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 설교 (Sunday sermon)

 

 

 

 

제목: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성경:엡1:17-19

 


1.천국을 확실히 보아야 합니다.

 

부산의 한 변두리 달동네에 신실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시장 한 모퉁이 좌판에서 장사를 하며 오직 하나님과 두 아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육체적으로 고달픈 삶을 살았지만 그는 감사하며 자녀들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였습니다. 이런 권사님의 신실한 믿음을 보셨는지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복을 주셔서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하여 큰 아들은 중소기업 대표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대기업 이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신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커다란 아파트를 드리려고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그 달동네의 낡고 작은 집을 고집하며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두 아들은 정 다른 데로 이사 가시는 게 싫으면 어머니께서 사시던 이 동네에다 새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웬일인지 쉽게 허락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단 몇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들이 뭐든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해드리겠다고 하자 권사님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내 집을 지어주고 싶으면 이렇게 해라. 먼저 주춧돌은 열 두개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짓되 주춧돌은 모두 다른 보석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둥은 다이아몬드로 하고 벽은 황금으로 하라. 마루에는 자수정으로 깔고, 담장도 황금으로 할 것이며, 대문도 열두개로 하되 모두 진주로 해야 하고, 담장 밖에는 유리알 같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강가에는 다달이 실과가 맻히게 할 것이며, 집으로 들어오는 도로도 모두 황금으로 포장을 하거라.”

그러자 두 아들은 깜짝 놀라며 ‘에이 어머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런 집을 어떻게 짓습니까?’ 그랬더니 권사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너희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런 집을 준비해 두셨단다. 나는 머잖아 그곳으로 이사를 갈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집을 지어주지 못할 바에야 그만 두고 그 돈으로 정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나 더 도와 주거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크리스천이라면 적어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질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이런 영광스러운 저택을 준비해 두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장차 반드시 이런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런 영광을 누릴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그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까짓 세상 것 때문에 염려 근심 질투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얽매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보십시오. 마음의 눈을 밝히 떠서 무엇을 보라고 하였습니까?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무엇이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입니까?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이런 영광의 나라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소망가운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저 천국의 한량없이 풍성한 영광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영광의 기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영광의 기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영광은 한량이 없습니다. 영원무궁합니다. 조금치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이 영광의 기업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천국의 그 아름다움과 영광을 알지 못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무슨 철학적 신학적 과학적 이성적하면서 쩍쩍하면 유식한 줄 알고, 천국이나 지옥 이야기를 하면 유치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공자가 어떻고 맹자가 어떻고 소크라테스가 어떻고 하면 그럴듯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하면 시큰둥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거 큰일 날 징조입니다. 세상이 그만큼 인본주의에 흠뻑 빠져 들어있다는 증거입니다. 눈이 어두워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철학이나 과학이나 정치나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신학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심오한 철학을 가르치려고 오신 것도 아니고, 그저 윤리적 도덕적으로 조금 고상한 삶을 살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여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눅19:10절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향이 아니라 실재의 장소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라도 반드시 사 들여야할 가장 소중한 보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며 정말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가운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어 영의 눈을 활짝뜨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저 영광스러운 천국을 확실히 보는 가운데 세상의 작은 것들에게 얽매이지도 말고, 그것 때문에 낙심이나 좌절이나 원망이나 불평도 말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소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확실히 선명하게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밝고 환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가 밝히 보이고 천국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길거리에 매일 더럽고 해어진 옷을 입고 다 낡아빠진 검은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더듬거리면서 나와서 깡통을 앞에 놓고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며 먹고사는 맹인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불쌍하고 초라한 행색으로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하는데 그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동정을 베풀어 제법 많은 천원짜리 지폐들이 깡통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한 소년이 걸인의 곁에서 서성거리더니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걸인 앞에 놓여 있는 깡통을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맹인 거지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소년을 향해 날쌔게 쫓아가더니 금방 붙잡고는 숨을 헐떡이며 ‘이런 고얀 녀석 같으니라구, 앞길이 창창한 녀석이 어디가서 일을 도와주고 살든지 할 것이지 할 짓이 없어 남의 것을 훔쳐 먹고 사느냐 이 놈아,’하면서 발길로 막 차고 두들겨 패고는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걸인은 맹인 행세를 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두 눈이 멀쩡한데 일하기가 싫어서 맹인 행세를 하며 빌어먹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진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목적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마음의 맹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은 떴으나 진짜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보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저 돈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 세상의 나쁜 것만 보면서 원망과 불평과 투기와 향락과 죄악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밝은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눈이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과 이 아름다운 세상과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보고 천국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며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빛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6:22,2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냐? 네 눈이 감겨져 진리를 보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네 인생이 얼마나 어두운 인생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밝은 눈, 아름다운 눈, 깨끗한 눈,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진리의 빛,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을 듬뿍 받아들이면 우리 인생이 해와 같이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육신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물질에도 밝아야 하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더 밝은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눈, 과학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더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진장으로 제공해 주시는 생명의 빛을 듬뿍 받아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눈을 가지려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때만이 우리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달려가 그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진리이신데, 생명이신데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어떻게 진리를 알겠으며, 생명을 알겠습니까?

오늘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보십시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뭡니까? 물론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지혜를 얻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눈이 활짝 열려 그 나라를 바라보며 누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복되고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대통령을 아는 것도 좋고, 국회의원을 아는 것도 좋습니다. 과학을 알고, 문화를 알고, 윤리도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 진정한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을 알게 되고 그래서 세상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진정 복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7: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을 때에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박근혜대통령이 18대 대한민국대통령에 취임하며 취임사에서 경제 민주화를 이루고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대통령으로서 정말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헌신함으로 어느 정도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 갈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책임질 수도 없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고,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고, 아무리 과학이나 문화가 눈부시게 발달해도 참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해서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내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래서 진정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국민행복시대는 요원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성실하게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거기에 행복이 있고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의 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방법과 목적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과 방법과 방향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진실하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죄를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죄에 대해서도 밝은 눈을 갖게 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걸 바르게 알고 그래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 때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 사회는 죄에 대하여 점점 눈이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머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가 만연되어 있어서 죄에 대한 경계심도 두려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가 양심을 마비시켜 더욱 죄악 속에 빠져 들어가게 하고 그래서 죄에 대한 양심은 더욱 마비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3:1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알지 못하고, 죄를 깨우쳐 주어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속에서 자행자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는 입에 담기도 그렇지만 요즘 뉴스에 보면 이 땅에 성적인 타락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모릅니다. 성폭행 문제 너무 자주 나오고, 나아가 불륜의 관계도 너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강제성이 없으면 다시 말해 서로 좋아서 하면 뭔 짓을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아름답게 하나 되어 아름답고 복되고 경건한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서로 돕고 의지하고 존중하며 귀히 여기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서로 좋아서 엉뚱한 짓을 하면 결혼을 했건 안했건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죄와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예민한 감각으로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 인본주의, 이기주의, 외모지상주의, 편의주의, 향락주의, 종교다원주의 등 온갖 왜곡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정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정 우리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가치있게 하고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하는지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며 영적인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영적인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야 그런 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나아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기에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들 때문에 원망 불평 좌절 분노하지 않게 됩니다. 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밝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과 천국과 세상에 대하여 활짝 열려진 밟은 눈을 가지고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소망과 평강과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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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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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성도는 최고의 신사 (Sunday preaching)

 

 

 

 


말씀 : 행17:10-15

제목 : 신사적인 그리스도인

 

1.성도는 최고의 신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지상 최고의 신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몇백만원 몇천만원하는 명품 옷이나 시계나 구두를 신고 번쩍번쩍 빛나는 고급 세단차를 몰고 다니는 그런 신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영혼과 인격과 정신과 생각과 가치관이 신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원래 신사 즉 gentleman은 ‘가문이 좋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문으로도 큰 띠 紳, 선비 士자를 써서 옛날 중국에서 예복을 입고 큰 띠를 맨 고위직에 있는 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사란 본래 높은 지식과 인격과 품위를 가지고 있는 높은 신분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보다 고귀한 신분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입니다. 이 보다 높고 고상한 지식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최고의 윤리 강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세상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 높고 고상하고 영광스러운 신분과 지식과 윤리강령을 가진 사람이므로 마땅히 최고의 신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벧전2: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인데 거지같은 인생을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거룩한 나라의 백성인데 속되고 추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니 그 고귀한 신분에 걸맞게 고상하고 품위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거룩한 존재인지 기억하며 몸과 마음과 말과 행동과 영혼이 거룩하고 깨끗하고 품위 있고 단정한 참 신사다운 삶의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존중받으며 주의 은총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신사다운 면모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1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너그러워서’라는 말씀은 본래 ‘고귀한 혈통의, 마음이 고상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에 쓰던 개역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신사적이어서’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말이 원어의 뜻에 훨씬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신사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2.고상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신사적이라고 평가한 것은 우선 그들은 고상한 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에서 본 11절 말씀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들은 너그러워 즉 고상하여 말씀을 잘 받아들였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속되고 추하고 더러운 것들에는 관심이 없고, 고상한 진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순전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베뢰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신사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상한 마음, 신사적인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의 돈이나 일이나 향락이나 이런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으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받지도 않고 설령 받는다해도 결코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13장에서 사람의 마음을 네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길가와 같은 마음인데 이런 마음은 완고하고 강퍅하여 죽어도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제 고집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씨알머리도 먹히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돌밭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은 말씀을 받기는 받는데 건성으로 받아 말씀이 심비에 새겨지지 않음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실족해 버리는 마음입니다. 다음에는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마음은 말씀을 받기는 한 것 같은데 마음속에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욕심이나 향락이나 이런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차 있어서 말씀의 씨앗이 싹이 터서 조금 자라다가 세상 것에 묻혀서 결실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곡식이 잡초 속에 떨어져 겨우 싹을 내긴 했으나 잡초에 묻혀 아무런 결실도 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이 고상하여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씨앗이 잘 싹이 트고 자라나 30배, 60배, 100백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바로 신사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네 종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애굽왕 바로는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끝까지 완고하고 강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다가 끝내 열가지 재앙을 당하고 전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비극을 만났습니다. 가룟 유다는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재물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까지 팔아 넘겼고,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사람으로서 듣지 못할 소리를 들었고, 결국 비참한 자살로 최후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재물을 탐을 내다가 부부가 함께 죽는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데마라는 사람은 처음에는 바울을 따라 다니며 열심히 믿음 생활하는 것 같았으나 믿음의 뿌리가 없어 바울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 결국 천국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에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보았던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는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하여 베드로사도를 초청한 다음에 온 가족과 친척과 친구까지 초청해서 모아 놓고 기다리다가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러 오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모셔 들여 겸손히 말씀을 받음으로 온가족과 친척과 친구까지 구원받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으나 피라미 새끼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지치고 곤한 몸으로 돌아와 항구에 배를 대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셔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인 베드로의 지식이나 경험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고기는 주로 호수의 가장자리 근방에서 잡히지 가운데 깊은 곳에서는 잘 잡히지 않습니다. 게다가 해가 중천에 떠오른 지금은 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헛그물질을 했기에 지칠대로 지쳐 이제는 그물질 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까지 별거 아닌 자신의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다 내려놓고 ‘주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했으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여러분, 저는 농사도 잘 모르고, 여러분의 직장이나 경영하는 사업장의 상황이 어떤지 솔직히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농사를 짓는 일이나 직장생활하는 일이나 사업장을 경영하는 일에도 제 말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언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각론에 들어가서는 여러분의 경험과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되 근본적인 원칙은 반드시 제말대로 하십시오. 겸손히 저의 말을 받아들이십시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배격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겸손히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방법은 여러분들보다 만배 억배 수백 수천억배 더 좋고 더 크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에 성공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 안에 풍성함이 있습니다. 오직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그 방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인생의 배가 가득 차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강퍅하고 완고하고 가시덤불같은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그 알량한 지식과 이성과 경험만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밤새도록 아니 죽을 때까지 수고해봐야 결국은 헛그물질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베뢰아 사람들처럼 옥토와 같은 마음, 고상한 마음, 신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여러분 인생의 배가 만선을 이루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여러분, 베뢰아 사람들은 이렇게 고상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또 어떻게 하였다고 하였습니까? 앞에서 본 11절 다시 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러한가하여’라는 말씀은 성경이 정말 그런지 아닌지 의심하며 읽었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이 누구신지, 참된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 진정 인생이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 알기 위하여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입니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렇게 성경을 상고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처음에 바울에게 들었을 때는 겸손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그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다음에는 이 고상한 진리의 말씀을 더욱 바르게 자세히 확실하게 알기 위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고,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듣게 되었고,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분명히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일단은 겸손하고 순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다음에는 열심히 말씀을 상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분명하게 알려주시고 믿게 하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어디에 생명이 있는지, 무엇이 복을 받는 길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알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최고의 신사다운 면모를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말씀을 받지도 않고, 설령 받았다해도 간절하 마음으로 상고도 하지 않으면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고집과 이성과 경험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면 결코 신사와 같은 인생도, 성공한 인생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초라하고 추하고 자부심도 긍지심도 가치도 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열심히 상고하면 진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가운데 살게 됩니다. 성공한 인생, 멋있는 인생, 신사중의 신사와 같은 인생, 주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겸손히 말씀을 받고 열심히 상고함으로 주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신사다운 신사의 삶을 살아감으로 빛과 같이 빛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믿음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짜 신사는 진리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입니다. 죄와 악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쉽게 불의에 굴복하고 죄와 야합하고, 세상과 짝하며 추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들과 벗하며 지내면 신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짧은 신앙경륜에도 불구하고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믿음을 지킬뿐더러 바울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14,1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무슨 말씀이냐하면 바울은 베뢰아에 오기 전에 데살로니가에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시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모함하여 체포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간신히 보석금을 주고 풀려나긴 했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전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 이곳 베뢰아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이 전도는커녕 도리어 신변이 위험해지자 예수님을 영접한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일행을 아덴까지 안전하게 피신시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된지 불과 한 두달내지는 몇 달 밖에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많은 군중을 선동하여 바울을 무슨 이단자나 사이비 집단으로 몰아간다면 혼란에 빠지고 미혹당하기 쉬운 때였습니다.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이런 위협과 유혹과 핍박이 있으면 교회를 떠나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있기 십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그 짧은 신앙연륜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협과 공갈과 유혹과 핍박 앞에 무릎 꿇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겸손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였기 때문에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킬 뿐만 아니라 위험을 무릎쓰고 바울일행을 안전하게 아덴까지 피신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신사적인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부인하고 도망가고 숨는다면 그게 무슨 신사이겠습니까? 조금 손해볼 것 같으면 진리를 팔아버린다면 그게 무슨 신사겠습니까? 베뢰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짧은 신앙연륜에도 자신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은 물론 바울일행까지 안전하게 피신시켜주는 신사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신사다운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고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런데 조금 힘들다고 진리를 버리겠습니까? 어떻게 조그마한 물질적 이익을 위하여 신앙양심을 팔아먹겠습니까? 어떻게 죄의 세력에 굴복하고 더럽고 추하고 거룩하지 못한 것들과 야합하며 친구가 되겠습니까? 그래가지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영화로우시고 거룩하신 주님의 자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진정 신사다운 크리스천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고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열심히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온전한 관계속에서 내 생각, 고집, 이성, 경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세상의 모든 죄나 악이나 더럽고 추하고 속된 것들에게 지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안에서 예수님을 따라 거룩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신분에 어울리는 신사 중의 신사적인 모습으로 주의 영광 나타내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받고 존경받고 인정받으며 주님의 은총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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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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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윤택한 영혼을 위하여

 

 

 

말씀 : 갈2:19~21

제목 : 영혼을 윤택함을 위하여

 

1.진리 안에서의 갈등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마음이 무겁고 갈등과 고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초신자들은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라리 아예 하나님도 모르고 말씀도 듣지 않았더라면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텐데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보니까 부담만 되고, 걱정이 되고,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부담이 되고, 이웃을 섬기지 못해서 마음이 무겁고, 때로는 주일날도 가족들하고 어디 나들이나 다녀오고 싶은데 그것도 맘대로 못하고, 헌금생활 제대로 못하는 것도 마음이 무겁고 그렇다고 또 하자니 돈이 아깝고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과 고민이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감각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고민과 갈등이 없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죽어서 감각이 없는 영혼인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신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고, 아무거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도 고민도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도덕적 감각이 완전히 죽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도적질을 하고도 오늘 한건 했다며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사기꾼들은 사기 쳐서 돈을 빼앗고는 기분이 좋아서 낄낄 거립니다. 마약에 취한 사람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좋다고 희희낙락합니다. 술에 취하면 죄를 짓는데 용감해 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덕성이 마비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양심이 죽어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때리고 차고 꼬집고 별짓을 다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죄짓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도 고민이 없습니다. 희희낙락합니다. 제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나는 자유하다, 평안하다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아픔이 있습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아픕니다. 조그마한 죄에도 통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픔이 없습니다. 죄를 짓고도 뻔뻔합니다. 그래서 영혼과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저 육의 욕구를 따라 살면 되었지만 예수님 믿고 영혼이 살아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옛 자아가 남아서 자꾸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도록 충동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내 맘대로 살면서 아무 갈등과 고민 없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새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예수님이 이끄시는대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내가 주인 노릇하던 그 행세가 남아 있어서 자꾸만 육의 욕망을 따라 가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진리 때문에 겪는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요,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갈등과 고민이 우리를 더욱 하나님 앞에 세움으로 성화의 길을 가게 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좀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후7:10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지만 그 죄인중에 괴수라는 인식이 자신을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세우게 함으로써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던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진리 때문에 겪는 갈등과 고민이 있을 때, 내가 정말 너무 부족하고 미련하고 죄많은 인생이라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 너무 죄송스럽고 마음에 부담이 되고 갈등이 생길 때 너무 낙심하고 탄식하고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책하고 탄식하고 낙심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 주저앉힐 뿐입니다. 힘을 빼놓고 무기력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하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래서 갈등과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성화되어가고 그러면 점차 그런 갈등과 고민도 최소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고민과 갈등보다는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훨씬 크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과 참 자유가운데 할렐루야 찬양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하면 좀 더 성화되어 주님과의 갈등을 최소화시켜 주님의 은혜들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2.속사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등과 고민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고민과 갈등과 죄속으로 몰아가는 옛자아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속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자아보다 새 자아가 힘이 훨씬 세면 우리는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자아보다 옛자아가 힘이 세면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니까 우리의 삶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한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말했었습니다. “얘야, 사람의 마음속에는 늘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한 마리는 악마 같은 놈으로 늘 거짓과 미움과 도적질과 향락과 음란과 분노와 질투와 탐욕과 교만 등의 악한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나쁜 길로 내몰려고 하고,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늑대로써 믿음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희망과 친절과 선함과 겸손과 진실과 용서 쪽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하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이 나쁜 늑대와 좋은 늑대가 들어 있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단다.”

그러자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면 좋은 늑대와 나쁜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야 사람이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그러니까 나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나쁜 늑대가 힘이 세져서 이기고,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좋은 늑대가 힘을 얻어서 나쁜 늑대를 굴복시킨다는 것이지요. 힘이 센 놈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모셔들이더라도 지금까지 우리를 완전히 지배해왔던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가 완전히 물러가지 않아서 자꾸만 새자아에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를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나쁜 옛자아를 이기려면 새자아를 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3:16절에서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 사람을 강건케 하라. 그래야 너희가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사상들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쁜 늑대의 힘을 약하게 만들고, 좋은 늑대를 힘이 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육체를 강건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육신에 필요한 영양분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하면 됩니다.

영혼의 강건함도 동일합니다. 영적인 좋은 양식을 충분히 섭취하고 영적으로 열심히 훈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쁜 늑대인 옛 자아에게는 먹이를 주지 말고, 좋은 늑대에게만 먹이를 주고 그 좋은 늑대가 열심히 움직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는 점점 힘을 못쓰게 되고, 완전히 먹이를 끊어 버리면 굶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늑대인 새자아에게는 영양가 있는 풍성한 양식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면 살이찌고 생명력이 풍성해지고 힘이 세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양식만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영양가 있는 양식을 듬뿍주고 열심히 운동을 시켜야 근육이 튼튼해져 힘이 세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자아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면 힘이 세져 바짝 말라서 힘없는 옛자아 따위는 단숨에 때려 눕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이고, 좋은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입니까? 물론 영적, 정신적 양식입니다.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이런 것들입니다. 맨날 싸우고 죽이고 빼앗는 폭력적인 오락을 즐기거나 그런 폭력적이고 음란한 영화를 보고, 술집이나 도박장을 기웃거리고, 거짓되고 속되고 우상숭배와 저속하고 더러운 말을 일삼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등이 모두 못된 늑대가 좋아하는 먹이인 것입니다.

반대로 책을 읽어도 건전한 교양도서를 읽고, 아름다운 사랑과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줄수 있는 영화를 보고, 믿음의 사람들, 선한 사람들, 진실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확실한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 영혼을 살리는 확실한 양식입니다. 기도하며 찬양하며 믿음 안에서 아름답게 교제하는 것도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귀한 양식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전도를 하고 이웃을 돕고 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늑대를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양식을 먹고, 세상에서도 아름답고 선한 것들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며 선을 행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좋은 늑대에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100%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아가 옛자아를 이겨 거룩하고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꾸만 옛자아에게 먹이를 주고 새자아는 거의 굶다시피 한다면 보나마나 옛자아가 새자아보다 힘이 세니까 옛자아에게 져서 질질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6:55절에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생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우리 심령에 모셔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잘 안하니까 영양실조에 걸려 새자아가 맥을 못추는 것입니다. 자꾸만 세상의 헛된 양식만을 사모하며 그것만을 쫓아다니니까 옛자아는 기세등등하고, 새자아는 빈약하기 짝이 없어 옛자아 앞에서 기도 못펴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시편1:1-3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양식을 잡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라도 잡수시기 바랍니다. 살기 위해서 잡수시기 바랍니다. 밥맛이 없을 때 살기 위해서라도, 힘을 내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먹고 영적인 운동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몸을 안 움직이면 몸이 자꾸 약해집니다. 아예 안 움직이면 온 몸이 굳어서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움직이기 싫어도 자꾸 움직여야 합니다. 운동하기 힘들고 귀찮아도 자꾸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이 힘을 쓰는 것입니다.

새 자아도 그렇습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귀찮아도 먹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영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자아가 강해집니다. 힘이 세집니다. 그래서 옛자아를 이깁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양식, 생명의 양식을 열심히 먹고, 열심히 영적인 활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속에 있는 새 자아, 영혼, 좋은 늑대가 토실토실 살이찌고 강건해지고 생명력이 넘침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옛자아를 단숨에 눕혀 버리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예수님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속사람을 강건케하여 옛자아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선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열심히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과정에서 예수님이 내안에 온전히 들어오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런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달라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세울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드디어 예수님이 완전히 우리 가운데 들어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진리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란 놈이 감히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바리 같은 옛자아가 대들긴 하겠지만 그러나 한방에 K.O. 시켜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자아가 우리 가운데 온갖 유혹과 정욕과 탐심을 불러 일으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협박도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면 옛자아는 이빨도 빠지고 발톱도 빠지고 힘도 다 빠져버린 호랑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빨도 발톱고 힘도 다 빠져 버린 호랑이는 무늬만 호랑이지 실상은 호랑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나쁜 늑대, 나쁜 호랑이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그런 것들을 물리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기에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그의 심령속에 모셔 들여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을 때에 모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도전과 유혹과 핍박과 환난과 고난을 이기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었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은 오직 믿음 안에서 즉 믿음을 따라서, 말씀을 따라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완전히 그를 사로 잡았기 때문에 주인이신 주님만을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는 옛자아가 더 이상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모든 역경속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하면서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적 갈등과 고민이 있습니까?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까? 희망적 징조입니다. 무언가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거기에 안주하지도 마십시오.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조금 더 힘을 내어 여러분의 거듭난 자아에게 양식을 듬뿍 공급하십시오. 영적인 활동을 조금 더 활발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힘 주시고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새자아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새자아가 옛자아를 확실히 제압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평안과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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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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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설교

본문 : 마태복음 1 : 18~25

제목 : "임마누엘"

 

오늘날 남아선호사상이 많이 퇴색했습니다만,

예전에는 유난히 아들을 많이 낳기를 소원하는 가정들이 흔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많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가정에서 아들을 낳기 위해 계속 임신을 하다보니

어느덧 딸이 많은 가정이 되었습니다.

연이어 세 딸을 낳고 네 번째 임신을 했을 때에 틀림없이 아들이라고 믿었지만,

낳고 보니 또 딸이었습니다.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산모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않고 죽든지 말든지

방 한 구석에 밀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죽지 않고 울기만 했습니다.

이 어머니는  “그래도 죽지 않고 빽빽거리는 것을 보니 명줄이 긴가보다” 생각하고

아기에게 젖을 물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춘기에 들어선 딸아이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다는 것과 아무도 기뻐해 주는 사람도 없었으며

죽기만을 바랐던 아이였다는 사실이 당사자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때부터 마음에 병이 생겼습니다.

엄마를 극도로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엄마가 아무리 사랑해주고 잘해주려고 해도 그 사랑이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는 

마음이 삐뚤어진 불행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상처를 많이 받게 됩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아도

상처 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큰 상처는 버림받은 결과 얻은 상처로,

특별히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크게 상처를 입습니다.

요사이 이혼률이 높아지면서 내버려지는 아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 아이들 중에는 6~7세의 아이들도 있지만 갓 태어난 아이들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평생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 해서 범죄한 인간은 노아 때에 와서 극도로 타락하여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렀습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후 노아의 여덟 식구를 제외한 모든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것도 불행한 일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10~12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들이 다 타락하여 악해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사람을 한 명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따라 우리를 멸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지어주신 그 이름에는 ‘구세주’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 자체가 예수님의 사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실을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전하면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 2:1~5).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8~9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14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가장 저주스럽게 죽으신 것입니다.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주스럽게 죽으셨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법을 어기므로 해서

저주를 받게 된 저와 여러분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까지도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받은 복 가운데 가장 큰복은 “언제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여 주시는 복”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절대주권을 가지신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복을 다 받습니다.

범사에 형통하는 복과 전화위복의 복을 받습니다.

고난이 오고 손해를 보고 누명을 쓰고 노예가 되고 감옥에 가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지나고 보면 더 잘되고 더 큰 축복을 받으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전화위복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창세기 21:22을 보면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라고 했고,

창세기 26:28에서 이삭에게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조차도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고 고백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뿐만 아니라 야곱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있었으며,

요셉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범사에 형통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고

그곳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 일 때문에 오히려 총리가 되고 축복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28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범사에 형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후로부터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갈 3:14,29).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면 구원을 얻은 그 사람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18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은 성령을 알뿐만 아니라

그 성령이 그 사람 안에 계시며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3:16).

옛날 러시아에 지혜롭고 선한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매우 사랑해서,

과연 이 나라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 종종 노동자나 거지

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가 방문한 사람들 중에 아무도

그가 황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황제를 잘 대접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문전박대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황제가 오두막에 사는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얼마나 극진히 대접을 잘하는지  음식만 먹고 가려고 했으나

주인이 간곡히 붙잡는 통에 하루 밤을 함께 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왕복을 입고 다시 그 사람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아니, 어제 밤에 나와 함께 잔 분이 이 나라의 황제였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황제는 "그대는 지난밤에 나를 정성껏 대접했노라.

이제 내가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 말해보라."

그러자 이 사람은 허리를 굽히고 "황제께서는 궁궐과 그 영광을 떠나

이 어둡고 비천한 장소에 저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제가 먹는 초라한 음식을 함께 드셨고,

저와 거처도 함께 하셨습니다.

황제께서 저와 함께 거하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달리 아무런 소원이 없습니다." 라고 겸손히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이 땅의 황제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 주님은 하루 밤만 주무시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떠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축복이야말로 축복 중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을 때,

이 사실을 모르고 낙심이 되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셨으나

이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지 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여주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중에 외로움을 느끼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홀로 있을 때에도 혼자가 아닙니다.

언제나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요한복음 5:24의 말씀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순간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다시는 정죄함을 받지 않게 되었고, 결단코 심판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하나님이 함께 하여주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임마누엘의 복을 받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기독교 외에 유교, 불교, 이슬람교 등등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나름대로 진리를 전파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믿게 된 어떤 분이 자신이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실수로 우물에 빠졌는데,

그 우물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사람 살려! 사람 살려!”라고 외쳐댔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이것을 보고 “아이고, 이 일을 어찌할꼬.

아무래도 당신은 전생에 죄가 많아서 이렇게 된 모양이니

참회하고 저승으로 가시오.”라고 말하고 안타까워하며 지나갔습니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그 곁을 지나가다가 우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사람은 누구나 아차하면 실수하는 법이지.

이번 일을 거울 삼아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게나, 쯧쯧." 하며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깊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점점 굳어오고 온 몸에 힘이 빠져

물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또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사람이 우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급히 어디론가 달려가 사다리를 구해가지고 와서

우물 밑으로 내려가 거의 다 죽게 된 이 사람을 살려냈습니다.


이 이야기는 비유로, 첫 번째 사람은 석가모니를 말하고,

두 번째 사람은 공자를 말하며,

세 번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왜 범죄했느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느냐,

“어떤 죄를 범했느냐”라고 절대로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책망하시지도 않으시며 조목조목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마 11:28).

그리고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계 3:20).


예수님은 죄가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묻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이 열리기만을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마음의 문은 결코 바깥에서 열 수 없기 때문에 본인이 문을 열어줄 때까지

주님은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보면,

비록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다 쓰고 돌아온 

이 아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무조건 받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라고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나오기만 하면, 예수님께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는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참 회개는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오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죄를 이길 힘을 주시고,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오시라고 권하면 “술 끊고 가겠다.”

​혹은 “담배를 끊고 가겠다.” 혹은

“지금의 죄된 생활을 좀 정리하고 교회에 가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앞서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우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도저히 자기 힘으로 살아나올 길이 없습니다.

내 힘으로 죄를 버리고, 내 힘으로 바르게 살고,

그 다음에 교회 가겠다는 사람은 영원히 교회에 나오지 못합니다.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가 있는 대로, 허물이 있는 그대로,

부족하지만 무조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성도가 됩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기만 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임마누엘의 복을 받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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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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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첫주일 낮 예배 대표기도문 (December,prayers for sunday worship service)

 

 

죄인을 부르러 오신 아버지여! 저희는 죄인입니다.

나면서부터 저주받은 자요 살아가면서 멸망받을 자들인데, 주님이 택하시고 구속하여 자녀 삼아주신 그 지극하신 사랑과 오늘도 지키고 보살펴 주시는 그 변함없는 사랑에 끝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주님이시여! 또 다시 저희는 성도의 자격을 잃어버리고 죄인의 모습으로 나아왔습니다. 세상 권세에 짓눌리어 지난 한 주간 동안 저희 영혼에 생긴 상처와 허물을 치료해 주시고 고요함 속에 저희 마음에 둥지를 트시고 들어와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모든 은혜 중에 가장 적은 것조차 받기에 합당치 못한 저희들이 이 시간도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간절히 구하오니 험악한 세상에서 강퍅해진 심령들을 사랑의 빛으로 녹이시며 용서해 주시고 옛부터 지금까지 저희가 주님께 맹세하고 약속한 말들을 낱낱이 기억하게 하셔서 그것들이 입술로만 끝났다면 이제라도 탄식하며 그 약속을 이행하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은총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들의 머리털까지 헤아리시며 걸음까지 다 세시는 주님이신데 어찌 저희들이 감히 변명할 말이 있겠습니까?

주님이시여! 불쌍히 보시고 주님의 피와 의로우심으로 전신갑주를 입게 하셔서 살벌한 세상 한 복판에서 죄와 두려움과 부끄러움에서 보호하여 주시고 주님의 평화와 사랑으로 분깃을 삼고 담대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항상 바르고 옳고 순수한 생활 속에서 주님의 신성한 깨우침으로 무엇을 위해 살 바를 알려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두가 믿음으로 사랑하고 사랑으로 용서하며 남을 위해 남몰래 우는 풍성한 자들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푸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들의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는 곳에 영원히 가뭄이 없게 하시고 저희들의 용서가 태산같이 쌓이는 곳에 영원한 원수가 하나도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시여! 지금 이 곳엔 실망과 고통 중에 있는 형제들과, 빈곤과 병마에 시달리는 형제들과 핍박받고 설움 당한 형제들과 불화하고 괴로워하는 형제들이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당하고 있는 슬픔과 실망의 의미를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병고와 사망과 흑암 중에서도 주의 성령이 최후로 승리하는 것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지혜와 용기를 주시고, 위로와 기쁨과 건강을 주시고, 은혜로 채워주시고 치료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어라"하신 주님!

부르짖으면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이시여!

저희들의 간구와 부르짖음에 권능의 오른손 흔들고 화답하여 주시옵소서. 우둔하고 미련한 저희들이지만 주님께서 저희들을 사랑하시는 것만은 아나이다.

다시는 아버지 말고는 아무에게도 저희 마음을 열지 않게 하시고 그 사랑의 맹세를 영원히 간직하게 하옵소서. 특별히 간구하옵나니 이 시간도 압제와 굶주림에서 절망하며 신음하고 있는 북한 동포들과, 청운의 꿈을 안고 외국으로 건너갔다가 인간 천대와 고독만 뼈저리게 맛본채 지금도 모진 고생과 질병으로 희망조차 잃고 방황하고 있는 많은 이민자들과 불법체류자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 아버지시여!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도 입히시나니 저들도 먹이고 입히시며 소망을 주시고, 그러한 병과 고통과 싸우고 있을 때가 하나님을 발견하고 축복 받을 가장 좋을 때임을 깨닫게 하셔서 하루 속히 하나님을 영접하여 은혜를 받고 자비와 긍휼을 기다리는 용기와 확신을 주시옵소서. 오늘도 이 교회의 유치부로부터 중, 고등부 및 각 기관들을 축복하여 주시고, 세우신 종을 통하여 무한하신 은총으로 베풀어 주셔서 그 은혜가 모두와 함께 머물고, 모두와 함께 나누며 모두와 함께 지내도록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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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주일예배설교 /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October,Sunday Sermon)

 

제목 :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 

말씀 : 2:42-47 

 

1.올바른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스위스 영성가 프란시스 쉐퍼가 한번은 미국교회를 방문하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미국교회는 모두 자기 행복, 자기 만족에 빠져 있다. 미국교회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나 거룩한 삶이나 사명이나 헌신이나 하나님의 뜻이나 이런 것들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세상에서 누릴 만족이나 기쁨이나 뭐 이런 것들만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신앙의 목적이 지극히 이기적이고 육체적이고 세상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교인을 소비자교인이라고 불렀고, 그런 교회를 상품가게라고 하였습니다. 소비자 교인이란 사람들이 자기 구미에 맞는 음식이나 상품을 찾아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원하는 것을 얻고 만족하는 것처럼 교인들도 자기 구미에 맞는 것을 찾아다니는 소비자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어떻게든지 신자들의 구미에 맞는 상품을 열심히 개발하여 사람들을 끌이들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예배자로 교회에 오는 게 아니라 자기 구미에 맞는 것을 얻기 위해 찾아온 소비자요, 교회는 교인들의 원하는 상품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미국 교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미국 국민의 55% 주일에 교회에 나가는데 왜 나가느냐고 물었더니 45%는 삶에 유익한 말씀이나 교인들과의 친교를 통하여 뭔가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답했고, 26%는 마음의 평화와 정신적인 안정을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했고, 20% 정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나머지 9%는 기타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55% 중에 20%만이 올바른 목적으로 왔으니 결국 고작 약11%만이 제대로 된 교인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에 와서 친교나 유익한 이야기나 인간적 만족을 구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만족과 기쁨과 정신적 안정과 안식을 주십니다. 이것도 신자가 누릴 수 있는 복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그런 인간적 만족과 행복이 교회의 존재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 캠브리지대학교 교수를 지내면서 하나님을 부정하다가 중년 이후에 주님 품으로 돌아와 순전한 기독교, 나니아 나라 이야기 등 수많은 기독교 저술을 남긴 C.S 루이스라는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행복해지려고 교회를 찾은 것이 아니다. 그런 행복은 와인 한 병으로 얻을 수 있다.”

 

교회에 와야할 진정한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우리가 인간적으로 원하는 만족이나 행복을 찾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크고 아름답고 진정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뭡니까? 그건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와 무지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것입니다. 2차적으로는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림으로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인생의 목적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올바르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가운데 바르게 아름답게 정직하게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주며 자신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와 의미가 넘치는 삶을 살다가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6: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는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 그 뜻대로 삶으로써 이 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이 분명한 의미를 바르게 알고 올바른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주님의 역사이루어가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믿음위에 서서 생명력있는 삶을 살려면 가장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올바르고도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구세주라는 사실에 대한 올바르고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 교제를 위한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단순히 세상에서 인간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소망을 두고 위로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은 고상한 인격과 정신적 수양을 하는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곳도 압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히 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나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생명의 공동체요, 진리의 공동체요, 이 땅위에서 천국을 건설하는 공동체 인 것입니다.

 

여러분, 16장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 주님,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또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중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16:1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너는 복된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16:18절을 같이 읽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러분, 이 대화의 요지가 뭡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너희는 나를 무엇으로 알고 따라 다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선지자나 선생으로 알고 있는데 너는 어떠냐? 나를 메시야로 알고 따르느냐 아니면 너희들도 그냥 선지자중의 한사람으로 아느냐, 아니면 나를 통해서 무슨 부귀영화라도 얻으려고 따라 다느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시오, 메시아라고 고백을 하였고, 그런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며 바로 그런 너의 그러한 신앙고백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와 같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믿고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의 터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이 없으면 교회의 겉모양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교인들이 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그냥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는 있어도 진정 생명력이 넘치는 성도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세상의 위대한 성인이나 영웅이나 선생이 아니라 그리스도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나에게 평안이나 위로나 기타 여러 가지 복이나 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분명히 알고 오직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분명한 신앙고백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와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새생명의 은총이 내 안에 온전히 역사함으로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주님께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가운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는데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믿음은 영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 속에 오셔서 우리의 죽었던 영을 살려 주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가르쳐주시고 믿게 하실 때만이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습니까? 1:13,14절을 보겠습니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무슨 말씀이냐하면 열두제자를 비롯한 120여명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보내드리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분부를 따라 마가의 다락방으로 돌아와 오로지 기도하는데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힘쓸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인 것입니다. 좀 길지만 같이 보겠습니다. 2:1~4절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러니까 120여명의 문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로지 기도에 힘 쓴지 열흘만에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이 방안에 가득하고, 마치 혀가 날름거리는 듯한 불길이 임하더니 거기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자들은 온전히 주님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래서 과감히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게 되고,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며 초대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이 창립52주년 기념주일이면서 성령강림주일인데 바로 이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였던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초대교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을 기념하여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도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우리 자신이 먼저 풍성하게 누리고 나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다짐하고 힘쓰자는 취지에서 지키고 있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알게 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와 기쁨으로 주를 섬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왜곡되고 죄되고 무지한 것들을 분별하게 되고, 모든 연약하고 부족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창립기념주일과 성령강림주일을 보내며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들을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가운데 모든 도전 세력들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모든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사랑과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려면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함으로 바로 이런 사랑과 은혜가 충만함으로 더더욱 힘있게 발전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얼마나 사랑과 은혜가 충만했던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44,4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자기 재산과 소유를 다 팔아 교회에 바치고 니꺼 내꺼 따로 없이 각각 필요한 만큼 가져다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모습입니까? 이것은 사랑과 은혜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과 은혜가 없으면 이런 일은 시작도 못하고 만에 하나 어떻게 시작을 했다 해도 날마다 온갖 시비와 갈등과 다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과 은혜가 충만했기에 자신의 것을 다 드려서 함께 사용했습니다. 날마다 함께 모여였습니다. 음식을 함께 나누며,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사랑과 은혜가 충만했고,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니 믿는 자의 숫자는 날마다 더해갔고, 더욱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가정이든 교회이든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다른 어떤 공동체라도 사랑과 은혜가 있으면 반드시 흥합니다. 망할래야 망할 수가 없고, 흥하지 않을래야 흥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요, 잘나고 못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배우고 못배우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번영과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면 서로 귀히 여깁니다. 서로 이해하고 용납합니다. 서로에 대하여 성실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합니다. 원망 불평 시기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런 공동체가 어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공동체에 하나님이 어찌 복을 주지 않겠습니까? 그런 공동체가 어찌 사람에겐들 인정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런 공동체가 어찌 든든히 세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공동체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더욱 깨어 기도하고 말씀을 들음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라니다. 그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어 서로 사랑하며 은혜를 끼치며 도우며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과 평안을 주고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사랑이 충만하여 생명력있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열심히 모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선은 그들은 열흘동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러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니까 더더욱 기쁨이 충만해서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게 되었습니다. 오늘 46절을 보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여러분, 보십시오.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주일이나 수요일만 아니라 매일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은 늘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는 정말 아름답고 바람직한 순환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쓸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니 사랑과 은혜가 넘쳤고, 그러니까 더욱 모이기를 힘쓰게 되었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니 더더욱 은혜와 사랑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성령충만함을 받고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삶을 살려면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사랑과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그러면 더 교회가 오고 싶습니다. 말씀이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더욱 교회를 찾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충만한 성도의 선순환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모이지 않으면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기도와 말씀과 찬양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은혜는 멀어져 갑니다. 은혜가 멀어지면 교회는 더 멀어집니다. 교회가 멀어지니 은혜는 더 다운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활력이 충만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0:25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모이기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대가 갈수록 사람들이 점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영광돌리고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일을 멀리하고 그저 먹고 입고 자고 놀고 하는 세상 일에 바빠지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서는 성령으로 말씀으로 은혜로 사랑으로 충만함을 입고 은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지 않으면 우리가 맨 날 하는 일이 뭡니까? 그저 맨날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들이 먹고 입고 자고 돈벌고 일하고 뭐 그런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맨날 그런 거만 생각하는데 어찌 영성이 풍요로워 지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교회창립52주년 기념주일과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곳에 너무나 귀한 교회를 세워주셔서 생명 주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기초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위하여 모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도간에 더욱 사랑과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함을 받아 더욱 사랑과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갈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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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네째주일낮설교/천국백성의 가정 (October,Sunday Sermon)

말씀 : 시128:1~6

제목 : 천국백성의 가정

1.천국은 내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천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완전한 천국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천국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정말 모든 슬픔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 미움 시기 질투 상처 아픔 질병 어둠 죽음 없는 세상은 여기에는 이루어 질 수 없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그런 천국의 은총은 저 하늘나라에 가서나 비로소 누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비록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누릴 완전한 천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천국의 기쁨을 맛보며 천국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눅17:20,2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그렇다고 눈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 눈으로 볼수 있고, 손으로 만져지고 지금 여기서와 같이 실제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살아갈 실제적 천국이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승천하시면서 그 천국이 예비되면 내가 다시 와서 우리를 주님이 계신 그 실제적인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볼수 있게 임하지 않는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저 영원한 천국에는 분명히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고 실제로 우리가 살아갈 천국이 있지만 지금 여기서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완전한 파라다이스가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런 외적인 것에서의 천국을 바라보지 말고 내적인 천국 즉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그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자유와 기쁨과 소망을 누리는 그런 천국을 맛보며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천국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권세나 명예나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속에 모시고 그 말씀과 가치관과 삶의 양식을 따라 살아가는 그 심령속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시며 모든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가운데 천국의 은총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분들이 현실 현실 그러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그래서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죽자사자 일만 하면 행복줄 압니다. 어떤 분든 죽어라고 공부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행복할 줄 압니다. 그래서 결국은 현실의 노예로 살아갈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노예로 끌려다니지 말고 주님의 말씀과 은혜와 능력으로 현실을 지배하고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상황이나 다른 사람 때문에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천국을 스스로 만들어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날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모여서 열심히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모여서 성도간의 교제도 나누어야 합니다. 또한 예배를 마치고는 좀 쉬면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가끔은 짬을 내어 가족과 함께 하며 사랑을 나누며 친밀하게 교제하는 시간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우리 삶이 그렇게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그런 시간도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간도 가정천국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시간 이상으로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천국은 결국 우리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그 말씀과 가치와 삶의 양식과 인도하심과 그 방법대로 또한 그 은혜와 능력으로 모든 환경과 상황과 시간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스스로가 천국을 만들어 누리는 지혜롭고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예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천국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심령과 가정속에 온전히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뭐 너무나 당연한 말씀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로써 모든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과 평강과 기쁨과 위로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면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죄와 무지와 어둠과 욕심과 질투와 근심과 염려와 이런 어둔 것들로 채워져 있는 우리 심령속에 주님의 생명과 사랑과 은혜로 채움으로 그런 어둔 것들을 몰아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요15: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른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이른다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이 말씀 바로 앞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니까 기쁨이니까 평강이니까 그 예수님 안에 있으면, 그 사랑안에 살아가면, 그 말씀을 지키면 당연히 기쁨이 충만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하나님 없이도 행복하게만 잘만 살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마약에 취하고, 술에 취한 자나 혹은 미친사람이 누리는 즐거움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마약이나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감각이 무디어집니다. 감각이 무디어 지면 어떻습니까? 슬픔이나 고통이나 죄나 고통에 대한 의식도 희미해집니다. 그래서 근심걱정도 잠시 잊게 되고, 죄의식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술에 취하면 추하고 악한 행동을 서슴없이 하게 됩니다. 미친 사람은 어떻습니까? 머리는 제멋대로 흐트러지고, 때가 꼬지지하고, 옷은 더럽고 너덜거리고 하면서도 히죽거리며 좋아합니다. 하나님 없는 기쁨이 바로 그와같은 것입니다. 죄에 취해서 악을 행하면서도 좋다고 그럽니다. 무지속에 갇혀서 멸망의 길로 가면서 알지 못한채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그 말씀과 가치와 방법대로 살아갈때에 거기에 이 땅에서의 천국이 있고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님없는 인생,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 인생에게는 결단코 행복이 없습니다. 본인들은 행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단지 무지한 자아에 속고, 사탄에 속고 있는 것 뿐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형통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고,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같고,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심령과 가정 위에 분명히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평강과 사랑과 위로와 소망이 넘칩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와 기쁨으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심령이 평안하고 가정이 평안하고 범사에 잘 되는 가운데 천국의 은총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말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의 중심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속에 온전하게 이루어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 방법대로 살아갈때에 모든 생명과 복과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에 가득하여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기쁨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부부가 서로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한 천국의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이 평안해야 합니다.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하고 돈많이 벌고 공부많이 해도 가정이 평안하고 행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지상 천국의 삶을 살려면 가정이 평안하고 행복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은 가정의 핵심 주체인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섬기며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관계가 아름답게 성결하게 이루어지면 그 가정 전체가 평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부부관계가 아름답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창2:18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실 때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돕는 배필이 뭡니까? 말 그대로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물론 도와준다는 것은 상대방으로 봐서는 도움을 받는 것이지만 여기서의 강조점은 도와주는 것입니다. 즉 배우자를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로 여기지 말고 내가 배우자의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로 살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끊임없이 서로 요구하게 되고 그러면 그 가정의 평안은 깨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를 채워주려고 하다보면 결국 너의 필요도 채워지고 나의 필요도 채워지고 그러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실상은 너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부부가 가정의 출발점입니다. 부부가 인류공동체의 핵심입니다. 인류공동체의 모든 출발점은 부부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부부만큼 중요한 관계는 없습니다. 실제로 부부만큼 가깝고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부만큼 늘 가까이서 함께하며 좋은 친구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는 자녀라 할지라도 부부만큼 항상 함께 하면서 서로에게 위로와 기쁨과 힘과 도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부부는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함께하며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을 함께하는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하고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닙니까? 그러니 이 너무나 가깝고 너무나 소중한 인생의 동반자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고 존중히 여기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정말 부부간에 정말로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귀한 사람입니다. 너무나 고마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진실로 사랑하며 서로가 내가 당신의 필요를 채워주겠노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정말 부부관계가 아름답게 이루지고 그럴 때 결국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부부간에 정말 서로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고 아끼고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로 살아갈때에 사랑과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천국가정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은총을 누리며 살려면 먼저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또한 자녀를 말씀과 사랑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 우리 모든 자녀들이 예수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삶의 양식을 따라 살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자녀가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그 가정이 행복해지고 나아가서는 다음 세대의 가정이 바로 서고, 결국 사회전체가 아름답고 복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부모들 혹은 기성세대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저 자녀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는데만 몰두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하여 힘쓰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잘먹고 잘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도외시 한 채 그저 외적인 풍요로움만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영성과 인성과 지성을 가지고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저 남보다 편하게 대접받으며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영성과 인성에 문제가 생기고 자녀도 행복하지 못하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문제가 생기고, 더 나아가서는 많은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엡6:4절의 말씀을 보세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저 맨날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면서 세상 공부만 시키지 말고, 그저 세상 공부만 시키는데 온갖 것을 다 쏟아붓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하는 자녀가 영적, 인격적, 지적으로 올바르게 성장하여 영성과 인성과 지성을 고루 갖춘 올바른 지성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물론 자녀 자신이 행복하고 가정에 평안과 기쁨과 소망이 있고 나아가 이 사회가 아름답고 복된 사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물론 자녀들에게 공부도 열심히 시켜야 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잘되라고 죽어라고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먼저 정말 아름답고 복되고 진실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하도록 더욱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자녀들이 영성과 인성과 지성과 감성을 고루 갖춘 올바른 인격체가 되어 주님도 기쁘시게 해드리고 남에게도 기쁨을 주며 자시니도 진정한 인생의 가치와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모든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국의 은총을 누리기 위하여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자녀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 공경과 더불어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규범이기 때문에 이것이 안되면 인류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엡6:2,3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약속있는 첫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약속있는 첫 계명이란 십계명 중 인간에 대한 계명중 첫 번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인데 그 계명을 따라 부모님을 바르게 공경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님 공경이 첫계명이라는 것은 결국 부모님 공경이 인간 윤리의 기본이며 근간이며 뼈대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런지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부모님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내게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가지만으로도 공경받고 섬김받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게다가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헌신적으로 양육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 없이는 나 자신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으로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같이 부모님 공경은 인륜의 근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계명 중에 첫째로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고 하셨고, 반대로 부모님을 공경할 때에는 하나님으 놀라운 축복으로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뭐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부모님을 공경하는 인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명령중 제일 첫째되는 명령입니다. 그렇게 인륜의 근본을 바르게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부모님을 공경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그 삶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얼마나 성실하겠습니까? 그러면 세상에서도 얼마나 인정을 받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향기나는 삶을 보면서 어찌 복을 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고 먼저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또한 부부가 정말 사랑하고 아끼고 귀히 여기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과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고 자녀는 몸과 마음과 물질로 부모님을 공경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속에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천국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 복된 가정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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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주일낮예배설교 / 강을 건넌 사람들 (October,Sunday Sermon)
 
제목 : 강을 건넌 사람들

말씀:수3:14-17


1.현실의 강을 넘어서야 합니다.

어떤 인터넷 매체에 보니까 박명수 어록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들이 있었습니다. ‘성공은 1%의 재능과 99%의 빽이다.’ ‘일찍 일어난 새가 피곤하다.’ ‘고생 끝에 골병난다.’ ‘가는 말이 고우면 얕 본다.’ ‘늦었다고 생각할때는 늦은 거다.’ ‘참을 인이 세 번이며 호구된다.’ 그리고 이런 말들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고, 이런 말들을 주옥같은 명언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지요? 공감이 가는 말들인가요? 물론 어떤 면에서는 오늘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공감이 되는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설령 그런 말들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게 진리는 아닙니다. 아니 도리어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다면 그것은 현실이 그만큼 왜곡되고 썩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사고 방식은 결코 인간의 삶을 가치있고 의미있게 하며,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갈등과 탈법과 술수와 상처와 아픔과 시기와 질투와 무질서를 초래하여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그걸 진짜로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말 뿐입니다.

여러분, 세월이 어떻게 변하고, 가짜가 어떻게 그럴듯하게 가장해도 거짓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세월이 변한다고 진리가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진리가 가짜가 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처음부터 진리가 아니었을 뿐이지 진리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너무나 왜곡된 가치관이 마치 진리처럼 가장하고 판을 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인본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무사안일주의와 쾌락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무슨 박명수 어록이니 뭐니 하는 이런 허접스런 말들이 나오고 그걸 또 무슨 주옥같은 명언이니 어쩌니하며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며 흘러가고 있는 이 왜곡된 가치관들 속에 끌려가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맨날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교제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신이 죄와 무지속에 있는 줄은 모르고 그저 자기중심, 자기 소견, 자기 의지, 자기 경험대로 물질주의, 이성주의, 이기주의 물결속에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거기에 휩쓸려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1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의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영혼이 변화되고, 마음이 변화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그 뜻을 좇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온전한 분별력을 가지고 모든 거짓되고 왜곡된 가치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다수라는 이름으로 진짜를 가장하고 있는 가짜를 바르게 분별하고 배격함으로 그런 것들에 결코 농락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오염되고 추하고 왜곡된 현실을 이기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현실의 강을 건넌 사람들

여러분,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런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 살 것을 계속 말씀하셨고, 또 그런 말씀을 따라 삶으로써 성공했던 많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아 할아버지도 그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죄가 세상에 관영하여 하나님께서는 땅을 홍수로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 할아버지 가정은 그런 현실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그 현실의 강을 건너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시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홍수를 피라하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즉각 순종하여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무려 120년 동안에 걸쳐 방주를 지었습니다.

여러분,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137m, 넓이가 23m, 높이가 14m의 3층짜리 배로 용적량이 3만톤이 넘는 거대한 배입니다. 물론 지금의 조선기술로는 이런 규모의 배 정도야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노아의 가족 여덟식구가 순전히 손으로 이 정도의 배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120년동안 그 엄청난 일을 하면서 얼마나 힘이 들었겠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었겠습니까? 이 배를 정말 우리가 완성이나 할 수 있을까? 정말 120년 후에 인류가 멸망할 비가 오기는 오는 걸까? 또 10년 30년 50년 70년 100년이 지나면서 내가 정말 말씀을 바로 듣기는 들은 걸까 등등 많은 생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전 세계의 홍수심판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믿고 배를 만드는 노아의 가족을 미치광이 취급을 하면서 노아의 가족을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런 모든 현실을 뿌리치고 배를 만들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오직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였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중단하지 않고 열심히 성실하게 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120년이 지났을 때 정말로 하늘에 구멍이 뚫려 밤낮 40일 동안을 양동이로 물을 퍼붓듯이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온 세상이 물에 다 잠겼고, 노아를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던 사람들은 하나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뭐라 그러거나 말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내부 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120년간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의 가족 8식구만이 방주 안에서 안전하게 대홍수의 강을 건너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12: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밑도 끝고 없이 무작정 가라는 것입니다. 떠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왜곡되고 죄된 문화가 판을 치는 이 땅과 이 사람들과 이 문화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떠나 내가 새롭게 시작할 그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버지와 고향산천과 그 모든 환경과 문화의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구원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애굽의 우상숭배의 문화의 땅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 멀리 가나안 땅까지 가게 하셔서 거기서 새역사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들이 뜻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죄와 무지와 왜곡과 어둠의 현실들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딛고 일어서든지 아니면 그곳을 떠나든지 여하튼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고, 거기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에덴의 모습들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렸고, 너무나 많이 변질되어 있어서 우리가 넘어야 산과 건너야 할 강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때로는 환경과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산입니다. 때로는 이성과 경험이 우리가 건너야 할 강입니다. 불신과 의심과 욕심과 욕망과 돈과 권력도 넘어서야 할 강입니다. 사람과 문화와 과학도 우리가 넘어서야 할 산 중의 하나입니다. 술과 담배와 향락과 무사안일은 말할 것도 없이 반드시 건너가야 할 강입니다. 물질주의와 인본주의과 종교다원주의와 개인이기주의도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요, 건너야 할 강입니다. 이러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모두가 원하는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정말 내가 지금 시급하게 넘어서야 할 산이 무엇인지, 빨리 건너야 할 강이 무엇인지 되새겨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인도하심과 능력 주심을 따라 그 산을 넘고 그 강을 건너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산과 강의 저너머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에덴의 축복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산과 강을 넉넉히 건너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말씀드리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어떻게 왜곡되고 오염된 가치관과 문화가 판을 쳐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푯대로 삼고 천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중요한 시점에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그때가 우기라서 요단강이 넘칠만큼 싯뻘건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요단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런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갔습니까? 오늘 1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이것은 6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으로 거기에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에 도착하면 무조건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요단강이 갈라질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은 제사장들이 멘 언약궤를 보고 건너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세상 물결이 어떻게 넘실 거려도 말씀을 따라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약궤가 뭡니까? 말그대로 약속의 말씀이 들어있는 상자입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따라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 생명의 말씀을 따라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아무리 사납게 덤벼들어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을 바라보며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요단강을 가나안복지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 때 그 사람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갈때에 사나운 강물이 넘실대며 그들을 방해하고 위협하고 낙심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갈때에 우리를 실망시키고 낙담케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환난과 풍파가 닥칠때도 있고, 때로는 환경과 상황 때문에, 때로는 물질과 건강 때문에, 때로는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말고 흔들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부여잡고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위협하고 유혹해도 그런 왜곡되고 죄되고 혼잡한 것들에게 눈길도 주지말고, 흔들리거나 낙심하지도 말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부여잡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든지,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상황과 환경을 그대로 두고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서 이기게 하시든지 여하튼 어떤 방법으로든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이 인도하십니다. 힘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환경과 상황을 변화시켜 주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그러실만한 능력과 권한과 사랑과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정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주님의 방법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때에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모든 세력들을 이기고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5,16절 말씀 보겠습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자 보십시오, 요단강물의 흐름이 언제 그쳤습니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물속에 들어섰을 때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이 덤벼들던 요단강의 흐름을 끊고 강바닥을 드러내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는데 그런 기적이 일어난 시점이 언제냐?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언약궤를 메고 사납게 요동치며 흐르는 요단강속으로 들어갔을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기적을 일으켜 놓고 건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의 경우 기적을 만들어 놓고 누리게 하시기 보다는 믿음으로 행동할 때 기적의 은총을 누리게 하십니다. 노아에게도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어놓고 타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가 만들어서 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실때도 먼저 그냥 무조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동안 반석에서 물을 내실 때도 모세에게 반석을 향하여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놓고 갖다 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물을 떠서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를 부활시킬때도 마르다에게 무덤 입구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 못가에 있던 맹인에게는 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말씀에 순종했을 때 결국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즉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갓난아기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과 순진한 마음을 보시고 은헤를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열심히 성실하게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따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따라가도 하나님이 아니라 하신 것,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버리고 넘어가고 떠나 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두말할나위도 없이 거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 사랑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 땅에서 누려야 에덴 동산이 있고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이어지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앞에 높게 서 있는 왜곡된 현실의 산들을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도도하게 흐르는 왜곡의 가치관의 강을 건너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푯대로 삼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넉넉하게 건너가게 하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도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다가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런 진정하고 영원한 승리를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우리 온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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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네째주일낮설교 / 버림과 얻음 (September,Sunday Sermon)

 

제목 : 버림과 얻음

 

말씀:5:1-3

 

1.심령이 가난해 져야 합니다.

 

여러분,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한 선행조건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먼저 버리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뭔가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가치관이나 습관이나 이런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그래서 뭔가가 새롭게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오물이 잔뜩 들어있는 컵에는 깨끗한 물을 따라 마실 수가 없이 않습니까? 주먹에 돌을 쥐고 있으면 금덩어리를 집어 들 수가 없지 않습니까?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 들어 있으면 어떻게 사랑의 마음을 담겠습니까? 마음에 거짓이 가득차 있으면 어떻게 진실을 담겠으며,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다면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담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에서 자꾸만 낮아지고 버리고 비워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먼저 버려야 새것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16:25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기서 목숨이란 물론 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말합니다. 즉 목숨을 버리라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도 바쳐야 하겠지만 꼭 생명을 바치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예수님 안에 진정 생명의 은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작고 보잘 것 없고 한계속에 있고 죄와 무지속에 있는 우리 생각과 뜻과 그밖에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 가운데 온전히 자리잡게 되고 그러면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일단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강제로 빼앗아 갈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어떤 부잣집 아들이 부모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떼를 써서 결국 자신의 몫을 가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미련한 아들은 돈좀 있다고 진탕 먹고 마시고 세상 연락을 즐기며 허랑방탕하여 있는 돈 다 날려 버리고 그야말로 알거지가 됩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 돼지치기로 들어갔는데 하필 그해 따라 너무 큰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주인집도 먹을 것이 제대로 없어서 돼지밥을 먹으면서 돼지를 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이때부터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즉 그가 자발적으로 그랬든 강제적으로 그렇게 되었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몽땅 잃어버렸을 때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은데,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도 좋은 것을 먹는데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게 되었구나 하면서 내가 한 짓이 있으니 아들로 맞아 달라고는 못할 거고 품꿈으로라도 써달라고 하자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갔을 때 아버지의 환대를 받고 아들로서의 지위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비유의 핵심은 아무리 죄와 무지가운데 살던 인생이라도 하나님품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큰 잔치를 베풀며 환영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부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이 탕자가 지위가 회복되는 그 반전 드라마가 언제 펼쳐졌느냐? 그가 어떻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느냐? 하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뭔가 자신이 가지고 있을 때, 그래서 뭔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여길 때, 돈이 있어서 흥청망청 쓸 때, 술 친구들과 기생들이 아첨을 하면서 같이 놀아주니까 세상이 제 세상 같았을 때 그는 아버지집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돈 떨어지고, 술떨어지고, 친구떨어지고, 쾌락도 다 떠나고 그래서 철저하게 낮아지고 버림받고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나 돈이나 세상 즐거움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두손두발 다 들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자꾸 우리에게 비워라 낮아져라 죽어라는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알거지라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알거지를 만들기를 바라시겠습니까? 비우고 죽이고 낮아지라는 것은 우리의 지혜와 능력과 경험과 이성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그것을 의지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이 내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삶의 우선순위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 내뜻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자신을 바르게 알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천국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말씀 그대로 심령 곧 마음 혹은 영혼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신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공급해 주시는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그 뜻대로 힘써 살아가는 그 겸손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져 하나님 안에 있는 온갖 좋은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게 됨으로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무지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와 이성과 능력과 지혜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그런 것들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그 원리와 그 방법과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은 나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큽니다. 더 지혜롭습니다. 더 선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따를 때에 내가 생각하고 바라고 원하던 것들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수지맞는 일이 생깁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강과 위로와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심령이 부유하면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분명히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심령이 부유하면 교만한 자가 되어 주님의 은총은커녕 도리어 주님의 책망과 진노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심령이 부유하면 그냥 주님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분명한 책임추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12장에 보면 이런 어리석은 자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비유가 있습니다. 소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어떤 마을에 큰 부자가 있었는데 어느 핸가 엄청난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곡식을 쌓아 둘 창고가 모자라 곡간을 하나 더 짓고, 곡간마다 곡식을 잔뜩 쌓아놓았습니다. 그렇게 여러개의 곡간에 곡식이 잔뜩 쌓인 것을 보자 마음이 너무 든든하였습니다. 이제는 아무 걱정이 없었습니다.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12:19절입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12:20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그러니까 부자는 곡식을 잔뜩 쌓아 놓고 내 영혼아 이제 부러울 것이 무엇이냐, 걱정할 일이 무엇이냐, 이제는 남은 인생 실컷 먹고 마시며 멋지게 즐겨보자꾸나 그런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미련한 인사야, 네가 그렇게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다만 만일 오늘 밤에 내가 네 영혼을 거두어 간다면 너의 쌓아둔 곡식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오늘밤 그 양식을 내가 다 가져간다면 너는 무엇으로 평안을 누리겠느냐, 오늘 밤 너의 건강을 빼앗아 간다면 너는 정말 실컷먹고 마시며 즐거워할 수가 있겠느냐? 너는 너의 생명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이 미련한 인생아, 그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는 마치 자기가 쌓아둔 양식이 순전히 자기 힘으로 농사지어 얻어서 순전히 자기의 것으로 알았습니다. 먹을 것을 잔뜩 쌓아 두었으니 이제는 먹고 마시며 즐기며 살기만 하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 많은 곡식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을 주시고 비를 주고 생명을 주셔서 자라나고 싹이트고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가져가시면 그만입니다. 생명도 권력도 명예도 건강도 지식도 물질도 하나님이 도로 가져가시면 그것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집니다. 결코 내 영혼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은 그만 어둠으로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무엇인가 좀 있으면 마치 자신이 다 얻은 줄로 여기고, 자신이 다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로 여기고 교만하고 미련하게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힘만 믿고 살아갑니다. 자기 지식이나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만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18:12에서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가진 생명도, 먹고 입고 자고 하는 모든 생명의 활동들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모든 삶의 터전들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과 보호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단 한시도 살 수 없는 연약하고 무지하고 곤고하고 어리석은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정말 가난한 심령으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렇게 정말 피조물로서의 자기 분수를 알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는 삶을 살 때 정말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버릴 때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버리라, 낮아지라, 심지어 죽으라 하심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버리라 하심은 가짜를 버리고 진짜배기로 채워주려 하심입니다. 낮아지라 하심은 우리를 진정한 의미에서 높아지게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에게 죽으라하심은 진짜 생명을 주시려 함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입었을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그가 철저하게 낮아지고 자신의 것을 송두리째 다 버렸을 때입니다. 그는 애굽의 궁궐에서 왕자로 40년을 살았습니다. 애굽의 왕자로서 모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명예도 권세도 부귀도 지식도 영광도 있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도 필요없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뒤늦게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동족들이 애굽의 노예가 되어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보고 분노하여 그 애굽 사람을 죽이고 말지요. 그리고 결국 이 일이 탄로나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는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하루아침에 왕자의 자리에서 가진 것이라곤 알몸둥이 하나밖에 없는 거지로 전락한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철저히 버려야 했습니다. 왕자의 자리도 버려야 했습니다. 권세도 물질도 평안함도 호화스러움도 그곳에서 배웠던 학문도 기술도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이집트의 왕자의 신분에서 이제는 더 이상 내려 갈래야 내려 갈곳이 없을 만큼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야말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곧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기회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집트 왕자에서 하나님의 왕자로 새롭게 시작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빼앗기고 잃어버리고 낮아졌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즉 그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시고 그래서 그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그를 이집트 왕장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왕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인간의 모든 것을 완전히 잃어버린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세상적인 것을 완전히 제거하신 다음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대신 채워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시킵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천하를 호령하는 바로왕 앞에 당당히 서서 대결을 펼쳐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이스라엘을 구원해 냅니다. 홍해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를 물리칩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고, 메추라기 떼가 몰려오고, 쓴 물이 단물이 되고, 반석에서 샘물이 터지고, 대적자들을 물리쳤습니다. 작은 것을 잃고 어마어마한 것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지혜롭고 능력이 있고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55:8,9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뭐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그 안에 모든 생명과 부귀와 영광과 지혜와 축복과 평강과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은 것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따를 때 우리는 놀라운 은혜 가운데 살게 됩니다. 얼마든지 능력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적들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환경이나 상황의 적도 물리칩니다. 사탄의 궤계를 물리치고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까짓 죄의 세력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과 핍박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더럽고 추한 것들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세상 욕심과 향락과 명예와 권세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넉넉히 천성을 향하여 달려 갈 수 있습니다. 마귀가 어떻게 교묘하게 유혹하게 당장에 간파해 낼 수 있습니다. 사탄이 유혹할 때 사탄아 물러가라고 큰 소리 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내 능력과 재물과 이성과 지식과 경험과 과학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귀 사탄의 권세, 죄의 권세, 지옥의 권세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 의지하다가는 맨날 그런 것들에게 끌려다니며 노예 생활을 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과 권능을 의지할 때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위대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덧입으려면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추하고 더럽고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인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악하고 추하고 왜곡된 것을 비워내야 합니다. 성령의 불길로 태워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은혜가 내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내 심령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의롭고 올바른 가치관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은혜와 능력로 지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우리 자신의 작음과 나약함과 한계와 죄됨과 무지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그것이 환경이든 상황이든 고난이든 핍박이든 유혹이든 죄이든 그 어떤 것이든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이기고 왕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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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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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네째주일낮설교 / 순수한믿음 (September,Sunday Sermon)

 

제목 : 믿음으로 살리라

 

1:13-17

 

1.순수한 믿음을 회복합시다.

 

어떤 인터넷 블로그에서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에서 활동하고 있는 변성우선교사의 글을 보았습니다. 이 분이 활동하고 있는 카투만두 남쪽 가까운 곳에 수까우다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은 너무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정령숭배에 빠져 세상 모든 것에 영혼이 깃들어져 있다고 여기며 그것들을 섬기며 가난에 찌들어 살고 있는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쩐드라라는 사람이 세운 가정교회가 하나 있는데 교인이라야 그의 아내와 장인 장모 모두 네명뿐이었습니다. 쩐드라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고 결혼까지 하였지만 한쪽 눈은 보이지 않고 너무나 가난해서 동네에서도 무시당하며 살다가 카투만두로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카투만두에 온 그는 다행히 어떤 복음전도자를 만나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교회 다닌지 6개월만에 큰 은혜를 받고 고향에 가서 복음을 전하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겨 고향 수까우다로 돌아와 가정 교회를 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변성우 선교사님이 쩐드라가 다니던 교회 사람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 교회 리더들과 함께 이 수까우다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수까우다 교회에 도착하여 기도회를 열어 쩐드라의 간증을 듣고나서 통성으로 간절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약30분동안 간절히 기도를 드릴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뜨겁게 기도하는 동안에 쩐드라의 한쪽 눈이 완전히 회복되어 정상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변 선교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도 큰 은혜를 받아 할렐루야 찬양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불과 교회 다닌지 6개월 밖에 안된 이 쩐드라에게 어떻게 이런 역사가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순수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그 감격, 그 무한한 기쁨, 그 주체할 수 없는 은혜, 그 절대적인 심뢰감, 무한한 존중감,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가정교회를 세우고 감사와 기쁨으로 섬기던 그 사랑과 열정과 은혜가 그로 하여금 놀라운 능력을 맛보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정말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감격과 은혜와 기쁨과 신뢰와 사랑, 그래서 정말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주를 따르며 의지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그 믿음말입니다.

 

요즈음 딸바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딸을 너무 사랑하니까 딸을 위해서 바보처럼 무엇이든 하는 그런 태도를 말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저 모든 것이 은혜요, 모든 것이 감사요, 모든 것이 사랑이요,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곧이 곧대로 믿어지고,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내가 바보 멍청이가 되어도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순수한 믿음으로 살아갈때에 은혜와 능력과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11:39,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예수께서 죽은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고 하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때는 살 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면서 지금 살 것이라고 하시며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말한 것입니다. 아니 죽은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데 어쩌시려구요?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냄새가 나는 게 뭐 어쨌단 말이냐? 그가 살아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썩어서 냄새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몸이 완전히 다 분해되어 없어졌다라도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이냐?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내가 누구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러므로 너의 생각과 이성과 경험들일랑 집어 던지고 나를 믿으라. 그러면 은혜를 체험하리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지혜와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고 육신도 소생시키고 마음도 소생시킵니다. 힘과 능력과 지혜와 권세와 용기와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믿으면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말씀드릴 게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세상을 떠나 육신의 장례를 치를 때에 화장에 대하여 제가 몇 번 말씀드렸는데 아직도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신가요?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설령 총회장이 그랬더라도 아니 대한민국 총회장 아니라 전세계의 총회장이나 교황이 그렇게 말했더라도 그건 큰 실수한 것입니다. 아니 화장하면 하나님이 부활을 못시키시나요? 아니 또 화장과 매장이 뭐가 다릅니까? 백년 천년 후에 뭐가 다릅니까? 천년 후에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아니 설령 만에 하나 다른점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능치 못할 일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화장하나 매장하나 매 한가지입니다. 화장해도 흙으로 돌아가고 매장해도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화장해서 한줌 흙으로 돌아가나 매장해서 나중에 한줌 흙이 되나 뭐가 달라요? 매장해도 나중에는 다 썩고 분해되고 가스가 되어 땅과 공중의 원소가 되어 우주 공간 어디엔가 남아 있고, 화장해도 땅과 공기속에서 어떤 원소의 형태로 우주 공간에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라 그러면 돌아와서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는 거예요. 아니 설령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도 원상태로 돌아와라 그러면 돌아오는 거지 뭐 그렇게 어렵습니까?

 

여러분, 내 작은 생각과 경험과 이성과 지성과 논리의 틀속에 갇혀 있지 말고 권능의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올 주님을 믿으십시오. 정말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리하여 정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세상의 모든 의심과 의문과 문제를 이기고 은혜충만 능력충만 감사충만 기쁨충만 생명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순수한 믿음이 곧 능력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가장 크고 영원하고 무한한 능력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반드시 큰 은헤와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16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러분, 무엇이 능력이라고 하였습니까? 복음입니다. 복음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예수님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영광의 나라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다시 오십니다. 그때에 완전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복음이 왜 능력입니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복음을 믿는 자만이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는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비롯한 모든 마귀사탄의 역사를 이깁니다. 모든 환경과 상황의 권세를 이깁니다. 모든 어둠의 권세, 사람의 권세 다 이깁니다. 이게 바로 능력입니다. 세상에서는 돈과 명예와 권세와 지식과 기술과 스펙이 능력인 줄 압니다. 물론 그것도 능력은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능력입니다. 곧 무너지는 능력입니다. 마귀사탄에게 판판히 깨길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보잘 것 없는 능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깁니다. 환경과 상황의 권세를 이깁니다.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모든 것을 이깁니다. 사람과 돈의 권세를 이깁니다.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깁니다. 오직 이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이 믿음만이 영혼을 살리고 몸을 살리고 마음을 살리고 영생복락의 은총을 가져다 주는 유일무이한 능력인 것입니다.

 

이런 능력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집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 인류의 유일한 완전한 능력인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믿으면 그 복음의 능력이 완전히 내것이 되어 영적 육체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모든 것을 이기는 승리자가 됩니다.

 

여러분, 성경의 핵심주제가 뭡니까? 다른 거 없습니다.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주의가 대두되면서 사람들은 믿음보다는 이성을 중시했습니다. 이성적으로 문화적으로 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종교적으로 깨어났다고 여기면서 그 잘난 이성과 과학과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성경조차도 제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난도질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결국 서구 기독교문명은 지금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만약 서구 세계가 회개하지 않고 이대로 한세기를 지난다면 서구기독교문명은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그 역사를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여러분, 11:6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어떻게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 제아무리 잘나고 똑똑하고 유능하고 멋있고 심지어 성경을 달달 외워도 믿음이 없으면 헛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구원을 믿고 심판을 믿고 믿었으면 그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니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권세와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순진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고, 똥을 된장이라 그래도 믿어야 합니다. 이해가 안되고 믿고, 불가능해보여도 믿고, 경험에 맞지 않아도 믿고, 세상 이치와 거꾸로 말씀해도 믿고, 죽어도 믿고 살아도 믿고, 망해도 믿고 흥해도 믿고, 잘되도 믿고 안되도 믿고, 그냥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순수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순수한 믿음을 가질 때에 정말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능력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경험이나 이성이나 과학이나 이런 따위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것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것들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지식이나 지혜나 이성이나 과학이나 경험 따위는 내려놓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의 소유자가에게 능력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그 어떤 상황과 환경도 어떤 장애물도 이기게 됩니다. 어떤 죄의 권세나 마귀 사탄의 유혹도 이기게 됩니다. 사람이든 물질이든 문화이든 이성이든 그 어떤 것이든 주님의 능력과 지혜로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모든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 어둠의 권세, 물질의 권세, 죄의 권세, 유혹의 권세, 상황과 환경의 권세, 그 밖의 다른 모든 권세를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주님께 대한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심으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믿음이 우리 삶을 이끌어가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렇게 순수한 영혼으로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그리고 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순수한 믿음의 삶의 원리가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이 아무리 왜곡되고 변질되고 죄악 가운데로 흘러간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그런 세상의 삶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그런 삶을 살기가 너무나 힘든 세대입니다. 세상이 너무나 변질되어 있어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되고 무지하고 왜곡된 가치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 하나님보다 우선시되고, 인간의 욕구가 주님의 요구보다 우선되고,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것이 진리보다 우선 되고, 주님의 말씀과 뜻보다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이 우선 되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우선시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죄악과 부조리와 왜곡된 가치와 사상과 현상들이 판을 치고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에 만연된 그런 왜곡된 풍조속에 그냥 묻혀서 휩쓸려 갈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박고 그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도, 환경과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어도 해도 우리는 오직 예수님께 대한 믿음안에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이 살고 생명의 은혜와 능력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의는 말그대로 하나님의 옳으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죄에 대한 심판,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믿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의를 덧입어서 의롭다 인정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살고 마음이 살고 육신이 살아 진정 살아있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과 영혼이 살아나면 또한 마땅히 그 살아있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가지고 그 믿음을 따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영혼이 살아난다는 말씀이요, 이차적으로 그렇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난 영혼을 가지고 믿음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생명력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영혼이 살아나고, 마음이 살아나고, 육체가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영혼이 살고, 마음이 살고, 육신이 살았으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 새롭게 산 영혼과 마음과 육신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환경이든 간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 말씀과 삶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든지, 사람들이 어떤 삶의 양식을 가지고 살든지, 대세가 어떻게 흘러가든지, 심지어는 교회가 어떻게 하든지 우리는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딱 달라붙어서 그 말씀과 그 원리와 그 삶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삶을 이끌어가는 원리요 지침이요 푯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진정한 승리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녹은 그 왜곡된 세상에서도 철저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노아는 온갖 어려운 현실속에서도 믿음으로 120년간 방주를 지어 온 인류가 멸망하는 중에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온갖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하다가 병거타고 승천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계속되는 핍박속에서도 오로지 믿음으로 신실하게 대처함으로 성왕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믿음으로 왕의 산해진미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기도하다가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사자들의 입을 봉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요셉은 또 어떠했습니까? 그는 형들의 시기 때문에 억울하게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이 대항 원망 불평 낙심 절망 한탄 통곡 증오하지 않고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보디발 장군 집에서 종으로 팔려갔지만 역시 원망 불평이 아니라 믿음으로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신임을 받아 가정의 총무가 되지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는데 요셉이 꿈쩍도 안하니까 원한을 품고 도리어 요셉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워 또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래도 원망이나 불평이 아니라 믿음으로 묵묵히 성실하게 임하여 또 감옥의 총무가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헤와 능력으로 바로의 꿈을 알려주고 그 대비책까지 세워주어 일약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과 선하심을 믿고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며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승리의 비결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수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신뢰할만 하고, 완전히 따를 만하고, 그 안에 완전한 구원과 생명과 은혜가 있습니다. 이런 주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지혜와 기쁨과 은혜속에서 세상 모든 것을 이기는 자들이 됩니다.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 지옥의 권세, 마귀의 권세 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과 환경도 이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말 순수한 믿음으로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 주님을 갓난아기와 같이 믿고 의지하고 따를 때에 정말 성령충만 은혜충만 능력충만 감사충만 기쁨충만 사랑충만 지혜충만함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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