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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주일낮예배 대표기도문 (세계선교교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저희들을 사랑하시고 가장 큰 축복으로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지난 한 주간 제단을 통하여 주신 말씀 붙잡고 삶의 

순간 순간 마다 하나님 함께 하심을 감사합니다 

무더웠던 지난 여름도 저희들 건강함으로 지켜 주시고 

9월을 맞아 청명한 가을 하늘을 맞이하게 하시사 저희들의 입에서 

위대하신 주님을 찬송하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늘도 예배를 통하여 은혜 받기를 소망합니다

무조건 은혜 받게 하옵소서 

우리의 거짓과 더러움으로 얼룩졌던 우리의 입술과 

혀가 주님을 찬양하기에 부족함 없는 도구로 사용되게 하시고 

우리의 찬양이 우리 삶의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이 시간 하나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기도하오니 

이 어려움이 속히 지나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를 상하게 하셨으나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시는 

하나님 싸매어 주실 그 하나님을 믿고 나가오니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길 원하옵니다 

대통령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 주시는 지혜로 모든 일들을 이루어 가게 하시고 

다니엘과 요셉 같은 동역자를 붙여 주사 그들이 

용기와 헌신을 통하여 지도할 수 있는 귀한 은혜가 있도록 

도와 주시기 원하오며 이 나라 이 민족 앞길 위에 

하나님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 정말 어지러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이 민족에게 하나님 함께 하사 

어지러운 법들 제정되지 않게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들 다음 세대들이 건강한 사회 건강한 땅에서 세워질 수 

있도록 하나님 함께하여 주시기 원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가 강 같이 흐르는 땅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물이 바다를 덮은 같이 이 땅에 가득하게 하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 참좋은교회를 이 땅에 세우시고 

오늘 까지 함께 하심을 감사합니다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였음을 이 시간 고백합니다


특별히 담임목사님에게 날마다 성령과 지혜로 충만하게 하시고 

영육 간에 강건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시간 시간마다 갑절의 영감을 부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반기 목회 사역 위에 주님께서 늘 함께하여 주시므로

 승리하게 하여주시고 말씀과 기도로 영혼을 살리는 귀한 

당신의 종으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담임목사님 생명의 말씀을 저희들에게 주실 때에 저희들 

큰 은혜 받는 귀한 시간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말씀 위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사 우리 모두가 은혜 받는 

귀한 시간 되게 하시고 세상에 나가 빛된 소금 된 자녀들로 살기에 

부족함 없는 귀하고 복된 삶이 될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간 하나님 저희 성도들의 삶을 위해 기도합니다

한 주간도 세상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들을 

힘들게 하였고 하나님을 부르짖어 찾고 싶고, 신음 소리를 

내고 싶어도 내지 못하는 그런 어려운 형제 자매들 있습니다.

 
주여!! 저들의 아픔을 위로하시는 주께서 저들의 상처를 만져주시고 

저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저들의 상처를 피 묻은 손으로 

만져 주시사 나음이 있고 회복이 있는 귀한 손길이 있도록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예배를 돕는 많은 손길들을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저들의

 노고와 땀이 헛되지 않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배의 모든 시간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우리 주님 영광 받아주시길 바라며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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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대표기도문 (주일대표기도문) 
 
사랑과 은혜아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의 날,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거룩한 주의 전에 불러주셔서 찬양과 기도와 경배와 예배로 영광과 존귀를 택하신 제단 위에 드리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권능과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하여 영적 눈을 열어주시고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하시며, 위로부터의 참된 은혜와 평강으로 채워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주님의 부르심을 통하여 모인 무리들 머리 위에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하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심령 위에 위로부터의 신령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 말씀을 사모하며, 기름부음을 위하여 기도하는 순복음 새 강남교회의 귀한 믿음의 자녀들 머리위에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으로 온전히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하나님 나라와 몸된 교회를 위하여 간구와 사모의 마음으로 달려온 귀한 영혼들 위에 십자가의 권세와 권능으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 주님의 몸된 교회, 순복음 새 강남교회를 축복하여 주시며, 성령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경험하게 하시며,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심령이 새롭게 되며 믿음이 강건하게 세워지는 놀라운 은혜가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지금 전 세계가 어리석은 지도자들로 인하여 분쟁가운데 있으며,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서로 핍박하여 혼란과 혼돈 가운데 있사오니, 지금 임재 하여 주시어서 미국과 중국, 미국과 프랑스, 한국과 일본, 남한과 북한 중국과 대만 등 분쟁 가운데 있는 나라들을 주재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대한민국 정치권이 흔들리고 있사오니 주께서 간섭하시어 중재하여 주시어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다툼이 멈추게 하시며,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하여 가장 온전한 사람들로 채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의 위정자들에게 지혜와 총명과 명철을 더하여 주시어서 국민들이 원하는 정치를 하게 하시오며,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가짜뉴스를 만들고 있는 정치인들에게도 중심을 보게 하시어 무엇이 국민을 위하는 일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아버지 하나님,   

아직도 먹거리가 없어서, 입을 것이 없어서 힘들어 하는 많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시고 이제 풍성한 한가위를 통하여 서로 나누게 하시고, 서로 위하여 기도하며, 성실함으로 구제하게 하시고, 즐거움으로 서로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 간구와 사모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예배드리오니 우리의 기도를 기억하시어 우리의 심령 위에 참으로 귀한 기쁨과 평안으로 온전히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어둠에 사로잡힌 이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오직 복음으로, 오직 성령님으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영혼구원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사자 여재창 목사님을 기억하시어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마다 말씀이 불이 되게 하시고, 말씀이 치유가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권세가 차고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예배를 위하여 믿음과 열정으로 헌시하시는 교회 각 기관과 재직들과 섬기는 손길들을 기억 하시옵고, 섬기는 손길 손길마다 주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더하여 주시오며, 믿는 자의 권세가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귀한 은혜와 영광으로 충만하여 주심에 감사드리며, 이 모든 영광 홀로 받으시옵소서.

모든 것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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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주일예배설교:유혹앞에서(마4:1-11)


제목 : 유혹 앞에서

성경 : 마4:1-11

1.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요즘에 보면 상대적 빈곤감 또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보면 즉 실제로는 빈곤한 게 아닌데 많이 가진 자들과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여기고 박탈감을 느끼면 불평불만을 하게 되고 그래서 자존감도 잃어버리고 진짜로 가난한 자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바보 같은 일입니까? 실상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데 하필이면 없는 것을 가지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남이 가진 것을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며 가지고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하고 진짜로 가난한 자처럼 기쁨을 모르고 산다면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딨습니까?

그럼 왜 그렇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꾸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월급 200만원도 못 받는데 남이 300만원 500만원 1,000만원 받으니까 저 사람은 무슨 복이 많아서 머리가 좋아서 일류대학 나와 대기업에 들어가고 출세하여 잘먹고 잘사나, 저 사람은 무슨 복이 많아서 부잣집에 태어나서 저렇게 좋은 조건 속에서 온갖 좋은 혜택을 누리며 잘먹고 잘사는데 나는 왜 쎄가 빠지게 일해도 이 모양인가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항하고 시비를 걸고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됩니다. 남이 월급을 1,000만을 받든 1억을 받든, 대궐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온갖 사치를 누리든 그런 거 배 아파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 앞에서 믿음 안에서 성실하게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누리고 있는 것 자체를 보면 우리는 결코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힘든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이 정도면 먹고 살만한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영원한 영광까지 주셨습니다. 그럼 됐지 자꾸 더 바라고 욕심을 내고 비교하며 원망하고 불평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그럴 일이 뭐 있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행복은 자꾸 도망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세상이 그렇지를 못합니다. 완전히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서 그저 좋은 집에서 좋은 것 먹으며 좋은 옷 입고 많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할 줄 압니다. 그래서 죽어라하고 돈돈돈 경제경제경제하면서 온통 관심의 초점을 돈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물질적 외형적인 것만 남과 비교하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많은 갈등과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게 바로 마귀사탄의 역사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치 옛날에 나라에 시끄러운 일이 있으면 소위 북풍이라고하여 작은 일을 크게 부풀리든지 없는 일을 만들든지하여 북한 공산당이 무슨 큰 일을 저지른 것처럼 하여 국민들의 관심의 초점을 그쪽으로 돌리게 함으로 시끄러운 일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귀사탄이 우리의 관심을 온통 돈에게 두게 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이니 사랑이니 진리니 의니 선이니 이런 것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잘먹고 잘살면 장땡이라고 여기며 예수님도 안 믿고, 심지어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예수님보다 돈을 좋게 여기게 만들어 자꾸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돈을 따라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깨어 기도하며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마귀 사탄의 유혹에 속지 말고 진리를 따라 살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5:16~18절을 보겠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보세요. 세월이 선하다고 했습니까? 악하다고 했습니까? 악하다고 했습니다. 악한 게 뭡니까? 죄와 무지 속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저 돈과 명예와 권력과 세상 즐거움에 빠져 사망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려면 세상의 것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올바르게 판단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짓되고 왜곡된 것들을 물리치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왜곡된 가치관이 만연된 세상에서 정말 깨어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올바른 영성을 가지고 모든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을 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까?

2.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왜곡되고 유혹 많은 세상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지요.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시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이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가치관과 악한 것들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더럽고 추하고 악한 마귀 따위에게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까?

물론 왜 이유가 없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분임을 명백히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최초의 인간 아담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는데 예수님은 사탄의 권세와 유혹을 물리침으로 마귀에게 저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살리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능동적으로 시험에 임하셔서 사탄을 호통을 쳐서 쫓아내심으로 사탄의 권세룰 물리치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마귀에게 속아 죄와 무지 가운데 빠진 인생은 결코 자기 힘으로는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선이나 진리나 의에 대한 온전한 분별력도 없고, 악을 이길 힘도 없습니다. 자신이건 남이건 죄과 마귀와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이나 다른 어떤 능력이나 지혜로도 안됩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으나사나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임으로 그 안에 있으면 안전한 것입니다. 사탄 마귀가 넘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설령 사탄 마귀가 도전해도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게 됩니다. 사탄 마귀가 어떻게 교묘하게 유혹하고 시험하고 도전해도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분별하고 물리치게 됩니다. 세상의 왜곡되고 그럴듯한 가치관에 속지도 않고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 따위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세상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게 밀려와도 휩쓸려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그런 것들을 이기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자유와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5: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심으로 세상의 모든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물질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가장 먼저 이겨내야 할 시험은 물질의 시험입니다. 사탄은 온갖 방법으로 교묘하게 우리를 유혹하는데 가장 흔한 것이 물질을 통한 유혹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간사한 마귀가 심지어 예수님께도 물질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40일 동안이나 금식하여 주리신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린 배도 채워서 좋고 권능을 보여주면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될 거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수작이 예수님께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말을 듣고 사탄을 꾸짖습니다. 마4: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한마디로 떡 즉 물질이 우리를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좌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영생복락의 말씀인데 그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고 썩어 없어질 물질이 지배하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생명의 길도 진리의 길도 모르고 썩어 없어질 물질만 따라가다가 영원한 멸망길로 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내가 배가 고프고 힘든 건 사실이지만 너 따위의 말은 들을 수 없다며 사탄의 교묘한 물질적 유혹을 일축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질은 요긴한 것이긴 하지만 절대로 물질이 내 삶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물질적 가치에 의하여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그 말씀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당연히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세상은 물질지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믿음이나 사랑이나 진리나 의보다는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 때문에 싸우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도 합니다. 물질 때문에 이웃과 친구와 심지어는 가족 간의 관계가 파괴될 때가 많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물질 때문에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풍조가 세상을 뒤덮고 있어서 그게 도리어 정상인 것처럼 여겨질 지경입니다. 그러나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속고 있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인생을 거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껍데기에 지배당하는 인생은 당연히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 지를 잊지 알고 더욱 깨어 기도하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며 말씀으로 무장하여 물질보다 오직 주님을 앞세우시기 바랍니다.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내 삶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과 믿음과 사랑과 진리와 선과 의의 참된 가치를 앞세우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명예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 마귀는 물질적 시험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예수님의 명예욕을 자극시켜며 유혹합니다. 즉 성전 꼭대기로 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붙들어 다치지 않게 하실 것이고, 그러면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웅대접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런 수작에 넘어갈 분이 아니시죠. 그래서 또 마귀를 꾸짖습니다. 마4:7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내가 너 따위의 말을 듣고 여기서 뛰어 내린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게다가 여기서 뛰어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이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사탄 따위의 말을 듣고 뛰어 내린다는 것 자체가 그 말에 순종하는 것이니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설령 뛰어 내려서 좋은 결과가 있다고 할지라도 마귀의 말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한다면 그게 바로 사탄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설령 돈보따리가 생긴다해도 마귀 따위의 말에 순종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마귀의 말에 의해서든 아니면 자기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든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전에서 뛰어 내리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방법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있다면 마귀의 말처럼 뛰어내릴 때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면 자신이 영웅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방법으로 명예를 주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명예를 주는 것이지 영웅심리를 가지고 쓸데없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지켜 줌으로 영웅이 되게 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게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이 지켜 주실 만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해 주실지 안 해 주실지 한번 테스트해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무모하게 행동하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말씀에 합당하게 믿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이게 올바른 믿음이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명예와 영광도 아울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기본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비롯하여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무엇을 하든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영웅심리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무언가를 행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함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명예도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영적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시험이 실패로 끝나자 마지막으로 사단은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영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높은 산으로 가서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모두 주겠다는 것입니다. 즉 그저 눈 한번 질끈 감고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만국을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탄이 그럴만한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 까짓 게 무슨 그런 권세가 있습니까? 그저 예수님이 지금 40일동안이나 전혀 아무것도 안 잡수시고 약해져 있으니까 이 약해진 틈을 노려 어떻게든 예수님을 넘어트리려고 술수를 쓰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작이 예수님께 어떻게 씨알머리나 먹히겠습니까? 예수님은 사탄을 향해 호통을 치십니다. 마4:10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내 지금 비록 힘이 들어도 어딜 감히 나한테 수작을 부리느냐? 오직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거늘 어찌 더럽고 추하고 악한 너 따위에게 경배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사탄은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나에게 절하라. 그러면 천하만국 즉 명예와 권세와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우상을 섬기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을 미끼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신은 없다고도 했다가 신은 똑같다고 하면 믿지 말든지 아무거나 적당히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 행복이 있다. 그걸 소유하라. 그러면 행복하리라고 하면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그 길로 갑니다. 자기 생각대로 갑니다. 그저 돈돈돈 경제경제경제 하면서 삽니다. 그게 바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모습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볼때에 보기에도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고 먹으면 뭔가 지혜와 생기를 얻을 것처럼 보여 덜커덕 따 먹음으로 죄의 굴레를 뒤집어썼던 것처럼 지금은 더 크고 더 좋은 선악과들이 세상에 널려 있어서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게 쉽사리 걸려들어 선악과 따먹으며 죄의 길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 소리에 속으면 안됩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향락이나 세상의 가치관 앞에 무릎을 꿇으면 안됩니다. 그건 죽음의 길입니다. 오직 우리가 경배해야할 분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뿐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뿐입니다.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특별히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묵상함으로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 시험을 이기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능력을 온전히 맛보며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 갈 수 이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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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주일예배설교 (성가대헌신예배설교)거룩한 사역자(대하20:2023)


제목 : 거룩한 사역자

말씀 : 대하20:20~23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 당시 암몬과 모압과 에돔 사람들이 연합군을 이루어 유다를 침공하였는데 여호사밧은 온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는데 전쟁은 내게 속한 것이라며 너희가 싸울 것이 없이 내가 싸울 것이니 너희는 대열을 이루고 서서 내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은 희한한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군대를 이끌고 나가 대열을 이루고 그 앞에 성가대를 앞세워 찬송을 하게 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요. 찬송이 시작될 때에 모압과 암몬과 세일산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하면서 자멸하고 맙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칼 한번 안 쓰고 오직 찬양으로 전대미문의 승리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보면 성가대가 가져야 할 자세를 볼 수 있는데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성가대가 어떤 자세로 주님을 섬겨야 할지를 살펴볼 때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성가대원들은 거룩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먼저 오늘 21절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여러분, 여기에 보면 거룩한 예복 즉 성가대 가운을 입혀서 찬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이 어떤 상황입니까? 비상 상황입니다. 그런데 찬송은 왠 찬송이며 거룩한 예복은 또 뭡니까? 그럼 왜 이런 비상상황에 거룩한 예복을 입혀서 찬양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거룩한 사명감의 고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예복을 입힘으로 그들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재인식시키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성가대도 거룩한 예복 즉 가운을 입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폼으로 입는 게 아닙니다. 사람보기에 멋있으라고 입는 게 아닙니다. 목사 가운이나 장로 가운이 성가대 가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제 우리는 거룩히 구별되어 그리스도로 옷입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거룩한 사명을 받은 자로 구별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가운을 입는다고 거룩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세로 그 거룩한 직분이나 사명을 감당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가대원들은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우선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별된 백성이라는 그래서 거룩한 백성이라는 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을 위하여 특별히 세움 받은 자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겉으로 입는 예복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믿음과 고백과 사명감이 진정한 예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이 있다면 일상적인 삶도 거룩하게 성결하게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일상적인 삶은 아무렇게 하면서 성가대석에 앉아서 아무리 꾀꼬리 같은 소리로 찬양을 해도 그 찬양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물론 예배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세상에서는 그냥 내 마음대로 살다가 그럴듯한 옷을 입고 그럴듯하게 찬양한다고 그게 온전한 찬양이 되겠습니까? 찬양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구원과 인도하심과 거룩하심과 영광스러움과 인자와 자지를 높여 드리는 일인데 그러한 진정한 고백을 가지고 찬양해야 하고 그렇게 진정한 고백을 가지고 찬양한다면 당연히 일생생활에서도 거룩한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 성가대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나는 주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 성별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찬양 사역을 위하여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일상생활도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며 믿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며 더욱 생명의 은총과 능력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성가대는 믿음으로 앞장 서야 합니다.

성가대는 귀한 사명을 가진 자들이니 만큼 일상생활에서나 교회생활에서나 모범을 보여야 하고 앞장서야 합니다. 귀한 일을 맡으면 맡을수록 모든 일에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21절 다시 봅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여호사밧은 성가대원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혀서 군대의 앞에 세워 찬송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전술적으로보면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딨습니다. 적군이 성가대를 향해 돌진해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죽을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가대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두렵고 떨려서 찬양도 제대로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선두에 서서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20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즉 여호사밧이 ‘걱정 말아라.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러면 형통할 것이다.’라고 하자 성가대원들이 그 말씀을 믿고 적을 눈앞에 두고 군대의 제일 앞에서 담대히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지만 성가대원들은 이런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믿음 생활에서 앞장서고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교회는 성가대가 목사님 강단보다도 더 앞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성가대원들은 목사님 뒤통수 보면서 예배를 드리더라고요. 오늘 이 말씀을 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뭐니뭐니해도 예배의 꽃은 말씀인데 말씀보다 앞에 가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또 어떻게 보면 뭐 그렇지는 않겠지만 제일 앞의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 영광을 받는 것 같기도 하고...... 설령 그렇지 않아도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하려면 마주보고 해야지 뒷모습보고 하면 좀 그렇잖아요. 여러분, 이야기할 때 한 사람이 뒤돌아서서 하면 어떻겠어요?

여하간 여러분,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귀한 사명, 귀한 직분을 맡은 사람은 언제나 남보다 앞장서야 하고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성가대도 동일합니다. 특히 성가대는 예배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모든 교우들이 마찬가지지만 성가대는 정말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이 아니면 예배에 빠지면 안됩니다. 안 그래요?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데 빠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바쁘다고 빠지고 집안에 무슨 일이 있다고 빠지고 상황이 그래서 여건이 그래서 빠지고... 아닙니다. 생명이 죽고 사는 일이 아니라면 예배보다 우선 될 수는 없습니다.

사탄은 온갖 그럴듯한 이유로 예배를 방해합니다. 합리화시킵니다. 그러나 그런 합리화나 변명은 하나님의 소리가 아닙니다. 사탄의 소립니다. 우리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아휴 목사님, 세월이 그런데요. 요새 교인들 다 그런데요. 그러면 교인들 다 도망갑니다. 그러면 힘들어서 교회 생활 못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교회가 힘들어진 게 아닙니다. 반대입니다. 거꾸로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따라 환경 따라 상황 따라 사람 따라 사람 생각대로 편한대로 하니까 믿음이 죽어가고 교회가 힘을 잃고 교회가 욕을 먹고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지면 안됩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모든 일에 본이 되고 앞장서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세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 성가대석에 앉아서 졸면 안됩니다.

그리고 물론 교회의 다른 일에도 앞에서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폼 나게 싹 차려입고 하는 일에는 제법 참여하고 궂은 일은 안 하려고 합니다. 부모들도 보면 자녀들을 폼나는 일은 안시켜주면 뭐라고 그러고 궂은 시킨다고 뭐라 그럽니다. 그러나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일만 아니라 어렵고 힘들고 궂은 일에도 동참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주의 어떤 교회 이야기인데 그 교회 장로님이 자기 교회는 성가대 찬양 소리가 잘 안 들릴 때가 많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성가대가 잘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성가대와 함께 다른 쪽에서 학생들이 관현악기 현악기 타악기가 합주를 하는데 그 악기 소리 때문에 성가대가 찬양할 때에 고음은 그런대로 들리는데 저음은 안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악기연주자를 줄이자고 하니까 목사님이 악기를 연주하는 학생들의 부모들이 서운해 해서 곤란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학생들에게 교회 화장실 청소를 시키다가 그만두라고 했으면 어땠을까요? 아니 화장실 청소를 시키면 난리가 날 겁니다. 여러분, 폼나는 자리는 안 앉혀 준다고 뭐라 그러고, 궂은 일은 시킨다고 뭐라 그런다면 이게 믿음있는 행동입니까? 여러분,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도 궂은 일도 해야 합니다. 궂은 일 하는 사람 따로 있고 폼나는 일하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폼나는 일만 하려고 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요 자기가 영광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특별히 너무나 귀한 찬양의 사역을 맡은 우리 성가대는 찬양하는 일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모범을 보이고 앞장섬으로 삶의 예배가 뒷받침되어 여러분의 찬양이 진정 향기로운 찬양이 되고 여러분의 삶에도 은혜와 기쁨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또 한가지 성가대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양은 자기 만족이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찬양을 하면서 우리도 은혜와 위로가 되고 소망도 갖게 되고 능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찬양은 그게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찬양이 뭡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구원과 인도하심을 기억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즉 찬양은 나의 기쁨이나 만족이나 은혜나 소원을 이루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전지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며 기쁘시게 해드리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상황이나 환경도 이기게 되고 위로도 받고 소망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서가 바뀌어 자신이 뭔가 얻으려고 찬양을 한다면 그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노래이므로 찬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21절 후반부 다시 봅니다.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보세요.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세요. 힘을 주소서. 용기를 주소서. 저들을 물리쳐 주소서. 그렇게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인자하심을 믿고 그래서 그렇게 구원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찬양소리가 나기 시작했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도와달라고 위로해달라고 힘을 달라고 소망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진짜 찬양입니다. 나의 위로 소망 구원 도움이 목적이 되면 찬양이 아니라 찬양을 나의 필요를 채움받기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진정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성가대는 이 찬양 사역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되새겨보며 믿음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찬양하는 일만 아니라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상생활도 거룩하게 아름답게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 보기에 그럴듯한 일이든 그렇지 못한 일이든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앞장 서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정말 여러분의 찬양과 삶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상달되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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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주일낮예배설교 (Sunday morning worship preaching in March 2019)

 

제목 : 강을 건넌 사람들

말씀:수3:14-17

 


1.현실의 강을 넘어서야 합니다.

어떤 인터넷 매체에 보니까 박명수 어록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들이 있었습니다. ‘성공은 1%의 재능과 99%의 빽이다.’ ‘일찍 일어난 새가 피곤하다.’ ‘고생 끝에 골병난다.’ ‘가는 말이 고우면 얕 본다.’ ‘늦었다고 생각할때는 늦은 거다.’ ‘참을 인이 세 번이며 호구된다.’ 그리고 이런 말들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고, 이런 말들을 주옥같은 명언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지요? 공감이 가는 말들인가요? 물론 어떤 면에서는 오늘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공감이 되는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설령 그런 말들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게 진리는 아닙니다. 아니 도리어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다면 그것은 현실이 그만큼 왜곡되고 썩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사고 방식은 결코 인간의 삶을 가치있고 의미있게 하며,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갈등과 탈법과 술수와 상처와 아픔과 시기와 질투와 무질서를 초래하여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그걸 진짜로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말 뿐입니다.

여러분, 세월이 어떻게 변하고, 가짜가 어떻게 그럴듯하게 가장해도 거짓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세월이 변한다고 진리가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진리가 가짜가 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처음부터 진리가 아니었을 뿐이지 진리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너무나 왜곡된 가치관이 마치 진리처럼 가장하고 판을 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인본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무사안일주의와 쾌락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무슨 박명수 어록이니 뭐니 하는 이런 허접스런 말들이 나오고 그걸 또 무슨 주옥같은 명언이니 어쩌니하며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며 흘러가고 있는 이 왜곡된 가치관들 속에 끌려가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맨날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교제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신이 죄와 무지속에 있는 줄은 모르고 그저 자기중심, 자기 소견, 자기 의지, 자기 경험대로 물질주의, 이성주의, 이기주의 물결속에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거기에 휩쓸려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1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의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영혼이 변화되고, 마음이 변화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그 뜻을 좇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온전한 분별력을 가지고 모든 거짓되고 왜곡된 가치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다수라는 이름으로 진짜를 가장하고 있는 가짜를 바르게 분별하고 배격함으로 그런 것들에 결코 농락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오염되고 추하고 왜곡된 현실을 이기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현실의 강을 건넌 사람들

여러분,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런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 살 것을 계속 말씀하셨고, 또 그런 말씀을 따라 삶으로써 성공했던 많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아 할아버지도 그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죄가 세상에 관영하여 하나님께서는 땅을 홍수로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 할아버지 가정은 그런 현실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그 현실의 강을 건너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시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홍수를 피라하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즉각 순종하여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무려 120년 동안에 걸쳐 방주를 지었습니다.

여러분,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137m, 넓이가 23m, 높이가 14m의 3층짜리 배로 용적량이 3만톤이 넘는 거대한 배입니다. 물론 지금의 조선기술로는 이런 규모의 배 정도야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노아의 가족 여덟식구가 순전히 손으로 이 정도의 배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120년동안 그 엄청난 일을 하면서 얼마나 힘이 들었겠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었겠습니까? 이 배를 정말 우리가 완성이나 할 수 있을까? 정말 120년 후에 인류가 멸망할 비가 오기는 오는 걸까? 또 10년 30년 50년 70년 100년이 지나면서 내가 정말 말씀을 바로 듣기는 들은 걸까 등등 많은 생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전 세계의 홍수심판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믿고 배를 만드는 노아의 가족을 미치광이 취급을 하면서 노아의 가족을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런 모든 현실을 뿌리치고 배를 만들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오직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였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중단하지 않고 열심히 성실하게 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120년이 지났을 때 정말로 하늘에 구멍이 뚫려 밤낮 40일 동안을 양동이로 물을 퍼붓듯이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온 세상이 물에 다 잠겼고, 노아를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던 사람들은 하나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뭐라 그러거나 말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내부 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120년간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의 가족 8식구만이 방주 안에서 안전하게 대홍수의 강을 건너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12: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밑도 끝고 없이 무작정 가라는 것입니다. 떠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왜곡되고 죄된 문화가 판을 치는 이 땅과 이 사람들과 이 문화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떠나 내가 새롭게 시작할 그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버지와 고향산천과 그 모든 환경과 문화의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구원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애굽의 우상숭배의 문화의 땅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 멀리 가나안 땅까지 가게 하셔서 거기서 새역사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들이 뜻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죄와 무지와 왜곡과 어둠의 현실들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딛고 일어서든지 아니면 그곳을 떠나든지 여하튼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고, 거기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에덴의 모습들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렸고, 너무나 많이 변질되어 있어서 우리가 넘어야 산과 건너야 할 강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때로는 환경과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산입니다. 때로는 이성과 경험이 우리가 건너야 할 강입니다. 불신과 의심과 욕심과 욕망과 돈과 권력도 넘어서야 할 강입니다. 사람과 문화와 과학도 우리가 넘어서야 할 산 중의 하나입니다. 술과 담배와 향락과 무사안일은 말할 것도 없이 반드시 건너가야 할 강입니다. 물질주의와 인본주의과 종교다원주의와 개인이기주의도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요, 건너야 할 강입니다. 이러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모두가 원하는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정말 내가 지금 시급하게 넘어서야 할 산이 무엇인지, 빨리 건너야 할 강이 무엇인지 되새겨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인도하심과 능력 주심을 따라 그 산을 넘고 그 강을 건너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산과 강의 저너머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에덴의 축복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산과 강을 넉넉히 건너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말씀드리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어떻게 왜곡되고 오염된 가치관과 문화가 판을 쳐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푯대로 삼고 천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중요한 시점에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그때가 우기라서 요단강이 넘칠만큼 싯뻘건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요단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런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갔습니까? 오늘 1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이것은 6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으로 거기에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에 도착하면 무조건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요단강이 갈라질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은 제사장들이 멘 언약궤를 보고 건너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세상 물결이 어떻게 넘실 거려도 말씀을 따라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약궤가 뭡니까? 말그대로 약속의 말씀이 들어있는 상자입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따라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 생명의 말씀을 따라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아무리 사납게 덤벼들어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을 바라보며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요단강을 가나안복지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 때 그 사람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갈때에 사나운 강물이 넘실대며 그들을 방해하고 위협하고 낙심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갈때에 우리를 실망시키고 낙담케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환난과 풍파가 닥칠때도 있고, 때로는 환경과 상황 때문에, 때로는 물질과 건강 때문에, 때로는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말고 흔들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부여잡고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위협하고 유혹해도 그런 왜곡되고 죄되고 혼잡한 것들에게 눈길도 주지말고, 흔들리거나 낙심하지도 말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부여잡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든지,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상황과 환경을 그대로 두고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서 이기게 하시든지 여하튼 어떤 방법으로든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이 인도하십니다. 힘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환경과 상황을 변화시켜 주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그러실만한 능력과 권한과 사랑과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정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주님의 방법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때에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모든 세력들을 이기고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5,16절 말씀 보겠습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자 보십시오, 요단강물의 흐름이 언제 그쳤습니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물속에 들어섰을 때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이 덤벼들던 요단강의 흐름을 끊고 강바닥을 드러내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는데 그런 기적이 일어난 시점이 언제냐?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언약궤를 메고 사납게 요동치며 흐르는 요단강속으로 들어갔을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기적을 일으켜 놓고 건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의 경우 기적을 만들어 놓고 누리게 하시기 보다는 믿음으로 행동할 때 기적의 은총을 누리게 하십니다. 노아에게도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어놓고 타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가 만들어서 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실때도 먼저 그냥 무조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동안 반석에서 물을 내실 때도 모세에게 반석을 향하여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놓고 갖다 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물을 떠서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를 부활시킬때도 마르다에게 무덤 입구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 못가에 있던 맹인에게는 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말씀에 순종했을 때 결국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즉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갓난아기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과 순진한 마음을 보시고 은헤를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열심히 성실하게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따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따라가도 하나님이 아니라 하신 것,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버리고 넘어가고 떠나 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두말할나위도 없이 거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 사랑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 땅에서 누려야 에덴 동산이 있고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이어지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앞에 높게 서 있는 왜곡된 현실의 산들을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도도하게 흐르는 왜곡의 가치관의 강을 건너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푯대로 삼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넉넉하게 건너가게 하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도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다가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런 진정하고 영원한 승리를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우리 온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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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요셉이 감옥으로 간 까닭 (고난이 우리 삶에 끝이 아님)

 

 

 

요셉이 감옥으로 간 까닭은?

 

< 본문 - 창세기 39:19-23 >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영화가 있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제목의 영화입니다. 우연히 산새 한 마리를 죽이게 된 동승(童僧)이 성불(成佛)에 이르기 위해서 겪어나가는 고뇌의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1989년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인 금표범상을 비롯하여 국제기자협회상 등 4개의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영화의 제목에서 보여준 것처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달마(達磨)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세 번째 왕자로,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6세기에 중국에 와서 선종(禪宗)을 창시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달마가 고향 인도를 떠나 동쪽 중국으로 먼 길을 간 까닭은 제자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제자 하나를 만나겠다는 열망 때문에 고향을 떠나 수 천리의 먼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에서는 달마처럼 먼 길을 가던 동승이 노중에 겪었던 고뇌와 갈등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여정에는 그 나름대로의 뜻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불필요하고 때로는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과정이라 하더라도 다 나름대로의 뜻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고난과 역경의 길에도 그 나름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오늘의 고난이 우리 삶에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3-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또 로마서 8:18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는 이 말씀의 진리를 믿기에 때로 어려움을 당해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당하는 환난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역경이나 환난이 그것으로 끝이라고 한다면 그 어려움 가운데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끝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한 환난이나 고난을 이겨내면 우리에게 더 큰 영광과 기쁨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죽음이라는 인생 최고의 두려움 앞에서도 우리 신앙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더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인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신앙의 선조들보다 더 성실하고 본받을만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실하게 살았던 요셉이 누구보다도 큰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당한 그 고난은 그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4명의 아내로부터 12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 중에서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은 요셉과 베냐민 단 두 명뿐입니다. 라헬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지만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11번째 아들로 요셉을 낳게 되었고, 마지막 베냐민을 낳다가 죽고 맙니다. 그래서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남달리 사랑했습니다. 특히 라헬이 첫 번째 낳은 아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 때문에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결국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요셉은 어린 나이에 노예가 되어 이국 땅으로 팔려가고 말았습니다.

  당시 노예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참했습니다. 노예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주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인이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릴 수도 있고, 심지어는 죽일 수도 있습니다. 노예의 목숨은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파리 목숨’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도록 일만해야 했습니다. 일을 잘 했다고 칭찬받는 것도 아닙니다. 죽도록 일한 후에 늙으면 버려지는 것이 노예의 일생이었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서 처음 일하게 된 곳이 애굽 왕 바로의 친위대장이던 보디발의 집이었습니다. 보디발은 당시 굉장한 권력자였습니다. ‘바로의 친위대장’이라는 그의 직책이 말해 주듯이, 그는 바로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친위대장이라는 말은 요즘으로 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입니다.

  그런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실하게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보디발의 신임을 받게 되고, 어린 나이에 보디발의 집 가정 총무까지 맡게 됩니다. 가정 총무의 자리는 당시 노예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습니다. 보디발의 집 모든 살림살이를 주관하는 위치였습니다.

  

  노예로서 그렇게 잘 나가던 요셉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쳐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젊고 잘 생기고 똑똑하기까지 한 요셉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단호하게 그런 유혹을 거절합니다. 한번은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또 유혹했습니다. 요셉의 옷을 붙잡고 동침하자고 유혹했습니다. 이것은 유혹이 아니라 주인으로서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유혹이든 주인의 명령이든 간에 요셉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혹과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집요한 주인아주머니의 손에서 빠져나오느라고 요셉은 자신의 옷을 벗어버리고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요셉을 유혹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보디발의 아내는 오히려 요셉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버립니다. 요셉이 벗어버리고 간 옷을 증거물로 삼아 남편 보디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종 요셉이란 놈이 나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 하다가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이 옷을 벗어놓고 도망갔습니다.’ 물론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그것 때문에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을 사서 이국땅으로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런 삶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예생활이 좀 풀려지는 듯싶더니만, 이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더 처절한 삶의 자리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요셉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온 것도 억울한데, 이제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것 때문에, 믿음을 지키겠다는 것 때문에 그는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오히려 고통을 당하고, 오히려 손해를 본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나 손해가 적은 것이라면 그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당한 일은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예가 된다는 것도 엄청난 것이었고, 감옥에 갇히는 것 역시 곧 죽음을 의미할 정도로 아주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저는 하나님께 불평했을 것입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살았는데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하나님께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나 요셉이 보인 삶의 자세는 한결같았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성실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주인 보디발이 그를 신임하고 집안 모든 살림살이를 그에게 맡길 만큼 성실했고, 감옥에서도 간수장이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다 관리할 수 있도록 제반 사무를 다 요셉에게 맡길 정도로 그는 신실했습니다.

  

  요셉이 그런 비참한 삶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와도 묵묵하게 참고 이겨냅니다. 지금의 고통과 역경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과정 없이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의 순간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꿈이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유명한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들, 그리고 우리가 성공했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 가운데 힘들지 않게 그 자리에 올라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숨이 턱 밑에까지 차오르는 고통의 순간을 참고 이겨낸 선수만이 승리의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습니다. 고된 훈련의 과정이 없었다면 영광과 환희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힘들 때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마지막에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1등의 꿈을 꿉니다.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고통을 참아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꿈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래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꿈이 분명한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포기할 수 없습니다. 꿈이 숱한 고난과 역경, 좌절과 슬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어내게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꿈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꿈을 갖고 계십니까? 오늘의 고통과 역경보다 훨씬 큰 꿈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고통과 역경을 참고 견디며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 앞에서 불평하고 자신의 처지를 원망한다면 그건 우리의 꿈이 우리가 당한 어려움보다 작기 때문입니다. 꿈을 잃어버렸거나 꿈이 작으면 어려움 앞에서 좌절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역경을 이겨낼 힘이 내게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에게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바로 그 꿈입니다. 형들뿐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도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크게 쓰실 것이란 꿈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그 꿈이 너무너무 힘들 때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꿈을 이룰 때까지는 어떤 어려움이나 힘든 상황에 내몰린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인 노예로 전락했을지라도, 또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는 원망이나 불평으로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야 할 굼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꿈을 주십니다. 인생의 꿈뿐만이 아니라 신앙의 꿈을 주십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나를 통해서 이루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꿈이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하나님의 꿈입니다. 때로는 그 꿈을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그 꿈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마지막에 쟁취하고 얻게 될 영원한 꿈이 있습니다. 천국이라는 꿈 말입니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그 꿈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그 꿈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어떤 역경과 고통의 순간이 와도 이길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그 꿈이 우리를 하여금 담대하게 만들어줍니다. 그 꿈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 줍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에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늘 자신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의 눈길을 보내오고 자신과 동침하라고 명령을 내려도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라고 말하면서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짓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믿음 때문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런 믿음 때문에 또한 노예생활과 감옥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교회에 다니면 절대로 어려움이 없다.’거나 ‘믿음으로 살면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난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다. 요셉은 믿음을 따라 살려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만이 아닙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 때문에 죽음의 길을 가야 했던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갔습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신앙의 길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믿음을 지키다가 당하는 고난이나 역경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믿음입니다. 아니 우리의 삶에 닥친 그 어떤 어려움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믿음뿐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어떤 어려움을 당하든지, 또 어떤 역경이나 고난이 우리를 힘들게 하든지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십시다. 힘들다고 믿음을 버리거나 고통스럽다고 믿음의 자리를 떠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을 이기는 것이 믿음인데, 믿음을 버린다면 무엇으로 그 어려움과 시련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우리에게 승리를 줍니다. 믿음이 우리 앞에 당한 고난과 어려움을 재해석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일어설 수 있게 해 줍니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주인아주머니의 유혹과 부당한 명령 앞에서도 ‘지금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지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내가 어찌 그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렵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감옥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본문 20-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또 23절에서도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지켜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특히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내 주위에 아부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더욱 힘이 듭니다. 심지어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왔을 때에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창세기 39:2절에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이 노예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늘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은 늘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믿었고, 그것 때문에 요셉은 범죄에 빠지지 않고 성실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 믿음을 가지십시다. 내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일수록 하나님은 더욱 우리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 믿음으로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고, 힘들 때 내 손을 꼭 붙잡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 받으며 사십시다. 우리가 내민 손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요셉의 그 믿음이 그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읽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23절 마지막에서 말씀하고 있는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말씀이 39:2-3절에도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여러분, 형통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것이 형통한 것입니까?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찬송가 384장)고 찬송합니다. 그렇다면 만사형통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흔히 별 어려움이 없이 내가 계획한대로 잘 되어가면 형통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평안하게 잘 진행되고 있으면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계획한대로 잘 이루어져 가고 있으면 형통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사형통하리라”고 찬송할 때도 그런 의미의 형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한 삶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 계획이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대로 되어가는 것이 형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것도 형통한 길이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것도 형통한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왜 자신이 노예로 팔려오게 되었는지, 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그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세기 45:5-8)

  요셉은 자신이 노예로 팔려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을 먼저 여기로 보내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도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꿈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과정을 거치게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형통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기 위해서 그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것이기에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을 만나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고, 불평 대신에 찬송과 감사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려 애굽 땅으로 오지 않았다면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그는 바로 왕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감옥에 와서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바로 왕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요셉의 가족들은 7년의 흉년 가운데서 굶어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당신이 뜻하신 바를 이루어가셨고, 결국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들을 이루어가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의 일을 하게 된 것이나 감옥에서 제반 사무를 보게 되었던 것이 나중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국정을 운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언제 어디에서 행정경험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보디발의 가정총무와 감옥에서의 제반 사무를 보던 것이 큰 경험이 되어서 국무총리의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내고 보면 우리의 삶에 그냥 되어지는 것도 없고, 의미 없이 경험되는 것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섭리의 과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내가 지금 어려운 가운데 있다고 생각된다면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실 것인가를 기대하시고,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나가면 나중에 그 경험이 내 인생에 아주 중요하게 쓰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7-50장까지 기록된 요셉의 이야기 가운데 특이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요셉의 삶에는 어떤 특별한 기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가진 것 외에, 그 어떤 기적을 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의 위대한 모습은 계속된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단 한 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고,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셉에게 있는 꿈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요셉이 가진 믿음 우리도 가질 수 있습니다. 요셉이 가졌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 우리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꿈과 믿음과 확신을 회복하셔서 그것을 더욱 굳게 붙잡고 사십시다. 그러면 요셉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오늘 우리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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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단헌신예배 / 찬미의 능력

 

 

 

제목 : 찬미의 능력

말씀 : 행16:19-32

 

노래는 사람들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노래는 영혼을 사로잡는 힘이 있습니다. 때로는 흥겨움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힘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위안과 평안을 주고, 때로는 우리들의 마음을 엄숙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남녀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통하여 자신들의 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승화시켜나갑니다. 반대로 실연을 당한 사람들은 이별의 노래를 들으면서 더욱 애절하게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됩니다.

운동권 학생들은 거리에서 어깨를 동무를 하고 혁명적인 노래를 부르면서 투지를 북돋웁니다. 노동자들이 투쟁을 할 때는 노동가를 부르면서 단결을 도모하고 투지를 불사르게 되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는 노래를 부르면서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노래는 그 사람의 삶의 면모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노래를 좋아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관심사와 그 사람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학생들은 어떻습니까? 여러 성도님들은 어떠십니까? 맞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믿음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믿음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의 관심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서는 그 믿음의 노래는 우리를 더욱 믿음의 반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믿음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찬양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고, 어제도 인도하셨고, 오늘도 인도하시는 은혜를 찬양하고,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하신 것을 찬양하고, 오늘도 우리를 찾아 오셔서 위로하시고 은혜 주심을 기억하며 찬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찬송은 곧 믿음입니다. 찬양은 은혜의 통로입니다. 찬양은 감사요, 감격이요,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찬양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은혜요, 찬양을 통해서 기쁨과 위로와 은혜를 받으니 더욱 은혜인 것입니다. 찬송 부를 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향하며, 찬송 부를 때 우리의 마음 문이 열리며, 찬송 부를 때 믿음이 성장하고, 찬송 부를 때 기도문이 열리고, 찬송 부를 때 하늘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 부를 때 하나님이 좋아하십니다. 기뻐하십니다. 오죽 하면 우리를 찬양하게 하기 위하여 지으셨다고 말씀하셨겠습니까?(사 43:21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과 실라를 보십시오. 이들은 빌립보에 와서 또 큰 어려움을 겪에 됩니다.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고쳐 주었는데 그 주인이 자기 수입이 줄어들자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 주인이 그 지역에서는 행세꽤나 하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붙잡혀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옷을 벗기고 매로쳤습니다. 그리고는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들의 몸은 착고에 채워졌습니다.

그런데 밤중쯤 되었을 때 그 감옥속에서 노래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이들이 밤중이나 되어서 노래를 한 것은 아마도 너무나 심한 매질 때문에 그제서야 어느 정도 정신이 들어서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그 극한 상황속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매맞은 자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멍이 들고,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고 내일 어떻게 될지, 과연 살아날수나 있을지 등등의 고통과 아픔과 불안과 근심의 그 순간이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올만도 한 상황이었습니다. 후회가 될 만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차라리 예수를 몰랐더라면, 차라리 믿지 말았더라면, 공연히 예수 만나서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하나, 예수 안 믿었으면 그래도 내가 이 나라의 최고학부를 나온 사람인데.. 나도 잘먹고 대접받고 으시대며 목에 힘주고 살 수 있었을 터인데... 나는 왜 예수 믿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냐, 맨날 얻어 터지고, 두드려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하고, 강도을 만나 고통을 당하고.....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는 그러한 원망과 불평대신 찬송소리가 나왔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그 절망적이고 암담한 상황속에서 찬송을 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 결과는 이미 여러분이 다 잘 알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찬양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무언가 큰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땅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지진이 나서 땅 전체가 흔들렸는지 아니면 그 감옥 건물만 세차게 흔들렸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두가지 다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옥터가 움직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흔들린다고 감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질리는 없으므로 지진과 동시에 감옥 건물을 하나님께서 세차게 흔들어 버리셨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찬양했을 때 감옥문이 열렸습니다. 착고가 풀어졌습니다. 그러자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 간줄 알고 자살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이 그들 말렸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가 도망가지 않고 다 여기 있으니 염려 말아라 하면서 도리어 그를 위로하며 안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는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 선생님이여, 어떻게하면 구원을 받겠습니까? 어떻게하면 우리가 살 수 있습니까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 유명한 말을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간수는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들을 모두 데려와 세례를 받게 되고 그러자 그 가정에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찬송해야 합니다. 언제 어느 때고 찬송해야 합니다. 기쁠 때 은혜가 넘칠 때 특별한 감사의 조건이 있을때만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도리어 어렵고 힘들 때 찬송하기 바랍니다. 외롭고 쓸쓸할 때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사정을 모른다고 생각될 때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살이가 어렵다고 느껴질 때, 고민과 절망감과 괴로움이 몰려 올 때 그때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때, 내 뜻 대로 되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그때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으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5, 28)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나 몰라라하지 않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십니다. 비록 지금의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십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언가 좋은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범사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범사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기쁘나 슬프나, 즐거우나 괴로우나, 형통할때나 앞이 캄캄할때나, 절망적이거나 희망적이거나, 돈이 있으나 없으나, 사업이 잘되나 그렇지 못하나 여러분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즐거울 때 찬양하면 여러분의 즐거움을 배가 될 것입니다. 형통할 때 찬양하면 더욱 큰 형통함이 있을 것입니다. 절망적일 때 찬양한다면 절망은 곧 희망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괴로울 때 찬양하면 괴로움은 사라지고 즐거운 순간이 다가올 것입니다. 가난할 때 찬양하는 사람에게 가난이 곧 물러가고 부유함이 깃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말씀도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할 때 괴로움과 절망과 슬픔과 가난과 고통은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때 기쁨과 은혜와 희망과 감격과 부유함을 더 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예그랑 찬양단 헌신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찬양단은 이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찬양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찬양은 곧 복음이요, 은혜요, 능력이요, 소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찬양은 하나님을 향하여 큰 영광을 돌리는 일이요, 여러분 자신에게와 온 성도들에게는 큰 구원의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하며 동시에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기게하는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찬양은 세상을 향하여는 우리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선포하는 복음의 메시지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더욱 힘찬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이 엄청난 특권과 사명을 부여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욱 정열적으로 찬양하는 아름다운 찬양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은 우리 예그랑 찬양단에게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후원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장 잘 협조하는 방법은 여러분이 찬양단의 찬양시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제발 부탁인데 오후1시 30분 되면 와서 함께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못 받았으면 은혜를 받기 위하여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감사해서 기뻐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감사와 감격으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소원을 이루지 못한 분은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니다. 하나님을 감격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만 감동시킬수만 있다면 문제는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감동시킨다면 우리의 모든 환경과 상황은 반드시 변화됩니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죄의 사슬은 끊어지고, 어두움은 사라집니다. 절망도 미움도 원망도 두려움도 가난도 원통함도 사라집니다.

아무쪼록 어떤 환경가운데서도 찬양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승리를 여러분의 것으로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 예그랑찬양단들, 다시한번 찬양의 능력과 소중함을 생각하며 정열을 다하여 찬양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때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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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행17:10-15

제목 : 신사적인 그리스도인

 

1.성도는 최고의 신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지상 최고의 신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몇백만원 몇천만원하는 명품 옷이나 시계나 구두를 신고 번쩍번쩍 빛나는 고급 세단차를 몰고 다니는 그런 신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영혼과 인격과 정신과 생각과 가치관이 신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원래 신사 즉 gentleman은 ‘가문이 좋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문으로도 큰 띠 紳, 선비 士자를 써서 옛날 중국에서 예복을 입고 큰 띠를 맨 고위직에 있는 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사란 본래 높은 지식과 인격과 품위를 가지고 있는 높은 신분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보다 고귀한 신분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입니다. 이 보다 높고 고상한 지식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최고의 윤리 강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세상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 높고 고상하고 영광스러운 신분과 지식과 윤리강령을 가진 사람이므로 마땅히 최고의 신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벧전2: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인데 거지같은 인생을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거룩한 나라의 백성인데 속되고 추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니 그 고귀한 신분에 걸맞게 고상하고 품위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거룩한 존재인지 기억하며 몸과 마음과 말과 행동과 영혼이 거룩하고 깨끗하고 품위 있고 단정한 참 신사다운 삶의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존중받으며 주의 은총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신사다운 면모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1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너그러워서’라는 말씀은 본래 ‘고귀한 혈통의, 마음이 고상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에 쓰던 개역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신사적이어서’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말이 원어의 뜻에 훨씬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신사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2.고상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신사적이라고 평가한 것은 우선 그들은 고상한 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에서 본 11절 말씀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들은 너그러워 즉 고상하여 말씀을 잘 받아들였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속되고 추하고 더러운 것들에는 관심이 없고, 고상한 진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순전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베뢰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신사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상한 마음, 신사적인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의 돈이나 일이나 향락이나 이런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으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받지도 않고 설령 받는다해도 결코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13장에서 사람의 마음을 네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길가와 같은 마음인데 이런 마음은 완고하고 강퍅하여 죽어도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제 고집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씨알머리도 먹히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돌밭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은 말씀을 받기는 받는데 건성으로 받아 말씀이 심비에 새겨지지 않음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실족해 버리는 마음입니다. 다음에는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마음은 말씀을 받기는 한 것 같은데 마음속에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욕심이나 향락이나 이런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차 있어서 말씀의 씨앗이 싹이 터서 조금 자라다가 세상 것에 묻혀서 결실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곡식이 잡초 속에 떨어져 겨우 싹을 내긴 했으나 잡초에 묻혀 아무런 결실도 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이 고상하여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씨앗이 잘 싹이 트고 자라나 30배, 60배, 100백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바로 신사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네 종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애굽왕 바로는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끝까지 완고하고 강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다가 끝내 열가지 재앙을 당하고 전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비극을 만났습니다. 가룟 유다는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재물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까지 팔아 넘겼고,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사람으로서 듣지 못할 소리를 들었고, 결국 비참한 자살로 최후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재물을 탐을 내다가 부부가 함께 죽는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데마라는 사람은 처음에는 바울을 따라 다니며 열심히 믿음 생활하는 것 같았으나 믿음의 뿌리가 없어 바울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 결국 천국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에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보았던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는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하여 베드로사도를 초청한 다음에 온 가족과 친척과 친구까지 초청해서 모아 놓고 기다리다가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러 오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모셔 들여 겸손히 말씀을 받음으로 온가족과 친척과 친구까지 구원받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으나 피라미 새끼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지치고 곤한 몸으로 돌아와 항구에 배를 대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셔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인 베드로의 지식이나 경험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고기는 주로 호수의 가장자리 근방에서 잡히지 가운데 깊은 곳에서는 잘 잡히지 않습니다. 게다가 해가 중천에 떠오른 지금은 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헛그물질을 했기에 지칠대로 지쳐 이제는 그물질 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까지 별거 아닌 자신의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다 내려놓고 ‘주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했으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여러분, 저는 농사도 잘 모르고, 여러분의 직장이나 경영하는 사업장의 상황이 어떤지 솔직히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농사를 짓는 일이나 직장생활하는 일이나 사업장을 경영하는 일에도 제 말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언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각론에 들어가서는 여러분의 경험과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되 근본적인 원칙은 반드시 제말대로 하십시오. 겸손히 저의 말을 받아들이십시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배격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겸손히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방법은 여러분들보다 만배 억배 수백 수천억배 더 좋고 더 크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에 성공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 안에 풍성함이 있습니다. 오직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그 방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인생의 배가 가득 차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강퍅하고 완고하고 가시덤불같은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그 알량한 지식과 이성과 경험만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밤새도록 아니 죽을 때까지 수고해봐야 결국은 헛그물질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베뢰아 사람들처럼 옥토와 같은 마음, 고상한 마음, 신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여러분 인생의 배가 만선을 이루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여러분, 베뢰아 사람들은 이렇게 고상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또 어떻게 하였다고 하였습니까? 앞에서 본 11절 다시 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러한가하여’라는 말씀은 성경이 정말 그런지 아닌지 의심하며 읽었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이 누구신지, 참된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 진정 인생이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 알기 위하여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입니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렇게 성경을 상고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처음에 바울에게 들었을 때는 겸손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그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다음에는 이 고상한 진리의 말씀을 더욱 바르게 자세히 확실하게 알기 위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고,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듣게 되었고,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분명히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일단은 겸손하고 순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다음에는 열심히 말씀을 상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분명하게 알려주시고 믿게 하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어디에 생명이 있는지, 무엇이 복을 받는 길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알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최고의 신사다운 면모를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말씀을 받지도 않고, 설령 받았다해도 간절하 마음으로 상고도 하지 않으면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고집과 이성과 경험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면 결코 신사와 같은 인생도, 성공한 인생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초라하고 추하고 자부심도 긍지심도 가치도 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열심히 상고하면 진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가운데 살게 됩니다. 성공한 인생, 멋있는 인생, 신사중의 신사와 같은 인생, 주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겸손히 말씀을 받고 열심히 상고함으로 주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신사다운 신사의 삶을 살아감으로 빛과 같이 빛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믿음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짜 신사는 진리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입니다. 죄와 악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쉽게 불의에 굴복하고 죄와 야합하고, 세상과 짝하며 추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들과 벗하며 지내면 신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짧은 신앙경륜에도 불구하고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믿음을 지킬뿐더러 바울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14,1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무슨 말씀이냐하면 바울은 베뢰아에 오기 전에 데살로니가에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시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모함하여 체포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간신히 보석금을 주고 풀려나긴 했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전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 이곳 베뢰아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이 전도는커녕 도리어 신변이 위험해지자 예수님을 영접한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일행을 아덴까지 안전하게 피신시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된지 불과 한 두달내지는 몇 달 밖에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많은 군중을 선동하여 바울을 무슨 이단자나 사이비 집단으로 몰아간다면 혼란에 빠지고 미혹당하기 쉬운 때였습니다.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이런 위협과 유혹과 핍박이 있으면 교회를 떠나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있기 십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그 짧은 신앙연륜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협과 공갈과 유혹과 핍박 앞에 무릎 꿇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겸손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였기 때문에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킬 뿐만 아니라 위험을 무릎쓰고 바울일행을 안전하게 아덴까지 피신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신사적인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부인하고 도망가고 숨는다면 그게 무슨 신사이겠습니까? 조금 손해볼 것 같으면 진리를 팔아버린다면 그게 무슨 신사겠습니까? 베뢰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짧은 신앙연륜에도 자신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은 물론 바울일행까지 안전하게 피신시켜주는 신사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신사다운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고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런데 조금 힘들다고 진리를 버리겠습니까? 어떻게 조그마한 물질적 이익을 위하여 신앙양심을 팔아먹겠습니까? 어떻게 죄의 세력에 굴복하고 더럽고 추하고 거룩하지 못한 것들과 야합하며 친구가 되겠습니까? 그래가지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영화로우시고 거룩하신 주님의 자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진정 신사다운 크리스천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고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열심히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온전한 관계속에서 내 생각, 고집, 이성, 경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세상의 모든 죄나 악이나 더럽고 추하고 속된 것들에게 지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안에서 예수님을 따라 거룩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신분에 어울리는 신사 중의 신사적인 모습으로 주의 영광 나타내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받고 존경받고 인정받으며 주님의 은총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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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예배 설교 / 절망 중에서 구원하심

 

 


막 5:25-29 

 


“…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막 5:25-29)

Ⅰ. 본문해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많은 기적을 베푸셨다. 그러나 이것은 기적을 바라보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제시된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Ⅱ. 불행에 항거함
본문에는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나온다. 혈루증은 아마 여자의 몸 속에서 하혈이 계속되는 병을 가리키는 듯하다. 율법은 이러한 병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였기에, 이 여인은 부정한 자가 되어 성전에 갈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도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여자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당한 채 12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 12년의 세월 동안 그녀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경험하였다.

A. 괴로움을 받음
첫째로, 여자는 많은 의사에게 괴로움을 당하였다. 낫고자 하는 그녀의 갈망은 많은 의사를 찾게 하였다. 그녀는 유명하다는 의사를 찾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 전해져 오는 방법으로도 자신을 치료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병은 낫지 않았고, 마가는 그녀가 많은 의사에게 괴로움을 당했다고 말한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희망 하나로 많은 의사를 찾았지만 그녀는 병을 치료하는 과정 중의 많은 고통과 수치심을 받았던 것이다.

B. 재산을 허비함
둘째로, 여자는 가진 재산을 다 허비하였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재산이 있었겠지만 많은 치료 비용을 지불하면서 결국 가진 것을 다 소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여자의 문제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가족의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아픔으로써 가족들도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삶의 평안함은 상실하게 된 것이다.

C. 병세가 중해짐
셋째로, 여자는 병세가 더 중해지게 되었다. 많은 의사에게 괴로움을 당하며, 가진 것을 전부 소비하였지만 아무 효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병세가 더 중해졌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의지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구원은 이렇게 자신이 의지하던 것에 대한 깊은 절망에서 시작된다. 이 여자는 자기가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버렸다. 의사들을 의지했었고, 자신의 재물을 의지했었다. 스스로 병을 낫고자 하는 열망을 거두지 않고 살아갔다. 그렇지만 이제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가 온 것이다. 그때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Ⅲ. 예수를 믿음
그녀가 듣게 된 것은 갈릴리에서 오신 어떤 사람이 병든 자를 고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에 대해 받은 인상은 인간 의사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단지 병만을 고치는 것이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그들의 마음까지 치료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을 뜻하는 헬라어 ‘쏘데’는 그야말로 구원을 말한다. 왜 여자는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면 나으리라고 하지 않고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을까? 이 여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병뿐만 아니라 상처 입은 그녀의 인생 전체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모종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 이외에 나를 구원할 분이 없으며, 모든 구원은 그분께로부터 나온다는 믿음, 이것이 곧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Ⅳ. 결론
하나님은 이 가련한 여자를 버려두지 않으셨다.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하나님은 그녀의 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셨다. 만약 훌륭한 의사를 만나 고침을 받았다면 이 여자의 삶은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나자 그녀는 믿음의 여인이 되었고, 이제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만약 여러분이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굳게 붙든다면, 오늘 여러분의 인생에 드리우는 실패의 그림자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여러분을 데리고 갈 것이다. 그러므로 시련과 실패 속에서 간절히 주를 찾는 자들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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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주일 낮 예배 설교 (Sunday worship Preaching, September 2018) 
 

 

 


말씀 : 마13:3-9

제목 : 마음을 옥토로 만들때

1.풍성한 열매의 관건은 밭입니다.

농사를 지어서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면 여러 가지 구비 조건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밭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아무리 품종이 좋고 기후나 기술이 좋아도 토질이 형편없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면 밭을 갈아 부드럽게 하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퇴비도 넣고 토양 소독도 하면서 밭을 장만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밭이 깨끗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워야 인생의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우리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인간의 심령이 너무 왜곡되어 있어서 복음이라는 너무 귀하고 복된 생명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졌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한 생명의 말씀을 아예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마저도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든지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속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나라와 동시에 이 땅에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화와 소망을 주는 복음의 씨앗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의 밭에 뿌려 졌고 또 얼마든지 그것을 믿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릴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거부하고, 어떤 이는 겨우 받아들이긴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거나 심지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생명의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같은 생명의 씨앗이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거부당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 자라다가 말라죽고, 어떤 사람에게는 근근이 목숨만 부지하고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것입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문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완고하고 단단하게 굳어져 있거나 돌밭과 같이 얄팍하거나 세상의 온갖 잡초들로 무성하여 복음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지 못하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능력을 본 사람들 중에도 어떤 이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어떤 이는 복음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에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감히 세상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엄청난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능력을 본 사람들 중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여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지만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대로 살아가는 완고하고 어리석은 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겨우 받아들인다해도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마음의 밭을 잘 다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인해 단단해지고, 세상의 온갖 잡초로 가득하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이성을 의지하려는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깨트리고 부드럽고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 생명의 말씀이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마음의 밭을 옥토로 만들 수 있습니까?

2.단단히 굳어진 마음을 깨트려야 합니다.(3,4절)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려면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묵상하며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심령속에 들어있는 단단하게 굳어진 것들을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속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먼저 3,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씨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길가란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인간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해졌건만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로 완전히 굳어져 있어서 생명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심령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으로 너무나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은 대부분 물질적으로 많고 좋은 것을 누리며 높은 자리에 올라가 대접받으며 육체적 물질적으로 평안하고 부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기를 쓰고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고 애쓰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과 정열을 거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완전히 굳어질 수 밖에 없고, 그러한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굳어지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도 못함으로 이를 거부하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치달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복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아직도 그 심령 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물질적 육체적 가치관으로 인하여 말씀 따라 가지 않고 세상을 따라 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단단하게 굳어진 심령을 깨트려 부드럽게 하고 생명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존재인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과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너무나 왜곡되게 굳어진 옛자아가 깨트려 주심으로 진리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 동안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왜곡된 가치관들이 깨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 속에서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어 그야말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찌 하든지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며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어리석은 자요 완고한 인생임을 고백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임함으로 세상의 것으로 굳어져 있던 마음이 활짝 열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온전히 심겨지고 그래서 그 말씀이 여러분 심령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말씀이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려야 합니다.(5,6절)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마음이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온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5,6절을 보십시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기서 돌밭은 돌이 많은 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 위에 약간 흙이 덮여있는 밭을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싹이 텄으나 가뭄이 들자 땅속의 습기를 공급받지 못함으로 금방 말라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심령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령에 말씀의 씨가 겨우 들어가긴 했는데 그 마음속이 아직도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말씀이 그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는 진정한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복이나 기쁨이나 평안을 위해서 다니고, 그래서 뭔가 믿는 흉내를 내기는 내는데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실족하여 넘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10년 20년 30년 교회에 다녔다고 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굳어진 심령이 깨지지 않음으로 그저 세상 기쁨이나 평안이나 위로나 복을 위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별일 없이 웃고 떠들고 재미있게 교제할 때는 그 재미로 교회에 다닙니다. 또 뭔가 어려움이 없고 일이 잘 되면 좋다고 교회에 다니고 어떤 때는 은혜를 받은 것처럼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도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교인과 뭔가 관계가 틀어지고 뭔가 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뭔가 좀 자기에게 서운하게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알아주지 않는 것처럼 여기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나도 왕년에 세례를 받았다, 성가대를 했다, 교사를 했다고 하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그건 그냥 교회에 왔다갔다 한 것이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속된 말로 때려 죽여도 교회에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생명의 주를 만났는데, 천국과 지옥을 아는데 어떻게 교회를 안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다름 아니라 마음이 돌밭이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 심령 속에 아직도 인간적인 생각과 가치관과 경험과 이성이 바위처럼 굳어 있어서 그냥 인간적인 생각으로 교회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교회생활하면 안됩니다. 정말 나 자신을 깨트려 부수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오직 그 말씀만이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걸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냥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돕고 위로하는 것은 직장이나 마을이나 동호회나 계모임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사랑도 나눌 수 있고 서로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으로 교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래서 이 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다가 무엇보다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한 진리이고 이것을 아는 사람은 죽어도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교회생활하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조금 어려움이 오고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만 졸업해 버립니다. 교회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조금 서운하게 하면 그만둡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심령 속에 바위처럼 굳어져 있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지식의 단단한 것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인간적인 기쁨이나 평안이나 욕구 충족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며, 오직 말씀안에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살다보면 인간적인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사랑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심령속에 굳어진 왜곡된 생각들을 하루속히 버리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권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먼저는 나 자신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마음속의 잡초를 뽑아버려야 합니다.(7절)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로 완고하게 굳어져 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그 다음에는 마귀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뿌려놓는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의 밭을 부드럽게 해도 온갖 못된 잡초들이 무성하면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7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말씀을 겨우 받아들이긴 했는데 그래서 뭔가 자라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만 마음속에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 같은 것들로 가득차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밭을 아무리 부드럽게 하고 퇴비를 넣고 씨앗을 뿌려도 잡초가 무성하면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겠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심령에는 너무나 많은 잡초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근심과 걱정이 잡초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향락과 즐거움이 잡초가 됩니다. 어떤 이는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욕심이 잡초입니다. 어떤 이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잡초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잡초는 얼마나 질기고 강하고 잘 자라는지 모습니다. 밭에 곡식의 씨앗을 뿌려 놓으면 잡초가 먼저 납니다. 조금만 방치하면 잡초가 곡식을 완전히 덮어 버려 곡식은 약해져 죽거나 겨우 살아남아도 열매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 인간 심령도 그렇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강렬하게 역사하는지 조금만 방심하면 온갖 왜곡되고 추하고 부정적이고 악하고 불신앙적인 것들이 우리 심령을 차지해 버립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영광과 향락과 원망과 불평과 증오와 미움과 같은 잡초들이 말씀을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제거하고 이겨야 합니다. 이걸 이기는 방법도 다른 게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덧입어 마귀가 잡초의 씨앗을 뿌리지 못하게 하고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니 완전히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8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말씀으로 채우고 잡초들을 제거하면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속에 있는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을 제거하고 진정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사랑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되고 귀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얼마나 자신의 삶이 윤택하고 부요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이러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뿌리박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의 밭에 있는 모든 잡초들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진정 주님의 인도하심과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오직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생명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면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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