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사

로마교회의 전성기 (1073-1303)

이 시대는 일반적으로 그레고리우스 7세가 등장한 1073년경부터 보니파키우스 8세가 죽은 1303년까지의 기간에 해당하는데 로마교회가 최고의 영화와 번영을 누리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사상면에서나 제도면에서 교회지상주의가 구가되었고 십자군 전쟁 등으로 유럽 역사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1.서임권 논쟁

 

(그레고리 7세의 교황권 회복 투쟁)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세기의 교회정치가 퇴폐 일로를 걷고 있을 때 등장하여 교황권과 로마교회를 개혁한 인물이다. 그는 중세 교황 중에서는 가장 탁월한 인물이었다. 당시 교회 상황을 보면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매우 복잡하고 암담했던 상황이었다. 외부 사정을 볼 것 같으면, 독일 황제는 권력을 이용하여 로마 교회의 내정을 간섭하였으며, 교황 및 감독의 임명을 좌우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국내 정세는 카를 대제의 사후 국왕의 권력이 약화되어서 사실상 대제후(영주)들이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교회는 영주의 손에서 그 흥망이 결정되었다.

 

또한 교회의 내부 사정을 볼 것 같으면, 교회는 부패하여 탐욕과 모략과 음모가 끊이지 않았고 폭력과 암살이 난무했다. 축첩 시대에 잇달아 일어난 교황 폐위 사건 등으로 인해 11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교황청의 권위가 완전히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1044년에서 1046년 간에는 대단히 보잘것없는 세 사람의 교황 베네딕트 9, 실베스터 3, 그레고리우스 6세가 동시에 교황이 되어 서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교회의 부흥과 교황권의 회복을 위한 개혁파가 일어났는데 그 대표자가 나중에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이 된 힐데브란트(1015-1085)였다. 그의 등장을 기준으로 로마교회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로 그는 로마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획기적으로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 명의 교황이 서로 다투다가 황제의 간섭으로 세 사람 모두 교황직에서 쫓겨났을 때 힐데브란트는 그 중 한 명인 그레고리우스 6세를 따라서 독일로 추방되었다. 그레고리우스 6세가 죽자 그의 백부가 원장으로 있었던 클뤼니 수도원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각지를 순회하며 교황권 확립을 위해 힘썼는데, 투르의 감독 부르노가 황제 하인리히의 간청으로 교황직에 오르려고 로마로 가게 되자 그도 함께 가게 되었다. 로마인들의 환영 속에서 부르노가 로마에서 교황직에 오르자 헬데브란트는 교황청 부집사가 되었다. 그 자리는 외형적으로는 크게 유력한 자리는 아니었으나 힐데브란트는 그의 인격과 수완으로 교황과 다름없는 실질적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1054년 교황 레오가 죽은 후 몇대의 교황을 모두 그가 선정하다가 드디어 1073년에 힐데브란트는 자신이 직접 교황이 되어 그레고리우스 7세라 칭하였다.

 

교황에 취임하자 힐데브란트는 교회의 지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혁명적 조치를 취하였다. 그는 교황인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리고 베드로의 대표로서 제국과 왕국, 공국(公國), 후작령, 심지어 모든 사람의 소유까지도 다 취할 수 있으며 다시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땅에 사는 사람이면 황제로부터 비천한 농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권위에 순종하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또한 모든 성직자로 하여금 독신 생활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성직자들이 누리던 모든 세습적 특권을 빼앗고 오직 모든 것을 교황에게 의지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횡행하고 있던 성직 매매를 엄금하였다. 당시 파렴치한 고위 성직자들은 영적 자격 유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최고 입찰자에게 성직을 팔아버리는 일을 빈번히 행하였다.

 

그러나 힐데브란트의 최대 싸움은 평신도의 성직자 임명권(Lay Investitue)을 둘러싼 것이었다. 봉건법에 따르면 봉신(封臣, 騎士)은 토지를 소유하는 대가로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법률적 권리를 인정받는 의식을 행했는데 이것을 서임식(敍任式)이라 하였다. 이런 원칙은 성직자에게도 적용되어 고위 성직자가 땅이나 영토를 취득할 때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임식의 절차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힐데브란트는 클뤼니 수도원의 원칙에 따라 교회 일에 대해 세속 권력이 간섭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여, 성직자는 세속 통치자의 재가 없이(즉 서임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취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성직자를 임명하거나 교회에 속하는 토지나 재산을 감독하는 권한을 국왕이나 제후에게서 빼앗아 교황의 권한 아래에 둔 것이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는 교황은 국왕을 지배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태양과 달이라는 두 빛을 세우신 것처럼 땅에도 교황과 국왕이라는 두 권세를 세우셨는데 그 중 교황은 태양과 같고 황제는 달과 같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 독일 황제(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독일 왕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황권 확장 정책을 크게 반대했다. 만일 그레고리우스의 뜻대로 모든 교회 재산 감독권이 교황에게로 넘어가게 되면 당시 독일 제국 토지의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던 교회 감독들과 신부들의 땅은 교황 수중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이는 곧 황제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하며 독일 제국의 주권은 크게 침해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는 교황의 반대파와 결탁하여 보름스 종교 회의(1076)에서 교황의 폐위를 결정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 역시 그해 6월에 회의를 소집하여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폐위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파문을 당한 황제를 돕는 자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이렇게 되자 영원한 형벌을 두려워한 민중들이 아무도 황제를 섬기려 하지 않았으며 음식이나 피난처조차 제공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과 아울러 제후들의 권고 등으로 인해 하인리히 4세는 결국 굴욕을 참고 일년 이내에 교황과 화해하기 위해 그해 겨울 부하들을 거느리고 알프스를 넘어 교황이 머무르고 있는 카놋사로 찾아갔다. 황제는 맨발과 참회자의 초라한 복장을 하고 눈덮힌 궁전 뜰에 3일을 서 있어야 했다. 4일째 되는 날에 비로소 교황은 그를 받아주었다. 황제는 교황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며 자비를 구하여 사면을 받았다. 이것이 소위 {카놋사의 굴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카놋사의 굴욕은 표면상으로는 교황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하인리히 황제의 정치적 승리였다. 황제는 독일의 정적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교황이 주재할 아우스부르그 회의를 못하도록 막아버렸고 교황의 다른 계획도 좌절시켰다. 그러나 이 카놋사 사건은 독일 제국이 교회의 권위 앞에 심한 굴욕을 받았다는 인상을 남겨주게 되었다. 교회의 출교 해제가 있자 황제의 정적들은 10773월에 루돌프 공을 세워 내란을 일으켰으나 하인리히 4세는 루돌프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황제에게 반대했던 제후들에게 보복을 가했다. 그러자 교황은 10803월에 로마 회의에서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에 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독일 국민의 동정이 국왕에게로 쏠려 파문이 효과를 내지 못했고 황제는 이 기회를 타서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하고 클레멘트 3세를 교황에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아예 교황을 죽일 생각으로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3년이나 걸려서 로마를 점령했고 10855월 남부 이탈리아 살레르노의 한 산성에 숨어 있던 교황을 찾아내어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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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교회의 예배 형태와 생활상

 

중세 교회의 예배는 설교보다 의식과 예전을 중시하였는데 갈수록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이것은 교회의 타락과 형식화의 결과였다. 서유럽 각국의 교회들에서 예배 때 사용되는 용어는 당시 이미 사어(死語)가 된 라틴어였다. 성경 낭독도 라틴어로 했고 설교도 성직자와 학생들을 상대로 한 라틴어 설교였다. 따라서 일반 신자들은 설교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예배는 자연히 귀로 듣는 말보다는 눈으로 보는 형식을 더 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 중세의 성직자들은 대개 지식 정도가 매우 낮아 설교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설교는 길지 않았으며 기독교의 복음 진리를 설명하기보다는 생활에 필요한 도덕 윤리를 강론하였다. 성자들의 이야기를 자주 했으며 옛날 설교집을 참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 교회에 사용되는 예전(禮典)은 그 종류가 다양하였으나 피터 롬바르드(1110-1161)7가지로 정하였으며 1439년 프로렌스 대회의에서 이를 공인하였다. 7가지 성례전이란 세례, 견신(堅信), 성찬, 고해(告解), 혼배(婚配), 종부(終傅), 서품(敍品)이다.

 

여기서 세례는 몸에 물을 뿌리거나 침례의 형식을 통해 입교를 증거하는 의식이었고, 견신은 세례자의 신앙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기름 부음을 받는 형식으로 성령을 받게 하는 의식이었다. 성찬은 7가지 성례전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서 그 의미에 대해서는 화체(化體)설이 통용되었다. 이 용어는 2세기 초부터 사용되었는데 피터 롬바르드가 분명한 형식으로 교리화했다. 그는 말하기를 "떡은 그리스도의 살로, 포도주는 그의 피로 변화하기 때문에 떡을 나눌 때나 포도주를 나눌 때에는 그리스도의 몸 전부가 제단 위에 임재(臨在)하신다"고 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로마 카톨릭교회의 신앙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이밖에도 고해는 죄를 신부에게 참회하고 고백함으로써 신부로부터 죄를 사함 받는 예식이고, 혼배는 교회가 합법으로 인정하는 결혼을 공표하는 예식으로서 신성시하였다. 종부는 초대 교회 이래로 시행되어 왔는데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며 병 낫기를 기도하는 의식이었다. 이러한 기름은 병자의 영혼을 도와주며 몸을 돕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12세기부터 종부는 주로 죽음에 임하는 준비로서 해석되었다. 신품이란 영혼에 인()을 쳐서 성직에 임명하는 예식이었다.

 

이 일곱 가지 성례 중에서 세례, 견신, 신품은 일생에 오직 한 번만 받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예식들은 영혼에 사라지지 않는 인()을 치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교회에는 고질화된 풍습 중 하나는 성자 숭배였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풍습인데 중세에 와서 그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죽은 자에게 성자의 칭호를 주는 풍습은 800년부터 900년 사이에 일어났는데 십자군 운동은 이러한 풍습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원래 동방에서 주로 행해지던 이 풍습은 서방으로도 전파되었다. 이 문제는 스콜라 철학자들의 토론 주제가 되었는데, 아퀴나스는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는 예배(Lattria), 성자에게는 숭배(Dulia), 성모에게는 최고 숭배(Hyperdulia)를 바쳐야 한다"고 했다.

 

회개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선행을 힘쓰는 것은 오래된 풍습인데 중세에 와서는 어떤 종류의 선행을 한 사람은 죄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교회가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감독이 그것을 공포했으나 나중에는 교황이 대규모로 이를 공포하게 되었다. 이것이 면죄부(免罪符)의 시초였다. 처음에는 죄의 사면을 받기 위해서는 통회 자복이 우선적인 조건이었으나 나중에 그것은 허식에 지나지 않게 되고 오직 죄의 사면은 헌금과 선행에 의해 얻어지는 것으로 믿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스콜라 철학자들은 공덕축적설(功道德蓄積說 ; Theory of Merits)이라는 교리를 만들어내었다. 이것은 아퀴나스에 의해 완성된 이론인데 내용인즉 그리스도의 희생을 비롯한 여러 성자와 선인들이 행한 공덕들은 쌓이고 쌓여서 교회 안에 보존되는데 교황은 그 권위로서 이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미사(Missa, Mass)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 또는 죽은 후 연옥에서 고생하는 사람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죽은 자를 위해 행하는 미사는 일종의 공양(供養)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의 미사를 위해서는 하나의 제단이 필요하고 그것을 집행할 한 명의 사제가 필요하므로 큰 교회에는 많은 제단과 많은 사제들이 있게 되었고 미사는 그러한 사제들의 주요 수입 원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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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 운동

 

스콜라 철학 제1기와 때를 같이하여 일어난 것이 중세의 신비 사상이다. 유럽 중세기의 사상계는 스콜라 철학과 신비주의 사상이 두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 이 두 사상은 근본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었다. 스콜라 철학의 뿌리는 신비 사상에 두고 있다. 둘의 대표적 차이는, 스콜라 철학은 추리를 중히 여기고 신비 사상은 직관을 중히 여기는 것과 스콜라 철학에는 객관적인 요소가 많고 신비 사상에는 주관적인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비적 사상가들 중에서도 차이가 있었으니 독일의 신비주의자와 프랑스의 신비주의자의 특성이 달랐던 것이다. 독일은 철학적이고 프랑스는 감정적, 시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A.독일의 신비주의 운동

 

 

독일 신비주의 사상가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신통주의(神通主義)]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하였으며 따라서 상대적으로 인간의 공허성(空虛性)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들의 약점은 영감으로 오는 체험을 성경보다 중히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1.에크하르트(Johannes Meister Eckhart, 1260-1327)

 

 

독일과 네델란드에는 거의 범신론에 가까운 쪽으로 기울어진 신비주의자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 근원이 된 사람은 독일의 에크하르트였다. 에크하르트는 중세 말기의 신비주의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로 꼽히며 독일 최대의 신비주의자로 꼽히기도 한다. 그는 15세에 엘푸르트에 있는 도미니코파의 수도원에 들어갔고 1293년 파리에 유학하여 1302년에는 신학석사가 되었다. 1311년에 파리에 교사로 파견되었다가 나중에 슈트라스부르크와 쾰른에서 교사와 전도자로 봉사했다. 생애 말년에는 그는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 혐의를 받았다. 그가 죽은 후인 1329년에 교황 요한22세는 그의 저서들에 나타난 28개의 전제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에크하르트는 도미니코파로서 스콜라적인 신념을 가졌던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에게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측면보다는 신플라톤주의적 측면을 받아들였다. 그가 정죄를 받게 된 것도 주로 신플라톤주의에서 나온 일련의 경솔한 진술들 때문이었다. 그는 철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승을, 신학에서는 아퀴나스는 따랐으나 강조점이 달랐다. 그는 또 어거스틴에게서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추상을 빌었으며, 플로티누스, 가짜 디오니시우스,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등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에크하르트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관계였다. 그는 만물에 있는 참 실재는 하나님이요, 사람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불꽃'(spark) 또는 '근저'(ground)가 들어있다고 했으며, 사람의 영혼은 그 속에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께서 완전히 거하시는 곳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안에 있는 이 참 실재 곧 하나님의 성질만 남기고 나머지 개성적인 인간적 특성들은 다 버려야 한다고 했다. 사람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살려내고 나타내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것이 곧 사람이 하나님과 완전하게 사귀는 것이요 내재하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노력의 모범이시며 그러한 예수 안에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성을 입으시고 거하였다고 했다. 하나님이 영혼을 주장하시면 영혼은 사랑과 의로 채워지며, 선행을 통해서가 영혼이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의로워진 영혼이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 생명을 충분히 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하기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아의 의지이며 우주에 편만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주관을 성부(聖父), 객관을 성자(聖子), 사랑을 성령으로 보았다. 그의 이러한 신비적 경험은 신플라톤주의의 용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범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에크하르트는 후에 자신이 과장된 표현을 쓰는 잘못을 범했다고 인정하였고 어거스틴주의와 아퀴나스주의의 교리에 근거한 정통적 설명들을 제공함으로써 논란이 되는 그의 주장들을 다른 방법으로 옹호하였다.

 

 

2.타울러(John Thauler, 1300-1360)

 

 

에크하르트의 가장 유명한 제자는 타울러였다. 독일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출생한 타울러는 도미니코파의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가 되었으며 에크하르트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1348년 영국에서 흑사병(임파선 페스트)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병자 구원에 전력을 기울여 더욱 유명해졌다.

 

 

타울러 역시 에크하르트처럼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내주(內住) 장소인 '불꽃' 또는 '근저'를 영혼 속에서 파악했다. 그러나 그는 조심스럽게 이 근저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영혼의 본래적 속성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영혼이 그 원천으로 돌아감은 은혜의 활동이며 인간 의지와 신적 의지의 연합을 동반하는 것이지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로 흡수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루터는 훗날 타울러의 설교를 순수 신학의 샘이라고 찬양했다. 루터의 찬탄을 자아낸 것은 타울러의 독특한 신비적 가르침이 아니라 고난과 자기 부인, 은혜 의존이라는 내적 신앙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었지만 루터의 이러한 판단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종종 타울러를 종교 개혁의 선구자로 본다. 이런 말을 들을 만큼 그는 신앙의 내적 생명력을 매우 강조하여 기독교 신앙이 외적 의식에 의존하는 것을 비난했다. 그의 설교는 하나님의 내재(內在), 내적 조명(照明)에 대해 많이 말했으며 복음적 사상이 강했다. 또 그의 사상은 실제적이어서 죄의 관념이 강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회개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또한 사랑과 자기 희생을 강조했다.

 

3.로이스부르크(Jan van Ruysbroeck, 1293-1381)

 

 

신비주의 신앙은 네델란드 플랑드르의 가장 탁월한 신비주의자 로이스부르크에 의해 더욱 커져갔다. 그는 오랫동안 브뤼셀에서 교구 사제로 지냈는데 은퇴 후 친구들과 제자들을 모아 그룬엔달에 어거스틴주의적 표준의 명상 공동체를 세웠다. 거기서 그는 그의 첫 저술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를 제외한 모든 책을 썼다. 그의 사상의 많은 부분은 신비주의자 하데비치(Hadewijch)에게서 나온 것으로, 하데비치는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관계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로이스브루크의 교훈과 신앙에 관한 체계적인 개요는 에크하르트의 저작들이 보이는 내성적인 성격과 대조적이다. 그의 대표작 [영혼의 결혼](1350)은 삼위일체에 관한 견해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찾는 영혼들을 위한 안내서이다. 그의 많은 저작들은 당시의 어거스틴주의자를 위해 씌어졌으나, 라틴어 번역서를 통해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는 15세기의 '데보티오 모테르나'(devotio moderna공동생활형제단의 창시자인 헤라르트 흐로테가 시작한 신앙운동)의 출현을 예고했는데, 그 운동을 대표하는 저술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리스도를 본받아]이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의 철학적 업적 때문이 아니라 그의 깊고 순수한 정서 때문이었다. 다른 신비주의자처럼 그 역시 내면 생활과 명상을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일치와 연합을 강조했다.

 

4.주조(Heinrich Suso, 1295-1366)

 

 

주조는 독일 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콘스탄스에 있는 도미니코파 수도원에 들어갔다. 쾰른에서 공부할 때 타울러와 만났고 에크하르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후에 그는 콘스탄스로 돌아와 수도원장이 되었다. 주조는 대개 신비적 연합을 신체의 연합보다는 의지의 연합으로 묘사하고 피조된 존재와 피조되지 않은 존재의 지울 수 없는 차이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구약의 잠언 가운데서 여성화(의인화)[영원한 지혜]를 상상과 동경의 대상으로 이후 일편단심 그것을 섬기는 생활과 명상의 생활을 하였다. 그는 수도자들의 정신적 지도자로도 이름이 나 있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명상집으로 지은 그의 저서 [진리의 소책자](The Little Book of Truth)는 후대의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보다 더 인기를 얻었다.

 

B.신비주의적 단체들

 

 

신비주의 사상은 비단 사상가들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들에 의해서 고취된 독일과 네델란드의 여러 영적 공동체들에 의해서도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에크하르트, 타울러, 주조는 14세기 라인란트와 스위스에 있는 성직자들이나 평신도 신비주의 단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단체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친구](Gottesfreunde)라고 불렀는데 이런 단체들로부터 14세기 후반 익명의 신비주의 논문인 [독일 신학]이 나왔다. 이 책은 1516년과 1518년에 자신이 서문을 써서 발행한 젊은 루터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16세기의 재세례파와 영성주의자들(Spiritualist)은 이 책을 개혁의 기본 서적으로 애용하였다.

 

 

베긴회(Beguines)11세기 경에 이미 존재한 여자 독신 단체인데 공동 생활을 하였으며 검소한 옷을 입고, 함께 기도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힘써 돌보았다. 베가르드(Beghards)는 베긴회와 같은 성질의 남자 단체로서 방적업자를 비롯한 평신도들이 많이 속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견실한 생활과 자선사업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이들은 나중에 과도하고 과격한 성향을 띠게 되어 기성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했다. 그들이 정죄된 것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됨으로써 영적인 완성 상태를 누릴 수 있다는 것, 둘째, 이 거룩하고 온전케 된 사람은 성례적 은혜와 선행을 포함하여 종교의 모든 형식들을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셋째, 그런 사람은 더 이상 교회법이나 심지어는 하나님의 도덕법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자가신론(autotheism;영혼과 하나님이 하나됨), 반율법주의, 급진적 영성주의(신앙 생활에서 모든 외적 도움을 제거함)를 주장한 것으로 정죄된 것이다. 성령의 인도에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이러한 주관적 신앙 태도는 결국 기성 교회와 교권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성직제도를 반대했으며 예배와 예식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마거리트 포레테라는 한 베긴회원 여성은 1310[순박한 영혼의 거울]이라는 책에서 위와 같은 이단적 생각을 개진했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해졌다. 특히 자유신령파라고 불린 극단적 성향의 신비주의파들은 그 경향이 매우 급진적이어서 일반 신비주의자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자가신론(自家神論)을 주장하였고 종종 해방된 영혼은 전통적인 구원 방식이 필요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인들과는 달리 완전에 이르는 길에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철저한 자기 부인이 필요하며, 완전케 된 사람들이 무절제한 생활을 하는 경우는 없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친구들]이라는 단체는 공동 생활을 하는 단체는 아니었다. 서로 인맥을 통하여 경건한 생활과 봉사를 위해 서로 돕고 장려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1348년 흑사병이 유럽을 돌 때 이들은 병자를 돌보고 위급과 혼란의 상태를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중세 말에 가장 널리 퍼지고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운동은 네델란드 동부에서 로이스부르크의 제자 헤라르트 흐로테(Geert Groote Gerhard, 1340-1384))와 흐로테의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데빈스(Florentius Radewijns, 1350-1400)에 의해 시작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곧 현대신심(現代信心, Devotio moderna)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1370년대와 1380년대에 흐로테와 라데빈스의 사역으로 설립된 세 공동체들 곧 데벤터에 설립된 [공동생활 자매회][공동생활 형제회](Bretheren of the Common Life), 빈데샤임에 설립된 [어거스틴 참사회(社會) 공동체]을 통해 펼쳐졌다.

 

 

데벤터 출신의 흐로테는 파리대학교에서 법학, 의학, 신학을 공부하였고 그 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그는 성직자가 아니면서도 많은 성직록을 보유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다가 1370년 회개를 체험하고 모니쿠이첸 수도원으로 들어가 생활하는 중에 라인란트의 신비주의자들 특히 로이스부르크의 저서들을 공부하였고 그 제자가 되었다. 그는 본격적인 수도 생활과 신비주의자 생활을 다 원치 않았기 때문에 부제로 임명받은 위트레흐트 교구에서 선교사와 설교자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당대의 부패, 특히 성직자들과 수도원들의 부도덕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1383년 설교 자격을 박탈당했다.

 

 

흐로테가 원래 지녔던 이상은 세속 사회를 떠나지 않은 채 신앙을 실천하는 공동 생활이었다. 이 이상에 가장 가까이 남은 사람들이 바로 라데빈스가 데벤터에 있는 자신의 총사제관에서 조직한 평신도 [공동생활 형제단]이었다. 이들은 주로 필사본을 베끼는 가난한 학자들로 구성되었다. 공동생활 형제단의 주요 활동은 네델란드와 독일의 도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신앙적으로 돌보는 일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그들은 특히 수도 생활 또는 성직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일부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고 형제단원들이 그들에게 신앙 교육을 할 수 있는 숙소들을 건립하였다. 형제단원들 자신들은 거의 대학 교육이나 신학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학교를 설립하거나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필사를 통해 유익한 서적을 보급함으로써 청년들의 신앙 교육에 힘썼다.

 

 

이 단체의 대표적 인물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와 요한 벳셀(Johann Wessel, 1420-1489)이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켐펜에서 태어났는데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12세부터 교육을 받고 1399년 형이 원장으로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 1413년 신부가 되어 이후 70년간 아그네스 산에 있는 빈데샤임파 수도원에서 수도하며 전도와 저술, 사본 정서(淨書), 수도사 지도에 힘썼다. 그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하였으나 사교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애를 거의 서재에서 혼자 조용히 책을 쓰며 보냈다. 그는 39권의 책을 썼으며 그 중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흔히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큰 영향을 미친 경건 서적으로 꼽힌다.

 

요한 벳셀은 흐로닝엔 출신으로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배웠다. 그는 토마스 아켐피스의 책을 읽고 또한 그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파리, 로마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그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교리를 이해하였으며 이를 가르치는데 명쾌하고 열심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데벤터에서, 루터는 마그데부르크에서 각각 공동생활 형제단원들이 교사로 있던 학교들에 다녔다. 그러나 형제단원들이 기독교 인문주의 또는 종교개혁의 직접적 선구자라고 볼 수는 없다. 공동생활 형제회와 자매회, 그리고 빈데샤임 수도회원들이 실천한 '새로운 경건'은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 관계에 대한 각성에 그 기초를 두었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을 강조하였으며,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의식들로부터 자양을 얻었다. '데오티보 모데르나'(현대신심) 운동가들은 비록 진보적이기는 했지만 반()성례적이거나 반제도적(反制度的)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경건을 가르침으로써 신앙의 형식주의와 교회의 부패를 극복하는 데에만 목표를 두었다. 더욱이 이러한 경건은 신부주의가 아닌 묵상을 그 성격으로 삼았다. 데오티보 모데르나 운동가들은 본격적인 신비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라인란트와 플랑드르 지방의 신비주의자들이 쓴 책들을 대체로 무시하였다. 이 보수주의적 경건이 남긴 가장 큰 열매는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고 할 수 있다.

 

 

C.프랑스의 신비주의 운동

 

 

12세기에 신비주의 신앙을 고취시키고 신비주의를 발전시킨 사람 중 대표자는 씨토(Citeaux) 수도원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이다. 프랑스 디종 근처의 퐁탱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22세에 그는 30명의 동지들을 데리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엄격하다는 씨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행한 3년간의 극도의 고행으로 그는 평생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로 지냈다. 그는 111512명의 수도사를 데리고 클레르보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워 원장이 되었고 거기서 평생을 지냈다. 그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비적 명상이 최고의 영적 기쁨이라고 생각하고 오직 극단적 금욕 생활을 근간으로 하는 경건 생활에 힘썼다. 그는 수도원에서 평생 지냈지만 대중 설교가로 나섰고 전도 여행을 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생활과 신앙의 영향력은 교황을 능가하기도 했고 1130년 추기경들은 그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분열된 교황청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제2차 십자군을 일으키는 제창자가 되기도 했다.

 

 

신학에 있어서 베르나르는 전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아벨라르의 자유사상과 싸웠다. 그의 사상은 신비적이었지만 단지 무한자(無限者)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그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사모하여 그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는 신앙적 신비였다. 그의 신학의 근본적 윤리적 원리는 겸손과 사랑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먼저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사랑하고 다음에는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일이 거듭되면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마침내 하나님을 위하여 만민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베르나르의 이 신비적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명상함으로써 영혼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고 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고 갈보리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명상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비적 사랑을 일으키고자 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고난은 베르나르의 철학과 신학의 총체이며 정수였다.

 

 

이러한 베르나르의 정신을 계승한 씨토(일명 Cistercian) 교단은 놀라운 확장력을 가지고 뻗어나가 13세가 중엽에는 1800개의 수도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가르침이나 목회 사역에는 비교적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금욕적인 경건의 모범을 끼친 것을 제외하면 그들이 사회에 끼친 주된 공헌은 광대한 황무지를 열성적으로 개간하여 농업에 종사한 것이었다. 그들의 수도원은 의도적으로 거친 벽지나 기독교 세계가 팽창하는 변경에 세워졌다. 그들은 농노 고용을 거부하였고 주로 평신도 형제들(conversi)을 이용하여 토지를 경작하였다. 그들은 또한 이교도 전도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그들의 금욕적인 성실함은 자연히 물질적인 번영을 가져왔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이 그들의 정신적 쇠퇴를 가져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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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운동

 

A.십자군 운동이 일어나게 된 근본 동기

 

중세 기독교의 십자군 운동은 매우 특이한 사건으로서 신앙적 정치적 경제적 원인이 복합되어 일어난 것이다.

우선 신앙적 원인을 살펴보면, 이전부터 기독교 신자들은 신앙적 돌파구를 찾고자 할 때 그 한 수단으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등의 성지를 순례하였는데 638년 예루살렘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점령된 후로는 그 순례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1071년 터키군이 소아시아의 대부분과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부터는 아예 성지 순례가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불만이 고조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정치적 원인을 살펴보면, 이전에 동방에서 이슬람교도에게 패했던 기독교인들은 그 무렵 이슬람교도들과 싸워서 이기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1060-1090년 간에 남부 이탈리아이 노르만족은 시실리아를 빼앗았고 페르디난드 1세는 이슬람교도들에게서 스페인을 되찾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서유럽 국가들의 국민들 간에는 이슬람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으며 그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험심과 약탈 욕망, 영토 확장욕 등의 세속적 충동과 합쳐져서 십자군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경제적 원인을 살펴보면, 11세기 유럽의 곤고한 상황을 주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970-1040년 간의 48년이 흉년이었고 1085-1095년 간에는 사정이 더 악화되어 사회적으로 불안과 참상이 널리 퍼졌다. 이런 상태를 벗어나 보려는 욕망이 민중들 가운데서 팽창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러한 경제적 곤란은 종교적 열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수도 생활과 금욕 생활을 추구하였고 현세보다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간절히 가지게 되었으며 그 종교적 열정으로 교황청을 개혁하고 성직 매매와 성직자의 결혼 등과 같은 타락을 제거하고 교회와 국가 간의 권력 싸움에는 교회 쪽에 힘을 불어넣는 작용을 하였으며 더 나아가 십자군 운동과 같은 명분 있는 신앙적 투쟁에 기꺼이 몸을 바칠 수 있도록 만들었다.

 

 

B.십자군 운동의 직접적 발생 동기

 

 

동로마 황제 미카엘 7(1067-1078)는 셀주크 투르크족의 소아시아 점령을 두려워하여 로마의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당시 로마 교황권 확장에 열중이었던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이 동방교회(헬라 정교회)가 서방교회(카톨릭)와 연합하려는 시도인 줄 알고 1074년에 하인리히 4세에게 파병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서로의 임직식 관계로 좌절되었고 나중에 교황 우르반 2세가 시행했다. 그는 동방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터키 군대의 위협을 감당할 능력이 없음을 자인하고 원조를 요청했을 때 원조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10953월 북부 이탈리아의 피아쎈짜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그해 11월에 클레르몽에서 다시 회의를 열어 십자군 원정을 호소했다. 이에 신자들은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참여키로 했고 교황은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자의 모든 죄를 사면해 준다고 선언했다.

 

  

C.십자군 운동의 진행

 

 

1차 원정 때는 어느 나라도 왕은 직접 가지 않았다. 은둔자 베드로가 인솔한 오합지졸이 먼저 출발하고 브와롱의 고드프리, 뚤루즈의 레이몽 백작, 노르만디의 로베르, 벨망드와의 위고 같은 지도자들이 30만의 십자군을 이끌고 큰스탄티노플을 거쳐서 10976월에 니케아를 함락시켰고 에뎃사와 안디옥을 점령했다. 그리고 10996월에는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격전 끝에 715일 드디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812일에는 이집트의 이슬람교 원정군을 격퇴시키고 성지 회복에 성공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장기적 방어를 위해 일종의 신정 국가 형태의 예루살렘 왕국을 수립하고 보와롱의 고드프리(Godefroy of Bouilon)를 성묘보호자(聖廟保護者;Protector of the Holy Sepulachre)라는 이름의 왕좌에 앉혔다. 고드프리는 11007월에 죽고 그의 동생 볼드윈이 예루살렘 라틴 왕국의 공식적 첫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1146년 에뎃사가 이슬람군에 의해 함락되었으므로 예루살렘 왕국은 매우 위험하게 되었다.

 

 

2차 십자군은 당시 명성 높던 베르나드(St. Bernard)가 모집하고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드 3세의 협조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1147년 원정을 떠났으나 전과 같은 열정이 없는 대부분의 군인들은 소아시아에서 죽고 소수의 남은 십자군은 1148년 다메섹을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이 참패가 동로마제국의 제후들 탓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동방에 대한 서방의 감정만 악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왕국은 약 40년간 명맥만이라도 유지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슬람교도들 간의 내분 때문이었다. 그러나 1171년 아시아 남서부의 쿠르드 출신 이슬람 장군인 살라딘이 일어나서 1174년 다메섹을 점령하고 1183년에는 그의 영토가 예루살렘 라틴 왕국의 동쪽과 북쪽, 남쪽을 두르게 되었다. 그리고는 11877월 드디어 하틴에서 라틴 군대를 격파하고 예루살렘과 성지 대부분을 점령하고 말았다. 이 재난의 흉보를 들은 유럽인들은 민심이 크게 흥분되어 제3차 십자군을 일으키게 되었다.

 

 

3차 십자군은 1189년에 조성되었다. 3차 십자군은 이전의 어느 십자군보다 많은 준비를 하였다. 당시 용맹한 군인 출신의 독일 황제 프레드리히 1(1152-1190 재위)와 프랑스 왕 필립(1179-1223), 그리고 영국 왕 리차드(1189-1199)가 대군을 거느리고 성지를 향해 떠났는데 독일 황제는 소아시아까지 가서 이코니엄 강에서 목욕을 하다가 익사를 하고 말았다. 가장 용맹한 지휘관을 잃은 군대는 사기가 떨어졌고 기타의 문제들로 인해 군대는 예루살렘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프랑스와 영국 왕은 서로 점령지에 대한 분쟁 문제로 싸웠고 그러던 중 프랑스 왕은 본국에서 자기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도중에 돌아가 버렸다. 그런 가운데서 영국 왕은 살라딘과 싸우다가 3년간 휴전 협정을 맺었고 살라딘으로부터 성지 순례자는 괴롭히지 않는다는 약조를 받아내고는 전쟁을 끝내고 말았다.

 

 

4차 십자군은 1202년에 있었는데 그 병력의 숫자는 보잘것없었지만 그 정치적 종교적 결과는 중요하였다. 이 십자군은 인노센트 3세가 주장하여 프랑스 북부 샴페인, 블로와, 프랑드르 지방에서 모집되었는데 그들은 예루살렘 점령의 첩경은 이집트 정복이라고 확신하고 베니스 상인들과 그곳으로의 군대 수송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운임을 조달할 길이 없어서 교활한 베니스 상인들의 제안대로 도중에서 헝가리로부터 짜라라는 도시를 빼앗아 베니스인들에게 주게 되었다. 그 후에도 십자군은 동방 제국의 왕위 찬탈에 개입하여 알렉시우스 3세를 폐위시키는 등 성지 회복이라는 본연의 목적과 거리가 먼 정치적 술책에 휘말리게 되었다.

 

 

4차 십자군은 엉뚱하게도 동방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교회의 보물을 탈취하여 서방으로 가져왔으며 거기에 라틴제국을 세워 볼드윈을 왕으로 삼았고 큰스탄티노플 대주교를 로마 교회 계통으로 세워서 로마 교회에 예속시켰다. 이로 인해 동서방제국과 교회간에는 증오감만 쌓이게 되었다.

 

 

5차 십자군 운동은 소위 [소년 십자군]으로서 매우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목동 스테반과 독일 소년 니콜라스가 수만명의 소년들을 모아 출전했으나 이슬람군대에 의해 크게 참패하고 이탈리아로 흩어졌으며 많은 숫자가 기아로 죽거나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다.

 

 

6차 십자군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 때 독일 황제 프레드리히 2세가 인솔하여 원정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원정을 계속 미루다가 마지못해 잠시 떠났다가 금방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이에 교황은 황제를 파문했으나 그는 1228년 다시 출전하였고 이슬람군대와는 싸우지 않고 이집트의 술탄과의 협상을 통해 향후 10년간 휴전한다는 약속을 받았고 예루살렘과 나사렛, 베들레헴을 얻고 1229년 귀환했다.

 

 

그러나 잠시 기독교도 손에 들어왔던 예루살렘은 1244년 다시 이슬람교도 손으로 돌아갔고 이 때문에 프랑스왕 루이 9세는 제7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군사들 대부분은 살해되고 루이 자신은 많은 속전을 내고 살아 돌아오는 신세가 되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온 루이는 1270년 다시 군대를 이끌고 튜니스로 향했으나 그곳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와 동시에 영국의 에드워드 1(1272-1307년 재위)가 아직 황태자 시절인 1271-1272년 사이에 원정을 하여 아크레(Acre)로 진군하고 나사렛을 점령하였다. 그는 협상으로 약 10년간의 휴전을 얻어내고 돌아왔다. 그후 십자군 운동은 없어지고 결국 기독교는 성지를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1291년 예루살렘은 완전히 이슬람교도들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그후에도 십자군 운동에 대한 약간의 거론이 있었으나 십자군 운동은 완전히 포기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교황을 제외한) 모든 유럽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수한 열정으로 이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불순하고 복합적인 이유로 이 운동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이 운동은 그럴듯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갖은 부도덕과 약탈과 살육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운동은 분명한 성령의 인도를 따른 것이 아닌 것으로 증명되고 말았다. 이 일은 영적 일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일이었으며 종교적 일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D.십자군 운동이 실패한 원인들

 

 

첫째,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일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일어난 순리적이고 영적인 일이 아니라 당시 유럽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세속적 요인들로 말미암아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운동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실패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교황에서 군사통솔권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일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주도한 일이었는데 그 책임자인 교황에게 군대와 군사권과 지략과 같은 전쟁 수행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병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도 없었고 이해가 상반된 각 나라의 군대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할 수도 없었다.

 

 

셋째, 출전한 귀족들과 기사들 간에 전쟁 참여 목적이 다르고 이해 관계가 상반되었기 때문에 온전한 원정이 될 수 없었다.

 

 

넷째, 복음을 위한 헌신적 정신으로 성지 회복을 주장했던 초기의 종교적 열정은 곧 식어버리고 계속적인 내분과 재물을 약탈하고자 하는 불순한 동기, 거칠고 저속한 군대의 행동들로 인해 군대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다섯째, 소년들로 구성된 5차 십자군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십자군 병력이 마음만 있을 뿐 훈련은 거의 되지 않은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잘 훈련된 기병과 지리에 익숙한 원주민들로 구성된 이슬람 군대를 근본적으로 상대할 수 없었다.

 

 

 

E.십자군 운동이 남긴 것

 

 

십자군 운동은 처음 목표와 관련하여서는 실패한 운동에 지나지 않았으나 중세 유럽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첫째, 이 운동은 유럽 각 국민의 단결을 촉진시켰고 기독교회가 하나의 목적 아래 단합과 통일이 되는 기회를 가지게 만들었다.

 

 

둘째, 십자군 운동은 적어도 이슬람교가 더 이상 서방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셋째, 이 전쟁으로 인해 많은 귀족들이 죽거나 재산을 잃음으로써 봉건제도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대신 중산 사회가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재정적 정신적 인적 손실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었다.

 

 

넷째, 대규모의 군대와 물자를 장기간에 걸쳐 수송하는 가운데서 해운의 발달이 촉진되고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지중해 연안 도시가 번영하게 되었다.

 

 

다섯째, 서방 출신 십자군이 동방으로 왕래하는 가운데서 유럽 사회가 동방 문화에 깊이 접촉하게 되었고 서방 세계의 정신적 지적 시야가 크게 넓어지게 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야만인들이 동방의 고대 문화와 훌륭한 도시들을 보고 크게 각성함으로써 서구의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의 발전 계기가 마련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전후하여 중세기 신학의 최고봉인 스콜라신학이 나오게 되었다.

 

 

여섯째, 십자군 운동의 결과 로마 교회의 수입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것은 상공업이 발달하게 됨으로써 도시 상인 계급들이 점점 부유하게 되어 교회를 위해 많은 헌금과 그릇, , 비단, 금은을 기증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십자군 원정 때 교회가 면죄부를 많이 팔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교회는 부해졌고 교황권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세속권을 많이 흡수하여 이전보다 많이 강화되었다.

 

 

일곱째, 십자군운동은 후대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에 의하지 않고 인간의 정치적 세속적 필요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한 종교적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고 부수적 유익을 준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가져오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십자군 운동은 이교도로부터 하나님의 세계를 지켜 보호하자는 기치 아래 일어났으나 실제로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유지나 확장에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신자들의 영적 각성과 진보에도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사탄이 요소 요소에 개입하여 살육과 협잡과 혼란을 일으키도록 만든 점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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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기

 

2세기의 초반 70년은 교회 역사상 가장 모호한 시대이다. 주후96년 도미티안 황제가 죽음으로 박해는 점차 줄어들었다. 도미티안은 말년에 의심이 많아지고 포악해 져서 그를 가리켜 제 2의 네로라고 하였다.

 

♡♡ 초대교회의 문서들 ♡♡

 

* 로마의 클레멘트 서신.. 이레니우스의 글에 의하면 클레멘트는 로마의 제 2대 감독이었다고 한다. 그의 편지 내용에는 자신의 교회 이외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가톨릭에서 말하는 것 같이 전 세계의 교회를 관할하는 권위를 내세우고 있지 않다는 점이 특이하다.

 

열두 사도의 교훈집=디다케.. 유대적 관점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비영적이며 육체적인 욕망을 억제하는 금욕적 관습과 금식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 시대부터는 선지자들이 점차로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선지자를 사칭하는 사기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 그가 보낸 7교회의 편지에는 가현설이라고 불리우는 초대교회의 이단과 관련하여 반박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현설에 의하면 세상에 사실 때의 그리스도는 참 육신이 아니라 환상적인 육신을 가졌으며 그러므로 그의 고난도 환각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그나티우스는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감독의 권위에 순종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그나티우스는 여러 감독들의 대표격인 장로를 감독(bishop)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감독은 한 사람의 장로이지만 영구적인 목회자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 서머나의 폴리갑.. 2세기에 알려진 최고 성자요 순교자이다. 그는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었으며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 때에 서머나에서 화형을 당하였는데 그의 인내와 유명한 말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한 지방총독에게 한 그의 답변이다. "86년 동안 나는 그 분을 섬겨왔으나 그 분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없으시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한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는가?"

 

* 져스틴 마터.. 그는 초기 변증가라고 한다. 그의 변증서에는 철학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의 사상체계는 아주 독특하였다. 그의 글을 통한 예배의 형식을 보면 아주 간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경낭독,사회자의 강론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의한" 즉석기도로 이루어져 있다.

지방장관 쥬니우스 루스티쿠스에 의하여 사형성고를 받았는데 "너희들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살 줄로 상상하느냐?"라는 질문에 져스틴은 "나는 그것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다."고 답변하였다.

 

♡♡ 초기 이단들 ♡♡

 

2세기에는 여러 이단들이 일어났다.

 

* 나사렛파.. 이들은 바울을 몹시도 괴롭히던 초기 유대주의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예루살렘 멸망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관습을 버린 후에도 끝까지 집착하던 자들이다. 4세가경 까지 존재하였다.

 

* 에비온파.. 나사렛파와 유사하나 훨씬 더 급진적인 사람들이다. 유대의 율법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는 단지 세례시에만 성령이 함께하였으며 십자가상에서는 성령이 떠났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으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 영지주의.. 이들의 영향력은 광범위하여서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많이 퍼졌다. "영지"라는 말은 지식을 뜻하는 헤라어 그노시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비의적이고 신비한 영적인 사람들만이 이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물질을 악으로 여겼다. 이들의 도덕적인 생활은 처음에는 엄격하였으나 종종 방종과 방탕으로 빠져들곤 하였다. 이들중에 유명한 이들로는 발렌티누스와 바실리데스가 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는 시노페의 말시온이다. 그는 열심있는 사람이었으며 어떤 면에서는 정통 기독교의 입장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구약성경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그는 구약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였다. 구약의 신은 비토스라고 하는 말로 다 할수 없는 거룩한 존재로 부터 유출되어지는 30개의 유출물이 있는데 그중에 제일 마지막에 해당되는 물질의 창조의 신 데미우르지라고 한다.

 

* 몬타누스 주의.. 몬타누스 주의가 나타날 때의 교회적 상황은 최악이었다. 사도와 선지자들이 없었고 교회는 안이한 형식주의에 빠져들고 있을 때였다. 몬타누스는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열광적인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천년왕국시대는 감각적인 쾌락이라고 말하여 교회의 재림교리를 부인하게 되었다. 점차로 감정주의로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의 사색과 감정에 치우치게 되었다.

 

3. 초기 교부들

 

2세기의 교회는 영지주의에 의한 환상적인 사변과 다른 편으로는 반지성적인 환상적 극단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 시기를 이끌고 나간 여러 교부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에게는 세 가지의 과제가 부과되어 있었다.

1) 신약의 정경..당시까지는 신약의 목록이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서신들도 정경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많은 편지들이 사도가 썼는지 아니면 사도와 적어도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이 썼는지를 알아 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레니우스는 이러한 글들을 가리켜 "성경"이라고 불렀으며 터툴리안은 구약의 위치에 신약을 올려놓았다.

2) 신앙의 규범.. 영지주의자들이 가짜 복음서와 가짜 서신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이런 것들로부터 보호하여야만 했다. 이렇게해서 간략한 신조 혹은 신앙의 규범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사도신경이다. 이레니우스는 참된 교리의 발견을 위해 사도시대에 있었던 교회들의 신앙에 의존하였다. 이 것이 교회들의 "전통"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가자 이 전통은 모호한 것이 되었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3) 사도권 계승..이레니우스는 전통의 거룩한 수탁자로서 사도직 계승 사상을 강조하였다. 이 식부터 점차로 장로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감독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3세기에 이르러 터툴리안과 클레멘트에 이르면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교회가 감독직 아래서 그 통일성을 발견하게 되고 전해내려오는 전통에 비중을 두게된다. 그 결과로 전통이 성경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 골의 이레니우스 ♡♡

 

180-250 년경의 위대한 교부들 중에 첫째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의 제자이다. 그는 영지주의자와의 논쟁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것은 그가 전통에 호소할 수 있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로는 가장 유명한 이단논박이라는 책을 남기고 있다.

 

♡♡ 카르타고의 터툴리안 ♡♡

 

복음이 북아프리카에 전해진 이후 유명한 이들로는 바로 터툴리안과 키프리안 그리고 어거스틴을 들 수 있다. 여기서 기독교 라틴 문학이 발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크고 아름다운 도시 카르타고가 라틴 문화의 뛰어나나 중심지 였기 때문이다.

그는 법률가로서 훈련을 받았다. 그후 그의 신학세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신격을 나타내는데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있다. 그의 변증서는 그야말로 걸작이다. 그는 이단을 물리침에 있어서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닥호 주장하였다. 이 이론은 더 나아가 사도권의 계승과 전통의 강조와 접목되어져 로마 가톨릭의 권위와 전통을 주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사상에는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 카르타고의 키프리안 ♡♡

 

그는 감독직에 대한 폭넓은 주장때문에 그리고 성직자 개념을 도입함으로서 교회의 예배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이유로 유명해 졌다.

1) 감독의 위치를 높이려는 그의 줄기찬 주장.. 박해때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자를 어떤 회개의 증거없이도 다시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문제로 크게 두 파벌이 나뉘어졌는데 키프리안 모두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감독의 위치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에 대한 굉장한 주장을 하였따. 그후 그의 이 주장은 받아들여져서 거의 완전한 독재적인 교회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2)제사를 드리는 사제로서의 성직자 개념.. 그는 주의 만찬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제단에 바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 변화는 중대한 것으로 후에 화체설과 미사희생을 남용을 초래한다. 당시까지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제단이나 제물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랑이었으나 이후로는 그렇지 않게 되었다.

 

3) 감독 각자의 자치권에 대한 그의 신념.. 로마의 감독이 자신의 의견에 자신의 반대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복종을 요구하는 교령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키프리안은 전에 폴리갑과 이레니우스의 경우처럼 로마의 권리침해에 대하여 싸우게 된다.

 

여기서 아프리카의 다른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로 우리의 관심을 옮겨보자!알렉산더에 의해 세워진 도시로 인구 250만에 달하는 세계 최고의 도시였다. 헬라문화가 아테네 다음으로 꽃피운 도시이다. 여기서 구약성경이 번역되었으며 이곳의 교회에서 배출한 지도자로는 판타이누스,클레멘트 그리고 오리겐을 들 수 있다. 이 곳에서는 교리문답학교가 있어 신학뿐 아니라 과학과 철학의 교육도 이루어졌다.

 

♡♡ 클레멘트 ♡♡

 

클레멘트는 문답학교의 교장이었다. 그는 철학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그는 모든 참된 지식은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인 성경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오리겐 ♡♡

 

당시까지 교회가 알고 있던 가장 위대한 인물은 오리겐이다. 그는 18살에 교장이 되엇다. 또한 학교의 이름을 최고로 높여놓은 것도 그였다. 그는 성경의 신적인 영감을 강하게 믿으면서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전형적인 풍유적 해석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단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의 교리를 강조하였다.

2세기말에 나타난 단일신론(Moanrchianism)이 있다. 이 말은 헤라 신학자에게는 하나님의 신성에는 하나의 위격만이 있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1)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 예수에게 임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역동적 단일신론이라고 한다.

2) 하나님의 충만함이 그리스도안에 거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양태의 표현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 주장을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고 한다. 즉 어떤 때는 성부로 성자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항상 같은 위격이라는 것이다.

이들 이론에 의하면 성부계서 십자가에서 수난당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들을 성부수난설자라고 한다.

 

이 상들에 대한 오리겐의 역할은 중요하였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그는 성부와 성령과 구별되는 인격을 가졌으나 그들과 하나라는 것이다. 오리겐의 성자의 영원출생에 대한 해설은 325년의 니케아 회의의 결정과 4세기의 교회 공의회의 선언에 기초가 되었다.

 

4. 시련과 승리

 

교회에 대한 박해가 250-260 정도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데키우스(249-251)와 발렌시안(254-260)의 통치기간에는 가혹한 박해가 있었다. 이 시기는 로마에 있어 큰 재난의 시기이다. 사방에서 침입해 오는 야만족들의 침입이 심각했는데 그중 고트족의 침입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박해의 대표적인 희생자는 키프리안을 들 수 있다. 3세기로 접어들기까지 교회는 삶의 모든 영역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 디오클레티안때에 기독교의 예배장소와 모든 종교서적을 파괴하는 칙령을 내리게 된다. 이들이 아름다운 교회당에 들어갔을 때 아무런 신상이 없다는 것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서방황제 막시미안도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이 칙령을 준수하였는데 그의 부제로 골과 브리테인 그리고 스페인을 다스리던 콘스탄티우스는 하나님의 성전인 육체가 그렇게 가혹하게 학대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종교박해로 인헤 사람을 죽이는 일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그의 아들 콘스탄틴이 여러 경쟁자를 물리치고 황제가 되었다. 그는 밀비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기전에 특이한 영적체험을 하게 된다. 헬라어 문장이 새겨져 있는 불타는 듯한 십자가를 본 것이다. 그는 공동황제였던 리시니우스를 물리치고 전 지역의 황제가 되었으며 3133월 밀라노에서 칙령을 발표하였다. 기독교에 몰수되었던 재산을 돌려주고 무조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그는 후에 매우 사치해져서 이교도의 예복중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감독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교회에서 예복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4세기말에 이르러 거의 모든 이교도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자체내에서도 미래에 대한 불길한 전조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성직자의 세속적인 야심과 성례가 사상 그리고 수도원 제도등이 자라나고 있었다.

 

5. 주요 회의들,주요 인물들,주요 사건들(325-500)

이 시기는 단적으로 격렬한 신학적 논쟁의 시기다.

 

아리우스 논쟁 ♣ ♣

 

아리우스의 견해에 의하면 아들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앞서고 고귀하기는 하지만 본성과 위엄에 있어서 아버지보다 열등하다는 것이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던 알렉산더는 동일본질임을 주장하였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더와 싸우게 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틴 황제의 노력이 실패하자 324년 니케아에서 회의를 소집한다.

토론의 내용은 그리스도가 동일본질(Homousius)인가 유사본질(Homoiousius)인가였다. 결국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 의해 그리스도는 동일본질임이 주장되었고 아리우스는 파문당하였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사벧리우스 주의에 반대하여 성령의 신성을 특별히 주장한 회의였다.

431년 에베소 회의는 콘스탄티노플의 웅변가적인 감독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여 내쫓았다. 그가 단성론자들에 반대하여 지나치고 양성론을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 인격이 아니라 두 인격을 가진다고 본 것이다. 당시 마리아에게 데오토코스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이 뜻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이다. 여기에도 반대하여 그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지 그의 신성의 어머니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회의는 불공종했으며 그는 유배되었다. 그후 네스토리안 교회는 페르시아와 아르메

니아에서 확장됴으며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에베소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하던 유티케스가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의 본성 신성만을 가르친다고해서 정죄당하였다.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으며 449년 에베소회의에서 그를 인정하였으나 이 회의는 난장판이었으며 일명 강도회의라고 부른다. 그후 칼케돈회의에서 다시 정죄당하였다.

그리하여 최종적인 결론은 이렇게 났다. "그리스도가 변화나 혼합됨없이 두 본성을 지니고 있으나 한 위격속에 연합되있다고"고 확인되었다.

 

탁월한 인물들 ♣ ♣

 

1) 포이티어스의 힐라리.. 아리우스에 대항한 서방의 위대한 투사

2) 밀라노의 암브로스.. 황제 발렌티니안2세의 어머니가 아리우스파를 위하여 예배처를 요청했을 때 거절한 사람이며 서방제국의 왕좌를 탈취한 막시무스에게 성찬정지시켰고, 데살로니가의 반란군에게 학살을 명한 데오도시우스대제에게 8개월간의 교회출입을 금지시킨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감독이었다.

3)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 그의 신학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며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다.

4) 세 사람의 카파도기아인.. 가이사랴 감독 대 바실, 그의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 그들의 친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를 들 수 있다. 동방교회의 위대한 인물들이다.

5) 존 크리소스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가로 이름나 있으며 "황금 입의 존"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6) 제롬..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역을 내 놓은 사람이다. 그는 은둔생활을 하며 수도원주의와 독신주의자이다.

7) 레오대제..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그와 로마의 그의 계승자에게만 "교황"이라는 명칭을 쓰기로 합의했다. 그후 그는 로마의 감독이 세계의 감독권을 갖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칼케톤회의에서 그의 주장은 거부당했다. 그러나 교황 지상권에 대한 주장은 후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격변하는 세계(400-500) ♣ ♣

 

이 시기에 야만족들의 침입이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서고트족의 알라릭은 410년 로마를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다행인 것은 이 야만족들이 아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이란 점이다. 그래서 다행히 기독교의 피해가 적었다고 할 수 있다. 410년 로마의 마지막 군단은 골과 이탈리아를 방어하기 위해 영국을 떠났다. 그러나 쥬트족,앵글족,색슨족등이 북부독일로부터 건너와 동부 잉글랜드와 남부 스콜틀랜드의 교회를 파괴하였다. 서부의 켈트 교회만이 살아 남았다. 이로서 로마 문화는 크게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꿋꿋한 튜튼족은 무력한 문명을 대체하기 위하여 새로운 힘과 활력을 심었다. 이 시기가 기독교에 있어서는 어려운 시기였다. 비록 이교도들이 개종을 하기는 했지만 각종 미신과 오류가 유입된 시기였다.

그럼에도 로마의 감독들에게는 개인적인 위치를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교도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귀족들은 도망갔으며 감독의 도덕적인 권위가 크게 증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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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의 기독교

 I. 3 세기의 박해

II. 3 세기 - 변화

1 세기가 "시작"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면, 2 세기는 "박해"로, 3 세기는 "변화"의 세기로 명명될 수 있다.
기독교가 고통을 당하는 기간동안 태도와 교리에서 변화가 생겼다. 변화가 있었던 몇 가지 주요한 영역은 다음과 같다.

A. 교회 직분(Offices)의 변화
2 세기에 목양자와 집사의 성경적 직무에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목양자의 권능과 특성이 커갔다. 그리고 성직자 계급제도를 높이는데 영향을 끼친 성직자직분의 특성이 뒤따랐다.

3 세기 중반에, 성직자 계급이 나뉘기 시작했다. 감독과 장로 사이에 차별이 확립되었다.이후에, 많은 직분(office)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부집사, 성구 낭독자, 또는 성가대, 문지기, 시종직(acolytes)(감독 수종자), 무당(exorcists) 등이다.
오직 감독만이 임명하는 권리를 가졌다. 서방에서는 견진 성사(confirmation)의 개념이
생겼다. 견진례를 베푸는 권리는 오직 감독에게만 주어졌다.

성직을 계승하는 개념이 생겨났다.
요약하면 : 1 세기 - 성직자 없음 : 장로(감독) & 집사
           2 세기 - 평신도 위에 성직자가 등용
           3 세기 - 성직자가 여러 등급으로 나뉨

1. 이레니우스 (115-200 A.D.)
그는 사도직을 존속시키고 캐톨릭 전통을 전하려는 매체로서 감독제도 개념을 감독관구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이단에 대적하여 신앙의 보존자요 보호자로 "사도적 계승(apostolic succession)"을 강조했다.   

2. 키프리안(Cyprian)(200-256 A.D.)
그는 희생 사역의 성직자직분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회"의 교리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는 "감독은 교회 안에 있고 교회는 감독 안에 있다. 누구든지 감독과 같이 하지 않으면 그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B. 교회 행정의 변화
초기부터 성직계급제도의 경향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씨는 1 세기에 뿌려진 것이다. 

1. 교회 성직 계급제도의 출현에 영향을 끼친 요인
다음과 같은 요인의 영향으로 캐톨릭 성직계급제도가 서서히 발전되었다.

a.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모델들
기독교는 로마에 의해 지배받는 세상 안으로 태어났다. 로마는 종교적 의식(sacralist) 사회였다. - 로마의 행정과 종교는 분리할 수 없는 얽혀진 형태였다.
양자가 별개로 나뉘어서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제국의 영토 안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로마 행정의 지배를 받았고 당연히 로마의 다신교를 신봉해야 했다.
 

이 혼합 사회는 결국 로마와 참 기독교 사이에 충돌을 낳았고, 또한 기독교 안에 종교적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b. 유대 (구약) 체계
부분적으로는 초기의 유대교적 경향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는 교회 형태의 성직자 직분 개념에 대한 성경적 지지를 얻으려는 방법으로, 신약교회 체제(order)의 모형을 구약의 레위 성직자 직분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원래 종교적 의식 사회였다. 이스라엘 국가에 속한 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주어진 종교를 가져야 했다. 
 

구약 체제를 신약 교회의 실행에 적용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구약 성직자직분    →    신약 사제제도
구약 국가              →    신약 카톨릭주의
구약 할례              →    신약 유아세례
구약 유월절           →    신약 만찬
구약 종교적 의식   →    신약의 전례(예배식)


c. "모교회(Mother Churches)"의 승인
사도적 기원을 가진 교회들은 순수한 사도적 전통의 주(主) 매체(媒體)로 존중되었고, 자연히 이들 교회의 감독들은 큰 존경을 받았다.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감독관구로 나뉘어졌고, 각 감독관구는 여러 지방으로 나뉘어졌다. 각 지방에는 수도가 있었다. 수도에 위치한 교회의 감독들은 수도대감독(Metropolitan Bishop)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다른 지방 분구(分區) 주교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졌다.
수도대감독들에게 대주교(Archbishop), 수도대주교(Primates), 총대주교(Patriarchs)의 명칭이 주어졌다. 이 당시 그리스도인에게 영향을 끼친 3 대 중심지는 로마,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였다. 이 도시들은 무역과 여행과 정치적 영향에서도 주요한 중심지였다. 

d. 이단의 출현
이단들의 등장으로 참된 그리스도 교회(Catholic church)는 자신들을 알릴 수 있는 외적 특성들을 나타내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2. "우주적인 교회(Universal Church)" 

보편적(우주적) 교회 개념은 이 시대의 시대적 발전의 필연적 결과였다.
이 우주적 교회 개념을 조장시킨 이는 "부패한 교회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안(200-258)이다.

신학적으로, 이같은 이상한 개념은 "교회(에클레시아)"와 "왕국(바실레이아)"을 동일시함으로써 정당화되었다. 이 엄청난 오류는 "거룩한 보편적 교회"를 제안한 자들의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믿는이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우주적인 실재(entity)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교회는 그 본성에 있어서 지역적이고 가시적인 것이다. 이 개념은 하나님의 왕국이 구원의 영역이기 때문에 "교회"도 구원의 영역이 된다는 논리적인 결과를 추가로 제안자들에게 제공했다. 키프리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250 A.D.)

키프리안의 많은 교리는 그와 노바티안파와의 충돌의 결과로 발전된 것이다. 그는"한 개의 참된 우주적 교회(ONE true universal church)"를 제안하여 계급 제도를 반대하는 자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하였다. 

Cunningham은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교회 안에 오류와 부패가 진보하게 된 것은 키프리안의 지대한 공헌 때문이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개념을 거부하고 신약 형태를 고집스럽게 고수하였다. 그 결과 제도권 교회들은 이들을 "교회 분리자(Schismatics)" 또는  "이단(heretics)"으로 불렀다.

 

3. 로마 교회
이 교회는 그 당시 큰 교회 중의 하나로서(롬 1:8), 다른 이들에 의해 큰 존경을 받았다.
a.로마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b.가장 큰 교회 중 하나였다.
c.많은 교회들을 세우는데 활동적이였다.
d.많은 지역을 도왔다. 이 교회는 그들이 베푼 사랑으로 존경을 받았다.
e.로마 제국에 의해 첫 번째로 박해를 받았다.
f.그들의 순교자 명부에는 많은 유명한 순교자가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순교는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g.논쟁이 있을 때에 권위를 가지고 말했다.
h.사도 시대에 세워진 오래된 교회였다.

모든 시선이 이 교회를 향했고, 곧 교회 권위의 가장 상좌(上座)로 여겨졌다.
로마의 감독 빅터는 교리적 문제로 소아시아 교회들을 파문했다.
키프리안은 베드로의 우월성을 가르쳤고, 로마교회 감독직은 사제의 유일성(unity)의 원천인  베드로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교황제도를 옹호하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3 세기에 로마 교회는 단지 교리의 해설자가 아닌 보호자로 여겨졌을 뿐이다. 로마 교회는 명령 또는 통제에 관한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무오하다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C. 교회 기율(紀律)의 변화.

성경은 때로는 교회 회원의 자격 박탈을 가르친다(마 18:17).
 

3 세기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회개자(Penitent)라는 부류가 생겨났다. 이 부류는 파문되었다가 회개 의사를 표시한 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도록 특별한 장소에 앉아야 했다. 성직자들이 그들에 대한 벌을 정하였다.
비록 이 당시에는 참된 내적 회개가 강조되었지만, 결국 이 기율은 "고해성사 (Penance)"의 교리로 발전되는 기원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죄 가운데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venial sins)와 용서받지 못하는 죄(mortal sins)가 구별되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후에 "밥티스마로 베푸신 은혜"를 상실하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D. 교회 예배의 변화

 

1. 금욕주의의 출현

금욕주의는 근본적으로 동양 신비주의의 산물이다. 금식의 날을 정하는 것과 독신주의는 금욕주의의 초기 형태이다. 많은 경우, 수요일과 금요일이 금식의 날인데,처음에는 자발적으로 정했다가 후에 교령(敎令)으로 정해졌다.

2. 예배장소

그리스도인들이 모임 장소로 사용한 초기의 건물은 로마의 공회당(basilica)을 모방한
것이다. 이 공회당은 그 당시 재판소와 증권거래소였다. 성찬을 받는 사람(communicants)은 본당에, 회개자는 현관에, 관객은 별석(別席)(gallery)에, 성가대와
감독은 후진(apse)에 모였다.

3. 상징(Symbols)
3 세기말에 사람들은 "십자가의 상징"에 신비한 효능 같은 것을 부여했다.

 

E. 밥티스마(침례) 실행의 변화
3 세기까지, 모든 밥티스마는 성인을 물에 잠그는 것이라고 확실히 공표되었던 것 같다.교회들이 규례에 성례전의 강조 사항을 넣을 경우, 유아들은 밥티스마를 받지 않았으며,
물 뿌리는 양식을 실행하지 않았다.  몇몇 교부들(특히 터튤리안)의 고증을 연구한 결과
밥티스마의 실행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얻을 수 있다.

 

1. 성인에게만 실행되었다.
2. 잠김으로 실행되었다.
3. 통상 긴 가르침이 선행되었다.
4. 자주 장대한 의식으로 거행되었다.

a. 이마와 가슴에 성호.
b. 밥티스마 후보자에게 우유와 꿀을 줌.
c. 소금을 baptizand의 머리 여러 곳에 둠
d. 256년 카르타고 공의회 후 밥티스마 전에 주문을 외우는 의식이 생김
e. 모든 밥티스마 후보자의 대부모(代父母) - 그들의 가르침을 보증

5. 효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짐
3 세기까지 밥티스마는 구원의 과정을 완성시키기 위해 지켜져 왔다. 밥티스마는 원죄를 씻어버린다고 했다.


a, 터툴리안

비록 밥티스트와 유아세례자들이 똑같이 그를 자주 인용하였지만, 터툴리안은 밥티스마와 관련한 많은 반대적인 실행에 대항했다. (터툴리안은 제도권 교회에 속했지만 후에는 회심하고 몬타니스트가 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것)터툴리안은 조기 밥티스마와 대부모의 사용을 반대했다.

b. 키프리안

대조적으로 키프리안은 밥티스마에 성수가 (따라서 성수를 뿌리는 자 -사제)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성수는 성령의 깨끗케 하는 에너지를 운반하는 매체가 된다"
또한 키프리안은 편의주의적 실행으로 물을 붓는(pouring) 것을 처음으로 지지하였다.

비록 밥티스마가 여전히 물에 잠그는 것으로 실행되었지만, 초기의 가장 큰 규례의 부패는 아프리카 교회로부터 왔다. 첫 번째 예로 Clinic Baptism을 들 수 있다.
그가 곧 죽을 것으로 여겨지자 노바티안은 Clinic Baptism을 받아들였다. 그가 종이로
자기 몸을 완전히 두룬 후 그 종이를 물에 담그어서 마치 그를 물 속에 잠근 것처럼 생각했다는 것은 주지해야 할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우리는 이 기사로부터 그 당시에는 물에 잠그는 실행을 올바른 양식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2 세기 동안 유아세례가 없었다는 사실은 많은 학식 있는 유아세례자들도 충분히
인정한 것이므로 그들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F. 주님의 만찬의 변화
     

1. "애찬(愛餐)(아가페)" 이는 초기부터 많은 교회들이 지켜 온 애찬(love-feast)이다 - 행 2:46, 유다12박해를 받는 동안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모여서 음식을 나누었다. 때로는 주님의 만찬 후에 애찬이 있었으나 지나쳐서 문제가 발생했다.
 

2. Eucharist
이것은 주님의 만찬에 붙여진 초기의 명칭 중에 하나다. [헬라어 유카리스테로(Eucharisteo) - 감사(thanks)]. 성찬중시주의(sacrementalism)로 인해 주님의 만찬의 단순성과 순결성이 변했다.

 

3. 미사(Mass)

비록 오늘날 실행되는 것과 같은 미사가 얼마 동안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  용어는
만찬 때 성찬을 받지 않는 사람들(non-communicants)을 제외시킨 3 세기의 관습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예비 예배(Preliminary Worship) 후에 밥티스마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퇴장시켰다. "퇴장(dismissal)"의 라틴어 "missa"로부터 "미사"가 유래했다. 

 

G.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케 하는 영향력은 3 세기에 극에 달했다. 이는 주로 한 사람,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 학파 출신의 유명한 그리스도인 철학자(골 2:8), 오리겐의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1. 오리겐의 생애
a.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복한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태어남
b. 젊은 나이에 높이 평가받는 성공적인 교사가 됨
c.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193-211 A.D.)가 일으킨 박해 중, 202년에 생애의 극적인 변화를 맞이함.
그의 아버지가 순교를 당함

그의 가족이 빈곤하게 됨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강제로 도피하자, 203년에 18 세의 나이로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의 교장이 됨.
 

d. 그는 천재이며, 광범위한 독서와 저술과 수집을 함. 그노시스주의자 암브로우스의
서재를 가짐

e. 신플라톤주의 창시자인 이교도 암모니우스 사카스(170-243 A.D.)의 문하생이 됨.
f.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함. 맨발로 맨 땅에서 잤으며, 스스로 고자가 됨.
g. 박해에 맞서는 용맹성과 극단적인 인내로 존경을 받음.
h. 213년에 로마를 방문함.
i. 215-219 년 동안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어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에 거주함.
j. 후에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서 231년까지 머무름. 231년에 알렉산드리아 지도자와
              다툰 후 추방당하여 영구히 알렉산드리아를 떠남.

k. 232년에 가이사랴로 가서 알렉산드리아 학교와 경쟁이 되는 다른 학교를 설립함
l. 데키우스 황제가 일으킨 박해 때 받은 가혹한 박탈과 고문의 결과로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가이사랴에 머무름. 

 

2. 오리겐의 믿음

오리겐은 일반적으로 위대한 교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지만, 그를 숭배하던
자들조차도 그가 엄밀하게 정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a. 비록 많은 그노시스파들과 철학적 논쟁을 가졌지만 그는 그노시스파의 신조에
               정통했다.
           b. 플라톤 철학에 몰두했다.
           c. 구약을 신약과 비유하여 알레고리로 해석하며 자주 구약을 신비적인 방법으로
               해석했다.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운 철학에 따라 문법적 해석에서 자기 의견상
               불합리하거나 불가능한 의미가 도출될 때마다, 문자적인 의미를 벗어났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을 기록된 대로 이해하는 자에게 성경은 아무 소용이 없다"
              고 했다.

          d.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의 기사를 부인했다.
          e. 혼이 영원 과거부터 존재했다고 믿었다(혼의 선재).
          f.  어떤 사람의 혼이 죽은 후,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고등 생명이나 하등
             생명으로 귀속된다는 혼의 윤회를 믿었다.
          g. 사악한 자도 형벌(연옥?) 후 결국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을 믿었다.
          h.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다.
          I. 별들과 행성이 혼을 가졌다고 믿었다.
          j. 마귀들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k. 목양자를 사제로 언급한 최초의 사람 중에 하나이며 감독은 중대한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말했다.
          l. 밥티스마를 받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암시를 보였다.
         m.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후천년 견해를 주장했다. 대부분의 초기 교부들은
             전천년주의자(chiliasts)였다.

       3. 오리겐의 작품들
          오리겐을 유력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그의 작품이다. 그의 생애 동안 약 6000권의
          책을 저술했다. 초기 교부들이 작성한 현존하는 신약 인용문의 50 % 가 그가 작성한
          것이다. 7 명의 유명한 교부가 작성한 신약 인용문 목록에서 오리겐이 작성한 것이
          거의 18,000 개다.

          a. 그의 주요 작품들
            · 오리겐은 거의 모든 성경책에 대하여 주석을 썼다.
            · 그의 저서 "제 1 원리(De Principiis)"는 방대한 조직신학이다.
            · 그의 책 "켈수스 이단 반박"은 변증론이자 논쟁이다.

          b. 구약 본문에 끼친 그의 영향 - THE HEXAPLA
              헥사폴라는 6개국어 구약 대조(對照) 성경이다. 6 개의 난으로 구성되었고, 각
              난은 구약 본문의 번역본을 실었다.  
            · 그 크기가 대략 6500 페이지, 50 권의 대형 두루마리에 달한다.
            · 약 250 년에 완성되었다
            · 그는 7 명의 속기사와 7 명의 필경자와 같이 일했다.
            · 첫째 난
               히브리어 본문으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후기 마소라 본문과 실질상
               동일한 것이다.
            · 둘째 난
               히브리어의 그리스어 음역이다
            · 셋째 난
               아퀼라(Aquila)(95-137년)의 그리스어 번역본이다. 아퀼라는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회심한 후에도 점성술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문을 당한 후
               다시 유대교로 돌아갔다.
            · 넷째 난
               에비온파였던 심마쿠스(Symmachus)(160-211 년)의 그리스어 번역본이다.
            · 다섯째 난
               오리겐 자신의 작품으로 통상 70 인역(Septuaginst)과 동등시된다. 오리겐은
               히브리어에 대하여 불완전한 지식을 가졌으며, 그가 당시 유포된 그리스어 및
               히브리어 본문을 정열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 여섯째 난
               또 다른 에비온파 데오도티온(Theodotion)(160-211년)이 만든 그리스어
               번역본이다.
            · 헥사폴라는 가이사랴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이 침입하여 분실 또는
               파괴될 때까지(638년) 이 곳에 남아 있었다.
            ·  5 번째 난은 오늘날까지 모두 잔존하며, 바티칸 사본(B) 필사본, 시내 사본(K),
                알렉산드리아 사본(A), Ephraemi Rescriptus(C)에서 발견된다.

          c. 신약 본문에 끼친 그의 영향
           오리겐은 자주"추측 교정(Conjectural Emendation)"이라는 본문 비평학의
           방법론을 적용하여 신약 본문을 고쳤다. 추측 교정이란 "당신이 생각하기에 본문을
           고쳐야 한다면 고쳐라!"를 뜻한다.    
                
    H. 교리의 변화
    
         2 세기의 대표적인 이단이 그노시스주의였다면 3 세기는 일위신론(一位神論)
       (단일신론 : Monachianism)이다. 이 이름은 터툴리안이 하나님의 단일성(unity)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호하려는 시도로 계발한 가르침에서 적용한 것이다. 일위신론은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한다

         이 시대에 발달된 또 다른 이단은 "성자종속론(Subordinationism)"이다.

         1. 역동적 일위신론(Dynamic Monachianism)
            이것은 사실상 에비온 이단의 존속으로, 하나님의 단일성을 지지하는 이론이다.
            이 일위신론의 형식은 비잔틴의 데오도투스(Theodotus)가 처음으로 가르쳤으며,
            대부분은 특히 사모사타(Samosata)의 바울이 가르친 것이다.
            사모사타의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 "로고스(Logos)"는 아버지에게
            종속되었으며, 인간의 이성이 사람 안에서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다. 비인간적 권능(로고스)은 사람인 예수 안에
            들어가서 점차적으로 그를 신성화했다. 비록 그가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할지라도"사람인 예수가 그렇게 신성화되었기 때문에 그는 신성한 영예
            (honor)를 받기에 합당하다".

            이 이론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기 보다는 사람이 하나님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2. 양식론적 일위신론(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 :
            Patripassianism/사벨리우스주의 :
            이 이단은 신격의 세 인격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세 양식으로 생각한다.
            이 이론은 스미마의 Prakeas 와 Noetus이 최초에 주장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제안자는 사벨리우스이다. 동부에서 이 교리는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라고
            불린다.
            사벨리우스에 따르면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은 신성한 본질을 스스로 계시
            하는 세 양식(modes)또는 상(phase)의 명칭이다.이 이론은 '아버지가 육체가 되어서
            우리 안에 거하셨다'고 주장한다.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분은 아버지이시다. 따라서
            Patripassian 이라는 용어를 주장했다 (Patri = Father, Passion = suffering)

         3. 성자 종속설(Subordinationism)
            이 견해는 오리겐이 가르쳤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께 종속된 2 위(secondary divinity)
            를 가진 한 신(a god)이지 하나님(the God)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성령은
            아들에게 종속되고 실제로 아들이 창조한 것들 가운데 있다고 가르쳤다.

           "오리겐의 삼위일체 교리는 ....아리우스파에게 디딤돌을 제공했다"
           "아리우스파의 논쟁의 뿌리는 위대한 오리겐의 그리스도론의 모순된 원리(elements)
           에서 부분적으로 발견된다."

    I. 기억해야할 사람들

         1. 오리겐(184-254) - 부패한 성경의 아버지
         2. 키프리안(200-258) - 부패한 교회학의 아버지
         3. 유세비우스(260-339) - 부패한 사학의 아버지
         4. 어거스틴(354-430) - 부패한 신학의 아버지

III. 노바티안

     노바티안은 신약 신앙 및 반열의 노선에서 몬타니스트의 뒤를 잇는 다음 연결점이다. 2 세기의 몬타니스트 운동이 "모든 믿는이의 성직자직분 논쟁"이라면, 노바티안 분파는 "교회 기율 논쟁(church discipline controversy)"으로 불릴 수 있다.  양 운동은 신약교회의 순결과 관련된 것이다. 그들은 영 안에서 밥티스트였고 복음의 진보를 낳았다.

    A. 지도자
         노바티안파란 이름은 지도자 노바티안 때문에 명명되었다.
         노바티안은 250년경에 이교 철학의 배경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가 병들어 곧 죽을 것으로 여겨지자, 노바티안은 성경적으로 밥티스마를 받지 않고
         "clinic baptism"을 받았다. 회복된 후 그가 다시 올바르게 밥티스마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노바티안은 감독 파비안(Fabian)에 의해 로마교회의 장로(목회자)로 임명되었다.

    B. 노바티안의 분파
         데시우스 트라얀 황제의 칙령으로 교회는 가혹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우상과 황제의 수호신에게 희생물을 드렸던 자들이 교회로 다시 들어오려고
         하자, 심각한 논쟁이 고조되었다. 다음과 같은 두 견해가 주장되었다.

         1. 엄격한 기율
           배교에 대한 본성 때문에 그러한 자들은 결단코 다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가능성이 거절당한 것은 아니었다)

         2. 엄격하지 않은 기율
            그러한 사람은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유예 기간이 지난 후 교회 일원으로
            복직될 수 있다.

            노바티안파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은 로마인 목양자 Hippolytus(?-235 A.D)이다.
            그는 이레니우스의 제자였으며 티버 강에서 순교 당했다. 그는 엄한 규율의
            주창자였으며, 스스로 로마 교회에서 분리되었다.

            노바티안은 엄격한 규율의 견해를 견고하게 지지했다. 250년에 파비안 감독이
            죽자마자, 그는 공석의 감독직을 가지고 유명한 코르넬리우스와 경쟁을 하였다.
            (코르넬리우스는 엄격하지 않은 규율을 지지했다) 코르넬리우스가 감독으로
            선정되자 노바티안은 교회의 소수 무리와 함께 교회를 떠났다.

           이 분열은 심각한 것이었다. 그를 비난하는 많은 거짓 고소가 유포되었다. 즉, 이 큰
           분열의 원인이 노바티안의 권력에 대한 개인적 야망 때문이며, 그가 당선되지 않자
           악의로 대항하는 교회를 세웠다는 거짓 고소가 유포되었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이
           논쟁은 교회의 기율에 관한 것이며, 노바티안은 실제로 자신이 원했던 바와는 반대로
           분열되어 나온 그룹에 의해 목양자로 뽑혔다.

    C. 노바티안파의 교리

         노바티안파의 교리는 다음을 지지했다.
    
         1. 교회 일원의 순결
            교회는 모든 배교, 불순물,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2. 엄격한 교회 기율

         3. 배교자의 재 밥티스마

         4. 밥티스마
           a. 잠김에 의해
           b. 성인에게
           c. 장대한 의식이 없이
           d. 교회의 권위 위에
 
         이들 교리는 기독교계 가운데서 실제적인 영구한 분열을 낳았다. 노바티안 교회들은
         더 이상 제도권 교회들의 밥티스마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 분열은 251 년에 발생했다.

    D. 노바티안에 대한 고소

         우리가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항은 노바티안이 성경적으로 밥티스마를 받지
         않았으며 소위 clinic baptism을 받아드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1. 밥티스마에 관한 노바티안의 가르침
            밥티스마는 교회의 권위에 의해 그리고 오직 잠김에 의해 실행되어야 한다고 명확히
            가르쳤다. 그는 제도권 교회로부터 온 모든 자들에게 다시 밥티스마를 베풀었다.
            이 사실은 비록 준비된 증거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가 올바르게 밥티스마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밥티스마는 사람이 아닌 권위가 중요하다.
            비록 노바티안이 성경적으로 밥티스마를 받지 않았지만, 그는 밥티스마에 관한
            권위가 교회와 관련한 것이지 밥티스마를 집행하는 사람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노바티안파의 밥티스마는 유효한 것으로 여겨진다.

    E. 노바티안 운동의 영향
   
        그 이름과 초기 시작은 로마였지만 분열을 일으킨 의견은 널리 퍼졌고, 운동은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로마에서 보다 앞서서 250 년에 카르타고에서 유사한 분열이 일어났다. 키프리안이
        감독으로 성급하게 선임되자 노바투스라는 이름의 인자한 목양자와 Felicissimus라는
        이름의 집사가 교회를 떠났다. 그 때 회개자에 대한 논쟁에서 키프리안이 보다 더 엄격한
        견해를 가졌으나, 분열 후 노바투스는 그의 입장을 바꾸고 엄격한 노바티안 운동에
        합류했다.

         254년에 이들의 반대자들은 이들이 프랑스를 이들의 교리로 오염시킨다고 고소했다.

         역사가 샤프는 노바티안파가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인 진지함 덕분에
         동쪽으로 여러 지방에 전파되었고 서쪽으로는 6 세기까지 전래되었다고 언급했다.
         이들은 피리기아에서 몬타니스트의 잔류자들과 결합했다.

         "노바티안파는 최초의 재침례교도(Anabaptist)였다 : 반대자들의 사역과 성례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참된 교회가 될 것을 주장하며, 카톨릭 교회로부터
        온 사람들 모두에게 다시 밥티스마를 받을 것을 필수적으로 강요했다. 이 무리는
        소아시아에서 크게 세력을 얻었는데, 거기서 많은 몬타니스트가 합류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노바티안파는 6∼7 세기까지 잔존했다"

        "로빈슨 박사는 그들의 존속이 종교개혁과 재침례교도 운동의 출현때까지라고 밝혀냈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바티안파의 본을 따랐고  제국 전역에 걸쳐 순결한 교회들이
        세워졌으며, 200 년 동안 번창했다. 후에 가혹한 법 때문에 부득불 희망자를 은밀히
        가입시키고 몰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만 했을 때, 그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특징을
        이루며 종교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들의 순결한 삶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들을 '순결한'을 뜻하는 카타리(Cathari)라고
        불렀다. Mosheim은 말하기를 "더욱이 그들은 캐톨릭교회에서 온 자들을 다시 밥티스마
        를 베풀었다. 다른 단체에서 온 자들을 다시 밥티스마를 주었기 때문에 재침례교도라고
        불렸다. 제 4 차 라테란 공의회는 이 재침례자들을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법령을 포고
        했다. 로빈슨 박사는 그들을 Trinitarian Baptist(삼위일체를 믿는 밥티스트) 라고 했다.
        그들은 교회의 독립성을 주장하고 존엄과 권위에 관하여 모든 목양자들의 동등성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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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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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기의 기독교 

 

 교회사에서 2 세기는 박해(PERSECUTION)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로마제국의 손으로부터 박해의 파도는 쉬지 않고 교회를 때렸다.

I. 2 세기의 박해들

주님의 교회는 대환란의 시대에서 2세기로 들어갔다.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하여 성장했고 확장되었다. 이러한 현상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다.

1. 끊임없는 전파

믿는이들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진지하게 수행했다. 그들은 참된 신념을 가졌다.

 

2. 복음의 배타성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들만이 진리를 선포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기독교는 "단지 또다른 종교"라고 믿지 않았다.

 

3. 회중 생활(congregational life)

이들 성도들은 복음을 살아냈다. 곧 그들이 선포한 바를 그대로 실행했다.

박해의 다른 효과는 박해가 교회를 순수하게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 고문과 죽음의
위협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재고하기에 충분했다. 많은 이들이 주님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renounce)". 이는 후에 교회에 몇 가지 문제점들을 야기시켰다.

98년부터 211년까지 Trajan, Hadrian, Antonius Pius, Marcus Aurelius, Commodus,
Septimus Severus 등의 6 황제에 의한 잔혹한 박해가 있었다.  

 

II. 2 세기의 타락들

사도들의 생애동안 심겨졌던 오류의 씨앗들이 이 기간동안 열매를 맺기 시작함

A. 교회 실행의 변화
주로 유대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교회내에 수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1. 성직자주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급화하는 것임 :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 ("kleros"는 '택한자들'을 의미함; "laos"는 '백성'을 의미함)신약은 감독의 직무가 교회내 지도권의 하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거만한 성직자들이 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경고가 베드로 전서 5:3에 주어졌다.

신약의 가르침을 넘어선 목양자들의 특권(prestige), 권능(power), 및 권위(authority)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카리스마(charisma), 강한 개성(strong personality), 또는 "영웅 숭배"를 통하여 두드러지지 않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특성들은 인간적 본성에 흥미를 끄는 것이다. 이유가 어떠 하든지, 신약의 가르침에서 이탈한 이러한 특성은 구약에 호소함으로 (구약의 레위 성직자제도와 이에 수반되는 권능 및 특권의 올가미)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백성의 몸(body)과는 별개의 특별한 성직자제도의 개념 및 제도는 수반되는 개념인 희생물과 희생단과 함께 유대교와 이교를 기억나게하는 유사한 것들로 기독교의 교회 안으로 알아챌 수 없게 귀속되어 갔다" (Schaff P.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II. p. 60) 

이 변화는 2 세기에 발생하였으며, "믿는이의 성직자직분"이라는 신약 교리를 벗어난 것이다.
a. 이그나티우스 (117년) : 안티오크 교회의 감독. "감독과 장로와 집사와 상관없이 무엇이든 하는 자는 양심에서 순결하지 않다"
b. 로마의 클레멘트 (110년) : 그가 신약교회와 레위 성직자직분을 비교할 때, 처음으로 평신도(layman)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 같다.

 

2. 비속화(卑俗化)(Sophistication)

이러한 진리들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형상을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복음의 단순성과 순결이 잊혀져 갔다. 더욱이 사람의 타락한 죄성인 상상력에 의해 이러한 보조 기구는 급격히 인간 고안품의 잡동사니로 타락해 갔다. 

"2세기 중간 또는 말기에 심각한 심볼의 형태가 그리스도인의 예술에서 시작되었음을
보게 된다...이러한 심볼의 근원은 종교적 진리의 상징을 가지려는 그리스도인의 본능적
욕망에서 발견되어짐에 틀림없다.." (Schaff P.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II. p. 60)
           

십자가 성호가 2 세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터튤리안은 "십자가 숭배"의 고소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방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기타 초기 기독교 심볼로는, 비둘기, 배, 닻, 등이 있다. "이들 심볼로부터는 단지
도상학적 표현의 측면에서 한 발자국의 진보가 있었을 뿐이다"고 샤프는 말한다
물고기 심볼은 2 세기 중반부터 유래되었는데, 그 근원지는 알렉산드리아로 여겨진다.

 

3. 성찬 중시주의(Sacramentalism)

2 세기 초에 중요성에서 주목할만한 변화가 보일 것이다. 실체(substance)와 상징(symbol) 간에 성경적 균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밥티스마의 규례가 크게 강조되었다.

 

a. 밥티스마의 부속물

먼저 규례에 의식(儀式)주의가 첨가되었다. 곧이어 다음 사항들이 뒤따랐다. 

(1) 도입부(Introduction)가 길어짐 - 교리문답
(2) 마귀 거절 설명서
(3) 신조(Creed)의 암송
(4) 삼중 잠김(Trine Immersion) - 간혹
(5) 형제의 입맞춤(Brotherly Kiss)
 

b. 밥트스마와 구원의 혼란
많은 교부들 가운데 켐벨주의와 유사한 견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의식에서 마술적인 것을 보지 않았지만, 밥티스마를 믿음의 행위로, 그래서 하나님의 원하는 은혜(saving grace)의 전달자로 보기 시작했다

 

(1) 순교자 저스틴 (100-165년)

(2) 헤르마스(Hermas) (115-140 년)

 

B. 기독교 교리의 변화

일세기에서 두번째 주요 이단이었던 그노시스주의는 2 세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노시스주의는 창조의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너무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얼마는 선하고 얼마는 악한 많은 중간 신들에 의해 우주를 다스린다고 가르쳤다.

III. 2 세기의 명사들

A. 저스틴(100-165 A.D.)
B. 이레니우스(115-200 A.D.)
C. 터튤리안(160-230 A.D.) 
       

IV. 2 세기의 발전

교회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짐으로 신약 정경이 형성됨. 2 세기 초에 발생하였다. 신약의 최종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사도시대에도 신약이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골 4:16)(살전 5:27)
(벧후 1:15, 3:1,2) * 딤전 5:18 과 마 10:10을 비교할 것  성경기록을 수집하고 편집한 곳 (4 곳)

팔레스타인 - 마태, 야고보, 히브리서
소아시아 - 요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후서, 빌레몬서, 베드로전서부터 계시록까지

그리이스 -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카전후서, 누가, 디도서
로마 - 마가, 사도행전, 로마서 

지리적인 분리 때문에 초기의 정경 수집은 완전하지 못했다.교부들의 글에서 신약성경의 정경화에 관한 많은 증거들이 제시되었다.

주로 전달과 유포의 어려움 때문에 몇 가지 책들에 대한 작은 논쟁이 있다. 412년 까지논쟁이 되었던 책으로는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 일서, 요한 이서이다 -
대체로 이단들을 정죄한 책들이다. 

 

 

 

V. 2 세기의 저항자 - (Monatanists)

몬타누스파의 출현. 대부분의 교회역사에서 몬타니스트들은 이단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들의 신조와 실행들을 주의깊게 연구하면 그들이 정통이였음이 밝혀진다.몬타니즘은 교회의 순결과 영성에서 조류를 거스리는 첫번째 일반 저항이다

 

A. 지도자
그들이 몬타니스트라 불리운 것은 몬타니우스라는 사람의 선포때문에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는 Cybele의 이교도 사제였으며 약 150 년에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B. 위치
몬타니즘은 소아시의 중앙 프리기아에 있는 Ardabau라 불리우는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사상은 신속하게 유럽과 아프리카로 퍼져나갔다. 몬타니즘은 177년에 로마와 프랑스의 리용에서도 발견되었다.

 

 C. 시작

몬타니우스는 150년에 그의 관심사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 명의 여자 명사인 맥시밀라와 브리스가를 포함한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다.

 

D. 몬타니스트 운동의 이유들
사도시대이후 곧 많은 교회들 가운데서 눈에 띄일만한 변화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그들 중 몇 가지로는,
 

1. 의식주의(儀式主義)화 경향        
2. 성직자 계급의 등장
3. 영성의 부족
4. 기율과 교회회원의 기준이 헤이 해지기 시작함

 

E. 몬타니스트의 사명
몬타니즘은 실제에 있어서 교회를 그들의 영적 단순성으로 회복시키려는, 신약의 기초로 돌이키려는 개혁운동이였다.
몬타니우스는 믿는이들과 교회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를 크게 강조했다. 그리고 복음에는 성직자에게 아무런 특권이 없음을 표명했다. 그는 철학과 종교의 반대자였다.

 

F. 몬타니스트의 교리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 것과는 별개로 몬타니스트들은 다음과 같은 신조와 실행들을 지켰다.

1. 교회의 회원으로 거듭남을 강조함
2. 믿는이의 밥티스마

그들은 교제의 순결을 실행했으며, 제도권 교회에서 온 자들을 다시 밥티스마를 주었다. 그들은 오직 물에 잠그는 밥티스마를 베풀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2 세기에는
이 밥티스마 외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3. 삶의 거룩함

 "그들은 과학과 예술, 모든 세상적인 교육 또는 삶의 화려한 형태를 피하였는데 이는 그러한 것들이 이교주의에 속했기 때문이었다"(Christian Op. Cit. p. 42)그들은 재혼, 방종한 금식, 박해를 도피하는 것에 반대했다.

4. 교회 기강
"도덕적 죄에 대항하여 교회는 그 죄를 범한 자를 올바르게 배제함으로써 스스로를 지켜 나갔다. 왜냐하면 교회의 거룩함은 단순히 그 일원의 거룩함이기 때문이다(Christian Op. Cit. p. 43)"

5. 삼위일체 신학
6.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
몬타니스트들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경기록들을 전수하였다. 

7. 전천년주의 종말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속히 다시 오셔서 땅 위에 그분의 천년왕국을 세우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이러한 전천년주의 견해는 또한 순교자 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몬타니스트들이 인기가 없었던 것이 전천년주의의 소멸에 기여했던 것 같다.

 

G. 몬타니즘에 대항한 변화
몬타누스파 교회들은 제도권 교회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들에 관해 언급한 것들 중 많은 것들이 부당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최근의 역사가들은 몬타니즘의 대적자들 편을 들었으며, 그들에 대하여 몇 가지를 고소하였다.  

 

1. 가장 일반적인 고소
이는 몬타니스트들이 "고대의 Holy Roller (열광적인 종파의 신자)"라는 것이다.
몬타니우스가 위로자(Paraclete)이며, 그의 추종자들은 성경의 계시를 초월하여 주장하였다고 고소했다.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절대적인 증거가 없는 것 같다. 몬타니스트 교회의 영성과 삶은 제도권 교회들의 형식주의 및 무감각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a. 루터교 역사가 모헤임은 몬타니우스가 자신을 위로자라고 불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의 역사서 번역자 맥클린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몬타니우스가
자신을 스스로 성령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실수였다." (Church History. Mosheim, Volume I. p. 188) Armitage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몬타니우스는 자신을 성령과 동등시하였다고 고소를 당했는데, 이것은 단지 비방에 불과하였다"(Armitage, T. History of The Baptists. p. 175)

b. Jarrel은 "ecstasy"에 관한 터툴리안의 해설을 인용하면서 아마도 그가 다윗이 말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c. 터툴리안은, 이상(vision)과 초성경적 계시를 언급하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성경을 읽거나, 시편을 노래하거나, 강연을 하거나, 기도를 드리는 것들은 이상에 의해 지지를 받는 것들이다"라고 했다. 어떠한 비성경적인 것도 없다!!
 

d. 몬타누스파 교회들이 제도권 교회의 교리들을 수용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바이다. - 그들의 차이는 강조와 실행에 있다. 

2. 몬타누스파의 지나친 점들
비록 단호하게 입증되지 않을 지라도, 일부 몬타누스파 교회들이 다음과 같은 확실한 비성경적 실행들을 지켰을 가능성이 있다.

a. 여자의 임명
몇몇 교회들은 성령의 선물들이 모든 조건과 성에 차이가 없이 분배되었다는 그들의 신조로 인해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허용했다.

b. 삼중 밥티스마(Trine Immersion)일부 몇몇 몬타누스파 교회에서 실행되었다.
c. 목양자의 독신주의 - 아무런 규칙이나 또는 법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박해의 때에 실제적인 예방조치였다. (예 고전 7:26,29 와 8,9 절)
d. 엄격한 금욕주의
e. 엄격한 교회 기강

 

 H. 몬타니즘의 결과
1. 터툴리안은 몬타니스트 사상으로의 전환자로 알려졌다. 그는 이 가르침들을 잘 정리하는 것을 도왔으며, 그 결과 북 아프리카 지역(터튤리안파)에 유증으로 남겼는데, 후에 도나티즘으로 나타났다.

 

2. 이 운동에 대하여 수차례 공의회가 소집되었으며, 공식적으로 그들을 정죄하였다.
3. 이 운동의 영향은 노바티안파, 도나티우스파, 아르메니아와의 점촉, Paluician의
출현 등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역사가들 중에 몬타니스트를 옹호하는 역사가들이 있는데 그들 중 몇몇을 인용하면,

 

a. 초기 역사가인 W.R. 윌리암 박사는 "그들의 가르침에서 교리적 오류를 발견하기가
힘들다. 그들의 감정의 표현은, 훨씬 후 종교개혁시대에 많은 다른 교사들이 강조한
바와 같이, 은혜의 참된 경험은 믿는이의 삶에서 분명하다는 그들의 믿음에서 유래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b. 도너 박사는 그들의 운동에 대하여, 교회 지도자들을 교회 몸의 지배자로 세우려는
움직임(역자주:성직자계급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적 반발이였다고 썼다.

c. Schaff-Herzog 종교 백과사전의 기고자인 몰러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몬타니즘은
기독교의 새로운 형태가 아니며 몬타니스트는 새로운 종파가 아니다. 오히려 몬타니즘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 가운데 안락하게 안주하려는 그 시대의 두드러진 경향에 대항한 단순히 고대 초기 교회의 반발이었다."  (Grimith, J. W. A Manual Of Church History: Vol. II. p.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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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사 개요 

 

1세기 - 가톨릭 교회가 시작된 것은 성령 강림 때이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사도들과 제자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으며 그분은 메시아 즉 구세주로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부활 승천하셨으니 그분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으리라"하는 것이 그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파함으로 나날이 신자들이 늘어나고 사도들을 중심으로 신앙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제자들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자 유대인을 중심으로 하는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가 각각 형성되었다.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교회 중 특히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교회, 안티오키아 교회, 로마 교회가 큰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그 후 바울로(바오로)의 열성적 전교에 힘입어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교회들을 융성하나 예루살렘의 유대인 중심 교회는 쇠퇴하게 되었다.

2세기∼3세기 - 이때는 이미 12사도들이 사망하였으므로 사도 후 시대(100∼300년)가 시작되는데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교회 관습이 유대교적 색채를 띠며, ②교계제도가 확정되어 주교, 신부, 부제 등의 등급이 생겼고, ③그리스도 신학이 정립되었으며, ④로마의 영토 확장으로 그리스도교가 확장되었고, ⑤그 후 그 발전을 견제하기 시작하여 로마 황제들로부터의 박해가 200년간 계속되었다.

4세기 -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었다. 그리고 392년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 가톨릭 교회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이로 인해 ①수도회가 창설되고, ②공의회를 열어 교회의 문제를 협의하고, ③전례가 발전하였으며, ④정통 가톨릭 교리가 정립되어갔다.

5세기 -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로마가 멸망하였다. 게르만 민족 특히 프랑크 왕국의 문화와 고대 그리스 문화가 융합되어 중세 문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때 가톨릭 교회가 위기를 맞는 듯했으나 게르만 민족의 회개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고대사회 제2기 [312-604년] 

 

콘스탄틴 대제부터 그레고리오 대교

    

제1절 콘스탄틴 轉換

콘스탄틴의 개종

Constantinus는 로마군 장교 Constantius Chlorus와 Helena의 아들, 285년경 로마 제국의 속주(屬州)나이수스(Naissus)[1]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니코메디아의 디오클레시안 궁전에서 보냈다. 모친Helena는 旅人宿 주인으로서 콘스탄시우스와 결혼하였지만 법률상의 아내는 되지 못하였다. 당시의 로마법이 고급 장교들에게 속주의 주민들과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93년에 콘스탄시우스는 로마 제국 서부지역의 막시미안(286-305) 제2정제(正帝,August) 치하에서 제2부제(副帝, Caesar)로 임명되어 Gaul 지방과 Britannia 지방의 통치자가 되었다.당시 동부지역의 제1정제는 Diocletianus(284-305)였고 제1부제는 Galerius(305-311)였다.[2] 이 때에콘스탄틴의 부친은 副帝가 되는 조건으로 막시미안 정제의 의붓딸인 Theodora Fausta와 결혼해야 했기에아내와 헤어졌다. 콘스탄틴은 296년에 디오클레시안과 이집트 전쟁에 출전하러 가던 도중에 팔레스티나에서 장래의 敎會史家이며 체사레아의 주교가 될Eusebius(260-340)를 만나 친교를 맺었다.

 

305년 5월에 두 정제인 디오클레시안과 막시미안이은퇴를 선언하였을 때에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이 제1정제가 되고 자신은 그의 부친을 계승하여 제2부제로임명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디오클레시안은 그의 사위인 갈레리우스를 제1정제로 임명하고 콘스탄틴의 부친은 제2정제, 두 副帝로는 Maximinus Daza(305-313)와 Severus(306-307)를 임명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불만을 품은 콘스탄틴은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그의 부친이 있는 Gaul지방의 불로뉴(Boulogne)로 갔다가 후에 그의 부친과 함께 브리타니아로 건너가Galedonia 전쟁에 참전했다. 306년 7월 콘스탄시우스가 York에서 사망하자 군대의 지도자들이 콘스탄틴을 正帝로 추대하였다. 이제 그는 부친을 계승하여 골지방과 브리타니아 속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다.이로써 로마 제국에서는 디오클레시안이 제위 계승의효과적 방법으로 수립한 4인 정치체제의 질서가 붕괴되었다. 콘스탄틴은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강력한군사력을 통해서 310년에 에스파냐를 정복하여 로마제국의 서부지역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311년, 제1정제인 갈레리우스가 사망한 후 서부지역은 콘스탄틴과Maxentius(306-312)가 영토를 나누어 지배하였고,동부지역은 Licinius(311-324)와 막시미누스 다자가지배하였다. 당시 콘스탄틴은 동방의 리치니우스와, 막센시우스는 막시미누스와 정치적 동맹을 맺고 있었다.콘스탄틴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해 그의 부친처럼관용정책을 시행하였고 리치니우스도 이에 동조하였다.

  

312년 콘스탄틴은 당시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던 막센시우스와의 정권투쟁을 계획하고,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동부지역 황제인 리치니우스에게 자기의 누이동생인 콘스탄시아를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한 후, 막센시우스의 영지인 이탈리아로 出征하였다. 그는 알프스를 넘어 Turin, Milano, Verona 등지에서 저항군을 격퇴하고 로마로 진격했다. 로마의 티베르강에 놓여 있는 Milvio橋에서 상대방의 막강한 군대와 마주쳤을 때 그의 군대로서는 로마를 점령할 수 없음을 알았다. 전투 전에 발현(또는 꿈)을 통하여 그와 그의 군대는 그리스도교 神의 가호와 구원의 표징을 받았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교 신의 이름으로 대승리를 거두었다. 밀비오橋 전투의 승리는 그의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 그는 서부 유럽 전체를 차지한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고, 312년 10월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최고통치자로 영접하고, 그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착공했다(315년에 완성). 이제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을 보호신으로 공경하기에 이르렀고, 후일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런데 콘스탄틴의 大勝戰과 그리스도교 귀의에 대한상이한 기록과 두 견해가 논란되고 있다.

 

 첫째 문제는, 밀비오교 전투 직전에 있었던 콘스탄틴의 체험이다. 락탄시우스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꿈에서 그의 군인들의 방패에 神의 천상 표시를 붙이고 싸우라는 지시를 받고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의 첫 글자인 ‘ ’를 십자 표시인 ‘+’에다가 윗 부분을 약간 구부려 ‘f'로 바꾸어 방패에 그려 넣어 그리스도인의 신을 보호신으로 삼고서 전투에 나가 승전하였다. 기적적 사건 기술이기보다는 황제의 꿈은 쉽게 이행될 수 있는 着想을 일으켜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황제와 그의 군대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의 보호 하에 전쟁에 나갔으며 승전의 결과는 그리스도교의 신이 이러한 결심을 일으켜주었고, 보호신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반면에 콘스탄틴의 친구인 에우세비오는 황제 자신이 겪은 체험을 듣고 황제의 사망 후에 <콘스탄틴의 생애>라는 저서를 내놓았는데 여기서 황제가 실제로 발현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전쟁의 勝算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느 날 오후에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하였을 때 그의 군인들과 함께 공중에서 빛나는 십자가와 “이것을 가지고 싸워라”라는 문구를 보았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모노그램(Χ와 Ρ의 조합문자)이 그려진 군기를 만들어 가지고 싸워 승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두 기록 중에서 오늘날 학자들은 락탄시우스의 실사적 진술을 에우세비오의 기적적 진술보다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둘째 문제는, 콘스탄틴의 전환에 대한 동기(動機)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① 내적인 마음의 변화 즉 종교적 체험의 영적 결과로 보기보다는 순전히 황제의 정치적 책략으로 간주하는 견해 - 그 증거로, 그의 재위기간 내내 우상숭배의 이교사상을 배격하지 않았고, 전임 황제들이 지니고 있던 대사제(Summus Pontifex)의 황제 칭호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음을 든다. ②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그의 내적 변화는 매우 긍정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 이유는 황제가 일신교적인 미트라(Mithra : 태양신)의 신도로서 어느 정도 종교적 경험을 가지고 있어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교의 일신론에 대해 내적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콘스탄틴은 일신교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경향이 짙은 가정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3세기 로마 제국의 종교적 성향은 모든 신들을 초월하는 최고신(Summus Deus)에 대한 신앙이 우세하였는데 그의 부친 콘스탄시우스가 바로 이러한 일신교 신봉자였다. 그는 신도들에 대한 박해령을 무시하고 관용정책을 실시하였다. 더욱이 콘스탄틴 가정에는 이복 여동생 Anathasia가 그리스도교 신자(또는 유다교 신자)였고 또 다른 이복 여동생 콘스탄시아도 그리스도교 신자로 간주되었다.

 

 帝國敎會의 창설

밀비오橋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콘스탄틴은 로마에서두 달 동안 지낸 다음 313년 봄에 밀라노로 갔다. 거기서 그는 누이동생 콘스탄시아와 동부지역의 황제 중의하나인 리치니우스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두 황제는 이른바 ‘밀라노 관용령’이라는 포고령을 선포하여 동부로마 제국의 집정관들에게 제국내의 여러 종교에 부여된 기존권을 그리스도교에도 승인하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동부 황제 다자는 박해자로서 이 포고령을 수행하는 데장애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리치니우스는 313년 4월Adrianopolis에서 M. 다자와 싸워 승리한 결과 동부지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으며, 6월에 니코메디아에서 밀라노 관용령을 시행하라는 포고를 내렸다. 이제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박해는 완전히종식되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한편 서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콘스탄틴은 그리스도교와 그 신도들에 대해 우호적 정책을 실시하였고, 312년 말 자기 군대의 군기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뜻하는 상징을 사용하였다. 그는 재위기간중에 그리스도교에 대해 물질적 특혜와 법적 특권을 부여하였다. 313년 교황에게 라테란 궁전을 기증하여 그곳에 라테란 대성전(성 요한 대성당)을 건립하고, 320년경에는 베드로 대성전을, 이어 예루살렘 무덤 성당,베들레헴 예수 성탄 성당 등을 건립하였다. 이로써 그리스도교 예술과 건축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이교도의 종교 행사를 조심스럽게 제한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312년, 이교도 제관들에게 부여했던 면세특권을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에게 부여하였고 특히 주교에게 국가의 사법권을 이양(移讓)했다. 또 성당이 죄인의 도피처(逃避處)가 되는특권도 부여했다. 국사범 용의자는 교회를 피신처로 삼을 수 있었으며 주교는 이 특권으로 국가의 결정을 무시하고 성당을 정치범의 보호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황제는 315년에 십자가 처형을 폐지시켰고, 321년에는主日을 그리스도교의 예배일로 공인하였고, 국법에 의해 주일과 교회 축일을 공휴일로 정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교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황제는 몰수된 교회 재산의 반환 조치를 취하였고 321년에는 교회가 상속권(相續權)을 갖는 법을 제정하여신자들이 재산을 교회에 기증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급속히 방대한 재산을 축적하고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토지는 교황 그레고리우스1세(590-604) 이후 교황청에 흡수되었으며, 증여물과 기부금에 의해 생긴 재산은 교회로 하여금 가난한이들을 돕는 구호단체가 되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반면, 로마 동부지역 황제인 리치니우스가 324년에反교회 정책을 시행하자 콘스탄틴은 크리스폴리스 전투에서 리치니우스를 격퇴시키고 全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이후 그리스도교 역시 로마 제국안에서 보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325년에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니체아에 제국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최초의 공의회를열도록 했고, 33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그리스도교적인 수도로 건설하였다.

 

  그는 사생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임을 공언하였고,그의 가족 모두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임종 직전(337년)에 세례를 받고 황제복을 다시 입기를 거부, 흰 領洗服을 입은 채 세상을떠났다. 동방교회는 대제를 ‘13번째의 사도’, ‘준사도’로 공경하고 있다.

  

대제를 계승한 세 아들, 콘스탄틴 2세(337-340), 콘스탄스(337-350), 콘스탄시우스 2세(337 -361)는 부친의 교회 정책을 그대로 시행하였고, 동시에 이교 사상과 종교 행사를 탄압하였다. 콘스탄시우스 2세는341년에 미신행위와 우상숭배를 금하였고, 346년 콘스탄스와 함께 로마 제국 전역에 이교 신전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선포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로마 제국은점차 그리스도교화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대제의 이복형제의 아들인 율리아노(361-363)가 황제로 등극하자 잠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거부하고 과거의 우상숭배의 종교 행사를 다시 일으켰다.그러나 그가 페르시아인과의 전투에서 戰死함으로써그의 이교 사상의 부흥작업도 끝맺게 되었다.Jovianus(363-395)는 제국에서의 특권적 위치를 교회에 다시 돌려주었다. 이후 로마 황제들, 특히Theodosius 1세(379-395)가 그리스도교 정책의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유능한 통치자로서 388년에 로마 제국을 통일하였는데, 그의 시대에 교회와 국가가제휴관계를 이루어가기 시작하였다. 380년 2월 황제는 ‘가톨릭 신앙에 대한 칙령’(De fide catholica)을반포하여 동부지역의 국민들에게 니체아 공의회의 전통신앙을 받아들이도록 명하였고, 동시에 모든 국민이이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선언하였다. 이 칙령은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종교로 설정됨을 시사한 것이다. 황제는그리스도교 이단자들에게는 교회 설립과 종교 행사를금지시켰고 정통교회로 돌아오도록 강권을 발동하였다. 그는 1년 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의칙령을 법으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당시까지 이교도의마지막 보루이며 피난처였던 원로원도 로마 신에 대한신봉을 포기해야 했다. 392년에 또 하나의 법령을 반포, 모든 그리스도교 이단의 가르침을 대역죄에 해당되는 벌금형에 처하고 이교 우상숭배의 종교 행사를 모두重刑에 처하는 금령을 내리고, 이교도 제관과 여신을섬기는 童女들의 수입금과 함께 이교 神殿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러한 反이교정책과 親그리스도교 정책 이후로 이교 신앙은 국민의 공적 생활에서 점차로 사라지고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되었다. 이러한 政敎一致로 국교 시대의 주교들은 자기지방의 행정권까지 갖게 돼 지방에서의 주교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국민의 보호자로서 권력가들의 압박과관리들의 수탈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는 임무를완수했다. 또한 주교들은 황제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미쳤고 그의 시행착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전환기의 문제성

 

 교회와 국가의 이 같은 밀접한 관계에 대해 이미 동시대의 사람들도 서로 다른 견해를 보였으니,어떤 이들은→ 감사와 기쁨에 넘쳐 그것을 국가의 그리스도교화로간주(에우세비오)하였고,어떤 이들은 → 교회의 ‘俗化’를 두려워하기도 했다.

중세 교회개혁 문헌→ 콘스탄틴 이전 ‘원시교회’(Ecclesia primitiva)만이 개혁의 전형으로 보았다

즉, 사도적 단순함, 청빈에 대한 이상, 세상으로부터의격리가 원시교회의 특징으로서, 그것으로 교회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① 교회는 이러한 특징으로 돌아가야 한다(11, 12세기피오레의 요아킴 요구)

② 13, 14세기 프란치스코회 엄격주의자들 → 콘스탄틴 이후 교회에서 쇠퇴밖에는 보지 않았다.

③ M. Luther, 이러한 쇠퇴의 원인을 교황직의 책임으로 돌리고. 그 이후 ‘쇠퇴이론’이 프로테스탄트 역사 서술에 성행하게 되었다.

계몽시대 → 모든 악의 원인이 사제직의 지배욕에서 비롯되는데, 사제들은 박해가 끝나면서부터 황제의 총애를 누리고, 권세욕에 물들고, 복음의 순수성을 그들의이기적 관심으로 희생시켰다.

콘스탄틴 이후 : 제국교회 → 자진하여 국가 권력에 순응함으로써 본연의 사명을 배반하였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부정을 저질렀다.

이러한 잘못된 발전이 시작된 시기에 대해 19세기와20세기에 이르러 이견 지닌 이들 생겼다.

① 부패가 벌써 사도시대의 종료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이들

② 초기 그리스도교의 호교가들에 의한 그리스도교의희랍화로 시작되었다는 이들

③ 콘스탄틴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이들이 있었다.

 

 주요 비난은 언제나 콘스탄틴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그리스도교를 박해에서 해방시키고, 국가 질서에배열시킨 것은→ 의심 없이 하나의 선물로 간주되었다.그러나 콘스탄틴은 즐겨 자신을 ‘동료주교’로 불렀고,니체아의 축연에서 겸손하게 행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제였다. 얼마 안 가 그는 주교직을 그의 관직처럼 지배하고, 비록 순 교회 사정에 관계되는 일일지라도 국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예 : 아타나시오 335년 황제에 의해 추방됨). 그 후 콘스탄틴은 교회 내의 생활에 더욱 심하게 간섭했다.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 → 신학 지식의 깊이와 그리스도교 구원 신비의 궁극적인 의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부족했다는 것이었다. 그 예로, 아리우스파의 분규 시초(324년)에, 그는 양측 대표자인 아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델 주교를 화해시키기 위해 그들에게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서 양 파의 대립 문제를 지엽적인 것으로 판단했는데 실제로 이 문제들은 그리스도교의 존립문제와 상관되었고, 또 구원 교리자체가 문제시 된 사실도 그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콘스탄틴은 니체아 공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중요한 신앙문제에 대해 자신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아리우스와 그의 신봉자들을 파문한 공의회의 결의에 처음으로 국가적인 추방을 뒤따르게 했고, 종교문제에 대한 국가의 지속적 간섭은 그 이후 이단자를 화형에 처하기에 이르렀다.

 

  (예) 황위 찬탈자인 Maximus(383-388)는 스페인과 갈리아의 금욕운동의 창립자인 스페인 평신도 프리스킬리안을 385년 트리어에서 그의 6명의 伴侶와 함께 처형시켰다. 여기에는 정치적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다.

 

  교회의 중요한 대표자들인 투르의 마르티노,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로마의 시리치오 교황은 위의 이 잔학한 행위를 아주 맹렬하게 단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처형의 편을 든 주교들도 있었다.

 

  이 같은 국가와 교회의 공생, 둘의 적극적인 상봉이란획기적 사건은 많은 신자들에게, 이제 교회는 자진해서국가의 자유에 맡겨야 하고, 국가의 임무에 적극적으로협조해야 함 생각했다.

 

  승리의 도취감 → 세속과의 격리가 급속화되고

 

                → 일종의 세계 개방적인 문화 낙관주의로변하게 되었다.

 

  콘스탄틴 자신 → 주교와 신부들에게 권한과 전권 위임하고, 교회에 많은 영예를 부여했으나,

주교, 신부들 → 국가와 교제하는데 있어서 전혀 경험이 없었다.

 

             → 그동안 박해에는 잘 대응했으나, 국가의 호의적 태도에 대해 미숙했다.

 

형편에 따라서는 호의적인 것이 적대적인 것보다 더 위험스럽다는 사실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의 보호를 받는 교회로 몰려든 군중은 교회에 완전히 새로운 과제를 제기했다.

 

확신에 차 있고, 순교를 각오한 신자들의 엘리트의 교회에서 → 정치적으로 야심이 있고, 종교적으로 무관심하고, 아직 반은 이교적인 사람들이 몰려들어온 대중의교회가 되었다. 이로써 종교의 평범화 및 이교적·미신적인 것의 침투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서 종교의世俗化나 남용이 교회를 위협하게 되었다. 교회는 이위험들을 극복하였던 것일까?

 

  만일 우리가 예수의 肉化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또한교회를 모든 시대와 민족과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 예수의 구원사업을 완성하기 위한 예수의 삶의 계속으로인식한다면, 우리는 그 理想을 본래 주어진 형식을 고수하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의 역사적인 발전에 여백을 남겨두어야 한다. 교회의 특성은진정한 역사성이다.

 

  교회는 시대와 떨어져서, 시대와 나란히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시대 안으로 들어가고, 시대 안에서 자신을시간화한다.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교회는 정지될 수없다. 교회는 본래 개개의 문화에 대해 중립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모든 문화에 대한 개방과접근을 의미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모든 시대와 문화 안으로 끌고 들어가, 그 안에서 형태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와 세상을 향한 개방 사이에서 올바른 중용을 유지해야 한다. 세상으로의 접근과 세상으로부터의 격리 사이에 있는 큰 변화의 넓은폭이 교회의 품안에서 성인과 죄인, 승리와 패배의 여지를 제공한다. 그래서 한 시기의 부정적인 면에 이론을 제기하거나 그것을 간과하는 것은 비학문적이고, 비신학적일 것이고, 긍정적인 면을 부인하는 것 역시 비역사적이고 비학문적일 것이다.

 

  당시의 포교열(布敎熱), 종교문제를 토의하고 신학문제를 해결한 그 정열, 특히 수도생활의 발전과 성인의큰 숫자는, 콘스탄틴 이후의 시기가 지닌 여러 가지 약점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활기와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충만했던, 교회사상 한 위대한 한 시기의 성격을부여하는 것이다.

 
[1]) 오늘날 유고슬라비아의 Nis지방


[2]) 당시 로마 제국의 동부지역에서 제1정제는 Nicomedia에,  제1부제는 Sirmium에 정주하였고, 서부지역에서는 제2정제가 Milano에, 제2부제가 Trier에 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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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고대사(사도후 시대)


 

 

Ⅱ. 사도후 시대(100-313) / (콘스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1. 서 론

 


1) 시기-사도 요한이 죽은 후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기까     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를 사도후시대(Post-Apostolic Age) 혹은 니케아 회의 이전시대       (Ante Niecene Age)라고 부른다.

 


2) 박해와 순교

 


(1) 네로(Nero) 황제부터 250년간 박해 받음-순교자의 시대

(2) 익나티오(안디옥), 폴리카르푸스(서머나), 유스티누스(로마철학자), 키프리아누스(칼타고)등      의 순교자가 나옴.

 


3) 카톨릭 교회(Catholic Church)

 


(1) 카톨릭(Catholic)은 <공동>, <보편>의 의미를 지님.

(2) 박해를 승리하기 위해 교회들이 단결함

(3) 사도 신경이 이 시대에 작성됨

 


4) 사상의 발달

 


(1) 온갖 박해 중에도 전도 활동 왕성-기독교의 생명력 입증

(2) 이 시대는 사상의 발효 시대이다.

(3) 헬라(그리이스) 철학, 동방 종교, 유대의 율법주의의 이입으로 사상적 혼란이 옴.

(4) 그노시스주의(Gnostism),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등 절출 조화의 사상이 형성

 


2. 기독교의 전파

 


1) 교회 확장의 중심지

 


(1) 예루사렘-유대 각지로

(2) 안디옥-수리아와 메소보다미아로

(3) 에베소-소아시아 각지로

(4) 빌립보, 데살로니가-마게도냐 지방

(5) 알렉산드리아-신학교 설립

(6) 고린도, 아덴-헬라 지방

(7) 로마-여러 지방에 선교

 


2) 성장의 성과를 거두게 된 요인

 


(1) 성령의 역사

(2) 신자들의 비상한 전도열

(3) 왕과 상류 계급의 입신(入信)

(4) 가난한 자와 어려운 자 구제

(5) 봉사와 상부상조

(6) 박해에 대한 인내

(7) 고상한 도덕적 생활

 

 

 

 


3. 박해

 


1) 원인

 


(1) 우연한 원인

①오해로 인해서 - 기독교인은 부도덕한 자들이다-동굴 속에 남녀가 모여 음행한다고 기독교    인은 불의한 자들이다-자식을 잡아 먹는다(성찬식을 보고)

②미신으로 인해서 - 기독교인 때문에 신이 노하여 천재 지변이 일어난다고

 


(2) 진정한 원인

①사상의 부조화 - 로마인은 국가 지상주의(國家至上主義), 기독교인은 신본주의(神本主義) 로마 제국은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기독교인은 끝이 있다고 생각함 / 가장 명령에 절대복종, 기독교인은 가장이 불신자이면 복종치 않음

②사회 생활의 부조화 -로마인은 오락, 사치를 죄로 여기지 않으나 기독교인은 죄로 여김 /이    교도들과 융화되지 못함을 보고 사회와 정부를 분해 개조하려는 행위로 봄

③로마의 정책 -황제 예배 강요(국가 통일 위해), 기독교인은 다신교 반대/ 비밀 결사를 취체    (비밀 집회는 딴 국가를 세우려는 정치적 음모로 봄) /기독교인은 군대 복무를 안하므로 박    해가 생김

 


2)박해의 방법

 


(1) 기독교와 절연 증거로 성경과 기물을 주어 버리거나 파괴하도록 함

(2) 사회에서 추방(직업 방해, 재산 몰수, 공직 박탈)

(3) 폭력 바오하(화형, 십자가형, 맹수와의 결투)

(4) 문서상 방해(교리적으로 박해)

(5) 기독교를 부인하면 과거 죄 사면

 


3) 박해의 결과

 


(1)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임을 확신

(2)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 확신

(3) 신약 정경(Canon) 형성 촉진

(4) 진리를 세계에 알림

(5) 사도, 교부들의 순교로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임을 증명

(6) 교회와 국가의 구별을 명확히 함

 


4. 10대 박해

 

 


황제
 
이유
 
방법
 
발생사태
 

네로, Nero(54-68)
 
로마시 방화자
 
생일연 춧불대신 화형빛
 
베드로, 바울 순교
 

도미티아누스(81-96)
 
다른 국가 세운다고
 
재산 몰수, 살해  
 
카타콤 생활
 

트라야누스(97-117)
 
사회생활 부조화
 
황제상 앞에서 절하라
 
강요 죄인취급, 집회불허

이그나티우스 맹수에게
 

하드리아누스(117-138)
 
그리스도인 증오
 
국경일에 헌제케함
 
성묘에 여신단 세움
 

마리쿠스 아우렐리우스

(161-180)
 
질병, 흉년을 기독교때문으로 봄
 
고문, 리용교회 베일교회 심한 핍박
 
우스티누스,

풀리카르푸스 순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폭악, 무도한자로 봄
 
입교금지 측령
 
이레네우스 오리게네스 순교
 

막시미누스 (235-228)
 
지진 사고로
 
유형
 
두 감독 금광노예로
 

디키우스(24=251)
 
국력쇠약원인
 
재산 몰수 악형
 
오리게네스 중형
 

바벨리아누스(235-260)
 
병, 흉년 원인
 
재산몰수, 예배 금지
 
키프리아누스 순교
 

디오클리아누스(284-)
 
참소로 인해
 
교회 파괴, 처형
 
교회파괴 가다리우스 순교
 

 

 

 


5. 사상적 공격

 


1) 루키아누스(Lucianus of Samosada)

(1) 120년 수리아 출생, 200년 헬라 혹은 애굽에서 죽다. 에피쿠로스 학파 소속

(2) 기독교인의 생홀과 풍습을 비방

(3) 저서-<페레그리누스의 죽음> (De Morte Peregrim) 180년경 출간

 


<내 용>

165년 올림피아 경기 때 키니크 학자 페레그리누스(Peregrini)가 불속에 투신 자살한 상황을 알리는 편지 형식의 소설이다.

 


①페레그리누스는 부모를 죽이고 간음한 자로 후에 예수 믿고 목사까지 되었다.

②악행이 탄로되어 투옥되었다. 그러나 성도들의 도움으로 출옥하다

③출옥후 우상의 제물을 먹다가 추방되어 키니크 학파에 가입

④명성을 내려다가 투신 자살한다

 


(4) 결과-오히려 더 잘 믿고 사랑하게 되었다.

 


2) 켈수서스(Celsus)

(1) 로마 혹은 알렉산드리아인이며 플라톤 학파에 속하면서 에피쿠로스 학설에 기우러짐

(2) 저서 <참말>로 기독교 공격. 여기에 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대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켈수스를 반박한다>는 책을 저술하여 반박함(오리게네스의 저서만 전해짐).

 


<내용>

켈수스는 이용할 수 있는 온갖 학설과 풍자 상식을 총동원하여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후세의 기독교 반대론자인 볼테르(Voltaire), 시트라우스가 사용한 말들이 켈수스의 저서에 나올 정도이다.

①그리스도의 신성 부인(동정녀 탄생 부인)

②천지 차조는 신화(헬라 신화보다 저금 우월하다)

③구약 부인(유대인만 사랑하였느냐)

④신의 계시가 있다고 하면 이는 신의 존엄을 저하시킨다.

⑤그리스도의 신성은 변화를 의미한다

⑥부활 신앙은 <벌레의 희망>과 같은 것이다.

⑦성경의 문장이 조잡하다.

 


3) 신 플라톤 학파(Neo-Platonism)

(1) 파생 원인

①기독교로 인하여 로마 재래 종교가 없어질까 하여 생김

②재래 철학 사상에 종교적 요소를 가미하여 신비 철학 구성에 성공

(2) 시조-암모니우스 삭카스(Ammonius Saccas, 243년에 죽다)

(3) 중요 학자

①플로티누스(Plotinus) ; 208년 애굽 출생. 269년 로마에서 죽다. 삭카스의 제자. / 페르시아                          원정에 종군, 동방 학문을 배움.

<학 설>

․내 안에 있는 하나님과 우주에 계신 하나님과의 조화에 도달하려고 힘쓰고 있다.

․우주 만상은 하나님의 출발로 이루어졌는데 3단계로 된다.

-마음(Spirit)

-영(Soul)

-물질(Body)

․사람이 하나님께 복귀하는 행정 덕(德)과 에로스(愛)로 엑시더스 현상에 이르러 하나님과 하나(合一)가 된다.

②포르피리우스(Porphyrius) ; 다신교의 옹호자로서 15권의 저서를 통해 기독교 공격

<학 설>

․신약과 구약의 모순을 밝혀내어 두 성경이 서로 같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사도끼리 분쟁했다.

․예수는 거짓말하였고 제자의 본이 되지 못하였다.

․제자의 사상이 일치되지 못함을 볼 때 그리스도의 신성 부인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교훈을 곡해하여 사족(蛇足)을 깨달았다

신 플라톤 학파가 철학으로서 종교를 대신하려는 시도는 실패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들의 실패 원인을 3가지로 지적하였다.

․교조(敎祖)가 없는 것

․어떻게 하면 축복과 평화를 영원히 유지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에 해답을 주지 못한 점

․사색하는 힘이 없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방법을 가지지 못한 점

 


6. 교부(敎父,Fathers)

 


1) 정의

(1) 사도들의 직계 제자

(2) 교리에 정통성을 가진 자

(3) 교리 발전에 역사적 중요 위치를 차지한 자

 


2) 구분

(1) 속(續)사도 교부(Apostolic Fathers)

(2) 변증가(Apologists)

(3) 헬라 교부(Greek Farthers)

(4) 라틴 교부(Latin Fathers)

 


7. 속(續)사도 교부(Apostoloc Fathers)

 


1) 이름과 저서가 같이 전해 오는 교부

 


(1) 로마의 클레멘스(Cemens of Rome)

①1세기말의 로마의 유명한 장로

②저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4분의 1을 구약 인용 / 질투말라, 겸손하라, 규칙지키          라 / 부활을 확신 / 감독, 집사 선거에 조심하라 /서로 사랑하라

 


         제2서신은 설교(2세기 후반 타인의 필적임)

 


(2) 이그나티우스(Ignatius)

①안디옥 감독으로 로마에서 맹수의 밥이 됨

②사상 ; 교회의 통일 / 감독의 권위/  순교자의 영광

③저서-로마로 호송 도중 7통의 서신 집필

       <에베소> <마그네시아>(Magnesia) <트라리아> <로마인에게>는 서머나에서 집필

       <빌라델비아> <서머나> <폴리카르푸스에게>는 드로아에서 집필

 


(3) 폴리카르푸스(Polycarp)

①서머나 교회 감독, 사도 요한의 제자, 이그나티우스의 친구

②55년에 순교

③저서<빌립보의 서신> ; 이그나티우스에 대한 친절 칭찬/ 바울 서신, 요한2서, 베드로서 인용

 

 

 

 


(4) 파피아스(Papias)

①브프리기아(브루기아) 감독으로 150년에 순교

②사도 요한의 제자인 듯

③저서 <주의 가르침의 설명> 5권 ; 사도와 사도의 제자에게 듣고 본 바를 기록 /유세비우스 교회사 속에 인용된 단편이 있음 / 천년왕국론

 


2) 저서만 전해지고 저자가 전해지지 않은 교부

 


(1) 헤르마스(Hermas)의 <목양자>(牧羊者), 롬16:14의 허마인듯

①미래 문학(未來文學)으로 천로 역정(天路歷程)과 비슷하다

②이신 득구(以信得救)보다 의무와 도덕을 강조

 


(2) <바나바서>

①히브리서와 비슷한 점이 많음

②성전 예배에 무식한 유대교를 반대하는 입장

 


(3) <디오그네투스에게 주는 편지>

①발신자, 수신자를 모름

②황제를 양해시키려는 변증서임

③내용 ; 기독교 예배와 생활의 진의 설명 /신자는 비국민인 근거가 없다 /박해는 신자들이 기           뻐한다 / 사상과 내용, 문장이 힘있고 풍부한 내용

 


(4) <12사도의 교훈>(Teaching of the Twelve Apostles Didache)

 


①신자의 생활과 습관을 교훈

②세례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실제적 교훈 기록

③1873년 콘스탄티노플리스 성내의 살렘 수도원에서 발견되었고 1883년에 출판됨.

 


8. 교부들의 신학

 


1) 기독론(인성을 믿으나 신성을 더 강조)

 


(1) 클레멘스(Clemens of Rome)-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엄한 홀이다.

 


(2) 이그나티우스(Ignatius)

①그리스도는 신이요 우리의 하나님이다

②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났다.

 


(3) 헤르마스(Hermas)-선재설(先在設) 주장

 


2) 3․1신 교리(희미한 듯하나 삼위일체 교리를 믿은 듯)

 


(1) 이그나티우스 ①신자는 건축재(돌)  ②십자가는 끌어올리는 기계 비유 ③성령은 밧줄

(2) 클레멘스-사도들은 임명받고, 예수 부활로 확신을 얻고, 하나님 말씀에 견고히 되고, 성경      의 보증을 얻고, 하나님나라가 임한다는 복음을 듣고 나아갔다.

 


3) 속죄론-주께서 생명의 길을 보이시고자 피 흘리시고, 회개하여 죄사함 받는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믿는 자들을 전능의 신께서 의롭게 하신다는 그 신앙으로 의를 얻는     다(의신득의 제창).

 


4) 천년설-재림이 멀리 않은 장래에 있다고 믿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천년간 이 땅에 왕 노릇 하신다고 설명하였다(재림천년왕국기대)

 


5) 이방과 구약 사상의 영향을 받아 윤리주의가 아직 농후하였다.

 


9. 변증가

 


1) 대표적 변증가들

 


(1) 유스티누스(Justinus)

①125년에 사마리아에서 출생, 166년에 죽다.

②신자된 동기-해변에서 산보할 때 노인이 나타나 구약을 주면서 이 책이 예수에 이르러 성취                되었다고 말하고 사라짐.

③저서; <대변증서> <소변증서><트리포(Trypho)와의 대화>

 


(2) 아리스티테스(Aristides, 아테네 사람)

①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글을 올려 기독교를 변증함(시내산에서 발견).

참 신의 성질을 설명 / 이교의 신화를 공격 / 기독신자의 풍성을 설명

 


(3) 콰드라투스(Guadratus)

①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변증서 제출-예수에게 병 고침받은 자 아직도 생존해 있다고 주장      (126년경)

 


(4) 타티아누스(Tatianus, 110-17)

①유스티누스의 제자로 로마에 거주

②저서 <헬라인에 대한 담론>, <디아텟사론(Diatessaron, 傳記라는 뜻)>

 


(5)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아테네 출생)

①저서 <기독교에 관한 사명>, <부활>에 관한 저서

 


(6) 멜리토(Melito)

①소아시아 사데 교회 감독

②헬라 신화 비판과 5,6종의 저서

 


(7) 라틴어 사용의 변증가들

①미누키우스 펠릭스(Minucius Gelix)-로마의 법률가, 저서<옥타비우스>

②아르노비우스(Arnobius)-다신교의 불합리성 공격

③락탄티우스(Lactantius)

저서 <하나님의 법칙> <완비된 변증론>

 


2) 변증의 정신과 내용

 


(1) 정신

①신자는 세계의 심령이다(심령이 육체에 충만한 것같이 세계 각처에 널리 있다. 그러나 세상    것이 아니다).

②육은 영을 미워하고 이것과 싸우기 좋아함은 영으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어 그런 것이 아니    고 자기를 정욕대로 향락을 쫓아 내려가는 것을 금하는 까닭이다.

 


(2) 내용

①신자들이 불공평한 재판을 받는 억울한 형편을 변호

  기독교는 어떤 것인가? /  신자는 어떠한 생활을 하느냐를 설명하여 오해를 풀고 비난과 박    해를 없이 하려함

②비난의 요점과 변증

<비난>

․기독신자는 무신론자

․세상에 별다른 왕국을 세우려함

․부도덕한 자

․예수는 요술쟁이

 


<변증>

․이교도들이 우상 섬기는데 비해 신론자라 할 수 있겠으나 사실 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

․신자는 신앙을 위해 순교한다. 이것은 세상 왕국을 세우려는 것이 아님을 증명

․예수의 도덕적 교훈을 인용하여 도덕적 탁월함을 설명

․예수는 신이요 요술쟁이가 아니며 예언 성취자라고 함

 


10. 그리이스 교부

 

 

 

1) 소아시아의 신학자

 


이 시기는 대략 주후 170년경으로 변증가 시대의 끝으로 삼는다. 이들은 사도 요한의 계승자이며 성경 해석에 중점을 두고 이단에 대한 태도를 취하였다.

 


(1) 이레네우스(Irenaeus, 115-119경 출생)

①소아시아 신학자로 고올(Gaul) 지방 감독

②온유, 준수, 박학자

③리용(Lyon)시에 전도하여 전 시민이 거의 신자가 됨.

④그의 신학 ; 사도 이래의 전설을 존중하고 신앙의 표준을 존중함.

              신  관 - 신은 자유 의지로 창조한 유일신이다. /신의 피조물인 우주는 선하다.

              기독관 - 그리스도는 신이 자기를 표현한 로고스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아버                          지와 함께 계신다. /출생 방법은 모른다.

              성령관 - 성자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 포함되는 것이다 /성자에게 복속의 지                          위가 있다.

              특  색 -그리스도는 교사가 아니요 구주이다. 사람의 경험을 체험하면서 사람                         이 하나님께 드릴 충성을 한 몸에 지고 대신했다.

 


(2) 힙폴리투스(Hippolitus)

①이레네우스의 제자로 박학자

②로마 테베르(Tiber)강 하류 포르투스 로마누스가 임지라는 주장도 있다.

③사르지니아 섬에 추방당해 순교한 듯 하다

④1551년 티베르강 한 섬의 순교자 사당 자리에서 그의 이름이 세겨진 상(像)을 발견

  1842년 프랑스 학자 빌맹(Villemain)이 터어키 아소스산 수도원에서 그의 저서 <모든 이단을    배척함> (Against all Heresies)을 발견

 


2) 알렉산드리아 학파(Alexandrian School)

 


(1) 판테누스(Pantaenus)

①스토아(Stoics) 철학을 교육받은 자

②열심가로 인도에서 전도

 


(2) 클레멘스(Glavius Clemens)

①판테누스 문하에서 수학, 189년부터 12년간 신학 교수

②202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황제박해로 안디옥 피난, 저술과 강론으로 교회 봉사

③성격이 온순, 명상을 좋아함

④213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죽음

⑤저서  : <그리이스인에게 주는 권면(Exhortation to the Greek)>

          <교육자(Paedagogue)>

          <잡설(Stromata)>

 


(3) 오리게네스(Origenes)

<생애>

①185년 알렉산드리아 출생

②어릴 때 신앙독실, 총명, 부지런함.

③아버지는 202년 대박해시 순교, 모친과 6명의 자매 위해 필경과 학생 가르침.

④18세부터 클레멘스 후계로 신학 교수가 됨

⑤청년시에 수술하고 고자됨(천국위해)

⑥명성이 높아지자 시기하여 군인들이 감시하고 그 문하생 7명 사망

⑦211년부터 로마, 아라비아, 팔레스티나, 그리이스 등지로 전도 여행

⑧이단설 주장한다고 추방되어 가이샤라에서 신학교 교장이 됨

⑨244년 옥중에서 사망

⑩저서-6천권이라고 전해짐

<신학>

①기독교 진리를 철학으로 해석하고 조화시키려 함

②육신․정신․영이 있는 것처럼 성경에도 문의적․도의적․심령적 3종이 있다함

③父와 子는 하나이다. 동질이며 같은 인격이다.

④영혼 선재설(先在說) 주장

⑤내세관은 연옥설과 지옥유한설 주장

⑥우주관은 플라톤의 영향을 입어 Idea 세계와 물질 세계가 있음을 주장

⑦계시관은 성경을 온유적으로 해석

⑧구원관은 만인구원설 주장

<요약>  극기 생활(천국위해 고자, 청년 시절 금주)

         업적 많음(기독교 학자,. 변증가, 저술가)

 


(3) 알렉산드리아 신학과정

 


①과학, 기하학, 생리학, 천문학

②철학-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책 연구

③논리학 연구

④신학 연구

 


11. 라틴 교부

 


1) 테르톨리아누스(Tertullian) (62년 합동 강도사)

 


(1) 160년경 카르타고에서 아버지는 백부장, 어머니는 이교도인 가정에서 출생, 40세에 신자      가 됨

(2) 그의 신앙관

①시조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는 죄악론(罪惡論).

②영혼은 부모에게서 유전 받았다는 유전설을 취함

③죄도 유전 받은 고로 죄가 육체에 있지 않다고 주장

④그리스도의 사업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포괄했다.

⑤삼일신 사상(三一神思想) 차시자

⑥유아 세례 반대

<요약> ․삼위일체(三位一體)란 말 처음 사용  ․순종치 않으므로 신인불화론(神人不和論) 주장

 


2) 키프리아누스(Cyprian) (63년 통합 목사, 73년 합동 강도사)

(1) 200년에 칼타고의 부잣집에서 출생, 수사학, 문학, 법학 교사가 됨

(2) 248년 카르타고 교회 감독이 됨

(3) 250년 박해로 사막에 피난가서 서신으로 교회를 격려.

(4) 그의 교회론

①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

②교회를 버린 자는 외인(外人)이고, 속인(俗人)이며 적이다

③교회를 어머니라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수 없다

④노아 방주 밖의 사람이 멸망 받음같이 교회 밖의 사람은 멸망당함

⑤교회는 단일, 즉 카톨릭 교회 외에 다른 교회는 있을 수 없다.

⑥교회는 감독에 의해 세워졌으니 감독 없으면 교회도 없다

⑦분리한 교회나 이단자의 세례는 무효이다.

⑧교회 통일을 주장한 카톨릭 교회 사상의 시조

<요약> ․교회만이 구원이 있고 감독권을 높임. 교회를 방주 등으로 표현

        ․최초의 카톨릭 성직제도 계급 지도지

<교부들의 사상 비교표> 이 름 연 대 활 동 지 저 서 순 교

 

 


이름
 
연대
 
활동
 
저서
 
순교
 

클레멘스
 
92-101
 
로마감독,여러교회 화합에 힘씀
 
클레멘스 제2서 설교집
 
 
 

이그나티우스
 
125
 
안디옥 감독
 
7통의 서신
 
 
 

폴리가르푸스
 
155
 
서머나 감독
 
빌립보교회 송서
 
화형
 

파피아스
 
150
 
히에라폴리스감독
 
주의교훈설명집5책
 
순교
 

헤르마스
 
140
 
로마감독 비오의 제자
 
목양자, 말세 기적문학
 
 
 

유스티아누스
 
100-105
 
철학자. 철학적으로 서방 전도
 
대 변증서, 소 변증서 트리포와 대화
 
순교
 

타티아누스
 
110-172
 
로마거주
 
헬라인에대한 담론 예수전
 
 
 

이레네우스
 
115-202
 
폴리카르푸스 제자 갈리아 선교
 
라틴신학 공헌, “이단배척함”
 
순교
 

클레멘스
 
213
 
알렉산드리아계/ 안디옥 감독
 
그리스도인에게 권면 교육자

잡설 찬송가
 
박해받음
 

오리게네스
 
185-254
 
아라비아 전도, 가이사랴 신학교설립
 
헥사플라 교리상 변증적 저술
 
순교
 

터툴리아누스
 
160-240
 
북 아프리카 카타르 감독
 
변증론 이단금제 논문 다수
 
 
 

키프리아누스
 
200-258
 
카르타고 감독
 
교회일치 81서신, 교회규칙조직
 
순교
 

 

 

 


12. 이단과 분파들

 


1) 유대교적 이단(68년 합동 강도사)

 


(1) 에비온 파(Ebionites․가난한 자)

①바울 교리의 배척(마태 복음만 사용한 듯함)

②율법고수-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금식/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

③기독관(觀) ;. 동정녀 탄생 부인 /. 인성만 주장 /. 수세시 직분 받음을 거부/ . 예수가 하나                 님의 아들 됨

 


(2) 엘카이파(Elkesaites)

①예수는 아담이 다시 사람이 되어 나왔고 앞으로도 다시 육신을 입을 수 있다고 주장

②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금식한다

 


(3) 그노시스파(Gnosticism)

①말뜻(語意)-헬라어(지식․Gnosis)에서 나옴. 지식이란 신비적 초자연 지식이요 보통 지식이     아니다.

②당시 유행하는 점성술, 마술, 철학, 페르시아의 이원적 우주론(二元論 宇宙論)의 혼합체에 기    독교 교리를 혼합해서 일종의 종교 철학을 구성하려고 한 것이다.

③그들의 새 교리 ;. 구약에서 유대교적 오소를 거절할 것 /. 예수의 육체적 고난, 부활 등의     실재를 부인 /. 금욕과 방랑 생활을 시인

④그들이 해결하려는 문제

.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에 왜 죄가 있고 재해가 있느냐?

. 어떻게 하면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 신․구약의 관계에 관한 것

⑤여기에 대한 이들의 해명

. 신으로 유출된 아이온(Aeon-영원히 존재하는 자라는 뜻)이 신에게서 멀어져 최하급에 달함

. 구약 성경의 신은 하급신이다.

. 그리스도는 최고 아이온이며 가현(假現)하였다.

. 구원은 물질의 구속을 해탈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감이니 소수이다.

. 속죄는 지식을 통해 완수한다.

. 인류는 선악의 혼합으로 삼분(三分)할 수 있다.

․ 심령적 인간 /정신적 인간

 


2) 교회의 분파

 


(1) 몬타누스파(Montanism) (62년, 67년 합동 강도사)

①기원-156년 프리기아(브루기아)의 몬타누스에 의해 시작됨(테르툴리아누스 분파)

②교리-구교와 일치함(성경은 전부 정경)

③목적-원시 기독교의 부흥

. 신앙보다 지식을 강조하는 사상을 반대(그노시스주의 반대)

. 엄격한 규율을 실시(千年王國說)

. 교회의 계급 제도를 반대(만인 제사주의)

. 금식과 고행을 장려, 재혼 금지, 금욕주의

. 세례 후 범죄는 무서운 것이라고 강조

 


(2) 노바티아누스파(Novatianists)

①분파된 원인

. 데키우스황제 시대(249-251)에 박해로 변절자가 많았는데 이들이 다시 교회로 들어오려할     때 어떻게 처리하느냐로 의견이 갈라졌다.

. 로마 교회와 동방 및 서방 감독들과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관대히 대함

. 노바티아누스는 엄중히 계율을 지키게 할 것을 강조

. 로마 감독들은 여러 차례 회합하고 노바티아누스를 파면하고 변절자들은 적당히 회개시키고    받아드리기로 결정

②이들의 주장

. 신앙을 배반한 치명적인 범죄자는 교회에서 받아드릴수 없다.

. 그외 중죄는 우상 숭배, 살인, 음란 등이다.

. 죄목-․분파주의자로 교회 질서 문란, 분열 조성  / 이단 주장

. 이 분파는 7세기에 가서 자취를 감춤

 


(3) 도나투스파(Donatism)

①파생 원인과 주장

. 박해시 성경을 버린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강경론 때문

. 범죄한 자가 속한 교회는 하나님이 떠났으니 제명하라

. 범죄한 교사에게 받은 세례는 무효라고 주장

②분파 과정

. 카르타고에서는 두파로 분열되고 두 감독이 세워지고 북아프리카는 분란이 계속됨

.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처음에 이단으로 규정했다가 33년에는 태도가 변하여 신앙과 예배의     자유 법령을 공포하고 카톨릭교회에는 관용 정책을 쓰도록 권유함.

. 330년에는 270명의 감독이 이 파에 속함

 


③교리와 주장

. 엄격한 교회의 규칙과 교인의 순결을 주장

. 세속적인 교직자를 배격함

. 교회 일에 세속 사람의 간섭 불허

. 감독 정치를 채택

. 세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

. 개인주의로서 편협, 완고, 광신 상태로 흘러감

 


3) 마니교

 


로마제국 동방에서 3세기에 일어난 종교로서 그노시스파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그 근원이 동방이며, 서방으로 흘러와서 기독교와 접촉하는 기독교적 요소를 흡수하였다.

 


(1) 교조 마니(Mani, 216-276)

①페르시아 귀족의 아들로 19-24세 때 계시를 받음

②인도와 중국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많은 신도를 얻음

③페르시아 궁정에서 우대했으나 반대자의 미움으로 십자가에 달려 가죽 벗겨 죽임을 당함

 


(2) 교리 / 페르시아의 이원론(二元論)을 근거로 이 세계는 광명과 흑암의 투쟁장이라고 함

①인류는 악마가 광명국(光明國)에 친입하므로 생겼다.

②그러므로 인생이 돌아갈 곳은 해탈이다

③해탈하기 위해서는 금욕 생활을 하여야 한다.

. 입의 봉인-육식, 망언을 말라

. 손의 봉인-모든 악한 일을 행치 말라

. 가슴의 봉인-정욕과 악한 생각을 말라

 


(3) 조직 : 마니-12사도-70감독-교사-학생

(4) 전파

메소포타미아, 수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 등지에서 13세기까지 계속되었다.

 


13. 성경과 신조(信條)

 


1) 성경

 


(1) 성경의 집성(集成)

①초기 주일 예배시에 예수의 언행록(言行錄)을 읽음

②160년 전후 사복음서 종합 집성

③마르키온은 사도 서신(바울의 10서신)을 경전의 일부로 함

④테르툴리아누스 시대에는 이미 신약의 집성이 완료됨

 


(2) 무라토리 단편

①1740년에 이탈리아의 역사가 무라토리(Muratori)가 밀라노의 도서관에서 발견하였다.

②4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의 13개 서신, 유다서, 요한2서와 요한 계시록

③2세기 반 경의 것으로 추정

 


(3) 페시토(Peshito)

①2세기 중엽 이전에 에뎃사에서 만들어진 시리아(수리아) 어역

②4복음, 사도행전, 바울의 13서신, 히브리서, 야고보, 베드로 후서, 요한 1서가 포함

③유다서, 베드로 전서, 요한2 3서가 추가됨

④이레네우스는 야고보, 유다서, 베드로 후서, 요한3서를 인용치 않음

⑤클레멘스는 빌레몬, 요한2 3서, 베드로 후서, 야고보서를 인용하지 않음

⑥테르툴리아누스는 야고보, 베드로 후서, 요한2 3서를 인용하지 않음.

 


<요약>

 


정경(Canon)에 대하여

*신구약 66권이 정경

*희랍어 '카논'은 <곧은 장대> <지팡이>라는 뜻

*성경에는 <규례> <분량>이라는 뜻으로 사용됨(갈6:13,15,16, 고전10:13,15,16)

*교회가 Canon을 정경이란 뜻으로 시작한 것은 이 말이 애초부터 사랑의 신앙 행위를 규정하   는 원리라는 관념을 갖고 사용함

*신약 성경도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까지 쓰여지고 교부들의 서적에도 이 관념을 갖고 사용함

*Canon은 <표준> <근본원리> <근본적인 원리를 기록한 책의 목록>을 뜻함

*결정 시기-동방 교회가 382년 로마 전체 회의에서 정경 목록 작성, 295년 칼타고 회의에서   27권과 그 목차가 확정됨

*결정 기준 ․역사적 기준:사도적 권위가 있는가?

           ․내적 기준:그 감화력이 사도들의 것과 동일한가?

 


2) 사도신경

(1) 12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신앙의 표준으로 작성하여 베드로가 로마에 가지고 갔다는 전설에      의하여 <사도신경>이라고 함.

(2) 당시 수세(水洗) 후보자의 신앙 고백으로서 오랫 동안 사용되어 왔다(오늘의 것과 같지 않      음).

(3) 아리우스 등 이단이 일어남으로 정통 교리를 표시할 만한 문자를 넣어 381년에 전문이 완      성된 듯하다(콘스타티 노폴리스 회의)

 

 

 

14. 교회 정치와 역원

 


1) 교회 정치

 


(1) 교회 주권

①대도시 교회로 집중-탁월한 지도자와 경제적 풍부함으로 인하여

②교회는 구원의 조직체-교회 외에는 구원이 없다함

③감독의 권위-감독 없이는 교회도 없다하여 정권을 장악

 


(2) 지방 대회

①도시를 중심하여 지방 대회가 열림

②4세기 경에는 카르타고, 알렉산드리아, 로마 안디옥, 갈라디아, 엘베리스(Elberis), 아를        (Arles)등지에서 회집

③의장은 대부분 대도시 감독이 되고 간혹 연장자가 됨

 


2) 역원

 


(1) 직제

①초기-감독, 장로

②3세기 중엽-감독 1명, 장로단, 집사국

③3세기 후반-(안수직)감독, 장로단, 집사(비집사단), 부집사, 시승, 악마 조복사, 독경사, 수위    등

 


(2) 자격

①심신이 건전하고 도덕심이 견고한 자

②자기 교회에서 피선된 자

③30세 이상 / 단, 병상에서 수세자, 관직자, 군직자, 재혼자, 노예, 스스로 된 불구자, 수세                  후 중범자는 될 수 없음.

 


(3) 임직

①감독-지방 교회 평신도에 의해 선출-3명의 인근 감독이 안수

②장로 집사-교회와 교직자에 의해 선출-감독이 안수

 


(4) 권한

①대감독-그 지방 전 감독을 지휘하고 안수례를 행하고 2년 1차 종교 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이            됨

②목사-하나님과 사람의 중재자로 군림

③감독-교회 정치의 수반, 행정 관리, 집례, 설교, 종교회의 참석

④장로-통상예배 관리, 안수례 행함, 신도 교육, 종교회에서 감독의 상담 역할

 


15. 예배와 예전(禮典)

 


1) 예배

 


(1) 예배 장소

①초기는 개인집, 셋집, 회당

②200년 후는 특별한 건물에서 예배

③회당은 평행사변형으로 본당과 목사의 자리인 강단으로 설비

 


(2) 예배 내용(주일 회집)

①찬송-시편과 성경중 이사야 6장, 눅1:46-2:29, 마21:9를 노래함

②성경 낭독-사도가 쓴 예수의 언행록, 선지자의 글

③설교-회장이 간단한 말로 즉석 설교, 후에는 준비하여 설교함

④기도-총기립함

⑤성찬식-떡, 포도주, 물을 가지고 회장이 나누어 줌. 결석자는 집사를 통해 보내줌

⑥헌금-회장이 보관하여 고아, 과부, 병자, 곤궁한 자를 구제한다.

 


2) 예전(禮典)

 


(1) 세례

①수세전-기도하고 자주 금식(2년간)

②문답시-사죄에 관한 원칙을 알게 하고 구하게 함

③세례식-세번 침례함

④수세 후-일주일간 목욕 안함

⑤축일, 부활절-50일간 흰 옷 입음

 


(2) 유아 세례

①찬성-이레네우스, 키프리아누스

  반대-테르툴리아누스

②라틴 교회는 전반적으로 시행

 


(3) 부활절

 


①동방-유대인의 유월절(니산월 14일)

②서방-춘분후 첫 만월 다음 주일

③이를 통일하기 위해 158년 폴리가르푸스가 로마에 가서 타협하려 하였으나 에베소 감독과     이레오가 반대

④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통일

 


(4) 렌트(Lent)

①부활절전 1주간(고난주간)근신

②40시간 무덤에 머문 시간 동안 금식

③40일간 렌트(대제)로 지킴

④전야 철야, 세례 베품

 


(5) 승천일과 오순절

①부활 후 40일째는 승천일

②부활 후 50일째는 오순절

 


(6) 주현절(主顯節)

성탄절이 없을 때 예수의 세례와 그 출현을 축하하는 날임

 


16. 생활과 풍속

 


1) 박애와 자선

 


(1) 박해가 심하므로 성도는 단결

(2) 로마 감독 우르바누스 1세(223-230)는 걸인 없음을 확인

(3) 시리아(수리아), 아라비아, 가바도기아까지 원조

(4) 카르타고 질병시에 시체를 처리하여 전염병을 방지

 


2) 정결한 생활

 


(1)결혼은 인정하나 독신 남녀는 존경

(2) 이혼 후 재혼하지 못하며 재혼자는 파문

(3) 교직자는 장립 후에 결혼을 피할 것

3) 은둔 생활과 금식(수, 금요일은 아침 식사를 하지 않음)

4) 순교자와 수절자 숭배

5) 장례식

(1) 화장하지 않음

(2) 과도히 슬퍼하지 않음

(3) 복상기 상복은 일반과 같음

(4) 죽은 자의 일용 기구, 장식품은 묘문에 장식 Ⅲ. 니케아 회의 시대(313-590)

이 시대는 A.D.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즉위에서부터 590년 그레고리우스 1세의 즉위까지를 말한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604년 그레고리우스 1세가 죽은 때까지를 경계로 삼는 사람도 있다. 그는 라틴 교부의 마지막 사람이며 첫 교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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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중세사
 
중세사

 


1. 서 론

 


1) 기간 

   313-590(최초의 세계적인 회합인 니케아 회의가 있어으므로 이렇게 부름)


2) 교리 논쟁

   박해 중에는 신앙 뿐이었다. 그러나 박해가 끝나면서 교리 문제가 등장하고 신학자들이 많     이 나왔으며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이다.


3) 세계 대회

   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세계 대회가 소집되었고 근본 교리가 재정되었다.

   교회 정치 분야에는 암브로시우스, 설교가로는 크리소스토모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등이 유명하다.


4) 교권 증진

   정치력이 쇠해 갈수록 복음 운동이 일어났다. 교회 지도자의 세력이 점점 강대해졌고, 로마     교황 세력이 강대해져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관직까지 소유하였다.


5) 수도원의 발전

   관직을 지킬 수록 교회는 속화되었고 여기에 반작용으로 금욕주의, 둔세주의가 성행하여 수     도원이 생겼다.


2.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1) 콘스탄티누스 대제 약사

(1) 288년 나이사스에서 출생, 아버지는 서로마 황제 클로루스(독신자), 어머니는 헬레나          (Helena)

(2) 서방의 부제(副帝)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의 아들로 용맹하고 싸움 잘함

(3) 부왕 사망후 서방의 황제 입후보자가 6명이었으나 막센티우스(Maxentius)와 싸워 이김

(4) 동방의 황제 리키니우스의 누이를 황후로 삼고 두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      를 공인함

(5) 동방 황제가 이교를 도와줌으로 싸워서 로마 제국을 통일함

(6) 337년 65세때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받고, 오순절날 사망.


2) 입신(入信) 동기

(1) 막센티우스와 로마 근교 밀위아 다리에서 전쟁할 때 태양위에 십자가와 <이것으로 이기       라>는 글자를 모든 군사들이 봄

(2) 그날 밤 꿈에 예수가 나타나 십자가를 보이고 이것으로 기장을 삼으로 하므로 그대로 하여      승리함

(3) 믿은 후에도 죄인이라고 세례받지 않다가 죽음에 이르러 세례받음.


3) 업적

(1) 교회 보호

①외부적 감독이라 자칭하고 궁중에서 연설함

②유세비우스를 궁중에 들이고 우대함

③이단을 멸하고 교회 통일을 도모


(2) 법률 개정

①고래(古來) 풍속 개량/

. 십자가형 폐지/

. 검투 폐지 /

. 축첩 제도 엄벌, 이혼에 제한을 둠

. 여자에게 토지 이외의 소유권 인정/

. 죄인 이마에 화인(火印) 금함

②교회의 법률을 국가가 공인/

. 교인간의 쟁투에 대한 교직자의 판결은 법률상 유효 /

. 대의회(大議會) 결의는 국가의 법률이 됨 /

. 교회의 법률에 대한 불가침 /

. 사죄, 감형 요구권을 교직자에게 부여함

③기독교를 위한 특별 법령

. 주일 휴업(법정, 군대)

. 교직자는 세금과 병역 의무 면제

. 박해시 몰수한 재산 반환

. 교회 재산 관리법 제정, 기부금 제도 공인

. 타종교의 잔인성과 불결한 행동을 금함


(3) 천도(遷都)


①3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

②이유

. 야만인과 페르시아인 제어 목적

. 새로운 기독교 수도 형성 목적

. 자기이름을 후세에 남기려고


(4) 결정-왕위를 빼앗으려 한다고 처, 자, 조카까지 살해


(5) 후계자

①세 왕자에게 제국을 분할

. 장남-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 차남-콘스탄스(Constans)

. 삼남-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②차남은 형을 죽이고 동생과 함께 나라를 차지함

③차남은 10년 후 자객에게 암살당함

④천하는 삼남에게 통일됨


<요약>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업적

․우상 숭배 금지

․이교 전당을 몰수하여 교회에 줌

․관직은 기독교 신자라야 함

․크게 부패하기 전에 일대 반동이 일어남


3. 니케아(Nicaea) 회의


1) 시일과 소집자 / 325년 5-6월, 콘스탄티누스 황제

2) 소집 방법

(1) 각지 감독에게 안내장을 보냄

(2) 각 감독은 장로 2명, 수행원 3명의 대동을 허락함

(3) 관용 주차 편의를 보아주고 체재비는 국고에서 부담

3) 소집 동기

(1) 부활절 일자 문제(동방은 유월절을 지키고, 서방은 주일을 중시했다.)

(2) 아리우스(Arius)설 때문에 교회가 분열될까 염려하여

①아리우스(Arius)

. 리비아인(현, 트리포리)

. 루키아누스(Lucianus-312년경 죽음)에게 사사(루키아누스는 당대의 일류 학자로 성경 해석    에 통달하였음)

. 알렉산드리아 장로로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음

. 키가 크고, 몸은 약하나 말이 명쾌한 이론가

. 열정적이며 금욕 생활을 통해 추종자가 많음.

②아리우스의 학설(그리스도관)

.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다. 참 신이 아니고, 같은 성품, 동격(同格)도 아니며 오직 은혜를 주어    서 세계 창조의 중개가 그리스도의 본분이다.

. 악을 택하셨으면 악행할 수 있었다. 선행함으로 상급을 얻는다.

③사건의 발달

. 감독 알렉산드로스가 삼일신(三一神)의 현현을 가르칠 때 장로인 아리우스가 이를 공격함.

. 320년 알렉산드리아 지방 대회에서 아리우스와 그를 찬성하는 애굽 감독들을 파면함

. 그 세력이 점점 확대되고, 각지로 다니면서 반대 연설을 함. 당시 유명한 니코메디아 감독의  . 동방에는 아리우스 설이 유포됨

. 황제는 스페인 감독 호지우스(Hosius)로 조정케 했으나 성공치 못하므로 이 문제 해결을 위    하여 회의를 소집함.


4) 회 원


(1) 유세비우스는 250명, 아타나시우스는 318명으로 기록 (아마 계산한 시일이 다르므로 차이      가 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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