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예배설교] 부활은 우리 믿음

 

 


제 목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

집필자 서문강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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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사순절설교 : 섬기는 자가 되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20:28, 막10:45)이라는 것은 예수님 스스로 밝히신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내기 위한 유월절 양이 되어야 함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맞춰 대제사장들과 유대교의 지도층이 당신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잔과 떡을 나누어주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22:15-16).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 유월절 식사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눌 마지막 식사이며, 그 식사 후에는 잡히셔서 고난과 능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며, 그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실 마지막이고 결정적인 일이며, 그 뒤에 남는 것은 완성될 하나님나라에서 잔치를 즐기는 것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 후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잔을 돌리시고 떡도 떼어 나누어주셨습니다(눅22:17-20).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는데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눅22:21-22)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놀라며 서로 묻기를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다고 오늘 본문 직전의 23절은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당신께서 붙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바 있었지만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에게는 보통 충격적인 말씀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시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을 뿐 그들의 관심은 곧 다른 문제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문제란 다름 아니라 열두 제자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첫 절에서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한 것이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정말로 당신의 죽음이 가까웠고 당신과 함께 그 자리에 있는 제자 중에 하나가 당신을 곧 팔아넘길 것이라고 심각하기 그지없는 말씀을 하시는데도 그 시점에서조차 제자들은 “또” 그 자리다툼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동고동락해온 제자들에게서 드러난 주되고 궁극적인 목적이 동료들의 우두머리가 되거나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한심스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사람들의 사고나 가치관과는 정반대로 확립되어야 할 주님의 제자들의 사고와 가치관을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25-26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경우와 “너희” 즉 제자들의 경우를 대비시키신 데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세계에서는 임금이 권력을 쥐고 백성을 다스리며 스스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로 칭송을 듣는 것이 당연시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세계에서는 “큰 자” 즉 존경과 대우를 받을 자격이 더 많은 이들이 오히려 “젊은 자” 곧 존경과 대우를 받을 우선순위에서 뒤에 와야 할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잘 섬길 줄 아는 이가 다스리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섬길 줄은 모르면서 남 위에 올라 다스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가르침을 다른 말씀으로 한 번 더 반복하셨습니다. 27절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여기서는 세상사람들과 예수님 자신을 직접 대비시키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당연히 자리에 앉아서 날라다 바치는 음식을 받아먹는 사람이 음식을 나르는 사람보다 크다고 여기겠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마땅히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시면서도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제자들도 마땅히 주님을 본받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일러주셨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에서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구하기를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한 사실을(마20:20-21)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그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는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 했습니다(마20:24).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일러주신 말씀이 바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될 사람, 교회의 중직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철저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앞서서 유다의 배신을 보았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서로 묻기를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자신이 모두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만 주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열두 제자 모두가 배신자들이었습니다. 유다는 돈 때문에 배신했다면 나머지 제자들은 권력욕과 명예욕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겸손과 섬김을 가르치셨는데도 서로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고 다투고 있었다면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배신이 아니고 무엇이 배신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반복된 가르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던 제자들은 붙잡히신 예수님을 보고 그를 부인하거나 버리고 도망치기 이전에 이미 다 배신자였던 것입니다. 그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도 섬길 줄은 모르면서 남보다 위에 서려고 하는 사람은 다 배신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절을 앞두고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는 지난주일 장로 열 분을 선출하기 위해 공동의회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거조례가 금지하고 있는 부정선거운동이 적발되어 긴급히 모인 당회에서 의논 끝에 이번 공동의회를 무기연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는 “뭐 그 정도 일 가지고 기껏 모인 공동의회를 유회시키느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분도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 이번 선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고 깨끗하게 치러질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문제 삼은 일은 세상에서라면 문제꺼리조차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교회 안에서라 해도 보기에 따라서는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사에 한국교회의 본이 되고 무엇을 하든 교과서같이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이고 의지이기에 우리에게서는 용납되지 않은 것입니다. 깨끗한 선거풍토를 다지고 과열선거운동의 재발을 막자고 모든 장로님들이 몇 달 동안 주일예배 때 대표기도도 스스로 삼가고 장로로 선출되신 분들은 임직을 육 개월 이상 미루는 아픔을 감내한 역사를 지닌 우리 교회이기에 그런 일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의지를 짓밟고 지지하는 특정 인물들의 명단을 만들어 다량으로 복사해서 버젓이 교회마당에서 돌리는 일은 당회에 대한 정면도전이고 교회에 대한 심대한 배신행위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주님의 제자들의 사고와 가치관은 세상사람들이 갖는 사고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가르치셨는데 세상에서 하는 행태를 그대로 교회에 가지고 들어오겠다는 것이 주님에 대한 배신이며 주의 몸 된 교회에 대한 도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당회에 들어온다 한들 어떻게 당회원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 표를 던진다면 어떻게 주님의 제자이며 주님의 공동체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평소에 겸손하게 열심히 섬기고 항존직을 선출하는 때가 되면 조용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일꾼들이 되고, 또 그런 사람들을 항존직에 세울 줄 아는 성숙한 교인들이 되어야 한국교회와 이 나라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희망을 꺼뜨리는 일체의 행위는 한국교회에 대한 배신행위로 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일을 통해 한국교회와 이 나라의 장래가 우리 한 사람 사람의 의식과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모두가 성숙한 교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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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부활주일예배 설교 <죽음을 이기신 예수>

 

 


 
 


죽음을 이기신 예수  (고전 15:1-26 )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그리스 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 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 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울다가도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메시지입니다. 이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주일날, 먼저 죽음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아니하는 것 같지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나누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주제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제법 잘 팔리는 책이 있습니다. 운동세포 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모리라는 노(老)교수, 이제 죽음의 날을 카운트다운하고 있는 그에게 제자 중 한 사람이 매주 화요일마다 찾아가서 함께 인생을 논하는 내용을 담은 글입니다. 그 글 가운데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생각을 드러내는, 의표를 찌르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는 수긍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을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무어 그렇게 대단히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세가 있을 때 예수 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이 엄청난 기쁨이요, 소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밤이 되면 자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 이 듭니다. 1998년도 한 해에 우리나라 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25만 명으로 최종통계가 나왔습니다. 한 해에 25만 명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요? 사랑의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서초구의 전체 인구가 40만 명하고 몇 백 명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25만 명은 서초구에 사는 사람들의 60%에 해당합니다. 1년에 서초구 인구의 60%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시편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마치 홍수가 쓸어가듯이 죽음이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현실이 이렇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사랑의교회만 해도 하루에 한 명 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통계상으로 보면 1년에 365명이 세상을 떠난다는 말이 아닙니까?

사랑의교회 교인 전체로 따지자면, 거의 100명에서 120명중에 하나가 날마다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만큼 죽음은 우리가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기분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진지하게 직시해야 될 실체입니다.

우리가 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력을 느낍니까? 왜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무덤을 갖고 있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려고 하는 마음을 갖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 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소식 아닙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인간이기 때문에 너무 고상하게 대답을 하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았는데 다 이해한 체 한다면 본심을 숨긴 가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좀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사람의 책을 여러 권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가 쓴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는 굉장히 감동적인 책입니다. 그 책 안에 정말로 옥 목사의 마음과 서로 통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왜 부활의 주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에 마음이 끌렸는지에 대하여 그는 퍽 인간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인간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은근한 바람이 자기 마음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바람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이 귀가 번쩍 뜨이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해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한해 안에 자기 친구 셋을 잃은 슬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 친구는 나이에 비해서 일찍 은퇴를 한 사람 인데, 어느 날 저녁에 아내와 더불어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와서 차를 타려다가 '윽' 하고 쓰러지더니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한 친구는 40대 부인인데, 믿음이 아주 좋은 부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모이는 선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안개가 짙게 깔려있는 길을 드라이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유조차가 앞에 있는 차를 못 봤던지 들이받아 차에 화재가 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말았습니다. 또 한 친구는 건장한 친구인데, 미시건 호수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 해에 졸지에 사랑하는 친구를 이렇게 셋씩이나 잃어버리는 기막힌 슬픔을 가슴에 안게 되자, 그의 마음 속에서 죽음이 끝장이라는 생각에 저항하고 싶은 욕구, 죽음이 마지막 이라고 하는 말에 저항하고 싶고 거부하고 싶고 비판하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죽은 친구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기대감이 마음에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솔직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중에는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 니다.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하며 귀여 워하던 어린 딸이 죽었습니다. 그 딸의 시체를 앞에 놓고 울부짖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이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 아니겠 습니까? 어느 누구라도 그 부모의 입장이라면 부활을 믿고 싶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을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도 매달리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요, 우리의 생각을 확 뒤집어 놓는 놀라운 복음 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변증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요, 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살아났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3절입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액시던트(accident) 가 아닙니다. 어쩌다 일어난 사고나 돌발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예고된 일입니다. 수 백년 전부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영감을 받아, 장차 이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이기고 살아날 것을 여기 저기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 한 예로 시편16편 10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다윗은 자기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를 빗대어서 장차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지만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요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자기가 부활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요나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가기 싫어 도망쳤습니다. 도망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바다에 빠지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고래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큰 고기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3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당하다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건을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12:40) ' 인자도 무덤에서 사흘 동안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요나가 사흘 후에 살아나온 것처럼 인자도 사흘 후에 부활하리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 있는 요나의 사건마저도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라고 해석하신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앉혀 놓고 자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는다.

그러나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구원 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대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 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부활하셨습 니다. 할렐루야!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 많이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5절 이후에 보면 바울이 대충 언급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위시해서 500여명이나 되는 제자들과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버티던 예수님 의 동생 야고보까지도 부활하신 예수님 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다 목격자들입 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짜 목격자들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한 여인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받은 여인들이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고 그것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고린전서를 쓰던 당시만 해도 여자들의 증언은 법적으로 효력을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해도 여자가 한 말은 일단 접어두고 참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례를 따라서 바울도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을 여기에 기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자들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보았다고 말해도 함부로 의심할 수가 없거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면, 누가 이것을 거짓말 이라고 꾸며낸 이야기라고 부인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만큼 확실한 것입니다.

또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기 자신의 간증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본 사람이 누군가?' 라고 묻는다면 바울 자신이라고 간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 하려고 이를 갈면서 다메섹을 향해 가던 사람입니다. 그 때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으셨습니다. 그는 그의 영광스러운 빛 앞에 거꾸러졌 습니다. 간신히 눈을 뜨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여, 누구시니 이까?' 아무도 없는데 누구냐고 물었 겠습니까? 아니죠. 분명히 바울만이 본 예수님의 실체가 있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그 다음부터 바울은 숨만 쉬고 있었지 제 정신이 아니었 습니다. 얼떨결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나는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드디어 사도 바울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증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간증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초반부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복음이 지금도 땅끝까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북한을 비롯 하여 중국에 있는 지하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지구상에 있는 수십 억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릎 꿇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생명을 걸겠습니까?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까? 진실입니다.살아계신 그 분이 오늘도 계시기에 그 이름 만 불러도 귀신이 쫓겨 나가고, 그 이름만 불러도 병든 자가 나음을 입고, 그 이름만 불러도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구원 받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확실하게 믿을 때 우리가 어떤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 준 혜택에 대해 논하라면 끝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몇 가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믿도록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상당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만 해도 여러 명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라든지, 야이로의 딸이라든지, 나사로라든지, 이렇게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또 죽었습니다. 그렇지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는 헬라 철학이 사람들의 생각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그 헬라 사상 가운데 '부활 불가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절대로 다시 살지 못한다는 사상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도 비록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부활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12절에는 바울의 엄중한 책망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것이 헬라 사상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라.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다.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을 자신있게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부터 17절까지 비슷한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이것을 논증합니다. 이 구절 안에는 유명한 오중주의 '욱'(uk)이 들어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부정어 (not, nothing)로 쓰이는 단어가 '욱'입니다. '아니요', '없으면'하는 뜻입니다.

13절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이것이 '욱'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리라.' 비슷한 형식을 17절까지 5번 정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골자는 이것입니다. '왜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죽은 자라도 살 수 있다. 무엇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을 보면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죽은 자가 다시 살 수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절대 살리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아라.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얼마든지 부활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소망을 줍니까? 우리 모두는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다시 살아난다는 소망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기본적인 이 진리를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감격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맹숭맹숭하다면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진리에 매료되어 예수님의 이름 앞에 굴복한 사람인가 다시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은 이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할렐루야! 세상 빅 뉴스 가운데 제 1면에 대문짝만하게 큰 글자로 나올 수 있는 뉴스가 있다면 '죽은 자는 살 수 있다.' 하는 뉴스 아닙니까? 바로 예수의 부활이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는 것입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의 내용 중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우리 믿음도 헛되고' 믿어봐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또 우리의 죄는 하나도 용서받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만약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지 못했다면 우리 보다 먼저 세상 떠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믿음을 가지고 떠났더라도 다 소망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어디에 가서 있을지 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누구라고 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19절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고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바울은 정말 인간적인 말을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느라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평생 두들겨 맞으면서 여기저기 다녔고, 천대받아 가면서 살다가 나중에는 로마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참수형을 당한,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울 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멍청해도 한참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불쌍합니까? 이렇게 좋은 날씨에 왜 하필이면 여기 와서 앉아있습니까? 벌써 더위 때문에 힘이 드는데 왜 여기 와 앉아 있습니까? 모두 다 오염이 되어서 갈 때도 마땅치 않겠지만 그래도 여기 저기 꽃이 피어 있는 계절인데 야외에 나가서 도시락 풀어놓고 먹어 가면서 연인과 함께 꽃향기도 맡고 아름다운 인생의 꿈도 서로 나누면 좋을 텐데, 왜 지금 여기 와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여기 와 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여기 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정성껏 헌금까지 준비해 가지고 들고 나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정말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평생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서 칭찬을 듣겠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괜히 재미있는 일도 못하고 한 생을 보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만큼 예수의 부활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도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 앞에 불쌍한 자가 아니고 영광스러운 자요, 가장 복 받은 사람이요,

정말로 멋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부활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신약성경 27권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언급한 성경이 17권이나 되고, 나머지 10권은 간접적으로 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빼고서는 신약의 말씀이 성립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장해 준다. 예수 부활은 내 부활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해준 것입니다. 20절부터 24절까지 보면 그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들'이란 이미 세상을 떠난 자들을 가리킵니다. 앞으로 우리가 죽어도 잠자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 즉 먼저 간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추수기가 다가오면 들녘에 나가 먼저 익은 곡식들을 조금 베어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 흔들면서 요제를 드립니다. 요제란 흔들어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단을 들고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번 농사에도 축복하시어 이른 비도 주시고 늦은 비도 주셔서 이렇게 추수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이제 앞으로 추수할 동안에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셔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하옵소서.' 손에 들고 있는 처음 익은 열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들판에 있는 모든 곡식이 다 익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들녘에 있는 모든 곡식을 대표해서 첫 열매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첫 열매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음에 예수 믿고 따라올 모든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그 다음에 다 따라서 부활하게 될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완전 구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과 육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우리 영은 하나님나라로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기소에 머무는 것입니다. 완전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우리 영혼이 어느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묻힌 썩은 저 육신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입었던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부활하여 하늘에 있는 영과 결 합하는 영화로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성경에는 영화라고 합니다. 또 몸의 구속이라고도 말합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목을 빼고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완전 구원을 주십니다.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도 구원받습니다. 영과 육이 결합해서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닮아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하는 것이 완전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우리가 기 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입니다. 할렐루야! 독일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에릭 사우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멋진 말이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가 예수의 부활하심을 믿으면 죽음을 보는 패러다임이 바뀝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긴 하지만 절망적인 것으로 보지않습니다. 죽음이 불쾌한 것이긴 하지만 저주스러운 것으로보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생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이 마침표라고 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죽음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배짱이 있고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놓고 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죽음 자체를 인정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담대함이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지금 여든 세 살 정도 되십니다. 그분이 쓴 글을 최근에 보았더니 참 인상 깊은 말을 한마디 하셨습니다. '여러분,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기사를 믿지 마시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뿐이오.' 주소를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 자체를 흔히 말하는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때문에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실낙원을 쓴 영국의 문호 밀턴이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죽음은 영원한 하나님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다.' 미국의 한 때 유명한 설교자였고 목회자였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죽음을 놓고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마을길을 지나가다가 항상 열려 있는 어떤 상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자세히 봤더니 창문 밖에다 다음과 같이 써 놓았더랍니다. '내부 수리중' 그 후 여러 날 동안 그 가게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었습니다.드디어 어느 날인가 가게문이 활짝 열려서 들어가 봤더니 가게 안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 니다. 들어가는 손님들마다 아주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내부 수리중인것과 같구나.' 우리가 죽습니까? 그러면 문 딱 닫아 놓고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화되는 부활의 날까지 내부 수리중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우리 몸은 정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하나님나라에 입성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마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일지 모릅니다. 얼마나 비통합니까? 어떤 면에서는 얼마나 추합니까? 얼마나 허무합니까? 사랑의교회에 어떤 자매가 있었는데, 그 자매 남편이 30대에 암이 걸려서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다. 라고 그랬더니 안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끝까지 안 갔습니다. 가지 못하는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다는 것,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대단히 어렵습니다.며칠 전에 우리 한국 교회의 큰 별이 하나 떨어졌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우리목회자의 사표가 되는 어른이었 는데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빈소 앞에 가서 한참 동안 앞에 있는 큰 사진을 쳐다보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 사진은 아마 그분이 한 80세 정도 되었을 때 찍은 것 같았습니다. 깊게 파인 주름살이 잔뜩 덮여 있는 얼굴, 이목구비의 모든 균형이 다 어그러진 얼굴, 생명의 빛이 거의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얼굴, 이것을 쳐다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 저렇게 되는구나.' 하고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지 않는다면, 이런 마당에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참 정말 허무하네, 허무해.' 그 목사님의 친척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눈물은 안 나오겠지만 당장 이런 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정말 허무하네. 빌어먹을 세상, 가서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다가 죽어야지. 마지막이 저 모양인데 잘 살겠다, 의롭게 살겠다, 이런 소리 할 필요가 있나?'

그러나 그 목사님의 그 사진을 보면서 제 마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지금은 저렇게 추한 모습이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면 엄청난 미남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시겠지.'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아름다운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면 먼저 떠난 내 아버지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먼저 떠난 우리 어머니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나보다 먼저 떠난 내 남편,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내 눈물을 쥐어짜면서 세상을 떠난 내 아들, 내 딸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불구의 몸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몸 안에 있는 질병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며 그 부활을 바라볼 때마다 '그 날이 되면 나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을 입고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는 소망을 가지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을 통해 완성될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합시다.

또 우리 자신이 부활할 그 날을 늘 생각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그럴 때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에 관한 가능성을 길게 변증한 사도 바울은 끝으로 우리를 향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57절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아멘!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날마다 감사해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말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주님께 더욱 헌신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부활의 기쁨, 부활의 소망,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샘솟듯이 회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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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설교] 고난주간의 십자가의 사랑


 

 


제목 : 사랑의 십자가

말씀 : 마27:38-44

 


1.우리의 저주를 대신한 주님의 십자가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사실은 저주의 상징입니다. 끔찍한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저주받은 십자가가 교회의 상징이 되었습니까? 말할나위없이 우리의 저주를 대신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지옥의 저주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고전1:18에서는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 즉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는 것만이 우리를 모든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는 유일한 능력이요 힘이요 지혜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슨 다른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다면 예수님인들 왜 십자가를 지고 싶으셨겠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그 저주받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다른 무슨 방법으로 인류의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돈으로 할까요? 지식으로 할까요? 과학으로 할까요? 윤리도덕으로 할까요? 다른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오직 죄없고 흠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모릅니다. 아니 자신들이 죄가운데 있다는 사실 조차 모릅니다. 다 자기가 잘나고 똑똑하다고 옳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죄와 무지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모르고 천국이 있네 없네, 아무거나 믿으면 좋은 데 가네 마네하며 떠듭니다. 누구 맘대로 그럽니까? 참 안타깝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반대로 이 놀라운 생명의 비밀을 알고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다행이고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겸손히 동행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 놀라운 은총을 입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감사하고 영광돌리고 찬양해야 하는 것을 말할 것도 없고 동시에 죄를 미워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놈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까? 그 놈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놈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죄를 가까이 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죄를 혐오하고 멀리해야 되겠습니까? 정말 그렇잖아요? 그 놈의 죄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가게 되고 지금 여기서도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받게 되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으시려고 그 끔찍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흉악하기 짝이 없는 죄를 가까이 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하면서 좀 걱정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끔찍한 죽음을 당하심으로 생명을 얻었는지를 망각하고 마치 구원이 거저 얻어진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 못하니까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거저 얻어진 것은 귀한 줄을 모릅니다. 귀한 줄을 모르면 감사할 줄도 모르고 또 가치 없이 막 써버립니다. 그래서 부자집 자녀들은 돈 귀한 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흔전만전 써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가 얻은 이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주어진 것인지를 알면 절대로 우리가 얻은 구원을 조금이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거나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여 죄를 가까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짜 안 그래요? 여러분, 여러분은 온갖 썩은 냄새와 똥냄새가 풀풀나고 구더기가 들끓는 그런 더럽고 추하고 혐오스러운 곳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또는 사자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며 대드는데 그곳으로 가까이 가겠습니까?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죄는 이보다 더 더럽고 악하고 사납고 흉악한 것인데 어찌 그것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그래서 약4: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사순절 특별히 오늘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그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주님께 정말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동시에 정말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오직 주님을 가까이 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기억할 때에 우리가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온갖 저주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주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 온갖 저주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난과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사실을 몰랐으면 몰라도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그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당하셨는지, 그리고 처절한 고통을 통해서 주신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줄 안다면 우리가 어찌 생명의 역사를 위한 일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너무나 끔찍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로마의 병정들이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쓰러지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혀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육체적 고난 뿐 아니라 주님은 온갖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당했습니다. ①로마 병정들은 사정없이 때린 후에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침을 뱉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하면서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②유대종교지도자들은 눈을 가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뺨을 치며 너를 친 자가 누구인지 알아맞혀 보라면서 조롱했습니다. ③불과 며칠전만 해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환호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④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있을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⑤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는 강도들도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모욕했습니다. 이런 참혹하고 끔찍하고 처절한 고통을 통하여 우리 죄가 용서되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놀라운 은혜를 입은 우리는 백번 천번 만번 죽어도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하지 않습니까? 또 그냥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면서 그 은혜만을 누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서 주님이 그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얼마나 처절한 고통을 당하신 것을 안다면 어찌 그냥 편히 앉아 은혜만 누리고 있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6:24절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정말 백번 죽고 또 죽어도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도 주님의 그 거룩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게 주님의 은혜를 덧입은 자의 마땅한 의무이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이고 우리 자신이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입니다.

물론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마귀사탄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죄와 무지 가운데서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인본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참여하려면 이러한 모든 마귀사탄의 역사와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올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며 육신의 안일함과 평안함과 즐거움만을 향하여 가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보다는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받쳐야 합니다. 열심히 모여 깨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전도도 해야 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덧입은 자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복되고 고귀하고 영화로운 삶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자신도 정말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누리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정말 복되고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또 오늘 성찬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이 당하신 그 처절한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주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죄를 멀리하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며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위에 생명의 역사를 아름답게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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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설교]성령을 받으라

 


 
제목 :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말씀 : 엡5:15~18

1.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거룩하시고 진실하시고 선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신 유일한 구원자라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고 여기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믿음을 가진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는 진정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풍성히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우리가 믿는 그 믿음대로 주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음으로 믿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을 따라 살아야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고 그래야 비로소 그 믿음이 주는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동행해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라고 믿으면서 그래서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이 있다고 믿는다고 하면서 따라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어둠 가운데 있으면서 빛의 은혜를 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 은혜를 누리고 못 누리고를 떠나서 믿는다고 하며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야 하고 그러면 분명히 예수님이 주시는 그 무한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정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건 말하나마나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으면 하나님을 믿게 되고 더 나아가서 충만하게 받으면 정말 성령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얼마든지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전체를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보세요.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지혜있는 자가 되라는 거예요. 왜요? 때가 악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때가 악해서 뭐 어쨌다는 겁니까? 지혜가 없으면 악하고 왜곡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 있는 자가 되어 악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말고 올바른 분별력과 힘을 가지고 그걸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을 얻게 되어 주님과 동행하며 세상의 왜곡되고 헛된 것들을 물리치고 진정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그래서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자신도 하나님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죄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죄와 무지가운데서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를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 어두운 영혼이 밝아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게되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게 되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알게 됩니다. 사탄에게서 해방되고, 세상의 죄와 무지와 도전과 유혹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올바른 분별력과 지혜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령의 받아야 합니다. 받되 한번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지 못하면 어떻게 근근이 죽지 않을 만큼의 생명을 유지할지는 몰라도 세상에 너무나 만연되어 있는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과 도전을 이길만한 영적 능력이 부족하여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게 되어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느라고 다니기는 다니는데 예수님 안에 넘쳐흐르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것은 못 받아도 별거 없습니다. 세상의 것 많이 받은 사람이나 적게 받은 사람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거기서 거깁니다. 그래봤자 죄인이고 그래봤자 다 근심걱정 시기질투 속에 지지고 볶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령충만 받으면 다릅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운명이 바뀝니다. 영생복락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쳐나는 살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함을 받습니까? 물론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먼저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어서 자연인 그대로는 어떤 생명의 은총도 누릴 수 없고 오직 성령을 받아야 생명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기쁘시게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어 생명의 능력과 은헤와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그 사람이 여러분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면 갈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설령 억지로 간대해도 반가워하기는커녕 시큰둥하게 여기고 귀찮게 여기면 그 사람과 오래 함께 머물겠습니까?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는 가운데 성령의 오심을 다른 무엇보다 기뻐하고 간절히 기다리는 그 영혼 속에 기쁨으로 찾아 가셔서 거기 계속 머무시면서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07:9절에서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모하는 영혼 즉 하나님 안에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있음을 믿고 그러기에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에게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성령님과의 만남과 그 안에서 누리게 될 은총을 진실로 사모해야 하는데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진실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말씀과 기도와 찬양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돈을 사모하는 사람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돈 냄새가 나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을 달려갑니다. 오락이나 도박이나 술이나 이런 것에 빠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거기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한다면 어디로 달려가겠습니까? 물론 성령이 역사하는 곳으로 달려가게 되겠지요.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는 곳이지요. 그러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 교회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배드립시다. 말씀 묵상합시다. 기도합시다. 찬송합시다. 그러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무엇으로 성령의 은총을 덧입을 수 있습니까? 영은 오직 영으로만 통하기 때문에 오직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 안에서 기도로 대화할 때에 하나님과 우리 영이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쓰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믿음을 주시고 힘과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말씀 되새기며 기도할 때에 성령 충만함을 받아 능력 있는 제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행1:14절을 보십시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기도하기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2:4절을 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말씀 되새기며 기도에 힘썼을 때 드디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열흘 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어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성령의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은총을 사모하신다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를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우리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여러분, 그러면 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물론 앞에서 이미 상당부분 언급이 되었습니다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인생을 알게 되고 그래서 주님을 믿고 거듭나 새 생명을 얻음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에 성령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도전과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의의 길로 잘 달려가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을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못 받아도 성령은 받아야 합니다.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죄와 무지 가운데 있던 옛자아가 죽고 영혼이 소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 가지고 있던 인생의 목적과 방향과 의미는 사라지고 주님이 주시는 새롭고 올바르고 살아있는 인생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천국시민이 됨으로 거듭나고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니 거듭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알든 알지 못하든 사탄의 지배 속에서 사탄의 조종을 받으며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죄되고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살며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건 죄와 무지 속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방황하는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스스로는 다 똑똑하고 잘나고 세상에 모르는 것 하나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왔지만 그러나 실상은 죄와 무지 가운데 살아가는 무지몽매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완전히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세상에 지배당하고 세상에 취하여 세상 사람들이 살아 가는대로 살아갔는데 이제는 성령에 취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물론 성령은 생명의 영, 은혜의 영, 거룩한 영, 진리의 영이기시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생명의 풍성한 은혜과 기쁨과 능력을 평안과 위로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삶의 모습을 보면 흡사 술에 취한 사람과 비슷합니다. 물론 결과는 반대지만 원리적으로 보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술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 몸과 마음을 술이 지배해버립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내 마음대로 잘 안됩니다. 그래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거리다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집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술이 내 마음을 지배해 버리니까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게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싸우기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노상방뇨도 하고, 음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술이 나를 지배해 버려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에 취해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은 영적 육체적 마음적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지만 성령은 진리의 영, 선한 영, 은혜의 영, 의의 영이시므로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혜와 분별력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의의 길로 달려가며 주께 영광을 돌리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어렵고 힘든 일도 이기게 하십니다. 상황과 환경도 이기게 하십니다. 심지어 환난과 핍박과 죽음까지도 이기게 마침내 완전한 승리자가 되게 하십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술이 내 정신 줄을 제 맘대로 조종하여 평소에는 못하던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하고, 추하고 더러운 말도 서슴없이 하게 되고,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곤해서 사람을 질려버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에 취하면 쓸데없고 추한 말이 많아지지만 성령에 취하면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는 말이 많아집니다.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느라고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감각이 무뎌져서 근심걱정을 조금쯤은 잊어버려 약간은 평안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건 진짜 평안이 아닙니다. 잠시 약간의 정신적인 마취를 시켜 놓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취가 풀리면 즉 술에서 깨어나면 더 괴롭고 후회스럽고 수치감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하면 생명과 평강과 소망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영혼과 마음을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근심 걱정이나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진정으로 평강과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인하여 더욱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즘에 보면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취해 있지 않고 돈과 명예와 안일함과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와 세상 즐거움에 취해 있습니다. 심지어는 술과 마약과 향락과 도박에 취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세상에 취해서 헌신과 봉사와 충성과 이런 거룩한 귀하고 복된 가치들을 고색창연한 옛말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성수하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고, 술을 마셔도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18절에서 술 취한 것을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방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잠23:31~33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여러분, 그래도 마셔도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이 말씀들은 도대체 뭡니까?

여러분, 롬12: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러분, 보세요.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술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겠습니까? 그게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이겠습니까?

여러분, 바로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르게 분별하게 됩니다. 그래야 이 왜곡된 세대를 본받지 않고 주님을 본받게 됩니다. 그래야 우리 몸이 거룩한 산제물이 되고 그래야 거룩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령강림절기를 보내면서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 묵상함으로 성령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이 세대의 왜곡된 풍조에 휩쓸려가지 말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하게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꼭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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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별 설교] 종려 주일 예배 설교

 

 

 

제목 : 승리의 입성
말씀 : 눅19:42-44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에 대해 성경은 의미 깊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불과 5리 떨어진 벳바게 동리에 이르자 주님은 뜻밖의 지시를 하셨습니다. 동리에 들어가서 나귀새끼를 끌어오면 그 위에 타고 입성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찍이 솔로몬을 기름 부어 왕으로 추대할 때 다윗 왕의 노새에 태워 행진했던 일을 연상케 했습니다. 더욱이 스가랴 선지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고 예언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평강의 왕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무리에 옹위되어 평화롭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예수님의 마음은 착잡하셨습니다.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으로 불리우는 예루살렘은 온통 투기와 외식으로 꾸며진 거짓 평화를 구가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에 가까이 오신 주님은 우시며 안타까이 말씀했습니다. “(예루살렘아)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이라…”(눅19:42-44).
하나님과 누려야 할 평화를 잃은 백성에게 평화를 회복시키려 오신 평강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는 끔찍한 죄악이 장차 얼마나 큰 진노를 받을 것인가 생각할 때 주님은 연민의 눈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사명을 위해 위험과 고난, 죽음이 기다리는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음흉한 권력의 음모가 도사린 거대한 성을 향해 고독한 도전자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오늘 보기에는 무모한 짓이요, 실패로 평가되더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최후의 승리를 안겨 주실 확신이 있기에 담대히 나아가셨습니다. 이른바 육신으로는 두려워서 회피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 영적으로는 벌써 승리해 버린 영광을 바라보며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보여 준 승리가 무엇인지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며 은혜를 받읍시다.

1. 악과 증오에 대한 사랑의 도전이요, 승리의 입성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 후 한 주간의 생활은 무수한 충돌로 일관했습니다. 우선 성전에 들어가셔서 만민의 기도하는 곳인 아버지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책임자들을 질책하시며 뜰에 매놓은 양들과 비둘기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당시 종교계의 지도층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있을 외식자들’이 라고 서슴없이 여러 차례 질책하시기도 했습니다.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을 비유하시면서 주인의 포도원을 탈취하기 위해 주인이 보낸 아들을 살해하는 포악을 저지르는 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얼핏보면 주님은 빨리 죽으시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가 통박하는 상대가 얼마나 악과 증오에 차 있는 무리임을 잘 아시는 주님입니다. 차라리 모른 체 아무 말도 않으면 미움을 증대시키는 어리석음을 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목숨을 내걸고 지도자들의 죄와 허물을 지적하셨습니다. 이는 저들의 미움에 대한 반발론 증오감을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회개를 촉구하시는 충심의 발로였습니다. 급기야 미움이 극도에 달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할 때 주님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며 용서를 빌어주시는 참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아첨하는 말보다 친구의 과오를 지적해 줌으로써 시정하도록 아픈 말을 해주는 용기와 사랑을 갖습니다. 때때로 성직자들이 부패한 정치권력에 대해 가차없는 질책을 쏟을 때 많은 사람들은 불안해하며 또는 성직자의 본분 밖의 일이라고 입을 다물어 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직자는 나라를 사랑하고, 지도자들을 진정 아끼기 때문에 하기 어려운 말을 합니다. 이 충정을 모르는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을 구금하고 살해한 것처럼 옳은 깨우침을 거절합니다. 이런 결과가 두려워서 입을 다무는 크리스천은 악에게 진 것입니다. 목숨을 내놓고 상대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성도는 진 것 같으나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악을 악으로 갚게 되는 감정을 극복하고 사랑과 선으로 갚으신 주님을 철저히 따라야 합니다. 이 때에 비로소 악과 증오를 사랑으로 승리한 참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입성은 값진 고난을 향한 도전이요, 승리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고난을 좋아하지 않기에 성도들도 신앙을 통해 환난과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자기 앞에 주어진 고난이 의미 있고 값진 것일 때 이를 회피하려 한다면 패배자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 속에 으레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넘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의 기도는 바로 자기가 당해야 할 고난을 앞에 놓고 몸부림치는 절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의 쓴 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의미 있고 값진 일이라면 순종하겠나이다."라고 기도했을 때 그의 손등에는 피땀이 흘러내렸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스스로 고난을 택하는 일은 감상적인 선택이 아니요, 피땀을 쏟는 자기 희생이 수반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육의 욕구만 따라 사는 자연인과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스스로 고난을 택하기도 하는 정신인을 구분해 보았습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사명 때문에 고난을 감수한 사명의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손에 잡힌 선지자들과 주님의 손에 잡힌 사도들이 한결같이 주어진 사명 때문에 고난을 받고 순교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이들을 패배자로 보지 않고 세상을 이긴 승리자들로 증거합니다. 히브리 11 : 38에는 이런 사람을 세상이 감당치 못한 분들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도 십자가의 고난을 향해 도전하심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신 승리의 입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축복을 받으려는 열심에 비하여 의미 있는 고난을 감수할 사명감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감당치 못할' 성도들이 아니요, '세상을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일은 오늘의 교회지도자들이 무겁게 느껴야 할 책임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4:1-2) 하며 고난에 대한 성도의 적극적인 자세를 교훈합니다. 바울 사도가 간증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겠노라."는 자세로 의미 있는 고난에 도전하는 성도는 고난을 이긴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3. 주님의 입성은 죽음을 향한 도전이요, 승리입니다.
퀴블로러스가 쓴 '인간의 죽음'이라는 글에는 인간이 죽음에 임하는 다섯 가지 단계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정과 고립의 단계, 분노의 단계, 타협의 단계, 우울의 단계를 거쳐서 비로소 죽음에 순응하는 단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지상정이라면 죽음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의 용기란 대단한 것입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아끼는 마음으로 빌립을 통해 도피하실 방도를 제안했을 때 주님은 단호히 거절하시고 결연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 :24).그리고 이어서 사람이 자기 목숨을 아끼면 잃게 되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아낌없이 내놓을 때 참 생명을 얻게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인간 생명의 참된 가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에 도전할 때 빛을 발하는 젓입니다.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확증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겁내어 도피하셨다거나 사도들이 목숨을 부지하려 복음 증거하는 일을 기피했다면 아직도 온 인류 위에 사망귄세가 왕노릇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단은 오늘도 죽음의 공포를 무기삼아 우리를 위협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향해 도전하셔서 부활의 승리를 확증해 주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는 강하고 담대하여 승리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옥중에서도 생사를 초극한 신앙의 절정을 보여 준 바울의 간증을 우리의 간증으로 선언케 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 20-21).
우리는 오늘부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고난주간으로 지냅니다. 그러기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주님을 뒤따르시기 바랍니다. 악과 증오가 도사리고 있는 도성, 무서운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도성, 심지어 죽음의 위협까지 팔을 걷어 부치고 서 있는 도성으로 주님을 따라 입성하십시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앞서가신 주님이 승리하시니 반드시 우리도 승리할 것입니다. 담대히 입을 열어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십시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겁내지 말고 겟세마네의 주님을 따라 피땀 흘리는 기도를 힘씁시다. 죽음의 권세가 우리를 위협해도 담대하여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만이 존귀케 되도록 온전히 헌신합시다. 주께서 부활하신 아침, 우리 모두는 환한 얼굴로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될 것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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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부할절주일 설교 :: 부활의 첫 열매

 

 

 

제목 : 부활의 첫 열매
말씀 : 고전15:20-28
부활의 첫 열매   (고전15:20-28 )

제가 영국에 있을 때에 런던의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를 관람한 일이 있습니다. 성바울 교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로서 영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 지하에는 큰 공로를 세운 영국 위인들의 묘가 있습니다. 각 묘비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정치인, 장군, 예술가,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영국의 국민들은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곳에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결국은 이렇게 죽는 것을..' 하는 인생의 허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한 시대를 호령하던 영웅호걸이라도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묘실은 어떠했습니까?
그 곳에 "여기 예수의 몸이 누워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천사에 의해 남겨진 묘비명은 "여기 그가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빈무덤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결국 무덤에서 그들의 인생이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만은 그 무덤을 헤치고 일어나셔서 온 세계에 참 소망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외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의기소침하여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다음 부활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초대 교회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고 부활 신앙과 성령의 역사로 복음의 역사가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던 사도들이 하나 둘 순교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초대 교회 신자들 가운데서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전15:12)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헬레니즘의 사고에 따라 이원론을 받아들여 예수의 부활은 육의 부활이 아니라 영적 혹은 정신적인 부활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기독교 신앙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바울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애써 복음을 전하였던 고린도 교회에도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당시 생명을 걸고 세계 선교의 비전을 성취하려던 사도 바울에게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문제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합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현대인들은 부활을 자칫 신화적인 이야기로 간주해 버립니다. 반대로 이상한 신비주의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부활을 환생의 교리로 뒤바꿔 놓기도 합니다.

물론 부활은 분명 우주 안에 속한 법칙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한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초월적인 사건이었기에 예수의 부활이 시공(時空)을 넘어 오늘 이 땅에 사는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자만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성도들이 다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과거보다 현재 인간의 평균 수명은 무척이나 많이 연장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회갑이 돌아오면 큰 잔치를 베풀곤 했지만 최근에는 회갑연을 생략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육십 노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인간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현대 과학과 의학은 많은 연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신약들이 개발되어서 인간의 수명을 심지어 배로 연장시킬 수도 있다고 장담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과 사망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결국은 다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에 대한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죽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라도 삶에 대한 희망을 놓쳐버리고 싶지 않은 법입니다.
세상에 3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장사꾼이 손해보면서 장사한다는 말이요, 둘은 처녀가 시집가기 싫다는 말이고 마지막은 노인이 빨리 죽어야지 하는 말이랍니다. 비록 우스개 소리이지만 누구든지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자명한 일입니다.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지만 누구든지 이처럼 존재하지 않은 불로초와 영생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인류의 최대 비극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죽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누구든지 결국은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 죽음과 죽음 이 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배가 얕은 바다에 있을 때는 눈으로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만 깊은 바다에 있을 때는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다른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경험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죽음은 그 누구도 속시원히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제로 이죽음의 문제는 최고의 난제입니다. 그 누구도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 같이 위대한 사람도 "우리가 삶에 대하여서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있으랴"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달리 죽음에 대해서 명확하고 자신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아담 이 후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의 원인을 바이러스나 다른 질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죽음에 이르는 가장 무서운 질병은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죽음의 사약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담 이후에 모든 인류는 죄의 그늘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그 이후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고전15;22)는 본문의 표현처럼 모든 인류는 죄의 삯으로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죄의 결과로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서 호흡을 하며 활동하고 있으나 실상은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모태로부터 나오자마자 모든 사람은 이제 무덤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육은 살아 숨을 쉬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그 결과로 이 세상은 미움, 시기, 질투, 간음, 분쟁, 분열, 전쟁으로 참된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합니다. 어떻게 인류가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2. 예수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독일에 '죽은 자와 잠자는 자'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그 동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땅거미가 내리고 밤이 어두워오자 잠의 천사와 죽음의 천사가 밤을 지새고자 어느 마을에 내려왔습니다. 일찍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마을 사람들은 어느덧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잠의 천사는 이제야 자기 할 일을 찾았다는 듯이 이 집 저 집 다니며 잠의 씨를 뿌리고, 다시 죽음의 천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순식간 마을은 고요 속에 잠들고, 할머니도, 아기도, 그리고 외양간의 소도 모두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죽음의 천사와 함께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을 보던 잠의 천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것 봐 ! 모두들 잠이 들었어. 이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내일 하루도 열심히 일할 수 있을거야. 그리고 모두들 나를 고맙게 여길거구.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안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야." 잠의 천사가 신이 나서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죽음의 천사는 시름에 잠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너처럼 즐거울 수가 없구나. 사람들은 나의 방문을 싫어해. 모두들 내가 기쁨과 평화를 빼앗아간다고 말해."

이 말을 듣고 잠시 심각해졌던 잠의 천사가 죽음의 천사를 바라보며 이렇게말했습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장차 하나님께서 베푸실 부활의 날에 잠에서 깨어날 사람들을 생각해봐. 아마 그들은 너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할지도 몰라. 그러니 너와 나는 모두 같은 사명을 맡은 천사가 아니겠니?" 이 말을 들은 죽음의 천사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잠의 천사와 함께 평안한 미소를 띄울 수 있었습니다.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하늘 나라에서는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동화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일시적인 것으로, 장차 부활의 아침이 이르면 우리 모두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를 잠자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란 것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 이 후에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다만 그 순서와 성격이 다를 뿐 죽은 자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처음은 예수의 부활이요, 그 다음은 예수의 재림 때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 영광스러움에 들어가는 영광의 부활이요 마지막은 믿지 않은 람들이 일어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부활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영광의 부활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사람들의 부활은 비참한 부활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에게 죽음이 엄습했는데 마찬가지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삶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 수입의 모든 곡식을 바친 것이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도 모두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머리요 그의 백성은 몸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그의 몸된 교회와 성도의 부활을 일컫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라는 말씀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만 하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예수의 부활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기를 소망한다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예수의 부활에 참여한 것입니다.

죽음을 해결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와 연관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직 아담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의 그늘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빠져나와 예수와 연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부활의 첫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자는 없습니다. 이미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3. 이제 우리는 예수께 순종해야 합니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 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주여,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라고 울부짖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 자매가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세 번씩이나 잘라 버려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며 주님을 찾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매는 너무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시 후 마음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은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나도 그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걸으리라는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부활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재림하실 날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나 잠자는 이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영화로운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 주님께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24절)입니다. 곧 주님이 재림 때 모든 악한 권세 곧 사탄의 권세, 죄악의 권세를 멸하시는 때입니다. 이 때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예
수와 연관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와 연관을 가진 성도들은 비록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라 할지라도 인내하며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에 참예하는 것만이 사람이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의 쓴잔을 서슴없이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이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행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니"(히11:3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부활을 얻고자 갖은 수모와 결박, 옥에 갇힘, 궁핍, 심지어는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부활 신앙을 소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습니다.칼빈은 죽을 때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칼빈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 놓았을 뿐입니다.그래서 칼빈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고 잠들어 있는 칼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참된 소망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영원한 행복과 만족을 찾고 있지만 들려오는 소식들은 모두 사망의 소식뿐입니다. 인류의 참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의 신앙뿐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비로소 인생은 행복과 만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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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설교] 감사가 넘치는 인생

 

 


제목 : 축복받은 사람들

말씀 : 시65:1-5

1.먼저 감사부터 합시다.

(닉부이치치, 오토다케히로타다, 이지선 사진 보여주기)

닉 부이치치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보이스 목사님과 더쉬카 사모님의 사랑과 헌신과 기도로 그는 정상인의 다니는 학교를 다니며 대학까지 나왔습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훈련하여 컴퓨터는 물론 수영, 줄넘기, 골프, 농구를 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드럼까지 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19살때부터 학교와 기업, 교회 등 수많은 단체에서 강연을 하였고, 세계 여러 나라의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입니다. 어떠한 상황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절 보십시오. 저는 이와같이 팔다리가 없지만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진은 오토다케 히로타다입니다. 이 사람도 태어날때부터 팔다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정상적인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으로, 잡지사 기자로, 방송사 캐스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진은 ‘지선아 사랑해’의 저자 이지선자매입니다.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 4학년 때에 공부를 마치고 오빠와 함께 승용차로 귀가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55퍼센트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살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7개월간의 입원, 11차례의 수술,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치료. 이후에도 지금까지 매년 몇차례의 끔찍스러운 고통의 수술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난 시간에 간증을 통해서 보았듯이 과거의 그 예쁜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니 돌아가야 할 이유가 뭐냐고, 지금 더 행복하다고, 지금 더 할 일이 많다고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과거의 그 예쁜 얼굴은 잃었지만 오히려 더 주님을 믿는 믿음가운데 든든히 서게 되었고, 주님이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와 용기를 줄 수 있는 귀한 것을 얻었기에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행복은 돈에 있지도 않고, 권력에 있지도 않습니다. 지식에 있지도 않습니다. 인기에도 있지 않습니다. 얼짱 몸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데 있는 것입니다. 많든 적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주께서 주신 내 인생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과 기쁨과 존귀를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20절에서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달라고 하기 전에, 없는 것에 잃은 것에 좌절하고 낙담하기 전에 이미 주신 것에, 가지고 있는 것에, 누리고 있는 은혜에 먼저 감사부터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없는 거, 모자라 거, 약한 것, 부족한 것 생각하며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절망하지 말고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고, 거기에 믿음이 있고, 거기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감사부터 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자꾸 달라고 졸라대기 전에, 없다고 불평하기 전에, 많이 가진 자를 부러워하기 전에,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만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꼭 그런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의 뜰에 거하게 됨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감사와 은혜를 알고 누릴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바로 다윗인데 먼저 다윗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된 복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4절에서 고백합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말 그대로 주님께 택함을 받고 주님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감사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많습니다.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감사요 은혜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요, 먹고 입고 마시고 숨쉬고 자고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자유를 누리고 평화를 누리고 어느 것 하나 감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도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 어느것도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큰 은혜요, 감사인 것은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의 정원에서 주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신 사랑과 은혜와 평강의 주님이신 주님의 자녀가 되어 그 능력과 은혜와 사랑의 주이신 주님의 정원에서 살면서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세상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큰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솔직히 안 그렇습니까? 어떤 집에 산들 이런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제아무리 대궐 같은 집에다 축구장 골프장 수영장을 갖추고 온갖 아름다운 나무와 꽃을 가꾸어 놓은 정원속에 산다한들 주님의 정원에 사는 것만 하겠습니까? 그야말로 새발의 피도 안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한 너댓살 까지는 그런대로 부유한 가정이었지만 이후로 아버님의 실수로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초가삼간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웃에는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고래등같은 같은 기와집 안채에다가 사랑채도 여러칸이었습니다. 초등학교때 가끔 그 집 마당을 지나면서 열려 있는 대문으로 그 집 안뜰을 몰래 들여다보곤 하였습니다. 안채는 어린나이라서 그런지 무슨 궁궐처럼 보였습니다. 마당에는 나무로 잘 가꿔져 있었고 여러 가지 꽃도 예쁘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이 마치 천국처럼 보였습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저런 집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저런 집 뜰안에서 놀면 얼마나 좋을까, 저 집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면서 늘 부러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의 정원에서 살고 있습니까? 주님의 정원입니다. 그까짓 고래등같은 기와집 정원이 넓으면 얼마나 넓겠습니까? 좋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정원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정원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우리집입니다. 우리집 뜨락입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영광과 기쁨과 은혜와 존귀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완성되겠지만 그러나 지금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뜰안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은총을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소망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물론 때로는 환난과 핍박도 있습니다. 어려움이 올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은 결코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그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주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더욱 주님을 바라보게 만드십니다. 더욱 주님과 동행케하십니다. 더욱 주님 앞에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승리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이렇게 주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의 뜰에 거하며 주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마음껏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기억하시고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것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까짓 세상의 것들 부러워하지도 말고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좌절하질랑 더더구나 말고 나는 하나님의 정원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평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7,8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평강의 은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오직 주님만이 인생에게 닥쳐오는 모든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과 공포와 어둠속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안에 있는 자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즐거워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얼마나 많은 전쟁과 도전과 위협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끊임없이 블레셋이나 암몬이나 에돔사람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얼마나 사울에게 괴롭힘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자식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되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믿었습니다. 주의 역사하심을 믿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참고 견디며 주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결국 모든 대적자들을 물리쳐 주시고 위대한 성왕이 되게하히고 평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안식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다른데서 오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와 자유는 하나님에게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더구나 영원하고 완전한 평화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과 평강과 은혜의 창조자이시고 수여자이시고 주관자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도 그 주님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평강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실제로 여러분, 우리는 외견적으로도 얼마나 놀라운 번영과 평안과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대한민국이 이 만큼 부요하고 태평성대를 누릴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이 땅위에 교회가 세워지고 찬양소리와 기도 소리가 울려퍼지고 성도들이 새벽마다 나라와 민족과 교회와 가정을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이 함께 하셨을 때 우리는 이만한 번영과 자유와 평화와 질서와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안에서는 분명 평안이 있습니다. 주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분명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 주의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의 평안을 누리기 위하여 평강의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평강의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면서 주님안에 있는 그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결실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평화의 축복에 이어 결실의 축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보세요. 땅을 권고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고하셨다는 돌아보셨다는 것입니다. 살펴서 필요한 것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을 돌아보사 물이 필요할 때 물을 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뜨거운 태양이 필요할 때 태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단비를 내려서 단단해졌던 땅을 부드럽게 하여 싹을 내게 하셨다는 것이죠. 싹을 내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싹에 복을 주셔서 그 싹이 잘 자라도록 인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푸른 초장이 형성되어 그 초장에는 양떼가 덮여있고, 밭에는 곡식이 넉넉하게 덮여 있어서 온 무리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오늘 이땅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힘든 일이 있고, 때때로 우리를 실망시키는 일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예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땅은 축복받은 땅이예요. 은혜의 땅입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예요. 우리는 놀라운 은혜를 값없이 받은 사람들이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해도 여러분의 가정과 산업에 결실의 축복이 있는 것은 주께서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를 권고하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친히 돌아보시어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절기를 따라 적절한 태양빛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가장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갈 이 축복의 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도 농사의 현장에서, 사업장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열심히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수고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감사요, 축복이요, 커다란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할 수 있는 터전과 조건과 환경과 건강과 지혜를 주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제반 조건들을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열심히 수고한대로 먹을 수 있도록 인도하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저 감사할 것 뿐입니다. 영광 돌릴 것 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기뻐해야 할일들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특혜를 받았습니다.

지금 여기서도 우리는 마음껏 주와 동행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마음껏 찬양하며 예배드리며 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복된 삶의 터전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복받은 사람들이지 얼마나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물론 힘들때도 있습니다.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받은 바 은혜가 더 큽니다. 제아무리 어려워도 받은 은혜가 몇 백배 천배 만배 더 큽니다. 그러므로 먼저 감사부터 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있음에 감사하고, 주님의 뜰안에 거하게 하심에 감사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하고, 이 풍요로움에 감사하고, 이 자유와 평화와 질서가 있음에 감사하고, 가족이 있음에 감사하고, 이웃이 있음에 감사하고, 살아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에 혹시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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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부활절(Easter)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독교 최대의 축일이다. 초창기에는 유월절을 따라 유대력 니산월(태양력 3-4월) 14일을 부활절로 기념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의 유월절을 그리스도인의 부활절로 지킬 수 없다는 로마 교회의 판단에 따라 니케아공회(325년)부터는 춘분(3월21일) 이후 최초의 만월(彎月)이 지난 첫 번째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결코 부활절이 유월절보다 먼저 오는 일은 피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부활절의 날자는 매년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대체로 3월22일과 4월26일 사이에 떨어지게 된다.
● 2017년= 4월 16일
● 2018년= 4월 1일
● 2019년= 4월 21일
● 2020년= 4월 12일

부활절 풍습으로는 ①흰옷(기쁨) ②백합(순결) ③양고기(예수님) ④달걀(새 생명) 등이 있다.
 

B. 고난주간(Passion Week)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종료주일 다음날(월)부터 부활하시기 전날(토)까지 일주일을 말한다. 수난주간이라고도 하는 이 일 주일은 예수님의 행적을 생각하며 경건하게 지내는 주간으로 특히 최후의 만찬이 열렸던 목요일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계셨던 금요일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심정으로 금식하는 성도들이 많다.
 
 
C. 사순절(Lent)
부활절 전까지 6번의 주일을 제외한 40일동안의 기간을 말한다. 40일의 시작일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부른다. 교회는 이 기간 동안에 십자가를 생각하며 회개, 금식, 기도, 묵상 등의 경건생활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음식을 먹는 경우 고기를 제외한 채식 위주의 식단을 꾸리는 것이 원칙이다.
● 성경에서 40일은 고난과 인내의 기간을 상징한다. 노아의 홍수 때 밤낮으로 비가 40일간 내렸고(창 7:4),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으며(민 14:33), 예수님께서는 40일동안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마 4:1).
 
 
D. 사육제)(Carnival)
카니발의 어원은 ‘고기여 안녕’이라는 뜻이다. 즉 원래 사육제는 사순절 기간 동안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될 것을 대비하여 미리 실컷 고기를 먹어두는 3-7일 정도의 행사 기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본질은 사라지고 자유와 방종이 과도하게 허용되는 축제로 변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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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기예배 ] 부활주일예배 예수부활 

 
 

 


 나는 왜 예수부활을 믿는가?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1.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1)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맹목적(盲目的)으로 믿지 않았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맹목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의심하고, 충분히 불신하고, 충분히 거리를 두고 예수의 부활을 검토한 뒤에 믿기 시작한 것이다. 사기꾼들은 처음부터 믿음을 주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제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부활의 날 아침 신문 속보에 실린 1면 기사는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아다닌 사람들 이야기’가 정작 부활하신 주님보다 더 많이 다루어졌다. 부활 아침에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았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찾지는 않았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 16:6).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와서 제자들에게 이야기 했을 때 마가복음 16:11은 이렇게 반응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듣고도 믿지 않았다. 누가복음 24:11은 좀 더 강하게 묘사한다.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 심지어 마태복음 28:17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말씀을 하실 때의 반응도 보여 준다.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제자들은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 이야기나 덥석 믿어버리는 맹목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어리석은 촌뜨기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부활에 목숨을 건 제자들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도 나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2)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신앙을 날조(捏造)하지 않았다.

  ‘날조’란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조작하는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완전히 날조하여 퍼트리려고 작정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처 실패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검찰이 론스타 회사의 불법을 조사하기 위해 700상자 분량의 서류를 검토한 적이 있다. 불법을 저지르려면 철저하게 잘못을 감춰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위해서 어떤 안전장치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부활 사건을 보호하려는 어떤 인간적인 시도도 하지 않았다. 부활을 음모하려면 모든 제자들이 모여서 입을 맞추고, 모든 사건 순서와 모든 내용을 똑같이 증언해야 하며, 부활에 대한 대단한 확신도 보여주어야 하고, 부활에 대한 모든 증언이 일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성경은 지난 수천 년 동안에 오류를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한 번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왜? 부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부활 사건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꾸밀 필요가 없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류나 인간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사건이 오류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도 잡혀가 죽을 까봐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부활신앙을 믿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같았다. 얼마나 겁이 났던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주변에는 요한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 달아났던 제자들이다.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례를 치른 것은 의외의 인물들이다. 예수 믿는 신앙을 감춰왔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서서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런 정황으로 보건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꾸미거나 부활을 확신하는 척하거나 목숨을 걸고 군인들이 지키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보기엔 너무 무리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예수 믿는 신앙을 후회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끝이 났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을 듣고 오히려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마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는 실패한 사업가와 같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황우석 박사의 추종자들만도 못했다. 목숨을 건 제자도 없고, 나서서 데모하는 제자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위하여 어떤 인위적인 시도조차도 할 수 없었을 만큼 부활을 믿지 않았던 자들이다.

  

3) 예수 부활은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증언되었다.

  예수님이 처음 태어나셨을 때 그의 증인은 목동들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목격하고 전한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목동이나 여성들은 1세기 유대사회에서 별 볼일 없는 그룹이다. 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증언으로 채택되지도 않는다. 만일 사람들을 믿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좀 더 그럴싸한 증인을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부활소식을 전하게 하려고 초대교회는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서 사기극(詐欺劇)을 연출할 필요가 없었다. 하찮은 여인들의 증언이야 말로 초대교회가 부활을 날조하지 않았다는 좋은 증거다. 노예해방의 전기를 가져온 엉클 톰의 이야기를 쓴 사람을 만났을 때 링컨은 놀랐다. 이렇게 키도 작은 여성이란 사실에. 부활의 증인은 위대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이면 족한 것이다.

  

  4) 예수 부활 사건 기록은 수정되거나 보완되지 않았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음모나 날조로 부활이야기가 생겼다면 시간이 흘러 부활 이야기는 좀 더 완벽한 시나리오로 고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교회 한만오 목사님이 미국에서 논문 초고를 제출하면서 지도교수에게 물었다. “이 논문이 지금 어느 정도 평가를 받겠습니까?” 슈미트 박사는 말하기를 “이 논문은 B급이라”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한만오 목사님이 실망하여 내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 어떡하면 좋지요? 내 논문이 B밖에 안 된데요.”

  내가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격려해 드렸다. “목사님, 논문 초고(first draft)를 내면서 B라면 아주 잘한 겁니다. 논문 수정을 한 번 거치면 B가 B+이 되고, 두 번 거치면 B+이 A-가 되는 겁니다.  졸업할 때까지 논문 방어를 하고 나서 한 번 더 수정하면  A-가 A가 됩니다. 틀림없이 A 받으실 겁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부활 점수를 A로 받기 위해 박사 논문을 수정하듯 손대지 않았다. 수정할 필요도 없다. 성경은 누구의 변호도 필요치 않는다.

 

  데이빗 스티브스는 1957년 공군 중위로 공군 훈련 제트기를 타고 훈련받다가 비행기가 추락, 실종 된지 54일 만에 캘리포니아 주 시에라 산중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이미 시종 사망 처리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스티브스가 말하는 것처럼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찾지 못해 사건 조작 혐의로 강제 전역 당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뒤에 그 비행기 잔해가 캠프 하던 보이스카우트 소년들에게 발견되어 20년 만에 그의 이야기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마치 부활이 조작이라고 말하도록 만들게 되지 않을까? 그의 청중을 위해 예수님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고 수정하고 싶지 않은가?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왜 실망하여 예루살렘을 떠나려했고, 그들은 예수님이 대화에 끼어들어 한 동안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뭔가 부족한 듯 보이는 이 이야기를 좀 더 완벽하게 수정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도무지 변증하거나 잘 보이려고 애쓰거나, 보다 완벽한 구성을 해서 제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부활 사건을 경험했던 충격 그대로 우리에게 기록하여 전해준다.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2. 나는 부활의 역사적(歷史的) 사실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프랑스의 한 신문사가 세계의 저명인사 100명에게 ‘지구의 파멸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안전하게 반출해야 할 지구상의 보물이 무엇이냐?’고 설문조사를 했다. 2위는 인간예술의 극치로 평가받는 미로의 비너스상이다. 1위는 무엇일까? 폭 1m, 길이 4m 20cm인 세마포,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하찮은 삼베 수의천이 인류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었다. 수년 전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 화재가 일어나 완전히 전소되었을 때 그 역사적 성당 안에 수많은 보물들이 불에 타 한 줌 재가 되어버렸다. 그 당시 가장 큰 관심은 토리노 성당 안에 있던 세마포였다. 화재 신고를 받은 소방대원들은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 3층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트린 뒤 그 세마포가 담긴 상자를 안고 나왔다. 왜 세마포롤 첫 번째 보물로 여기고, 소방관은 자기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면서도 세마포를 가지고 나왔을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라”(마 28:6). 

 무덤은 비었고, 수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요한복음 20:3-08을 보면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수의는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처럼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향유를 바르고,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던 바로 그 모양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1) 빈 무덤과 빈 수의는 부활의 큰 증거다.

  2) 유대 지도자들은 부활에 관한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3) 유대 종교와 로마의 통치 속에서 기독교가 탄생했다.

  4) 주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시작한 것은 부활의 역사적 부산물이다.

 

3. 나는 부활 신앙을 인해 변화된 사람들 때문에 예수부활을 믿는다.

 

  의심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하면 쉽게 믿어지겠는가? 믿기 어려워서, 믿을 수 없어서 고민한 사람들이 많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누가 돌을 치웠는가??(Who Moved the Stone?)이라는 책을 쓴 영국의 저널리스트 프랭크 모리슨이다. 모리슨의 의도는 부활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려던 것이었는데 쓰다 보니 결론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영국의 두 젊은 무신론 변호사 길버트 웨스트(Gilbert West)와 리틀톤(Lyttleton)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기독교를 무너뜨릴 궁리를 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역사성(歷史性)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입증만 하면 기독교는 모래성처럼 허물이 지게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길버트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리틀톤은 사울의 회심에 대한 책을 각각 쓰기로 했다. 성경을 포함한 많은 책을 읽고 연구를 하던 중 얼마 후에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들의 결론은 놀라웠다. 아무리 보아도 예수는 부활하셨고, 사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조사하고 연구한 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과「사울의 회심」(The Conversion of St. Paul)이다. ?벤허?라는 영화의 원작을 쓰기 전까지 월러스(Wallace)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예수를 믿는 것을 우습게 여겼던 작가이다. 그의 친구의 말을 믿고 있었다.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월러스가 소설을 쓰기 위해 성경을 읽고, 역사적인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영화 속의 불신자 벤허처럼 그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앞에 무릎을 꿇어다. 영화 속의 벤허는 복수심에 불타 칼과 창으로 민족을 해방시키겠다는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자 그는 딴 사람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자 그는 딴 사람이 되었다.  

 


   1) 부활을 받아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다.

  숨어있기에 급급했던 이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40일 동안 11번 넘게 만나면서, 순교도 마다않는 겁 없는 전도자들로 변했다. 그들의 변화를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진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진다.  

 

  2) 예수의 육신적인 형제며 불신자인 야고보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야고는 부활 사건 전까지는 예수의 주님 되심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그의 형을 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3) 의심 많은 제자 도마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요한복음 20:25을 보면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던 제자이다. 도마에게 감사하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의심해 준 것, 우리가 거쳐야 했을 고민을 그가 먼저 해 준 것을 감사하자. 요한복음에서 가장 감격적인 신앙 고백은 도마의 입술에서 나왔다. 그는 먼저 회의론자, 의심 많은 자로서 고통스런 시간을 먼저 보냈다.  그런 뒤에 이런 위대한 고백을 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4)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울은 부활의 증인으로 변했다.

  사울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던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교회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는데 힘썼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다. 그것은 사울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사건이었다. 그는 3일 간을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그리고 나서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는 왕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고, 이방인들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다. 그의 변화는 마치 아인슈타인이 예수를 믿은 것보다 더 큰 사건이다.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노후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겼다.

 

“나는 평소에, 특별히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했습니다. 교회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내 조국 독일이 어두워 졌을 때, 그리고 나치의 핍박 아래 있었을 때 내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교회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사람들의 안식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노후에 인생의 석양녘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교회로 다시 돌아옵니다. 내 영혼의 안식처인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 예수도 잘 믿는다.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이유와 근거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 소크라테스는 하나님을 믿었다. 갈릴레오, 베이컨(Bacon), 과학자 아이삭 뉴톤 경(Sir Isaac Newton), 파스테르(Pasteur) 같은 뛰어난 과학자, 철학자, 사상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들이 바보라서 믿었을까? 아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해답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주시기에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죄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에 삶을 의탁하는 것이다. 이별의 아픔에서, 무덤의 그림자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예수님만이 구원하시며 희망이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예수님만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의 보증이시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이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이시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부활에 관한 희망을 주신다.

 

4. 나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 때문에 예수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요 20:20). 왜 우리를 향한 대속(代贖)의 상처는 낫지 않았을까? 사라지지 않은 채 주님 몸에 남아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상처에서 희망(希望)을 본다. 그 상처는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을 이어주는 중요한 표시이다. 구원과 구원의 보증(保證)의 표시이다. 상처가 준 고통은 사라졌지만 상처의 흔적은 남아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1) 나를 위해 어떤 사랑의 희생(犧牲)도 치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나를 구원할 능력이 충분(充分)함을 보여준다.

  3) 나의 죄 사함과 구원이 영원(永遠)함을 확증한다.

 

  언젠가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며 그 손에 난 상처를 보실 것이다. 부활신앙이란 우리가 흘린 눈물, 우리가 당한 비극,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치른 모든 희생을 주님이 기억하여 주시는 것이다. 예수 몸에 난 상처가 그렇듯이 나와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 난 상처는 새로운 몸을 입어도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님에게 증거가 된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증거가 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나는 어머니의 굵게 파인 주름살을 기억한다. 나는 어머니의 거치러진 손의 느낌이 가슴에 남아있다. 나는 그 손을 만져보고 싶고, 그 주름진 얼굴이 보고 싶은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인도에 썬다씽이라는 유명한 성자가 있다. 그거 어느 해 영국을 방문해서 국회에서 연설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강연을 경청하였다. 참석자 중의 유명한 교수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당신은 뿌리 깊은 힌두교의 유명한 학자이고 철저한 힌두교인인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까?”

  썬다씽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 부활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이 있다. 힌두교나 불교는 인생무상이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생명을 준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 많은 내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다가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의 돌을 굴려버리시고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께 감사하자. 슬픔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우리들 때문에 다시 무덤까지 찾아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 감사하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실망의 길을 걷는 우리들을 따라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종종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낯선 방법으로, 낯선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기뻐하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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