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설교] 주일낮예배설교 Sunday worship preaching

 

 


제목 : 하나님의 지팡이

말씀 : 출4:17~20

1.믿음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길을 가다보면 때론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건 우리 인생 누구나가 받아 들여야 할 숙명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광야와 같고 나나 너나 세상이나 다 온전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와 무지와 악함과 추함과 왜곡됨 속에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는 아무도 여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제거할 것이냐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최대한 그런 것들을 피하고 최선을 다해 제거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아무리 피하고 제거해도 또 찾아올 수 밖에 없는 것들이니까 이런 것들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이나 시험이 유혹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물론 천성적으로 성격이 낙관적인 사람이 부정적인 사람보다 더 잘 이길 수도 있습니다. 또 성품과 의지가 강하거나 뭔가 능력도 있고 배경이 좋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좀 더 유리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조건들이 승리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다 죄와 무지가운데 있고 게다가 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무리 의지가 강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능력과 배경이 있더라도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그것을 자기 힘으로 이겨 낼 수 있습니까?

그러면 어떤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순간이 왔을 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물론 말할 필요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길 수 없는 절망적인 순간이 온다해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그 모든 것들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습니다. 심지어는 인생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까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따라서 이런 주님을 믿고 그 주님과 동행하면 주님께서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나아가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용기와 담대함으로 우리 스스로도 잘 헤쳐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롬8:37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기서 이 모든 일이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등 우리 인생길 앞에 닥쳐오는 모든 어려운 일들을 말합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 지혜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우리의 완전한 보호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빽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돈도 권력도 능력도 지식도 과학도 그 어떤 우리의 완전한 보호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하고 완전한 백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완전하고 영원하고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주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우리를 위로하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우리로 하여금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떤 일을 만나도 오직 주를 바라보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생명이시며 구원자이시면 든든하고 완전한 후원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또한 주님이 주신 능력과 은혜로써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며 천성을 향해 달려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그런 담대한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유혹도 많고 도전도 많고 환난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에서 담대한 믿음으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다녀야 합니다. 그렇다고 실제로 무슨 지팡이를 짚고 다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팡이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과 인도하심이 확실히 담보된 표징이 되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마음속에 있든 혹은 어떤 특별한 은혜나 은사나 기적의 체험이나 사명이나 여하튼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고 하는 확실한 표징이 내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도전과 유혹과 시련과 고난이 온다해도 그 하나님의 지팡이로 넉넉히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먼저 20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이 말씀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 목동생활을 마치고 애굽으로 돌아가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는 40년 전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던 애굽 사람을 죽인 후에 미디안 광야로 망명하여 40년간 목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아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당당하게 애굽으로 돌아가고 있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처음부터 이렇게 담대하게 애굽으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모세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과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고도 그대로 믿고 따르지 않고 자꾸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으며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출4:1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하나님이 분명히 함께 해 주시겠다고 했는데 바로는커녕 이스라엘 백성들도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꽁무니를 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래, 그럼 좋다. 내가 누구인지를 너에게 보여주겠다. 그래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분명한 표적을 보여주겠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에 든 것이 뭐냐? 네, 하나님, 지팡입니다. 그래 그럼 그걸 던져 보거라. 그러자 모세가 던집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뱀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꼬리를 잡으니 도로 지팡이가 됩니다.

그리고 나서 물론 다른 몇가지 과정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모세를 보내시며 하신 말씀이 오늘 말씀 17절 말씀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이 지팡이로 이적을 행하라고 하였다고 해서 이 지팡이 자체가 무슨 능력이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실 이 지팡이는 처음부터 무슨 특별한 지팡이는 아니었습니다. 이 지팡이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칠 때 쓰던 그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이후로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지팡이는 본래 모세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지팡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지팡이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하나님이시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오,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표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지팡이만 들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임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강건해지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지팡이를 가지고 가서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셨고, 모세는 이 말씀을 따라 이 지팡이를 들고 담대히 애굽으로 가서 결국 승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바로 이런 지팡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오, 은혜의 하나님이시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지키셔서 승리케 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고 절망하고 돌아서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천성을 향해 달려가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은혜를 받아도 외견적으로 갑자기 다른 상황이 전개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상황이나 조건이 좋은 상황과 조건으로 갑자기 바뀌고, 갑자기 장사가 잘 되어 수입이 확 늘어나고, 허약체질이 갑자기 근육질로 변하고, 갑자기 승진을 하고, 가난한 사람이 갑자기 일확천금을 하고, 막혔던 혼사 길이 갑자기 확 열리는 등 뭔가 힘들고 어렵고 잘 안 풀리던 일들이 졸지에 사라져 버리고 갑자기 만사형통해 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뭐가 달라집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지팡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팡이가 뭡니까? 힘없고 약한 때 의지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뭔가 나를 위협하는 것을 물리치는 막대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뭔가 방향을 지시하는 도구가 되기고 합니다. 바로 이런 지팡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고 절망하고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지혜와 용기로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시23편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러분, 다윗이 마냥 평안하기만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에게 수많은 인생의 풍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부족함이 없어서 부족함이 없는 게 아니라 부족함이 있지만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결국 다 해결될 것이고, 결국은 이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결국 하나님 안에서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처음에는 못한다고 안된다고 내가 뭘 하겠느냐고 나는 입이 둔하고 혀가 뻣뻣하다고 바로는커녕 이스라엘 백성들도 나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며 몇 번씩이나 꽁무니 뺐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자 용감하게 애굽을 향해 가서 승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꼭 이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바르게 세우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만남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지팡이, 능력의 지팡이, 은혜의 지팡이를 꽉 붙잡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를 가지고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왜곡되고 추한 것들을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3.하나님의 지팡이는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출4:2~4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자 여러분, 잘 보십시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예, 지팡입니다. 그래? 그러면 그걸 던져 버려라. 그랬습니다. 지팡이는 의지하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맹수를 물리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꾸짖고 책망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양을 몰 때도 사용합니다. 바로 그걸 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네가 의지하고 네가 너의 보호자라고 여기고 너희 생활수단으로 여겼던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양을 칠 때에 사용하던 그런 지팡이는 이제 버리라, 더 이상 그런 지팡이를 의지하지 말라, 그런 것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그런 너의 지팡이를 의지하고 있으니까 두려워하고 못한다고 하고 벌벌 떨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 지팡이를 던지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뱀이 되었습니다. 뱀은 사탄의 상징입니다. 모든 거짓과 유혹과 죄와 독의 상징입니다. 즉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의지하고 보호자로 여기고 생활 수단으로 삼던 것들을 계속 의지하면 그런 것들이 너를 보호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독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너의 삶에 조금 도움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데는 도리어 장애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연약하고 무기력하고 악의 유혹에 빠지게 만드는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리라고 하였고, 그래서 버리자 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뱀이 되자 어떻게 하라고 하였습니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뱀의 꼬리를 잡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꼬리를 잡았다가는 뱀이 홱 돌아서서 손을 물어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필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뱀에게 물릴 것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명령하는 것이 아니냐, 내가 함께 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너는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고 그 따위 것들에게 물릴 것에 염려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가 뱀 곧 사탄의 세력과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이기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즉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던졌고, 그것이 뱀이 되었을 때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꼬리를 잡았을 때 모세가 뱀에 물리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지팡이로 변한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지팡이를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뱀의 꼬리를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팡이를 그냥 계속 잡고 있으면 계속 우리의 지팡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걸 던져 버리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던져버리기만 하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뱀의 꼬리를 잡아야 합니다. 즉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탄의 세력과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능력과 은혜를 주십니다. 기적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지팡이를 들고 다니며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은혜와 용기를 덧입어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자신의 지팡이를 일단 던져 버리기 바랍니다. 자신이 의지하고 믿고 보호자로 여기고 내세우던 것을 던져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겁내지 말고 모든 죄와 유혹과 악한 것들 앞에서 비겁하게 도망가지 말고, 적당하게 타협하지 말고 그런 것들과 당당히 맞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용기와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주십니다. 이 지팡이를 들고 다니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기게 됩니다. 감히 사탄이 대들지 못합니다. 혹 덤벼든다해도 하나님의 지팡이로 얼마든지 때려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당당히 바로와 맞장 뜨기 위하여 애굽으로 갔고 결국 승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정말 내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던져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사탄의 꼬리를 잡고 집어 던져 버리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팡이, 능력과 보호와 인도와 동행을 상징하는 믿음의 지팡이를 가지고 담대하고 당당하게 힘차게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앞에 다가오는 모든 유혹과 시련과 도전과 어려움과 환난과 핍박과 악을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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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 설교 / 십자가로 승리하시다

 

 

 

 

 

성경본문| 골로새 02장 08절 ~ 15절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아프리카 우간다 어느 교회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당시의 우간다는 독재자 이디 아민이라고 하는 악명이 높은 그러한 대통령이 통치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케파쎔팡기 라고 하는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는 7000명이 넘는 큰 교회로 영적 지도자로서 귀한 역사를 담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부득불 정부를 비판하는 설교를 종종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독재자에게 억압을 당하고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는 그런 설교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정부에 알려졌습니다. 부활절 아침입니다. 다섯 명의 비밀경찰이 찾아왔습니다. 모두는 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배 후에 그들은 사무실에 총을 가지고 겨누며 들어와서 "반국가 사범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처단하기 위해 왔소"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이미 각오했던 것처럼 태연스럽게, 온유하게 대답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아침입니다. 나는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게 2분간의 시간만 주시면 기도하고 나의 생을, 내 목회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러라고 허락을 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또박또박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간다 통치자 이디아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명령을 원치 않으면서도 받아들여야 하는 불행한 이 다섯 사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간다 국민에게 자유를 주시옵소서. 내 사랑하는 조국이 사랑의 땅, 의의 땅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죽음으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아멘."

 

기도하는 목사님의 눈에서는 한없이 눈물이 솟았습니다. 비밀경찰도 울었습니다. 마침내 그 대장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합니다. "엄청난 실수를 범했습니다. 못본 것, 못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하고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갔습니다.

 

여러분, '가장 강한 것이 무엇이냐?'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장 강한 것은?'하는 제목의 글입니다.

"가장 강한 것은 돌이다.

그러나 돌을 깨뜨리는 것은 쇠다.

쇠를 녹이는 것은 불이다.

불을 끄는 것은 물이다.

물은 구름에 흡수되어 버린다.

구름은 바람에 날려간다.

바람은 사람을 어찌하지 못한다.

사람은 죽음을 향해서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런고로 죽음이 가장 강하다.

죽음보다 강한 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하겠습니다. 크리스챤이 누구입니까? 도대체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뭡니까? 크리스챤이라는 것은 바로 십자가 이해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어떤 측면에서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올시다.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속성이 결정됩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 것은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아주 처참한 죄인에 대한 처형법입니다. 아주 부끄러운 죽음입니다.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인류역사상의 가장 비참한, 가장 부끄럽고,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합니다. 십자가 안에 무궁무진한 비밀이 숨겨있습니다. 그 속에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엄청난 생명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바로 몇 시간 후에 십자가를 지실 것인데 제자들 앞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말씀하시고 십자가를 집니다.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신 게 아니라 승리하시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승리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에 나타난 신비입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는 시간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선언이요 여유요 엄청난 위세입니다. 비록 죽으면서도 그렇게 죽이는 자들을 여유 있게 용서하고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에 짓궂은 생각입니다만은 한마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어떨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좀 할 때가 있어요. 십자가 위에서 내려다보시면서

"이놈들, 두고보자" 만일에 그렇게 말씀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한마디가 역사를 바꿉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완전히 다른 의미로 만든 것이올시다. 여러분, 십자가는 절대로 불가피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속에 자발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돼요. 그것이 승리올시다. 억지로 도망가다가 능력도 없고 지혜도 없고 일이 꼬여들어서 할 수 없이 죽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절대로 실패가 아닙니다. 성경이, 복음서가 계속 증거하는 그 주제의 초점이 어디 있느냐 하면 십자가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요. 십자가는 예정된 것이요 십자가는 계획된 것이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미리 약속된 것이요 그리고 십자가를 진 거라고.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성경책 전부입니다. 총 주제올시다. 이걸 모른다면 성경을 못 본 사람이지요.

 

예수님의 많은 이적이 무엇을 말합니까? 병든 자를 고치고 귀머거리를 열게 하고 아,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나와라"고 소리를 칩니다. 죽은 사람이 걸어 나옵니다. 이건 뭘 말하는 겁니까? 이러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십자가에 죽었다 이 말이에요. 그걸 설명하자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설명하는 내용이에요 이게. 그 능력을 가지신 분이 말없이 십자가를 집니다. 그래 빌라도는 그것이 알 수가 없어서 "Behold this man, 이 사람을 보라.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말없이 죽어가느냐" 하는 거지. 그걸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거기에 십자가의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예언해 왔습니다. 예표로 확증을 해왔습니다. 수많은 양,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대한 예표입니다. Prototype 입니다. 계속해서 보여주고 예언해주고 그 예언이 오늘 와서 십자가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클라이막스에 와서 이루어진 것이에요. 십자가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하나님의 오묘한 우주적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계획적인 일이라는 것이죠. 거기에 진정한 승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완성이요 이것은 예언의 성취요 이것은 본래부터 계획되었던 것이요 그것이 이 시간에 와서 결정적인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올시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는 뭐니뭐니 해도 사랑의 계시요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승리올시다.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사랑 자체도 설명하기 어렵지만 사랑의 소위 말하는 커뮤니케이션, 사랑을 전달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울 수가 없어요. 여러분, 쉽게 사랑한다는 말했다가는 뺨맞아요. 안 그렇습니까? 이 사랑이 전달이 돼야겠는데 이 사랑의 뜨거운 마음을 전달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의 진실한 언어는 희생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부잣집 아들딸들이 이게 문제라고요. 부모님이 아무리 사랑한다, 사랑한다 해도 그리고 뭐, 이거 해주고 저거 해주고. 그저 못마땅합디다만은 저로서 볼 때는 그거 지금 철따구니 없는 아이들 장가가고 시집가는 데다가 뭐 큰집을 사주고……. 난 마음에 안들어요. 그렇게 하는 게 아니거든요. 저들도 저들대로 고생을 하고 살아야지. 그런데 부모가 옛날에 고생했다고 해서 "너는 고생하지 마라"해서 집 사주고 차 사주고 다 사주는데, 틀림없는 것은 이렇게 사랑 받은 자녀는 불효자가 됩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어려워서 밥 한끼를 제대로 못 주고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면서 키운 그 자녀는 커서 철저하게 효자가 됩니다. 그걸 아셔야 되요. 오직 희생만이 사랑의 효과적 언어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경험했습니다. 너무 가난하고 어려워서 겨울에 추운 때에 어머니가 메리야스 장사를 해요. 메리야스 몇 가지를 들고 다니면서 그저 이집 저집 다니면서 팔아요. 아들은 남의 사무실에 가서 청소하면서 일을 하고 밤에 야간 고등학교를 다닙니다. 밤중에 돌아온 아들을 놓고 "미안하다. 오늘은 밥을 못했다" 구워놓았던 고구마 하나를 까주면서 "이거를 먹고 오늘은 때우자." "어머니 시장하실텐데 어찌하여 이걸 제게 줍니까?" 그 고구마 하나를 받아먹으면서 눈물을 뚝뚝뚝뚝 흘렸어요. 이 아들이 고려대학교 상과 수석으로 들어갔어요. 그 어려운 가운데 고학을 해서 졸업을 했어요. 졸업식 날 제가 같이 참여했어요. 그 아들이 졸업장을 갖다가 어머니에게 주면서 "이것은 제게 아닙니다. 어머니의 졸업장입니다." 어머니가 "내가 너를 위해서 해준 게 뭐냐. 밥도 제대로 못 주고 학비도 못 줬는데……." 둘이 끌어안고 우는 장면은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고구마 얻어먹고 자란 아이는 효도하더라구요. 자동차 준 아이는 효도하지 않습니다. 그걸 알아야 되요. 이래서 많은 고난 속에 희생, 사랑은 분명합니다. 저 분이 얼마나 희생하나? 나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하나? 그걸 보고야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을 수용합니다. 사랑을 믿게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살리기 위하여 그는 죽으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 안에 엄청난 사랑이 계시되어있고 그 사랑 안에 나의 삶의 의미가 계시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 이것은 의의 개시입니다. 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에요. 죄란 그저 흐지부지 용서할 수가 없는 거예요. 죄 값은 사망입니다. 누가 당하든지 당해야 되는 것이에요. 우리나라 정치처럼 흐지부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분명하게 밝혀서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으로 벌을 받아야지요. 누가 당하든지 당해야지요. 그냥 슬쩍슬쩍 넘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심판은 엄연합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고로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야 했던 것이에요. 죽지 않고는 절대로 살리지 못하니까요. 그걸 아셔야 됩니다.

 

어느 마을이 아주 Puritan 마을인데 깨끗하게 정결하게 술집도 창녀도 없는 것을 자랑삼고 사는 좀 엄격한 마을이 있는데, 어느 처녀가 어쩌자고 결혼하기 전에 얘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한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요 또 그런가 하면 마을 사람들의 궂은 일은 온 마을의 궂은 일은 그 수도사가 하는 거예요. 이런 수도사 한사람이 그 마을에 있었는데 이 처녀가 임신을 했는데 그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대지 못하면 이것은 간음죄로 추방을 당하게 되고 잘못하면 맞아죽게 됩니다. 그런데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말을 안해요. 그래서 지금 추방당하게 되었는데 직전에 하는 말이 "저 수도사"라고 했어요. 수도사는 그대로 끌려가서 많은 몰매를 맞고 고역을 당하고 감옥에 처넣어졌어요. 시름시름 앓다가 감옥에서 죽었어요. 죽은 다음에 시신을 염하면서 보니까 이게 남자가 아니고 여자예요. 남장 여인이었다고요. 모든 사람은 숙연해졌습니다.

이 여자는, 이 수도사는 왜 '그것이 내 아이가 아니라'는 말을 왜 안했을까? 저 처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했어요. 내가 죽어야만 그 누군가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십자가는 의의 승리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먼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거기서 완전히 충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충족원리라고 합니다. 충족돼요. 그리고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긍휼의 승리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거예요. 율법과 은혜? 은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만이 이 십자가만이 이 긍휼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음을 확증해 주시는 것이올시다.

 

또한 이 십자가는 죽음의 승리입니다. 죽음을 넘어섭니다. 죽음을 초월합니다. 십자가는 생의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의 시작입니다. 그것을 믿고 죽음의 세계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 십자가의 말씀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생명의 길입니다. 칼 바르트 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는 그의 교회 교의학 속에서 "사람의 생의 단 한번의 기회"라고 하는 논문을 씁니다. 사람에게 많은 기회가 있는 것 같으나 가장 중요한 기회는 딱 하나 있어요. 단 한번의 기회. 그것은 바로 곧, 죽음이다. 그 기회를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향하는 길로 맞이하느냐? 아니면 영원한 저주로 끝내는 시간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삽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그 한순간을 작품처럼, 클라이막스로 그렇게 맞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모멘토리(Mementori)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곧 죽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사십시오. 모멘토리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모멘토 도미니(Memento Domini), 모멘토 도미니,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주님을 생각하라.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라. 바로 이것이 나의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기회를 가장 귀한 기회로 의미를 바꾸어 놓을 수 있고 방향을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저는 이래저래 북한을 자주 내왕을 합니다. 북한에 있는 고관들과 자주 만나서 얘기도 해봅니다. 언젠가는 여러분 아시는 대로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세우려는 큰 계획을 세우고, 재단 이사장의 임명장을 받고, 큰 행사를 치루고 저녁에 이렇게 파티를 하는데, "목사님, 목사님은 왜 우리를 돕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도우려고 하는 겁니까? 목사님의 아버지가 우리 공산당원에 의해 총살당한 것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북한을 10여년 동안 돕는데, 그 돕는 이유가 뭡니까? 무슨 대가를 요구하는 겁니까?" "대가 없습니다. 내가 평양시내에다가 굉장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그런 얘기는 안하겠습니다. 내가 목사니까, 뭘 요구한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보느냐?" 그러니까 "그래도 한 말씀 해주세요." "딱 한마디만 할께요. 예수믿는 사람들 죽이지 마세요. 이것만 약속해주면, 제가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작년에도 400명 죽였다며. 인정을 하더라고요. 그런고로 기독교인들 죽이지 말아달라고. 그는 말합니다. "안 죽일 수가 없어요." "왜요?" "반동이거든요." "어째서?" "공산당보다 기독교인은 훨씬 셉니다." 왜 세냐고 물었더니 "공산당원들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전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죽기를 기독교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거기서 죽을 뻔하고 산 사람들 만나보니까 그 때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더라고요. 기독교인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수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다면 그건 지상의 영광입니다. 단 한번밖에 없는 기회입니다. 그러니 사양할 리가 없죠. 두려워할 리도 없죠. 승리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승리를 위하여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를 보장받고 사는 것입니다. 승리를 믿고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나의 승리의 계시가 바로 십자가에 확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이 길을 통하여 승리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승리의 호산나를 먼저 부르고 당당하게 갈보리 언덕으로 가신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늘 십자가를 쳐다보며 십자가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직도 우리 마음은 어둡고 비겁하고 나약할 때가 많음을 용서하옵소서. 십자가 안에 있는 감추어진 승리의 의미를 날마다 확인하면서 영원한 승리의 생을 오늘 살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곽선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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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 부부의 불행 이야기(행5장1-11)

 

성경본문|사도행전 5장 01절 ~ 11절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우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저는 지난 화요일 국기원에서 개최된 “2006 미션컵 전국태권도대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며 태권도 시범을 잠시 관람했는데, 청소년들이 자기들이 닦은 태권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태권도 시범에 최선을 다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는 눈물겨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모인 600여명 이상의 선수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최선을 다하는 순복음노원교회 성도들의 헌신적인 모습도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사도 행전 2장 이하에 기록된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교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바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밭과 집이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두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행4:34,35).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저들의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교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바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신자들 중에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불성실한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기도회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고, 교제하는 일이나 봉사하는 일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고, 전도하는 일이나 바치는 일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불성실한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그와 같은 불성실한 신자들 중의 두 사람인 아나니아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아나니아 부부가 불성실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저는 그렇게 추측합니다.

 

바클레이의 주석을 보았더니 아나니아 부부가 범한 죄 중의 기본적인 죄가 불성실의 죄였다고 지적했습니다. Failure in diligence 가 그들의 기본적인 죄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신앙 생활에 불성실할 때, 여러가지 잘못에 빠질 수가 있는데 오늘 아침 아나니아 부부가 빠졌던 세 가지 잘못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첫째, 아나니아 부부는 명예욕에 빠졌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존경과 칭찬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신앙의 인격을 갖추고 봉사의 삶을 지니면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과 칭찬을 받게 됩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행16:2)라고 했습니다. 도르가는 욥바에 있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고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행10:22). 도르가와 고넬료는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도 모두 칭찬 받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행6:3). 초대교회 신자들 중 밭과 집이 있는 신자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두었고 사도들은 그것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했을 때, 저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신자들이 신자다운 인격과 삶을 지닐 때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신자들이 사회로부터 인정과 존경과 칭찬을 많이 받는 것은 좋은 일이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 부부는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주변에 있는 신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을 보고는, 자기들도 존경과 칭찬을 받고 싶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 중에 밭과 집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값을 헌금으로 바치고 특히 바나바가 밭을 팔아서 그 값을 헌금으로 바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래서 저들이 사도들과 신자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을 보았을 때, 아나니아 부부는 자기들도 무엇을 해서라도 존경과 칭찬을 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저는 강변교회를 시작하기 전에 새로 시작하는 개척교회인 영안교회를 8개월 동안 맡아서 섬긴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여러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얻었는데 그 중의 한 가지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교회당을 하나 지어서 바치든지, 1억 원의 헌금을 드리든지, 자동차를 한 대 사서 드리는 일이 반드시 옳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자동차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1억 원의 헌금을 드릴 때, 1억 원 상당의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 생활도 봉사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무슨 일을 일부러 시도할 때 무서운 잘못을 범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이렇게 경고의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마6:2).

 

사람에게 인정과 칭찬과 영광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 억지로 헌금도 하고 억지로 구제도 하고 억지로 봉사도 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정 반대로 생각을 하면 그것도 큰 잘못입니다. “그래, 나는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을 받지 않으려고 헌금도 하지 않고, 구제도 하지 않고, 봉사도 하지 않아, 내가 참 잘 하는 것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헌금으로 바치는 것을 보시면서 그를 칭찬하시고 부자의 인색한 헌금은 칭찬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막12:41-44). 아나니아 부부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 두 사람이 공모한 후 소유를 팔았습니다. 바나바처럼 그들도 땅을 팔았습니다. 대단한 결단이었지만 그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불순한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아나니아 부부는 탐욕에 빠졌습니다.

아나니아 부부가 소유를 판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명예욕에 이끌려서 그렇게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헌금을 하기 위해서 소유를 판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소유를 판 값이 얼마였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이 소유를 판 값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을 다 바치기가 아까운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탐욕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땅을 판 값의 일부를 감추기로 공모를 했습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꼭 맞았습니다. 한 사람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부부가 좋은 일에 공모를 하여야 하는데 아나니아 부부는 나쁜 일에 공모를 했습니다.

 

박종렬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가정은 나쁜 일에 부부가 보조를 맞추는 일이 있다. 예배에 지각하고 헌금에 인색하고 맡은 일에 무책임하고 말 많고 세상 쾌락을 사랑하고 교역자를 괴롭히는 일에 부부가 죽이 맞는 일이 있다. 아나니아 부부가 그러했다.”

아나니아 부부는 땅을 판 값의 일부를 감추기로 공모를 했습니다. 두 사람은 돈을 너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는데, 두 사람은 돈을 너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헌금을 바치기 위해서 마련한 돈이었는데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을 수가 있습니다. 십일조의 일부를 떼어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됩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돈을 사랑해서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다가 그만 무서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돈을 너무 사랑하다가 헌금의 일부를 떼어 먹을 때 그것을 그대로 두고 보시지만은 않습니다. 무섭게 책망을 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8,9).

 

구약 시대에 아간이란 사람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 덩이 오십 세겔을 자기 장막 땅 속에 감추었다가 무서운 저주를 받아 아골 골짜기 돌 무더기에 묻힌 일이 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 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수7:25).


엘리사의 종 게하시도 옷 두 벌과 은 두 달란트를 나아만에게서 받아 자기 집에 감추었다가 무서운 저주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을 때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되었더라”(왕하5:26,27). 재물에 대한 탐심과 탐욕은 무서운 책망과 무서운 저주를 불러옵니다.

 

저의 삶을 돌이켜볼 때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제가 헌금을 떼어 먹은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돈에 대한 탐심도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신학교의 교장으로 있을 때 나를 위해서 판공비를 어느 정도 쓸 수도 있었지만 거의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저는 강변교회의 목사로 있으면서 교회가 써야 할 돈이 많을 때 되도록 적게 쓰려고 했고 다른 돈으로 그것을 보충한 일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제가 저의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주 들은 이야기이지만, 저의 어머니는 돈에 대해서 깨끗했습니다. 남에게서 빌린 돈은 기한 내에 반드시 값 곤 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돈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돈에 대해서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어둡고 컴컴한 면이 있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땅을 판 값에서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두 사람이 공모해서 벽장에 감추었는지 땅을 파고 거기에 감추었는지, 땅을 판 값의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책망과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셋째, 아나니아 부부는 거짓과 불 회개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명예욕이나 탐욕 등 죄에 빠질 때 그 죄를 지적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가룟 유다에게도 예수님은 죄를 지적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 부부가 땅을 판 값의 얼마를 감추고 일부를 그에게 가져왔을 때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에게 저들이 땅 값을 감춘 죄를 정면으로 지적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3,4).

 

아나니아는 사도 베드로의 긴 책망을 듣고도 아무런 뉘우침의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 시간 후 그의 아내 삽비라가 사도 베드로에게 와서 똑 같은 책망을 듣고도 아무런 뉘우침의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하게 자기들의 죄를 은폐했습니다. “예 이것뿐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 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행5:7,8). 두 사람이 단단히 공모를 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박차고 거짓과 불 회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가장 불행하고 가장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과 관련하여 명예욕이나 탐욕이나 거짓의 잘못을 범할 때 그것이 단순한 윤리적인 죄에 그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단을 끌어드리는 무서운 죄이고 성령을 대적하는 무서운 죄라는 사실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 앞에서 명예욕이나 탐욕이나 거짓의 죄를 범할 때 그것이 사단을 끌어드리고 성령과 대적하는 무서운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5:3).

 

회개의 기회를 박차고 거짓과 불 회개에 빠진 아나니아 부부는 둘 다 사도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서 혼이 떠나 죽었습니다.

“아나이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사람들이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행5:5,6).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 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가 크게 두려워하더라”(행5:10,11).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아나니아 부부의 불행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신자의 생활을 하다가 그리고 헌금의 일부를 교회에 갖다 비치다가 심판을 받게 되는 일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강변교회 신자들 중에서 아나니아 부부와 같은 불행에 빠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때로는 여러분들이 좋아하지 않는 책망의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불행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평상시에 신앙생활과 봉사 생활에 최선을 다하면 될 것입니다. 기도와 교제와 봉사와 전도와 바치는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전도부원들처럼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기를 힘쓰고 봉사하기를 힘쓰고 전도하기를 힘쓰면 될 것입니다. 평상시에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에 최선을 다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인 청교도들은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지나칠 정도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위선과 거짓의 죄를 범하게 될 때 즉시즉시 회개를 하면 될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일곱 집사들의 행복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강변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모두 일곱 집사들처럼 행복한 사람들이 될지언정 아나니아 부부 같은 불행한 사람은 한 사람도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출 처| 김명혁목사(강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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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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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부모님의 참된 사랑 (Sunday Sermons Preaching)

 

 

 


제목 : 참된 부모님 사랑
말씀 : 출20:12


충북 제천 출신으로 허리가 굽은 곱사등이로 판사가 된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곱사등이가 된 것은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는데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술과 도박에 빠져 있었습니다. 스스로도 술과 도박에서 벗어나려고 손가락까지 절단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다시 노름을 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가정 형편이 어떠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들어오더니 또다시 어머니에게 노름 밑천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어디서 노름 밑천을 가져오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자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아버지가 홧김에 어린 아들을 마당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그만 척추를 크게 다쳐 곱사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그는 밖에도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가면 철없는 아이들이 놀려대기 일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부에 열중하며 그나마 자신을 반겨주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결국 명문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며 기도하였고, 판사가 된 이후에는 다른 여러 형제들도 있었지만 자기 집에 모시며 극진히 섬겨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게 정말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설령 부모가 무지해서 제대로 못해 주었어도, 심지어는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어도 그래도 부모니까, 그래도 날 낳아주신 분이니까 섬기고 공경하고 모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하셨는데 하물며 부모님이야 말하면 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길러 주신 부모님, 설령 만에 하나 그렇지 못했을지라도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잘 공경하고 섬김으로 부모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부모님을 공경해야 할 이유

1)너무나 귀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자녀들은 부모님이 자신에게 어떻게 해 주셨느냐와 관계없이 생명을 주신 것 그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고 공경하며 섬겨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생명은 너무나 고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이 아름다운 땅위에 태어나 먹고 입고 자는 기본적인 행위를 비롯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교제하고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열심히 수고하여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하고 기도하며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이 모든 생명의 활동이 얼마나 귀하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이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생명이 누구에게로부터 왔습니까? 물론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으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그 가정을 통하여 이 위대한 생명체가 태어나게 하시고 대대로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을 대대로 전수시켜주는 위대한 생명의 창조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낳아 주시기만 하고 아무것도 해준 게 없을지라도 이 너무나 소중하고 위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께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인생길 살다가 어렵고 힘들고 답답하고 낙심되는 일이 있더라도 이 귀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큰 축복이요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 생명을 주신 하나님과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공경하며 성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때에 부모님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여러분에게도 더욱 은혜가 충만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헌신적인 사랑으로 양육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귀한 생명을 주신 분이기에 그 자체만으로 감사하며 공경해야 하는데 더더구나 온갖 수고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양육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6.25사변 때의 일입니다. 한 부인이 아기를 등에 업고 피난민 대열의 제일 후미에 쳐져 피난을 가다가 그만 가슴에 작은 포탄 파편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다행히 아기는 무사했지만 엄마의 가슴은 피로 범벅이 되었고, 사람들은 아기 엄마가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저마다 살기 위하여 도망을 가고 결국 다 죽어가는 엄마와 아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갓난아기는 엄마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젖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고, 엄마는 출혈이 너무 심하여 의식이 몽롱해져 가면서도 피범벅이 된 젖꼭지를 아이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엄마의 가슴에서 나오는 피를 빨아먹게 되었고, 결국 몇 시간 후에 엄마는 과다 출혈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군인들이 지나가다가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와 아기를 구해 주었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피를 먹고 이틀 동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는 좀 덜할지 모르지만 저와 같은 세대만해도 가히 부모의 피를 먹고 살았다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네 부모님들은 정말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온갖 고생을 하며 자녀만큼은 조금이라도 잘 살게 해주겠다는 일념으로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을 던져서 수고하고 헌신했던 분들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주셨듯이 자식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내어 주신 그런 분들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삼하18:33절 하반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것은 다윗이 셋째아들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며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압살롬이 누구입니까?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려고 했던 패역무도한 자식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궁에서 쫓겨나 도망가게 되었는데 이를 뒤쫓다가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되려 했던 이 패역무도한 자식의 죽음 앞에서 차라리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더라면 하면서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신을 던져서, 자신을 희생하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하며, 자식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자신은 굶어도 자식이 굶은 것은 차마 바라볼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신은 멸시천대를 당해도 자식이 멸시천대를 당하는 꼴은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이런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 어찌 온전한 사람의 모습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자녀 여러분, 이와같이 우리에게 너무나 위대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 나아가 그야말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랑과 헌신과 수고로 우리를 양육해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말고 공경하고 섬김으로 하나님과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부모님을 어떻게 공경해야 합니까?

1)힘에 겹도록 섬겨야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출20:12절을 보겠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기서 공경하라는 말 db'K;(카바드)는 ‘무겁다, 힘겹다, 짐이 되다, 존경하다, 영화롭다, 존귀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공경은 힘에 겹도록 즉 최선을 다해서 존경하고 귀히 여기며 섬기며 영화롭게 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힘에 겹도록 해야 그게 진정한 공경이고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냥 형편대로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안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남으면 하고 안 남으면 안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을 쓰고 남으면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기 전에 먼저 따로 떼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볼일 다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볼 일을 보기 전에 하나님과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볼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공경이고 그게 섬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시간이 남으면 하는 게 그게 무슨 섬김입니까? 돈이 남으면 하는 게 그게 무슨 섬김입니까? 물론 시간이 남아도, 돈이 남아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긴 하지만 그러나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섬김이나 헌신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모님이 정말로 나에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신 분이요, 나아가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 분이요, 그래서 내 생명의 은인이요, 내 존재의 근거라는 것을 인정하면 하나님이나 부모님이 내 모든 행동의 일차적인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행동의 일차적인 근거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다하고 나머지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하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하고 그리고 그 나머지로 다른 것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섬김이요 공경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 부모님을 섬김에 있어서 이 원리를 잘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부모님이 내 생명의 은인이요, 내 존재의 근거라는 점을 기억하며 그래서 하나님과 부모님이 내 모든 행동을 제어하는 근거가 되어 먼저 공경하고 섬기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 부모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럴 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부모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님 공경의 또 다른 자세는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이 곧 공경한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고 인정한다면 상대방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상대방이 부모님이건 하나님이건 그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혹은 그 지혜와 그 능력을 인정한다면 그 분을 높여 드리고 영화롭게 해 드리기를 원한다면 어찌 그 뜻에 따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엡6:1절을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옳다는 것은 ‘당연하다,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원문에서 옳다는 말은 ‘준수하다, 의롭다, 법을 지킨다, 의무를 이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고, 도리이고 그래서 그것이 의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시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양육해 주신 부모님을 섬기고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보면 한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안에서’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일까지 순종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우주만물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주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일을 하는 것은 결국 우주만물의 최정점에 계신 최상의 어른이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뜻에는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수가 없기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날 교회를 가야하는데 부모님이 교회에 다니지 않으셔서 못 가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공손하고 정중하게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왜 교회에 가야하는지를 인내심을 가지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설령 부모님이 노를 발하셔도, 심지어 매를 든다고 해도 끝까지 참고 공손하게 말씀을 드리고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모든 영역에서는 백배 천배 더 순종하고 더 공경하고 더 섬겨야 합니다. 자신이 정말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부모님도 그 자녀를 알아주실 것입니다.

또 꼭 신앙문제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모님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때로는 적절치 못한 말씀이나 행동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일단은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공손하고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항변하고 무시하는 자세를 가지면 안 됩니다. 어떤 말씀이라도 일단은 공손하고 겸손한 자세로 경청한 다음에 말씀이 다 끝나고 나면 공손하게 자신의 뜻을 밝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이 좁혀지지 않으면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합니다. 정말 공경하고 섬기면서 기다리다가 기회를 보아가며 공손하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부모님도 자녀의 뜻을 받아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부모님의 권위와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정상적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물론 이려니와 혹시 정말로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지 않거나 일상생활에서 불합리한 말씀을 하신다 할지라도 결코 대항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언제나 존중히 여기며 공손한 태도로 최선을 다함으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축복도 함께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모님들은 뭔가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는 자녀를 위하여 온갖 헌신과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점점 작아집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워집니다. 바로 이럴 때 모든 자녀들은 이제 거꾸로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고 심지어는 자기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으니 부모님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가기 힘들 때는 이제 거꾸로 자녀가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어떤 설문조사에 의하면 2002년에는 노후에 자녀가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67% 정도였는데 10년이 지난 2012년 그러니까 작년에는 35%정도만이 자녀가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있다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현상은 아무리 대세라고 할지라도 결코 올바른 가치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며,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배은망덕입니다.

여러분, 오늘 정말 얼마나 왜곡된 가치가 판을 치고 있는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분별해야 합니다. 요즘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 그게 정말로 옳으냐 그르냐보다는 대세가 진리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대법관 아홉명 중 여섯명이 간통죄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도 적극적으로 간통제 폐지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좀더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유를 뭐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간통죄는 사람들의 범감정에 맞지 않는다는 거예요. 법감정이란 쉽게 말해 법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즉 옛날 사람들은 간통을 큰 죄로 생각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별로 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없애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놈의 법입니까? 잘못된 가치관이나 왜곡된 생각들을 바르게 잡아주는 게 법이지, 선이든 악이든 진리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법입니까? 그럼 다수의 사람들이 도둑질을 죄로 느끼지 않으면 도적질도 처벌하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까? 여러분, 다수가 선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대세가 진리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진리는 오직 1%만 따라가도, 아니 아무도 안 따라가도 진리이고, 99%아니라 100%가 따라가도 거짓은 거짓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우리는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의 잣대로 삼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안강에 나갔더니 길가에 현수막이 하나 붙어 있는데 거기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의 오심을 함께 기뻐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다 떡하니 ‘안강성당’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안강성당에서 석가모니가 온 것을 함께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세상의 대세입니다. 불교에서 ‘축 성탄’하면서 성당에 축하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러면 성당에서 ‘축 불탄’하면서 화답합니다. 세상적으로는 멋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그게 바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다가오는 사탄의 장난입니다. 성경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다 사신 우상에 불과한 것이요, 사람을 속이는 사탄의 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다수의 사람들이 자녀들이 부모님 책임질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엡6:2절을 보십시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공경이라는 말은 ‘평가하다, 존경하다, 경의를 표하다, 상을 주다, 가치를 정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생명을 주시고 온갖 수고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양육해 주신 부모님의 그 은혜와 사랑과 헌신을 인정하고 거기에 걸맞게 경의를 표하며 몸과 마음과 물질까지 드려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자녀들의 본분이요, 책임이요, 의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부모님을 평상시에도 마찬가지겠지만 특별히 힘없고 약할 때에 더욱 봉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우리에게 너무나 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 헌신적인 사랑으로 나를 양육해주신 부모님께 정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나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나머지 찌꺼기로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부모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상시에도 그래야 되지만 특히 부모님이 연세가 드셔서 약하고 힘들 때 부모님을 잘 봉양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도 풍성하게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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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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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주일오전 예배 대표기도문 (February,prayers for sunday worship service)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을 찬양 합니다

지난 한주간 동안도 우리몸을 성전삼아 성령님이 거하시며 성령님이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기를 원하시되 모래수보다 많은 수로 우리를 지키고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주님이 인도하실 때 말씀에 순복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었을 하든지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감당치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길을 내셔서

우리로 능히 감당케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으며

날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것들을 택하사 강한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천한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것들을 택하사 있는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그리스도 의 이름을 덧입지 않고는 우리가 자랑할것이

아무것도 없슴을 고백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 이름만 높이는 삶을 살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하여서 우리를 예수그리스도 의 편지로 살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예수향기 날리며 기쁘고 복된소식을 전하는 자로 살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각양 좋은은사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받은바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두지 아니하고 많은것을 남기는자로 살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좋은 군사로 살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전신갑주를 취하게 하시고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며 복음의 신을신고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인 말씀을 가지고 깨어 기도하는일을

힘쓰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군사로 일하는동안 생활에 억매이지 아니하게 입히시고 먹이시고 충분히 쓸것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어 가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주사랑 교회를 사랑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먼저 구원받은 우리를 이곳에 먼저 보내주시고 머리되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귀울여 수종들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로 받은바 은사대로 일하게 하시되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주사랑교회를 통하여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교회와 예배를 위하여 헌신하며 봉사하는 손길이 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대로 잘되는 복과 형통의 복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특별히 세우신 목사님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시간 목사님을 통하여 말씀을 대언하실 때에 성령의 불길이 저희에게 임하게 하시고 말씀이 스스로 일하실때에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우리마음을 감찰하셔서 주님앞에 벌거벗은 자같이 드러나 회개하는 시간이 되게 하옵서

사랑하는 주의 성도들 말씀 읽는중에 문제가 해결되고 말씀듯는중에 건강이 회복되며

오직 기쁨이 넘치는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옵서서

이시간 빈손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주님앞에 예물을 드리게하신 주님 우리의 예물을 받으시니 감사합니다 해외에 나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 들과 그가족들 위에도 주님이 함께하셔서 날마다 오고가는 소식들이 주님은 살아게시고 오늘도 변함없이 일하심을 증거하게

하옵서서 예배시종을 주님께 의지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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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주일낮설교/행복한 새해를 위하여 (February,Sunday Sermon)

 

 

제목 : 행복한 새해를 위하여  

본문 : 50:23

1.감사로 주님과 동행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에도 정말 믿음안에서 기도하며 말씀을 향하여 한발자국 한발자국 앞을 향해 나아갈 때에 주님의 인도하심과 축복하심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사랑과 풍족함이 넘치는 복된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서로 한번 축복의 말씀을 합시다. 마음껏 서로를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과 기쁨으로 동행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정말이지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벌써 2018년입니다. 1900년대를 보내고 2000년대를 맞으며 뉴밀레니엄이니 어쩌니 하면서 전 세계가 떠들썩하게 떠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2017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린다고 준비를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또 1년이 지나 2018년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물론 많은 것들이 생각나겠지만 우리가 이 시점에서 가장 먼저 가져야 할 마음은 감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도 많아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할 노릇 제대로 못한 것도 있고 또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 고달픈 일, 실패한 일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 모든 것을 덮어 버려서 우리가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지나간 한해도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너무 부족한 것도 많고, 하나님과 사람앞에 송구스러운 일도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으로 어려운 일도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정치인들도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실망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물질적으로도 이만하면 풍족하고, 자유와 평화와 질서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 해마다 풍년이 되어 쌀이 남아도는 땅, 이 얼마나 복된 나라며 복된 민족입니까? 전쟁이나 기근이나 테러가 없고, 이렇게 자유스럽게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영광드리며 살 수 있는 것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물론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지역적으로, 국가적으로 어렵고 힘든 일, 때로는 억울하고 원망스럽고 낙심이 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도 남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수학이 뭔지 아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는 수학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가히 천문학적인 것입니다. 아니 천문학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값으로 돈으로 수량으로 그 어떤 것으로 계수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의 가치는 얼마나 되겠어요?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지구의 가치는 얼마나 되겠어요? 태양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산소의 가치는? 물의 가치는? 게다가 천국의 가치는? 이걸 돈으로 환산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숫자로 나타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말그대로 무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그냥 공짜로 거저로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만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이웃, 온 인류 정말 너무나 감사한 존재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서로 돕는 관계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혼자서 편히 살겠다? 정말 그럴 수 있어요? 없습니다. 독신으로 생활하면서 사용하는 모든 것들을 보세요. 자기 혼자 가능한 게 몇가지나 있겠어요.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의 거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거예요. 뭐 혼자 잘 먹고 잘살아? 말도 안되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는 부모형제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연에게도 감사해야 하고, 나라에 대하여도 감사해야 되고, 직장에 대하여도 감사해야 하고 여하튼 다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자연의 가치가 얼마나 되겠어요? 이것도 무한한 것입니다. 그 자연으로 인하여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수백 억 원짜리 그림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자연들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들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런데 이것을 주신 하나님께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고, 그 자연을 어찌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교회나 학교나 직장이나 병원이나 무슨 문화시설이나 체육시설이나 상점이나 마을 공동체나 나라나 하여튼 모든 개인에게나 공동체나 기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 것들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교회도 없고 학교도 없고 직장도 없고 병원도 없고 마을도 기관도 없고 상점도 없고 문화시설도 없고 나라도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그 인생이 어떻게 되겠어요? 거기서 우리가 무엇을 누릴 수가 있겠어요?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보장받겠어요?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그런데 서로 감사하지 못하고 그저 어떻게든지 서로 속이고 빼앗고 하려고 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예요.

 

여러분, 감사할 줄 아는 모르는 사람은 동물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영어로 ThinkThank는 어원이 같은 말입니다. Think 즉 생각이라는 말과 Thank 곧 감사라는 말이 어원이 같다는 것입니다. 즉 생각할 줄알면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감사를 모르면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안그래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찌 하나님의 은혜나 부모님의 은혜나 다른 사람의 은혜나 자연의 은혜를 모르겠어요? 알면 어찌 감사가 안 나오겠어요?

 

여러분, 오늘 말씀보세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그냥 형식적으로 의식적으로 기계적으로 무감각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감격하며 예배를 드릴 때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고, 감사할 때 우리의 삶에도 은혜와 기쁨이 있고, 감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고, 감사할 때 우리 모두의 삶이 햇빛처럼 밝아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2017년도를 보내고 2018년 새해를 맞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새롭게 밝아온 2018년도에도 변함없이 베풀어주실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며 자유와 평화와 소망가운데 새해를 맞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이웃에도 감사하고, 이 아름다운 대자연에게도 감사하고 그래서 소중히 여기는 가운데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을 주고 여러분도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합시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가 두 번째로 가져야할 마음의 자세는 말씀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세요.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려는 역사의 전환점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가장 중요한 시점에 이스라엘의 정신적, 영적 지주로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인도해왔던 모세가 죽은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지도가가 되긴 했지만 솔직히 인간적으로는 여호수아는 모세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행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고, 홍해바다를 갈라 애굽의 군대에서 건져주고,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먹여주고, 메추라기 떼를 모아 고기를 먹여주던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만 이 모든 일들을 모세를 통해서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모세의 수종자로서 심부름 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여호수아에 대하여 신뢰를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이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가 강하고 강한 가나안 족속들과 일전을 벌려야만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정말 힘든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걱정하며 불안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백성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여호수아에게 힘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두려움없이 가서 그 땅을 차지하여 약속된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 말라. 마음을 강하게 하라. 가나안은 내가 너희에게 준땅이니 너희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들어가라. 너희들이 할 일은 하나, 그저 나를 믿고 내 말을 따라서 들어가는 것이다. 오직 내 말을 의지하고 내 말을 신뢰하고 그 말씀만을 따라 살라. 그러면 너희들의 하는 일이 분명코 형통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우리가 가는 길이 불확실합니다. 내일 무슨 일이 있을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길입니다. 염려가 되고 불안하고 걱정되는 일들도 있습니다. 올해 2013년도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로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승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약속과 그의 말씀은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변개치 않으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결코 부도수표가 없습니다. 분명코 하나님의 약속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생명과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세월이 어떻게 전개되든 지구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든 상관없습니다. 혹 고난과 비극적인 역사가 온다해도 상관없습니다. 믿음안에 사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소망이 있습니다. 반드시 천국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화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저 신실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따라만 가면 됩니다. 아니 내힘으로는 따라 갈 수조차 없습니다. 그냥 말씀 앞에 엎드릴 따름입니다. 그냥 마음에 주님을 모셔들일 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알아서 해 주십니다. 성령님이 인도해 주십니다. 말씀을 따라 가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러면 반드시 영원한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돈과 지식과 명예와 과학과 권세와 그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말씀으로만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왜 아니겠어요? 무엇으로 가능하겠어요? 무엇이 영원한 미래를 알겠어요?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 어떤 우리를 온전히 지켜 줄 수도, 온전히 인도해 줄 수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완전한 등대이고 인도자이고 천국으로 안내해 주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나간 한해 여기까지 인도하심을 감사하세요. 이 한해도 감사하며 사세요. 공연히 헛된 것 잡고 발버둥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부여 잡고 그거 따라 가세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말씀을 따라 여러분의 인생의 발걸음을 한발자국 한발자국 옮겨 놓으세요. 그러면 결코 실족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기쁨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승리가 있습니다. 천국의 은총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새로 밝아온 이 2018, 아니 여러분의 남은 모든 생애가 바로 그런 날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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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주일낮설교 /복된 새해를 위하여 (February,Sunday Sermon)

 

 

말씀 : 3:1~10

제목 : 축복받는 새해

지하철에서 어떤 아저씨가 칫솔을 팔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너무 좋은 물건 하나 소개해 드리려고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물건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칫솔입니다. 왜 가지고 나왔습니까? 물론 팔려고 가지고 나왔습니다.

 

, 칫솔이 이렇게 다섯 개가 한 묶음으로 되어있습니다. 얼마일 것 같습니까? 단돈 천원입니다. 뒤에 보면 made in korea라고 쓰여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수출품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수출이 잘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망했습니다. 잘 되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 어쨌든 백문이 불여일견, 하나씩 드릴테니 찬찬히 구경해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몇 분이나 사실까요? 저도 모릅니다. 잠시 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 . 점잖은 신사 분 한분이 구입하셨습니다. 더 구입하실 분 안 계십니까? , 많은 분들이 저를 믿지 못하고 망설이고 계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만 팔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몇 개를 팔았습니까? , 한 개입니다. 그럼 제가 얼마를 벌었습니까? 1,000원입니다. 아니 원가를 빼면 300원 벌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실망했을까요? , 아주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여기서 포기할까요? 아닙니다. 저는 다음 칸으로 갑니다. 남은 하루도 즐거운 시간 되시고 안녕히 가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음 칸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는 아저씨입니까? 비록 지하철에서 칫솔을 팔고 있지만, 비록 수입은 많지 않지만 얼마나 여유가 있고, 얼마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혹시 실망할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다음 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는 혹시 좀 실망스럽고 힘든 일이 있다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희망과 긍정 속에 한 해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주님 말씀따라 한걸음 한걸음 앞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분명히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한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복된 한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한해를 정말 은혜가 충만한 시간들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가운데 살려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나 긍정의 생각이라고 내 마음대로, 세상 가치관대로의 긍정은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긍정하는 것이 올바른 긍정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죄와 어둠 가운데 있고 하나님은 빛이시오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긍정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 뭐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1:8절을 보십시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보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라. 지키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할 것이라. 형통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생명과 축복과 평강과 위로와 기쁨의 근원자이십니다. 모든 우주만물과 그 질서와 규칙과 규범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주만물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모든 우주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당연히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따라가면 그 인생이 생명과 진리와 은혜로 충만해 질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빛이신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을 따라가면 빛의 은혜, 생명의 은혜를 누릴 것이요, 어둠과 사망에 속한 마귀 사탄을 따라가면 어둠과 사망의 그늘 속에 살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와 어둠속에 있는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자기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마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인생의 참된 생명의 양식이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규범이며, 규칙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성경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서 인간이 스스로 만든 룰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이 정해주신 룰만이 하나님께 통하는 길이며 그것만이 인간의 생명을 보장하고 풍성케 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성경만이 인간의 삶에 유일하게 완전한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규칙이요, 규범이요, 가이드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의 영과 육과 정신에 관한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은 오직 성경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천지창조 때부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알고 인간 존재에 대하여, 인간이 살아가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하여 규칙을 정할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모든 인생은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실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안의 그 어떤 존재도 우주와 인간과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다 알지도 못하고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제시할 수 없고, 모든 우주의 질서를 정할 수도 없고, 규범을 만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바르게 알고 그 가이드라인을 따라, 그 설명서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이드라인으로 삼아 육신을 사용하고 시간을 사용하고 물질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새롭게 밝아온 이 새해에는 오직 우리 인생의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이며 등불이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한해 동안도 말씀이 여러분을 지키고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말씀 안에 있는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의 은총이 풍성한 삶을 살려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그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6절 말씀 보십시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 이 말씀에서 특별히 범사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범사, 즉 모든 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밥 먹을 때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직장에서 일을 할 때로 인정하고, 장사를 할 때도 인정하고, 공부할 때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잘되고, 건강하고, 형통하고, 축복받을 때도 인정하고, 잘 안되고, 건강하지 못하고, 불통해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만나도, 불만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해 못할 일이 벌어져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와 환경과 상황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과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나 내게 주어진 시간이나 물질이나 재능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고 그러면 반드시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인정하면 어찌 예배와 찬송과 기도에 열심을 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어찌 내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며, 나아가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님과 나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하며 살아갈 때에 어찌 그 인생이 별처럼 빛나지 않겠습니까? 그 인생이 어찌 아름답고 복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여러분,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음을 믿고 그저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 할뿐입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도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정말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때에 그 인생이 어찌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움과 은혜를 인정하고 예배드리고 찬송드리고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우리의 육신이나 정신이나 물질이나 시간이나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사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들고 이해가 안되고 억울한 일을 만나도 그저 하나님께 맡기며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존중히 여김을 받으며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가득한 이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그 은혜를 누리려면 하나님의 지혜는 나보다 천배 만배 억배 더 크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 7절 말씀 보십시오. “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

 

어다.” 자기가 똑똑한 것처럼 생각하며 제 고집대로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다고 내 놓을만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비록 피조물들 중에서는 제법 지혜롭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우리 인생이 아는 게 얼마나 됩니까? 우리가 경험한 것이 얼마나 됩니까? 배웠으면 얼마나 배웠습니까? 알면 얼마나 압니까?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 욥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너무 답답해서 따져 묻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나는 정말 나름대로 선하고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오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악한데도 잘 먹고 잘 사는데 난 정말 억울하다고 하소연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내게 대답하라.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거기 있었느냐, 바닷물이 넘치게 하였느냐, 네가 아침이 오게 하였느냐, 네가 별들을 매어 묶을 수 있느냐, 네가 눈과 비를 내리었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네 가슴속의 지혜는 누가 주었느냐, 네가 염소의 새끼를 낳을 때를 아느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러자 욥은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42: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렸고,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욥을 고난에서 건져주시고 다시금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인품이 좋고 선하고 잘나도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처럼 여기고, 하나님앞에서 의로운 것처럼 여기는 인생은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마귀사탄에게 철저히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 우주 공간속에서, 천지가 창조되고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는 길까지, 영원한 세상이 지속되는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한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자신과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는 이 복된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4.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진실로 하나님을 공경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9절 말씀 보세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제일 먼저,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아가서 십일조를 비롯한 모든 감사예물을 드릴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여호와를 인정하는 일이요, 바르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게다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는데, 게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일에 사용되는 것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하늘 곳간에 쌓는 일인데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고 공경한다면 어찌 하나님께 먼저 드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인가 힘써 노력해서 얻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야, 말합니다. ‘, 정말 수고 많았다. 너 정말 대단하다. 이제는 좀 쉬면서 먹고 마시고 놀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부모님이 날 낳아 주시고 열심히 키워 주신 덕분이라며 부모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곁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던 친구나 선배나 기타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리며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면 우리도 여전히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육신으로 물질로 시간으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었다해도 근본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터전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생명과 육체과 지혜와 능력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햇빛과 비와 공기와 토지를 주셔서 그 안에서 활동하며 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다른 모든 것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공경할 때 그 믿음과 신실함을 보시고 더욱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0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이 귀한 말씀들을 기억하며 올 한해 동안도 정말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결코 자신이나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규범이며 잣대이며 안내자인 하나님의 말씀의 안내를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물질과 육신을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창고가 가득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은총과 귀중이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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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예배설교] 십자가의 승리 (palm sunday 2018)

 

 

 

 


제목 : 십자가의 승리

말씀 : 갈3:13-14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고난주일이란 약2000여년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그 참혹한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온 인류에게 죄사함의 은총을 가져다주신 사건을 회상하면서 그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절기입니다.

또 오늘은 종려주일이라고도 하는데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실때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면서 주님을 환영한데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종려주일이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만 그 십자가의 죽음은 승리를 위한 죽음이었음을 상기하는 주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이었으므로 주님의 고난가운데서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며 희망과 소망을 갖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고난과 승리,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이라는 이 역설적인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주님의 십자가 속에는 어떻게 고난과 승리,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이라는 이 역설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까?

 

1.죄의 참혹한 결과를 보여주는 십자가.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선 죄가 우리에게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가장 참혹한 사형틀입니다. 요즈음에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차에 걸고 무슨 장식품이나 부적처럼 달고 다니지만 십자가는 본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혐오스러운 물건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가장 잔인하고, 가장 끔찍스럽고, 처절한 고통을 주는 가장 참혹한 사형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상에서의 고통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의 정도도 말로 할 수 없고, 고통의 시간 또한 많게는 40여일 동안 계속되는 너무나 잔인한 사형방법인 것입니다.

게다가 십자가의 사형은 먼저 채찍으로 때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채찍도 보통의 채찍이 아니라 끝에 쇠갈고리가 달려 있는 채찍입니다. 이것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니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이렇게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며 사형장소로 이동합니다.

사형 장소에 도착하면 십자가에 손과 발에 못을 박아서 세워놓습니다. 그러면 못박힌 손목과 발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밤에는 추위가 엄습합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당합니다. 심지어는 독수리가 와서 뜯어먹기도 합니다. 그것도 잠시잠깐이 아니라 목숨이 긴 사람은 40일 동안이나 그 끔찍한 고통을 당하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그러니 그 고통과 비참함과 참혹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끔찍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죄를 지은 인생은 그런 끔찍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셔서 그 참혹한 고통을 당하시지 않으면 우리 모든 인생이 그런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계2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그 고통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계9:6에서는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는 너무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 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영영토록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죄는 나중에 지옥에서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여기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와 고통과 미움과 저주와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원한 천국의 은총은 물론 여기서도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늘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통하여 빛과 같은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저주를 풀어준 십자가

여러분,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처절한 고통의 장소였기 때문에 십지가가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가 받을 그 저주, 그 참혹하고 처절한 고통을 대신한 대속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13절 말씀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죄없고 흠없고 티 없으신 예수님,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영화로우신 예수님이 내가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순전히 내가 받을 고통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내가 받을 지옥의 형벌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죄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구속함을 받아 죄에서 자유인이 되어 새생명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20:28절에서 예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서 요19: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여러분, 인간적으로는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사형을 당하면서 그것도 그 저주받은 그 끔찍한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니 이성적으로는 이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그야말로 다 이룬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저주받은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받을 저주를 풀어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처절한, 그 끔찍한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지옥에서 당할 그 처절한, 그 참혹한 고통의 굴레를 벗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죄의 저주에서, 지옥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죄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지식으로도 과학으로도 물론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그 끔찍하고 처절한 고통을 영원히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그 저주에 풀어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일 입니까? 영원한 고통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하셨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과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어도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 영원한 저주에서 해방된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기뻐하며 영광 돌리며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3.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십자가

여러분, 그렇습니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랑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이 너무나 큰 사랑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남의 자식을 살리기 위하여 여러분의 자식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실 용기가 있으십니까? 여러분, 내가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자식이 아픈 것은 차마 보지 못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까?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자식이 죽는 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이 천한 곳에 보내셨습니다.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가장 처절한 죽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기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요3:1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범죄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저주와 고통에서 해방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너무나 크나큰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이런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또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더욱 감사하여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축복을 가져다준 십자가

여러분, 오늘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느냐, 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느냐?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복이 뭡니까? 한마디로 영생복락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천국에 가는 복입니다. 그래서 눅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영원한 천국의 복을 주셨다는 말씀이고, 이 복이야말로 지고지선지은의 복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복복복하면서 복을 누리기를 원하지만 세상의 복은 온전치 못한 복입니다. 제 아무리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세상에는 걱정 근심이 있고, 질고가 있고, 불안과 외로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복은 완전한 복입니다. 100%입니다. 아니 200%, 1,000%입니다. 넘친다는 것이지요. 충만하다는 것이지요. 무엇으로 은혜와 기쁨과 평강과 행복이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들은 조금치도 깃들일 수가 없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요.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덧입은 우리는 바로 그 복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덧입어야만 죄사함을 받고,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만 이런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난주일이지만 동시에 종려주일인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승리의 주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부활하셔서 새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승리의 날인 것입니다. 주님의 처절한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절기를 보내며 그 저주 받은 십자가, 그 끔찍한 십자가, 그 참혹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지옥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루신 것처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만이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며 어떤 형태로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는 자신이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아름답게 이루어 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하강교회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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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행복한 새해를 위하여(시50:23)


제목 : 행복한 새해를 위하여

본문 : 시50:23

 

1.감사로 주님과 동행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에도 정말 믿음안에서 기도하며 말씀을 향하여 한발자국 한발자국 앞을 향해 나아갈 때에 주님의 인도하심과 축복하심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사랑과 풍족함이 넘치는 복된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서로 한번 축복의 말씀을 합시다. 마음껏 서로를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과 기쁨으로 동행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정말이지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벌써 2012년입니다. 1900년대를 보내고 2000년대를 맞으며 뉴밀레니엄이니 어쩌니 하면서 전 세계가 떠들썩하게 떠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또 2011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린다고 준비를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또 1년이 지나 2012년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물론 많은 것들이 생각나겠지만 우리가 이 시점에서 가장 먼저 가져야 할 마음은 감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도 많아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할 노릇 제대로 못한 것도 있고 또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 고달픈 일, 실패한 일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 모든 것을 덮어 버려서 우리가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지나간 한해도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너무 부족한 것도 많고, 하나님과 사람앞에 송구스러운 일도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으로 어려운 일도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정치인들도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실망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물질적으로도 이만하면 풍족하고, 자유와 평화와 질서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 해마다 풍년이 되어 쌀이 남아도는 땅, 이 얼마나 복된 나라며 복된 민족입니까? 전쟁이나 기근이나 테러가 없고, 이렇게 자유스럽게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영광드리며 살 수 있는 것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물론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지역적으로, 국가적으로 어렵고 힘든 일, 때로는 억울하고 원망스럽고 낙심이 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도 남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수학이 뭔지 아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는 수학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가히 천문학적인 것입니다. 아니 천문학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값으로 돈으로 수량으로 그 어떤 것으로 계수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의 가치는 얼마나 되겠어요?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지구의 가치는 얼마나 되겠어요? 태양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산소의 가치는? 물의 가치는? 게다가 천국의 가치는? 이걸 돈으로 환산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숫자로 나타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말그대로 무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그냥 공짜로 거저로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만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이웃, 온 인류 정말 너무나 감사한 존재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서로 돕는 관계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혼자서 편히 살겠다? 정말 그럴 수 있어요? 없습니다. 독신으로 생활하면서 사용하는 모든 것들을 보세요. 자기 혼자 가능한 게 몇가지나 있겠어요.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의 거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거예요. 뭐 혼자 잘 먹고 잘살아? 말도 안되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는 부모형제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연에게도 감사해야 하고, 나라에 대하여도 감사해야 되고, 직장에 대하여도 감사해야 하고 여하튼 다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자연의 가치가 얼마나 되겠어요? 이것도 무한한 것입니다. 그 자연으로 인하여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수백 억 원짜리 그림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자연들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들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런데 이것을 주신 하나님께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고, 그 자연을 어찌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까?

교회나 학교나 직장이나 병원이나 무슨 문화시설이나 체육시설이나 상점이나 마을 공동체나 나라나 하여튼 모든 개인에게나 공동체나 기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 것들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교회도 없고 학교도 없고 직장도 없고 병원도 없고 마을도 기관도 없고 상점도 없고 문화시설도 없고 나라도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그 인생이 어떻게 되겠어요? 거기서 우리가 무엇을 누릴 수가 있겠어요?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보장받겠어요?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그런데 서로 감사하지 못하고 그저 어떻게든지 서로 속이고 빼앗고 하려고 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예요.

여러분, 감사할 줄 아는 모르는 사람은 동물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영어로 Think와 Thank는 어원이 같은 말입니다. Think 즉 생각이라는 말과 Thank 곧 감사라는 말이 어원이 같다는 것입니다. 즉 생각할 줄알면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감사를 모르면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안그래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찌 하나님의 은혜나 부모님의 은혜나 다른 사람의 은혜나 자연의 은혜를 모르겠어요? 알면 어찌 감사가 안 나오겠어요?

여러분, 오늘 말씀보세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그냥 형식적으로 의식적으로 기계적으로 무감각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감격하며 예배를 드릴 때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고, 감사할 때 우리의 삶에도 은혜와 기쁨이 있고, 감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고, 감사할 때 우리 모두의 삶이 햇빛처럼 밝아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2012년도를 보내고 2013년 새해를 맞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새롭게 밝아온 2013년도에도 변함없이 베풀어주실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며 자유와 평화와 소망가운데 새해를 맞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이웃에도 감사하고, 이 아름다운 대자연에게도 감사하고 그래서 소중히 여기는 가운데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을 주고 여러분도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합시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가 두 번째로 가져야할 마음의 자세는 말씀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1:7절을 보세요.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려는 역사의 전환점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가장 중요한 시점에 이스라엘의 정신적, 영적 지주로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인도해왔던 모세가 죽은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지도가가 되긴 했지만 솔직히 인간적으로는 여호수아는 모세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행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고, 홍해바다를 갈라 애굽의 군대에서 건져주고,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먹여주고, 메추라기 떼를 모아 고기를 먹여주던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만 이 모든 일들을 모세를 통해서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모세의 수종자로서 심부름 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여호수아에 대하여 신뢰를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이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가 강하고 강한 가나안 족속들과 일전을 벌려야만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정말 힘든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걱정하며 불안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백성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여호수아에게 힘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두려움없이 가서 그 땅을 차지하여 약속된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 말라. 마음을 강하게 하라. 가나안은 내가 너희에게 준땅이니 너희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들어가라. 너희들이 할 일은 하나, 그저 나를 믿고 내 말을 따라서 들어가는 것이다. 오직 내 말을 의지하고 내 말을 신뢰하고 그 말씀만을 따라 살라. 그러면 너희들의 하는 일이 분명코 형통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우리가 가는 길이 불확실합니다. 내일 무슨 일이 있을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길입니다. 염려가 되고 불안하고 걱정되는 일들도 있습니다. 올해 2013년도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로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승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약속과 그의 말씀은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변개치 않으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결코 부도수표가 없습니다. 분명코 하나님의 약속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생명과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세월이 어떻게 전개되든 지구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든 상관없습니다. 혹 고난과 비극적인 역사가 온다해도 상관없습니다. 믿음안에 사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소망이 있습니다. 반드시 천국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화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저 신실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따라만 가면 됩니다. 아니 내힘으로는 따라 갈 수조차 없습니다. 그냥 말씀 앞에 엎드릴 따름입니다. 그냥 마음에 주님을 모셔들일 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알아서 해 주십니다. 성령님이 인도해 주십니다. 말씀을 따라 가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러면 반드시 영원한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돈과 지식과 명예와 과학과 권세와 그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말씀으로만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왜 아니겠어요? 무엇으로 가능하겠어요? 무엇이 영원한 미래를 알겠어요?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 어떤 우리를 온전히 지켜 줄 수도, 온전히 인도해 줄 수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완전한 등대이고 인도자이고 천국으로 안내해 주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나간 한해 여기까지 인도하심을 감사하세요. 이 한해도 감사하며 사세요. 공연히 헛된 것 잡고 발버둥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부여 잡고 그거 따라 가세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말씀을 따라 여러분의 인생의 발걸음을 한발자국 한발자국 옮겨 놓으세요. 그러면 결코 실족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기쁨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승리가 있습니다. 천국의 은총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새로 밝아온 이 2010년, 아니 여러분의 남은 모든 생애가 바로 그런 날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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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성경:엡1:17-19


1.천국을 확실히 보아야 합니다.


부산의 한 변두리 달동네에 신실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시장 한 모퉁이 좌판에서 장사를 하며 오직 하나님과 두 아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육체적으로 고달픈 삶을 살았지만 그는 감사하며 자녀들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였습니다. 이런 권사님의 신실한 믿음을 보셨는지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복을 주셔서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하여 큰 아들은 중소기업 대표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대기업 이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신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커다란 아파트를 드리려고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그 달동네의 낡고 작은 집을 고집하며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두 아들은 정 다른 데로 이사 가시는 게 싫으면 어머니께서 사시던 이 동네에다 새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웬일인지 쉽게 허락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단 몇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들이 뭐든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해드리겠다고 하자 권사님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내 집을 지어주고 싶으면 이렇게 해라. 먼저 주춧돌은 열 두개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짓되 주춧돌은 모두 다른 보석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둥은 다이아몬드로 하고 벽은 황금으로 하라. 마루에는 자수정으로 깔고, 담장도 황금으로 할 것이며, 대문도 열두개로 하되 모두 진주로 해야 하고, 담장 밖에는 유리알 같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강가에는 다달이 실과가 맻히게 할 것이며, 집으로 들어오는 도로도 모두 황금으로 포장을 하거라.”

그러자 두 아들은 깜짝 놀라며 ‘에이 어머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런 집을 어떻게 짓습니까?’ 그랬더니 권사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너희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런 집을 준비해 두셨단다. 나는 머잖아 그곳으로 이사를 갈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집을 지어주지 못할 바에야 그만 두고 그 돈으로 정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나 더 도와 주거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크리스천이라면 적어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질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이런 영광스러운 저택을 준비해 두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장차 반드시 이런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런 영광을 누릴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그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까짓 세상 것 때문에 염려 근심 질투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얽매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보십시오. 마음의 눈을 밝히 떠서 무엇을 보라고 하였습니까?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무엇이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입니까?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이런 영광의 나라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소망가운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저 천국의 한량없이 풍성한 영광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영광의 기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영광의 기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영광은 한량이 없습니다. 영원무궁합니다. 조금치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이 영광의 기업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천국의 그 아름다움과 영광을 알지 못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무슨 철학적 신학적 과학적 이성적하면서 쩍쩍하면 유식한 줄 알고, 천국이나 지옥 이야기를 하면 유치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공자가 어떻고 맹자가 어떻고 소크라테스가 어떻고 하면 그럴듯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하면 시큰둥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거 큰일 날 징조입니다. 세상이 그만큼 인본주의에 흠뻑 빠져 들어있다는 증거입니다. 눈이 어두워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철학이나 과학이나 정치나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신학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심오한 철학을 가르치려고 오신 것도 아니고, 그저 윤리적 도덕적으로 조금 고상한 삶을 살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여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눅19:10절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향이 아니라 실재의 장소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라도 반드시 사 들여야할 가장 소중한 보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며 정말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가운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어 영의 눈을 활짝뜨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저 영광스러운 천국을 확실히 보는 가운데 세상의 작은 것들에게 얽매이지도 말고, 그것 때문에 낙심이나 좌절이나 원망이나 불평도 말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소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확실히 선명하게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밝고 환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가 밝히 보이고 천국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길거리에 매일 더럽고 해어진 옷을 입고 다 낡아빠진 검은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더듬거리면서 나와서 깡통을 앞에 놓고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며 먹고사는 맹인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불쌍하고 초라한 행색으로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하는데 그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동정을 베풀어 제법 많은 천원짜리 지폐들이 깡통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한 소년이 걸인의 곁에서 서성거리더니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걸인 앞에 놓여 있는 깡통을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맹인 거지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소년을 향해 날쌔게 쫓아가더니 금방 붙잡고는 숨을 헐떡이며 ‘이런 고얀 녀석 같으니라구, 앞길이 창창한 녀석이 어디가서 일을 도와주고 살든지 할 것이지 할 짓이 없어 남의 것을 훔쳐 먹고 사느냐 이 놈아,’하면서 발길로 막 차고 두들겨 패고는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걸인은 맹인 행세를 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두 눈이 멀쩡한데 일하기가 싫어서 맹인 행세를 하며 빌어먹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진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목적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마음의 맹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은 떴으나 진짜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보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저 돈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 세상의 나쁜 것만 보면서 원망과 불평과 투기와 향락과 죄악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밝은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눈이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과 이 아름다운 세상과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보고 천국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며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빛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6:22,2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냐? 네 눈이 감겨져 진리를 보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네 인생이 얼마나 어두운 인생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밝은 눈, 아름다운 눈, 깨끗한 눈,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진리의 빛,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을 듬뿍 받아들이면 우리 인생이 해와 같이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육신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물질에도 밝아야 하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더 밝은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눈, 과학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더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진장으로 제공해 주시는 생명의 빛을 듬뿍 받아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눈을 가지려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때만이 우리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달려가 그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진리이신데, 생명이신데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어떻게 진리를 알겠으며, 생명을 알겠습니까?

오늘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보십시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뭡니까? 물론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지혜를 얻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눈이 활짝 열려 그 나라를 바라보며 누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복되고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대통령을 아는 것도 좋고, 국회의원을 아는 것도 좋습니다. 과학을 알고, 문화를 알고, 윤리도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 진정한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을 알게 되고 그래서 세상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진정 복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7: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을 때에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박근혜대통령이 18대 대한민국대통령에 취임하며 취임사에서 경제 민주화를 이루고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대통령으로서 정말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헌신함으로 어느 정도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 갈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책임질 수도 없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고,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고, 아무리 과학이나 문화가 눈부시게 발달해도 참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해서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내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래서 진정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국민행복시대는 요원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성실하게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거기에 행복이 있고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의 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방법과 목적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과 방법과 방향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진실하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죄를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죄에 대해서도 밝은 눈을 갖게 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걸 바르게 알고 그래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 때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 사회는 죄에 대하여 점점 눈이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머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가 만연되어 있어서 죄에 대한 경계심도 두려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가 양심을 마비시켜 더욱 죄악 속에 빠져 들어가게 하고 그래서 죄에 대한 양심은 더욱 마비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3:1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알지 못하고, 죄를 깨우쳐 주어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속에서 자행자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는 입에 담기도 그렇지만 요즘 뉴스에 보면 이 땅에 성적인 타락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모릅니다. 성폭행 문제 너무 자주 나오고, 나아가 불륜의 관계도 너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강제성이 없으면 다시 말해 서로 좋아서 하면 뭔 짓을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아름답게 하나 되어 아름답고 복되고 경건한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서로 돕고 의지하고 존중하며 귀히 여기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서로 좋아서 엉뚱한 짓을 하면 결혼을 했건 안했건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죄와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예민한 감각으로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 인본주의, 이기주의, 외모지상주의, 편의주의, 향락주의, 종교다원주의 등 온갖 왜곡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정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정 우리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가치있게 하고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하는지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며 영적인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영적인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야 그런 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나아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기에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들 때문에 원망 불평 좌절 분노하지 않게 됩니다. 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밝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과 천국과 세상에 대하여 활짝 열려진 밟은 눈을 가지고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소망과 평강과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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