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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특강] 기도란 무엇인가?

 

 

 


 1장 :기도훈련  기도란 무엇인가? 

 

첫째. 영혼의 호홉 (영적 호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실 때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마21;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인 성전을 “기도하는 집”, 기도하는 장소로 알려지기를 원하셨음. 그런데 이 말씀에 더하여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고전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인의 몸이 바로 성전이라고 가르쳐 주신다.

(엡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라는 말씀은 바로 성도들이,  곧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확고히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들 자신이 바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요,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므로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성전인 우리의 육체가 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쉬지 않고 호홉 하듯 기도도 쉬지 않아야.

 

둘째.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하는 것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과 아담이 대화를 하셨다.

그러나 아담이 불순종 하므로 이 교제 관계가 상실 되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했고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과 대화가 끊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했고 그 분과 대화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준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대화가 가능함을 밝혀주셨다.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골2;13)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했다.

(요1서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과의 사귐은, 즉 교제는 죄로 파괴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회복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하심과 대화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모세가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위대한 것은 하나님과 친구같이 대화 하셨기 때문입니다..

(출33;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대화는 모세에게만 가능하고 우리 인간에게는 불가능 한 것인가?

(요15;14-15)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모세가 하나님과 가졌던 친구의 관계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이다.


셋째. 영적 전쟁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영적인 전투를 수행하는 것임을 잘 알았던 인물이다.

(시103;4)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다.

단지 기도했을 때 기도하는 자신을 괴롭히는 적들의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는 사건을 체험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시109;17-19)

기도는 세상 적 시각에서 볼 때는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도자의 우편에서 적들을 깨뜨리시고 구원의 팔을 내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도 자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기도하기 전부터 철저히 자신을 포기하는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시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다. 고 다윗은 고백하고 있음.

 

바울 사도는,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성도들이 쓸 수 있도록 허락하신 영적 은혜라고 합니다.

(막9;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귀신의 여러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빌3;8)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

자신의 능력, 명예, 지혜, 경험, 방법, 철학 등에 대하여 철저히 자기 포기가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기도의 사람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음.


 넷째. 믿음으로 구하는(부르짖음) 것이다.

기도는 자기자신을 부인하고 창조주이시며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긍정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 적이든 특별하고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하나님을 찾게된다.

모세의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에 찬 부르짖음은 결국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다.

(출3;7-8)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구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에...이르려 하노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외치는 부르짖음은 은혜를 체험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시39;12)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 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 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시61;1)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부르짖는 자들은 제사장이나 지체 높은 자들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라도 기도할 때 응답을 받게된다.,

(눅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하나님은 언제나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아뢰며 기도하는 자들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신다.


다섯째.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체험하는 길

기도는 사람의 뜻을 하나님께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최선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마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느니라.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우리를 향하신 계획과 뜻을 성취시키시고 계시는 분이다.

(사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결국 기도는 연약한 사람의 뜻을 하나님께 알릴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계획 하시는 의도와 언약의 약속을 체험하는 최선의 길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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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기예배 ]  부활주일예배  

 
 


 나는 왜 예수부활을 믿는가?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1.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1)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맹목적(盲目的)으로 믿지 않았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맹목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의심하고, 충분히 불신하고, 충분히 거리를 두고 예수의 부활을 검토한 뒤에 믿기 시작한 것이다. 사기꾼들은 처음부터 믿음을 주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제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부활의 날 아침 신문 속보에 실린 1면 기사는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아다닌 사람들 이야기’가 정작 부활하신 주님보다 더 많이 다루어졌다. 부활 아침에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았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찾지는 않았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 16:6).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와서 제자들에게 이야기 했을 때 마가복음 16:11은 이렇게 반응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듣고도 믿지 않았다. 누가복음 24:11은 좀 더 강하게 묘사한다.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 심지어 마태복음 28:17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말씀을 하실 때의 반응도 보여 준다.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제자들은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 이야기나 덥석 믿어버리는 맹목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어리석은 촌뜨기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부활에 목숨을 건 제자들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도 나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2)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신앙을 날조(捏造)하지 않았다.

  ‘날조’란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조작하는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완전히 날조하여 퍼트리려고 작정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처 실패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검찰이 론스타 회사의 불법을 조사하기 위해 700상자 분량의 서류를 검토한 적이 있다. 불법을 저지르려면 철저하게 잘못을 감춰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위해서 어떤 안전장치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부활 사건을 보호하려는 어떤 인간적인 시도도 하지 않았다. 부활을 음모하려면 모든 제자들이 모여서 입을 맞추고, 모든 사건 순서와 모든 내용을 똑같이 증언해야 하며, 부활에 대한 대단한 확신도 보여주어야 하고, 부활에 대한 모든 증언이 일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성경은 지난 수천 년 동안에 오류를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한 번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왜? 부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부활 사건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꾸밀 필요가 없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류나 인간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사건이 오류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도 잡혀가 죽을 까봐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부활신앙을 믿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같았다. 얼마나 겁이 났던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주변에는 요한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 달아났던 제자들이다.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례를 치른 것은 의외의 인물들이다. 예수 믿는 신앙을 감춰왔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서서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런 정황으로 보건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꾸미거나 부활을 확신하는 척하거나 목숨을 걸고 군인들이 지키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보기엔 너무 무리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예수 믿는 신앙을 후회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끝이 났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을 듣고 오히려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마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는 실패한 사업가와 같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황우석 박사의 추종자들만도 못했다. 목숨을 건 제자도 없고, 나서서 데모하는 제자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위하여 어떤 인위적인 시도조차도 할 수 없었을 만큼 부활을 믿지 않았던 자들이다.

  

3) 예수 부활은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증언되었다.

  예수님이 처음 태어나셨을 때 그의 증인은 목동들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목격하고 전한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목동이나 여성들은 1세기 유대사회에서 별 볼일 없는 그룹이다. 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증언으로 채택되지도 않는다. 만일 사람들을 믿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좀 더 그럴싸한 증인을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부활소식을 전하게 하려고 초대교회는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서 사기극(詐欺劇)을 연출할 필요가 없었다. 하찮은 여인들의 증언이야 말로 초대교회가 부활을 날조하지 않았다는 좋은 증거다. 노예해방의 전기를 가져온 엉클 톰의 이야기를 쓴 사람을 만났을 때 링컨은 놀랐다. 이렇게 키도 작은 여성이란 사실에. 부활의 증인은 위대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이면 족한 것이다.

  

  4) 예수 부활 사건 기록은 수정되거나 보완되지 않았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음모나 날조로 부활이야기가 생겼다면 시간이 흘러 부활 이야기는 좀 더 완벽한 시나리오로 고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교회 한만오 목사님이 미국에서 논문 초고를 제출하면서 지도교수에게 물었다. “이 논문이 지금 어느 정도 평가를 받겠습니까?” 슈미트 박사는 말하기를 “이 논문은 B급이라”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한만오 목사님이 실망하여 내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 어떡하면 좋지요? 내 논문이 B밖에 안 된데요.”

  내가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격려해 드렸다. “목사님, 논문 초고(first draft)를 내면서 B라면 아주 잘한 겁니다. 논문 수정을 한 번 거치면 B가 B+이 되고, 두 번 거치면 B+이 A-가 되는 겁니다.  졸업할 때까지 논문 방어를 하고 나서 한 번 더 수정하면  A-가 A가 됩니다. 틀림없이 A 받으실 겁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부활 점수를 A로 받기 위해 박사 논문을 수정하듯 손대지 않았다. 수정할 필요도 없다. 성경은 누구의 변호도 필요치 않는다.

 

  데이빗 스티브스는 1957년 공군 중위로 공군 훈련 제트기를 타고 훈련받다가 비행기가 추락, 실종 된지 54일 만에 캘리포니아 주 시에라 산중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이미 시종 사망 처리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스티브스가 말하는 것처럼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찾지 못해 사건 조작 혐의로 강제 전역 당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뒤에 그 비행기 잔해가 캠프 하던 보이스카우트 소년들에게 발견되어 20년 만에 그의 이야기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마치 부활이 조작이라고 말하도록 만들게 되지 않을까? 그의 청중을 위해 예수님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고 수정하고 싶지 않은가?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왜 실망하여 예루살렘을 떠나려했고, 그들은 예수님이 대화에 끼어들어 한 동안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뭔가 부족한 듯 보이는 이 이야기를 좀 더 완벽하게 수정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도무지 변증하거나 잘 보이려고 애쓰거나, 보다 완벽한 구성을 해서 제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부활 사건을 경험했던 충격 그대로 우리에게 기록하여 전해준다.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2. 나는 부활의 역사적(歷史的) 사실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프랑스의 한 신문사가 세계의 저명인사 100명에게 ‘지구의 파멸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안전하게 반출해야 할 지구상의 보물이 무엇이냐?’고 설문조사를 했다. 2위는 인간예술의 극치로 평가받는 미로의 비너스상이다. 1위는 무엇일까? 폭 1m, 길이 4m 20cm인 세마포,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하찮은 삼베 수의천이 인류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었다. 수년 전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 화재가 일어나 완전히 전소되었을 때 그 역사적 성당 안에 수많은 보물들이 불에 타 한 줌 재가 되어버렸다. 그 당시 가장 큰 관심은 토리노 성당 안에 있던 세마포였다. 화재 신고를 받은 소방대원들은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 3층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트린 뒤 그 세마포가 담긴 상자를 안고 나왔다. 왜 세마포롤 첫 번째 보물로 여기고, 소방관은 자기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면서도 세마포를 가지고 나왔을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라”(마 28:6). 

 무덤은 비었고, 수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요한복음 20:3-08을 보면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수의는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처럼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향유를 바르고,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던 바로 그 모양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1) 빈 무덤과 빈 수의는 부활의 큰 증거다.

  2) 유대 지도자들은 부활에 관한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3) 유대 종교와 로마의 통치 속에서 기독교가 탄생했다.

  4) 주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시작한 것은 부활의 역사적 부산물이다.

 

3. 나는 부활 신앙을 인해 변화된 사람들 때문에 예수부활을 믿는다.

 

  의심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하면 쉽게 믿어지겠는가? 믿기 어려워서, 믿을 수 없어서 고민한 사람들이 많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누가 돌을 치웠는가??(Who Moved the Stone?)이라는 책을 쓴 영국의 저널리스트 프랭크 모리슨이다. 모리슨의 의도는 부활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려던 것이었는데 쓰다 보니 결론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영국의 두 젊은 무신론 변호사 길버트 웨스트(Gilbert West)와 리틀톤(Lyttleton)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기독교를 무너뜨릴 궁리를 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역사성(歷史性)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입증만 하면 기독교는 모래성처럼 허물이 지게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길버트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리틀톤은 사울의 회심에 대한 책을 각각 쓰기로 했다. 성경을 포함한 많은 책을 읽고 연구를 하던 중 얼마 후에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들의 결론은 놀라웠다. 아무리 보아도 예수는 부활하셨고, 사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조사하고 연구한 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과「사울의 회심」(The Conversion of St. Paul)이다. ?벤허?라는 영화의 원작을 쓰기 전까지 월러스(Wallace)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예수를 믿는 것을 우습게 여겼던 작가이다. 그의 친구의 말을 믿고 있었다.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월러스가 소설을 쓰기 위해 성경을 읽고, 역사적인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영화 속의 불신자 벤허처럼 그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앞에 무릎을 꿇어다. 영화 속의 벤허는 복수심에 불타 칼과 창으로 민족을 해방시키겠다는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자 그는 딴 사람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자 그는 딴 사람이 되었다.  

 


   1) 부활을 받아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다.

  숨어있기에 급급했던 이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40일 동안 11번 넘게 만나면서, 순교도 마다않는 겁 없는 전도자들로 변했다. 그들의 변화를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진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진다.  

 

  2) 예수의 육신적인 형제며 불신자인 야고보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야고는 부활 사건 전까지는 예수의 주님 되심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그의 형을 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3) 의심 많은 제자 도마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요한복음 20:25을 보면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던 제자이다. 도마에게 감사하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의심해 준 것, 우리가 거쳐야 했을 고민을 그가 먼저 해 준 것을 감사하자. 요한복음에서 가장 감격적인 신앙 고백은 도마의 입술에서 나왔다. 그는 먼저 회의론자, 의심 많은 자로서 고통스런 시간을 먼저 보냈다.  그런 뒤에 이런 위대한 고백을 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4)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울은 부활의 증인으로 변했다.

  사울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던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교회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는데 힘썼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다. 그것은 사울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사건이었다. 그는 3일 간을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그리고 나서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는 왕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고, 이방인들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다. 그의 변화는 마치 아인슈타인이 예수를 믿은 것보다 더 큰 사건이다.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노후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겼다.

 

“나는 평소에, 특별히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했습니다. 교회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내 조국 독일이 어두워 졌을 때, 그리고 나치의 핍박 아래 있었을 때 내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교회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사람들의 안식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노후에 인생의 석양녘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교회로 다시 돌아옵니다. 내 영혼의 안식처인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 예수도 잘 믿는다.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이유와 근거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 소크라테스는 하나님을 믿었다. 갈릴레오, 베이컨(Bacon), 과학자 아이삭 뉴톤 경(Sir Isaac Newton), 파스테르(Pasteur) 같은 뛰어난 과학자, 철학자, 사상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들이 바보라서 믿었을까? 아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해답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주시기에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죄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에 삶을 의탁하는 것이다. 이별의 아픔에서, 무덤의 그림자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예수님만이 구원하시며 희망이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예수님만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의 보증이시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이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이시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부활에 관한 희망을 주신다.

 

4. 나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 때문에 예수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요 20:20). 왜 우리를 향한 대속(代贖)의 상처는 낫지 않았을까? 사라지지 않은 채 주님 몸에 남아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상처에서 희망(希望)을 본다. 그 상처는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을 이어주는 중요한 표시이다. 구원과 구원의 보증(保證)의 표시이다. 상처가 준 고통은 사라졌지만 상처의 흔적은 남아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1) 나를 위해 어떤 사랑의 희생(犧牲)도 치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나를 구원할 능력이 충분(充分)함을 보여준다.

  3) 나의 죄 사함과 구원이 영원(永遠)함을 확증한다.

 

  언젠가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며 그 손에 난 상처를 보실 것이다. 부활신앙이란 우리가 흘린 눈물, 우리가 당한 비극,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치른 모든 희생을 주님이 기억하여 주시는 것이다. 예수 몸에 난 상처가 그렇듯이 나와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 난 상처는 새로운 몸을 입어도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님에게 증거가 된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증거가 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나는 어머니의 굵게 파인 주름살을 기억한다. 나는 어머니의 거치러진 손의 느낌이 가슴에 남아있다. 나는 그 손을 만져보고 싶고, 그 주름진 얼굴이 보고 싶은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인도에 썬다씽이라는 유명한 성자가 있다. 그거 어느 해 영국을 방문해서 국회에서 연설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강연을 경청하였다. 참석자 중의 유명한 교수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당신은 뿌리 깊은 힌두교의 유명한 학자이고 철저한 힌두교인인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까?”

  썬다씽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 부활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이 있다. 힌두교나 불교는 인생무상이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생명을 준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 많은 내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다가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의 돌을 굴려버리시고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께 감사하자. 슬픔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우리들 때문에 다시 무덤까지 찾아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 감사하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실망의 길을 걷는 우리들을 따라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종종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낯선 방법으로, 낯선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기뻐하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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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만 자랑하라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라디아서 6:14).

 


필자는 많은 독서를 한 사람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어떤 책도 성경만큼 한가지 주제를 분명히 증거하는 완벽한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가지 분명한 주제를 통해서 인생을 깨우치고 있다.

   어떤 이는 "성경은 어려워서 읽지 못하겠다" 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어찌 아비가 자식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말을 하는자가 있겠는가? 하물며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자녀 된 인간에게 주신 말씀인 성경이 당연히 쉬워야 하지 않겠는가!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특히 중세 및 근대 기독교가 일반인들의 성경 접촉을 막거나 혹은 성경을 어려운 책으로 가르쳐왔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면 누구나 깨달아야 할, 또는 깨달을 수 있는 쉬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성경의 주제는 무엇인가?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요 구원의 성취는 십자가이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디모데후서 3:15).

   성경에서 십자가를 빼어버리면 성경은 당장에 쓸모 없는 휴지조각으로 전락해 버린다.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하여 성경은 쓰여졌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은 후 뜨겁고 간절한 마음으로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다.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 누구도 십자가 앞에 나오지 않고 결코 하나님을 만날 자가 없다.우리 신앙의 시작도 십자가요 우리 신앙의 진행도 십자가요 우리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의 모든 능력도 십자가에만 있다. 인간이 사단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모든 능력도 십자가에서만 나온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진실이 이러할진대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믿고 증거하고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러므로 사단은 갈보리 십자가 사건 이후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십자가의 진리를 왜곡시키며 훼손하려고 대적하고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교회적 문제점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서신을 보내면서  마지막 결론의 내용이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갈라디아서의 주제들을 마감하려 함에 있어서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되며 결론이 되는 십자가의 역할에 대해서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십자가는 구원의 길이다.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거룩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죄를 무조건 용납하시거나 죄에 관여하시거나 죄인과 상종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인간이 멸망의 지옥에 가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사단의 꾀임을 좇아서 죄인의 길로 들어간 까닭이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선하게 만드셨지만 인간이 타락의 길로 간 것이다(전도서 7:20). 창세기 1장 27절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함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도 포함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토록 악한 모습으로 만든 것은 절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아버지)을 버리고 사단을 아버지로 섬김으로(요한복음 8:44) 사단을 따라서 포악해진 것이다. 사실 현재도 인간의 속성 깊은 곳에 선한(거룩한) 성품이 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로마서 7:21)라고 고백하였다.

   이제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인간은 약간의 선한 성품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결코 나아질 수 없는 신분과 상태로 전락하여 버렸다. 만약 성경이 구약만 기록되고 그리스도의 실체를 나타내는 신약이 진술되지 않았다면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영원히 막혀버리고 전 인류는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구원을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모르고 있는 자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데살로니가후서 1:8).

   그러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끊어진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는 무슨 역할을 하였는가?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는 그 위대한 최후의 순간에 외치신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한복음 19:30).

   여기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인가? 죄인을 구속하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뜻이다. 즉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 란 단어로서 '다 갚았다'는 뜻이다. 인간이 갚아야 할 죄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갚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전 인류의 죄, 즉 창세 초기의 아담으로부터 마지막 인간까지의 모든 인간의 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여기 '갑'이라는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현재 주님을 심히 모독하는 사람이다. 그는 십자가의 속죄를 안 믿을 뿐 아니라, 모르고 있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죄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이미 2000년 전에 갈보리 언덕 십자가상에서 고통 중에 돌아가신 주님은 '갑'이라는 사람의 죄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죄를 단번에 해결하셨다. 그런데 사람이 왜 지옥에 가는가? 그것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이 복음을 믿지 않음으로 지옥에 가는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든다. 더러운 죄인이 거룩해지는 것은 십자가의 길뿐이다. 이제 거듭난 자는 죄인이라 하지 않고 거룩한 의인이라 칭한다. 이제는 하나님과 상종할 자격이 주어진 의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속죄를 받아들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로마서 3:23~24).

 

   둘째로 십자가는 능력이다. 구원받은 신자는 어떻게 이 악한 세대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함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신자가 구원받았을지라도 신자의 육체에는 여전히 죄의 속성이 있어서 신자를 괴롭힌다. 사단은 이 육체의 속성을 이용하여 신자로 하여금 기쁘고 즐겁게 생활하지 못하도록 역사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은 이러한 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능력이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십자가에 달리신)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1~2).

   사단은 우리 육체의 속성 중 정과 욕심을 사용하여 우리를 죄 가운데로 인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죄의 근원은 정과 욕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정욕이 역사하여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때 십자가 앞으로 나가면 불같이 일어나던 정욕이 사그라지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회복 받게 된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성도를 용서하지 못하다가도 십자가의 사랑이 중심에 살아나면 저절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변화된다.

   모든 평강의 근원도 십자가로 말미암은 것이다. 죄를 향하여 달려가기를 즐겨하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묵상하기 바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셋째로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핍박이 따른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갈라디아서 5:11).

   바울이 만약 할례와 율법의 행위를 전하였다면 핍박이 없었을 것이요 그러하였다면 바울을 통하여 죄인이 구원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십자가가 전해지는 곳에는 구원 역사가 일어난다. 구원받는 자들이 십자가로 인하여 성장하며  용감하게 주님을 따르게 된다.

   이것은 사단이 가장 싫어하는 성령님의 역사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전하고자 하는 곳에는 반드시 사단이 핍박하며 자기의 종들을 동원하여 방해공작을 일삼는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훌륭한 종파, 큰 교회에 속하여 자신은 정통이라고 하여 다른 사람들을 힘부로 판단하고 핍박하며 스스로 정통적인 믿음의 소유자로 위로 받고 있는데 이것은 엄청난 자기 착각임을 알아야 한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사단은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여 왔다. 성경을 자세히 보라. 항상 핍빅하는 자 편에 선 자들이 이단이요 거짓이었다.

   물론 오늘날 실제로 잘못된 이단이기 때문에 핍박받는 경우도 많지만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들도 핌박받는 자 중에 있음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핍박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가인이 아벨을 핍박하였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에서가 야곱을, 사울이 다윗을, 여러 잘못된 왕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하였다. 예수님도 핍박 받고 이단으로 정죄받아 죽임을 당하셨으며 제자들도 대부분 이단으로 몰려 순교하였다.

   오, 독자여! 그대가 참된 진리 중에 있는지 아는 방법 중 하나는 그대가 지금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받는 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교회사에도 보면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핍박을 받았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이(십자가 예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0~12).

   분명히 말하거니와 성경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는 정상적인 하나님의 종들이 심한 핍박에 시달렸음을 잘 대변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의 거대한 조직들이 참된 하나님의 교회들을 자기 교인들을 지킬 목적으로 얼마나 정죄하고 있는가? 이 핍박은 주님 오실 때까지도 계속될 것이다.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 "좁은 문"의 비밀을 독자들은 알기 바란다.

   끝으로 바울이 탄식으로 경고하고 있는 말씀이 있다. 참된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변질 되는가 하는 문제다. 그것은 "핍박을 면하려는 생각"으로부터 변질 되는 것이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함 뿐이라"(갈라디아서 6:12).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모양을 내고 타협을 하고 안일한 생활을 추구할 때 참 진리는 점점 변질되어 가고, 성령의 능력은 점점 떠나간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복음의 초창기에 온갖 핍박을 정면으로 대적하며 담대하게 나아갔을 때 능력과 성령 충만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러한 경험을 회상하는 성도들을 필자는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핍박을 면하려고 부드러움과 평안을 추구하며, 여러 가지 지혜와 학문적 방법이 동원되고, 종교적 형식을 흉내내며, 이러한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용납하는 동안 숫자는 늘어날지라도 이미 교회는 변질되어가고 성령의 능력은 소멸되어 가는 것이다. "이슬비에 옷 젖는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우리가 순종하던 성경의 진리가 놀랍게 변질될 때 주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는가?

   필자는 생각하건대 전도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고 본다. 정상적 전도라면 십자가의 본질을 분명하고 담대하게 전하는 것이다. 바울도 전도는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다(고린도전서 1:21). 비록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앞세우고 담대히 전진하여야 한다. 핍박이 더 일어난다 할지라도... .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베드로전서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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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에 대한 잘못된 「 열 가지 신화」

 

 

 

리더십(leadership)에 대한 책은 정말 수도 없이 많다. ‘리더십’이라는 단어로 책을 검색하면 각종 인터넷 서점에서 수 천 권의 책을 쏟아 낸다. 아마 이들 중 몇 권은 이미 읽어 봤을 것이고 살면서 리더십에 대한 책을 몇 권 정도는 꼭 읽게 될 것이다. 꼭 책을 읽지 않더라도 ‘리더십’이라는 단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세상을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단어만큼 다양한 오해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것도 드물다. 어떤 곳에서 리더십은 지도자의 능력이기도 하고 어떤 시간에서 리더십은 독재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며 어떤 상황에서 리더십은 생명이기도 하다. 리더십은 매우 다양한 상황에서 상이하게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그것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과 신뢰 즉, 잘못된 신화도 다양하다. 잘못된 신화는 잘못된 판단의 근거가 된다. 어떤 경우 그 신화가 너무나 강력하여 문제의 이유에서 아예 제외시켜 버리기도 하는데 외국인 감독에 대한 축구협회의 신화가 좋은 예제가 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외국인 감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신화는 문제의 핵심을 완벽하게 벗어나게 만든다. 리더십 또한 매우 많은 문제의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정작 리더십에 대한 잘못된 신화를 고수함으로써 그것 자체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

리더십에 대한 열 가지 잘못된 신화는 리더십 자체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리더십은 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변용 가능하다는 것과 제멋대로 이해하는 것이 전혀 다름을 알고 있다면 열 가지 잘못된 신화에 대한 이야기가 리더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 리더십은 타고난다
알렉산더 대왕의 리더십과 체 게바라의 리더십과 간디의 리더십이 같은가? 혹은 이건희의 리더십과 우리 회사 사장의 리더십과 지난 주에 입사한 신입 사원의 리더십이 같은가? ‘타고 나는 리더십’이란 전문적으로 교육된 리더십을 의미한다.

리더십은 규범과 문화 그리고 조직 속에 내재되어 있고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것을 교육과 전수라는 과정을 통해 체화한다. 극소수의 사람만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전수의 혜택은 받는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교육받은 리더십은 대개의 경우 권력과 이익의 유지에 복무하는데 사용된다.

이런 관점에서 타고난 리더십은 매우 극소수에게만 적용된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 대부분은 필요에 의해 리더십은 배우고 받아들인다. 수 만년 이상 유지된 권력이 있어서 그들의 행동 패턴이 교육과 전수 이외에 DNA 속에 각인될 수 있었다면 모를까 마치 인간 자체가 원래 그러했다고 주장하는 ‘타고난 리더십’은 없다.

둘, 리더십은 모든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리더십은 매우 다양하게 이해되며 다양한 영역에서 어떤 상황을 설득하고 설명하는데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리더십이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열 걸음 물러서더라도 ‘지도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다. 리더십은 그것이 필요로 하는 환경에서만 필요하며 대화와 협의 그리고 존중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상황에서만 필요하다. 변기가 3개 뿐인 화장실에서 20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한 줄로 서서 기다리지 않는다면 여기에 리더십이 필요한가? 아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규범과 규칙이다.

미국과 영국은 자칭 세계의 리더이며 리더십을 갖고 있다고 공언하고 있는 셈인데 왜 세계무역센터가 사라져 버리고 영국 지하철에서 폭탄이 터지는 걸까? 여기에 필요한 것은 협상과 타협이다. 모든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한 리더십을 주장하는 것은 독재자와 멍청이들의 공통된 현상이다.

셋, 좋은 리더십은 착한 성격에서 나온다
리더십은 조직의 합의에 근거한다. 강제로 어떤 일을 시키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그 일을 하고 과업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리더십의 주요한 목적이다. 그래서 좋은 리더십, 받아들일 수 있는 리더십을 구현하는 사람들은 대개 품성이 선하고 착한 경우가 많다, 당신에게만. 이게 중요하다. 주변을 둘러 보라. 자신의 조직에서 리더십이 있다고 불리거나 혹은 자신이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착하다’, 자신에게만.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여.러.분이 리더십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러분 ‘자신에게만 착하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좋다’, ‘착하다’, ‘성격’, ‘리더십’이라는 최소한 4개의 단어에 대해 임의로 규정하고 있다. 이 단어는 평생을 잠자리를 함께하는 아내와도 합의를 이루기 힘든 것들이다. 그러니 다시 물어보자,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착하기 때문에 리더십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착한 리더십을 갖고 있어서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것인가? 아니면 여러분과 아직은 친하기 때문에 리더십을 인정하는 것인가?

넷, 나이가 들수록 리더십은 세련되어 진다
대개의 리더십은 경험에 큰 영향을 받는다. 리더십은 구성원에 대한 설득이 매우 중요하므로 합리적이며 이해할만한 근거를 내세워야 한다. 때문에 경험은 리더십의 매우 중요한 항목이 된다. 똑똑하지만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젊은 사람들이 노숙한 경험자의 조언을 구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리더십은 더욱 세련되고 유연해지며 부드러워진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경험이 쌓일수록 그것의 문제점에 대해 더욱 세밀하게 인식하고 대안을 모색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이가 들어도 세련되기는커녕 더욱 유치하고 치졸해지는 경우도 많다.

리더십은 훈련의 과정에서 성장하며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은 똑똑한 검색 엔진의 알고리즘과 비슷하다. 1천만 개의 웹 문서가 쌓여 있을 때 검색 엔진은 비슷하게 동작한다. 그러나 10억 개의 웹 문서가 쌓여 있을 때는 똑똑한 검색 엔진과 그렇지 않은 것은 전혀 다르게 동작한다. 똑똑한 검색 엔진은 여전히 재빠르게 정보를 찾아서 결과를 알려 주지만 그렇지 않은 검색 엔진은 전혀 동작하지 못하거나 검색 결과를 기다리다 완전히 지쳐 버린 후에야 결과를 낸다. 그것도 제대로 된 결과도 아니고 “서버가 응답하지 않습니다” 따위의 대답을 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경험은 쌓여가겠지만 고뇌하지 않고 대화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리더십은 그런 검색 엔진과 마찬가지다.

다섯, 내 상사는 정말 리더십이 없다!
절대 다수의 직장인이 상사가 리더십이 없다고 생각한다. 직장인만 그런 것은 아니고 학교에서 교수나 선배에 대해, 혹은 가정에서는 특히 아버지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리더십이라는 것이 늘 모두에게 이해되는 방식으로 구현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현재 자신이 영향을 받고 있는 리더십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닐 수 있다. 혹은 이런 경우라면 정말 비참한 감정이 들겠지만 ‘나를 뺀 리더십’일 수도 있다. 한 마디로 현재 조직이 구현하는 리더십에서 자신이 소외된 것이다. 그러니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상사가 리더십이 없는가? 아니면 내게만 그러한 것인가?

여섯, 리더십은 무사공평해야 한다
리더십은 설득의 심리학에 기초한다. 설득을 하려면 상대방을 이해해야 한다. 상대방의 내외적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상대방의 이해관계를 도움으로써 리더십은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리더십은 리더와 대상 뿐만 아니라 대상과 대상(구성원들)의 시너지를 발휘하게 만드는 주요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에 대한 ‘무사공평’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리더십은 어떤 경우 목적을 위해 당신을 처단할 수도 있다. 다른 부서로 보내거나 다른 일을 시키거나 혹은 회사에서 퇴출 시킬 수도 있다. 그것이 리더십이 구현하려는 목적에 부합하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니 리더십은 결코 무사공평하지 않다. 리더십은 그것이 추가하는 목적과 부합할 뿐이다.

일곱, 최신의 리더십을 많이 배워야 한다
이런 생각 덕분에 지금도 리더십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경영학 교수들이 밥벌이를 하고 있다. 리더십은 거의 모든 학문에서 언급되고 있다. 특히 정치학에서 오래 전부터 리더십에 대해 다루고 있다. 경영학이 이것을 다루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인간이 정치적 존재라는 것을 믿는다면 굳이 리더십의 최신 이론을 배우기 위해 서점을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 정치학 개론을 펴 놓고 읽어도 리더십에 대한 똑 같은 이론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리더십은 기술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신의 것보다 과거의 것이 훨씬 유용할 수 있다(물론 기술 영역에도 이런 경우가 있긴 하지만). 어떤 회사는 공자의 리더십을 표방할 수 있다. 또 다른 회사는 부처의 리더십을 기본적인 리더십의 테마로 삼을 수 있다. 최신의 리더십 이론 또한 과거의 현자와 학자들의 이론에 기초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텔레토비의 머리 크기를 보고 현명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여덟, 크게 성공하려면 리더십이 있어야 해
크게 성공한 사람 ? 그게 돈이든 명예든 예술이든 간에 ? 은 공통적인 리더십이 있다. 성공과 리더십의 상관관계에서 리더십이 성공을 견인했을까? 다시 말해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일까?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대개의 경우 성공한 사람의 주변 인물들이 누군가 성공한 이후에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리더십’으로 과거의 일을 재해석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과거 행동과 현재의 행동을 ‘리더십’으로 해석하면 보기 좋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리더십은 성공의 조건이 아니라 성공의 중간 산출물로 보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현재 리더십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리더십을 만든 후에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로또 대박을 맞은 사람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상, 리더십은 성공을 향해 달려가며 또한 그 성공에 도달하기 위해 변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공통적인 산출물이다. 그것이 성공한 사람들이 풍기는 공통된 ‘리더십의 향기’가 존재하는 이유다.

아홉, 리더십은 사업과 회사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리더십은 매우 일상적인 단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류’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 사회의 구성 요소 중 하나가 ‘회사’일 뿐이다. 리더십은 회사와 가정, 지역 사회, 봉사 단체에서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그 모든 리더십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 훌륭한 리더이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이 애인과 관계에서 리더십은 고사하고 금간 유리잔처럼 애정 누수를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혹은 학교에서는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교사가 동네 반상회에는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는 우리가 모든 리더십을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리더십은 조직과 상황과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르게 구현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 중 몇몇 경우에만 리더십을 발휘할 뿐이다. 나머지 조직과 상황과 시기에는 다른 리더십을 발휘할 사람, 즉 리더를 찾거나 찾아가야 한다.

아파트 진입로 개선을 위해 서명을 받는 아줌마와 그녀를 존중하지 않는 리더십 강한 어떤 회사의 부장이자 그녀의 남편을 생각해 보라. 남편이 그녀의 “조직과 상황과 시기”에서 발휘하는 리더십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갈등은 불을 보듯 뻔하다. 반대로 그녀 또한 남편이 회사에서 발휘하는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남편은 단지 돈 버는 기계일 뿐이다. 리더십이 사업과 회사 혹은 뚜렷한 목적이 있는 영역에서만 발휘될 것이라고 믿을 때 리더십은 편협한 것이 되며 그것 이외의 모든 영역에서 충돌하게 된다.

열, 리더십이 회사를 살릴 것이다
리더십은 조직의 제한 범위를 확장하고 자발성을 북돋움으로써 기대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든다. 과거의 모든 연구 분석 데이터는 강제적 시스템보다 자발적 시스템이 훨씬 효율적임을 증명해 왔다. 때문에 위기에 처한 조직이든 잘 돌아가는 조직이든 리더십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조직의 관리자는 늘 리더십에 대해 공부하고 교육 받으며 그것을 부하들에게 전수한다. 또한 조직원들은 직급과 지위에 관계없이 리더십을 갖도록 요구 받는다. 왜냐면 리더십이 위기에 처한 회사를 살릴 수도 있으며 현재의 긍정적인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리더십은 그러한 힘이 있다.

그러나 언제 동화적 현실이 회사를 살린 적이 있던가? 리더십은 사람에 의해 구현된다. 리더십을 잘 구현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또한 리더십은 목적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오늘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리더십이 필요하다면 내일은 그들을 퇴출시키는 리더십도 필요하다. 리더십은 용이 지키는 오래된 성에 잠들어 있는 공주에게 입맞춤할 멋진 왕자가 아니다.

리더십은 그 왕자가 타고 온 백마이며 용과 싸우기 위해 입은 갑옷과 칼과 방패다. 잠든 공주에게 키스하는 것은 왕자 자신이다. 결국 리더십이 회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회사를 살린다. 리더십이 동화적 현실이 되었을 때 리더십은 회사를 망하게 한다. 훌륭한 갑옷과 칼과 방패와 백마가 뭘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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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려주일]예루살렘 입성

 

기념 ‘호산나주일’로 불리기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린 성화. ⓒ위키피디아

종려주일(棕櫚主日, Palm Sunday)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마 21:1-11, 막 11:1-11, 눅 19:28-38, 요 12:12-19).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의와 아름다움, 승리 등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날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다.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된 그대로였으며, 그래서 '호산나주일'이라 불리기도 했다.

종려주일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385년경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에 나오는데, 당시 동로마 교회에 속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축하의 의미로 종려 행렬이 나섰다. 반면 서로마 교회들은 축하 분위기 대신 애도의 성격을 띠었다고 한다. 6세기경 스페인 의식서를 보면, 5세기경 동로마 교회의 종려주일 풍습이 전해졌음을 볼 수 있다.

중세에는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다음, 가까이 있는 다른 교회로 걸어가는 것이 종려주일의 관습이었다고 한다. 성도들은 종려주일이 되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되새겼다.

 
축성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축성이란 성례에 쓰이는 물건 등을 정해진 의식을 통해 성스러운 것으로 구별하는 것으로, 구약의 성별 의식(출 40:9-15)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중세 교회에서는 종려주일에 사용하는 종려나무 가지에 축성 의식을 행했다. 축성된 종려나무 가지는 귀신을 추방하거나 질병의 치유와 재앙을 막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도 했다.

군중들은 이렇듯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메시아 또는 선지자, 왕을 맞아들이는 예식을 거행했지만, 5일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올해는 4월 9일이 종려주일이며, 다음날인 10일부터 부활절 전날인 15일까지는 '고난주간(苦難週間, passion week)'이다.

'수난주간(受難週間)'으로도 불리는 고난주간은 잘 알려져 있듯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절기로, 종려주일 다음 날부터 부활 직전까지의 1주간을 말한다.

예로부터 성도들은 고난주간이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냈다. 특히 최후의 만찬과 세족식을 기념하는 목요일, '세족목요일(洗足木曜日)'과 주님이 십자가 달려 돌아가신 금요일, '성금요일(聖金曜日, Good Friday)은 더욱 경건하게 보낸다. 오락을 금하고 금식을 하기도 한다.

마르틴 루터(Luther)는 종교개혁을 통해 고난주간에 행해지던 로마 가톨릭 의식들을 대부분 폐지했으나, 츠빙글리(U. Zwingli)의 영향 아래 부분적으로 회복됐다. 오늘날에는 교파에 따라 다양하게 지켜지고 있으며, 특별 새벽기도회나 저녁모임 등을 열어 경건하게 보내고자 노력한다.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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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칠대신비 (The Birth of Jesus and the Death of Jesus

 

 

 

 
(이사야 9:6~7)

이태리 알프스 산에 있는 한 마을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당 안에는 사면 벽둘레에 구약시대의 선자지들의 동상이 서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이 다 같은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가보면 맨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의 큰 동상이 서 있다고 합니다. 이 동상들 즉,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수님을 가르키고, 그들의 눈은, 갈보리산을 향하여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중에도 예수님에 관해서 가장 많이 말씀하고 있는 선지자가 이사 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를 구약의 복음서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예고할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고(이사야 7:14)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 5)"라고 예언했습니다.

 

특히 9장에 가서는 "그의 이름은 기묘라(Wonderful)"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기묘하고 신비스러운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의 신비 일곱가지를 말씀드리고저 합니다.

 

1.탄생의 신비

때가 차서 영원의 시계가 정시를 칠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들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 내려가 세상을 죄에서 구원할 때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낼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천사로 보낼까? 왕으로 보낼까? 장성한 어른으로 보낼까? 그러나 다 합당치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작은 아기로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장하면서, 모든 인간의 욕망도 알고 시련도 알고 유혹도 받아 알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탄생시킬 그릇이 될 여인을 찾고 계신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눈이 멈추어졌습니다. 마리아는 헌신적인고 마음이 깨끗하고, 사랑스러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옆에 있던 천사 가브리엘을 불러서 "마리아에게 내려가서 이르기를 너는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컫는 아들을 잉태하리라 고 일러라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에게 또 한가지 말하기를 "그 이름은 예수라고 하라고 일러 주어라"하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곧 결혼하기로 된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달했습니다. 이 두사 람이야 말로 이 귀중한 책임을 맡기기에 합당한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때가 차서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중 밤에 천사의 찬송이 들려오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고 들려왔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처녀 탄생이라니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입니까? 아담과 이브이래 남녀의 융합이 없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만은 아무 남자도 관계가 없고 하나님 자신이 아버지요 마리아가 어머니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없는 어머니의 품에 안기워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우시게 되었습니다. 어떤이는 동정녀 탄생을 못믿겠다는 이가 있으나 성경의 말씀을 못믿으면 무엇을 믿겠으며 천지를 장조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쯤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이태되신 분이 아니라면 나는 안믿겠습니다. 그분이나 나나 다 같은 사람인데 무슨 숭배할 것 까지 있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다 남자의 후손이지만, 예수님만은 여인의 후손으로 죄없는 사람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은 네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말꿈치를 상하게 할것이닌라"고 예언했습니다. 저는 그전에 마리아도 죄인인데 어떻게 예수님이 죄가 없을까 하고 생각했으나 여러분 여자는 밭이라면 남자는 종자입니다. 밭은 콩을 심거나, 팥을 심거나, 심어 주는대로 내 놓기 때문에 종자를 결정할 권리가 없습니다 . 이와 같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신 분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셔서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요사이 어느 과학자가 말하기를 어느 서 식 동물은 숫놈이 없이도 새끼를 낳기 때문에, 성령의 잉태설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삶의 신비

신약성서는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기록한데가 몇 곳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입에 궤사가 없으시다"(벧전 2:22)라 했으며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서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비교적 선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완전한 사람은 한분 밖에 없습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악한 것이라고는 한가지도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에서 악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수 없습 니다. 우리는 빌라도와 같이 "우리는 그에게서 허물을 찾지 못하였노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서 장례식을 하게 되었으니 아무날 아무시에 다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인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장례식 날이 되서 관을 강단앞에 놓고 주위에 꽃을 장식하고 설교를 하는데, 고인이 누구라고는 하지않고 이 사람도 죄를 짓다가 죽은 사람이므로 영원한 슬픔을 다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설교를 끝마치고 누군지 알고 싶으면 한사람씩 이 관속을 들여다 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와서 들 여다 보는 사람, 자기의 얼굴이 비쳤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깨우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루도 일분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그는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해서 보게 했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걷기도 했 고 문둥이를 깨끗케 했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므로 신비한 일들로 꽉 찼습니다. 오늘날도 그 믿음으로 많은 병자가 고침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착한 일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예수님 의 말씀은 세상 아무도 따를 수 없는 훌륭한 진리의 말씀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기다리는 영광스러운 천국에 대해서 구원의 도리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도 신비로웠습니다.

 

3.죽음의 신비

예수님은 다른 어떤 사람도 죽어보지 못한 죽음을 죽었습니다. 어떤이는 희생적인 죽음을 죽기도 하고 어떤이는 큰 업적을 남기면서 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 천국으로 이끌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지 않아도 되었었습니다. 그는 생 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당신과 나를 위해서 그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아침 일지기 십자를 짊어지워서 골고다로 향해 끌어 갔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 밑에 몇번이고 몇번이고 한없이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다가 구레네 시몬이 그 십자를 떠메어 가지고 갔습니다. 골고다 산정에 이르러서는 상처나고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십자가 형틀에 눕히고 굵은 쇠못을 양 발과 양 손에 사정없이 망치로 내리 박았습니다. 그 망치소리, 그 십자가를 구덩이에 털석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리는듯 합니다. 6시간이는 긴 시간동안 십자가에 달려 있었고 해도 그 빛을 읽었습니다. 마침내 오후3시가 되어서 고뇌와 저철한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큰 소리로 외치고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가 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죄를 씻는 샘이 터졌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구속받은 죄인을 위해 영광의 문을 열으셨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받아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미국에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 하 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예수를 믿지 않고 그 부인은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읍니다. 그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엘 같이 가보자고 하더랍니다. 가 보니까 그 닭장 둥우리에 알닭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가 그 암닭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닭은 죽어 있었습니다. 농부가 말하기를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요 족제비란 놈이 그 몸에서 피를 다 빨아 먹었는데도 그놈이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은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읍니다. 예수님은 움직일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 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당신과는 멸망 받기 때문입니다." 그

농부는 그 뜻을 깨닫고 즉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셔들였다고 합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4.부활의 신비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서 무덤에 장사했으나 지상의 어떤 무덤도 그를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제 삼일째 되던날, 살아 나리라고 예언하셨던대로 무덤에서 걸어나와 영원히 살아나셨습니다. 그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증명했습니다. 또 그의 하신 모든 말씀이 진리였음이 증명되었습니다. 부활은 그의 신성을 증거합니다. 해리 린멜 박사가 고관인 모스렘교도와 주고 받은 말입니다. (해리린멜)-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셨음을 믿는다. (모스렘 교도)-우리도 그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창조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 (모슬렘 교도) - 우리도 그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 (모슬렘 교도)-우리도 코란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 것을 믿는다.(모슬렘 교도) - 우리도 모하메드를 통해서 계시한 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 예수님을 믿는자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다. (모슬렘교도) - 우리도 모하메드가 그 백성을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다. (해리 린멜)- 예수님은 부활하신것을 믿는다. (모슬렘 교도) - 우리는 그 선지자의 죽은 후에 관해서는 모른다. 옳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유일한 분입니다. 모하메드도, 공자도 부처 도 모두 그 무덤 앞에는 "그가 여기 누워 계시다"고 묘비가 새겨 있으나 예수님의 무덤 앞에는 "그가 여기 계시

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고 한 천사의 말을 기억하게 됩니다.

 

5.승천의 신비

1961년 봄에 한 사람이 우주에 올라갔을때, 온 세상이 인간의 과학에 놀라고 떠들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주로 올러간 첫번째 사람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읍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간 세상에서 지내시다가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 위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그 들은 놀라서 입을 벌리고 바라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우주선이나 우주 로켓트를 탄 것도 아니고 우주복이나 헬멧을 착용한 것도 아니며 무슨 전자기구를 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직 구름을 타시고 올라 가셨읍니다. 천국으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되돌아 가신 것이며, 우주 창조 이전의 영광으로 되돌아 가신 것입니다. 고향으로 되돌아 간 것과 같습니다. 천사도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고 모든 성도들이 기뻐하며 외친 것입니다. 승천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었음이 증명되었고 승천을 통해서 주가 만유의 주가 되심이 증명된 것입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사망권세를 이기셨고 승천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음도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부활로 증거 되었고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승천으로 보여 주었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빌 2:9)고 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가면 성령이 오셔서 모든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강력히 역사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현재 사역의 신비

현재 예수님은 하늘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는 우리 위해 도고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는 펴지를 받으면 기쁩니다. 그러나 더 기쁜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한분 한분의 이름을 아시고 사정을 아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7.재림의 신비

구약성서에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초림을 예언했는데 해가 갈수록 그 소망이 희미해지다가 그 약속이 잊어버릴 즈음이 되었다가 막상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그를 몰라 보았습니다. 그를 맞을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이 성경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몇배나 더 말 씀하고 있습니다. 해가 지나감에 따라 예수님이 정말 재림하실까? 하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니 그 약속은 헛된것이 아닌가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림과 같이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모든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었습니다. 헛 된 약속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심은 우리 믿는 자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니이 공중에 재림하실 때 모든 믿는자를 끌어 올려 그의 형상과 같이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와 함께 영원히 있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모든 성도들을 하늘에서 모으시고 그들과 함께 다시 지상에 오십니다. 그때 만물이 새롭게 되고 예수님은 의로 세상을 1,000년 동안 다스리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 재림하실때, 모든 성도들을 그 행한대로 심판을 받아 상급을 받게 하십니다. 이것은 상급 심판입니다. 행한 일이 없으면 상급이 없고 행한 일이 많으면 상급을 많이 받게 됩니다.

 

그후 1,000년 왕국시대가, 지난뒤 모든 불신자는 그 행한대로 하나님의 백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아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이 심판과 영원한 형벌을 피하려면 지금 예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당신의 구세주를 영접해야 합니다. - 아 멘 -
출처:금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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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을 통해 십자가 복음 이해하기

 

 

 

 

십자가 복음이란 무엇인가?

 

십자가 복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쉬운 말씀이요. 가장 기본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사탄이 지금까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모세의 수건이 아직도 벗겨지지 않아서 유대인들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메시야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엇을 믿어야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는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한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복음인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 교인수가 10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기독교 역사 120년 만에 1000만 명이 넘는다고 자랑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 수는 늘어나는데 교인들의 삶은 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사람은 변화되지 않고 외형은 점점 화려해진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성장 중독증에 걸려서 교회가 커지고 교인수만 많으면 목회에 성공한 것으로 알고

성도들의 영혼의 탄식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총체적으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 하지 않는다.

그래서 깨어있는 목사님들은 한국교회의 병폐를 고쳐보자고 여러 가지 방법을 내놓지만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정녕 교인들을 변화시킬 방법이 없단 말인가?

정녕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흠이 없는 거룩하고 영광스런 교회를 세울 수 없단 말인가?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가는 거룩한 성도가 양산되는 방법이 없단 말인가?

있다!!. 방법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십자가 복음’이다

이 말씀을 깨닫게 되면 속사람이 놀랍게 변화된다. 할렐루야!

 

그러면 ‘십자가 복음’이 무엇인가?

 

바로 로마서 6장 말씀이 십자가 복음에 대한 말씀이다.

특히 로마서 6장 6절은 십자가 복음의 핵심 말씀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 하려함이니”(롬6:6)

 

 

우리의 옛 사람(죄의 몸, 아담)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믿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이 말씀을 믿으면 실제로 나의 옛사람(아담) 죽는다.

나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 할 때,

나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새 사람이 되었다’라는 것은 고린도 후서 5장 17절 말씀인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새롭게 재창조 되었다’라는 것이다.

 
 

옛 사람이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본질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염소가 죽어 양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염소인 옛사람에게 양가죽을 입혔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이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다. 그래서 죄를 반복적으로 짓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염소가 아예 죽어버리고 양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복음이다.

양으로 태어났으니 염소의 속성을 아무리 내려고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본성적으로 양의 성품이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양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십자가 복음인 로마서 6장 6절의 말씀을 믿는 순간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이 지금 내 사건이 되는 것이다.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이 지금 현재 나의 사건으로 체험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때”에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지 않으면 실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어야” 실제가 되는 것이다.

말씀은 믿어야한다.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내가 만약 암이 걸렸어도 암이 말씀대로 낫는다고 믿으면 실제로 낫는다. 믿지 않으면 낫지 않는다.

이처럼 말씀은 믿을 때에만 실제가 되는 것이다.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도 병자들을 만났을 때에 꼭 물어본 것이 있었다.

‘믿음’을 물어보았다. 이유는 예수님도 말씀으로 치유하셨다. 말씀을 믿을 때만 역사하셨다.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다. 천국도 믿음으로 가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 복음도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 복음을 믿으면 실제로 나의 옛사람, 죄의 사람이 죽는다.

내 죄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는 순간 내 죄가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는다.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다.

믿음은 내가 소원하는 것, 내가 소망하는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믿는 대로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 복음을 믿으면 그대로 내 죄가 십자가에서 죽는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말씀대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6장 1절과 2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당당하게 말을 하고 있다.

 

헬라어로 ‘죽은’은 현재가 아니고 ‘과거’이다.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완전히 죽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내 죄가 죽었기 때문에 나하고 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죄 가운데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서 죽었느냐?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로마서6장 3~5절이다.
 

 

로마서 6장 3~5절을 요약하면 “내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해서 새사람이 되었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이 말씀을 믿으면 실제로 내 죄가 십자가에서 죽는다.

죄인이 죽고 의인이 되는 것이다.

죄인이 죽고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2)

 
 

십자가에서 죄로부터 해방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의인이 되는 순간부터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열매를 맺었으니’에서 ‘맺었으니’는 현재 능동태이다. ‘맺을 것이다’가 아니다.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은 예수와 함께 부활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선언을 했다.

현재완료 수동태이다. 거룩함을 이미 십자가에서 얻은 순간부터 지금도 거룩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믿는 순간 거룩해졌고 지금도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4)

 
 
더욱더 놀라운 것은 한 번의 제사로 영원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음으로 영원히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씀도 ‘현재완료 능동태’이다.

십자가 복음을 믿는 순간 완전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계속 완전하다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이 믿어지면 이런 말씀들이 다 이해가 된다.

 

또한 십자가 복음의 핵심인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믿어지면 주님이 내안에 오셔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나의 자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할렐루야!

이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이것이 완전한 복음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이 예수님을 이렇게 믿는다.

 

십자가 밑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 내 죄를 용서해주세요!

예수님의 피로 내 죄를 용서해주세요!

내 죄를 용서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예수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니까 죄가 실제로 죽지 않고 반복해서 죄를 짓게 된다.

 

죄 덩어리인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이다.

 

이 복음은 ‘불완전한 복음’이요 ‘반쪽짜리 복음’이다.

 

이렇게 믿어서는 죄는 용서함을 받을 수 있지만 죄가 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 반쪽짜리 복음을 믿기 때문에 갈수록 죄를 짓는 것이다.

삶에 변화가 없는 것이다. 죄를 반복해서 짓는 것이다.

 

계속해서 미워하고, 혈기내고, 시기질투하고, 비방하고, 판단하고,

용서하지 않고, 원망불평하고, 고집부리고, 음란 하고, 욕심내고,

자존심을 조금만 건드려도 못견뎌하고, 조금만 책망을 해도 시험 들고 등등의 것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십자가 밑에 와서 무릎을 꿇고 내 죄 용서해 주세요!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고 계신 십자가로 ‘나도’ 올라가야 한다.

 

나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하는 것이다.

십자가만 바라보지 말고 ‘십자가 위에’ 올라가야한다.

 
 

십자가 밑에만 있지 말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못박혀야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참된 의미이다.

십자가 밑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 내 죄 용서해주세요!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얘야! 십자가 밑에서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지 말고

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자!”라고 말씀을 하신다.

 

죄가 죽는 유일한 곳은 십자가 밖에 없다. 천상천하 어디에도 죄가 죽는 곳은 없다.

 

오직 십자가에서만 내 죄가 죽는다.

십자가 밑에서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만 죄가 죽는다. 이것을 깨닫기 바란다.

십자가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내 죄가 죽는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받을 수 있지만 내 죄는 죽지 않는다.

십자가 밑에서는 아무리 해도 죄가 죽지 않는다.

십자가 위에서만 죽는다. 십자가에서 나도 함께 죽어야만 한다.

 


“십자가 밑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 것”과 “십자가에 올라가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의

차이점을 염소와 양을 모델로 설명하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상태를 ‘염소’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상태를 ‘양’이라고 하자.

십자가 밑에 죄인인 ‘염소’가 와서 무릎을 꿇고 죄를 용서해달라고 한다. 보혈로 내 죄를 씻겨달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죄의 용서함을 받고 죄인인 염소에게 양의 가죽이 씌워진다.

 

이것이 십자가 밑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 것과 같다.

이런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면은 겉은 양인데 속은 염소이다.

그러니 속에서는 염소의 속성이 그대로 나간다. 염소의 성품이 나간다.

내가 아무리 죄를 안 지으려고 해도 속은 염소이기 때문에 염소의 속성이 나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속은 염소이기 때문에 염소의 속성인 죄가 나가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뿔로 받지 않으려고 해도 내 속에 염소가 있기 때문에 건드리면 뿔로 받는다.

아무리 혈기를 안내려고 해도 십자가에서 혈기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참다가 참다가 혈기를 낸다.

혈기를 참는다고, 누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누르다가 폭발하면 더 무서운 폭발이 일어난다.

 

이와 반면에 죄인인 ‘염소’가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매달려 죽는다.

 

그러면 죄인인 염소는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

죄인인 염소는 예수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장사된다.

장사를 지낸다는 것은 확실히 죽었다는 것이다. 군대용어로 확인사살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 할 때 나도 함께 부활을 한다.

예수님과 부활 할 때 나는 양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부활 할 때 염소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양으로 부활을 한다. 의인 ‘양’으로 태어난다.

겉도 양이요 속도 양이다.

 

옛 사람인 염소는 십자가에서 죽고 새 사람인 양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염소의 속성이 나오지 않고

양의 속성이 나온다. 양의 성품만 나온다.

염소의 속성을 내려고 해도 안된다. 양에게는 염소의 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한 성도는 양의 속성만 나간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 밑에서의 구원”과 “십자가 위에서의 구원”의 차이이다.

 
 

오늘날 교인들이 양의 가죽을 쓴 염소와 같다.

 

 
그러니 계속해서 죄를 반복적으로 짓고 있는 것이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회개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회개를 외치는 강단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너무나 슬픈 현실이다.

오늘날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할 줄도 모른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교회를 보고 피눈물 흘리고 계시는 것이다.

염소가 십자가에서 죽어야한다 그리고 양으로 다시 태어나야한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해서

새 사람이 되어서 거룩하게 살아야한다.

 

십자가 복음만이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있다.

 

십자가 복음은 나도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 한 것을 믿는 것이다.

부활해서 새 사람이 된 것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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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이해

 

 

 

 

요한복음의 목적
(a) 요한 스스로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곧 요한복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
(b) 왜 요한은 마태/마가/누가 세 복음서가 이미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레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였을까? 당시 시대를 풍미하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함이었다.
 영지주의(Gnosticism)=그노시즘(헬)=나스티시즘(영)=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것은 선한 것이고, 물질적인 것은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께서 더러운 육체를 입고 이 악한 세상에 오셨을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을 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기독교의 구원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구원은 영적인 깨달음(靈知)이 있는 영적인 고수들에게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c) 따라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기록하는데 비중을 두기보다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여주신 표적과 선언과 말씀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d) 당연히 기존의 세 복음서와는 거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공통 부분은 8%에 불과하고, 공관복음에 기록된 ①예수의 탄생 ②시험 받으심 ③변화산 사건 ④최후의 만찬 ⑤많은 비유 등이 빠져 있다.

요한복음의 저자
(a)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 의해서 쓰여졌다. ①13:23 ②19:26 ③20:2 ④21:7 ⑤21:20. 그렇다면 누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인가? 예수님의 12 제자 중 수제자는 베드로, 야고보(요한의 형), 요한이다. 베드로는 요한복음에서 직접 이름이 거론되고 있고, 야고보는 일찍 순교하여 집필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요한이다.  
(b) 요한은 어부였으나 품꾼을 부릴 만큼 부자였던 것으로 보인다(막 1:20).
(c) 유대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던 에베소에서 요한복음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갔던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d) 요한복음의 저작 연도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여러 가지 정황상 공관복음이 모두 쓰여지고 난 뒤인 AD 90년경에 저술된 것으로 본다.
(e) 헬라어 본문의 표제는 공관복음과 같은 형식인 ‘카타 요아넨’(요한에 의한)이다.

요한복음의 특징
(a) 요한은 믿음(faith)이라는 명사보다 믿다(believe)라는 동사를 선호한다. 신약 성경에 ‘믿다’라는 동사는 총 241번 나타나는데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98회나 사용했다. 즉 요한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단순한 지적 동의를 넘어 몸으로 믿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b) 요한복음에는 ‘진실로’를 반복하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아멘 아멘 레고 휘민)라는 표현이 25회나 등장한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새기도록 촉구하려는 의도로 쓰여졌다.
(c) 요한복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강조한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보다 예수님과 성부, 성령과의 관계를 더 많이 담고 있다. 예수님 스스로도 요한복음에서 ‘아버지’를 104회, 성령님을 8회 언급하셨고, 특히 성령님을 가리키는 ‘보혜사’라는 단어를 4회나 사용하셨다.
(d) 저자의 주해가 들어있다. 즉 요한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다가 독자들이 오해할 우려가 있다고 느낄 때면 서슴지 않고 개입하여 자세한 설명을 첨부했다.

요한복음의 숫자
(a) 요한은 완전수 7(창조)과 3(부활)을 즐겨 사용했다.
(b) 예수님의 7가지 표적을 기록하고 있다.
(c) 예수님께서는 7가지 자기 선언을 하셨다. (나는 xx이다=에고 에이미)
(d)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 3번 가셨다.
(e)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3번 지키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3년이다.
(f)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3번 말씀하셨다(요한복음에서만).
(g)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3번 나타나셨다.
(h) 요한복음 전체가 21(3x7)장이다. 물론 이것은 후대에 편집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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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예수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유석성 서울신학대총장, "예수 이름 팔아 정당 조직" 직격탄
"정당 정치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 실천해야"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한국 교회가 기복주의, 물질만능주의, 맹목적 반(反)지성주의에 빠져 인간의 욕심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해버렸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물질, 권력, 명예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개교 100주년을 맞은 서울신학대의 유석성 총장은 31일 취임 1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교회의 현실과 최근 일부 목사들의 정치 참여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유 총장은 "예수님의 정신은 3가지 단어로 요약해 말할 수 있는데 사랑과 정의와 평화"라면서 "사랑은 정의로 구체화되고 정의를 행함으로써 평화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한국 교회는 너무 풍성해지고 부자가 돼 중세 교회처럼 제도화되면서 병폐가 나타났다"면서 "물욕, 명예욕, 권세욕이 한국 교회의 병폐이며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예수의 정신, 희생정신이 한국 교회의 치유제이자 정화제이며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유 총장은 "한국 교회가 시작할 때부터 잘못됐다"면서 "한국 교회가 개화기부터 사회봉사, 의료 등 큰 역할을 해왔지만 개인의 영혼 구원만 강조하다 보니 천당 가기까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70-80년대) 경제 성장과 맞물려 교회 성장이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사람만 많이 모으면 성공한 목회자가 됐다"면서 "이러한 교회 성장주의가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 사태', 교회 세습, 교회 내 목회자 간 알력"이라고 말했다.

최근 일부 목사들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유 총장은 "기독교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비(非)정치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교회, 목사, 신도, 신학자는 있을 수 없다"면서 "정치 참여를 하되 정당 정치가 아니라 사회적 예언자적 기능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당 창당 등의 방법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일부 목사들에 대해서는 "사회적 지탄을 받는 분들이 선거철만 되면 예수의 이름을 팔아서 정당을 조직하는 것은 시의적절치 않고 방법도 올바르지 않다"면서 "철새처럼 나타났다가 선거철만 끝나면 사라지지 않겠느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나는 보수도 진보도 아니며 복음적"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유 총장은 "(정당 창당은) 원론적으로 할 수 있으며 독일에도 기독교 민주당이 있지만 다종교 국가(한국) 안에서 (기독교 정당을 조직하는 것은) 지금으로는 성공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유 총장은 그러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실천을 강조했다.

그는 "사랑은 진공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실천하지 않는 사랑은 의미가 없다"면서 "독재 정권 시절 자신은 비정치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독재 정권을 유지, 옹호, 확대,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또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의 90%가 기독교인이었는데 어떻게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죽일 수 있었느냐는 반성에서 독일의 정치 신학이 나왔다"면서 교회가 사회적, 공적인 책임을 다하자는 것이 정치 신학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독일의 '행동하는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전문가로, 한국본회퍼학회장인 유 총장은 "정치 신학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본회퍼"라면서 "본회퍼는 기도하는 것과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되는 두 가지 조건이라고 했으며 '기도'와 '사회 정의'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 3월 13일 개교 100주년을 맞은 서울신학대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소속으로, 한국의 전설적인 부흥사 이성봉 목사, 한국 교회의 대표적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 여성독립운동가 백신영 전도사 등 많은 개신교계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개교 100주년을 맞아 예수의 정신인 사랑과 정의, 평화를 실천하는 인물 양성을 목표로 신입생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는 등 인문 교육, 현장 중심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유 총장은 "예수님의 정신으로 사랑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인물, 한국 교회를 치유할 수 있는 인물을 키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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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기도 /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소리엘

 


진정한 예배가 숨쉬는 교회
주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
믿음의 기도가 쌓이는 교회
최고의 찬양을 드리는 교회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
성도의 사랑이 넘치는 교회
섬김과 헌신이 기쁨이 되어
열매 맺는 아름다운 교회
주님의 마음 닮아서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빛되신 주님 전하는 교회
사랑의 불꽃이 활짝 피어나
날마다 사랑에 빠지는 교회
주께서 사랑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
성도의 사랑이 넘치는 교회
섬김과 헌신이 기쁨이 되어
열매 맺는 아름다운 교회
주님의 마음 닮아서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빛되신 주님 전하는 교회
주님의 마음 닮아서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빛되신 주님 전하는 교회
사랑의 불꽃이 활짝 피어나
날마다 사랑에 빠지는 교회
주께서 사랑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주께서 사랑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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