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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기독교 10대 박해

 

1.고대최초의 핍박사건

 

1) 64년,네로(Nero)황제의 치하에서

2) * 로마와 그 변두리에서만 발생.

* 기독교인들이 로마방화의 희생양이 됨.

* 기독교인들을 불태워 네로 황제의 정원을 밝힐 정도.

3) 주요 순교자 - 바울, 베드로

 

2.두번째 박해

 

1) 약 90-96, 도미티안(Domitian) 황제치하에서

2) * 주로 로마와 소아시아지방

* 황제신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해받음.

3) 주요순교자 - 로마의 클레멘트, 요한(밧모섬으로 유배)

 

3.세번째 박해

 

1) 98-111, 트라얀(Trajan) 황제치하

2) * 산발적으로 번짐

* 애국심에 대해서 의심받던 다른 단체들과 함께 수난당함

* 기독교인들은 발견되기만 하면 형집행당함. 그러나 쉽게 발각되지는

않았음.

3) 주요 순교자 - 이그나시우스, 시므온, 소지무스, 루푸스

 

4.네번째 박해

 

1) 117-138, 하드리안(Hadrian)황제치하

2) * 산발적으로 번짐

* 트라얀 황제의 정책이 고수됨

* 기독교인에 대해서 거짓 증거하는 자도 처벌

3) 주요 순교자 - 텔레스포루스

 

5.다섯번째 박해

 

1) 161-18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Aurelius)황제 치하

2) * 황제 자신이 스토아철학자였기에 기독교를 반대함

* 자연재해의 원인이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비난함.

3) 주요 순교자 - 순교자 저스틴, 포티누스, 블랜디나

 

6.여섯번째 박해

 

1) 202-211,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usSeverus) 황제치하

2) * 기독교에로의 개종이 금지

3) 주요순교자 - 레오니다스, 이레니우스, 페르페투아

 

7. 일곱번째 박해

 

1) 235-236, 트레스출신의 막시미누스(Maximinus)

2) * 기독교 성직자를 처형하라고 명령.

* 기독교인들이 암살당했던 전임황제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박해받음

3) 주요 순교자 - 우르술라, 히폴리투스

 

8. 여덟번째 박해

 

1) 249-251 ,데키우스(Decius)황제치하

2) * 처음으로 제국전역으로 박해가 번짐

* 황제신 외의 다른 신에게로의 경배가 금지

* 이교주의에로의 열정적인 복귀는 기독교를 박멸하고자 함.

3) 주요 순교자 - 파비아누스, 예루살렘의 알렉산더

 

9. 아홉번째 박해

 

1) 257-260, 발레리안(Valerian)황제치하

2) * 기독교인의 재산 압수

* 기독교인의 집회 금지

3) 주요 순교자 - 오리겐, 키프리안, 식스투스2세

 

10.열번째 박해

 

1) 303-311, 디오클레티안 갈레리우스 (DiocletianGalerius)황제 치하

2) * 이때가 최악의 박해시기

* 교회들은 무너지고, 성경이 불태워짐

* 모든 기독교인의 권리가 정지됨

* 기독교인은 이교신에 대한 희생제물이 됨

3) 주요 순교자 - 마우리티우스, 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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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침례교도

 

   1638년 末頃에 칼빈주의 신학을 견지하면서 신자의 침례를 실행한 회중이 생겨났다(이들을 “특별 침례교도”라고 함). 이 침례교도들은 영국 최초의 독립파 회중에서 생겨났으며 그들이 언제 침례교도의 모든 견해를 받아들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청교도적 방식으로 교회의 원칙들을 본 급진적인 입장은 처음에는 교회를 함께 모인 공동체로 이해하였으나 후에는 오직 침례를 받은 신자들 만이 그 견해에 적합하다고 보게 되었다.

 

   초기의 침례교도들은 네덜란드의 메노파와 관련을 맺었었고, 영국 분리주의자들 사이에서 생겨난 사도적 교회의 유형을 추구하려던 양심적인 탐구에서부터 생겨났다.

이러한 초기의 침례교도들은 교회와 국가사이의 관계에 대한 당시의 논쟁에 끼어들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17세기 중반에 제기 되었던 천년왕국설에 대한 다양한 논의에 관련되었다.

 

   챨스1세에 대한 의회에 반대가 강렬해 지고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게 되면서 크롬웰의 승리군은 의회의 국가장로회주의(State-Presbyterianism)와는 다른 종교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독립교회와 침례교회는 군 지도자들과 군인들의 지배아래 놓이게 되었다. 크롬웰은 국교회의 존속을 허락하였으나 침례교도, 독립 교회신자, 장로교도, 비왕당파 국교도는 그 국교회 내의 성직자로서 활동하게 했다. 국교회와 분리해서 예배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평화를 깨뜨리지 않는 한 분리하여 예배를 드릴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어떤 침례교도들은 국교회 내의 직분들을 받아드렸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계속 독립적으로 행하였다.

 

   침례교도들은 정치적 공백기간 중에 엄청난 세력을 확보하고 국가의 영향을 미치는 초창기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왕정복구 이전에 이르러서는 퀘이커파와 같은 더 급진적인 파에게 교인들을 빼앗기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제 5왕당파의 혁명적인 견해들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임으로서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였다. 이 침례교회 중에 지역적 독립을 주장하였을 때 그것은 그들이 추구하였던 바 국가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였다. 그들은 지역 회중으로서의 완전한 자격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회중 간의 상호 원조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초기의 일반 침례교도 사이에는 총회를 세우게 되었고 특별 침례교도들은 지역적인 연합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나 권징 문제를 논의 하거나 혹은 “침례교도의 관점”을 확립시키기 위한 공적인 협의회를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별 침례교회 모임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논의 되었다 : 교회의 모임, 신자의 침례, 침례받지 않은 자와의 교제, 목사의 장립, 성직의 유지, 치안 판사의 위치, 선교, 예배 의식의 사용 문제 ( 예배시의 음악 문제, 떡을 떼는 것, 시편 찬송, 세족식, 환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 ),교회의 권징, 배제시킬 수 있는 근거와 방법, 가정의 의무와 관계 등이다.

 

   1660년 경까지 거의 3백여 개의 일반 침례교회와 특별 침례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왕정복구 후 국가는 25년간 간헐적으로 핍박을 하였다.윌리암과 메리가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침례교도들은 단지 한정된 부분에서만 묵인을 받게되었다. 39개 조항의 중요 내용을 찬성하는 삼위일체 신앙의 숭배자인 신교 비국교도들이 비록 형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압제의 법은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적인 견해에 관하여는 광범위한 관용책이 생겨났다. 비국교도들과 영국 국교도들은 모두 종교적인 활기 속에서 쇠퇴기를 견디어 냈다. 반면에 일반 침례교는 장로교처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던 아리안주의의 확장을 위해 희생을 당하였다. 18세기 말 경에 많은 침례교도들은 그들 자신을 적어도 유니테리언파라고 부르고 있었다.

 

   반면에 특별 침례교도들은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해 과도한 저항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개인의 도덕 행위와 복음 전도가 모두 “과도한 칼빈주의”(hyper-Calvinism)라고 알려진 것 속에서 방해를 받았다. 침례교도는 대각성 운동에 의해 나타난 새로운 삶에서 즉시 유익을 얻을 만한 위치에 있지않았지만 몇 차레의 운동은 침례교를 각성하게 하였다.

 

   1755년 레이세스터셔 지역의 노동자들이 침례교도가 되었고 단 테일러(Dan Taylor)가 형성한 교회와 더불어 일반 침례교회와 함께 “일반 침례교 신연합을 1770년에 형성하였으며 게속 확장되어갔다. 1785년 케터링의 Andrew Fuller가 만민이 받을 만한 복음(The Gospel Worthy of all Acceptation)을 발간 했을 때 특별 침례교에서도 새로운 생명의 운동이 찾아왔다. 그는 칼빈주의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선교적 신학이라고 주장하였다.특별 침례교는 18세기에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당시 그들의 생활은 청교도와 복음주의 사이의 논쟁을 보여주고 있다. 단 테일러의 열정주의를 반대하던 일반 침례교도들은 유니테리언파로 빠지게 되었다. 또한 복음주의적인 올바른 힘을 거절하고 성만찬에 그들의 회원만 용납한 특별한 침례교도들은 ”엄격한 침례교도“가 되었다.

 

   풀러는 1781년에 그의 저서를 완성했으나 4년간이나 출간을 주저하였다. 1784년 그는 미국의 신학자 Jonathan Edwards(1703-58)의 사상을 영국의 종교적 상황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풀러의 동료인 John Sutcliffe는 노댐프튼셔의 침례교도들에게 ”기도에의 부르심“(Call to Prayer)을 출간하였다.1792년에 침례교 선교회가 창설되었다. William Carey(1761-1834)와 John Thomas가 이 선교회의 최초의 국외 대표자가 되었다. 1812년 특별 침례교가 보다 더 일반적인 연합을 바람직하게 수행하였고, 복음선교회가 탄생하였으며 교파적 조직의 선교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침례교 연합회(The Bapatist Union)가 형성되기까지는 그 후 20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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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사 개관

 

목차

 

◎서양고대문명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고대 문명의 발전과정/ 고전고대란? 1. 첫째-지역, 공간적인 물음/지중해 세계의 개념2. 시간적인 구분

 

◎그리스-로마사 시대구분

그리스사 시대구분/ 로마사 시대구분 (BC 8세기-AD 5세기) a. 로마공동체CIVITAS의 탄생과 왕정기(BC753-509) b. 공화정 초기와 중기(509-2세기초) c. 공화정후기 (B.C 2세기-1세기) d. 로마제정 BC 1-A.D 2세기(제정전기) e. 제정후기(3-5세기)/ 중세와의 경계

 

◎그리스의 문화

문화창조의 원동력/ 그리스 문화의 특징/그리스문명의 세계사적 의미와 교훈/ 그리스-로마문화의 차이점

 

◎로마제국의 세계사적 의미

로마발전의 배경 1. 로마정신2. 로마의 외형적 발전요인/ 로마문화의 특징

 

◎로마제국의 문화사적 역할

로마제국이 문화에 끼친 영향 1. 로마가 헬레니즘사상에 끼친 직접적인 영향 2. 그리스와 오리엔트가 로마에 끼친 영향 3. 정치와 문화의 융합

* 헬레니즘의 매개자로써 마호멧트 교도(아랍인)

 

◎그리스문명의 성립과 발전

1.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문명개요 2. 크레타문명 개요 3. 미케네문명 개요

 

◎그리스문명의 성립

1.그리스인의 이주  2. 폴리스의 성립 (B.C.8-6세기) 그리스의 사회  3. 폴리스의 구조  4. 아테네와 스파르타ㄱ. 아테네  ㄴ. 스파르타

 

◎그리스 세계의 발전

1. 페르시아 전쟁(B.C. 492-479: 3차)과 아테네의 발전 2. 아테네의 황금기 3. 펠로폰네소스전쟁( B.C. 451-405)  4. 폴리스의 쇠퇴와 종말 *그리스 도시국가의 몰락원인 

 

◎그리스 문화

그리스의 문화의 특징 *신화와 종교 /그리스 신화/ 그리스종교 /그리스 철학과 정치사상/ 관념론의 발전/ Socrates (470-399)/ Platon(427-347)/Aristoteles(384-322)/ 문학 및 연극과 예술 /그리스문학/ 그리스 연극 /그리스 미술 및  건축과 조각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1. 알렉산더 대왕의 업적과 제국의 분열  2. 헬레니즘시대의 사회와 문화 정치, 경제/ 문화/ 현실주의사조

* 로마의 지중해대국 발전과정/로마의 대외정책

 

◎로마제국의 흥망사

1.  로마공화정의 발전 a. 로마공동체CIVITAS의 탄생과 왕정기(753-509) b. 공화정 초기와 중기(509-2세기초) 2. 로마공화정의 성립 3. 로마의 반도 통일 4. 로마의 발전/ 로마 시민공동체의 해체(공화정후기 B.C2세기-A.D. 1세기) *지중해의 세계 개관/ 로마의 대외정책/포에니 전쟁(Punic War 264-146 B.C) 5. 로마공화정의 변질/로마사회의 변질 6. 로마의 새로운 질서/ 3두정치/제1회 삼두정치/ 케사르의 개혁/제 2차 삼두정치/악티움해전 7. 로마제정의 발전  * 로마의 평화 Pax Romana 8. 제정시대의 사회  9. 로마문화와 기독교

 

◎로마법의 기원과 발전

로마법/ 만민법/시민법과 명예법/공화정시대/고전시대/제정후기/ 동로마 법률학교와 고전주의의 부활/중세의 로마법(주석학파)/로마법계수운동

 

◎로마제국의 붕괴원인

정치적 원인/황제의 계승문제/ 군대의 조직력약화/군대의 질적 변화/ 정치적 변화/게르만의 이동/ 게르만의 침입/게르만의 이동에 따른 정치경제적 변화/ 경제적원인 (근본적 원인)/로마의 경제제도/정신문화적원인/기독교의 성장/ 기독교박해/기독교의 성장과정/사도 바울의 등장/ 유태교의 쇠퇴/교부시대

 

◎이슬람제국과 비잔티움의 발전

  

◎서양고대문명

 

서양 고대문명? 3가지 문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스문명, 헬레니즘 시대의 문명, 로마문명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서구 문명의 양대 기본적 토양

그리스-로마적 전통/ 유대-기독교적 전통; 현세주의 물질문명/ 초현실주의 정신문명; 인간주의/신본주의; 낮과 밤의 이질적, 대조적이지만 상호보완적 관계

  

고대 문명의 발전과정

1.에집트-메소포타미아, 오리엔트문명에 세례를 받고 2. 고유한 독자문명 (그리스 문화를 중심)을 창조: 오리엔트의 지나친 종교와 신화적인 면에서 탈피.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중시, 자연과의 조화의 세계를 추구. 3. 그리스 문명은 다시 오리엔트문화와 재접목(헬레니즘의 문화로 계승)  4. 로마문명으로 계승 발전 (헬네니즘+기독교문명)

  

고전고대란?

-18세기 말 독일 낭만파운동의 신조어: 그리스-로마시대와 동일-르네상스 이후의 가치관과 역사의식의 소산: 그리스-로마세계= 고대사회-19세기부터 그리스-로마 역사를 총칭하는 말 (문화, 문명사적 의미의 확대해석)-특히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음: 고대-중세-근대의 구분(서구 보편문명사적 관점)사회경제적인 요인, 소유형태, 생산방식, 사회구조에 주목한 사회경제사적 관점 

  

1. 첫째-지역, 공간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서양 고대를 개관할 수 있다.

 

서양고대사? 

지중해의 역사와 그 주변지역과의 정치적, 문화적 관계로 생성 발전된 역사를 말한다.  *즉 서양고대사는 지중해 세계의 형성과정이 씨줄역할을 하며,  그리스로마사회의 내적 발전이  날줄역할을 하면서 짜여진 역사와 문화를  뜻한다.

  

*지중해 세계의 개념

특징 -그리스-로마사의 동질성과 연속성을 포괄하는  하나의 역사단위-지중해의 세계는 작은 문명으로부터 출발 지중해 전체를 포괄하는 세계제국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며, 주변부의 다른 문명과의 관련 속에서 고유한 전형적인 제도와 이념을 발전시켰다. 예) 시민공동체, 민주주의와 노예제, 자유와 정의의 이념  -이지역의 내적 통일은 제 민족적인 특성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문화교류를 통해 이루어 졌다. 

  

*고대세계의 통일사상은 정치적, 군사적 통일이념이 아니라, 항상 문화적 영역 안에서 가능하였다.  *고대세계란?   역사적인 통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직,간접의 바다와 국경을 넘어서는 일종의 정치적 문화적 교류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특히 -지중해의 해양적 지리적 특수성이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스-로마가 지리적으로 오리엔트와 다른 면 (자연적 조건: 지중해식 기후 여름에 고온건조, 겨울: 온난다습. 해상을 통한 교통수단이 발달* 공간적으로 엄청난 동서팽창:  스페인부터 (지불롤터해협) 프랑스연안-베네룩스-영국본토-북부아프리카(이집트포함)-다다넬스- 소아시아(터키) 흑해, 시리아, 팔레스티나-페니키아-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이라크) 페르샤(이란), 서파키스탄, 카자흐스탄, 아프카니스탄, 간지스강유역 까지

  

*알레산더대왕과 카이사르의  세계제국의 이념을 달성키 위한 공간으로서의 지중해의 세계를 연상하라. 알렉산더대왕: “내가 만약 더 젊었더라면 인도까지 제패하였을 터인데...” 그의 이름에 따른 수많은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오늘까지 존재한다. 그의 제국: 나일지역부터-겐지스 지역까지 확대-중세이후  인도제국 및 중국의 영향권인 카시미르-타슈켄트지역이 아랍, 모슬렘세력에 대항한 점을 주목하라. 로마와  카시미르에서의 예술의 상호관련성을 생각해 보라. 

 

2. 시간적인 구분

 

고대 연구의 문제점: 초기 소아시아와 이집트 문명과 깊은 연관시켜 파악해야 한다.

 

중세와의 경계

-3가지 모두 정치적, 교회사적인 의미-니케아 종교회의 325, 훈족의 침임(375), 서로마제국의 멸망(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한 로물루스 아우구수툴루스의 폐위 476):  495년*중세란? 고대문명의 단절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 고대문화, 고대국가, 고대사상의 종말  -정치세력의 새로운 그룹화(지방 세력의 등장), 새로운 사상과 가치관이 형성(기독교),   새로운 경제시스템(봉건제도)

 

6세기 말/ 7세기 초 중세적인 요인들이 결정적으로 나타남-572년 랑고바르덴족에 의한 파비아점령-634 아랍인에 의한 서구침입 (마호메트 사후 2년 동유럽을 넘어). 이에 따른 영향: 오리엔트의 커다란 세력에 대항하는 서구적인 헬레니즘문화-칼 마르텔: 칼 대제의 할아버지: 732년 투르와 프와티에 (파리근교)에서 아랍세력을 격퇴-칼 대제는 새로운 서구에서의 황제등극 800년*중세의 정치적 역사: 비잔티움, 로마교황, 황제의 3파전의 양상으로 발전 

 

◎그리스-로마사 시대구분

 

그리스사 시대구분 (언어적)


1. 그리스 자유국가시대 (BC 8-4세기)

해외식민시대:(도시국가의 형성-정치제도가 급속히 완비되는 시기)  폴리스(정치적 단위): 도시국가( 시민의 다수는 농민): 근대적 읍수준 100-200개 정도수준.  암흑시대 (BC 10-8세기) 이후 생성. 2. BC 6-4세기: 페이시스트라투스-클레이테내스, 펠리클레스 전성기: 황금기(그리스 문명)알렉산더에 의한 멸망

 

II.마케도니아시대: B.C. 338-146

BC4-3세기: 정치적 쇠퇴기: 문화적 반전기(헬레니즘의 영향) 마케도니아의 통치시대: 클레오파트라의 사후 로마에 의한 이집트 병합까지 (악티움해전 BC 27년)


II. 로마제국의 시대에 포함 (BC 146 이후)

  

로마사 시대구분 (BC 8세기-AD 5세기)

  

a. 로마공동체CIVITAS의 탄생과 왕정기(BC753-509)

귀족이지배한 도시공동체-3000년경 인도-게르만의 일파: 이탈리아인이 정주시작-기원전 8세기 티베르강 유역 라틴의 작은 촌락 로마가 건설(라틴인)-초기 에트루리아Etrurians에 지배이후 독립도시국가의 형태를 유지 510년경부터:  이후 1000년의 세계제국의 수도로 변모-그리스문명의 영향(종교,  제도, 건축, 도로건설, 도예)-부족국가: 씨족Gens, 종족Curia 부족Tribus으로 구성  사회적 신분: 혈통귀족Patricii 평민Plebs 예민Clientes 노예Servus

 

b. 공화정 초기와 중기(509-2세기초)

로마시민공동체의 성장  -초기로마: 로마공화정은 6세기이후-귀족(대토지소유)이 실권장악-통치와 군사권은 임기 1년의 2명의 통령Consul-전권은 귀족대표기관인 원로원Senatus이 장악-평민: 중소농민이 주축, 참정권이 박탈

 

c. 공화정후기 (B.C 2세기-1세기)

로마시민공동체의 발전 및 쇠태-포에니전쟁: 반도통일이후 (지중해진출모색) 1차-3차: B.C 3-2세기-지중해의 세계는 당시 군웅활거시대  알렉산더사후 중동, 이집트,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페니키아의 카르타고로 분열   로마의 지중해 진출의 결정적 방해요인 1-2차 3두정치: 케사르, 케사르 사후 BC 1세기

  

d. 로마제정: BC 1-A.D 2세기(제정전기)

Pax Romana시대(1-2세기)  시민공동체적 요인이 해체기*아우구스투스 시대(옥타비아누스)BC 27년  -내란과 무정부적 혼란방지를 위한 Princeps(원수정)수립

Princepatus: 19세기 몸젠이 명명한 정치체제  Augustinus: 혼합정부체제(원수정) -원로원과의 타협  대권장악: imperator: 군통수권자. Augustus(존엄,지존)의 칭호: 로마  황제에 등극-그는 독재자가 아닌 로마시민의 원수  -Principatum(지배체제): 로마공화정의 변질. 귀족정이 아닌 일인지배 (원로원의 기능쇠퇴)속주의 총독의 사병화 금지(연금제실시, 감독관파견) 상비군과 친위대창설: 국내질서유지. 도시정비: 상수, 신전, 목욕탕, 도로 정비-45년간의 치세: 혼란과 무질서를 추방한 로마의 평화시대가 열림 A.D 1-2세기: 네로이후 4황제 마르셀리우스황제까지

  

e. 제정후기(3-5세기)

3세기 군인황제시대: 235-285 군대가 개입하는 황제옹립과정에서 내분과 대립-제국의 통합과 황제권에 치명적결과*전제주의 정부형태: 3세기: 부패와 타락(금권정치): 군부의 등장: 황제의 등극을 좌우:   동서의 야만인의 침입, 혼란: 군사비의 증가, 질병이 만연*정치적 변화두황제의 노력: Diocletianus 284-305, Constantinus 306-337   Augustinus: 혼합정부체제(원수정)를 마감, 절대권력체제로 전환.  제국의 통합유지를 위한 중앙집권적 권력국가(관료제적 통제강화)-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제국개편  -강력한 황제권력을 유지: 관료제, 군제를 강화 공화정적인 요인을 일소, 통일적 군현재도를 개편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에서 전제적 군주정(Dominatum)으로 변질

  

◎그리스의 문화

 

문화창조의 원동력

 

ㄱ. 폴리스체제와 민족주의적 융합-엄연한 정치적 독립국가, 종교공동체이며 혈연적 전사공동체ㄴ. 진취성과 개방성 (그리스인의 지중해 진출과 정복사업) ㄷ.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ㄹ. 조화와 균형의 미덕(학문과 예술에 반영)

  

그리스 문화의 특징

도시국가의 자유민 중심의 문화( 다른 문명의 군주의 지배와는 무관) - 개인의 창의성 존중 (독창적인 개성을 중시하는  문화업적은 지속적으로 서양문명에 큰 영향)

(한계: 폴리스의 생활은 문화와 사상을 제약,  폴리스적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아테네/스파르타 (개방/패쇄)-마케도니아시대에 보다 세계적인 그리스문화로 발전 (헬레니즘)

 

인간이 만물의 척도, 우주의 중심(인문주의,) 인간중심주의/합리주의(계몽사상)/개인주의/자유주의/민주주의등 로 발전해 나갔다.-그리스인의 종교: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신(인간과 공존)-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시대로 전환 (B.C, 6세기이후)-인간중심주의: 합리주의 정신의 터전으로 발전  -대립과 투쟁이 아닌 균형과 조화  (그리스 예술문화양식: 미적개념 서양의 전통)-개인중심주의, 이성에 바탕을 준 계몽사상: 미신, 관습, 권위로부터 인간해방(인본사상)

 

그리스문명의 세계사적 의미와 교훈

 

1.  최고의 인간주의 역사와  공동체주의의 흥망의 역사: 비판점:군사적, 물리적 힘에 의한 끝없는 침략과 정복사업을 추진한점.  그리스 폴리스문화(공동체문화)는 외부와 내부의 적대투쟁관계에서 형성, 발전, 몰락.  침략과 정복의 민족역사는 또 다른 침략과 정복으로 멸망하는 실례

 

2. 폴리스체제의 교훈:  노예제도, 시민계급의 폐쇄적 특권의식, 빈부격차, 퇴폐타락의 향락문화:  폴리스체제를 유지, 강화한 반면, 약화와 유지불능 상태를 연출3. 그리스적 한계:  공동체의식의 쇠퇴와 민주정치의 폐단 (중우정치):도덕성과 질서파괴는 자멸한다는 교훈: 민중주의, 다수의 횡포, 무절제와 권력남용,소수계층에 대한 추방 

 

그리스-로마문화의 차이점

그리스-로마: 자유-질서, 주지주의-주의주의, 서양의 동방과 서방(헬레니즙의 2대기조). 그리스-폴리스적 한계(민족통일 실패)/로마-세계제국의 건설: 배타적 폐쇄적/호의적  개방적. 그리스 (유럽문명의 기본적 개념을 착안)/로마인의 정신; 제국창조의 원동력(국가질서)

 

◎로마제국의 세계사적 의미

 

“로마는 하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1. 유구한 역사발전 속에서 세계제국을 건설하고 장기간 지속시킴 2. 그리스문화를 다음세대 또한 여러 다른 세계에 전달시킴. 특히 지중해의 세계라는 역사단위를 창출하고 발전시킴. (지중해의 특유한 문화가 공유하는 세계라는 의미보다는 로마인의  역사적 과업에 해당되는 개념으로 해석됨.)  제국은 로마의 평화에 의해 유지된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였던 로마제국:  로마가 멸망한 이후 로마와 같은 통일된 세계로 다시 정치적 통합을 유래는 역사상 찾을 수 없다.

  

로마발전의 배경

 

1. 로마정신

로마인의 사고는 로마정신에 깃들어있다.  그리스인은 폴리스 개념(민족공동체내의 자유와 분립주의)에 집착한 반면, 로마인은 “세계는 오직 하나의 폴리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자 하였다. 즉 로마제국내의 각 민족의 조국들이 있었다. 따라서 로마정신은 출생과 인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심도시로서의 로마의 역할을 중시하였다. 거대한 영토를 하나의 폴리스로 만든 것이 바로 로마제국의 의미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경제, 하나의 행정만이 존재하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법률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리스인(Hellas)는 자신이외의 모든 이민족을 야만인 (babarlos)으로 취급하였다. 하지만 로마인은 비로마인과의 관계(특히 법률체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즉   로마인은 그리스인과 다르게 배타적, 폐쇄적인 면을 금기시하여 로마의 울타리는 개방적이었다.

 

2. 로마의 외형적 발전요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의미로 상징된다.

1. 도로망의 정비는 거대한 제국을 지배하는 최대의 비밀무기인 셈이다. 이는 초기부터 정치적 군사적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개인의 상업적 목적은 결코 아니다)

2. 도시의 정비는 라틴화된 로마도시의 건설을 뜻한다. (경기장, 신전, 목욕탕, 학교 및 공공시설, 하천, 교량 등). 로마인에게는 도시문명의 외향적 확대를 찬양하는 정신적 사고가 두드러진다.

3. 농업의 중요성(농민생활의 실체). 로마제국의 경제적 기초는 농업에 있었다. 평균적 도시의 주요산업도 농업 및 상공업이다. 당시 상공업을 통한 과학기술혁신보다는 농업의 중요성이 도시경제의 기본으로 자리잡고 있다. 로마인의 제국주의적 착취와 약탈, 즉 전쟁과 정복사업을 통한 노예제에 의존한 농업중심의 경제체제가 바로 로마제국의 원동력이었다. 즉 정복과 전쟁이 종료될 때 농민에게는 치명적 손상을 끼치면서 경제대국의 한계성을 경험하여야만 하였다. 결국 로마의 대토지소유제는 소작제를 취함으로써 농민의 불만과 고통은 증가되었고, 제국 말기에는 이미 봉건제적인 요인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로마문화의 특징

로마의 그리스 정복은 무력적, 정치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문화적으로 로마는 그리스에 정복을 당한셈이다. 그리스인은 로마인에게 학술과 예술분야의 스승이며, 로마인은 그리스문화의 충실한 모방자였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실천적, 실용적인 사고로 무장하여 현실적인 분야에서 대단히 독창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예: 조직적인 대단위 토목, 건축사업)

 

1. 로마공화정, 로마제정의 성립과 발전을 통해 정치와 문화의 통합에 의한 세계통치 즉 세계제국의 건설을 성사시킴. 따라서 로마 최대의 문화사적 업적을 달성하였다. 이는 진리탐구, 예술적 창조 보다는 현실문제 해결을 중시한 로마문화를 대변한다.

2. 그리스문화를 계승하여 서유럽에 전달함. 또한 기독교를 보급하여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유럽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침

3.  인간성(humanitas)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적용함. 그리스인은 보편적 인간사상을  창제하였다지만,  한계는 자신과 동포만을 포함시킴(그리스적)-로마인: 인종, 종교, 민족, 인습에 차등화정책을 인정하면서도, 공통적, 보편적 인간성을 인정. 평등, 인도주의, 박애주의(알렉산더대왕이후 뿌리내림). 이를 조직적으로  법제화한 것은 로마 인간성의 특징이다.

4. 로마법은 가장 뚜렷한 문화적 특징을 대변한다. 최대의 문화유산으로 로마인의 유구한 정치활동 및 체계를 상징하며 거대한 제국의 통치와 질서를 유지하는 골격이었다. 현제까지 영속한 공헌을 주목하라. (한국의 법질서도 로마법에 기인한다.) 로마인의 국가생성의 힘으로써 로마정신은 로마법에 고스라니 담겨있다. 로마법은 서구의 정치적인 생성의 초석이었다. 로마정신은 서양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정치적, 문화적 요인으로 제시하였다.

 

◎ 로마제국의 문화사적 역할


1. 초기 로마는 헬레니즘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그 정도는 미비하였다. 2. 로마제국이 헬레니즘세계( 그리스와 동양의 서반부)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고, 지속적이었다. 3. 로마의 평화시대는 문화를 보급하는데 큰 의미를 갖고 있으며,  로마인은 제국의 통합적 문화 이념에 익숙하였다.  4. 로마는 라틴화한 헬레니즘문명을 마호메트교에 전달되었다. 이후 이슬람세력은 그리스-로마의 지적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다시금 유럽문명의 성장과정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로마제국이 문화에 끼친 영향

 

1. 로마가 헬레니즘사상에 끼친 직접적인 영향

BC 2세기 그리스출신 역사학자인 Polybius는 로마의 대장군 小스키피오의 보호하에 포에니 전쟁사를 저술하였다. 그리스가 로마에 병합되자 다수의 그리스 지성인들은 점진적으로 로마화되었다. 그들은 로마의 정치적 현실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면서 그리스 문화를 로마에 전수시키는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다.

풀타크 (A.D. 46-120)는 <고귀한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전기>를 통한 영웅을 비교하여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융화에 공헌하였다. 로마는 황금시대에 그리스어를 사용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시대 이후 그리스의 예술, 사상, 철학적 전통은 점차 쇠퇴되었다.  

 

2. 그리스와 오리엔트가 로마에 끼친 영향

ㄱ. 헬레니즘 예술과 문학

로마인은 대체적으로 수송, 농업기술, 교양 등 우수한 그리스의 문화를 인정하였다. 포에니 전쟁이후 그리스어를 로마지성인이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리스 건축 및 조각 등 예술을 모방하였다. 로마인들은 로마 신과 그리스 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이는 로마인의 기원을 트로이에 둔 이유로 호머의 신화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로마의 철학적 토대는 물론 그리스 철학에 기인한다. 종합적으로 로마문화는 그리스문화에 기생체에 불과하며 독창성이 결여되고 새로운 과학의 발견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로마인의 실용전신은 무척 우수하여 도로, 조직적인 법전, 유능한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다. 로마는 헬레니즘문화에 깊게 융화되므로서 야성에서 지성으로 강건에서 유약으로 우둔에서 현명으로 전환하였다.

 

ㄴ. 반헬레니즘적인 종교와 미신

3세기이후 서로마제국에 대한 그리스의 영향은 급격히 감퇴되었다. 당시 로마의 지성인은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게 되고 로마문화는 크게 퇴폐적 성향으로 나타났다. 특히 군벌독재에 따라 문화적 가치는 크게 격하되었다. 군인황제의 시대 로마제국은 반헬레니즘적인 종교와 미신이 확고한 지지기반을 형성해 나갔다. (예: 알렉산더 대왕시대에 수입된 것과 유사한 종교인 페르시아의 미트라스교(조로아스터교의 토대)와 이교도의 미신 따위가 특히 군대계층에 널리 보급되었다.) 당시 유태교 및 기독교의 교리가 급속히 로마에 퍼져나갔다. 이후 콘스탄틴 황제는 군대의 대다수가 신봉한 기독교를 공인하는 고도의 정치적 수완을 보였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자리 잡는 과정에서 그리스적인 요인을 흡수하고 유태적인 요인과 융합된 점을 주목하여야한다.


3. 정치와 문화의 융합

로마의 정치와 문화는 그리스적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인은 정복자로 그리스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였다. 특히 정복자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은 그리스의 문화적 요인을 더욱 발전시켜나갔다. 로마제국은 보다 세계화된 Universality을 추구하고 있다. 로마는 군대에 의한 강압적 정복사업을 통해 서유럽의 라인강-도나우강 지역을 개화시키는 문화의 보급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로마인은 문명의 질보다 양을 보다 중시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4. 헬레니즘의 매개자로써 이슬람교도

7세기 예언자 마호메트의 후예들은 시리아, 이집트 및 북 아프리카지역과 8세기에는 스페인지역을 정복하면서 로마제국의 문명과 접하게 되었다. 특히 아랍의 지성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게 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등을 응용적 분석적인 방법으로 연구하였다. 대수(Algebra), Alcohol, Alchemy(연금술), Alkali 등 응용과학의 분야를 살펴보면 아랍인들의 유산은 그리스 것에 기인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의 자연과학을 응용하면서 천문학, 점성술이 발달되었다. 따라서 아랍인은 창조적 이라기 보다 응용적이며, 해설적이다. 11세기에 이르러 서유럽은 이러한 아랍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13세기 스콜라 철학의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바탕을 둔 이슬람철학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서양고대사 개관 2

 

◎그리스문명의 성립과 발전


그리스 문명은 서구문명의 근원적 발전적 토대이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받고, 특히 예술, 문학, 자연과학, 철학, 역사학 등의 학문적 기초를 제공하엿다. (탈레스) 철학과 과학은 동시에 발생하였다.

 

*문자는 이집트에서 B.C. 4000년 경 처음으로 나타났고 이후 바빌론에서도 발생하였다. 초기에 문자는 그림으로 유형화된 표의문자(오늘날 중국문자)로 사용되었다. 이는 수천년 후 알파베트 문자의 초석이 되었다.

 

1.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문명 개요

*양대문명은 유목민의 정착에 의한 농업문명.  이후 해상을 통한 상업활동, 철에 대한 약탈과 독점 등이 이루어졌다. 나일,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에 농경을 통한 정주가 시작되고 신과 같은 동격의 왕이 군림하게 되었다.

 

에집트의 종교는 다신교이며, 최고의 신은 왕과 친교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사제계급과 귀족계급이 상류층이다. 죽은자의 영혼은 육신으로 되 돌아온다는 사상를 굳게 믿고 있다. 따라서 시체를 미이라로 보존한다. 기원전 4000-3000초 셈족에 의한 정복의 역사. BC 1800년 팔레스타인 시리아지역으로  에집트문명이 전파되었다.

 

바빌론은 호전적 민족으로 설형문자를 사용하고 셈족에 의해 계승되었다. 종교는 풍년을 기원하는 사상에 기인하며 땅과 태양(여,남)등의 다신교 형태로 나타났다. BC 2100년 경 함무라비법전은 왕이 마르덕(신)에게서 받은 것으로 고대종교는 도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바빌로니아는 이집트와는 다른 내세보다는 현세의 행복에 초점을 두어 점성술, 마술, 점술은 물론 과학이 발달되었다. (1일=24시간, 원=360도 분할, 일식과 월식의 주기성을 발견 함) 후에 탈레스의 일식예언에 근거를 제공( BC. 585년)

 

2. 크레타 (미노아)문명 개요

서양최초의 문명인 미노아문명은  BC 2500년부터 1400년까지 11세기동안 독자적 예술을 만개하였다. 에게문명의 발견은 19세기 고고학의 성과로 혁명적인 결과이다.

 

Schliessmann(1822-1890)

슐리히만이전 그리스 고전문명은 완전히 베일에 가려졌다. 그는 청소년기 호메로스에 심취하여 트로이전쟁의 실체파악에 관심을 두었다. 그의 트로이 유작지 발굴로 B.C 14세기 그리스인의 크레타침공이 시적허구가 아님이 증명되었다. 1873년 트로이에 원정한 그리스인의 발자취를 추적하여 금은보화가 가득한 유적지 발굴한 이래 계속적인 미케네문명을 추적하고 펠로포네수스 반도의 유적지를 탐사함. 미노아문명은 BC. 14세기 그리스인의 침입으로 멸망함.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크레타의 유물은 에집트에 영향을 받았음이 입증됨.  크레타의 종교는 동물의 여신을 숭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문자 판독에는 다양한 이론이 많다. 성은 성벽이 없어 해상방위의 문제점이 제기된다.

 

이반스 경

크노소스 궁전의 유적탐사를 통해 왕국의 규모(부와 권력)를 짐작하였다. B.C. 1500-900년까지 미노아문명의 전통은 그리스에 남아 있었다고 판단됨. 궁전은 지진에 의한 3차례 파괴되고 재차 중건되었다. 미노아 문명은 BC. 1500년 최고조에 달함. 크노소스(Knosos) 궁전는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로 파악됨. 고대 그리스의 전통은 화려하였다. 이는 오리엔트 선진문명의 세례를 받은 해상문명이었다. 초기에는 오리엔트와 유사한 청동기 문명의 증거가 나타난다. 인종 문화면에서 아시아적 특징이 두드러진다. 예술, 특히 미술은 이집트적인 독창성이 강조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사실성과 역동성은 해상문화와 상업적 감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벤트리스

영국건축가 1952년 미노아문명 및 미케네의 최대유적지 크노소스궁전의 선상문자 B의 암호해독 (미케네문명 연구에 박차). 그리스어의 초기형태는 상형문자와 표음문자의 중간형태였음을 입증하게 되었다.

 

3. 미케네문명 개요

 

미노아문명의 쇠퇴는 BC 1400년 경부터.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인(도리아계통)이  크노소스 궁전을 점령한 이후 미노아 문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특징

미케네문명은 미노아문명울 계승하여 독창적 그리스문화의 성격을 완성하였다. 경고한 거석의 성벽문화는 군주권을 상징하며 벽화와 도기는 크레타문명보다 뒤지나 문화의 양상은 상무적이고 역동적이다. 왕의 무덤, 요새, 성곽을 통해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에 영향을 받았고 개방보다는 폐쇄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그들은 이방인의 침입에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호모의 서사시를 통해 알려졌다. 그리스어 사용은 점토판의 선상 B문자의 해독으로 오리엔트문명의 세례를 확인케 함.

 

미케네인은 그리스어를 최초로 사용한 주민으로 확인됨. 추측컨대 피라밋 구조의 사회였을 가능성이 있고 공납제(동의 공납)가 쇠퇴한 암흑시대가 도래하였다. BC 1100경부터 8세기까지 내란과 대외전쟁으로 그리스문화의 쇠퇴기를 맞는다. 이시기는 철이 동보다 더 중요하게 사용된 철기시대였다. 당시 지중해의 재해권은 미케네인과 페니키아인과 양분하였던 점에 주목하라.

 

미케네인은 말기 농경정착을 벗어나 지중해의 도서로 이탈리아의 연안으로 해상활동을 시작하고 약탈과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이집트, 페니키아해안, 시칠리아, 남부이탈리아등과 교역활동) 당시 국왕은 군사권, 사법권을 장악하였고 성직자는 제사장 역할을 담당함. 자유민은 농민 목축민, 수공업자 등이며 노예는 전쟁포로 하층계급이었다.

 

과연 미케네인이 최초의 희랍인인가?  BC. 2000년 경부터 남하하여 3차례에 걸친 침입으로 그리스에 정착함. 그리스인의 해상활동을 통한 결과는 우선 문자의 습득에 있다. B.C 1000까지 문자 사용이 미확인되었다. 페니키아인(시리아인과 마찬가지)은 이집트와 바빌론에 영향 받았고 해상무역의 주도권(지중해의 도시국가이전)을 장악하였다. BC 969-936 투르의 그리스인은 알파벳문자를 사용함.(이집트와 페니키아 문자에서 발달) 그리스 문자는 페니키아문자를 개발한 것으로 판명됨.

 
◎ 그리스문명의 성립


1.그리스인의 이주

미케네시대의 도리아인은 인도 게르만의 일파로 BC 1200-900년 미케네문명을 파괴하고 이오니아인과 대치함. 양대세력의 대치로 지중해 교역은 중단되고 문화의 쇠퇴기(암흑시대)를 맞는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상업을 통해 오리엔트문화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감. (예; 페니키아인으로부터 알파벳 전수받음)

 

2. 폴리스의 성립 (B.C.8-6세기) 

BC. 800년 경 그리스에는 지역마다 소규모의 정치조직이 형성되면서 그리스적인 국가, 사회, 종교의 기본적인 윤곽이 나타났다. 집주의 형성(Synoikismos)은 군사적 공동체 역할을 통해 외적에 침입에 공동대처하는 목적에 기인함. 따라서 집주에 의한 그리스적 정치조직은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되고 200여개의 도시국가(Polis)가 생성됨.

 

그리스의 지리적 조건: 험준한 산악과 해안선의 발달하여 영토국가보다는 소규모의 정치공동체가 용이함. 자연적조건: 산악보다 바다로의 진출이 용이하여 해상국가의 면모가 강화됨. 폴리스는 골짜기마다 작은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농경을 통한 정착문화가 형성되었고 식민지 확보를 위한 해상활동이 강화됨.

 

그리스의 사회

폴리스의 사회구성: 자유민, 외국거류민, 노예로 구성. 시민권은 성년의 남녀 자유민에게 부여 (부녀자 제외). 그리스의 대외팽창의 결과로 외국 거류민이 증가(병역에 종사). 피정복지의 노예제가 정착되었지만 인권, 재산권 모두 박탈됨. 사회제도와 계층은 공동체마다 다양하게 나타남. 일반적으로 노예제 도입, 자영농, 자유민이 등장함. 이오니아인의 정복을 통한 전쟁포로로 노예제가 정착됨. 인구증가, 생산력증대, 토지부족현상으로 폴리스 체제가 강화됨.

 

그리스 초기: 원시사회이며 혈연중심의 씨족사회는 다수씨족이 모여 대씨족(형제단)사회를 구성. 후기: 부족사회이며 인구의 증가와 농축기술이 발달됨. 토지의 사유화는 대토지 소유제로 변질됨. 부족계급의 구성: 사회적 양상이 복잡하여 부족간의 교류가 활발해 짐.

 

3. 폴리스의 구조 

도시중심 및 농촌과의 결합이 필수적.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폴리스의 당위적 목표는 “농업생산을 통한 자급자족”이라 주장함. 인구 1만의 독립된 정치기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성벽의 중심지와 성외곽의 농경지로 구분됨. 폴리스의 성내 중심부의 언덕은 아크로폴리스(Akorpolis)로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 그 아래에는 아고라 (Agora: 광장)로 시민생활의 중심무대이며 정치적, 종교적 행사 및 물건교환의 시장 역할을 함.

 

폴리스의 구성원: 성년시민들이 민회를 구성하여 정치적 권리를 행사함. 부녀자, 외국인, 노예는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박탈됨. Hellenes는 그리스인(Hellas: 그리스 땅)이며 Barbaros(이웃)와 철저히 구별됨. 그리스인은 여럿의 폴리스로 분열되었으나 공통의 언어와 문화유산을 통해 공동체의 민족유대의식이 강화되었고 올림픽경기나 동맹을 통해 잘 나타남. 새로운 해외 폴리스의 건설: 시칠리아, 소아시아, 흑해연안, 에게 일대로 팽창됨. 식민도시는 오리엔트문화의 영향을 받아 본토보다 더 자유로운 활동이 전개됨. 따라서 오리엔트지역과의 상업 및 문화교류가 활발해짐. BC. 8세기 중엽이후 귀족과 성장한 시민계급간의 갈등대립에서 시민세력은 경제적, 조직력을 갖고 해외로 진출함.

 

4. 아테네와 스파르타

ㄱ. 아테네

이오니아계 그리스인의 폴리스. 초기: 자연적으로 비옥하지 못함, 원시적인 왕정의 형태. 폴리스의 성립이후 토지소유의 귀족에 의한 귀족회의가 구성됨. Areopagos는 최고의 사법기관이며 (국가를 대표하는 민회는 의결 및 입법기관) 임기 1년의 9명의 집정관도 선출한다. (귀족만으로 구성) BC 7세기 이후 해상무역을 통해 눈부신 성장을 하여 황금기를 맞는다. 이오니아인은 BC 7세기경 리디아로부터 화폐가 도입되면서 경제가 활성화됨.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함. 모국과 식민지역간의 교역은 아테네의 은화가 국제적 통화로 자리잡음. 금은광산업을 통한 은의 축적은 화폐제도의 정착에 크게 기여함. 귀족 외에 상공인(자유인)의 정치, 사회적 발언권이 점진적으로 크게 향상됨.

 

적극적 식민 활동의 전개와 성패는 신분상승 및 몰락(노예화)을 유발함. 귀족에 대한 시민의 반항은 커져감. 농촌의 위기와 군대의 전술 변화로 BC 6세기이후 폴리스는 중무장보병의 밀집대형을 새로운 전술로 채택함. 애국심은 새로운 의식의 자각. (귀족정에서 참주정으로 변화) 즉 중소농민=중무장보병=능동적 시민의식이 강화됨. 폴리스의 정체: 군주정에서 귀족정, 폭군참주정, 민주정의 순서로 발전됨. 국왕은 이집트와 바빌론과 달리 절대권력자가 아닌 원로원의 자문을 중시함 (관례를 존중).  당시 폭군은 상속받지 않은 통치자를 의미함.

  

Drakon, Solon 집정관의 입법개혁: BC 621, 594-공동체의 분열에 대비함. (내란)  재산에 따른 시민을 4계급으로 등분하여 권리와 의무를 구분함. 부유한 시민층은 귀족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 금권정치(Tomocarcy) 실시이후 내분은 극심하여 솔론의 개혁은 실패함.

 

BC 561년 Peisistratos 의 참주정치(Tyranny):  대중의 지지로 귀족의 재산몰수와 토지분배가 성사됨. '비합법적인 권력 장악' 이었지만 아테네의 정치 및 문화안정에 크게 이바지함.

  

BC 508년 Cleithenes (클레이테네스: 반참주운동의 선봉장)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여 참주정치는 종말을 고함. (계층간의 분열이 원인) 평민과 연계하여 귀족의 권력기반을 약화시키고 민주혁명적인 개혁을 단행함. 행정구역 10개로 개편(10부족제), 500인 협의회를 창설하고 종래의 공동체적 혈연적 규제를 해체함. 170여개의 demos(행정구)가 성립됨. Democracy (민중: 시민에 의한 지배): 502년의 민주개혁. 당시 노예제는 민주정의 필수요인. 능동적인 정치참여를 제약하는 제도.

  

페리클레스의 전성시대: 정치적, 경제적, 정신문화적 전성기, 황금기. BC 492년에 귀족회의는 정치적 권한 상실.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의 실시(민회는 1년에 40회 집회: 전쟁의 포고, 조약의 비준, 세출 등 국정을 논의). 시민적 애국주의가 발전하여 동질사회의 성격이 강화됨. 그러나 부녀자, 노예, 비자유인은 정치참여를 배제됨. 중우정치의 폐단도 노출: 서민대중을 통한 직접정치의 한계. 펠리클레스 시민권법: 수당제의 재원은 제국주의와 구조적 결합됨. 비 그리스계 주민들(Barboroi: 스키타이인, 트라키아인, 프리기아인). 포로, 유괴, 매매가 성행함. 노예의 수는 전인구의 3분의 1로 상품화됨. -500명의 평의회(Boule: 행정을 감독하는 민회의 대행기관). 모든 관직은 추첨하여 결정함.

 

ㄴ. 스파르타

BC 8세기 메네시아 평원을 정복한 도리아인의 폴리스 (발칸남부에 침입). 선주민 아케아인을 정벌하고 이웃도시까지 세력 확장함. 7세기 초 스파르타시민단의 체제변화: 리쿠르코스(Lykurgos)법은 정치적 목적으로 지배를 강화함. 스파르타인 상호간의 토지소유의 평등을 유지함. *군사적 귀족정치: 정복민과 도리아인간의 불평등원칙. 지배계급에게는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실시. 피정복민을 다루기 위한 국가정책은 쇄국주의와 보수주의. 후에 스파르타 폴리스는 보다 민주화되지만 폐쇄적인 면은 강화됨.

 

 스파르타체제의 핵심요인인 homoioi (호모이오이:동등자들): 민회 구성원의 동등권, 균등한 경제권 토지의 할당을 보장함. agoge( 아고게:훈련제도): 직업적 전사를 위한 훈련제도. 출생 시 적격심사이후 60평생의 군사적, 사회적 교육을 12-20세에 받음. 명령복종의 예비 군사훈련 (20-30세에 받음). 병영생활은 30세 이상에 해당됨. 15인 이상의 공동식사제(시민자격요건): 동등의식의 강화목적. 헤일로타이제도는 아테네의 노예제와 유사하지만 스파르타체제의 필수적 요소이다. (아테네의 노예는 사유재산: 헤일로타이는 시민에게 할당된 국가의 재산) 노예와 자유민 사이의 집단: 2명의 국왕(군 최고사령관),  보좌기구인 장로회의(Gerusia): 60세 이상의 장로로 구성된 원로원의 기능. 민회는 입법기관으로 30세 이상의 남자로 구성됨. 감독관은 5인의 민회에서 선출되고 정사를 담당함.

 

◎ 그리스 세계의 발전

  

1. 페르시아 전쟁(BC 492-479)과 아테네의 발전

( 국제적질서의 개편무대) BC 6세기 중엽: 그리스인의 대외팽창기에 페르시아에 의한 오리엔트세계의 통일로 지중해의 페니키아세력을 제압함. 페르샤왕 다리우스는 해상권 장악 이후 소아시아, 이오니아 식민지(밀레토스)에 압력을 행사함.(세금을 요구) 이는 밀레토스 반란 원인, 그러나 실패함. 아테네의 후원하에 소아시아의 그리스계가 결속하자다리우스는 아테네를 응징코자 원정군 파견함. 페르시아 전쟁의 발발-1차 원정(492) 폭풍우로 실패, 2차 원정(490) 에게해를 넘어 마라톤에 상륙후 아테네군에 패배함. 3차 원정(480-479)은 다리우스의 후계자 Xerxes(크세르크세스)가 감행함.

 

결과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결속으로 스파르타군 격파하여 그리스 중부지역을 석권함. 그리스연합군은 스파르타의 지휘하에 페르시아 육해군을 패퇴시킴. 그리스인의 결속: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 후에 자유와 번영의 기반을 조성함. 전쟁으로 농민출신의 중방보병과 하층민의 수병 역할로 신분적 상승되고 시민대중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됨.


2. 아테네의 황금기

3대 특징-제국주의, 노예제, 민주주의.

 

당시 노예제는 보편적 현상. 민주정은 급진화됨. 해군력의 성장을 통한 하층시민의 군사화는 제국주의적 경향이 지배적. 페르시아 전쟁 후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해군동맹(Delos동맹)체결함. 참가국에 할당량이 정해짐: 군함, 자금, 인원 등. 아테네의 압력으로 동맹은 델로스 섬에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본부를 옮김. 이후 아테네의 독주는 동맹국의 반감을 삼. 아테네의 경제적 번영으로 문화와 예술의 발전(도자기, 공예품에서 확인).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페리클레스의 전성시대가 열림.

 

3. 펠로폰네소스전쟁( BC 451-405)

결과는 그리스 폴리스체제의 종말원인을 제공함, 전쟁 원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그리스세계를 재패하기 위한 쟁탈전. 스파르타의 승리에 따른 아테네의 해체. 델로스 동맹이후 아테네의 번영은 다른 도시국가와 반목케한 직접적 요인. 아테네의 다른 폴리스에 대한 강압적, 제국주의적인 면이 반영됨. 스파르타는 인근지역의 직접지배를 통해 시민단의 군사화를 통한 경제적 기초가 마련된 반면 아테네는 해외의 다른 폴리스에 대한 간접지배와 착취를 통한 시민단을 군사력으로 이용함.

 

폴리스내부에서 진행된 민주화의 수준과 범위의 차이점: 아테네는 정치적 법적 평등, 스파르타는 경제적 평준화에 성공함.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델로스 동맹의 반목이 전쟁의 직접적 원인. 코린트(펠로폰네소스 소속: 아테네의 경제침투에 위기감을 느김). 459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교전상태: 페리클레스에 의한 화해. 431년 스파르타의 전쟁 재개: 아테네의 해군에 의한 스파르타 포위에 성공하지만 피해는 극심.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이 페스트에 감염되고 병사, 펠리클레스도 희생. 이는 아테네의 몰락원인이 됨. 405년 아테네의 패배와 함락, 댈로스동맹의 해체, 스파르타의 패권이 확립됨.

 

4. 폴리스의 쇠퇴와 종말

스파르타의 불안정: 그리스 주도권은 Thebes로 이행되면서 무정부 상태에 빠짐. 스파르타에 의한 각 도시국가 통제: 감독관파견, 군대진주. 전쟁시 페르시아는 스파르타를 지원, 후에 테베 Thebes (반스파르타전선:코린트동맹)를 지원함. 371년 페르시아의 반격으로 스파르타는 패배함. 테베는 아테네, 스파르타에 이어 그리스를 재패하지만 국력은 쇠퇴되고 마케도니아 전제군주에 패배함. ( BC. 338년) 

 

그리스 도시국가의 몰락원인

ㄱ. 정치적 원인  -그리스 도시국가는 폴리스간의 투쟁대립의 연속 정치체계는 붕괴-그리스 문화권 밖의 마케도니아세력에 의해 몰락-그리스 세계는 분립주의와 패권주의: 폴리스의 자치와 그리스의 통일의 2대원리에서 힘을 소모

 

ㄴ. 그리스몰락의 경제적 원인(정복과 제국주의적인 요인의 감소)-자급자족은 불가: 지역의 80%가 산악: 식량은 수입(소아시아, 이집트등으로부터): 곡물, 광물, 노예-수출품: 과실:포도, 올리브  수공업제품: 모직물, 도자기, 금속세공품, 유리제조-수공업의 발달: 해상 상업활동의 활기. 금융업, 은행(예금과 어음교환)이 발달-경제적활동은 그리스 문화에 결정적 역할-그리스 경제는 노예제도에 기초(전쟁포로는 모든 경제활동에 주역)-B.C 4세기 이후 폴리스간의 내분으로 노예제도는 쇠퇴

 

5. 그리스의 문화

고대세계의 통일사상은 정치적, 군사적 통일이념이 아니라, 항상 문화적 영역내에서 가능하였다. 헬레니즘은 실질적으로 기독교문화의 정신적인 길라잡이 역할을 함. 유럽문명의 개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착안된 점을 주목하라. 예술, 특히 미술, 건축, 도예분야, 문학(희극과 비극의 드라마), 역사서술, 이오니아인들에 의한 초기 서양 철학 등. 그리스 문화창조의 원동력인 폴리스체제와 민족주의적 융합: 엄연한 정치적 독립국가, 종교공동체이며 혈연적 전사공동체-진취성과 개방성-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조화와 균형의 덕(예술에 반영)

  

그리스 문화의 특징

도시국가의 자유민 중심의 문화(다른 문명의 군주의 지배와는 무관). 창의성존중(독창적인 개성의 발휘의 문화업적은 지속적으로 서양문명에 큰 영향). 한계: 폴리스의 생활은 문화와 사상을 제약하여 폴리스적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마케도니아시대에 보다 세계적인 그리스문화로 발전함. (헬레니즘) 인간이 만물의 척도, 우주의 중심(인문주의를 중시함). 그리스인의 종교: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신(인간과 공존).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시대로 전환함 (BC, 6세기이후). 인간중심주의: 합리주의 정신의 터전으로 발전됨. ( 대립과 투쟁이 아닌 균형과 조화).  그리스 예술문화양식은 바로 서양문명의 미적 전통이다. 개인중심주의, 이성에 바탕을 준 계몽사상을 보라. 미신, 관습, 권위로부터 인간해방을 모색한 인본사상이 그 중심이다.

 
신화와 종교 


그리스 신화

11-12세기 이후 그리스 반도에 거주한 이오니아, 도리아인등과 그 자손이 소유한 신화.

특징 

미노아문명의 영향을 받아 모계적 색조가 강함 (여신, 모신의 숭배). 신화는 종교와의 융합을 뜻함. 예: 아테네 여신-지리적인 영향으로 인한 이민족의 신화를 수용(셈, 힛타이드인등): 아프로디테, 아도니스신화-종합적인 국민적 신화체계를 이룸(예: 올림프스신)-종류: 우주창성신화(카오스-에로스의 원리), 신통신화(다신교적 영향)   인류창생신화, 홍수신화(제우스신등)

  

그리스종교

모든 문화예술의 상징적인 면을 포괄적으로 수용ㅎ마. 일반적 의미의 종교가 아닌 인간적인 것을 중시함. 그리스 비극은 종교와 깊은 연관을 맺음.(문학과 연극)-초기 그리스 종교: 자연숭배의 다신교(지중해 고대문명의 영향) 후에 점차적으로 신의 계보가 형성되면서 Olympus의 12신으로 확정됨 (호메로스의 서사시 Illias, Odysseia(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 Hesiodos의 신통기에 나타남.

  

그리스문명의 첫 열매 호머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

 

호머는 개인이 아닌 당시의 시인들이란 견해도 있다. 눈먼 시인 또는 다수의 시인으로 해석된다. 작품은 200년간에 걸쳐 완성됐을 가능성이 크다.( BC 750-550-서사시의 저자 연대 소재는 논란 ). 현존하는 호머의 시는 페이시스트라투스가 아테네 및 그리스전역에 확산시켜 사용함. (통치기간: B.C. 560-527). 미케네인의 트로이전쟁 에피소드: 일리아스-아킬레스와 트로이왕가의 싸움: 영웅의 분노와 사랑, 헥토르의 죽음을 묘사

  

오딧세이아-희랍전사 오딧세이아의 공상적 무용담, 모험(10년간 트로이 함락지를 유랑하다 고향의 아내 곁으로 돌아간 이야기)  무대: 올림프스 산의 신을 배경으로 한 신의 이야기: 신= 초인적 도덕적 인간상( 종교적인 면 약함)  -종교를 대표하는 올림프스 신에 대한 주제가 당시에 통용된 것은 아님. 등장인물: 포세이돈, 제우스: 신과 인간의 반반요소를 접목

 

호머의 종교는 일반적 의미의 종교가 아닌 인간적인 것. 그에게서 신은 귀족계급의 신이다. 농부를 위한 신은 아니다. 상류사회의 합리적 인간상을 그림.


그리스 철학과 정치사상 

 

BC 6 세기경의 이오니아인의 문화: 철학, 과학, 수학, 역사학 등이 생성되는 시기. 소아시아의 서안지역 이오니아 식민지에 밀레토스학파가 성립됨/ 자연철학적 바탕). 오리엔트의 문물을 전수받음. 그리스 정치사상에 영향을 끼침. 신화적, 시정적인 면에서 결정적으로 탈피한 철학자의 노력의 결정체. Thales: 신화적인 세계관탈피, 우주만물의 근본원리를 과학화에 시도.  만물의 근원은 물 Anaximandros: 아낙시만드로스: 원소Herakleitos 헤라클레이토스  불.Empedokles 엠페도클레스 4원소: 지.수.화.풍Demokritos 원소 및 원자의 기계적 결합 .Pytagoras 수와 수를 통한  조화

  

Sophist: BC. 5세기 중엽 아테네 민주정치의 번성기에 성행. 새로운 교양인이 요청됨. 정치, 사회적인 처세술: 수사학, 변론, 웅변술등이 성행함. 프로타고라스 (BC 481-411) : 주관적 절대성, 단순한 회의론자:  인간은 만물의 척도.  Hippias는 상대주의자

 

관념론의 발전 

Socrates(470-399)

회의론적 상대주의의 극복함(대화법). 인간의 독자적 절대가치를 기준으로 절대적 진리를 인식함. 도덕적 선의 개념을 파악함: 지덕합일설을 주장하여 인간과 우주의 원리를 밝힘. 개인과 도덕의 각성을 강조하여 정치와 윤리에 큰 영향을 미침. 

  

Platon(427-347)

아카데미아를 창설함. 참다운 실제는관념(idea), 현상은 관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관념론을 수립함. 정치사상의 확립은 플라톤의 노력의 성과. 펠로폰네수스전쟁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목격.  아테네정치와 도덕의 타락을 경고함. Republic 정의로운 국가란? 인습과 전통이나, 권력의 논리로 성립될 수 없다. 보편타당한 개인의 도덕적 토대위에서만 존제한다고 역설.  중우정치의 폐단을 지적, 철학자에 의한 도덕정치를 강조함.

 

Aristoteles(384-322)

알렉산더대왕의 스승. 이데아는 개개의 사물에 존재함. 경험주의의 창시자-논리학, 형이상학, 예술론, 정치학, 윤리학, 자연과학의 철학적 체계를 수립함. 만학의 아버지-개인의 올바른 삶은 개인의 정치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행동할 때만 성사된다는 판단. 법률에 의한 통치를 강조: 철저한 준법정신만이 혁명과 변란을 방지한다고 역설함. *Anaxagoras: 자연철학, 자연의 탐구: 천문학Hippokrates: 의학*미술가는 과학자( 해부학적 지식, 기하학, 물리학 등 응용)

 

역사학

Herodotos(484-425): 페르시아 전쟁사(사료비판의 영역을 개발)-Thucydides(460-400):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인과관계)-Xenophon 그리스사, 소크라테스의 변명

 

그리스문학

신화와 결부된 서사시가 시초. Homer: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그리스인의 생활과 전설을 묘사: 유럽문학에 시초). 헤이오도스의 <신통기>는  올림프스 신의 계보를 정리. <노동의 나날>을 통해 노동의 신성함과 귀족의 부정을 고발함. Sappho는 여류시인으로 인간의 내면세계의 서사시(연애고백)을 그림. 호메로스의 서사문학는 종교,윤리적 철학적 교훈시가 성행 (비극, 희극시인)-펠로폰네수스전쟁이후-미카도니아시대-헬레니즘시대는 산문의 전성시대: 소크라테스-플라톤시대: 수사학과 시학 등 문학이론 및 역사학이 발전 

  

그리스 연극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의 민중적 기반의 연극이 성행함. 연극의 기원: 534년 페이시스트라투스: 디오니소스 제전을 위한 연극제의 입상자들은 찬양, 노래와 춤, 인물에 대한 이야기 등을 묘사함. 酒신: 포도와 샘물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를 찬양함. 3대 비극시인인 Aischylos(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5세기 말 합창대를  배경으로 합창대장외 2명의 배우를 등장시켜 그 역할을 강조하였다는 설. Sophokles <안티고네>에서 호언장당하는 자는 천벌을 받으리라! Euripides 전설속의 인간과 신의 모습을 연극을 통해 형상화시킴.

 

주제와 연출방식 및 목적은 종교적성격: 반사실주의적, 상징적인 면을 강조.  예; 높은 구두신고, 가면 쓰고 장업시 낭송, 무용가을 곁들인 노래와 춤. 비극은 형식적이며, 종교제식적 (연극과 서사시는 발전).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에 관한 정의:“동정과 공포를 통한 카타르시스”*희극시인-Aristophanes 기사, 구름, 벌의 연극작품-희극도 종교적 축제에서 발생: 관객의 감성자극하는 해설형태의 연극

  

그리스 미술/ 건축과 조각

진선미의 균형과 조화의 사상을 추구함. 전체적으로 중용과 고요의 안정감, 즉 지성과 감성이 적절히 융합됨. 주제: 신화 및 종교 또는 시민의 일상생활. 폴리스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존경이 어우러짐. 전성기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 황금시대. 6세기 이오니아 밀레토스지역의 석제건축양식이 페르시아전쟁 이후 아테네로 중심지 이동.

 

파르테논신전: 대리석이용, 열주에 꾸며진 장식. Doria 도리아식: 남성적 장중하고, 실용적. 가장 오래되고 단순함. 기둥받침과 머리가 없음, 파르테논신전의 원형는 아테네 아클로폴리스 언덕에 있는 아테네의 여신의 신전. 파아디스의 지휘하에 신전 안팎의 조각품을 장식하여 그리스 조각건축의 정수로 평가됨. Ionia 이오니아식: 여성적, 우아한 장식미: 소용돌이 머리의 기둥양식으로 날씬함. 에레크테리온 신전. Corinth 코린트식; 화려함. 아테네에서 채택되지 않음 후에 로마인이 즐겨 사용함. 이오니아식의 연장(화사, 복잡함). 로마의 판테온신전

  

조각건축의 재료: 대리석, 청동 등. 조각의 기본특성은 이상주의로 미의 영원함을 상징함. 여인상등 신상이나 경기의 승리자의 상에서 균형과 조화의 인간의 육체가 소재로 채택됨. 나체의 사실주의적 아름다움을 찬양함. 조각의 주제는 제우신 등 존엄한 신에서 아프로디테, 에로스 등 청춘미의 신으로 옮겨감. 신적인 것에서 인간적인 주제로 이동( 에토시적에서 파토시적인 것으로 이동). 인체묘사에 최대한 관심을 둠. 해부학적지식과 원근법, 명암법을 이용함(물리학적 이론을 활용). 조각가:  Myron의 원반던지기. Phiadis(피아디스)의 제우스상. 회화: 현존하는 유물은 거의 없고, 다만 병, 항아리, 접시에 그린 것으로 추측.  프레스코화, 초상화가 성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짐.

  

◎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헬레니즘이란?

헬레니즘이란 그리스적인 것 (공동체와 도시적 제도와 문화)이 오리엔트세계로 이식되고 보급되며  오리엔트문화와  융합되는 현상 *드로이젠 `1830“-민족적 융합(그리스와 오리엔트)으로 처음사용-구조적으로 지배종속관계(정치. 사회적). 도시와 토착농촌과의 구조적 결합-이원적 구조: 그리스적 도시의 건설: 그리스 지배층과 정복지 상층지배층의 공통언어: 그리스어를 통한 문화적 국제주의의 확산. 피지배층은 토착문화에 강하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적 융합을 시도( 희랍문화의 사도를 자청): 종교적 편견을 존중: 희랍신과 정복민의 신들과 동격인 대우. 정신적인 우월성을 믿음*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복민이 노예화를 정당화. 반면 알렉산더는 유화책(혼인, 결혼정책: 정복지의 두 공주와 결혼). 다른 그리스 귀족들에게 모범-절대지배 복종관계는 무의미(세계주의적 견해): 스토아학파의 영향

 

1. 알렉산더 대왕의 업적과 제국의 분열

(로마제국 건설의 원동력 및 토대)-그리스 도시국가의 내분을 틈타 마케도니아의 남진(경제적, 문화적으로 미개)-필립2세: 국가제도의 정비, 군사적 남진정책의 성공: 그리스의 위기.마케도니아-그리스 연합군을 창설 :페르시아 원정계획( 필립2세의 돌연사로 실패)-후계자 알렉산더: 그리스 도시국가의 부활을 억제책:  페르시아 원정을 감행-시리아, 페니키나, 이집트를 격파 B.C.323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시 건설-메소포타미아 진격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 B.C 330-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중앙아시아(사마르칸트), 인더스강(박트리아Bactria)유역에 진출-수도 바빌론(323) 대제국을 건설.

 

정치적으로 총독정치를 통한 통합: 지역통치에 대한 중앙의 간섭을 최소화-문화정책: 정복지의 종교, 문화, 제도 및 관습을 유지허용.  각지역의 그리스의 도시를 건설(알렉산드리아):  지식인, 상인, 정치가를 이주시킴: 그리스 문화를 이식* 간다라미술(불상 및 동전)에 큰 영향: 대승불교를 통한 한국에도 영향-그는 신격의 아시아의 대왕: 유럽과 아시아의 융합을 통한 세계 정복에 성공 .정복지의 호족의 딸과 결혼: 혼인정책 (인종적 융합): 그리스인과 동방계 


대왕의 돌연사는 후계자문제에 대한 군부의 대립관계를 연출함 *결과: 이집트. 시리아, 마케도니아의 3왕국으로 분열  -안티고노스가(마케도니아)가 명분을 유지 로마에 복속: B.C.146-셀레우코스왕가(시리아): 안티오키아, 다마스코스에 도시건설 로마에 복속B.C. 64-프톨레미왕가(이집트): 지중해 그리스 도시국가를 복속 절대군주제를 유지:   악티움해전:  로마에 복속 B.C. 31 * 순차적으로 로마에 복속-로마제국이후 실질적으로 기독교문화의 정신적인 길라잡이:(고대: 기독교도은 지금의 아일랜드부터 인디아까지 확산)


2. 헬레니즘시대의 사회와 문화 

  

정치와 경제

절대군주제: 국왕이 절대적 권력을 독점, 국가독점하에서의 경제생활-그리스 도시국가 중심의 경제는 동방원정으로 중심지를 오리엔트로 이동(동서문화 교류정책의 일원)-오리엔트지역의 지리적 자연적조건(천연자원이 풍부, 조밀한 인구밀도, 영토의 광활함)-이집트지역: 절대왕정, 대토지소유제(노예제)를 통한 곡물의 대량수출-알렉산드리아: 저렴한 노동력에 의한 대규모 수공업생산(유리, 종이(파피루스)아마포, 주단 및 직물): 왕실과 승려계급이 주도-오리엔트지역의 정치적통일: 동서의 무역이 증대: 상공인의 부의 축척(왕실경비충당)지중해, 홍해, 흑해, 인도에 걸친 무역권형성


문화

-대왕은 그리스문화를 통합수용, 동방문화와 융합: 세계사적인 성격과 의미-특징: 그리스의 도시국가적 애국주의는 쇠퇴:개인주의, 세계주의, 현실주의로 전환-철학: Stoa(Zenon)학파, Epikuros학파, 견유학파Cynicism-3학파는 폴리스의 해체 이후 모두 도시국가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은둔의 가치를 공통적 전제조건으로 함. 회의주의적 -Stoa: 이성중시, 도덕적 철학에 의한 행복추구를 목표로 한 금욕주의. 보편적인 이성에 근거한 세계시민사상Cosmopolitanism (계몽사상)-에피큐로스: 정신적 쾌락에 의한 행복추구만이 인간의 목표(개인주의의적 입장).이후 3세기까지 신플라톤학파의 등장까지 철학의 새로운 것은 생성되지 못함 

 

현실주의사조

자연과학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과학과 수학은 최고조에 이름)-중심지: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Museion. 국왕의 적극적인 문화, 학문의 중심-아르키메데스Archimedes; 원주율을 통한 미적분연구-유클리드Euclid: 유클리드 기하학-에라토스테네스: Eratosthenes지구 구체설(지구둘레를 측정)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태양중심설 (코페르니쿠스 보다 앞선 주장)-Polybius: 로마사(로마제국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건축: 신전, 궁전, 극장, 목욕탕-그리스식 코린트양식의 화려한 조형미 .조각: 개인주의 및 사실주의 사상이 반영. 육체와 감성을 주제로 한 조각: 여인상(밀로섬의 비너스)

 

*로마제국은 2원적 구조

-정치적 통일-문화적 2원구조: 헬레니즘세계는 상층은 국제적 그리스화 .하층은 다양한 지방문화

  

서양고대사 개관 3

   

◎ 로마제국의 흥망사


1.  로마공화정의 발전


a. 로마공동체CIVITAS의 탄생과 왕정기(753-509):

귀족이지배한 도시공동체-3000년경 인도-게르만의 일파: 이탈리아인이 정주시작-기원전 8세기 티베르강 유역 라틴의 작은 촌락 로마가 건설(라틴인)-초기 에트루리아Etrurians에 지배이후 독립도시국가의 형태를 유지 510년경부터:  이후 1000년의 세계제국의 수도로 변모-그리스문명의 영향(종교, 제도, 건축, 도로건설, 도예)-부족국가: 씨족Gens, 종족Curia 부족Tribus으로 구성.  사회적 신분: 혈통귀족Patricii 평민Plebs 예민Clientes 노예Servus


b. 공화정 초기와 중기(509-2세기초) 

-초기로마: 로마공화정은 6세기이후-귀족(대토지소유)이 실권장악-통치와 군사권은 임기 1년의 2명의 통령Consul-전권은 귀족대표기관인 원로원Senatus이 장악-평민: 중소농민이 주축, 참정권이 박탈


2. 로마공화정의 성립


-상공업을 통한 평민계층의 부의 축척(귀족수준을 능가) 및 일부는 군대(중장보병)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  -신분상승을 통한 귀족정의 변질-B.C. 5세기 귀족과 평민간의 신분투쟁(평민의 새로운 도시건설을 통한 이주문제: 성산사건)-원로원의 타협안: 2명의 평민대표에게 호민관 Tribunus Plebis 권한 허용-평민대표기관 평민회구성 Concilium Plebis-평민의 권리신장에 크게 기여:  451년 12표법의 제정: 관습법에 의한 귀족의 폐단을 방지 및 평민보호책 .367년 Licinius(리키니우스법): 토지소유의 상한을 정함(125만 평방m)2명의 통령 중 1명은 평민대표. 평민과 귀족의 실질적 신분차이가 거의 폐지-287 Hortensius(호르텐시우스법): 평민회의 결의가 원로원을 거치지 않아도 효력발생.  로마 공화정의 신분제 문제는 완전 해소


3. 로마의 반도 통일

초기 로마의 정복사업이후 정복지주민은 로마 시민화(평민과 동맹관계에 편입)-로마 주변의 라틴도시국가의 라틴동맹(396)  -주변부:에트루리아인, 갈리아인을 완전 복속-280년경 거의 반도를 통일: 남부경략 삼니움족Samnium: 중부석권 이후, 남부 그리스식민지공략*모든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와 각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망 건설(군사, 수송도로)-각 지역의 로마화작업(군사, 상업, 문화교류에 영향)-이탈리아에 대한 로마의 통치: 지방자치제를 통한 협력관계를 구축(군대진주를 위한 요새구축)-이후 지중해 및 해외 진출을 통한 대제국 건설의 원동력* 로마시민권의 확대과정: 로마지배하의 이탈리아인 로마군사력의 절반이상차지


4. 로마의 발전 

로마시민공동체의 해체(공화정후기: B.C2세기-A.D. 1세기)

포에니전쟁: 반도통일이후 (지중해진출모색)-지중해의 세계는 당시 군웅활거시대 .알렉산더사후 중동, 이집트,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페니키아의 카르타고로 분열 

카르타고: 서지중해의 맹주(강대한 해군력과 경제력):   로마의 지중해 진출의 결정적 방해요인

  

지중해의 세계 개관

-지중해 동쪽: 알렉산더의 정복사업에 따른 변화 . 서쪽: 제해권 장악한 북아프리카의 해양대국 카르타고와 이탈리아반도를 석권한 육상국가 로마와의 대결(포에니 전쟁: 이는 그리스세계와 오리엔트 대결의 연장)-카르타고: 기원전 6-8세기 해상왕국 페니키아인 (라틴말 새로운 도시)-포에니: 로마인이 페니키아인을 일컫는 말*기원전 3세기 한니발전쟁의 승리는 로마가 해상왕국으로 급부상  -동지중해의 헬레니즘 강대국과의 긴장, 갈등관계로 발전-기원전 146 로마가 지중해 대국을 건설하는 과정의 분수령-카르타고 격파, 그를 속주로 편입(서지중해에서의 승리)-마케도니아 병합 (196년 2차 마케도니아전쟁이후 속주화) 그리스 자유정신을 존중

 

로마의 대외정책

헬레니즘왕국에 대한 기본전략-직접적인 지배: 로마의 지배(imperium romanorum)과정-기원전 31-30 악티움해전에서 마지막 왕국(헬레니즘) 이집트 격파: 속령화거의 모든 지중해지역을 통일-기원전 27년 로마제정: 황제에 의한 제국통치체제의 수립이후 200년 팽창: 북부 갈리아, 라인-다뉴브강, 영국의 일부등 영토편입-평화의 시대(정복보다는) Pax Romana: 경제적 번영(해운업, 무역, 도시건설)최고의 고대문명의 절정기: 물질문명을 기반

 

*포에니 전쟁(Punic War 264-146 B.C)

-페르시아전쟁이후 최대의 동.서충돌(유럽대 오리엔트)

 

1차 포에니전쟁: 264-241B.C. 

원인: 시칠리아의 내란에 양측이 간섭 군대파견-경과: 로마의 육군과 해군력 총집결로 승리: 시칠리아의 지배권확보(배상금 요구) 이후 Sardinia, Corsica를 확보: 로마제국의 형성에 초석을 마련

 

2차 포에니 전쟁: 218-201B.C

원인: 카르카고의 에스파니아 개발문제에 주력. 한니발Hannibla 에스파니아의 개발을 통한 부의 축척과 군대를 동원  .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원정 216년. 8만의 로마대군을 격파(Canne전투: 이태리 중부)로마의 함락위기: 이탈리아 동맹군의 일부(남부지역)이 카르타고와 동맹. 로마의 재기: Scipio를 중심으로한 신규평성로마군의 카르타고 본토공략. 한니발의 철수: 북아프리카의 전투에서 카르타고의 패배, 휴전이 성사: 201 B.C.-결과: 로마의 스페인 지배, 카르타고 50년 상환의 배상금, 카르타고의 군선인도서지중해의 재해권확보

  

3차 포에니전쟁: 149-146B.C.

원인: 카르타고의 재기방지책(카르타고 자체분쟁에 개입)  -목표와 결과: 카르타고의 초토화, 주민을 노예화: 로마속주에 편입* 지중해의 재해권문제-2차 포에니 전쟁이후: 마케도니아정벌작업-목표: 카르타고와 그리스세력의 동맹할 가능성을 사전봉쇄. 4차에 걸친 로마의 마케도니아 간섭: 군대파견을 통한 군사적 개입-소아시아, 이집트, 중동지역으로 확대(로마의 군사적 절대 우위): 속주에 편입


5. 로마공화정의 변질

 

로마사회의 변질

대외적 팽창의 결과: 평민출신의 기사계급(Equites)의 성장(공헌)-군수품조달, 공공건물 건설, 속주의 세금관리 과정에서 경제적 부의 축척*새로운 관료제도의 요구: 토지제도 및 사회적 신분지위. 로마는 부의 집중을 통한 사치와 향락문화 풍조가 확대-건축, 장식, 요리, 사교, 의상 등 전통사회의 가치 및 소비문화가 변질

 

전쟁의 결과: 정복지 주민의 로마노예화.  하층평민 및 자영농의 신분하락. 전쟁을 통한 생산저하 및 부체의 상승. 대토지소유의 농장경영(노예를 통한): 속주를 통한 값싼 농산물 유입

  

Latifundium  라티푼디움의 실시: 곡물재배가 아닌 올리브, 포도의 상품생산의 대토지소유제로 전환  -결과: 중소농민의 무산자로 전락, 새로운 귀족층이 정착 (사회의 양극화 현상)*사회적 모순: 무산자와 유산자계급의 갈등이 심화-유산자: 전통귀족, 신흥귀족: 관직 및 경제력을 독점.  원로원의원: 대토지 소유자-무산자: 가혹한 대우: 특히 노예의 반란이 반복. Spartacus 73-71B.C.의 반란은 대규모-결과: 로마 내부적인 혼란이 가중은 내란의 수렁에 빠트림. 로마공동체의 시민의식의 사라지고 개인 및 물질주의가 팽배-로마는 무력에 의한 헬레니즘세계를 재패, 반면 헬레니즘의 개인, 물질주의에 패배

  

개혁과 군벌의 대두(평민파의 개혁요구)Tiberius Graccus 163-133 B.C. 형제  -133 형 그락쿠스의 호민관: 자유농민의 몰락: 귀족의 사병화에 반대. 토지개혁를 주장 (니키니우스법을 부활: 귀족의 토지소유제한)반대파로부터 살해-123 동생 Gaius Graccus의 로마하층민의 지지로 호민관 선출: 형의 계획을 계승. 로마시민권의 확대, 토지분배문제로 원로원과 대립.  내란으로 확대될 위기에 그는 자살로 마감, 실패-이후 혼란이 가중 내란의 유혈사태가 속출-로마의 공화정체제는 대제국의 통치체계를 대신할 수 없었다 .속주의 반란과 이민족의 침입이 결과적으로 나타남

 

*군벌의 등장-혼란속에서 시민군은 귀족의 사병화(용병화)-귀족(속주지사)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군벌독재화.  원로원과 정치적 대립 -대표인물: Marius (마리우스: 평민출신 원로원을 대변)   Sulla (술라:귀족출신 평민회를 지지)-대립 후 술라의 승리: 원로원의 과두제를 개혁함

 

6. 로마의 새로운 질서

 

3두정치

군벌간의 정치적, 군사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 원로원이 기능상실이 원인-술라의 사후 그의 참모장 Pompeius106-48B.C와 Carccus 114-54B.C. 의 등장-원로원의 요청으로 이베리아반도에 남은 마리우스파를  완전 분쇄-크락쿠스는 스파르타쿠스의난을 평정 후 대부호로 정치적 야심-케사르 Caesar 100-44B.C.의 등장: 평민의 지지 

  

제1회 삼두정치

원로원과 대립 (케사르가 최고 실력자로 부상)-케사르: B.C. 59년 갈리아군단의 사령관(군사적 지위의 중요성을 의식)8년간의 갈리아지방 정복사업에 몰두(라인이서지방평정)라틴문화의 프랑스, 독일지역 전수자-크락크스: 시리아 총독부임후 파르티아전투에서 사망

 

폼페이우스와 시저의 대결구도-원로원은 시저의 군사적 성공에 경계: 정치적 대권과 직결. 시저를 군사령관직에서 파면: 그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넘었다-결과: 이탈리아와 속주는 전쟁상태, 강력한 군대의 승리는 예고. 봄페이우스는 원로원의 지지자와 동방으로 피신.  케사르의 에스파니아 점령이후 B.C. 48년 봄페이우스군을 격파, 살해.  그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여왕에 임용한뒤ㅡ B.C. 45년 로마에 귀환. 그는 원로원의 추천으로 10년 임기의 통령이 됨

  

케사르의 개혁

새로운 질서의 모색-행정개혁:혼란, 무질서, 부패방지의 원인: 세제를 개혁, 중앙집권제 (속주의 총독을 중앙에서 통제)시민권의 확대, 빈민층구제사업(도로, 항만 등 공공사업), 토지재분배(하층민대상)  -문화사업: 46년B.C. 율리우스력(태양력의 기초)의 제정. 44년 B.C. 종신통령(원로원은 로마공화정의 종말로 간주: 그를 암살)

 

제 2차 삼두정치

안토니우스(Antonius: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케사르의 암살: 로마공화정의 혼란을 재현양자: 옥타비아누스와 케사르의 참모 안토니우스와 레피투스(Sepitus)* 3두체제는 부루투스 Brutus(시저의 암살자)의 군대를 마케도니아에서 격파.  반대파의 재산몰수와 숙청 *로마제국의 영토분할-레피투스: 아프리카 (후에 탈락 로마는 동서로 양분)  -안토니우스: 이탈리아 이서지역  -옥타비아누스: 그리스 이동지역 

 

악티움해전 Actium 31 B.C 

로마 실권장악을 위한 분할통치를 둘러싼 내분.옥타비아누스의 승리: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연합함대를 격파.  이집트왕국의 멸망(프톨레미왕조): 로마의 영토에 편입. 일인지배체제(제국영토의 효율적지배)가 필요: 제정이 요구. 공화정은 로마제정으로 전환하는 계기 

 

7. 로마제정의 발전

서기 1-2세기(제정전기): 시민공동체적 요인이 쇠퇴

 

*아우구스투스 시대(옥타비아누스)

내란과 무정부적 혼란방지를 위한 Princeps(원수정)수립Princepatus: 19세기 몸젠이 명명한 정치체제-원로원과의 타협  대권장악: imperator: 군통수권자. Augustus(존엄,지존)의 칭호: 로마   황제에 등극-그는 독재자가 아닌 로마시민의 원수 

 

Principatum(지배체제): 로마공화정의 변질. 귀족정이 아닌 일인지배 (원로원의 기능쇠퇴)속주의 총독의 사병화 금지(연금제실시, 감독관파견)상비군과 친위대창설: 국내질서유지. 도시정비: 상수, 신전, 목욕탕, 도로 정비-45년간의 치세: 혼란과 무질서를 추방한 로마의 평화시대가 열림-아우구스투스는 고대신앙을 복구하는 노력: 진리탐구에는 등한시-로마의 세계는 점점 더 판에 박힌 틀만 유지-그는 정치적 도전자에 냉혹(원로원등)-A.D. 18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까지 같은 시기

  

*로마의 평화 (Pax Romana)

아우구스투스이후 4황제시대: 정치체제의 제도적 정비와 전문화작업이 확대-Nero의 기독교박해, 로마방화, 화산폭발(봄베이)에도 불구: 평화와 안정은 유지됨-원로원과의 타협: 군벌의 대립으로 인한 내란위협 방지 :황제권한의 강화-네로이후 5현재시대(96-180): 로마의 전성시대 로마제국의 영토 확장, 내치정비-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Marcus Aurelius(121-180): 원로원을 통해 선출  -빈민구제사업: 대규모의 토목공사  -대외정책: 무력으로 루마니아, 헝가리지방 아르메니아 진출, 속주의 반란진압. 소아시아, 유럽(이베리아반도, 베네룩스, 영국 서유럽라인좌변)   아프리카에 광할한 영토를 넓힘-철인황제: 아우렐리우스(외침과 내분의 연속: 전쟁으로 인한 인구감소 및 게르만의 이동-비단길: 중국 후한에 사신파견 (로마제국을 대태국으로 명명)

  

8. 제정시대의 사회

라인,도나우강의 국경유지: 법에 의한 통치, 경제력을 강화-도로, 항만, 습지개발: 무역의 증대(각국의 특산물 교역: 식민지)중국, 인도까지-교역을 통한 도시의 발달: 헬레니즘문화의 계승: 그리스-로마문명의 열매를 맺음-정복지에 지중해 고전문화을 전수시킴(프랑스, 영국,남독일, 스페인 포함)-로마시민권의 확대: 신분제사회, 귀족과 기사계급, 일반평민, 노예-노예제를 통한 경제력 증가: 신분유지를  위한 연속적 대외원정 : 막대한 군사비지출-상업의 발전을 통한 화폐경제의 일상화-대외팽창만이 새로운 재원을 창출한다는 정책: 로마사회의 내부붕괴는 팽창의 중지를 의미


9. 로마문화와 기독교

-지중해 그리스의 도시문명을 인수-로마제국의 발전과정에서 이민족의 문화를 융합하고 그리스-로마적 전통을 전수함-고전고대를 유럽중세세계에 전달하는 역할

-헬레니즘화된 그리스문화를 계승: 그리스의 독창적인 면을 수용  -로마인은 실용적인 정신으로 계승 발전-로마문명은 그리스문화의 모방에 충실: 조성이 부족: 학문, 예술분야:   건축, 도로, 수도 등 토목공사: 웅장함.  제국의 창조력의 원동력: 정치, 군사, 행정, 법률제도의 우수성확인

  

◎로마법의 기원과 벌전

 

로마법

-로마제국의 최고의 문화유산-그리스: 예술, 철학  로마: 법-초기: 기원전 8세기 도시국가 civitas- 6세기말 유스티아누스 법전의 집대성-최초의 성문법: B.C 450년 12표법(귀족과 평민의 대립이후 평등을 보장):-시민의 권리와 관습을 법으로 제정(시민법)-농촌사회를 규율하는 법 (엄격한 형식주의)-가부장권을 인정   -자유민, 반자유민, 노예, 가축, 물품에 대한 소송의 당사자: 가장만 인정-정복지 이민족과의 통제 및 교섭을 위한 만민법의 체계

  

만민법은 스토아철학의 자연법과 동일시:(제정초기 2-3세기 통용)법은 자연의 합리적인 원칙과 일치되어야 한다: 세계성, 보편타당성.-자연법: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처럼 영혼불멸하고 보편적인 법-보편적 규범, 인간의 공통된 합리성을 강조하는 스토아의 자연법사상을 토대로  세계제패를 위한 법, 행정체계를 유지하고자 함

  

*정복사업-만민법과 시민법: 기원 전 3세기 포에니전쟁이후 로마가 헬레니즘세계와의 접촉. 로마시민법: 로마시민에게만 적용하는 관습 및 12표법(민회의 법률) 엄격한 형식주의(법률소송제도를 채택)로마 시민의 거래법(시민법)거래행위: 매매, 금전소비대차, 조합, 저당 등에 대한 법적 보호책-자유로운 거래법은 외국인에도 통용되는 원칙을 채택(만민법으로 통용):(외국과의 소송문제에 외국인 법무관 1명)

 

시민법과 명예법: 민회에 의한 고유한 시민법과 법무관에 의한 명예법(만민법)으로 구별. 법무관은 공화정의 명예로운 관직이라는 의미-귀족의 법률학자:원로원의 구성원들: 1년 임기의 법무관임용에 자문기관 역할.  법무관 임용에 따른 승인방식서, 소송진행표를 재편집한 법전형태가 성장(영구 고시록: 변경이 금지 ) 법률의 체계화: 

  

공화정시대

법무관과 명예법시대-원수정시대: 황제의 칙령(제정시대)*pax romana 고전시대:(A.D. 1-2세기)-그리스 철학의 영향 (로마 법률학이 소제, 추상, 귀납의 개념을 체계화)-가이우스: 법학제요: (사람의 법, 물건의 법, 소송의 법) 시민법을 3부분으로 분류. 나폴레옹의 프랑스 민법전의 초석, 법학입문서의 역할  -해설서 저작( 해답집, 문제집, 서간집): 개별적 문제해결에 초점-사법고시의 주해역할, 법제도와 법학의 기초학설을 마련-유스티아누스의 학설집에 40명중 35인이 고전시대의 저자가 해당-지금 5%만 현존: 920페이지상당(법률 해석집)

  

고전시대

원수정시대(관료제도의 정비)-법학이 발전 성장하는 이유: 관료제 내에서의 법학자의 위치 지대한 것(모든 공직분야에 진출: praefectus 속주의 총독)-Princeps에 의해 위임된 재판관으로서의 법학자의 권위: 그의 해답만 인정-법무관에 자문하던 때와 다른 공인(월급)*황제의 칙령칙법(칙령)-카라칼라황제 212 로마시민권을 제국의 모든 주민에게 준 칙령-최상급심으로서의 재심원칙-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재판제도(상소제도):  -황제의 재판권은 많은 새로운 법을 발전-황제의 법률해답의 발령( 실질적으로 법학자가 기초한 것)  -법학자의 자유로운 법해석은 많은 제약을 받음-이후 모든 법의 체계는 황제의 이름으로 제도화(고전법학의 쇠퇴)

 

제정후기

3세기말 4세기 초 이후-서로마제국의 멸망   -법학의 체계화에 성공(서책)-법률학교를 통한 법학서적이 다량으로 복제됨( 개념이 일반화)-법학의 비속화: 라틴화하는 경향-콘스탄틴대제 이후의 법률은 비속법이라 함예: 테오도시우스 법전: 438 소유와 점유의 구별이 애매하고 혼동됨-서로마제국의 멸망이후 로마의 비속법은 게르만족의 관습법과 혼제하는 현상-중세에 다시 재발견

  

동로마 법률학교와 고전주의의 부활

서로마제국의 해체과정에서 로마법은 더욱 비속해짐-5세기 동로마는 고전주의적 입장에서 법률학교를 신규개편함 (5년 과정)고전법학자의 저술이 수집되고 해석됨-텍스트의 주해, 색인 등의 연구가 강화: 주석적 연구방법-이후 중세의 주석학파와, 현재 법해석학의 기초*유스티니아누스황제의 법전:-로마볍의 집대성-로마법은 동로마황제 Justianus 527-565 (유스티아누스)에 의해 집대성-동로마 법률학교의 연구덕택으로 단시일에 완성-학설집의 자료는 방대하지만 3년만에 533완성-고대로마법과 다르게 가부장제에 따른 엄격한 형식주의는 완화됨-즉 시민법과 명예법이 통합된 보다 일반화된 로마법체계-고전주의적 입장이 반영: 이후 동로마세계에서 비속적으로 적용됨-11세기 까지 서유럽에서는 로마법이 자취를 감춤

  

중세의 로마법 (주석학파)

십자군원정 콘스탄티노플과의 교역하던 피사에서 학설집의 사본발견-이후 12-13세기 볼로냐의 주석학파에 의한 법전연구가 활발-주석학파의 업적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1000년의 신.구법제도를 정리통합)의 역사적 기원 및 모순점 해결  -해석학을 통한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면서 볼냐대학은 전유럽에서 몰려는 법학도를  위한 로마법 강의와 연구를 활발이 전개함  -영국은 전통적 법률전통에 따라 이를 배척함(영미법)-후기 주석학파: 주석서에 봉건법, 교회법, 도시행정법를 추가로 소재화함

 

로마법계수운동

나폴레옹법전과 19세기 독일법학이 로마법을 전승-1900년 민법전이 성립: 유스티니아누스계통의 로마법이 현행법-나폴레옹의 법전: 로마법에 강력한 영향-제국주의와 양차대전을 통해 전세계에 로마법 대륙법이 전수됨(독일-일본-한국)

 

◎ 로마제국의 붕괴원인

Spengler, Toynbee 문명사적 흥망고찰의 기본적 틀: 그리스-로마문화 /Gibbon: 로마제국의 몰락의 주요원인-( 야만족의 침입과 기독교의 승리: 대중화, 국교화)

 

정치적 원인/황제의 계승문제 

황제권을 둘러쌓은 궁정음모는 고질적 병폐(5현재시대는 제외)-3세기 군인황제시대: 군대가 개입하는 황제옹립과정에서 내분과 대립-제국의 통합과 황제권에 치명적결과-디오틀레티아누스의 수습책: 전제군주정를 도입 -콘스탄틴누스 이후 악화  -로마의 황제권: 제국통합의 핵심-오랜전통의 기능적 제도가 뒷받침되지 못한, 공화정에 접목된 타협의 산물-황제의 칙법과 강력한 군대의 장악-황제의 계승권문제가 애매: 황제의 신격화 작업은 지배층세력에 역효과로 나타남-군인황제시대: 5현재시대이후 (3세기): 로마의 내분과 이민족의 이동

  

군대의 조직력약화  

235-285: 군사반란과 내란이 연속적으로 일어남.군인황제: 속주의 군대를 배경(26명의 군인황제 Barrack Emperor)가 교체:   자연사는 2명뿐: 모두 권력투쟁의 희생물: 군대의 동요

 

군대의 질적 변화

초기: 자유로운 중산적인 시민으로 구성된 국민병의 성격. 공화정말기: 3두정치시부터 용병대의 성격이 첨가되고 사병화함.  제정후기-말기: 속주민과 야만족 출신의 비중이 커짐: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약화. 제정후기(3-5세기)전제주의 정부형태: 3세기: 부패와 타락(금권정치): 군부의 등장: 황제의 등극을 좌우:  동서의 야만인의 침입, 혼란: 군사비의 증가, 질병이 만연

  

정치적 변화

두황제의 노력: Diocletianus 284-305, Constantinus 306-337/ Augustinus: 혼합정부체제(원수정)를 마감, 절대권력체제:   제국의 통합유지를 위한 중앙집권적 권력국가(관료제적 통제강화)-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제국개편-강력한 황제권력을 유지: 관료제, 군제를 강화. 공화정적인 요인을 일소, 통일적 군현재도를 개편.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에서 전제적 군주정(Dominatum)으로 변질  -그는 소아시아에 군대와 함께 체류: 시리아, 이집트를 직접통치  -공동황제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밀라노에 체류: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북아프리카지역 통치  -2명의 황제 2명의 부황제: 제국은 4분 분할통치

  

콘스탄티누스Constantiuns 306-337:-비잔티움으로 수도이전: 콘스탄티노플으로 명명.  4개의 대관구 Presfectura 14개의 관구 Doicesis 117개의 주 Provincia로 분류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를 정비: 175군단으로 개편-그리스도교를 공인(민간신앙의 확대를 피할 수 없었다)-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79-395 동서로 제국이 분열. 서로마제국: Odoacer 476멸망(게르만 용병대장)


게르만의 이동

-외몽골의 훈족이 유럽 침임: 이에 따른 유럽, 인도어족의 3차례 민족 이동-1차 이동: 4말-5세기 초-375년 다뉴브강을 넘은 서고트족,   -406년 라인강을 넘어선 반달, 알란, 수예브족. 이후 슬라브, 동고트, 프랑크족의 민족이동. 이에 따른 로마제국의 국경과 정치조직의 붕괴-2차이동: 유스티아누스대제 527-565의 타계이후(비잔틴 내부의 동요)-아바르족의 발칸침입, 롬바르족의 북부이탈리아 정복,   앙글로섹슨족의 잉글랜드정복, 프랑크족의 지배지역 확대(라인지방)

 

3차 민족이동: 카로링왕조의 종말-9세기 초~10세기 초: 노르만족의 프랑스와 잉글란드 및 전유럽지역에 대한 침입  -이시기: 이슬람세력의 지중해장악: 에스파니아,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시칠리, 남부이태리(비잔틴제국이 쇠퇴)-서유럽지역: 두 세력의 침입에서 분열되고, 황폐화-카롤링조: 독일 911년까지, 프랑스, 987까지 명맥이 유지-훈족의 침입: 이에 따른 고트족이 도나우강을 넘음: 4세기. 로마황제는 군대를 동원 전투에서 패배, Valens황제

  

게르만의 침입

게르만의 일부는 로마의 용병화-국고의 고갈 , 신분제의 동요(군제, 조세, 토지제도)-로마인의 정신적, 도덕적 무기력이 원인-게르만의 이동(라인-도나우 지역에서 월경)동: 고트족 (소아시아와 그리스지역 침입)   서북부: 게르만(갈리아, 에스파니아, 이탈리아에 깊게 침투)동부국경: 사산조 페르시아의 흥기로 크게 위협*결과:-국경을 넘어 도시는 약탈, 방화, 파괴되기 시작,  -군사적으로 물, 인적 동원이 어려움: 강제 징병, 징세, 노동의 악순환

  

게르만의 이동에 따른 정치경제적 변화

로마가 그리스 도시국가의 제도를 흡수한 면도 원인: 제국의 발전은 시민공동체의식이 무력해짐 (공화정의 변질: 제정)-로마의 평등이념은 경제, 사회 구조적으로 비현실적인 면에서 나타남.-중앙집권적 관료제의 붕괴는 지방분권적 귀족정치로 이동(고대세계의 종말)-중세사회로의 과도기에 접어듬; 경제의 중심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행정의 중심은  중앙집권에서 지방의 유력귀족으로

  

경제적원인 (근본적 원인)

로마의 번영은 바로 제국의 영토확장과 전리품 및 공납의 산물을 의미한다 -기술개발이나 혁신이 수반된 생산적인 경제발전의 혜택이 아님-정복의 한계=경제적 쇠퇴=황제권이 동요=제국의 해체과정을 겪음

 

로마의 경제제도

그리스와 유사한 노예제를 기반.  대토지소유제가 확대(공화정이후)노예의 인신매매가 성행,   정복사업이 둔화되면서 노예의 감소현상.  대토지경영의 어려움, 생산력저하: 토지제도의 붕괴위기-로마의 경제가 노예제에 의한 생산방식에 의존, 기술개선에 소홀한 면-기술개량에 등한시: 고용창출, 대중의 구매력 자극에 실패

 

*정복전쟁의 종식-값싼 대량의 노예공급원의 소멸을 의미-대토지소유제(라티푼디움)-콜로누스(소작제)로 변질-콜로누스: 소작제의 도입(대토지분할): 노예제도는 로마경제의 한계. 화폐경제가 흔들리면서 급여가 현물화(자연경제)-제정말기: 제국의 분할에 따른 경제적 상황의 악화: 도시의 역할이 감소(대토지소유제는  유지하는 모순)재정의 어려움은 지방화,자급자족화, 현물화의 결과를 초래-166년 이후 페스트의 창궐과 질병, 기아로 인한 소작인인 점차 부자유적인 농노화-지배계층의 면세특권이 강화: 제정말기에는 자유민이 소작인으로 전락-유산자와 무산자 계층의 대립이 뚜렷해짐

  

경제, 사회적 동요-속주의 로마시장경제로의 편입문제의 어려움. 도로(군사적 목적): 수송과 통신의 어려움: 자본의 재투자가 비효율적(비생산적),   기술투자의 어려움-과대한 군사비지출: 재정악화, 만성인플레, 화폐경제의 쇠퇴(중국, 동방으로부터 곡물, 향료, 보석수입: 막대한 금, 은을 지출

 

정신문화적원인

기독교의 성장

현실적이 아닌 내세의 신비사상에 사로잡힘-로마말기의 기독교수용: 로마정신과는 배치(원래정신의 토대를 상실)-헬레니즘-로마적 전통문화에 동화된 게르만 야만문화를 배경-로마적 게르만적 요인을 기독교정신으로 계승해나감-이는 중세유럽의 정신적 기반

 

기독교박해

로마황제의 상징적 신성성에 대한 공식적 참배요구  -속주의 군대조직은 대부분 기독교신자가 확산  -이교도적 제의를 거부, 황제의 신성성 요구에 불응이 원인-네로황제 54-68이후 9차례 그리스도교 박해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제국 최대 최후의 박해*콘스탄틴 대제: 313 기독교 공인, 관용과 호의 정책적 전환  -기독교는 사적 신조 공동체(sect)가 아니라, 사회적 종교(cicil Religion)-기독교도들도 황제를 정치적 수장으로 인정-기독교는 로마황제 중심적 제국통치에 필요하고 유용한 집단

  

-392년 기독교의 국교화를 통한 제국의 통합(로마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의 일치)-395년 테오도시우스 379-395: 마지막 황제의 타계이후 동-서로마의 분열.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로 대립-서유럽은 다수의 다양한 후계자 역할: 5세기 말 정치조직으로서의 로마제국은 붕괴.-동부는 새로운 로마: 비잔티움의 강력한 제국이 유지-서로마제국의 해체과정(서유럽 지역)이 진행될수록, 로마교회는 모든 로마적인 것, 즉 그리스-라틴문명의 유일한 통로의 역할 -서로마제국의 몰락이후 서유럽은 제국통합을 위한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더욱더 새로운 민족이동 양상으로 변화되고, 이는 서유럽의 분열을 가속화 함.

 

기독교의 성장과정

사도 바울의 등장

A.D. 1-64-기독교를 세계종교로 발전시킨 율법학자이며 전도사:  -전도여행: 소아시아, 그리스, 마케도니아-로마에서 순교-바울의 기독교 세계주의: “각 교회에 보낸 서한”에 명시됨-“기독교는 율법의 마지막이라고 선언: 기독교를 유태교에서 해방시킴-기독교와 유태교의 통합을 역설하면서 기독교를 헬레니즘-로마문화 세계에 전파시켜 기독교신학의 터전을 마련

 

유태교의 쇠퇴

-로마에 대한 독립반란 66년: 1차 유대전쟁 때 기독교도는 불참)-70년 예루살렘이 함락  -제2차 유태전쟁(132-135): 유태교의 철저한 파괴*기독교의 로마전파: 로마교회의 기원은 불투명:  -58년 바울의 로마인에 보낸 서한에 근거이방인을 주체로 한 기독교는 세계종교로 발전: 수도 로마에 신자수 증가-주로 공인종교였던 유태교와 다른 면을 강조하고 로마사회의 관심사가 됨-네로의 박해(64년): 로마 시장거리의 화재사건에 소문으로 연루된 네로는 기독교인의 소행으로 협의를 덮고 박해하기 시작함-도미티아누스의 박해; 81-96년 기독교인을 공적으로 규정하고 박해. 요한묵시록에 순교한 신자들의 이야기가 나타남

  

교부시대

사도시대 1세기 말 -2세기 시대)이후  -교부란 신틀라톤학파나 스토아학파에 비해 지식과 학문수준이 덜함-기독교 교회의 건설과 교의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자

-대체로 6세기까지 교회의 조직화에 노력:  -사도, 예언자라기보다 주교, 사제 등 교회를 대표-2세기 말부터 교회조직은 정비되고 독립적인 주교제가 확립*신약성서가 탄생: 2세기 말-3세기:  -현재의 성서 27서는 4세기에 공적인 인정

 

이슬람제국과 비잔티움의 발전

모하메드Mohammed 570-632이후  -지중해세계는 특히 동로마제국의 영향권(아랍지역 및 동지중해지역)은  이슬람의 권력팽창과정에 흡수됨.-8세기: 이집트, 북아프리카, 에스파냐, 서고트왕국을 정복:  이후: 남프랑스 지중해연안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바그다드: 비잔틴제국과 힘을 겨루고 있었지만 8세기는 지중해세계의 실질적인 지배자   -이슬람제국은 중세 내내 독자적인 종교로 통합된 세력이며,  -그리스-라틴문명을 보존, 성장시킨 강력한 지중해의 세력으로 유지됨-비잔티움과 더불어 서유럽보다는 높은 수준의 문명을 보존, 성장시키며, 보다 통합된 사회이다.

  

-양대세력(비잔틴과 이슬람): 로마제국의 직접적 후예들: 세계문명사적 의의와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유럽서구문명에 대한 특징과 구조에 대한 분석은 고전문명만으로 해명이 불가능:-로마제국은 3등분의 유산: 비잔티움, 이슬람제국, 분열된 서유럽의 형태  -기독교는 서유럽에 로마 구제국의 전통과 문명을 전달하는 유일한 통로의 역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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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지리학의 중요성

 

성서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은 대부분 오늘날의 세계 지도상에서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장소들이다. 따라서 바람직한 성서연구는 성서의 지리적 배경 연구와 직결된다. 현대 지리학은 단순한 지형 및 자연 지리의 범위를 넘어서 민족들의 이동, 도시의 발달, 경제와 산업 등을 다루는 인문 및 사회지리, 그리고 시대별 주거 분포와 중요한 사건들, 특히 전쟁 등에 대한 지리적 배경을 다루는 역사지리까지도 포함한다. 구약성서의 맨 처음 사건인 천지창조와 에덴동산, 노아 홍수와 바벨탑 사건 등은 모두가 비슷한 지리적 문화적 여건을 지닌 메소포타미아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한 출애굽 사건과 구약성서의 시가문학, 지혜문학, 특별히 왕정 초기의 행정체제나 물질문명들은 이집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성서의 역사는 고대 근동의 지리적인 관점에서 ‘바빌론에서 바빌론으로’와 ‘이집트에서 이집트로’라는 두 가지 지리적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은 서기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하류지역의 전통적인 바빌로니아 세력권의 중심도시인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시리아의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오면서 구약의 역사가 시작됐다. 나아가 서기전 586년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면서 구약역사가 마감된다. 서기전 13세기 모세의 영도 하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한 것이 선민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시작이었다면, 서기전 608년경 여호아하스 왕이 이집트로 잡혀가고(왕하 23:34),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대소 백성과 군대장관들이’ 이집트로 망명함으로써(왕하 25:26) 구약의 역사가 마무리된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소아시아(터키)의 다소(Tarsus) 출생의 바울은 기독교인 박해의 임무로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중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시리아의 안디옥, 소아시아의 버가, 이고니온, 에베소, 밀레도, 키프로스의 살라미스, 파포스, 그리스의 네압볼리, 데살로니가, 아테네, 고린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따라서 성서에 언급된 지역은 오늘날의 국가들 기준에서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이집트,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이란, 터키, 키프로스, 그리스, 몰타, 이탈리아 등 모두 12개국에 달한다. 

 

계절, 강수(precipitation), 기온

 

이스라엘은 북위 30-33도 사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지구상의 다른 북반구의 온대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일년 중 계절의 변화가 나타나지만, 이스라엘의 계절 변화는 다른 지역보다는 훨씬 안정적이다. 이스라엘의 경우 일반적인 사계절보다는 건기(dry season)와 우기(wet season)의 두 계절로 양분된다. 좀 더 정밀하게 분류한다면 이 두 계절 사이의 한 달 또는 한 달 반 정도는 그 성격상 환절기(transitional season)에 가깝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의 건기는 4-9월이고 우기는 11-2월인데 나머지 3월과 10월을 각각 건기와 우기 사이의 환절기로 볼 수 있다. 우기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의 겨울철 날씨를 보이고 있으며 북서풍에 실려 온 비구름들이 해안 평야와 쉐펠라, 그리고 중앙 산악 지대에까지 비 또는 눈을 뿌린다. 강수량은 북동에서 남서로 이어지는 경사 선을 중심으로 지중해에 가까울수록 비가 많이 내리며 남동쪽의 광야에 가까이 갈수록 비가 적어진다. 연중 강수량은 헤르몬 산에는 1600밀리미터이며 갈릴리 산악 지대는 800-900밀리미터, 사마리아 지역은 600-700밀리미터, 예루살렘과 헤브론 지역은 400-500밀리미터, 브엘세바 지역은 200-300밀리미터, 그리고 남쪽의 네게브 광야는 50-100밀리미터 정도이다. 중앙 산악 지대에는 해마다 겨울철에 한 두 차례씩 눈이 내리기도 한다. 
 

시리아-아프리카 단층(the Syro-African Rift)

 

단층은 지구 내부의 뜨거운 용암과 마그마의 상태가 지표면에 물리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골짜기를 형성하는 지속적인 작업에 의한 것이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골짜기가 바로 시리아-아프리카 단층인데 실제로는 터키의 남동부 아마누스(Amanus) 산맥에서부터 출발하며 시리아의 오론테스(Orontes) 강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다가 해발 3000미터 이상의 레바논 산지를 서쪽의 레바논 산맥과 동쪽의 안티 레바논 산맥으로 갈라놓았다. 이 둘 사이를 베카 골짜기, 또는 베카 평야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인 헤르몬 산(해발 2814미터)은 바로 안티 레바논 산맥의 남쪽 끝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베카 골짜기에는 남쪽으로 흐르는 리타니(Litani) 강이 있으며 이 강은 서쪽으로 꺾여서 지중해로 빠져 나간다. 또한 요단 강의 한 원류인 스니르 하천도 바로 이 베카 평원에서 발원하며 이스라엘 지역에서의 시리아-아프리카 단층은 단에서 발원하는 요단 강을 따라 갈릴리 호수로 이어진다. 갈릴리 호수의 수면 높이는 해저 210미터이며 이곳에서부터 남쪽으로 흐르는 요단강은 해저 400미터의 사해까지 직선거리 105킬로미터를 흘러간다.

 

 사해 남쪽은 아라바 광야로 불리는 낮은 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홍해까지는 다시 해발 0-100미터 정도로 높아진다. 아라바가 원래는 사해와 마찬가지로 낮은 골짜기였지만 서쪽의 네게브 산지와 동쪽의 에돔 산지에서 우기에 가끔 흘러내려 오는 건천(wadi)들로 인해 덮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시리아-아프리카 단층은 홍해를 따라 남하하여 동부 아프리카를 지나 모잠비크의 올두바이(Olduvai) 골짜기까지 이어진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러한 남북의 길이가 6000킬로미터나 되는 시리아-아프리카 단층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서 그 지형지리의 특징들이 이 단층에 의해 좌우된다.

 

 

이스라엘의 물 문제는 이 곳에 이용할 만한 큰 강이 없다는데서 비롯된다. 일년 내내 흐르는 상시천(perennial river)이 있는 나일 강의 이집트나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의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이스라엘에는 비록 요단강, 야르묵 강, 야르콘 강 등이 있지만 수량도 적거니와 주변에 대규모 곡식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가 없는 등 대부분 우기의 비에만 의존하는 실정이어서 소규모의 농사만 가능한 곳이다. 1년 동안 이스라엘에 내리는 약 100억 톤의 빗물 중에서 70퍼센트 정도는 증발되고 5퍼센트는 지중해나 사해로 흘러가며 나머지 25퍼센트의 물은 지하로 스며든다. 대부분 석회암 지대인 이스라엘에서는 석회암이 물에 녹아 생긴 지하의 동굴과 공간들이 많이 있는 편이어서 스며든 강수량은 지하수의 수맥(aquifer)을 이루며 흐르다가 샘으로 지상으로 표출된다. 

 

지리적 구분 및 경계 

 

이스라엘은 오늘날 골란고원과 요단강 서안(West Bank)을 합친 전체 국토의 넓이가 3만8천 제곱킬로미터로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40퍼센트에 불과한 작은 나라이지만, 이 곳에는 한대지방의 얼음으로 뒤덮인 툰드라 지역을 제외한 지구상의 거의 모든 종류의 지리적 조건들이 존재하는 매우 독특한 나라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서는 알맞은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쉐펠라(Shephelah)의 농경지대, 일년 중 절반은 눈에 덮여 있는 헤르몬(Hermon) 고산지대, 삼림이 빽빽하게 들어찬 갈릴리(Galilee) 산악지대, 온통 모래뿐인 남서부의 사막지대, 그리고 전국토의 60퍼센트를 차지하는 유대 광야, 네게브(Negev) 광야, 아라바(Aravah) 광야 지대, 여름철에는 건조하고 겨울철에는 비가 오는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는 해안 평야지대 등의 다양한 지리적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지형적인 특성으로는 산지와 평지로 양분되지만 기후 면에서는 광야가 별도의 지역으로 첨가될 수 있다. 

 

지역별 구분

 

1. 평야(Plains) 

 

평야는 물만 공급되면 대규모의 밀, 보리 등의 곡식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한 지역의 문명의 발달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실제 이스라엘의 고대 역사를 보더라도 평야를 지배하는 세력이 가나안 전체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서쪽에 위치한 지중해 해안 평야는 남쪽의 이집트와 북쪽의 시리아, 나아가 힛타이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국제 무역로가 통과하는 곳이어서, 예로부터 이 곳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자주 발생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후 가나안에 정착할 때에도 평야를 차지한 가나안 민족, 특히 이 중에서도 블레셋 민족이 이 지역의 중심 세력이었다. 이스라엘의 평야는 그 위치상으로 악고 평야, 샤론 평야, 블레셋 평야 등의 해안 평야와 이즈르엘 평야, 요단 평야 등의 내륙 평야로 구분된다. 

 

2. 산지(Mountains) 

 

이스라엘은 지형적으로 시리아-아프리카 단층의 영향을 직접 받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좁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산지와 골짜기가 다양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서의 배경과 관련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두 산지는 북서쪽의 갈릴리 산지와 중앙 산지이며 요단 건너편도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스라엘의 산지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차례대로 갈릴리 산지, 헤르몬 산지, 바샨과 골란, 사마리아, 유다, 쉐펠라, 네게브 산지 등으로 구분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에 의해 정착한 가나안 땅은 대부분 산지에 속한다. 왜냐면 이미 가나안의 비옥한 평야지대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정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3. 광야(Deserts) 

 

이스라엘 전체의 약 60퍼센트를 차지하는 광야는 일년 중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아서 예로부터 사람들이 살기에 부적합한 땅이었다. 광야는 지형적으로는 산과 골짜기가 있고 평야도 있지만 비가 오지 않아서 풀과 나무가 자랄 수 없는 땅이다. 이스라엘의 광야는 요단 광야, 유대 광야, 아라바 광야, 그리고 남부의 네게브 광야 등으로 구분된다.

 

지역지리(Regional Geography) 

 

이스라엘의 각 지역은 지리학의 여러 분야의 관점에서 차례대로 분석될 수 있다. 우선 그 지역의 자연 조건들과 지형적 특징들을 알아보고, 인간의 거주 면에서의 인문 지리와 생업에 관계된 사회 지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대별 그 지역의 역사적 배경들을 확인하는 역사 지리 등의 관점에서 비로소 특정 지역에 대한 지리적 분석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지역 지리는 특정한 지리적 한계와 특정한 시대적 범위 내에서 연구하게 된다.

 

1. 헤르몬(ןומרח) 산지 

 

헤르몬은 성서에 모두 13회 등장하며 ‘거룩한 장소’를 의미하는 ‘헤렘(םרח)’에서 유래되었다. ‘바알 헤르몬(ןומרח לעב)’ (삿 3:3). 서기전 2세기 말에 편집된 구약성서의 위경 중의 하나인 에녹 1서 6장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들은 헤르몬 산으로 내려와서 다시는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지 않기로 맹세하고 어기는 자를 저주하기로 결정한 데서 헤르몬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구약성서에서 헤르몬은 시돈 사람들에 의해 ‘씨르욘(ןꖼרꙶ)’(신 3:9)이라 불렸고 또는 씨온(ןꔠישׂ)(신 4:48)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모리 사람들은 헤르몬을 ‘스니르(רינשׂ)’(신 3:9)라 불렀으며 안티-레바논 산지 전체를 의미했다. 타르굼과 탈무드에서 헤르몬은 아람어로 ‘투르 탈르가(אגלת רוט)’로 기록됐는데 이는 ‘눈덮힌 산’이라는 뜻이다. 아랍어로 헤르몬은 ‘제벨 에탈르지(雪山)’, 또는 ‘제벨 에쉐이크(노인의 산)’로 불린다.

 

헤르몬은 안티-레바논 산맥의 남쪽 끝에 위치하며, 폭 17-23 킬로미터, 길이 50 킬로미터의 산지로 전체 면적은 약 1,000 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1967년 6일 전쟁의 결과 헤르몬 산지의 7 퍼센트 지역이 이스라엘로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시리아와 레바논에 반반씩 분포되어 있다. 헤르몬 산지의 최고봉의 높이는 해발 2814 미터로 단 북동쪽 20 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 최고봉을 중심으로 해발 2000 미터 이상 지역은 남북으로 모두 22 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져 있다. 헤르몬이 고산지대인 만큼 사방의 경계는 매우 분명하다. 북쪽 베카 평원, 남쪽 싸아르 하천, 동쪽 다메섹 고원, 서쪽의 스니르 하천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헤르몬 산지의 남북으로 뻗은 능선은 오늘날 서쪽의 레바논과 동쪽의 시리아와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헤르몬 산지는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골란 고원과는 달리 석회암 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무가 거의 없는 바위산이다. 이스라엘 쪽의 헤르몬 산지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들에 의해 서쪽에서부터 차례대로 씨온 산지(도브 산), 씨리온 산지, 그리고 헤르몬 산지 등으로 구분된다. 헤르몬 산지는 쥬라기(Jurassic period: 1억9천5백-1억3천5백 만년전)에 시리아-아프리카 협곡의 단층 작용에 의해 4000 미터 높이의 산지로 형성되었다가 풍화작용에 의해 차츰 깎여져 오늘날의 높이에 이르게 되었다. 석회암 지대인 헤르몬 산지는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지하의 동굴을 이루면서 지표면이 형성되는 전형적인 ‘카르스트(Karst)’ 지형을 이루고 있다.

 

카르스트(Karst) 지형 

 

카르스트 지형은 빗물의 이산화탄소에 의해 석회암이 녹으면서 화학적인 부식작용을 일으켜 형성되는 지형이다. 유고슬라비아의 카르스트 지방에서 유래한 카르스트 지대는 대부분 기온이 낮고 강수량이 많은 지역이다. 카르스트는 초창기에는 지표수가 흐르면서 골짜기를 이루는 ‘라삐예(Lapiés)’ 지형을 이루다가, 차츰 발전하여 지하의 동굴과 물이 지하로 빠지는 소규모의 호수(Uvala) 등이 형성된다. 초창기에는 움푹 패인 구덩이인 돌리나(Doline)가 형성되어 차츰 규모가 큰 호수인 폴리예(Polje)로 발전된다.

 

강수량

 

헤르몬 지역에는 연중 강수량이 해발 1200미터 지점의 마즈달 샴스에는 1,350 밀리미터, 그리고 미쯔페 호란에는 1600 밀리미터에 달한다. 헤르몬 산지의 우기는 9월부터 5월까지로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보다 약 3 개월이 더 길다. 대부분은 눈으로 내리며 4월부터는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하지만 헤르몬의 정상 부분의 계곡에는 일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경우도 있다. 

 

주거역사

 

헤르몬 산지의 주거는 서기전 4세기 그리스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해발 1500 미터 지점까지 올리브 틀의 유적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대략 이 높이까지 올리브나 포도 재배가 가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이 곳에는 마즈달 샴스를 중심으로 호두, 사과, 앵두 등도 재배한다. 성서 시대에는 눈 화장품인 콜(Kolh)이 헤르몬 산지에서 생산되기도 했다. 오늘날 이스라엘 쪽의 헤르몬 70 제곱킬로미터는 모두가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이스라엘 유일의 스키장은 해발 2080 미터 지점에서 1600미터 지점까지의 경사면에 개발되었다. 헤르몬 유일의 이스라엘 정착촌인 모샤브 느베 아티브는 해발 960 미터 높이에 위치하며, 1969년에 건설되었고 헤르몬 스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 지역 원주민인 두루즈 마을은 해발 1100-1200 지점에 위치한 마즈달 샴스와 아인 키느아 등이 있다.

 

2. 바샨(ןשׁב) 

 

오늘날 골란 고원이라고도 불리는 바샨(ןשׁב)은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현무암 지대로서 아람어로 ‘비트난(ןנתב)’ 그리스어로는 ‘바타네아(Βαταναια: Batanaea)’라고 불렸다. 아랍어 지명 ‘바타네’는 고원보다는 평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라틴어로 현무암을 바사니타스(basanitas)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바샨 지방의(תינשׁב)’라는 형용사에서 유래되었다. 영어로는 현무암을 바살트(basalt)라 부른다. 바샨의 지리적 경계는 북쪽으로는 헤르몬 산 기슭, 남쪽으로는 야르묵 강, 동쪽으로는 하우란 산, 서쪽으로는 갈릴리 호수 등이다. 바샨의 면적은 3,500 제곱킬로미터이며 이중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골란 고원은 1,120 평방킬로미터이다. 바샨은 동쪽의 하우란 산지와 트라코니티스(Traconitis), 중앙의 바샨 평원, 그리고 서쪽의 골란 고원 등으로 구분된다. 바샨은 신약시대에는 헤롯 빌립의 왕국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3. 갈릴리 산지
갈릴리 산지는 이스라엘에서 숲이 가장 많이 우거진 지역이다. 지중해 연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키 작은 상수리 나무와 소나무 숲이 우거졌으며, 평균 해발 600-800 미터의 고지에다 연간 강수량도 800-1000 밀리미터로 넉넉한 편이어서 목축을 주로 하고 산 사이의 골짜기 평야에는 대규모의 밀, 보리 농사도 가능한 지역이다. 갈릴리의 지리적인 북쪽 경계는 리타니(Litani) 강, 남쪽은 이즈르엘 평야, 동쪽으로는 요단 골짜기의 평지, 서쪽은 지중해변의 평야 지대이다. 리타니(Litani)강은 그리스어로는 레온티스(Leontes)로 불렸으며 베카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갈릴리는 위치에 따라 북쪽의 비교적 높은 지대인 상 갈릴리(Upper Galilee)와 남부의 하 갈릴리(Lower Galilee)로 구분되며 이 둘 사이의 경계는 갈릴리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아무드 하천에서 지중해변의 악고 평야로 이어지는 오늘날의 베잇트 케렘 골짜기이다. 지역명으로서의 갈릴리는 서기전 15세기 이집트의 툿트모세 3세의 가나안 원정 명단에 ‘Krr(케레르)’로 처음으로 등장한다 (Aharoni 1979: 162; Ahituv 1984: 94). 갈릴리 전체의 면적은 약 2260 제곱킬로미터이다.

 

가. 상 갈릴리(Upper Galilee)
 

상 갈릴리는 이 지역 최고봉인 해발 1206 미터의 메론 산(Mt. Meron)을 비롯해서 800 미터 이상의 고원지대이다. 이사야 9:1의 ‘이방의 갈릴리(םיוגה לילג)’가 상 갈릴리를 의미한다는 학설도 있다. 상 갈릴리는 갈릴리 전체 면적의 2/3인 1500 제곱킬로미터이며 이 중에서 오늘날 레바논에 810 제곱킬로미터,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에 속한 상 갈릴리 지역은 690 제곱킬로미터이다. 현재의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경계는 제 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에 팔레스타인을 차지한 영국과 시리아-레바논을 차지한 프랑스 사이의 협정(싸익스-삐꼬: Sykes- Picot)을 계기로 1920년대 초에 확정된 것이다.

 
나. 하 갈릴리(Lower Galilee)

 

하 갈릴리는 해발 400-600 미터 정도의 야산 지대로서 면적은 전체 갈릴리의 1/3인 760 제곱킬로미터이다. 갈릴리 산악 지대의 남부에는 지중해에서부터 요단 계곡에 이르는 이즈르엘 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이스라엘 최대의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이 곳이야말로 샘과 하천의 물이 풍부하고 연간 기온도 온화해서 문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이다. 

 

4. 샤론(ןורשׁ) 

 

지리적 배경

 

샤론은 이스라엘의 서쪽 지중해안과 동쪽 산악지대 사이에 위치한 해안 평야 중의 한 부분이다. 샤론 평야의 남쪽으로는 블레셋 평야가 이어지는데 이 둘 사이의 경계는 샘에서 흐르는 상시천이자 전통적으로 남북으로 이어지는 해안 길의 장애물인 야르콘(Yarkon) 강이다. 샤론의 지리적인 북쪽 경계는 해발 300-400미터 높이의 갈멜 산이지만, 솔로몬 시대의 제 3지방 행정구역에서 항구 도시 도르(Dor)가 빠진 점으로 미루어 타니님 하천으로 한정하고 있다. 샤론의 남북의 길이는 50킬로미터, 그리고 동서의 폭은 평균 17킬로미터 정도로 전체 면적은 약 850 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샤론은 지형적으로 볼 때 남북으로 평행되게 달리는 세 개의 통로와 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몇 개의 하천들로 구성돼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서쪽의 통로는 바닷가에서 형성된 낮은 사암의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천들의 경로를 막아서 늪지를 형성하기도 한다. 실제로 샤론 지역은 1950년대 이전까지도 늪지의 말라리아 모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 수 없는 불모지였다. 가운데 위치한 남북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붉은 모래로 이루어진 40-50미터 정도로 솟아 있는 낮은 구릉지대이다. 가장 동쪽의 통로는 중앙 산악지대로 이어지는 야산으로서 좋은 토양으로 이루어진 비옥한 지대이다.

 

지중해 쪽의 첫 번째와 두 번째 통로는 척박한 사암과 모래지역이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다만 키가 작은 상수리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동쪽의 통로는 폭이 6킬로미터쯤 되는 지역으로서 물이 잘 빠지는 비옥한 농토인데 주로 북부에 잘 발달되어 있다. 이곳에서 예로부터 밀, 보리 등의 곡물 재배가 가능했고 성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선화가 피어 있는 샤론은 바로 이 지역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또한 이 지역을 따라 남쪽의 이집트에서부터 북쪽의 시리아로 이어지는 국제 무역로인 해안길이 지나고 있는데 샤론과 북부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므깃도로 가는 세 갈래의 길로 나누어진다. 이 중에서 가장 남쪽의 길은 갓(Gath)에서 갈라져서 하데라 하천의 상류를 따라 동쪽의 도탄과 이블르암을 지난 이즈르엘 평야로 이어지며, 중간의 길은 이론 골짜기를 따라 아루나를 통과하여 바로 므깃도 남쪽으로 나오게 되며 가장 북쪽의 길은 요크네암으로 연결된다. 

 

주거 역사

 

샤론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지리적 조건이 상대적으로 열악하기 때문에 이 지역의 도시들은 남쪽의 이집트와 북쪽 시리아를 연결하는 국제 무역로인 소위 ‘바다의 길(Via Maris)’과 중앙 산지에서 발원하여 서쪽의 지중해로 흐르는 하천들을 따라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샤론 지역의 대표적인 고대 도시들은 초기 청동기 시대의 아펙을 비롯하여 중기 청동기 시대에는 대부분의 도시들인 소코(Socho), 텔 즈로르(Tel Zeror), 아펙(Aphek), 텔 메보락(Tel Mevorakh), 헤페르(Hepher), 텔 폴레그(Tel Poleg), 텔 그릿사, 텔 미칼 등이 발달하였다. 철기 시대에 들어와서는 블레셋 민족이 텔 카실라에 정착하였다. 솔로몬 시대에 샤론은 제 3주에 속하였으며 소떼를 많이 방목한 것으로 나타난다(대상 27:29). 앗시리아 식민지 시대에 샤론은 도르(Dor) 구역에 속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헤롯은 샤론을 본격적으로 개발하여 도라(Dora), 가이사랴, 아폴로니아, 안티파트리스 등의 네 도시를 중심으로 네 구역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특히 대규모 토목 공사로 12년에 걸쳐 건설한 로마식 대도시인 가이사랴 항구 도시는 당시 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했다. 

 

5. 중앙 산지

 

성서적 사건의 핵심지역은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 중앙 산지이다. 중앙 산지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주된 활동 무대인 세겜의 모레 상수리, 베델, 아이, 살렘,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 브엘세바 등이 위치한 지역이다. 또한 이 지역은 출애굽 이후 열 두 지파 중 중심적인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유다 지파가 차지한 곳이기도 하다. 사울 왕의 고향이 베냐민 지파 지역의 중심지인 기브아였으며, 다윗은 유다 지파의 한 소읍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헤브론에서 왕이 된 후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다. 솔로몬이 죽은 후 갈라진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중심지는 비옥한 골짜기 평야에 자리잡은 세겜이었으며, 그 후 디르사와 사마리아로 수도가 이전되었다. 역사적 아이러니 때문에 오늘날 중앙산악 지대의 대부분은 소위 ‘요단강 서안(West Bank)’이라 불리는 지역으로서 소수의 유대인 정착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유대광야(Judean Desert)

 

유대광야는 북으로는 베델산지에서 여리고로 이어지는 와디 켈트, 남으로는 디모나, 서로는 중앙산악 지대의 분수령, 그리고 동쪽 경계는 사해로서 전체 면적은 2,800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1998년에 체결된 평화협정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80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을 넘겨주기로 되어 있다. 오늘날 유대광야에는 카아브니(Kaabni), 사라야(Saraya)부족들의 베두인들이 살고 있으며 전체 숫자는 약 6,000명에 달한다. 이 곳의 연중 평균 강수량은 120-140 밀리미터 정도이며 적게 오는 지역은 50 밀리미터이다. 유대광야의 야생동물들은 표범을 비롯하여 늑대, 하이에나, 여우, 산양, 영양 등이 있다.

 

6. 요단 계곡: 요단원류, 훌라 호수, 갈릴리 호수, 요단강, 사해

 

요단 계곡은 지구상에서 가장 긴 골짜기인 시리아-아프리카 단층의 일부로서 요단강의 근원인 단(Dan)에서부터 상 요단강을 지나 해저 210미터의 갈릴리 호수, 그리고 하 요단강을 따라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지대인 해저 400미터의 사해에 이르는 약 200킬로미터 길이의 저지대이다. 요단 계곡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평야지대이며 늪지대의 말라리아 때문에 강변에 사람들이 살 수 없었다.

 

훌라 골짜기

 

단에서 시작된 상 요단강은 골란고원에서 흘러내린 용암에 의해 차단되어 거대한 늪지인 훌라 골짜기와 평야를 형성했다. 5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는 예로부터 우가릿 문서에서 ‘쌈코 바다(Yam Samcho)’라 불렸던 훌라 호수가 있었다. ‘훌라(הלוח)’는 아랍어 ‘훌레’에서 유래했으며, 이것은 탈무드의 아람어 ‘훌라타(אתלוח)’에서 유래되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서는 ‘울라타(Oulatha)’로 나타난다. 훌라 호수는 그리스 어로 ‘싸마코니티스(Samachonitis)’로 불렸는데 이는 우가릿 어의 ‘쌈코 바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이전에 발행된 성서 지리학 책들에는 ‘쎄메코니티스(Semechonitis)’로 자주 표기되기도 한다.

 

7. 네게브(Negev)

 

네게브는 원래 남쪽이라는 방향을 나타내는 말이며 이스라엘 남부 지역의 광야를 지칭한다. 네게브 광야의 넓이는 12,000 평방 킬로미터로서 이스라엘의 30퍼센트에 해당된다. 

 

8. 요단 건너편(트랜스 요단): 바샨, 길르아드, 암몬, 모압, 에돔

 

요단 건너편은 평균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고원지대로 형성 되어 있다. 요단 건너편에는 남쪽의 홍해에서부터 북쪽의 다마스쿠스까지 이어지는 ‘왕의 대로(King's Highway)’가 통과하는 곳으로서 목축을 생업으로 하는 유목민들이 일찍부터 정착하였다. 이 지역은 북쪽으로부터 차례대로 바샨, 길르아드, 암몬, 모압, 에돔 지역으로 구분되며, 이중에서 암몬, 모압, 에돔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적대 세력들이었다. 

 

길르아드(דעלꔹ, Gilead) 

 

히브리어 지명의 길르아드는 ‘갈-에드(דע־לג)’, 즉 ‘증거의 돌무더기’로서 라반과 야곱 사이의 계약(창 31:43-48)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원래 이 지역이 거친 산악 지대기 때문에 ‘거칠다’는 뜻의 ‘가아드(דעג)’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길르아드의 지리적 경계는 좁은 의미로 볼 때 북쪽으로는 야르묵 강, 남쪽으로는 얍복 강, 서쪽으로는 요르단 강, 그리고 동쪽은 광야 지대 등이다. 

 

암몬(Ammon)

 

암몬은 구약시대에는 라밧 암몬이라 불리는 도시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다. 오늘날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 도시는 얍복 강의 원천이 되는 수량이 풍부한 샘으로 인해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암만 시내 중심부에 있는 요새에는 중기 청동기 시대에 건설된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요단 건너편의 다른 세력인 모압이나 에돔과는 달리 암몬 세력의 지리적 경계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중심 도시 라밧 암몬에만 국한 되어 왕조를 형성했던 도시국가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모압(Moab)

 

모압은 해발 1000미터의 고원지대로 형성되어 있으며 서쪽으로는 사해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동쪽에는 넓은 아라비아 광야에 접해 있다. 모압의 남쪽 경계는 세렛 골짜기이며 북쪽 경계는 사해 북동부의 모압 평지로 불리는 곳으로서 암몬 세력에 접해 있다. 모압의 중심 지역은 아르논 골짜기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약 90킬로미터, 그리고 동서의 폭인 약 25킬로미터 정도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모압의 중심 도시는 디본(Dibon)이며 이밖에도 마다바, 헤스본, 크데못, 키르-모압 등이 있다.

 

에돔(Edom)

 

에돔은 요단 건너편 남부 지역에 위치한 해발 1500미터 이상의 고원지대로서 중심도시는 보스라였다. 

 

9. 시나이 반도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잇는 연결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면적이 약 6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삼각형의 지역이다. 시나이 반도의 북쪽 경계는 지중해이고 서쪽과 남쪽은 각각 홍해의 끝부분인 수에즈 만과 아카바 만이지만, 동쪽 경계는 이스라엘의 남부 네게브 광야로 연결되어 그 지리적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오늘날 지중해 연안의 가자 지구에서부터 에일랏에 이르는 약 200킬로미터 길이의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국경선이 일반적인 시나이 반도의 동쪽 경계를 이룬다. 성서시대에는 ‘이집트 하천’, 즉 오늘날의 ‘와디 엘-아리쉬’가 시나이 반도와 가나안의 경계가 되기도 했다. 시나이 반도는 지리적으로 북쪽의 사막지대과 중앙의 석회암 야산지대, 그리고 남쪽의 화강암 고산지대 등으로 삼등분된다. 대부분 모래로 덮여 있는 북쪽의 지중해 연안에는 이집트 삼각주 지역에서부터 가나안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국제적 무역로가 예로부터 발달했다. 이집트인들은 이 길을 ‘호루스(Horus)의 길’,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이를 ‘불레셋 땅의 길’(출 13:17)로 불렀다. 중앙지역에는 카데스 바르네아를 거쳐 이스라엘의 남부 네겝 광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남부지방에는 해발 1500미터 이상의 화강암 고산지대가 자리 잡고 있다. 10억 년 전부터 형성된 이 지역은 붉은 색의 화강암과 화산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장 높은 봉우리는 해발 2642미터의 카타린 산이며 시나이 산의 높이는 2285미터이다. 

 

시나이 반도에는 겨울철에 비가 약간 오며 대부분 10밀리미터 정도이지만 남부의 고산지대에는 이보다 많은 50밀리미터 정도이며 눈으로 내리기도 한다. 광야지역의 강우가 겨울철에 집중되다 보니까 한꺼번에 많은 양의 비가 내릴 경우 주로 골짜기에 위치한 베두인 마을을 덮쳐 큰 피해를 내기도 하며, 또한 한편으로는 일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현상도 3-4년의 주기로 발생하고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시나이 반도의 교통로는 북쪽의 ‘블레셋 땅의 길’(출 13:17)을 비롯해서 ‘수르의 길’(창 16:7), ‘세이르 산의 길’(신 1:2), ‘홍해 광야길’(출 13:18) 등인데 이 중에서 ‘블레셋 땅의 길’은 이집트에서 출발하여 시리아를 거쳐 소아시아의 힛타이트 지역과 메소포타미아로 향하는 국제적인 무역로 및 군사로였으며, 일정한 거리마다 요새와 정거장 시설을 갖춘 전략적인 도로망을 개발했다. 이 길은 신약시대에 들어 와서는 ‘비아 마리스(Via Maris)’, 즉 ‘바다의 길’로 불려졌다. 오늘날 이집트에서부터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교통로는 북쪽의 가자 지구에 위치한 라피악흐 통로와 남쪽의 아카바 만의 타바에서 에일랏으로 이어지는 통로 등 모두 두 군데이다.

 

 
시나이 반도에는 중기 구석기 시대인 20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이 석기류를 통해서 밝혀졌으며, 특히 서기전 3500년경 동석기 시대에는 나와미스(Nawamis)라 불리는 유목민들의 독특한 원형 석조무덤들이 시나이 반도의 중부와 남부 지방에서 주로 발견됐다. 북부 시나이 지역에 대한 조직적인 발굴 결과 이미 이집트 제 1왕조 이전시대부터 이곳에는 이집트인들이 진출해 있었으며 고왕국, 중왕국 시대에는 그 흔적이 미미하다가 신왕국 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인 무역로와 군사로로 개발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북쪽의 지중해변을 제외하고는 시나이 반도에 후기청동기시대(서기전 1550-1200)와 철기 I시대(서기전 1200-1000)의 주거 흔적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터키옥 광산

 

시나이 남부 고산지대의 서쪽은 예로부터 터키옥(turquoise) 광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연한 하늘색에서부터 녹색에 이르기까지 매우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상을 자랑하는 터키옥은 이집트 귀금속 장식에 있어서 신의 육체로 여겨지는 황금, 짙은 남색의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그리고 붉은 빛의 카넬리안(carnelian)과 함께 4대 중요 보물로 취급되던 매우 중요한 보석이었다.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최초로 개발한 지역은 와디 마아라의 광산이었다. 조직적인 채굴작업은 제 3왕조의 첫 왕인 사낙크트(Sanakht) 시대(서기전 2686-2667)부터 시작됐으며, 이 광산을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이집트인들은 이곳에 전체 면적이 6,000평방미터에 달하는 요새를 건설했다. 두 번째의 터키옥 광산은 세라빗트 엘-카딤에 위치해 있는데 근처의 와디 하시프(Wadi Hasif)에서 발견된 토기조각들의 분석 결과, 이미 동석기 시대인 서기전 3500년경부터 채굴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판명됐다. 이집트는 중왕국시대부터 세라빗트 엘-카딤을 집중적으로 개발했으며 제 12왕조의 아메넴헷트 1세(서기전 1991-1962)는 이곳에 하토르 여신을 위한 신전을 건설했고, 이 신전 유적에서 하토르 여신을 ‘터키옥의 귀부인’으로 표현한 상형문자의 기록이 발견됐다. 또한 이곳에서는 서기전 1600년경 기록된 세계 최초의 알파벳으로 알려진 원(原)-시나이어(Proto-Sinaitic)의 기록물이 여러 점 발견되어서 당시 이집트 상형문자권의 광산에서 일하던 가나안 노동자들이 좀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문자의 개발을 시도했던 흔적을 확인하게 되었다. 

 

카데쉬 바르네아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 기간 중 대부분을 머물렀다는 카데쉬 바르네아는 시나이 반도 북동 지역의 베두인 중심지인 쿠세이마(Quseima) 남동쪽 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작은 오아시스 지역으로서, 쿠데이랏트 샘(Ain Qudeirat)의 물을 이용한 소규모의 작물재배가 가능한 곳이다. 1956년과 1976-82년에 걸친 조직적인 발굴결과 이 요새는 이스라엘 왕국의 남쪽 경계를 수비하기 위해서 서기전 10세기 솔로몬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확인됐다. 카데쉬 바르네아의 중요성은 이 요새가 서기전 8세기 우시야, 서기전 7세기 요시아 왕에 의해 각각 재건된 점으로 미루어 잘 알 수 있다. 

 

쿤틸랏트 아즈루드

 

카데쉬 바르네아 남쪽 5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쿤틸랏트 아즈루드는 왕정시대의 유다왕국의 남쪽 요새로 개발된 곳이다. 서기전 800년경으로 추정된 기록물에는 ‘야훼와 그의 아쉐라(התרשׁאו הוהי)’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사마리아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에찌온 게베르

 

에일랏 남쪽 11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제지랏트 엘-파라윤(파라오의 섬)에는 서기 11세기 십자군들이 건설한 해상요새가 자리 잡고 있다. 최근의 해저 발굴 결과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200미터 떨어진 육지와 방파제로 연결하여 건설한 솔로몬 시대 타르쉬쉬 해운회사가 있었던 에찌온 게베르(Ezion Geber)로 보고 있다.

 

시내산(Mt. Sinai)

 

오경의 야훼(J) 전승과 제사장(P) 전승에서 시내 산으로 표기되는 모세의 산은 엘로힘(E) 전승과 신명기(D) 전승에서는 호렙 산으로 나타난다. 모세가 야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는 시내 산의 위치에 관해서는 성서 상으로 이집트의 나일 삼각주 지역과 가나안 사이에 있다는 것 외에는 뚜렷한 단서가 없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여러 학자들이 각각 다른 지역의 시내 산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고고학자인 아나티(E. Anati)는 자신의 체계적인 답사와 유물 수집을 통해서 이스라엘 남부 지역의 카르콤 산(Har Karkhom)을 시내 산으로 여겼다. 또한 모세가 미디안 지역에서 야훼를 만난 것에 착안하여 요르단 남부와 사우디 아라비아 서북부 지역에서 시내 산을 찾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아마도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서기 1세기 바울이 시내 산을 아라비아, 즉 나바테야(Nabatea) 왕국에 위치한 것으로 묘사하는 것(갈 4:25)에서 힌트를 얻은 것 같다. 오늘날 제벨 무사로 불리는 시내 산은 이 지역에 기독교가 정착한 서기 3세기부터 비롯됐다. 서기 250년경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를 피해 알렉산드리아 지방에서부터 피신해 온 이집트의 기독교인들은 시나이 반도 남부의 가장 큰 오아시스인 와디 페이란(Wadi Feiran)에서 공동생활을 영위했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부터 남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해발 2070미터 높이의 세르발 산(Jebel Serbal)을 시내 산으로 여겼다. 하지만 와디 페이란은 로마 군인들에게 쉽게 발각될 수 있어서 수도자들은 좀 더 산속 깊은 곳으로 이동했고 근처에 샘이 있는 한 골짜기에 정착했다. 그들은 샘가에 자라는 떨기나무를 호렙 산의 모세(출 3:4)와 연관시켰고, 이 장소를 신성시하기 위해 성소와 망대 등을 건설했다. 서기 4세기 로마제국에 그리스도교가 공식종교로 인정되면서 이곳에 성모 마리아 기념교회가 건설됐다. 서기 6세기 중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제국의 남쪽 변방인 시나이 반도를 지키기 위해 일종의 전략적인 요새로서 이곳에 대규모 요새 수도원을 건설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수도원은 서기 548-565년 사이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서기 7세기 무슬림들이 시나이 반도를 점령했지만 수도사들의 친 이슬람 정책으로 수도원이 보호될 수 있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아랍인들이 수도원 남쪽의 해발 2285미터 봉우리를 ‘제벨 무사’, 즉 ‘모세의 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서기 1000년경 카타린 성녀의 유해가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해발 2642미터의 산 봉우리에서 발견되면서 이 봉우리를 카타린 산이라 부르게 됐다. 이집트 콥트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서기 250년경 태어난 카타린은 알렉산드리아 귀족 출신의 처녀로서 수도자 생활을 하다가 서기 305년 막시마누스 황제에 의해 순교 당했다고 한다. 서기 1000년 이후 카타린 성녀의 유해가 수도원으로 안치되면서 성 카타린 수도원으로 불려지게 됐다. 서기 726년부터 시작된 성상파괴 운동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원의 구내 도서관에는 희귀한 고대의 성화들이 수 백점 남아 있으며 세계 최초의 그리스어 성서인 시나이 사본(Codex Sinaticus)이 이곳에서 19세기 중엽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독일의 티셴도르프가 1844년부터 15년에 걸친 노력 끝에 거의 탈취하다시피 빼돌린 이 소중한 성서는 오늘날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과 함께 최초의 신약성서의 사본으로 손꼽힌다. 오늘날 시나이 산을 찾는 순례자들은 해발 1500미터 지점에 위치한 성 카타린 수도원에서부터 등산을 시작하기 때문에 실제로 오르는 높이는 약 800미터 정도이다. 마지막 750여개의 돌계단을 올라 정상에 오르면, 그 곳에는 성 삼위일체 교회당과 이슬람교의 사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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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배경사 요약

 

1.메소포타미아의 역사

1)아라랏 산에서 짐승 사냥으로 먹고 살았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북쪽의 산악 지방으로부터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거쳐 페르샤만쪽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곳에는 우바이드족이라고 알려진 백성들이 처음 등장을 했다고한다. (고고학적 유물) 2)우륵시대 : 주전4000년 경의 수메르족의 문명이 시작면서 메소포타미아 하류의 우륵, 와르카(창10:10의 에렉) 수사, 갈대아 우르(창11:28,아브라함의 고향) 테페 고라 등지에서 촌락을 형성하고 거주하던 이들의 문명은, 상형문자 10진법과60진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늘의 신 아누와 어머니신 이난나 아카드어로 어스탈을 숭배 하였고 아누 신전은 벽독로 만든 인공대지 위에 건축되었고 둘레에 계단이 있는 피라및형의 신전의 원형이 되었다. 통치자는 (루갈: the lugaal, 위대한 사람이라는 뜻) 정치와 종교 분리가 없는 신정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3)젬뎃 나슬시대 : 주전3000-2800년 특별한 기록이 없다.

 

메실림시대 : 주전2800-2500년.

 반상형문자단계에서 쐐기모양의 설형문자단계로 발전, 기술과 공예가 발달하였고, 중심도시 국가인 우륵의 경우 10킬로미터의 담벽과 900개가량의 망대가 건설되었다. 모래땅을 파서 그 위에 신전을 건설. 도시생활의 중심으로서의 신전의 역할이 약화되고 대제사장과 함께 왕이 부각되면서 왕조들의 등장. 기스의 메시림 왕이 활동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메실림 시대라고 부름.  우르의 첫왕조시대 : 주전2500-2360년 메사니파다가 우르의 첫 왕으로 등장 80년간 통치. 우르 근처의 알 우바이드에 신전건축 니훌삭 여신에게 봉헌. 우르 외에도 마리, 앗수르, 니풀, 수룹팍, (노아의 고향으로 알려짐) 촌락들이 조금 확대 되었던 것을 국가라고 하였다.

 

아카드시대 : 주전2360-2180년

셈족의 사르곤1세가 창립. 동쪽으로는 엘람. 북쪽으로는 수바르투. 서쪽으로는 수리아와 소아시아까지 5400명인구, 다람신이 엘람에서 32명의 동맹군을 퇴치. 구트족에게 멸망. 수메르국 달과 별을 신으로 숭배 태양신 샤마스 숭배.

 

우르3세시대 주전2060-1950.

왕의 이름 안에 신 이라는 이름이 많이 들어간 것을 볼 때 신의 숭배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엘람은 아모리 족속으로 이루어 져있어서 북서쪽의 셈족 방언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됨. 지중해 해변가에는 가나안 족속이 살고 있었다. 가나안은 자주빛 빛깔의 땅인 베니케 본토를 말한다.애굽의 영향권안에 있었다.

 

이신 라르사시대: 주전1960-1830년

 입비신을 폐위시킨 아모리족속은 한 무리는 마리 출신의 이스비 이라의 영도하에 이신에서 통치했다. 라르사 에서도 이신과 같은 10명의 왕이 세워졌다. 이신의 5대왕인 리핏 이스탈은 최초의 법전 우르남부 법전을 집대성하였다. rimsin에게 멸망 rimsin은 바벨론에게 정복당함

 

 

2.고대 바벨론시대: 주전1830-1530.

사붐을 거쳐서 함무라비가 왕이됨 라르사를 정복하고 함무라비는 우르남부법전과 리핏 이스탈 법전을 포함하는 함무라비법전을 집대성하였다. 모세의 법전보다 먼저였지만 명령형으로 되어있는 모세의 법전과는 다르다. 노예의 인권보호를 중요시하고 있었고 신랑이 신부 아버지에게 값을 치루고 신부를 데려왔고 신부는 결혼 지참금을 가지고 시집을 갔다. 아내는 이혼을 할 수 있었고 이혼 후에는 친정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결혼은 문서로 된것만 유효.

 

 

3.고대 앗수르 왕국 :주전1950-1677년

200년 어간 .아카드시대 사르곤 왕국의 속국으로 통합되었다가 1950년에 우르의 3왕조가 멸망당하자 독립. 일루수마를 첮왕으로 출발.


마리왕국: 주전.1695년.
약기들림  야스마-아닷 1732-1715년. 60평방킬로가 넘는 왕궁을 마리에 건립.

 

4.힛타이왕국 주전: 1800-1200년.

 

성경의 햇족속으로 명명됨. 아니타스 치하에서 히타이트족이 주전2000년경 통일왕국을 형성.  호리족속.주전3000중엽-1350.년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지방에 주로 거주했던 샘족계통의 인종으로서 미타니왕국의 지배적인 인종. 미타니왕국의 수도는 하란. 유프라테스 중류계곡을 중심으로 형성. 앗수르를 지배하기도 함.  카시트왕국 : 주전1530.-1150. 바벨론의 함무라비 후계자들이 약해지고 무능해진 틈을 타서 메소포타미아북서쪽에 왕국을 세움. 앗수르가 연약해진 틈을 타서 일시적으로 번영을 누렸다가 바벨론왕조를 다시 일으킨 엘람족에의하여 1155년 멸망을 고함. 바벨론이 고난을 받은 이유는 신 앞에서 도덕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5.중간앗수르: 주전 1356-932년

 

호리족속의 미타니왕국의 속국으로 전락했던 앗수르 왕국은 미타니의 혼란기를 틈타서 왕국을 제건. 앗수르 최초의왕  우발릿1세. 바벨론을 침략, 살만에셀1세 때 미타니의 반란을 진압  1128년 토착민이었던 느부갓네살 1세가 일어나 카시트왕조를 무너트리고 토착바벨론 왕국을 제건함. 디글랏빌레셀1세. 1116-1078에 등장하여 앗수르의 군사력을 절정에 이르게 하고 무자비한 살인군대를 형성한다. 침략과 정복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정복한 거민들을 먹여살리며 인구가 늘어 가지만 정복할 곳이 없자 자멸을 하게 되었던 앗수루.   

 

6.새 앗수르의 제국 : 주전932-612년

 

주전 932년에 앗수르-단2세가 즉위하면서 앗수르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살아났다. 단의 앗수르에 이르러 앗수르 제국은 전성기에 들어섰다. 서쪽으로는 소아시아까지. 동남쪽으로는 바벨론을 침공하여 평화조약을 체결. 앗수르의 왕들은 온 우주의 왕으로서 경배를 받고자 하는 교만을 보여주었으며. 무자비하게 적들을 학살했다. 도시를 불태우고 반항하는 적들을 산 채로 껍질을 벗기고 목을 자르고 여자와 어린 아이들은 끌고 가거나 불 태워 버렸다.(영화 아포칼리포와 유사한 내용) 이런 잔인한 행위는 우레의 신인 앗수르 신에게 드리는 예배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앗수르의 왕권이 악화될 기미만 보이면 소국들이 끓임없는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앗수르의 군대는 끊임없이 싸워야 했고 전쟁비용으로 국가자원을 탕신 하여 자멸을 하게 된다. 살만에셀3세는(858-824)은 생존을 위하여 정복을 계속하고 정복에서 얻은 물자에 명맥을 이어가는 정치를 하였고 바벨론까지 정복한다. 앗수르내에서 형제의 왕권다툼이 벌어지고 앗수르바니팔이 죽은 후 앗수르는 엄청난 전비를 충당하지 못하고 항복해온 사람들을 먹여 살릴 힘도 없었다. 이사이에 바벨론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을 당하고 메데와 갈대아연합군이 힘을 규합하여 앗수르를 공격했고 바벨론도 앗수르를 공격했다. 앗수르는 애굽과 연합하여 대항을 하였지만 패전을 하고 앗수르는 종말을 고했다.(612년) 

 

7.새바벨론제국(주전625-539)

 

나보폴라살의 등장으로 새바벨론제국이 등장한다. 앗수르보다 힘이 약했던 바벨론은 군사력보다는 외교력으로 제국을 유지한다. 메데와 조약을 맺고 북부메소포타미아지배를 허용하고 중부바벨론과 수리아지방을 통치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605년에는 애굽까지 정복을 하고 바벨론의 무너진 신전과 성벽을 재건하였다. 주전501년에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여호야긴 왕과 그의 모친을 인질로 끌고 가고 왕으로는 시드기야를 세웠다. 9년 후 시드기야가 애굽의 바로 호프라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멸망을 시키고 주전586년에 유다왕국은 종말을 고하고 시드기야는 아들들이 처형을 당하는 것을 본 후에 장님이 되어 느브갓넷살에게 끌려갔다. 아벨 마르둑이 왕이 되었을 때(561-560)여호야긴 왕을 특사로 풀어주었다. 이후에 유다는 바벨론의 한 지방처럼 되어 버렸다. 애굽의 지지를 받던 두로는 13년을 방황하다가 멸망을 당했다. 고레스의 영도아래 페르시아의 세력이 점점 증대하고 있었고 페르시아가 동쪽 통상로를 차단하자 바벨론은 서쪽과 남쪽으로 통상을 확대해야 했다.  나보니두스가 신년축제에 참여하기를 소홀히 하자 백성들이 등을 돌렸고 티그리스강 동편에 있던 구티움영토를 다스리던 구바루가 고레스와 합쳐버렸다. 구바루군과 나보니두스군이 싸우게 되었고 이틀 후에 페르샤군이 싸움도 하지 않고 승리하여 주전539년10월29일에 고레스는 바벨론에 해방자로 환영을 받으면서 바벨론에 입성했다.

 

8.애굽의 역사

 

애굽왕조는 주전3000년경에 시작되어 주전322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정복 될 때까지 30대가 계속되었다. 원래 메소포타미아 북부산악지역에서 살던 종족들이 아프리카 북동부 산악지대로 내려왔고 이들은 산악지대의 물이 마르고 사냥하는 들짐승만 으로는 식량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나일강변으로 내려 왔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주전3000년 경 한 가족이 애굽전체를 정복하는데 성공을 하고 이들은 나일강 하류멤피스에 도읍을 정한다. 주전2700년경에 제3왕조가 등장하면서 애굽의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되고 이 무렵부터 피라 및 시대가 시작된다. 왕이 신으로 숭배되며 신정사회에서 왕의 아들들이 정부의 중요한 직책들을 맡았으며 왕과 왕자들이 사후 세계에서도 영원히 다스려야 했기 때문에 피라및이 건설되었다.  지방의 귀족들이 왕의 불멸을 불신하고 자신들의 독립된 무덤을 세우기 시작했다.

 

제6왕조 이후에 무력한 왕들이 등장하여 애굽전역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이전에는 장례식이 왕만이 누리는 특권이었으나 모든 귀족들의 권리가 되었고 선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을 때 오시리스 신이 될 것이며 영원한 행복에 들어갈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팔레스타인과 수리아는 애굽의 문화적지배권하에 있었으나 애굽이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장악하시는 못했다. 제12왕조가 약화되자 셈족계통인 힉소스족이 무력으로 침략하여 애굽을 통치했다. (주전1720-1570)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가 총리대신이 된 것이 이 시기인데, 애굽왕실이 요셉을 총리대신으로 임명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셈족계통이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는 학자들이 있다. 나중에 힉소스 왕조가 몰락하고 애굽 본토 출신의 왕권이 들어서자 셈족 출신의 히브리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다시 살아나 박해가 시작되었다. 박해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미디안에 있던 모세가 애굽에 내려가야 했다. 힉소스 왕조는 삼각주를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테베스스로 부터는 공물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힉소스 왕조를 통하여 바알,호론, 레세프, 아스다롯, 아나스, 아세라, 신과 같은 가나안신들이 애굽에 소개되었다. 출애굽기 1장8절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아모세1세를 가르킨다.

 

힉소스왕조 말기에 테베스스의 왕인 카-모세(1580)가 새로운 전쟁무기들을 수입하여 힉소스 왕가를 삼각주까지 밀어내는데 성공을 하였다. 힉소스왕조에 의하여 외국 통치를 받아본 애굽인들은 충격을 받았고 마음 속에 제국주의적인 애국주의 감정이 찾아 왔다.  새 왕이 등장한 후에 요셉의 주선으로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을 포함한 셈족들은 노예나 농노의 신분으로 전락한체 타니스에 남아 있었다.  애굽 안에서는 사회구조가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제정일치 사회가 제국의 규모가 커지면서 전문화되고 직업화되면서 제정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람세스 1세는 수도를 삼각주에 있는 라메세스로 옮기고 람세스 1세는 제국이 재건을 목표로 하여 수에즈 경계로부터 갈릴리의 산악지방까지 출정을 하여 반란을 일으킨 팔레스타인 군주들을 진압했다. 모세가 애국에서 태어나고 애국에 내려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왔던 때는 제 19왕조 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애굽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앗수르의 산헤립은 유다를 침공했을 때 유다가 애굽을 의지 하는 것은 부러진 갈대를 의지 하는 것과 같다고 설득했다.(사36:6)산헤림은 주전 700년에 팔레스틴에 있는 애굽군을 패퇴시키고 진군을 하다가 688년에 애굽변방에서 재앙을 만나서 더 이상 진군을 하지 못하게 된다.

 

호프라왕이 유다를 선동하여 함께 바벨론을 항거하였으나 오히려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포로의 주 원인이 되었다. 이후 골륙상전에 빠진 애굽은 페르시아에게 점령당했다. 주전525년에 애굽은 페르샤의 캄비세스의 손에 넘어갔고 다리우스1세가 애굽의 합법적인 왕이 되고자 선정을 베풀고 토착민 제자장들에게 신전을 건축하게 해주었다.  다리우스가 죽자 애굽의 반란이 있었지만 크세르크세스1세가 진압을 하고 341년까지 애굽은 페르샤의 지배하에 있었다.  주전333년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 애굽으로 향했고 애굽에 있던 페르샤총독은 항복을 하고 주전332년 알렉산더는 애굽의 신들을 찾아가서 경의를 표하고 알렉산드리아라는 국제적인 대 도시를 세운다.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애굽에 존재하지 않던 세계적인 대 도시로서 헬라문화와 동방문화를 접목시킨 문화의 중심지였다. 알렉산더사후에 복중의 아들이 상속자였으나 이들은 원로 장군들의 손안에 있었다.

 

주전306년 제국은 분열되어서 애굽에는 프톨레미 장군이 등극을 하였고 프톨레미1세는 고대 애굽의 종교를 존중하고 신전을 건축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뮤스 신전박물관을 세우고 특별한 학자들을 상주시켜서 사본연구와 비평을 하게 하였고 50만개의 두루마리를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모아 들였다. 내부문제로 격심한 집안 싸움을 하다가 약화된 프톨레미 왕조가 신흥세력인 로마에 지원을 호소한 이후에 사실상 로마의 속국이 되어 버렸다. 약 한세기 정도 외교를 이용하여 애굽의 독립을 유지시켰던 크레오파트라가 시저와 안토니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애굽을 지키려 했으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패전을 하고 주전20년에 자결을 하고 애굽은 완전히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9.페르시아 제국의 역사

 

페르샤제국은 고레스의 시작이며 이스라엘의 해방이야기이다. 고레스의 부친은 캄비세스. 모친은 메데 왕국의 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전559년 고레스는 40세의 나이로 메데제국의 속국인 안산이라는 작은 나라를 상속받아서 통치를 하고 있었다. 당시 바벨론에는 나보니두스가 왕위에 있었고 자신의 취미생활에 도취되어서 바벨론제국의 국력을 약화시킨 상태였다. 주전550년에서 549년에 고레스는 메데에 반란을 일으키고 메데의 왕이 되어서 소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을 점령하여 군대만 관리하고 그 나라의 종교와 왕권은 그들에게 위임을 하는 관대한 정치를 하기 시작한다. 낙타를 적군의 말들에게 보여서 말들이 도망을 가도록 하는 전법을 사용하기도 하며 세계를 정복해 나가는 고레스는 바벨론정복을 계획하게 되었고 당시의 바벨론은 벨사살의 통치아래서 바벨론의 독직과 악정이 반복되어 거의 기아상태로 전락한 상태였다.

 

느브갓네살의 유능한 장군이 고레스에게 투항을 하고 바벨론의 제사장들마저 왕에게 등을 돌린 것이 바벨론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벨사살은 죽게 되었고 바벨론 백성들에게 해방자라는 칭송을 받으며 입성을한 고레스는 바벨론에 대하여도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앗수르의 정책과는 달리 고레스는 주민들을 추방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포로로 고향을 떠나오게된 실향민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정책을 취했다. 고레스의 관대한 정책은 인도주의 적인 발상이었다기 보다는 페르샤의 정복정책에 협력을 하도록 하는 고도의 정치적전략 이었다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이러한 전략으로 고레스는 그리스 연합군의 함대에 필적하는 강력한 함대를 거느리고 있는 페니키아의 협력을 얻어냈다.  고레스의 포로민귀환 정책은 유대인에게도 적용되었고 바벨론포로로 잡혀온 유대인 포로중에는 바벨론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니엘서나 에스더서의 이야기나 페르샤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던 느헤미야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고레스는 유대의 포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한 하여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예루살렘성전 제건을 허용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 또한 바벨론과 애굽 그리고 예루살렘의 위치 와 페르시아의 위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도를 보면 고레스의 통찰력 있는 군사정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약 오만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하게 되었고 더 이상 바벨론의 포로가 아닌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사는 것이 귀환을 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 보다 안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귀환자들의 통솔은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에게 위임이 되었다. 즉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의 통치아래서 바벨론의 정치적 직위를 담당할 수 있었던 환경이 주어졌던 환경이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마리아 인들은 페르샤 왕국에 뇌물을 주고 자신들을 동참시켜주지 않는 성전건축을 중단 하도록 방해를 하였고 이들의 작전이 성공하여 성전건축은 18년 동안이나 중단이 되었다. 고레스는 애굽정복을 부친의 이름과 같은 아들 캄비세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동쪽 국경에서 일어난 유목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섰다.

 

이 전토에서 고레스는 부상을 입고 사망을 했다. 고레스는 페르샤의 사상을 강요하지 않았고 메소포타미아 ,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이스, 인디아의 각 문명들을 종합하려는 노력을 했었고 정복민들에게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았다.   캄비세스가 왕이 된지 4년만에 애굽정벌에 나섰다. 캄비세스는 애굽의 바로로 등극을 하고 자신이 태양신 레의 아들임을 발표했다. 캄비세스는 애굽의 서부인 암몬의 서부인 오아시스를 정벌하기 위하여 5만명의 대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원정대는 사막에서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는데 아마도 모래폭풍에 집어삼켜 졌을 것이라는 가능성과 추정이 압도적인 견해이다. 캄비세스는 에디오피아 원정에도 나섰는데 진군도중 식량이 동이 나서 철수를 해야 했다. 이사이에 본국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간질병으로 고생을 하던 캄비세스는 말년에 정신이상증세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그가 아버지 고레스와는 달리 애굽의 종교와 문명을 탄압하고 난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살인지 마상의 부상때문인지 죽었지만 그의 충성스런 부하들은 반란을 한 새 왕(가마우타)을 체포해서 처형을 하였다. 캄비세스의 뒤를 이어 다리우스가 왕이 되었고 다리우스는 페르샤의 일곱 귀족이 연합을 하여 반란으로 왕위를 차지한 가마우타를 제거하고 일곱귀족들은 태양이 떴을 때 가장 처음에 우는 말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되기로 하였는데 다리우스의 마부가 다리우스의 말을 먼저 울게 하여 다리우스에게 왕위가 주어졌다고 한다.

 

다리우스는 두달만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고 왕위를 굳혔다. 다리우스는 반역자들에 대하여 코와 귀와 혀를 자르고 눈알을 파내고 족쇄를 채워 왕실법정에 두는 잔인한 형벌을 내림으로서 반역에 대하여 경고했다. 다리우스는 거대한 비문을(베히스툰)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이 비문은 한 개의 길이가 18미터에 달하며 고대 페르샤어, 고대 바벨론, 엘람어, 등으로 쓰여 있다고 한다.  다리우스 제2년에 중단 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학개와 스가랴의 지도하에 재개되었다. 유대와 베냐민의 대적들은 페르샤총독 닷드네에게 유대인들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발을 했다. 닷드내는 반역의 기미만 있으면 처벌하려고 현장을 방문하여 질문을 했다.(스5:3)“누가 너희를 명하여 이 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 이 질문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고래스의 명령이 있었음을 말하고 조사를 원했다. 조사를 진행한 다리우스는 고레스의 조서를 발견하고 성전재건을 막지말고 오히려 왕의 재산 중에서 경비지원을 하도록 지시를 했다.

 

다리우스는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했으나 일곱귀족에 의하여 제약을 받기도 하였고 여섯 귀족은 거대한 땅을 하사 받았으며 왕이 왕가 출신이 아닌 여자와 결혼을 할 시에는 여섯 귀족의 딸들과만 결혼이 허락되었다. 법에 관한 일은 일곱재판장이 함께 협의를 하여야 했고 왕 자신이 내린 명령은 자신도 어길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다리우스의 신하들은 다니엘을 잡기 위하여 신상에 절하라는 명령을 다리우스의 입으로 말하게 하고 어인을 찍어서 변개치 못하는 규례를 만들었다. 다리우스가 마게토니아를 얻은 사건은 오리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의 결속력을 강화시켰고 다리우스는 마라톤전투에서 아테네군과 접전을 벌여 대패를 했다. 이 때 애굽은 노골적으로 다리우스에게 반기를 들었고 애굽의 반란이 진압되기 전에 다리우스는 사망했다. 다리우스가 건축한 페르세폴리스의 왕궁은 위대한 고대 건축물중의 하나다. 성경의 아하수에로왕으로 알려진 크세르크스가 35세의 나이로 다리우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주전486-465) 이 때 바벨론과 애굽의 반란들이 지속되었었다. 이 러한 상항들을 종식시킨 크세르크스는 그리스정벌을 다시 시작하였고 내부의 밀고자와 폭풍우등의로 많은 고초를 격으며 아테네까지 입성하여 신전을 불태우기 까지 하지만 살라미스에서 페르샤해군의 절반도 안 되는 그리스군에게 대패를 당했다. 그리스군은 그리스의 도시들이 페르샤에 의해서 불타는 광경들을 보며 사생결단으로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었다.

 

패전후 크세르크세스는 14년간 통치를 하다가 아르타바누스에게 암살을 당했다. 정숙한 왕비 와스디를 폐위 시키고 잔치를 벌이면 6개월간 지속하는 한량이기도 했던 크세르크스는 조로아스타 교도였고 허식에 빠져서 과시를 좋아했고 아첨하는 신하들의 밀고에 민감했다고 전해진다. 즉위 20년 만에 그의 영화는 셋째아들에게 암살을 당하므로 막을 내린 것이었다. 뒤를 이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아닥사스닥)가 왕위를 이었고 이 무렵 에스라가 유대인을 다시 유다로 귀환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고 에스라는 유대인 1500명을 모아서 일곱달에 걸친 긴 여행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 유대인의 잡혼문제 때문에 총회를 연다. 그리고 성전보수를 계획하였지만 또 다시 유대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중지되고 이 때 느헤미야가 술 맡은 관운장으로서 청원을 하여 휴가를 얻어 성전보수작업을 마친다. 수산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다시 잡혼문제와 율법준수가 이행 되지 않는 것을 놓고 고민을 하던 끝에 유대자녀들이 이방인 어머니의 방언을 하게 되는 문제들을 방관 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신앙생활을 개혁하였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3세는 왕위를 계승하자마자 모든 형제자매들을 살해하고 애굽반란에 동조했던 시돈을 불태우고 애굽을 다시 정복한 뒤 그리스와의 일전을 벌인다. 아테네가 페르샤와 동맹을 체결하자 마게도냐의 왕 필립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이를 적대행위로 보고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둔다.  (주전 338) 주전336년에 는12:22의 다리오와 동일한 인물인 다리우스3세가 사촌과 숙부를 살해한 바고아스를 독살해 버리고 같은 해 알렉산더가 마게도냐의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명대로 페르샤를 쳐서 2년 후 페르샤의 중심부를 점령한다. 다리우스 3세는 피신처에서 사촌에게 살해를 당하고 그가 죽으면서 페르샤 제국은 멸망을 당한다. 페르샤시대의 유대인의 근황은 사마리아인, 엘레판틴의 유대인, 회당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확인 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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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이야기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신국론)

 어거스틴이 기록한 '하나님의 도성'은 총 22권으로서 방대한 분량과 방대한 주제와 내용, 그리고 어거스틴의 신학과 철학과 사상, 그리고 해박한 지식이 총망라되었다고 볼 수 있고, 또한 그의 통찰과 지혜가 드러나는 책이다. 이책의 저술 기간만 해도 14년이 걸린 어거스틴의 역작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총 22권으로서 1-10권 까지는 기독교에 대한 변증에 관련된 것이고, 그리고 11-22까지는 두 도성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로마제국의 강력함이 주후 410년 얄라릭이 이끄는 야만족(고트족)에 의해 맥없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심한 혼란과 회의를 느끼고 로마제국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절대에 가까운 신앙을 가지고 있던 그가 지사의 나라는 영원 할수 없다는 것을 크게 인식하고 '하나님의 도성'을 기록하게 된다.

로마에 쳐 들어돈 야만족들의 침입과 약탈에 대한 로마 자체 내의 책임론이 심하게 일어나고, 또한 그 책임이 부당하게 기독교인들에게 돌려지는 것들에 대해서, 기독교를 변호하고 로마의 위기는 야만족의 침입 이전 부터 선재되어 있음과 로마의 도덕적인 타락이 원인이고 그것은 또한 로마의 참된 종교의 부재가 원인이라고 변증함으로 기독교를 보호하고 또한 로마의 자체의 우상숭배와 무지함을 비판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로마의 종교와 문화,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은 기독교인들에 비난이 돌려져서는 안될 것들에 대해서 명확히 선을 긋고 있다.

야만인들에게 공격을 당한 후 로마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비난을 했는데, 기독교인들은 로마가 부당하게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그때 기독교인들이 베푼 관용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교회로 피신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품어주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비난하는 그들은 어리석음과 무지와 착각의 산물인 것이. 로마는 이미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종교와 도덕의 타락이다. 그것은 로마 전역의 문제이다. 이것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비기독교적이고 반 기독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설명하는 것과 또한 기독교인들에게는 힘과 위로를 주었다.

그리고 나서 어거스틴은 2에서는 두 도성을 구별한다. 이 두 도성은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civitas terrena)인데 라틴어의 키비타스(civitas)라는 단어와 개념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이 도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또한 이 도성의 혼합되어 있는 지상의 삶의 실상과 또한 교회에 대한 인식과 실재들을 다루고 있다.

어거스틴은 이 지상의 현실 정치에 대한 입장과 그리스도인의 입장들을 명확히 했는데, 그것은 이전의 현실 도피적인 신앙과 내지는 현실 적응주의나 타협과 동화주의를 배제하고 균형잡힌 사상을 갖는다. 현세정치 제도는 죄의 산물로 생겨난 것이고 인간의 타락 이후에 인간의 이기심과 죄, 지배욕에 대해서 이것을 어거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성이 이루어지기 전에 나타나는 과정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또한 그것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거나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닌 입장을 견지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사람들도 이 세상의 도성의 정치에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에서 살고 있는 한 이 땅의 유한하지만 선인 것을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하다거나 절대적인 성격을 갖지 않기 때문에 이 땅의 선한 것일 할지라도 안주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에서의 행복한 결말에 대해서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지막 최고의 선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채워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철저히 나그네적인 삶이요, 순례자의 삶이다. 시간과 영원의 관점에서 지상의 도성과 삶을 조명하고 또한 영원의 관점에서 상대적이고 시간적인 세속의 삶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상대화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가 사용하는 키비타스(civitas) 개념과 그로 인하ㅏㄴ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차이점은 신플라톤주의 영향과 플라톤의 영향이 있다. 플라톤은 참된 이데아와 이 세상이 참된 이데아의 그림자라고 생각했다. 이데의 세계는 영원성과 불변성, 그리고 존재론적인 특징을 갖는 반면, 물질 세계는 시간성, 그리고 변하는 속성과 비존재적인 특성을 갖는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도성과 신의 도성을 성격을 구별하여 정의 한 것이다.

두 도성의 기원에 관해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은 아벨에서 기원을 찾고 지상의 도성에서는 가인에게서 기원을 찾는다. 그리고 가인은 지상의 도성인 "에녹성"을 지은 최초의 지상의 도성을 건축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보고 바른 사랑을 카리타스로, 그릇된 사랑을 큐피디타스로 구별한다. 하나님의 도성의 사람들은 전자로, 지상의 도성의 사람들은 후자로 본다. 어거스틴은 국가적 개념에는 키케로의 것을 따고 있지만 국민의 개념은 바로 사랑으로 특징 짓는 것으로 나누고 있다.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기원과 전개는 바로 그것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연결되어 나타나고 또한 그 결말은 확연하게 나누어 진다. 지상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이 지금 혼재되어 있으나 결말은 확연하게 나누어 질 뿐 만이 아니라 결말의 차이가 있다. 이 땅에 있는 지상의 도성을 절대화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심판에 이른다. 그러나 이 세상의 상대성과 유한성을 알고 이 땅 지상의 도성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도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참되고 영원한 행복을 얻게 되고 참된 정의와 하나님과 이웃과의 영원한 교제에 이른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교회를 가장 최고의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영역으로 보고 있다.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이 혼재되어 있고 하나님의 도성의 사람과 지상의 도성의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떠나 존재할 수 없으며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영원한 종말의 완전한 하나님의 도성과는 다르기 때문에 동일시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도성의 표지판이요 안내판이다.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과도 구별되고 세속의 지상의 도성과도 구별되는 곳이요, 또한 순례자와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된 권위이다. 어거스틴은 결코 저 세상의 피안만을 지향하는 태도를 갖지 않고 또한 세계 내에서의 변혁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그리고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역사철학은 하나님의 도성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결말을 통해서 그리고 두 도성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사랑에 의해서 역사를 형성하고 또한 두 도성의 역사의 차이를 낳게 한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은 이 세상의 현실 정치와 제도에 대한 완전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성 개념을 통하여서 역사를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도록 하는 중요한 통찰과 안목을 주고 있다.

어그스틴은 이를 위해 바람직한 사회와 타락한 사회, 즉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비교를 통해 사회의 정치, 문화, 윤리적 이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암시한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역사에 두 도성의 실재를 통해서 진리를 따르고 윤리적 성숙을 지향하는 도성, 그리고 탐욕과 명예에 집착한 나머지 진리를 외면하고 윤리를 상실한 도성, 이 두 도성의 차이가 바로 역사의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믿은 로마가 야만족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시간 안에 있는 지상 나라의 불완전성과 한시성과 상대성을 바라보고, 또한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과 또한 행복한 종말론을 내리고 있다.

어거스틴은 신학만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도성을 통해서 믿는자나 믿지 않는자의 역사철학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주고 또한 그것이 성경을 기반으로 한 역사철학이라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성경과 세상 학문, 성경의 세상의 역사, 성경의 삶과 이 세상에서의 삶, 그리고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이런 포괄적인 주제와 내용을 통해서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통찰과 역사에 대한 안목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이 저술을 통해서 고대 세계는 중세라는 역사의 전환점을 갖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말씀과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며 경천동지의 경험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 쌓아 놓은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삶의 방정식, 삶의 원리와 내용에 대한 전혀 새로운 안목과 통찰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성경을 연구하고 법학과 수사학을 공부하고 라틴 문화와 서적들을 통해서 전 영역을 넘나들며 펼쳐가는 그의 신학적 작업은 지금의 첨단의 발전을 가져온 신학자들에게도 혀를 내둘게 한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신학과 서적은 나중에 종교개혁자들의 필수 교과서가 되었고, 이것은 다음의 신학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한 사람의 능력과 영향력은 바로 이런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도성 전체에 대한 글을 언젠가는 한번 써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면 그 때 한번 더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도성' 전문을 읽기를 원하는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읽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고하실 것은 하나님의 도성 전문을 읽고 이해하는 시간이 성경을 적어도 5-6 번 읽을 수 있는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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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고고학(Biblical Archaeology)

김 성교수(연대 성서고고학)

1. 성서 고고학의 정의 및 연구 범위.

 

성서 고고학은 성서의 시대와 성서와 연관된 지역들의 유적과 유물들을 발굴을 통하여 추적 분석하고, 당시의 물질문명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재구성해 보려는 학문적인 시도이다. 학문적 관점에서 고고학이 지리적 제한을 받는이상 성서 고고학은 실제로는 1948년에 독립국가로 탄생한 이스라엘의 고고학이다.

시대적 범위에서 성서 고고학은 이스라엘의 성서 시대 즉 초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3300-2200)부터 신약시대인 서기 1세기 까지의 고고학이 된다. 성서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올브라이트(W.F. Albright)는 성서 고고학 연구의 시대적 범위를 팔레스타인에서 농경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던 신석기 시대 (서기전 8500-4300년)부터 신약성서의 배경인 초기 로마시대 (서기전 63-서기 135년)까지로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서 고고학 연구의 지리적 범위는 주로 이스라엘로 국한되며, 경우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인접국가들인 요르단,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터키, 이라크, 이란, 사이프러스, 그리이스, 및 이탈리아 등으로 확장될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스라엘의 주변국들이 아랍국가들로서 더이상 자국의 고고학을 유대인들의 경전인 성서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정치적 배경에서는 현재 이스라엘 국가의 영토가 실질적인 성서 고고학의 지리적 영역으로 여겨진다

2. 성서 고고학 발굴의 역사

초기의 성서 고고학은 문자 그대로 성서의 여러가지 사건들의 역사성을 현지 탐사 및 발굴을 통하여 확인하고 증명하려 하였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도되기 전에는 현장답사를 통하여 주로 성서의 지명들을 확인하여 지도상에 표기하는 일종의 지리적 탐사작업이 수행되어졌다. 성서 고고학이 성서의 역사적 배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상, 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재구성된 역사사이의 비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초기의 성서 고고학자들은 주로 팔레스타인 지방의 지리연구에 몰두하여, 성서에 나타나는 고대 도시들을 지리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많이 하였다. 1865년에 영국에서 결성된 "팔레스타인 탐사기금 (Palestine Exploration Fund)"은 성지의 고고학, 풍속, 지리, 자연환경등을 연구하기 위하여 당시의 영국여왕을 후원자로 하여 모금하기 시작 하였다. 이 기금으로 설립된 학회의 목적은 이 연구단체가 발행하는 학회지에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성서의 쉬운 이해를 위한 성지의 역사, 고고학, 지리학, 관습 등의 정확하고도 체계적인 조사". 19세기 말부터 일반 고고학의 발굴이 그 이전까지의 도굴과 유물채집의 수준을 벗어나 차츰 과학적인 방법론들이 도입되면서 부터 성서 고고학도 단순히 성서에만 의존하는 것을 탈피하여 고대 이스라엘 지역의 유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 고고학의 발굴의 기원은 1890년 페트리(F.M. Petrie)에 의한 텔 엘헤시(Tell el-Hesi) 발굴로 부터 시작된다. 이 곳을 성서의 라기스로 착각한 페트리는 이집트에서 쌓은 발굴 경험들을 토대로 주거층에 따른 토기 모양들의 변화에 착안하여, 주거층론과 토기 연대추정을 확립하였다. 페트리의 발굴 이후에 계속해서 젤린(E. Sellin)의 타아낙(Taanach) 발굴(1902-1904), 마칼리스터(R.A.S. Macalister)의 게제르(Gezer) 발굴(1902-1909), 젤린(E. Sellin)과 바찡어(C. Watzinger)의 여리고(Jericho) 발굴(1907-1909), 하바드 대학팀의 사마리아 발굴(1908-1910), 올브라이트(W.F. Albright)의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 발굴(1926-1932), 시카고 대학팀의 므깃도(Megiddo) 발굴(1925-1939), 펜실베니아 대학팀의 벳샨(Beth Shean) 발굴(1921-33), 페트리의 텔 엘 아줄(Tell el-Ajjul) 발굴(1930-1934), 스타키(J. Starkey)의 라기스(Lachish) 발굴(1932-1938) 등이 이어지면서 발굴 방법론이 점차 발전하였다. 2차 대전이후 영국적 발굴방법인 소위 휠러-케년(Wheeler-Kenyon)식이 케년(K.M. Kenyon)의 예리코 재발굴(1952-1958)에서 적용되어 텔의 가장자리에 깊은 홈(Trench)을 파서 주로 주거층들의 수직적인(연대적인) 상관관계를 일목요연하게 규명할수 있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라이트(G.E. Wright)가 중심이 된 미국팀의 세겜 발굴(1956-1964)에서는 텔 전체에 산재한 주요 건축물들의 시대적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수평적 개념의 발굴방법이 강조되었다.

히브리 유니온 대학(Hebrew Union College)의 게제르 재발굴(1964-1973)에서는 앞의 두 방법론을 적절히 조화시켰으며, 특히 삼차원적으로 규정한 특정 위치의 임의의 공간을 "로쿠스(Locus)"로 독립시킴으로써,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을 위상에 따른 체계적 분류 및 분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1948년 이후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한 발굴은 그때까지 축적된 발굴 기술들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많은 유적지에서의 대규모 발굴이 지속되었다. 야딘(Y. Yadin)의 하솔(Hazor) 발굴(1955-1958)과 맛사다(Masada) 발굴(1963-1965)을 통하여 고고학 역사상 처음으로 자원 봉사자들에 의한 발굴이 체계화 되었다. 1994년 현재 이스라엘에서 진행중인 성서와 관련된 주요 발굴들은 다음과 같다.

단(Dan), 가이사랴 빌립보(Banias), 벳세다(Tel Julia), 하솔(Hazor), 도르(Dor), 벳샨(Betn Shean), 므깃도(Megiddo), 이즈르엘(Tel Jezreel), 에크론(Tel Miqne), 아슈켈론(Ashkelon).


3. 텔(Tell)과 발굴

성서의 배경지역들은 대략 오늘날의 중동지역과 많은 부분이 일치하는데, 이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고대의 유적지들은 독특한 형태의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폐허의 언덕을 아랍어로 텔(Tell)이라고 부른다. 옛날 사람들이 새로운 지역에서 정착하기 시작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장소를 선택하였다. 첫째, 근처에서 쉽게 물을 구할수 있는곳, 둘째,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여 관측과 방어에 유리한 곳, 셋째, 주위에 경작할수 있는 비옥한 들판이 있는 곳, 넷째, 교통의 요충지로서 무역로와 군사로를 통제할수 있는 곳 등이다. 현재 중동 지방에서 흔히 볼수있는 텔은 원래부터 주위보다 현저하게 높았던 언덕에 위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너져서 퇴적된 흙벽돌들의 흙과 건물벽의 기초로 사용되었던 돌들로서 쌓여진 흙언덕을 이루고 있다.

지역적 기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흙벽돌 건물들은 우기의 비바람과 건기의 열풍에 의한 풍화작용으로 오래 견디지 못하고 쉽게 무너져 버린다. 그다음에 다시 집을 짓기 위해서 무너진 흙벽돌의 잔재를 평평하게 고른 다음 주거지 밖에서 돌들을 가져다가 기초를 쌓고, 주위에서 쉽게 만들수 있는 새로운 흙벽돌로서 다시 벽을 올리고 새 집들을 완성하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너진 옛 집터에 새로 집을 지을때 바닥에 수북이 쌓인 돌과 흙더미를 치우지 않고 바로 그위에 다시 새집의 기초를 놓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은 마을 밖에서 마을안으로 계속해서 건축자재인 흙과 돌들을 유입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집짓기 과정이 같은 장소에서 수 천년 동안 오래 지속되다 보면 주거지의 지반이 상당히 높아져서 오늘날 볼수있는 텔을 이루는 것이다. 고고학의 기초적인 방법론은 발굴인데, 성서 고고학에서는 특별히 로마시대의 유적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흙언덕인 관계로 독특한 과장을 통해 축적된 텔의 발굴이 주된 방법론이다. 발굴 목적에 부합되는 텔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지표조사(Surface Survey)를 통하여 그 곳의 주거 연대를 확인해야 한다. 다음은 발굴 예산을 확보하고 현장 지도와 분속을 맡을 고고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스탭진과 발굴작업에 직접 종사하는 일반인들로 구성된 발굴단을 조직한다. 이스라엘에서의 발굴은 건기(4-10월)에 주로 행해지며 예산에 따라 한달에서 네달까지 다양한데 발굴이 여러해 동안 지속되는 만큼 한해의 수집된 유물들을 충번히 분석할수 있을 만한 시간적 여유를 고려하여 매해의 발굴 기간을 결정한다.

성서 고고학 발굴의 초창기에는 탤을 발굴할때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후시대의 주거층의 전체를 한겹씩 벗겨나가는 식으로 파내려 갔지만 한번 발굴된 것은 이미 그 역사적 가치가 사라지게 되고 특별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요즘에는 텔의 몇몇 중요한 부분들을 선정하여 수직으로 파내려가서 특정지역의 시대적 연속성을 규명해 보려는 발굴을 주로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텔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성벽 및 성문 지역, 텔의 중심부 약간 높은 곳에 있는 궁전과 신전 및 부속 창고들, 그 외의 일반 주거 지역등을 중점적으로 발굴하게 된다. 고고학적 발굴은 문자 그대로 땅을 파는 작업인데, 조금씩 파내려 가면서 주거층의 흙바닥들을 차례로 확인하며, 건물의 기초들을 보존하고, 그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온갖 종류의 유물들을 수집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대부분의 구약시대 도시들의 집들은 돌로 쌓은 기초위에 흙벽돌로써 벽을 올리고 나무가지를 걸쳐서 지붕을 엮었기 때문에 집의 무너진 잔재를 발굴하게 되면 불에 탄 지붕재료, 무너진 흙벽돌의 퇴적층, 집바닥에 널려있던 토기 조각 및 기타 유물들, 그리고 단단하게 눌리어진 집바닥층 등의 네 층으로 구분된다. 이 네 층을 모두 합쳐서 고고학적 용어로 한 주거층(Stratum)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내에서도 지형적 특성에 따라 산악지대에서는 돌을 많이 사용하였고 저지대나 광야지역에서는 흙벽돌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약간 다른 발굴 방법론이 적용 되기도 한다.

4. 성서 고고학의 연구 방법론


성서 고고학에서 가장 기초적인 방법론인 발굴을 수행하고 나서는 밝혀진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분석 및 해석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고고학에서 기본적으로 묻는 질문들은 첫째, 발굴된 유적과 유물이 "무엇인가"라는 구체적인 묘사에 관한것이고, 둘째는, 출토된 지점과 원래의 출처가 "어디인가"라는 유적과 유물의 지리적 기원에 관한 것이며, 마지막으로 발굴물의 시대적 기원에 관한 "언제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의 유물들의 연대추정에 관한 물음은 고고학적 연구의 최종적 결론인 동시에 성격상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다행이 같은 지점에서 발견된 역사적 문서 및 기록물들을 통하여 비교적 쉽게 연대추정이 가능하지만,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와는 달리 발굴현장에서 기록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서는 자연히 기록물 다음으로 연대추정의 기준이 될만한 특정 유물에 의존할수 밖에 없게 되었다.

성서 고고학의 독특한 세 가지 연구 방법론은 주거층론(Stratigraphy), 유형론(Typology), 그리고 토기 연대추정(Pottery Chronology)이다. 주거층론은 텔 자체가 여러개의 주거층(Stratum)으로 구성되었다는 전제하에 상대적으로 밑의 주거층이 위의 것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는 기본적인 연대추정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특정 유물의 절대 높이가 매우 중요한데, 경사진 곳에서는 절대높이의 비교로서 유적의 상대연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집이 무너져도 원래의 상태를 잘 보전하고 있는 돌기초의 위치에 따라 주거층이 결정되는 등의 비교적 복잡한 분석과 판단을 필요로 하고 있다. 유형론이란 주로 발굴에서 수집된 유물에 적용되는 방법론으로서 겉모양이 비슷한 것끼리의 비교를 통해서 유물의 지리적 시대적 기원과 발전 등을 유추하는 분석의 한 방법론이다. 이 유형론은 특별히 토기 분류에 결정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토기 연대추정은 토기의 모양중에서도 특히 아구리 부분(Rim)이 시대적으로 자주 변천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30-50년의 단위까지 세분하여 상대 및 절대 연대의 추정이 가능한 일종의 토기 유형론에 의한 연대측정 방법론이다. 19세기 말이후 지속적으로 축적된 이스라엘 여러 지방의 다양한 시대의 토기들의 유형으로 인해서 오늘날에는 토기 달력이 잘 정리 되어 있기 떄문에 어떤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라도 비교적 정확하게 연대를 추정할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 성서 고고학에서의 가장 믿을만한 시대판단의 기준으로서 "비교 토기연대"는 팔레스타인에서의 토기제작 시기 (서기전 6000년)이래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50년 내외의 연대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5. 성서 고고학의 출판물

발굴의 결과는 현장의 유적과 수집된 유물들인데 이들에 대한 보고서의 출판을 통해서 비로소 일반 성서학자들이 발굴결과를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따라서 보고서가 출판되지 않은 발굴은 학문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성서 고고학계에서는 규정을 통하여 발굴이 끝난후 정해진 기일내에 최종 보고서를 출판하도록 하고 있다. 발굴이 진행되면서 매일 새롭게 파헤쳐진 유적은 사진촬영과 실측도를 작성하여 단계별로 기록을 유지한다. 수집된 유물들의 경우 토기류는 크기에 따라 1/5 또는 1/10의 축소그림과 사진으로 보관하며 기타 유물도 마찬가지로 사진과 축소그림 또한 물질적인 분석과 유형론적인 비교를 시도한다. 이러한 분석이 끝나면 현장의 유적과 함께 유물에 대한 보고서를 출판하게 되는데, 출판 싯점에 따라 초기 보고서(Preliminary Report), 중간 보고서(Interim Report), 그리고 최종 보고서(Final Report)로 분류된다.

이중에서 최종 보고서가 가장 중요하며, 여기에는 발굴에 관한 총체적인 평가외에도 주로 건축물들로 구성된 유적의 객관적 묘사 및 해석과 유물들의 분석 결과를 토대로 주거층별 시대에 따른 유적지의 거주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최종 보고서의 부록편에는 유적과 유물의 사진 및 그림, 특히 주거층별로 정리된 토기도판이 수록된다. 성서와 관련된 한 장소를 발굴하여 마지막의 최종 보고서를 출판한후에야 비로소 그 장소에 관한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발굴 보고서와는 별도로 성서 고고학에 관한 저서는 성서와 관련하여 창세기부터 차례대로 해당 귀절들의 고고학적 설명을 시도한 일반서적과 이스라엘의 고고학을 시대별로 정리한 전문서적으로 양분할수 있다.

이 중에서 성서 고고학의 전문서들은 대표적 고고학자들의 저서들로 올브라이트(Albright 1939), 라이트(Wright 1957), 케년(Kenyon 1960), 아하로니(Aharoni 1982), 마자르(Mazar 1990), 벤토르 편(Ben-Tor ed. 1992), 프릿츠(Fritz 1994)등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지금까지 수행된 이스라엘의 발굴 결과들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한 네권의 "성지의 고고학 발굴 백과사전"은 성서고고학의 필수적인 자료집이 되고 있다(Avi-Yonah & Stern eds. 1975-8; Stern ed. 1993).

6. 성서 고고학의 시대구분

일반 고고학계의 시대구분은 전통적으로 고대인들이 사용했던 도구의 재질에 따라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그리고 철기 시대로 나뉘어 지는데 성서 고고학에서도 이 구분을 따르고 있으며 단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사이에 일종의 금석 병용시대인 동석기 시대를 별도로 구분하고 있다.

 

◈ 신석기 시대(Neolithic Period: 서기전 8500-4300).

◈ 토기이전 신석기 시대(Pre-Pottery Neolithic Period: 서기전 8500-6000).

◈ 토기 신석기 시대(Pottery Neolithic Period: 서기전 6000-4300).

◈ 동석기 시대(Chalcolithic Period: 서기전 4300-3300).

◈ 청동기 시대(Bronze Age: 서기전 3300-1200).

◈ 초기 청동기 시대(Early Bronze Age: 서기전 3300-2250).

◈ 중기 청동기 시대(Middle Bronze Age: 서기전 2250-1550).

◈ 후기 청동기 시대(Late Bronze Age: 서기전 1550-1200).

◈ 철기 시대(Iron Age: 서기전 1200-586).

 

서기전 586년의 바빌로니아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끝나는 철기 시대 이후의 고고학적 시대구분은 당시 팔레스타인을 점령 통치했던 주변 강대국들에 따라 각각 바빌로니아 시대(서기전 586-530), 페르시아 시대(서기전 530-330), 희랍 시대(서기전 330-66), 로마시대(서기전 66-서기 330), 비잔트 시대(서기 330-630) 등으로 분류된다. 일반적으로 성서 고고학에서는 현재 이스라엘 고고학의 시대구분의 기준에 따라 철기 시대까지만 범위로 넣고 있으며, 그 이후 시대는 역사학과의 밀접한 교류에 따른 희랍과 로마시대를 포함하는 독립적인 고전 고고학(Classical Archaeology)으로 연구되고 있다. 고전 고고학의 중심지는 역시 현재의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이기 때문에 성서 고고학의 전통적인 시대를 서기전 586년으로 한정시키는 경향도 있다. 좀더 세분된 성서 고고학의 각 시대별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토기 이전 신석기 시대(Pre-Pottery Neolithic Period: 서기전 8500-6000)

이 시대의 문명은 나투프 문명(Natufian Culture)이라고도 불리우며 소위 팔레스타인에서 처음으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여리고)가 건설되었고, 농업혁명으로 인한 정착경제의 발전과 목축업이 시작되었다.

(2) 토기 신석기 시대(Pottery Neolithic Period: 서기전 6000-4300)

이 시대의 문명은 야르묵 문명(Yarmukian Culture)이라고 불리우며 이 시대에 와서야 비 로소 처음으로 토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토기가 특정지역의 고유한 민족 집단에의해 독 특하게 제작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대구분 및 인종집단 구분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3) 동석기 시대(Chalcolithic Period: 서기전 4300-3300)

이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인류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금속인 구리가 도구제작에 이용되었으며, 또한 석기도 함께 사용되었다. 트랜스 요르단 사해북부의 텔레일랏 가슐 (Teleilat Ghassul)에서 이 시대의 거주흔적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문명을 가슐 문명(Ghassulian Culture)이라고도 부른다. 특별히 엔 게디 남쪽의 미슈마르(Mishmar) 동굴에서 발견된 436점의 구리제품은 이 시대에 벌써 고도의 구리제련술이 발달되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4) 초기 청동기 I 시대(EB I: 서기전 3300-3050)

이 시대는 고대근동 전체에 있어서 역사상 처음으로 문자가 발명된 시기이고 이의 여파 로 정착경제가 가속화되고 다른 지역과의 교류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특히 이 시대에 이집트와의 문물교류가 이루어졌음이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된 이집트 토기를 통하여 밝혀 졌다.

(5) 초기 청동기 II 시대(EB II: 서기전 3050-2700)

이 때부터 본격적인 도시문명이 근동지방 전체에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소위 제 1 왕조가 수립되었으며 이의 영향으로 가나안 지방에서도 성벽으로 둘러쌓인 도 시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6) 초기 청동기 III 시대(EB III: 서기전 2700-2250)

이 시기는 도시문명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이며, 조직적인 국제무역의 흔적을 토기나 장신구등의 물질문명에서 잘 찾아볼수 있다. 이때 번창했던 도시들로는, 하솔, 벳 예라크, 벳샨, 므깃도, 아이, 예리코, 야르뭇트, 텔 엘헤시, 텔 에라니, 텔 할리프 등을 들수 있다.

(7) 중기 청동기 I 시대(MB I: 서기전 2250-2000)

서기전 2250년을 전후하여 가나안의 초기 청동기 도시들이 파괴되었고 그 이후 250여년 동안 일종의 쇠퇴기를 맞게 되며 이집트의 제1중간기(제7-11왕조)와도 일치하고 있다. 이 시대는 수직갱 무덤(Shaft Tomb)이라는 독특한 매장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성행 했던 유목민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8) 중기 청동기 II 시대(MB II: 서기전 2000-1550)

이집트의 중왕국의 발달과 함께 가나안에서도 새로운 도시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역사시대 전체를 통하여 가나안의 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시대였다. 물질문명의 척도인 토기제작면에서도 고속물레(Fast Wheel)를 이용한 고품질의 얇은 토기들이 멀리 이집트까지 수출되었고 파이안스(Faience)와 알라베스터(Alabaster) 용기들도 가나안 자 체의 기술로 대량생산 되었다.

(9) 후기 청동기 I 시대(LB I: 서기전 1550-1400)

이집트의 제15왕조인 힉소스의 추방의 여파로 중기 청동기 도시국가들이 대부분 파괴되 면서 약 100여년의 과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집트 신왕국의 제18왕조의 출범과 함께 이 집트는 역사상 처음으로 시리아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가나안은 이집트의 식민지로 전락 하게 되었다.

 

(10) 후기 청동기 II 시대(LB II: 서기전 1400-1200)

아마르나(Amarna)시대라 불리우는 서기전 14세기의 가나안은 이집트를 종주국으로 그 지배하에 근처의 마을들을 통치하는 도시국가들이 있었다. 발굴을 통하여 이집트식 신전 및 궁전이 므깃도와 벳샨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이집트가 이 도시들에 총독부를 두고서 가나안을 다스린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11) 철기 I 시대(Iron I: 서기전 1200-1000)

서기전 1200년을 전후해서 고대 근동지방에서 암흑기(Dark Age)라고 불리우는 문명의 위기가 발생하는데 이 쇠퇴기는 그리스에서 발생한 도리아족(Dorians)의 이동에서 부터 비롯되었다. 특별히 지중해 연안을 휩쓴 해양민족의 이동으로 막강했던 헷 제국이 몰락하 고 시리아와 가나안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파괴되면서 여러지역에서 새로운 민족의 유입 이 발생하고, 가나안 지역에서는 주변의 권력공백을 틈탄 약소민족들이 각각 아람, 페니 키아,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등의 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목이음 항아리(Collar Rim Jar)"의 추적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진입 과 주거분포를 추적할수 있게 되었다.


(12) 철기 II 시대(Iron II: 서기전 1000-586)

다윗왕조의 수립과 함께 이스라엘의 독특한 문명이 발전되었으며, 비교적 구약성서의 역 사서의 기록과 발굴을 통한 주거분포가 일치하는 등 이 시대는 성서 고고학의 중심시대 로 간주된다. 북쪽의 단(Dan)에서부터 남쪽의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와 쿤틸랏트 아즈루드(Kuntilat Ajrud)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독특한 양식의 요새가 많이 건설되어 서, 이스라엘의 실제적 통치영역과 고유의 물질문명의 지리적 분포를 쉽게 추정할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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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시대 ~ 사도 후 시대의 교회
 종교 자유 시대의 교회: 5대 교회의 형성
 로마교회 (서방교회)의 발전
 중세 전기의 교회 (750∼1054년)
 중세 후기 교회 (1054∼1300년)
 종교개혁 전야(前夜)의 교회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가톨릭 교회의 쇄신
 근대교회
 현대교회 (제2차 바티칸공의회 1962.10∼1965.12)
 
  여러분이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세계교회사를 알아야 할 것이며, 세계교회사를 공부하는 동안 가톨릭과 개신교와의 관계, 가톨릭과 동방교회와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교회가 다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기독교)이면서도 왜 여러 교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발전사, 그중에서도 특히 가톨릭교회의 발전사를 살펴 세계교회사를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어느 정도 알고 나서 우리는 다시 한국에서 가톨릭이 어떤 식으로 발전해 왔는지도 공부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우리나라에 수용될 당시 사회적, 정치적, 사상적 여건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이를 용감하게 받아 들이고, 또 전할 수 있었던 우리 조상들의 구도모습과 한국천주교회의 발전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찾아 얻은 진리에 대한 더 큰 관심을 가지고, 더욱더 적극적인 신앙자세를 가다듬고자 한다.

1. 사도시대~사도 후 시대의 교회
  가톨릭교회의 역사는 30년경 유다교의 축일인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베드로를 중심으로 군중 앞에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러한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이들이 사도들을 중심으로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다교 예배에 참여하였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유다교 종파 중의 하나로 보았다. 그러나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신들만의 예배, 즉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거행하면서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사도단과 그들을 보좌하는 이들로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그분의 기쁜 소식을 열심히 전하였으니,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 밖으로까지 전파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이들을 그리스도교인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전파되던 그리스도교는 차츰 그리스인, 로마인들에게도 전파되었으며, 사도들과 성 바울로와 다른 여러 제자들의 열성적인 선교활동 덕분에 로마제국 안에 있는 큰 도시들 대부분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는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외국인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날로 커져 갔다.
  이들 초기교회 공동체는 아직도 유다교의 전통을 어느 정도 따르면서도 나름대로의 교리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사도들이 죽은 후, 2세기로 접어들면서 주교를 중심으로 하여 장로(사제)와 부제들이 보좌하는 지역공동체(교회)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 공동체들은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교리문제를 해결하면서 급속도로 로마제국 안에 퍼지게 되었다. 교회가 발전하면서 로마 황제들과 잦은 마찰이 있게 되면서 2세기부터 4세기 초에 걸친 대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를 낳게 되었다.
 
2. 종교 자유 시대의 교회: 5대 교회의 형성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거듭하던 교회는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에서 내린 칙령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이후로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 황제들의 호의적인 도움을 받으며 세계적 종교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29년에 포고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고, 이러한 국교시대를 맞이하여 그리스도교는 여러 분야에 걸쳐서 발전하게 된다. 이때 많은 수도원이 창설되어 영성에 대한 도움을 주었으며, 공의회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조직으로 등장하였고 신앙생활의 활성화로 인하여 전례가 발전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밖의 교리 논쟁 등은 여러 공의회를 통하여 해결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정통 가톨릭 교리가 정립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당시 로마제국 안의 큰 도시들에 세워진 교회들은 훌륭한 주교들과 학자들의 영향으로 전례와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위의 작은 지방교회들은 이 큰 교회들로부터 전례와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어느 일정한 지역 전체에 영향을 행사하는 큰 교회들이 생겨났으니, 이들 교회들을 총대주교좌(總大主敎座) 교회라고 불렀다. 5세기에 이들 총대주교좌 교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 예루살렘에 있었다. 이들 교회들은 서로 협력하면서도 각자 서로 다른 역사를 걸어가면서 발전하였다. 로마를 제외한 다른 교회들로부터 파생된 교회를 우리는 현재 동방교회들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르고 있다.
 
3. 로마교회(서방교회)의 발전
  5세기 중반기는 로마의 국경지대에 게르만족이 이동하면서 로마제국을 멸망시키자 그리스도교 자체도 붕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본래의 사명인 선교 열의를 잃지 않고 영국에 선교사를 파견함과 동시에, 프랑스와 독일 지역의 새 주인으로 등장한 게르만족을 개종시켰으니, 이로써 고대 그리스 문화권과 게르만 민족이 융합하여 새로운 중세문화를 탄생시켰고,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고유한 민족적 특성을 지니면서 같은 신앙 위에서 일치된 중세기 그리스도교의 기원이 된다.
 
4. 중세 전기의 교회(750∼1054년)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의 융합이라는 과도기(450∼750년)를 거치면서 시작되는 중세기(750∼1300년)는 시대적으로 양분(兩分)될 수 있다.
  중세 전기에는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서구 그리스도교 제국이 창설되었고 종교적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 교세의 확장과 교황령(敎皇領)의 탄생 등, 외적 발전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로부터 물질적인 혜택을 받은 반면에 황제의 내정간섭을 받아 교권이 약화되고 교회가 세속화 되었고,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가 밀착되었던 프랑크 제국이 정치적으로 붕괴됨으로써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권한이 쇠퇴하는 교회의 암흑기를 맞게 된다. 암흑기 동안에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로마 귀족의 지배를 받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교회 내정간섭으로 자율성을 잃게 된다. 아울러 성화상 파괴 논쟁으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신학적 충돌을 하였고, 교리 논쟁 이후로 서방 라틴교회와 동방 비잔틴교회는 각기 다른 노선으로 발전하게 된다.
(1) 성화상 파괴 논쟁   동방교회들 안에서 5∼7세기에 대중 신심으로 크게 유행하였던 성화상 공경이 신도들을 우상숭배로 빠지게 할 염려가 있다 하여 성화상들을 파괴하는 운동이 100여 년 동안(726∼843년) 지속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제국 안에서 교회박해, 폭력사태, 정치적 혼란 등 사회소요가 야기되었다. 성화상 공경을 찬성하는 서방교회(로마교회)와 이를 금지하는 동방교회 사이에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843년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에서 성화상 공경을 부활시킴으로써 성화상 논쟁이 끝났다.
(2)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결별(1054년)   남부 이탈리아에 위치한 교회의 영향력 행사를 둘러싸고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교회와의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1054년 서로를 파문하는 가운데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으니, 이후 동·서방 교회는 1965년 서로의 파문을 철회하고 화해하기까지 결별상태에 있게 되었다.
 
 
5. 중세 후기 교회(1054∼1300년)
  중세 후기에는 클뤼니 수도단체의 개혁과 그레고리오7세의 교회쇄신으로 교회는 세속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할 뿐 아니라 세속권을 지배하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개혁운동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각성시켰고, 평신도의 영성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는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운동과 청빈운동에서 나타난다. 십자군운동은,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지순례에 불편을 느끼고 있던 중,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1세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서방교회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교황 우르바노2세는 1095년 두 차례의 종교회의에서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에 이를 호소하였다. 이때 동방교회를 돕기 위한 염원과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하려는 열망은 국가란 장벽을 넘어 서구 세계를 단결시켰다. 이 십자군운동은 대중의 종교적 운동으로 시작되어 몇 세기 동안 8차례 (또는 4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십자군운동은 그리스도교적인 목적을 위하여 일어났지만 기사들의 모험심, 명예욕 등의 세속적 동기도 있었다. 그리고 기사들의 활력은 비그리스도교적인 광포로 나타나 십자군 운동을 중세의 한 잔인한 현상으로 변질시키기도 했다. 십자군운동으로 인해 기사 수도회가 탄생했으며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이 가능했고, 학문, 특히 스콜라 철학과 신학, 예술의 발달에 이바지 한 점 등이 그 긍정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6. 종교개혁 전야(前夜)의 교회
  14∼15세기(1300∼1500년)에 있어서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중앙집권의 정치체제 또는 지방분권화의 정치적 상황으로 단일성을 상실하였다. 또한 교회는 일련의 대사건 즉 교황청의 아비뇽 환도(遷都)와 대분규(大紛糾, 西歐의 大離敎)로 인한 교황권의 약화로 말미암아 공의회 우위사상의 흐름 속에서 이단 운동이 발생하여 혼란 속에 빠졌다.
  프랑스인들이 교황으로 뽑히면서 그들이 프랑스의 아비뇽에 머무는 70여 년 동안(1305∼1377년) 교회는 중심을 잃고 크게 흔들렸으며, 교회 개혁 또한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로마로 다시 천도한 이후에 교회는 큰 위기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세 명의 교황이 선출됨으로써 서로가 자신을 정통 교황이라고 주장하게 되고 이로써 교회 전체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콘스탄스공의회(1414∼1417년)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렸고, 이로써 분규는 끝났으나 그 후유증은 오래 남았으니, 영성의 쇠퇴, 신학의 퇴보, 교회 쇄신 작업의 실패로 교회는 날로 흔들려 갔다.
  한편 일반대중의 신심생활은 매우 활발하였으며 이는 수많은 성당의 건립, 자선활동, 신심서의 보급확대, 모국어 성서의 번역, 새로운 신심의 번창에서 볼 수 있다(묵주 기도, 십자가의 길, 성지순례 등). 그러나 이 시대의 신심은 개인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현세적 두려움을 피하고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치중하여 미신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교회 안에서는 비난과 함께 개혁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기에 이른 것이다.

7.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의 수사신부이며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대사(大赦) 남용에 대해 항의하면서 대사 교리의 재정립을 제의하기 위해 그의 교구장과 동료, 교수, 신부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는 유명한 95개 조항의 신학명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정통신앙의 뿌리를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리스도교 교계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분열시키는 종교개혁 시대를 열게 되었다. 여기서 마르틴 루터와 대사남용에 대하여 잠시 살펴 보자.
(1) 마르틴 루터   아우구스띠노회의 수사신부(修士神父)였던 루터는 대사(大赦) 남용에 충격을 받고, 그는 1517년 교회의 관습대로 그의 교구장과 독일의 대사 시행을 책임진 고위 성직자에게 항의하는 편지와 대사의 남용을 논박하는 신학명제인 '95개항 명제'를 작성하여 보냄으로써 대사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개신교 기원을 루터의 종교개혁에 두고 있다면 그 시발점은 바로 이 대사논쟁(大赦論爭)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는 사목자로서 설교를 통해 대사 교리와 구원론을 설명하면서 대사 설교가들을 비판, 신자들에게 대사 남용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 영혼은 원죄로 인하여 완전히 부패하여 그 어떤 착한 행위도 우리 의지로 할 수 없으므로 스스로는 의로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功德)이 병풍과도 같이 인간의 죄를 덮어 주는 것이므로 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만 있다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고신극기(苦身克己), 종교계율의 엄수, 고해성사, 자선사업, 덕행 등이 구원의 조건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그리스도의 자비에 대한 신뢰만 필요하며, '우리를 구하는 것은 선행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수한 자비만이 우리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성서만으로, 은총만으로, 신앙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고 요약하였다.
(2) 대사논쟁(大赦論爭)   죄를 범한 죄인은 고해성사를 통하여 죄의 잘못을 용서받고 영원한 벌에서 벗어났지만 자기 죄로 인해 생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죄의 벌은 고해신부가 부과하는 보속의 실천을 통해서 탕감될 수 있고, 현세에서 보속을 하지 못할 경우 연옥에서 보속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이 보속을 면제해 주는 것을 대사라고 한다. 대사는 교황이나 주교들이 줄 수 있다.
  이러한 대사제도는 초대 교회 박해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교회의 보속 규정에 의하면 죄인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자신의 죄를 보속하는 속죄기간을 거쳐야 그에 해당하는 벌을 사면받는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해기간 동안에는 이러한 규정을 지키기가 힘들었고, 후에 신자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오는 데 일종의 장애 요소로도 작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특별한 경우에 주교들은 속죄기간을 단축하여 주기도 하였는데, 이 속죄기간의 단축이 대사의 기원을 이룬다. 그후 속죄기간의 단축이 아니라 속죄를 사면하는 관습이 생겨났고, 이는 이른바 대사의 원형이 되었다. 그후 십자군운동이 일어나면서 대사는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나 십자군을 위하여 재산을 기부하는 자에게 주어졌는데, 이 대사는 십자군운동이 끝난 후에도 일정한 공익사업을 위해 기부하는 자에게도 주어졌다. 즉, 이는 중세말 소위 '대사 설교가'라는 사람들이 나타나 대사를 남용하면서 소위 '면죄부(免罪符)'라고 알려진 증서를 발매하기에 이른 것인데, 이것이 바로 루터의 95개항의 '항의명제(抗議命題)'가 나온 원인이다. 1506년 성 베드로 성전을 개축할 때 막대한 돈이 필요했으므로 교황들은 전대사(죄의 벌을 전부 사해주는 것)를 반포하고 신도들에게 재정지원을 청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 대사의 반포가 너무나 자주 있었고, 그외에 대사 선전자들 주변에는 흔히 탐욕이 뒤따랐다. 그들은 이 대사를 기회로 잡아 돈벌이에 이용하였고, 그 폐단이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거리가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대사는 교회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오용되어 설교가들은 모금의 성공을 위하여 대사의 효과를 과대하게 설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죄의 용서와 죄벌 사이의 구분이 불투명해졌고 무지한 신자들은 대사와 구원을 혼동하여 대사 부여를 약속하는 고해성사표를 곧 천국 통행증으로 오해하였다. 신자들은 고해성사표에서 강조하는 대사를 얻기 위한 내적 정화를 등한시하여 돈이면 구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대사 교리가 중세 말기의 지배적인 견해였고 여기에 근거한 대사 시행과 대사 판매의 행위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과장된 교리를 밝힌 적이 없었다.
  이에 교회 안에서는 잘못된 대사 시행에 대해 개혁의 소리가 높았고, 대사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재확인하여 공식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루터가 대사 교리에 대한 토의를 제기하기 위해 '95개항 명제'를 공표한 사실은 자연스러운 사건이라고 하겠으나 교회 안에서의 개혁이 아니란 사실이 지극히 아쉬운 관점이라 하겠다. 이와같이 루터의 사상과 대사 논쟁은 결국 루터의 파문과 함께 그리스도교 세계가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에서는 독일의 루터 종교개혁을 위시하여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린의 종교개혁과 칼빈의 종교개혁, 그리고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국교회(성공회)가 탄생하였다.
 
8. 가톨릭 교회의 쇄신
  가톨릭도 15세기 초부터 교회 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던  중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자극을 받아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교회 쇄신을 바라는 사람들이 공의회의 개최를 요구함에 따라 1545년 트렌트에서 공의회(1545∼1563년)가 개최되었으니, 여기서 타락한 교회에 대해 반성하면서 신학과 교리를 재정리하고 교회 규율을 혁신하였다.
  이 공의회는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를 명백히 하였고 교회 개혁을 추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 공의회 이후에 가톨릭 교회는 교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되면서 교황청을 중심으로 지방교회와 수도원에서 교회 쇄신이 일어났다. 트렌트 공의회의 개혁정신은 선교활동에서도 나타났는데, 종교개혁 이전까지 유럽의 종교로 머물러 있던 가톨릭 교회는 리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신대륙 탐험을 통해서 세계 선교에 나선다. 그리하여 이제 가톨릭 교회는 동서양에 걸쳐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적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기에 들어서 유럽의 가톨릭 교회는 세계의 여러 나라로부터 정치, 종교, 사상에서 정면으로 도전을 받게 된다. 특히 국교회 사상과 가톨릭 정통 신학을 반대하는 이단 운동인 얀세니즘(Jansenism), 그리고 계몽주의 사상도 가톨릭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9. 근대교회
  18세기에 이르러 계몽주의는 외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켰다. 그 영향을 받은 가톨릭 교회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일부 지역에서 점점 그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세속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과 세속화는 교회가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교황청과 지방교회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고, 이에 교회는 반가톨릭 국가에서 단결하게 되었고 국가지상주의와 국교회 사상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운동, 즉 교황지상주의(敎皇至上主義)가 세력을 넓혀가게 되었다. 이에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상처받은 교황 권위를 회복하였으며 가난해진 교회는 근로대중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반교회적 요소들에 대한 대처방안과 이에 따른 교회법의 개혁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1869년에서 1870년까지 열리게 되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신앙과 계시의 속성에 대한 헌장과, 이성과 신앙 및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에 대한 헌장을 반포하였다. 레오 13세(1878∼1903년)는 1891년 '가톨릭 사회주의 대헌장' 또는 '새로운 사태'라 불리는 회칙을 반포하여 근로대중을 위한 사회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이 회칙은 널리 유포되기 시작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운동을 어느 정도 저지하고 그리스도교 노동조합을 창설, 발전시키며 가톨릭 정신이 구현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정당을 탄생시켰다.

10. 현대교회(제2차 바티칸공의회 1962.10∼1965.12)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우선 성직자 중심의 교회체제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이 부각되었으며 '평신도 신학'이 정립되어 성직자와 평신도가 교회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지는 그리스도 공동체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20세기 가톨릭의 중요한 사건은 교황 요한23세(1958∼1963년 재위)가 소집하여 교황 바오로6세(1963∼1978년)가 마무리지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이다. 바티칸 성베드로대성전에서 개최된 이 공의회는 화해와 쇄신을 통해 교회가 인류의 복지와 평화와 구원을 촉진시킬 수 있는 교회로 되기 위한 공의회였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급변하는 현대세계에 적응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는 동시에 다른 그리스도교와의 일치를 위해서 계속 노력하고 있다. 또한 비그리스도교 종교들과도 폭넓은 대화의 길을 모색, 진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미래세계를 향한 일치와 희망으로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결론 : 그리스도 교회는 초기 사도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세계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고 온 인류에게 희망을 제시하며 생활해 왔다. 이러한 교회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박해와 이단사상, 그리고 분열의 고통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좌절하거나 후퇴함이 없이 더욱더 성숙되어 하느님의 사명을 실현해 왔다. 이를 통해 교회는, 하느님이야말로 세상과 교회의 역사를 이끄시는 분임을 고백하며 더욱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이웃과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를 위하여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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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敎會史, church history]  개요

 

교회사는 교회이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넓은 의미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그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총망라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고, 좁은 의미로 말한다면 기독교회의 역사와 교리적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 시작된 기독교회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교리적 발전과정은 교리사라는 이름으로 따로 부르기도 한다. 


교회사는 교회의 기원과 어떻게 일어나고 성장했다가 또한 어떻게 쇠하게 되었는지를 연구하고 조명하는 학문이다. 또한 교회사는 기독교의 외적인 팽창과 축소, 선교와 박해의 역사, 교회행정과 기강의 유형적인 조직, 교리와 신학의 발달, 예배, 다양한 예배의식과 예식, 기도문, 성시(聖詩), 성가, 경건의 표시, 윤리, 자선단체의 활동 등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연구하고 정리하고 체계화 한다. 그러기에 교회사는 교회를 통한 하느님의 역사(役事)와 사탄의 세력과 그 영향력에 의하여 펼쳐진 투쟁의 기록이며, 이에 대한 교회의 발자취라 할 수 있다.


교회사는 일반 역사 구분을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시대적으로 크게 구분하여 연구한다. 


첫째, 고대 교회사.

이 시기는 그레고리우스 1세(주후 590년)까지의 처음 6세기 동안을 말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시기가 포함된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과 십자가의 죽음과 승천, 그리고 사도들의 활동 시대

② 박해시대와 콘스탄티누스 1세와 니케아공의회(325)까지

③ 교회와 국가연합시대, 교리의 공식화와 전(全)교회 공의회가 있는 시대(590)


이 시대는 유대 땅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로마에 전해지고 나아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전세계화 되는 시대이다. 이 때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사도 바울이다. 


둘째, 중세 교회사.

이 시기는 초대 교회 그레고리우스 1세로부터 시작하여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난 때(주후 590-1517년)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를 세분화 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선교시대 : 그레고리우스 1세부터 그레고리우스 7세까지(590∼1050). 이 때 교회는 북유럽과 서유럽의 켈트족·슬라브족·튜튼족에가지 퍼져나갔다. 이때에 다른 한 편으로 이슬람종교가 일어났다. 그리고 기독교회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로 나뉘게 된다. 

② 그레고리우스 7세부터 보니파티우스(보니파시오) 8세까지(1050∼1294). 이 때 일어난 일들이 이슬람 제국에 의해 정복된 예루살렘을 회복한다는 미명하에 일어난 십자군 원정,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와 스콜라철학의 대두, 대학과 고딕 건축양식의 발생, 이단 종파의 발생과 이에 대한 종교재판이 성행 등이다.

③ 교황권의 쇠퇴와 종교개혁의 징조가 보인 보니파티우스 8세로부터 M.루터의 95개조 논제가 나오기까지(1294∼1517). 이 시기에 일어난 주요 사건들은 교황의 아비뇽유수(幽囚), 교황의 분립, P. 콘스탄스의 등장, 바젤에서의 개혁회의 개최, J. 위클리프, J. 후스, G. 사보나롤라, 베셀 등의 활약, 독일의 신비주의자인 에크하르트와 타울러의 등장, 르네상스의 싹틈, 인쇄술 발달, 신대륙 발견 등이다.


셋째, 현대 교회사.

이 시기는 중교개혁(주후 1517년)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복잡하고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종교개혁의 바람은 다양한 교회와 교단들을 탄생시켰고, 독일의 합리주의와 영국의 이신론(理神論) 등이 출현하면서 성경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신학의 대두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간에 갈등이 생긴 시대이기도 하다. 세분화 하면 다음과 같다.

① 종교개혁과 로마 가톨릭의 반동시대(1517∼1648),

② 비국교도와 주관적 신앙심과 투쟁한 스콜라철학의 논쟁적 고백주의 시대(1650∼1750), ③ 합리주의와 종교적 부흥과 교회연합 시대(1750∼현재) 


<부가적인 설명>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 자체가 역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지으시고 섭리해 오시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겨 있으며, 신약시대로 들어오면서 다양한 신앙사상들과 철학사상들이 발전하면서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을 그러한 사조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사도시대에 전승된 신앙의 내용들과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때에 역대 주교의 목록이나 교회의 연대기가 작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가 광범위한 사료의 수집검토 후, 325년까지의 『교회사』 10권을 로마황제사와 관련시켜서 상술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서 그리스어권이나 라틴어권에서 교회와 국가를 동시에 다루는 관점에서 연대사 작성과 같은 연구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참회록”를 쓴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저서 “신국”을 통해서 이 지상의 국가의 개념과 하나님의 나라(신국)의 개념을 대비하여 역사적으로 묘사하였다.


중세 이전에는 교회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는 통합적 시각이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은 때여서 주로 개개의 민족, 수도원, 주교구 등의 연대사가 중심으로 연구되고 기록되었다.


11세기 이후에 이르러서 중교개혁이 이후에 개혁운동이 전교회적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교회를 전체적으로 보는 통합적인 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교회 전체의 연대사가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프라이징의 오토가 『양국사』 8권을 쓰고, 중세적 교회관에서의 벗어나고자 헸던 15~16 세기의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사에 대해서 비판적인 관점에서 연구하여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프로테스탄트의 플라치우스 일리리쿠스(Matthias Flacius Illyricus, 1520~75)는 고대 교회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 루터파라는 것을 입증하려는 의도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당장 반발을 불러왔는데,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가톨릭 교회에 속한 바로니우스(Caesar Baronius, 1538~1607)는 더 많은 역사적 자료들을 근거로 연구해서 1198년까지 『교회연보』 12권을 발표함으로써 일리리쿠스의 견해를 반박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학술적 교회연보작성은 역사가들에게 많은 흥미를 불러 일으켰고, 17~18세기에는 예수회의 보란두스 학파나 베네딕도(베네딕트)회의 마우리니 학파 등에 의한 광범위한 연보가 작성되고, 수많은 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고대, 중세의 연대사(chronicler)가 연구하는 당사자들의 견해를 다소 첨삭한 것에 비해서, 16세기 이후의 연보작성자(annalist)들은 사실에 가능한 한 충실하려는 객관성을 중시했다. 마빌론(Jean Mabillon, 1632~1707) 등의 마우리니 학파에 의해 고문자학, 고문서학, 연대학도 창시되어 방대한 교회보관문서에 대한 조직적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이들 연구를 토대로 19세기 전반의 독일에는 튀빙겐 대학의 뮐러(Johann Adam Möhler, 1796~1838)를 중심으로 일종의 역사신학이나 교회론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이 신스콜라학파를 지지하면서 위와 같은 연구사조들을 위험시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교회사에 대한 연구는 프로테스탄트 측에 이어져서 연구자의 주관적 관점에서의 교회사 해석이 20세기 전반까지 유행하였다.


20세기 중엽 이후에는 신학계의 새로운 동향과 병행해서 교회사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현대에는 교회사 역시 일반 역사학과 완전히 동일한 연구방법을 따라 연구되고 있다. 즉 교회는 무엇인가를 경험적(a posteriori), 실증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학문적 노력을 말하며, 이것은 이전의 교리신학과는 대조적으로 또다른 차원에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일종의 역사신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요즘은 단순히 교회사라고 부르기보다 역사신학이라고 불러서 이론신학의 한 분야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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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교회사

 

1. 교회사 개관

(신32: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무릇 우리가 어느 한 특정 분야에 대하여 포괄적 이해를 얻고자 할 때 필히 요청되는 요소의 하나가 그 분야에 관련된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특히 교회사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어 온 과정의 적나라한 기록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성경과 교리가 선포하는 구원의 진리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 숨쉬다 간 인물들과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숱한 사건들을 통하여 영원히 현실화 되어 가고 있는 살아있는 진리임을 재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교회사를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성경과 기독교 교리가 선언하는 구원의 신실성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교회사 연구는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성경과 교리의 최종 결론인 구원의 확실성을 거듭 입증해 줌으로써 실로 전인격의 영원한 존재론적인 구원이라는 솟아오르는 대망에 젖게 하는 원천인 것이다.

 

교회사는 성경적으로 정의할 때 먼저 교회사는 신약에서 시작하는 지역교회들의 역사라 할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 ‘기독교의 기원, 발전, 그리고 기독교가 사람에게 미친 영향을 조직화하고 해석한 기록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 강림으로부터 시작된 교회가 오늘날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어떻게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여 왔는지, 또한 그 속에서 복음은 어떻게 변질되어 세상과 타협의 역사를 걸어왔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교회사이다.

 

우리가 교회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보다 교회사의 흐름을 통해 하나님 섭리와 역사하심과 거기에 도전하는 마귀의 간계와 계교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앞서 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올바른 삶을 본받고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으며, 교리논쟁을 통하여 올바른 교회관을 가지고 말씀을 분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사 안에서 과거 자신들이 각각 처했던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신앙과 현실, 교회와 사회, 핍박과 유혹 사이에서, 때로 순교하고 변절하며 또 고뇌하고 좌절하면서도 끝내는 신앙의 환희로 약동하던 과거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발견케 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처하고 있는 신앙 현실의 원인과 과정의 일면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사수와 타협, 분리와 관용의 기로에 서기를 끝없이 강요하는 이 세상에서 끝내 지켜야 할 절대적 본질과 시대와 문화에 맞추어 적응해야 할 상대적 문제를 구분하고 이에 부드럽고도 굳건히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회사는 성경의 예언이 일점일획의 착오 없이 실현되어 가고 있음과 기독교 교리가 단 한점의 오류도 없음을, 역사적 기록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입증하여 주는 최선의 장이다.

 

교회사를 연구함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설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범하기 쉬운 잘못을 미리 막을 수 있고, 삶의 올바른 지침도 마련할 수 있다. 또한 교회사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도들의 행적들과 우리에게까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피흘림으로 복음을 사수한 앞서 간 성도들의 삶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본받을 수 있다. 그리고 앞서 간 성도들이 범한 잘못을 통하여 그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교회사는 성경이 배척당하거나 무시되거나 의문이 제기되거나 변질될 때마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인 재앙들이 뒤따랐음을 보여준다(갈6:7).

 

우리가 교회의 역사를 구분할 때 주로 초대, 중세, 종교개혁, 근대, 현대로 구분한다. 그것을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1)초대교회사(AD27-590)

가)사도시대(AD27-100) : 교회 건설기

나)속사도시대(AD100-313) : 교회핍박기

다)공인종교시대(AD313-590) : 신학조성기(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100(?) : 사도요한의 죽음

313 :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칙령(기독교 공인)

392 :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기독교 국교선언

395 : 동서로마의 분열

476 : 서로마 멸망

590 : 그레고리 1세 즉위

 

2)중세교회사(AD590-1517)

가)과도기(AD590-800)

나)로마교회 성장시대(AD800-1073) : 동서교회 분리기

다)로마교회 전성시대(AD1073-1303) : 그리스도교 실생활기

라)로마교회 쇠퇴시대(AD1303-1517) : 개혁전초기

※622 : 이슬람교 발흥

800 : 프랑크왕국 설립(칼 대제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대관식을 받음)

1054 : 동, 서교회 분리

1073 : 그레고리 7세 즉위

1309 : 아비뇽유수

1453 ; 동로마제국 멸망

 

3)종교개혁사(AD1517-1648)

※1517 :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제기

1545-1563 : 트리엔트 종교회의

 

4)근대교회사(AD1648-1800)

 

5)현대교회사(AD1800-현재) [03년 1월호]

   

2. 초대교회사

 

Ⅰ. 사도시대(AD27 - 100)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교회사에 대한 모든 논의는 태초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궁극적으로 ‘구원 받은 자들의 무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가 구약 선민 이스라엘의 범위를 넘어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확대된 개념으로서의 교회로 본격 등장한 것은 신약 시대 이후였다. 더욱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와 구원 행동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직후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였다. 따라서 본 기고도 이 모두를 염두해 두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의 교회사를 고찰하도록 하겠다.

 

1)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요건

기원 전 4세기경에 알렉산더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패망시킴으로 팔레스타인의 주인이 되었다. 그는 헬라문명으로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고 그가 정복한 각 지역은 헬라적 요소가 매우 강했다.

헬라적 이념은 서로 다른 국가들의 신들을 동일시하여 혼합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들은 결국 그 신들은 다 똑같은 신이라고 말했다. 헬라의 이념을 그대로 답습한 로마제국은 지리적 통합 뿐 아니라 보다 완전한 통일을 위해 종교적 통합을 준비하였다.

당시 로마제국의 종교적 행태를 보면,

① 여러 종교를 무차별 혼합하는 종교적 혼합주의

▶ 로마의 만신전(萬神殿)이 있었고

▶ 혼합 절충주의는 당시에 유행이었다

▶ 로마정부는 각 지방의 신들이 결국은 같은 존재라고 가르쳤다

② 황제 숭배

▶ 로마 제국은 이를 통일과 충성의 방법이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2) 유대인들 사이의 분파

가) 바리새파

바리새주의는 경건한 사람이 특히 빠지기 쉬운 자기도취나 영적 자만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해 주는 실례이다. (행26:5, 눅11:45, 요7:7)

바리새란 분리주의라는 뜻이다. 그들은 신앙의 열심은 있었으나 율법의 문자에 대하여 집착하였고 마음이 좁고 배타적으로 점점 되어 갔다.

▶ 바리새주의의 등장 배경

- 율법에 근거한 분리주의

남은 자의 귀환 후에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일에 있어서 먼저 다른 나라들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중요시되었다.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2000여명이 먼저 행한 일은 분리였다. 잡혼은 해소되고, 규칙위반이 바로 잡혀 갔다.

- 대제사장의 세속적 영향력의 증가에 대한 반사작용

왕이 없는 상태에서 세습에 의해 거룩한 직무를 담당한 제사장의 영향력은 점차 커지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파사정부도 총독을 임명하는 대신에 유대인 대 제사장에게 파사의 공세(公稅)의 책임을 위탁하기도 했다. 결국 대제사장직이 영적인 책임보다는 정치적인 이점을 취하려는 정치적 야심의 도구가 되었다. 이로인해 유대교의 최초의 이상을 엄밀하게 지키고자 하는 운동이 점점 일어나기 시작했다.

- 두개의 대립하는 단체의 출현

중간 시대 초기부터 유다에는 두개의 지배 계급이 있었다. 제사장들은 그들의 직무상의 지위를 근거로,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권위를 근거로, 각기 자기 계통이 더 큰 영향력을 갖도록 열망했다.

제사장들은 세속적 욕망을 위해 점점 율법의 기본 원칙을 버리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율법을 열심히 수호하는 경향의 그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점 종교적인 배타주의와 외면적인 형식을 중시하는 모습으로 변질되어져 갔다.

이들 두개의 분파적 모습은 결국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으로 결정화해 갔다.

BC 2세기 초두에 가장 엄격주의적인 경건한 유대인이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기 위하여 헬레니즘에 반대하고 종교의 자유를 위하여 마카비우스의 해방전쟁에 적극 모여들어 참여 했다. 바리새파, 에세네파,쿰란종단등은 이 차시디임운동에 기원을 둔다.

※ 참고 : 차시디임(CHASIDIM: 히브리말로 HASIDIM이라고 하며, 신앙깊은 사람들이란 뜻임)

▶점진적인 타락

성문화된 율법과 구전 율법을 지킴으로 분리와 성결에 이르는 일은 바리새인의 최고의 목표였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복잡한 규칙을 지킬 수가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외면상 그 모든 일을 실현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외면적인 복종만을 보이는 위선에 점점 빠져 들기 시작했다. 음지에 숨어서는 죄를 범하고 외면적으로는 신앙이 깊은 척하는 모습이 습관화되고 결국은 최악의 위선자가 되여 갔다. 이것이 주님이 오셨던 시대의 정황이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엔, 헤롯 시대의 바리새인이 약 6,000명 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들은 당시 대중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었다

나) 사두개파(Sadducees)

사두개인은 다윗의 치세 때부터 마카비아 시대까지 대제사장직을 담당한 사독의 자손에서 유래된것으로 여겨 진다. (삼하8:17)

대제사장직이 하시몬 왕조로 옮긴 때에 자신이 진정한 사독의 후손임을 새로운 형태로 강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제사장직은 영적 권력을 갖고 의식을 주관하고 정치적 권력도 함께 누림으로 세상적 측면도 열중하게 되었다.

알렉산더가 죽은 이후에도 희랍문화는 널리 펴져 나갔는데, 제사장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희랍적인 자유를 즐기면서도 유대교를 함께 지지하는 타협적인 모습으로 점점 변화되어 갔다.

사두개인은 주로 예루살렘의 귀족들과 대제사장의 가문들로 구성되어져 폐쇄적 체제를 갖고 있었다. 이는 바리새인이 누구든지 바리새파로의 개종을 환영한 것과는 대조된다.

사두개파는 수적으로 바리새인보다는 적은 그룹이고 귀족계급인 부자, 의회의 의원, 군대의 장교, 정치가등 대부분은 제사장 가정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고 천사도 영도 믿지 않았다. (마22:23, 행23:8)

바리새인은 민중에서 위로 향하여 국가에 영향을 주었고, 사두개인은 지도자계급에서 아래를 향하여 국가에 영향을 주었다.

예수님의 공생애동안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는 모두 사두개인이었다.

그러나 모든 제사장이 사두개인은 아니었다. 타락된 이 무리 속에도 하나님의 사람은 있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있었고, 초대 교회 시대에 많은 제사장들이 구원을 받기도 했다. (행6:7)

다) 엣세네파

신약성경에는 엣세네파로 알려져 있는 유대교의 일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엣세네파는 율법을 고수하며 철두철미하게 율법정신으로 살고 이것을 행하기 위하여 인간 사회에서 떠나서 자기들의 은둔지에 거주하며 수도원적인 생활과 신비적인 유대교를 실천했다.(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결코 은둔자가 아니다) 그들은 영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자기들이 보다 순수하고 거룩함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여 성전의 희생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 그들은 독립된 공동체를 만들고 엄격한 사람은 결혼마저도 포기했다. 이것은 모세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한 금욕주의였다. 그러나 수도원적인 생활로 형식주의라는 잘못을 가져 왔다. 비록 동기는 좋았다 하나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 결국 그들은 형식의 노예가 되었다. 또한 이들은 은둔 생활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진실한 영향을 주지 않고 결국은 신약성경에 그들의 존재조차 나오지 않게 만들었다.

라) 열심당원 (THE ZEALOTS)

12사도 가운데 한 사람인 시몬은 열심당원으로 불리우고 있다. 가나안인으로 번역된 것은 인종으로서의 가나안인이 아니고 "열심스러운 사람"이란 의미의 아람어를 음역한 것이다.

희랍어로는 제로테스 (ZEALOTS)와 같은 뜻이다.

열심당원은 철저히 유대민족주의자로, 로마와의 충돌을 초래케 하였다. 그 결과 AD70년 로마 장군 타이투스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붕괴하게 되었다.

중간시대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구주가 오셔서 백성을 구원할 것을 대망하고 있었고 이 시대는 외국지배에 대해서 싸울 용가가 있는 백성에게만 기적은 일어난다고 하는 주장이 일어났다. 율법에 대해서는 바리새적인 열광성은 같았으나, 민족주의적 기질이 더해져 있었다. 이들은 무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도래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행5: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

갈릴리 유다는 이 같은 배경을 가지고 폭동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유다의 자식들은 그 운동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결국, 두 아들은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고, 자기가 구주라고 선전하던 마지막 아들은 폭도에게 살해 되었다. 이들 열심당의 반항은 차츰 동포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되고 국토를 위협하는 산적으로 되었다.

 

3) 디아스포라 유대교

예수그리스도 탄생 몇 세기전부터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 유대인들은 선조의 조국에 대한 강한 감정적, 종교적 유대감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흩어진 유대인들은 헬레니즘 특히, 희랍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집트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프톨레미 필라델푸스(Ptolemy Philadelphus, B.C285-246) 치하 때에 알렉산드리아에서구약이 희랍어로 번역되었는데, 이를 70인역(Septuagint)이라 부른다. 동방에서는 아람어, 서방에서는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이로 인하여 전혀 낯선 언어 속에 유폐되어 있던 구약성경에의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구약의 종교 개념이 희랍철학, 특히 스토아 철학과 플라톤의 사상에 혼합되었다. 이들 알렉산드리아의 해석자들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필로(Philo, B.C20?-A.D42?)였다.

그는 구약을 모든 책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책이며 하나님의 참된 계시의 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유적 해석 방법에 의해서 플라톤의 사상과 스토아 철학에서 구약과 일치되는 요소를 찾아냈다. 구약과 희랍 철학이 기본적으로 일치한다는 견해는 기독교 신학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하나이신 하나님이 그의 선하심을 표현하시려고 세상을 창조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팔레스타인에서 그들은 헬레니즘과 더 이상 대립하는게 아니라 그들과의 타협을 고려하고 있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들 사이에 그들의 고유신앙과 헬라문명과 가장 뛰어난 부분이 서로 상응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헬라적 역사 기술 방식에 의해 진술하기도 하였다. [03년 3월호]

 

 

4) 오순절 성령강림과 예루살렘 교회의 태동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7주가 지난 후, 오순절(pentecost)날 예수님의 제자 120명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보내시기로 약속한 성령의 강림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실로 이는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이는 성령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성취로 성도들의 심령에 영원히 내주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 첫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곳에 모였던 어떤 이들은 신비하고도 강한 바람이 집 안으로 불었다고 생각했으며 혹자는 혀 모양의 불꽃이 제자들의 머리 위에 머물렀다고 증언하였다.(행2:1-3)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후 그들은 예루살렘에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모인 군중들 앞으로 쏟아져 나아갔다. 사도들 가운데 시몬 베드로(Simon, the Peter)가 군중 앞에 나섰다. 베드로는 놀한 군중들에게 그들이 현재 목격하고 있는 성령 강림의 기적은 구약의 요엘 선지자를 통해 주어졌던 약속, 즉 ‘마지막 날’에 쏟아 부어질 하나님의 영에 관한 약속의 성취라고 설교하였다.(욜2:28) 그리고 이처럼 놀라운 예언의 성취는 최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사건으로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죽음으로부터 살려내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만드셨음을 과감히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베드로는 순례자들에게 결론적으로 외쳤다. 그리하여 순례자들 중에 많은 이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그리스도요 주로 고백하였다. 약 3000명의 사람들이 그날로 세례를 받고 예수 공동체에 합하였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태동되는 위대한 사건이었다.(행2:38-41)

 

5)환란과 복음의 전파

(행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오순절 성령강림 후 교회의 시작과 동시에 하나님의 크신 역사로 믿는 자의 수가 날로 더하자 그리스도인에 대한 유대인의 핍박은 더하여 갔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초기 박해가 로마인들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로부터 가해졌다는 사실이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 예루살렘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자 사도 외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루살렘을 떠나 모든 땅으로 떠나면서 세계를 향한 복음의 전파가 시작되었으며 또한 전 세계로의 교회의 확산이 시작되었다.

처음 로마 관리들은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을 잘 분간하지 못하여 로마의 법 아래에서 보호받아 온 유대인의 종교적 특권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베풀어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로마관원들은 그리스도가 최고의 존재로서 왕들과 황제들까지도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의 여러 가지 관습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했으며 관중들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우는 검투 경기과 관중들의 오락을 위해 무죄한 죄수들을 사자에게 던져 주는 공개 경주를 정죄하였다. 그들은 공직을 거절했으며 또한 이방 신들에 대한 분향 혹은 헌주 등의 공적 의무를 이교도와 관련된 일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 결과 그들은 까다롭고 편협한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주후 64년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 불을 질렀다고 누명을 집어 씌움으로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대중의 감정은 매우 나빠서 그들은 도처에서 욕을 먹었다.

네로의 박해에 있어서 로마에서 자행된 잔인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으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짐승의 가죽으로 뒤집어 씌워져서 잔인하게 개들에게 물어 뜯겨졌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어떤 사람들은 역청은 담은 통에 처넣어졌고 혹은 그들이 그 역청을 몸에 발라서 불을 놓았고 이러한 횃불은 네로가 이렇듯 무시무시한 광경을 즐기며 산책하는 정원을 밝혀 주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환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흩으셨고 이로 말미암아 복음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지는 도화선으로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셨던 것이다. 만약에 초기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러한 핍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예루살렘 교회로만 제자들은 안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환란과 핍박을 통해 전 세계로 전해져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었다.


 
■로마와 근교 부근에서 박해를 가했다.

■로마시 대화재 재난의 혐의를 재난의 그 리스도인에게 전가시켰다.

■네로의 궁전을 밝히기 위한 소위 ‘인간 횃불’로서 그리스도인을 화형에 처하는 광란을 벌였다.
 
■바울

■베드로

 
 

90-96년
 
도미티아누스
 
로마와 소아시아 지역에서 일시적이고 산발적인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의 황제숭배 거부로 비롯되었다.
 
■로마의 클레멘트

■사도요한
 

98-117년
 
트라야누스
 
점차 박해가 강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비애국적인 집단으로 규정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은 발견 즉시 처형되었다.
 
■이그아티우스

■시므온

■조시므스

■루프스
 

117-138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숭배는 계속되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하는 자는 처벌 되었다.
 
■텔레스포루스
 

161-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독교를 사상적으로 배격한 스토아주의자인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연재해의 장본인으로 규정하였다.
 
■순교자 저스틴

■포티누스

■블란디나
 

202-211년
 
셉티무스

세베루스
 
기독교로의 개종을 금지시켰다.
 
■레오니다스

■이레니우스

■피르페투아
 

235-236년
 
트라키아의

막시미누스
 
기독교 성직자를 처단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황제가 암살한 전임황제를 지지하였다는 사실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아르술라

■히폴리투스
 

249-251년
 
데키우스
 
최초로 제국 전체에 박해의 손길을 펼친 그는 황제숭배의 향기로운 제물을 요구하였고 기독교의 완전한 파멸과 더불어 이교신앙으로 복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파비아누스

■예루살렘의알렉산더
 

257-260년
 
발레리아누스
 
그리스도인의 재산을 몰수하며 그들의 공민권을 박탈하였다.
 
■오리겐

■씨프리아

■식스투스 2세
 

303-311년
 
디오클레티아누스

갈레리우스

 
 
가장 혹독한 박해로서 교회는 파괴되었고 성서는 불태워 졌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박탈 위기에 처했으며 로마신들에 대한 숭배가 강요되었다.
 
■마우리티우스

■알바누스
 
6)로마제국의 10대 기독교 박해사건
 


사 도
 
성 경
 
전 승
 

시몬 베드로
 
▶오순절날 설교를 함

▶성문곁의 앉은뱅이를 고침

▶산헤드린의 박해를 받음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꾸짖음

▶죽은 도르가를 살림

▶하나님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 남

▶안디옥에서 바울로부터 비난 받음

▶2개의 신약서신을 기록
 
▶브리튼(영국)과 고올지방(프랑스)을 방문

▶네로황제 박해때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 가 형을 당함(AD64-68)
 

안 드 레
  
▶스구디아,소아시아 희랍에서 복음전도

▶아가야의 파트라에서 십자가형 받음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
 
헤롯 아그랍바 1세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순교함
 

요 한
 
▶성전에서 앉은뱅이 치료시 베드로 와 함께 있음

▶빌립의 사마리아 사역 계승

▶노년에 밧모섬으로 추방당함

▶요한복음, 3개의 서신서, 계시록 을 기록
 
▶에베소에서 사역

▶초기 영지주의자 케린투스와의 논쟁

▶약100년경 에베소에서 늙어 죽음
 

빌 립
 
 
소아시아 히에라폴리스에서 십자가형을 받아서 순교함.
 

마 태
 
마태복음서 기록
 
이디오피아, 파르티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등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
 

도 마
 
 
 
▶바벨론 복음전도

▶인도에서 교회를 세웠고 그곳에서 순교 당함
 

바돌로메

 
▶빌립과 함께 히에라폴리스로 감.

▶아르메니아 지방사역 후 순교당함.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초기 전승에 보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 보와 계속 혼동되었음

▶시리아 복음전도
 

다 대 오
 
 
 
▶예수님의 형제 유다와 혼동됨

▶에뎃사 복음전도
 

열심당원

시 몬
 
 
 
페르시아, 애굽, 카르타고, 브리튼 등지에서 다양하게 활동
 

가롯유다
 
예수님을 배반한 후 목메어 자살
 
 
 
7)예수님 사후 12사도의 행적
 

2. 속사도시대(AD100-313)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요한의 사후(死後)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대는 복음의 확산과 이것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순교의 시대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셨고 이 복음은 순교의 피로 지켜졌다. 주님의 제자들은 받은 사랑을 순교로서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였으며, 그들의 제자들 또한 그러했다. 순교는 이교도들을 향한 가장 확실한 변증이었으며 그렇기에 속사도 시대의 교부들에게 이 순교의 문제는 생활의 문제였다. 그들에게 순교는 목숨을 잃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새롭고 영원한 삶으로의 비약, 바로 그것이었다.

이 시대에 박해 상황을 잘 나타내는 비시니아의 총독 플리니와 황제 트라잔의 서신을 보도록 하자.

※플리니와 트라잔황제 사이의 서신

111년 플리니는 비시니아 총독에 임명 되었다. 플리니는 로마 법률과 전통을 깊이 숭상하던 인물이었다. 비시니아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어서 플리니는 이들의 처리에 대해서 고민을 하였다. 플리니는 기독교인들에게 세 번 개심할 기회를 준 후에 계속 고집하는 자들은 처형을 하였다.

플리니가 당면했던 문제는 과연 기독교신자들은 뚜렷한 범죄 사실이 있을 때에만 처벌받아야 하는지 , 아니면 '기독교신자'라는 사실 자체가 범죄를 구성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던 플리니는 일체의 법적 절차를 일단 중지시키고 트라잔 황제의 지시를 받기 위해 서신을 띄웠다.

황제의 답변은 간단했다. 그들에 대한 일반적인 규칙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고 밝히고 신고가 들어오면 그들을 처벌하되 배도하면 용서해 주고, 익명의 신고는 받지 말라고 하였다. 이러한 트라잔의 정책들은 비시니아의 경계를 넘어서, 그리고 트라잔이 죽은 오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 성행되었다. 제2세기, 그리고 제3세기 일부에 이르기까지 제국 전체에 걸쳐 기독교 신자들을 솔선하여 색출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당국자들 앞에 소환 되었을 때에는 이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이 제국의 공식적 정책이었다.

 

1. 로마제국의 박해 이유

1)종교상의 이유

그리스도인에게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배타성으로 인하여 많은 핍박이 주어졌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으며 또한 인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신교의 상황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젖어 살아온 로마인들의 미움을 사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박해가 주어진 것임.

2)비밀결사로의 오해

핍박을 피하여 한 밤중에 모여서 집회를 해야만 하는 환경이었으나 로마인 들은 이를 음란 집단으로 오해하여 핍박함.

3)사회생활의 부조화

성찬식을 오해하여 어린이를 잡아서 그 피와 살을 먹는다고 생각함.

기독교인은 남녀가 함께 모여 형제, 자매라고 부르며 음행한다고 오해함.

4)황제숭배 거부

로마제국은 황제를 신격화 하여 신으로 숭배토록 하였으나 그리스도인은 이를 거부했다. 당시 황제숭배거부는 곧 반역죄로 사형에 처함.

5)사상의 부조화

로마제국은 영원하다고 믿고 있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은 언제인가 멸망한다고 가르침으로 박해를 가함.

 

  
클레멘트 1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제4대 교황으로 추대함

▶성서에는 빌립보서 4:3에 언급된 것으로 추정함

▶도미티아누스황제 박해시 순교함

▶그의 서신은 사도의 계승원칙을 강조함
 

이그나

티우스
 
117년 사망
 
시리아 안디옥
 
에베소 서신

마그네시아 서신

트랄레스 서신

로마 서신

빌라델비아 서신

서머나 서신

폴리갑 서신
 
▶그의 서신은 로마에 순교하러 가는 중에 기록되었으며 그는 순교를 당연한 기쁨의 운명으로 받아들임

▶주교와 장로직의 구분을 최초 역설함

▶이단사상인 영지주의를 배격함

▶트라야누스황제의 박해로 순교함
 

헤르마스
 
1세기말엽

~2세기초엽
 
로마
 
목자서(牧者書)
 
▶클레멘트와 동시대 인물임

▶환상과 비유에 관한 많은 저술이 있음

▶아마도 유대인이었으며 노예 출신의 신분을 지닌 것으로 추정함
 

알렉산드리아의

바나바
 
1세기 말엽

~2세기초엽
 
알렉산드리아
 
바나바서
 
▶알렉산드리아의 법률학자임

▶필로의 알레고리 방법에 능통함
 

파피아스
 
60-130년경
 
히에라볼리
 
우리 주의 말씀 강해서
 
▶사도 요한과 깊은 친교를 나눈 자임

▶종말론에서 전천년설을 주장함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어록집에 기초하여 저술되었으며 마태복음은 원래 아랍어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함
 

폴리갑
 
69년경-160년
 
서머나
 
빌립보 서신
 
▶사도 요한과 깊은 교제를 나눈 자임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편집하고 보존함

▶영지주의자 말시온을 "사단의 맏아들"로 규정함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하에 순교당함 
 


2. 속사도 시대의 교부들
 

▶클레멘스( Clement of Rome) 클레멘트는 베드로와 바울의 제자였다(빌4:3 '글레멘드'). 로마교회의 감독(92-101년까지). 그는 로마의 귀족 출신으로 당대의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나, 당시의 학문과 철학에 만족하지 목하고 진리를 찾아 여기저기 여행하던 중 팔레스틴에서 베드로를 만나 신자가 되었다. 그는 베드로의 선교여행에 동행하며 그의 책 저술을 돕고,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바다에서 파도에 잠기는 상태로 순교한다. 96년경에 쓴 그의 글을 통해서 그의 신앙의 일면을 본다. "그러므로 그의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나 우리의 지혜로나 우리의 통찰로나 종교적 헌신으로나 우리의 충심으로 행하였다고 보여지는 거룩한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향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나이다. 아멘

▶ 이그나티우스

107년 맹수의 밥이 됨

이그나티우스는 순교의 자리를 향하여 가면서 일곱 개의 서신들을 남겼는데 이는 초대 기독교역사를 살펴보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록이 되고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30 - 35년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사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의 편지들을 살펴보면, 안디옥 교회내에 몇 개의 분파가 있었으며, 감독은 그가 이단적이라 생각한 교리들을 맹렬히 반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이교도들에 고발되었는지, 혹은 그를 미워하였던 분파의 기독교신자에 의해 고발 되었는지도 확실치 않는 것이다. 어쨌든 이그나티우스는 체포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 로마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그나티우스는 압송되어 가는 도중 여러 신도들을 만나 대화할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그가 구술하는 편지를 받아 쓸 비서까지도 대동할 수 있었다. 그 편지를 통해 당시 로마 전체에 걸친 기독교신자들에 대한 일반적 박해는 없었으며 단지 법원에까지 소환된 자들만 재판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이그나티우스가 기독교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라 할 수 있다.

 

이그나티우스의 일곱 편지는 이러한 면회의 결과 였다.

1.서머나에서의 집필

가.에베소 - 에베소 감독 오네시모가 보낸 사절단과의 만남

나.마그네시아 - 마그네시아 교회에서온 감독과 두 장로

다.트라리아 - 폴리비우스 감독

라.로마인에게

2.드로아에서의 집필

가.빌라델비아 - 빌라델비아교회에 보낸 글

나.서머나 - 서머나 교회에게

다.폴리캅에게 - 폴리캅에게

 

▶ 폴리캅 (Polycarp)

폴리캅은 서머나의 감독이었다. 폴리캅이란 이름은 "열매가 풍성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는 소년시절에 사도 요한을 자주 보고 들었다. 그는 사도 요한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고 서머나의 감독으로 "사도 요한에 의하여 세움을 받았다" . 그는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폴리캅은 155/6년에 80세라는 고령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폴리캅의 순교에 대하여는 그의 순교 직후에 기록된 "폴리캅의 순교사"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이레니우스도 폴리캅의 순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를 한다: "그는 대단히 오래 살았는데, 결국 아주 노년에 이르러 참으로 영광스럽고 장려한 순교를 하였다"

폴리캅은 처음에는 성도들이 강권을 이기기 못하여 도피를 하였으나 순순히 체포를 당하였고 불과 단검으로 고귀하게 순교를 하였다. 그의 순교장면을 살펴보자.

IX 3. 그러나 총독은 윽박지르면서 "맹세하시오. 그러면 내가 그대를 놓아주리다. 그리스도를 모독하시오"라고 말하였을 때 폴리캅이 말하였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기고 있소. 그런데 그분은 한번도 나에게 불의를 행하지 않았소.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한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소?"...

XI. 그러나 총독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에게는 맹수가 있소. 만일 그대가 돌이키지 않는다면 이것들에게 그대를 내주겠소". 그는 말하였다. "부르시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더 좋은 것들로부터 더 나쁜 것들로의 돌이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악한 것들로부터 의로운 것들로의 변화는 좋은 일이오". 그러나 그가 다시 말하였다. "만일그대가 맹수들을 우습게 여기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내가 불로 그대를 삼켜버리게 할 것이오". 그러나 폴리캅이 말하였다. "그대는 잠시동안 타다가 조금 후에는 꺼지고 마는 불로 위협을 하고 있소. 왜냐하면 그대는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장차올 심판의,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왜 머뭇거리시오? 그대가 원하는 바를 보내시오".

XII. 이것들과 더 많은 것들을 말하면서 그는 담대함과 기쁨으로 가득 찼고, 그의 얼굴은 은혜로 충만했다. 그리하여 그는 결코 그에게 말해진 바에 의해 동요되어 연약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역으로 그 총독이 당황하여 자신의 전달자를 경기장 가운데로 보내 세 번 전달하게 했다. "폴리캅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승인했다 [2003.05]

 

3. 2세기 변증가


이 름
 
연 대
 
목회지
 
주 요 저 서
 
주 요 사 실
 

쿠아드라투스
 
2세기 초
 
아테네
 
변증서(전해지지 않음)
 
○아테네교임.

○그의 저서는 황제 하드리아누스 에게 보낸 변증서였음

○기독교를 유대교와 이교도의 예 배와 대조하여 구별시켜 놓음
 

아리스티데스
 
2세기 초
 
아테네
 
변증서(전해지지 않음)
 
그의 저서는 황제 하드리아누스에게 보낸 변증서로 사도 바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
 

순교자 저스틴
 
100-165년경
 
팔레스틴

에베소 로마
 
제1 변증서 제2변증서

유대인트리포와의 대화

말시온이교반박서(전해지지않음)
 
○철학적인 훈련을 받음 ,

○순회 평교사로 영지주의자 말시 온을 반박하며 로고스(logos) 개 념정립을 위해 헌신함

○예언, 이적, 윤리의 근본인 기독 교에 대한 토론에 열의를 보였고 그후 로마에서 순교함
 

타티안
 
110-172
 
앗시리아

시리아 로마
 
공관복음서, 그리스인들에게 보내는 서신
 
저스틴의 제자로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르 주장함, 그는 최초로 복음서들간의 공통된 기사를 정리하였으나 말년에 영지주의에 심취되고 말았음 ,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켜 "극단적 금욕주의자"로 간주함
 

아데나고리스
 
2세기
 
아테네
 
변증서 ,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플라톤주의자로 고전적인 형태의 저술을 남김
 

데오필루스
 
181년 사망
 
안디옥
 
아우톨리쿠스 서신
 
안디옥의 주교로 이교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인 엄격한 변증가임
 

멜리토
 
190년 사망
 
사르디스
 
약 20여권의 저서(대부분 소설)
 
시르디스의 주교로

Quartodecimans(14일주의)을 지지함 , 구약성서 가운데 최초로 그리스도인 목록을 작성함
 

헤게시푸스
 
2세기
 
시리아 그리스

로마
 
연대기(전해지지 않음)
 
유대교에서 개종한 자로 초대교회의 순수성과 사도성을 증명하기 위해 각종 문헌정보를 수집하였고 모든 이단사상의 책임을 유대교에 돌림
 

 

▶순교자 저스틴

저스틴은100년경 팔레스틴의 Flavia에서 출생. 로마에서 163-167년경 순교. 그는 이방인이었으나, 출생지인 팔레스틴에서 유대교 전통에 접했고, 희랍세계를 여행하면서 스토아학파, 피타고라스학파, 플라톤학파등 희랍 철학과도 접하였다. 135년경 에베소에서 만난 그리스도인에 의해서 기독교 신앙에 귀의한다. "철학의 의미와 목적은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며, 그 실재(Wirklichkeit)를 중재하는 것이고, 이러한 인식으로 인하여 행복을 선사하는 것이다." 변증가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합리적인 사고로 대체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는 모든 철학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계시의 진리는 이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신적인 근원에 있는 것이다."(Cohortatio ad graecos, Schlu worte-B.H gglund, 21). 개종후 로마에서 활동하며 로마황제 Antonius Pius, M. Aurelius, Lucius Verus에게 변증서를 보내어 기독교를 변증했다.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Dialog mit dem Juden Tryphon)이 유명하다.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입장
 
변증가들의 답변 내용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빗나간 형태의 분파
 
유대교의 법은 본래 한시적이었기에 새 계약을 지향하는 것을 표방한 것
 

십자가에 달린 목수의 아들 예수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아님
 
구약성서는 메시야의 영광과 고난을 예언하고 있음
 

그리스도의 신성은 하나님의 일체성과 모순되는 것임
 
구약성서는 삼위일체 안에서 인간의 양면성을 나타내고 있음
 

변증가들의 유대교에 대한 반박 내용
 

●구약성서의 예언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음

●구약성서의 전형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

●예루설렘의 멸망은 유대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자 기독교에 대한 입증을 말함
 

기독교에 대한 이교(異敎)의 입장
 
변증가들의 답변 내용
 

부활의 교리는 불합리한 것임
 
복음서마다 수많은 증거가 있고 제자들에게 끼친 영향이 크며 자연계의 순환 (예를들면, 계절)에도 그 비유가 있음
 

성서는 모순투성임
 
타티안의 공관복음서처럼 모순된 내용들이 조화와 일치를 이루고 있음
 

무신론은 폭넓게 전파되고 있음
 
플라톤조차도 보이지 않는 신(神)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음
 

기독교는 범죄자들의 예배처소임
 
예수의 의도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함에 있었음
 

기독교는 흔히 발생하는 종파에 불과함
 
기독교는 모든 이들의 영생을 준비하고 있으며 모세는 이교 철학자들의 등장을 예견함
 

기독교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함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한모든 법에 순종함
 

기독교는 근친상간(近親相姦)관 만행을 저지르는 등 도덕상의 문제가 있었음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자의 정신을 본받고 있듯이 그들의 삶의 방식을 준수할 따름이었음
 

기독교는 천재로 인한 사회질서 파괴의 주범이었음
 
자연의 재해는 그릇된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
 

변증가들의 이교(異敎)에 대한 반박 내용
 

●이교 철학작들은 자신들의 주요 이념을 모세와 예언자들로부터 도용한 표절자에 불과함

●다신교는 철학의 불합리리성과 비도덕성을 특징으로 삼고 있음

●이교 철학자들은 서로들 간에는 물론 그들 자신조차도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음
 

변증가들의 기독교에 대한 옹호 내용
 

●참된 진리는 이교 철학자들이 기독교에 개종함으로써 입증되었으며 이로써 기독교의 진리 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되었음

●그리스도, 사도들, 그리고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발생된 기적들이 기독교 의 진리됨을 증거함

●수많은 시련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발전은 그 자체의 진리성을 확증하고 있음

●기독교만이 인간 존재의 참된 행복을 발견케하는 종교임
 
▶변증가들의 주요 논쟁
 

[2003년 6월]

4. 3세기 교부


이름
 
연 대
 
목회장소
 
대표저서
 
주요내용
 

이레니우스
 
2세기 후반
 
서머나

고올
 
-이교에 대한비판

-악의기원과신(神) 의 일체성에 관하여
 
폴리갑에게 공부한 그는 선교사요 변증가였으며 영지주의에 강력한 반대를 표방하였고 전천년설을 옹호하였으며 리용의 주교로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클레멘트
 
150-215년경
 
알렉산드리아안디옥, 예루살렘
 
-그리스인들에게 보내는 교훈집

 

-기질론

 

-교육론
 
철학 수업을 쌓았던 그는 성년에 이르러 개종하였으며 로고스이론을 강조하였고 성서를 은유적 해석방법으로 접근하였다

 

고전적인 그리스도인 찬양시인 "선한목자"를 저술하였다
 

터툴리안
 
160-220년경
 
카르타고
 
-이교에 대한 규정 -말시온 이교반박서 -프락세우스 이교 반박서
 
로마군대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한 그는 중년의 시기에 몬타누스파로 개종하였으며 그의 업적은 그가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시켰다는 데에 있다.
 

히폴리투스
 
170-236년경
 
로마
 
`
 
이레니우스에게서 공부한 그는 당대 로마의 주교들에게 배척받았는데 그 이유는 알레고리적인 방법으로 성서를 해석하였기 때문이었다.

후에 사르디니아지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
 
160-240년경
 
팔레스틴
 
-연대 사료집
 
오리겐에서 공부한 그는 천지창조로부터 서기 221년까지 역사적인 자료연구서를 발간하였다.
 

오리겐
 
185-254년경
 
알렉산드리아 -가이사랴
 
-6개국어 대역성서

-켈수스 이교반박

-제1원리(신학)
 
그의 아버지 레오니다스는 202년에 순교하였고 그는 클레멘트에게서 공부하였다. 203년 클레멘트 사후(死後) 교리문답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성서의 알레고리적인 해석의 주목할만한 업적을 이루었으며 극도의 수도생활을 하였고 교회내 반대세력을 피해 망명생활한 후 로마인의 손에 의해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

 
 

씨프리안
 
200-258년경
 
카르타고
 
-교회의 통일성 -실수에 대하여
 
수사학을 공부한 그는 245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247년부터 카르타고의 주교 일을 담당하였고 터툴리안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감독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박해시 배교자들의 문제에 엄격한 입장을 취하였고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시 순교하였다.
 

 

▶터툴리안 --------- 라틴교부

터툴리안은 155년과 160년 사이에 카르타고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모는 이교도였으며 그는 부패한 극장과 잔인한 검투사의 경기가 열리는 도시에서 교양있는 이교도의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는 법률가로서의 훈련을 받았는데, 이것은 후에 그의 신학 표현의 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사상 형태와 교회의 신학용어 전반에 걸쳐서 깊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신격을 나타나는데 있어서 삼위일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카르타고의 교회와 알렉산드리아의 교회는 서로 반대되는 경향을 나타냈다. 하나는 철학을 불신하고 기독교의 교리를 강조했으며, 다른 하나는 철학을 사랑하고 사색을 좋아하고 신학사상을 철학적 용어로 표현했다.

우리가 그의 정력과 추진력과 대담성을 생각해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의 뛰어난 변론적 재능은 기독교를 보호하는데 최대한으로 사용되었다.

그의 저술은 여러 권이 있는데 우리에게 전해오는 30여 편의 논문 외에도 여러 작품들이 있었다. 197년에 쓴 그의 변증서(Apology)는 아마 그때까지의 글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법률가로서 그는 다른 기독교 변증가들이 결코 다루지 못했던 결정적인 영향력이 있는 논지들을 발표했다.

매우 널리 알려졌으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책은 그의 취득시효론(De Praescriptione)이었다. 여기서 그는 전통은 성경과 일치해야하며 결국 그것은 성경과 동등하다는 잘못된 주장을 제기했으며, 또한 이 주제에 관한 이레니우스의 관점을 발전시켰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로마 카톨릭의 권위 및 전통 교리가 완전하게 발전되어 갔다.

 

▶키프리안 -------- 라틴교부

그는 주후 200년 경 교양있고 부유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46세 되던 해 그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는 실천적 신앙으로 세례를 받은지 2년후에 장로가 되었으며 곧바로 그는 대중의 환호를 받아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최근에 개종한 사람이 대중에 의해 감독으로 선출된 사건은 장로가 된 지 오래 된 사람들에게 쓰라린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분파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교회사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1. 감독의 위치를 높이는 그의 줄기찬 주장

이것은 그가 직면했던 분파주의자들의 심각한 반대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했고 또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말한 감독에게 복종하지 않은 죄를 비난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임명하신 교회의 통치자로서의 감독의 절대적 우월성에 대해 굉장한 주장을 내놓았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이 주장은 널리 채택되어 거의 완전한 독재적인 교회정치가 이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2. 제사를 드리는 사제로서의 그의 성직자 개념

그는 기독교교회에 이러한 관념의 구체적 유형을 제시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주의 만찬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제단에 바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 변화는 중대한 것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체설의 교리와 미사 희생의 남용을 초래케하였다. 키프리안 이전에는 제단이나 제물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교회는 계속해서 이교도들에게 자랑했었다.

3. 감독 각자의 자치권에 대한 그의 강한 신념

로마의 감독 스테판은 이단들의 세례에 대하여 다른 모든 교회들이 자기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음을 알게 되자 자기를 반대한 다른 교회들이 자기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음을 알게 되자 자기를 반대한 다른 교회들 특히 카르타고와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의 복종을 요구하는독재적인 교령을 발송하였다. 키프리안은 전에 폴리갑과 이레니우스의 경우와 같이 힘을 다해 로마의 권리 침해 행위에 대항해서 싸웠다.

258년 발레리안 황제의 박해에서 그는 카르타고에서 40마일 떨어진 곳에서 목베임을 당하였다.

 

▶클레멘트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지적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클레멘트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연구하고 가르쳤으므로 그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 특유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레니우스와는 달리 목회자가 아니라 사상가요 연구자였다. 그가 학문을 탐구했던 목적은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을 돕고 이교도 지성인들에게 기독교가 절대로 불합리한 미신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클레멘트는 이교신자들에게 기독교 교리의 많은 부분이 플라토의 철학에 의해 증명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클레멘트는 이 세상에 오직 한 가지 진리만이 존재한다고 확신하였으므로 플라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진리는 다름 아닌 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바로 그 진리라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주어졌듯이 헬라인에게는 철학이 주어졌다.

저스틴과 클레멘트의 차이점은, 저스틴이 이교도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로고스의 교리를 사용했던데 반해, 클레멘트는 같은 교리를 이용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철학을 진리에 관하여 보다 개방적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했다는 점이다

 

 

클레멘트는 190년경에 유면한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교리문답학교의(Catechetical School) 교장이 되었다. 202년 셉티무스 세베루스황제 박해로 안디옥 피난, 저술과 강론으로 교회에 봉사하였으며, 213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죽었다.

터툴리안과는 달리 그는 교회는 이교의 철학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철학은 매우 가치가 높은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모든 참된 지식은 결국 사람을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인 성경에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클레멘트는 모든 자료로부터 이 지혜와 지식의 보고를 쌓아서 그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하려고 했다. 또한 그는 영지주의의 거짓된 지식을 기독교의 진실하고 성서적인 지식으로 바꾸고자 하였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us Severus)의 혹심한 박해를 받아 202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당했으며 220년 가이사랴에서 죽었다.

 

▶오리겐 Origen(Origenes Adamantius)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185-254년경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이다. 그는 이집트엣 태어나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자랐고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학교에서 클레멘트에게서 배웠다.

202년 세베루스(Septimus Severus)의 박해때 아버지 레오니다스가 순교를 당할 때 그도 함께 순교하려 하였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후에 그는 교리문답학교의 교장이 되어 28년간 재직하였고, 그동안 금욕적이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성년 초기에 마태복음 19:12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거세한 것으로 알려진다.

215년 카라칼라 박해 때 팔레스타인으로 가자 가이사랴와 이일리아의 주교들이 그에게 설교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평신도 신분으로 설교 부탁을 받은 것에 대해 불쾌하게 여긴 알렉산드리아 주교 데메트리우스는 그를 알렉산드리아로 소환하였다. 그 뒤 그는 집필에 전념하였다. 230년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사서 처음에 자기를 초대했던 두 주교에세 사제 임명을 받았다. 그러자 데메트리우스는 오리겐의 사제직을 폐위하고 알렉산드리아의 교장직을 박탈한 뒤 추방하였다.

그뒤 그는 가이사fi에 학교를 세웠고, 이 학교는 곧 유명해졌다. 250년 데키우스의 박해 때 체포되어 사슬에 묶여 고문을 당하였고, 쇠목걸이를 차는 고통을 당하였으며, 지하 감옥에 갇혔다. 이런식의 시죄법(試罪法)을 당하고 풀려났지만 얼마 못가서 죽었다.

오리겐은 희랍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최초의 성경 본문 비평가들 가운데 한 사람, 최초로 체계적인 신앙 진술을 제시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 그리고 최초의 성경주석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 받는다. 또한 유력한 변증가이기도 하였다.

그가 남긴 저서의 수는 유세비우스가 전하는 6,000권에서부터 밤빌리우스가 전하는 2,000권, 그리고 히에로니무스가 전하는 800권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대부분의 저서는 없어졌고, 다만 단편들로만 현존하며 최근에 일부가 발견되었다. 가장 유명한 저서들 가운데는 <헥시플라 Hexapla>와 최초의 조직신학 저서들 가운데 하나인 <원리에 대하여 De Principiis>, 주기도에 대하여 다룬 <기도에 관하여 On Prayer>, 그리고 가장 유명한 변증서인 <켈수스 논박 Against Cel년>등이 있다.

기독교교리를 철학으로 해석하고 조화시키려 하였다. 그는 성경의 신적 영감을 강하게 믿으면서도 알렉산드리아에서 매우 전형적이었던 풍유적 해석이라는 올무에 빠졌다. 그는 현대의 *유니테리언파와 비슷한 여러 이단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를 주장하였다.

사변적인 면에 있어서 오리겐의 상상은 자유 분방하였다. 그는 교회에 의하여 공인된 신앙의 규칙에 충실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수납된 신조에 포함되지 않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충분히 행사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계속되는 창조 행위는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이다. 일련의 피조된 세계가 있었으며 영혼들도 태초부터 창조 되었다는 영혼 선재설을 주장하였다.

 

*유니테리언주의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성교리를 배척하고 교리 일치 없이도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음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종교사상체계, 성경의 권위를 이성과 체험의 기초로 강조하는 데서 발전하였다. 유니테리언 교도들은 인간 본성이 선하다고 믿고 타락, 속죄, 영벌 교리를 비판하며 오직 신적인 영감에 마음을 열 것만을 요구한다.

 

내세관은 연옥설과 지옥 유한설 주장

우주관은 플라톤의 영향을 입어 이데아세계와 물질 세계가 있음을 주장

구원관은 만인구원설 주장

 

▶이레니우스 ----- 소아시아의 신학자

이레니우스는 소아시아에 있는 서머나에서 출생했다. 폴리캅의 제자였으며, 178년 이후로 리용의 감독으로 문서활동, 목회 및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교회안에 있는 이단들을 논박하느라고 전력을 다했지만, 그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감독으로 있는 동안 리용의 모든 주민들을 믿게 하였으며, 유럽각지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논쟁에 있어서 그는 항상 성서를 자유롭게 인용하였으며 기록된 말씀 뿐만 아니라구전, 특히 구약을 많이 사용하였다. 202년경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박해때에 순교를 당했다.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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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니케아 이전의 이단종파

속사도 시대를 마지막으로 정리하면서 우리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성령의 역사와 함께 마귀의 역사도 동시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경고한 말씀대로 어떤 사람들이 교회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려는(갈1:7) 이단의 가르침을 우리는 교회사를 통하여 다시금 살피고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얼마나 말씀으로 철저하게 무장하여야 할지를 스스로 생각해 보도록 하자.

먼저 속사도시대의 대표적 이단을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단
 
지도자
 
역사적 사실
 
가르침의 특징
 

에비온파

(엘케파, 만데파
 
 
 
1세기 후반 팔레스틴 지방에서 발생한 후 소아시아에 전파되었고 대부분 유대인계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었으며 히브리적인 마태복음을 중시하였다
 
구원에 필요한 부분인 모세율법의 보편성을 가르쳤으며 바울에 대한 반감을 지니며 예수는 메시야이지만 단지 세례시 성령이 임한 인간일 뿐이라 하였다.

특히 천년왕국의 임박함을 기대한다
 

노스틱파(영지주의
 
마술사 시몬

(1세기)

케린투스

(1세기 말엽)

바실리데스

(2세기 초엽)

사투르니누스

(2세기 초엽)

말시온

(160년경 사망)

발렌티누스

(160년경 사망)

타티안

(110-172)
 
특히 그리스철학인 플라톤철학에 기초하여 동방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일반대중에 대한 포교는 미흡했고 교회지도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제국 전체에 걸쳐 다양한 종교운동형태를 보여주었으며 이들의 가르침 때문에 교회는 신앙과 신약성서 정경화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교회는 진리의 보고(寶庫)로서 사도의 계승원칙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들은 독특하고도 탁월한 "영지"(gnosis)를 지닌 자로서 신성(神性)이 어떤 "영적인"개인들의 몸 안에 주입되었다고 믿는다. 물질적인 것은 악으로 규정하며 영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철저한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Pleroma). 따라서 성(性)과 결혼에 대한 극단적인 금욕주의 현태를 일반적으로 취하여 유대교와 구약성서를 거부하며 성서를 알레고리(은유)적으로 해석하고 세계는 조물주(=여호와)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그리스도의 육체는 한갖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믿는다
 

몬타누스파
 
몬타누스(2세기)

브리스길라(2세기)

막시말라(2세기)

터툴리안

(160-220년경
 
브루기아 지방에서 발생하여 후에 로마와 북아프리카에 널리 성행하였다
 
금욕적이며 천년왕국을 고대하였고 정통 기독교 교리에 비교적 충실하였으나 그들 자신을 성령의 대변자로 간주하며 예언자적인 계시를 믿고 방언을 하며 신자들의 만인사제직을 주장하였고 어떤 류의 오락 및 여흥도 생활 속에서 배격했었으며 오로지 순교자의 길을 추구하였다
 

마니교파
 
마니(215-277)
 
페르시아에서 발생, 배화교의 영향으로 성장하였고 마니는 그의 육체를 벗고 환생했으며 그의 시체는 페르시아 거리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어거스틴이 젊은 시절 심취한 바 있으며 후대 바울학파, 보고밀파, 카타리파, 알비겐파와 유사한 성격을 지녔었다.

엄격한 계급조직에 의해 형성되었다
 
창조의 이원론적(빛과 어두움) 견해를 지니며 그리스도는 빛으로, 사단은 어둠으로 묘사한다.

이들에 의하면 사도들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 것이며 마니가 올바른 가르침을 주도록 계시받은 자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허구에 불과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추종세력들은 극도의 금욕생활을 표방하였다
 

 

1)영지주의

(1)영지주의(Gnosticism)란 무엇인가?

영지주의 종파는 1세기 말부터 2세기에 걸쳐 지중해 동해안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영지주의란 헬라어 "지식"을 의미하는 '그노시스' 에서 온 말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지식을 높여 신앙 위에 두었다. 그들은 헬라의 철학과 동양의 세계관과 기독교 교리를 절충하여 하나의 혼합적 종교 철학을 세우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의 중요한 문제는 우주의 기원, 죄의 문제, 죄악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인 분석이었다. 또한 신앙을 경시하고 당시 유행했던 신 풀라톤주의를 바탕으로 기독교의 종교적 명제들을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여러 가지 사상을 혼합한 것으로 지역과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원 맥은 동일하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시몬도 초기 영지주의자로 보이며, 이미 요한 당시에 에베소의 세린더스라는 영지주의 거짓 교사가 출현하여 교회를 크게 어지럽혔다. 계시록의 니골라당은 이런 영지주의의 한 무리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전통적으로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인 안디옥 사람 니골라(행 6:5)에게 돌린다.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가 오류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요한 1, 2, 3서를 기록하였다.

 

(2)영지주의의 주장과 특성

▶세상은 최고의 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 낮은 신(the Demiurgus)인 구약 성경의 하나님이 창조했다. 또한 물질계와 영계로 나누고 물질을 죄악시 하고 창조를 부인했다.

▶낮은 신의 계시인 구약 성경은 자신들이 최고의 신에게서 받은 계시인 신령한 지식(靈知, gnosis)보다 낮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약의 하나님 아들인 그리스도의 사도들보다 최고 신의 사도인 자신들이 더욱 월등하다고 주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는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요, 그의 몸은 보통 육신이었는데 침례 시에 참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메시야의 직분을 수행하다가 십자가에서 떠났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무리는 가현설(Docetism), 즉 예수는 육체로 탄생한 것이 아니요 오직 육체를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어떤 파에서는 메시야가 공적인 사역을 하는 동안 잠정적으로 육체를 빌려 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물질과 육신은 악하고 영(spirit)은 선하다. 그러므로 육체는 선하지 않기 때문에 학대하고 방종해도 좋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사상은 페르샤의 조로아스터교(拜火敎)의 이원론에서 온 것이다.

▶율법은 폐지되었으므로 이제 사람은 아무 법이나 규례 또는 규정에 얽매일 필요가 없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요 그들이 얻은 지식을 통하여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3) 신학

▶ 신론

영지주의에서 "신은 완전히 초월적인 존재로서 우주를 창조하거나 통치하거나 하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이다" (Hans Jonas, The Gnostic Religion, Boston 1963, 2. Aufl. 42). 그는 우주와 완전히 반립되며 "초월적인 신 그 자신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감추어져 있으며 자연적인 개념들에 의하여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에 관한 지식은 초자연적인 계시와 조명에 의하여 얻어진다" (42f).

▶우주론

신으로부터 하급의 신적인 존재들이 나왔다. 이들은 통치자들(Archons)이라고 불리우며 우주를 만들었고 그것을 거처로 삼는다. 우주는 이들이 거처하는 일곱 영역으로 겹을 이룬다 (바실리데스에게서는 365 하늘). 이들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을 지닌다(Iao, Sabaoth, Adonai, Elohim, El Shaddai). 아르콘들은 우주를 다스리는데 그들의 사명은 인간을 신으로부터 격리시키고 그리하여 지구를 감옥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들의 폭군적인 세계통치를 운명 (heimarmene)라고 부른다. 아르콘들의 지도자는 데미우르그 (demiurg)이다.

▶인간론

인간은 아르콘들에 의하여 감옥에 갇힐 뿐 만 아니라 그 자신에 의하여도 감옥에 갇힌다. 인간을 몸, 혼, 영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서 영은 위에서 말한 원광의 불꽃이다. 이 불꽃이 몸과 혼에게 갇혀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우선 영이 혼과 몸을 벗어나는 것이며 이어서 아르콘들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구원론

그러나 이러한 구원은 인간 스스로가 이룰 수가 없다. 신이 구원자를 보내어 인간에 대한 지식을 건네줄 때 구원이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이 이 지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미 그가 원광의 불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꽃이기에 원광의 지식을 전달받을 수가 있다. 이때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에 의하여 안다" (Gleiches wird durch Gleiches erkannt)는 것이 중요한 원칙이 된다. Corpus Hermeticum에서는 신지식을 위하여 이 원리가 사용된다. Poimandres 17에서 "原人은 생명으로, 빛으로부터 혼과 정으로 되었다. 생명으로부터는 혼으로, 빛으로부터는 정으로"라고 말한다. 이때 안트로포스는 원인 (原人)을 가리키지만, 원인의 유래에 대한 정의는 일반인에게도 적용된다. 빛과 생명은 만물의 아버지인 신 곧 누스를 가리킨다. Poimandres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신적인 본질의 씨가 있다. 인간에게 누스가 있기 때문에 神인 누스를 인식할 수가 있다. 이 사실이 CH Tract. XI 20에 아주 분명하게 언급된다: "만일에 네가 네 자신을 신과 동등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너는 신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같은 것은 같은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윤리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악한 것으로 여겨 금욕적 (Rigorsm)이거나, 방종적 (Libertinism)이 된다.

▶비판

영지주의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을 혼합주의 (Synkretismus)이다. 바빌론의 점성술, 이란의 신비주의, 유대의 용어, 그리이스의 철학 등이 혼합되어 있다. 신론, 우주론, 인간론이 보여주듯이 영지주의는 삼원론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원론을 주장). 신은 세상과도 인간과도 격리되며, 인간은 신과도 세상과도 격리되어 있다. 우주론과 인간론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세상과 인간에의 부정적인 세계관이다. 인간론에서 인간의 한 구성요소를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인간의 구원을 신격화 (Vergoettlichung)로 여기는 것에 반하여 재신화 (Wiedergoettlichung)이다. 인간의 영은 본래 신적인 존재였는데 물질세계에 갇혀있다가 지식 (Gnosis)를 가짐으로써 다시 신이 된다는 것이다. 유유상식 (類類相識) 이론에 의하여 구원자와 피구원자가 동일시된다. 인간론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윤리이다. 영지주의는 물질적인 몸을 악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것을 금욕을 통해 제어하든가 (Askeptismus) 아니면 어차피 몸은 썩어질 가치없는 것이라는 생각하에 방탕한 생활로 빠지거나 (Libertinismus) 하였다.

 

 

 

 

 

사도후 시대 (101 - 313년 )

: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 까지의 기간

제 2세기부터는 박해에 관한 문제를 다룬 기록들이 증가하며, 순교에 관한 기독교 신자들의 태도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플리니와 트라잔 사이의 서신

111년 소 플리니는 비시니아 총독에 임명되었다.플리니는 로마 법률과 전통을 깊이 숭상하던 인물이었다. 비시니아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어서 플리니는 이들의 처리에 대해서 고민을 하였다. 플리니는 기독교인들에게 세번 개심할 기회를 준 후에 계속 고집하는 자들은 처형을 하였다.

플리니가 당면했던 문제는 과연 기독교신자들은 뚜렷한 범죄 사실이 있을 때에만 처벌받아야 하는지 , 아니면 '기독교신자'라는 사실 자체가 범죄를 구성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던 플리니는 일체의 법적 절차를 일단 중지시키고 트라잔 황제의 지시를 받기 위해 서신을 띄웠다.

황제의 답변은 간단했다. 그들에 대한 일반적인 규칙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고 밝히고 신고가 들어오면 그들을 처벌하되 배도하면 용서해 주고 , 익명의 신고는 받지 말라고 하였다. 이러한 트라잔의 정책들은 비시니아의 경계를 넘어서, 그리고 트라잔이 죽은 오랜 후에도 계속 성행되었다. 제2세기, 그리고 제3세기 일부에 이르기까지 제국 전체에 걸쳐 기독교 신자들을 솔선하여 색출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당국자들앞에 소환 되었을 때에는 이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이 제국의 공식적 정책이었다. 이는 이그나티우스의 일곱 서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서론

1)시기 - 사도 요한이 죽은 후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기 까지의 기간

2)카톨릭 교회 - 보편, 공동의 의미를 지님

3)사상의 발달

가.온갖 박해중에도 전도활동 완성

나.이 시대는 사상의 발효시대이다

다.헬라(그리이스 철학), 동방종교, 유대의 율법주의의 이입으로 사상적 혼란이 옴

라.그노시스주의, 신플라톤주의등 절충 조화의 사상이 형성

 

2.기독교의 전파

1)성장원인

성령의 역사. 전도열, 왕 상류계급의 입신,구제, 봉사와 상부상조, 인내, 고상한 도덕적 생활

 

3.박해

1)원인

가.우연한 원인

가.오해

기독교인은 부도덕하다 - 동굴속에서 남녀가 음행한다

기독교인은 불의한 자 - 자식을 먹음

나.미신

나.진정한 원인

가.사상의 부조화 (로마,기독교)

국가지상주의 -- 신본주의

나.사회생활의 부조화

사치,쾌락,오락 -- 금욕

다.로마의 정책

황제 예배 강요 -- 다신교 반대

기독교인은 군복무 안함

 

2)박해의 결과

가.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임을 확인

나.하나님의 아들임을 더 확인

다.신약 정경 촉진, 진리를 세계에 알림

라.사도,교부들의 순교로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임을 증명

마.교회와 국가의 구별을 명확히 함

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하에서의 박해

161년 황제의 자리에 오르다

그의 재위기간 초기에는 야만족들의 침략과 홍수와 전염병과 기아 자연 재해들이 그치지 않았다. 곧 신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제국에 이러한 재해를 가져다 준 인물들은 다름 아닌 기독교신자들이라느 설명이 나타나게 되었다.

과부 펠리시타스와 그의 일곱 아들의 순교기가 있다. 펠리시타스는 특별회 교회에 의해 구별된 과부였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당신에게 승리할 것이며, 나를 죽인다면 죽음을 통해서 더욱 큰 승리를 거두리라" 이에 총독은 그들을 마르쿠스에게 보냈으며 마르쿠스는 이들을 각각 다른 구역에서 처형시켰다. 저스틴 마터도 이때 죽었다.

쌍투스라는 소년은 갖은 악형 하에서도 단지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 당할수록 계속 이 말만 되풀이 하였다. 이 광경과 또한 다른 이들의 용기를 지켜본 신자들 몇명이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자의 최후를 맞았다.

 

4.사상적 공격

1)루키아누스 lucianus of samosada

기독교인 생활 풍습 비방. 저서 '페레그리누스의 죽음'

2)켈수스 celsus (셀수스)

저서 '참말'로 기독교 공격. 오리게네스가 '켈수스를 반대한다'로 반박

예수는 마리아와 로마 병사사이의 사생아라고 말했다

3)신플라톤 학파

시조 - 암모니아 삭카스 ammonius saccas

중요 학자 - 플로티누스 plotinus

포르피리우스 perphyrius

 

5.교부 fathers

1)정의

가.사도들의 직계제자

나.교리의 정통성을 가진 자

다.교리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자

2)구분

가.속사도교부 apostolic fathers

나.변증가 apologists

다.헬라교부 greek fathers

라.라틴교부 latin fathers

 

6.사도교부

1)이름과 저서가 같이 전해오는 교부

가.로마의 클레멘트 clement of rome

일세기말의 로마의 유명한 장로

 

나.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ignatius

107년 맹수의 밥이 됨

이그나티우스는 순교의 자리를 향하여 가면서 일곱 개의 서신들을 남겼는데 이는 초대 기독교역사를 살펴보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록이 되고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30 - 35년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사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의 편지들을 살펴보면, 안디옥 교회내에 몇 개의 분파가 있었으며, 감독은 그가 이단적이라 생각한 교리들을 맹렬히 반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이교도들에 고발되었는지, 혹은 그를 미워하였던 분파의 기독교신자에 의해 고발 되었는지도 확실치 않는 것이다. 어쨌든 이그나티우스는 체포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 로마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그나티우스는 압송되어 가는 도중 여러 신도들을 만나 대화할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또한 그가 구술하는 편지를 받아 쓸 비서까지도 대동할 수 있었다. 그 편지를 통해 당시 로마 전체에 걸친 기독교신자들에 대한 일반적 박해는 없었으며 단지 법원에까지 소환된 자들만 재판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이그나티우스가 기독교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라 할 수 있다.

 

이그나티우스의 일곱 편지는 이러한 면회의 결과 였다.

1.서머나에서의 집필

가.에베소 - 에베소 감독 오네시모가 보낸 사절단과의 만남

나.마그네시아 - 마그네시아 교회에서온 감독과 두 장로

다.트라리아 - 폴리비우스 감독

라.로마인에게

2.드로아에서의 집필

가.빌라델비아 - 빌라델비아교회에 보낸 글

나.서머나 - 서머나 교회에게

다.폴리캅에게 - 폴리캅에게

 

다.폴리캅 polycarp

서머나 교회 감독. 사도요한의 제자. 이그나티우스의 친구

155년 경까지도 플리니에게 준 트라잔의 지시는 아직 유효하였다. 기독교신자들을 구태어 색출하지는 않았으나 일단 고발되고 로마의 신들에 예배하기를 거부할 경우에는 반드시 처벌하였다.

재판관은 폴리캅이 황제를 두고 맹세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석방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폴리캅은 답변하기르 "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겼으나 나를 한번도 저버리신 적이 없다.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하고 응답하였다.

재판관이 그를 산채로 태워 죽이겠다고 하자 폴리캅은 대답하기를 재판관이 붙인 불은 순간이지만 지옥의 영원한 불길은 꺼지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라.파피아스 papias

 

2)저서만 전해지고 저자가 전해지지 않는 교부

가.헤르마스의 '목양자' - 천로역정과 비슷

나.바나바서 - 히브리서와 비슷

다.디오그레투스에게 주는 편지 - 황제를 양해시키려는 변증서

라.열두사도의 교훈 - 신자의 생활과 습관 교훈

 

7.변증가

1)대표적 변증가들

가.저스틴 justinus

저스틴은 기독교신자가 되면서 철학자의 직분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과업을 계승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 작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름 아니라 기독교와 고전적 지혜사이의 관계를 증명하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저스틴은 기독교와 이교 철학 사이에 몇 가지 접촉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저스틴의 주장에 의하면 비록 이교도들에 의해 생성되었다 할 지라도 고전 문화 속에서 발견되는 모든 선한 것들과 진리들은 기독교에 속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 속에서 영감을 받아 곧 이어 그들의 신앙과 고대 문화 사이에 계속 다리를 놓고자 시도하는 기독교인들이 나타났다.

나.아리스티데스 aristides

다.콰드라투스 quadratus

라.타티아누스 tatianues

마.아테나고라스 atenagoras

바.멜리토 melito

2)변증의 내용

신자들이 불공평한 재판을 받는 억울한 형편을 변호

'비난'

가.기독신자는 무신론자이다 -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나.세상과 별다른 왕국을 세우려 함 - 기독교인은 세상에도 충실하다

다.부도덕한 자 - 성찬에는 세례교인만 참여, 서로근친상간한다. 아기를 먹는다

라.예수는 요술쟁이

마.황제숭배를 거부함 -

바.최후 부활을 믿는다.

 

'변증'

가.이교도들이 우상 섬기는 데 비해 신론자라고 할 수 있겠으나 사실 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

나.신자는 신앙을 위해 순교한다. 이것은 세상 왕국을 세우려 함이 아님을 증명

다.예수의 도덕적 교훈을 이용하여 도덕적 탁월함을 설명

라.예수는 신이다.

 

8.그리이스교부

1)소아시아의 신학자

이 시기는 대략 주후 171년경으로 변증가시대의 끝으로 삼는다

가.이레니우스 irenaeus 115 - 119년 출생

130년경 소아시아지방에서 출생하였다. 폴리캅의 제자

무엇보다도 목회자였다. 그는 사람들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신비스런 문제에 대해서 사색하기 보다는 그의 교인들을 기독교 생활과 신앙 속에 이끌기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역사를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일부로 보다

소아시아 신학자로 고을지방의 감독

나.힙폴리투스 hippolitus

이레니우스의 제자

2)알렉산드리아 학파 alexandria school

가.....판테누스 pantaenus

나. 클레멘스 flavius clemen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랜 여행끝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만족할 만한 스승을 만나다. 바로 판테누스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지적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클레멘트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연구하고 가르쳤으므로 그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 특유의 특징을 보여주고있다. 그는 이레니우스와는 달리 목회자가 아니라 사상가요 연구자였다. 그가 학문을 탐구했던 목적은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을 돕고 이교도 지성인들에게 기독교가 절대로 불합리한 미신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클레멘트는 이교신자들에게 기독교 교리의 많은 부분이 플라토의 철학에 의해 증명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클레멘트는 이 세상에 오직 한 가지 진리만이 존재한다고 확신하였으므로 플라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진리는 다름 아닌 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바로 그 진리라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주어졌듯이 헬라인에게는 철학이 주어졌다.

저스틴과 클레멘트의 차이점은, 저스틴이 이교도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로고스의 교리를 사용했던데 반해, 클레멘트는 같은 교리를 이용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철학을 진리에 관하여 보다 개방적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했다는 점이다

 

202년 셉티무스 세베루스황제 박해로 안디옥 피난, 저술과 강론으로 교회봉사

213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죽음

 

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

오리겐은 아직 10대 였을때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디미트리우스의 명을 받아 당시 카테쿠멘 , 즉 세례 지원자들의 훈련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일을 훌룡하게 처리함

후에 시기를 포함한 여러가지 이유로 디미트리우스와 분쟁이 생기게 되었다. 그 결과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가이사랴에 정착하게 되었다.

오리겐의 신학에 쓰는 정신은 그의 스승 클레멘트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다. 즉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행하던 철학사조였던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

데시우스 치하에서 박해받음. 모진 감옥생활로 출옥후 죽음

185년 알렉산드리아 출생

아버지는 202년 대 박해시 순교

18세부터 클레멘트 후계로 신학교수가 됨

청년시에 수술하고 고자가 됨

명성이 높아지자 시기하여 군인들이 감시하고 그 문하생 7명이 사망

이단설을 주장한다고 추방되어 가이사랴에서 신학교교장이 됨

244년 옥중에서 사망

(신학)

기독교교리를 철학으로 해석하고 조화시키려 함

육신.정신.영이 있는 것처럼 성경에도 문의적, 도의적, 심령적 3종이 있다고함

부와 자는 하나이다. 동질이며 같은 인격이다

영혼 선재설을 주장

내세관은 연옥설과 지옥 유한설 주장

우주관은 플라톤의 영향을 입어 이데아세계와 물질 세계가 있음을 주장

계시관은 성경을 은유적으로 해석

구원관은 만인구원설 주장

<요약>

.극기 생활(천국위해 고자, 청년시절 금주)

.업적많음(기독교 학자, 변증가, 저술가)

 

9.라틴 교부

1)터툴리안 tertullian

터툴리안은 클레멘트와는 매우 다른 인물이었다.

성경은 교회에 속해져 있는 것이므로 이교도들이 성경에 대해서 논할 자격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계승은 형식적 계승뿐만 아니라 교리의 계속성도 포함된다.

몬타누스운동에 참여

 

2)시프리안 cyprian

200년에 칼타고의 부자집에서 출생

40세쯤 개종. 248년 카르타고의 교회 감독이 됨

250년 박해로 사막에 피난가서 서신으로 교회를 격려 - 방대한 서신 왕래를 통해 교인들을 계속 지도하는 것이 자기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몇년후 순교함

데시우스의 박해후 변절자들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이 때 시프리안은 지역감독들의 모임인 감독회의를 소집하여 , 동 회의에서는 실제 제사에 참여함이 없이 증명서를 구입, 혹은 취득한 신자들을 아무런 조건없이 교회로 다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실제 제사에 참여한 자들은 임종시에나 혹은 새로운 박해가 일어나 이들의 신앙의 회개의 진실성을 증명할 수 있을때에 비로소 성도의 교제를 회복시켜 주기로 했다. 물론 제사에 참여하고 그 후 회개의 정이 보여지지 않는 자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 올수 없었다.

<교회론>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

교회를 버린자는 외인이고, 속인이며 적이다

교회를 어머니라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없다.

노아 방주 밖의 사람이 멸망함 같이 교회밖의 사람은 멸망당함

교회는 단일, 즉 카톨릭교회 외에 다른 교회는 있을수 없다.- 당시는 이백년대이다. 이시대에는 개혁교회가 없었다. 여기서 카톨릭은 정통 보편교회를 말한다.

교회는 감독에 의해 세워졌으니 감독 없으면 교회도 없다.

분리한 교회나 이단자의 세례는 무효이다

교회 통일을 주장한 카톨릭 사상의 시조이다.

<요약>

교회만이 구원이 있고 감독권을 높임. 교회를 방주 등으로 표현

최초의 카톨릭 성직제도 계급 지도자

 

10. 이단과 분파들

1)유대교적 이단

가. 에비온파 ebionites

바울 교리 배척

율법 고수 - 할례금함. 안식일 지킴, 금식, 율법의 문자적 해석

기독관 - 동정녀 탄생 부인, 인성 주장, 수세시 직분 받음을 거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됨

나. 엘카이파 elkesai

예수는 아담이 다시 사람이 되어 나왔고 앞으로도 다시 육신을 입을 수 있다고 주장

할례를 행함, 안식일 지킴, 금식한다

다.....그노시스파 gnostism

말뜻 - 헬라어 '지식'에서 나옴. 지식은 초자연적 지식

당시 유행하는 점성, 마술, 페르시아의 이원적 우주론의 혼합체에 기독교 교

리를 혼합해서 일종의 종교철학을 구성하려고 한 것이다.

인간의 삼분 - 물질적 인간, 심령적 인간, 정신적 인간

가.그들의 새 교리

.구약에서 유대교적 요소를 거절할 것

.예수의 육체적 고난, 부활등의 실제를 부인

.금욕과 방랑생활을 시인

나.그들이 해결하려는 문제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에 어떻게 죄가 있고 재해가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신/구약의 관계에 관한 것

다.여기에 대한 이들의 해명

 

.신으로 유출된 아이온(영원히 존재하여 자라는 뜻)이 신에게서 멀어져 최

하급에 달함

.우주는 하급신이 창조한 것이므로 불완전한 죄가 있다

.구약성경의 신은 하급신이다

.그리스도는 최고 아이온이며 가현하였다

.구원은 물질을 구속을 해탈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감이니 소수이다

.속죄는 지식을 통해 완수한다

라.....마르시온

시노페 감독의 아들로 출생

유대교와 물질세계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의 아버지, 즉 성부이신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인 여호와

와는 다른 존재라고 했다. 바로 여호와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그는 무지 혹은 악

한 동기로서 이 세계를 만들고 그 속에 인류를 배치시켰다.

여호와는 모든 인류가운데 특별한 민족만을 선택하였던 독선적인 신이었다.그

는 또한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자들을 기억하고 반드시 복수하고야마는 모진 신이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가 여호와의 영역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마르시온은 히브리 경전을 부인하였다.만약 구약이 열등한 신의 말씀이라면

교회에서 읽어서도 안되고, 기독교 교육의 기초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마르시온

은 이러한 공백을 메꾸기 위하여 그가 진정한 기독교경전이라고 생각하였던 책들

의 목록을 작성하였다. 이 속에는 마르시온이 보기에 예수님의 메시지

를 진정 이

해했던 몇 명 안되는 인물들 가운데 하나인 바울의 서신들과 누가복음이 들어있

다. 그외의 모든 기독교 경전들은 유대인들의 관점에 의해 훼손되고 오염되었다고

간주하였다.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속에 들어있는 수 많은 구약의 인용들을 마르시

온은 후대의 삽입이라고 보았다.즉 원래의 메시지를 훼손시키기 위한 유대주의자

들의 조작이라는 것이다.

2)교회의 분파

가.....몬타누스파 montanism

교리 - 구교와 일치함 (성경은 전부 정경)

목적 - 원시 기독교의 부흥

지식보다 신앙이 우선 (그노시스 반대)

엄격한 규율. 교회의 계급주의 반대 (만민 제사장주의)

금욕, 고행을 장려. 재혼금지. 금욕주의

세례후 범죄는 무서운 것이다.

몬타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운동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교회는 몬타누스주의자들이 예언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을 통하여 역사의 마지막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주장때문에 이들을 반대하였다.

나.....노바티아누스파 novatianists

데카우스황제 (249 - 251)시 박해때 변절자 처리를 용납안 함

신앙을 배반한 치명적인 범죄자도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칠세기 자취를 감춤

다......도나투스파 donatism

박해시 성경을 버린 자들 용납안함

엄격한 교회의 규칙과 교인의 순결 주장

세속적 교직자 배격

감독정치.. 세례받아야 구원을 얻을수 있다

개인주의로서 편협, 완고, 광신 상태로 흘러감

3)마니고

로마제국 동방에서 3세기에 일어난 종교로서 그노시스파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그 근원이 동방이며 서방으로 들어와서 기독교와 접목하고 기독교적 요소를 흡수

하였다.

가.교조는 마니이다

나.교리

- 인류는 악마가 광명국에 침입하므로 생겼다

- 그러므로 인생이 돌아갈 곳은 해탈이다

- 해탈하기 위해서는 금욕생활을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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