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주 예배 시간에 "거룩한" 카톨릭 교회(Holy Catholic Church)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거룩한 교회라기 보다는 오히려 더럽고 추한 교회인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중세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항상 교회 안에는 개혁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교회의 전반이 타락되어 있다. 자 어떻게 개혁을 실지로 가능하게 할 것인가? 중세 교회에서 개혁운동은 4가지로 이루어졌다. 첫번째는 교회의 수장이었던 교황이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개혁 운동을 주도한 경우이다. 이 경우 개혁의 효과는 즉각적이고 확실하게 나타났지만 장기적인 개혁은 불가능하였다. 개혁적인 교황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에는 개혁의 물결이 일었지만, 그 뒤의 교황은 너무나 자주 교권을 금방 타락시키고 말았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교권을 1인이 혼자 독점하게 될 때, 교회는 부패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번째 개혁이 가능한 경우는 경건한 황제가 교권에 개입하는 것이다. 중세 시대의 황제는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세우신 지도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명목상의 황제들은 자신의 세속 권력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 중에 하나님은 경건한 지도자를 세우셔서 교회를 개혁하도록 하였다. 이 개혁의 장점은 효과가 가장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무력을 통하여 교회 개혁을 할 때, 황제 앞에서 저항하는 세력은 미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개혁의 단점은, 황제가 언제나 교회 일에 신경을 쓸 수 없다는 것이고, 다음 황제의 입장에 따라 개혁이 개악이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다. 사실상, 황제가 교회에 깊숙히 개입하면 할 수록 교회는 타락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세번째 경우는 수도원 운동이다. 교회가 전반적으로 타락될 때 수많은 참된 신자들은 세속을 벗어나서 참된 신앙의 모임을 추구하였다. 곳곳에 수도원이 세워졌고 이 수도원들에서는 중세 시대 유일한 학문의 장이 되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수도원이 했던 중요한 일은 도서를 보관하고 손으로 필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수도원을 통해서 중요한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이러한 인물 중에는 나중에 교황으로 선출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교황은 수도원에서 가졌던 이상을 교회에 적용시키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수도원은 노력 역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수도원은 기본적으로 제도권 밖의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는 엄격한 규율과 질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일반 교회에는 적용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수도원은 교회에 개혁의 이정표로써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네번째 경우는 공의회 운동이다. 교황의 절대 권력이 교회를 부패하게 하기 때문에 교황을 공의회의 권한 아래 두어서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다. 중세 기간 동안 교황이 둘 혹은 셋으로 나누어서 서로가 싸운 적이 있었는데 이 들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공의회였다. 공의회란 모든 주교들이 함께 모여 최고의 권위로 교회 일을 결정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공의회도 한계가 있었다. 공의회는 각 나라가 모인 단체였기 때문에 각자 이해관계가 달랐고 명백한 문제가 아닌 한 한 목소리를 내기가 불가능하였다. 이들 중에는 순수한 의미에서 개혁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명백하게 이해 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꾼들도 많았다. 결국 공의회 운동은 교황의 공작으로 실패하고 만다.

 

자 이와 같은 4가지 관점에서 고신교회를 보도록 하자.

 

1. 우리에게는 교황이 없다. 총회장이 있기는 하지만 임기가 1년이기 때문에 강력한 총회장의 리더쉽으로 개혁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간혹 총회장이 우리 고신교단을 대표한다고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장로교 법상 총회장은 Moderator에 지나지 않는다. 즉 총회가 열리는 기간 동안 사회를 보며 중재를 보는 사람이다.

 

2. 우리에게는 경건한 국가 지도자도 없다. 김영삼 대통령이 있기는 했지만 한국 교회를 위해서 그가 한 일은 내가 알고 있는 한 아무것도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교단의 일부의 개혁은 국가기관인 교육부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앞으로도 우리가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교육부에 의해서 강제적인 조치들이 있을것이라고 한다.

 

3. 우리에게는 수도원도 없다. 물론 무척산 기도원과 같은 기도원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기도원은 반 지성주의에 물들여 있어서 중세 시대와 같은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기도원 같은 곳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 보면서 기도하는 분도 있겠지만, 교회의 개혁은 기도만 하면 된다는 반지성주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4. 우리의 총회는 개혁의 힘을 상실하였다. 한국 교회는 너무 개교회 중심적이기 때문에, 총회를 통한 개혁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 계파의 이익만이 대변되기 때문에 중세와 같은 개혁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고신의 개혁의 기치를 내건 고목협이라는 모임도 부정선거에 대해서 어떠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 모임이 어떤 이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해득실 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한 교회의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중세 역시 자신을 개혁하지 못함으로 인해 결국 참 교회를 분리시키고 말았듯이 우리 한국 교회도 교회를 분리하지 않고는 도저히 개혁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종교개혁의 시대와 다른 점은 우리에게는 바른 신학과 바른 교리와 바른 교회 정치의 원리가 있으나 그것을 현실에 적용시킬 힘이 없다는 것이다.

 

,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 개혁의 기치를 내 거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좀 한심스러운 것은, 그 사람이 바로 개혁의 대상인 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놓지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의 개혁은 자신을 개혁시키면 개혁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조심스럽게 쓰려고 한다. 이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교회 정치꾼들이 이 말을 쓴다면 "너나 잘해"라는 소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다운 교회 개혁을 꿈꾼다면 우리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인정하는데서 논의가 출발되어야 할 것이다. 중세 교회사를 보아서 알겠지만, 지금 우리 교회는 개혁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리 스스로를 개혁시키고 교회의 자녀들을 잘 교육시키고 자기가 속한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통해서 우리 교회 전체가 개혁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불쌍한 우리 교회에 임한다면, 우리는 종교개혁 당시의 참된 교회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품에 갈 수 있을 지 모른다. 성령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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