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입니다.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고, 내수가 침체되어 장사가 안되고,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고, 그래서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로 먹고 살기가 힘든 것입니까? 아니면 뭔가 우리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는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훌쩍 넘겼고, 무역규모와 GDP가 1조 달러가 넘는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강타하여, 우리나라 드라마가 세계 여러나라의 안방을 차지하고, K팝이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조차도 열광시키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많이 낙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만큼 정치적인 안정과 자유를 누리는 나라도 많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자유와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세계10대 교회중 절반 가량이 한국에 있고,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선진국수준에 이르고, 반만년의 역사 이래로 가장 융성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못 먹고 못살 때보다 더 불평과 원망이 많고 힘들어 못살겠다고 아우성입니까? 그럴 바에야 뭐하러 정치, 경제,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기를 쓰고 애를 써왔습니까? 아니, 정치 경제 문화 다 행복하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렇게 발전시키려고 기를 썼고, 그래서 이만큼 해냈으면 행복해야지 왜 더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냐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룬 부나 문화들이 너무 일부 계층에 편중되어 있고, 아직도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과거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물질적인 풍요와 자유와 평화와 질서를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여건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전5:18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우리가 받은 바 은혜가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특별히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를 맞이하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가족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에게 초막절을 정해 주시며 감사의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초막절은 수장절이라고도 하는데 가을에 곡식을 수확하여 창고에 저장한 다음에 일주일동안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굳이 이런 절기를 일부러 제정해 주시면서 지키라고 하신 이유가 뭐겠습니까?

 

첫째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 아름답고 복된 땅, 따사로운 태양과 신선한 공기와 때를 따라 내리는 비와 풍성한 열매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며 가꾸어 풍성한 결실을 맺었다해도 하나님께서 그 씨앗과 땅과 태양과 비를 주시지 않았다면 그것이 어떻게 자라겠습니까? 우리가 그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습니까? 또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고 일하여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해도 그 생명과 지혜와 재료와 힘을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혹자는 그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하는데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서 그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우리에게 공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신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많은 은혜가운데 삶으로 도리어 은혜를 알지 못하고 감사는커녕 도리어 원망 불평속에 살아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같은 자극을 받다보면 그 자극에 둔해 집니다. 그래서 너무 많으면 귀한 줄을 모르고, 좋은 일만 계속되면 좋은 줄을 모르고, 계속 향기속에 있으면 향기를 잘 못느낍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늘 곁에 있으면 소중한 줄을 잘 모릅니다. 평소에는 천지에 공기가 충만하니까 공기가 귀한 줄 모릅니다. 저수지에 물이 가득하고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나올 때는 물이 귀한 줄 모릅니다. 그러나 공기가 없는 곳에서 5분만 있어보면 공기가 얼마나 귀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저수지가 말라붙고 수도꼭지에서 물이 안 나오면 물이 얼마나 고맙고 귀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때가 너무나 많아 하나님께서 일부러 감사의 절기를 정해놓고 감사를 회복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내셔날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아프리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한 예닐곱 살 된 꼬마들이 한말쯤 들어갈 듯한 물통을 들고 물을 길러 맨발로 두 세시간씩 걸어갑니다. 그러면 소와 야생동물들이 목욕도 하고 마시기도 하는 그래서 더럽고 오염되고 기생충이 우굴거리는 물웅덩이가 나오는데 그 꼬마아이들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 물을 벌컥 벌컥 마십니다. 그리고 더러운 물통에 오염된 물을 담아 다시 두어 시간을 걸어서 집으로 갑니다. 집에서 물을 사용할 때도 대야에 물을 떠서 한방울의 물도 흘리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한 사람이 씻습니다. 그리고 나서 몸을 씻은 그 물로 빨래를 합니다. 그리고 그 빨래한 물을 마지막으로 소에게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 먹을 것이 없어 쓰레기 장에서 생활하는 아이들, 진흙에다 설탕 같은 것을 약간 넣어 진흙 파이를 해 먹고,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그냥 하염없이 바라만 보아야 하는 어머니, 눈가에 파리 떼가 우굴 거려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아이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수지에 물이 그득하고,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어디를 가나 먹을 것이 지천으로 쌓여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정말 이 풍성한 계절, 이 아름답고 복된 땅, 이 자유와 평화, 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 이 모든 것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가족에게 감사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이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가족과 이웃간에도 아름다운 사랑과 은혜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4절 말씀 보겠습니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즉 수장절에는 가족과 이웃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서로 사랑하며 기쁨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에서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가운데 사는 자의 마땅한 도리이고, 동시에 그것이 우리가 서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동시에 서로의 행복을 보장받는 길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많은 것을 거저 받았기 때문에 조건없이 거저 주어야 하고, 동시에 내 가족이나 이웃이 불행해지면 나도 불행해 지고, 그들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진다는 것을 기억하며 서로 사랑하며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 주변의 사람들이 잘못되어 전부 지지리 못살고 그래서 거지와 도적이 우굴 거리고, 서로 빼앗고 속이고 싸우고 때리고 죽이고 하면서 살아간다면 난들 어떻게 평안하겠습니까? 반대로 내 주변의 사람들이 잘 되어 서로 사랑하고 풍요롭고 그래서 서로 나누고 사회가 안정이 되면 나 또한 행복해지지 않겠습니까? 가정이 잘 되어야 내가 잘 되고, 기업이 잘되어야 취직이 잘 되고, 다른 사람이 잘 살아야 장사가 잘 되고,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와야 나라가 잘 되고, 나라가 잘 되어야 복지혜택도 늘어나고 자유와 평화와 질서도 유지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남이야 어떻든 아니 남을 짓눌러서라도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러면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남이 잘되기를 바라고 귀히 여기고 사랑해야 하는데 특별히 가족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가족은 나와 가장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가족의 행복과 불행은 나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더구나 가정은 인류사회의 핵으로 가정이 깨지면 인류는 망합니다. 가정이 해체되면 사회가 해체됩니다. 반대로 가정이 사랑과 은혜가 넘치면 사회가 살아납니다. 가정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 속에 든든히 서서 자녀들이 올바른 영성과 인성을 가지고 성장하고, 자녀가 부모를 바르게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고 하면 저절로 행복이 넘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가정을 이루고, 가족 간에 진정 귀히 여기고 사랑하고 돌보며 가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밖에 나가서 무슨 큰 일을 하면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가사를 돌보며 자녀를 양육하는 것을 하찮은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자녀 하나 잘 키우는 것이 밖에 나가서 100억원 벌어오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 땅의 모든 가정들이 믿음과 사랑과 기도로 자녀들을 잘 양육하여 올바른 영성과 인성과 감성을 가진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한다면 이 땅은 한세기 안에 천국과 같은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발전을 한다해도 가정이 믿음과 사랑과 기도로 바로서지 못한다면 갈등과 아픔과 상처투성이인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5:8절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되 특별히 세상 누구보다도 가깝고 고맙고 소중한 존재인 가족을 진실로 서로 귀히 여기며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장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한 가정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이 명절에는 온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서로 감사하며 사랑을 나눌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한번 해보겠습니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여보 고마워요, 아들아 고맙다, 딸아 고맙다. 사랑한다. 이렇게 가족간에 정말 귀히 여기고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더욱 큰 은혜가 넘치는 여러분의 가정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이웃간에도 감사하며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감사해야 할 대상은 가족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웃도 동일하게 사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빚진 자들이고 동시에 이웃에게도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웃이 행복할 때 우리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누리는 이 많은 은혜들을 어떻게 누리게 되었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대 우선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물론 나도 열심히 살았지만 아무리 내가 힘쓰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여건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과 이웃의 은혜도 그에 못지않게 많습니다. 우리 이웃이 없다면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의 만분 일도 못 누립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이웃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많은 것들을 누리겠습니까? 아무도 없는 저 무인고도에 산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친구도 학교도 직장도 병원도 공장도 교회도 정부도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나 쓸쓸라고 외롭겠습니까? 아니 외로운 것을 고사하고 먹을 것인들 제대로 먹을 수 있겠습니까? 옷을 제대로 입을 수 있겠습니까? 편히 살 수 있는 집을 제대로 마련할 수 있습니까? 차를 타고 여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겠습니까? 냉장고가 있겠습니까? 영화를 보겠습니까? 농사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 뭐겠습니까?

 

여러분,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이웃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웃들은 그저 경쟁하고 싸워 이기고 밟고 넘어가야 할 존재들이 아니라 상부상조하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막12:31절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 다음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두 번째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박완서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녀는 지난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분의 남편은 그보다 23년 앞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고 불과 석 달 만에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던 27살 된 막내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위로 딸이 셋이 있고 이 아들은 늦둥이로 낳은 아들인데 하필이며 그 귀한 막내아들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그녀는 그야말로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일기를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으로 출간 되었습니다. 그 책에 보면 그녀는 하나님께 나도 남편에게 데려다 달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대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기에 남편으로도 모자라 그 귀한 막내아들까지 데려가느냐고 따지며 포악을 떨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기도시간에, 때로는 산책하면서, 또는 길을 걸으며 도대체가 내 죄가 무엇이냐고,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냐고 하나님께 조용히 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묵묵부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화가 안 되어 화장실 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속에 있는 것을 다 토하게 되었는데 이때 계시처럼 자신의 죄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나는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 가족 외에 타인에겐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이것이 나의 크나큰 죄악이었구나.’ 하면서 그때서야 이웃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 죄악임을 깨닫고 회개의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토록 많은 것을 거저 받았는데, 우리가 누리고 있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이웃과 함께 이룬 것들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는데 이웃에게 무관심하다면 어찌 죄가 아니라 하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가위를 맞이하여 이 아름답고 복된 땅, 이 풍요로움, 이 자유와 평화, 이 모든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사랑하는 가족간에 정말 서로 감사하며 사랑을 나누는 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이웃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주변의 모든 이웃에게도 정말 감사하며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또한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도 서로 귀히 여기며 감사하며 사랑과 기쁨을 나눌때에 정말 행복이 넘치는 한가위,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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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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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진정한 소망


 

 
 
제목 : 진정한 소망

본문 : 딤전6:17~19

1.진정한 소망

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정말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기대하며 사십니까? 부자 되는 것, 자식이 출세하는 것,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것도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서도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게 되면 무슨 뾰죽한 수가 생길까요?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고 날마다 싱글벙글하며 살아갈까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가보면 똑같아요. 뭐 많이 배우고 돈많고 출세하고 건강하면 맨날 좋아 죽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똑같이 걱정하고 불안하고 염려하고 싸우고 갈등하고 지지고 볶고 삽니다. 그래서 뭐 전직 대통령, 전직 총리, 장관, 재벌 총수, 무슨 팝의 황제니 골프의 황제니 하며 불리던 사람들이나 유명 연예인이나 할 것 없이 자살도 하고 잡혀 가기도 하고 가정불화도 겪고 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의 것은 죽을 둥 살둥 달려가서 얻었다고 하는 순간 이미 멀어지기 시작해요. 세상의 것으로 누리려는 행복은 잡았다고 하는 순간 저만치 날아가서 날 잡아봐라 하면서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아 다니다가 결국 인생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도 모르고 세상 것 좇아 다니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한 인생이 되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써 나아가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주님안에 만이 진정한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는 이세상에서도 모든 상황을 초월해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가 있으며, 더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대한 기대와 소망속에서 사는 자들만이 완전히 후회없는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오늘 17절 말씀 보세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무엇에 소망을 두지 말라.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무엇을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두라.

왜요? 재물은 정함이 없으니까. 정함이 없다는 게 뭡니까? 정해져 있는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즉 불확실하다는 거지요.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거라는 거지요. 내께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무슨 소리냐 영원토록 내꺼다. 실컷 쓰고 누리고 살다가 죽으면 그게 내꺼지 누구꺼냐 그럴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생명도 돈도 내일을 장담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도 결국 놓고 가야하고 그거만 믿고 산 인생이라면 결국 영원한 고통 밖에는 남아 있을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소망은 다릅니다. 주님께 있는 소망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온전합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것만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19절 보세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뭡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터를 쌓는 것이고,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생명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육체적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완전한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쌓는 지혜로운 인생이다, 그런 인생속에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정함이 없는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세상의 즐거움을 기대와 기다림과 소망으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참 소망이신 주님을 소망께 대한 소망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결코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세상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2.선한 사업에 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소망이 다른 사람은 삶의 목적도 다르고 삶의 방향도 다릅니다. 돈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사용합니다. 그저 부자되고 건강하게 잘먹고 잘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그저 돈이나 모으고 제 몸 하나 잘 입히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준비하며 삽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목적도 다르고, 돈과 시간과 재능과 육신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돈과 지식과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는 목적이 다릅니다.

그게 뭡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나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그래서 결국 주님과 나와 이웃이 함께 기뻐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삶이 이생에서나 저생에서나 가장 복되고 기쁘고 아름답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깊이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그렇게 의미가 있겠어요? 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큰 가치를 만들어 내겠어요? 그렇게 해서 자신이 무엇이 그렇게 크게 즐겁겠어요? 여러분, 좋은 것은 함께 나눠야 더 좋아지고 더 많은 가치가 있는 거예요.

자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어요. 저 혼자 독차지하고 앉아서 먹으면 무슨 맛이 그렇게 있어요? 여럿이 같이 먹으면 얼마나 더 맛이 있어요. 너무 너무 좋은 일이 있어요.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좋아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웃고 축하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면 얼마나 더 기뻐요? 호화판 유람선이 있어요. 저 혼자 타고 다니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타고 다니며 서로 웃고 즐거워하면 얼마나 더 기쁘겠어요? 좋은 집이 있어요. 저 혼자살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살 때 즐거운 거지요.

여러분, 사람은 원래 관계적인 존재예요. 가족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거예요. 본래 그런 존재로 지음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절대 혼자 행복할 수 없어요. 혼자 배터지게 먹고 혼자 대궐 같은 집에서 살고 혼자 좋은 입고 하면서 행복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행복하다면 그 인생은 죽은 인생이요, 병든 인생이요, 죄와 무지의 종이 된 인생이예요. 결국 영원한 지옥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예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 말씀 보세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선한 일이란 포괄적으로 좋은 일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아보고, 절망속에 있는 자를 위로하는 등 모든 어렵고 고통받는 이웃을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는 것은 그런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인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들을 위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는데 인색하지 말고 넉넉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눠주기를 좋아하라는 것은 억지로 마지못해 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런 일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된 인생의 올바른 가치관입니다.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19절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길이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눌 때 그것이 결국은 자기 생명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지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라는 뜻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너도 살고 나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너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주님도 기쁘고 결국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자기 혼자 잘먹고 잘사는 거 그거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도 없고요, 있다 해도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은 죄와 무지속에 있는 인생의 모습이요, 영적, 정신적, 인격적, 체적 미숙아의 삶입니다.

여러분, 갓난아기 보세요. 갓난아기는 남을 모릅니다. 그냥 자기밖에 모르죠.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성장하여 성인이 되면 남을 배려하게 됩니다.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 인격적, 영적으로 자꾸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 지금은 대강절 기간입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 속에 기쁨으로 거하시도록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심령속에 기쁨으로 거하시겠습니까? 어떤 심령속에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기쁘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자는 부자가 아닙니다. 권력자가 아닙니다. 지식인이 아닙니다. 단순히 윤리적으로 깨끗한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거기에 욕심을 두지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기쁨으로 오십니다.

또한 그렇게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그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자에게 기쁨으로 찾아 오셔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목적인 것입니다. 대강절은 바로 그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별거 아닌 돈과 명예와 지식을 바라보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거기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기쁨이며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더불어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메시야라는 점을 기억하며 그저 겸손히 엎드려 그 분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정말로 주님을 기대하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산다면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살피고 이웃을 돌아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 모든 것들을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여러분 심령속에 가득하여 주님과 이웃을 기쁘게 해드리며 여러분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축복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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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지혜로운 자

 

 

 

제목 : 지혜로운 자

본문 : 엡5:15-18

1.주어진 것을 선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러분, 지혜가 무엇이겠습니까? 지혜란 한마디로 어떤 주어진 것들을 선용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육체이든 물질이든 지식이든 사랑이든 이성이든 경험이든 시간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여하튼 각자의 삶속에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을 선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선용할 때 모든 것들이 최상의 가치를 갖게 되고 그러면 우리 삶 전체가 복되고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그것이 돈이든 지식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기회든 시간이든 건강이든 제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해도 그걸 선용할 줄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도 그걸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씀이예요. 제아무리 박사학위가 100개라도 그걸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더 나가서 그것을 악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선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은데 그저 자신의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데만 사용하고 더 나아가서는 도박이나 향락이나 사치로 탕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가지고 폭력이나 휘두르며 강도짓이나 하면 엉뚱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혜와 지식이 많은데 그걸 가지고 남의 것을 빼앗을 궁리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컴퓨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이용하며 해킹이나 하고 남의 통장에서 돈이나 빼가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압력이나 행사하여 뇌물이나 받다가 망신만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무엇이 옳은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인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선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정말 아름답고 가치있고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1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시간을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은 아름답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결로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과 삶의 모습에 휩쓸려 다니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잘 살피며 정말 무엇이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지, 무엇이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작든 많든 하나님의 뜻대로 선용하는 삶을 통하여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선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말할 나위없이 생명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17,18절 말씀 보세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즉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주님의 뜻을 알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바르게 알게 되고 그러면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선용할 수 있는 참된 지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왜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우리가 진리의 길을 어떻게 알 수가 있어요. 무엇이 진리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지혜로 진리를 알겠습니까? 설령 안다면 그 진리의 길로 나 혼자 잘 갈 수 있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그 진리가 믿어지기는 하던가요? 도무지 안됩니다. 도무지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따라 갈 수 있습니까?

다른 뾰죽한 수가 없어요.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어둔 눈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내 어둔 마음을 환하게 비춰주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귀를 열고,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서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믿게 하실 때 진리의 길을 알게 되고,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달콤한 생명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천국이 보이고 주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안 보여요. 안 들려요. 안 믿어져요. 아니 막혀 있는데 어떻게 들려요. 눈이 감겨져 있는데 어떻게 보여요. 죄와 무지와 어둠과 굳어진 마음과 이성과 경험으로 영의 세계에 대하여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었는데 어떻게 들리고 어떻게 보여요.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 어떻게 분별할 수가 있어요.

이걸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사람이 할 수 있나요? 돈이 할 수 있나요? 과학이 할 수 있나요? 경험이 해결해 주나요? 안돼요. 영은 영이요, 육은 육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하는 거예요.

고전2:13절 보세요.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신령한 일은 무엇으로 분별해요. 신령한 것으로, 즉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서만이 분별하게 된다는 거지요.

좀전에 보았던 18절 말씀도 보세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술 취한다는 것은 물론 직접적으로 마시는 술에 취한 것을 말합니다. 술에 취하면 제 정신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술을 마시면 사리분별력과 판단력이 떨어져요. 몸도 제 맘대로 안돼요. 그래서 용감해지지요. 그래서 술 마시고 용기를 얻어 평소에 못했던 소리도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소리를 지르고 범죄 행위를 하고 희롱하고 추태를 부리곤 하지요.

그러나 술취한다는 것은 꼭 마시는 술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향락, 안락, 즐거움, 명예, 권세 등등 뭔가 자신에게 위안을 주고 만족을 줄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의 것으로 취한 상태, 곧 세상의 것들에게 정신을 빼앗긴 상태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시는 술에 취하면 제정신이 아니듯이 세상에 취하면 영이 제영이 아닌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분별력도 판단력도 없고 육체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에 취한 사람은 영적 분별력이나 판단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자꾸 영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고 엉뚱한 길로 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것에 취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대한 관심과 열정보다는 세상에 빠져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취해 있으면 안된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성령에 취해야 성령의 인도를 따라 거룩한 길로,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달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 받으면 내 마음속에 생명과 기쁨과 진리와 은혜와 사랑과 거룩과 의로 충만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내 마음속에 가득 들어 있는 진리, 생명, 은혜, 사랑, 거룩, 의를 따라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과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사랑을 나누는 일들에 열심을 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명과 은혜와 진리와 사랑과 거룩과 의를 향하여 갈때에 우리의 삶은 더욱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것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진리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겠지요. 그저 세상에 취해서 세상의 것에 얽매어 욕심과 이기심과 안일함이 나를 지배하게 되겠지요. 마치 거기에 행복이 있고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기며 세상길로 세상길로 달려가겠지요. 그러다가 그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지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명과 진리와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의 뜻을 향하여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달려가 달려 갈지라도 세-상길 가지 말고-, 그 하늘비밀 내게- 주신 아버지품을 향해-.’

정말 우리 성도님들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 충만하기 전에 먼저 성령으로 충만하여 진정 생명과 자유와 기쁨과 사랑과 의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주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16,17절 다시 한번 보세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세월을 선용하며 지혜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때가 악해서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들이 정말 진리안에서 말씀안에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여러분, 안 그래요? 보십시오. 정말 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살면 선한 일을 하기가 쉽습니다. 모두가 착하고 깨끗하고 올바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살면 자연히 선을 배우게 되고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절로 선한 모습과 사랑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혼자서 못되게 굴고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 이 사람은 결국 왕따를 당하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악을 행하고 싶어도 행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살면 선하게 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왜요? 보고 배우는 게 악이니까요. 보고 배우는 것이 악이니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설령 어찌어찌해서 혼자 선한 척하면 왕따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쁜 줄 알면서도 같이 행동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세월이 가면 자기가 하는 나쁜 행동들이 나쁜 줄도 모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잠13:20절에선느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왜곡된 세상속에 살고 있습니다. 영적인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늘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과학지상주의,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인본주의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사고 구조도 자연히 그렇게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왜곡된 가치관에 물들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만능주의, 개인이기주의, 인본주의에 빠져 그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그저 어찌 하든지 많은 소유하기 위하여 육신이 요구하는대로 죄와 무지속에 무감각하게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이런 점을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하는 이 한마디 속에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과학은 발달하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진리의 측면에서는 너무나 열악한 환경속에 처해있는 우리의 현주소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감각속에서 휩쓸려가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가 곧 큰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제나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계획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언행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일상들 정말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중심을 잘 잡고 살아갈때에 주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혜로운 자가 되기위하여 기억할 것은 세월을 아껴야 한다 즉 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15,1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말입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아낀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물론 아낀다는 것은 그저 애지중지 보관해두라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 아끼는 것은 각각의 용도에 맞게 귀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돈을 아끼는 것은 돈을 쌓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재능을 아끼는 것도 재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능을 유익하게 사용하여 자신과 남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아끼는 것은 자식을 가만히 앉혀 놓고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맨날 자식들 뒤치다꺼리나 해주는 게 아닙니다. 자식이 가치있게 바르게 진리안에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자식을 아끼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정말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아름답고 가치있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게 모두 유익이 되도록 가치있게 사용하라는 것이지요. 그럴 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이웃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며 우리 자신도 정녕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아름답고 멋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생명의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육체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정말 너무나 귀한 것들을 너무나 많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귀한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 오셨습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정말 선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 건강, 지혜, 물질, 육체, 시간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을 따라 아름답게 가치있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진정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취하지 말고 생명과 진리와 의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아서 주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고 동시에 여러분의 이웃에게도 기쁨과 유익을 주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죽어가는 영혼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며 주의 영광 나타내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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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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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 설교] 왜예수를믿어야하나

 

 


왜예수를믿어야하나

제 목: 새사람의 새습관

 

 
(에베소서 4:22~24)

17년도를 마지막 보내는 주일에, 지난해가 성공의 해가 되었든, 실패의 해가 되었든 망각의 바다에 흘려 보내고 87년 새해를 잘 맞이하고 잘 보낼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줄 압니다. 그래서 오늘 "새사람의 새습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 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좇아 가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반대로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즉 옛습관과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이 되어 새 습관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1.새 사람을 입으라

헌 옷을 벗어버리듯 죄악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듯이 새 사람을 입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낡은 옷 꿰매어 입듯이 사람이 노력으로 수양하고 교양을 쌓아서 새 사람이 되고 구원 받는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멸망할 옛 사람을 회개함으 로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새 생명을 얻고 예수그리스도를 옷입듯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새 생명이 되는 것이요, 새 사람이 시작되 는 것입니다.(요 1:12, 3:16, 6:47, 롬10:10등).

말씀은 생명있는 씨앗과 같아서 말씀을 들을 때 믿고 받아 들이면 옥토에 떨어진 씨 같아서 새 생명이 시작되지만, 말씀을 귀등으로 받아 넘기고 믿지 않으면 길바닥에 떨어진 씨 같 아서 새(마귀)가 와서 가로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 처음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었으면, 과거에 마귀의 유혹을 따라 육신의 욕심대로 행하던 옛 습관을 회개 함으로 벗어 버려야 됩니다. 또 밤송이가 영양분을 잘 빨아 들여 익으면 자연히 껍질이 벗겨지면서 탐스러운 밤톨이 쏟아지는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신령한 은혜를 받으면 과거에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마귀가 유혹하는대로 행동하는 옛 습관은 인간을 썩게 만들고 파멸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다음에는 말씀을 잘 받아먹고 은혜를 잘 받으며 회개하여 옛 습관을 벗어 버리고 끊어 버려야 합니다. 묵은 해를 보내며 썩고 냄새나는 옛사람의 못된 습관을 벗어 버리기로 결심하고 기 도해야 되겠습니다.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와서 핥아 먹듯이 예수님을 몇년씩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을 때 가졌던 못된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안되겠습니다. 술먹은 습관, 도박, 손장난하는 습관, 춤추던 습관, 음란한 습관, 부부싸움하는 버릇, 바가지 긁는 버 릇, 거짓말하는 버릇등 썩어져가는 더러운 습관을 끊어버리고,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새해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나쁜 습관 한가지 때문에 임금님 진지 그릇같이 귀한 그릇이 될 사람이 강아지 밥그릇처럼 천한 그릇이 되고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 서도 결단력이 있고 결심이 강한 사람이 성공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김 유신 장군이 젊어서 늘 주색에 빠지는 것을 보고, 하루는 그의 모친이 "치국평천하를 꿈꾸는 사람이 항상 주색에 빠져서야 어찌 큰 뜻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눈물로 타이를 때 그는 결심하고 술집에도 기생집에도 안갔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중 말위에서 졸다 보니 어느새 영특한 말이라 전에 잘다니던 기생집 앞에 와서 멈추어 섰습니다. 이때에 눈을 든 김유신 장군은 말에서 내려 "왜 나를 이리로 데려 왔느냐?"고 호통을 치고 긴 칼을 뽑아 그 애마의 목을 쳐서 떨어 뜨리고 뚜벅 뚜벅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목사는 설교도 잘하고 똑똑한데 말버릇이 나빠서 늘 교회에서 배척을 당하다가 어느 낙도 작은 교회에 가서 자기의 입 버릇을 고치려고 밤톨만한 조약돌을 주어서 입에 물고 3년동? 안을 지내고서 말 버릇을 고치고, 환영받는 훌륭한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습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성공자가 될 수도 있고 패배자가 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받을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묵은 해와 더불어 마귀가 유혹하는대로, 육신 의 정욕대로 행하던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사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2.새 사람의 새 습관을 가지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되었으면 새 사람다운 습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신 말씀대로 옛 사람의 습관은 십자가에 못박고 새 사람의 습관을 가지고 살 아야 되겠습니다.

1)모든 예배에 출석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시간마다 갈까 말까 망설이고 유혹받는 정도의 신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주일날 친구가 등산가자, 낚시가자, 유혹을 받을 정도가 되면 안됩니다. 감히 그런말도 못 꺼내게 엄한 신자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밤 예 배시간에 세계복싱 타이틀 매치를 한다고 해도 탁 꺼버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용기를 가져야지, 무슨일이 있을때마다 곶감 빼 먹듯 하면 아직 좋은 신자 되기는 늘린것입니다. 특히 일주일의 7분의 1, 그 하루는 주님의 날로 성별해 바쳐야 그 가정, 그 나라에 평강과 복을 주십니다. 이사야서 58장 13절, 14절에서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을 행치 아니하며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 후 토요일은 일요일로 바뀌었습니다.) 시편 84편에 보면 주의 제단에 집을 짓고 보는 참새 와 제비도 부러워하면서 "주의 집에 거하는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고 했고 "주의 궁정(교회)에서 한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하고 하면서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눈물 골짜기로 다니며 슬픔과 고통을 만나도 때를 따라 위로의 샘물을 얻게 하고 은혜의 단비를 내려 주신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주일낮 예배는 물론 밤 예배도 열심히 출석하여 T.V앞에서 시간보내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종교가 그렇게 부패했는데도 규례를 따라 꼭 꼭 성전에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2)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의 가장 기초적이면서 중요한 것은 내 수입의 십분의 일을 정확히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를 하나님께 돌려 드리지 못하는 사람의 다른 헌금은 올바른 헌금이라고 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박사가 설교하는 중에 "오늘날 미국 사람의 가장 큰 죄악의 하나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께 대한 채무 이행을 기피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레위기 27장 30절) 마당히 갚아야 할 빚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기 전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헌금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강도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간신히 구원 받았으니 십일조를 여생, 구원에 갖다 부치지는 않습니다마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사람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것이며 진정한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순교자라고 불리우는 리차드 윔브랜드(Richard Wurmbrand)라는 사람은 공산치하에서 그 극 심한 고문을 받으며 감옥 생활를 할 때에도 일주일에 빵 한덩어리씩 주는 것과 매일 더러운 국한그릇씩 주는 것을 받아서 십의 하나씩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더 약한 형제에게 주며 십일조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맨솔래덤(mentholatum)의 주인공 알버트 하이드(Albert H yde)씨는 십일조를 드리기로 결심한 다음 언손에 바르는 약 맨솔래덤을 발명하여 돈을 많이 벌었는데 하나님이 삽으로 떠 넣어주면 반드시 잊지않고 하나님께 떠서 바치곤 했는데 마침 내 하나님께 가장 많이 바치는 신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YMCA에 수백만불을(당시 돈 으로)내 놓았고 일본에서 버는 돈만 가지고 일본 선교사업비 전부를 부담할 수가 있었고 그가 87세에 죽을 때는 150만불(현 150억도 넘는 액수)를 선교사업에 내놓았습니다. 십일조로 축복받은 윌리암 콜게이트(William Colagate)는 16세때 집이 너무 가난하여 집을 떠나가 다가 전에 알던 선장노인을 마나서 돈을 벌려고 뉴욕으로 가는데 자기는 비누와 양초 만드는 기술 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선장노인은 무릎꿇고 간절히 기도해 주고나서 충고하기를 "언제인가 뉴욕에서 가장 훌륭한 비누업자(maker)가 생겨날 것이다. 그 사람은 다 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네가 될 수도 있다. 부디 착한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께 네 마음을 바쳐라. 그리고 네 소유에서 주님의 것을 꼭 돌려 드려라. 또 정량을 속이지 않는 정직한 비누를 만들어라. 그러면 분명히 너는 번영하고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을 때 콜게이트(Colgate)는 말을 명심하고 교회 생활을 철저히 하며 십일조를 잘 드렸습니다. 처음 1달러를 벌었을때 10센트를 드리고, 점점 축복을 받아 정식 사원이 되고 동업자가 되고 결국 자기의 회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10의 5조까지 드리다가 최후에는 모든 것을 다 바쳤고 수억만달러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록펠러(Fockefeller)는 어려서 어머니를 도와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는데 첫 월급으로 주금 1불 50센트를 받아 왔을 때 그의 어머니가 그중에 10분의 1조를 하나님께 드리면 잘살게 된 다고 말씀할때 꼭꼭 하기 시작하여 엄청난 재벌이 되었는데, 부디 자녀들에게 십일조를 꼭 가르쳐서 충성된 청지기가 되도록 독자들에게 일러 달라는 부탁을 하더랍니다. 십일조를 안해도 부자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보장을 받지 못하며 언제 날아 갈지도 모릅니 다. 자자 손손 축복받는 재물이 되지 못합니다. 그외에도 전 세계에 얼마나 많은 간증자들이 있는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성경 가운데 다른 곳에는 하나님을 시험하면 무서운 죄가 된다고 했지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한데가 없습니다. 오직 말라기 3장 10절에만 시 험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여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되 바칠때 마다 이럴까 저럴까 시험을 받으면 아직 하나님께서 마음놓고 축복하실 수가 없고 의례히 무슨 수입이나 크건 작건 생길때마다 하나님의 것을 아까운 마음없이 바치도록 습관화 되어야 합니다. 십일조의 습관은 복 받는 습관입니다.

3)하나님과 대화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대화란 누구와 말을 주고 받는 것인데 매이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의논하는 것과, 매일 단 두장씩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그속에서 듣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육신의 양식을 꼭 찾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 영의 양식을 반드시 먹는 습관을 가졍야 합니다. 기도가 아침의 열쇠가 되어야 하고 저녁의 자물쇠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고 무슨 문제나 기도로 해결하도록 해야 됩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번씩 목숨걸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기 때문에 항상 승리했습니다. - 아 멘 -
출처:금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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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오전예배설교] 사모하는 믿음

 

 

 

말씀 : 고전15:57,58

제목 : 사모하는 믿음

1.상급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복신앙 즉 복을 비는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기복신앙이라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복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앙을 그저 복이나 받기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복신앙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시말해 건전한 기복신앙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전한 믿음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도 없이, 성도로서의 책임이나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복이나 받으려한다면 당연히 잘못된 믿음이지요. 그러나 올바른 믿음안에서 복을 사모하며 열심히 섬기고 수고하는 모습은 바람직한 자세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하여 애쓰고 힘쓰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공부를 하여도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누가 공부를 하겠습니까? 뙤약볕에 나가서 아무리 피땀을 흘려 일해도 가을에 수확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 누가 그 고생을 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이 없다면 누가 일하겠습니까?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 남는 게 없다면 누가 장사를 하겠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예수님 믿고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예수님 믿으면 죄 용서 받고, 영생을 얻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에 믿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기본적으로 천국에 가는 것뿐 아니라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세상에서도 잘되고 나중에 천국에서 큰 상급도 받을 것을 믿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성실하게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면 됐지 뭘 상급까지 바라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은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솔직히 상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복받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정말로 순수한 사람은 상 받기를 바라고, 상을 받으면 좋아 합니다. 만약 상받는 것도 원치 않고 받아도 기쁘지도 않다면 그건 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상받기 싫은게 아니라 상받기 위하여 힘쓰는 과정이 싫은 거겠지요.

여러분, 보십시오. 순진한 아이는 사탕 하나를 주어도 기뻐합니다. 그래서 사탕하나 얻어먹기 위하여 재롱을 떨기도 합니다. 그래서 1,000원 한 장을 사모하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기꺼이 심부름을 합니다. 그러다가 1,000원 한 장 얻으면 너무나 기뻐합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천원 알기를 우습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 아이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적어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라면 작은 것 하나에도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예쁜 짓도 할 줄 아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 정말 순수한 사람은 유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맨날 이것저것 달라기나 하고, 떼나 쓰고, 일일이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하는 그런 유치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기뻐할 줄 알고 그래서 그것을 사모하는, 그래서 그 작은 것 하나를 얻기 위하여 뭔가를 열심히 하려고 하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사모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쁜 짓을 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줄 알고 예쁜 일을 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른이다, 나는 성숙했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을 유치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열심히 하느냐? 그렇지도 못합니다. 뭔가를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 같은 유치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열심히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지요.

또 이런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성숙한 사회인이요,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며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뭐 애들이냐? 이러란다고 이러고 저러란다고 저러고... 내가 뭐 어린애냐 사탕하나 얻어먹자고 뭘 하게.... 그러면서 하라고 하면 오기를 부리고 더 안합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이런 자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인격이든 신앙이든 성숙해지면 성숙해 질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순수해지고, 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다그러면 그런줄 알고 졸졸 따라가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 두려움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 경건함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배에 엄숙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이런 말은 정말 겸연쩍은 말이지만 그래도 맞는 말이니까 해도 괜찮은 줄 압니다. 목사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혹시 좀 못난 목사라도 그래도 하나님이 세우셔서 말씀의 대언자로,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사람이니까 좀 어렵게 여길 줄도 알고, 그 말에 순종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때묻지 않고 순진무구한 갓난아기와 같은 신앙인 것입니다.

요는 뭐냐하면 순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과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경외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사탕하나 바라고 재롱을 떨 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순수한 신앙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신앙이며, 정말 기쁨과 은혜와 기대와 소망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살아있는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18:3절에서 말씀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무구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순진한 아이가 어른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할줄 아는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진 자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한 그 은혜와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심으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순전한 믿음에 큰 상급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수없이 반복해서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반드시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복의 내용은 크게 보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현세적인 축복, 즉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누리는 복입니다. 땅에서 누릴 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중 대표적인 것은 신28:1~6절입니다. 좀 길지만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한마디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라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자녀가 복을 받고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고 짐승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두 번째 복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는 그 나라를 위하여 충성한 자들에게는 큰 상급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계22: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내가 다시 올 것이다. 그때에는 너희가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에는 확실하게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것은 물론 벌 줄 자를 벌주고 상 줄 자를 상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세상에서도 물론 상과 벌이 있지만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상과 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극히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주어지는 것입니다. 농부가 열심히 일을 하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면 좋은 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을 하면 좋은 운동선수가 됩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사업을 하면 좋은 사업가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하면 반드시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갓난아기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 주권, 능력, 은혜, 축복을 믿고, 그 안에 생명과 복과 은혜가 있음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로 이 땅에서도 좋은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죄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하십니다. 진실한 마음과 성실한 자세를 주십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땅에서도 많은 것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어찌 세상에서 복을 누리지 않겠으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상급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상급은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보상입니다. 반면에 우주만물의 창조주시오 주관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벌이 주어지는 것도 당연한 대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을 수없이 약속하셨고, 반면에 주님의 뜻을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이 주실 상급과 칭찬을 바라보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주님 뜻대로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질 이 땅에서의 축복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그 무한히 영광스러운 상급을 사모하면서 열심히 주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복을 받으려면 열심히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순진한 마음으로 복을 받기를 원하고 상급을 받기를 원한다면 물론 그 상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 5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장의 말씀은 소위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는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든 육체는 부활한다, 불신자는 죽음의 부활로 나타나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왕노릇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5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의 승리를 주신, 그래서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러기 때문에 그날을 바라보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수고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을 것이므로 장차 주께서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일으키셔서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누리게 하실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일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죽음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상과 벌이 확실해 집니다. 어떤이는 완전한 형벌 가운데 처하고 믿음으로 승리란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지키고 주님이 주실 큰 상급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순진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런 삶에 힘이 있습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신 사명을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역사도 힘있게 이루어가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엄청난 영광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를 바라보면 왜 희망과 소망과 힘와 용기와 위로와 기쁨이 솟아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생은 희망과 소망이 없습니다. 설령 나름대로는 희망과 소망이 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희망과 소망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이지요. 아니 그냥 일장춘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바라보는 그것들의 노예로 살기 십상입니다. 혹시 끝까지 그런 희망과 소망속에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순간들이 일식간에 끝나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롬8:24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벧전1:24,25절에서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보이는 소망, 세상의 모든 물질 부귀영화 풀의 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결코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 줄 그 하늘의 소망만이 완전한 소망이요, 그때 받을 상급만이 완전한 상급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만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복,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실 그 영광스러운 복을 간절히 사모하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갓난아기와 같이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세상을 것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귀하게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도 진정한 희망과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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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제목 :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말씀 : 마1:18-21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의 가정위에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특별히 지역 주민 여러분과 함께 성탄절을 맞게 되어 너무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저희 교회를 찾아주신 분들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환영하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이 성탄절은 우주 최대의 명절입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니 이 지구 뿐 아니라 우주 공간 전체에 걸쳐서 아니 우주 뿐 아니라 저 하늘나라의 성도들이나 천사들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영원토록, 그리고 민족이나 혈통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전 우주의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큰 축복의 날이요, 은혜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죄와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주어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든지 죄와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세상의 어떤 날과도 비교할 없는 엄청난 축복의 날이요 기쁨의 날이요 은혜의 날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이땅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박수를 치겠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예수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서로 간에 사랑과 기쁨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 축복의 성탄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이 땅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와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복된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1.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

그렇다면 여러분, 도대체 오늘 성탄절이 어떤 날이기에 그렇게도 온 우주 최대의 위대하고 복되고 기쁜 날입니까? 그것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씻어주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탄의 핵심이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해방되고 평화를 누리고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억압받는 자를 해방시켜주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도 결국 다시 늙고 병들고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냥 늙고 병들고 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절대 상극이기 때문에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오늘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보십시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0:10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생명은 영적, 육체적, 정신적인 전인적인 생명입니다. 즉 죄에서 구원하여 먼저 천국백성이 되게 하고 그 다음에는 이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 누리게 하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물론 돈이나 권세나 건강이나 이런 것도 중요합니다.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땅에서 누려야 할 자유와 평화도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돈도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하여 열심히 운동도 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영원한 생명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생명보다 우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해도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가는 권세를 얻었다해도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다해도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가운데 처한다면 세상에서 누렸던 그 온갖 부귀영화가 무슨 쓸데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돈도 중요하고 명예도 중요하고 건강도 중요하고 사랑도 중요하고 다 중요하지만 생명이 제일 중요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결코 육체적인 생명만이 아닙니다. 영적인 생명이 있고, 육체적인 생명이 있고, 정신적 생명이 있습니다. 영과 육과 혼이 살아있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영역에서 온전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문제를 아무도 스스로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일평생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도 안되고, 죽도록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천개만개 따도 안되고, 세계 제일의 권세를 얻어도 안되고, 천하제일의 부자가 되어도 안 됩니다. 천하없는 성인군자나 영웅호걸도 할 수 없습니다. 달나라 별나라 우주 끝까지 갈 수 있는 과학 기술로도 안됩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누가 해결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지혜와 권능과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 뿐입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아시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과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들은 다 죄와 무지속에 있어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도 능력도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2012년전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없고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끔찍한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받을 죄의 대가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망에게 붙잡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영생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부활의 생명을 얻음으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이 자기 죄는 자기가 해결해야지 남이 대신 죽어준다고 어떻게 내 죄가 용서되느냐고 말씀합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평생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도 안되고, 죽도록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천개만개 따도 안되고, 세계 제일의 권세를 얻어도 안되고, 천하제일의 부자가 되어도 안 됩니다. 어떤 분은 내 마음만 똑바로 먹으면 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천하없는 성인군자라도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죄인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쩔 수없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천길만길 깊은 구렁 속에 갇혀 있다고 칩시다. 그 구렁은 말 그대로 천길 만길 너무 깊어서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올라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네 힘으로 올라오라며 내버려 둬야 합니까? 두레박을 내려 보내주든지 헬리콥터를 내려 보내든지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을 때는 그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올라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살 길인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 나올 수 없는 죄의 수렁에서 건져 주러 오신 것입니다.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어도 올라올 수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찾아오신 주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천국까지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 영광스러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님 품에 온전히 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유일한 구조선으로 보내주신 예수님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받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영원한 천국을 주신 예수님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이 죽으면 그만이지 천국이 어디 있느냐, 가 보았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여러분, 아닙니다. 천국은 반드시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으면 육신은 땅에서 왔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기 전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데 죄를 그대로 가지고 가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고 들어간 영혼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은 그럼 무슨 증거라도 있느냐고 묻습니다. 네,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너무나 확실한 것입니다. 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천국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4:17에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고, 또 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누구의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메시아이십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성령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다해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예수님을 석가모니와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세계3대성인이라고 부릅니다. 그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너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죄 용서받고 천국에 갈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성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말씀을 믿든지 만약 믿지 않는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산다든지 천국과 지옥이 있다든지 하는 말들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과학으로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어째서 성인이라고 부른단 말입니까?

그러면 또 어떤 분들은 나는 그 성경자체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베스트셀러입니다. 성경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읽혀진 책으로 세계 2,5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수십억의 사람들이 읽고 인간이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지 알게 되고, 천국과 지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들이 바보라서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부활과 천국과 지옥을 믿겠습니까? 아니 그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이나 학자들이 과학의 법칙을 몰라서 부활을 믿고 천국과 지옥을 믿겠습니까?

그러면 또 예수님 안 믿는 수많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은 바보라서 그 사실을 안 믿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을 안믿는 분들 중에도 정말 똑똑하고, 인격적으로 너무나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과 육은 차원이 다릅니다. 육적, 물적인 것은 세상의 원리와 법칙아래 있지만 영혼은 세상의 육적 물적 이성적 법칙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기껏해야 3차원의 세계지만 영적인 세계는 4차원 5차원 백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어두워져 있으면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몽매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훌륭한 과학자들이나 그밖에 위대한 분들은 세상 지식도 잘 알고 영적인 지식도 잘 아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세상적인 지식이나 인격적으로 아주 훌륭하지만 영적인 지식은 없는 분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떤 판단이 더 옳겠습니까? 세상적으로는 똑똑하지만 영적으로는 어두운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세상 지식과 영적인 지식이 모두 밝은 사람들의 판단이 더 옳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영적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결단코 여기서의 삶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로 말미암아 무지와 어둠 속에 있는 인생들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인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래서 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이 세계 역사상 가장 기쁜 날인 것입니다. 전 우주 공간에 걸쳐서 가장 기쁜 날인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인류를 진정으로 영원히 온전히 살리는 일이요, 행복하게 하는 일이요, 우리 인류가 진정한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축복속에 영원히 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눅2:10,11절에서는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에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그러면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진정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탄과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한 해방자, 자유가가 될 것입니다.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과 고통에서 해방 될 것입니다. 모든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욕심에서도 해방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진정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가정과 이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이 성탄절에 온전히 예수님을 모심으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여기서 누릴 천국을 마음껏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나이다.

그러나 하오나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세상에는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진정한 생명의 은총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여,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 인생이 얼마나 죄와 무지속에 있는지 깨닫게 하시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모든 죄와 무지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먼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모든 이웃들에게 이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생명과 사랑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나누어 줄줄 아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죽음의 길로 가는 이들에게 생명의 빛이 되고, 가난과 핍박과 억압 속에 있는 자들에게 소망의 빛이 되고, 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있는 곳에 사랑의 빛이 되고, 거짓과 모함과 술수가 있는 곳에 진리의 빛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진실로 이 땅 만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면서 참된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강 속에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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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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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은혜충만한 성도

 

 

 

 
말씀 : 엡 3:14-19

제목 : 은혜충만한 그리스도인

 

1.선한 싸움에 승리해야 합니다.

 

어떤 어린 소녀가 큰 사고를 당하여 양쪽 다리를 심하게 다쳐 거의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여러 번의 수술과 물리치료를 받으면 회복될 것이라고 하여 이 소녀는 수술을 받고 물리 치료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기를 몇 차례하는 동안 이 어린 소녀는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 부모님에게 이제 그만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물론 허락할 리가 없었습니다. ‘얘야, 안된다. 힘들어도 참아야한다. 지금 잘 견뎌야 나중에 걸을 수도 있고, 그래야 생활하는데 힘들지 않단다.’하면서 달랬습니다. 그러자 어린 소녀는 ‘아버지, 아버지는 내가 다리를 못쓰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나를 사랑해 주실 거잖아요? 그러니 저를 집으로 데려다 주세요.’하면서 애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린 딸을 안아주며 말했습니다. ‘그래, 나는 네가 다리를 못쓰게 되어도 아니 설령 네 온몸을 못쓰게 된다고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러나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이 고통의 시간들과 싸워 이겨서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하기를 바란단다. 왜냐하면 그래야 네 인생이 더 행복하고 풍요롭게 아름다워 질 것이기 때문이란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 소녀는 일년여 동안의 긴 고통의 순간을 이겨내고 성한 몸으로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의 부모님도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아니 아예 바보가 된다고 할지라도, 또 심지어는 죄가운데 빠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비록 힘들지라도 우리가 어떤 고난이나 죄악과 싸워 이기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난에 지거나 혹은 어떤 어둠의 세력에 억눌려 초라한 인생이 되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조금 힘들더라도 선한 싸움을 잘 싸워 더 아름답게, 더 거룩하게, 더 온전하게 성장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받아 누리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어떤 고난과 시험과 유혹이 오더라도 그것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과 적당히 타협하고 양보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장은 조금 편하고 쉬울지 모르지만 결국은 우리 영혼이 유린당하여 그런 것들에게 얽매이고 종노릇하며 결국 인간으로서의 참된 가치나 의미도, 주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생명과 자유와 평화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세상의 고난과 시험과 유혹과 핍박과 죄악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맞서 싸울 때 비록 그 과정이 조금은 힘들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누려야 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살다가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후4:7,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조금 힘들다고 세상의 죄와 유혹에 적당히 타협하며 양보하며 살아가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모든 죄의 유혹과 시험과 환난을 이기고 진정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고난과 유혹과 왜곡된 가치들과 맞서 싸워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 안에 온전한 선과 의와 진리와 사랑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심령을 채울 때 하나님의 능력과 선과 의와 진리와 사랑으로서 세상의 모든 고난과 시험과 죄되고 왜곡된 것들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이기겠습니까? 무엇으로 모든 고난과 죄와 악을 이기겠습니까? 우리 힘으로 가능하겟습니까? 그것으로는 안됩니다. 우리는 강한 것 같지 심히 약한 존재입니다.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죄와 무지를 깨달아 알 수 있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9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바울은 지금 하나님 앞에 간절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데 무엇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느냐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충만한 은혜로 가득 채워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물질적인 부요함이나 세상의 명예나 세상적인 어떤 축복이나 건강이나 이런 것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덧입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하는 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 안에 있는 진리와 선과 은혜와 사랑 등의 선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한 가치로 채워져 있지 않으면 죄와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없고 따라서 다른 것들 즉 돈이나 건강이나 명예나 지식이나 이런 것들이 아무리 풍성해도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육신이라는 그릇 속에 무엇을 채우느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이 들어있으면 하나님의 사람이요, 마귀가 들어있으면 마귀의 사람입니다. 진리가 들어 있으면 진리의 사람이요, 거짓이 들어있으면 거짓말쟁이입니다. 사랑과 은혜로 가득차 있다면 은혜의 사람이요, 악과 거짓과 추함이 가득 들어 있으면 악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복된 마음이 가득차 있으면 축복의 사람이요, 원망과 미움과 저주가 가득 들어 있으면 저주의 사람이 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안에는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와 사랑과 축복과 은혜가 가득 들어있으므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우리는 모든 죄와 유혹과 어둠을 이기고 생명과 사랑과 진리와 은혜가운데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함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온갖 충만한 것들로 자신을 채우는 것, 이것이 우리가 정말 은혜와 진리와 생명의 풍성함 가운데 살아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것들로 우리를 채우지 못하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세상의 죄와 악과 어둠의 세력을 이기지 못하여 진정한 평안이나 행복이나 은혜를 누릴 수 없고,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도 누리기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무엇을 위하여 힘쓰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복된 삶을 살려면 무엇을 먼저 채워야 합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육신도 건강해야 합니다. 지식과 교양도 쌓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명예나 권력도 얻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먼저 인간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까? 국회의원 판사 의사 목사가 되기 전에 하여튼 외형적으로 무언가 그럴듯한 무엇이 되기 전에 먼저 올바른 인성을 갖춘 인격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정한 인간이 되려면 올바른 인성을 가진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거기에다가 올바른 영성을 플러스해야 합니다. 아니 인성보다 영성이 먼저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인성만 좋으면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영혼이 죽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올바른 영성과 인성과 지성과 감성을 갖춘 사람이 온전한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이라야 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누려야 할 영적 육적 물적 지적 정적 모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믿음과 사랑과 은혜과 진리와 거룩과 의와 선과 지혜로 충만함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올바른 영성과 이성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정말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이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8,19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간단히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크고 높고 깊은 것인가를 알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한없이 크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물론 모든 인류, 모든 우주 공간에 미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길이는 어떻습니까? 그 길이는 무한대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어지는 무한한 것이지요. 또 그 깊이는 어떻습니까? 그 사랑의 깊이는 바다 밑바닥까지, 지구 깊은 곳까지 모든 곳에 미치는 것입니다. 높이는 어떻습니까? 그 높이는 하늘 끝에까지 닿는 숭고하고 존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모든 인류에 미치는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덧입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 집니까? 그야 우리가 주님의 그 사랑을 알 때 우리는 그 앞에 엎드려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며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 무한한 은혜로 채워주시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주님이 어떻게 우리는 사랑하셨는지를 안다면 어떻게 그 놀라운 사랑 앞에 감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 그냥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 가운데 차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위하여 그 온갖 모욕과 멸시와 천대와 고통을 당하시고 마침내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그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어찌 그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진정 겸손히 엎드려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영광과 찬양을 돌리고 말씀묵상할 때 어찌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래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 때에 우리의 심령에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감격의 눈물이 쏟아져 내리게 됩니다. 그 감격의 눈물과 함께 세상의 모든 원망 불평 짜증 미움 저주 불신 어두운 것 더러운 것 다 독기 시기 질투 이런 모든 찌꺼기들도 다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내 심령속에 천국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하늘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하게 빛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기쁨과 능력과 사랑과 감사가 넘쳐흐르는 삶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느끼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죄인,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이 죄인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건져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더욱 주님 앞에 엎드릴 때 더욱 은혜의 충만함을 입어 우리 가운에 남아 있는 모든 찌끼 같은 것들을 다 쏟아내 버리고 주님안에 있는 놀라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와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하겠는데 어떻게 그 놀라운 사람을 진정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늘 17,18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온전히 모심으로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그리고 그의 사랑도 올바르게 안다는 것입니다. 뭐 당연한 거지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실 때 비로소 우리의 어둠과 무지는 물러가게 됩니다. 사단은 결박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우리 속에 빛과 진리와 생명과 사랑의 영이 들어오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사탄의 영이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죄와 어둠의 그림자도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사람이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게 하시고, 따르게 하시고, 생명가운데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까짓 알량한 내 고집, 생각, 이성, 가치관, 주장, 경험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완전히 주장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삶에 완전한 완전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니까 빛이시니까 은혜이시니까 능력이시니까 우리는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과 핍박이 와도 끄떡없이 서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까짓 세상의 것들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물결따라 이리저리 휩쓸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내 작은 생각과 가치관과 의지를 따라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보며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모든 약하고 추하고 왜곡된 것들을 이기고 생명력이 넘치고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승리의 사람, 능력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식도 건강도 좋지만 그보다 앞서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정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사랑과 진리와 선과 의와 빛과 기쁨과 평강와 위로와 소망 등의 온갖 좋은 것들로 여러분의 심령이 가득채움 받아서 진정 세상의 모든 약한 것과 어두운 것과 힘든 것과 죄의 유혹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 되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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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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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윤택한 영혼을 위하여

 

 

 

 

말씀 : 갈2:19~21

제목 : 영혼을 윤택함을 위하여

 

1.진리 안에서의 갈등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마음이 무겁고 갈등과 고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초신자들은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라리 아예 하나님도 모르고 말씀도 듣지 않았더라면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텐데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보니까 부담만 되고, 걱정이 되고,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부담이 되고, 이웃을 섬기지 못해서 마음이 무겁고, 때로는 주일날도 가족들하고 어디 나들이나 다녀오고 싶은데 그것도 맘대로 못하고, 헌금생활 제대로 못하는 것도 마음이 무겁고 그렇다고 또 하자니 돈이 아깝고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과 고민이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감각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고민과 갈등이 없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죽어서 감각이 없는 영혼인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신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고, 아무거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도 고민도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도덕적 감각이 완전히 죽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도적질을 하고도 오늘 한건 했다며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사기꾼들은 사기 쳐서 돈을 빼앗고는 기분이 좋아서 낄낄 거립니다. 마약에 취한 사람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좋다고 희희낙락합니다. 술에 취하면 죄를 짓는데 용감해 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덕성이 마비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양심이 죽어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때리고 차고 꼬집고 별짓을 다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죄짓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도 고민이 없습니다. 희희낙락합니다. 제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나는 자유하다, 평안하다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아픔이 있습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아픕니다. 조그마한 죄에도 통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픔이 없습니다. 죄를 짓고도 뻔뻔합니다. 그래서 영혼과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저 육의 욕구를 따라 살면 되었지만 예수님 믿고 영혼이 살아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옛 자아가 남아서 자꾸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도록 충동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내 맘대로 살면서 아무 갈등과 고민 없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새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예수님이 이끄시는대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내가 주인 노릇하던 그 행세가 남아 있어서 자꾸만 육의 욕망을 따라 가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진리 때문에 겪는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요,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갈등과 고민이 우리를 더욱 하나님 앞에 세움으로 성화의 길을 가게 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좀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후7:10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지만 그 죄인중에 괴수라는 인식이 자신을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세우게 함으로써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던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진리 때문에 겪는 갈등과 고민이 있을 때, 내가 정말 너무 부족하고 미련하고 죄많은 인생이라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 너무 죄송스럽고 마음에 부담이 되고 갈등이 생길 때 너무 낙심하고 탄식하고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책하고 탄식하고 낙심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 주저앉힐 뿐입니다. 힘을 빼놓고 무기력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하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래서 갈등과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성화되어가고 그러면 점차 그런 갈등과 고민도 최소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고민과 갈등보다는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훨씬 크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과 참 자유가운데 할렐루야 찬양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하면 좀 더 성화되어 주님과의 갈등을 최소화시켜 주님의 은혜들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2.속사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등과 고민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고민과 갈등과 죄속으로 몰아가는 옛자아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속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자아보다 새 자아가 힘이 훨씬 세면 우리는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자아보다 옛자아가 힘이 세면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니까 우리의 삶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한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말했었습니다. “얘야, 사람의 마음속에는 늘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한 마리는 악마 같은 놈으로 늘 거짓과 미움과 도적질과 향락과 음란과 분노와 질투와 탐욕과 교만 등의 악한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나쁜 길로 내몰려고 하고,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늑대로써 믿음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희망과 친절과 선함과 겸손과 진실과 용서 쪽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하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이 나쁜 늑대와 좋은 늑대가 들어 있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단다.”

그러자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면 좋은 늑대와 나쁜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야 사람이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그러니까 나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나쁜 늑대가 힘이 세져서 이기고,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좋은 늑대가 힘을 얻어서 나쁜 늑대를 굴복시킨다는 것이지요. 힘이 센 놈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모셔들이더라도 지금까지 우리를 완전히 지배해왔던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가 완전히 물러가지 않아서 자꾸만 새자아에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를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나쁜 옛자아를 이기려면 새자아를 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3:16절에서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 사람을 강건케 하라. 그래야 너희가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사상들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쁜 늑대의 힘을 약하게 만들고, 좋은 늑대를 힘이 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육체를 강건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육신에 필요한 영양분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하면 됩니다.

영혼의 강건함도 동일합니다. 영적인 좋은 양식을 충분히 섭취하고 영적으로 열심히 훈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쁜 늑대인 옛 자아에게는 먹이를 주지 말고, 좋은 늑대에게만 먹이를 주고 그 좋은 늑대가 열심히 움직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는 점점 힘을 못쓰게 되고, 완전히 먹이를 끊어 버리면 굶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늑대인 새자아에게는 영양가 있는 풍성한 양식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면 살이찌고 생명력이 풍성해지고 힘이 세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양식만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영양가 있는 양식을 듬뿍주고 열심히 운동을 시켜야 근육이 튼튼해져 힘이 세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자아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면 힘이 세져 바짝 말라서 힘없는 옛자아 따위는 단숨에 때려 눕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이고, 좋은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입니까? 물론 영적, 정신적 양식입니다.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이런 것들입니다. 맨날 싸우고 죽이고 빼앗는 폭력적인 오락을 즐기거나 그런 폭력적이고 음란한 영화를 보고, 술집이나 도박장을 기웃거리고, 거짓되고 속되고 우상숭배와 저속하고 더러운 말을 일삼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등이 모두 못된 늑대가 좋아하는 먹이인 것입니다.

반대로 책을 읽어도 건전한 교양도서를 읽고, 아름다운 사랑과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줄수 있는 영화를 보고, 믿음의 사람들, 선한 사람들, 진실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확실한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 영혼을 살리는 확실한 양식입니다. 기도하며 찬양하며 믿음 안에서 아름답게 교제하는 것도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귀한 양식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전도를 하고 이웃을 돕고 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늑대를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양식을 먹고, 세상에서도 아름답고 선한 것들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며 선을 행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좋은 늑대에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100%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아가 옛자아를 이겨 거룩하고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꾸만 옛자아에게 먹이를 주고 새자아는 거의 굶다시피 한다면 보나마나 옛자아가 새자아보다 힘이 세니까 옛자아에게 져서 질질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6:55절에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생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우리 심령에 모셔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잘 안하니까 영양실조에 걸려 새자아가 맥을 못추는 것입니다. 자꾸만 세상의 헛된 양식만을 사모하며 그것만을 쫓아다니니까 옛자아는 기세등등하고, 새자아는 빈약하기 짝이 없어 옛자아 앞에서 기도 못펴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시편1:1-3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양식을 잡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라도 잡수시기 바랍니다. 살기 위해서 잡수시기 바랍니다. 밥맛이 없을 때 살기 위해서라도, 힘을 내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먹고 영적인 운동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몸을 안 움직이면 몸이 자꾸 약해집니다. 아예 안 움직이면 온 몸이 굳어서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움직이기 싫어도 자꾸 움직여야 합니다. 운동하기 힘들고 귀찮아도 자꾸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이 힘을 쓰는 것입니다.

새 자아도 그렇습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귀찮아도 먹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영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자아가 강해집니다. 힘이 세집니다. 그래서 옛자아를 이깁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양식, 생명의 양식을 열심히 먹고, 열심히 영적인 활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속에 있는 새 자아, 영혼, 좋은 늑대가 토실토실 살이찌고 강건해지고 생명력이 넘침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옛자아를 단숨에 눕혀 버리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예수님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속사람을 강건케하여 옛자아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선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열심히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과정에서 예수님이 내안에 온전히 들어오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런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달라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세울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드디어 예수님이 완전히 우리 가운데 들어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진리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란 놈이 감히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바리 같은 옛자아가 대들긴 하겠지만 그러나 한방에 K.O. 시켜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자아가 우리 가운데 온갖 유혹과 정욕과 탐심을 불러 일으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협박도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면 옛자아는 이빨도 빠지고 발톱도 빠지고 힘도 다 빠져버린 호랑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빨도 발톱고 힘도 다 빠져 버린 호랑이는 무늬만 호랑이지 실상은 호랑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나쁜 늑대, 나쁜 호랑이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그런 것들을 물리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기에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그의 심령속에 모셔 들여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을 때에 모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도전과 유혹과 핍박과 환난과 고난을 이기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었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은 오직 믿음 안에서 즉 믿음을 따라서, 말씀을 따라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완전히 그를 사로 잡았기 때문에 주인이신 주님만을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는 옛자아가 더 이상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모든 역경속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하면서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적 갈등과 고민이 있습니까?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까? 희망적 징조입니다. 무언가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거기에 안주하지도 마십시오.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조금 더 힘을 내어 여러분의 거듭난 자아에게 양식을 듬뿍 공급하십시오. 영적인 활동을 조금 더 활발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힘 주시고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새자아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새자아가 옛자아를 확실히 제압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평안과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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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고난을 받는 자세

 


제목 : 고난을 받는 자세
말씀 : 골 1:24


본문 :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믿음대로 살아도 고난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살아있는 것, 예수 믿게 된 것, 기도할 수 있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가장 큰 것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천국시민이 된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을 가짐으로 받는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자랄수록 말씀대로 살고 하루의 삶이 더 행복해지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살면서 행복하게 사는 삶이 계속 되면 참 좋겠지만 때때로 고민을 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이 말씀대로 사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있을 때입니다. 지금같이 은혜롭게 살고 지금같이 좋을 때가 없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더 말씀대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아도 전혀 생각 밖의 어려움이 생길 때가 있고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흉년이 와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삭,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정말 훌륭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일생은 고난이 정말 많았습니다. 욥과 같은 경우도 하나님이 칭찬하실 정도였지만 엄청난 고난이 닥치는 것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다 희생하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고난이 날마다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고난 없이 산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인생이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7) 엄마 뱃속에 있던 아기가 나올 때에도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고난 속에서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고난이 있습니다.

[애매한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은혜 받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 애매한 고난, 선한 일을 위하여 받게 되는 고난”(벧전 2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당연합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은 유익이 많습니다. 그 고난으로 인하여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 그 뿐만 아니라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이 고난 중에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고난 중에 예수 믿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찾아온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축복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장 이 곳은 지옥이 될 것입니다. 이 고난 때문에 세상이 이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중에 고난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2. 또 선한 일을 하는 중에 고난을 받은 사람은 기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받은 상과 영광을 생각할 때 이 고난을 잘 참을 수 있습니다.

3. 그러나 문제는 애매한 고난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인 것입니다. 말씀대로 믿음대로 사는데도 왜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답답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기회로 만드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이런 고난이 올 때 화가 나고 원망 불평할 수 있습니다. 또 해결이 안 되어서 고민하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이 없어지기만을 바라면서 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4. 하나님께서 이런 애매한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이유는 첫째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이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 믿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혀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매한 고난이라도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유익을 주시려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라는 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 자세]

  믿음이 어린 사람과 성숙한 사람의 차이가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을 받는 자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고난 받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애매한 고난이 왔을 때 첫째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애매한 고난이 온 이유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무엇인가 내게 말씀하시고 알게 하시려는 것이 있기 때문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아니면 절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뜻을 알기 위해서 엎드리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크게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큰 믿음을 가집니다. 그러면 큰 축복을 받고 큰 일꾼이 됩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엎드리면 자신에게는 복이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고난은 기도하라는 사인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기 때문에 사자 굴에 들어가서 밥이 되는 고난이 왔을 때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변명도 하지 않고 오직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하나만 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눈을 여셔서 하나님의 엄청난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6-9) 이 시대는 포로로 끌려가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불타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그 비밀을 알았으니 참 행복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지역마다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왕이 쳐들어왔습니다. 밤새도록 엎드려 기도했을 때 18만5천의 군사들이 다 죽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히스기야의 이름이 더 높아지고 그 위기가 축복으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에게 죽음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15년이나 더 살게 하시고 증거로 해 그림자가 15도나 더 뒤로 물러나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힘든 일이 생길 때 낙심하지 마시고 히스기야처럼 엎드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삽니다.

  두 번째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만을 결심합니다. 이유는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만 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늘 복 받을 것을 믿습니다. 고민할 것 없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 말씀대로 살 것을 결심하고 애를 쓰면 반드시 축복하시고 책임지시는 것을 눈으로 볼 줄 믿습니다. 창세기 26장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삭에게 하나님은 애굽으로만 내려가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삭은 흉년 때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랄 지방에 갔습니다. 그 때에 100배의 축복을 주셔서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준행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갔을 때도 거룩하게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만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이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다니엘이 포로였지만 왕의 진미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 늘 3번 기도했을 때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결국 축복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서울에서 집회했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를 새로 잘 짓고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보통은 강사숙소를 호텔로 자주 정하는데 저에게는 교회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집사님 댁에 큰방을 주셨습니다. 제법 큰집이었지만 추운 날씨였는데도 방에 불을 떼지 않았고 물도 찬 물만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좀 기분이 나빴습니다. 장로님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집사님 남편이 왔습니다. 그 남편이 제게 공손히 인사하면서 ‘목사님, 저는 1년에 한 두 번 교회에 소풍갑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더 나빴습니다. 그 말은 결국 자신을 교회에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식사 후에 모두 교회에 가고 저는 조금 여유 있게 가려고 혼자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걸어가면 5분 거리를 고물 자동차에서 저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주 놀랐습니다. 저녁예배 드리고 나오니까 또 차로 저를 집에 데려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예배 때에는 5시 정각에 남편이 넥타이까지 매고 부인 성경을 들고 차에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새벽예배를 드린 후에는 제가 1시간 이상 기도하니까 그 분이 못 기다리고 먼저 가셔서 저는 걸어서 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집회를 계속 했습니다. 그 남편을 보면 귀하고 방을 보면 짜증이 나곤 했습니다. 목요일 새벽에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남편이 추리닝을 입고 뛰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차를 경찰이 몰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면허도 없이 새벽에 운전 연습한다고 자신이 끌고 돌아다니다가 걸린 것이었습니다. 사실 운전 연습한다고 저를 데리고 다닌 것이었습니다. 참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축복해주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가정이 축복을 받아야 주의 종이 대접받는 것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낮 공부 때까지 계속 기도할 때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집중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낮 공부를 마치고 점심을 시내에서 먹고 돌아오니까 대문을 활짝 열고 남편이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남편이 저를 데리고 소파에 앉더니 두 내외가 큰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면서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중동에 수출을 했는데 사업을 확장시켰다가 부도가 났습니다. 은행에서 압류하려고 결정을 내리는 상황에 부흥회가 있었고, 교회에서는 부흥강사를 위해서 호텔도 얻고 준비도 했는데 두 내외가 모시겠다고 하니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낙심할까봐 허락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예배 나가서 부인집사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십일조 생활을 했는데 회사가 잘 되니까 십일조의 액수가 커져서 떼먹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5분 거리에 살면서도 장로님, 목사님 아무도 대접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대접하지 못하고 집이 날아갈 상황이 되자 부흥강사를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제가 거기서 머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망한 사람이 결심하고 십일조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장로님들과 저를 대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목요일에 경찰에 걸리는 바람에 저는 기도했는데 그 시간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수출전람회 중에 그 회사도 전시를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그 회사를 보다가 1억 5천만원을 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1억이 얼마나 큰 돈입니까! 그래서 그 회사를 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수출 제품을 들고 교회에 가져와서 간증하고 설교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로 기도하기로 결심하십시오. 둘째로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하십시오.

3. 고난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욥의 문제는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한심스럽고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것이 났다는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만약 욥이 그 상황 중에 기뻐하고 감사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떤 고난이 있어도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

  그러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살겠습니까?

1.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고난은 위대한 사람을 만듭니다. 고난은 마치 뜨거운 불의 용광로와 같아서 금을 넣으면 모든 찌꺼기가 사라지고 정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유도 없이 고난을 주시는데 목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그 사람의 찌꺼기를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정욕, 혈기, 교만, 위선, 오만의 모든 찌꺼기들을 없애기 위해서 고난의 용광로 속에 하나님은 우리를 넣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그는 은혜를 받으면 위대해지지만 자신에게 고난을 준 사람을 원망하고 미움을 가지면 그 사람은 더 악한 사람이 됩니다. 고난을 받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자세가 무척 중요한 것입니다. 억울하게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은 생각지도 않고 사람과 세상을 원망하고 불평하면 더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반드시 전화위복이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요셉과 같이 억울한 고난은 반드시 더 큰 축복을 가져온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은 항상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믿으십시오.

3. 세 번째로 고난이 왔을 때 항상 기뻐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이런 믿음으로 사자굴에 들어가도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고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기쁨이 충만했고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스데반의 그 모습으로 사도 바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성숙의 변화는 고난 받는 태도와 정비례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성숙해져가는 것은 고난 받는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는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과 목표가 주님을 위해서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계속 디모데에게 강조하는 것이 고난을 잘 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까지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다는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자세가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저와 여러분도 고난 많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고난 때문에 낙심하는 사람되지 말고 모든 고난을 자신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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