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특강 / 천사들을 싫컷 부려 먹으라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10)

 

당신의 자녀는 일등이 될 실력이 있는가?

 

신자가 불신자와 달리 이 험한 세상을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을 맛보지 못한다.

 

신앙생활이란 문자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전지전능한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의탁하고 그 분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혼자 스스로 수양하고 깨우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도덕과 철학이다.

 

물론 기독교도 구원 이후에는 도덕적 삶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러나 그 보다는 모든 삶의 구체적인 부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 받는 생활이 더 우선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과 교제해 나갈 때에만 온전히 선해지고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 선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에는 그 능력에 한계가 있고 효과도 일시적일 뿐이다.

 

최근 돌아가는 세태를 보아라. 기도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더 위험한 발상이 아닌가? 정말 겁도 없이 설치는 꼴이지 않는가? 꼭 죄악이 만연하고 영적으로 이상한 풍조때문만은 아니다. 여러분들이 실감하는 돈 문제만 해도 그렇다. 전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끝날지 아무도 예측 못한다.

 

나아가 이미 벌써 그런 징조가 나타났지만 갈수록 무한 경쟁시대가 될 것이다. 여러분의 자녀가 성인이 되어 직장을 가질 때쯤 되면 한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먹고 살기 조차 힘들어질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의 자녀가 아주 똑똑하고 일등이 될 능력과 자질을 갖고 태어 났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데도 어떻게 불안해서 기도하지 않고 가만 있을 수 있는가?

 

기도란 세상사람이 갖지 못하고 신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권세다. 우리가 저들보다 세상적 실력이 뛰어나거나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기도만이 우리가 저들보다 더 큰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무기다.

 

세상 만사는 절대 우리가 듣고, 보고, 만질 수 있는 요소들로 진행되지 않는다. 눈에 안 보이는 영원한 세계가 따로 있고 그 세계의 영적 파워가 이 땅을 주관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말씀의 뜻은 영적세계에서 이루어진 일이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통제해 간다는 것이다. 그 반대가 아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와 교통할 수 있는 기도의 이 권세는 너무나도 대단한데 신자들이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기도를 단순하게 하나님께 내 사정을 아뢰는 것, 즉 편지나 전화하는 정도로만 생각한다. “일단 내가 현재 겪고 있는 급하고 억울하고 골치 아픈 사정을 다 전해 놓았으니 이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정도로 그친다. 기도의 역할을 단지 영적인 세계와 커뮤니케이션 하는 수단으로만 제한시켜 버린다.

 

바사국 군대의 방해

 

다니엘서 10:12-14절로 가보자.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 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국 군이 이십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유다가 멸망한 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다니엘은 바벨론이 바사 제국으로 바뀌어도 그 곳에 총리가 되어 남아 있었다. 고레스 왕 3년에 세이레 동안 금식기도 한 후에 힛데갈 강가에 앉아 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예언을 받는 장면이다. 함께 한 사람들은 이 사자의 음성은 직접 듣지 못했지만 빛 가운데 나타났다는 것은 알고 떨며 숨었다. 그 사자가 다니엘에게 은총을 크게 입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리라”(11)고 하며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 날 즉 다니엘이 금식기도 시작하자마자 들은바 되었고 바로 보냄을 받았다고 했다. 하나님은 즉시 기도를 응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다고 하는가? 바사국 군대가 와서 막았다고 한다. 페르사 제국의 군대가 하늘에 올라가서 막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부하들, 흑암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랬더니 천사장 미가엘이 도와주러 와서 함께 싸우느라 지체되는 바람에 이제야 왔다고 한다. 얼마 동안 지체 되었는가? 21일 즉 세 이레다. 다니엘이 금식 기도한 기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참 대단하지 않는가? 기도란 영적 세계가 있음을 알고 단지 통신만 하는 정도가 아니다. 영적 세계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기도다. 기도는 하늘을 움직인다. 표현이 이상하지만 하나님에게 일을 시켜 먹는 것이 기도다. 하나님께 드리는 단순한 편지가 아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 하늘에서 영적 전투를 해 주시고 그러면 땅에서는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난다.

 

다니엘이 기도했던 세 이레간 하늘에서 전쟁이 있었다. 천사와 사단의 싸움이 21일 간이나 지속되었으면 그 전투는 굉장히 치열했음에 틀림 없다. 그런데 왜 기도하는 동안에만 그 전쟁이 있었는지 이상하지 않는가? 기도 중에 더 일찍 끝낼 수 있었거나 기도 마친 후에도 계속 싸울 수 있었지 않겠는가?

 

흔히 신자들이 기도가 영적 전투라는 부분에 있어 오해 하는 것이 하나 있다. 기도는 영적 전투에 들어가는 준비라고만 생각한다. 맞다. 기도해야만 이 악한 세대를 분별할 줄 알게 되고 우리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바칠 수 있다. 기도로 무장한 후 현실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세상 권세 잡은 자와 죄악과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기도 자체가 사실은 전쟁이라는 것이다. 영적 전투를 위한 워밍엎이나 훈련이 아니라 기도하는 중에 하늘에선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눈에 안 보이는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군병인 천사와 사단의 졸개들이 격렬하게 싸운다.

 

영적 바겐 세일

 

이 기사를 보고 다니엘이 금식 기도를 마치자마자 응답을 받았으니 나도 특별 작정 금식기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번 금식기간 동안 지금까지 해결 안 된 이 문제 저 문제 응답 받아야지라는 유치한 생각이 앞서면 성경을 거꾸로 읽은 것에 불과하다. 금식 기도가 특별 대청소 기간이 아니다. 우리 영혼의 창고에 먼지 쌓이고 곰팡내 나는 오랜 상처, 곪아터지기 일보 직전의 잡동사니를 꺼내 몽땅 떨이 세일 하듯 하나님께 팔아 치우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다니엘의 금식 기도 기간과 하늘의 전투의 기간이 일치했다는 것은 지난 주 말씀 드린 대로 그가 하나님이 시키신 기도를 했다는 뜻이다. 성령의 간섭으로 하나님의 기도에 동참한 것이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당신의 이 땅을 향한 애끓는 심령 애절한 마음을 다니엘의 마음에 심어 주었다. 다니엘은 그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 기간 동안 직접 전투를 벌였다.

 

그럼 도대체 하나님의 심령을 애타게 만들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에스라서 5:3-5로 가보자. “그 때에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발보스내와 그 동료가 다 나아와 저희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를 명하여 이 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고하였으나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아 보셨으므로 저희가 능히 역사를 폐하게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고하고 그 답조가 오기를 기다렸더라.”

 

바사 제국은 바벨론이 포로로 잡은 유대인들을 본국으로 귀환 시키고 성전 건축을 허락했다. 2차 귀환 시에 온 에스라의 지휘 하에 하고 있던 성전 건축을 사마리아 인들이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의기소침해져 실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다니엘이 그 문제를 붙들고 간절히 금식기도 한 것이다.

 

성전 건축이라고 해서 요즘 식의 교회당 건물 짓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시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자 전부였다. 번제로 하루를 시작하고 번제로 하루를 마쳤다. 특히 바벨론 포로로 70년간이나 붙잡혀 가 있는 하나님의 징계를 거치고 난 후 자기들이 한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간섭으로 해방되는 큰 은혜를 맛본 그들이다. 영적 부흥을 경험했고 이제는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는 한 시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고 몸소 실천하겠다는 뜻이 성전 건축으로 나타난 것이다.

 

자기의 자녀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세상 세력들에게 방해와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을 보신 하나님이 안타까이 여기셨고 다니엘로 하여금 금식하고 기도하도록 시켰다. 대신에 당신은 하늘에서 전투를 직접 담당하셨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하나님의 전 역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로 하나님의 이 전을 본처에 건축하게 하라. 다리오 왕 육년 아달 월 삼일에 전을 필역하니라”(6:1,7,15)

 

신자의 무릎에서 시작되는 역사

 

성경은 옛날 이야기 책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이다. 다니엘 같이 믿음 좋은 사람이 기도했으니 그런 일이 일어났겠지가 아니다. 다니엘은 포로 귀환에 일부러 참가하지 않고 그 땅에 남아 멀리 떨어진 조국을 향해 하루 세 번씩 기도했다. 말하자면 우리 같은 교포가 미국 시민권을 따고 자리잡고 편하게 살지만 매일 고국을 향해 기도한 것이다.

 

현재의 한국 형편을 보라. 도저히 맨 정신으로 뉴스를 볼 수 없다. 멀쩡했던 정신이 뉴스만 보고 나면 돌 지경이다. 부정부패, 음란, 사기, 우상숭배가 흘러 넘치고 거룩과 정의는 눈을 닦고 볼래야 볼 수 없다. 교회 마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럴 때에 여러분 같은 한 신령한 미국 교포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을 헤아려 간절히 금식 기도하면 한국 사회가 깨끗해진다. 영적인 부흥이 일어난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무너지고 남북한을 가로 막는 휴전선이 뚫린다. 북한 땅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 곳곳에 찬송과 기도 소리가 들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난다. 완전히 역사를 새로 기록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 고르바쵸프의 탈냉전 정책과 공산주의의 경제적 실패 때문이 아니다. 시골 교회의 이름 없는 목사가 공산 동독이 자유화되고 복음이 들어가도록 기도를 시작했고 열명 남짓의 성도들이 기도모임을 주기적으로 가진 것이 발단이 되어 전국적인 영적 부흥으로 번졌다. 성도들의 기도에 하늘에서 하나님이 미가엘을 보내어 동독을 뒤 덮고 있는 흑암의 세력과 격렬한 전투를 벌려 이김으로 수 십 년간 막혔던 콩크리트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세계 역사에 죄악과 갈등과 분쟁과 전쟁 등으로 어둡고 사악해져 타락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순간적으로 희망이 되살아 나고 빛이 들어오는 전환점들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인간들이 특별히 한 일도 없는데 마치 여리고 장벽이 무너지듯 악의 세력이 와르르 붕괴되었다. 그럴 때마다 그 뒤에는 반드시 영적 부흥이 먼저 있었고 또 그 영적 부흥 뒤에는 신령한 신자 몇 사람의 기도가 발단이 되지 않은 적이 결코 없었다.

 

하나님은 세계 역사를 신자의 무릎에서부터 기록한다. 신자의 무릎이 헤어지지 않으면 세상은 절망과 부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역사는 정치가, 사상가, 실업인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신자만이 역사의 참 주인공이다.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 일대에 큰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이반로보트라는 한 광부와 그 친구 몇 명이 모여 몇 주를 회개하며 이 땅에 부흥을 주시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 후 갑자기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불경기도 아닌데 술집, 당구장, 극장, 경마장, 도박장등에 약속이나 한 듯이 손님이 일시에 뚝 끊어졌다. 유치장은 텅텅 비어져 갔고 경찰이 할 일이 없어졌다. 큰 조선소 직공들이 회사 몰래 훔친 철강재를 아무 말도 없었는데 한 사람씩 자발적으로 되돌려 놓아 그것 만으로 큰 창고를 지을 수 있었다.

 

이 청년들이 술집을 돌아 다니며 회개하시오 천국을 믿으시오라고 외친 적이 없으며 경찰서 유치장을 돌면서 전도지를 나눠 준 적도 없었다. 오직 한 곳에 모여 간절히 기도 드린 것 뿐이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술집과 도박장 등에 자리 잡고 왕 노릇 하던 사단의 세력을 물리쳐 주신 것이다. 그곳을 출입하던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들도 모르게 미혹시켜 노예로 만들었던 죄의 사슬을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권세로 끊어 주신 것이다.

 

전 지역에 동시에 순간적으로 일어 났던 일이었다. 어느 누구도 캠페인을 벌린 적이 없었다. 하늘에서 성령의 열풍이 내려와 모든 사람의 영혼에 불어 넣어졌다. 마가의 다락방에 불의 혀처럼 임했던 성령의 바람이 죄에 찌들고 사단에 눌렸던 그들의 인생을 단 번에 뒤집어 엎고 변화시켰다. 그래서 자기들도 구체적으로 의식을 못하는 사이에 세상의 재미와 죄가 싫어진 것이다. 사단의 더럽고 추한 실체를 또렷하게 눈으로 볼 줄 알게 된 것이다.

 

천사를 부려 먹어라

 

히브리서 1:14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을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고 했다. 이 말씀을 예수 믿은 신자를 하나님이 귀엽게 여겨 각 사람에게 수호천사를 보내 주었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신자가 된 후 수호천사가 지켜주어 병에 안 걸리고, 교통사고 안 나고,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재수 없는 일이 안 생기는 그런 법은 없다.

 

분명히 성도들이 천사를 부린다고 했고 그래서 보낸다고 했다. 다니엘처럼 기도하면 여호와의 사자가 보내심을 받고 하늘에선 미가엘이 실제로 흑암의 세력과 싸운다는 뜻이다. 또 그것이 다니엘처럼 신자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가 되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것이 은총이 아니다.

 

한 번 생각해보라. 웨일즈의 그 영적 부흥이 일종의 전 사회적인 정화운동으로 나타났는데 사람이 한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아무리 유능하고 똑똑한 정치가나, 사상가나, 도덕 군자나, 심지어 목사가 나선다고 될 일인가? 하늘에서 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했던 일이라고 누구나 동의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우리의 모든 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가? 병에 안 걸리고, 교통 사고 안 나고, 자식은 공부 잘해야 하는 수호천사 식의 기도이지 않는가? 무당과 점쟁이에게 찾아가 요구하는 내용과 하나 다를 바 없다. 부르는 절대자의 이름만 천지신명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으로 바뀐 것 뿐이다.

 

예수님이 어떻게 약속하셨는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 위에 더하시리라고 하셨지 않은가?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자가 정작 빌어야 할 것을 빌어라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은 내가 책임 지겠다고 하셨다.

 

기도란 신자들이 자기 할 일은 하지 않고 손 놓고 있으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편하게 먹고 살기 위해 열심과 정성을 바쳐 대박을 터뜨리려는 수단으로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피 흘리기 까지 싸우는 영적 전쟁 자체다. 필요하다면 웨일즈의 청년들처럼 목숨을 걸고 순교할 각오로 싸워야 한다.

 

더럽고 추하며 썩어가고 있는 이 땅을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생명의 빛으로 채우셔서 새롭게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이대로 가만 두었다간 사단의 천지가 되겠습니다. 죄악이 들끓어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이 숨이 막혀 죽을 지경입니다. 썩어져 가는 냄새가 진동하여 한시도 호흡 할 수가 없습니다. 제발 이 땅을 살려서 저희도 숨 쉬게 해 주시든지 아니면 차라리 저희들을 천국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이 땅에선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더러 꼭 전세계를 책임지거나 남북한의 운명을 양 어깨에 짊어지라는 말씀은 아니다. 우리 모두 솔직히 다니엘 만큼 믿음이 견고하지는 않다. 다리오 왕을 제외한 누구에게라도 절하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 해 왔던 것처럼 창문을 예루살렘 쪽으로 열어 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할 만큼 세지 못하다. 대신에 여러분 개인의 인생, 가정, 직장, 친구, 친척들을 두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가정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제발 남편 사업 잘 되게 해주시고, 아이들 안 아프고 공부 잘하게 해 주시고 식의 기도는 이제 하지 말라. 대신에 부부 사이와, 부모 자식간에, 직장 동료 간에, 모든 주위의 아는 사람과의 사이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이 그 힘을 발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더 이상 자존심, 체면, 위신, 고집, 정욕을 앞 세우지 말고 그런 것들 때문에 서로 상처 받고 야단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쓸데 없는 짓을 위해 기도를 동원하지 말라. 가장 먼저 자신부터 속에 있는 더러운 생각, 세상을 향해 빨리 뛰어 가는 마음,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의 근성들을 예수님의 피로 씻어주어 깨끗케 해달라고 울부 짖어라.

 

자식을 위해서도 더럽고 악한 세력이 접근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 중요하다. 성령이 수호천사처럼 지켜 달라는 기도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식이 스스로 죄악을 죽기 보다 싫어하고 사단의 세력을 분별하여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다니엘 같이 신령한 기도를 할 줄 아는 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아이가 성령의 권능에 사로 잡혀 주위에 예수님의 고귀한 빛을 비추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맘껏 끼칠 수 있는 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아이가 가는 곳 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시옵소서. 하나님께 쓰임 받아 이 땅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셔야 한다. 그것도 하나님의 그 애타하고 안타까워 하는 심정과 열심을 갖고 기도하셔야 한다. 그럼 나머지 질병, 공부, 돈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신다.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는 자를 굶기시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또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기 이전에 이미 그는 그런 것들로 자기 인생이 흔들리거나 현실의 삶에서 괴로워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자로 바뀐다. 사자 굴에 던지어도 극렬한 풀무불도 그의 삶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절대 가리울 수 없는 자가 된다.

 

기도는 신자가 세상이 못 갖는 권세를 가지고 세상보다 앞서 나가게 하는 수단이 아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움, 애절함, 그 자비와 긍휼과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나가는 싸움이다. 신자더러 네가 이 땅을 끌어 안고 눈물로 부르짖어보라 그러면 내가 하늘에서 네 대신 직접 싸워줄게라는 약속의 보증이 기도다.

 

여러분과 이 교회가 아직은 연약한 모습이고 주위에 이름도 없지만 정말 세상이 누리지 못하는 권세로 기도하길 원한다. 하늘을 움직이는 기도를 하시기 바란다. 지금부터 하늘의 모든 천사들을 싫컷 부려먹어셔야 한다. 그러면 그 이름 없는 목사와 성도들 몇이서 베를린 장벽을 일거에 무너뜨린 것 같은 역사가 여러분을 통해서도 틀림 없이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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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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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주 예배 시간에 "거룩한" 카톨릭 교회(Holy Catholic Church)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거룩한 교회라기 보다는 오히려 더럽고 추한 교회인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중세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항상 교회 안에는 개혁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교회의 전반이 타락되어 있다. 자 어떻게 개혁을 실지로 가능하게 할 것인가? 중세 교회에서 개혁운동은 4가지로 이루어졌다. 첫번째는 교회의 수장이었던 교황이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개혁 운동을 주도한 경우이다. 이 경우 개혁의 효과는 즉각적이고 확실하게 나타났지만 장기적인 개혁은 불가능하였다. 개혁적인 교황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에는 개혁의 물결이 일었지만, 그 뒤의 교황은 너무나 자주 교권을 금방 타락시키고 말았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교권을 1인이 혼자 독점하게 될 때, 교회는 부패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번째 개혁이 가능한 경우는 경건한 황제가 교권에 개입하는 것이다. 중세 시대의 황제는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세우신 지도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명목상의 황제들은 자신의 세속 권력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 중에 하나님은 경건한 지도자를 세우셔서 교회를 개혁하도록 하였다. 이 개혁의 장점은 효과가 가장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무력을 통하여 교회 개혁을 할 때, 황제 앞에서 저항하는 세력은 미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개혁의 단점은, 황제가 언제나 교회 일에 신경을 쓸 수 없다는 것이고, 다음 황제의 입장에 따라 개혁이 개악이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다. 사실상, 황제가 교회에 깊숙히 개입하면 할 수록 교회는 타락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세번째 경우는 수도원 운동이다. 교회가 전반적으로 타락될 때 수많은 참된 신자들은 세속을 벗어나서 참된 신앙의 모임을 추구하였다. 곳곳에 수도원이 세워졌고 이 수도원들에서는 중세 시대 유일한 학문의 장이 되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수도원이 했던 중요한 일은 도서를 보관하고 손으로 필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수도원을 통해서 중요한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이러한 인물 중에는 나중에 교황으로 선출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교황은 수도원에서 가졌던 이상을 교회에 적용시키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수도원은 노력 역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수도원은 기본적으로 제도권 밖의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는 엄격한 규율과 질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일반 교회에는 적용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수도원은 교회에 개혁의 이정표로써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네번째 경우는 공의회 운동이다. 교황의 절대 권력이 교회를 부패하게 하기 때문에 교황을 공의회의 권한 아래 두어서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다. 중세 기간 동안 교황이 둘 혹은 셋으로 나누어서 서로가 싸운 적이 있었는데 이 들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공의회였다. 공의회란 모든 주교들이 함께 모여 최고의 권위로 교회 일을 결정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공의회도 한계가 있었다. 공의회는 각 나라가 모인 단체였기 때문에 각자 이해관계가 달랐고 명백한 문제가 아닌 한 한 목소리를 내기가 불가능하였다. 이들 중에는 순수한 의미에서 개혁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명백하게 이해 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꾼들도 많았다. 결국 공의회 운동은 교황의 공작으로 실패하고 만다.

 

자 이와 같은 4가지 관점에서 고신교회를 보도록 하자.

 

1. 우리에게는 교황이 없다. 총회장이 있기는 하지만 임기가 1년이기 때문에 강력한 총회장의 리더쉽으로 개혁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간혹 총회장이 우리 고신교단을 대표한다고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장로교 법상 총회장은 Moderator에 지나지 않는다. 즉 총회가 열리는 기간 동안 사회를 보며 중재를 보는 사람이다.

 

2. 우리에게는 경건한 국가 지도자도 없다. 김영삼 대통령이 있기는 했지만 한국 교회를 위해서 그가 한 일은 내가 알고 있는 한 아무것도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교단의 일부의 개혁은 국가기관인 교육부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앞으로도 우리가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교육부에 의해서 강제적인 조치들이 있을것이라고 한다.

 

3. 우리에게는 수도원도 없다. 물론 무척산 기도원과 같은 기도원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기도원은 반 지성주의에 물들여 있어서 중세 시대와 같은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기도원 같은 곳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 보면서 기도하는 분도 있겠지만, 교회의 개혁은 기도만 하면 된다는 반지성주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4. 우리의 총회는 개혁의 힘을 상실하였다. 한국 교회는 너무 개교회 중심적이기 때문에, 총회를 통한 개혁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 계파의 이익만이 대변되기 때문에 중세와 같은 개혁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고신의 개혁의 기치를 내건 고목협이라는 모임도 부정선거에 대해서 어떠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 모임이 어떤 이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해득실 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한 교회의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중세 역시 자신을 개혁하지 못함으로 인해 결국 참 교회를 분리시키고 말았듯이 우리 한국 교회도 교회를 분리하지 않고는 도저히 개혁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종교개혁의 시대와 다른 점은 우리에게는 바른 신학과 바른 교리와 바른 교회 정치의 원리가 있으나 그것을 현실에 적용시킬 힘이 없다는 것이다.

 

,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 개혁의 기치를 내 거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좀 한심스러운 것은, 그 사람이 바로 개혁의 대상인 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놓지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의 개혁은 자신을 개혁시키면 개혁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조심스럽게 쓰려고 한다. 이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교회 정치꾼들이 이 말을 쓴다면 "너나 잘해"라는 소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다운 교회 개혁을 꿈꾼다면 우리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인정하는데서 논의가 출발되어야 할 것이다. 중세 교회사를 보아서 알겠지만, 지금 우리 교회는 개혁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리 스스로를 개혁시키고 교회의 자녀들을 잘 교육시키고 자기가 속한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통해서 우리 교회 전체가 개혁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불쌍한 우리 교회에 임한다면, 우리는 종교개혁 당시의 참된 교회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품에 갈 수 있을 지 모른다. 성령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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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훈련 인도자가 갖춰야할 조건

 

제자훈련 인도자의 자격, 실력의 문제라기보다 자세의 문제다 
옥한흠 목사 _ 국제제자훈련원 원장 

 

목회 일선에서 물러난 후 나는 종종 제자훈련의 진미를 몰랐다면 내 목회 생활이 퍽 황량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제자훈련이 나의 목회의 행복도를 가늠하는 절대적인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훈련생들과 몇 시간씩 함께 둘러앉아 은혜를 나누던 그 순간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지금도 행복하다. 

예배 참석자가 만 명을 넘어서고 건강을 다쳐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나는 제자훈련에 이어 사역훈련까지도 부교역자에게 넘겨야 했다. 그때 가끔씩 남몰래 부교역자가 인도하는 사역훈련반 문 밖에 서서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너무 안타까워하곤 했다. 이제는 그런 일마저 그리운 추억이 되고 있다. 

아직도 나는 40여 년 전에 제자훈련을 통해서 만난 형제자매들과 또 훈련 이후에 함께 은혜를 나눈 수많은 영적 제자들과 끊임없이 교제를 나누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자훈련이야말로 나를 행복한 목회자, 후회 없는 목회자로 만들었다는 말을 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나의 이러한 입장 때문인지 종종 나에게 어떻게 하면 제자훈련을 잘 할 수 있는지 혹은 어떤 요건을 갖추어야 제자훈련에 성공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격을 논하자면 끝이 없다고 생각한다. 

제자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사는 온전한 자의 자리이기에 그 목적을 만족스럽게 충족시킬 만큼 모든 조건을 갖춘 지도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목표가 구름에 가리운 높은 정상인 것처럼 인도자의 자격도 거기에 걸맞은 것이어야 하는데 누가 여기에 완벽하게 부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도자의 자격은 실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세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훈련이 성공할 확률은 훈련에 임하는 지도자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느냐에 많이 좌우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시간 나의 경험을 살려서 자세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제자훈련은 예수님에게 빠져서 하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빠지는 것을 흔히 은혜라고 말한다. 은혜가 많으냐 적으냐는 나의 마음이 얼마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만족하느냐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나의 제자훈련 40년을 돌아보며 몇 번이든 반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제자훈련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가 한다는 것이다”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제자훈련에 임하는 지도자는 자기가 은혜 받은 스토리가 분명할수록 좋다. 

그렇다고 무슨 별난 체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이런 체험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럼에도 언제 은혜를 받았으며, 그 은혜가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내가 은혜에 취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은혜는 식지 않고 지속이 되었다. 성경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진하게 가슴을 울리는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황홀하게 만드는지, 나는 이 기간에 넘치도록 맛보면서 살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이 강렬한 은혜의 맛이 서서히 식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그 은혜의 경지를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때에 받은 은혜가 내 한평생의 신앙생활과 목회의 질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은혜 때문에 나의 제자훈련에 남다른 감동과 눈물과 기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은혜를 가슴에 안고 대하는 마음 자세가 제자훈련의 성공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제자훈련은 자격 미달자라는 자책감을 숨기고 하는 것이다. 

제자는 제자가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성경적인 진리이다. 지도자가 예수의 제자와 거리가 멀 때, 그를 통해 제자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지상 교회에서 성취가 불가능한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실이 제자훈련을 남보다 큰 소리로 외치는 나의 기를 꺾어 놓았고, 항상 떠나지 않는 가책을 마음에 담고 살게 만들었다. 

은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모인 여순장반이었다. 나는 의도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 보았다. “우리는 25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옥 목사가 작은 예수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으면 손 한번 들어보십시오.” 손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예수님의 제자에 대해서 설득력 있게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지만, 나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작은 예수의 모습을 투영하는 데는 매우 미흡했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는 셈이었다. 이것이 정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내 마음에 숨겨놓고 있는 자격 미달의 지도자라는 자책감도 크게 탓하지는 않는다. 바울도 비슷한 데가 있지 않았나.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주님이 원하시는 기준에 많이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자신 있다고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갖는 지도자보다 실패의 위험을 훨씬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자훈련은 마음을 비우고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제자훈련을 하면서 마음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지도자들이 있다. 교역자라는 권위의식, 교회를 빨리 성장시켜야 한다는 성급함, 인기와 존경에 대한 갈급증 등 별로 건강하지 못한 소원을 마음에 담고 훈련을 시키려고 드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찌끼들이 계속 남아서 악취를 풍기면 십중팔구 제자훈련은 빗나가거나 실패하고 만다. 
지도자가 마음을 비우면 비울수록 훈련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 빈 마음을 통해서 성령은 말씀으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비었는지 차 있는지를 증명할 필요는 없다. 자연스럽게 알려진다. 

이상한 일이지만 훈련생들이 나의 마음을 너무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 하고 놀랄 때가 자주 있었다. 나도 한때는 마음을 완전히 비우지 못해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다. “천 명의 순장이 뛰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교인이 200명도 채 되지 않을 때 예배 시간에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내 입에서 튀어나온 기도였다. 이것이 한동안 교인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나를 향한 비아냥거림이 되기도 했다. 

내 속에 무서운 야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정도로 내가 야심에 들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마음 구석에 나도 모르게 자리를 잡고 있던 생각의 찌끼였던 것인데, 그것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가 망신을 당한 것이었다. 나는 정말 충고하고 싶다. 제자훈련의 열매를 넘치게 받고 싶은가?

마음을 비우고 시작하라. 

제자훈련은 함께 배우고 성장하려는 열정으로 하는 것이다. 
제자훈련은 지도자가 구름 위에 앉아 있거나 설교단에 서 있거나 수많은 청중 앞에 선 스타의 자리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소수의 사람 가운데 끼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함께 뛰어가는 것이 제자훈련이다.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소그룹은 ‘두세 사람’의 모임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주님이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은 두세 사람의 모임이나 제자들의 공동체뿐이다. 

작은 공동체의 한 사람이 되어 말씀을 나누는 것이 제자훈련이기 때문에 지도자는 자연스럽게 배우는 훈련생과 함께 모든 것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 은혜를 같이 나누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그를 위해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놀랍게도 많은 지도자들은 이 단순한 진리를 가볍게 알고 넘긴다. 가르치려고만 들지 배우려는 자세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은혜를 끼쳐야 된다는 의무감은 있어도, 눈앞에 있는 형제를 통해서 내가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부족한 것이다. 그 시간에 성령은 똑같이 역사하시는데 자기를 통하지 않고는 은혜가 임하지 않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착각할 때가 많은 것이다. 

내가 제자훈련을 하면서 두려웠던 것 중에 하나는 종종 나보다 앞서 뛰는 훈련생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남자 제자반을 인도할 때였다. 말씀을 적용하는 시간에 이성에 관한 각자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 마음으로도 간음할 수 있다는 말씀이 적잖은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마음으로 간음한 일이 한 번도 없는 남자가 몇 명이나 될까? 

그런데 그 시간 우리는 퍽 솔직해졌다. 나를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변화를 받은 형제들이 여러 명이나 있었다. 우리가 논한 것은 마음에 숨겨진 감정이었는데, 그 감정이 은혜를 받으면서 깨끗해졌다는 고백을 하는 형제를 보면서 내가 매우 부끄러운 지도자라는 죄책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나는 아직도 이런 사람이다라고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자훈련의 경륜이 쌓여가면서 훈련생들을 통해서 내가 받아야 할 은혜가 얼마나 많은가를 더 깊이 알게 된 순간이었고, 그것이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축복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신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평신도로부터 주님의 책망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제자훈련을 하라. 그게 싫으면 그만두는 것이 좋다. 

제자훈련은 집중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제자훈련을 중도에 포기하는 지도자들의 경우, 거의 대부분은 ‘집중’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집중이란 목회의 우선순위에서 제자훈련이 뒤로 밀리지 않도록 최선의 관심을 쏟는 태도를 말한다. 다른 사역이 지장을 받더라도 제자훈련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확고한 결단을 의미한다. 제자훈련에서 이 태도가 왜 성패를 좌우하는지는 1, 2년이라도 훈련을 해 본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생각이 여기저기로 흩어지거나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집중을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자연히 훈련의 강도가 떨어지고 힘이 드니까 쉽게 포기해버린다. 그래서 대부분 성경 공부 프로그램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나의 과거를 돌아보면 자화자찬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제자훈련에서 다른 데로 눈을 돌린 일이 한 번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외부에서 집회를 요청해도 열 중에 한 건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외부적인 행사나 조직에 참여하는 것도 최대한 절제했다. 심지어 가족들과 단란하게 시간을 가지는 것도 많이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목회를 위해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프로그램들이 많았지만 제자훈련에 도움이 되는 것들 한두 가지를 빼고는 거들떠보지를 않았다. 목회 콘텐츠를 할 수 있는 한 단순화 시키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이런 예들은 제자훈련에 집중하고자 하는 나의 결단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만일 내가 제자훈련을 부교역자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밖으로 돌면서 사역을 했든지, 싫증이 나서 이것저것에 손을 대었더라면 오늘의 사랑의교회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집중해서 개인적으로 치른 대가가 만만치 않았지만, 나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제자훈련이 목회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이 한 가지에만 전념을 하기에도 목회 인생이 너무나 짧다고 생각한다. 

제자훈련은 영적 전투를 치르는 것이다. 
교회와 대결해서 진을 치고 있는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일까?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일까? 교회의 양적인 부흥일까? 목회자의 탁월한 설교일까? 아니면 예배나 프로그램에 부지런히 출석하는 성도들의 열심일까? 나는 아니라고 믿고 있다.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가장 작아 보이는 자라도 천을 이루고, 가장 약해 보이는 자라도 강국을 이루는 놀라운 사건들이 교회 안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것이다. 기적을 구경하고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수만 명의 무리와 같은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는 마귀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은 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제자훈련만큼 마귀의 유혹과 도전이 격심한 목회 현장이 또 있는지 모르겠다. 지난 40년 동안 목회 하면서 제자훈련에 집중하는 나를 사탄이 얼마나 집요하게 시험하고 공격하고 또 자주 쓰러뜨렸는지 모른다. 이 모든 시험을 이겨야 제자훈련이 성공할 수 있다. 가끔은 패배하는 일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야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어떤 목회자는 너무 싱겁게 백기를 드는 것 같다. 몸이 좀 피곤하니까, 부끄러운 스캔들에 휘말려서, 교회가 좀 성장하니까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져서 등의 이유로 제자훈련을 내려놓는 것을 본다. 이런 지도자들은 그것이 사탄의 간교한 유혹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버리는 자와 같다. 

단적으로 말해서 제자훈련은 치열한 영적 전투이다. 지도자는 그 전투의 선봉에 선 장군과 같다. 적진을 환하게 꿰뚫어 보는 영안을 가지고, 때마다 적절한 대처를 하면서 자기도 지키고 훈련생들도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제자훈련은 최선의 모범이 되지 않으면 차선의 모범이라도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자훈련은 목회자에게 정말 두렵고, 어려운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는 청중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강의는 해박한 지식의 그늘에 자신의 진면모를 숨길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심방이나 상담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제자훈련은 열 명 내외의 소그룹 안에서 지도자의 모든 것이 노출되고 만다. 말씀 앞에서 모두가 벌거벗은 것 같이 자기를 드러내는데 지도자라고 해서 정장을 하고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좀 지나친 말인지 모르지만 티끌만큼도 숨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작은 예수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훈련생들이 알게 모르게 따르게 되는 최선의 모범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훈련 교재는 있는데 살아 있는 모범이 보이지 않는 죽은 훈련이 될 수 있다. 

내가 제자훈련을 하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이런 점이었다. 그동안 내가 모범이 되지 못해 영적으로 실족한 훈련생들이 얼마나 될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선의 모범이 못되면 차선의 모범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감히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던 것 같다. 나는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좋은 목사가 되고 싶은가? 제자훈련에 미쳐라.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온 교회가 존경하고 따르는 모범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훈련은 남을 위해 하는 것이라기보다 나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말이 더 솔직한 고백일 것 같다. 

제자훈련은 기막힌 행복을 누리면서 하는 것이다. 
목회자만이 아는 행복의 비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반 사람들이 누리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해도 남모르게 누리는 행복의 비밀들이 있다. 누가 나에게 목사로서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였는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제자훈련을 통해 영적으로 잠자던 자들이 깨어나고, 삶의 목적이 바뀌고 인격적인 결함이 치유되고 가치관이 달라지는,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아름답게 헌신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고, 그것이 한 번의 변화로 끝나지 않고 10년이 넘도록 지속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며 감격해 할 때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매우 행복한 목회자였다. 

흔히들 나를 보고 매 주마다 수만 명의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보람있느냐고 하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설교가 나에게 보람은 안겨주었을지 모르지만, 행복을 느끼게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설교의 부담감 때문이었다. 설교에 실망하고 돌아가는 숨은 군중들을 생각하면 두 번 다시 강대상에 서고 싶지 않을 때가 없지 않았다. 

나의 진짜 보람과 행복은 제자훈련의 현장에서 자주 체험했다. 설교를 통해서 은혜 받고 변화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구체적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자훈련은 누가 은혜를 받았는지 그래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 후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 이 말씀이 실제로 입증되는 사역이 제자훈련이다.
 
나처럼 모자라는 사람이 가르치는 자리에서 어떻게 저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이것은 사람의 머리로는 풀 수 없는 신비한 수수께끼다.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는가를, 제자훈련을 하면서 시간마다 경험하는 행복을 누려보지 않고 어떻게 이 신비를 알 수 있겠는가? 

그동안 나는 제자훈련을 통해 놀라운 열매를 거두는 목회자치고 행복해하지 않는 자를 한 사람도 본 일이 없다. 어떤 때는 은퇴해서 늙어가는 나의 처지로 보면 샘이 날 정도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왜 제자를 만들라고 하셨는지 나는 조금은 알고 있다. 우리 모두가 행복한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목회가 힘든가? 감격이 없는가?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예수의 제자를 생산하는 제자훈련의 현장으로 찾아가라. 거기에 당신이 찾고 있는 정확한 해답이 있다.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당신을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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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표준               

 

[1] 예배에 대하여

 

1.예배의 뜻

(1) 성소 (교회)에서 하나님을 창양합니다. (시150)

(2) 창조주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는것 (요424)

 (3)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는것 (롬12:1)

 

2.예배의 목적

(1) 예배자의 신앙을 성장키 위하여 (엡4:11-15)

 (2) 타인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고전 14:23-25)

(3)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시29:2, 고전10:31)

 

3.예배의 태도

(1) 무릎을 꿇고 경배드려야(참회와 용서)(시95:6)

(2) 땅에 엎드려 경배드려야(비하와 겸손)(욥1:20)

(3)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드려야(존경과 감사)(마26:39)

  

[2] 기도에 대하여

 

1. 기도의 뜻(기도란 무엇인가?)

(1) 하나님과의 대화요 영교(시91:14, 사1:18)

(2) 영혼의 호흡(롬12:12, 살전5:17)

(3)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마7:7,렘29:2-13)

 

2. 기도할 이유(왜 기도하는가?)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요14:13)

(2)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기 때문(시145)

(3) 어려울때 하나님의 도움을 위하여 (시50:15,120:)

(4) 무엇보다 하나님으로 부터 죄 사함 받기 위하여 (역대하7:14)

  

3.기도의 방법 (어떻게 기도를 하는가?)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시22:19 -24)

(2) 받는 은혜 생각하며 감사하라(시100:,행16:25-)

(3) 모든 죄를 고백하며 회개 자복하라(요일1:9,시94:9)

(4) 하나님 영광을 목적으로 소원을 간구하라 (빌4:6)

(5) 나라, 교회,이웃형제를 위해 기도하라(행8:15, 삼상7:5)

(6) 기도는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하고 "아멘" (진실로 그렇게 되기 바랍니다) 으로 마쳐라 (요14:13)

 

4. 기도의 효과

 

(1) 사죄의 은총을 받게된다(기쁨 , 평안)(롬8:1-39)

(2)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원수위해 기도)(마5:44)

(3) 성령의 은사를 체험케 된다(오순절 역사) (행2:1-13)

(4) 하나님의 능력을 얻게 된다(겟세마네 기도)(마26:36)

(5) 병자 고치는 기적을 체험케 된다(병자 고침)(약5:15)

(6)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다(히스기야 기도)(사38:1-8)

  

[3] 찬송에 대하여

 

1.찬송의 뜻

(1) 하나님께 감사와 헌신을 곡조로 표현한 기도 (시47: )

(2) 우리의 신앙고백을 노래로 간증하는것(시23: )

(3) 우리를 불러 하나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께 찬양하는 노래(시150:)

  

2. 찬송의 효과

 

(1) 기쁨과 은혜를 체험케 함(약5:13, 즐거울 때 찬송)

(2) 능력을 얻게 함(마26:30 예수님의 제자들 찬미)

(3) 신앙을 성장케 함(사38:18-20 히스기야의 찬송 생활)

 

 

3. 찬송의 결과(축복)

(1) 모든 대적을 물리쳐 주심(사42:10-13)

(2) 이혜화 총명을 주심 (단2:20-23)

(3) 놀라은 기적을 베풀어 주심 (행16:25-34)

(4) 기쁨과 평강을 충만케 하여 주심(롬15:11-13)

(5) 찬미의 제사 하나님이 기뻐하심(히13:15-16)

  

[4] 헌금에 대하여

 

1.헌금의 뜻

(1)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마6:20)

(2)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림(마22:21)

(3) 하나님께 받은 은혜 감사 표시(신16:15-17)

(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 척도 (고후9:7)

(5) 주님 사업에 참여 함이다(고후8:4)

(6) 스스로를 주님께 드리는 표시(고후 9:5)

 

2. 헌금을 해야 할 이유

(1)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레27:30, 사66:20)

(2)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마23:23)

(3) 성령께서 권상하셨기 때문(행 :44)

(4) 교회가 요구하기 때문(행 4:32)

(5) 그리수도인의 본분이기 때문(성도를 돌봄)(눅8:3)

 

3. 헌금의 방법

 

(1) 많이 심는 자가 많이 거둠(고후 9:6)

(2) 인색한 마음이나 억지로 하지 말것(고후 9:7)

(3) 감사함으로 즐겨드릴 것(고후9:8,스1:4)

(4) 빈손을 하나님께 보이지 말 것(출23:15,34:20)

 

4.헌금과 축복

 

(1) 하나님께 바치는 자는 범사에 복을 받음(신14:28)

 (2) 하늘문을 열고 창고를 넘치게 채워주심(말3:10)

(3) 하나님이 다 갚아주심 (잠19:7)

(4) 하나님께 바치는 자 하나님이 사랑하심(고후9:7)

(5) 후히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안겨주심(눅6:38)

  

[5] 성경에 대하여

 

1. 성경을 주신 근본 목적

(1) 영혼의 양식으로 인생을 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해 (딤후3:17)

(2)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주심(갈3:22)

(3)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위해 주심(요20:31)

(4)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주심(요5:13)

 

2. 성경을 읽어야 할 이유

(1) 마음이 평안케 되므로 (시85:5 -8)

 (2) 행실이 깨끗하게 되므로 (시119:9)

(3) 죄짓지 않게 되므로 (렘15:16)

(4) 기쁨이 충만케 되므로 (렘15:16)

 (5) 남보다 지혜롭게 되므로(시119:98,100,130)

(6) 기도의 능력을 얻으므로(요15:7)

(7) 거짓교훈에 속지 않게 되므로 (딤후3:13-15)

 (8) 모든 선행이 완전케 되므로 (딤후3:16-17)

(9) 악을 이기게 되므로 (요일2:14)

(10) 근면하게 되므로 (행17:11)

 

3. 성경이 우리에게 유익되는 것

(1) 새 사람 됨(벧전1:23)

(2) 강건하여 짐 (엡6:10)

(3) 시험을 이김 (마4:1-11)

(4) 좋은 인도자가 됨(딤후2:15, 3:15-17)

(5) 자기를 발견케 함(히4:12)

(6) 기도의 능력을 얻음(요15:7)

(7) 보호하고 완전케 함(행20:29-31)

(8) 굳센 믿음을 얻음(롬10:10-17)

(9) 죄를 피할 수 있음(벧후 1:4,시119:9)

(10) 영생이 있음을 알게함(요5:39,요일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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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역사와 그 발전 

 

들어가는 말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의 예배는 오늘 시대에 맞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추구할수록 요청되는 것은 예배의 본질과 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이다. 역사를 아는 자가 힘이 있다는 말은 예배의 분야에도 적용된다. 오늘 교회의 예배는 수천년을 말없이 흐르고 있는 강물처럼, 교회의 시작에서 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굽이굽이 흘러오고 있다. 그러기에 예배연구를 위해서 한 부분을 파편처럼 떼어내어 연구할 수는 없다. 예배의 역사와 그 발전을 고찰하는 것은 오늘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진단과 계획과 변화를 위해서는 필요하다.

여기서는 오늘 예배갱신을 위해 필요한 기초적인 예배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한국교회의 예배의 갱신을 위해서 필요한 예배역사 중에서 중요한 특징만을 언급할 것이다. 또한 단순한 예배의 형태를 지닌 한국교회에 호소력있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 예배와 청교도 예배에 보다 중점을 둔다. 예배의 역사와 발전을 고찰하기에 앞서, 연구의 의의를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것이다.

첫째, 오늘 교회 예배의 형태와 요소가 지닌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중세 로마천주교의 복잡하고 신비로운 예전에서 표현되는 예전적 행동들의 의미를 회중은 물론, 집례하는 사제들까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배운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에 대해 칼빈은 강하게 거부감을 갖고 비판한다. 예배적 행위는 이해되지 않을 때 미신적인 행위로 전락하게 된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예배형식이 비교적 간단함으로 그와같은 일이 잦지는 않을지 모르나, 그렇다고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몇차례의 성례전연구세미나을 인도하면서 확신하게 되는 것은 성례전에 대한 신학적, 예전적, 역사적 이해를 깊이 하는 만큼, 성례전을 통해 얻는 은혜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둘째, 예배의 역사와 발전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는 잊혀져 있으나 역사 속에서 표현된 예배의 유산들을 찾아낼수 있다. 한 때, 역사적, 문화적 이유 때문에 생략되거나 축소된 부분들이 많이 있다. 그것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면, 성경봉독은 초대교회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예배요소였다. 설교는 성경본문을 위해 봉사, 즉, 해설과 적용하는 것이었다. 성경본문을 낭독하는 시간이나 차지하는 위치에서 오늘 개혁교회의 말씀중심의 예배에서는 오히려 퇴보한 면이 있다. 설교를 위해 봉사하는 위치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셋째, 예배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예배의 변화의 패턴을 고찰함으로 예배의 갱신의 원리를 삼을 수 있다. 시대, 문화와 장소가 바뀜에 따라 그에 맞게 예배의 형태가 변할 때, 변하지 않았던 원칙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한정된 지면에 방대한 그리스도예배의 역사를 다 담을 수 없다. 예배역사연구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도전을 준다면 이 글의 목적을 다하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예배발전의 개요


개신교예배는 개혁자들의 신학과 예전으로 부터 시작하여 교단마다 강조점을 달리하며 발전해나갔는데, 한가지 공통된 특징은 다양성이다. 지역마다 시대에 따라 예배의 형태가 다르게 표현되었고, 개신교회는 서로 크게 대립하지 않고 이러한 다양성을 수용해 왔다. 이러한 개신교예배는 성서의 초대기독교공동체의 예배와 초기 교부들에 의해 유지되었던 예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기독교 예배의 역사와 발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전통과 개혁의 변증법적 변형이다. 기독교 예배는 시대마다 전통적인 예전에 예속되려는 성향과 그것으로부터 자유하려는 개혁적 시도가 긴장 또는 갈등구조를 유지하며 변천되어왔다.


1. 초대기독교

초대 기독교의 예배에는 일정한 형식과 자유가 어우러져 있었던 것 같다. 천국복음의 전파와 종말론적 사건이 전개되는 제자공동체에는 황무지를 개간할 때와 같은 자유함이 있었다. 한편으론 유대교의 회당예배와 불가분리관계에서 그 형식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었다. 분명한 것은 초기 기독교예배는 유대교의 하나님 예배와 동일한 기초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초대기독교예배에 전통에의 예속과 새로운 세계를 여는 자유로움의 특성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스카 쿨만이 지적한 것처럼 초대기독교예배는 비록 예배의 내용에 있어서는 유대적 전통에 예속되지 않았지만, 형식에 있어서 유대교 예배의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예배의 구조는 물론이고 각 요소들도 직접 간접으로 유대적 표현을 따랐다. 그러나 초대공동체 예배의 특징은 그들의 자유로운 영적표현에 있다. 그들의 자유로운 예수의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유대적 전통들을 새롭게 해석한 예수의 종말론적 선언과 행위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러한 자유를 유대교가 허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자연히 원시기독교예배는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훼르디난드 한이 지적한 원시기독교 예배가 유대교 예배로부터 나와 새로운 형식을 요구한 것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행위의 현재적인 현실성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원시공동체의 본질적인 세가지 요소는 예수의 활동과 죽음, 예수의 부활과 현재, 임재, 그리고 성령의 활동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유대교 예배와 함께할 수 없는 상이점이라는 것을 들었다. 초대기독교예배는 이 세가지 본질적 요소의 상관 관계를 통해 잘 이해된다. 즉, 부활의 증인들은 예수의 활동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으며, 성령의 강림과 활동을 통하여 보증을 얻었으며, 바로 여기에서 공동체의식이 성취된 것이다. 이런 초대공동체의 특이성은 유대교예배의 전통의 예속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 주었으며, 이후의 예배의 역사 속에서 변증법적 변형을 이루어가는 중심적 요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초대기독교예배가 유대교의 예배에서 분리되어가는 과정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대기독교공동체의 형성과 발전과 함께 고찰해야 한다. 한(Hahn)은 초대기독교공동체를 다음과 같이 네부류, 즉 아람어를 사용한 기독교 공동체, 헬레니즘저 유대인 기독교공동체, 이방인기독교공동체, 속 사도시대의 예배로 나누어 이 공동체들의 예배와 유대교의 예배의 상관관계를 역사적으로 기술한다. 먼저, 아람어를 사용한 기독교공동체예배는 사도행전 2-5장의 누가의 진술에서 알려졌는데, 유대교예배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하는 면들을 보여준다.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보인 곳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겠다"(마 18:20)는 말씀은 유대교적 예배이해를 거부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대교 예배에 필요한 소수 열 사람이 포기되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예수의 세례로, 유월절 식사는 성만찬으로, 마라나타기도, 구원소식의 선교설교등은 기독교공동체의 독특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아멘, 할렐루야, 기도형식등 유대교예배적 표현들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또한 성전과 율법의 경우 중심적 위치에서만 벗어났을 뿐, 이 공동체에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 성전과 회당은 선포와 선교의 장소였다. 후에 주의 형제 야고보가 예루살렘 공동체의 독자적 지배력을 인수한 이후에는 강화가 되어 엄격한 율법준수, 유대적 제의 질서에의 충실등 편협한 유대인 기독교가 형성되었다.

그 다음, 스데반, 빌립, 바나바를 중심으로 예루살렘과의 연대를 유지하며 안디옥에서 발전했던 헬리니즘적 유대인기독교공동체는 사도행전6장1-6절의 기사에서 히브리적 유대인기독 공동체와 확실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되는데, 유대교 예배에 있어서 더욱 확실히 분리시키고 있다. 헬라어구약을 사용하고,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도 예수의 의도를 더욱 철저히 받아들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공동체에서 유대적 제의적 표상들을 종말을 선언함과 동시에 기독론적이고 교회론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율법과 성전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셋째, 초기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에는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예배의 본질적 요소를 수용한 채, 성령의 활발한 활동이 포함되었다. 이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보여주는 예배의 설명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데, 사도적 교훈에 포함할 수 있는 교훈(디다케), 계시, 지식이 있고, 아멘이나 방언, 마라나타의 기도의 요소, 찬미가 있다. 여기에 다른 곳에서 성렁의 은사로 분류한 예언, 방언, 통역의 요소들도 언급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부적으로는 무질서와 분열, 그리고 공동체의 폐쇄성이고, 밖으로는 주위 세계의 이교적인 사상의 위협이였다. 이것을 간파한 바울은 한편으론 질서와 통일성, 공동체의 덕, 예배의 이해성을 강조하였고, 다른 한편으론 유대주의에 대해서처럼 혼합주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노력들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저항하였다.

마지막으로 속 사도시대(60년초부터 1세기말)의 예배는 요한계시록 히브리서, 야고보서, 목회서신,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에서 간접적인 자료들을 찾을 수 있다. 이 시대는 은사적인 형태가 전례적인 공식문과 공동체의 직분적 질서에 의식적으로 결부딤으로써 부분적으로 약화되는데, 따라서 유대적 제의개념들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시에 기록된 요한계시록의 경우에 종말론적 기독론적 메시지를 유대묵시문화적 표상자료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계시록4, 5장의 천상예배를 보라] 히브리서 역시 제의적인 진술로 가득차 있다.[7:1-10:18] 야고보서에는 아람어를 사용한 유대인 기독교에서 수용된 장로제도가 전제되어 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정체성을 전통적인 제의적 술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벧전2:5,9] 이 시대는 목회서신에서 처럼, 문서와 교훈이 나타나고, 전례적인 공식문과 공동체적 질서가 구체화되는데, 따라서 예배의 살아있는 은사적인 형태는 의식문에 흡수되어 약화되었다.


2. 교부시대와 중세시대

콘스탄틴대제의 회심이전까지 기독교예배는 사적예배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회심은 예배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변화는 사회관습을 수용하여 시민을 위한 예배를 꾀한 것이었다. 바실리카식 건물, 예복, 행렬, 촛불, 향등이 들어왔고, 세례와 성찬의 예전적 구조가 이때 고정되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이후 시대의 예전의 기초를 이루는 왕성한 예배의 발전를 이룸과 동시에 그만큼 초대교회의 종말론적을 기대가 희미해져갔다. 중세에 이르러 예전의 복잡함과 화려함은 극치에 달하지만, 이미 오신 주님과 그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맥스웰은 라틴예전의 부정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자국어로 진행하는 프론(Prone)이란 부분 이외에는 라틴어를 사용하므로 회중의 참여를 약화시켰으며 예배를 불건전한 신비적 분위기로 빠져들게 했다. 이런 신비감 조성에는 예배의식의 정교하고 복잡함이 가세하였다. 시편송이 줄고 수준높고 기교적인 음악이 늘어갔고, 회중들을 의식 진행과 연결해주던 부제의 역활도 집례자의 단순한 보조자 정도로 약화되었다. 무엇보다도 미사 횟수가 경건의 잣대처럼 되어 미사의 횟수가 증가 했고, 사적 미사로의 길을 터 주었다. 미사는 회중에 의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적 미사처럼 회중을 위해서 드려졌다. 본당이외에 부속건물을 둔 것이나 동방교회와는 달리 교회 안에 여러 개의 제단을 둔 것이 이를 반영한다.


3. 동방교회

동방교회 예배는 상징적인 행위들로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재현해 보이며, 따라서 길고 반복되는 것이 많다. 폴 버기스(Paul Verghese)는 동방교회 예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무엇보다도 자국어(vernacular)사용의 권장인데, 이는 서방교회와의 큰 차이점이 된다. 서방 로마캐톨릭교회는 라틴어를 그들의 예전의 유일한 언어로 제2바티칸 공의회까지 사용했던데 비해 동방교회는 성경과 예식서(the Divine Liturgy)는 회중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 초기때부터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회중의 참여(Congregational participation)다. 무엇보다도 이 예전에서의 부제(deacon)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은 사제들이 성소막 안에서 예전을 집행하는 동안 제단에 서서 회중에게 중보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인도한다. 넷째, 사제 혼자 성찬 집례를 허용하지 않는다. 적어도 세사람, 즉 사제와 집사와 회중의 대표하는 한사람이 있어야 한다. 에디오피아 동방교회는 두명의 사제와 세명의 집사가 성찬을 가질 수 있는 최소한 인원이다. 사제들은 매일 성찬을 할 필요가 없었고 함께 나눌 회중이 있을 때에만 성찬을 행했다. 다섯째, 성령임재기도(epiklesis)인데, 서방 로마예전에서는 성찬제정어 전에 하는 봉헌기도중에 드려지는데 비해, 동방교회는 성찬제정어 후에 드리기 때문에 성물이 성별되는 시점을 놓고 서방교회와 논쟁이 있었다. 여섯째는 성상(icon)과 성소막(iconostasis), 예배신학적인 면에서는 예배의 신학적 풍부성, 그리스도의 몸 전체에 대한 철저한 인식, 화려한 詩語에 담긴 신실한 경건성, 기도문의 성경중심성, 예전적 색깔, 소리, 움직임등의 구체적인 예전 형태와 행위, 예전형태의 다양성이란 특징을 보여준다.


4. 종교개혁당시의 예배

중세의 예배의 관심은 성례전의 형태와 성물에 있었던데 반해,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각 예전의 단순한 행위 하나 하나에 있었다. 성례전은 약화되고 개신교예배의 특징이 된 교육적 예배는 더욱 강화되어갔다. 자국어, 인쇄된 서적, 긴 설교가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또 한가지 개신교예배의 특징이라면 예배구조에서 찬송에 독립적인 가치를 부여한 것이겠다.

죤 바클리(John Barkley)는 개혁교회의 세가지 특징을 말하기를, 첫째 예배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경배와 감사, 겸손과 회개, 하나님 말씀을 들음, 다른 이들을 위한 중보기도와 회중 자신들을 위한 기도의 시간이 있다. 둘째, 예배는 항상 공동체적이므로 비록 혼자 기도할 때일지라도 다른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와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셋째, 예배는 공동체적이므로, 내향적인 동시에 외향적인 성격이 있고 따라서 침묵과 말씀, 음악과 예배적 행동, 촛불과 색깔등을 사용한다.

단순성을 강조한 칼빈은 그의 예전적 모델을 교황제도에 앞선 고대교회였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결합된 원리를 찾으려고 노렸했다. 그에게 성경에서 벗어난 것은 주제넘은 것이고, 배은망덕한 것이며, 불경건이고 지독한 불충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보다 성경에 충실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가능한 인간의 고안물을 최소한도로 첨가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너무 개성적인 예배는 인간의 잘못된 상상력의 산물을 숭배하는" 자들을 경계했고 그 대안으로 예전적인 예배를 지지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외부형식이 영적예배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왜냐하면 정교한 의식적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예배자가 자신들을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성경적 권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이다.

쥬리히예배서(The Zurich liturgy, 1535)를 만든 쯔빙글리는 많은 말이나 교훈, 의식적인 순서보다는 단순성과 고요함을 선호했는데, 기념설로 알려진 그의 성만찬 신학의 특징은 그리스도에 대한 관상(contemplation), 친교(fellowship), 감사, 도덕적 열정이다. 특히 상상력이 고갈되거나 마음이 혼란함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두가지 관상의 주제를 주었는데, 하나는 성찬의 성물로, 이들은 매우 빨리 효과적으로 예배자의 마음을 자극해서 깊은 명상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다른 한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중끼리 이야기하는 것처럼 회중들에게 읽어준다. 이러한 관상은 성찬을 통해 성물자체의 깊은 의미, 즉 갈보리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실히 의심없이 마치 현장에서 눈으로 보듯이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죤 낙스는 그의 예배서(The Form of Prayers)에서 후에 개혁교회의 특징이 될 여러 요소들을 강조했다. 즉, 성령의 영감에 의해 집례자 자신의 기도들을 작성하고, 공동체적 행위를 위해 성경을 자국어로 모든이에 들려지도록 큰 소리로 읽혀졌다. 설교를 위한 단순한 예복만을 남겨두므로 목사와 평신도의 간격을 좁히고, 예배인도는 칼빈이 목회했던 스트라스부르그나 제네바에서처럼 성찬상이 아니라 강대상에서 했다.

로버트 웨버(Robert Webber)는 종교개혁자들의 예배의 일치점은 첫째,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반복으로 행하는 중세미사를 거부하였다. 둘째는 화체설거부, 셋째는 말씀의 회복으로 말씀과 성례전 사이 균형을 꾀하였고 말씀과 성례전의 이중구조를 주장했다. 그러나 쯔빙글리의 말씀우선순위와 성례전 1년 4회 주장이 장로교회 뿐 아니라 영국청교도, 침례교도, 장로교도, 회중교회의 표준이 되었다. 개혁자들은 자국어사용에 대해서도 일치했다. 반면에 개혁자들 사이에 차이점도 있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전통의 수용정도에 대한 불일치가 심각했다. 루터교와 성공회는 대부분 받아들였으나, 쯔빙글리파와 재세례파는 완전히 거부했고, 개혁교회는 중간 입장이었다.


5. 청교도예배

종교개혁 이후에 근대에 이르기까지 개신교회에 가장 큰 예배적 전통과 특징은 청교도예배에서 나타난다. 한국교회는 특히 청교도 신앙을 초대기독교신앙의 모델로 보고 지향해 오고 있기에 그들의 예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교도의 예배목표는 교회의 전통적인 인습이나 인간의 고안물로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정당성을 갖는 규례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예배는 엄격한 성경적인 기초, 언약의 강조,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에 대한 표현과 평신도에 대한 격려를 담고 있었다. 그 예배는 철저한 성경중심, 성찬은 물론 찬송과 기도와 교회건축에 있어서 단순한 예전, 설교와 기도에 있어서 탈원고적 성향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중에 특기할 만한 것은 철저한 성경중심이었다는 점이다. 설교를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으로 여겼는데 이런 설교중심의 예배는 강대의 중앙에 놓인 강단의 위치에서 나타난다. 설교의 시간은 한시간에서 두시간까지 걸리기도 했는데, 이 때 설교에서 오늘날의 매스미디아와 시민교육의 역활도 담당했다. 말씀의 묵상후에 회중의 형편을 충분히 반영한 친밀하고 자연스런 즉석기도, 검은 가운이나 높은 강단도 말씀에 대한 강조점을 반영한 것이다.

그들의 설교의 특징은 연속설교에 구절마다 해석하였다. 18세기 이전에는 설교자가 기도와 설교에 모두 즉흥적이기를 기대했고, 18세기초에는 설교메모에 매달리지만 않는다면 설교메모를 사용할 수 있었다. 주기도문은 로마카톨릭이나 영국 국교회처럼 매주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모범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음악에 대해서는 최초의 청교도들이 교회성가대에 대해 회중들의 찬양특권을 빼앗는다는 부정적인 견해와는 달리 많은 개혁과 진전이 있었고 성가대들을 배출하는 음악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성찬은 목사의 관심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월 1회 또는 격월로 집행되었다. 성찬받기 전에 회개와 믿음을 요구했고 앉는 자세로 받은 것을 강조했는데, 이는 무릎꿇음의 우상숭배적 위함을 피하는 것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종말론적 특권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초기 청교도 예배의 형태와 순서는 단순했지만, 내용은 길었다. 매 주일 오전 9시에 대예배를 오후2시에 오후예배를 드렸는데, 예배마다 3시간에서 3시간 반정도 걸렸다. 예배시간이 긴 이유는 긴기도때문이다. 개회 기도도 15분이나 길었지만 설교 후의 기도는 설교만큼 길어서 한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오후 예배도 마찬가지여서, 회중들은 주일의 6시간 이상을 예배시간으로 보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 예배들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일주일의 삶의 절정으로 여겼다는 것은 청교도들이 예배를 통해 성화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진지한 자세를 잘 나타내준다.

이러한 청교도 예배는 영어 언어권 세계에서 성장해온, 장로교회, 개혁교회, 회중교회,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유니테리언 교파들에게 지배적인 형식이 되었고 한국교회의 신앙형태에 큰 영향을 미쳤다.


6. 비예전적 예배

침례교 예배에서는 의식문을 철저히 거부했는데, 심지어 성경의 직접적인 사용도 배제하였다. 설교하려고 본문봉독후에 성경이나 원고를 보지 않고 몇 편의 설교를 한다. 즉석기도를 하고 시편을 암송하여 부른다. 성찬은 쯔빙글리의 전통을 따라 매월 또는 분기별로 하지만, 칼빈주의적 권징을 더 엄격하게-예를 들면 수찬정지- 실행하기도 한다. 회중교회(Congregation Church) 예배는 보다 칼빈주의와 청교도 예배의 영향을 받았는데 예전적인 기도를 거부하고, 웨스트민스터 예배지침서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반대한다.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는 스코틀랜드 장로였던 알렉산더 캠벨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철폐하고, 사도신경은 비성서적으로 보고, 믿음을 고백하면 바로 침례를 행하고, 매주일 성찬을 주장하였다. 오순절교회예배는 특별한 체험과 황홀함이 성령의 임재라고 확신하는데, 늘 성령의 은사를 구한다. 이는 회개의 체험이나 성령세례와 관계되는데, 대부분 치유를 목표로 한다. 그들의 예배의 특징은 자발성인데, 기도와 간증과 고백과 찬송에서 잘 나타난다. 신오순절교회(Neo-Pentecostal church)예배에서는 오순절교회처럼 직접적인 성령의 역사를 믿지만, 오순절교회와는 달리 은사중심으로 흐르지 않는다. 퀘이커 교도들은 성령의 임재를 내적인 조명으로 말하며, 은사와 특권에 있어서 남녀가 평등이다. 내적인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수적이고 외적인 요소인 말씀까지도 성령의 체험을 위해서는 이차적이된다. 성찬의 제정어는 영적인 실체를 말하는 것이고, 세례의 말씀도 성령의 세례로만 이해한다.


7. 현대개신교 예배

20세기 초에 결성된 캐나다 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1925년에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가 합쳐서 한 교단을 이루고, 예배의식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와 감독교회, 성공회의 예배의식, 감리교와 회중교회로 부터 가져왔다. 이런 예배의식은 융통성이 있었다. 찬송도 생략할 수 있고, 사도신경도 필수적은 아니다. 성서일과와 함께 기도문들이 제공되는데, 고전적인 기도문-크리소스톰의 예전, 성공회의 공동기도서, 칼빈의 기도등-에서 취하여 짧게 변형시켰다. 성만찬은 매월 또는 년 4회 집례된다.
 

 


개신교회예배의 발전 가능성.


지금까지 초대기독교공동체의 예배로부터 중세, 개혁교회, 청교도, 근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예배의 역사연구로부터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역동성 회복을 위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1. 거룩성을 유지하는 예배.

그리스도교 예배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성은 중심적 위치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의식적인 예배속에서 더욱 강조되어온 경향이었으나,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와 구속사건에 대한 기억을 회상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했고, 그 후 역사적인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회상을 예전 속에 정확히 표현하려는데 집중하는 나머지 지나치게 의식화된 경향을 보여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과 회상은 예전적 틀 속에 정형화될 수는 없다. 회중들의 속에서 현재의 사건으로 재현될 때, 그리스도의 현존을 인식하게 되고, 거기에 참된 거룩성을 경험하게 된다.


2. 회중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예배.

예배에서 회중은 하나님의 은총의 수혜자의 위치에 있다. 회중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 예배에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수적 사랑으로 회중을 부르시고 예비하신 은혜와 복을 내리신다. 그런 의미에서 회중은 수혜자요, 수동적인 위치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자로서 회중이 경계해야할 것은 예배에서의 수동성(pasivisity)이다. 먼저, 수동성에 대한 극복으로 예배순서에 회중들의 참여를 들 수 있다. 역사적으로 회중들의 참여는 초대교회에서 회중들이 예언이나 통역을 하는 모습에서, 또한 초기 동방교회의 부제의 능동적인 역활에서 발견되는데, 오늘 현대교회에서도 회복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성경봉독순서를 담당한다든지, 중보기도의 한 주제를 맡아 기도하든지, 세례식 때에 수세자에게 간증의 시간을 할애하는 것등이다. 그런데, 수동성은 이처럼 예배순서의 진행에 직접 참여함으로 모두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진정한 응답을 하는가에 관한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므로 수동성의 위험은 회중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 순서의 대부분을 진행하는 집례자라하더라도 은총에 대한 진지한 참여가 없고 습관적으로 진행한다면, 수동성의 함정에 빠져있다고 보아야한다. 에릭슨(Craig D. Erickson)은 회중들의 지적이며 동적인 참여(participation)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회중이 참여할 수 있는 패턴을 정리해보면, 중보기도나 찬송 또는 평화의 교환에 즉석참여(spontaneous involvement), 고백이나 들음, 나눔에서의 침묵의 패턴(silent e engagement)등이다. 수직적인 참여는 수평적인 코이노니아를 가능하게 한다.


3. 세계를 위한 행동이 있는 예배.

훼르디난드 한(Hahn)은 술어적 진단을 통해서 초기예배의 성격을 요약하면서, 예배적 집회와 세상 안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봉사 사이를 따로 구분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예수께서 그 당시의 聖과 俗의 개념을 허무시고, 俗을 향해 열려진 공동체를 설립한 것을 연상하게 한다. 기독교예배는 밖을 향해 열려진 공동체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속사도시대예배에서 나타난 회중의 제사장직(priesthood)은 회중들이 세상의 구속을 위한 제사장임을 강조함으로 열린예배로서의 그리스도교예배의 성격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나가는 말

그리스도교예배의 역사는 시대마다 전통과 개혁의 변증법적 변형을 보여왔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회중에게 전통적인 예전은 귀한 유산으로 평가되기도하고 때로는 무의미한 형식으로 비판되어왔다.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자유하려는 개혁적 시도가 긴장 또는 갈등구조를 유지하며 변천되어왔다. 여기에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의 신앙에 부합한 예전의 발굴을 위한 성실하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개혁해가는 교회의 정신이 요청되는 때다. 이제, 데이비드 뉴만의 외침은 더욱 호소력이 있게 들린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향하게 하고 거기에서 능력있는 증인으로 서게하는 갱신된 예배의 열매는 교회 안의 기존의 고정된 틀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정신의 돌출을 허용하지 않고는 맺히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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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관점 / 구약에서의 성윤리


바알브올 사건(민25장)과 성적문란


모압 평지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싯딤지역에 진을 쳤다. 싯딤은 히브리어로 '아카시아 나무'란 뜻으로, 모압 평원 북단에 위치한 초원지대로서(민 22:1), 광야 생활 중 마지막으로 진을 친 곳이다.  이곳에서 모압 왕 발락과 술사 발람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내리기 위해 바알브올의 음행 사건을 일으킨다.  모압의 종교는 바알숭배였고 바알과 아세라와의 섹스를 통해 풍요와 다산이 온다고 믿었기에, 제사의식 과정에서 여사제가 남자와 행음하는 의식이 있었다. 


따라서 발람과 발락은 바알숭배 제사의식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모압 여인과 행음하면서 우상의 제물을 먹도록 유도한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모르는 모압 여자들과 더불어 바알 신 제의에 참석하고, 더러운 성적 음행을 일삼았다.  이처럼 구약에서 음행이나 성적문란은 주로 우상숭배와 가나안에 사는 족속의 타락한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기에 철저히 금지하였다. 


모든 성적인 문란은 애굽과 가나안의 풍속과 규례에 기인한다.  당시 애굽과 가나안 지역에는 우상 숭배와 더불어 제식(祭式)으로서의 음행(淫行)이 극에 달해있었다.   여기서 풍속과 규례는 우상종교에 근거하여 문란한 성적 행위들을 방조하는 가증한 행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철저한 단절을 명령하신다. 


레 18: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마아세, 행위, 행동, 일, 노동, 제작이나 공작) 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훅카, 규정, 법령, 법규, 관습)도 행하지 말고

레 20:23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토에바, 혐오하다,토하여 내치다) 여기노라

 

근친상간 금지


실제로 애굽, 가나안, 인도 파사등 고대 근동지역의 신화나 전설, 그리고 궁중 기록 등에 의하면, 남매 간의 결혼이나 모자(母子)간의 결혼 등 골육지친 간의 간음이나 결혼 행각이 종종 나타난다. 그 실례로 애굽인들이 섬기는 주요신 '오시리스'(Osiris)는 그의 누이 동생 '이시스'(Isis)와 결혼한 것으로 되어있다(Diodotus, Philo, Jerome).   여기서 범하다의 갈라는 [음욕을 품고 발가벗기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정상적인 성관계가 아니라 욕정을 품고 성폭행을 한다라는 의미가 강하다.

 

레 18:6 각 사람은 자기의 살붙이를 가까이 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갈라,음욕을 품고 발가벗기다)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8:7 네 어머니의 하체는 곧 네 아버지의 하체이니 너는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출애굽 당시 유대인들은 일부다처제의 가족 형태를 취했으며, 나이 많은 아들은 아버지의 젊은 첩들보다 나이가 많거나 비슷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 사통(私通)이 자주 발생하였다. 그 대표적인 성경적 예로는 계모 빌하를 범한 야곱의 첫째 아들 르우벤을 들 수 있다(창35:22).그러나 첩도 아버지와 동침하여 한 몸이 되었으므로, 계모와 동침하는 것은 곧 아비의 권위와 가정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큰 죄악으로 간주되어 엄격하게 금지 되었다(신27:20).

 

레 18:8 너는 네 아버지의 아내(에쉐트 아비카, 계모) 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아버지의 하체니라


친 자매 또는 이복 자매와의 사통을 금하는 규례이다(20:17;겔 22:11). 하나님의 창조 질서상 자매는 자기 자신과 동격(同格)이다. 그러므로 자매를 범하는 것은 곧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 자매를 범한 실례는 이복 누이 다말을 급간한 다윗의 아들 암논을 들 수 있다(삼하13:1-20).

 

레 18:9 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버지의 딸이나 네 어머니의 딸이나 집에서나 다른 곳에서 출생하였음을 막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레 18:10 네 손녀나 네 외손녀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하체니라

레 18:11 네 아버지의 아내가 네 아버지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레 18:12 너는 네 고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아버지의 살붙이니라

레 18:13 너는 네 이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어머니의 살붙이니라

레 18:14 너는 네 아버지 형제의 아내를 가까이 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숙모니라

레 18:15 너는 네 며느리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아들의 아내이니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형수나 제수와의 간통 및 결혼을 금지한 규정이다. 그 이유는 혈통상 형제는 자신과 동격이며, 형제의 아내는 형제와 동침함으로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규정은 계대 결혼법에 관한 한은 적용되지 않았다. 즉 만약 형이 자녀가 없이 죽은 경우에는 동생이 형수와 동침하여 형의 유업을 이을 자녀를 낳게 하는 계대 결혼법이 적용되었는데 이는 율법으로도 규정하고 있는 바이다(신 25:5-10). 한편 이 계대 결혼(levirate marriage)의 규례를 어기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은 대표적인 예로는 유다의 아들 오난을 들 수 있다.(창38:8-11)

 

레 18:16 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

레 18:17 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하지 말며 또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아울러 데려다가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들은 그의 살붙이이니 이는 악행이니라

 

성경의 대표적인 경우는 레아와 라헬을 동시에 취한 야곱의 경우를 들 수 있다(창 29장). 그러나 이와 같은 중혼(重婚) 제도는 본질상 인간의 기본적인 심성에 위배되는 것으로서, 가정 불화와 성적 타락의 원인이 되었으며 진정한 우애와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할 자매를 원망과 시기의 대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창 30:1).

 

레 18:18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의 자매를 데려다가 그의 하체를 범하여 그로 질투하게 하지 말지니라


간음의 금지


간음은 남의 것을 탐내서 훔치는 도둑질과 같다.  간음은 이웃 집의 아내나 여종을 탐하여 갈취하면서 자신의 욕정을 채우는 죄악된 행위다.

 

레 18:20 너는 네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여 설정하므로 그 여자와 함께 자기를 더럽히지 말지니라

신 22:22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우상숭배의 금지

 

우상숭배는 영적간음과 같다.  몰렉은 몰록(왕상 11:7), 밀곰(왕상 11:33), 말감(습 1:5) 등으로도 불리우던 고대 가나안 족속의 우상으로 유아 희생 제사로 특히 유명하다(20:2-5;왕상 11:7;렘32:35). 한편 이 우상의 재료는 놋이었고, 그 머리는 힘센 황소(bull)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팔은 마치 어린이를 맞아들이려는 듯이 앞으로 쭉 뻗어 있었다(Keil & Delitzsch, Vol. I. p.416). 또한 이 우상 바로 전면 좌 우측에 맹렬한 불길이 타고 있었던 듯하다. 이로 볼때 고대 이방 족속들은 가장 위대한 불인 태양을 섬기기 위해 이 우상을 만는듯 하며, 당시 부모들은 자식들 중 하나를 택하여 이 우상에게 바치면 남은 자녀들에게 복이 온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식을 이 우상에게 주었던 것 같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 p 516).

 

레 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남색의 금지


남색의 기원도 이방 신전의 제사의식에서 남성사제가 다른 남성과 관계 맺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건데 이성애든 동성애든 성적인 문란은 종교의식에서 출발하여, 당시의 가나안 지역에 널리 퍼진 것 같다.

 

레 18:22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토에바, 혐오하다,토하여 내치다)  일이니라

레 20:13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수간금지

 

고대 세계에서는 짐승과 성적 관계를 가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주로 문란한 제사의식상 그러한 패륜 행위가 종종 행해졌다고 한다. 고대의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애굽의 여자들은 종묘 숭배 의식상 수염소와 교합하였다 하며(Herodotus, Strabo), 로마에서는 개와 더불어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Aelian). 심지어 근대에 이르러서도 애굽 남자들이 악어 암컷과 교합했다는 기록도 있다(Sonnini; Keil & Delitzsch, Vol.I p. 418 참조). 이처럼 이교도들에게서나 이방의 우상 숭배 제사 의식에서 자주 행해진 수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짐승 이하로 전락시키는 패역한 행위다.

 

레 18:23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성매매 금지

 

신 23:17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신 23: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그들이 에덴 동산으로부터 쫓겨났듯이(창 3:24), 범죄한 백성이 구별받은 땅 가나안에서 그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  땅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인간을 또한 스스로 저버린다

 

레 18: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레 18: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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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관점 / 불의한자-동성애

 

불의한자-동성애


신약에서는 특별히 동성애만을 콕 꼬집어서 비판하지는 않는다.  고전6:9-10에서 동성애의 원인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를 불의한 자(아디코스, 하나님의 법률을 위반하는, 불의한, 죄있는 자) 라고 칭하고, 동성애는 그 결과로 나타나는 음행,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질, 탐욕, 술취함(술고래), 중상모략, 사기질과 같은 죄악들 가운데 하나로 등장한다(고전6:9-10).   따라서 동성애만을 무조건적으로 맹비난 할 것이 아니라, 동성애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현상을 면밀히 분석하고, 동성애와 함께 이 사회에 나타나는 다양한 죄악의 현상들에 관심을 가지고 다각적으로 접근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특히 동성애는 탐색(말라코스, 자기 몸을 변태적인 호색에 제공하는 남성)과 남색(아르세노코이테스, 여자와 동침하는 것과 같이 남자와 동침하는 사람) 이라는 단어로 묘사되는데, 성경에서 이처럼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변태적인 호색에 기인한 육체의 탐욕과 방탕과 쾌락을 추구하는 성적 탐닉이기 때문이다.

 
고전 6:9 불의한(아디코스, 불의한, 부정한 자, 법률 위반자, 죄있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클레로노메오, 상속하다 inherit)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포르노스, 불법적 성교에 탐닉하는 남자)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모이코스, adulterer) 자나 탐색하는(말라코스, 자기 몸을 변태적인 호색에 제공하는 남성) 자나 남색하는(아르세노코이테스, 여자와 동침하는 것과 같이 남자와 동침하는 사람) 자나

 

고전 6:10 도적이나 탐욕을(플레오네크테스,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하는 자) 부리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모욕하는(로이도로스, 비난하는, 중상모략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하르팍스, 탐식하는, 약탈자, 강도,사기꾼)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동성애나 이성간의 간음, 성매매, 음행은 똑같다


그래서 동성애를 이성간의 성적 탐욕과 성적 문란인  간음, 음행(포르노스, 불법적 성교에 탐닉하는 남자) 등과 대등하게 본다.   때문에 이성간의 간음, 성매매, 음행은 동성애 못지 않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이성간의 성적 문란을  갈5:19에서는 육체의 일(사르크스, 죄의 본성)에서 비롯된 음행(포르네이아, 매음, 간음, 음탕한 행위)과 더러운 것(아카다르토스, 악한 행위로 인한 도덕적 타락에 까지 불결함의 전(全) 영역, 육체적, 제의적, 도덕적 불결) 과 호색(아셀게이아, 방탕, 성도착) 이란 단어로 묘사한다.

 
갈5:19-21에는 육체(사르크스, 죄의 본성)의 일에 해당하는 죄악들이 음행, 더러운 행위, 호색, 우상숭배, 마법, 원수맺음, 분쟁, 시기, 분냄, 당파, 투기, 술취함, 방탕 등으로 다각도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와 신자는 동성애만을 비판하기 전에 사회를 피폐하게 만드는 이러한 여러가지 악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불신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다각적인 시도를 하는게 좋다.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는 문란한 이성애와 동성애는 불의한 일이고 육체의 일이며 호색, 방탕, 더러운 행위, 음행이기 때문에 동일한 심판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이성애자들이 동성애를 비판하는 것은 넌센스에 가깝다.  동성애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정작 자신들이 하는 이성간의 문란하고 더러운 성행위에 대해서는 너무 관대하게 보는 모순에 빠져 있다. 

 

갈 5:19 육체(사르크스, 죄의 본성) 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포르네이아, 매음, 간음, 음탕한 행위)과 더러운 것(아카다르토스, 악한 행위로 인한 도덕적 타락에 까지 불결함의 전(全) 영역, 육체적, 제의적, 도덕적 불결) 과 호색(아셀게이아, 방종, 성도착) 과


갈 5:20 우상 숭배와 술수(파르마케이아, 마술 magic, 마법 sorcery) 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젤로스, 경쟁적 시기, 질투) 와 분냄과 당 짓는 것(에리데이아, 비열한 본성, 이기주의)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 5:21 투기(프도노스, 시기 envy) 와 술 취함과 방탕함(코모스, 술잔치, 방탕) 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늘날  이성간에 벌어지는 수 많은 간음, 성매매, 음행, 호색, 불륜 등의 성적인 문란들을 보라.  교회 청년들도 이성간의 성적 탐닉과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이성간의 성적인 죄악들을 보라!  이것들은 동성애와 동일한 죄악이다.  따라서 교회는 동성애와 함께 이러한 이성간에 일어나는 죄악들에 대해서도 함께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간의 성적인 죄악들에 대해서는 관대하며 잠잠하고 침묵하면서 왜 유독 동성애만 저주를 퍼붓고 핏대를 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타까운 것은 교회와 신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균형적인 시각을 상실하고 동성애에 대해서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유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또한 교회는 동성애만을 비판하기 전에 고전6:9-10과 갈5:19-21 에 등장하는 탐욕, 술취함, 모욕, 속여 빼앗는 것, 우상숭배, 마법, 원수맺음, 분쟁, 시기, 분냄, 당파, 투기, 술취함, 방탕 등 모든 악독과 죄악들에 대해서도 심각한 윤리적인 위기 의식을 가지고 건강한 교회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세상을 향해 정의와 윤리를 외쳐야 할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순수하고 고결한 동성애?


그렇다면 매우 순수하고 고결한 동성애란 존재할까?  파트너를 바꾸지 않고 평생 함께 하며 책임지는 순결한 동성애와 동성결혼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동성애가 성적인 탐닉과 쾌락추구를 버리고 상대방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지는 보편 타당한 윤리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만약 오늘날 동성애자들 가운데 일부가 [사랑에 기초한 순수한 동성애] 를 주장한다면 과연 그럴 수가 있는지는 논의 해 볼 대상이 되겠다.    성경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동성애에 대해 말하지 않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부분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은밀히 이성간에 일어나는 성매매, 근친상간, 간음, 음행, 호색, 불륜보다 고결하고 순결한 동성애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성경의 성윤리를 강요할 이유와 필요가 있는가?   불신자들이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는 현실속에서 그들에게 성경의 윤리를 강요하는 것은 어려울지는 몰라도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수순에서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보편 타당한 건강한 윤리는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겠다.

 

여기까지는 불신자들의 관점이라면 다음에는 과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아름답고 순수한 동성애를 할 수 있을까?   남녀간의 결혼을 통해 책임지는 정상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의한 것이기에, 성도가 예수님은 순결한 동성애를 비난하지 않으신다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신자에게 있어 동성애는 인권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평가하실가의 관점에서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  하여튼 성경에서 말하는 바 중요한 핵심은 동성애든 이성애든 육체(사르크스, 죄성, 죄의 주체, 죄의 욕망) 의 일이라 할 수 있는 탐욕과 방탕과 쾌락과 호색을 추구하는 성적 탐닉은 절대적 심판의 대상이다.


로마 제국과 동성애


왜 성경은 동성애에 대해 비판적일까?  신약성경이 기록된 시대적 배경이 로마 제국의 지배하의 상황이었고, 로마 제국이 다신교와 황제숭배를 하면서 아울러 성매매, 남색문화, 힘과 육체의 숭배, 남근숭배, 검투사와 같이 쾌락과 향락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로마군대 내에서는 동성애가 흥행하였고 이를 통해 전우애가 강해졌다고 한다.  그리스 시대부터 나이 어린남자를 동성애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후견인 역활을 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로마는 동성애를 비롯한 변태성욕에 대해 매우 관대한 나라였고 현세의 삶과 육체의 쾌락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았다. 

 

또한 다신교 종교체제 아래서 황제숭배를 했던 로마제국 지배하에서는 신전 제의식은 당시 이방 신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행위로서 특히 성적 타락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당시 이방 신전들은 성적 타락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특히 여사제들이 제사를 드리거나 드린 이후 참배객들과의 섹스를 통해 우상의 신들과 연합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성경의 시각에서는 우상숭배와 음행을 동일하게 보았다.  

때문에 성경은 로마 제국의 종교, 문화와 가치관에 대해서는 결코 호의적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항상 로마에 대해 적대적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에 대해 로마서13장에서는 로마제국의 법과 제도를 잘 따르고 납세의무를 잘하여 정치적 혼란에 휩쓸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로마제국의 정치제도에 잘 적응하여 경제활동을 하면서 제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되, 거룩한 생활을 철저히 하여 로마의 쾌락과 향락의 문화에는 물들지 말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울이 가르친 2WAY 전략이다.  이 땅의 신자는 각자가 속한 나라의 시민이기에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고, 동시에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한 삶의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롬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동성애와 후견인 제도

 

신자가 지켜야 할 윤리


로마 제국하의 성도는 로마 시민들의 죄악과는 철저히 단절되어야 했으며,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의 윤리적인 삶을 요구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믿음 안에서 자유롭게 하신 자유가 있기 때문에, 그 안에 공고히 서야 했다.  그러나 이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소욕을 만족시키는데 사용해서는 안되었다.  신자들이 믿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방탕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서로 종으로 섬기는데 있었다.   믿음 안에서의 자유는 절제하는 가운데 빛을 발한다.  바울은 먹고 마시는 방탕에 빠지지 않았다.  바울은 신자들이 음행의 죄를 조장하도록 자유를 남용하기를 원치 않았다.  바울은 무절제함과 육욕을 채우는 일에 이 자유를 남용하기를 원치 않았다.

 

고전 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고전 6: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바울은 먹는 것은 육체의 본능이기 때문에 앞의 구절과 같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라 할지라도 몸을 위하여 또는 식욕의 본능을 채우기 위하여 믿음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고전 8:8;10:25).  그런데 당시 고린도 교인 들중에는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 라는 이 격언을 엉뚱한 곳에 적용시키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고린도 교인들은 식물을 먹는 것이 육체적 본능이듯이 성적 욕구를 채우는 것도 육체적 본능의 발로라고 주장하며 그들의 성적인 타락과 방종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고전 6: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고전 6: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사도 바울이 보기에 그들이 육체의 기쁨을 채우기 위해 도가 지나치게 먹고 마시는 행위는 육체의 탐닉을 위해 음란을 행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태도와 주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왜냐하면 먹는 것과 성적인 욕구는 잠깐 있다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모두 폐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새롭게 태어난 몸은 오직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행하며 거룩한 생활 가운데서 주를 영화롭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남녀가 만나 정상적인 결혼을 통해 거룩하고 온전한 성생활을 할 것을 촉구받는다.

 

고전 7: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당시 기독교 영지주의 이단의 영향을 받아 영과 육의 이원론을 주장하면서, [우리 영혼은 이미 구원받았다. 원래 부패하고 타락한 몸으로는 우상제물을 먹고 음행해도 상관이 없다.  육체에 죄를 지어도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는 이단적 가르침이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 신앙의 자유를 남용하여 전혀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또한 성적인 탐닉을 추구하여 음행을 행하는 것에도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이것이 계2:20의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난 이세벨의 행음사건의 본질이다.   버가모 교회의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과 내용은 이세벨의 행음과 같은 사건이었다.

 

계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음행, 더러운 행위, 탐욕, 우상숭배


불신자는 동성애를 인권의 관점에서 본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 성경의 관점에서 동성애를 비판하면 당연히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이처럼 불신자들에게 성경의 윤리를 강제적으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상식적인 수준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수준에서 사회 전반적인 윤리적 문제를 포괄적으로 비판하며, 건강한 사회윤리를 제시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성경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없는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고 있는가?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고 다정해 보이지만 서로 담을 쌓고 사는 쇼윈도우 부부는 없는가?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거룩해 보이지만 정작 음행과 간음, 호색, 성매매를 하는 자는 없는가?   신자는 정상적인 결혼을 통해 거룩하고 청결한 성생활을 추구하고 있는가?

 

신자는 우상숭배를 눈으로 보이는 형상을 숭배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숭배에 대해 경고한다. 엡5:5의 표준새번역을 보라.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음행하는 자나 행실이 더러운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는 우상 숭배자여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몫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이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이 하는 마음이나 그 대상이며 그 본질은 탐욕이다.  지금까지 성적인 문란과 탐욕 범주 내에서 동성애와 이성애의 문제점을 짚어 왔지만 우상숭배의 핵심은 탐욕이며, 탐욕의 적용 범위는 넓다.    따라서 성에 대한 탐욕을 넘어서,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탐욕까지 확장될 수 있으며 이는 모두 우상숭배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만연한 변질된 기복신앙은 탐욕을 축복이라 부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조건적인 세상적 성공을 최고의 가치에 두기 때문에 탐욕의 죄악을 합리화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숭배에 빠질 위험성이 농후해졌다.  눈에 보이는 우상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정작 교인들의 마음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눈에 보이는 않는 우상숭배에는 무감각한 것 같다.

 

따라서 교회와 신자는 음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와 탐욕에 빠진 자는 우상숭배자이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경고하는 말씀을 주의 깊게 새겨 들어야 한다.  오늘날  음행과 탐욕과 더러움에 빠지고 있는 교회와 교인들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축복이라는 미명 아래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아는게 제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음행과 탐욕과 더러움 가운데 사는 자는 우상숭배자인걸 알고는 있는가?  믿기만 하면 죽어서 천당간다고 믿으면서, 무한대로 죄를 지어도 회개만 하면 무한대로 용서받는 다고 믿는 타락한 자들이, 어떻게 사는 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인지 관심이 없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엡 5: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포르노스, 불법적 성교에 탐닉하는 남자) 자나 더러운자(아카다르토스, 악한 행위로 인한 도덕적 타락에 까지 불결함의 전(全) 영역, 육체적, 제의적, 도덕적 불결) 나 탐하는(플레오네크테스,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하는 자, 탐욕스러운 자)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동성애는 미워하되 동성애자를 심판하고 정죄하지 말라

 

이제 교회와 신자는 동성애는 경계하고 미워하되 동성애자를 심판하고 정죄해서는 안된다.   [마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크리노, 심판, 정죄)하지 말라]  과연 그 누가 돌을 들어 동성애자를 내리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돌을 들만큼 죄없이 떳떳한 신자들이 얼마나 있단 말인가?  자신들의 잘못들을 감추고서는 남의 잘못을 심판하고 정죄할 권리가 있을까?  자신들의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동성애자의 티를 빼려고 하는 자세는 모순이다.

 

그러나 동성애를 인권이나 성적취향의 관점으로 보려는 나이브한 자세는 버려야 한다.  죄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의 타협도 없어야 한다.  죄에 대해서는 경각심을 갖고 경고해야 한다.  죄는 누룩처럼 순식간에 퍼지기 때문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갈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신자는 모두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동성애자가 회개하면 용서해야 한다.  [눅 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결론


성경에서 동성애를 비판하는 이유는 육체(사르크스, 죄성, 죄의 주체) 의 일이라 할 수 있는 탐욕과 방탕과 쾌락과 변태적인 호색을 추구하는 성적 탐닉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성애라 할지라도 간음, 음행, 더러운 행위, 호색, 성매매 또한 육체의 일이며 동일하게 비판의 대상이 된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성적 문란은 호색, 술취함, 방탕, 분쟁, 다툼, 탐욕, 사기와 같은 다양한 사회악을 동반한다.  따라서 교회는 동성애만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상식적인 수순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서,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음행, 간음, 탐색, 남색, 도적질, 탐욕, 호색, 향락문화, 중상모략, 사기질과 같은 죄악들을 (고전6:9-10) 함께 비판해야 하며 건강한 사회윤리를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불신자는 동성애를 인권의 관점에서 본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 성경의 관점에서 동성애를 비판하면 당연히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이처럼 불신자들에게 성경의 윤리를 강제적으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상식적인 수순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서 사회 전반의 윤리적 문제를 포괄적으로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은 죄악의 양태에 대해서는 비판하되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정죄나 심판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좋다(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그리고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 존재한다.

과연 거룩하고 고결한 동성애란 존재할 수 있는가?

파트너와 평생 함께 하고 책임을 지는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동성결혼이 가능한가?

환경문제, 심리적 요인, 유전자 변이와 호르몬의 이상으로 인한 성 정체성의 혼란과 동성애적 경향을 어떻게 볼 것인가?

믿는 자가 동성애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성적 탐닉과 성 문란에 근거한 동성애와 건강하고 윤리적인 동성애는 구별이 가능한가?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성경의 성윤리를 불신자들에게도 강요할 수 있는가?

교회는 세상의 다양한 죄악들에 대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건강한 윤리를 어떻게 제시하여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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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관점1 / 소돔과 고모라


동성애와 동성결혼이 현대의 가장 핫한 이슈가 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동성애의 문제점을 네오 막시즘,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 페미니즘과 성 정치, 퀴어이론 등의 이데올로기의 관점보다는 성경에서 말하는 순수한 시각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또한 환경문제, 심리적 요인, 유전자 변이와 호르몬의 이상으로 인한 성 정체성의 혼란 등은 다루지 않겠다.

소돔과 동성애


동성애하면 소돔과 고모라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소돔과 고모라는  아드마, 스보임, 소알과 더불어 사해(死海) 남단 싯딤 골짜기에 있던 다섯 도시 중 두 도시이다(창14:2, 3).    소돔에서 유래한 [소도미] 라는 의미는 동성애와 짐승과의 수간 등 성적문란을 뜻한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소돔의 죄악은 동성애라고 단정하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성애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소돔의 죄악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창 13:13에는 소돔에 대한 평가가 악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럼 동성애나 성적문란이 소돔의 전부였을까? 


창 13:13 소돔 사람은 악하여(라, 나쁜, 해로운 bad, 악한 evil)  여호와 앞에 큰 죄인(핫타, 죄 있는, 죄 많은, 죄인) 이었더라

소돔과 고모라

위 구절을 가지고는 소돔의 죄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소돔에 대한 다른 성경의 평가를 요약해보면, 성적인 타락뿐만 아니라 아래처럼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이로 보건데 소돔의 죄악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있었고, 그 결과로 수많은 악행들이 동반되었다.  동성애와 같은 성적문란은 그 결과물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소돔의 죄악을 동성애나 성적문란으로만 간주하는 관점은 매우 편협적인 시각이다.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렘 23:14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가운데도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과 다름이 없고 그 주민은 고모라와 다름이 없느니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지만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고 교만한 자]--겔 16:49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음란하고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는 자]--유 1: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계 11: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특히 소돔과 고모라의 피지배계급이 억울하다고 울부짖는 소리가 크다고 한 점을 볼 때,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으며, 억울한자들이 흘린 피가 하늘을 향해 호소하였을 정도로 통치자와 지배계급의 폭정이 심하지 않았나 추정해 볼 수 있다(창 4: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호소하느니라).  창 18:20의 표준새번역과 창 19:13의 현대어성경을 보라.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폭정으로 인해 하늘을 향해 원통하게 부르짖는 자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지 동성애나 성적문란이 근본문제는 아니었다.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자아크, 부르짖음, 외치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크고 그 죄악이( 핫타아, 죄, 유죄, 죄의 형벌, 속죄제) 심히 무거우니

[표준새번역]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 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

창 19:13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현대어성경]우리가 이 성을 모조리 쓸어 버릴 작정이오. 이 성 사람들이 어찌나 못된 짓만 일삼는지 이 성 사람들 때문에 억울해하여 한이 맺혀 울부짖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 여호와께서도 그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이 소돔성을 쓸어 버리라고 우리를 보내셨소


소돔과 고모라의 본질-폭력성과 야만성


이들의 악행과 폭력성은 결국 롯이 영접한 천사들을 상관(강간)하기위해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힘을 가진 일단의 무리들이 힘이 없는 약자인 롯에게 위협을 가하면서, 롯이 영접한 자를 아무런 이유없이 성폭행(야다, 상관)하겠다는 장면을 통해 소돔과 고모라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도시였지만, 폭력성과 야만성이 가득한 살벌한 도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문제는 단순히 동성애나 성적문란이 아니라 폭력에 기반한 성폭력에 있다.  이들은 성폭력뿐만 아니라 롯을 해할려고 하였다.  이로 보건데 이들의 폭력성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은 많은 이들이 억울해하여 한이 맺혀 울부짖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성폭력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창 19:4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창 19: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야다, 알다, 이해하다, 성적 관계를 가지다)

창 19:9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하나님은 이러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살펴보기 위해 직접 방문하신다.  이러한 모습은 바벨탑 사건과 매우 유사하다.  하나님은 바벨도시와 바벨탑을 쌓고 있는 인간들을 보시기 위해 내려오셨다.  그리고 결국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인간들을 흩으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방문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는 악행들과 폭정으로 인해 심판을 당한다. 


창 18: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창 11: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소돔과 의인

 

아브라함은 곧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이 있을 것을 알아챈다.  그래서 의인이 있다면 그 의인이 악인과 함께 멸망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지 않느냐고 하소연한다.  아마도 조카 롯이 소돔에 살고 있었고, 적어도 롯만큼은 의인이니까, 심판에서 구원해 주십사하는 의향이 깔려 있는듯하다.  현대어성경을 보라.

 

창 18: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창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 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현대어성경] 저는 주께서 올바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이들을 못된 짓만 일삼는 것들과 함께 죽이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시면 안되지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일 저 성읍을 쓸어 버리신다면 그것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올바로 살아가려고 하는 이들을 죽어 마땅한 못된 것들과 함께 죽이시는 셈이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공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정의에 하소연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인 50명이 있다면 멸하지 않겠다고 먼저 제안하신다(창 18: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만약 의인 50명이 있어서 악인들이 전부 멸망당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정말 정의로운 일일까?  악인들이 의인들에게 감사해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채 악을 더해가는데도 의인 50명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는다면, 그리고 악이 지속적으로 득세한다면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요나가 악인이라 여겼던 니느웨는 심판의 메세지를 받자마자 굵은 베 옷을 입고 회개하여 12만명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 정의란 무엇일까?  정의는 악인이 심판을 당하고 의인은 은혜와 보호를 입는데 있다.  만약 악인이 번영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한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기대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 수 많은 모순들을 경험한다.  전도서를 보라!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통당하는 [헛되고 헛되도다] 하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지금도 여전히 악인들이 폭력을 동원하여 힘없는 자들을 억압하며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한다.  때문에 수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원망하거나,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전 7:15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전 8:14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많은 이들이 평상시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불미스런 사고와 사건이 터지면 왜 하나님이 막아주시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동네북처럼 두들거야 살 맛이 나는 자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의 상식과 고장관념을 뛰어넘어 활동한다.  결국 악인은 영원할 것 같지만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질 것이다(시 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때문에 이러한 불합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이 바벨론의 악행을 보고 실족할 뻔한 하박국에게 하나님이 요구한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남유다의 징계도구인 바벨론을 결국에는 멸하겠다고 약속하였고, 하박국은 이 사실을 믿어야만 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는 아브라함의 탄원을 통해 소돔땅에 적어도 의인 열명도 없다는 사실과 아브라함의 조카 롯만이 유일한 의인이지 않았나 추정해 볼 수 있다.   벧후2장에서는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 이라는 표현을 쓴다.  결국 구원을 얻은 자는 롯의 가족뿐이었다.  물론 롯에게도 인간적인 한계가 엿보인다.  창19:8에서 자신의 두 딸을 대신 내놓을테니 알아서 하라고 하는 장면은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다.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벧후 2: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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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9: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창 19: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창 19: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철처히 심판을 받고 후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는 주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앞으로 닥칠 종말론적 [심판 날]에 대한 중요한 예표가 된다.

마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마 11: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있었고, 그 결과로 수많은 악행과 폭력들이 동반되었다.  동성애와 같은 성적문란은 그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소돔의 죄악을 동성애나 성적문란으로만 간주하는 관점은 매우 편협적인 시각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동성애가 아니라 그들의 악행과 폭정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하늘을 향해 원통하게 부르짖는 자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데 소돔과 고모라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도시였지만, 폭력성과 야만성이 가득한 살벌한 도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문제는 단순히 동성애나 성적문란이 아니라 폭력에 기반한 성폭력에 있다.  이들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억울해하여 한이 맺혀 울부짖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성폭력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로마서의 동성애의 근원-불신앙과 우상숭배

그러면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동성애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는가?   동성애가 발생하는 근본적 배경에는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라는 불신앙과 [롬 1:22-23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의 우상숭배 죄악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교회 안의 많은 신자들이 동성애의 원인이 불신앙과 우상숭배에 있음을 보지 못하고 인권과 사랑의 관점에서 본다는 점에서 상당히 나이브하다.   특히 진보주의자들......


이러한 불신앙과 우상숭배의 결과는 [롬 1:24-2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에피뒤미아, 충동, 욕망, 갈망)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파라디도미, 포기하다, 넘겨주다)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아티마조, 모욕하다, 창피를 주다) 하셨으니,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파도스, 욕정, 정욕)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오렉시스, 욕망, 갈망, 육체적 욕망의 분투) 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안티미스디아, 형벌)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에 나타난 것처럼 동성애 라는 결과물이다. 

불신앙과 우상숭배의 결과는 마음의 정욕(에피뒤미아, 충동, 욕망, 갈망), 몸의 욕됨(아티마조, 모욕하다, 창피를 주다), 부끄러운 욕심(파도스, 욕정, 정욕), 서로를 향한 음욕(오렉시스, 욕망, 갈망, 육체적 욕망의 분투), 남녀 간의 순리적인(퓌시켄) 성관계를 역리적으로(파라 퓌신) 바꾼 것으로 특징지워지고, 하나님이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아티마조, 모욕하다, 창피를 주다) 하시어, 그 결과가 동성애로 나타나고 그와 아울러 다양한 죄악의 현상들인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기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등을 양산한다는 점을 간파해야 한다.

롬 1:26,27의 현대어 성경을 보라!   불신앙과 우상숭배에 기인한 동성애는 자연스런 법을 어긴 변태적인 성적 범죄이며, 더러운 욕정이고, 수치스런 일이며, 동성애 행위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벌이었다. 


하나님은 불신앙과 우상숭배에 빠진 인간들에게 모든 악한 일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파라디도미, 포기하다, 넘겨주다).  이러한 하나님의 유기와 방치 그 자체가 형벌이었다.


[현대어성경]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모든 악한 일들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러자 심지어는 여자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자연스러운 법을 어기고 변태적인 성적 범죄를 저지르며,  남자도 여자와의 정상적인 성관계를 버리고 동성끼리 더러운 욕정을 불태우며 수치스러운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대해서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가  죄의 뿌리와 근본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아도키모스,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가치 없는, 거절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파라디도미, 포기하다, 넘겨주다)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시어, 거기에서 파생된  롬1:29-30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기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등의 수 많은 죄악의 가지와 결과들이 파생되었고, 그 가지들 가운데 하나가 동성애임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롬 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 1: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 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롬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동성애에 대한 바른 시각

 


따라서 교회와 신자는 동성애를 바라볼 때 동성애의 근원인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우상숭배,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다양한 죄악의 결과들을 다각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동성애는 근원적인 죄인 불신앙과 우상숭배의 파생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성애나 동성결혼 자체만을 맹렬하게 비판하기 보다는 전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죄악의 틀 안에서 다각적 시각을 가지고 비판하되, 이성적으로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건전한 사회윤리를 함께 제시해야 한다.   교회와 신자가 핏대를 올리며 구호를 외치듯 동성애자들을 정죄하거나 심판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건전한 사회와 국가를 이루기 위한 윤리적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때문에 동성애만을 비판하기 보다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만연해 있는 근원적인 죄악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부패 네트워크, 불의, 탐욕, 추악, 악독, 분쟁 등과 같이 이 사회에 나타나는 다양한 죄악의 현상들을 분석하며 비판하고, 이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불신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건강한 사회윤리를 함께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왜 교회는 세상에 만연해 있는 롬1:29-30의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기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등의 다양한 죄악의 현상들에 대해서는 입다물고 있는가?  
교회 안에서만 뜨겁게 신앙생활만 잘하면 전부라고 생각하고, 교회 밖에 나가서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는 자들이, 세상에서 수없이 벌어지는 죄악들에 대해서는 입다물고 있으면서, 유독 동성애에 대해서만 핏대를 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와 신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균형적인 시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외형적인 성장을 통해 종교권력을 추구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이 사회를 지배하는 죄악들에 대해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모든 사람이 공감 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건강한 윤리를 제시하는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강단에서 헌금과 복, 출세와 성공만을 강조했지, 세상에 나가서 신자가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는 강조하지 않았다. 

죽으면 내세-천당간다고만 강조했지, 정작 이 땅에 임재하고 있는 바실레이아(왕권, KINGDOM),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 주님의 주권과 LORDSHIP에 복종하여 이 땅에 실현되어지는 천국(바실레이아 톤 우라논)과 하나님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우) 건설에 왕이며 제사장의 자격으로 동참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전도하고 교회가 숫적으로 많아지는게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고 생각하여 전 우주와 전 지구에까지 향하는 주님의 왕권과 주권을 교회의 건물 안에만 가두는 치명적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근본주의 교리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활을 해야 한다는 가장 근본적인 신앙의 원리를 놓치고 말았다.  온갖 사이비 신비주의적인 교리와 내세주의적 신앙관, 그리고 시한부 종말론들이 교회 안에 팽배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을 바라보는 균형적인 시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평화, 평등, 사랑, 박애, 인권을 외치는 진보주의(자유주의) 교회는 어떠한가?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정치적 억압과 압제에서의 해방이라고 보고, 구원을 경제적, 사회적 비인간화에서 인간성의 회복으로 보면서, 이데올로기 안에 갇혀 있는 인본주의자들이다.

그러면서 교회와 신자는 스스로 윤리적 부패와 죄악들에 연루되어 오히려 불신자들의 지탄을 받는 웃지 못할 지경에 까지 오게 되었다.  이 사회를 건강하게 이끌어가기 위해 도덕적 리더쉽을 가져야할 교회와 신자가 도리어 윤리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면서 동성애만을 핏대 올리며 저주를 퍼붓는, 모순된 상황을 연출하고 말았다.

때문에 교회는 동성애를 비판하면서 정치 권력이나 경제 권력에 아부하거나 타협하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된다.  교회는 동성애를 비판하면서 맘몬숭배나 권력숭배에 치우쳐서는 안된다.   교회는 단순히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나 [예수 믿으면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산다] 라고 말할게 아니라, 이 세상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죄악들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회개의 삶을 전파해야 하며, 건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사회윤리를 제시해야 한다.  


교회는 악해져가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정의를 부르짖는 노아의 사명을 다시 찾아야 한다.  벧후 2:5 의 표준새번역을 보라 [그는 또 옛 세계를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를 홍수로 덮으셨습니다. 그 때에 그는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인 노아와 그 가족 일곱 사람만을 살려주셨습니다]


성도는 교회 안에서의 열정적인 신앙생활 못지 않게 교회 밖으로 나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 속의 죄악된 가치관과 문화들과 철저하게 싸워야 한다.  이러한 자세가 왕 같은 제사장의 사명이다.   교회 안에서는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교회를 떠나서 세상 속에서는 죄악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면서, 동성애를 비판하는 자세는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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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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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안수(여자 목사, 여자 장로)를 금하는 성경적 교훈

(Biblical Teaching against Women’s Ordination)

 

(조영엽 박사)

 

 

(딤전 2:11-12)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고전 14:34-35) “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딤전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딛 1: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여성 안수를 금하는 가장 핵심 되는 성구들이다. 그만큼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이 말씀들을 아전인수 격으로 달리 해석한다.

 

1. 디모데전서 2:11-12 주해

 

(딤전 2:11-12)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 말씀은 여자는 ① 전적으로 순종하라 ② 조용히 하라 ③ 배우라 ④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⑤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요약된다.

 

(1) 전적으로 순종하라.

 

“일절 순종함으로”(엔 파세 휘포타게, ; in all subjection; 모든 복종으로, 전적 복종으로)는 전적 완전 복종(full submission)을 가리킨다. 이 단어(복종)는 신약에 4회 나타난다(고후 9:13; 갈 2:5; 딤전 2:11; 3:4). “복종”(휘포타게, ; subjection; 복종)은 영어성경 KJV에는 복종(subjection)으로 바로 번역되었다. “휘포타게”는 군사적 용어로서 이는 하급자가 상관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휘포타게의 동사 휘포타소( )는 후포(; under; 밑에)와 타소(; to arrange; 정열하다, 배치하다)로 구성된 합성어이다. 파세(; all, 모든)는 복종을 강조하는 형용사이다. 따라서 병사가 상관에게 절대 복종하듯이 여자가 권위에 전적으로 복종하라는 말씀이다. 여 성도는 교회에서는 감독자(목사와 장로)에게 복종하여야 하며,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딛 2:5; 딤전 2:11). 그러나 한국어로는 순복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순복은 부드러워 귀에 거슬리지 않는 반면 의미는 그대로 살아 있으니 여자에게는 순복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여자가 권위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것은 여자가 취할 적절한 자세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되는 것만 순복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2) 조용히 하라.

 

“조용히”(엔 헤쉬키아, ; in silence; 조용히)는 침묵을 뜻한다. ‘헤쉬키아’가 KJV, RSV에는 silence(침묵, 조용함)로, NASB, NIV에는 quietness(고요함)로 번역하였다. 헤쉬키아는 방해받지 않는 조용과 고요의 상태를 의미하거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조용하게 있는 태도로서의 침묵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헤쉬키아는 종교집회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서 조용하게 배우는 자의 자세를 가리킨다. 여자가 공예배시에 말을 하여 예배를 방해하거나 또는 질문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이 단어는 완전한 침묵 또는 함구무언(complete silence or no talking)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행 22:2; 살후 3:12; 딤전 2:11; 벧전 3:4).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또는 침묵한다는 단어는 씨가오(; to be silent; 조용히 하다, 침묵하다)이다(눅 9:36; 18:39; 고전 14:34).

 

(3) 배우라.

 

“배우라”(만다네토, ; let learn; 배우라)는 단어는 3인칭 · 단수 · 현재 · 명령형으로 사람이 행하여 오는 전례·관습·규례 등을 주시하여 관찰하므로 배우고 지식을 증가시키라는 말씀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강의를 통하여 지식적으로만 배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학생들이 실습을 통하여 지식을 획득 증가시키는 것과 같다. 본문에 누구에게 배울 것인가에 대하여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과 성경원리에 입각하여 고찰할 때 의심 없이 교회의 지도자로부터 배우라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는 교회에서나 어떤 종교적 모임에서도 조용히 배울 것을 가르친다.

 

(4) 여자의 가르치는 것(강도권)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여자가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 앞에서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가르치다”(디다스코, ; to teach or instruct; 가르치다, 교육하다)라는 단어는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을, 남편이 아내를,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교회에서 교역자들이 평신도들을 교훈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가르친다”는 이 단어는 주로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사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회당들·성전·마을·들판·해변가 등에서 제자들과 수많은 무리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실 때 사용하였다(마 5:2, 19; 7:29; 9:35; 11:1; 13:54; 21:23; 26:55; 28:20; 막 4:1; 6:6…). 그리고 사도들과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선포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행 4:2; 5:21, 25, 42; 11:26; 15:35; 18:11, 25; 20:20; 21:21, 28; 28:31; 엡 4:11; 딤전 4:11; 6:2; 딤후 2:2). 그러므로 본문에서 가르침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선포함이며, 이것은 설교를 포함한다. 이 직분은 족장들이, 제사장들이, 랍비들이, 감독들이, 목사들(엡 4:11)이 감당하여 왔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원문에는 “나는 허락하지 않는다”(우크 에피트레포, ; I do not permit)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은 부정을 나타내는 매우 강한 표현이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 단어는 충고나 권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암시한다. 따라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공예배시 여자가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에서 교역자(감독=장로=목사)로서 설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강도권을 말한다.

 

칼빈(John Calvin)은 고린도전서 14:34 주석에서 “교회에서 가장 최고의 위치를 점령하는 가르침과 설교를 위한 책임은…여성이 교회 전체에서 권위를 가짐은 얼마나 부당한가? 가르침의 직분은 교회에서 최고의 직분이요, 결과적으로 복종하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1)

 

그러면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여자의 가르침 자체를 부인하는 말씀인가?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교훈하는 의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여자가 가르치는 것 자체를 금하신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여자가 남자의 권위와 지도하에서 가르치는 것은 귀한 일이다. 사도 바울은 늙은 여자들로 하여금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라고 권면하였고(딛 2:3-4), 디모데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는 사내 아이인 디모데를 가르쳤다(딤후 1:3-5). 이와 같이 교회에서 여성도들이 주일학교 반사·성가대·구역장·전도회·기타 여러 면에서 가르치는 일·전도·상담·봉사·구제 등은 매우 중요하므로 강조되어야 한다.

 

(5) 남자 주관하는 것(치리권)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자의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을, 교회에서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남자”(아넬, ; an adult male, husband)는 남자 어른 또는 남편을 뜻한다. “주관하는 것”(아우덴테인, ; to exercise authority; 권위를 행사하다) 이 단어는 권위를 행사하다(아우덴테오, ; to exercise authority or to domineer over, 위에 권위를 가지다 또는 지배하다)의 현재·부정·능동이다. 현재 부정사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로서 행동의 계속이나 반복개념이 있다.

 

“허락지 않는다”(우크 에피트레포, ; do not permit;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가르치는 것과 연결되어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일, 남자 위에서 권위를 행하는 일을 계속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성경이 허락하지 않는다.

 

성경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선언하였다(고전 11:3; 엡 5:23). 성경은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사람의 머리와 몸으로 비유하였고,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도 사람의 머리와 몸으로 비유하였다(엡 1:22, 23; 4:15; 5:23; 골 1:18). 머리는 온 몸과 지체들을 주관하고 다스리듯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주관하고 다스리듯이, 남자는 여자를 주관하고 다스리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여자가 남자 어른들이나 남편을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는 여자는 순종적·복종적·종속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여자를 남자의 몸으로 삼으신 제도와 위계질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때로부터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설정하신 원리요 제도이다. 주관하는 일(치리권)은 교회에서는 감독(장로)의 임무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히 13:17)고 하였다. 여기서 다스리며 권면하는 자들과 인도하는 자들은 동일한 직분을 맡은 하나님의 사역자들 곧 장로들을 가리킨다(딤전 3:5; 5:17).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여자가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여자의 목사 또는 장로 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목사와 장로는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을 가르치는 직분과 다스리는 직분이다. 이 직분들은 남자들에게만 주어졌으므로 여자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2. 고린도전서 14:34-35 주해

 

(고전 14:34-35)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도들을 향하여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권면하였을 때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귀에는 그 말씀이 하등의 이상한 말씀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이 무엇인지 자신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는 일반적으로 여자들(구나이케스, ; women; 여자들)로서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과 결혼한 여자들 전체를 가리킨다.

 

 

(1)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공예배(Public Worship)와 관계된 교훈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배우지 못하고 교양이 없는 일부 여신도들이 예배시간에 무질서하게 질문 아닌 질문들을 하거나 또는 말을 하므로 예배를 방해하지 않도록 교훈하였다. 즉 그런 질문들을 즉시 중단할 것과 장기적으로는 그들을 교육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교훈하였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예배 도중에 자기 남편에게 질문하는 것까지도 규제하였다. 교회에서 무엇을 배웠어도 잘 알지 못하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배우라고 하였다(14:35).

 

“교회에서”(엔 타이스 에크레시아이스, ; in the churches; 교회들에서)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모이는 어떠한 집회에서도(in any assemblies) 잠잠하라는 말씀이다(Calvin, Bengel, Meyer, Ellicott).

 

“잠잠하라”(씨가토산, ; let be silent; 조용히 하라, 잠잠하라, 침묵하라). 이 단어는 디모데전서 2:11에 “조용하라”(헤쉬키아, )는 말씀보다 강한 표현이다. 이 단어의 시상은 3인칭·복수·현재· 명령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무조건 순종을 요구한다. 그리고 원문에는 여자가 잠잠하여야 할 이유를 “왜냐하면”(가르, ; for, because; 왜냐하면, …때문에) 이라는 접속사가 밝히고 있다. 즉 여자가 잠잠하여야 할 이유는 여자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영적 은사들(Spiritual gifts)과도 관계된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에는 방언과 예언도 포함된다. 사도 바울은 본 장(고전 14장)에서 방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고, 오용과 남용으로 인한 무질서와 혼돈을 방지하기 위하여 방언에 대한 규례를 상세하게 교훈하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였다.  따라서 영적 은사로서의 방언이 존재하던 사도시대에도 방언이 여자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영적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닌 계속적이고도 반복적인, 뜻이 없는, 정신나간 사람의 헛소리 같은, 중언부언하는, 이해가 되지 않는 소위 현대 방언이란 말할 나위도 없다. 성경적 방언은 외국어였으며, 계시의 완성(기록)과 더불어 자연히 끝났으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3)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여자의 강도권과도 관계되는 교훈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디모데전서 2:12, “여자의 가르침을 허락함이 없나니”라는 말씀과 맥락을 같이한다. 즉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 앞에서 가르치는 것(강도, 설교)과 전체 회중을 다스리는 것(치리)을 여자에게 허락함이 없다.

 

(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여자의 치리권과도 관계된 교훈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말씀의 근본적 권위는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상기시키면서 여하한 의문이나 반대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였다. 이 말씀은 여자가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교회에서는 가르치는 자와 다스리는 자에게 순종하에 있음(to be under obedience)을 가리킨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본절에서 “율법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말씀은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는 말씀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여자의 복종은 창조의 질서와 타락의 결과 즉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는 말씀과 연결하여 해석하여야 정당하므로 본절에서의 율법은 모세오경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여야 마땅하다.

 

“오직 복종할 것이요.”(휘포타세스도산, ; let them be subject; 그들로 하여금 복종케 하라)는 휘포다소()의 3인칭·복수·현재·명령·중간태이다. 중간태(middle voice)는 주어가 어떤 면에서 그 주어 자체에 관계되거나 또는 주어 자체가 직접 행동(동작)에 관계하는 것을 나타낸다.2) 그러므로 “복종할 것이요”라는 말씀은 여자들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자원하여 직접 복종할 것을 가리킨다. 여자가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그리고 교회에서는 목회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요, 명령이요, 여자의 미덕이다.

 

사람의 머리는 온 몸을 주관하고 다스리며 온 몸은 머리의 명령에 복종하듯이, 여자는 가정에서는 남편에게(엡 5:22) 그리고 교회에서는 영적 지도자에게(고전 14:34; 딤전 2:11-12) 복종하여야 한다. 이것은 질서의 개념이요, 불평등의 개념이 아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만 복종을 요한다.

 

3. 디모데전서 3:2; 디도서 1:6 주해

 

(딤전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딛 1: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디모데전서 3:2절과 디도서 1:6절 말씀은 남녀의 성별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중혼자가 아니어야 한다는 데 그 진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목사는 한 남편의 아내도, 독신녀도 무방하다고 한다.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는 “말 때문에 여자는 그 직분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지나치게 일방적인 것이라 보아야 한다”(『교역과 여성 안수』, pp. 103-104) 라고 한다.

 

반증(反證):

 

(1) 본 절은 교역자의 자격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감독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도 무흠하고 고상한 인격자이어야 한다. 교역자는 결혼관에 있어서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교역자는 이성적으로도 깨끗함을 요구한다. 성경적 이성관 결혼관은 일부일처(one man-husband and one woman-wife)이다. 결혼은 성적 순결성(sexual purity)을 강조한다. 사람이 결혼하였을 경우 한 아내만을 소유한 자(only one wife at a time)만이 교역자의 자격이 있다.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며”라는 말씀은 결혼하지 않은 미혼 독신(single)이나 또는 결혼은 하였으나 아내가 사망한 연고로 홀아비가 된 독신은 성직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은 아니다. 이 말씀은 교역자가 결혼하였을 경우 한 아내만을 소유하여야 한다는 진리이다. 목회자의 자격에 기혼과 미혼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목사는 한 남편의 아내도 독신녀도 무방하다는 주장은 논리적 비약으로 성경교훈에 위배된다.

 

(2) 감독은 남자이어야 한다.

 

성직자의 자격에 기혼이냐 미혼이냐의 구별은 없다. 그러나 남녀의 성 구별은 분명히 있다. 감독은 남자이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감독직을 여자에게는 허락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이다.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말씀의 논법을 빌어 감독은 한 남편의 아내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성경해석은 성경의 원리에 근거하여야 한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이나 신약시대의 사도들 그리고 그 이후 이 제사장 직분(예배를 주관하는 직분)은 남자에 의하여 남자만이 수행하여 온 직분이다. 성직에는 인간의 자유선택이 존재하지 않는다.

 

4. 여성 안수를 금하는 이유들(Reasons Why Against)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와 인간의 타락 사건에 근거하여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이유(가르, ga;r; for; 왜냐하면)를 밝혔다. 이 두 가지 이유가 우리에게 공평한가 또는 합리적인가는 큰 문제가 아니다. 이 이유들은 하나님의 이유들(God’s reasons)이기 때문이다.

 

(1) 창조의 원리와 질서에 있어서-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helper)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는 하나의 이유는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도덕적·인격적·영적 실유(實有)임으로 금수(禽獸)와는 만족할 만한 인격적·유기적 관계를 맺기 불가능하였다. 사람이 홀로 지낸다는 것은 곧 고독과 공허감을 면할 수 없다. 아담은 독처하였기 때문에 외로웠으며, 그러기에 옆에서 돕는 배필이 필요하였으며, 하나님은 하와(여자)를 남편을 돕는 배필(helper)로서 지으셨다(창 2:18). 이런 의미에서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고전 11:9)라고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곁에서 돕는 자는 순종적·복종적·종속적 위치에 있음이 분명하지 않는가! 순종적·복종적·종속적 위치에 있는 여자가 남자 어른을 포함한 전체 회중에게 설교하거나 그들을 다스리는 것은 창조의 원리, 성경의 교훈에 위배된다.

 

그러나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돕는 배필은 종속적 의미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열등성도 우월성도 의미하지 않는 상응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돕는 이란 “아담을 위하여가 아니라, 아담에게 어울리는, 아담에게 상응하는 것으로 번역하여야 한다. ‘에제르’는 단순히 일을 돕거나 자식을 낳아주고 살림을 살아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후원을 뜻하며 협력(partnership)을 의미하는 말이다.”3) “… 여기서 강조는 남자와 여자의 종속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양자의 동반자로서의 결속과 책임성에 대한 당위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4) 이 단어 자체는 높거나 낮은 등급이나 계급을 언급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면서 “돕는 배필”의 참된 의미를 변절시켰다.5) 그와 같은 아전인수격의 해석은 본문의 내용과 성경해석의 원리(문자적·문법적·역사적·교리적 해석)에 위배되므로 고려할 가치도 없다.

 

(2) 창조의 순위에 있어서-여자는 나중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자는 나중에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딤전 2:13)

 

여자가 남자를 주장할 수 없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여자는 나중에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담은 만물의 영장으로 먼저 지음을 받았고 하와는 아담을 돕는 배필로 나중에 지음을 받았다(창 2:21-23).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으니 원리상 먼저 태어난 것과 같다. 먼저 태어난 자(장자, first born)는 아버지의 차석에 있는 자요, 아버지 사후에는 가정을 다스릴 책임이 있다(창 27:19; 49:3; 왕하 2:9; 눅 15:11-32). 그런데 나중에 지음을 받은 자가 먼저 지음을 받은 자를 주관한다는 것은 몸이 머리를 주관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 이는 성경의 원리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여자는 남자보다 나중에 지음을 받았다는 이 사실을 근거로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창조의 원리와 순위에 있어서도 여자는 남자 위에서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도록 의도된 바가 없다.

 

(3) 범죄의 순위에 있어서-여자가 먼저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 2:14).

 

사도 바울은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여자가 먼저 사단의 꾀임을 받아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았다. 이 말씀은 아담은 범죄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와가 속임과 꼬임을 받아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음을 보여준다. “속이다”라는 단어가 아담의 경우에는 “아파타오”(; to mislead, deceive, beguile; 잘못 인도하다·속이다·기만하다·미혹하다)로 사용되었고, 하와의 경우는 “엑사파타오”(; to deceive wholly, beguile throughly; 완전히 속이다·철저히 기만<미혹>하다)라는 강조형이 사용되었다.6)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다 사단의 속임을 당하였으나 하와의 경우는 사단으로부터 완전히 철저히 꾀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창세기 3:6은 아담과 하와가 각기 범죄한 사실을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하와는 뱀(사단의 화신)의 꾀임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범죄하였고,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2:17)는 금령을 직접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와의 꾀임으로 하와로부터 금과를 받아먹음으로 범죄 하였다.

 

이상과 같이 창세기 3:6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사실을 상세히 보도하였고, 로마서 5:12-21은 아담이 하나님과의 행위언약(a Coverant of Works)의 당사자로서 인류의 대표로 범죄한 사실을 지적하였고, 디모데전서 2:14은 하와가 범죄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하와는 아담처럼 비록 하나님과의 언약의 직접적 당사자는 아닐지라도 언약에 관계된 자로서 범죄한 것은 사실이다.

 

로마서 5:12-21, “한 사람”(one man)이라고 5번 기록되었는데(롬 5:12, 15, 16, 18, 19), 여기서 한 사람이란 분명히 “아담 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한 사람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임을 또한 가리킨다. 따라서 아담 한 사람의 범죄의 결과는 아담 자신에게는 물론 아담의 후손 전(全)인류에 똑같이 그 영향이 미친다는 사실을 밝히 보여준다.

 

그러면 아담 한 사람의 범죄는 자신과 전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정죄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많은(many) 사람은 모든(all) 사람을 가리킨다.

 

아담은 전 인류의 대표자로서 그의 범죄와 그 결과는 온 인류 위에 미치는 것과 같이, 하와는 행위언약에 관계된 자로서 그녀의 범죄와 그 결과는 모든 여자들 위에 미친다는 사실을 성경은 또한 밝히 가르치고 있다. 그 한 예는 여자의 해산의 고통과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창 3:16). 해산의 고통은 잉태하는 모든 여자들 위에 임하며, 여자가 남자에게 다스림을 받는 것은 창조의 원리와 타락의 결과에 의한 것이다. 하와는 모든 여자들의 대표라는 “대표성의 원리”(A principle of representative)에 의하여 여자의 가르침과 다스림(설교하는 목사와 다스리는 장로)을 성경은 금하였다.

 

(4) 신적(神的) 권위에 있어서 - 여자가 남자 주관함을 허락하지 않음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하와와 범죄로 인한 결과이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하나님은 태초에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시고 남자를 머리로, 여자를 몸으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가정·교회에서의 남녀의 직분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이다. 성경은 여자는 남자 아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남자는 그리스도 아래 있음을 또한 말씀하셨다(엡 4:15; 5:23). 따라서 남자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다스림을 받을 자가 다스리고, 가르침을 받을 자가 가르친다면 그것은 신적(神的) 권위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가정과 교회의 위계질서를 전복(뒤집어 엎음)하는 일이다. 경건한 여성도들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자신들의 높은 신분을 깨달아 여성 안수를 반대한다.

 

(5) 신체적·정신적·심리적 측면에서 - 여자는 연약한 그릇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여자들의 신체적·정신적·심리적 면에서이다.

 

신체적인 면에서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하였다.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벧전 3:7). “그릇”(스케우스, ; vessel; 그릇)은 문자적으로는 컵이나 쟁반 같은 그릇을 가리키며(막 11:16; 눅 8:16; 요 19:29; 행 10:11, 16; 롬 9:21; 딤후 2:20; 히 9:21; 계 2:27; 18:12), 상징적으로는 사람의 육체를 가리킨다. 즉 사람의 육체를 질그릇으로 비유하였다. 본래 사람의 육체는 흙으로 만든 질그릇과 같다(창 2:7). 질그릇은 깨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육체도 깨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매우 연약하다. 남자의 신체도 연약하지만 여자의 신체는 더욱 연약하다.

 

“더 연약한”(아스데네스테로, ; weaker; 더 연약한·더 힘없는·더 무기력한)은 아스데네스()의 비교급이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신체적인 면, 정신적인 면, 심리적인 면 등 여러 면에서 더 연약하므로 남자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 할 위치에 놓여있다.

 

남자와 여자는 신체적·정신적·심리적 차이가 있으며 그로 인하여 비롯되는 “남성과 여성의 삶에 있어서의 역할과 위치의 불가교체성(the inexchangibility of roles and places in life between man and woman)을 믿기 때문에 여성의 교회에서의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에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강도와 치리)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여자는 신체적·정신적·심리적 측면에서 남자보다 더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 여자는 독립적이 아니라 의존적이며, 다스리는 위치에 있지 아니하고 다스림을 받는 위치에 놓여있다. 이러한 신분과 위치에 있는 여자가 남자를 주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위배된다. 남자는 남자의 위치를 지키며 남자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유익이 되는 것처럼, 여자는 여자의 위치를 지키며 여자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유익이 될 것이다.

 

(6) 여자의 생리적 현상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이 적합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성의 생리적 현상(멘스, menstration)이다. 성경은 여자의 월경 기간이나 해산 후에는 부정하다고 하였다(레 12:2, 5; 15:25-26). 이것은 현대 의학상으로나 위생상으로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월경 기간이나 해산 전후 상당한 기간에는 부부가 서로 가까이 하지 않도록 명령되었다(겔 18:6; 22:10).

 

월경기간에는 생리적 변화가 많이 일어난다. 구토·변비·속쓰림·가스 형성·두통·현기·요통·질 분비물·피곤·치질·살 부음 …. 월경기간에는 정신적 심리적 변화도 많이 일어난다. 짜증·신경질·히스테리 등 심경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이상과 같이 생리적·정신적·심리적 변화가 1개월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계속되는 상황 하에서 어떻게 올바른 목회를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양육하며, 집안일을 돌보는 이 중요한 일들을 제쳐놓고 어떻게 성직(聖職)을 잘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실상 여자 목사 제도를 찬동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약한 자매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요,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도록 강요하는 것이요, 신앙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케 한다.

 

(7) 여자의 음성(목소리)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또 하나의 증거는 여자의 목소리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여자의 음성을 아름답게 그리고 고음(high volume)을 내어 앨토(Alto)나 소프라노(Soprano)를 맡게 하셨다. 반면에 남자의 음성은 굵게 그리고 저음을 내어 테너(Tenor)나 베이스(Base)를 맡게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서 남자의 음성과 여자의 음성의 조화와 미를 산출케 하신다. 또한 여자의 음성은 여자의 신분에 맡도록 남편을 돕는 배필로서 남편을 기쁘게 하는 꾀꼬리 소리 같은 음성을 내게 하시며, 남자의 음성은 남자의 신분에 맞도록 아내를 다스리는 머리로서 권위적 저음을 내게 하신다. 여자의 음성 자체가 여자의 강도권과 치리권을 거부한다.

 

(8) 여성 안수를 찬동하여 시행하는 교단들도 실제상은 여성 안수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취하고 있다.

 

여성 안수를 시행하는 교단들의 교회들 다수는 여성 안수에 대하여 그리고 안수 받은 여자 목사(신부)를 교역자로 모시는 데 대하여 거부 반응을 취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본성(human nature)도 거부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여성 안수 허용하는 교단들의 성직자 통계들이 이것을 증명한다.

 

 

5. 여성 안수 찬동자들의 궤변들(Arguments for Women’s Ordination)

 

(1) 여성 안수 반대는 성 차별이라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로마서 10:12; 고린도전서 12:13; 갈라디아서 3:26-28; 골로새서 3:11 등의 구절들을 오용하여 여성 안수 반대는 성 차별(Sexism)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성직에 남녀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성직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 여성 안수를 금하는 것은 성경적 신학적 근거가 없다. 남자니까 성직을 맡을 수 있고 여자니까 성직 안수가 불가하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분명히 잘못된 것으로 여겨진다. 성직 안수 문제에 있어서 남녀차별의 잘못은 구약의 관점에서 성서 신학적으로 갈라디아서 3:28에 이르러 시정될 수 있고 긍정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진다.”7) “남자와 여자의 교회직제의 구별이란 더 이상 성서적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라고 주장한다.8) 아이디(Ide)는 “여성 성직의 권리와 책임을 제거하는 것은 오로지 성차별 때문에 나왔다”라고 주장하였다.9)

 

반증(反證):

 

성 구별과 성 차별은 전연 별개의 문제이다. 성 구별은 남성·여성을 구분하는 것이요, 성 차별은 어느 한 성(남성 또는 여성)을 다른 한 성(性)보다 대우를 달리하는 것이다. 성경은 자초지종 성 구별이요 성 차별이 아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성(sex)을 구별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직분을 달리 맡기셨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분리의 역사(work of separation)를 하신다.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창 1:4), 하늘 위의 물(구름)과 궁창 아래 물로 나누시고(창 1:7), 육지와 바다를 나누시고(1:10), 주야를 나누시고(1:14),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시되 그 영광을 달리하시고 (1:16), 모든 생물들을 암수로, 사람을 남녀로 나누어 구별하셨다(2:18).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격적 존재들이다(창 1:27). 그리고 남녀 모두 구속함을 받아 천국 유업도 같이 누릴 형제자매들이다. 그러나 가정·교회에서의 직분과 기능은 상이하다. 이것은 남녀의 차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별에 의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며 동시에 상이하다(equal but different).

 

여성 안수 찬동자들이 오용하는 성구들은 과연 여성 안수와 관련된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말씀들인가?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는 민족적 구별이다. 율법아래서 유대인은 선민(택한 백성)이요, 헬라인은 이방인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여러 면에서 큰 차이·차별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방인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방인들과의 거리를 멀리하였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하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를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주(Lord)가 되신다. 여기서 “부른다(call upon)는 말씀은 간구하다·예배드리다라는 뜻으로 구약의 표현이다”(창 4:26; 12:8; 13:4; 21:33; 26:25; 왕상 18:24; 왕하 5:11; 시 79:6; 사 64:7; 욜 2:32).10) 그리스도께서는 저를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말하면 저를 믿고 저에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에게 같은 주님이 되신다(행 9:14, 21; 22:16; 고전 1:2; 딤후 2:22). 그리스도 안에서는 민족적 구별, 인종적 차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여성 안수와는 전연 상관이 없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② “종이나 자유자나 …”는 사회의 신분적 구별이다. 일반적으로 과거에는 종은 가난한 자요, 자유자는 부자이었다. 실제상 그 당시 고린도 지방에는 종(노예)이 약 40만 명이요, 자유인이 약 25만 명이었다고 한다.11)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회 신분적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기 때문이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라는 말씀은 성령세례를, 성령세례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중생”을(요 3:3, 5), “한 몸이 되었고”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몸의 지체가 되었음을,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은 상징적 표현으로서 성령을 받음을 가리킨다.

 

(갈 3:26-28)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③ “… 남자나 여자”는 성적 구별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성 구별은 있어도 성 차별은 없다. 여성 안수 문제는 성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성 구별의 문제이다. 이 세상에는 민족적 차별·인종적 차별·사회적 신분의 차별·성 차별 등이 있어 왔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자유자는 종보다, 남자는 여자보다 우위에 있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 차별(sexism)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윤리적 사회적 성적 구별을 초월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는 그와 같은 차별들이 다 철폐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남녀 관계는 성 차별이 아니라 성 구별이다. 이 말씀도 여성 안수와는 전연 상관이 없는 말씀이다.

 

(골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④ 할례당과 무할례당: 종교적 구별이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때에는 이방인도, 무할례자도, 약속의 언약들에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요,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종교적 구별이 없다(옙 2:11-16). 모두가 새로 지음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갈 6:15). 거기에는(축복받은 자리에는) 할례 받았으면 들어가고 할례 받지 못하였으면 제외되는 곳이 아니다.

 

⑤ 야만인이나 구스디아인: 문화적 구별이다. 거기에는 문화적 구별이 없다. 당시 야만인은 헬라 언어와 문명에 무식한 자들, 문명에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구스디아는 발칸 반도 북쪽 남러시아 지방에서 온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곳 사람들은 짐승들보다 조금 나은 야만인들 중의 야만인이었다고 한다.

 

상기 구절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는 민족적 인종적 차별·사회의 신분적 차별·성 차별·문화적 차별 등이 있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죄 사함과 구원을 받음에 여하한 차별이 없이 동등하다는 말씀이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여성 안수 찬동자들이 오용하는 성경구절들은 여성 안수와는 전연 상관이 없는 말씀들이다.

 

(2) 여성 안수를 금하는 성구들은 그 당시 특정한 상황 배경 위에서 해석하여야 한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주장하기를 고린도전서 14:34-35이나 디모데전서 2:11-12 말씀들은 그 당시 공동체의 특정한 상황 배경 위에서 이해하고 해석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 편지들이 쓰이고 보내어진 배경들을 성경해석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2)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고전 11:5-6) 등을 실례로 든다. 그들은 말하기를 “여자들로 하여금 머리에 수건을 쓰도록 권면한 것은 창녀들과의 혼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창녀들은 남자들에게 매력을 얻기 위하여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얼굴을 노출시켜 남자들을 유혹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쓸 것을 말하였다. 만일 자기 아내가 밖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다니는 것을 남편이 발견하면 이혼의 근거가 되었다.”13)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여성들이 창기들과의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권위에 복종하는 표시로 머리에 꼭 수건을 쓰고 다녀야 할 것인가라고 반문하면서 그와 같이 “여자는 일절 순종하므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 2:11-12)는 말씀도 그 당시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이니 지금 이 시대에는 해당이 안된다고 한다.

 

반증(反證):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생활양식과 영구 불변한 보편적(우주적) · 신앙적 · 도덕적 진리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특별한 상황(specific situation)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하므로 그 당시 특정한 상황 배경 위에서 이해하고 해석하여야 한다. 그러나 보편적(우주적) 일반적 규칙들(universal, general rules)은 시대 변천 상황 배경 위에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일반적 규칙들은 시대 변천이나 문화적 배경에 관계없이 어느 시대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적용되는 영구불변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34-35; 디모데전서 2:11, 12 등은 영구불변한 보편적 진리이다.

 

물론 그 당시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닌 것은 당시 상황 배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쓴 것은 남편에 대한 순복과 존경의 표시로서 남편에게 순복하고 남편을 욕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은 창기로 오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수건을 썼다. 그리고 공중 앞에서는 잠잠하였고 집 밖에서는 수건을 쓰지 않고는 다니지 아니하였다.14)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예배드리는 것은 자신을 욕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남편을 욕되게 하는 일이었다.

 

1세기에 유대인들은 물론 로마와 헬라인들도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녔다.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쓴 것은 권위(남편)에 대한 복종의 상징이었다. 여자에게는 남자라는 보이는 머리(visible head)가 있음으로 그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머리에 수건을 썼다(고전 11:10). 그러나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닌 것이 오늘날에는 제재를 받지 않는 것처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금한 것도 이 시대에는 제재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의 원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에서 나온 말이다.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니는 것 여부는 당시 공동체의 특정한 상황배경에 의한 것이요, 따라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시대 그 지방의 생활 양식이었다. 그러나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 앞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금하신 말씀들은 상황 배경 위에서 이해될 내용들이 아니다. 성경에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천하는 문화적 배경들이 있으며, 세월이 변하고 또 변해도 변치 않는 변할 수 없는 영구불변한 진리가 따로 있다. 전자는 문화적 생활양식이요, 후자는 영구불변한 보편적 진리이다. 그런데 여성 안수를 금하는 말씀들은 시대적 배경에 의한 문화적 생활양식이 아니라 영구불변한 진리이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 입을 것과 입지 않을 것, 먹을 것과 먹지 않을 것 등등 생활양식에 관한 규례들이나 생활양식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많이 변화되었다. 그 변화들이 성경의 교훈에 역행하거나 충돌되지 않는 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10계명을 위시한 신앙적·도덕적 규범들은 시대 변천에 관계없이 변할 수 없는 영구불변한 보편적 진리이다.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이 진리를 바로 깨닫지도 구별하지도 못하므로 창조의 원리와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3) 구약시대에 여선지자들이 있었음과 같이 신약시대에도 여자 목사가 있어야 한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구약시대에 여선지자들이 있었고 신약시대(초대교회시대)에도 여선지자들이 있었음과 같이 이 시대에도 여자 목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5)

 

구약시대에 여선지자들이 있었다. 출애굽시대, 사사시대, 열왕기시대, 그리고 구약 말기에 미리암·드보라·훌다·노아댜·안나 등 여선지자들이 있었다. 미리암(Miriam)은 모세와 아론의 누이로서 여선지자(prophetess)였다(출 15:20-21). 그리고 미리암이 여선지자로서 무엇을 전하였는지, 사역 기간이 얼마이었는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드보라(Deborah)는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여선지자이었으며, 동시에 여자로서는 유일한 사사였다. 고로 사람들은 드보라에게 나아와 재판을 받았다. 그녀는 바락으로 하여금 가나안의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 군대를 멸하도록 명령하였다(삿 4:4-24). 야빈은 이스라엘을 20년 동안 심히 학대한 고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훌다(Huldah)는 유다 왕 요시아시대에 살룸의 아내 여선지자이었다. 훌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gods)에게 분향하며 죄를 범하였음으로 회개를 촉구하였다(왕하 22:8, 14-20; 대하 34:22-28).

 

노아댜(Noadiah)는 거짓 여선지자로서 도비야와 산발랏과 합세하여 느헤미야와 느헤미야가 기도한 자들을 반대하였다(느 6:14).

 

안나(Anna)는 여선지자로서 결혼하여 7년 간 남편과 같이 살았고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 기도하며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안나는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말씀하였다(눅 2:36-38).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이 여선지자들 이외에도 사라, 한나, 아비가엘, 에스더 등도 여선지자라고 불렀다. 초대교회에도 예언하는 여자들이 있었다(고전 11:5). 빌립의 결혼하지 아니한 네 딸들도 여선지자들이었다(행 21:9). 따라서 신약시대에도 여자 목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증(反證): 

 

상기와 같이 우리는 구약시대에 소수의 일시적 여선지자들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여선지자들은 구약시대 전반에 걸쳐서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들의 사역도 매우 미흡하였다. 그들은 제사장적 직분, 왕적 직분 즉 제사 드리는 일과 다스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 경우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한 일시적 역사인 것이다. 하나님의 일시적 역사는 하나님의 일반적 역사에 위배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4) 사도행전 21: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는 말씀을 근거로 빌립의 네 딸들도 여선지자들이었다는 궤변

 

반증(反證):

 

일반적으로 예언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말하는 것(마 15:7; 요 11:51; 벧전 1:10; 유 14절)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고전 11:5; 14:1-5).

 

그런데 빌립의 딸들이 예언하였다는 말씀은 고린도전서 11:5; 14:1, 3-5, 24, 31, 39의 말씀들과 같은 맥락에서 고찰해야 한다. 고린도전서에서 우리에게 교훈하는 예언은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나가서 전하는 것으로서, 예언은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며 안위를 주며, 믿지 않는 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므로 그 예언을 사모하라고 하였다. 복음을 나가서 전하는 것은 선지자나 성직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할 일이다. 빌립의 네 딸들은 선지자가 아니었다.

 

존 칼빈(Calvin)은 빌립의 네 처녀 딸들의 예언에 대하여 논평하기를 “이 처녀들이 예언의 직분을 어떻게 실행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인도하고 다스리심으로…그들이 일반 회중 집회 아닌 가정에서 또는 어떤 개인 장소에서 예언하였다고 생각이 든다”라고 하였다.16)

 

초대교회에서 여자들이 예언하였다는 말씀은 가정에서나 또는 어떤 개인 장소에서 복음을 잘 전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하며, 여자의 강도권과 치리권을 금한 고린도전서 14:34, 35; 디모데전서 2:11-14의 말씀과 충돌되지 않는다. 우리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 빌립의 네 딸들처럼 기록된 말씀을 나가서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고전 14:1)

 

(5) 구약시대 남자 제사장직은 그 당시 이방종교들의 여제사장에 대한 반작용이었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주장하기를 중동의 고대 이방종교들은 여신들에 대한 숭배는 물론이고 신전(temple)에서의 여제사장들은 풍요를 기원하는 하나의 종교의식으로서 매춘행위를 하였다.17) 이러한 배경에서 이스라엘의 제사장직은 여성을 제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자 제사장직만이 존재하여 왔다.18) 구약 율법에서 여성이 제사장 자격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오늘날도 여성 안수가 불가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19) 오늘날은 여성들에게도 교육과 훈련을 시켜 안수를 줄 수 있다고 궤변을 토한다.

 

반증(反證):

 

물론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신앙은 그와 같은 혼음종교와의 구별은 언제나 분명히 하였다(레 18:3; 렘 3:1-2; 겔 16:16, 23). 그러나 구약시대 제사장직은 그 당시 이방종교들의 여제사장들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다. 구약시대 제사장직은 모세시대부터 제도화되었으나 실상은 인류의 초창기 아벨 때부터이다(창 4:1-5; 히 11:4). 아담의 10대 손 노아는 족장으로서 온 가족을 위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창 8:20-21). 욥도 자녀들의 수대로 매일 아침 일찍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곤 하였다(욥 1:5). 아브라함도(창 12:7-8), 이삭도(창 26:25), 야곱도(창 35장; 36장) 그 이후 아론의 자손들을 통한 제사를 드렸다(레 10:1-2). 구약시대 공적인 제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구약시대 남자 제사장직은 이방종교들의 여제사장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하여 태동된 것이 결코 아니며, 하나님의 자아의지에 의하여 결정된 성직(聖職)이다. 그리고 구약시대 제사장 직분은 신약시대에 장로와 감독(목사와 감독)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저들은 구약시대 남자 제사장직은 그 당시 이방종교들의 여제사장들에 대한 반작용이었으므로 여제사장은 제외되었다고 주장하니 성경도 신구약 교회 역사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나타낸다.

 

(6) 신약시대에도 여성 동역자들이 있었다는 궤변

 

“여성도 동반자(partner)로서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성직에 봉사함으로 이 시대의 사명을 다해 보자는 것이다”.20) 그리고 “로마서 16:1, 3, 7, 12; 빌립보서 4:2-3 등에서는 뵈뵈·브리스길라·안드로니고·유니아· 순두게·유오디아 같은 여인들을 동역자라 칭하고 복음을 위하여 주안에서 바울과 함께 힘쓰며 수고하였다” 특히 겐그리아 교회 일꾼 뵈뵈는 집사가 아니라 복음사역을 맡은 사역자라고 주장하면서 여자 목사 제도를 주장한다.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동역자”를 성직자(목사 또는 신부)로, 일반적으로 여자 교역자를 디아코노스()라고 불렀다고 하면서 뵈뵈는 겐그리아 교회의 교역자라고 주장한다.21)

 

반증(反證):

 

사도 바울은 디모데서에서 교회 내에서의 여성들을 환영하고 그들의 직분을 귀하게 여겼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유오디아와 순두게에 관하여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빌 4:3)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는 또 로마에 있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이라”(롬 16:3)고 언급하고 문안을 부탁하였다. 그는 또 겐그레아 교회의 자매 뵈뵈를 교회의 일꾼으로 많은 사람들을 돕는 자로 천거하였다(롬 16:1).

 

그러나 위의 여러 부녀자들은 각기 속한 교회에서 각기 맡은 직분(봉사직)에 충성하므로 사도 바울을 조력한 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여러 부녀자들은 교회의 일꾼들이요, 광의적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이라고 칭하였다. 그 부녀자들은 기름부음 받은 종으로서의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은 결코 아니었다.

 

(7) 신약시대는 남녀 모두 제사장이므로 여자도 제사장 직분을 맡아야 한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신약시대 제사장 직분은 남녀 모두에게 주어진 특권이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직분으로서의 성직 안수는 남녀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이다(Ibid., p. 57)라고 주장한다.

 

반증(反證):

 

물론 구약시대 제사장 직분은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참 신자들에게로 이전되었다. 민족적 이스라엘로부터 영적 이스라엘로 이전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마다 왕같은 대제사장(every believer-High Priest)이 되어(벧전 2:9)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하나님께 직접 예배드리는 특권이 부여되었다(히 4:16).

 

그러나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예배 인도자와 예배드리는 자를 구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데 문제가 있다. 물론 예배 인도자도 예배드리는 자들 중의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예배 인도자는 예배의 요소들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 회중 앞에서 설교(강도), 성례(세례·성찬) 거행, 다스리는 일(치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는 축도 등을 포함한 예배 순서 일체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사역자이다. 반면에 예배드리는 자들은 일반 회중들이다. 구약시대 제사는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이 드렸고 신약시대 예배는 기름부음 받은 목사가 인도한다. 따라서 성직 안수는 남녀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란 남녀의 구별에 의하여 제정하신 하나님의 성직 제도를 전면 부인하고 도전하는 행위이다.

 

(8) 여자도 남자와 동일한 은사를 받았음으로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동일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남녀 차별 없이 다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증(反證):

 

우리는 여자들의 받은 은사의 다양성과 탁월한 지식·재능·능력 그리고 신앙적 열심 등을 결단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여하한 이론적 뒷받침이나 근거가 없다. 여자들도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과 기능을 발휘한다. 특히 여성도들의 신앙적 열심과 헌신적 봉사는 참으로 남성도들의 귀감이 된다. 그것은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 초기에도, 지금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많은 여성도들이 어떤 은사들은 남자와 동일한 은사를, 또는 남자보다 더 많은 은사를 받았으므로 각기 전문분야에서 높은 직위에 앉아 활동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동일한 직분을 받은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은사를 받았을지라도 동일한 직분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직분들은 남자들에게만, 어떤 직분들은 여자들에게만 그리고 어떤 직분들은 남녀 모두에게 맡기셨다.

 

제사장직은 이 세상의 다른 전문직들과는 분명히 상이하다. 제사장 직분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천직(天職)이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도 많이 있다. 성직은 천직이요, 천직은 하나님께서 제정, 선택하시기 때문이다.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이 중요한 원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여성 안수 반대는 여성은 열등하고 남성은 월등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각기 받은 은사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잘 개발하여 사용하여야 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9) 여성 안수 반대는 형평의 원리에 어긋난다는 궤변(여신도들의 수, 봉사에 비추어)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주장하기를 교회에는 여성도들이 다수이며 교회의 봉사도 여성도들이 더 적극적이니 형평의 원리에 맞도록 여성 안수를 허락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증(反證):

 

물론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는 여성도들이 다수이며, 여성도들의 헌신적 교회 봉사는 뭇 남성도들의 귀감이 된다. 그러나 성직은 남성과 여성의 수의 비례에 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성직은 소위 형평의 원리에 맞도록 여성 안수를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직의 원리에 따라서 안수를 허락한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직의 원리란 성직은 남자에 의해서만 수행된다는 사실이다. 성직을 남녀 평신도의 수에 비례하여 분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10) 여성 안수 반대는 비민주적이라는 궤변(최고 의결기구에서 제외되므로)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주장하기를 교회의 최고 결정기구는 당회인데, 당회는 소수 남자 목사와 남자 장로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전체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비민주적 결의기관이다. 소수 남성이 다수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여권 침해라고 한다. 다수의 여성들이 결의 기구에 참여치 못하니 교회 운영이 잘못된다고 한다.

 

반증(反證):

 

물론 당회는 남자 목사, 남자 장로로 구성된 교회의 최고 결의기구이다. 그러나 개신교 다수는 회중이 공동의회를 열어 장로들을 선택하고 노회가 안수하여 장립한 후 장로들로 하여금 성도들을 대표하여 일을 처리하는 의회 민주주의이다. 그러므로 당회는 교회 전체의 의사를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남자 장로들로 하여금 교회를 다스려 왔으니 과거 2,000년 동안 교회의 행정은 비민주적이고 독재였단 말인가? 교회 역사에 그 많은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은 어찌하여 여성 안수를 허락하지 않았는가? 경건한 여성도들은 어찌하여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가? 그들은 성령의 뜻을 거슬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11) 하나님의 여성상(Female image of God)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말하기를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남성상(male image of God)만을 전통적으로 생각하여 왔다. 과거의 유대교 전통이나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을 남성으로 비유하는 데만 치중하여 하나님을 “남성신”으로 착각해 온 경향이 있다. 남성신은 남자와 연결되어 남성 제사장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결과 여성이 성직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여성상(female image of God)을 발굴하여 여권(woman’s right)을 다시 찾고, 여성들에게 안수를 허락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여성상을 엘 샤다이에서 발견한다고 궤변한다. 하나님의 명칭들 중 “엘 샤다이”()는 주석적으로 볼 때 양육하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가진 하나님으로 이해되며, 젖먹이는 가슴(젖가슴)을 가진 하나님으로 해석되는 엘 샤다이의 모성적 이미지는 구약의 하나님 이해로서 무리 없이 수용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고 하였다.22)

 

반증(反證):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칭들 중 엘 샤다이(; God Almighty)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뜻이다(창 17:1; 28:3; 35:11; 48:3; 49:2; 출 6:3 등). 70인역에는 엘 샤다이를 판토크라톨(; Almighty; 전능자)로 번역되었다. 신약에도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 Lord God the Almighty)으로 되어 있다(계 4:8).

 

“엘 샤다이”를 양육하는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하나님의 양육하심과 돌보심을 나타내는 모성적 이미지로 이해해도 무리 없이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은 억지 주장이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서 역할을 하시며 해산의 수고와 양육하심과 돌보심을 나타내는 은유적 모성적인 역할도 하신다(사 49:15). 그렇다고 하나님의 명칭을 임의로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로 개칭할 수 있는가?

 

 

(12) 포괄적 언어의 성구집(An Inclusive Language Lectionary)

 

미국의 자유주의 교회들의 연합단체인 미국교회협의회(NCCC in USA) 교육목회분과위원회는 여성해방, 여권운동, 남녀평등 운동의 일환으로 남성 명칭들을 남녀를 함께 지칭할 수 있는 포괄적 용어들로 대치하였다. 남녀 11명이 위원이 되어 1980년부터 3년 동안 『포괄적 언어의 성구집』이란 책들을 출간하였다. 포괄적 언어의 성구집은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첫 권(Cycle A)은 1983년부터, 둘째 권(Cycle B)은 1984년부터 그리고 셋째 권(Cycle C)은 1985년부터 예배 시 교독문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23)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은 포괄적 용어로 『신약과 시편』(An Inclusive Version)을 5년 편집 끝에 출간하였다.24)

 

미국교회협의회가 남성 명사들을 남녀가 공히 사용할 수 있는 포괄적 용어들로 대치시킨 명칭들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로(God the Father→God the Father and Mother)

 

신구약 성경은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였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우리 주님도 우리를 위한 그의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불렀고(마 6:9), 빈번히 “아버지” 또는 “나의 아버지”(Father or my Father)라고 불렀다(막 14:36; 마 11:27; 23:9).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중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양자)가 된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아바(Abba)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이 남녀평등을 운운하면서 하나님의 명칭까지도 임의로 변경한 것은 불신앙적 배교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신(神)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sex)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버지라고 계시하신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가장 잘 묘사한다.

 

②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이”로(the Son of God→Child of God)

 

자유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자격(sonship)으로서의 아들이라는 특수명칭을 아들과 딸 모두에게 사용할 수 있는 포괄적 용어인 아이(child)로 대치하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여자아이로 성을 바꾸거나 또는 여자아이로 부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 하시기 전에는 성자 하나님(God the Son)으로 그에게는 신성(deity)만 있었다. 그러나 도성인신 하심으로 그의 신성에 인성(humanity)을 취하사 신인(God-Man)이 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취하시고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만은 완전한 신(神)이신 동시에 또한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인성(人性)으로서의 예수님은 남자(male)이었다(마 3:17; 막 1:11; 마 4:1-3; 11:27; 15:39; 27:40; 막 13:32).

 

③ “왕”을 “지배자”로(King→Ruler)

 

왕이란 명칭은 위엄과 권위 그리고 통치권을 나타내는 남성 명사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세상에는 여왕(queen)들도 있다고 하면서 왕이라는 명칭 대신 지배자란 명칭으로 대치하였다.

 

④ “남자”를 “사람”으로(Man→Person)

 

자유주의자들은 남자를 가리키는 단어 안트로포스()는 남자와 여자를 다 가리키는 명칭이므로 남녀를 모두 나타내는 단어인 사람(person)으로 대치하였다고 궤변 한다. 물론 남자를 가리키는 단어 안트로포스는 일반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다 가리키는 “사람”이라는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마 4:4; 12:35; 요 2:25). 그러나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의미에서 “남자”까지도 남자와 여자를 다 포함하는 사람(person)으로 대치한 것은 성 구별까지도 철폐하는 망동(妄動)이다. 그러기에 저들은 호모섹스까지도 허용하지 않는가?

 

⑤ “형제들”을 “형제자매들”로(Brethern→Brothers and Sisters)

 

자유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성경에 형제들이란 형제 자매들을 가리킨다고 하면서 형제들을 형제 자매들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물론 형제들이란 단어 아델포스()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친구들을 가리키기도 하며(요 20:17), 형제들을 가리키기도 하며(마 1:2; 14:3), 이웃을 가리키기도 하며(마 5:22, 23, 24; 18:15, 21), 같은 민족을 가리키기도 하며(행 3:17; 롬 9:3),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가리키기도 한다(마 28:10). 그러나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남자 형제들(brothers)만을 가리킬 때도(행 7:23, 26; 히 7:5) 자매들(sisters)이란 말로 대치할 수 있는가? 이는 어불성설이다.

 

⑥ “아브라함”을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로(Abraham→Abraham and Sarah and Hagar)

 

여권운동자들은 주장하기를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에 사라와 하갈의 이름을 더 추가함으로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사라의 계통인가? 하갈의 계통인가?를 알 수 있다고 궤변한다. 그리고는 마태복음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을 “아브라함을 우리의 아버지로 사라와 하갈을 우리의 어머니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임의로 추가하였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가감할 수 없다는 무서운 계명(계 22:18, 19)도 아랑곳없다.

 

⑦ “경찰”을 “경찰관”으로(Policeman→Police officer)

 

폴리스(police) 다음에 접미어로 맨(man; 남자)이 붙었으니 맨(남자) 대신에 어휘서(officer; 관)를 붙이므로 남녀경찰관 모두에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⑧ “의장”을 “의장”으로(Chairman→Chairperson)

 

의장(chairman)은 체어(chair) 다음에 접미어로 맨(man; 남자)이 붙었으니 맨(남자) 대신에 펄손(person; 사람)으로 고쳤다.

 

(13) 외국의 전통적 교회들은 다 여성 안수를 시행한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주장하기를 “우리와 신앙 교류를 같이하는 다른 나라들의 전통적 교회들은 다 여성 안수를 허락한다. 국제 교류적 측면에서도 여성 안수를 허락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증(反證):

 

먼저 여성 안수를 실시하는 다른 나라들의 소위 전통적 교회들이란 어떤 교회들인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교회들과 교류하는 다른 나라들의 교회들도 자유주의 교회들 아니면 신비주의 교회들이다. 실례로 우리 나라의 통합측 장로교와 기장측 장로교가 교류하는 미합중국장로교(PCUSA), 기독교감리회와 교류하는 미국연합감리교(UMC) 등은 극도로 타락한 자유주의 교회들이며, 우리나라의 순복음 하나님의 성회(기하성)와 오순절 성결 교회와 교류하는 미국의 하나님의 성회는 현대 방언과 신유의 은사를 강조하는 신비주의 교회들이며, 구세군은 오래 전부터, 영국 성공회는 1974년부터 여성 안수를 실시하고 있다. 이들 교회들은 여자목사, 히피목사는 물론 호모섹스 목사들도 있다. 이 교회들은 오래 전부터 신앙고백이 일치하지 않는 교회들과 비성경적 연합운동(Ecumenical Movement)도 하고 있다. 그래도 이들 교회들이 전통적 교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14) 여성안수 반대는 생명경시라는 주장

 

여성안수 찬동자들, 여권운동자들은 여성안수 반대를 생명경시와 동일시하여 여성안수 반대는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예장 합동 총회장 여성비하? 생명경시 발언 대책위원회).

 

반증(反證):

 

여성안수 반대와 생명경시는 전연 무관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성안수 반대와 생명경시를 동일선상에서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납득이 안 되는 논리적 모순이다. 생명은 생명체를 존재케 하는 원동력이다. 원동력이란 생명체를 활동시키는 힘이다. 영존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마꾸겠느뇨?”(마 16:26)

 

그런데 아이러니칼한 것은 소위 생명을 중시한다는 여권운동자들과 여성안수 찬동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오히려 산아제한(Abortion)을 찬동한다. 산아제한은 무제한 어린 생명을 죽이는 살인죄이다. 생명의 근원이시오 부여자이신 하나님은 살인하지 말라(출 20:13; 창 9:5-7; 제 6계명)고 명령하셨다.

 

(15) 여성안수 반대하는 자들은 철저히 회개하고, 여성안수 반대제도를 철폐하라는 궤변

 

최근 “예장합동 총회장 여성비하 생명경시 발언 대책위원회”에서 있은 윤철호 교수의 특강의 마지막 발언들 중의 하나.

 

반증(反證):

 

모든 사람은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가 있다. 이는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와 더불어 인간의 기본권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든지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의 원리에 입각하여 어떤 종파, 어떤 교단의 신앙노선, 교리적 입장, 예배의 형태 등등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각 개인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관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생명과 같다.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의 원리에 입각하여 어떤 종파, 어떤 교단, 어떤 신앙노선을 선택하는 여부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나의 신앙관과 다른 사람의 신앙관은 전적으로 반대될 수 있다. 그 때에 나는 다른 종파, 다른 신앙에 관하여 나의 신앙의 세계에서 잘못된 신앙, 잘못된 교리 등에 관하여 가르쳐야 하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리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유 3). 그러나 자기의 신앙관과 배치된다 하여 그 세계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 철폐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월권이요,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의 원리에 위배된다.

 

6. 여성 안수 제도의 진전 과정(Developments in Womens Ordination throughout Church History)

 

(1) 1927년 배교와 불신앙으로 타락된 자유주의 교회들의 연합단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모체 중에 하나였던 신앙과 직제 위원회(Commission on Faith and Order)가 1927년 스위스의 로잔(Lausanne)에서 처음 모였을 때 400명의 대표들 중 7명이 여성들이었다. 여성 대표들은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사역과 직분에 관하여 진술하기를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올바른 위치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고 하였다.25)

 

(2) 1948년 8월 22일부터 9월 4일까지 화란의 암스테르담에서 147개 교단 352명의 대표들이 모여서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조직한 그때도 “여성의 완전 목회사역에 합의하지 못하였다”고 함으로 일부 자유주의교회들이 여자 목사 제도를 채용하고 있으면서도 여자 목사 제도의 찬반의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26)

 

(3) 1961년도 11월 18일부터 12월 6일까지 인도의 뉴델리에서 모였던 WCC 제3차 총회 시에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가정, 교회, 사회, 남녀 협력 분과 위원회와 협력하여 여자 목사 제도를 연구하도록 요청받았다.

 

(4) 이에 호응하여 불란서 파리에서 모였던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1963년도 7월 12-26일까지 캐나다 몬트리얼에서 모였던 제4차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 “여자 목사 안수에 관한 연구 보고서”가 나왔다. 이 연구보고서는 여자 목사 문제에 대하여 적극 찬동하였다. 그리고 “목회사역에 있어서의 여성”이라는 주제 하에 연구를 계속할 것을 추천하였다.27)

 

(5) 1967년 영국의 브리스톨(Bristol)에서 모였던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현재 교회 연합 협상에서 제기되는 문제들 특히 여자 목사 문제에 관하여 연구하도록” 결의하였다.28)

 

(6) 1968년 7월 4일부터 20일까지 스위스의 읍살라(Uppsala, Switzerland)에서 모였던 WCC 제4차 총회에서는 여자 목사 문제에 관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찬동하는 피치를 들었다. “현재 여자 목사 제도가 점차 증가한 것과 이 경험에 비추어 신학적인 반영이 더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29)

 

(7) 1970년도에 “앞으로 다가 올 안수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WCC 조사에 의하면 당시 215개 WCC 회원 교단들 중 “72개 교단들이 여자 목사 제도를 허락하고 있다”고 하였다.30)

 

(8) 1971년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루베인(Louvain)에서 모였을 때 여자 목사 문제에 관하여 토론에 더욱 집중하였다. “19세기 동안의 여자 목사 제도 반대세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전통은 교회에서 변하고 있다. 여자 목사 문제는 취급하여야 하며 그때는 바로 지금이다”라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남녀의 동등한 공동참여 문제에 관하여 활발히 토의하면서 남녀의 공동 참여야말로 참된 공동사회의 지표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목회사역에 남녀 상호 인정을 강조하고 이것이 복음에 대한 반응의 한 형태라고 하였다. 여자 목사 제도는 교회정치와 헌법에 관련된 것이요, 교리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31)

 

(9) 1975년도 11월 23일부터 12월 10일까지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개최되었던 WCC 제5차 총회에서도 여자 목사 제도를 제 2분과와 제 5분과에서 취급하였다. 제 2분과에서는 “연합은 완전한 이해를 요구한다”라는 제목 하에, 제 5분과에서는 “교회와 사회에 있어서의 여성; Women in Church and Society”이라는 제목하에 여자 목사 제도를 토의 및 결의하고, 이 안건에 대한 특별 건의서를 WCC 총회에 건의하였으며, WCC 총회에서는 그 건의서를 채택한 후 WCC 산하 회원 교단들에게 여자 목사 제도에 관한 결의문을 추천 및 권장하였다.

 

WCC 제 5차 총회의 결의 채택 사항들

 

여자 목사 제도에 관하여 결의 채택한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① 세계교회협의회(WCC) 산하 회원 교단들은 여성들의 신학적 교육을 위한 자금을 마련할 것.

 

② 회원 교단들은 모든 결의기관들 안에 적극적인 여성 참여를 보장할 것.

 

③ 여자들에게 목사 안수를 허락하는 교회들은 남자들과 동일한 기회를 제공하고, 동일한 급료를 지급할 것.

 

④ 여자 목사 제도에 신학적 반대 입장을 취하지 않는 회원 교회들은 모든 안수직 목회사역에 여자들이 참여하도록 행동을 취할 것.

 

⑤ 여자들에게 목사 안수를 허락하는 회원 교회들, 다른 교파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 교회들, WCC에 가입하지 않은 비회원 교회들 모든 교회들에게 여자들이 받은 은사의 척도에 따라서 안수직 목회사역에 전적인 여성참여를 권장 한다”고 하였다.32)

 

실제상 WCC는 나이로비 총회에 참가하는 대표들 중 상당수의 여성들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회원 교단들에게 강조하였으며, 그 결과 그 총회의 “총대 20%는 여성들이었다”.33)

 

(10) 1975년 헬렌 스파울딩(Helen Spaulding)이 마련하고 WCC의 교회와 사회분과 위원회에서 주최한 “여자 목사 안수에 관한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295개 회원 교회들 중에 104개 교회(교파)들이 여자 목사 제도를 허락하고 있으며, 기타 교회들은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였다(Ibid.). 그러나 동년(1975년) WCC의 자체조사에 의하면 WCC 회원교단들 중 ⅔이상이 여자 목사 안수를 허락한다고 보고하였다.

 

(11) 1978년도 8월 15일부터 30일까지 인도의 방갈로에 있는 기독교 에큐메니칼 센터에서 모였던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서는 WCC에 13개 추천사항들을 건의하였는데 그 중에 제 9항의 내용에 의하면, “여러 교회 단체들에게 여자 목사 안수를 권장한다”고 하였다.34)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교육 목적 중 하나는 교회와 사회에 여성 참여를 증가하기 위함이다”고 하였다.35)

 

여자 목사 제도는 자유주의 신신학 노선을 걷고 있는 교회들, 신오순절주의(신비파) 교회들, 군소 독립교단들, 그리고 지금은 소위 복음주의 노선을 걷는다고하는 신복음주의 교회들 대다수가 채택하고 있다. 한국에 교회들 다수는 앞을 다투어 여성도들에게 목사 안수를 줌으로 여자 목사 홍수시대가 이미 도래 되었다. 더욱이 급진적 자유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일부 교회들(예를 들면 미국 장로교나 미국연합감리교 같은 교파들)은 여자 목사는 물론 히피 목사, 호모섹스 목사까지도 허용하고 있다. 분명히 앞으로는 더 많은 여성들이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의 강단을 점령하게 될 것이다. 그 증거로는 여자 목사 제도를 채택하고 시행하는 “교파 신학교들의 학생수의 30-40%가 여학생들”이라는 사실에서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36)

 

1) Calvin’s Commentaries, XX, p. 468

 

2) James A. Brooks, Syntax of N. T. Greek,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3, p. 11

 

3) 『교역과 여성 안수』, p. 56

 

4) Ibid., p. 86

 

5) Russel Prohl, op. cit., p. 37

 

6) Vine’s op. cit., p. 151

 

7) 『교역자 여성 안수』, pp. 56-7

 

8) Ibid., p. 89

 

9) A. F. Ide, Woman as Priest, Bishop and Laity, Ide House, U. S. A. 1984, p. 48

 

10) John Murray, The Epistle to the Romans, 10:12

 

11) NIV Study Bible, Zonderran, 1985, p. 1732

 

12) Ibid., p. 102

 

13) The Origin and History of Hebrew Law, p. 232, Chicago, 1961

 

14) Russell Prohl, Woman in the Church, pp. 51-4; Andre Dumas, Biblical Anthropology and the Participation of Women in the Ministry of the Church, pp. 28-30

 

15) Paul K. Jewett, The Ordination of Woman, pp. 62-5

 

16) Calvin, Commetary on Acts, vol. 19, p. 271

 

17) Mary Hayter, The New Eve in Christ, Eerdmans, 1987, pp. 70 이하

 

18) Canon R. W. Howard, Should Woman be Priests?, Oxford, 1949. pp. 22-5

 

19) 『교역과 여성 안수』, op. cit., pp. 54-5

 

20) Ibid., p. 18

 

21) Ibid., pp. 71-2, 182. Arthur Frederick Ide, Woman as Priest, Bishop and Laity, pp. 41, 42, 44, C. K. Barrett, 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p. 282

 

22) Ibid., pp. 49-51

 

23) An Inrlusive Language Lectionary, John knox Press, 1985

 

24) One World, p. 2. 1995. 11

 

25) Faith and Order, Proceedings of the World Conference, Lausanne, 3-21 Aug. 1927, H. N. Bate, N. Y. 1927, pp. 372-3

 

26) The First Assembly of the WCC, Amsterdam, 22 Aug. to 4 Sept, 1948. W. A. Vissert’s Hooft, N. Y. 1949, p. 147

 

27) Concerning the Ordination of Women, Depts on Faith and Order and Cooperation of Men and Women in Church, Family and Society, WCC: Geneva, 1964, p. 5

 

28) Faith and Order Paper No. 9. 1968, p. 148

 

29) Official Report of the Fourth Assembly of the WCC, Uppsala, 4-20 July 1968, WCC: Geneva, p. 250

 

30) C. F. Parvey, Ordination of Women in Ecumenical Perspective, WCC, Geneva, 1980, p. 9

 

31) The Ordained Ministry in Ecumenical Perspective Study Encounter, vol. 8. NO. 4. 1972, p. 12

 

32) A Report on Sexism from the Nairobi Assembly of the WCC in 1975

 

33) Alan A. Brash, The WCC, Geneva, WCC, 1981, p. 21

 

34) Sharing in One Hope, Commission on Faith and Order, Bangalore, India, 1978, WCC, Geneva, pp. 269-70

 

35) Ans J. Van Des Bent, What in the World is the WCC?, p. 40

 

36) Parvery, op. cit. p. 13

 

 

출처:  클릭=>  계약신학대학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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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한 기독교 역사 / 교회 학교 초등학새용 /

처음 1세기 동안은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으로 복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고 로마에서 기독교인들이 많아지면서 로마 황제가 기독교인이 된 것을 기점으로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을 당시 로마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 국가였고, 로마 이외의 지역으로 나가는 것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도마의 유적지가 있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자 그 전에는 예수를 믿는 것은 순교를 각오한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가능했던 것이 오히려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 상황으로 역전되어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기독교의 가르침은 전혀 모르면서 종교가 바뀌었다는 선언만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성경도 모르고 죄를 회개하지도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도 모르고 기독교인이라고 공포한 것입니다. 그러며서 로마의 기독교는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가 수도를 콘스타니노플로 옮기면서 동로마와 서로마가 갈라지면서 기독교의 분위기도 양분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의 교회는 성상숭배는 우상숭배라고 하여 멀리하였고, 이탈리아반도를 중심으로 서방교회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림이나 형상으로 교육하여야 한다며 성상을 허용하였습니다.

결국서방교회는 성상숭배와 성모 숭배사상에 빠져들었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완전히 갈라졌습니다.

 

동방교회는 다시 그리스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로 갈라졌으며, 서방교회는 국가 위에 군림하는 모양을 유지하며 중세에 접어들었습니다. 결국 서방 정교회는 로마 카톨릭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가장 부폐한 기독교의 암흑기 중세가 지나갔습니다.

 

중세의 말기 성경을 읽은 몇몇 신부들이 성경을 기준으로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부정과 비리를 개혁하자고 말하였으나 대부분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금속활자가 개발되면서 성경을 번역하여 인쇄하고 배부하였을 때에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은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개혁은 교회 내부 지도자들의 반대로 배척되었고, 교회의 지도하에 있던 국가들은 로마 카톨릭의 구교와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신교로 나누어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중세가 끝이나고 근대가 되면서 서방세계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미지의 세계로 뻗어나갈 때에 종교지도자들이 한두명씩 함께 나가 결국 서쪽으로 서쪽으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럼 동쪽으로 가지 못한 이유는 중앙아시아의 투르크 민족이 너무 강력하고 전투능력이 탁월하여 중앙아시아를 뚫고 지나가지 못하고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돌아다녔습니다. 덕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복음이 서쪽으로 전파되어 아메리카 대륙은 복음이 전파되었다가 보다 기독교인들이 옮겨가서 살았고, 그렇게 기독교인의 거주지역이 넓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은 그렇게 백인들에 의해 점령되고, 기독교화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백인들 중에 소수의 사람들이 다른 민족을 정복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서쪽으로 진출한 것이 조선이었습니다.

그당시 일본과 베트남에 이미 선교사들이 있었지만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님들이 가장 헌신적으로 조선 민족을 위해 봉사하며, 복음을 전하였기에 한국이 서교 대상국가 중에 가장 성공적으로 복음화 되었으며, 가장 빠르게 발전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하여 이제 중국도 기독교 인구가 10%가 넘어서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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