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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주일낮예배설교 /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말씀 : 엡2:1~9

제목 : 지극히 풍성한 은혜

1.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토끼가 길을 가다가 함정이 있어서 내려다보았더니 함정에 빠져 며칠을 굶어 다 죽어가는 늑대 한마리가 제발 나 좀 구해달라고 애걸복걸을 합니다. 그러자 토끼가 너를 구해 주면 날 잡아 먹을 것이 아니냐며 거절을 하자 늑대는 어떻게 생명의 은인을 잡아먹을 수 있겠느냐며 그런 배은망덕한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제발 한번만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토끼는 늑대가 너무 불쌍해서 기다란 나무를 내려 주어 늑대는 겨우 함정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함정 밖으로 나온 늑대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더니 나는 지금 너무 배가 고파 다른 사냥감을 구하기도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너라도 잡아먹어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토끼가 세상에 생명의 은인을 잡아먹는 이런 배은망덕한 일이 어디 있느냐며 따졌지만 도무지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여우가 지나가기에 토끼가 여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판결을 좀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우는 정확한 상황을 알아야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으니 처음부터 상황을 재현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늑대가 함정에 뛰어 들어가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함정에 빠져서 이러고 있을 때……” 그러자 여우는 늑대의 말을 조금 듣다가 말했습니다. “너는 거기서 계속 갇혀 있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토끼와 함께 떠나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뜻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배은망덕한 자가 되면 도로 함정에 갇힌 늑대와 같은 신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는 바로 함정에 빠진 늑대와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죄와 무지의 깊은 함정 속에 빠져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무지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그 죄와 무지의 함정, 지옥의 함정에서 우리를 건져 주신 것입니다.

오늘 1~3절을 보십시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보십시오. 우리가 과거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공중 권세 잡을 자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삶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끔찍한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의 현주소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겨 찾아와 주시고 구원해 주심으로 이제는 반대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영원토록 할렐루야 찬양하고 감사하며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는 특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다행입니까? 얼마나 은혜에 보답하며, 얼마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실상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나마 죄가운데 빠져 자연 상태로는 허물과 죄로 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와 그 죄의 함정 속에서, 사망의 함정 속에서, 지옥의 함정 속에서 건져 주셔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갈 뿐 다른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말 그대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졌는데,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었는데 다른 무슨 필요한 것이 있겠습니까? 물론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것들이 있는 있죠.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렇게 대단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은 이미 있어야 할 만큼 주셨습니다. 그러면 됐지 우리가 뭘 그렇게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구원받아 거꾸로 영광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기억하며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리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과거의 우리의 상태는 어땠습니까? 어떻게 그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까? 이 엄청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2.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의 모습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는 참으로 처참한 인생이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1절을 다시 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죽음은 물론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 즉 둘째 사망입니다. 즉 지옥에 처할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랬느냐? 허물과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허물이란 미끄러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허물은 의도적으로 잘못한 것이 아니라 실수로 잘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죄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목적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부합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모든 것들이 곧 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허물과 죄란 고의든 실수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모든 생각과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는 모두가 이런 죄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궤계에 빠진 이후로 인간에게 대물림하여 내려온 원죄로 자연인으로의 인간은 누구도 이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허물과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제 아무리 법 없이도 살 만한 천사 같은 사람이나 성인군자라도 허물과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생의 도와 목적을 알 수도 없고, 알아도 그것을 따라 살아갈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은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그 허물과 죄가운데 있는 인생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앞에서 보았던 2,3절을 다시 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에 보면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이 살아가는 모습 세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세상 풍조를 따른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이고, 세 번째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풍조를 따른다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의 물결 따라 유행 따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와 선과 의가 인생이 살아가야할 방향이요 목적이요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은 뒷전이고 그냥 당장 눈에 보기에 편하고 좋고 유리한대로 세상의 물결을 좇아 흘러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풍속이 다 나쁘고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는 좋은 전통도 많고 미풍양속도 많습니다. 나름대로 진리와 선과 의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사실 세상의 문명의 이기나 문화나 과학이나 예술이나 스포츠나 우리가 함께 공유하고 누리고 따라가야 할 것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세상에는 너무나 왜곡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을 추구하며 인본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자기 마음과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을 따라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는 모습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눈에 좋게 보이고 유익이 되고 기쁨이 되고 편하고 자유를 줄 것처럼 여기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코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과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 생명의 은총을 빼앗아 가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삶에 대하여 계속 경고를 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죄와 무지속에 있는 대부분의 인생들은 이걸 모르고 자기가 보기에 옳은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세상의 대세가 되어버리고, 대세가 되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자유의 길, 평화의 길을 버리고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리에서 구원받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더 이상 그런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들이 따라가고 있는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이 아니라 세상 많은 사람들이 달려가는 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의롭고 바른 것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거기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결코 세상의 물결을 따라, 유행을 따라,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말씀안에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공중권세 잡을 자를 따른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마귀를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세상 풍조를 따르는 모든 것이 마귀를 따르는 일이지만 특별히 여기서는 온갖 종류의 우상을 섬기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인생은 얼마나 우지하고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을 합니까?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떡을 하면 제일 먼저 한 접시 담아서 장독대로 가서 항아리 위에 올려놓곤 했습니다. 또 달에게 빌고, 해에게 빌고, 나무에다 빌고, 마을 앞 한길을 지나다가 마귀 어귀에 있는 서낭당에 돌을 하나 쌓고 가곤 했습니다. 나무를 베면 귀신이 노해서 화를 당한다고 나무도 못 베고, 못도 아무데나 못 박고, 결혼이나 이사도 제 맘대로 못 다니고 귀신한테 물어보고, 사랑하는 자녀의 이름도 제 맘대로 못 짓고 귀신한테 물어보고....... 얼마나 무지몽매한 일입니까? 이게 바로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귀신을 섬기고 있는 어리석은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꼼짝 못하고 종노릇하다가 결국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게 되니 이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생의 모습입니까?

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진리니 생명이니 의니 정직이니 성실이니 이런 것들은 뒤로 밀려나 있고 오직 육체의 욕심을 채우는 길로 달려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게 동물과 다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게 뭡니까? 영이 있고 이성 즉 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은 영적인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해서 섬길 자를 섬기고 버릴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성은 정신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옳은 일을 택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육신은 우리의 영과 혼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그런 영과 이성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오직 육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영과 이성이 없는 동물과 같은 삶이고, 하나님의 고위한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생이 짐승과 같은 삶을 산다며 결국 하나님에게서 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6:3절 하반절에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육신이 되었다. 이미 육신을 가지고 있는데 뭘 또 육신이 됩니까? 영이 완전히 죽어 오직 육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겨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젠가 뉴스에 보니까 강원랜드 카지노 주변에서 집에도 못가고 빌빌 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7천명인지 몇 명인지 된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카지노에서 도박으로 보통 몇 억씩 날린 사람들인데 그래서 집에 가지 못가고 가족도 가정도 다 잃어버리고 쪽방 같은데 살며 식당 등에서 일하며 겨우 먹고 살면서 그나마 돈 몇푼 모이면 또 카지노에서 다 날리고 그러면서 산답니다. 참 기가 막힌 노릇 아닙니까? 이게 바로 영과 이성이 마비된 인생들의 모습이지요. 어디 이 뿐이겠습니까? 영과 이성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육신과 물질의 종이 되어 온갖 짓들을 다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고 과거에 바로 그런 자들이었는데 이제는 거기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과 혼의 지배를 받으며 주님과 동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 이상 세상 풍조를 따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감으로 더욱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인생

여러분, 우리는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할 것 뿐이고 영광 돌릴 것 뿐입니다. 우리는 정말 죽을 때까지 아니 영원토록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며 살아도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앞에서 말씀드린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벗어나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종 말씀드리지만 얼마나 다행입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만약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끔찍하고 몸서리가 처지지 않습니까? 여러분, 앞에서 보았던 3절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는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니 얼마나 두렵고 끔직한 말씀입니까? 어떤 분들은 별로 느낌이 없는 것 같은데 여러분, 상상해 보기도 싫은 일이지만 상상해 보십시오. 이 몸이 죽고 싶어도 영원히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야 된다면 그 고통과 아픔과 비참함과 끔찍함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이걸 무슨 상상 속의 이야기라고 착각하는데 천국과 지옥은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 상황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반드시 둘 중의 한 군데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거기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냥 불구덩이에서 구원받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반대되는 세상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완전히 영원히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행복과 만족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만이 넘치는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무슨 잘나고 똑똑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입니다.

오늘 5절과 8절 말씀 보겠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5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절) 여러분, 이게 웬 떡입니까? 웬 은혜입니까? 웬 사랑입니까? 웬 축복입니까? 우리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그럴만한 공로가 있습니까? 그럴만한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까? 그럴만한 선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과대로 갚으셨다는 우리는 속된 말로 찍소리도 못하고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작은 믿음 하나 보시고 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며 그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 위하여 애써야 하겠습니까?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아주 유명한 시조가 있지 않습니까? 먼저 이방원이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누구의 세상인들, 세상이 어떠한들 그게 뭐가 중요하냐? 그냥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나와 손잡고 100년의 권세를 누려봄이 어떠하냐? 뭐 그런 정도의 뜻이겠지요. 그러자 정몽주가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를 지어 답을 하지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이 몸이 백번을 죽어도, 백골이나 넋이 있든 말든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은 변할 수 없다는 거죠. 그리고 결국은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철퇴에 맞아 순교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잠시잠깐 세상에 왔다가 사라져 갈 세상의 임금을 위한 충신의 자세가 이러하다면 영원토록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은혜를 입은 임금의 은혜를 이와 같이 죽음으로 갚았다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구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이 엄청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이 귀한 말씀을 묵상하며 정말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얼마나 엄청난 은혜를 받은 존재인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정말 세상의 왜곡된 풍조나 공중권세 잡은 자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만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 때에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로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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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요20:11-15

제목 : 내가 하리이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첫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몇 명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에 일어난 일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날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기 위하여 무덤을 찾아갔습니다.(막16:1) 왜냐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 오후여서 안식일이 시작되는 그날 저녁까지 장례를 마치기 위하여 너무나 서둘러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에 향유도 제대로 발라드리지 못하여 너무나 안타까워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덤 입구를 막아놓은 돌을 굴려낼 걱정을 하면서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어찌된 영문인지 무덤 문은 이미 열려져 있었고 깜짝 놀라 들어가보니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마음이 아파 울고 있는데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그러자 마리아는 사람들이 주님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해서 운다고 말하는데 이때 뭔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자 놀랍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마리아는 자기 앞에 나타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게다가 예수님의 모습도 신령한 몸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그곳을 지키는 동산 지기인 줄 착각하고 당신이 옮겼으면 어디 두었는지 알려주면 내가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까지의 말씀을 보았는데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특별히 15절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주님을 진정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리아는 진정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예수님 무덤가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이 말씀은 주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이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때의 상황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유대종교지도자들로부터 신성모독죄로 혹은 이단자로 몰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힐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성모독에다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준 권위에 도전하는 자로 간주하여 괘씸죄까지 추가되어 가장 극악한 죄수를 사형시키는 십자가의 사형을 언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율법을 파기하는 이단의 괴수요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역자 취급을 받고 가장 끔직한 십자가의 처형을 받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모든 실권을 쥐고 있는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잘못 보이면 자신도 무슨 봉변을 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짐짓 예수님과 관계없는 사람 행세를 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상황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다시 장례를 잘 치러준다는 것은 결국 반역자를 돕는 것입니다. 반역자를 돕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도 반역자 편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면 자신에게도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주저함 없이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혹시 불이익을 당한다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용감하게 주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도 바로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어찌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정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마다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주님은 나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하여 그 몹쓸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희롱과 고통과 아픔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영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그 끔찍한 고난을 당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지상명령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한다면,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찌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마22:37,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보세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하면 뭐하겠습니까? 주님을 진정 목숨처럼 사랑한다면 어찌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만났다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몸된 교회를 사랑한다면 정말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해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기 부인과 헌신과 섬김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위하여 끔찍한 죽음을 당하셔서 생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길이기에, 그것이 주님이 생명을 주시면서까지 이루시기를 너무나 원하셨던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길이기에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운데 살게되고 주님의 역사는 아름답게 이루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로서 주님께 대한 사랑과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대한 소망으로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할 때에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또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 대로 그때의 정황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불리한 정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반역자요, 이단자라는 죄명으로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후환이 두려워서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다시 장례를 치러주는 사람에게는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주님이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혹은 복음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무덤가를 찾아간다는 것이 큰 위협이나 걱정거리로 생각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그 무덤을 찾아갔을 때는 상황이 전혀 달랐습니다. 부활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당시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서슬이 시퍼렇게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찾아 핍박하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례를 치러주고 돌본다는 것은 어떤 고통과 불이익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용기와 각오와 결단이 없으면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용기 있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시신을 내가 가져가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환난과 핍박과 후환과 불이익이 있더라도 오직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오직 주님을 조금이라도 잘 모시기 위한 생각으로 내가 그 일을 하겠다고 용기 있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두려움과 걱정 염려를 물리치고 주님을 찾게 되었고 내가 가져가겠다고 말씀했고 그래서 결국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고 은혜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물론 당연히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정말로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세상에서 혹시 환난과 핍박이 있어도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안에 생명이 있는데요, 그 안에 영생복락이 있는데요, 거기에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는데요, 어찌 세상에서 좀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고 그걸 피하겠습니까? 어찌 세상에서 조금 불이익이 있다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한다면 진리를 위하여,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용기와 결단을 가지고 거기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고, 그것이 복된 일이고, 그것이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일이고, 그것이 우리가 자신이 진정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만나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16:24,25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진정으로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생각과 이성과 환경과 상황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약해지지 말고 오직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진정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진정한 용기와 결단력으로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할 때에 주님의 역사를 이루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르게 섬기려면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있어도 누가 뭐래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나는 내게 주신 이 귀한 사명,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내게 맡긴 이 일에 충성을 다겠다는 책임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과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사명을 감당하고 그래야 진정으로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5절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이와같은 책임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15절 하반절만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여기서 내가 가져 가겠다는 이 말은 곧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당신이 혹시 치웠다면 나에게 주십시오. 내가 그분을 잘 모시겠습니다. 내가 책임지고 비록 시신이나마 제가 돌보고 안식하도록 최선의 조치를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주십시오하는 뜻인 것입니다.

여러분,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넘쳐나고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드물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정승이 살았을 때는 뭔가 잘 보여서 유익을 얻을까하여 조그마한 일에도 열심히 그 집을 찾아 가지만 막상 정승이 죽으면 자신에게 별로 득 될게 없으니 멀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 병든 자, 메시야 왕국을 바라는 자, 진리에 갈급한 자 등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반역자로 몰려 돌아가시게 되자 그 많던 사람들도 어디론가 다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냥 자취를 감춰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데 한패가 되어 예수님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도망갔을 때 그녀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남들이 별로 거들떠보지 않는 예수님의 시신을 친히 모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온다고 해도 예수님의 이 시신을 자신이 돌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져가겠노라, 곧 내가 책임지겠노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어도, 남들이 잘 안하려는 일이지만 내가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일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일 자체로 보아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니고 더더구나 자칫하면 커다란 불이익이 올 수도 있는데 누가 기꺼이 하려고 하겠습니까? 남 보기에 좋은 일, 고상한 일, 깨끗하게 차려입고 폼 나게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나마 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궂은일은 뒤로 빠지기 쉽습니다. 궂은 일, 어려운 일, 힘든 일을 남에게 미루고 무언가 그럴듯하게 자신이 드러나는 일만 하려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뭔가 폼나고 재미있고 대접받고 드러나고 영광받고 하는 일만 한다면 그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그건 그저 자기 만족 자기 기쁨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기 힘든 일, 남들이 꺼려하는 일, 궂은 일을 하는 것이 진정한 헌신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조건이 나쁠 때, 힘들 때, 부족할 때, 연약할 때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랑이 위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면서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좋은 조건을 보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서 무언가 많은 것을 얻어 보려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에게 인간적으로 무슨 큰 영광이 되고 명예가 되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를 사랑하는 일에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참혹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기꺼이 지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정말 주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세상에서 혹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주님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깨끗하고 폼나고 그럴듯하고 남 보기에 좋은 일이 아니더라도 비록 인간적으로는 좀 꺼려지고 힘들고 하찮은 것처럼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일에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헌신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러한 사명들을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기와 결단력을 가지고 책임감있게 주님의 교회를 섬길 때에 여러분의 삶도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주님의 거룩한 역사도 힘있게 이루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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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주일 낮 예배 설교 (Sunday worship preaching)

 

 

 


향기로운 신앙인격


성경/(삼하1:1-16).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음으로 맡을 수 있는 향기가 있습니다. 그런 향기를 주위에서 맡으며 살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향기가 되어서 주변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아주 짙은 사랑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다윗의 신앙인격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 중이었고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직접 이 전쟁을 지휘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멀리 시글락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 도중에 사울 왕과 아들 요나단이 전사 하게 됩니다. 한 아멜렉 소년이 다윗에게 달려와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보여주며 그간에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보고했습니다. 다윗이 그 소식을 듣고 옷을 찢으며 슬퍼했고 이를 본 백성들도 함께 슬퍼하며 울고 또 금식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은 조가를 지어 저들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다윗의 신앙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짙은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1. 관용의 향기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왕의 시종이 되어 왕궁에 들어가게 되면서였습니다. 악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울 왕을 위해 주의 신에 감동된 다윗이 수금을 타서 악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처음에 좋은 관계로 시작이 되었습니다(삼상16:14-23).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전쟁마다 승리하면서 백성들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서서히 사울의 질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삼상18:7-8). 사울은 다윗에게 딸 미갈을 줄테니 블레셋 사람 백명의 양피를 가져오라 했습니다. 블레셋과 싸우다 죽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백 개 뿐 아니라 백 개를 더 가져왔습니다. 할 수 없이 딸 미갈을 주어 사위로 삼았지만 사울은 다윗을 심각한 정적으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울은 여러 차례 다윗을 죽이기로 음모를 꾸몄지만 번번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로인해 다윗은 10여 년간 사울을 피해 기나긴 유랑생활을 고단하게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사울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이제 고달픈 도피생활을 끝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의 전사 소식을 듣자마자 옷을 찢고 슬퍼하며 울었고 금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적으로 생각했지만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집요하게 뒤쫓고 있는 사울을 적으로 생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관용이라는 말은 타인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용서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참고 또 참아야 했습니다. 관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향기가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관용하는 사람들에게서 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2. 사랑의 향기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절친한 친구 사이지만 다윗은 새로운 왕으로 부상하고 있는 차세대 지도자였고,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왕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변함없이 순수한 사랑으로 우정을 이어갔습니다. 삼상 20:17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요나단이 자기 생명처럼 다윗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나단은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이 일로 사울이 요나단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도록 다윗을 지켜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윗도 요나단을 진정한 친구로 대했습니다. 삼상 20:41을 보면 요나단이 자기가 숨어있던 곳까지 와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요나단에게 세 번 절했고, 서로 부둥켜안고 크게 울었습니다. 정말 힘들 때 다윗은 요나단을 의지했습니다.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조가를 지어 이렇게 애통해 했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상하 1:26). 다윗은 왕이 되자 요나단을 생각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불구가 된 므비보셋을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자기 자식처럼 자기상에서 함께 식사하게 했고, 종과 일군들을 붙여주었고, 사울의 재산도 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향기로운 우정은 다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진실했습니다.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상황입니다. 요나단과 다윗 은 우정을 맺을 수 없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이런 상황을 뛰어넘어서 진실한 우정을 나눴습니다.
둘째, 섬기는 사람입니다. 사울의 뒤를 이어 요나단은 왕이 될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도록 예정된 사람입니다. 왕의 자리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로 섬기는 마음으로 권세에 대한 탐욕을 뛰어넘어 우정을 맺었습니다.


셋째,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우정은 처음 만날 때부터 수많은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이어졌습니다. 요나단이 죽은 뒤에도 그 우정은 지속되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우정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상황이라는 장벽, 이해타산이라는 장벽, 그리고 시간이라는 장벽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변함없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다윗과 요나단 같이 언제나 사랑의 향기가 풍겨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겸손의 향기입니다.
본문을 보면 아말렉 소년이 사울의 전사 소식과 그의 왕관과 팔찌를 가져왔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큰 상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우연히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투 자리에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사울 왕이 블레셋 군사들과의 싸움에서 크게 다쳐 자기에게 죽여 달라 청했다는 것입니다. 그 청을 받고 자기가 사울 왕을 죽였고 왕관과 팔찌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소년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하면 다윗이 자기의 공을 인정해서 큰 상을 내릴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소년을 그 자리에서 당장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14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하나님의 종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사실 다윗에게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삼상 24장을 보면 다윗이 엔게디 굴에서 혼자 잠자고 있던 사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겉옷만 베었습니다. 그리고 그 옷자락 벤 것만으로도 마음에 찔려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6절을 보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을 존중한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를 죽이러 온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기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를 죽인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겸손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존중하는 그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을 기름 부어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들의 권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의 권위는 그들의 인격이나, 그들의 능력이나 또 그들의 도덕적 의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의 종들을 존중하되 그들을 보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 때문에 그들을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그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보고 그것 때문에 존중한다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를 존중할 수 있기 바랍니다. 허물이 있어도,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심지어 나와 입장이 달라도 그래서 나를 비난해도 그를 존중할 수 있기 바랍니다. 다윗에게는 변함없는 사랑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향기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기뻐하며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향기가 나기를 바랍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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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예배 설교 ] 복된 만남을 위하여

 

 

 

 

말씀 : 눅10:30-37

제목 : 복된 만남을 위하여

1.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태어나서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의하여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도 잘 만나면 좋습니다.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와 게다가 인품까지 좋은 부모를 만나면 자식의 삶이 평안하고 부요하고 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술주정뱅이에다가 인품까지 고약한 부모를 만난다면 자식의 삶이 험난할 것입니다.

물론 배우자도 그렇죠. 그런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와 출중한 외모와 훌륭한 인품을 가진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쥐뿔도 없는데다 성품까지 고약한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삶이 힘들고 고달플 것입니다. 물론 친구나 이웃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면 많은 유익과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고약한 사람을 만나면 정말 피곤하고 힘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물론 다 기왕이면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야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좋은 사람이 못되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면 속된 말로 도둑놈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소위 황금율이라 불리는 마7: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당연하잖아요? 나는 남을 대접해주지 않으면서 나는 남에게 대접받으려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내가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데 누가 나를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 대하겠습니까? 나는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배우자에게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말 만남이 중요하므로 여러분도 좋은 분을 만나되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씀으로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만남이 되어 서로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2.남에게 끔찍한 불행을 준 사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 말씀에 보면 자기는 좋은 것을 누리려고 하면서 남에게 너무나 끔찍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주는 아주 나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오늘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러분,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입니까? 서로 생명을 살려주고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어도 시원찮을 판에 이 무지 몽매한 강도는 돈 몇푼 얻으려고 다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심지어 다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강도는 잘먹고 잘살려고 이런 몹쓸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정말 행복과 기쁨과 가치를 가져다주겠습니까? 뭐 빼앗은 것을 사용할 때에 잠시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그 심령이 평안할 리도 없고 성령 평생 그 짓을 해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할지라도 평생 동안 온갖 비난과 욕을 얻어먹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아가는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한 인생에 불과한 것이요, 결국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너무나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과 상처는 어떻겠습니까? 물건을 빼앗겨 물질적으로 많은 손해를 본 것은 고사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받았고,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후의 삶도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이 미련한 강도의 짓은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게 만드는 심히 어리석고 무지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또 크든 작든 또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나 절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하나님께도 책망듣고, 사람들에게 욕먹고 멸시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무시당하는 어리석고 무지하고 더럽고 추하고 볼품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 해야 할 것은 내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시에 나 스스로가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론 때론 불가항력적인 불행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그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구하며 그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데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마음에 새기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자기 마음대로 왜곡된 길로 잘못된 길로 다니다가 마귀의 밥이 되어 봉변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강도를 만난 사람도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에께 끔찍한 고통을 준 강도는 엄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죄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닥 봉변을 당했는데 그 길은 본래 매우 험한 길이라서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우범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길을 가기를 꺼렸고 부득불 가야 할 때는 여럿이 함께 다니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대책도 없이 혼자 그 길을 가다가 그만 봉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우리 인생길 전체에서나 혹은 인생길의 어떤 한 과정에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 나혼자 내 마음대로 하다가는 그런 불행한 일을 만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며 말씀 안에서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생길을 걸어가며 무엇인가를 추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내 마음대로 자신만 믿고 자기 생각대로 주님께서 동행하지 않는 길로, 심지어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길로 가면 자칫하면 이런 봉변을 당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캄캄한 밤길, 으슥한 길에 숨어 있는 강도처럼 숨어 있다가 우리 영혼과 정신과 물질과 육신을 덮침으로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실패나 아픈 기억들이 엎드려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삶을 영위했더라면 대부분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아픔이 아니었을까요? 그냥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길로 자기 마음대로 갔기 때문에 당했던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초한 불행과 아픔과 상처는 아니었을까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불행을 자초했던 것러첨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내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내 마음대로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우리의 완전하고 유일한 보호자이시며 인도자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동행해야 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안전하고 그 길이 복되고 그 길이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자신의 생각과 능력과 경험만을 의지하며 자기 마음대로 다니지 말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따라 겸손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사람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지나쳐간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31절, 32절을 보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 강도를 만난 사람은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때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이 사람을 못 본척하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당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걸 접촉하면 자신도 부정하게 됨으로 피해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금방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아 아직 강도들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보고 서둘러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무언가 급한 일이 있어 이런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이 지체되거나 성가신 일이 생길까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경우든 그들의 행동은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상황이나 안위나 평안함만을 구하는 무지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은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안타깝게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사람은 생명을 구함 받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반대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며 고통 받는 생명을 살림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복된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복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린 정도가 아니라 이건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 아니 굳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림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사람을 직접 해치거나 고통을 주지는 않았지만 마땅히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아픔과 고통을 당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적극적인 악만이 죄가 아니라 소극적 악, 즉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마땅히 선을 행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것도 악입니다. 그래서 약4: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여러분, 보세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하지 않으면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잖아요. 선을 행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가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거나 아픔을 겪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죄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유익을 주어야 할 때에 수수방관함으로 결국 죄를 짓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선과 진리와 의를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며 결국은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준 사람

앞에서는 여러 가지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는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33~3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강도 만나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드디어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하던 중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신속히 응급조치를 취한 다음에 주막으로 데려다가 주고는 치료비까지 내어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자기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고 멋있는 사람입니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강도 만나 다 죽어가던 사람은 새 생명을 얻음은 물론 비록 한편으로는 이 아픈 기억으로 말미암아 힘들 때도 있겠지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의 마음도 갖게 되고 새로운 희망과 소망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은 육체의 생명을 살릴 뿐 아니라 영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는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일을 한 것입니다. 또 사실 그 자신도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는 생명을 사랑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드려 살려 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게 되고 그래서 그 자신도 더욱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만남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던 적이 있다면 환경이나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먼저 스스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구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 내 생각과 경험과 의지와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내 코가 석잔데 남에게 도움을 줄 여유가 어디있느냐며 합리화시키고 변명하면서 하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이제 후로는 먼저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만나 교제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환경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밀접한 만남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주님의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과 마음을 공격하는 마귀사탄의 공격을 물리침으로 절대로 강도 만난 인생이 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강도를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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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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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한 목적

 

 
 
인생이란 미래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벧후 1:1-11

올림픽 경기 제밋게 보고 보시나요?   지난시간 우리들도 올림픽 선수들처럼 인생을 경주 선수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도핑검사에 걸려 출전 정지를 당하고 메달을 탔어도 박탈되는 것을 말씀 드리면서 신앙생활도 하나님의 뜻하신 법대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는 심판 날에 주님의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하나님의 뜻이 뭣이고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에 관한 문제요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잘 듣기를 바랍니다. 이것에서 틀어지면 모래위에 탑 쌓은 것 같이 잘못된 신앙생활 하는 것이 되기에 여러분이 지금까지 알고 믿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여러분 나름대로 인생이란 뭣과 같은 것이라며 지금까지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사람들일지라도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남들처럼 사는 거지 인생이 별거냐 하면서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인생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하늘에 상급을 쌓을 수 있는 시간임을 알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이미 갓난아이란 출발지를 떠나 여기까지를 달려왔다. 는 사실인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에게 ‘야들아, 인생이란 이런 것이란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생이란 항해하는 것과 같고 경주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항해하는 것과 같고 경주하는 것과 같다.  그렇습니다. 언젠가 배가 항해를 떠나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 것이고 시합이 시작되면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정한 시간이 오면 판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란 것입니다. 출발이 있고 골인지점이 있고 마감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언젠가는 인류전체에게 ‘스톱, 이젠 끝났다. 지금부터는 심판의 시간이다.’라고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최후 심판은 엄정하고 공평해서 천국과 지옥을 나누며 천국 갈 자중에서도 상급이 다르며, 지옥 갈 자중에서도 형벌이 다를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구절 하나만 들라면 히브리서 9장 27절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꼭 알아야 할 것을 성경에 기록하여 놨습니다.

그 중에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했는가? 그 이유를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서 창조하였다고 창세기 1장에 이유를 밝히고 있으며,  2장에서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유의 한계를 말하고 있으며 3장에서는 첫 인류가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말하고 왜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법을 어겼을 때 어떻게 되었지요? 첫째 범법자가 되어 버렸고 범법자에게 따르는 죄악의 값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를 맛 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죄 범한 인생들이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서로 뺏고 뺏기는 싸움을 싸우고 있고, 병들고 늙고  약해져 가다가 죽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하나님과는 단절되고 죄악을 다스리는 자 악한 마귀가 그 인생을 장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고 계속 죄를 지면 악한 마귀와 함께 영영 지옥 불에 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범한 인생들에게는 죄를 없이 해주시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행복했던 에덴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아니 그보다 더 귀한 자리를 주시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창세기 3장 15절에 말씀하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4장과 5장에서는 죄 범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하나님이 원하는 올바른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으나 가인은 자기 맘대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 은총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마귀가 그 마음을 장악한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어떤 예배를 드려야만 되는 지를 말하고 있으며, 6장에서는 홍수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는 노아에게는 심판에서 피할 길이 있음과 비록 하나님의 아들들일지라고 자기들 보기에 좋다고 사람의 딸들을 취하는 자들과 하나님을 경외치도 않고 악행을 저지른 자들에겐 심판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10장은 세계 민족과 나라가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가? 를 보여 주고 있고 11장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나라가 어떤 것임을 보여주고 있고 12장에서는 하나님을 믿으려면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아브라함이란 사람을 통해 보여주고,  출애급기부터는 하나님의 택한 민족과 세상나라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그리고 인류의 마지막은 어떻게 마감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 구약 성경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고 받아드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해야만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려고 창조했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심판을 하신 뒤에 하나님께서 계획한 하나님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라고 기록한 것이 신약 성경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란 사실과 자신의 형상과 모습으로 우리 사람을 만드신 분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이 여러분과 저 그리고 모든 인류들이 저지른 죄- 그 죄란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고 섬기지도 않으며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제 마음대로 살았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대신 형벌의 죽음이란 것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죄를 면제 받으며 원래 신분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려고 창조했던 신분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게 하시는 분으로 알고 믿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되고 믿어야 되는 기독교의 핵심 내용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한 목적과 마귀 때문에 죄에 빠져 범법자가 되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을 알아야 만이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런 말인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뭣인지를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궁극적인 하나님아버지 뜻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며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가 어떤 것임을 알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디모데 전서 2장 4절에 말하고 있고, 요한복음 6장 40절에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아버지의 뜻은 예수가 누군지를 알고 믿어 하나님께서 본래 계획했던 하나님나라에서 살 수 있는 영생을 얻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육신만이 전부인지를 알고 사는 사람들은 한 마디로 불행한 사람들이요 안타까운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법을 어기면 얼마나 불행에 빠지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통하여 용서를 받고 하나님나라를 다스릴 신분이 회복이 되었으니 이제는 예수님 말씀대로 법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된다고요? )

그래서 예수님은 수많은 비유를 통해서 어떻게 해야 만이 다가오는 하나님나라에서 영광된 자가 되며 기업을 얻을지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하나만 가지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에서 복된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8가지 심령의 상태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3장은 비유를 말씀한다고 해서 비유-장이라고 하는데 어떤 자들이 천국에서 복된 자들임을 이 비유 말씀을 통해서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장 25장을 통해서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자들 중에 어떤 자들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실 영광의 자리를 얻을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의 가르친 것대로 살면 주님께서 함께 할 것이고 주님께서 오셔서 시작할 나라, 하나님나라에서 복된 자들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지 땅에서 세상에서 잘되고 영광을 누리고 형통한 자가 된다고 하신 구절이 한 구절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신약 성경의 서신 서를 통해 우리 육신이 사는 것은 다가올 하나님나라, 영생의 나라에서 복을 받을 수 있는 준비하는 기간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목사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믿는 대로 될 것이고’ 세상에서 부와 귀와 공명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은 잘못된 가르침인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 시대에 주시려는 복과 예수님이 오신 신약 시대의 복의 차이를 알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 법도들을 지키며 땅에서 그들에게 복 주시겠다고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신 약속인 것이고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와 약속한 말씀이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들에게 하신 약속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처럼 사는 자들에게 땅에서 누리는 잠깐의 복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될 하나님나라에서 천사들이 부러워할 복, 시들거나 쇠하지도 않는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해서 하나님나라 기업을 주시되 열 고을도 다섯 고을도 주시고 예수님과 같이 하늘과 땅을 다스릴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성령으로 오셔서 함께 하시되 우리 안에 계시며 보혜사가 되셔서 어떤 일에도 평안할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요한복음 14장 26에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고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함께 할 것이니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담대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전천후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의를 먼저 구하기만 하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이라고 했고,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은사들을 주시며 지혜를 주시겠다고 하셨으며 어떤 일 앞에서도 두렴이  없도록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교회들과 하신 약속이란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은 땅에서는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어떤 핍박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도록 하시는 심령의 복을 주시고, 예수님이 오실 때 하나님이 계획한 엄청난 하늘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말할 때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맺은 약속은 왕과 백성과의 약속이라고 하고, 교회와 약속하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되는 약속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 하나님이 여러분의 왕이 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를 세운다고 할 때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셨는데도 그걸 모르고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약속, 육신적인 복, 세상 적인 복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주님이 왜 세상에 왔는지 왜 교회를 세우려고 하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한 때 번영주의, 기복주의 미국교회 영향을 받고 예수 믿고 잘 살고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잘못되게 가르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걷은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온데간데없고 너도 나도 예수님을 잘 되겠다고 하는 믿음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땅의 복을 구한 제자들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들은 영원한 나라에서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처럼 핍박 받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며 주님께서 자신 안에 성령님으로 함께 하심을 알기에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사함으로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하여 죄의 탕감을 받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과 함께 살며 아버지의 나라 하나님나라를 다스릴 엄청난 복을 받았다면 주님을 위해 어떤 고난이라도 참고 헌신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이 땅에서의 삶은 선수들이 장래에 메달을 바라보고 노력하듯이 영원히 사는 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집중하여야 하며, 인내하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삶이란 경주를 하는 삶과 같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상을 받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방해하는 것들이 어떤 것들임을 알고 피할 줄 알고 달려야 된다고 여러 차례 말씀 드렸던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이런 사단의 방해 공작들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여러분 깨어서 정신 차려야 할 땝니다. 여러분들이 더욱 성경을 읽으시되 특히 말세에 대해서 기록된 것을 많이 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예배에 생활에 더욱 힘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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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제목 :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말씀 : 마7:12

1.기독교의 황금율

오늘 말씀은 기독교의 황금율이라고 일컬어지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을 황금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3세기의 로마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라는 사람이 이 말씀에 감동을 받고 황금판에 새겨 서재에 걸어 놓고 늘 음미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은 예수님을 잘 믿어서 이 말씀을 황금판에 새겨 서재에 걸어 놓고 이 말씀을 묵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교도 곧 우상숭배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말씀을 너무나 귀하게 여겨 황금판에 새겨서 걸어놓고 늘 묵상하며 대중 앞에서 연설할 때나 재판을 할 때 이 말씀을 종종 인용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상숭배자가 이 말씀을 황금율로 여겼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해야 할까요? 안 그렇습니까? 물론 주님의 말씀이 다 황금보다 귀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도 얼마나 지당하고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하며 서로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간다면 우리 모두의 삶이 얼마나 서로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이 곧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이 선지자가 말씀하고 율법에 기록된 말씀의 근간이요, 핵심이라는 말씀이지요. 이것도 당연하지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아래로 사람들 간에 서로 사랑하며 귀하게 대접하면서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이게 말씀이 곧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22:37-40절에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도 사실 같은 말씀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나 대접하는 것이나 같은 말씀이죠, 사랑하면 대접하고, 진실로 대접하면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 말씀도 서로 대접하라는 말씀과 같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대접하는 것, 이것이 곧 율법이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두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안다며 위로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섬기고 대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그래야 합니까?

2.우리 모두가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고 대접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함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전에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유없이 해야 되지요. 안 그래요? 우주만물의 주권자시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명령인데 이유고 뭐고 따질 일이 뭐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아니라면 아닌 줄 알고 무조건 순종해야지요.

그러나 물론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을 때 왜 이유가 없겠습니까? 물론 많은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우선은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사랑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러분, 이 말씀 제일 앞에 보면 ‘그러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즉 앞에서 무슨 내용을 이야기하고 그런 이유로 어떻게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학생이다. 그러므로 공부해야한다. 나는 성도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와 같이 앞에 있는 내용이 이유가 되어 뒤에 있는 행동을 꼭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으니까 남을 대접해야 할 이유가 그 앞에 나와 있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앞의 말씀 1~11절 전체 말씀인데 특별히 2절과 11절에 잘 나타나 있는데 먼저 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즉 네가 남을 비판하면 너도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니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네가 남을 대접하지 않으면 남도 너를 대접하지 않을 것이니 네가 대접을 받고 싶다면 네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대접이란 먹을 것을 사주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도 사랑받고 존중받고 귀히 여김받고 인격적인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가 남을 무시하는데 상대방이 나를 존중하겠습니까? 내가 욕하는데 상대방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겠습니까?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겠습니까? 내가 남을 비방하고 깎아 내리는데 누가 나를 높여 주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높여주면 그 사람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려면 서로 대접하되 내가 먼저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11절에 보면 우리가 서로 대접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같이 보겠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줄 안다면 선한 나는 너희에게 얼마나 좋은 것을 주겠느냐? 그리고 실제로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귀히 여겨서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다. 너희가 먹고 입고 잠자며 활동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거저 주었고, 나아가 독생자까지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귀하게 대접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너무나 귀한 대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거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해서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삶의 터전을 삶고 있는 땅, 세상에 빛을 주고 따뜻하게 하여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태양, 물, 공기, 각종 동물이며 식물들, 지혜와 능력과 이성, 게다가 하나님의 아들로 대접해주셔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셨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뭐 잘나고 똑똑하고 선하고 의롭고 거룩해서가 아니라 그냥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아들 대접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아무 공로없이 귀한 대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웃을 귀하게 여기고 높여주고 대접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올바른 인간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한편으로는 서로 대접하는 것이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리고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과분한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정말 사랑하고 아끼고 귀히 여기며 서로 대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누구를 어떻게 대접해야 합니까?

3.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대접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대접해야 하는데 그 전에 먼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려야 합니다. 앞에서 보았던 마22:37,38절 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여러분, 보십시오. 첫째 계명이 뭡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도 그냥 대충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께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이고 의무이며, 진정 영원하고 완전한 능력과 사랑과 지혜의 하나님, 완전한 선과 진리와 의이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예우이며 바르게 대접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거룩과 의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십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우주만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분이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간적으로 제법 똑똑하고 위대하고 선한 모습이 있을지라도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면 정말 한없이 작은 자입니다.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한계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인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셔서 영원한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앞에 겸손히 엎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높고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찌 몸과 마음과 정성과 심지어 목숨을 바쳐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주님께 드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정말 그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며 경배와 찬양을 드리며 우리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섬겨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당연한 태도요, 이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대접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을 바르게 만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릴 때 우리 인생은 비로소 올바른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동시에 사람을 귀히 여기며 서로 대접하며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리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올바르게 대접해 드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자기 생각 능력 지혜 경험대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완전한 주권자이시며 능력자이시며 생명과 진리와 지혜가 되시는 하나님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잘 달려가며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충만히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4.이웃을 사랑하며 대접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대접해 드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는 사람을 바르게 귀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그저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교회만 열심히 섬기는 것만이 거룩한 삶이 아닙니다. 물론 당연히 그러한 삶은 거룩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일이지만 그렇게 예배드리고 말씀듣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알면 당연히 받은 은혜를 삶속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의롭고 깨끗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대접해 드리고 아래로 사람을 대접해주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경건이요, 거룩한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마22:39,40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보십시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두 번째는 이웃사랑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은 레19:18절을 인용하신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있는 레19장의 말씀은 한마디로 성도의 거룩한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즉 레19:2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즉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자녀다. 그러므로 너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다음에 그러면 거룩한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신데 거기에 보면 ‘네 부모를 경외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헛것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를 드리라. 곡물을 거둘 때에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속이지 말라.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두지 말라. 불의를 행하지 말라.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등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고,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거짓과 도적질과 불의를 버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곧 거룩한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깨끗하게 진실하게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마땅한 태도이고 서로가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서로 사랑하고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야 하는데 특별히 여러분, 먼저 가족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며 서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가족은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고 가장 귀한 이웃이 아닙니까? 그러면 먼 이웃도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한다면 가족은 얼마나 더 아끼고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대접하고 존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물론 이웃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가족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대접함으로 서로에게 정말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족 못지않게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대접해야 할 이웃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겠습니까? 물론 성도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성도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형제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똑같은 아버지를 섬기면 형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엡2:19절에서는 하나님의 권속 즉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권속이요, 형제이면 얼마나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대접해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하며 살아간다면 교회에서 얼마나 주님의 향기가 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겠으며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겠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또 얼마나 아름답게 이루어져가겠습니까?

그런데 근간에 보면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높여주고 하지 못하고 도리어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싸우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미워하시는 일이므로 우리는 절대로 그러면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변의 모든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귀하게 여기고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빛을 비추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힘있게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섬기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대접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존중하며 귀하게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을 정말 서로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며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믿음안에서 한 형제자매된 성도들간에 정말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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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제목 : 잃어버린 자아를 찾읍시다.

본문 : 행2:1-4

1.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특히 겨울밤에는 마실이라고 해서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도 방학 때는 이웃집에 놀러가 함께 놀다오곤 했었습니다. 지금은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할 것 없이 텔레비전을 보든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든지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런 게 없었죠. 그래서 동지 섣달 긴긴 밤에 별로 할 게 없으니까 마실을 가곤 했는데 때로는 좀 늦게까지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아이들은 그만 잠이 들기도 했는데 이 때 아이들이 짓궂게 불침이라는 걸 놓곤 했었습니다.

불침이라는 것 혹시 놓아 보거 맞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성냥개비를 반쯤 태우고 나서 숯처럼 만들어 끝에 불을 붙이고 다른 한쪽에 침을 발라 자는 아이의 다리 같은데 세워 놓으면 불이 숯을 타고 내려가 살에 닿으면 물론 아주 센 불은 아니어서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지만 자던 아이가 그만 기겁을 하고 벌떡 일어납니다. 그렇게 놀라서 일어나는 것이 재미있어서 아이들이 장난을 치곤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설교 준비를 하다가 이 이야기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름 아니라 우리 영혼도 불침을 한번 맞아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여러분, 육체의 잠이 깊이 들어있으면 곱게 깨우면 안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업어 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금방 일어납니까?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뜨거운 맛을 보든지 아니면 반대로 찬 맛을 보면 됩니다. 즉 불침을 한방 놓든지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으면 정신이 번쩍 나서 벌떡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잠만 아니라 영적인 잠이나 정신적도 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깊은 잠이 들어 있으면 웬만한 충격으로는 깨어나질 않습니다. 그야말로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죽어라고 왜곡되고 변질되고 추하고 어리석고 심지어 악한 생각과 경험과 이성과 가치관을 고집하며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마치 바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바로는 아홉 번씩이나 끔찍한 재앙을 당하고도 깨닫지 못하다가 마침내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참혹한 꼴을 당한 후에야 비로소 심령에 충격을 받고 이스라엘을 보내게 되지 않습니까? 그만큼 인간의 심령이 얼마나 어둠과 무지 속에 굳어져 있는지 그 영적 정신적 잠에서 깨어나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게 오히려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오면서 맨날 보고 듣고 배우고 말하고 행동한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맨날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잘먹고 잘살며 재미있게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들만 생가하며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육체적 물질절 생각과 가치관과 삶의 모습들이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런 가치관 속에 살고 있으니까 그게 본래의 모습인 줄 알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물론 그게 인생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놀고 그저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더 좋고 너 낫고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도 아니고 거기에 행복과 기쁨과 만족과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너무나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육체적 물질적으로 잘먹고 잘사는 것만으로는 자신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지 못하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마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1: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러분, 보세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이라니 얼마나 고귀한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물질적인 형상은 없으시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영적 정신적 감정적 지적 의지적 형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존귀하신 모습을 닮아 영적 정신적 감정적 의지적 지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선과 사랑과 의를 행하며 영육간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려야 할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그 모습도 심히 좋았고, 그 목적도 심히 좋았고, 그 마음도 영혼도 육체도 모든 것이 심히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지혜롭게 다스리며 아름답게 가꾸는 가운데 사랑과 기쁨과 선과 의를 행하며 영육 간에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어리석게도 그만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여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어둠과 무지 속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며 육체적 물질적으로 기쁨과 영광을 누리는 것을 인생이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본래의 모습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냥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본래의 모습인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이와 같이 너무나 왜곡된 가치관에 길들여져 온전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더 이상 그저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며 그저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욕망을 채우고 거기서 인생의 기쁨과 목적과 행복을 찾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며 아래로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사랑과 선과 의를 행하며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본래의 인생의 모습이고 그럴 때 당연히 진정하고 영원하고 온전한 행복과 기쁨과 만족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4:22~24절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제 정말 더욱 겸손히 그리고 열심히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함으로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불방망이를 맞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면 진정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본래의 그 아름답고 가치있고 생명력이 충만한 모습을 회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방법은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우리 인생이 본래 죄와 무지 가운데 있으니 우리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는 안됩니다. 천만년 도를 닦아도 안됩니다. 이건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언가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게 쉽게 깨지겠습니까? 단단한 쇳덩어리가 웬만한 충격을 주어서 깨지겠습니까?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쉽게 깨지겠습니까? 영적 정신적으로도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것들은 웬만해선 안 깨집니다. 그렇게 단단하게 굳어지고 무디어진 것들을 능히 깨트릴만한 강력한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딴딴하고 질기게 굳어진 그 왜곡되고 무지하고 추하고 어리석고 심지어 악하기까지 한 그 무지하고 강퍅한 심령을 깨트릴 수 있는 무기는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의 역사하심 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불망이로 한번 뜨거운 맛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납니다. 우리가 멍하게 앉아 있거나 졸려서 눈꺼풀이 천근만근 내려앉을 때에 뒤통수를 한번 얻어맞든지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뜨거운 불 맛을 보면 정신이 번쩍 나는 것처럼 성령의 불방망이를 한번 맞으면 정신이 번쩍 나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세상에서 굳어진 것들이 정말 끈질기게 내 안에 달라붙어 있어서 자꾸 그 잘난 이성과 경험과 지식을 따라가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좀 따라가는 것 같다가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되고 세상의 것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되고 그래서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를 맛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떤 분들은 아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냥 옛날에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하는 식으로 복이나 구하면서 종교생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는 여기서도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도 누리지 못하거니와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성령의 불망이를 한번 얻어 맞고 잠들어 있던 영혼이 깨어나 새로운 세계 속으로 들어오면 정망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저도 정말 호된 충격을 받고 정신을 번쩍 들어 인생의 방향전환을 한 사람입니다. 일차적으로 저 자신에게 육체적 정신적 충격이 왔었습니다.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경쇠약 같은 증세도 좀 있었고 특히 신경성 위염으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이번에는 자녀를 통해서 큰 충격이 왔습니다. 큰 아이가 큰 질병에 한달 이상 치료를 받았지만 영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때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나 잘나서 내 힘과 능력과 지혜로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내가 아는 것도 별로 없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구나. 내가 기댈 곳은 하나님 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밤낮으로 하나님을 찾아 울고불고 눈물콧물 흘리며 회개하며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내 심령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회개와 감격과 기쁨이 수없이 교차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참 빛, 생명의 빛이 내 심령 속에 채워지며 내 속에 있던 모든 부정적이고 추하고 어리석고 악한 것들이 빠져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연히 신경성 위염이나 신경 쇠약 증세도 함께 쫓겨 나갔고, 결국 아이의 병도 나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새로운 세계가 환하게 보였습니다. 영광의 나라가 보였습니다. 지금까지의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은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리고 삶의 이유와 목적과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할렐루야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정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회사 생활을 청산하고 지금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충격을 받고 자아가 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가 똑바로 보입니다. 환하게 보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러나 자아의 껍질이 깨지지 않으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씨앗이 껍질을 깨트리지 않고 어떻게 새 생명을 싹틔울 수 있겠습니까? 계란 껍데기를 깨트리지 않고 어떻게 병아리가 이 밝은 세상으로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애벌레가 껍질을 벗어 던지지 않고 어떻게 나방이 되어 훨훨 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내 자아와 경험과 이성과 지식의 틀을 깨트려야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로 나오게 됩니다. 안 그러면 맨날 그 자리에 있습니다. 안 그래요? 내 지식과 경험과 이성의 틀을 깨트리지 않고 여전히 그 안에 있으면 어떻게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겠습니까?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걸 깨트려야 하는데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이게 여간해서는 잘 안 깨집니다. 우리가 몇십년 동안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져 그 알량한 지식과 경험과 이성이 단단한 껍질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알량한 경험과 지식과 이성의 껍질이 나를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세계를 보지도 못하고 그곳을 향하여 달려가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깨트려야 합니다. 깨트려야 변화가 옵니다. 이걸 깨트려 버려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향해 비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성령의 불 맛을 한번 봐야 합니다. 성령의 불망이로 우리의 심령을 두들겨 부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지식이나 과학으로 되는 게 아니라 강력한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능력있게 은혜가운데 신앙생활하며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빛으로 충격을 받고 깨졌습니다. 하늘에서 밝은 빛이 비추더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그때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 자리에 엎어지고 눈이 멀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눈의 비늘이 벗겨지면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의 영혼과 마음에 단단한 껍질처럼 붙어 있던 껍데기가 벗겨져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180도 궤도 수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던 삶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던 삶에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엄청만 충격 앞에서 그의 자아는 완전히 깨어지고 성령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큰 충격을 받고 비로소 온전히 거듭나 제자다운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좀 길지만 전체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무리 120여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 동안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쓸 때에 성령의 불이 임한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가 같은 것이 들리더니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불이 거기 모인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각자 따로따로 성령의 불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확 뒤집어 진 것입니다. 심령이 뜨거워지고 감격과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능력을 받고 자신들도 모르게 알 수 없는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의 삶은 완전히 180도 바뀌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것을 다 내놓고 유무상통했습니다. 지상의 메시아 왕국을 꿈꾸던 삶에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갔던 비겁한 자들이 십자가의 순교를 택하는 진정한 용기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위해 살던 삶에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영적인 큰 충격을 받아 옛자아가 완전히 깨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영혼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어둡고 칙칙하고 추하고 악하고 독한 것들이 온전히 쫓겨나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자신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여 세상의 욕망과 유익과 기쁨을 따라 살던 삶에서 돌이키고, 세속에 얽매이고, 물질에 얽매이고, 육신에 얽매이고, 상황과 조건에 얽매이던 삶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로서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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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설교] 주일낮예배설교 Sunday worship preaching

 

 


말씀 : 창22:9~14

제목 : 믿음과 순종과 축복

1.믿음과 순종과 축복

믿음이 있는 곳에 순종이 있고,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여러분, 맞는 말입니까? 예, 맞는 말입니다. 안 그래요? 믿음이 있으면 순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있고말고요. 아니 믿는데 순종이 없을 수 있습니까? 안 그래요?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데 어찌 순종이 없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잖아요. 순종하는 복이 안 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요.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어찌 복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신28:2절 보세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하시면서 오만가지 복을 다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이 뭐 허튼소리 하시는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실로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고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브라함인데요,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떻습니까?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잘 됩니까? 잘 안되지요. 왜요?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실상은 그래봤자 얼마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요? 이 이야기 들어봤자 몇 번 들었습니까? 한 백번 들었을까요? 그런데 세상에서 정치이야기, 경제이야기,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는 몇 번 쯤 들었을까요? 한 천 번 들었을까요? 만 번도 더 들었을걸요. 그러니까 믿음 안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먹고 입고 잠자고 놀고 하는 이야기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못 듣고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 잘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요. 그러면 안 되는 게 당연하다고 가만히 있을 겁니까? 아니죠. 그러므로 더욱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지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기독교적 가치관이 확립되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축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간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삼아 각을 뜨고, 불에 태워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인신제사는 우상숭배자들이 하는 악습으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삭은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무려 25년 만에 달랑 하나 주신 약속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장차 큰 민족을 이루고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잡아 불에 태워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 말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일까?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녀가 아닌가? 그것도 아이를 도저히 낳을 수 없는 100세나 되어서 기적적으로 주신 아들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큰 민족을 이루려면 오히려 더 많은 자식을 주셔야 하는데 겨우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불에 태워 인신제사로 드리라니 내가 늙어서 헛소리를 들었나? 망령이라도 들었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말도 안되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왜요? 그게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분명 말도 안되지만 분명 뭔가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계획이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이성으로 다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 보다 높고 깊어서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이성과 경험과 능력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다. 경험적으로 납득이 갑니까? 저 영원한 천국, 이것이 인간의 논리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이성과 과학과 논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그런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해가 되든 말든 납득이 되든 말든 순종할 것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약 조금이라도 이성이나 논리를 가지고 생각했더라면 절대로 이삭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인신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해놓고 25년 만에 겨우 아들 하나 주어놓고 그걸 도로 달라고 하십니까? 하면서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이해가 가든 안가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무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인도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언제나 내 뜻과 이성과 경험과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잠3:5,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해가 되든 말든, 세상의 가치와 같든 다르든, 내 경험과 맞든 안 맞든, 손해가 되든 유익이 되든, 내 생각과 관계없이 인정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모든 생각과 경험과 환경을 떠나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오직 온전한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신 예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십시오. 그저 갓난아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때에 분명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2.온전한 순종

여러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말씀에 순종합니다. 창22:3,4절 보세요.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여러분, 이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아침 일찍 떠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무언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임을 믿었지만 밤새도록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아들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는데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날이 밝자마다 곧장 시행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내 사라에게 말도 없이 떠났습니다. 아내에게 말했다가 보나마나 이 양반이 나이가 들더니 드디어 망령이 들었냐고 하면서 핀잔만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도 시간을 지체하다간 아들을 번제로 드릴 자신이 없었기에 마음 변하기 전에, 마귀가 틈타기 전에 떠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즉시 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시행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일을 뒤로 미루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나중에 나중에 그럽니다. 이것만 해 놓고, 저것만 해결하고...... 나중에 생활이 안정되면, 나중에 시간 나면, 나중에 할 일 없어지면... 그러나 여러분, 지금 못하는 사람이 나중에 여유 생기면 할 수 있을 것 같죠? 그런 사람은 99%는 여유생기면 놀러 다닙니다. 여유돈 있으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쓰게 됩니다. 설령 나중에 한다 해도 지금 못한 것은 죽을 때까지 아니 천국에 가서 까지 못한 것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마귀가 장난칩니다. 마음이 변하기 쉽습니다. 방해꾼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길을 떠나 사흘 동안 걸어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여러분, 그 사흘길을 걸어오는 동안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길을 떠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외아들을 자기 손으로 잡아 불에 태워서 번제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발걸음은 재촉합니다.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릴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그는 묵묵히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한 산 밑에 이르러 종들을 거기 머물라고 하면서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의 등에 지우고, 자기는 칼과 불을 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이삭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제를 드리려면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제물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뜨끔했겠습니까? 차마 ‘네가 바로 번제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단다. 나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단다. 그러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구나.’ 차마 이렇게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실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묵묵히 산에 올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게 되고,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릴 준비를 합니다. 장작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제물을 잡아서 각을 떠서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태워야 할 차례였습니다. 그 번제물은 다름 아닌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번제로 드리라는구나. 내가 너를 대신해서 번제가 될 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나 내가 아닌 너를 요구하시는구나.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그러니 순종해야지.’ 하면서 아들을 결박합니다. 그 운명의 순간에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아픔이 몰려 왔습니다. 그러나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들을 붙잡아 결박하고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이려고 눈을 감고 칼을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여러분, 그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결박하는 아버지의 심정. 아들을 장작더미위에 올려 놓고 칼을 높이 들어 올린 아버지의 심정,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삭, 그것도 하나 밖에 없었던 아들 이삭,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결박 당할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하여 번제물이 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불 태워 질수만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이삭 대신 자신이 번제물이 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요구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이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무슨 선한 뜻이 있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니 거역할 수 없었기에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속에서 도저히 눈뜨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눈을 감고 아들을 향해 칼을 내리치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게 순종입니다. 내 생각과 달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도, 있을 수 없는 일을 시켜도 그냥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아무리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라도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다면 그냥 드리는 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믿음이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믿습니까? 주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구원자이심을 믿습니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상황이 이래요. 형편이 이래요. 저래요. 이래서 곤란해요. 저래서 곤란해요. 그럼 내가 손해봐요. 웃음거리 돼요. 주일날 하루 쉬면 손해가 얼만지 아세요? 아니 이 귀한 걸 달라고요? 그럼 난 어떻게 살라고요? 여러분, 이런 거 다 버리세요. 그냥 믿고 따르세요. 순종하세요.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에게 주님의 한량없는 은총이 임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순종하는 자에게 임할 복

여러분, 그렇습니다. 순종이 곧 온전한 믿음이기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임합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리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창22:11,1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던 하나님께서 도리어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제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너 정말로 이삭을 잡으려는 것이냐? 내가 정말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받기를 원하는지 아니냐? 아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네 믿음을 보고 싶었단다. 이제 충분하다. 그 믿음이면 충분하다. 너는 정녕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 그러니 이삭을 풀어주고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양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아들을 풀어주고 옆에 뿔이 나무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양을 가져다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삭이 아닌 양으로 제사를 모두 마쳤을 때 다시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2:16,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요구했던 것은 이삭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순종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빼앗아가려고 했겠습니까? 왜 말도 안되는 인신제사를 드리라고 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셨고 그 믿음과 순종이 있는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총을 그렇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순종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곧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의 나의 주인이라는 종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종이 주인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우매 자가 지혜 자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왜 그래야 하느냐고 따질 수 있습니까? 죄인이 구세주에게 이러니저러니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요, 진정 주님만이 생명의 주님이시오, 구원자시오, 주권자라는 믿음이 있다면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곧 믿음이요,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복이 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도, 현실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달라고 하셔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결코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하실 때에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모든 생각 지식 경험 이성 가치관 나 내려놓고 순종하심으로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영육간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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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예배 설교 
 

 


본 문 : 여호수아 3:14 - 17

제 목 : 약속의 땅을 바라보라

주자의 권학문(勸學文)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미각지당춘추몽(未覺池塘春草夢)인데 계전오엽기추성(階前梧葉己秋聲)이라? 연못가의 봄풀이 꿈에서 미쳐 깨어나기도 전에 뜰앞의 오동나무 잎새가 가을을 알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봄인가 싶더니 어느새 가을이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막 2017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습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2017년도 뒤돌아보면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은 한해였는지 모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그랬고, 정치적으로도 그랬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밝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했지만 그러나 늘 들려오는 소리는 거짓과 사기와 부정과 부패와 폭력과 강도라는 달갑지 않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정말 책임있고 깨끗한, 진정 국가와 민족을 위한 그런 정치다운 정치를 기대해봤지만 정치인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권모술수와 싸움과 욕설과 권력욕에만 급급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새로 찾아온 이 한해도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저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회의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자화상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간의 부정적인 자화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은 오늘도 은혜를 베풀려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간 스스로는 희망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과 위로하심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금 밝아온 이 새해에는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희망을 찾고 거기서 은혜와 기쁨과 생명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는 부족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미련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충만하십니다. 그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그분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분의 지시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의 기쁨 가운데 이 새롭게 밝아온 한해를 살아가는 비결이겠습니까?

 

1.말씀을 앞세우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그렇게도 손꼽아 기다려왔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제 이 요단강만 건너면 그들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너려고 할 때는 하필이면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우기였습니다. 그래서 요단강물은 홍수로 인하여 금방이라도 둑을 넘을 기세로 넘실거리며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낙심도 되었고, 좌절과 실의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염려하지 말아라. 다만 내가 시키는대로 하여라 하면서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무조건 요단강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넘칠 듯이 흐르던 요단강이 멈추어 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정말 어이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인간적 논리로는 당치도 않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백성의 앞장을 서게 됩니다. 그리고는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집어 삼킬 듯이 넘실대던 요단강물이 신기하게 멈추어 서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댐을 쌓은 것처럼 물이 멈추어 위쪽으로 쌓이고 그들이 서있는 곳은 마른땅 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차례로 물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놀라움과 감격과 기쁨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가나안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들이 삼키려고 넘실대던 요단강이, 가나안땅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중의 하나였던 요단강이 도리어 그들에게 감격과 기쁨을 주며 이스라엘의 가나안으로의 행진을 축하해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언약궤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상징하는 상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먼저 강에 들어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건너라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강중앙에 서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것을 의지하며 걱정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강을 건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떤 세력이라해도 너를 삼키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것도 가나안 복지를 향해 달려가는 너의 길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언약궤를 바라보며,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며 그것을 바라보며 강을 건넜고, 그럴 때 가나안을 건너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요단강물도 결코 그들의 발목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달려가는 순례객들입니다. 여러분의 그 순례길의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세상의 물결이 여러분을 삼키려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가나안 복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여러분을 실망케 하고, 좌절케하고,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러나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망이나 불평일랑 더더욱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다만 그것을 좇아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의지하며,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놓여있는 모든 장애물들은 물러갈 것입니다. 말씀앞에서 모든 대적자들은 쫓겨 갈 것입니다. 아무쪼록 새롭게 다가온 이 새해에는 오직 말씀을 바라보며 신뢰하며 의지하며 말씀안에서 달려갈때에 여러분의 발목을 잡고, 여러분을 힘들고 지치고 낙심케 했던 모든 어두운 것들에서 온전히 해방되어 진정한 가나안복지의 은혜를 누리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도전 세력과의 전쟁에 동참해야 합니다.

가나안 복지의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또 한가지 생각한다면 그것은 가나안 복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요단강을 건넘으로 그들이 할 일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요단강을 건너긴 했지만 아직도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가까스로 가나안땅에 들어오긴 했지만 그러나 그 땅은 비어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블레셋 족속을 비롯한 가나안 일곱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발달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견고한 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싸워서 이겨야만 그땅을 차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난관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던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이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를 무너뜨려야만 했습니다. 만약 그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그들은 가나안복지의 은혜를 누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또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 작전에 참여합니다. 어쩌면 정말 무모한 싸움이었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을 앞세우고 온 백성이 그 뒤를 따르며 그 성을 일주일 동안이나 돌았습니다. 그 견고한 성 주위를 그저 돌고 또 도는 것이었습니다. 위에는 여리고성의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성위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한다면 그들은 여지없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무모한 방법에 회의가 따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그저 묵묵히 돌고 또 돌았습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그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외치라고 했을 때 일제히 함성을 질렀고 그러자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땅은 그냥 거저로 가만히 앉아서 들어가야 할 땅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이 이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행렬에 같이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땅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세력들을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가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복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길을 막는 것이 정말 많습니다. 마귀 사탄은 우리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별의 별 짓을 다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무지를 동원합니다. 때로는 완고함을, 때로는 문화를, 때로는 과학을, 때로는 돈을, 때로는 향락을, 때로는 무사안일함을, 때로는 권력을, 때로는 지식을, 때로는 환난과 시험을, 심지어는 가족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정말 많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깨닫고 그것들에게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쩌면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내 힘만으로는 확실히 안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가는 길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도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새로운 2018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힘든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어둡게 찾아온 새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세상의 돈보다도 명예보다도 권력보다도 더 든든한 빽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을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다만 그 분을 믿고 신뢰하며 따르기만 하면 그것들은 모두가 우리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롭게 찾아온 이 새해에는 더욱 주님을 바라보는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서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방해꾼들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나안복지를 향할 발걸음을 방해하는 것이 환경이든 상황이든 사람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아니면 나 자신이든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그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이 새해가 되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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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감사하면 행복해 집니다

 

 

 

제목 : 감사하면 행복해 집니다.

말씀 : 마20:1~16

1.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미고사’캠페인을 벌였다고 하는데 참 좋은 캠페인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말은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의 약자인데 참 좋은 말 아닙니까?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스러운 말입니까?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런 말을 잘 할 수 있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따뜻해지고, 사랑이 넘치고, 행복해 지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세상에 이보다 쉬운 일이 어딨습니까?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든지 아무 때나 공짜로 할 수 있고 시간도 1초도 안 걸립니다. 이렇게 돈과 시간과 노력을 안들이고 서로에게 위로와 따뜻함과 평안함과 행복을 주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지난 6개월 동안 가족이나 교우나 직장 동료나 이웃이나 국가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의 말을 하셨는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한번 해 보실까요? ‘성도님,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집사님,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여보,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엄마아빠,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아들아,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세월이 자꾸만 이와는 반대로 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되었으면 이제는 좀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만도 한데 자꾸만 불만의 소리만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툭하면 싸우고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이혼도 쉽게 하곤 합니다. 회사에서도 그만하면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지 툭하면 거리로 뛰쳐나와서 결사항쟁을 외칩니다. 국회의원들은 또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툭하면 머리에 띠 두르고 거리로 나와 난리를 치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 지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감사와 은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꾸 부정적이고 어두운 곳에 포커스를 맞추기 때문입니다. 누리고 있는 은혜는 생각지 않고 자꾸 부족한 것만 생각하고, 자신의 잘못은 생각지 않고 자꾸 남의 탓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얼마나 귀한 존재로 창조되었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뭔가 좀 모자라고 부족한 것만 생각하니까 자존감을 가지지 못하고 열등감속에서 쉽게 상처를 받고 좌절하고 낙심하곤 합니다. 그래서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파서 시기하고 질투를 합니다. 그러니 원망과 불평과 갈등과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들은 정말 나도 불행해지고 남도 불행하게 만드는 심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고 축복해야 하고 서로 격려하고 남이 잘되면 기뻐해야 합니다. 그게 옳은 일이고, 자신도 복을 누리고 남에게도 복을 가져다주는 지혜로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만 그 반대로 하니까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기쁘게 살 수 있는 상황에서도 행복하지 못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살전5:18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그게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길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그 밖의 모든 사회 속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여러분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해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늘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2.감사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늘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가려면 우리의 생각을 감사의 관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감사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감사이지만 불평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불평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먼저 오늘 말씀의 내용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있었는데 포도 수확 철이 되어 이른 아침 즉 해 뜰 때에 장터로 나가 일꾼을 구하여 포도원에서 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손이 부족했든지 제3시 즉 오전 9시에 또 한사람을 불러왔습니다. 그래도 일손이 부족했든지 다시 제6시 즉 정오에 또 한 사람, 그리고 제9시 즉 오후3시에,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심지어 제11시 즉 해지기 한 시간 전에 또 한 사람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후6시에 일을 마치고 품삯을 주기 시작하는 데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 즉 오후5시에 와서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1데나리온 즉 노동자 하루 품삯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먼저 온 사람들은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을 1데나리온이나 주는 것을 보고 그 사람보다 몇 배 더 일한 자신들에게는 적어도 몇 데나리온은 줄 것으로 잔뜩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자기들도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똑 같이 한 데나리온 밖에 안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이 불평불만을 터트린 것입니다. ‘아니, 저 사람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1데나리온을 주고 우리는 그보다 몇 배를 더 일했는데 왜 똑같이 주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당신이 하루 종일 일한대가로 본래 정해져 있는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무엇이 불만이냐?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한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인데 그럼 이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 내가 잘못한 것이냐?’ 그러자 아무소리 못하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불평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일한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뭐가 불만입니까? 남에게 더 주었다고 자기가 손해 봤습니까?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잘못입니까?

여러분, 그러면 이 사람들이 왜 불평을 했습니까? 감사의 관점, 은혜의 관점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정당한 대가를 받았으면 일할 수 있는 터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일을 시켜준 주인에게도 감사해야 하고,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지혜가 있음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고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같은 노동자의 처지에서 주인이 얼마나 고마운 분입니까? 지금도 그런 분들이 계시지만 당시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일할 데가 없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늦게 일할 기회를 얻어서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은혜를 베풀어 한 데나리온을 받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으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들은 자신의 것을 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남이 좀 많이 받는다고 여기며 배가 아파 감사해야 할 일에 불평을 터트린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걸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사에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게 대해서나 감사와 사랑과 은혜의 관점으로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자신도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 되고 남에게 복을 가져다주고 주님도 기쁘게 해드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수없이 감사할 것을 명령하시며 특별히 골3:1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여기에 보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즉 모든 것을 감사의 관점으로 보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감사할 것이 천지고 그러면 감사의 찬양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 따지고 보면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태어나고 먹고 입고 자고 생활하는 것 중에 은혜를 입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있습니까? 부모님과 가족의 은혜 없이 살 수 있습니까? 또 이웃의 은혜 없이 살 수 있습니까? 누누이 말씀 드리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1초도 살 수 없습니다. 부모님과 가족의 은혜 없이도 우리는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저 잘나서 제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 같지만 실상 이웃의 은혜가 없어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평생을 감사하며 살아도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감사거리가 있는데 왜 하필이며 불평불만 거리를 찾아 자기도 힘들고 남도 힘들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매사를 감사의 관점으로 보고 해석하고 적용함으로 자신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주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감사하며 살기 위해서 또 하나 가져야 할 태도는 비교의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찍 온 일꾼들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은 것도 바로 감사의 관점은 없고 남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자신이 적게 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보세요.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 사람에 비해서 나는 일을 많이 했으니까 더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나 자신이나 그보다 몇 배 더 많이 일한 자신이나 똑 같이 받으니까 상대적으로 자신이 손해 봤다는 생각에 그만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평불만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건 전혀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자기는 정당한 대가를 다 받았지 않았습니까?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게 비난 받을 일입니까? 오히려 불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주인에게 존경을 표해야 할 일이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받은 것처럼 여기고 배가 아파 불평이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사람들이 왜 행복하지 못합니까? 이 정도면 잘 먹고 잘 사는데 자꾸 못살겠다고 아우성입니까? 비교의식때문입니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 고생 안하고 호의호식하며 편하게 잘 먹고 잘사는 데 왜 나는 쎄가 빠지게 일해도 맨 날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생각하고, 누구는 신랑 잘 만나서 명품 백 들고 다니며 자랑 질을 해대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이냐고 생각하고, 누구는 똑같이 일하고 한 달에 500만원 받는데 왜 나한테는 100만 밖에 안주냐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불평과 미움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늘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여기며 또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살아가는 태도는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원망과 불평과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싸움의 덫에 걸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론 나나 너나 우리 모두에게 평안과 기쁨은 점점 멀어져가고 결국 모두 함께 불행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뿐인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본래 죄와 무지가운데 있어서 부조리한 현실이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고, 때론 투쟁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그러한 피해의식이나 비교의식을 버리고 먼저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불공평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받은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모든 것을 감사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은 설령 세상이 불공평할지라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고 진실하고 의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혹시 사람은 몰라줄지 몰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솔직히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은 사람들도 알아보고 귀하게 여겨주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공연히 남과 비교하지 오직 믿음 안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모든 상황과 여건을 떠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감사와 기쁨과 가치와 보람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보상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먼저 온 사람들이 불평을 터트린 또 하나의 이유는 보상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은 나중에 온 사람보다 더 많이 일했기 때문에 당연히 더 많은 것을 받아야 한다는 보상심리가 있었는데 그게 좌절되니까 그만 불평을 터트렸던 것입니다. 물론 정당한 보상심리는 악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열심히 일한만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감사와 은혜의 측면은 무시하고 그저 더 많은 것으로 보상 받으려고 하는 왜곡된 보상심리가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불명 불만을 늘어놓은 사람들이 바로 그랬던 것입니다. 10절을 다시 보실까요?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보세요. 그들은 ‘더 받을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덜 주니까 그만 엉뚱한 불만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본래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겁니다. 그러면 지금 그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여건을 주신 하나님께나, 오늘 하루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주인에게나, 또 일을 할 수 있도록 내조해주고 동기부여를 해준 가족들에게나 우선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을 시기하며 자기에게 더 많은 보상을 해주지 않은 주인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자꾸만 더 달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보다는 자꾸만 권리만 주장하기가 쉽습니다. 할 일은 작게 생각하고 받아야 할 것은 크게 생각을 합니다. 내가 남을 대접해 주지 못한 것은 생각지 않고 남이 나를 대접해 주지 않은 것만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왜 때때로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까? 그것은 다른 아닌 비교의식과 보상의식 때문입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저 사람보다 먼저 와서 더 많이 일했다고 여기고, 내가 이 교회를 세우는데 많은 공로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 서운하고 화가 납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 그러면 제가 뭘 얼마나 했다고 하면서 고까운 마음이 듭니다. 나는 이제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네가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이미 보상심리와 공로의식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눅17:10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당연하지 않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려주셔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생명을 바치고 전 재산을 다 바친들 할 만큼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한들 주님의 은혜의 천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나 같은 것 불러 주심에 감사해야 하고, 주님의 일을 시켜 준 것에 감사하고, 내 미약한 힘이나마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데 조금이라도 필요해서 사용할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뿐이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많은 적든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면 불평불만과 갈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국가는 평안하고 행복해 집니다.

그러므로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매사를 감사의 관점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교의식을 버리고 주어진 삶의 자리가 어떤 곳이든 감사와 기쁨으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보상심리와 공로의식을 버리고 무엇이든 우리가 일할 수 있고, 기여할 수 있고, 누구에게인가 도움이 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되새기며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 속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의 자신의 삶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이웃들에게 행복을 주며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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