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세째주일 낮설교 /사모하는 믿음 (August Sunday Sermon)


말씀 : 고전15:57,58

제목 : 사모하는 믿음


1.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기복신앙 즉 복을 비는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기복신앙이라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복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믿음을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와 영광이나 건강이나 이런 세상적 물질적 육체적 복을 받기 귀한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렇다고 기복신앙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단순한 세상적 기복 신앙은 잘못된 것이지만 올바른 기복 신앙, 즉 올바르게 복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는 신앙은 당연하고 도리어 필요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올바르게 복을 바라는 것도 자신의 책임이나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그저 천국에 가려고 하고 평안이나 누리려고 한다면 당연히 잘못된 믿음이지요. 그러나 참되고 올바르고 진정한 복을 사모하며, 그래서 더욱 열심히 주를 섬기고 수고하는 가운데 복을 받아 누리려는 것은 당연하고 도리어 우리가 꼭 가지고 있어야 할 신앙의 모습인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 열심을 내게 되고 그래서 신앙에 발전이 있고 성숙해 지고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뭔가 바라는 게 없다면 어떻게 열심히 힘쓰고 애쓰겠습니다. 뭔가 바라보는 것이 있고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있어야 열심히 그것을 얻기 위하여 힘쓰게 되고 그러다보면 더 발전해 나가고 뭔가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공부를 해서 뭔가 좀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지요. 아무리 공부해도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면 누가 공부를 하겠습니까? 열심히 논밭에 나가서 일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피땀을 흘려 일해도 수확할 것이 없다면 누가 그 고생을 하겠습니까?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그렇지요. 열심히 일하는데 아무런 보상도 없다면 누가 일하겠습니까?


믿음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예수님 믿고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믿으면 뭔가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바라고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 믿으면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한두가지가 아니지요. 정말 예수님 안에서 바르게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가면 분명히 이 땅에서도 평안과 기쁨과 위로도 받고 육체적 물질적으로 복을 받습니다.

 

물론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그야말로 완전한 복과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르게 만나서 믿고 따르는 사람은 이 땅에서도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생명과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누리면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실 것을 기대하고 사모하며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고 그럴 때 더욱 은혜 충만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올바른 기복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진실하게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도 영육 간에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더욱 큰 상급을 주실 것을 믿고 열심히 성실하게 소망가운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 속에 살아가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에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아는 자요, 이런 사람이 순수한 마음과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순진한 아이들은 먹을 것을 보면 그거 하나 먹고 싶어서 눈을 떼지 못하지 않습니까? 또 그러다가 사탕하나 받으면 얼마나 기뻐합니까? 그래서 사탕하나 얻어먹기 위하여 재롱을 떨기도 합니다. 그래서 1,000원 한 장을 사모하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기꺼이 심부름을 합니다. 그러다가 1,000원 한 장 얻으면 너무나 기뻐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천원 알기를 우습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 아이가 잘못된 것입니다. 적어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라면 뭔가 작은 것이라도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사모할 줄 알아야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예쁜 짓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얻기 위하여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그대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순수한 마음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은혜와 복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그냥 단순히 간절히 사모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모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전한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하며 열심히 주님을 섬기면서 주님과 동행할 때에 그 심령 속에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쳐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도 아름답게 이루어가며 주님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2:2절에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갓난 아기에게 가장 좋은 것은 엄마 젖입니다. 속된 말로 엄마 젖만 있으면 장땡입니다. 그래서 갓난 아기들은 죽으나사나 엄마젖만 찾습니다. 그래서 결국 젖을 얻어먹고 만족함을 누리며 건강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에게 정말 생명을 주고 은혜를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주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사모하며 열심히 말씀을 묵상하고 그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이 먼저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주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순진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순전한 믿음에 큰 상급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신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사람들이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뭐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고 생명이시고 기쁨이고 평안이시고 위로이시고 소망이신데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믿음으로 그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어찌 그 안에 있는 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순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복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다시 말해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경외하며 섬기며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충성한 자들에게는 더 크고 영광스러운 상급도 보너스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계22: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즉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에는 확실하게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것은 물론 벌 줄 자를 벌주고 상 줄 자를 상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상과 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은 현세적인 복입니다. 즉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누리는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복입니다. 여러분 신28:2~4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한마디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라 사는 사람에게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며,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자녀가 복을 받고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고 짐승까지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지 않습니까?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주어지는 것입니다. 농부가 열심히 일을 하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이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면 좋은 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을 하면 좋은 운동선수가 됩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사업을 하면 좋은 사업가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하면 반드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갓난아기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 주권, 능력, 은혜, 축복을 믿고, 그 안에 생명과 복과 은혜가 있음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이 땅에서도 좋은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죄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하십니다. 진실한 마음과 성실한 자세를 주십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땅에서도 많은 것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복을 누리지 않을 수 없고 물론 당연히 영원한 영광의 나라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상급은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보상입니다. 반면에 우주만물의 창조주시오 주관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벌이 주어지는 것도 당연한 대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복을 주실 것을 수없이 약속하셨고, 반면에 주님의 뜻을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수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이 주실 상급과 칭찬을 바라보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주님 뜻대로 충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질 이 땅에서의 축복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의 그 무한히 영광스러운 상급을 사모하면서 열심히 주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복을 받으려면 열심히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순진한 마음으로 복을 받기를 원하고 상급을 받기를 원한다면 물론 그 상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 5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장의 말씀은 소위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앞부분에서는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든 육체는 부활한다, 불신자는 죽음의 부활로 나타나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왕노릇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57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의 승리를 주신, 그래서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러기 때문에 그날을 바라보며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수고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을 것이므로 장차 주께서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일으키셔서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누리게 하실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일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죽음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상과 벌이 확실해 집니다. 어떤 이는 완전한 형벌 가운데 처하고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을 지키고 주님이 주실 큰 상급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순진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런 삶에 힘이 있습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신 사명을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역사도 힘 있게 이루어가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와 위로와 소망이 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데 주님이 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위로와 소망으로 채워주지 않겠습니까? 또한 그 엄청난 영광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를 바라보면 왜 희망과 소망과 힘과 용기와 위로와 기쁨이 솟아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생은 진정한 평안도 기쁨도 소망도 누릴 복도 없습니다. 설령 나름대로는 평안과 소망과 복이 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평안과 소망과 복이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이지요. 아니 그냥 일장춘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바라보는 그것들의 노예로 살기 십상입니다. 혹시 끝까지 그런 희망과 소망 속에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순간들이 일식간에 끝나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롬8:24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또한 벧전1:24,25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보이는 소망 즉 세상의 모든 물질과 권세와 부귀영화는 풀의 꽃과 같은 것이기에 금방 시들고 마르고 썩어 없어질 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결코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고 영원한 영광을 가져다 줄 그 하늘의 소망만이 완전한 소망이요, 그때 받을 상급만이 완전한 상급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만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복,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실 그 영광스러운 복을 간절히 사모하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참된 기대와 소망 속에서 정말 갓난아기와 같이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진정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도 진정한 희망과 소망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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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말씀 : 골4:2~6

1.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어디서 나옵니까? 물론 마음에서 나옵니다. 안 그래요? 마음에 미움이 잔뜩 들어 있으면 미워하게 되잖아요. 마음에 원망과 불평이 들어 있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잖아요. 마음에 사랑이 들어있으면 사랑하고 나누게 되잖아요. 마음에 욕심이 잔뜩 들어있으면 어떻게든지 더 가지려고 난리를 치잖아요.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그것은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입니다.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이 뇌와 마음과 영혼 속에 축적되어 가치관과 인격을 형성되고 그렇게 형성된 가치관과 인격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무엇을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까? 99%가 사람과 교제하며 거기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입니다. 즉 하나님과 교제하며 보고 듣고 배운 것은 별로 없고 거의 대부분을 사람과 교제하며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는 주님의 가치관이 아닌 사람의 가치관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뜻대로 살지 못하고 자꾸만 왜곡된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일주일동안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일주일이 168시간입니다. 그러면 그 중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은 몇 시간입니까? 일주일 달랑 한번 예배드리는 사람은 불과 1시간이지요. 그러면 1/168입니다. 약 0.6%지요. 오후예배까지 드리는 사람은 2시간 즉 1/84 약 1.2%입니다. 수요예배까지 드리는 사람은 3시간 약 1/55 약 2%입니다. 매일 새벽기도까지 드리는 사람은 10시간 약1/16 약 6%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떤 사람은 아예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과만 교제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야 6%, 적으면 1%도 안되는 시간만 하나님과 교제하고 나머지 시간은 세상과 교제하며 거기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 뇌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우리 가치관과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겠습니까? 물론 당연히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로 가득차 있겠죠.

 

물론 그렇게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이 완전히 옳고 바르고 선하고 의롭고 진실하고 거룩하고 하다면야 문제될 게 없겠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영혼이 죄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와 무지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죄와 무지 가운데 있음으로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심히 죄되고 왜곡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렇지 않아도 내 영혼도 이미 심각하게 죄로 오염되어 있는데 거기다가 또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우리 영혼과 인격이 어떻게 올바르게 형성되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지극히 인간적 물질적 이기적 자기중심적 사고와 그 밖에 온갖 왜곡된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지극히 왜곡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자신도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남에게도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는 그러한 삶을 살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어찌하든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우리 영혼이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사랑과 선과 진리와 의와 진실 등의 하나님의 가치관, 예수님의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선과 진리와 의와 은혜와 사랑을 덧입어 내가 먼저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올바른 관계가 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물질 사이에도 올바른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러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선과 진리와 의로 대하게 됩니다.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바르게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전인적인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됨은 물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42:1절에서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주의 은혜로 가득할 때에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내 영혼에 은혜로 가득 채워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찌 하든지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되어 여러분 자신도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 영혼이 늘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될 수 있습니까?

 

2.말씀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영혼이 잘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두말할 나위가 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에게 완전하고 유일한 생명의 양식이며 동시에 완전한 나침반이며 규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이 살아나고 바른 길을 깨닫고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영생 복락의 길을 가려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거기에만이 완전하고 영원하고 생명과 진리와 은혜가 있습니다. 우주와 하나님과 인간과 이 세상과 내세와 영원한 나라에 대하여 유일하고 완전하게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누가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과 진리와 의와 영생 복락의 길을 알려 주겠습니까? 누가 우주만물에 대하여 다 알겠습니까? 그 어떤 철학이나 도덕이나 지식이 생명의 길을 알겠습니까? 무엇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를 가르쳐 주겠습니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다 죄인이요 무지한 존재요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인간은 그 아무도 자신이 길이요 진리가 될 수도 없고, 우리에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영생 복락의 길로 안내해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생복락을 주실 수 있고 우리를 선과 진리와 의와 영생 복락의 길로 인도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만이 유일한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19:7,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영혼을 소생케 하고 영혼의 눈을 밝혀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압니다. 그래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알게 됩니다. 그래야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되고, 그래야 속지 않고, 시험에 들지 않고, 세상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모르면 인생을 모릅니다. 인생의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모릅니다. 인생의 종착역도 모릅니다. 온전한 지혜도 능력도 분별력도 없어집니다. 그러면 왜곡된 가치관에 판판이 속습니다.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닙니다. 유혹에 빠지고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줄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삶으로 세상에서도 볼품없는 인생이 되고 끝내 멸망의 길로 가는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우리의 작음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을 따라 살지 말고 오직 인생의 유일한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가까이하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에 순복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이 주시는 능력과 은혜와 권세와 지혜로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물리치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 여러분의 영혼이 생명의 은혜가 넘쳐 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영혼이 회복되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기 위하여 또 하나 정말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체가 육체적 호흡을 통하여 산소를 공급받음으로 육체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마음껏 활동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도 기도를 통하여 영적 산소를 공급받아 영적 에너지를 얻어야 영적으로 생기 있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단지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 생각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과 은혜와 지혜와 위로와 평안과 능력이 내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욕심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원망과 불평과 근심과 걱정과 좌절과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이 물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생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분별력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의 유혹을 이기게 되고, 마귀사탄에게 속아 끌려 다니는 일이 없게 됩니다. 세상의 유혹과 도전과 시험을 얼마든지 이기며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26:41절에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고, 오늘 2절에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여러분 보세요. 계속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이라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에 보면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즉 맨 날 달라는 기도만하지 말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요구만 하는 게 아니라 먼저 감사해야 하고 회개해야 하고 또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하겠다고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달라는 기도도 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런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주님, 때를 따라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신 주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한다면 당연히 내가 이렇게이렇게 하겠노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요구하는 것과 무작정 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요구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지 못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도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먼저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은혜를 아는 사람도 요구하는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요구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 아닙니다. 그 요구는 나와 내 가족과 이웃에게 정말로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나옵니다. 맨날 무엇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족과 이웃과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하겠노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자의 기도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물론 그 기도자의 심령 속에 은혜를 주셔서 더욱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하나님께도 더욱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기도와 관련하여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영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3절을 보겠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고 저들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영혼 구원하는 것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영혼 구원을 받지 못했을 때 당하는 고통과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대로 영혼 구원을 받았을 때 누리게 되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보다 더 크고 기쁘고 즐겁고 복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가족에게 억만금을 주는 것보다 그 영혼이 구원받게 해야 합니다. 가정이나 국가의 경제발전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내 가족 이 나라 이 백성이 하나님을 알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여기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의 영혼이 밝아지고 지혜로 충만하고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특별히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지역사회와 나라와 민족의 영혼이 깨어나고 살아나서 우리 모두 함께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어 생명의 은총을 누리면서 그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려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먼저 예배와 말씀과 찬양과 기도를 통하여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생명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걸로 끝나면 안되고 그렇게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는 당연히 일상생활에서 은혜 받은 자로서 거룩하고 진실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2:1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셨고, 오늘 5절에서도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것은 세월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으라는 게 아닙니다. 세월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돈이나 시간이나 재능을 아끼는 게 뭡니까? 그냥 고이 간직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그 본래의 목적대로 바르게 사용하는 게 아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월을 아끼라는 것도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게 아니 원래의 목적대로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할나위없이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시간이든 재능이든 돈이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될 때에 가장 올바르게 사용되어 우리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과 유익과 복을 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풍성하고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여기서 맛을 낸다는 것은 세상에 기쁨과 평안과 은혜와 사랑과 소망과 위로를 주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렇게 맛을 내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선 말을 예쁘게 곱게 긍정적으로 상냥하게 친절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로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은혜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말도 예쁘게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만 잘하면 뭐하냐, 행동을 잘해야지 그럽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너는 얼마나 행동을 잘하냐?

 

여러분, 말도 나쁘게 하고 행동도 나쁘게 하면 빵점입니다. 그러나 비록 행동은 다 못할망정 말이라도 잘하면 50점은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말만 잘하면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선 말을 예쁘게 하고 그 다음에 행동도 예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우선 말이 예쁘고 그 다음에 행동도 잘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의로워야 합니다. 성실해야 합니다.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 있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유익과 소망을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금으로 맛을 내는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이 잘 된 자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도 잘되기를 바랍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모두 건강하고 출세하고 물질적으로 부유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영혼이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받은 은혜를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먼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살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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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주일낮설교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봅시다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유혹 앞에서

성경 : 마4:1-11

 

1.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요즘에 보면 상대적 빈곤감 또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보면 즉 실제로는 빈곤한 게 아닌데 많이 가진 자들과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여기고 박탈감을 느끼면 불평불만을 하게 되고 그래서 자존감도 잃어버리고 진짜로 가난한 자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바보 같은 일입니까? 실상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데 하필이면 없는 것을 가지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남이 가진 것을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며 가지고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하고 진짜로 가난한 자처럼 기쁨을 모르고 산다면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딨습니까?

그럼 왜 그렇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꾸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월급 200만원도 못 받는데 남이 300만원 500만원 1,000만원 받으니까 저 사람은 무슨 복이 많아서 머리가 좋아서 일류대학 나와 대기업에 들어가고 출세하여 잘먹고 잘사나, 저 사람은 무슨 복이 많아서 부잣집에 태어나서 저렇게 좋은 조건 속에서 온갖 좋은 혜택을 누리며 잘먹고 잘사는데 나는 왜 쎄가 빠지게 일해도 이 모양인가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항하고 시비를 걸고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됩니다. 남이 월급을 1,000만을 받든 1억을 받든, 대궐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온갖 사치를 누리든 그런 거 배 아파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 앞에서 믿음 안에서 성실하게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누리고 있는 것 자체를 보면 우리는 결코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힘든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이 정도면 먹고 살만한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영원한 영광까지 주셨습니다. 그럼 됐지 자꾸 더 바라고 욕심을 내고 비교하며 원망하고 불평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그럴 일이 뭐 있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행복은 자꾸 도망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세상이 그렇지를 못합니다. 완전히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서 그저 좋은 집에서 좋은 것 먹으며 좋은 옷 입고 많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할 줄 압니다. 그래서 죽어라하고 돈돈돈 경제경제경제하면서 온통 관심의 초점을 돈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물질적 외형적인 것만 남과 비교하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많은 갈등과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게 바로 마귀사탄의 역사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치 옛날에 나라에 시끄러운 일이 있으면 소위 북풍이라고하여 작은 일을 크게 부풀리든지 없는 일을 만들든지하여 북한 공산당이 무슨 큰 일을 저지른 것처럼 하여 국민들의 관심의 초점을 그쪽으로 돌리게 함으로 시끄러운 일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귀사탄이 우리의 관심을 온통 돈에게 두게 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이니 사랑이니 진리니 의니 선이니 이런 것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잘먹고 잘살면 장땡이라고 여기며 예수님도 안 믿고, 심지어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예수님보다 돈을 좋게 여기게 만들어 자꾸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돈을 따라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깨어 기도하며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마귀 사탄의 유혹에 속지 말고 진리를 따라 살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5:16~18절을 보겠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보세요. 세월이 선하다고 했습니까? 악하다고 했습니까? 악하다고 했습니다. 악한 게 뭡니까? 죄와 무지 속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저 돈과 명예와 권력과 세상 즐거움에 빠져 사망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려면 세상의 것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올바르게 판단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짓되고 왜곡된 것들을 물리치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왜곡된 가치관이 만연된 세상에서 정말 깨어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올바른 영성을 가지고 모든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을 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까?

2.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왜곡되고 유혹 많은 세상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지요.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시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이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가치관과 악한 것들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더럽고 추하고 악한 마귀 따위에게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까?

물론 왜 이유가 없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분임을 명백히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최초의 인간 아담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는데 예수님은 사탄의 권세와 유혹을 물리침으로 마귀에게 저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살리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능동적으로 시험에 임하셔서 사탄을 호통을 쳐서 쫓아내심으로 사탄의 권세룰 물리치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마귀에게 속아 죄와 무지 가운데 빠진 인생은 결코 자기 힘으로는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선이나 진리나 의에 대한 온전한 분별력도 없고, 악을 이길 힘도 없습니다. 자신이건 남이건 죄과 마귀와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이나 다른 어떤 능력이나 지혜로도 안됩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으나사나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임으로 그 안에 있으면 안전한 것입니다. 사탄 마귀가 넘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설령 사탄 마귀가 도전해도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게 됩니다. 사탄 마귀가 어떻게 교묘하게 유혹하고 시험하고 도전해도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분별하고 물리치게 됩니다. 세상의 왜곡되고 그럴듯한 가치관에 속지도 않고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 따위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세상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게 밀려와도 휩쓸려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그런 것들을 이기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자유와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5: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심으로 세상의 모든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물질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가장 먼저 이겨내야 할 시험은 물질의 시험입니다. 사탄은 온갖 방법으로 교묘하게 우리를 유혹하는데 가장 흔한 것이 물질을 통한 유혹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간사한 마귀가 심지어 예수님께도 물질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40일 동안이나 금식하여 주리신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린 배도 채워서 좋고 권능을 보여주면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될 거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수작이 예수님께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말을 듣고 사탄을 꾸짖습니다. 마4: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한마디로 떡 즉 물질이 우리를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좌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영생복락의 말씀인데 그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고 썩어 없어질 물질이 지배하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생명의 길도 진리의 길도 모르고 썩어 없어질 물질만 따라가다가 영원한 멸망길로 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내가 배가 고프고 힘든 건 사실이지만 너 따위의 말은 들을 수 없다며 사탄의 교묘한 물질적 유혹을 일축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질은 요긴한 것이긴 하지만 절대로 물질이 내 삶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물질적 가치에 의하여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그 말씀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당연히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세상은 물질지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믿음이나 사랑이나 진리나 의보다는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 때문에 싸우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도 합니다. 물질 때문에 이웃과 친구와 심지어는 가족 간의 관계가 파괴될 때가 많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물질 때문에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풍조가 세상을 뒤덮고 있어서 그게 도리어 정상인 것처럼 여겨질 지경입니다. 그러나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속고 있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인생을 거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껍데기에 지배당하는 인생은 당연히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 지를 잊지 알고 더욱 깨어 기도하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며 말씀으로 무장하여 물질보다 오직 주님을 앞세우시기 바랍니다.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내 삶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과 믿음과 사랑과 진리와 선과 의의 참된 가치를 앞세우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명예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 마귀는 물질적 시험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예수님의 명예욕을 자극시켜며 유혹합니다. 즉 성전 꼭대기로 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붙들어 다치지 않게 하실 것이고, 그러면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웅대접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런 수작에 넘어갈 분이 아니시죠. 그래서 또 마귀를 꾸짖습니다. 마4:7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내가 너 따위의 말을 듣고 여기서 뛰어 내린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게다가 여기서 뛰어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이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사탄 따위의 말을 듣고 뛰어 내린다는 것 자체가 그 말에 순종하는 것이니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설령 뛰어 내려서 좋은 결과가 있다고 할지라도 마귀의 말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한다면 그게 바로 사탄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설령 돈보따리가 생긴다해도 마귀 따위의 말에 순종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마귀의 말에 의해서든 아니면 자기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든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전에서 뛰어 내리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방법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있다면 마귀의 말처럼 뛰어내릴 때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면 자신이 영웅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방법으로 명예를 주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명예를 주는 것이지 영웅심리를 가지고 쓸데없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지켜 줌으로 영웅이 되게 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게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이 지켜 주실 만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해 주실지 안 해 주실지 한번 테스트해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무모하게 행동하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말씀에 합당하게 믿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이게 올바른 믿음이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명예와 영광도 아울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기본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비롯하여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무엇을 하든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영웅심리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무언가를 행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함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명예도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영적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시험이 실패로 끝나자 마지막으로 사단은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영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높은 산으로 가서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모두 주겠다는 것입니다. 즉 그저 눈 한번 질끈 감고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만국을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탄이 그럴만한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 까짓 게 무슨 그런 권세가 있습니까? 그저 예수님이 지금 40일동안이나 전혀 아무것도 안 잡수시고 약해져 있으니까 이 약해진 틈을 노려 어떻게든 예수님을 넘어트리려고 술수를 쓰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작이 예수님께 어떻게 씨알머리나 먹히겠습니까? 예수님은 사탄을 향해 호통을 치십니다. 마4:10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내 지금 비록 힘이 들어도 어딜 감히 나한테 수작을 부리느냐? 오직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거늘 어찌 더럽고 추하고 악한 너 따위에게 경배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사탄은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나에게 절하라. 그러면 천하만국 즉 명예와 권세와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우상을 섬기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을 미끼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신은 없다고도 했다가 신은 똑같다고 하면 믿지 말든지 아무거나 적당히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 행복이 있다. 그걸 소유하라. 그러면 행복하리라고 하면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그 길로 갑니다. 자기 생각대로 갑니다. 그저 돈돈돈 경제경제경제 하면서 삽니다. 그게 바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모습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볼때에 보기에도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고 먹으면 뭔가 지혜와 생기를 얻을 것처럼 보여 덜커덕 따 먹음으로 죄의 굴레를 뒤집어썼던 것처럼 지금은 더 크고 더 좋은 선악과들이 세상에 널려 있어서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게 쉽사리 걸려들어 선악과 따먹으며 죄의 길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 소리에 속으면 안됩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향락이나 세상의 가치관 앞에 무릎을 꿇으면 안됩니다. 그건 죽음의 길입니다. 오직 우리가 경배해야할 분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뿐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뿐입니다.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특별히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묵상함으로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 시험을 이기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능력을 온전히 맛보며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 갈 수 이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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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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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말씀 : 고전10:31-33

제목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 사람이든 물건이든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무엇인든 본래 그것을 만든 목적에 부합되는 상태를 유지하고 그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TV가 아무리 크고 디자인이 좋아도 영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자동차가 아무리 크고 멋있어도 잘 달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이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인물이 훤하고 키가 크고 능력이 많아도 사람 노릇 제대로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지식과 능력과 부와 명예와 권세가 있어도 그걸 본래의 목적에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아무 유익이 없지 않습니까? 아니 유익은커녕 도리어 그걸 잘못 사용하면 인간의 삶에 해악을 끼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생명과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거기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정말 멋있고 아름답고 가치 있고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고귀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1.인간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 뭐 있냐 잘 먹고 잘 놀고 잘살면 되지 그럽니다. 기왕이면 부귀영화도 누리고 명예도 누리고 그래서 떵떵거리며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그게 인생이지 그럽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잘먹고 잘살기 위하여 인생의 모든 것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부귀영화 누리면서 살다가 죽으면 대단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누구 맘대로 그게 인생이라고 그럽니까? 그건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이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인생이지 결코 그게 인생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간의 목적은 사람이 정하는 게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만들어진 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목적을 정합니까? 텔레비전이 자기가 목적을 정했나요? 밥그릇이 나는 밥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지 하면 자기가 목적을 정하고 만들어졌나요? 사람이 태어나면서 나는 이런 인생이 되어야지 하면서 스스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나요? 아닙니다. 물건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 정하고 우리의 목적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그건 사43:7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같이 보실까요?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무엇이 인간의 목적이라고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세히 말하면 길어지니까 간단히 말씀드리면 첫째는 직접적인 의미로서 우리를 지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찬양하여 섬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간접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능력을 잘 활용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되게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에서 인간도 자연도 하나님의 은혜를 흡족하게 누리며 살아감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신 의미와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은 인간은 무조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말하면 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완전히 거룩하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사랑과 은혜만이 충만하신 하나님께 어찌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걸 모르는 인생이라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모르는 자로서 결국 하나님의 은총에서 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때에 세상은 가장 아름답고 복된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행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무엇을 하든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과 지식과 경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길을 따르게 됩니다.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게 됩니다. 목적도 방법도 의도도 선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바르게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영광이 돌려지고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죄와 무지 속에 있는 내 생각과 방법과 경험과 지식을 따라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물론 옳은 것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죄와 무지가운데 있기 때문에 선하고 아름답고 귀한 목적과 방법과 의도를 가지고 하지 못하고 잘못된 목적과 방법과 의도를 가지고 하기가 십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기도 하고 헛된 것에 인생을 바치기도 하고 그저 자신의 욕심과 영광을 위해 하다보니까 시기와 질투와 분쟁과 싸움이 일어나 결국은 서로 아픔과 고통과 상처를 주는 어리석은 삶을 살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겸손하게 엎드려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행할 때에 선과 진리와 의를 따름으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이나 세상의 왜곡된 풍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여러분도 귀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모든 행위를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시켜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시켜야 합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인지 혹은 가리는 일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보십시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며 행위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본능적인 욕구나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살기 위해서 먹는다거나 아니면 식탐을 채우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먹음으로 건강을 유지하여 그 건강한 육신으로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의식주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의식주 생활도 정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방법으로 영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 중에서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멀리까지 유명한 음식점을 찾아 여기저기 다니기도 합니다. 또 일인분이 몇 만원, 몇 십만원씩하는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기도 합니다. 혹은 몇 만원짜리도 수두룩한데 굳이 몇 십만 몇 백만 원짜리 옷을 입기도 하고, 그저 삼십여평만 되어도 충분할 것 같은 데 굳이 몇 십 평짜리 집에 살면서 온갖 비싸고 좋은 것들로 장식을 하고 호화롭게 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들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일까요? 어떤 분들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 돈 잘 벌어서 내 돈 가지고 내가 쓰는데 왠 잔소리냐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능력도 지혜도 여건도 환경도 상황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필요이상으로 크고 화려한 곳에서 살며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과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므로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적 능력이 있어도 적당한 수준에서 검소하게 의식주생활을 하면서 내 영광과 내 기쁨을 위하여 사용하는 그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뭐 기타 지식이나 권력이나 지위나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은 드리고,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사용하고, 이웃을 위해서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남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우리도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가장 기본적으로 먹고 마시는 일 조차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말을 할 때나 공부를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직장 생활을 할 때나 결혼을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대전제를 잊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고 여러분도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남을 세워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일 중의 하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그건 다름 아니라 남을 세워주는 자 즉 남에게 힘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과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가져다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인데 어떻게 그 귀한 존재를 아프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겠습니까? 또 그렇게 서로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고 넘어지게 하면 서로가 얼마나 힘들겠으며 또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서로 사랑하고 세워주고 위로하고 힘을 주고 하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지겠으며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겠습니까?

 

오늘 32,3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남을 걸려 넘어지게 만들고,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는 자가 아니라 기쁨과 위로를 가져다주는 자라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뭐 당연하지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세워주고 위로하고 힘을 주고 유익을 줄때에 우리 모두가 함께 복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내 식구나 남의 식구나 할 것없이 누구라도 걸려서 넘어지게 하고,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자가 아니라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의무이고 그게 우리가 서로 행복한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반대로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오직 자기 영광을 위하여 남을 넘어뜨리고라도 자신의 유익을 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기치고 도적질하고 싸우고 때리고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줄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헐뜯고 싸우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입니까? 이건 우선은 교인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막는 행위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이런 우를 범하지 말고 서로 정말 사랑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들이 사랑과 진리와 의 안에서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자신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정직하고 모범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아픔을 주는 자가 아니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이 사회를 아름답게 세워가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우리들도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영혼구원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남을 가장 유익하게 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머니가 아니라 복음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익한 것입니까? 물론 생명이지 않습니까? 온 천하를 얻어도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으며 이보다 기쁨과 유익과 은혜를 주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33절 다시 보십시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어찌하든지 남을 유익하게 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여 구원의 길로 이끌라는 말씀입니다. 즉 남에게 유익을 주는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만약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먹을 것을 주고, 입혀주고, 병을 고쳐주는 일들은 그것대로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기에 그런 일도 중요하고 당연히 해야할 일이지만 그러나 단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남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에 보다 더 관심과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가운데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누려야 할 영적,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은혜도 누리다가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인생을 전인적으로 영원히 유익하게 하는 일이요, 행복하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사순절과 대강절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평소에도 해야할 일이고 또 평소에 사랑과 거룩과 진실과 선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그 선하고 아름답고 의로운 모습을 보면서 주님품으로 오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결정적으로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게 하고 예수님 믿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목적이요 이것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유익과 기쁨과 은혜를 주는 일이요. 이것이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해드리는 길이요, 이것이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가장 풍성하게 누리는 길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시기 바랍니다.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의 유익을 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열심히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려 드리는 가운데 여러분도 더욱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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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랑의 십자가

말씀 : 마27:38-44


1.우리의 저주를 대신한 주님의 십자가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사실은 저주의 상징입니다. 끔찍한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저주받은 십자가가 교회의 상징이 되었습니까? 말할나위없이 우리의 저주를 대신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지옥의 저주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고전1:18에서는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 즉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는 것만이 우리를 모든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는 유일한 능력이요 힘이요 지혜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슨 다른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다면 예수님인들 왜 십자가를 지고 싶으셨겠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그 저주받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다른 무슨 방법으로 인류의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돈으로 할까요? 지식으로 할까요? 과학으로 할까요? 윤리도덕으로 할까요? 다른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오직 죄없고 흠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모릅니다. 아니 자신들이 죄가운데 있다는 사실 조차 모릅니다. 다 자기가 잘나고 똑똑하다고 옳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죄와 무지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모르고 천국이 있네 없네, 아무거나 믿으면 좋은 데 가네 마네하며 떠듭니다. 누구 맘대로 그럽니까? 참 안타깝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반대로 이 놀라운 생명의 비밀을 알고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다행이고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겸손히 동행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 놀라운 은총을 입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감사하고 영광돌리고 찬양해야 하는 것을 말할 것도 없고 동시에 죄를 미워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놈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까? 그 놈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놈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죄를 가까이 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죄를 혐오하고 멀리해야 되겠습니까? 정말 그렇잖아요? 그 놈의 죄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가게 되고 지금 여기서도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받게 되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으시려고 그 끔찍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흉악하기 짝이 없는 죄를 가까이 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하면서 좀 걱정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끔찍한 죽음을 당하심으로 생명을 얻었는지를 망각하고 마치 구원이 거저 얻어진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 못하니까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거저 얻어진 것은 귀한 줄을 모릅니다. 귀한 줄을 모르면 감사할 줄도 모르고 또 가치 없이 막 써버립니다. 그래서 부자집 자녀들은 돈 귀한 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흔전만전 써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가 얻은 이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주어진 것인지를 알면 절대로 우리가 얻은 구원을 조금이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거나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여 죄를 가까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짜 안 그래요? 여러분, 여러분은 온갖 썩은 냄새와 똥냄새가 풀풀나고 구더기가 들끓는 그런 더럽고 추하고 혐오스러운 곳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또는 사자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며 대드는데 그곳으로 가까이 가겠습니까?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죄는 이보다 더 더럽고 악하고 사납고 흉악한 것인데 어찌 그것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그래서 약4: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사순절 특별히 오늘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그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주님께 정말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동시에 정말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오직 주님을 가까이 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기억할 때에 우리가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온갖 저주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주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 온갖 저주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난과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사실을 몰랐으면 몰라도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그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당하셨는지, 그리고 처절한 고통을 통해서 주신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줄 안다면 우리가 어찌 생명의 역사를 위한 일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너무나 끔찍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로마의 병정들이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쓰러지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혀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육체적 고난 뿐 아니라 주님은 온갖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당했습니다. ①로마 병정들은 사정없이 때린 후에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침을 뱉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하면서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②유대종교지도자들은 눈을 가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뺨을 치며 너를 친 자가 누구인지 알아맞혀 보라면서 조롱했습니다. ③불과 며칠전만 해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환호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④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있을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⑤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는 강도들도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모욕했습니다. 이런 참혹하고 끔찍하고 처절한 고통을 통하여 우리 죄가 용서되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놀라운 은혜를 입은 우리는 백번 천번 만번 죽어도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하지 않습니까? 또 그냥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면서 그 은혜만을 누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서 주님이 그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얼마나 처절한 고통을 당하신 것을 안다면 어찌 그냥 편히 앉아 은혜만 누리고 있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6:24절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정말 백번 죽고 또 죽어도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도 주님의 그 거룩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게 주님의 은혜를 덧입은 자의 마땅한 의무이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이고 우리 자신이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입니다.

물론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마귀사탄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죄와 무지 가운데서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인본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참여하려면 이러한 모든 마귀사탄의 역사와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올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며 육신의 안일함과 평안함과 즐거움만을 향하여 가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보다는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받쳐야 합니다. 열심히 모여 깨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전도도 해야 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덧입은 자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복되고 고귀하고 영화로운 삶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자신도 정말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누리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정말 복되고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또 오늘 성찬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이 당하신 그 처절한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주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죄를 멀리하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며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위에 생명의 역사를 아름답게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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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말씀 : 갈5:16-24

1.육신의 지배 속에 사는 인생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살인사건, 성폭행사건, 폭력사건, 강도사건... 또 국가 간에도 전쟁과 억압과 착취와... 심지어 옛날에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노예를 삼아 짐승처럼 부려 먹기도 하고.... 하기야 요즘에 보니까 어떤 섬에서는 외국인들을 데려다가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임금도 제대로 안주고 부려 먹기도 한다는 군요. 하기야 남나물 콩나물 할게 뭐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편이 갈라져 쌈박질이나 해대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왜 비 인간적이고 비 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육체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혼이 심각하게 병이 들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 육신의 소욕의 노예가 되어 인간이하의 삶을 영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19-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마땅히 영혼이 마음과 몸을 다스리며 아름답고 가치있게 살아가야 하는데 정신과 영혼이 죽어 있어 육신의 지배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온갖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체’라는 단어입니다. 이 육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savrx(사르크스)인데 이 말은 단순히 육체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몸과 더불어 거기에 깃들여져 있는 어떤 육체적, 정신적 욕망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라고 말할 때 육체의 일이란 단순히 몸으로 하는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바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한 것 등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인생에게 발생되는 문제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일들이 저질러지고 있느냐하면 우리 인간이 육신의 정욕에 지배당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마땅히 육신과 정신이 영혼의 지배를 받아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영혼이 죽어 있어 육과 정신이 미쳐서 엉뚱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인간으로서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기쁨과 고귀함을 누리지 못하고 무가치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인생은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21절 하반절 보세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어떻게 된다고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영혼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다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로봇은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 안에서 움직일 때만이 올바른 기능을 하게 됩니다. 로봇을 구성하고 있는 몸체들이 제작자가 구성한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때에 로봇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가 고장나 로봇의 몸체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이 로봇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고쳐서 쓸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끝까지 말썽을 부리면 폐기처분 당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몸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 움직일 때 인간은 올바르게 제 기능과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되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고장난 로봇과 같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음행과 술수와 우상숭배와 원수 짓는 것과 분쟁과 술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수많은 죄악들이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이 문제의 핵심이 육체의 소욕이 영혼의 지배를 떠나 제멋대로 움직이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결코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삶이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주셨던 그 순수한 영혼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혼이 우리의 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올바르게 이끌어 감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가져다 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영혼의 지배를 따라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16,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우리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죄된 본성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를 끊임없이 죄의 길로 내 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에게도 죄된 육신의 소욕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음으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이 죄된 육신의 소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자신 쳐서 복종시켜 성령의 소욕을 따르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지요. 죄된 본성이 우리에게 있고, 그것이 우리를 자꾸만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게 하는데 그러기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하겠는데 그 놈의 죄된 본성 때문에 그게 잘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어찌하든지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워서 죄된 본성을 쫓아내서 그것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는 무엇이 나를 사로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 안에 가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전자에 맑은 물이 들어 있으면 맑은 물이 나오고, 흙탕물이 들어 있으면 흙탕물이 나옵니다. 단물이 들어 있으면 단물이 나오고, 쓴 물이 들어 있으면 쓴물이 나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들어 있으면 사랑이 나오고, 미움이 들어 있으면 미움이 나옵니다. 원망과 불평이 들어 있으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감사가 들어 있으면 감사가 나옵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으면 성령의 행실이 나오고, 세상의 영이 가득차 있으면 세상의 행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17,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육체를 따라 세상의 엉뚱한 것을 따라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니까 당연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잘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성령을 좇아 행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려면 어찌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생활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지배 속에서 의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갈 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과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의 모습.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지배가운데 들어가면 이제는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전에 육체의 지배를 받던 삶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존재, 새로운 가치, 새로운 목표, 새로운 방향, 새로운 방법을 가지고 인생을 영위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삶인 것입니다.

고후5: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나를 억누르고 있던 옛주인 마귀사탄이 쫓겨나가고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새 주인이 되므로 육신의 소욕을 따르던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임하시면 전혀 새로운 인생이 전개됩니다. 과거에는 사탄의 권세 아래서 내가 주인 노릇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사탄이 주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아 내 이성과 지성과 경험대로 살면 내가 왕노릇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대로 행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길로 갔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습니다. 내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했습니다. 세상이 가는대로 갔습니다. 세상의 조류를 따라 흘러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고 죽어라고 그 길이 맞다고 여기며 고집을 피우며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게도 도리어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심지어는 핍박하며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인 바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죄의 노예로 살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은혜의 영이신 성령이 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쫓겨가고 죄의 권세가 물러갑니다. 마귀사탄의 역사로 내 안에 들어와있던 죄와 어둠과 죽음과 권세가 물러갑니다.

그런 죄와 어둠과 마귀의 권세가 물러가니 영혼과 마음과 눈과 귀가 밝아집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바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 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추악한 모습들이 밝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천국과 지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광이 나라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됩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 집니다. 그래서 드디어 생명의 열매,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육신의 소욕을 물리치면 세상의 온갖 죄되고 잡다한 것들이 물러가고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령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열매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거듭남입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알고 믿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 죄사함과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이 핵심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새생명을 얻게 되면 그 새생명을 가진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함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바랍니다.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묵상하며 열심히 찬양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빛의 은혜를 받으려면 빛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을 마시려면 물가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곳으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어디에 임재하십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하는 곳에 임재하시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쓸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았습니까?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말씀을 전할 때에 그 가정에 성령이 임재하지 않았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을 정말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성령충만함을 받아은 생활과 열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임과 동시에 어버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충만 받은 것을 방언받고, 병고치는 은사받고, 예언하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약 거기서 끝난다면 그건 성령 충만 받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지배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당연히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마땅히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부모님 공경이 인간에 대한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입니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제아무리 기도 잘하고 찬양 잘하고 예배 잘 드려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 관계에 대하여 주신 첫 번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며 어찌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다시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성령 충만함은 결코 기도와 찬양과 말씀과 예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의 삶속에 접목시켜야 합니다.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이며 동시에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래로 사람들을 잘 섬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충만히 맺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웃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함께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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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주일오전예배설교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봅시다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시다

말씀 : 벧후3:8~13

 

1.인간은 주인이 아닙니다.

여러분,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세월아 비켜라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여기서 사랑이란 물론 하나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이 아니라 물론 남녀간의 사랑이겠죠. 물론 뭐 나이가 좀 있다고 너무 나이 타령만하지 말고 열심히 사랑도 하고, 활기차게 살아보자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 솔직히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보면 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실은 그 내면 속에는 마음은 청춘인데 나이는 속일 수 없어 애석해하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래를 하면서 나이를 이겨 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거죠. 물론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 나이를 이겨 보려는 마음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별 것 아닌 것에 미련을 두고 늙기 싫어서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 애처롭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하나님 일 하기에 딱 좋은 나인데 그러면 몰라도.... 또 백세인생이라는 노래가 있더라고요.

육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팔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간다고 전해라

구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테니 재촉말라 전해라

백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여러분, 어떻습니까? 재밌습니까? 그런데 이건 올바른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는 노래가 아닙니다. 안 그래요? 누구 맘대로 아직 못가고, 누구 맘대로 알아서 가고, 누구 맘대로 좋은 날 좋은 시에 갑니까? 여러분, 이건 완전히 뉴에이지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노래입니다. 뉴에이지는 새시대란 뜻인데 좋은 뜻으로 새시대가 아닙니다. 완전히 인본주의적인 새시대입니다. 옛날에는 인간이 무지해서 신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제 신에게 속박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우주의 주인으로 인간의 이성과 능력과 지식으로 세상을 지배하며 얼마든지 좋은 세상 만들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열심히 자기를 갈고 닦으면 고차원적인 세계를 누릴 있는데 그게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바로 이런 사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감히 누구한테 못간다고 전합니까? 한번 훅 불면 끝날 존재가 감히 누구맘대로 가고 싶으면 가고 안가고 싶으면 안갑니까? 물론 그냥 좋은 시절 오래살고 싶은 소망이 담겨져 있는 노래라고 가볍게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 노래의 가사를 보면 인간이 자기가 주인이 되어 제맘대로 오래오래 세상 것 실컷 즐기며 잘먹고 잘살고 싶은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뉴에이지적 발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생은 내 마음대로 왔다가 내 마음대로 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와서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진 시간 동안 살다가 언제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할 존재입니다. 눅12:20절 보세요.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또 약4:14절을 보십시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러니까 인간은 정상적인 수명을 누린다해도 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하고 게다가 지금이라도 부르면 꼼짝없이 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저 자기 한몸 잘먹고 잘살기 위하여 제아무리 기를 쓰고 모아봤자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단순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저 자신의 무지하고 왜곡된 생각과 가치관 속에서 자기 육신의 안일함과 평안함과 부귀영화를 위하여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말고 오직 겸손하게 엎드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바르게 삶으로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언제라도 부르시면 할렐루야 찬양하면서 영광의 나라로 가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는 정말 작은 존재요, 세상의 것은 금방 다 썩어지고 없어질 것이요 우리는 곧 하나님 앞에 가야할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과 사랑과 선과 의가운데 주님과 동행함으로 여기서도 진정한 소망과 기쁨가운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은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요, 먼저 오늘 8,9절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니까 세상의 많은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 짧고 보잘것없는 지식과 생각을 가지고 ‘천국도 없고, 주의 재림도 없다.’ 그러는데 지극히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이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다시 오시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오셔서 모든 인류를 심판하시고 믿음 안에서 의를 따라 산 사람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고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진노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주어진 기간들을 오직 믿음과 선과 진실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맞을 준비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시고, 다시 오실 때 우주의 종말이 옵니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시고 믿음을 따라 산 사람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십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영벌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그 짧고 무지한 이성과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이걸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슨 꾸며낸 이야기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인간이 죄와 무지 가운데 있어서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단순히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지식으로 본다면 천국이나 재림이나 지옥이나 이런 것들은 말도 안됩니다. 도무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인간의 이성과 지식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과 과학과 논리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우주의 모든 물질과 경험과 지식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짧은 지식과 경험과 고학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말씀하신 천국과 지옥을 판단하려고 한다면 이건 벌레가 사람을 판단하려는 것보다도 더 어리석고 미련한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예수님이 곧 오실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금방 오신다면 말씀을 기록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10년, 20년, 30년, 50년이 지나도 오시지 않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주님의 말씀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지가 벌써 2,000년이 지났는데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신다 오신다 그러더니 벌써 2,000년이 지났는데 봐라 아직도 안 오시지 않느냐? 그런데 재림은 무슨 재림이냐?’ 하면서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도 역시 인간의 무지몽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 8절 보십시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길어봐야 100년 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천년이 엄청난 시간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순간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기준으로 빨리 오시니, 오시지 않느니 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떠들어대는 우매하기 짝이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눈으로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에 대하여 우리가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그것은 지연이 아니라 주님이 한 영혼이라도 더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9절 말씀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더딘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이라도 멸망의 길로 가지 않고 회개하고 구원받도록 기회를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주님의 때에 주님이 정한 수가 차면 천군천사를 대동하고 큰 나팔소리와 함께 영광 중에 강림하셔서 심판할 자를 심판하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십니다. 그날 결국 우주의 종말이 오고 기존의 질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신천신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는 모든 고통과 아픔과 슬픔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24:30절에 보면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그 짧고 무지하고 한계속에 있는 생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과 은혜와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다시 오실 때에 할렐루야 찬앙하며 영광을 돌려 드리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을 알고 믿고 살아야 하고 그렇게 주님의 재림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을 것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경건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일단은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당연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가려면 거룩한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거룩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님 믿고 옛 자아가 죽고 거듭나 천국백성이 되면 마땅히 천국백성의 삶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인데 거듭났다고 하면서 옛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 믿고 거듭나 생각과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까? 목적과 방향이 다른데 세상 사람들과 같이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11절에서 말씀하시 ㄴ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즉 예수님이 오실 것이고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이 건설될 터인데 이것을 알고 믿는다면 거룩하고 경건함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면 하나님이 욕을 먹게 되고, 교회가 조롱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우리가 도리어 하나님 나라의 문을 막고 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거룩하게 아름답게 진실하게 의롭게 살아가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도 세상에서 인정받고 귀히 여김 받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도 저절로 이루어 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2:1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올바른 예배생활 가운데 진실하게 성실하게 의롭게 선을 행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하게 쓰임 받으며, 주께 영광을 돌려 드리며, 사람들에게도 감동감화를 줌으로 그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는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잘했다 칭찬받고 상급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 소망을 두고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사모합니까? 좋은 것을 사모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좋지 않을 것을 바라고 사모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그야말로 오직 영광과 기쁨과 은혜만이 가득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야말로 지상낙원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거기에 소망을 두고 감사와 기쁨과 희망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12,1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여러분, 정말 당연하지 않습니까?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의 진정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소망이요 기쁨이요 행복이 아닙니까? 정말 도대체 세상의 무엇이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겠습니까? 물론 세상에도 그런대로 상대적으로 좋은 것도 있고 사모할 것도 있고 바라볼 것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행복과 기쁨을 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정말 별거 아닙니다. 온전한 생명의 기쁨을 주지도 못하고 그나마 잠시잠깐후면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그런 걸 바라보며 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게다가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진정한 소망과 위로와 기쁨과 평안을 주는 곳은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말할 것도 없이 그저 세상의 것에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죽자 사자 그것만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들에게 인생을 바치게 되고 세상의 것들의 노예가 되어 참된 행복과 안식도 누리지 못하고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는 불쌍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 그 나라를 향하여 하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삶을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얼마든지 이기게 됩니다.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도 않고, 모든 욕심과 욕망과 원망 불평 미움 근심 걱정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물질과 사람과 세상 영광과 명예와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설령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조차도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진정하고 영원하고 완전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가 주인공이고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을 따라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댄다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고집대로 물질주의 이기주의에 빠져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산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머잖아 오시든지 아니면 내가 먼저 주님 품으로 가든지 이제 곧 우리는 주님 앞에 서게 되고, 그 때에 행한대로 심판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거룩하게 의롭게 진실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혹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세상의 모든 것들은 머잖아 종말을 고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소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그 소망으로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도 말고 진정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므로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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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세상을 이기는 믿음

말씀 : 시27:1-6

1.진정한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러분,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큰 소리를 치며 유럽대륙과 러시아와 이집트까지 정복했던 나폴레옹은 키가 157Cm 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는 그 보다 조금 큽니다. 그래봤자 그야말로 도토리 키재기이지만.... 그런데 여러분, 이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은 자신의 작은 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키는 땅에서부터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부터 재면 제일 크다.’고 말입니다. 그는 이런 자신감과 당당함으로 큰 소리를 치며 세계 정복에 대한 꿈을 가지고 결국 유럽대륙과 러시아와 아프리카까지 정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며 승승장구했던 나폴레옹도 별 수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 유명한 워털루전투에서 영국과 프러시아의 연합군에게 비참하게 패하게 되는데요, 여러분, 나폴레옹이 워털루전투에서 패한 이유가 어떻게 보면 아주 웃긴다고 합니다. 그는 만성 위궤양이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심한 변비가 생기가 되었고, 변비 때문에 치질에 걸리게 되었고, 심한 치질 때문에 말을 타기가 힘들어 전쟁에 나갈 때는 항문 주위에 마취제 주사를 맞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워털루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하필 치질이 너무 심하여 전쟁을 2시간가량 늦추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영국을 지원하는 프로이센군이 합류하여 나폴레옹은 아주 강력한 마취제를 투여하고 전쟁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부적인 마취제였지만 너무 강력한 마취제를 맞아 정신이 좀 몽롱한 상태에서 지휘를 하다가 그만 힘도 못쓰고 패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큰소리를 쳤던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이 그 놈의 치질 때문에 결국 쓰디쓴 패배를 당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초라하게 생을 마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패한 다른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겠지만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큰 소리쳤던 나폴레옹도 치질 하나도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권력이든 부귀영화든 아무리 크고 높고 대단해봐야 별거 아닙니다. 아무리 대단한 영웅호걸이라도 금방 늙고 병들고 결국 죽습니다. 제아무리 큰 권세라도, 제아무리 천하 없는 부귀영화라도 금방 썩어지고 없어지고 그야말로 물거품과 같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립니다. 또 사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도 별거 없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행복에 겨워 죽을 지경인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이 별로 없다고 맨 날 슬프고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도 아닙니다. 있는 자나 없는 자 때론 웃고 울기도 하고, 때론 평안하기도 하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도 있고 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벧전1:24,25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육체는 풀과 같이 연약해서 금방 스러질 것이요, 그 영광도 풀의 꽃과 같이 곧 시들어 질것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 약속 안에서 주어지는 영광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풀과 같이 시들어 버릴 세상의 것들 바라보고 의지하고 거기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별 것 아닌 것들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고 낙심하고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별것 아닌 것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찮은 것들에 얽매어 믿음 생활도 제대로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안 그래요? 그거 뭐 사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뭐 좀 많이 가졌으면 어떻고 좀 적게 가졌으면 어떻습니까? 그게 뭐 인생의 행복을 좌우합니까? 아닙니다. 행복은 결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분명코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백만원 수입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천만원 수입으로도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눅12:15절에서도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인생의 행복이 결코 세상의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오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와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물질과 상황과 환경을 초월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총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하나님의 전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온전히 누리려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며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려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지요.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고,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자연히 세상의 사람이나 환경이나 상황이나 돈이나 명예나 혹은 죄와 마귀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게 되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빛의 은총을 누리려면 빛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선하고 아름답고 능력 있는 사람을 가까이해야 뭔가 유익한 것을 얻지 않겠습니까? 더럽고 추하고 악하고 사납고 흉악한 사람을 가까이하면 얻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공기가 오염된 공간에 머물면 어떻게 됩니까? 오물과 썩은 것들이 잔뜩 쌓여 있는 공간에 머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선하고 아름답고 능력과 지혜가 충만해서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존재를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그런 존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밖에 무엇이 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영원한 복을 주겠습니까? 누가 우리에 영원한 소망과 위로를 주며, 누가 우리를 영원히 온전히 지켜 줄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아 누렸던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할 만큼 믿음을 인정받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놀라운 은총을 누릴 있었던 것은 물론 저절로 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을 간절히 사모하며 가까이 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에 틈만 나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아니 틈만 나면이 아니라 틈을 만들어서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그 말씀을 그리워하며 늘 묵상하였고, 그래서 말씀의 맛이 꿀과 송이 꿀보다 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능력과 은혜를 받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했는지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참 놀랍지 않습니까? 다윗이 정말 간절히 원하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 영호와의 집 곧 성전에 살면서 여호와를 사모하며 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이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는지 교회에서 사는 게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에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부귀영화 누리면서 사는 것도 소원이 아니요, 자식이 잘되고 자식 자랑하며 자식 덕 좀 보며 사는 것도 소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누리는 것, 이것이 딱 한 가지 유일한 평생의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인지요? 자식이 잘되는 것입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입니까? 나라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더욱 발전하여 온 국민들이 평안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것입니까? 서로 사랑과 은혜를 나누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좀 더 고상하게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돕고 희망과 위로를 주며 사는 것이 소원입니까? 물론 당연히 그런 소망들도 가져야 합니다. 저도 그런 소망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소망은 결코 온전한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곧 사라지고 썩어지고 없어지고 결국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그런 것들이 이루어져도 우리에게 온전한 행복을 주는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영원히 온전히 생명의 기쁨을 주는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소망,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자 하는 소망만이 진정으로 영원토록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누리게 하는 복되고 고귀한 소망인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까? 무엇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습니까? 무엇이 정녕 우리를 영원토록 온전하게 행복하고 평안하고 자유하고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습니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돈도 명예도 지식도 과학도 권력도 우리에게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과 사랑과 평화와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하고 온전한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도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해서 기쁨과 은혜와 행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지식과 능력이 없어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 수 있게 하는 소망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합3:17,18절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시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없어도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 완전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을 이기게 하십니다. 세상의 환경과 상황과 조건도 이기게 하십니다. 모든 마귀사탄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와 지옥의 권세에서 승리케 하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는 물론 지금 여기서도 분명히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의 기쁨 가운데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공연히 우리에게 진정으로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주지 못하는 세상의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위하여 살면서 그것에 끌려 다니면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구원과 생명과 진리와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모든 상황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이와 같이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욱 큰 믿음과 능력과 은혜를 주셔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하나님께도 인정받고 세상 영광도 누리며 하나님의 역사도 이루어가는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여러분, 참 대단한 신앙고백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빛이시고 구원이시고 생명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기시는 것은 물론 우리에게도 힘과 능력과 은혜를 주셔서 모든 것을 이기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이 계신데, 그런 하나님을 믿는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으며, 낙심되고 한탄하고 불평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다윗이 이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은 결코 상황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오늘 시27편 전체 말씀을 보면 다윗은 결코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6절에 보면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원수 위에 들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또 9절에서는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말아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뭔가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까지 몰린 것입니다. 또 12절에서는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나를 치려고 하오니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위경에서도 한탄 원망 불평 불신 근심 걱정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하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빛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시고 빛이신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빛을 비춰주셔서 은혜를 주실 것인데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근심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윗은 이것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렇게 큰 믿음과 능력으로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위험과 유혹과 죄와 왜곡된 가치관과 악한 것들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지혜는 어디 나왔습니까? 물론 하나님께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까? 물론 성전에서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만큼 하나님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 달다고 할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그 수많은 전투와 도전과 위험 속에서도 찬양하는 생활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더욱 큰 믿음과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주심으로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위기와 유혹 앞에서 요동하지 아니하고 의연하게 헤쳐 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또 시56:11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이라도 여전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걸 잘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의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성이 뭔가 둔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영성을 풍성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집이며 주님의 몸인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럴 때 능력이 임합니다. 은혜가 충만해 집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지혜의 영으로 충만해 지게 됩니다. 그러면 마귀사탄 따위가 역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의 유혹과 핍박이 우리를 어찌 할 수 없게 됩니다. 때론 하나님께 직접 보호하여 주심으로, 때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것을 넉넉히 이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세상 모든 것을 이기고 영원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이제 이후로 더욱 교회를 가까이 함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인도와 보호 가운데 세상의 모든 시험이나 유혹이나 환난이나 핍박이나 기타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주님의 권능으로 이기고 승리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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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생기 넘치는 인생 (Sunday Sermon)

말씀 : 창2:4~7

제목 : 생기 넘치는 인생

 

1.생기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생기가 넘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이나 행동에 활력이 있고, 생동감이 있고, 얼굴이 밝아야 하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걸어 갈 때에도 활기가 넘쳐야 하고, 찬송도 좀 힘차게 기쁨에 넘친 모습으로 부르고, 예배를 드릴 때도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할 사람들입니다. 계22:5절을 보십시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보세요.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왕노릇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만 왕노릇하고 지금 여기서는 거지 노릇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만 왕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벧전2: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보세요. 우리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왕같은 제사장이 뭡니까? 제사장은 제사장인데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겁니다. 왜 제사장입니까?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며 거룩한 모습으로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제사장이기도 합니다.

그럼 왜 왕입니까? 일단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왕인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인 우리는 왕자이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로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비롯한 모든 어둠의 세력들과 상황과 환경과 사람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왕같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생명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혹시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를 좀 힘들게 하는 일들이 있더라도 성령의 능력으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무엇이냐, 너의 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이기느니라하면서 큰소리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빌4:1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보십시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힘센 장수라도 내가 힘이 없어 못 당하면 그 장수보다 힘이 열배나 강한 장수를 데려오면 이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그러니 하나님이 내 편이시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왕성한 생명력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활기차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힘차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씩씩하게 용감하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좀 힘들어도 까짓것 힘들면 얼마나 힘들겠느냐하면서 당당히 맞서 싸우며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어느 부모가 자녀가 조금 힘들다고 죽을상을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근심 걱정 탄식하며 세상 다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한숨이나 푹푹 내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자녀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그러나 자녀가 좀 힘들어도 당당히 맞서 싸우며 활기차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놓이고 대견스럽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로써 하나님의 백성,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시민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더욱 활기차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뭔가 마음과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있어도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미 이겼고, 또 이후로 다가올 모든 어둠의 세력들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며 활기차고 용감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생기를 충만하게 공급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활기찬 삶을 살려면 생명의 에너지를 충만하게 공급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뭔가를 이기려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뭔가를 힘차게 움직이게 하려면 그것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우리 앞에 있는 벽을 무너뜨리려면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 있든지 장비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또 자동차가 힘차게 움직이려면 기계적 성능도 좋아야 하지만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기름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인생도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장벽을 무너뜨리고 더 나아가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힘차게 달려가려면 그렇게 달려가게 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허우대만 좋다고 벽을 무너뜨리고 힘차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벽을 무너뜨리고 힘차게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육체에 힘을 주는 양질의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체에 필요한 영양소들이 육체에 공급이 되고 일부는 산소와 만나 산화작용을 일으키면서 신체 각 부분에 에너지를 공급함으로 비로소 몸에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앞에 놓여져 있는 벽을 무너뜨리고 힘차게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올바르게 깨끗하게 아름답게 진실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올바르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정신적인 양식을 충분하게 계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윤리적 도덕적 철학적 교육도 받아야 합니다. 올바르고 진실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것들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계속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올바른 인격형성에 필요한 에너지를 계속 공급받아야 비로소 올바른 인격을 갖추어 어려움도 이겨내고 선과 진리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태를 보면 이런 올바른 인격에 필요한 에너지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죽어라고 부자 되고 높아지고 편하게 쉽게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기술만 공급합니다.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맨 날 공부 잘해라. 1등해라. 높아져라. 돈 많이 벌어라. 이런 따위 들입니다. 그래서 고작 한다는 인사가 부자 되라는 것입니다. 그게 최고의 축복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라고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가지고 노는데 게임들이 대부분 싸우고 죽이고 빼앗고 정복하고 높아지고 폭력적이고 선정적이고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것들입니다. 그렇게 늘 폭력적 선정적 이기적 배타적 물질적 에너지만 공급되니까 사람들이 결국 폭력적 선정적 이기적 배타적 물질적 성향이 강한 인생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며칠 전 뉴스에 보니까 열일곱살배기 소년이 스물한살날 친누나를 칼로 수차례 찔러 중상을 입혔는데 이 소년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폭력적인 컴퓨터 게임을 주로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그날도 4시간동안 폭력적 게임을 한 후에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 폭력적 에너지만 잔뜩 공급받으니까 인성이 마비되고 아름답게 사랑하며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게 하는 에너지는 점점 줄어들고 폭력적 부정적 반항적 에너지가 자꾸 축적되고 그런 부정적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는 자율신경이 제 기능을 잘 못하게 되니까 그런 끔찍한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생명을 아름답게 하고 깨끗하게 하고 참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귀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영적으로는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자연인은 그러지 않아도 죄로 말미암아 영성이 거의 죽어있기 때문에 영혼에게 생명을 주고 올바르고 진실하게 아름답게 거룩하게 감사와 기쁨으로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에너지를 듬뿍 공급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뭡니까? 그게 바로 오늘 7절에서 말씀하는 생기입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만들 때에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물론 흙으로 만든 육체는 생명도 기쁨도 감격도 능력도 없는 그냥 흙덩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생명력 없는 흙덩이가 어떻게 살아 움직이게 되었습니까?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생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생기가 뭡니까? 영적 육체적 정신적 생명력을 가지고 살게 하는 생명의 기운입니다. 그러면 생령은 뭡니까? 살아있는 영혼, 즉 생명과 기쁨과 감격과 은혜와 사랑 속에서 뭔가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영혼인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 즉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축복과 희망과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살게 하는 그 생명의 기운이 우리가 가운데 들어올 때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고 그 생기가 충만해 지면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생들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이 생명의 에너지를 거의 상실함으로 하나님께서 본래 주셨던 생명의 은총이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끝내 이것을 회복하지 못하는 인생은 영원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과를 도말하시고 나아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사기(死氣) 즉 죽음의 기운을 제거하고 생기(生氣) 즉 생명의 기운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고 따르는 자들은 생기가 다시금 우리 영혼 속에 들어옴으로 진정하고 영원한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믿고 그 생기를 받았다고 하는 우리들조차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도리어 축 처져서 살 때가 많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살지 못하고 도리어 근심 걱정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도리어 미워할 때가 많습니다.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가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니며 심지어 악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거룩하고 의롭고 고귀한 삶을 살지 못하고 도리어 추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를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충만하게 공급받아야 하는데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만 받아 그나마 다행으로 죽지는 않았는데 생명의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육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육신이 계속해서 왕성하게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밥을 먹어야 하는데 한번 먹는 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육신을 힘 있게 움직이게 하는 생명의 에너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영양가 높은 음식을 공급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또 식물도 잘 자라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려면 식물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데 필요한 수분과 영양분이 떨어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영혼도 그런 것입니다. 영혼이 생명을 유지하고 왕성하게 움직여서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생기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충만하게 공급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혼에 생기가 있고 힘차게 움직이고 그래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생기를 계속해서 공급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예배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신앙적 행위가 먼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요, 나아가서는 우리 영혼이 정말 생기 있게 풍성하게 아름답게 힘차게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는 영적인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일이요, 생명의 산소를 공급해 주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시1:1,2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래서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하신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 영혼에 양질의 양식을 공급할 때에 죽어있는 영혼들이 살아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기로 가득차고 그러면 그 생명의 에너지가 우리 속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솟아나게 하여 생명력이 넘치게 나아가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게 힘차게 나아가게 함으로 생명의 풍성하게 맺게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 속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데 어찌 그 삶이 힘차게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심령가운데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평강과 소망의 기운이 넘치는데 어찌 그 삶이 활기차지 않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생명과 진리와 선의 에너지가 넘치는데 어찌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지 않겠으며,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때에 어찌 생명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그러한 생명의 에너지를 풍성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교회에 열심히 나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쓸 때에 생기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생기의 통로를 막고 있는 찌꺼기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우리는 생기가 충만한 곳을 가까이해야 하는데 그때에 한가지 더 유념해야 할 것은 생기가 흘러들어오는 통로를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기를 받는데 방해가 되는 찌꺼기 같은 것들을 제거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생기가 넘치는 곳을 찾아와도 그 생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좁아져 있거나 막혀 있으면 어떻게 생기를 충만하게 받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심장이 아무리 힘차게 펌프질을 해서 피를 내보내도 혈관에 진득진득한 것이 달라붙어 있어서 혈관이 좁아졌거나 막혀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수지에 아무리 물이 가득해도 수로가 막혀 있으면 어떻게 논에 물을 대겠습니까?

영적으로도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아무리 생기가 가득해도, 그래서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생기를 공급해 주는 교회를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우리 영혼에 생기를 공급하는 통로가 좁아져 있거나 막혀 있으면 생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거나 두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조금 밖에 들어오지 못하면 근근이 생명을 유지한다해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요, 만약 완전히 막혀 있다면 그 영혼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우리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찌꺼기들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찌꺼기가 뭡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이 죄와 무지와 어둠 속에 있는 세상에 살면서 굳어진 왜곡되고 잘못된 생각들과 가치관과 경험과 지식과 인본주의와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왜곡된 가치관으로 말미암아 우리 심령 속에 자리잡고 있는 시기나 질투나 거짓이나 분노나 염려나 이기심이나 이런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생기의 통로를 막아버리는 찌꺼기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생기가 영혼 속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좁게 만들거나 막아버림으로 생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생기를 충만하게 받으려면 그 생기를 받을 수 있는 교회를 열심히 찾는 것과 더불어 그러한 모든 왜곡된 경험과 지식과 이성과 욕심과 악과 미움과 그 밖의 모든 왜곡된 가치관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6:24절에서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고, 엡4:22절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얼마나 죄와 무지와 어둠과 한계 속에 있는 존재인지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존전에 열심히 찾아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찾아 나오되 내 생각 이성 경험 지식 다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주님의 생기가 충만하게 영혼 속에 흘러들어옴으로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은혜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기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생기 넘치는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 도 )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하심에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이다.

그러하오나 주님이시여, 저희가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여 주님께서 주신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온전히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나이다. 오, 주님이시여,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진실로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생기의 통로를 막고 있는 모든 인간중심적인 생각들, 물질만능주의적인 사고들, 그로 인한 모든 욕심과 시기와 질투와 모든 어두운 모습들을 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섬김과 겸손의 삶으로 생명의 통로가 활짝 열려 하나님의 생기를 충만하게 덧입어 온전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며 이 땅 모든 이들에게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소망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축 도) 이제는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운을 막고 있는 모든 세상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주님의 생기를 충만하게 덧입어 주님의 그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그 생명의 기쁨을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과 저들의 가정과 저들의 경영하는 모는 일들 위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인도 교통 역사 충만케 하시는 은사가 이제로 영원까지 함께 하시옵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봉헌기도) 영화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이 아름다운 계절, 이 생명력이 넘치는 계절을 우리에게 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총을 덧입어 이 생명과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시오니 영광과 존귀를 돌리나이다.

오 주님이시여, 지금 이 시간 우리가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며 적은 예물 드리나이다. 주님의 그 은혜와 사랑과 인도하심에 감격하여 믿음으로 예물 드리는 손길 위에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것 거룩히 구별하여 십일조 예물 드리는 손길위에 더욱 축복하셔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더욱 풍성하고 강건한 은총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며 감사예물 드리는 손길에도 복을 주셔서 더욱 감사와 은혜가 가득한 복된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예물을 통하여 주님의 생명의 역사가 더욱 힘 있게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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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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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성령을 좇아 행하라(갈5:16-24)

제목 :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말씀 : 갈5:16-24

1.육신의 지배 속에 사는 인생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살인사건, 성폭행사건, 폭력사건, 강도사건... 또 국가 간에도 전쟁과 억압과 착취와... 심지어 옛날에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노예를 삼아 짐승처럼 부려 먹기도 하고.... 하기야 요즘에 보니까 어떤 섬에서는 외국인들을 데려다가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임금도 제대로 안주고 부려 먹기도 한다는 군요. 하기야 남나물 콩나물 할게 뭐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편이 갈라져 쌈박질이나 해대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왜 비 인간적이고 비 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육체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혼이 심각하게 병이 들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 육신의 소욕의 노예가 되어 인간이하의 삶을 영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19-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마땅히 영혼이 마음과 몸을 다스리며 아름답고 가치있게 살아가야 하는데 정신과 영혼이 죽어 있어 육신의 지배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온갖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체’라는 단어입니다. 이 육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savrx(사르크스)인데 이 말은 단순히 육체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몸과 더불어 거기에 깃들여져 있는 어떤 육체적, 정신적 욕망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라고 말할 때 육체의 일이란 단순히 몸으로 하는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바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한 것 등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인생에게 발생되는 문제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일들이 저질러지고 있느냐하면 우리 인간이 육신의 정욕에 지배당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마땅히 육신과 정신이 영혼의 지배를 받아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영혼이 죽어 있어 육과 정신이 미쳐서 엉뚱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인간으로서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기쁨과 고귀함을 누리지 못하고 무가치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인생은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21절 하반절 보세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어떻게 된다고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영혼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다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로봇은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 안에서 움직일 때만이 올바른 기능을 하게 됩니다. 로봇을 구성하고 있는 몸체들이 제작자가 구성한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때에 로봇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가 고장나 로봇의 몸체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이 로봇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고쳐서 쓸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끝까지 말썽을 부리면 폐기처분 당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몸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 움직일 때 인간은 올바르게 제 기능과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되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고장난 로봇과 같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음행과 술수와 우상숭배와 원수 짓는 것과 분쟁과 술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수많은 죄악들이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이 문제의 핵심이 육체의 소욕이 영혼의 지배를 떠나 제멋대로 움직이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결코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삶이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주셨던 그 순수한 영혼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혼이 우리의 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올바르게 이끌어 감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가져다 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영혼의 지배를 따라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16,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우리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죄된 본성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를 끊임없이 죄의 길로 내 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에게도 죄된 육신의 소욕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음으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이 죄된 육신의 소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자신 쳐서 복종시켜 성령의 소욕을 따르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지요. 죄된 본성이 우리에게 있고, 그것이 우리를 자꾸만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게 하는데 그러기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하겠는데 그 놈의 죄된 본성 때문에 그게 잘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어찌하든지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워서 죄된 본성을 쫓아내서 그것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는 무엇이 나를 사로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 안에 가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전자에 맑은 물이 들어 있으면 맑은 물이 나오고, 흙탕물이 들어 있으면 흙탕물이 나옵니다. 단물이 들어 있으면 단물이 나오고, 쓴 물이 들어 있으면 쓴물이 나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들어 있으면 사랑이 나오고, 미움이 들어 있으면 미움이 나옵니다. 원망과 불평이 들어 있으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감사가 들어 있으면 감사가 나옵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으면 성령의 행실이 나오고, 세상의 영이 가득차 있으면 세상의 행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17,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육체를 따라 세상의 엉뚱한 것을 따라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니까 당연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잘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성령을 좇아 행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려면 어찌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생활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지배 속에서 의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갈 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과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의 모습.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지배가운데 들어가면 이제는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전에 육체의 지배를 받던 삶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존재, 새로운 가치, 새로운 목표, 새로운 방향, 새로운 방법을 가지고 인생을 영위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삶인 것입니다.

고후5: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나를 억누르고 있던 옛주인 마귀사탄이 쫓겨나가고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새 주인이 되므로 육신의 소욕을 따르던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임하시면 전혀 새로운 인생이 전개됩니다. 과거에는 사탄의 권세 아래서 내가 주인 노릇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사탄이 주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아 내 이성과 지성과 경험대로 살면 내가 왕노릇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대로 행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길로 갔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습니다. 내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했습니다. 세상이 가는대로 갔습니다. 세상의 조류를 따라 흘러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고 죽어라고 그 길이 맞다고 여기며 고집을 피우며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게도 도리어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심지어는 핍박하며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인 바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죄의 노예로 살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은혜의 영이신 성령이 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쫓겨가고 죄의 권세가 물러갑니다. 마귀사탄의 역사로 내 안에 들어와있던 죄와 어둠과 죽음과 권세가 물러갑니다.

그런 죄와 어둠과 마귀의 권세가 물러가니 영혼과 마음과 눈과 귀가 밝아집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바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 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추악한 모습들이 밝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천국과 지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광이 나라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됩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 집니다. 그래서 드디어 생명의 열매,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육신의 소욕을 물리치면 세상의 온갖 죄되고 잡다한 것들이 물러가고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령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열매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거듭남입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알고 믿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 죄사함과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이 핵심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새생명을 얻게 되면 그 새생명을 가진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함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바랍니다.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묵상하며 열심히 찬양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빛의 은혜를 받으려면 빛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을 마시려면 물가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곳으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어디에 임재하십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하는 곳에 임재하시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쓸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았습니까?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말씀을 전할 때에 그 가정에 성령이 임재하지 않았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을 정말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성령충만함을 받아은 생활과 열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임과 동시에 어버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충만 받은 것을 방언받고, 병고치는 은사받고, 예언하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약 거기서 끝난다면 그건 성령 충만 받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지배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당연히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마땅히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부모님 공경이 인간에 대한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입니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제아무리 기도 잘하고 찬양 잘하고 예배 잘 드려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 관계에 대하여 주신 첫 번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며 어찌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다시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성령 충만함은 결코 기도와 찬양과 말씀과 예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의 삶속에 접목시켜야 합니다.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이며 동시에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래로 사람들을 잘 섬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충만히 맺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웃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함께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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