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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예배 설교 :: 진정한 성탄 준비
 
Christmas Worship Preaching

제목 : 진정한 성탄 준비

말씀 : 요17:14-17

1.예수님은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오늘 대강절 넷째주일입니다. 대강절은 물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참뜻을 되새기며 주님을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에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우리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일 먼저 주님이 누구신지, 왜 오셨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만약 왕이 우리 집에 오셨는데 그 분이 누구신지 모른다면 어떻게 왕의 예우를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또 만약 왕이 나에게 높은 자리라도 하나 주려고 왔는데 난 높은 자리 따위는 필요 없고 돈이나 한보따리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돈이나 지위는커녕 왕의 분노만 유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지 못하면 바르게 영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신 참 뜻을 알지 못하면 엉뚱한 것만 바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실망과 좌절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성인군자라고 하고, 어떤 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고 여깁니다. 또 어떤 경우는 건강이나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정말 주시려고 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고 자꾸 엉뚱한 것만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되어도 집안이나 거리나 상점이나 교회에 여러 가지 장식도 하고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행사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힘든 이웃을 도우며 사랑을 나누기도 하지만 정작 생명을 주려고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생명의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주님이 주시는 참되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위로와 평안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당연히 성탄축하프로그램도 하고 외부장식도 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어렵고 힘든 이웃들도 도우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평화도 당연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성탄절이웃초청잔치도 하고 어려운 분들을 돕기도 하며 성탄절 헌금의 거의 전부를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희망과 위로를 주고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유일한 참 구세주로서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천배 만배 억배 중요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요10:1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마1:21절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즉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에서 사함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인류가 이 땅에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영원토록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지식과 문명과 과학이 발달해도 이 땅에서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더더구나 영원한 고통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대강절을 맞아 성탄절을 준비하며 다른 무엇보다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심령이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의 은총이 넘침으로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그렇게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새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유일한 생명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었으면 그 다음에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져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5절 말씀 보겠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여러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고 온전히 보전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 마6:1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것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을 행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어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진대 어떻게 악 가운데 머물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악 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은혜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떠나야 합니다.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기 위해서도 모든 악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 날 많은 인생들이 이걸 몰라서 진정한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그 안에서 사랑과 선과 의와 진실가운데 살아갈때에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인데 오직 돈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믿음과 진리와 선과 의 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소유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속이고 빼앗고 훔치고 하면서 악한 방법으로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설령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할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틈이 벌어져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도 점점 틈이 벌어져 갈등과 불신과 싸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기는커녕 갈등과 불화와 상처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행하면서 생명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그 다음에는 진정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 선과 의와 진실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어떻게 흘러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도 오직 주의 말씀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누리며 주님의 향기 발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거룩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악을 물리치고 믿음과 사랑과 의와 선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려면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달콤하고 교묘한 유혹과 도전과 왜곡된 가치관을 분별하고 그걸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래야만이 우리 심령 속에 성경적 가치관이 확립되어 세상의 왜곡되고 혼돈되고 악한 것들에게 휩쓸려 다니지 않게 됩니다. 마귀의 간계를 간파하고 즉시 물리치게 됩니다. 감히 마귀 따위가 장난치지 못하게 됩니다. 설령 겁 없이 대들어도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에 힘쓰지 않아 성령의 충만함과 지혜와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세상의 유혹과 핍박과 환경과 왜곡된 가치관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길만한 분별력도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만연된 인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종교다원주의와 향락주의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충만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몸과 마음과 시간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게 되고, 악을 분별하며 거부하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감으로 거룩한 인생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4: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대강절 특별새벽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거의 대부분이 미동도 안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거 정말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고 계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만큼 모입시다. 기도합시다. 예배드립시다해도 꿈쩍도 안한다면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또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선과 의와 진리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겠으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하면서 주님이 오신 참뜻을 바르게 알고 진실로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 자신이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평강과 위로를 마음껏 누리며 동시에 이 왜곡되고 어두운 세상에서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의 모습을 통하여 생명의 빛을 비춤으로 아직도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여 저들도 우리와 같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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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추수감사절 주일'은 11월 17일 추수감사절, 초막절

유태인들은 그들의 민족적 경험과 감사의 축제 전통에 따라서 가지고 있는 삼대명절은 모두 감사절이었다. 유월절은 민족해방에 대한 감사절로 기념하였고, 봄의 맥추절은 첫 열매의 수확에 대한 감사절이었다.

초막절은 1년 중 가장 큰 절기로서 가을에 모든 곡식과 올리브, 포도를 거두어들이는 명절로, 또한 40년 동안 장막에서 살며 광야에서 유랑하던 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이기도 하다.

미국의 감사절은 영국의 국교도들에 의하여 박해를 받던 청교도들이 미국에 건너가 1621년부터 시작되었다. 온갖 역경을 겪고 첫 수확을 감사하며 지낸 감사절은 지방 행정관 브래드포드(Bradford,W.)가 언명하여 시작되었다. ​

1789년 11월 26일 워싱턴 대통령에 의하여 처음으로 국경일로 제정되었다. 1941년 의회에서 11월 넷째주 목요일로 결정하여 공휴일로 되었다. ​

한국교회는 미국의 청교도들로부터 시작된 감사절의 영향으로 행하여졌다. 한국교회가 감사일을 결정한 것은 1908년 예수교장로회 제2회 대한노회에서 양력 11월 마지막 목요일로 정하였다. ​

그 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외 제1회 총회에서 감사일을 음력 10월 4일로 정하고 외국전도를 위하여 강도하며 기도하고 특별히 연보하여 선교비에 충당하기로 하였다. ​

1914년 제3회 총회에서 감사일을 11월 셋째 주일 후 수요일로 정하였다. 이는 선교사가 한국에 처음 온 날을 의용(擬用)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 뒤, 1921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협의회에서 한국교회의 감사일을 매년 11월 둘째 주일 후 수요일에 기념하기로 결의한 것을 제10회 총회에서 채용하여 전국교회가 실시하였다.

현재는 11월 셋째 주일에 감사절을 지키고 있으나 범교파적으로 정해진 날은 없고, 대체로 미국교회의 감사절 전통에 따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초막
초막절 절기 행사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성전 제단에 물을 붇는 것입니다. 물은 다윗성 아래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실로암에서 떠옵니다. 대제사장은 그 물을 성전 재단에 부으면서 "비를 기원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대제사장은 이사야 12:1-3절을 재단을 물을 부은 후 읽습니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게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예수님께서는 초막절 마지막 날에 물을 붇는 의식을 통해 "비"를 간구하는 것을 성령의 임재로 바뀌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7:39).  ​

추수감사절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

예수님은 생명의 물이 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2)

올해는 11춸17일이 추수감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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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사순절 주일예배 설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위하여(요21:1-6)


제목 :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위하여

본문 : 요21:1-6

여러분, 영어를 가장 빨리 가장 쉽게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직접 부딪치는 것입니다. 직접 부딪쳐서 되든 안되든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미국을 가든 영국을 가든 아니면 미국인 친구를 사귀든 한국에 있는 미국인 가정에 가서 함께 생활을 하든 어쨌든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계속 접촉하는 것입니다. 접촉하면서 큰소리로 말하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실수를 하든 말든 잘하든 못하든 그냥 막 부딪치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어는 저절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기들이 어떻게 언어를 배웁니까? 그냥 같이 살다보니까 배우는 거예요. 늘 듣고 그냥 따라서 하다보니까 알게 되는 거예요. 실수하면서 잘못 표현하면서 그러면서 배우는 거예요. 처음에는 서투르지만 그래도 자꾸 따라 하다보면 결국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어를 배울 때도 하여간 부딪쳐서 하다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맨 날 책상 머리에 앉아서 무슨 부정사, 조동사, 동명사, 관계사, 시제, 가정법이니 하면서 씨름을 해봐야 백날 가도 외국인과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문법이 훤해도, 아무리 토익 시험에 만점을 맞아도 직접 해보지 않고는 대화를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해봐야 합니다. 부딪쳐야 합니다. 처음에는 잘 되어도, 서툴러도, 실수를 해도 자꾸 따라 하다보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이치가 똑 같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책상 머리에 앉아서 종자는 어떤 것이 좋고, 언제 밭을 갈고, 파종은 언제하고, 어떤 병에는 어떤 약을 쳐야하고, 거름은 어떻게 주고 아무리 연구를 하고 훤히 안다고 해도 직접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면서 농사를 지어 보지 않으면 절대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단은 부딪쳐 봐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딪치기 전에 사전 준비도 필요하겠지요. 연구도 필요하겠지요. 정보도 수집해야 되지요.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부딪치는 거예요. 안 부딪치면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괴테는 [참다운 지식은 경험밖에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이론이든 지식이든 그것이 경험을 통하여 실제로 적용되었을 때, 그 이론이나 지식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 올바르게 현실화 되어질 때에 비로소 그것은 가치가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론과 행동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올바른 이론없는 행동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기 쉽습니다. 설령 잘못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론적으로 무지하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고 열심히 수고한 것만큼 좋은 결과를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반대로 행동 없는 이론은 공허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고 해도, 아무리 훌륭한 논리라고 해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행동화 되어 어떤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무언가 가치 있는 무엇을 만들어 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지식과 아울러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행동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이론이 있어야 하고 다음에는 그 이론을 실제로 적용하는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좋은 가치를 만들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신앙생활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선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길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어디에 생명이 있는 어디에 참된 진리가 있는지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지 왜 믿지 않으면 안 되는지 우선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좌우지간 먼저 알아야 그것을 하든지 말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알아야 믿든지 말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그렇습니까? 모르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모르면 생명도 지키지 못하고 은혜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모르면 심지어 독약도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 옆에는 독약병을 놓아두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그걸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옆에 있으면 무조건 입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호6:3절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17: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선은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물론 세상의 지식적으로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세상의 초등학문을 아는 일에 힘쓰는 것 더 이상으로 주님을 아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진정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생명의 길이 어디인지 아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알기 위하여 예배에 참석하는 일과 찬양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안에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바르고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바르게 달려갈때에 여러분의 삶에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물론 우선은 알아야 하지만 그러나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알고 난 다음에 그 아는 바를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경험해 봐야 합니다. 짜장면 맛이 어떻고 저떻고 아무리 설명을 들어서 지식적으로 안다고 해도 진정한 짜장면 맛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먹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먹어봐야 맛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박사 학위가 몇 개씩 있어도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 전체를 다 안다고 해도 그것을 삶속에 올바르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는 일에 힘쓰는 것과 더불어 그 아는 것을 우리의 삶속에 적용시키는 일에도 더욱 힘을 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의 의미도 사실 이러한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순절이란 일단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가 달려 돌아가신 사건을 기억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새롭게 알아보는 기간입니다. 희미해진 기억을 분명하게 되새겨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새겨서 새롭게 분명하게 알고 느낀 사실들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아니 그냥 생각해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 적용시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향하여 나아가며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누려야 할 은혜들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며 그 사명을 감당해 보자는 취지에서 제정된 것이 바로 사순절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한 마음의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새롭게 가다듬은 마음을 우리의 삶속에서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진정 많은 열매를 맺으며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제자들이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주님을 떠나 자기 생각대로 물고기를 잡을 때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패한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의 말씀대로 행동했을 때 제자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실패한 삶에서 성공한 삶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요지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볼때 참으로 안타까운 제자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다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이제 모든 것이 끝장 나 버렸으니 난 다시 가서 고기나 잡으련다하고 떠나자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그렇게도 여러 번 이르고 또 일렀건만 그들은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너희 죄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야 너희에게 진정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갔다고 다시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거라. 걱정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 맡겨준 일들을 감당하거라. 그러면 성령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다. 너희들은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느니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거라.」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게도 일렀건만 돌아가신지 며칠 되지 않아서 옛날로 돌아가서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랬을까요? 왜 예수님과 함께 3년간이나 동고동락을 하면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주님의 삶을 보았고, 주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했지만 그들은 왜 주님을 떠날 수 밖에 없었을까요?

물론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주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주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소경을 보게하고, 앉은뱅이 걷게 하고,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등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 기적의 의미가 무엇인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주님 자신과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도 여러번 당신의 죽음의 의미를 말씀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에 대하여 말씀하셨건만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을 그저 정치적 육체적 세상적인 메시야로만 이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돌아가시자 이제는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옛날로 돌아가서 열심히 그물을 던졌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지만 그들은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고기잡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그저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좀 얻어보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입니다. 밤새도록 그렇게 무엇인가 좀 얻어보려고 그물을 던지고 또 던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게 되었습니까? 밤이 맞도록 즉 밤이 새도록 쉬지 않고 그물을 던졌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미 새벽이 되었건만 그들 손에는 피라미새끼 한 마리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손은 여전히 빈손이요, 배는 빈 배요, 그물은 여전히 빈 그물뿐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그저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한번 얻어보려고 발버둥을 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 좀 얻어서 좀 행복해보려고, 무언가 좀 만족한 삶을 살려고 열심히 수고하고 힘쓰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리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해도, 아무리 평생 동안 발버둥을 쳐도 주님 없는 인생에게 남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을 결산 할때에 그들의 손은 빈손이요, 머리는 빈 머리요, 그들의 삶은 공허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없는 인생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무엇이 자신과 영원히 함께 하겠습니까? 젊음이 남겠습니까? 아름다움이 남겠습니까? 재산이 남겠습니까? 건강이 남겠습니까? 권력이 남겠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남는 것이라곤 공허 뿐이요, 남은 것이라곤 영원한 형벌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주님을 온전히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임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행여라고 아직 주님을 모르는 분들께서는 주님앞에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여, 주님을 보게하소서. 생명의 길을 나도 알게 하소서.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로하여음 생명의 생명의 길로 가게 하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에 진정 세상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진정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후반부에는 바로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실패를 하고 한 마리도 못잡고 실망과 좌절과 공허감에 빠져 있을때에 바닷가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바로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없나이다」하면서 그저 기계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그물을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들이 그물을 들어 올리려고 했을 때 그들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그물을 쉽게 끌어올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잠도 자지 못하고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는데 피래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마지막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디 다른 바다로 이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멀리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방향만 조금 바꾼 것이었습니다.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는 위치를 약간 수정한 것뿐이었습니다. 사실 배 하나 사이에서 왼편과 오른편은 큰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배 밑에는 왼편이나 오른 편이나 서로 가까이서 통해져 있습니다. 그러니 왼편이나 오른편이나 거기서 거깁니다. 그런데 왼편에 던졌을때는 밤새도록 잡았지만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오른편에 던졌을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습니다.

요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기술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이성과 경험에 의지했을때는 한 마리도 못잡았습니다. 밤새도록 헛수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을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생명인지 무엇이 참된 가치인지를 올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그 주님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을 알았으면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좇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여러분의 삶의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지시에 의하여 손을 펴고, 발을 뻗고, 삶의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참 생명의 도, 진리의 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는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올바르게 알고 깨닫고 고백하고 그리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피조물이며,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부활한 존재로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 변화가 없고, 우리의 삶속에 기쁨이 없고, 우리의 삶속에 진정한 생명의 환희가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있겠습니까?

이 땅의 전국 방방곡곡에 십자가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리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천 만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산다는 이 나라가 이처럼 불의가 넘치고,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이처럼 많은 혼란을 겪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와 주님 사이에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따로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거나 혹은 앎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우거나 아니면 주님의 뜻이 있음에도 따라가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욱 주님을 아는 일에 힘쓰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더욱 올바르게 온전하게 알기 위하여 주님의 음성에 늘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앞에 엎드려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드리는 일과 찬양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주님을 올바르게 알고 올바르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만난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지시와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행동화시키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세상속으로 여러분의 삶의 현장속으로 나아가서 적용시키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물을 던지라는 곳에 던지고, 주님께서 거두라는 곳에서는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온 성도 여러분께서 진정 주님만이 진정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오직 그 안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그 주님의 말씀을 내 삶에 적용시키며, 그 말씀들을 우리의 일상생활속에 행동화하며 살아갈때에 주님안에 있는 그 생명의 은혜를 더욱 넘치도록 충만하게 맛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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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예배설교 :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위하여


제목 :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위하여

본문 : 요21:1-6

 

여러분, 영어를 가장 빨리 가장 쉽게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직접 부딪치는 것입니다. 직접 부딪쳐서 되든 안되든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미국을 가든 영국을 가든 아니면 미국인 친구를 사귀든 한국에 있는 미국인 가정에 가서 함께 생활을 하든 어쨌든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계속 접촉하는 것입니다. 접촉하면서 큰소리로 말하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실수를 하든 말든 잘하든 못하든 그냥 막 부딪치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어는 저절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기들이 어떻게 언어를 배웁니까? 그냥 같이 살다보니까 배우는 거예요. 늘 듣고 그냥 따라서 하다보니까 알게 되는 거예요. 실수하면서 잘못 표현하면서 그러면서 배우는 거예요. 처음에는 서투르지만 그래도 자꾸 따라 하다보면 결국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어를 배울 때도 하여간 부딪쳐서 하다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맨 날 책상 머리에 앉아서 무슨 부정사, 조동사, 동명사, 관계사, 시제, 가정법이니 하면서 씨름을 해봐야 백날 가도 외국인과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문법이 훤해도, 아무리 토익 시험에 만점을 맞아도 직접 해보지 않고는 대화를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해봐야 합니다. 부딪쳐야 합니다. 처음에는 잘 되어도, 서툴러도, 실수를 해도 자꾸 따라 하다보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이치가 똑 같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책상 머리에 앉아서 종자는 어떤 것이 좋고, 언제 밭을 갈고, 파종은 언제하고, 어떤 병에는 어떤 약을 쳐야하고, 거름은 어떻게 주고 아무리 연구를 하고 훤히 안다고 해도 직접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면서 농사를 지어 보지 않으면 절대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단은 부딪쳐 봐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딪치기 전에 사전 준비도 필요하겠지요. 연구도 필요하겠지요. 정보도 수집해야 되지요.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부딪치는 거예요. 안 부딪치면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괴테는 [참다운 지식은 경험밖에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이론이든 지식이든 그것이 경험을 통하여 실제로 적용되었을 때, 그 이론이나 지식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 올바르게 현실화 되어질 때에 비로소 그것은 가치가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론과 행동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올바른 이론없는 행동은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기 쉽습니다. 설령 잘못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론적으로 무지하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고 열심히 수고한 것만큼 좋은 결과를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반대로 행동 없는 이론은 공허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고 해도, 아무리 훌륭한 논리라고 해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행동화 되어 어떤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무언가 가치 있는 무엇을 만들어 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지식과 아울러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행동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이론이 있어야 하고 다음에는 그 이론을 실제로 적용하는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좋은 가치를 만들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신앙생활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선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길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어디에 생명이 있는 어디에 참된 진리가 있는지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지 왜 믿지 않으면 안 되는지 우선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좌우지간 먼저 알아야 그것을 하든지 말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알아야 믿든지 말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그렇습니까? 모르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모르면 생명도 지키지 못하고 은혜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모르면 심지어 독약도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 옆에는 독약병을 놓아두면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그걸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옆에 있으면 무조건 입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호6:3절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17: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선은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물론 세상의 지식적으로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세상의 초등학문을 아는 일에 힘쓰는 것 더 이상으로 주님을 아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진정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 생명의 길이 어디인지 아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알기 위하여 예배에 참석하는 일과 찬양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안에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바르고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바르게 달려갈때에 여러분의 삶에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물론 우선은 알아야 하지만 그러나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알고 난 다음에 그 아는 바를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경험해 봐야 합니다. 짜장면 맛이 어떻고 저떻고 아무리 설명을 들어서 지식적으로 안다고 해도 진정한 짜장면 맛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먹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먹어봐야 맛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박사 학위가 몇 개씩 있어도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 전체를 다 안다고 해도 그것을 삶속에 올바르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는 일에 힘쓰는 것과 더불어 그 아는 것을 우리의 삶속에 적용시키는 일에도 더욱 힘을 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의 의미도 사실 이러한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순절이란 일단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가 달려 돌아가신 사건을 기억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새롭게 알아보는 기간입니다. 희미해진 기억을 분명하게 되새겨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새겨서 새롭게 분명하게 알고 느낀 사실들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아니 그냥 생각해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 적용시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향하여 나아가며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누려야 할 은혜들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며 그 사명을 감당해 보자는 취지에서 제정된 것이 바로 사순절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한 마음의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새롭게 가다듬은 마음을 우리의 삶속에서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진정 많은 열매를 맺으며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제자들이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주님을 떠나 자기 생각대로 물고기를 잡을 때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패한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의 말씀대로 행동했을 때 제자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실패한 삶에서 성공한 삶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요지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볼때 참으로 안타까운 제자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다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이제 모든 것이 끝장 나 버렸으니 난 다시 가서 고기나 잡으련다하고 떠나자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그렇게도 여러 번 이르고 또 일렀건만 그들은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너희 죄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야 너희에게 진정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갔다고 다시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걱정하지 말거라. 걱정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 맡겨준 일들을 감당하거라. 그러면 성령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다. 너희들은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느니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거라.」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게도 일렀건만 돌아가신지 며칠 되지 않아서 옛날로 돌아가서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랬을까요? 왜 예수님과 함께 3년간이나 동고동락을 하면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주님의 삶을 보았고, 주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했지만 그들은 왜 주님을 떠날 수 밖에 없었을까요?

 

물론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주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주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소경을 보게하고, 앉은뱅이 걷게 하고,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등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 기적의 의미가 무엇인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주님 자신과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도 여러번 당신의 죽음의 의미를 말씀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에 대하여 말씀하셨건만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을 그저 정치적 육체적 세상적인 메시야로만 이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돌아가시자 이제는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옛날로 돌아가서 열심히 그물을 던졌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지만 그들은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고기잡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그저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좀 얻어보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입니다. 밤새도록 그렇게 무엇인가 좀 얻어보려고 그물을 던지고 또 던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게 되었습니까? 밤이 맞도록 즉 밤이 새도록 쉬지 않고 그물을 던졌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미 새벽이 되었건만 그들 손에는 피라미새끼 한 마리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손은 여전히 빈손이요, 배는 빈 배요, 그물은 여전히 빈 그물뿐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그저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한번 얻어보려고 발버둥을 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 좀 얻어서 좀 행복해보려고, 무언가 좀 만족한 삶을 살려고 열심히 수고하고 힘쓰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리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해도, 아무리 평생 동안 발버둥을 쳐도 주님 없는 인생에게 남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을 결산 할때에 그들의 손은 빈손이요, 머리는 빈 머리요, 그들의 삶은 공허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없는 인생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무엇이 자신과 영원히 함께 하겠습니까? 젊음이 남겠습니까? 아름다움이 남겠습니까? 재산이 남겠습니까? 건강이 남겠습니까? 권력이 남겠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남는 것이라곤 공허 뿐이요, 남은 것이라곤 영원한 형벌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주님을 온전히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임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행여라고 아직 주님을 모르는 분들께서는 주님앞에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여, 주님을 보게하소서. 생명의 길을 나도 알게 하소서.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로하여음 생명의 생명의 길로 가게 하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에 진정 세상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진정하고도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후반부에는 바로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실패를 하고 한 마리도 못잡고 실망과 좌절과 공허감에 빠져 있을때에 바닷가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바로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없나이다」하면서 그저 기계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그물을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들이 그물을 들어 올리려고 했을 때 그들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그물을 쉽게 끌어올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잠도 자지 못하고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는데 피래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마지막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디 다른 바다로 이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멀리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방향만 조금 바꾼 것이었습니다.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는 위치를 약간 수정한 것뿐이었습니다. 사실 배 하나 사이에서 왼편과 오른편은 큰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배 밑에는 왼편이나 오른 편이나 서로 가까이서 통해져 있습니다. 그러니 왼편이나 오른편이나 거기서 거깁니다. 그런데 왼편에 던졌을때는 밤새도록 잡았지만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오른편에 던졌을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습니다.

요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기술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이성과 경험에 의지했을때는 한 마리도 못잡았습니다. 밤새도록 헛수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주님의 지시를 따라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을때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생명인지 무엇이 참된 가치인지를 올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그 주님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을 알았으면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좇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여러분의 삶의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지시에 의하여 손을 펴고, 발을 뻗고, 삶의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참 생명의 도, 진리의 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는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올바르게 알고 깨닫고 고백하고 그리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새로운 존재이며, 새로운 피조물이며,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부활한 존재로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 변화가 없고, 우리의 삶속에 기쁨이 없고, 우리의 삶속에 진정한 생명의 환희가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우리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있겠습니까?

이 땅의 전국 방방곡곡에 십자가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리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천 만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산다는 이 나라가 이처럼 불의가 넘치고,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이처럼 많은 혼란을 겪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와 주님 사이에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따로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거나 혹은 앎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우거나 아니면 주님의 뜻이 있음에도 따라가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욱 주님을 아는 일에 힘쓰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더욱 올바르게 온전하게 알기 위하여 주님의 음성에 늘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앞에 엎드려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드리는 일과 찬양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주님을 올바르게 알고 올바르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만난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지시와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행동화시키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세상속으로 여러분의 삶의 현장속으로 나아가서 적용시키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물을 던지라는 곳에 던지고, 주님께서 거두라는 곳에서는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온 성도 여러분께서 진정 주님만이 진정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오직 그 안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그 주님의 말씀을 내 삶에 적용시키며, 그 말씀들을 우리의 일상생활속에 행동화하며 살아갈때에 주님안에 있는 그 생명의 은혜를 더욱 넘치도록 충만하게 맛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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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주일예배 설교 <부활의 생명으로 >누가복음  눅24:30-35

 

 

 

제목 : 부활의 생명으로

말씀 : 눅24:30-35

할렐루야! 오늘은 정말 감격스러운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가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준 날입니다. 진정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이상 어찌 할수 없을만큼 참혹하고 처절하고 끔찍한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그러나 그 어둡고 절망적인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세상의 그 어떤 날보다도 기쁜 날이고 축복의 날이고 은혜의 날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탄생한 날과도, 세상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더 얻은 날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은혜의 날이요, 큰 축복의 날입니다.

여러분,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러한 부활의 의미를 다시한번 깊이 되새기며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 부활절에는 모든 어둠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더욱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속에 모시고 살아갈때에 더욱 부활의 생명이 충만한 삶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나 인간의 부활에 대해서도 이러킁 저러쿵 말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끊어졌던 생명이 다시 살아난단 말인가? 어떻게 죽어서 썩어 흙이 된 인간이 다시 살 수 있단 말인가하면서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이 이해하거나 말거나, 믿거나 말거나,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든지 말든지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인간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살이 찢기시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당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군병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창으로 찌름으로 온 피를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의 묘지에 장사지내었습니다.

그러나 3일후에 가보니 그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안식후 첫날에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와 살로메에게 천사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노라고.... 그리고 베드로에게, 제자들에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500여 문도에게 여러번 나타나셔서 함께 말씀도 하시고 함께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감람산에서 사도들과 제자들이 함께 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고 당신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처럼 장차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영광의 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팔목과 발목에 대못이 박혀서 십자가에 6시간 동안 못박혀 있었는데, 더구나 군병들이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가 다 쏟아져 내렸는데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 감추어 놓고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I.Q.가 두자리 숫자도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다.」라고 하는 복음을 전하다가 11명 모두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어떤 이는 사자의 밥이 되어, 어떤 사람은 칼에 맞아, 어떤 이는 돌에 맞아,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 놓고 부활을 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아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바보가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겠습니까?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위하여 온갖 모욕과 핍박과 죽음을 당하는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기에, 그들의 귀로 들었고, 눈으로는 보았고, 손으로 만져보았기에 그래서 그 예수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이였기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내걸고, 속된 말로 때려죽인다해도 「예수는 부활하셨다.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런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는 부활이 없으면 말짱 헛일입니다. 사랑도 좋고, 선고 좋고, 거룩도 좋지만 그러나 부활이 없으면 그거 다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사랑이니 선이니 의니 거룩이니 이런 것들은 다른 종교나 철학이 윤리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사망권세 억눌려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심을 명백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께서는 이러한 부활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 때 부활하신 주님의 새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오늘날 기독교가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가치관이 혼돈되고 말세가 가까워오면 올수록 진리는 비진리에 의하여 더 많은 도전과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앞으로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 질 것입니다.

요즈음 무슨 다빈치 코든지 뭔지 때문에 교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래서 한기총에서는 법원에 이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 소설과 영화에서는 예수님과 마리아가 결혼을 했고 그 후손들이 지금 살고 있다느니 뭐 이따위 허튼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이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그린 그림 속에 암호처럼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시온수도회에서 그런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이런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그들을 핍박하고 죽였지만 아직 그들중 일부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소설과 영화 속에 무슨 역사를 들먹이며 교묘하게 역사성이 있는 것처럼 위장해서 말하고 있으나 다 허구입니다. 교묘하게 자신들의 논리를 역사에 대입시켜 우리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시키려는 마귀의 장난인 것입니다.

또 며칠전에 뉴스에 보니까 유다복음서가 공개되었는데 이 복음서는 성경에 있는 복음서의 내용과 다르게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예수님의 지시에 의하여 그렇게 했다고 해서 교계에 논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허튼소리입니다. 정통 신학자들이 연구해보니 그것은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쓴 책입니다. 영지주의란 신비한 영적지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들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합니다. 물론 당연히 십자가의 죽음이나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절대자의 신령한 영으로 오신 분으로 그 예수님과의 신비한 영적인 교통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다 이단사설에 불과합니다. 그저 인간의 철학일뿐이지요.

여러분, 복음서가 성경에 있는 사복음서만 있는게 아닙니다. 도마복음, 베드로복음, 마리아복음, 요셉복음등 등 성경외의 많은 복음서와 많은 서신서가 있습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구약성경외에 많은 성경과 비슷한 문서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어떤 것은 가짜이고, 어떤 것은 이단자들이 쓴 것이고, 어떤 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읽어도 별 문제는 없으나 성경에는 미치지 못하는 문서들입니다. 이러한 문서들은 거의 성경과 동시대에 쓰여졌기 때문에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가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진리와는 무관한 것들입니다.

여하튼 여러분, 세상의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소리에도 현혹되지 마세요. 세상의 다른 어떤 소리에도 귀 기울지말 고, 여러분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에도 맡기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누가 뭐라고 현혹한다해도 오늘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에 정녕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여러분의 삶이 생명과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한 삶이 되기를 다시한번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바로 그런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처음에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하고 낙심중에 낙향하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새로운 희망과 소망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된 두사람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제자 즉 글로바라는 사람과 이름을 알수 없는 다른 한 사람의 제자가 예수님을 참혹한 죽음속으로 보낸 뒤에 좌절과 실의속에서 터덜터덜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대한 아주 각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능력 많으신 스승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와 가난과 다른 모든 고통에서 구원해 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고, 눈먼 자를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심지어는 죽었던 사람까지도 살리는 이분이라면 능히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들의 기대는 십자가 앞에서 그만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도 권능 있으셨던 주님이 그만 로마 병정들에게 온갖 조롱과 희롱을 당하시면서도 저항한번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침을 뱉아도, 채찍으로 내리쳐도, 가시면류관을 씌워도 가만히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 참을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아무런 힘도 못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온갖 희롱과 조롱을 퍼부어대도 주님은 그저 무기력하게 매달려 있을 뿐이엇습니다. “어이, 자네가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만에 지을 수 있다면서. 한번 지금 그 힘을 발휘해 보시지. 아니, 자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그럼 한번 너 자신을 먼저 구원해 보시지 그래. 자기도 못 구하는 주제에 남을 구하겠다고. 정말 웃기는구먼.”

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희롱하며 말했습니다. “이봐, 남은 구원해 주었다며 자네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뭐,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럼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래. 그럼 좋아, 지금이라도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럼 우리가 믿어주지.” 그러나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그냥 매달려 계셨고, 끝내는 그 십자가위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시고 참혹하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실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메시야라고 여겼던 예수, 이스라엘의 구원자라고 여겼던 예수, 이 가난과 압제에서 건져주실 분이라고 믿었던 예수, 그가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으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이제 예수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실망과 좌절속에서 힘없이 낙향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실망과 좌절 속에서 낙향하고 있을 바로 그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찾아가셔서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말을 겁니다. 「너희가 길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그러자 글로바는 기가 막혀서 말했습니다. 「아니 당신이 보아하니 예루살렘에서 오는 것 같은데, 근일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을 모른단 말이요?」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느냐?」

글로바가 다시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의 일이오. 그는 권세있는 말로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했고, 엄청난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병과 죽음에서 구해주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다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것으로 믿고 따르고 있었다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가 엊그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고 말았소. 그런데 이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어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그러자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들아,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는 줄 너희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더냐?」라고 하시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자신에 관한 말씀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들의 심령속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절망과 불신으로 얼어붙어 있던 그들의 마음속에 어디선가 한줄이 빛이 찾아들었습니다. 그러자 어둠이 물러갔습니다. 의심의 안개도 걷혔습니다. 내가 너희위하여 죽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도 기억났습니다. 결국 바로 자신들과 이야기하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돌이키게 됩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소,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단 말이오, 우리가 엠마오로 가다가 그분을 보았소,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다시 살아나야 인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하셨소.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가 다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소.」 그리하여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은 결국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때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면서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감당해 나갈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형벌과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이기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형벌과 저주와 고통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가 그 저주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모든 어둠과 실의와 좌절과 불안과 공포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모든 어둠과 절망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이 날, 다시금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고 그분과 동행하심으로써 모든 죄의 권세를 벗어던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현혹에도 흔들리지 말고 오직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보혈로 온전히 죄사함의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사망 권세를 보기좋게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 그 부활의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좌절하게 하던 모든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영원한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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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종려주일설교 :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

 

 

 

제목 :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

말씀 : 누가복음 18:31~34

 

3월에는 고난 주간에 이어 부활주일이 함께 있는 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느 때와는 달리 좀더 특별한 자세를 가지고 이 한 달을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주일을 앞에 두고 2~3일 동안 금식했다고 합니다. 이기간 동안 하루 한끼, 혹은 온종일 금식하면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경배했다고 합니다. 주후 4세기 경쯤 교회가 굉장히 부흥하고, 교회 제도가 제도화되면서 '사순절'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부활 직전 40일 동안을 특별한 방법으로 금식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기 위해 하루 한끼나  각자 정한 대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그분의 고난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잃어버린 복음을 다시 찾고 교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사순절이라는 구교의 형식적인 행사를 따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사순절이라 하여 특별한 행사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고난주간을 앞두고 우리의 삶이 좀더 경건하고 거룩해져야 겠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욕심을 절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묵상하면서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는 계획을 세우고 생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갖고 이번 한 달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생각하고 마음에 담을 수 있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동안 예루살렘을 몇 차례 오르내리셨지만 이번 행차는 단순한 방문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올라가면 선지자들이 이미 구약에서 예언하고 기록한 대로 인자가 이방인들, 즉 로마인들에게 넘기워져 희롱과 능욕과 침 뱉음, 그리고 채찍질을 당한 다음 결국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언하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을 떠나실 것인가를 세세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2편에서,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여 사람들의 훼방거리와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고, 십자가에 매달려 수족이 못 박힌 채 죽게 될 것이며, 그분의 겉옷과 속옷을 제비를 뽑히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상하고 찔릴 것이며, 우리의 모든 죄악을 홀로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면 그 예언대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사건은 피할 수 없는 사건이거나 돌발적으로 일어날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수백 년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각본대로 일어날 사건입니다. 곧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길을 따라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들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손에 칼을 들고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 나라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파라다이스를 세울 수 있는 메시야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그렇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 능력자라고 믿고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고 하자 '지금이야 말로 그때가 왔구나!' 하고 마음으로 반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예루살렘에 가면 이방인에게 넘겨져서 능욕과 침 뱉음과 모욕을 당하고 채찍질을 맞아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칼을 손에 든 메시야를 꿈꾸던 제자들의 마음에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죽으시는 메시야란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들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설교는 귀에 잘 들리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은 아무리 큰 소리로 전해도 다 옆으로 새고 맙니다. 손에 칼을 든 정복자 메시야를 꿈꾸고 있는 사람에게 십자가에서 죽는 메시야에 대한 이야기가 들릴 리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3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외에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 없음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기로 각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세상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기로 작정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발을 옮기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8절에 있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자기 몸을 맡기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퍽 침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묵묵히 죽음의 길을 가십니다. 이어서 제자들이,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져 무리들이 따라 갑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 뒤를 따라가면서 심히 두렵고 무서워했다고 말합니다.(막10:32) 여기에서 우리는 어둡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금새 느낄 수 있습니다.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당하는 사람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당하는 사람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세밀하게 내다보고 그것을 당하는 자는 그 비극을 겪기 전에 이미 2번, 3번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한걸음씩 발을 옮겨놓고 계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먼저 '내가 큰 죄인이구나.' 하는 사실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 없는 예수를 죽인 죄인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어린양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시키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먼저 제사장에게 어린양을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 손을 얹고는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는 기도가 끝나면 그 어린양을 제사장에 맡겼습니다. 그러면 이 어린양은 주인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제단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어린양이 되셔서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놓고 계십니다. 나의 검은 손을 그분의 머리 위에 얹고 내 모든 죄를 그분에게 뒤집어 씌우고는 내 대신 죽도록 예루살렘을 향해 밀어 내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입니까? 죄 있는 나를 대신하여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음의 형틀에 밀어 넣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입니까? 그러므로 저는 예루살렘을 향해 묵묵히 가시는 주님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죄인 중의 괴수구나. 정말 이것은 살 가치가 없는 무서운 죄인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 안에서 보면, '죄' 또는 '죄인'이라는 말을 듣는 것을 거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죄라는 말을 듣는 것은 마치 죽음이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우울한 반응을 보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 상당수가 '죄'나 '죄인'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사용하는 상투적인 단어쯤으로 생각하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이 말은 고귀하고 품위 있는 모임이나 기쁨의 축제인 예배에서는 되도록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로 하나님의 위로를 특별히 기대하면서 예배 드리는 사람들에게 죄, 죄인이라는 어두운 말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는 목사님들이나 교인들도 많습니다. 사랑의교회와 같이 복음주의 입장에 굳건히 서있고, 양질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런 말을 새겨 듣지 못하는 분들이 이따금씩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평생 가슴 아프도록 느껴보지 못한 채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은 죄, 죄인이라는 말을 가급적이면 듣지 않길 원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도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무슨 가책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지 않고,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선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아 내가 선하지 악한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는 데서 우월감을 가지려는 태도는 출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신의 어렸을 때 경험을 이야기한 글을 소개합니다. 그 목사님이 어렸을 때 조금 개구쟁이였는지 자기 방 청소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아침마다 어머니가 들어와서는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냅니다. "너 어떻게 방을 이 모양으로 정리하니? 침대는 이게 뭐니? 양말은 양말대로, 옷은 옷대로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정리하면 되겠어?" 하고 나무랐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때마다 이 목사님은 주저하지 않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엄마, 내가 형보다는 나아요. 형 방에 한번 가보세요." 사실 형 방은 자기 방보다 훨씬 더 지저분합니다. 그래서 형과 비교하면 자기 방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두말하지 않고, 아이의 팔을 끌고는 아래층에 있는 엄마 방으로 내려간답니다. 엄마 방에 가보면 침대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화장실도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습니다. 무엇 하나 흐트러진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엄마가 큰 소리로 "내가 네 방을 깨끗이 치우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치우라는 거야. 네 형처럼 하라는 것 아니야. 이 방처럼 치우라는 거야." 하고 호통쳤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의 어린시절 경험에 비추어, 우리가 죄인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지 않고 날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기준을 맞추어 '나는 그래도 좀 선하다.'고 생각한다면 철없는 어린 애와 똑같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자기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우리도 그만큼 의롭고 선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인정 받을 만한 선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똑 같은 사람들끼리 비교하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비교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우리는 형편없는 죄인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를 십자가에 밀어 넣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우리는 악한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시는 많은 성도들 가운데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해야 될 분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인 변화란 철저한 죄인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철저한 변화를 위해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이 예수를 내가 죽였다고 고백하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럴 때 나는 철저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체험을 근본적으로 바로 할 때 비로소 그 믿음이 바로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을 보면 이런 철저한 변화, 근본적인 변화를 체험하지 못한 채 교회 다니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해주시길 바랍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나의 죄를 짊어지고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묵묵히 향하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을 거기에 가도록 한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그러므로 나만큼 큰 죄인이 없다는 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램브란트(Rembrandt)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을 그린 다음 그 주변에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동조하는 군중들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군중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자기 얼굴로 그렸습니다. '이 군중 가운데 내가 있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장본인이다.'라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습니다. 내가 예수를 못 박는 이 무리들과 한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겉잡을 수 없는 슬픔을 가지고 대성통곡을 했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오래 믿었든, 늦게 믿었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한두 번쯤은 깊이 실존적으로 인식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며, 그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그것 때문에 십자가를 부둥켜 안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이런 변화를 전혀 모른 채 신앙생활 하는 것은 십자가를 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령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밀어 넣은 죄인이 아닌가?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닌가?' 하고 깊이 인식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은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또 무엇을 느끼십니까? 저는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느낍니다. 너무나 크고 풍성하신 은혜, 내 입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느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내 죄를 예수님께서 짊어진 대신 자기의 의를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없는 예수님은 죄인이 되고, 죄 있는 나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신분이 이렇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를 들고 서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로 영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불의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흡족한 의가 있는 자만을 받아들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로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그 의를 얻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의만 가지면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시고 우리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그 의를 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맥스 루카도(Max Lucado) 목사님은 자신이 경험했던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님께서 주신 이 의의 은혜를 설명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교회 직원들과 함께 쿠키 파티를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은 각자 자기가 만든 쿠키 한 접시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만든 쿠키든지 간에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쿠키를 만들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교회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나는 쿠키를 만들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해서 쿠키 한 접시만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이 파티에 기꺼이 참석할 수 있게 됩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그러자 교회 직원 중 한 자매가 정성껏 쿠키 한 접시를 만들어서 목사님에게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그 쿠키 한 접시를 들고는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는 파티석상에 놓여진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온 다양한 쿠키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에 파티를 열어놓고 계십니다. 그것은 쿠키 파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의의 파티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를 가지고 오면 하나님께선 무조건 받아 주시고, 하늘 나라에 있는 모든 행복과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영생할 수 있는 축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나라의 파티에 들고 갈 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 밑에서 나대신 죄인이 되신 예수님, 그리고 자기의 의를 나에게 넘겨 주신 예수님, 자기는 죄인이 되고 우리는 의인으로 만드신 이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는 이 의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의를 들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느냐, 늦게 믿었느냐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무조건 우리를 받아 들이시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자격은 오직 예수님께서 주시는 의의 소유 여부에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소용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의를 내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의를 다 소유한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의를 소유하고 있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닫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상식일 뿐, 가슴으로 그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주님, 머지 않아 십자가 형틀에 그 발을 올려 놓으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시는 이유는 나를 의인 만들어 하나님나라의 파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자격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속에 눈물이 솟고 흥분할 정도로 그 은혜에 깊이 감격하고 있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찬송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오르신 그 발, 흘린 피로 나의 죄를 대속하셨네." 자신이 흘린 피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 이 은혜 앞에 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가슴은 반석일 것입니다. 이 은혜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하면 그 무릎은 굳은 무릎일 것입니다. 이 은혜 앞에 가슴 속에서 우러나는 뜨거운 사랑을 바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중생 받은 자의 가슴이 아닐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십니까? 의가 없는데도 나를 의인 만드신 은혜를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이 축복을 주신 은혜를 얼마나 느끼십니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터치하셔서 식어버린 이 은혜의 마음을 다시 한번 뜨겁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잊어버렸던 이 은혜를 다시 회상할 수 있길 바랍니다.

최근 어느 검사로부터 들은 말입니다. 그 검사가 이렇게 질문 했습니다 "형무소에서 가장 기뻐하는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언뜻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형무소 시설이 좋다고 해도 거기서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형을 3개월 받고 들어온 사람이 이제 나갈 일이 가까이 왔으므로 제일 기뻐할 것 같죠?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형무소에서 기뻐하는 사람은 사형수로 있다가 무기수로 감형된 사람입니다." 언제 죽을지 몰라 조마조마한 가슴을 안고 사형 집행 날을 기다리던 사람에게, 사형 집행이 중지되고 비록 감옥에서나마 종신 살 수 있는 무기형이 선고되면 너무 기뻐서 소리지르며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나 이제 살게 됐어요. 나 이제 살게 됐어요." 하면서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이 갔습니다. 생명이란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의인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그 의를 들고 하나님나라에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신형에서 무기형으로 감형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셔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하늘에 있는 모든 축복과 행복을 누리도록 허락하셨으니 어찌 큰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한달 동안 예루살렘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놓으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곳에 가셔서 십자가에 발을 올려놓으시고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자주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놀라운 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께 내 마음을 드릴 수 있는 한 달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내 정성과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한 달이 되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영원한 의인이 되어 주님 앞에 받아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과 행복을 받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 성도들이 이번 고난 주간을 앞두고, 죄 없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은혜가 있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죄인이 되심으로 내가 의인이 된 이 놀라운 은혜 앞에 감격하여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 외에는 우리가 자랑할 분이 없고, 예수님 외에는 우리가 찬양할 분이 없음을 믿고 주님을 높이 받들며 사는 귀한 하루가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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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종려주일 낮 설교 - 예수님의 고난 (히브리서 5:1~10 )

 


제목 : 예수님의 고난

말씀 : 히 5:1~10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 날이자 종려주일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예루 살렘에 입성하신 날로서, 이때부터 주님이 부활하신 전(前)날, 즉 토요일까지의 일주일을 고

난 주간이라 합니다. 고난주간에는 금식과 철야 또는 새벽기도 등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을 깊이 생각하고 몸소 체험하며 그 뜻을 깊이 깨닫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나?', '왜 주님은 십자가의 엄청난 고난을 받으셨나?', '과연 누구 때문인가?', '그 십자가의 고난과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나?' 깊이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주님의 큰사랑에 감격, 감사하는 기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북쪽에 조그만 언덕이 있습니다. 나무도 별로 없고 붉은 흙으로 덮인 곳, 바로 히브리어로 '골고다'요, 라틴어로 '갈보리', 그리고 우리말로는 '해골의 곳'이라는 장소입니

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으로써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신 곳입니다.

 

금요일 아침, 안토니아 성문 앞에서는 예수를 잡아죽이라는 무리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벌써 닷새 전에 우리의 '구세주'라고, '메시아'라고 고백했던 입술들이,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 시는 이여'라고 찬양하던 입술들이 지금은 아주 돌변하여 굶주린 사자 떼 같이 큰소리로 ' 죽이시오.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오' 하고 불끈 쥔 주먹을 휘저으며 아우성을 치 고 있습니다.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광기 어린 외침을 하고 있습 니다. 비겁하지만 합리적인 빌라도는 '그대들은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매달든지 말

든지 마음대로 하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노라'며 군중의 뜻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 주었습니다.

 

그 전날인 목요일 저녁,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신 주님은, 대제사장 가야 바의 법정과 총독 빌라도의 법정, 그리고 헤롯의 법정에까지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며, 모욕

과 멸시와 침 뱉음과 고초를 당하신 끝에 결국 십자가의 형을 받게 되신 것입니다.

 

주님은 밤새도록 심문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였기 때문에 몹시 지친 몸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무거운 십자가 틀을 지고 가는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여러 번 넘어지셨습니다. 넘

어지고 또 넘어지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로 인하여 쓰러질 때마다 무릎은 터지고 깨졌고, 발은 돌 뿌리에 채여서 붉은 피로 물들었으며, 그 얼굴은 로마 병정들에게 맞아 멍들어 부

풀어올라 분간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바로 당신이 못 박힐 그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고통스럽게 걸어가셨습니다.

 

오전 9시경, 겨우 겨우 갈보리 산상에 올라오니, 악당들은 주님의 입은 옷을 다 발가벗기고, 십자가 위에 눕힌 채 사지를 결박한 후, 13cm의 못을 입에 물고, 예수의 손목 중 뼈가 없는

부분을 찾아 그 위에 힘차게 못을 때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이 '끌어 올려라'고 소리 쳤습니다.

 

십자가를 올릴 때 예수의 손목은 비틀어졌고, 검붉은 피는 치솟아 흘러내렸습니다. 갑작스럽 게 어둠이 밀려왔고 하늘은 어두워졌습니다. 고통을 덜어주는 쓸개 탄 포도주도 안 받으시

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리셔서 몸부림치시고 목마르셨습니 다. 결국, 옆구리에까지 창을 받아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모시던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갔으며,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 문제해결 받 고 할렐루야! 외치며 기뻐 뛰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산 나사로는

어디 갔고, 순교를 각오했던 베드로는 어디 갔습니까? 관리들이 예수님을 버렸고, 헤롯왕은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했고,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참람하다'면서 정죄하였습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에게 버림을 당하고 심지어 유일한 피난처인 하나님 아버지에게 마저 버림당하는 슬픔을 맛보셨습니다. 모두에게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은 아주 외롭고 쓸쓸하게 죽으셨습니

다.

 

불법한 빌라도의 채찍에 맞아 터지고 멍든 그 몸의 상처, 우리 주님의 전신에서 예리 하게 흘러내리는 보배로운 피를 다시 한번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그 고통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인간의 적은 두뇌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주님의 고난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왜 고난

을 당하셨으며, 우리는 왜 오늘도 그 고난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나요? 주님께서 주신 고난의 의미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위하여 죽으심에 대한 감격과 다른 하나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된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난받으실 때, 제자들의 생활상태를 찾아보면 한심함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기도 의 고난을 당하시는데 잠만 자고 있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법한 로마의 군

병들에게 잡혀가실 때는 제 갈 길로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심문을 당하시며, 조롱과 모욕을 당하실 때는 멀찍이 따라가며 비자들과 불을 쪼이던 제자도 있었

습니다.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기 위해 모의를 하던 제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신앙인의 자세가 절대로 아닙니다. 신앙인의 자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29)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만 분의 일이라도 동참하는데 고난 주간을 지키는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고난은 어떤 고난이었을까요?

 

첫째로, 기도의 고난이었다.

 

본문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 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

도를 드리셨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겠습니까?

 

마태복음 26장 37, 38절에 보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 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된 상태에서 기 도하셨습니다. 죽게 된 지경에서 기도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이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될 지경이 되면 기도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지경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죽을 지경에서의 통곡하는 기도는 십자가

의 고난보다 더 컸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놓고 결판을 내는 기도 였기에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잠시나마 하나님께 버림당할 것과 하나님께 멀어지고 끊어

질 저주를 앞두고 하신 기도였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를 알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당할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아셨기

때문에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통을 없이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 라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 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땀은 다 쏟아지고, 진액은 다 빠져나가고, 땀구멍으

로 핏방울이 쏟아지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것이 너무도 유명한 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였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름

을 짜듯이, 그런 기도를 드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올렸고'라는 말은 제물을 드린다는 술어입니다. 즉 '제물을 가져다 바친다'는 뜻 인데, 구약시대에 드렸던 제물은 곧 신약시대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제물은 언제나 고난과 희생을 뜻했습니다. 속죄 제물은 죽여서 피를 흘리는 것이요, 번제 제 물은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며, 소제 제물은 가루로 드립니다. 그러니까 내 몸이 부서지고 깨

져 가루가 되기까지 드려지는 기도여야 합니다. 피를 쏟는 기도여야 하고, 내 몸이 태워지는 기도여야 하고, 기름을 짜내듯 온 영혼을 다 짜내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야곱처럼 환도뼈

가 부러지는 기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께서 생명을 건, 처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쿨쿨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와 함

께 한 시(時)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40) 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난 주간이 되어도 감각이 없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한 주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그 고난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기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둘째로, 순종의 고난이 있다.

 

본문 8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 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뜻

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드리실 때,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자기의 소원을 버리고 아버지의 소원을 따른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입니다. 나의 욕

망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 못지 않은 고통인 것입니다. 아 무리 나의 생각이나 주장이 옳다 하여도, 그 고집을 버리고 아버지 말씀에 복종하는 순종의

고난을 배워야 합니다.

 

순종의 사람 사무엘은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버림당한 사울을 향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삼상 15:22)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몸이 소제의 제물같이 가루가 된다 할지라도,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번제로 드린다 할지라도 순종 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자기의 몸을 드리고, 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바친다

해도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순종하면 당장은 손해일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시험과 분쟁으로 금방 죽을 것 같아도, 결국은 복이요 승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

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은혜를 체험한 후, 복음을 전파하며 기 적을 베풀고 다닐 때입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제자들을 잡아다가

심문을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는 사람을 더 이상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베드로는 담대하게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산 제사의 믿음이요, 이 믿음으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 달려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루 한 가지씩이라도 순종합시다. 사랑할 수 없 는 사람을 사랑하고, 기도할 수 없는 환경에서 기도하고, 충성할 수 없는 처지에서 충성하

고, 참을 수 없는 지경에서 참으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제사장적 죽음의 고난이 있다.

 

본문 10절에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 니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1년에 한번씩 온 백성의 죄악을 짊어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희생의 피를 뿌리며 속죄제를 드리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대제사장이라고 히브리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

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7, 18),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님 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

6:20), '저가 저 대제사장들의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 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7).

 

이와 같은 말씀들을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구약시대에 많은 짐승을 잡아서 속죄제를 드리 던 것을 자기의 몸을 희생의 제물로 단번에 드려 마지막 대제사장이 되어주셨다는 것입니

다.

 

예수님의 고난의 최절정은 제물로서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그분은 벌써 온 몸을 채찍에 맞으셨습니다(마 27:26). 그래서 멍이 든 온 몸은 군데군

데 터지고 미어져 핏빛이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셨습니다(마 27:29). 그래서 가시에 찔린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온 얼굴은 흥건하였습니다. 무려 6시간 동안이나 십자가에 달

리셔서 몸부림치시고 목마르셨습니다(막 15:25, 34: 요 19:28). 그리고 죽음을 확인 받기 위 해 옆구리는 창으로 찔리셨습니다(요 19:34). 모든 인류의 죄값으로 저주를 받으신 고난이었 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불에 들어가서 당해야 할 고난을 홀로 담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른다'고 하 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엘리야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을 부르신 것입니다.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절규하시는 이 순간이야말로 고난과 고민, 고초과 고통의 최절정의 순간입니다. 인류의 죄를 지시고 버림받은 죄인으로

몸은 깨어지고, 심장은 파열되고, 조롱을 당하시고, 멸시를 받으시며 죽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이 고난을 생각하며,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 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

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이나 노예들을 처형하는 형틀로써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형을 듣기만 해도 몸서리치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십자가가

영광과 복과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십자가를 통하여 참되고 영원한 구원과 희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우주와 모든 인류에게

가장 큰 이적이요 기적입니다. 바로 절망의 십자가가 희망의 십자가가 되었다.

 

저주의 십자가가 축복의 십자가로 변화되었고, 치욕의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로 변화되었 습니다. 멸시의 십자가가 존귀의 십자가로, 고통의 십자가가 평화의 십자가로, 실패의 십자

가가 승리의 십자가로, 그리고 사망의 십자가가 영생의 십자가로 변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아 무리 힘들고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생애 위에 축복과 영광과 평화와 승리와 형통과 영생의 역사가 충만하게 임할 것을 믿습니다.

 

ex) 몇 사람이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겁다고 불평을 하면서, 중간쯤 가다가 아무도 모 르는 곳에서 톱으로 십자가를 잘라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끝까지 지고 갔습니다. 어느덧 예수님께 상급 받을 종점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큰 강이 있었습니다. 그 강을 마지막으 로 넘어야 저편의 황홀하고 아름다운 왕관을 들고 서 계신 예수님께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

다. 물론 그 강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고 온 십자가를 강 위에 걸쳐서 건너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묵묵히 끝까지 인내하며 십자가를 지고 온 사람은 당당하게 잘 건너갔고, 무겁다고

불평하다 자신의 십자가를 잘라버린 어리석은 사람은 짧아서 건너기는커녕, 오히려 강에 빠 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삶 가운데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잘 견디어내지 못하면 결코 예수님의 상급을 받 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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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주일예배 설교 - 기약없는 주님의 사랑 (The love of the Lord)

 

 

제목 : 기약없는 주님의 사랑
말씀: 눅22:31-34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오늘의 교회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겨울바람이 어느덧 봄바람으로 바뀌고, 산수유 노란 꽃망울이 봄이 왔다고 가만히 외치고 있습니다. 삐죽 고개를 드는 새싹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생명의 기운을 지렛대로 삼아 대지를 들어 올린 것입니다. 벌써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 속에도 예수라는 꽃이 조금쯤 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십니다. 굳어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녹이고, 남의 아픈 사정을 헤아리지 못한 채 자기 욕망 주위만 맴돌던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하시던 주님은 당신의 때가 이르렀음을 직감하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 순례자들이 꿈에도 그리는 그곳을 사람들은 ‘평화의 도성‘이라 불렀지만, 사실 그곳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헤롯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리모델링한 성전은 아름다웠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도살되는 짐승들의 피가 흐르고, 경건을 가장한 욕망이 지배하는 곳이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성전을 보며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하고 찬탄했을 때 주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막13:1-2). 제자들은 성전의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주님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을 꿰뚫어보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후 70년 로마의 장군인 Titus에 의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전을 성전답게 하는 것은 건물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병들고 찢긴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절망의 어둠 속에 있던 이들에게 빛을 비추고, 뭔가에 짓눌린 채 살아가던 사람들을 해방하여 자유인으로 살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바로 성전의 존재 이유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외형은 성전이었지만 실제로는 강도의 소굴, 곧 신의 무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는 이들, 소위 종교 전문가들로 인해 모독당하고 계셨습니다. 

오늘의 교회 현실도 그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에 절망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늘의 개신교회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싸늘합니다. 어느 기독교 대학 교수님이 자기 학교에 들어오는 학생 가운데 기독교인이라고 밝힌 이들은 10%에 불과하다고 말하더군요. 실제로 교회 다니는 학생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학생들은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합니다. 교회 다닌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편협하고, 열광주의적이고, 비이성적인 사람들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참담한 현실입니다. 교회는 영영 희망이 없는 것일까요? 객관적으로 타당한 대답은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희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가치입니다. 루쉰은 ‘길이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걸어 다니는 동안 형성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희망은 그것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살아내려는 이들을 통해서만 현실이 됩니다. 지금 우리 모습이 추하다고 해서 쉽게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담을 넘는 담쟁이처럼 우리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더 나은 교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못났다 책망하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여 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 주님의 외로움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를 죽일 음모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더불어 어떻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지를 의논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님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저녁 식사 후에 잔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비장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찢긴 빵은 머지않아 찢기실 주님의 몸을 상징했고, 나누어 마신 포도주는 주님이 흘리신 피를 상징하건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기들 나름의 꿈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눈을 가렸던 비늘이 제자들의 눈도 가리고 있었습니다.

3년이나 주님과 동고동락 했지만 그들은 예수의 길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세 번이나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장밋빛 미래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누구를 가장 큰 사람으로 칠 것이냐를 놓고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철저히 외로우십니다. 지상에서의 삶의 종착역이 저만치 보이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미숙한 신앙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사순절 특별 기도회 광경이 떠오릅니다. 별 기대도 없이 참석한 예배였는데, 4학년 선배가 홀로 부른 찬송가가 제 마음을 온통 뒤흔들었습니다. 청아하지만 쓸쓸한 목소리에 담긴 가사가 심장을 파고 들었습니다.

“1. 감람산 깊은 밤중에 별빛은 희미하여라/주 예수 고민하시며 외로이 기도하시네
2. 주 홀로 깊은 밤중에 고민에 싸여 계시나/그 사랑 받던 제자들 스승의 괴롬 모르네
3. 한 밤중 피 땀 흘리며 인간의 죄를 지신 주/무릎을 꿇고 애쓸 때 성부는 힘을 주시네
4. 한 밤중 하늘로부터 천사의 노래 들리네/인간은 듣지 못하나 주 예수 위로 받도다”

이 아름다운 찬송가가 지금 찬송가에 왜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주님의 외로우심‘이라는 이미지에 확고히 사로잡혔습니다. 주님을 외롭게 해드리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저는 주님을 외롭게 해드리고 있지만,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찬송가 134장 감람산 깊은 밤중에


● 우리 마음이 흔들릴 때에도
주님은 외로우셨지만 그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섭섭함과 분노에 사로잡혀 마음이 황폐해지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티끌에 불과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히브리 시인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시103:13-14). 그 마음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혼돈과 아픔과 절망까지도 자기 안으로 끌어안으십니다. 하지만 쓸쓸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31)

이게 현실입니다. 고난의 태풍 앞에서 시몬의 마음은 속절없이 흔들릴 겁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말을 강하게 부정합니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33) 나는 이 마음에 조금의 거짓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정말 그런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신이 한갓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올 때, 이성적인 판단이나 결심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그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저는 ‘죽을 각오로‘ 혹은 ‘목숨을 걸고’라고 말하는 이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 말은 진실한 말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4)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철저한 부정을 뜻하는 말일 겁니다. 누가복음 본문만 보더라도 베드로는 주님과의 관련성을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려는 이들에 맞서 베드로가 한 말에 우리는 참담함을 느낍니다. “여보시오, 나는 그를 모르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란 말이오.” “여보시오, 나는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 베드로는 이렇게 철저히 무너졌습니다. 베드로의 삶을 포도에 비유하자면 그는 이제 으깨진 포도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자기라고 믿어왔던 그 자기 정체성이 무너진 겁니다.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해도 그는 자기에 대한 혐오와 절망감을 품고 살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희망의 뿌리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미 그의 약함과 배신까지 품어 안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32)

한번 넘어지면 그걸로 끝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넘어진 자리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면 희망이 없지만, 기어코 몸을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패자 부활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한번 루저는 영원한 루저로 취급당합니다. 흙수저들은 금수저가 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게 악한 세상의 실상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넘어짐도 삶의 일부분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기도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멸감이나 자기혐오에 사로잡히면 다시 일어설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혹은 그럴 가능성이 큰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아니었다면 베드로는 베드로로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 새로운 소명
물론 베드로가 위기 속에서도 굳건하게 믿음을 지키고, 신념대로 살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무너졌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양심의 시험대 앞에 세우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시련의 시간을 면제해주지 않으십니다. 일전에 서양의 엄마들과 한국 엄마들을 피실험자로 한 실험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풀기 어려운 문제가 제시됩니다. 아이들은 고심을 거듭하지만 쉽게 대답을 찾지 못합니다. 서양 엄마들은 아이가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시행착오를 용납한 것입니다. 그에 비해 한국 엄마들은 좀 달랐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아이들이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비가 내린 후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픔을 겪어본 사람이라야 아파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쓰라림을 맛본 사람이라야 지금 자기에게 절망한 이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으깨진 포도처럼 생의 밑바닥을 맛본 사람이라야 그런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주님이 겪으신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2:18).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저는 ‘다시 돌아올 때’라는 구절에 감동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베드로는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말씀은 영혼의 어둔 밤에 사로잡힌 그의 앞을 비추는 등불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께 등을 돌릴 베드로에게 격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배신할 것을 내다보셨지만, 그가 다시 돌아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시몬이라는 갈릴리의 어부 속에서 베드로 곧 반석을 보셨던 주님의 그 가없는 사랑과 신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 사랑과 신뢰가 베드로의 희망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형제를 굳세게 하라 이르십니다. 새로운 소명입니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도 완벽하지 못하고, 신앙적으로도 담대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실패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실패를 계속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실패를 디딤돌 삼아 더 나은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실패입니다. 어느 축구팀이 연전연패를 거듭할 때 해설자가 하는 말이 제게 크게 다가온 적이 있습니다. “저 팀은 패배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졌어요.“ 패배에 익숙해졌다는 말처럼 슬픈 말이 없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도 세상과의 싸움에서 패배를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가끔 아무리 외쳐보아도 세상은 달라질 리 없다는 절망감이 저를 사로잡을 때도 있습니다. 물질과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리를 외치는 이들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몸과 마음을 곧추 세우는 까닭은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신 주님이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값싼 위안이나 구하라고 택함 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넘어졌더라도 그 자리를 딛고 일어나 형제를 굳세게 하라는 소명 앞에 서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비록 으깨진 포도 같은 우리라 해도, 주님의 가없는 사랑을 신뢰할 때 향기로운 포도주처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우리를 바칠 때 우리는 성찬의 포도주처럼 거룩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들을 통해 이 척박한 땅에 사랑과 생명의 씨를 심으려 하십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기쁨으로 응답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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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종려주일 낮설교 -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

히 5:1~10

종려주일 낮설교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 날이자 종려주일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예루 살렘에 입성하신 날로서, 이때부터 주님이 부활하신 전(前)날, 즉 토요일까지의 일주일을 고

난 주간이라 합니다. 고난주간에는 금식과 철야 또는 새벽기도 등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며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을 깊이 생각하고 몸소 체험하며 그 뜻을 깊이 깨닫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나?', '왜 주님은 십자가의 엄청난 고난을 받으셨나?', '과연 누구 때문인가?', '그 십자가의 고난과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나?' 깊이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주님의 큰사랑에 감격, 감사하는 기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북쪽에 조그만 언덕이 있습니다. 나무도 별로 없고 붉은 흙으로 덮인 곳, 바로 히브리어로 '골고다'요, 라틴어로 '갈보리', 그리고 우리말로는 '해골의 곳'이라는 장소입니

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으로써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신 곳입니다.

 

금요일 아침, 안토니아 성문 앞에서는 예수를 잡아죽이라는 무리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벌써 닷새 전에 우리의 '구세주'라고, '메시아'라고 고백했던 입술들이,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 시는 이여'라고 찬양하던 입술들이 지금은 아주 돌변하여 굶주린 사자 떼 같이 큰소리로 ' 죽이시오.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오' 하고 불끈 쥔 주먹을 휘저으며 아우성을 치 고 있습니다.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광기 어린 외침을 하고 있습 니다. 비겁하지만 합리적인 빌라도는 '그대들은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매달든지 말

든지 마음대로 하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노라'며 군중의 뜻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내어 주었습니다.

 

그 전날인 목요일 저녁,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신 주님은, 대제사장 가야 바의 법정과 총독 빌라도의 법정, 그리고 헤롯의 법정에까지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며, 모욕

과 멸시와 침 뱉음과 고초를 당하신 끝에 결국 십자가의 형을 받게 되신 것입니다.

 

주님은 밤새도록 심문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였기 때문에 몹시 지친 몸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무거운 십자가 틀을 지고 가는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여러 번 넘어지셨습니다. 넘

어지고 또 넘어지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로 인하여 쓰러질 때마다 무릎은 터지고 깨졌고, 발은 돌 뿌리에 채여서 붉은 피로 물들었으며, 그 얼굴은 로마 병정들에게 맞아 멍들어 부

풀어올라 분간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바로 당신이 못 박힐 그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고통스럽게 걸어가셨습니다.

 

오전 9시경, 겨우 겨우 갈보리 산상에 올라오니, 악당들은 주님의 입은 옷을 다 발가벗기고, 십자가 위에 눕힌 채 사지를 결박한 후, 13cm의 못을 입에 물고, 예수의 손목 중 뼈가 없는

부분을 찾아 그 위에 힘차게 못을 때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이 '끌어 올려라'고 소리 쳤습니다.

 

십자가를 올릴 때 예수의 손목은 비틀어졌고, 검붉은 피는 치솟아 흘러내렸습니다. 갑작스럽 게 어둠이 밀려왔고 하늘은 어두워졌습니다. 고통을 덜어주는 쓸개 탄 포도주도 안 받으시

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리셔서 몸부림치시고 목마르셨습니 다. 결국, 옆구리에까지 창을 받아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모시던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갔으며,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 문제해결 받 고 할렐루야! 외치며 기뻐 뛰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산 나사로는

어디 갔고, 순교를 각오했던 베드로는 어디 갔습니까? 관리들이 예수님을 버렸고, 헤롯왕은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했고,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참람하다'면서 정죄하였습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에게 버림을 당하고 심지어 유일한 피난처인 하나님 아버지에게 마저 버림당하는 슬픔을 맛보셨습니다. 모두에게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은 아주 외롭고 쓸쓸하게 죽으셨습니

다.

 

불법한 빌라도의 채찍에 맞아 터지고 멍든 그 몸의 상처, 우리 주님의 전신에서 예리 하게 흘러내리는 보배로운 피를 다시 한번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그 고통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인간의 적은 두뇌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주님의 고난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왜 고난

을 당하셨으며, 우리는 왜 오늘도 그 고난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나요? 주님께서 주신 고난의 의미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위하여 죽으심에 대한 감격과 다른 하나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된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난받으실 때, 제자들의 생활상태를 찾아보면 한심함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기도 의 고난을 당하시는데 잠만 자고 있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법한 로마의 군

병들에게 잡혀가실 때는 제 갈 길로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심문을 당하시며, 조롱과 모욕을 당하실 때는 멀찍이 따라가며 비자들과 불을 쪼이던 제자도 있었

습니다.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기 위해 모의를 하던 제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신앙인의 자세가 절대로 아닙니다. 신앙인의 자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 1:29)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만 분의 일이라도 동참하는데 고난 주간을 지키는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고난은 어떤 고난이었을까요?

 

첫째로, 기도의 고난이었다.

 

본문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 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

도를 드리셨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겠습니까?

 

마태복음 26장 37, 38절에 보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 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된 상태에서 기 도하셨습니다. 죽게 된 지경에서 기도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이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될 지경이 되면 기도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지경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죽을 지경에서의 통곡하는 기도는 십자가

의 고난보다 더 컸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놓고 결판을 내는 기도 였기에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잠시나마 하나님께 버림당할 것과 하나님께 멀어지고 끊어

질 저주를 앞두고 하신 기도였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를 알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당할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아셨기

때문에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통을 없이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 라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 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땀은 다 쏟아지고, 진액은 다 빠져나가고, 땀구멍으

로 핏방울이 쏟아지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것이 너무도 유명한 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였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름

을 짜듯이, 그런 기도를 드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올렸고'라는 말은 제물을 드린다는 술어입니다. 즉 '제물을 가져다 바친다'는 뜻 인데, 구약시대에 드렸던 제물은 곧 신약시대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제물은 언제나 고난과 희생을 뜻했습니다. 속죄 제물은 죽여서 피를 흘리는 것이요, 번제 제 물은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며, 소제 제물은 가루로 드립니다. 그러니까 내 몸이 부서지고 깨

져 가루가 되기까지 드려지는 기도여야 합니다. 피를 쏟는 기도여야 하고, 내 몸이 태워지는 기도여야 하고, 기름을 짜내듯 온 영혼을 다 짜내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야곱처럼 환도뼈

가 부러지는 기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께서 생명을 건, 처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쿨쿨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와 함

께 한 시(時)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 26:40) 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난 주간이 되어도 감각이 없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한 주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그 고난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기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둘째로, 순종의 고난이 있다.

 

본문 8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 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뜻

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드리실 때,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자기의 소원을 버리고 아버지의 소원을 따른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입니다. 나의 욕

망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 못지 않은 고통인 것입니다. 아 무리 나의 생각이나 주장이 옳다 하여도, 그 고집을 버리고 아버지 말씀에 복종하는 순종의

고난을 배워야 합니다.

 

순종의 사람 사무엘은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버림당한 사울을 향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삼상 15:22)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몸이 소제의 제물같이 가루가 된다 할지라도,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번제로 드린다 할지라도 순종 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자기의 몸을 드리고, 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바친다

해도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순종하면 당장은 손해일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시험과 분쟁으로 금방 죽을 것 같아도, 결국은 복이요 승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

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은혜를 체험한 후, 복음을 전파하며 기 적을 베풀고 다닐 때입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제자들을 잡아다가

심문을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는 사람을 더 이상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베드로는 담대하게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산 제사의 믿음이요, 이 믿음으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 달려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루 한 가지씩이라도 순종합시다. 사랑할 수 없 는 사람을 사랑하고, 기도할 수 없는 환경에서 기도하고, 충성할 수 없는 처지에서 충성하

고, 참을 수 없는 지경에서 참으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제사장적 죽음의 고난이 있다.

 

본문 10절에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 니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1년에 한번씩 온 백성의 죄악을 짊어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희생의 피를 뿌리며 속죄제를 드리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대제사장이라고 히브리서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

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7, 18),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님 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

6:20), '저가 저 대제사장들의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 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7).

 

이와 같은 말씀들을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구약시대에 많은 짐승을 잡아서 속죄제를 드리 던 것을 자기의 몸을 희생의 제물로 단번에 드려 마지막 대제사장이 되어주셨다는 것입니

다.

 

예수님의 고난의 최절정은 제물로서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그분은 벌써 온 몸을 채찍에 맞으셨습니다(마 27:26). 그래서 멍이 든 온 몸은 군데군

데 터지고 미어져 핏빛이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셨습니다(마 27:29). 그래서 가시에 찔린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온 얼굴은 흥건하였습니다. 무려 6시간 동안이나 십자가에 달

리셔서 몸부림치시고 목마르셨습니다(막 15:25, 34: 요 19:28). 그리고 죽음을 확인 받기 위 해 옆구리는 창으로 찔리셨습니다(요 19:34). 모든 인류의 죄값으로 저주를 받으신 고난이었 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불에 들어가서 당해야 할 고난을 홀로 담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른다'고 하 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엘리야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을 부르신 것입니다.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절규하시는 이 순간이야말로 고난과 고민, 고초과 고통의 최절정의 순간입니다. 인류의 죄를 지시고 버림받은 죄인으로

몸은 깨어지고, 심장은 파열되고, 조롱을 당하시고, 멸시를 받으시며 죽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이 고난을 생각하며,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 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

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이나 노예들을 처형하는 형틀로써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형을 듣기만 해도 몸서리치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십자가가

영광과 복과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십자가를 통하여 참되고 영원한 구원과 희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우주와 모든 인류에게

가장 큰 이적이요 기적입니다. 바로 절망의 십자가가 희망의 십자가가 되었다.

 

저주의 십자가가 축복의 십자가로 변화되었고, 치욕의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로 변화되었 습니다. 멸시의 십자가가 존귀의 십자가로, 고통의 십자가가 평화의 십자가로, 실패의 십자

가가 승리의 십자가로, 그리고 사망의 십자가가 영생의 십자가로 변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아 무리 힘들고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생애 위에 축복과 영광과 평화와 승리와 형통과 영생의 역사가 충만하게 임할 것을 믿습니다.

 

몇 사람이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겁다고 불평을 하면서, 중간쯤 가다가 아무도 모 르는 곳에서 톱으로 십자가를 잘라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끝까지 지고 갔습니다. 어느덧 예수님께 상급 받을 종점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큰 강이 있었습니다. 그 강을 마지막으 로 넘어야 저편의 황홀하고 아름다운 왕관을 들고 서 계신 예수님께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

다. 물론 그 강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고 온 십자가를 강 위에 걸쳐서 건너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묵묵히 끝까지 인내하며 십자가를 지고 온 사람은 당당하게 잘 건너갔고, 무겁다고

불평하다 자신의 십자가를 잘라버린 어리석은 사람은 짧아서 건너기는커녕, 오히려 강에 빠 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삶 가운데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잘 견디어내지 못하면 결코 예수님의 상급을 받 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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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부활절 메시지 -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라

 

 

 

제목 :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삶

말씀 : 고전15:1-8

주님께서 죄와 사망을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이 날, 다시 한번 주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의 기쁨이 충만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이나 우리의 부활이나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기쁘고, 너무나 감격스럽고,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서 어쩌면 그 기쁨을 다 맛보고 있지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본래 기쁜 것이나 슬픈 것이나 좋은 것이나 그 크기가 너무 크면 우리가 그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다 누릴 수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모든 영역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지식도 이성도 감정도 물질적인 영역도 다 한계가 있어서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면 우리가 그것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밝으면 잘 보이지만 그러나 적당히 밝아야지 너무 밝으면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습니다. 따뜻하면 좋지만 적당히 따뜻해야지 너무 따뜻하면 몸을 데게 됩니다.

 

부활도 정말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사실은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일이라서 잘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하고 또 너무나 큰 기쁨의 소식이라서 그 기쁨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른다고 느낄 수 없다고 그 엄연한 사실이 취소되거나 축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현실은 현실이로되 사람들이 그것을 잘 알지 못하거나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어떻게 그것을 최대한 누리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 기쁨의 소식을 알고 그것을 최대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누리는 사람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정말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어찌해야 됩니까?

 

1.부활의 신앙위에 확고히 서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가 타 종교와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두가지를 빼고 나면 다른 것은 거의 비숫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건전한 모든 종교들은 인간에게 나름대로 소망과 위로를 줍니다. 평안과 기쁨을 줍니다. 마음을 순화시켜줍니다. 선과 의와 거룩을 가르칩니다. 사랑과 자비를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직 유일하게 기독교에만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되고, 설렬 한다해도 소용도 없습니다. 그 사건은 한번이면 족한 것이고 이미 예수안에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을 다시 일으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유일무이한 기독교의 핵심진리이며 유일무이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래서 이게 없으면 말짱 헛일입니다. 물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없으면 죄사함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 믿음은 헛믿음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이 이것인데, 생명의 길이 유일하게 거기에 있는데 이걸 알지못하고 믿지 못하면 무든 의미가 있겠습니까? 또 우리 인생이 알든 알지 못하든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이기에 필연적으로 영생합니다. 영혼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하고,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덧입어 새로운 생명으로 덧입지 않으면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았다해도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조금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짧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시간속에서의 100년은 한 경점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설령 그 짧은 기간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해도 나머지 영원의 시간을 고통 중에 보낸다면 그건 분명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오늘 다 읽지는 않았지만 같은 본문인 고전15:17-19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니까 아무리 교회생활잘해도 이 부활신앙을 갖지 못하면 헛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가장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공연히 헛수고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조금은 의미가 있겠지만 즉 소망도 가질 수 있고, 인격수양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좀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순간에 지날 것이므로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부활의 신앙위에 확실히 서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분명 부활하셨습니다. 부님의 부활은 어느 한구석에서 숨어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에 의하여 조작된 것도 아닙니다. 신화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었고, 사실이었고, 큰 뉴스거리였습니다.

 

그것은 이미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던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았고,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령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앞에서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련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조작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산증인들이 있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하여 제자들은 모두 순교했습니다. 조작된 사실을 위하여, 꾸며진 이야기를 위하여 누가 순교를 하겠습니까? 허무맹랑한 거짓에 목숨을 걸 바보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3-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이 부활신앙의 기초위에 확실히 서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합니다. 주님은 승천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천국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때가 되면 다시 오십니다. 그때에 모든 인류는 부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참혹함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신 예수님, 그러나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신앙위에 서야 합니다. 그 인생이 결국 마지막 승리자가 됩니다. 세상에서 그 부활의 신앙만 있으면 모든 것을 이기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부활의 신앙위에 서게 됩니다.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나의 사전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까? 어떻게 주님의 부활이 믿어지고, 어떻게 주님의 부활의 생명이 나의 것이 됩니까? 믿으면 되는 줄은 알겠는데 그럼 어떻게해야 믿어집니까?

 

그건 간단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롬10: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그러니까 믿음이란 어디서 오느냐 그것은 들음에서 오는데, 그럼 무엇을 들을 것이냐,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그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지 가운데 있었는지 말게 된다는 말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비로소 믿음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20:31에서는 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즉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말한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알고 믿게하려는 것이요, 그렇게 그것을 보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게 될 때 결국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바뀝니다. 십자가에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면 나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의 심각성을 알게되고,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뿐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음과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셨음을 알고 이해하고 믿게 됩니다. 그러면 인생의 바꿉니다.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러면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성이 깨어납니다. 죽어있던 영혼이 살아나게 됩니다. 할렐루야 찬양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기뻐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는 일을 늘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영혼이 맑아지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욱 기뻐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승리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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