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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설교 -다시 듣고 싶은 은혜의 설교

 

 

종려 주일 설교


[마리아에게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몇몇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가 하신 일을 그들에게 알렸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가야바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가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니, 민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한데 모아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들은 그 날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고난주일이며 종려주일인 오늘 아침, 주님의 전을 찾아 나온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수요일은 춘분이었습니다. 춘분, 낮의 길이가 밤의 길이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는 절기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만 춘분은 자연계에 있어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는 절기로 동양과 서양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춘분을 중요한 날로 여겨왔습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이 어느새 녹고 그 위로 새싹들이 쑥쑥 올라옵니다. 저 안에 무슨 생명력이 남아 있을까 싶어 보였던 메마른 나뭇가지 위에도 새순이 돋고 꽃들이 활짝활짝 피어납니다. 생명의 기적, 부활의 기적이 일어나는 절기가 바로 춘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이 절기와, 생명이 새롭게 태어나는 춘분절기를 지내며 우리의 마음과 우리 사회에도 그런 참되고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길 소망해 봅니다.

 

●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제자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최대의 명절로 그 어느 때보다도 예루살렘이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해의 예루살렘은 유난히 붐비고 뜨거웠습니다. 이스라엘 대중 사이에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한 바 있었고,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기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이번 유월절 명절을 맞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게 되면 대중의 지지를 힘입어 이스라엘 전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키실 것이라 믿었고, 그 변화는 자신들의 입지와 사회적 지위를 크게 높여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를 두고 다투기까지 했지요. 

예수님께서 성서의 예언처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사람들은 구원자를 맞아들이는 예법으로 예수님을 맞았습니다. 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마태복음 21장 10절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에, 온 도시가 들떴다’(마 21:8-1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결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셨기에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을 예고하셨던 것이죠.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열렬히 외치는 ‘호산나‘ 소리가 곧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는 소리로 바뀔 것까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그곳은 영광이 기다리는 자리 같았으나 죽음이 기다리던 곳이었습니다. 

 

● 예루살렘
예루살렘,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 그 중심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습니다. 헤롯에 의해 46년에 걸쳐 크고 웅장하게 지어진 성전, 비록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배하에 있었지만 아직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하심을 느끼게 해주던 곳,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모여 제사를 통해 민족공동체성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곳. 그러나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제물을 비싼 값에 팔았고 성전세금을 거두어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그 돈의 상당부분을 자기들의 비호세력인 식민지배자 로마에 갖다 바쳤습니다. 

“최고의 것이 부패하면 최악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대제사장 무리는 이스라엘 최고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기신 자리를 옳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배하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백성들의 돈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갈취해 자신들의 배를 불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가 부여한 세금과 부역 이외에도 성전에 제물을 바쳐야만 했고 종교세를 내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2중 3중의 고난으로 허리가 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날 바로 성전에 가셔서 제물을 파는 사람들의 의자와 돈을 바꾸어주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과 사람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불의하고 부패한 성전체제가 뒤집어져야 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권력자 중에 자기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을 그냥 두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제사장 무리는 그 순간부터 예수를 죽일 방도를 찾았습니다. (누가복음 19:47, 막 11:18)

 

●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
예루살렘은 예수님에게도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차례나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당신이 당할 고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함이기도 했겠지만, 예수님 스스로에게도 고난을 준비하게 함은 아니었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말함으로써 자신을 확신시켜나가기도 하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소위 말하는 최후의 만찬 후에 제자들 몇 명과 함께 예루살렘 건너편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마가복음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는 매우 놀라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막14:33,34) 
‘매우 괴로워하다’.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라는 표현은 왠지 예수님이 사용하시면 안 될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너무 연약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그 고통이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아버지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세 번이나 기도하셨던 것이구요. 

기도 후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유다와 함께 찾아오게 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붙잡혀 의회 앞에 끌려가 고난을 겪게 되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이 우글거리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걸까요? 굳이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으셨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그들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갈릴리와 이방 땅으로 가셔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좀 더 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더 좋은 방법은 아니었을까요? 학교를 세워 더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당신의 말씀과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저술 작업에 힘쓰시는 게 더 나은 방법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다 해도 1,2년 더 미룰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왜 꼭 그 때여야만 했던 것일까요?

 

● 양을 살리기 위해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 전해주지 않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을 길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1장에 나오는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장소는 베다니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마을입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에게 좀 특별한 마을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11:5)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그곳으로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반대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죠. 그런데도 예수님은 끝내 베다니로 가셨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모든 기적의 결과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긴급대책회의(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한 사람이 말합니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을 받습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그들 논의의 결론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를 죽이자’(11:53)였습니다. 그들은 크게 두 가지 잘못된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과 자기들이 속한 집단을 사회 전체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생각보다 자주 만나게 되는 사고방식인데 무척 위험한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은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요, 자기의 손해는 공동체 전체의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자는 공동체에서 제거해야 하는 불순분자로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자기가 ‘절대’가 되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이 사회공동체의 여러 부분 중에 한 부분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무너짐이 오히려 공동체의 안정과 평안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의 잘못된 생각은 자기들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 그 누군가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강요된 희생에 기반을 두고 유지되는 구조는 폭력적인 구조입니다. 자기가 살고자 남을 죽이는 구조는 악한 구조입니다. 또한, 그것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구조는 악마적 구조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폭력적인 구조와의 충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런 폭력적인 구조가 반대자를 처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대제사장 무리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 시점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따르면 성전정화 사건 이후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이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성전정화 사건이 이 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일로 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오신 목적이 나사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든 나사로를 살리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작정하게 된다고 해도, 그래서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신 것입니다. 

두 곳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대책 없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간 목자, 늑대와 같은 들짐승들이 자기에게 달려들 수도 있는 그 위험을 전혀 계산하지 않고 오직 잃어버린 한 마리만을 생각하며 온 땅을 헤매던 목자, 또 그 양 한 마리를 찾은 게 뭔 큰일이라고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나와 함께 기뻐해 달라’고 말하던 목자에 대한 예화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라는 말씀도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베다니가 있는 예루살렘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신 순간 그 예화와 그 말씀은 육신이 되었습니다. 

 

● 한 생명을 살리고자
여기서 주목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무리의 방향성과 예수님의 방향성.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는 말도 있지만, 대제사장 무리는 예수 한 명을 죽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동원했습니다. 하나님, 민족, 성전, 대중, 로마를 동원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동원한 하나님, 민족, 성전은 물론 올바른 하나님, 민족, 성전이 아니었지요. 그들이 겉으로 내세운 높고 숭고한 가치들의 이면에는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고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이권과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무기들로 중무장하고 예수를 죽이러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 중무장한 무리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권력화된 하나님도, 으리으리한 성전도, 민족을 대표할 권한도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고 물 위로 올라올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참 좋아한다’라고 말씀해주신 하나님, 내 몸 하나를 하나님이 머무시는 성전으로 삼고 산다는 정신, 이스라엘 곳곳에서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하며 따르는 가난한 민초들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연어가 강 상류에 새 생명을 낳기 위해 거칠고 험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듯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베다니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결국, 대제사장 무리는 한 생명을 죽임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고, 예수님은 한 생명을 살림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셨습니다. 

과연 우리의 삶은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일체의 것을 뒤로하고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겉으로는 예수님을 말하지만 실상은 대제사장 무리를 따르고 있지는 않는지요?

얼마 전 <영재발굴단>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9살 최주원이라는 어린이가 소개되었습니다. 주원이는 아인슈타인을 좋아합니다. 특히 특수상대성이론을 좋아합니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속도가 빛보다 빨라지면 시간이 느려진다는 이론이고 실험을 통해서 증명된 바가 있는 이론입니다. 주원이는 블랙홀과 웜홀에도 관심이 많은데 웜홀은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나온 바 있죠. 두 시공간이나 한 시공간의 두 곳을 잇는 좁은 통로를 의미합니다. 그 좁은 통로를 이동하는 비행체가 소위 말하는 타임머신이죠. 주원이는 이 타임머신에 엄청 관심이 많습니다. 9살짜리 주원이는 이 쉽지 않은 이론들을 줄줄 꿰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위해 찾아간 피디와 카메라 촬영기사를 앞에 세워두고 긴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주원이는 더 공부하고자 틈만 나면 책을 보고 영어사전을 찾아가며 영어논문들까지 보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방송국 사람이 물었습니다. “주원이는 타임머신을 타고 뭘하고 싶어요?” 주원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세월호 침몰할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때로 돌아가 형, 누나들에게 저 배는 침몰하니까 타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래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좀 더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주원이가 5살 때 세월호 사건이 있었고 그때부터 주원이는 세월호 관련 뉴스를 보면서 굉장히 마음 아파했답니다. 주원이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세월호의 형, 누나들을 구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순수하면서도 바보 같아 보이는 열심, 한 생명을 살리고자 자기의 전부를 쏟아붓는 모습은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고난주간, 온갖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으로 서계십니다. ‘너 이곳에 올 수 있니?’, ‘너 또한 이곳에 서야 하지 않겠니?’ 물으시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나사로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이 시대의 강도 만난 자가 우리의 나사로라고, 우리 가운데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우리의 나사로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혼자 감당할 수 아픔 속에서 절규하는 한 생명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아픔과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 나사로들의 울음소리를 주님의 울음소리로 알아듣고 그들 곁으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아픔과 고난을 품어 안아 줄 때, 그 아픔과 고난은 우리를 참된 생명에 이르게 해 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메마른 가지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놀랍고 아름다운 변화일 것입니다. 이 변화의 춘분 절기와 고난과 부활의 절기를 지내며 우리의 삶에 그런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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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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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예배 설교- 하나님의 방식으로 (To Live In God’s Way)

 


 

제목 :이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To Live In God’s Way)

말씀 : 베드로전서 5:5-11

 

5 젊은이들은 웃어른께 순종하며 겸손하십시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6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를 때에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7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8 마음을 강하게 하고 늘 주의하십시오. 원수 마귀가 배고파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9 마귀에게 지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 있기 바랍니다. 온 세상의 모든 성도들도 여러분과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10 힘든 고난은 잠시 동안입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르게 세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뒤에서 받쳐 주시고 든든하게 세워 주셔서, 결코 넘어지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여러분을 친히 부르셨으니, 그 영광이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기도드립니다.
11 모든 능력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멘. (쉬운성경)

 
매년 이 시간이 되면 우리 마음이 착잡해 집니다. 마음이 착잡해 지는 이유는, 올 한 해에 대한 후회와 반성 때문입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좀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는데......” “좀 더 사랑할 수 있었는데......” 이런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편 우리 마음 속에 다가오는 새로운 해에 대한 기대감이 있습니다. 이 기대감을 생각하면 우리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새해에는 무슨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직 한번도 살아 보지 않은 시간에 대한 기대감과 희망이 우리 가슴을 뛰게 합니다.


여기까지는 누구에게나 다 이 맘 때가 되면 드는 생각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았는지 우리 자신들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열심히 살았고, 업적을 남겼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크리스천으로 사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에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길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걷는 “넓은 길”이 아니라, 길이 좁고, 험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걷지 않는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넓은 길”는 걷기에 편한 길이지만 그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좁은 길”은 그 길로 가는 사람이 적지만, 그 길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7:13-14).

구약성경에도 이 길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물이 넉넉한 요단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이 보이는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 가는 멸망의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선택한 길과 반대편으로 난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길을 선택한 아브라함은 동서남북 사방을 바라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길이었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있는 길이었습니다.

성경에 또 다른 길이 나옵니다. 하나는, “여로보암의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번영이 약속된 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중심적인 생각이 지배하는 우상숭배의 길이었고, 악한 길 (왕상 13:33, 15:34, 왕하 3:3, 10:29)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다윗의 길 (역대하 34:2)”이 있습니다. 다윗이 살아왔던 길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길이 어떤 길인지 보여 주십니다. 저는 오늘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이, “새해에는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여러분의 결심을 하나님께 올려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믿음 생활에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심했다고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결단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이 결단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면 우리가 결심한 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어 보면 우리가 따라서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방식에 대한 삶이 네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authority를 따라 살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5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n the same way, you younger men must accept the authority of the elders. And all of you, serve each other in humility, for ‘God opposes the proud but favors the humble.’” 이 말씀에 나오는 “elder”라는 말은 공동체 안에서 나이 많은 윗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의미에서 “elder of elders”는 하나님이십니다.  골로새서 4:1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Masters, be just and fair to your slaves. Remember that you also have a Master in heaven.”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authority를 인정한다는 것은 내 삶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은 이렇게 결정할까 저렇게 결정할까 하고 망설여지고 혼란스러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쪽으로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순간에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결정해 버리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중에 이런 종류의 크리스천들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은 게 아니라 거의 전부가 이런 식으로 삽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크리스천인 줄 압니다.

저는 결코 완전주의자가 아닙니다. 저는 인간성의 연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제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우리의 연약함만 내 세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제는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는 승리의 기쁨을 맛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성경 말씀이 맞다, 성경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나의 삶을 통해서 증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서 그런 말씀을 읽었습니다. 무디의 성경에 “T”와 “P”자가 군데 군데 무슨 암호처럼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T”자는 “tried”의 약자였고, “P”자는 “proved”의 약자였다고 합니다. “tried”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 그대로 시도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proved”는 이 말씀이 사실로 입증되었다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authority, 하나님의 권위라고 할까요? 아니면 조금 의역해서 하나님의 주인되심이라고 할까요? 내 삶에 대한 나의 authority가 아니라 하나님의 authority를 인정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태까지는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나의 권위를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항상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 그 삶에 만족한다면 계속 그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 마음대로 살아서 나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한번 살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방식은 다른 것 아닙니다. 너의 삶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오늘 말씀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방식은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So humble yourselves under the mighty power of God (6절)”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간성 자체가 교만합니다. 그래서 겸손하려고 애는 쓰지만 그 때 뿐이고, 여전히 우리는 교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속적으로 겸손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훈련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한 삶의 비결입니다.

셋째로, 오늘 말씀에 나와 있는 삶의 방식은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걱정과 근심을 내가 안고 살았던 삶의 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걱정과 근심을 맡긴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부모가 자기들을 돌본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딜 가도 돈 낼 걱정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돈을 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19:14)” 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에게서 보신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나의 부모가 나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믿음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온갖 걱정과 근심을 합니다. 오늘 말씀에 “Give all your worries and cares to God, for he cares about you (7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보니까 구약성경에도 이와 똑 같은 말씀이 나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시편 55:22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쓴 시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다윗에게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되는 일들이 많았습니까? 생명의 위기를 느낀 적이 많았습니까?

언제부터인지 사울에게 악한 영 (evil spirit)이 들어갔습니다. 악한 영이 들어가면 사울은 괴로워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사울을 치료하기 위해서 추천한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이 수금 연주를 잘했기 때문에 그의 연주를 들으면 사울의 증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증상이 악화될 때는 별로 효과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수금 연주를 듣던 사울이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다윗을 향해 던졌습니다. 그 창은 다윗의 목을 겨누었습니다. 가까스로 다윗은 그 창을 피했고 창은 벽에 박혔습니다.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평생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사울이 실수할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향한 사울의 창 끝은 두 번이나 빗나가 벽에 박혔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그 무엇이 다윗을 지켜 주었을까요? 바로 시편 55:22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짐을 여호와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을 돌보실 것입니다. 그분은 절대로 의로운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다윗을 모든 불안과 위기의 순간에서 그를 구원하였습니다. “Give your burdens to the Lord, and he will take care of you. He will not permit the godly to slip and fall.” (New Living Translation) 이것이 다윗이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2016년 새해를 살아가는 너희들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Stand firm against God, and be strong in your faith (9절)”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평안하고 걱정 없을 때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삶에 고난이 닥칠 때 더욱 중요합니다. 2016년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에 아무 고난이 없을까요? 파도가 없는 바다처럼 고요하기만 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불어 닥칠 고난을 예상해야 합니다. 베드로도 신앙의 박해를 피해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방에 피신해 있는 성도들에게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고난의 삶을 예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겁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겁내지 말고 “Stand firm against God, and be strong in our faith”이라고 합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을 보세요. “Remember that your Christian brothers and sisters all over the world are going through the same kind of suffering you are.” 너 혼자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같은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위로가 되시나요? 여러분의 학업, 새해에는 아무 일 없이 계획한대로 잘 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비지네스, 새해에는 잘 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어쩌면 올해 보다 더 어려운 해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헬조선”이라는 말이 젊은 청년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헬 (hell)은 지옥이란 뜻입니다. 조선이란 말은 한국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옥과 같은 한국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들이 청년들의 입에서 오르내린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픕니다. 지금은 헬조선이지만 내년에는 그런 말이 없어질 것이라는 보장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보다 더 심한 신조어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Stand firm against God, and be strong in your faith” 이 믿음입니다. 힘이 들수록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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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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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감사 예배설교 (Happy-New-Year Service)

 

 


말씀 : 잠3:1~10

제목 : 복된 새해를 위하여

지하철에서 어떤 아저씨가 칫솔을 팔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너무 좋은 물건 하나 소개해 드리려고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물건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칫솔입니다. 왜 가지고 나왔습니까? 물론 팔려고 가지고 나왔습니다.

자, 칫솔이 이렇게 다섯 개가 한 묶음으로 되어있습니다. 얼마일 것 같습니까? 단돈 천원입니다. 뒤에 보면 made in korea라고 쓰여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수출품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수출이 잘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망했습니다. 잘 되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자, 어쨌든 백문이 불여일견, 하나씩 드릴테니 찬찬히 구경해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몇 분이나 사실까요? 저도 모릅니다. 잠시 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 네. 점잖은 신사 분 한분이 구입하셨습니다. 더 구입하실 분 안 계십니까? 네, 많은 분들이 저를 믿지 못하고 망설이고 계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만 팔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몇 개를 팔았습니까? 네, 한 개입니다. 그럼 제가 얼마를 벌었습니까? 1,000원입니다. 아니 원가를 빼면 300원 벌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실망했을까요? 네, 아주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여기서 포기할까요? 아닙니다. 저는 다음 칸으로 갑니다. 남은 하루도 즐거운 시간 되시고 안녕히 가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음 칸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는 아저씨입니까? 비록 지하철에서 칫솔을 팔고 있지만, 비록 수입은 많지 않지만 얼마나 여유가 있고, 얼마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혹시 실망할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다음 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는 혹시 좀 실망스럽고 힘든 일이 있다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희망과 긍정 속에 한 해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주님 말씀따라 한걸음 한걸음 앞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분명히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한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복된 한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한해를 정말 은혜가 충만한 시간들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가운데 살려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나 긍정의 생각이라고 내 마음대로, 세상 가치관대로의 긍정은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긍정하는 것이 올바른 긍정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죄와 어둠 가운데 있고 하나님은 빛이시오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긍정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 뭐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1:8절을 보십시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보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라. 지키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할 것이라. 형통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생명과 축복과 평강과 위로와 기쁨의 근원자이십니다. 모든 우주만물과 그 질서와 규칙과 규범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주만물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모든 우주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당연히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따라가면 그 인생이 생명과 진리와 은혜로 충만해 질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빛이신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을 따라가면 빛의 은혜, 생명의 은혜를 누릴 것이요, 어둠과 사망에 속한 마귀 사탄을 따라가면 어둠과 사망의 그늘 속에 살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와 어둠속에 있는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자기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마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인생의 참된 생명의 양식이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규범이며, 규칙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성경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서 인간이 스스로 만든 룰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이 정해주신 룰만이 하나님께 통하는 길이며 그것만이 인간의 생명을 보장하고 풍성케 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성경만이 인간의 삶에 유일하게 완전한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규칙이요, 규범이요, 가이드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의 영과 육과 정신에 관한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은 오직 성경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천지창조 때부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알고 인간 존재에 대하여, 인간이 살아가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하여 규칙을 정할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모든 인생은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실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안의 그 어떤 존재도 우주와 인간과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다 알지도 못하고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제시할 수 없고, 모든 우주의 질서를 정할 수도 없고, 규범을 만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바르게 알고 그 가이드라인을 따라, 그 설명서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이드라인으로 삼아 육신을 사용하고 시간을 사용하고 물질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새롭게 밝아온 이 새해에는 오직 우리 인생의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이며 등불이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한해 동안도 말씀이 여러분을 지키고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말씀 안에 있는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의 은총이 풍성한 삶을 살려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그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6절 말씀 보십시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 이 말씀에서 특별히 범사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범사, 즉 모든 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밥 먹을 때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직장에서 일을 할 때로 인정하고, 장사를 할 때도 인정하고, 공부할 때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잘되고, 건강하고, 형통하고, 축복받을 때도 인정하고, 잘 안되고, 건강하지 못하고, 불통해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만나도, 불만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해 못할 일이 벌어져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와 환경과 상황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과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나 내게 주어진 시간이나 물질이나 재능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고 그러면 반드시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인정하면 어찌 예배와 찬송과 기도에 열심을 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어찌 내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며, 나아가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님과 나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하며 살아갈 때에 어찌 그 인생이 별처럼 빛나지 않겠습니까? 그 인생이 어찌 아름답고 복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여러분,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음을 믿고 그저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 할뿐입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도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정말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때에 그 인생이 어찌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움과 은혜를 인정하고 예배드리고 찬송드리고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우리의 육신이나 정신이나 물질이나 시간이나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사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들고 이해가 안되고 억울한 일을 만나도 그저 하나님께 맡기며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존중히 여김을 받으며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가득한 이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그 은혜를 누리려면 하나님의 지혜는 나보다 천배 만배 억배 더 크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 7절 말씀 보십시오. “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자기가 똑똑한 것처럼 생각하며 제 고집대로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다고 내 놓을만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비록 피조물들 중에서는 제법 지혜롭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우리 인생이 아는 게 얼마나 됩니까? 우리가 경험한 것이 얼마나 됩니까? 배웠으면 얼마나 배웠습니까? 알면 얼마나 압니까?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 욥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너무 답답해서 따져 묻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나는 정말 나름대로 선하고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오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악한데도 잘 먹고 잘 사는데 난 정말 억울하다고 하소연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내게 대답하라.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거기 있었느냐, 바닷물이 넘치게 하였느냐, 네가 아침이 오게 하였느냐, 네가 별들을 매어 묶을 수 있느냐, 네가 눈과 비를 내리었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네 가슴속의 지혜는 누가 주었느냐, 네가 염소의 새끼를 낳을 때를 아느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러자 욥은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욥42: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렸고,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욥을 고난에서 건져주시고 다시금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인품이 좋고 선하고 잘나도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처럼 여기고, 하나님앞에서 의로운 것처럼 여기는 인생은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마귀사탄에게 철저히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 우주 공간속에서, 천지가 창조되고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는 길까지, 영원한 세상이 지속되는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한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자신과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는 이 복된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4.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진실로 하나님을 공경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9절 말씀 보세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제일 먼저,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아가서 십일조를 비롯한 모든 감사예물을 드릴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여호와를 인정하는 일이요, 바르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게다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는데, 게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일에 사용되는 것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하늘 곳간에 쌓는 일인데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고 공경한다면 어찌 하나님께 먼저 드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인가 힘써 노력해서 얻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야, 말합니다. ‘너, 정말 수고 많았다. 너 정말 대단하다. 이제는 좀 쉬면서 먹고 마시고 놀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부모님이 날 낳아 주시고 열심히 키워 주신 덕분이라며 부모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곁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던 친구나 선배나 기타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리며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면 우리도 여전히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육신으로 물질로 시간으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었다해도 근본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터전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생명과 육체과 지혜와 능력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햇빛과 비와 공기와 토지를 주셔서 그 안에서 활동하며 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다른 모든 것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공경할 때 그 믿음과 신실함을 보시고 더욱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0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이 귀한 말씀들을 기억하며 올 한해 동안도 정말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결코 자신이나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규범이며 잣대이며 안내자인 하나님의 말씀의 안내를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물질과 육신을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창고가 가득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은총과 귀중이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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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예배설교 (New Year's Eve Service)

 

 

 

말씀 : 고후5:17

제목 : 행복한 새해

1.행복은 마음에 있습니다.

옛날에 어느 나라의 임금님이 큰 병이 들어 나라의 용하다는 의원을 다 불러서 처방을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이고 병은 점점 깊어져 생명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소식을 듣고 한 지혜자가 찾아와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입으면 임금님의 병은 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을 시켜 전국 방방곡곡에 다니며 가장 행복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대감들의 집을 찾아가 물었으나 누구도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전국에서 이름난 부자집을 찾아다니며 물었지만 이들도 역시 제일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학문이 높은 사람을 찾아가 물어보았지만 역시 자신이 제일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권세자, 부자, 지식인 등 행복할 만한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 다녔지만 제일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며 돌아오며 산길을 걷다가 오두막을 발견하고 거기서 묵게 되어 주인 영감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는데 뜻밖에도 이 산골 오두막에 사는 노부부가 자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신하는 너무 반가워 그러면 당신들의 속옷을 좀 달라고 하자 노부부는 우리는 너무 가난하여 지금까지 속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행복은 결코 권력이나 지식이나 돈이나 잘 생긴 외모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조건에 관계없이 행복을 담을 수 있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행복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을 갖지 못한 사람은 천하를 가지고도 행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눅17:20,21절에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렇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적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천국은 이 땅위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을 그대로 가진 상태에서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완전히 새롭게 창조되어 우리에게 임할 것인데 그 동안은 그 천국의 임재를 바라보며 그 천국에 합당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천국을 여기서도 앞당겨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분명 우리 안에 있습니다. 천국도 우리 안에서 있습니다. 믿음으로 천국에 합당한 마음으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모든 조건에 관계없이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이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는 천국을 누리기에 합당치 않은 모든 부정적이고 패배적이고 절망적이고 불신앙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오직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거룩함과 진실함과 성실함으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새롭게 다가온 이 새해에는 여러분 모두의 삶이 정말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2.속사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행복하려면 행복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 행복한 마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느냐? 죄와 무지속에 있는 옛것을 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죄와 무지속에 있는 그래서 불신앙적이고 부정적이고 패배적이고 추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감사와 선과 의와 거룩과 진실 등의 아름다운 마음으로 채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추방하고 우리 주님의 마음인 사랑과 은혜와 진실과 거룩과 의와 선으로 채우면 그 인생이 어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엡4:22-24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마귀의 권세아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버리고 생명과 진리의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심령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해봅시다. 과거의 낡고 가치없고 부정적이고 어두운 것들은 벗어 던져버려 봅시다. 부정적이고 편협적이고 이기적인 과거의 잔재를 벗어 봅시다. 그거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닙니다. 주님 앞에 엎드리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마음먹고 주님 앞에 간절히 엎드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새 마음으로 살아가면 우리는 얼마든지 상황과 환경과 처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면 가능합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마른 지팡이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죽어서 썩은 시체가 살아나는데 무슨 환경, 상황, 나이 그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새해는 정말 하나님 엎드려 성령의 도우심을 덧입어 과거의 모든 아름답지 못한 잔재들은 다 날려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아 아름답고 향기롭고 큰 기쁨과 은혜와 축복이 가득한 복된 날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삶의 목적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의 목적에 가장 부합되는 존재가 가장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에 어긋난 것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림 받게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텔레비전이 아무리 좋게 보여도 화면이 안 나오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냉장고에서 시원한 바람이 안 나오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다 고물상으로 들어가 폐기되는 길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그냥 무의미가 왔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다. 그냥 잘 먹고 잘살다가 가도록 만들어진 존재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하여 지음 받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사43:7절을 보세요.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인생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욕심쟁이라서 우리 인간을 만들어 놓고는 가만히 앉아서 자기 혼자 영광을 누리려고 지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우리에게도 영광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나 자신을 비롯하여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 즉 모든 물질과 시간과 자연과 지헤와 능력과 감정과 영성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때 그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이 되겠습니까? 그 얼마나 아름다운 가치를 갖게 되겠습니까? 얼마나 바르게 사용하겠습니까? 얼마나 이웃에게도 기쁨과 유익을 주겠습니까?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겠으면 얼마나 풍성하겠습니까?

반면에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다보면 결국 재물의 노예가 되고, 권력의 노예가 되고, 나아가 향락에 노예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저 더 많이 소유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자연과의 관계가 깨지고. 이웃과의 관계가 깨져서 갈등과 시기와 거짓과 분쟁과 불만과 불평과 원망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바로 여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이 목적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과 물질과 시간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물질과 권력과 소유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바르게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와 평화가 자유가 임합니다. 행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결코 자기 영광, 자기 만족, 자기 명예를 위해서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삶을 영위할 때에 세상의 모든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러분 자신도 진정한 자유와 평강과 기쁨 속에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올바른 목적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가능합니다. 예수님 만나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내 영혼 속에 있는 모든 죄악된 것들, 무지한 것들, 거룩하지 못하던 것들, 어둡고 칙칙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환경, 조건, 상황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안 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죄의 뿌리를 뽑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인격수양이나 과학이나 지식이나 무슨 물리적인 힘으로도 안됩니다. 그러나 예수이름으로는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환경, 상황, 나이 그까짓 것 별거 아닙니다. 주의 성령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막9: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상황들이 있지만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그러한 것들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밝아온 이 새해에는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상황과 환경과 소유욕과 죄와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주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건강의 복과 자녀의 복과 물질의 복과 형통의 복을 누리시기는 이 복된 한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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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예배 설교 :: 진정한 성탄 준비 (Christmas Worship Preaching)

 


제목 : 진정한 성탄 준비

말씀 : 요17:14-17

1.예수님은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오늘 대강절 넷째주일입니다. 대강절은 물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참뜻을 되새기며 주님을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에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우리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일 먼저 주님이 누구신지, 왜 오셨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만약 왕이 우리 집에 오셨는데 그 분이 누구신지 모른다면 어떻게 왕의 예우를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또 만약 왕이 나에게 높은 자리라도 하나 주려고 왔는데 난 높은 자리 따위는 필요 없고 돈이나 한보따리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돈이나 지위는커녕 왕의 분노만 유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지 못하면 바르게 영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신 참 뜻을 알지 못하면 엉뚱한 것만 바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실망과 좌절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성인군자라고 하고, 어떤 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고 여깁니다. 또 어떤 경우는 건강이나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정말 주시려고 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고 자꾸 엉뚱한 것만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되어도 집안이나 거리나 상점이나 교회에 여러 가지 장식도 하고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행사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힘든 이웃을 도우며 사랑을 나누기도 하지만 정작 생명을 주려고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생명의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주님이 주시는 참되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위로와 평안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당연히 성탄축하프로그램도 하고 외부장식도 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어렵고 힘든 이웃들도 도우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평화도 당연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성탄절이웃초청잔치도 하고 어려운 분들을 돕기도 하며 성탄절 헌금의 거의 전부를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희망과 위로를 주고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유일한 참 구세주로서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천배 만배 억배 중요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요10:1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마1:21절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즉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에서 사함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인류가 이 땅에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영원토록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지식과 문명과 과학이 발달해도 이 땅에서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더더구나 영원한 고통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대강절을 맞아 성탄절을 준비하며 다른 무엇보다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심령이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의 은총이 넘침으로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그렇게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새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유일한 생명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었으면 그 다음에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져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5절 말씀 보겠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여러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고 온전히 보전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 마6:1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것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을 행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어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진대 어떻게 악 가운데 머물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악 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은혜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떠나야 합니다.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기 위해서도 모든 악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 날 많은 인생들이 이걸 몰라서 진정한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그 안에서 사랑과 선과 의와 진실가운데 살아갈때에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인데 오직 돈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믿음과 진리와 선과 의 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소유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속이고 빼앗고 훔치고 하면서 악한 방법으로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설령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할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틈이 벌어져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도 점점 틈이 벌어져 갈등과 불신과 싸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기는커녕 갈등과 불화와 상처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행하면서 생명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그 다음에는 진정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 선과 의와 진실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어떻게 흘러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도 오직 주의 말씀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누리며 주님의 향기 발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거룩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악을 물리치고 믿음과 사랑과 의와 선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려면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달콤하고 교묘한 유혹과 도전과 왜곡된 가치관을 분별하고 그걸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래야만이 우리 심령 속에 성경적 가치관이 확립되어 세상의 왜곡되고 혼돈되고 악한 것들에게 휩쓸려 다니지 않게 됩니다. 마귀의 간계를 간파하고 즉시 물리치게 됩니다. 감히 마귀 따위가 장난치지 못하게 됩니다. 설령 겁 없이 대들어도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에 힘쓰지 않아 성령의 충만함과 지혜와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세상의 유혹과 핍박과 환경과 왜곡된 가치관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길만한 분별력도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만연된 인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종교다원주의와 향락주의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충만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몸과 마음과 시간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게 되고, 악을 분별하며 거부하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감으로 거룩한 인생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4: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대강절 특별새벽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거의 대부분이 미동도 안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거 정말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고 계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만큼 모입시다. 기도합시다. 예배드립시다해도 꿈쩍도 안한다면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또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선과 의와 진리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겠으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하면서 주님이 오신 참뜻을 바르게 알고 진실로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 자신이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평강과 위로를 마음껏 누리며 동시에 이 왜곡되고 어두운 세상에서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의 모습을 통하여 생명의 빛을 비춤으로 아직도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여 저들도 우리와 같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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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성탄절 주일 예배설교 (2018년)
Christmas Sermon in 2018

 


 
제목 : 진정한 성탄 준비

말씀 : 요17:14-17

1.예수님은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오늘 대강절 넷째주일입니다. 대강절은 물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참뜻을 되새기며 주님을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에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우리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일 먼저 주님이 누구신지, 왜 오셨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만약 왕이 우리 집에 오셨는데 그 분이 누구신지 모른다면 어떻게 왕의 예우를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또 만약 왕이 나에게 높은 자리라도 하나 주려고 왔는데 난 높은 자리 따위는 필요 없고 돈이나 한보따리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돈이나 지위는커녕 왕의 분노만 유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지 못하면 바르게 영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신 참 뜻을 알지 못하면 엉뚱한 것만 바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실망과 좌절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성인군자라고 하고, 어떤 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고 여깁니다. 또 어떤 경우는 건강이나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정말 주시려고 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고 자꾸 엉뚱한 것만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되어도 집안이나 거리나 상점이나 교회에 여러 가지 장식도 하고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행사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힘든 이웃을 도우며 사랑을 나누기도 하지만 정작 생명을 주려고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생명의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주님이 주시는 참되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위로와 평안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당연히 성탄축하프로그램도 하고 외부장식도 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어렵고 힘든 이웃들도 도우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평화도 당연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성탄절이웃초청잔치도 하고 어려운 분들을 돕기도 하며 성탄절 헌금의 거의 전부를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희망과 위로를 주고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유일한 참 구세주로서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천배 만배 억배 중요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요10:1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마1:21절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즉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에서 사함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인류가 이 땅에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영원토록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지식과 문명과 과학이 발달해도 이 땅에서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더더구나 영원한 고통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대강절을 맞아 성탄절을 준비하며 다른 무엇보다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심령이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의 은총이 넘침으로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그렇게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새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유일한 생명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었으면 그 다음에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져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5절 말씀 보겠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여러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고 온전히 보전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 마6:1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것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을 행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어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진대 어떻게 악 가운데 머물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악 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은혜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떠나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기 위해서도 모든 악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 날 많은 인생들이 이걸 몰라서 진정한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그 안에서 사랑과 선과 의와 진실가운데 살아갈때에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인데 오직 돈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믿음과 진리와 선과 의 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소유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속이고 빼앗고 훔치고 하면서 악한 방법으로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설령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할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틈이 벌어져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도 점점 틈이 벌어져 갈등과 불신과 싸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기는커녕 갈등과 불화와 상처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행하면서 생명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그 다음에는 진정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 선과 의와 진실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어떻게 흘러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도 오직 주의 말씀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누리며 주님의 향기 발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거룩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악을 물리치고 믿음과 사랑과 의와 선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려면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달콤하고 교묘한 유혹과 도전과 왜곡된 가치관을 분별하고 그걸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래야만이 우리 심령 속에 성경적 가치관이 확립되어 세상의 왜곡되고 혼돈되고 악한 것들에게 휩쓸려 다니지 않게 됩니다. 마귀의 간계를 간파하고 즉시 물리치게 됩니다. 감히 마귀 따위가 장난치지 못하게 됩니다. 설령 겁 없이 대들어도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에 힘쓰지 않아 성령의 충만함과 지혜와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세상의 유혹과 핍박과 환경과 왜곡된 가치관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길만한 분별력도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만연된 인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종교다원주의와 향락주의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충만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몸과 마음과 시간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게 되고, 악을 분별하며 거부하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감으로 거룩한 인생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4: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대강절 특별새벽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거의 대부분이 미동도 안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거 정말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고 계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만큼 모입시다. 기도합시다. 예배드립시다해도 꿈쩍도 안한다면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또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선과 의와 진리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겠으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하면서 주님이 오신 참뜻을 바르게 알고 진실로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 자신이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평강과 위로를 마음껏 누리며 동시에 이 왜곡되고 어두운 세상에서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의 모습을 통하여 생명의 빛을 비춤으로 아직도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여 저들도 우리와 같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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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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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성탄절예배설교 (December 2018 Christmas Worship Preaching)

 

 

 
제목 : 기쁨의 성탄절
말씀 : 눅 2:8-14


요즘 우리 사는 세상에 너무 슬프고 아픈 소식이 많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사상 최대의 홍수가 나서 5만명 이상이 희생될 것 같다고 합니다. 필리핀에서는 여객선이 침몰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종교분쟁이 일어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희생을 당했다고 합니다. 엊그제에는 영국에서 우리 대한항공 화물기가 폭발과 함께 추락하여 기장과 승무원등 4명이 죽었습니다. 21세기를 즐겁게 맞이하려는 우리들에게 이런 소식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슬프고 아픈 소식들 틈에서 21세기에 희망의 빛을 주시는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8절에 보면 한 밤중에 밖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입니다. 21세기를 닷새 앞둔 우리들에게 세상에서 들려오는 모든 험악하고 불안한 소식들을 다 잊게 하고 새로운 시대의 새 희망을 주시기 위해 구주 성탄의 기쁜 소식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이 시간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에게 참 빛으로 오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천년의 희망이 넘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께서 탄생하신 소식"은 온 우주에 가장 큰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을 때, 그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목자들, 그리고 동방의 박사들.. 그 외에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기뻐 찬양했으며, 하늘의 천사들까지 기쁨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되면 우리는 "merry christmas"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20세기 마지막 성탄을 맞이하는 여러분들에게 첫 번째 성탄절의 기쁨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성탄의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첫 번째 성탄을 맞이하던 사람들을 통해서 진정한 성탄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목자들의 기쁨


8절-11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000년 전 당시 구세주의 탄생의 첫 증인이 된 사람들은 목자들이었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이 거룩한 일에 목자들이 그것도 첫 번째로 참여했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전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신뢰받지 못했던 계층의 하나가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신뢰받지 못했다기보다는 멸시받는 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직업 속성상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떠돌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종교적인 의무를 행할 수도 없었고, 또 이리저리 떠돌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던 사람들로 인식이 되어 법정에서 증인 노릇 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그렇게도 멸시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구세주 탄생의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멸시받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존귀한 자리에 두시기를 좋아하십니다. 미련한 자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약한 자들을 택하셔서 강한 자를 놀라게 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을 택하셔서 권세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대로 된 권리 하나 없는 목자들을 택하셔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가 탄생하신 것을 증거 하게 하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영적 어둠에 잠겨 있었습니다. 얼마나 영적으로 어두웠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던 서기관들조차도 구세주의 오심을 예상조차 하지 못했겠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소망 없는 세상 한 구석에서 멸시받고 천대받는 목자들에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 구세주를 집적 목격하게 함으로 세상의 모든 유력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 것입니다. 부끄러운 자들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목자들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봅시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아멘. 이 말씀은 "오늘(today)구주가 나셨으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약속의 성취됨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소식입니다. 은혜가 임하는 소식입니다. 멸시가 사라지고 고통의 날이 끝나고 흑암이 물러가고 밝은 빛 속에서 새 삶이 시작된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는 기쁨의 날이 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소식을 목자들이 들었고, 20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그들이 들은 그 기쁨의 좋은 소식을 귀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으로 영접한 기쁨에 찬송과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불편했던 모든 관계가 새롭게 될 때 얻는 기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맛보고 하늘의 평안을 얻었을 때, 누리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어떠한 염려나 근심이라도 초월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의 일 번지입니다. 그분만 있으면 즐겁습니다. 그분만 생각하며 기쁨이 넘칩니다. 빼앗길 수 없는 기쁨 그분 안에서 샘솟는 기쁨이 끊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누리는 특권이요 영광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우리의 구세주로 주인으로 모실 때, 우리들에게도 목자들과 동일한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2. 마리아의 기쁨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을 것입니다. 그는 요셉이라고 하는 청년과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정혼을 하였다는 것은 함께 살지는 않지만 완전한 부부가 되기로 약속된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부정행위가 드러나면 율법에 따라 돌로 쳐서 죽이는 무서운 형벌이 가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하는 말이 마리아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가 바로 예수라고 했습니다. 처녀에게 이 소식은 좋은 소식입니까? 나쁜 소식입니까? 분명히 나쁜 소식입니다. 지금 당장에 보기에는 엄청난 비극의 일이지만 하나님의 기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브리엘이 온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의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①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의 기쁨입니다. 누가복음 1: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하나님의 선택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는 한 이름 없는 처녀를 선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도 똑똑한 사람이 많았을 텐데,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갈릴리의 작은 동네 나사렛에 천사를 보내셨는지 우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 한 여자를 선택하셨는데 그 여인이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그를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여"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기쁨인 것입니다. 이 일로 모진 수모와 멸시를 받을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적인 선택의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에 마리아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바로 이 은혜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거나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 있었는데, 원수 마귀가 내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을 듣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나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또 어떻게 내 마음이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생겼는지, 생각만 해도 감사하고 기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을 소유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마리아가 기뻐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하는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하신다고 선언하여 주신 것입니다. 소망이나 바람이 아니라 지금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그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에 그들의 생애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역경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그 엄청난 과업을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던 비밀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 마리아에게 함께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마리아가 그 힘든 상황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비밀이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비밀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시간 마리아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 왜 우리에게 성탄절이 기쁨의 절기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우리를 선택하여 구원하셨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여러분과 나의 삶에 참 기쁨이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동방 박사들의 기쁨


예수님의 탄생을 목격하고 경배한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늘의 페르시아(이란)아나 아니면 인도 같은 이방 나라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천체와 우주를 연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은 하늘의 이상한 기운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큰 빛 하나가 나타나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분명히 만왕의 왕이 나실 징조라고 깨닫고 왕을 만나면 바치려고 몰약과 황금과 유향을 선물로 준비하고 급히 그 별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별을 따라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한 아이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것을 보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장 10-1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의 기쁨은 참 빛을 발견한 기쁨이었습니다. 어둡고 암울한 세상, 당시 로마의 거대한 세력이 마구 세상을 짓밟고 있어 로마에 식민지가 된 나라마다 배고픔과 가난으로 힘겨운 삶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지역이 모두 그랬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암울한 역사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도 어디에서 그 희망의 빛을 찾아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바로 동방의 박사들이 그 희망의 빛을 찾은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온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참 빛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은 1장 9절부터 읽겠습니다.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참 빛 곧 세상에 비추는 빛이 있었으니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 어둡고 칙칙한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열어 가실 영원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과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의 박사들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세상의 정부도 로마도 희망이 없으나 온 세상을 비추는 큰 빛을 따라 달려와 만난 아기 예수가 희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의 보화를 드려 왕 되심을 천하에 선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그 생명의 주님,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이제껏 세상에서 누려보지 못한 엄청난 희망이 열려질 것이며, 동시에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그러면 여러분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목자들과 마리아와 동방박사들,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남으로 얻은 그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늘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그야말로 기쁜 성탄절입니다. 이 기쁨이 영원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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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대강절 설교 그날을 바라보며

 

 

 

말씀:이사야 35:1-10

제목:그날을 바라보며

영국의 극작가 사무엘 베켓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으로 1969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두 사람이 황량한 길가에서 <고도>라고 하는 미지의 인물이 나타나 그들을 구원해줄 것을 막연히 기다리면서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삶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는 책입니다.

그들은 고도가 나타나면 그들을 구원하여 무언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줄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작정 고도를 기다리면서 서로 다투기도 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떠들어대기도 하고, 혹은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러보기도 하는 등의 별 의미도 가치도 없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때로는 절규하기도 하고, 때로는 희희낙낙하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희망을 갖기도 하면서 그저 무한정 고도를 기다리는 것으로 이 책의 이야기는 아주 허무하게 종결을 짓고 있습니다.

무슨 결론도 없고 마치 쓰다가 만 책처럼 그렇게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책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오늘날 방황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아주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참된 인생의 목표나 기다림도 없이 그저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그것이 마치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길인 것처럼, 그것이 마치 인생의 목적인양 생각하며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모습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진정한 목표와 소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영원한 고향을 망각한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소유하고 즐기면서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이 마치 인생의 의미요, 인생의 가치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쁨도 될 수 없고, 참된 만족과 가치를 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없고, 기다려야할 대상도 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허무와 좌절과 고독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영원한 절망과 고통만을 안겨 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과 만족과 은혜를 주실 분은 누구십니까? 정녕 우리가 기다려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정녕 우리 인류가 소망을 걸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할것도 없이 성육신하셔서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온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며 소망이며 기다려야 할 유일한 분이십니다.

 

1.갈림길에 서 있는 인생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에서는 두 개의 세상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광야와 같은 세상입니다. 식물도 동물도 제대로 살 수 없는, 설령 산다고 해도 온갖 고초속에 살아가야 할 그런 험하고 거친 세상입니다. 소경과 귀머거리와 저는 자들이 있을 수 밖에 없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상입니다. 우리를 넘어뜨리고 상처를 주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런 사나운 세상이요, 소망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것과 정 반대의 세상입니다. 그야말로 낙원과 같은 세상입니다. 광야와 사막 위에 샘물이 솟아나서 백합화가 무성하게 피어나고, 온갖 종류의 풀과 꽃들이 만발한 샤론평원처럼 아름다움과 향기가 넘치는 그러한 세상입니다. 저는 자는 일어나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소경의 눈이 열려서 누구하나 소외당하거나 고통 당하는 사람이 없이 함께 은혜와 기쁨을 누리는 그런 세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이 두 개의 상이한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두 개의 상이한 세상이 다만 우리의 상상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갓 이상향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이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된 세상이며, 우리를 위해서 예비된 그런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누리고 있든 누리고 있지 못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지금도 이 두 개의 세상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두 개의 세상중 어느 한쪽에 속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속에서 험하고 절망적이고 영원한 고통의 삶을 살아 갈것이냐 아니면 낙원과 같은 세상속에서 영원한 영광과 은혜의 삶을 누릴 것이냐 우리는 이 두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누가 광야의 삶을 원하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고통과 절망의 삶을 원하겠습니까? 누가 낙원의 삶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행복과 은혜의 삶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하면 이 광야의 삶에서 해방되어, 이 절망과 무의미의 삶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그저 적당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가운데 거기에 진정한 행복과 은혜의 삶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해답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2.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

먼저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실 그때에만 진정한 은혜와 행복의 삶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바벨론 포로와 같은 세상속에서 좌절과 두려움과 참된 평강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에게 주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오셔서 어둠의 세력들을 물리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좌절하고 고통스럽고 근심걱정하게 하는 모든 사단의 세력을 물리쳐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열리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저는 자는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하는 모든 것이 물러가고 우리는 진정한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는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외에는 다른 어느 누구도 해결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의 근원인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리하여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안에 있는 자에게 진정한 생명과 평강과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잊지 말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대강절넷째주일을 보내면서,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이제 성찬식과 세례식에 참여하면서 먼저 이천년전에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끊임없이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어리석고 미련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은혜를 주시려고 기쁨을 주시려고 변함없이 찾아오시는 주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셨을 때 비로소 구원의 길이 열리고, 은혜의 길이 열리고, 낙원으로 향하는 통로가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욱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주님을 영접해야 할 인간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과 더불어 우리가 진정한 은혜와 기쁨과 영광의 삶을 살기 위하여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우리는 어떻게 영접하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다리를 만들어 주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 다리를 건너가지 않으면 그 다리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으면 아무리 풍성한 진수성찬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다. 8절 말씀입니다.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광야와 같은 세상에 대로를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길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영광의 나라에서, 그 낙원과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을 누가 갈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길을 통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깨끗지 못한자는 지나가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만이 그 길을 통과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덧입어서 죄사함의 은총을 입은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그래서 죄로부터 해방되어 깨끗하게 되어 질때에 우리는 그 거룩한 길을 건너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대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영원한 영광과 기쁨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행동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단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고 구속함을 받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분을 진실로 영접하고 믿고 따르기만 한다면 그 거룩한 길이, 그 영광의 나라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얼마나 감격스런 일입니까?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무지로 말미암아, 어둠으로 말미암아, 완고함과 강퍅함과 고집스러움과 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모르는채 광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죄 사함의 은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과 기쁨의 나라를 맛보며 또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이 어찌 감사하지 않으수 있으며, 이 어찌 영광돌리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천년전에 이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자유와 평화와 기쁨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향한 통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의 심령속에 가정속에 교회속에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기쁨과 은혜와 생명을 주시고 계십니다.

물론 아직은 영광의 나라가 완성된 것이 아니기에 힘이 들때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도 영광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게 영원한 기쁨과 안식과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아무도 우리를 괴롭게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은혜만이 안식만이 영원한 영광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대강절 넷째주일을 보내면서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이 광야에 같은 세상에서,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건지시어 참된 생명과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께 소망을 두고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영광의 나라를 오늘 여기서 맛보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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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감사의 때 (When we are thankful)>

 

 



누가복음 17 ; 11 - 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우리는 어떤 현상이나 자극에 대해 받아들이는 성향을 일반적으로 감수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사람을 흔히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그냥 들에 핀 꽃이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꽃이 그냥 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으로 느끼며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꽃을 의인화하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영적인 감수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감수성은 어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순간순간 느끼고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날마다 마시는 공기와 태양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똑같이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도 하나님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였지만 어떤 분들은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함을 깊이 깨닫는 분들이 있고 어떤 분들은 크게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도 분명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저와 여러분의 영적인 감수성은 어떠하십니까?

만일 매년 이 맘 때에 드려지는 추수감사절의 절기가 단순히 헌금 한 번 더 내는 절기로 혹은 잘 차려서 풍성하게 먹는 그러한 절기로만 여겨진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실제로 어떤 분들은 ‘요즘 농사도 짓지 않는데 왜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하는가?’ 라면서 추수감사절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전의 농경산업에서 산업사회로 그 일터만 바뀌었을 뿐이지 다시 말해 직종이 바뀌었을 뿐이지 일하여 소득을 얻는 것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추수감사절의 의미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시면서 한 마을에 들어 가셨을 때에 예수님이 지나시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쳐달라며 외치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왜 그토록 주님을 향해 소리를 지른 것일까요?

거기에는 분명 나름대로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저주를 입은 사람으로 여김 받아 사람들과 격리되어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들의 병도 치료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부르짖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기도를 해주거나 안수를 해주신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시고 한마디 말씀만 하십니다.

14절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왜 그럴까요? 당시에는 제사장은 마치 의사와 같아서 병을 진단하고 치유에 대한 판결도 내렸습니다.

레13:9 ‘사람에게 나병이 들었거든 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율법에는 제사장이 나병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제사장이 병이 나았다고 하면 정상인이 되어 다시 가정과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지도 않고서 먼저 제사장에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반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안수도 안하고 기도도 해주지 않고서 이대로 제사장한테 가라고? 가다가 사람들에게 맞아 죽으라고?’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곧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여러분 어찌하였든 이 또한 큰 믿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얼마나 놀랐을까요?

여러분 상상이 갑니까? 아마도 이들은 길거리에서 환호를 하고 춤을 추고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15-16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사마리아 사람 한사람만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왜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와 감사를 했을까요? 아홉 명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치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들을 통해 우리는 왜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며 살아가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나중에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우선은 제사장에게 가서 완치 판정을 받는 것이 우선이고 그리고 가족에게 가서 이 기쁨을 나누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선순위가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모두 현재이지 나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감동하시면 지금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 감사하려면 사탄이 틈을 타 방해하고 그러면 기회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바로 하자” 감사를 결코 내일로 미루지 마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둘째로 마음으로만 감사했습니다.

아홉 모두가 나음을 받았을 때에 말로는 당연히 감사하죠. 왜 감사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아홉 모두 마음속으로는 감사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을 체험하고도 감사가 없다면 그것이 사람이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감사가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만이 아니라 표현되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마음이 중요하지만 말이나 행동으로 이어질 때에 진정한 감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홉은 마음 뿐이었지만 사마리아인은 행동으로 감사를 실천했습니다.

어떻게요? 15-16절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다른 아홉 명과 다른 점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마음만이 아닌 말과 행동이 따를 때에 진정한 감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셋째로 다른 이가 하지 않는다고 자신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열 명이 같이 가다가 다 나음을 받았지만 아홉은 집으로 갔습니다.

이들은 분명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도 다 집으로 가네, 나보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도 집으로 가네. 애라 모르겠다. 남들도 가는데 나도 집으로 가자’ 라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서로가 ‘저 사람도 그렇게 하니 나도 그렇게 해도 되겠지’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남들 따라하거나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다 저렇게 하는데 나라고 뭐 잘났다고 해야하냐?’ 이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남들 따라가는 신앙은 평범한 신앙은 될지 모르나 큰 복을 누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복이 임하지 않는다면 한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나는 항상 ‘다른 사람이 하는 것 만큼만 감사 해야지’ 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코 감사할 수 없고 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무엇 보다 때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타이밍입니다. 그렇다면 왜 감사는 때를 놓치면 안될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때를 놓치면 받은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시간이 지나면 다 잊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망각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은혜를 누리고 살면서도 시간이 흐르면 그 은혜를 다 잊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은혜를 다 잊어버리니 부모님을 모시는 것을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은혜도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스승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스승의 은혜를 은혜로 생각지 않습니다. 다 돈 벌기 위해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존경심도 사라지고 감사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목회자의 은혜도 그렇습니다. 목회자는 늘 성도들을 품고 기도하며 보살피지만 이들은 조금이라도 마음이 틀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떠납니다.

목회자들이 가장 가슴 아플 때가 이럴 때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기도해 주고 하였지만 말 한마디라도 하면 다행이지 말 한마디 없이 떠납니다.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그때 받는 충격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무엇보다 사람에게 받은 은혜도 잊어도 되지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시50: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그러나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구원을 보이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의 때를 놓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때를 놓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단순히 감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감사의 때를 놓치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한사람이 감사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이방인 한사람이 감사를 드렸을 때 주님은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 이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드리는 감사는 단순한 감사가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를 영화롭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방법이 감사입니다.

 

의사들이 말하기를 ‘질병의 원인은 찾아낼 수 있어도, 건강의 원인은 모른다’ 고 합니다.

실제로 어지간한 질병은 다 찾아내고 치료가 가능합니다. 물론 아직 불치의 병도 있지만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치료의 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왜 사람이 건강한지’ 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원인을 모릅니다. 불신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공로나 우연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 은혜에 둔감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똑같은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감사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를 놓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도 놓치는 것입니다.

 

셋째로 때를 놓치면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잃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때가 있습니다. 아홉 명의 나병환자도 다들 감사한 마음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회를 미루었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그길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께 감사를 직접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홉 명은 육신은 나병에서 구원받았으나 그들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사마리아 사람 한사람은 감사하는 그 마음을 갖고 주님께 나왔다가 영혼도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여기서 ‘네 믿음’ 이 무엇입니까? 감사하는 그 믿음입니다.

그것이 너를 구원했다고 할 때 그 구원은 질병에서 구원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감사는 믿음이고 감사는 복을 누리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의 때를 놓치면 이것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느냐가 내가 얼마나 은혜를 누리냐를 결정합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느끼는 감사의 온도가 여러분에게 임한 하나님 은혜의 온도가 되는 것입니다.

원하기는 오늘 추수감사절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감사의 기회를 잃지 않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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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명절 가정 예배 (추석명절에 드리는 가정예배)

 

 

 

 오늘은 추석 명절입니다. 오랜만에 멀리 살던 가족들도 함께 만나게 되었는데 감사한 마음으로 이시간 예배를 드리도록 합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드리겠습니다.

찬송가 ; 201장(460) 지금까지 지낸 온 것

기도 ; 가족중에서

 

하나님의 말씀 ;  신명기 33 ;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제목 ; 행복한 인생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없는 것을 괴로워하지 말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있는 것을 감사하지는 않고 없는 것을 불평하며 살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문제를 만나지 않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문제가 없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풀어내야 행복하게 됩니다.

큰 문제일수록 잘 풀어내면 행복은 더 커집니다.

인생은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입니다.

문제를 풀지 못하면 인생에는 괴로움만 남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잘 풀어내면 행복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속담에 '눈이 보배'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은 사람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늘 얼굴을 마주 대하며 살아가는 가족은 금이나 진주보다 더 소중한 보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 싸우는 이유는 물건들 때문입니다.

물건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소한 물건들 때문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들고 다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함께 있는 사람, 가까이 있는 사람, 지금 우리 옆에 있는 사람은 어떤 물건보다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물건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행복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행복의 요소가 되지 못하는 물건 들 때문에 가족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쯤 행복할 것으로 게획하고 있습니까?

행복의 계획은 미루지 말고 앞당기는 것이 좋습니다.

행복하기를 미루다가 행복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불행을 미루고 행복은 앞당겨서 오늘부터 행복해야 합니다.

내일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우리는 가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보다 더 성공하고, 사랑받고, 인기도 좋고, 일도 잘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항상 감사 하는 삶, 즐거운 삶, 웃음 가득한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행복하기로 결심하고, 오늘을 행복하게 사는 가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 370장(455)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주기도문으로 오늘 모든 가정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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