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성령충만함을 받으라

 

 

 

제목 :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말씀 : 엡5:15~18

1.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거룩하시고 진실하시고 선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신 유일한 구원자라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고 여기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믿음을 가진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는 진정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풍성히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우리가 믿는 그 믿음대로 주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음으로 믿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을 따라 살아야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고 그래야 비로소 그 믿음이 주는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동행해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라고 믿으면서 그래서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이 있다고 믿는다고 하면서 따라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어둠 가운데 있으면서 빛의 은혜를 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 은혜를 누리고 못 누리고를 떠나서 믿는다고 하며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야 하고 그러면 분명히 예수님이 주시는 그 무한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정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건 말하나마나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으면 하나님을 믿게 되고 더 나아가서 충만하게 받으면 정말 성령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얼마든지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전체를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보세요.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지혜있는 자가 되라는 거예요. 왜요? 때가 악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때가 악해서 뭐 어쨌다는 겁니까? 지혜가 없으면 악하고 왜곡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 있는 자가 되어 악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말고 올바른 분별력과 힘을 가지고 그걸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을 얻게 되어 주님과 동행하며 세상의 왜곡되고 헛된 것들을 물리치고 진정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그래서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자신도 하나님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죄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죄와 무지가운데서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를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 어두운 영혼이 밝아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게되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게 되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알게 됩니다. 사탄에게서 해방되고, 세상의 죄와 무지와 도전과 유혹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올바른 분별력과 지혜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령의 받아야 합니다. 받되 한번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지 못하면 어떻게 근근이 죽지 않을 만큼의 생명을 유지할지는 몰라도 세상에 너무나 만연되어 있는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과 도전을 이길만한 영적 능력이 부족하여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게 되어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느라고 다니기는 다니는데 예수님 안에 넘쳐흐르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것은 못 받아도 별거 없습니다. 세상의 것 많이 받은 사람이나 적게 받은 사람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거기서 거깁니다. 그래봤자 죄인이고 그래봤자 다 근심걱정 시기질투 속에 지지고 볶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령충만 받으면 다릅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운명이 바뀝니다. 영생복락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쳐나는 살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함을 받습니까? 물론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먼저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어서 자연인 그대로는 어떤 생명의 은총도 누릴 수 없고 오직 성령을 받아야 생명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기쁘시게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어 생명의 능력과 은헤와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그 사람이 여러분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면 갈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설령 억지로 간대해도 반가워하기는커녕 시큰둥하게 여기고 귀찮게 여기면 그 사람과 오래 함께 머물겠습니까?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는 가운데 성령의 오심을 다른 무엇보다 기뻐하고 간절히 기다리는 그 영혼 속에 기쁨으로 찾아 가셔서 거기 계속 머무시면서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07:9절에서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모하는 영혼 즉 하나님 안에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있음을 믿고 그러기에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에게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성령님과의 만남과 그 안에서 누리게 될 은총을 진실로 사모해야 하는데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진실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말씀과 기도와 찬양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돈을 사모하는 사람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돈 냄새가 나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을 달려갑니다. 오락이나 도박이나 술이나 이런 것에 빠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거기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한다면 어디로 달려가겠습니까? 물론 성령이 역사하는 곳으로 달려가게 되겠지요.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는 곳이지요. 그러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 교회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배드립시다. 말씀 묵상합시다. 기도합시다. 찬송합시다. 그러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무엇으로 성령의 은총을 덧입을 수 있습니까? 영은 오직 영으로만 통하기 때문에 오직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 안에서 기도로 대화할 때에 하나님과 우리 영이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쓰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믿음을 주시고 힘과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말씀 되새기며 기도할 때에 성령 충만함을 받아 능력 있는 제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행1:14절을 보십시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기도하기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2:4절을 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말씀 되새기며 기도에 힘썼을 때 드디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열흘 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어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성령의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은총을 사모하신다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를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우리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여러분, 그러면 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물론 앞에서 이미 상당부분 언급이 되었습니다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인생을 알게 되고 그래서 주님을 믿고 거듭나 새 생명을 얻음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에 성령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도전과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의의 길로 잘 달려가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을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못 받아도 성령은 받아야 합니다.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죄와 무지 가운데 있던 옛자아가 죽고 영혼이 소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 가지고 있던 인생의 목적과 방향과 의미는 사라지고 주님이 주시는 새롭고 올바르고 살아있는 인생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천국시민이 됨으로 거듭나고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니 거듭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알든 알지 못하든 사탄의 지배 속에서 사탄의 조종을 받으며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죄되고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살며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건 죄와 무지 속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방황하는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스스로는 다 똑똑하고 잘나고 세상에 모르는 것 하나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왔지만 그러나 실상은 죄와 무지 가운데 살아가는 무지몽매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완전히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세상에 지배당하고 세상에 취하여 세상 사람들이 살아 가는대로 살아갔는데 이제는 성령에 취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물론 성령은 생명의 영, 은혜의 영, 거룩한 영, 진리의 영이기시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생명의 풍성한 은혜과 기쁨과 능력을 평안과 위로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삶의 모습을 보면 흡사 술에 취한 사람과 비슷합니다. 물론 결과는 반대지만 원리적으로 보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술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 몸과 마음을 술이 지배해버립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내 마음대로 잘 안됩니다. 그래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거리다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집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술이 내 마음을 지배해 버리니까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게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싸우기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노상방뇨도 하고, 음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술이 나를 지배해 버려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에 취해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은 영적 육체적 마음적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지만 성령은 진리의 영, 선한 영, 은혜의 영, 의의 영이시므로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혜와 분별력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의의 길로 달려가며 주께 영광을 돌리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어렵고 힘든 일도 이기게 하십니다. 상황과 환경도 이기게 하십니다. 심지어 환난과 핍박과 죽음까지도 이기게 마침내 완전한 승리자가 되게 하십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술이 내 정신 줄을 제 맘대로 조종하여 평소에는 못하던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하고, 추하고 더러운 말도 서슴없이 하게 되고,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곤해서 사람을 질려버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에 취하면 쓸데없고 추한 말이 많아지지만 성령에 취하면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는 말이 많아집니다.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느라고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감각이 무뎌져서 근심걱정을 조금쯤은 잊어버려 약간은 평안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건 진짜 평안이 아닙니다. 잠시 약간의 정신적인 마취를 시켜 놓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취가 풀리면 즉 술에서 깨어나면 더 괴롭고 후회스럽고 수치감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하면 생명과 평강과 소망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영혼과 마음을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근심 걱정이나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진정으로 평강과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인하여 더욱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즘에 보면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취해 있지 않고 돈과 명예와 안일함과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와 세상 즐거움에 취해 있습니다. 심지어는 술과 마약과 향락과 도박에 취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세상에 취해서 헌신과 봉사와 충성과 이런 거룩한 귀하고 복된 가치들을 고색창연한 옛말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성수하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고, 술을 마셔도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18절에서 술 취한 것을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방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잠23:31~33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여러분, 그래도 마셔도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이 말씀들은 도대체 뭡니까?

여러분, 롬12: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러분, 보세요.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술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겠습니까? 그게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이겠습니까?

여러분, 바로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르게 분별하게 됩니다. 그래야 이 왜곡된 세대를 본받지 않고 주님을 본받게 됩니다. 그래야 우리 몸이 거룩한 산제물이 되고 그래야 거룩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령강림절기를 보내면서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 묵상함으로 성령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이 세대의 왜곡된 풍조에 휩쓸려가지 말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하게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꼭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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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만왕의 왕 예수
말씀 : 눅19:28-40

평화의 사자로 자칭하는 미국과 영국연합군이 바그다드에 입성했습니다. 폭격으로 중요한 모든 건물들이 다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인명피해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또 얼마나 사람들이 죽을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이라크 국민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바그다드에 왔다. 고 했습니다. 평화를 주기 위해 온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극을 안겨 주었습니다. 부모와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울부짖음, 병상에서 부모를 잃고 누워 있는 어린아이. 그 처참한 모습은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저들은 평화의 사자로 자칭하면서 장갑차와 탱크를 앞세우고 들어 왔습니다. 앞으로 군정을 통해서 자유를 주겠다고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종려 주일입니다. 그분은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을 하고 입성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타고 기마병을 동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수많은 병사들과 함께 간 것도 아닙니다. 12영도 더되는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그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는 조그마한 나귀를 타고 입성 하셨습니다. 그것도 나귀 에미가 아니라 한 번도 사람이 타 본적이 없는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 하셨습니다.

길들여진 나귀가 아닙니다. 그러니 사람을 제대로 태울 수가 없어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얼마나 초라합니까? 왕의 입성으로는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입성 하셨습니다. 왜냐구요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죽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으러 오셨습니다. 빼앗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주러 왔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오십니다. 제자 둘을 불러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무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메여 있는 것을 보면 풀어 끌고 오라 누가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래서 제자들이 갔습니다. 정말 나귀새끼가 있고 저들이 끌고 갈 때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왜 남의 나귀 새끼를 끌고 가느냐? 해서 주가 쓰시겠다 하니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습니다.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타시게 했습니다. 안장하나 없어서 겉옷을 안장으로 삼았습니다. 궁색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금으로 만든 안장을 깔고 다니는데 예수님은 천으로 된 안장 하나도 없습니다. 가시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양탄자를 못 깔고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겉옷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 안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그 겉옷은 겉옷이 아니라 사랑의 양탄자입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을 목격한 제자들과 무리들이 큰소리로 찬양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했습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 있던 어떤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겁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자들이 외치는 소리는 왕의 입성을 알리는 소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때 주님의 대답이 분명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왕이 입성하는데 왕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왕입니다. 왕이면서 만 왕의 왕입니다. 그런데 그 왕께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자기백성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거기에 우리 가슴이 뭉클 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데, 내가 무엇인데 왕께서 나를 위해 고초를 당하셨나 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1.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예수님은 주의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에는 누가 세우지도 않았는데 제 스스로 왕이 된 사람도 많습니다. 어느 정신 병원에 한 환자가 나는 왕이다. 나는 왕이다 하고 가니까 저 앞에서 고무신을 끈으로 묽어 끌고 오는 환자가 하는 말이 내가 언제 너를 임명했냐 그러더 랍니다. 세상에는 원하지도 않는데 세우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폭력으로 제가 왕이 된 사람이 많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주의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수님 오심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세례요한 이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하고 증언했습니다. 때가 되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니고 강제로 오신 것이 아니고 주의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소리가 나서 들리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2.나귀 타고 오신 왕
왕의 입성이라면 뭔가 화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지구상에 나귀 타고 입성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외국에 내빈 하나만 와도 빨간 융탄 자가 깔리고 고급 쎄단차가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말도 아니고 나귀입니다. 나귀는 장사꾼들이 예루살렘을 드나들면서 타고 다니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나귀새끼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나귀 타고 오는 것을 겁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귀는 그들과 친숙한 동물입니다. 그들 삶 속에는 언제나 나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을 모신 자리가 평화입니다. 또한 나귀 타고 오심은 겸손입니다. 온유하심입니다.  만 왕의 왕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신 것입니다. 우리를 가까이 하시기 위해 낮추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사에 쓸데없는 교만과 허세가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언제든지 빈 수레가 요란 하구요 가벼운 것이 멀리 날라 갑니다.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 되신 주님은 요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겉치레로 화려한 것 보다 든든한 속마음을 장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를 진정 사랑하는 제자들의 순종이 더 좋은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겉옷이 양탄자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습니다.  양탄자는 돈으로 살수 있지만 사랑은 돈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 것입니까? 무엇이 더 귀한 것입니까? 그분은 우리 위에 군림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며 도리어 섬기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3.찬양 받고 받으실 왕
사람들이 노래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 되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주 되시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분은 창조주 되시기에 찬양 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합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4.죽으러 오신 왕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남들은 좋아할는지 모르나 주님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의왕처럼 군림하러 가는 줄 알고 자기들도 한자리 할 줄 알고 좋아하나 주님은 그러하질 못합니다. 주님은 지금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시기에 인간적으로는 더욱 고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가자 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발을 옮기자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서로 누가 높으냐 하고 다투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지금 답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만 주님이 하시는 일은 이해가 안됩니다. 왜 죽으러 간다고 하는지가 이해가 안됩니다. 예수님의 그 능력으로 로마 놈들을 싹 쓸어버리고 왕으로 올라앉으면 그만인데 왜 저렇게 꾸물거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곱 살 난 아이가 담배를 피우더랍니다. 그래서 꼬마 놈이 왠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었더니 “ 마음이 답답해서 피운답니다. 네가 뭐가 그리 답답하냐 했더니 남북통일이 안돼서 그럽니다 하더랍니다. 어른들이 답답 한거요 빨리빨리 철조망 뜯어내고 손잡으면 될 터인데 맨 날 무슨 회담이나 하고 앉았으니 답답하지요. 제자들이 그래요

믿음생활하면서 답답한 일이 없습니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맞추지 말고 나를 예수님에게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입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십자가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보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찢으신 몸과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기 무엇인지를 알고 오늘 성찬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영태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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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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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 설교] 전인적 부활의 능력

 

 

 

제목 : 부활의 능력으로

말씀 : 요5:24~29

1.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죽음이라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예수님이 생명의 주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전 우주 공간과 역사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은혜와 기쁨이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죄 사함의 은총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주어진 영원한 새 생명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만이 참 종교의 조건입니다. 제아무리 지적 윤리적 도덕적 철학적으로 고상하고 심지어 사랑이 충만해도 생명의 없으면 빛 좋은 개살구요, 알맹이 없는 씨앗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어야 진짜고 이 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도덕도 흉낼 낼 수도 없고, 흉내 내지도 못한 놀랍고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법칙과 질서와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믿지를 못합니다.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마저도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건 인간의 죄와 무지와 한계의 소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인생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거나 말거나 부활은 우주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실이고 진실이고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에 누누이 예언되었던 일이요, 예수님께서 미리 예고하시고 약속하신 일입니다. 눅9:2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그리고 물론 당연히 그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28:6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대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가 사망권세, 사탄의 권세를 보기 좋게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식과 경험과 과학의 법칙은 물론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생명의 주님이심을, 그 안에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그 분이 온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심을 만천하에 알리셨습니다.

물론 이 일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 영웅호걸이나 종교의 창시자나 철학이나 지식이나 과학이나 그 어떤 것도 하지도 못했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생명을 조금 유익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조금 생명을 연장하고 조금 건강하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생명을 창조할 수도, 살릴 수도 없습니다. 오직 유일한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주관자이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우리 주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살아생전에도 죽음을 향하여 명령하셨고, 그러자 사망이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였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향하여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4)고 명령하자 청년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외치셨을 때 썩어 가던 나사로가 걸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병들어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소녀야, 일어나라.”고 명령하자 즉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도 오늘 친히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절을 보내며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심령 속에 더욱 온전히 모셔 들이고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하고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 가운데 부활의 생명이 넘침으로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소망과 승리가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러한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 주님께서 이루신 부활의 생명을 마음껏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먼저 영적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부활의 능력과 은혜를 마음껏 맛보며 살아가려면 먼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우리 영혼이 부활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죄와 무지와 불의를 비롯한 모든 어둠에 속한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그런 것들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산다는 것은 믿음과 진리와 선과 의에 대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덧입어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 죄에서 해방되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덧입어 의와 선과 진리에 대하여 살아남으로 말씀가운데 진리가운데 선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넘치게 되고, 그러면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어둡고 칙칙하고 더럽고 악하고 추한 것들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부활의 생명력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25절을 보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이 때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는 살아난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냐? 바로 지금이다. 그런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 말씀에서의 죽은 자는 육신이 죽은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죽은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신이 죽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오직 심판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는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혹 듣는다해도 믿고 회개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서도 죽은 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살아난다는 것은 육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 있는 영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살아난다는 것은 영혼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게 거듭남이지요. 그래서 바로 앞절의 24절에서는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거듭남이고 구원이고 영적인 부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먼저 바로 이 거듭남, 즉 영적인 부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일단은 천국백성이 되고 그 다음에는 부활의 생명과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거듭남으로 일단은 영적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부활했으면 이제는 과거에 우리가 영적으로 죽어있을 때 우리를 지배하던 죄와 무지와 어둠의 세력들을 뿌리쳐 버려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영적으로 부활했는데 영적으로 죽은 자처럼 살면 안 되지 않습니까? 과거에 우리 영혼이 죽어 있어서 죄와 무지와 마귀사탄의 종이 되어 끌려다녔지만 이제는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모든 마귀사탄의 흉계와 유혹과 위협을 간파해 내고 호통을 치며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르게 섬기며 세상의 영광과 명예와 물질과 육신의 욕구와 모든 원망과 불평과 좌절과 시기와 질투와 거짓 등의 세상의 모든 더럽고 추하고 속되고 죄된 것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영혼이 부활한 자의 삶이요, 이것이 진정 능력있는 삶이요, 진정한 자유와 승리를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상황이나 환경이나 돈과 명예와 세상 영광과 세상 즐거움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 걱정 근심 염려 원망 불평 좌절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아름답게 감사와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평강과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할렐루야 찬양하며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4:12,13절에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외치며 능력있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고 온전히 거듭남의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죄로 인하여 죽어있던 영혼이 온전히 부활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으로 이기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되어 온전히 거듭난 심령, 부활한 영혼으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약하고 추하고 악하고 속된 것과 모든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을 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고 예수님의 생명 은혜 기쁨 평안 위로 소망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인격적 부활

여러분,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부활하면 자연히 인격적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는 우리 영혼이 죽어 있어서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과 방향도 알지 못합니다.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영혼이 죽어 있어서 캄캄한 가운데 있으니 어떻게 알겠습니까? 별빛도 달빛도 그 어떤 인공적인 조명도 없는 완전히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가다가 넘어지고 자빠지고 구덩이에 빠지고 벽에 부딪치고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영혼이 죽어 있는 인생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게 됩니다. 올바른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바르게 사용하지도 못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릅니다. 그저 죄된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부활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죽어 있어서 감각도 없고 분별력도 없고 캄캄한 가운데 있던 우리 영혼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시고 그래서 생명의 빛이 비춰지고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영혼이 살아나면 그야말로 우리 영혼이 밝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면 비로소 인생을 알게 됩니다. 인생의 본분을 바르게 깨닫습니다. 내 육신과 생명과 능력과 지혜와 지식과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비로소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주님의 기쁘신 뜻을 알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주님을 위하여 사용할줄 아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 속에 부활의 주님의 은혜가 충만함으로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희망과 소망과 위로와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름다워지고, 정직과 진실과 성실로 주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예배와 기도와 찬송하는 시간이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말씀의 맛이 꿀맛처럼 달아집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을 가까이하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 심령 속에 생명의 은혜로 더욱 가득하게 되고 그리하여 현재적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의 모습이요, 이것이 바로 말 그대로 거듭난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5: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과거에 죽어있던 영혼이 살아난 것입니다. 과거에는 죄와 죽음과 사탄이 내 안에 역사했으나 이제는 예수님과 의와 생명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 영광을 돌리며 하늘나라를 맛보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들임으로 일단 영적으로 온전히 부활한 생명을 가지고, 더 나아가 과거의 모든 악하고 왜곡되고 추하고 부정적인 모든 모습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림으로 인격적으로도 온전히 부활하여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육체적 부활

여러분,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일단은 영적으로 부활하게 되고, 영적으로 부활하면 전 인격이 새로워져 인격적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과 혼의 부활이 전부는 아닙니다. 부활의 완성은 신령한 육체로의 부활입니다. 이 부활이 마지막 부활이요 완전한 부활이요 궁극적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루어질 것인데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고, 주님을 알지 못하고 거부함으로 죄를 그대로 가지고 간 영혼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28,29절을 보겠습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보십시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때가 온다. 그때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이요,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서 선한 일, 악한 일은 단순히 인격적으로 선하고 악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믿음이 없다면 인격적으로 아무리 선해도 선한 일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선한 일은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아무리 선을 행해도 선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설령 세상에서 선을 좀 행한다해도 선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0: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육체적인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의 육체는 지금의 육체와는 달리 신령한 육체요, 영광스러운 육체입니다. 그래서 늙지도 병들지도 아프지도 죽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염려 근심 걱정 원망 불평 등의 어둠에 속한 것들은 하나도 없고, 하나도 지배를 받지 않는 완전한 육체입니다. 이 신령한 육신은 물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지만 그러나 시공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5:42~44절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선 영적으로 부활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부활합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부활합니다. 이 육체적인 부활이 이루어질 때 부활이 완성됩니다. 영적 인격적 부활을 가진 자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모든 어둠과 마귀사탄과 죽음과 세상의 왜곡되고 무지하고 추하고 더러운 것들을 이기는 삶을 살기는 하지만 100%는 못됩니다. 혹 70%. 혹 80%, 혹 90% 하늘나라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혹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육체의 부활이 이루어져 전인격적으로 부활이 완전히 완성되었을 때 우리는 그야말로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영원토록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 어둠의 권세, 마귀 사탄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부활절을 맞이하여 진정 오직 유일한 생명의 부활이신 예수님을 더욱 온전히 심령 속에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실로 영혼이 온전히 거듭나고 부활하고 인격적으로도 거듭나고 부활함으로 마귀 사탄 어둠 권세 물리치신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어둡고 칙칙하고 더럽고 악한 것들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부활이 완성된 단계가 아니라서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여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반드시 영과 육과 혼이 완전한 새 생명으로서의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모든 죄와 무지와 추함과 낙심 원망 불평 절망 근심 염려 시기 미움 거짓 위선 다 집어던지고 믿음과 사랑과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부활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부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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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 부활절예배 설교

 

 

 

제 목 :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
말 씀 : 고린도전서 15장 12절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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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설교 : 은혜충만한 인생

 

 


제목 : 만선(滿船) 인생

말씀 : 요21:1-6

1.깨달음과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중국의 고대문헌인 벽암록(碧巖錄)에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啐 떠들 줄, 啄 쫄 탁, 同 같을 동, 機 기회 기자를 쓰는데 계란이 부화하여 병아리가 되어 나올 때를 비유하여 나온 말로 때를 알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해야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병아리는 때가 되면 밖으로 나가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껍질을 톡톡 두드려 어미 닭에게 껍질을 깨트려 달라고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줄(啐)입니다. 그러면 어미 닭은 이 신호를 듣고 병아리가 나올 때가 되었으니 도와달라는 신호인 줄 깨닫고 거기에 응답해서 껍질을 톡톡 쪼아 깨트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탁(啄)입니다.

이와같이 병아리는 병아리대로 어미닭은 어미 닭대로 깨닫고 행동하는 것이 같은 시기에 이루어져야하는데 이게 동기(同機同)입니다. 그러면 건강한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어느 한쪽이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깨달아도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고, 너무 늦게 행동하면 자칫하면 병아리는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그 안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원리는 비단 병아리가 부화될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깨닫기만하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깨달아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행동하는 것도 시기가 있습니다. 뒤늦게 깨닫고 행동하고자 해도 때를 놓치면 일을 그르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깨달아야 하고 나아가 적절한 시기에 행동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이루어져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줄탁동기가 필요합니다. 우선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깨닫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았으면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없고, 또한 깨닫기는 깨달아도 거기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 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닫고 그 깨달음을 따라 행동할 때에 비로소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의 도, 생명의 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속에서 자기 생각대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뭔가 좀 알 것 같은 데 조금 지나면 그만 말씀의 의미를 다 까먹고 그저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예수님이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그 말씀대로 로마병정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는 것을 보자 저분에게서는 기대할 것이 없다면서 다 떠나 버리고 말지 않았습니까?

심지어는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떡만을 생각하며, 육신의 떡을 걱정하며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막8:17절에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어찌해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동안 그만큼 너희들과 함께 하며 너희에게 말한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만큼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바람과 파도를 명령하여 잔잔케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내가 생명의 주임을 너희에게 분명히 보여주었건만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고 먹을 것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느냐고 하시면서 영적인 감각이 둔하여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선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줄탁동기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 심령의 문을 톡톡 두리면서 잽싸게 응답하여 그 말씀대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정말 주님과 주님의 뜻과 주님안에 있는 그 생명의 은총을 바르게 깨닫고 이해함으로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주님을 바르게 알고, 나아가서는 그 아는 지식을 따라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삶이 하나 되고, 믿음과 행동이 하나 되고, 신앙과 삶이 조화를 이루저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자기 생각대로 행동했을 때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안타깝게도 주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자기마음대로 엉뚱한 일을 하다가 참혹한 실패를 당했던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오늘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그러니까 어부출신으로 갈릴리 바닷가에 잔뼈가 굵은 베드로를 비롯해서 다른 여러 명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닷가로 나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피라미 한마디로 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후 여러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뒤에 있었던 일입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게 나타나셨고,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문을 닫고 숨어 있는 방에 찾아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영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자 나를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라고 하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당신의 부활이 얼마나 확실한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이 시간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이들이 지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셨겠습니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아 제자들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했습니다. 부흥집회를 열든지 성경사경회를 하든지 간절히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능력을 받아야 했습니다. 열두제자 뿐 아니라 그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을 모아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분명히 알려주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상기시켜 주며 이 분이 진정 메시아요, 생명의 주님이셨음을 선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수제자격이었던 베드로가 먼저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열심히 고기를 잡았으나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할 때에, 기도해야 할 때에,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에 엉뚱하게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 때 그 결과는 처참한 실패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안 잡혀도 그렇게 안 잡힐 수가 있는지 일부러 안 잡으려고 기를 쓰고 그물을 던져도 밤새도록 던지면 다만 피라미 몇마리라도 잡힐 법한데 단 한 마리도 안 잡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로 말하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 고기잡이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갈릴리 바다라면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는 일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그물질 했지만 헛 그물질이었습니다. 피라미새끼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고생만 실컷하고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빈털터리였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인생, 주님을 떠난 인생이 바로 이와같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 맘대로 사는 인생에게 얼마나 쓰라린 실패가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맘대로 살아갈 때는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남는 것은 처절한 실패뿐이요, 빈손 뿐이요, 빈 그물 뿐이요, 빈 배 뿐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주님없는 인생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혹시 잠시 무엇인가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해도 무엇이 자신과 영원히 함께 하겠습니까? 돈이 남겠습니까? 권세가 남겠습니까? 건강이 남겠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남는 것이라곤 공허뿐이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렘2:13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는데 그게 뭐냐 하나님을 버린 것과 제 맘대로 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과 축복과 평강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고기만 많이 잡으면 거기 행복이 있고, 거기 풍성한 삶이 있는 줄 알고 죽자사자 세상의 고기만 잡으러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터진 웅덩이에 물을 채우는 일이요,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일과 같아서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그런 어리석은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세상의 고기도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고기를 잡기 전에 주님께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 영혼을 풍성케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힘쓰며 나와 내 가정과 교회와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믿음의 사람들도 조차도 자꾸만 세상의 고기만 잡는 일에 열중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온전히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주일에도 세상의 고기를 잡으러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정열을 세상의 고기를 잡는 일에만 쏟아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남는 것은 빈배요, 고통과 상처뿐이요, 하나님의 진노뿐인 참으로 가려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말로 내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닫고 온전히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 말씀따라 행동했을 때 성공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했을 때는 실패뿐이요, 반면에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의 뜻대로 행할 때에 확실한 성공이 보장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6절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여러분, 정말 놀라운 일입니까? 밤새도록 피라미 한 마리 못 잡았는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니까 그물이 찢어질 만큼 엄청난 물고기가 잡혔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디 다른 바다로 이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멀리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한 것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사실 왼편이냐 오른편이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솔직히 그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며 설마하니 왼편에만 계속 그물을 던졌겠습니까? 설령 왼편에만 던졌다해도 왼편이나 오른편이 다른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배 밑에는 왼편이나 오른 편이나 서로 가까이서 통해져 있습니다. 그것도 무슨 커다한 항공모함도 아닌 조그만 배에서 왼편 오른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들의 의지를 따라 던졌을 때는 밤새도록 잡았지만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던졌을 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던 것입니다.

앞의 3절 말씀과 정 반대입니다. 주님을 떠나 자기 소견대로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을 때는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피라미새끼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헛고생 했습니다. 헛그물질을 했습니다. 고생만 죽도록 하고 소득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허탈과와 낙심과 절망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결코 네 생각, 네 지식, 네 경험속에 성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위치나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술이나 사람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이성과 경험에 의지했을 때는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밤새도록 헛수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을 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성공의 비결입니다. 말씀따라 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 놓는 것입니다. 어디 멀리가야 성공이 있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을 해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높은 자리도 올라가야 합니다. 기왕이면 명예와 권세도 얻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더 잘되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도 앞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방법대로 행하는 인생이라야 진정한 성공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있는 곳 그 곳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그물을 던지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든 직장생활을 하든 사업을 하든 높은 벼슬을 하든 내 방식대로 내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의 말씀대로 하는 삶에 반드시 성공이 있고, 반드시 풍성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28:2절에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그러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자녀가 복을 받고,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영육간에 온전한 복을 받는 성공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르게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성과 경험과 지식과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을 바르게 알고 주님의 말씀대로 인생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 내 힘과 지혜대로 내 마음대로 헛 그물질 하지 말고, 주님께서 던지라는 곳에 그물을 던지고, 주님께서 거두라는 곳에서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영육간에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진정한 성공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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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고난주간설교

 

 

 


제목 :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

말씀 : 마27:45-54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다 그랬지만 특별히 이 기간은 특별히 더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낮아지셨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고난주간으로 정하여 주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진정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던 죄사함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예수님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바라바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심으로 멸시천대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바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치욕이고 모욕을 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그뿐이 아닙니다. 막14:65에 보면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또 얼굴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면서 조롱하였으니 천하에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부도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무지막지한 로마병정들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극심한 모욕한 멸시천대를 당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입히고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으며 꿇어 엎드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면서 온갖 조롱을 해댑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바보다도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선지자 노릇 한번 해봐라, 십자가에서 한번 뛰어보라며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멸시천대와 조롱을 당했더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면 도리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요절 낼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당하신 그 육체적 고통은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안토니아 요새에 있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가시는 길도 고통과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험한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채찍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로마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의 끝에는 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휘두를때만 살쩜이 떨어나가고, 그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옮기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온통 피로 얼룩이 졌고, 넘어지고 쓰러질때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뼈를 짓눌렸습니다.

그러한 처절한 고통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예수님을 십자가위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시 시작합니다.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대에 대고는 커다란 대못을 주님의 팔목에 대고 박기 시작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와 함께 주님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사람들의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두 발목을 포개어 십자가의 수직 대에 대고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합니다.

(복음송 :그때 그 무리들이)

1절 :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망치소리는 산을 울리고, 멀리서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은 주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세워지면 질수록 못 박힌 주님의 손목, 못 박힌 주님의 발목에는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살은 찢겨지고, 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으스러져 갔습니다. 손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주면, 이번에는 발목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발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뺄라치면 이번에는 손목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이 온 몸과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져 갔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주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젖어 들어왔습니다.

(찬송가 144장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그 처절한 고통속에 내 맡기셨습니다. 멸시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난 파도를 향하여 명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호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 병정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완악한 무리들을 당장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가장 햇빛이 찬란히 빛나야 할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간간히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주님의 절규가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잠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당신의 오셨던 그곳으로, 당신의 영광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갖 멸시천대와 조롱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씌움과 침뱉음과 뺨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험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손목이 찢어 졌습니다. 발목이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피는 흐르고 또 흘러 십자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골고다 언덕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빛을 잃어 버렸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 저주의 죽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멸시받은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지구를 태양을 향하여 돌라하면 돌고, 달더러 지구를 돌라고 하면 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산자를 죽으라하면 죽고, 죽은 자를 살라하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처절한 아픔과 죽음을 당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가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공의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절대로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험하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무거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오르시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에 맞고 또 맞으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시던 그 갈보리 언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망치소리 요란하게 주님의 손목과 두 발목에 사각형의 대못이 박히던 그 순간, 그 골고다 언덕에 울려퍼지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망의 영원한 권세아래 고통받게할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진정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생명의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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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절기예배 설교

 

 

 

 

 

제목 : 십자가의 도

말씀 : 고전1:18-25

1.가장 큰 능력인 십자가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큰 지혜와 지식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더 풍요롭게 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능력이요, 지혜요, 지식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제 아무리 큰 능력이라도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대단한 능력이겠습니까? 제 아무리 고상한 학문이라도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대단한 학문이겠습니까? 온 천하를 다 얻는다해도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그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억만금이 있어도, 지상 최고의 권세를 얻어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렇잖아요? 결국 돈도 지식도 권세도 과학도 문화도 스포츠도 예술도 다 생명의 풍성함을 위해서인데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명의 살리지도 못하고 풍성함도 주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전한 의미의 지식과 능력과 은혜는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살리는 지혜와 능력이 어디 있습니까? 생명을 풍요롭게하는 지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 있습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그러나 죄와 사망과 마귀와 지옥과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누가 살리겠어요? 누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겠어요? 아무도 그 아무것도 못합니다. 정치도 못하고, 스포츠도 못하고, 예술도 달나라 별나라 가는 과학도 못합니다. 오직 생명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요10:10절 보세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요14:6절에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 이 사실을 알고 믿은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걸 모르면 제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도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 모르는 거 하나도 없다해도 생명의 도를 모르면 헛 똑똑이요, 헛 지식인이요, 헛 박사인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따라 합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왜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왜 표정들이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생명을 영원히 살리고 생명을 영원히 풍성하게 하는 지식과 믿음을 가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가장 똑똑한 사람, 가장 능력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지옥과 마귀의 권세를 이긴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똑똑하고 능력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감사하며 사세요. 이 시대 최고의 지혜로운 사람으로써 거기에 걸맞는 자부심과 삶의 양식도 가지고 사세요. 최고의 지식인이요, 최고의 지혜자로써 거기에 걸맞게 그 가장 고상한 지식을 바탕으로 거룩함과 의와 진리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주님의 자녀로써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은총과 능력과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최고의 능력이며 지혜이며 지식입니까? 여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볼 때에 주님의 생명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주님의 십자가만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 대한 지식이 최고의 지혜이며 능력인 첫 번째 이유는 그 지식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사함의 은총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 주님의 대속함이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천국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사람들이 만든 형벌 가운데 가장 참혹하고 끔찍하고 처절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는 형벌을 받기 전에 먼저 초죽음이 되도록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에 매어 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매달아 놓습니다. 생명이 질긴 사람은 열흘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며 죽어갑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고 때로는 독수리들이 몰려와 산채로 살을 뜯어먹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하고도 처절한 고통이 그 십자가위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이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그 참혹하고 끔찍한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요?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사야서의 말씀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우리의 죄, 아니 나의 죄를 위하여 죄없고 흠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당해야 할 그 끔찍한 죄의 대가를,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처참한 지옥의 고통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과가 도말되었고,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겪어야 할 참혹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자유와 평화와 새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방법 밖에는 도무지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다른 좋은 방법이 있으십니까?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다른 대안이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없습니다. 돈으로도 안됩니다. 지식으로도 안됩니다. 과학으로도 안됩니다. 무슨 고상할 철학으로도 안됩니다. 천년만년 도를 닦아도 안됩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밖에는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의 죄과 대신하여 받으신 멸시와 천대와 수치의 십자가였습니다. 처절하고 끔찍한 참혹한 고통과 절망과 죽음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통해서 죄사함의 은총이 찾아 왔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찾아 들게 되었습니다. 은혜의 날이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죄에서 은혜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생명이며, 소망이며, 가장 큰 힘이며 지혜이며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8절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특별히 지금 사순절을 보내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마음 속 깊이 되새기며 우리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날 위하여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기적이고, 편협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못난 자아랑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주님의 새생명의 은총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십자가만이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만이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유일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없이는 죄사함이 없고, 죄사함이 없이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없고 흠없으신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과가 도말되었고, 우리의 죄과가 도말됨으로 비로소 새생명의 은총을 덧입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된 인생을 살리는 유일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1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또 엡 2:1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을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인생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대신 고난을 당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인생을 화목한 관계로 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엄청난 죄의 장벽을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깨뜨려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깨뜨려 버린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가장 한 무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가장 강력한 가장 지혜로운 힘은 생명을 살리는 힘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요, 힘이요, 가장 큰 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생명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총알 하나면 생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아니 막대기 하나로도 생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아니 바늘 하나로도 생명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원자폭탄을 터트리면 한꺼번에 수십만의 생명이 희생당합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지진과 해일과 테러와 화재와 전쟁과 기아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일은 어떻습니까? 살리는 일은 그렇지 못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고사하고라도 생명체에 생긴 조그만 상처하나도 치료하기는 어렵습니다. 몸에 조그마한 상처를 내기는 쉽지만 그 상처를 치료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손가락 하나가 절단되기는 쉬우나 그것을 원상복구 시키기는 어렵습니다. 더더구나 죽은 생명을 살린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과연 무엇이 가장 큰 능력이겠습니까? 원자폭탄을 수없이 만들어서 많은 사람을 위협하고, 여차하면 터뜨려서 생명을 죽이는 것이 능력이겠습니까? 엄청난 군대를 훈련시키고, 최첨단 무기로 무장을 하고, 경제력을 쌓고, 돈을 벌고, 엄청난 기술력을 축적하는 것이 능력이겠습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고 지식과 지혜와 기술을 쌓는 것이 능력이겠습니까?

물론 그것도 능력 맞습니다. 그런 것들도 어느 정도 생명의 풍성함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과학의 힘으로 병을 보다 잘 치료하고,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도 있습니다. 또 윤리와 도덕과 종교와 철학도 어느 정도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감동을 주기도 하며 어느 정도 선한 길로 이끌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의 가치도 인정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이나 과학이나 도덕이나 윤리나 사상이나 철학이나 하는 등의 세상적인 지혜와 힘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결코 생명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좀더 향상 시키고, 좀더 풍요롭게 하고, 좀더 가치있게 해 줄 수는 있을지언정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 인생을 건져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어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 인생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는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할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능력과 은총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 여러분의 삶의 기초를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주님보다 앞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주님께 삶의 근거를 두고 목적을 두고 그 바탕 위에서 다른 모든 삶을 영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 안에 있는 그 힘과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평안이 충만한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주님의 십자가만이 참된 지혜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가장 큰 지식이며 지혜입니다. 또 말씀드리지만 무엇이 참된 지혜이며 지식입니까? 생명에 관한 지식입니다.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지식입니다. 죽은 영혼 살리는 지혜가 진짜 지혜입니다. 온천하를 얻어도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다면 가장 불쌍한 인생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도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면 가장 무식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미련하다고도 말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무기력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외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면서 예수님을 열렬히 맞이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십자가가 무슨 능력이냐, 그렇게 무기력하게 붙잡혀서 어떻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 저주 받은 십자가는 필요없으니 뭔가 좀 대단한 능력으로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우리를 해방시키고 먹을 것 입을 것 실컷 먹고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거기서 내려오라, 거기서 뛰어 내려서 너를 구원하라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조롱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도 이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멸시합니다. 무시합니다. 그게 무슨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냐고, 그게 무슨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겠느냐고, 우리는 그 따위는 필요 없으니 돈이나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실상은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미련한 것입니다. 사실은 십자가가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재물과 권력과 인간의 이성이 무기력한 것입니다. 십자가가 헛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헛된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결코 우리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오늘 20절과 25절 보세요.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20절)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5절)

여러분, 지혜자가 어디 있습니까? 선비가 어디 있습니까? 참된 변사가 어디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보다 지혜롭게습니까? 누가 하나님보다 강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보다 똑똑하겠습니까? 누가 우주의 근원을 알겠습니까? 누가 영원한 미래를 알겠습니까?

오직 참된 지혜하는 하나님 뿐입니다. 진짜 진짜 진진짜 선비는 주님 뿐입니다. 참된 변사는 주님뿐입니다. 참으로 강한 자는 하나님 뿐입니다. 참으로 참된 지식을 가진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그 하나님 택하신 인류구원의 방법인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인류를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도를 따르십시오. 누가 어떻게 세상없는 소리해도 십자가의 도가 지혜이고 능력이고 복음이고 생명입니다. 십자가의 도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생명얻는 지혜가 없습니다. 생명얻는 능력이 없습니다. 생명얻는 도가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의 도만이 생명의 도요, 지혜의 도요, 능력의 도입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며 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때에 정말 큰 능력과 기쁨과 생명의 풍성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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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예배설교] 빌라도의 선택  Pilate's Choice,Lent Preaching      


 


 


제목 : 빌라도의 선택

말씀 : 마27:15-26

 


어떤 사람들은 사도신경의 내용 중에 나오는 빌라도라는 사람은 좀 억울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그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사람인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하면서 저주받은 사람의 대표격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분명 성경에 보면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는 왜 사도신경에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을까요? 저는 오늘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으며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며 사순절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빌라도는 정의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빌라도는 예수님의 문제에 대하여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애썼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하면서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당시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을 군중들의 요구대로 처리하지 않고 정당한 방법으로 처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24절에서 빌라도가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죄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말했다는 것은 그는 어느 정도 종교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없는 사람을 죽이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일일뿐 아니라 하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건에 대하여 공정성을 기하고 정의에 입각하여 처리하려고 애썼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긍정적으로 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빌라도가 억울하다고 할 수는 물론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빌라도는 그러한 공정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으므로 중대 사안에 대한 법적인 결정은 로마 총독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사형집행에 관해서는 로마 정부 즉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에게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에 대하여 공정하게 판단하여 최종결정을 해야할 위치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고소하고 있는데 만약 사형을 받을 만한 죄가 있다면 사형언도를 해야 하고, 죄가 없다면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 자신의 말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23절에 보면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말하고 있고 또 요18:38절에서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8)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여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이라는 최악의 결정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죄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중의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설령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조금 애를 썼다고해서 억울하다고 하소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환경 때문에 혹은 이해득실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 옳지 않은 결정을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 진리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빌라도의 이 옳지 않은 결정을 보면서, 그래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 어떤 상황가운데서라도 마음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빌라도는 명예를 위하여 정의를 팔아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그런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정의대신 타협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은 빌라도를 향하여 아우성을 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이 예수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반역자를 살려두면 당신은 로마의 충신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서 이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리십시오.” 이렇게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빌라도는 그 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칫하면 무슨 큰 폭동이라도 일어날 태세였습니다. 그러면 치안상태가 어려워지고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그 책임이 돌아올 것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무능한 총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 질 것이었습니다. 출세길에 막대한 지장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빌라도는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그렇지만 저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저렇게 아우성을 치고 있다. 저 성난 군중들의 아우성을 무시했다가는 내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저 나사렛 촌사람 하나 때문에 내 출세 길을 막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결국 그는 큰 무리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명령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또 하나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자신의 결정이 진리냐, 정의냐, 옳은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자신의 명예와 권력과 부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느냐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 그릇된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 육신의 소리, 유혹의 소리를 뿌리치고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세상의 소리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런 것 다 뿌리쳐 버리고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때로는 어떤 때는 그러면 물질적으로, 명예적으로 손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따라 살아갈때에 결국은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빌라도는 진리의 소리를 작은 소리라고 무시하며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실 빌라도는 조금만 귀를 기울였다면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바로 그의 아내를 통해서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19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그러니까 빌라도의 아내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꿈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죄가 없는 옳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꿈에 그분의 고통앞에서 자신도 몹시 괴로움을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저 사람들의 잘못된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끝내 그러한 아내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왜 일까요? 아마도 그 소리는 너무나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내의 소리는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작은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너무나 미미한 소리였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소리는 너무나 큰소리였습니다. 아우성으로 들려왔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의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는 자신의 권력을 삼킬 듯한 거대한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옳은 소리였지만 작은 소리에 불과했던 아내의 소리는 무시해 버렸고, 잘못된 소리였지만 큰 소리였던 군중들의 소리를 따라 악을 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실인즉 우리도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자칫하면 빌라도와 같은 결정을 하기가 쉽습니다. 작고 소수이지만 진리의 소리, 정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옳지 않은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 많은 소리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는 항상 요란하고 커다란 소리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항상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진리는 좁은 길에, 작은 소리에, 잘 들리지 않는 소수의 소리에 있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이세벨의 핍박을 피하여 동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때 엘리야 앞에 몇 가지 상황이 벌어지는데 먼저는 산을 흔들만한 요란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땅을 흔드는 지진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일어났으나 거기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란한 상황이 지나가고 갑자기 고요해졌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작고 세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만한 가냘픈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작은 소리를 듣고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고 힘들어 하실 때 아주 그럴듯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여기 있는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그리하여 네 배고픔을 해결하고 군중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에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기적을 보여주라. 그러면 너는 최고의 인기스타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천하만국 권세를 가지라. 너는 최대의 권력자와 성공자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럴듯한 소리였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명예를 누리라는 유혹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현란하고 요란스런 거짓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커다란 거짓소리를 물리치시고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결국 인류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기의 소리에, 명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작은 소리라고 아내로부터 전달된 진리의 소리를 무시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요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조용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큰 소리에 파묻혀 그만 진리의 소리를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누가 어떻게 떠들어대든 주님앞에 조용히 엎드려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빌라도는 사람들의 큰 소리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는 그 자신이 분명히 말했습니다. 예수, 그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어떤 죄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양심의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죄가 없었고, 죄가 없으니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러니 그를 석방하라. 이것이 빌라도의 양심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양심의 소리보다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를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양심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고 군중들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혹시 당장은 손해가 되는 일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것이 성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함께 살다가 가축이 많아져 갈라서야만 했습니다. 목축업을 생계수단으로 하는 그들에게는 양떼를 방목할 수 있는 풀밭과 물의 근원이 가장 중요한데 유대 땅의 그러한 환경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간에 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제는 롯과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롯에게 선택권을 주며 떠나라고 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선택의 우선권을 네게 주니까 네가 먼저 우선권을 결정하라.”(창13:9)

여러분, 이때 롯의 양심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롯은 아버지 어려서 아버지 하란을 잃고 큰아버지 아브라함 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길러주신 늙은 아브라함에게 이 좋은 것을 다 드리고 젊은 자기는 양떼를 몰고 새로운 개척지를 향해 사막을 떠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양심의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자기 양심에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좋은 것을 자기가 차지해 버립니다. 그래서 늙은 큰 아버지 아브라함은 좋지 못한 땅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좋은 땅으로 갔던 롯은 풍요로운 땅에서 잘먹고 잘살았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당장은 성공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죄악의 땅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들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 땅이 불의 심판을 받을 때 그 동안 모아 놓은 재산을 다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는 그 땅에 미련을 두고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나중에는 종족 보존이라는 미명하에 딸들이 아버지를 술취하게 만들고 관계를 맺어 모압과 암몬 족속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당장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을 좇아 갔던 롯은 재물로, 가문의 체통도, 윤리도, 믿음도, 하나님의 유업도 모두 잃어버리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다른 절기가 아닙니다. 바로 세미한 주님의 소리를 듣는 절기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세미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무슨 화려한 소리, 대박이 터지는 소리, 출세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절기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의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인류구속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세상 사람들의 커다란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내의 꿈을 통해서 보여주신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가 없다고 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세상의 권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성공한 인생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권력과 부귀영화도 누리지 못하고 나중에 사마리아인들의 어떤 폭동과 관련되어 총독의 지위도 박탈당하고 로마로 소환되어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의 지위도 빼앗기고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기는커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 대대로 남은 저주받은 인생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순절을 보내면서 정말 세상의 크고 시끄러운 소리,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군중의 소리, 부귀영화의 소리, 물질의 소리, 무사안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혹시 작은 소리일지라도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여러분 모두는 주님을 따라 진리의 길을 달려감으로 진정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으며 생명의 은총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조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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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별 설교] 사순절 예배 설교  / Lent Worship Preaching               
 

 

 

 

시험당하신 예수님(마 4:1-11)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 공생애를 시작하심에 앞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주님께서 인간과 동일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이러한 시험은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러 형태로 항상 존재 합니다. 주님이 당하신 시험의 유형에 대해 살펴봄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죄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① 물질로 유혹했습니다(3절) -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물질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사단은 이러한 약점을 알고 성도를 유혹합니다. 이에 주님은 나그네로 잠깐 머무는 이 세상에서의 필요를 채우는 것보다, 하나님께로 온 영적 양식을 취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요 6:27). 자녀가 무엇이 필요한지 그 부모가 알듯이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자녀된 성도의 필요를 모르시겠습니까? 따라서 성도는 물질로 인해 받는 시험을 주의 말씀으로 물리쳐야 하겠습니다(4절).

  ② 세상 영광으로 유혹했습니다(5,6절) - 사단은 오늘도 우리에게 현실과 조금만 타협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기와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6:24). 이처럼 세상의 영광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과는 양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벧전 1:24).

  ③ 세상 권세로 유혹했습니다(8,9절) - 사단이 보여 주는 세상의 권세는 너무나 위대하게 보입니다. 사단은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 이러한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증거처럼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하늘 백성으로 영원한 권세를 가진 자로서 어찌 그것을 하찮은 세상의 권세와 바꿀 수 있겠습니까?(계 2:25,26)

 

  주님은 이 모든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람인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승리는 이미 사단을 이기신 주님을 의지할 때만 가능합니다. 항상 주님을 의지하여 승리의 삶을 사는 성도가 됩시다(빌 4:13).

 
 

   마라의 교훈(출 15:22-26)  

 

  마라란 '쓴물'이란 뜻으로 광야 여정 중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만난 오아시스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물은 너무 써서 아무리 목마른 백성이라도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마라에 이르게 하셨을까요. 백성을 마라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인생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① 마라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 사람이 사는 인생은 고행(苦行)이라 할 만큼 우리의 인생에는 마라와 같은 시련과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과 시련은 세상 사람의 삶 속에는 물론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의 삶 속에도 존재합니다.

  ②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됩니다(25절) - 하나님께서 백성들로 하여금 마라의 쓴물을 맛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또다른 축복을 맛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마라의 쓴물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③ 마라의 극복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26절) -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기에 앞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무릎꿇고 기도했을 때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간단히 바꾸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우리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면 모든 문제는 이렇게 쉽게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고난을 극복하신 후에 온전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주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단 과정입니다. 그의 뜻 안에서 온전히 연단되어 축복의 단물을 마시는 우리가 됩시다(벧전 1:7).

 
 

   고난의 유익(롬 8:17)  

 

  사람들에게 있어 고난은 반갑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의 유익을 바르게 인식한다면 고난은 우리에게 화가 아닌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럼 고난이 인생들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고후 12:9) -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지만 마음이 굳어져 버린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도,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고난은 이러한 인간들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며 그러한 연약함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합니다.

  ② 하나님을 의뢰하게 됩니다(고후 1:9) - 인간은 자신조차 구원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인데도 교만하여 스스로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고난은 이러한 인간들에게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게 하여 절대 능력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바라고 의뢰하게 합니다.

  ③ 장차 올 영광을 생각케 합니다(롬 8:17) - 성도는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위로하심을 받습니다. 그리스도께 받은 위로는 이땅에서의 삶은 나그네의 삶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에게는 영원한 본향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는 성도에게 있어 고난은 슬픔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에의 참여인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우리에게 예비된 영광에 비하면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깨닫고, 그분을 의지하며 고난을 넉넉히 이기는 성도가 됩시다.
 

   고난을 기뻐한 바울(고전 15:31; 갈 6:17; 골 1:24)  

 

  각 교회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는 고난받으셨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도 바울의 눈물어린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 길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지만  바울은 고난의 길이라도 기뻐하며 나아갔습니다. 바울의 신앙 고백을 통해 동일한 제자의 길을 가는 우리의 자세를 생각해 봅시다.

 

  ① 나는 날마다 죽었노라(고전 15:31) - 바울은 매일의 삶 속에서 육신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 우리의 죄악된 성품과 세상적인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주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②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 바울은 예수의 흔적, 즉 진리의 증거함으로 오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며 그를 온전히 좇아가는 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③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신에 채우노라(골 1:24) -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도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그러한 바울에게 주님은 넘치는 사랑과 위로를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난은 그에게는 차라리 기쁨이 될 수 있었습니다.

 

혹 우리는 주님의 길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그 고난의 길은 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영광이나 바울의 영광이 고난 뒤에 온 것임을 기억하며 고난을 이기는 자가 됩시다(벧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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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설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제목: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본문:마 7:13,14

 

어느 날 아인슈타인의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그 많은 지혜는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물 한방울을 자신의 손바닥에 떨어트리며 말했습니다. 우주의 지혜를 바다에 비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는 이 물한방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바다에 비해 물한방울과 같은 그 지혜를 가지고 어떻게 성공하셨습니까?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세가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말을 많이 하지 말 것, 두 번째는 자신의 생활을 즐길 것, 세 번째는 삶의 여유를 가질 것 등 이었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많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고, 자신의 생활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고, 삶의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이성적으로 깊이 성찰해보지 못하고 그저 감정과 세파 속에 휩쓸려가기 쉽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주방기구를 판매하는 세일즈맨으로 크게 성공한 후 유명해 진 미국의 성공철학자 지그 지글라(zig ziglar)라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①정직한 사람 ②인격이 좋은 사람 ③성실한 사람 ④신념이 강한 사람 ⑤충성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전세계에서 가장은 많은 강연을 한 인물로 20세기말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의 경영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으며,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통하여 개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은 그 책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①주도적이 되라 ②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③소중한 것부터 먼저하라 ④상호이익을 추구하라 ⑤경청한 다음에 이해시켜라 ⑥시너지를 활용하라 ⑦심신을 단련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또 나름대로의 비법을 가지고 열심히 힘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공의 비법이 어디 있다고 여기십니까? 저에게 물으신다면 저는 단언코 믿음과 노력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앞서 말씀드린 것들도 다 성공을 위한 중요한 요건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믿음과 노력이 없다면 그 위대한 것도 이루어낼 수도 없고, 설령 이루어낸다해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으며, 설령 사람들 앞에 인정을 받는다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성공하기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인간적으로 인내하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정말로 귀하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들은 모두가 무언가 피나는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일이나 세상의 일이나 무언가 위대한 족적을 남겼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피나는 노력을 투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없이 매맞고 주리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끝까지 인내하며 참고 힘써 결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역시 몇 번씩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핍박을 당하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수함으로 주님의 수제자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세상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디슨은 이만번이나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거듭하여 결국 전구를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노아 웹스터라는 사람은 웹스터사전을 집필하기 위해 36년간 자료를 수집하고 두 번이나 대서양을 횡단했으며, 시인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시를 보통 99번씩 다듬어 완성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은 무려 10년의 세월에 걸쳐서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인생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위인이라고 불리거나 혹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남다른 삶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좁은 길을 걸어 왔던 사람들입니다. 험하고 힘들어서 가기 어려운 좁은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에서 정말 올바르게 성공한다는 것도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그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일부러 골목길을 찾아다니라는 것입니까? 넓고 평평하게 잘 닦여진 고속도로로 다니지 말고 일부러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찾아다니라는 것입니까?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는 대로로 가지말고 음침한 골목길로 가라는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럼 무슨 말씀입니까?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길을 그저 가기 쉽다고 아무 길로나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충 대충 하기 쉬운대로, 마음에 끌리는대로, 무사안일하게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힘든 길이라도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옳은 길, 바른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비록 간섭하는 것이 성가시고, 마음에 부담이 가더라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진리의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령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된 본성 때문에 그 길이 결코 가기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길을 포기하고 그저 편하고 무사안일한 길로 달려가고 있지만 그러나 정녕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좁은 길은 무엇이며, 넓은 길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 길을 가야만하는 것입니까?

1. 넓은 길은 육신에 이끌려 자기 마음대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 13절의 말씀을 보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크고 넓은 길은 그저 육신의 이끌림을 따라 대강대강 갈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 편한대로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그 길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길입니다. 그저 죄된 본성의 욕구를 따라 가면되는 길을 말합니다. 사람의 통제나 제재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간섭도 거부하며 자기 마음내키는대로 가는 길을 말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입니다. 세상물결 흘러 가는대로 적당히 따라 가는 길을 말합니다. 그저 육신이 요구대로 살면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않습니다. 죄된 본성의 요구에 따라 때로는 적당히 불의와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살면서 자기는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렇겠습니까? 그것이 편한 길이겠습니까? 그것이 자유를 누리는 길이겠습니까? 물론 당치 않은 말입니다. 그것은 편한 길도 아니고, 자유의 길도 아닙니다. 그것은 간교한 사탄의 유혹대로 놀아나는 길입니다. 편하고 좋고 자유로운 길 같지만 그 길은 결코 자유로운 길이 아니라 죄의 노예된 길입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길입니다. 그 길은 결국은 죽음의 길일 따름입니다. 그 길이야말로 뱀의 속삭임에 유혹되어 아담과 하와가 갔던 길인 것입니다.

어느날 뱀은 하와를 찾아가 속삭였습니다. 정말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더냐? 그러자 하와가 그렇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자 뱀은 다시 말합니다. 아니다. 죽지 않는다. 오히려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러자 하와는 점점 뱀의 꾀임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선악과를 보니까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먹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결국은 죽음과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괞찮다. 네 마음대로 해라. 네 편한대로 해라. 네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하라. 네 육신이 시키는대로 하라. 남의 눈치 볼 것 없다. 네 인생 네가 네 뜻대로 살아라. 왜 간섭받고 사느냐? 자꾸만 이래라, 저래라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필요없다. 그들은 너를 얽어매려고 한다. 너는 자유인이다. 그러니 네 마음에 편한대로 네 육신이 시키는대로 하라.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분명한 사단의 소리입니다. 사단의 소리가 별겁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거역하면 그게 곧 사단이요, 적그리스도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16:24절에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또 눅8:21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곧 내 모친이요, 내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좁은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요구에 충실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요구에 충실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넓을 길로 휩쓸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셨던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실때에 영원한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좁은 길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길을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꾸만 넓은 길로만 가려고 하는데 너희는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길이 뭡니까? 이 말씀은 크게 두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하나는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길은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자신만이 유일하게 생명으로 통하는 하나밖에 없는 외길이기에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 여러 군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길 예수님 밖에 없는 외길이기 때문에 좁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또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사도행전 4장12절에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딱 하나입니다. 곧 예수님만이 생명의 문이요, 구원의 문이요, 영생의 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길은 많다고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합니다. 산꼭대기에 오르는데 굳이 외길만 고집할 것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남쪽에서 올라가든 북쪽에서 올라가든 아무데로나 올라가도 정상에 올라가기만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나름대로 신을 찾아 올라가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의 소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사탄의 소리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는 소리가 사탄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라고 하는데 둘이라고 하면 그것이 사탄의 소리입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님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성적으로 아무리 생각하고 연구해보아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사람의 소리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길입니다. 사람이 연구해보니까, 내가 도를 닦아 보니까 그런 것처럼 보이더라하는 수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미 예언되어 있던 메시야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대로 이땅에 오신 죄없고 흠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만이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고 생명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길은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진정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주장하는 넓을 길로 가지 말고 오직 유일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인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성도여러분께서는 오직 한길 예수님, 오직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그 좁은 길은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실때에 생명의 은총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2)두번째로 좁은 길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저 육신의 요구대로 살아가는 것도 쉽습니다. 죄된 인간의 본성에 따라 대강대강 살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세상 조류를 따라 떠내려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그러한 삶을 살아있는 삶이 아닙니다. 죽은 삶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결을 따라 떠내려 갑니다. 그러한 살아있는 물고기는 거센 물살을 헤치고 힘차게 거슬러 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인생입니다.

오직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길은 결코 녹녹한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이 죄와 무지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 죄와 무지로 오염된 심령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늘날의 대세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것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조류를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가치와 이상과 문화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죄된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고 그것을 부인하고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길은 간섭받아야 하고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 길은 우리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길입니다. 때로는 알기는 알면서도 우리의 육신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이 우리를 자꾸만 다른 길로 내 몰아가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진리만이 가득하다면 저절로 진리의 길로 가겠는데 우리 안에 비진리가, 거짓된 것들이, 죄된 것들이,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는 것들이 들어있어서 우리를 자꾸만 그 길로 이끌어가려고 하니까 그것들과 싸우느라고 힘이 들기 때문에 어려운 길이고, 좁은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같은 대 사도도 말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협착하다고 하셨습니다. 협착하다는 말은 계속해서 어떤 제재를 받는 답답한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진리의 말씀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내 마음대로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육신의 요구와 생각과 세상에 보이는 것을 따라하면 쉽겠는데 그것들을 부정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힘써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좀 힘이들고 답답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비 진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가려고 하니까 물질적으로 손해도 감수해야 합니다. 때로는 억울한 일을 만나도 내 혈기대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불의와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희생해야 하고, 원수조차도 사랑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또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잘 안되고, 힘이 들고, 그래서 가기가 어려운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길이 비록 좁을 지라도 가야하고, 답답해도 가야하고, 손해를 봐도 가야하고, 희생을 당해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답답하고 손해를 보아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진리의 길이기에, 그 길만이 진정한 생명의 길이기에 우리는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힘들고 고달파도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함께 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하시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에게 있어서 진리의 길은 결코 다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로 말미암아 어둠과 연약함과 무지함 가운데 있는 인생에게 있어서 진정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은 결코 넓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전한 진정한 성공자도 다수가 아니라 소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생명을 원하신다면 다수가 가는 길을 좇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행복을 원하신다면, 우리가 모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신다면, 더욱이 여러분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기를 원하신다면 진리 편에 서 있는 소수의 사람들의 편에 서 계시기 바랍니다.

비록 힘들고 외롭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참고 인내하면 열심히 좁은 길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을 부인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부인하며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인생이 아니라 진리를 향하여 생명을 향하려 세상의 조류를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모두 세상적으로나 하나님나라에서나 진정한 성공자가 될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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