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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전도


1.복음전도자들


복음전도자들은 직업적인 사역자들과 임명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육신하신 예수를 알았고 그의 부활후에 그로부터 명령을 받은 한 두명의 다른 사도들과 함께 교회에 의해서 보내어졌고 믿음의 은사를 받은 순회 전도자들에게 모두 적용되었다. 순회전도자들은 한장소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부름을 입었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고, 그래서 그들은 생활이나 메세지, 기독교인으로서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보증을 보여주었다. 또한 장로는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였는데 장로의 주된 사역은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므로 회원들이 자신들의 실력을 발견하고 수행하도록 하는 일이며 주교는 복음전파와 성례전을 행하는 일이였다.

2.비공식적인 복음전도자들
초대교회 당시의 믿음은 비 공식적인 복음전도자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확산되었으며 특별히 노동자 계층에 전파되었다. 여인들의 탁월한 사역과 지속적인 헌신과 충성을 보게 된다. 예수를 따르던 많은 여인들, 오순절, 사도행전의 도르가, 루디아, 브리스길라. 밀림의네딸, 로마제국의 모미틸라의 질녀들이 복음전도자들로 전해지고 있다.

3.복음전도자들:그들의 삶은 어떠하였는가 ?
그들의 삶은 핍박을 당해도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고, 그리스도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면서 높은 도덕적 기준을 유지하였다. 또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는 인종, 성별,계층 그리고 교육의 장벽을 넘어섬으로써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코이노니아로 지칭되는 이단어는 세속적인 용법에 있어서 식사모임, 장례모임, 상인조직과 같이 공동활동을 일으키기 위한 조직된 비공식적 연합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로마인들의 생활에 잘알려졌기 때문에 로마법에 저촉되지 않았으므로 허용되었던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므로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이 되도록 노력을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기까지 출산의 고통을 치루었다. 그리스도와 만난 그들은 그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하나님께로 이끄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과 최고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주는 이기쁨은 교회의 영원한 소유물이며 아무도 그들로 부커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약속을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령께서 주신 기쁨으로 충만하여 고통속에서도 감옥에서도 순교하면서 기뻐하면서 찬양하였다. 핍박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선포하였다.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이것을 예수께서 가르친 죄에 대한 비타협정신이 초대교회에 깊게 뿌리박혔기 때무너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독교인으로서의 행위로 인하여 투옥되고, 산헤드린 공회앞에서 위험을 당할 때에도 소리를 지르거나 불평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료들과 함께 기도하고 부활의 주님을전파하였다.  그들이 메세지를 전파함에 있어서 역사는 능력으로 나타났다. 병고침과 귀신의 쫓아냄을 포함하여 기적을 행하였던 것이다.

결론)초대교회에 있어서 복음전도자들은 예수님이 메세지를 직접 들었고, 부활도 목격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도들과, 사도로 뽑히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사건을 목격한 많은초대교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였다. 복음전파는 사실상 비공식적인 복음전도자들에 의해서 로마를 복음화 한 것이다. 복음전도자들의 삶은 깨끗하고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 어떠한 고난과 압박속에서도 인내하고 능력을 보여주었다.

 전도방법
a.대중전도

1.회당설교 : 회당은 유대인들 사이에 복음전도를 위한 모판을 제공했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 전도자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회중이 있었다. 안디옥 회당에서의 설교는 유대인들에게 대한 전도의 접근의 모델이였다.롤란드 알렌은 회당설교의 네가지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청중의 감수성에 대한 바울의 회유와 동정, 둘째는 바울은 어려움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진리를 선포하는데 용기를 보인다. 세째는 그의 청중들과 그들의 지력과 영적 필요성이다. 네째는 복음메세지의 진리와 능력안에서는 능력안에서는 주저하지 않는 확신이다.기독교 전도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설교자와 청중을 연합하는 공통의 기원과 공통의 신앙을 강조하면서 있는 자리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종교는 새로운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그치이며 이스라엘의 역사의 열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했다.

2.옥외설교 :회당에서 그리고 회당을 통해서 한 설교는 별도이지만 제자들은 옥회설교(open air preaching)에 있어서 그들 스승의 가르침을 따랐다. 즉흥적인 만남은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거나 모이는 사원지역이 효과적이였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예루살렘, 사마리아, 루스드라, 아덴등과 같은 곳에서 옥외설교를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유대주의적인 입장에서 볼 때 옥외설교는 결코 혁신적인 방법은 아니였다.
3.예언적 설교 :초대교회시절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빌어 직접 직설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예언자들이 있었다. 예언은 어떤이들은 소유하고 어떤이들은 소유하지 못한 은사였다.  예언은 성령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는 조리있는 말이다. 초대교회 시절 예언은 사도직 다음으로 아주 귀하게 여겼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충동저거인 자극으로 가득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고,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디다케는 이재능이 진심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경건한 생활이 중요함을 강조하기도했다.예언은 교회에서 계속되어졌다. 감독제도의 출현으로 예언이 쇠퇴하게 되었어도 예언적 기능을  주교들은 몰두하였다.

4.설교의 가치: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초대교인들은 설교를 하였다. 오리겐에 의해서 채택된 시편36편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우리는 설교자의 예를 볼수 있다. 설교는 학문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도리어 실제적인 접근을 이루면서 행해졌다.

5.교훈적 전도:
기독교의 교훈과 철학을 가르치는 학자는 로마에서 져스틴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기전 철학강의를 하는 동안,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신앙에 관한 교훈을 하였다. 가르침과 전도의 이 혼합은 많은 지식인 층의 사람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이 방법은 지식인들로 부터 개종한 사람들로 부터사용되었느너데 이들은 안전하게 그리고 서서히 변증학을 썻으며 이들이 거물도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순교도 하였던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교훈적 전도는 에베소에 3년을 머물면서 전도를 하였던 사도바울과 같은 이에게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6.증언:메세지의 진리에 대한 개인적 증언은 기독교 증거의 절대 필요한 요소이다. 자신의 경험을 확신하고 증언했던 것이 이교세계를 전도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증언은 2세기의 복음전도의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다.

b.가정전도
가정의 편안한 분위기와 비격식성이 가정전도의 형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가정에서의 교회가 기독교신앙의 선파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가장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는 예루살렘의 마가라는 요한의 어머니가 소유하고 있는 집의 다락방에서 만났다는 사실이다.가정이  갖는 사회학적 중요성은 기독교 전진기지의 중심이 되었다. 가장은 개종으로 전가족을 기독교인이 되게 하였고, 개종한 부인의 거룩한 행동은 전 가족에게 감화를 주었다. 기독교 가장은 저녁 교제의 장소로, 성찬의 장소로, 철야기도와 예배와 교훈의 장소로 즉석 복음집회 장소로 그 가정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c.개인전도
예수 진리를 발견한 사람이 다른사람에게 그의 감명을 나누기 위해서 만나는 것은 중요하다. 이 개인 전도를 통하여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개인적인 만남, 방문을 통하여 전도의 기회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d. 문서전도

1.1세기의 변증서인 사복음서
예수에 관해 떠도는 이야기들과 이방인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는데 사용된 문답식 단편들을 구성하려는 새로운 문학형태인 복음을 고안한 첫번째 사람이 마가였다. 그는 전기물을 쓰는 것이 아닐,예수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제자들이 그를 따른 증거와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인것을 보여주기 위해 배열된 많은 증인들의 입술로부터 나온 증거로 쓰여진 신앙고백이었다. 마가복음은 철두철미하게 케리그마적이다. 요한은 예수와 그의 인격과 오신 목적을 '표적'을 선택함으로 강조하기를 원한다. 마태는 회개해서 신앙에 이르게 할 일차적인 호소보다는 오히려 신실한 가르침의 사역을 지지해 줄 자료를 주로 찿아 본다.

결론) 초대기독교인들이 세계를 복음화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들의 주무기로서 성경과 기도를 내세우며 자신의 신앙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사랑과 타오르는 열심과 그리고 삶과 죽음의 순수한 우위에 근거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복음전도는 그들의 사명이였다.

 

 


 

 복음전도의 동기

1.감사의 태도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초대교인들의 생각은 신학적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그들에게 적절하다고 생각했거나 사회적인 공리적인 입장에서 한 것이 아니였다. 복음전도의 주요동기는 초대교인들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도 감사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의 보내심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목숨을 걸고 전파하였던 것이다. 초대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예수님의 사랑에 의해서 사로잡혔다. 그들의 삶을 이러한 사랑에 사로잡힘으로써 예수님을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복음전도의 사역은 하나님께 대한 자발적인 사랑의 헌신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복음전파의 설명을 하자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예수의 보내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인간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에 그 동기가 깊이 뿌리 박혀 있다는 것이다.

2.책임감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두번째 요소는 항상 하나님앞에서의 그들의 고백을 따라서 사는 삶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그들은 마지막날에 주님앞에서 부끄러움을 당치않기 위하여 진실하기로 결심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게 하는자가 되기를 힘쓰며, 주님앞에 섰을때 선악간에 그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보응을 받는다는 것이  사도바울의은 복음전도사역에 있어서 동기를 부여한 요소였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종에 대하여 보상을 베푸시지만 그러한 보상은 그리스도의 성품에 더욱 접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상은 은혜의 산물인데, 그것은 공로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초대기독고인들은 위대한 재판장이신 하나님앞에서의개인적인 책임감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 자신이 저주를 받을가능성에 대하여 두려워하였다. 기독교인의 봉사에 대한 동기로서의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바울이 제기한 문제의 미묘한 성격으로 볼때에 징계와 보상에 대한 교리는 결코 열등한 것이 아니였다.

3.관심
복음화되지 아니한 인간의 상태에 대한 관심이 초대교회의 복음전도를 위한 숨겨진 원동력이였다. 사도바울서신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은 복음전도를 위한 만반의 준비가 초대교인들에 의해서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프로트렙티쿠스의 결론장에는 "나는 인간을 향한 사랑에 이끌리어 내가 하나님께로서 받은바 가장 큰 축복인 구원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의 이러한 독자들의 행복에 대한 관심이 너무나도 켰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사도바울은 그자신이 에스겔이 그러했던 것 처럼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준비까지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귀를 기울이기를 거절하는 한 그들은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음을 그들에게 경고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파수군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때때로 그리스인의 삶의 유익성을 설명하기도 하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데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결론) 초대교회는 그들의  특징인 복음전도를 위한 열정을 불살랐는데 이것은  역사를 통하여  두드러진 현상이였다. 그들은 죽기도하고,조롱거리가 되기도 하였으며 공민권을 박탈당하기도 했고 재산이나 집이나 가족까지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더구나 로마제국의 신에게 예배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고, 오히려 죽음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와같은 정열과 비밀은 비천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게 되었다. 그들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책임감을 갖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역시 복음전도의 동기는 값없이 받았기에 값없이 준다는 것이고 사도바울과 같이 전하지 않으면 저주아래 있을 것이라는 절대적인 사명에 의한 것이였다.


  전도전략
기독교 복음은 어느 곳에거주하든지간에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초대교인들은 그점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았다. 바로 이점이 선교의 출발점이 되었다.하나님의 속성자체가 보편적 선교를 요구하신다.
1.지형   1세기에 지중해 연안의 문명화된 세계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효과적인 복음전파가 용이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수 있다.
로마제국의 자연적인 교통로를 따라 복음이 전파되었다. 기독교 확장은 지형적 요소가 전체전략에 있어서 중요하였다. 로마의 교두보는 모두 이용되어 복음이 주변국가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지형적인 요소는 기독교의 전도의 지역책략에 일익을 담당했다. 북음은 자연스런 교통로를 따라서 퍼져나갔던 것이다. 바울의 서신 운반은 교통로를 따랐고, 확실한 복음은 지리적 근접선과 도로망을 따라서 전파되었다.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주요한 전진로로서 로마제국의 길과 교역로를사용한 첫번째 사람들은 물론 아니다. 그들보다 먼저 유대인들이 이것들을 사용하였다. 기독교인들이 처음2세기동안 침투해 들어간 주요한 모든 지역에 유대인들이 그들보다 먼저 거기에 있었다는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2.영향
1)사도바울의 목표
알렌은 그의 저서 "전도방법"에서 바울의 전도전략은 로마제국의 행정과 헬라문명과 유대영향과 상업요충지의  중심부를 선택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안에 대해 각각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지만 , 다른 면을 지적함으로써 현명하게 결론을 내린다. 그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고, 그가 멈추어야 하는 중심지가 아니라, 그가 시작해야 하는 중심지였으며, 생명을 고갈시켜야 하는 중심지가 아니라, 그곳으로부터 생명을 전파하는 중심지였다. 초대기독교인들이 세우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중심지였다.
2)사도바울의 선교전략
공동체의 지도자를 찿아가 복음을 전하는 정책을 바울은 취하면서 그들이 기독교인이 되면 그들을 통해 복음의 메세지가 더 넓게 퍼질 수 있도록 하였고, 사도바울의 전략은 도시중심적이었다. 에베소에서 했던 것 처럼 도시를 중심지로 삼고, 이처럼 도시를 선교전략의 중심지로 삼은 것은 로마의 방문으로 확실하게 결정되어 졌다. 또 동시에 지방적이며, 동시에 세계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전체 구원 역사의 열렬한 도구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세웠다. 이것은 전세계를 복음화하려는 바울의 비젼이였다.

3.종말론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가 초대교회의 복음전도에 있어서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초대교인들을 향한 설교는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선포와 만물의 마지막때에 있어서  외개와 믿음에 대한 도전으로 그절정에 이르렀다. 초대교회의 복음전도에 있어서 강력한 원동력은 종말론이였다. 종말론적인 기대는 복음전도를 위한 교회의 교리에 있어서 계속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속한 재림은 옳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1세기교회의 종말론적인 기대에 다양성속에는 구속하신 것들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깊은 확신이 있었다.

결론)사도바울은 도시중심적이며 동시에 개방적이며 헌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선교에 열정을 기울였다. 초대교회에 복음전도의 강력한 원동력은 역시 종말에 대한 소망이였다. 종말에 대한 잘못해석으로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종말에 대한 근본적인 확신에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종말론과 복음전도는 성령의 인격안에 떨어질 수 없이 연합되어 있으므로 지금도 온세계에 선교의 사역으로 계속되어지고 있다. 초대교회의 복음전도를 통해서 우리는 그들이 역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위에서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열정으로 싸여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킬수 있는 첫번째길이 복음전도이다. 이러한 것을 의무로 또 당연히 해야 할 일로 기억하고 산 초대교인들의 신앙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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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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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특강 /  교리  학습  

 

◈ 진리


우리는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들이 성령의 감동 하심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며 그 원본에 있어서는 전혀 오류가 없는 것으로 믿는다 . 오직 성경만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 외에 또 다른 하나님 말씀은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초는 성경이다.

(딤후 3:16. 벧후 1:21. 잠 30:5-6 )

 

◈ 하나님

 

하나님은 한분 이시며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삼위로 존재하심을 믿는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무한 하시며 편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또한 변함이 없으시다.

(출.34:6-7. 신6:4. 마28:19. 요 4:24, 10:30. 행 5:3-4. 고후 13:14. 히 1:8-12 )

 

◈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시다. 그는 동정녀를 통하여 무죄하게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으 며 인간의 연약을 가지시고 사셨으나 범죄치 않으셨으므로 죄가 없으시다. 그는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무덤에 묻히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성도의 대제사장으로 앉아 계신다.

(마1:21-23. 요 1:1.14. 행 1:9. 롬 1:3-4. 고후 5:21. 히 1:8. 4:14-15. 7:25. 벧전 2:24, 3:18)


◈ 성령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삼위 중에 한 분으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죄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거듭난 자들 안에 거하셔서 구원에 대한 보증이 되신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수 있도록 능력을 더하시며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 하신다.

(마 28:19. 요 16:8. 롬 8:9-16. 고전 12:13. 엡 1:13-14 )

 

◈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 되었으며 죄가 없는 자였으나 그는 죄를 범해 죄인이 되었고 인간의 조상으로서 그 모든 후손들에게 죄의 본성을 물려 주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 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며 또한 죄를 범하여 죄인이다. 하나님의 구원 없이는 인간들에게 소망이 없다.

(창1:27, 9:6. 롬 5:12. 엡 2:1)

 

◈ 죄

 

죄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다. 죄는 또한 의를 행하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이 죄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에 온전히 이르지 못한 것이 죄이다. 하나님은 죄의 값으로 사망 즉 죽음을 요구하셨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사 53:6. 겔 18:24. 롬 3:23. 약 2:10, 4:17. 계 20:11-15)

 

◈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이는 죄 용서함이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며 율법 준수나 선행으로 얻지 못한다.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은 모두 영생을 얻는 다.

(막 1:15. 요 1:12-13. 행 4:12. 롬 10:9-13. 고전 15: 1-4. 히 9:22)

 

◈ 교회

 

우주적인 교회는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셨을 때부터 휴거 때까지 구원 받은 모든 자들로 이루어진다. 각 지역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의 축소형이다. 지역 교회는 구원 받은 자들로 이루어지며 모여서 함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며 또한 전도를 한다. 각 지역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지역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 하도록 목자들에게 맡기셨다(장로들, 감독들, 목사들, 목자들은 성경에서 모두 같은 자을 말하고 있다). 각 지역 교회에는 또한 실질적인 면에서 성도들을 섬기는 집사들이 있다.

(행 2:42-47. 고전 12:12-13, 27. 엡 1:22-23, 5:24-25,30. 행 6:3-6. 딤전 3:1-13. 히13:17)

 

◈ 예식

 

교회에는 두 가지 예식이 있다. 하나는 침례이고 다른 하나는 주의 만찬이다. 물 속에 잠기는 침례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에 묻히는 것을 상징하며 물에서 나올 때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이제는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의 만찬은 신자들이 주님의 고난 받으심 과 죽으심을 기념하며 예배하고 또한 그가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에 맨 처음에는 매일 떡을 떼었으며 나중에는 매주 주님의 날에 떼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마 28:19-20. 눅 22:19-20. 행 2:42-47, 10:47-48, 20:7. 고전11:26)

 

◈ 속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으며 또한 그의 죽으심과 흘리신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하시기에 충분하며 죄를 속하기 위한 다른 노력이나 선행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엡1:7, 2:8-9. 고후 5:21. 벧전 3:18)

 

◈ 구원의 확신과 안전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말씀에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영원히 안전하다.

 

(요5:24,10:28-29. 롬 5:1. 딤후 1:12. 요일 5:13 )


◈ 그리스도인의 삶과 우선순위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영혼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는데 적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에 재물을 쌓아 놓지 말라고 명하시고 주를 신실히 섬기는 자들에게는 하늘에서 보상을 약속하셨다.

(마 6:19-34. 막 8:34-35. 고전 3:12-15. 벧전 1:15-16. 요일 2:6)


◈ 성령의 은사

성령님께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거듭날 때 각자에게 주님을 섬기며 성도들을 섬기도록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고유한 권한으로 주신 것이며 사람이 바라거나 기도함으로 주시지 않는다.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데 기초적인 은사가 있으며(사도, 선지자) 병 고침이나 능력 행함, 방언 그리고 방언 통역과 같은 이적의 은사가 있고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 즉 변환기에 유대인들에게 표적으로 주신 것이다. 기초적인 은사나 이적의 은사들은 그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끝났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병을 고치실 수가 있고 방언을 하게 하실 수도 있지만 그것은 기도나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인한 것이며 은사로 주신 것은 아니다.

(롬 12:6-8. 고전 12:7-11, 14:22. 고후 12:12. 엡 2:20, 3:5, 4:11-12. 히2:3-4)


◈ 장래일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시대를 통하여 인간과 관계를 가지시고 또한 다스려 오셨다. 각 시대 마다 구원의 방법은 오직 믿음 뿐이었다. 현 시대는 은혜의 시대이다. 교회는 은혜시대 이전 에는 존재하지 않았었고 교회가 이스라엘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는다. 은혜시대 끝에는 교회의 휴거가 있고 그 후에는 대환란이 있으며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친히 오셔서 이 땅을 다스리시는 천년왕국과 불신 영혼들에 대한 심판과 구원 받은 자들에 대한 영원한 복락이 있을 것이다.

(마 24:21, 29-30, 25:46. 롬 6:14. 고전 10:32. 엡 3:2-6. 골 1:25-27. 살전 4:13-18, 5:4-10 히 7:18-19. 계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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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Apostolus)와 장로(Presbyter)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회는 유대인 중심의 소규모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 후 고넬료 가정을 비롯하여 이방인 교회가 설립되는 등 교회의 규모가 점차 증대되고 확장되면서 조직적인 운영의 필요성이 제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인하여 하루에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등 교회의 성장은 일시에 5,000명을 초과하는 수직적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많은 인원이 교회라는 공동체속으로 합류되었고, 또한 그 조직 안팍으로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을 둘러싼 각종 사회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구조안에서 무엇인가 정형화된 조직이 필요해 졌습니다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운영과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필요성이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그것을 구성하는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 직분자에 대한 정의와 목적이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1) 사도(Apostolus)

 

사도(使徒, Apostolus)라는 말은 '파견된 자', '사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샬리아(shaliach)에서 유래하엿으며, 그리스어의 아포스톨로스(apostolos)의 동의어 입니다  또한 사도(Apostle)란 헬라어로"보냄을 받는다" 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 전하는 권세를 위임받은 직계 제자를 통칭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28:19~20, 누가복음6:13)   사도의 자격은 성육신하여 역사적인 인물로 살아간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만났고, 그 분의 가르침을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4대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제자 12명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3:16~19) 

 

그러나 그 가운데 예수님을 팔아 넘긴 가룟 유다가 자살하여 사도직을 버리자, 사도들은 '예수께서 활동하실때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 중 하나인 "맛디아" 에게 사도직을 맡겼습니다 (사도행전1:21~26) 이후 성령강림주일에 탄생한 교회(사도행전 2:1~47)를 탄압하던 사울(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하여 자신을 사도로서의 권위를 주장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15:10)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바울을 사도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 전도의 핵심 인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사건의 중심에 서 있던 바울의 회심은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신비한 체험에서 비롯된 역사적 전환기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그의 일생의 전후가 완전히 뒤바뀐 것으로 바울이 사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자격 문제는 오래동안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의 삶을 통해서 바울은 충분히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였다고 보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할 기독교인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맛디아와 같이 선출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사도적 정통성은 그의 삶을 통하여 충분히 인정되고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시작으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시몬, 그리고 가룟유다를 우리는 예수님의 12제자이며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30세겔에 대적관계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팔아 넘기고 자살을 선택한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사도로 인정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 바울에 이르기 까지 사도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은 모두 14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 바울과 함께하며 그의 가장 아름다운 동역자였던 "바나바" 와 유다의 기록자인 "유다" 등은 기독교사의 역사에 그 기록과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을 인물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며 그 분의 말씀과 생활을 가장 인접한 곳에서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전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맛디아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는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항상 함께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그러한 삶의 모양과 흔적들을 관찰한 열 한명의 제자들이 만장일치로 선택한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도들이라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교훈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오용한다면 그것은 가장 치명적인 오류가 될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의 순수성을 투명한 통로를 통하여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세상에 전달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또한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한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있으며, 나머지 제자들도 부활한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도피하여 세상의 생활로 돌아갔던 배신의 흔적들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그렇게 세상 가운데 흔적없이 사라져가는 무의미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내 버려 두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그들을 다시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여 주셨으며 뜨거운 성령의 불길로 회생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직분적 사역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과 삶을 여과없이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며 이것이 세대와 후대에 이르기 까지 본질이 훼손되지 않고 연결되는 일들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사역은 복음전파(마태복음10:5~7)와 성경 말씀을 증거(누가복음24:45~48)하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역을 증거하는 것입니다(사도행전1:8, 10:39~41요한일서1:1~3)   또한 교회를 설립하고(로마서15:17~20), 환자를 치유하며(마태복음10:1, 누가복음9:1~2),  귀신을 내쫓음과 동시에(마가복음6:9)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것입니다(사도행전2:43, 5:1)

 

사도의 첫번째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각지로 흩어져 버린 그리스도인들을 다시금 모여 들게 하는 구심점과 같은 역할을 감당할 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전파되게 하였으며, 생활과 구제와 복음의 전파기능을 담당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월이 흘러 오늘날 우리 세대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어온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로마서15:17~20)

 

초대교회의 풍습과 관습은 오늘날 끝없는 진화와 도전을 거쳐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의 정신과 생활과 예배는 결코 무너질 수 없는 기초가 되었으며 그것이 오늘을 지탱하는 본질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직분은 예배를 세우는 것으로 끝난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복음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순교가 동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역경도 받아들이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굶주림과 억울한 누명, 이유없는 감옥생활도 그들을 지체하게 하거나 중단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의 두번째 가치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복음에 대한 확신과 용기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스승은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히 생존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결코 그들을 막을 수 없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그들과 그들의 삶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0:5~7)

 

사도의 세번째 역할은 그들이 가는 곳에 또 다른 예수님의 흔적,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의 사회, 그들이 지켜온 토테미즘과 범신론적인 사상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낙망하지 아니하였고, 지인 한명없이,  일푼의 물질도 없이 그러한 교회들을 세워 나갔던 것입니다 (사도행전1:8, 10:39~41요한일서1:1~3)

 

사도들이 일으킨 네번째 역할은 환자를 치유하고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있어서 귀신을 내쫓는 것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십년 동안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 귀신들려서 평생을 고통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빈곤의 악순환,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가는 곳 마다 만날 수 있었고 사도들은 그들을 지나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에겐 돈도 권력도, 물질도 부요함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생을 걸쳐 어부로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어부라는 직업이 돈이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또한 가진 돈이 없지만 가지고 있는 돈을 나누어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권력이 있어서 로마의 힘을 빌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을 전파하고 기도하였으며,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는 곳에서 치유와 회복과 삶의 전환점이 일어나는 역사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동행하였으며 예수님의 통로 역할을 한 사도의 힘이었습니다 (마태복음10:1, 누가복음9:1~2, 마가복음6:9, 사도행전2:43, 5:1)

 

2) 장로(Presbyter)

 

장로(長老)는 어원상 "턱수염이 있는 자"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에서 지파와 가족의 어른들을 부르는 칭호였습니다 (출애굽기3:16)   구약성경에서는  부족의 지도자·촌로(村老), 회당의 장로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이들이 주로 지파나 대가족을 대표하여 정치기구에 참여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원로라는 의미로 계속 사용되었으며, 초대교회에서는 직분상 두가지로 분류하여 장로를 호칭하였습니다  그것은 신자의 영적 생활을 지도하며 설교와 예전을 집행하는 목사장로(디모데전서3:1~5)와 교회의 존경받는 연장자로 교회의 조직과 예산과 운영을 책임지는 평신도 장로(사도행전11:30)로 구별하는 것의 기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에 의해 교회가 설립되면서 그 개체 교회를 위하여 장로가 세워졌습니다  장로를 최초로 세운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설립한 교회에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목회를 권면하며 각 성에 교회를 설립하고 장로를 세울 것을 권장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성령이 저들 교회 회중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 라는 말씀으로 장로의 직분의 범위를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장로 피택은 구약시대의 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지방 회당은 장로들에 의해 치리되었고 유대의 국가적인 문제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다루어 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장로와 신약의 장로가 동일한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장로는 문자 그대로 연장자로서의 원로를 대우하며 그의 경험과 경륜을 존중한 반면에 초대교회의 장로는 연령보다 신령한 면을 강조하여 교우들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였으므로 영적인 자격이 선행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장로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치리하는 직무를 맡아 양떼를 잘 보살피는 일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직무(Overseeing office)로 인하여 장로들을 감독(Bishop=Overseer)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일례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 로 불러 고별사를 전할때에 그들을 감독으로 칭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디도" 에게 "그레데 교회" 에 장로를 세울 것을 권면하면서 감독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신약성경에는 감독이라는 단어가 5회 기록되었는데 모두 장로와 동의어로 쓰여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속사도" (Post-Apostolic, 사도들의 제자),  "교부" (敎父, Patristic,속사도들의 제자)들의 글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장로의 구분이 분명하지는 않으나 바울은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를 구분한 것으로 보아 동일한 교회내에서 여러 장로가 있었을 경우에는 분담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리는 일을 겸한 장소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지교회에서 장로들을 세울때 모든 장로들이 가르치는 장로로 세움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장로들을 세우는 방법에 있어서도 명확한 해석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세울때 예루살렘 교회가 선택한 방법이나 일곱 집사의 선택으로 추정할 때 장로들도 임명보다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 23절에 바울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였다" 고 했는데 이 때의 택함의 동사의 원어적 의미가 "손을 들어 선택한다" 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이러한 모든 직분들은 낮은자로 섬김을 위함이요 군림을 위한 권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목사장로와 치리장로들간에 일어나는 권력적 선점을 위한 분쟁과 갈등은 바로 이러한 힘의 논리의 축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이미 순수성을 잃어버린 태도라 할 것입니다

  

3) 목사장로와 치리장로의 직분과 직무

 

목사장로는 그리스도의 양무리를 감시 감독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감독" 이라는 칭호를 쓰기도 합니다(사도행전20:28)  또한 신령한 양식으로 교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므로 "목자"  또는 "목사" 라고 하기도 하며(에베소서4:11, 예레미야3:15, 베드로전서5:2~4), 또한 교인들의 모범이 되고 교회와 그 지역을 치리하는 자 이므로 "장로" 라고 합니다(베드로전서5:1~3)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종", 흔히 전임 "사역자" 라고도 하며(고린도후서3:6),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는 의미에서 "교회의 사자" (요한계시록2:1)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권하는 자의 역할도 하므로 "그리스도의 사신" 이라고 합니다(고린도후서5:20, 에베소서6:20)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며 거역하는 자를 책망하여 깨닫게 하는 직무도 있어서 "교사" 라고도 하며(디모데전서2:7, 디모데후서1:11, 디도서1:9)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 라하여(디모데후서4:5),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오이코노모스)라고도 합니다(누가복음12:42, 고린도전서4:1~2)

 

목사장로에 관한 직무는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고 설교하는 일, 그리고 찬송을 지도하며 성례를 거행하는 것, 하나님의 사자로서 축복권을 행사하는 것, 교인을 교육하고 심방하며 평신도장로와 협력하여 치리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평신도 장로는 설교와 교훈은 그의 전무책임이 아니지만 각 치리회에서는 목사장로와 같은 권한으로 제반 사무를 처리하는 것입니다(디모데전서5:17, 로마서12:7~8)  평신도 장로는 목사장로와 협력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며, 교회의 영적관계를 확인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교인을 심방, 위로, 권면, 교훈하며, 또한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보다 근접한 상태에서 점검하고 언약의 자녀들을 양육하며, 교인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목회에 필요한 제반적인 사항들을 목사에게 알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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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통합의 차이점 
 

합동과 통합의 차이점에 대하여

보통 사람들은 WCC 때문에 나뉘어진 것만으로 아는데 이후에 신학적인 노선이 달라졌고

뿌리가 달라졌습니다.

이들의 차이점을 살펴보려면 일단 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신앙고백 (2) 미국 근대장로교회사

 

(1) 장로교회(영미)와 개혁교회(화란)의 신앙고백으로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도르트 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을 주의깊게 살펴봐야 하는데 이 신앙고백이 변화를 겪기 때문입니다.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작성될 당시에는 33항으로 3항과 10항에서 제한속죄론(즉 예정론)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알미니안주의가 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교를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1903년 미국 북장로교회는 신앙고백을 35항으로 개정하고, 3항. 10항에 대해서 보편구원론적으로 바꾸게 되었지요. 더군다나 34항은 성령에 관하여 35항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2) 1903년 신앙고백이 개정된 이후 북장로교회는 1906년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하며 탈퇴했던 컴버랜드 장로교회와 합동하면서 프린스턴 신학이라 불리던 정통 개혁주의가 도전을 받게 되고 벤자민 워필드 등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그 신학전통을 지켰으나 프린스턴 신학교 또한 신학에 대하여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에 찬성한 자들이 있고 반대한 자들이 있는데 반대한 대표적인 사람이 세계적인 신약학자였던

그레셤 메이첸이었습니다. 메이첸은 계속해서 자유주의에 대해서 방어하고자 했으나

북장로교회는 이미 넘어가고 있던 상황이었고,

1929년 메이첸과 그의 제자 등은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선교부를 운영합니다.

하지만 북장로교회는 용납하지 않았고 그들을 제명시켰습니다.

그 결과 1936년 메이첸은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를 세웠지만

북장로교회의 (PCUSA)와 비슷하다 하여 여러 압박이 들어왔고

1939년 교단 이름을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바꿉니다.

 

통합과 합동은 크게 3가지면에서 차이가 납니다.

 

첫째. 그들이 계승하는 신학이 다릅니다.

1959년 WCC를 이유로 교단이 분열했을 때만 해도 신학은 비교적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통합의 경우에는 에큐메니컬 신학에 근간한 보수 신앙을 추구하며

개혁주의 신학의 20세기 계승자로 칼 바르트를 뽑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칼 바르트 신학을 따라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동 측의 경우에는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를 따르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학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통합 측에서는 흔히 박형룡 박사와 메이첸 박사가 칼바르트에 대해 알지 못하고 비판한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칼 바르트 비평의 영향을 준 것은 <변증학>의 권위자 반틸과 박윤선 박사였다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들이 교류하는 교단이 다릅니다.

통합은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와 스코틀랜드 개혁교회, 프랑스 개혁교회 등과 교류하고 있지만

합동은 미국장로교회(PCA - 이 교단은 남장로교의 좌경화에 반발하여 세워진 교단임)와 정통장로교회(OPC)와 자매교단처럼 교류하고 있으며 미국의 기독교개혁교회(CRC)와도 교류하고 있지만

여성목사 안수와 칼 바르트 신학 등에 대한 포용적 자세로 인해 교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많은 것도 사실이며

기독교개혁교회는 합동 측보다는 합동 비주류에서 시작한 백석 측과의 교류가 더 많은 편이다.

 

셋째. 사소한 면에서 차이가 난다.

통합 측의 경우에는 예배에 있어서도 성찬 중심, 예전 중심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합동 측의 경우에는 말씀 선포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강단의 구조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증명한다. 통합 측 교회를 가면 대부분 강대상 뒤에 성찬상을 두고 있으며

목회자들의 경우에 스톨을 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합동 측 교회에서는 강대상 외에는 다른 것을 강단에서 찾아볼 수 없고

목회자들이 성의를 입지 않는 경우들도 많아졌지만 입는다 하더라도 스톨을 걸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통합 측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있어 35항을 채택한 1903년 판을 따르고 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 (1986) 과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 (2001)을 채택하고 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6C 신앙관을 다루고 있으므로 21C에 맞는 신앙고백이 필요하다는 시각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통합은 대소요리문답의 경우 대요리문답은 채택하지 않고 소요리문답만을 채택하여 <요리문답>으로서 세례 시에 가르치고 있다.

반면 합동의 경우 1647년 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으며 대소요리문답을 그대로 채택하고 있다. (대요리문답은 목회자들을 훈련하는 등 성인들을 대상으로 두고 있는 것이며 소요리문답은 청소년들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통합은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고 있으며 여성 장로 장립도 허용하지만

합동 측은 딤전 2:11 - 12과 고전 14 : 33 - 34를 근거로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를 거부하고 있다.

또 축도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합동 목사는 고후 13 : 13를 근거로 끝부분에 "함께 계실지어다."로 마무리하지만

통합 목회자들은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로 끝내고 있다.

 

칼 바르트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 더 알고싶으신 것이 있다면 개혁주의를 연구하는 단체(SDG 개혁신앙연구회) 등에서 배우시고 더 전문적인 것이 필요하시다면 <개혁신학회>에 들어가셔서 2012년 봄에 장로교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발표된 논문들이 게재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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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향한 비전 매핑(14)제자 디모데

(행 16:1-5)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족적을 남긴 사람하면 바울 사도를 손꼽는 일에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바울 사도를 직접 만나 당신은 어떻게 짧은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느냐고 질문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내가 한 일의 거의 대부분은 나의 제자 디모데가 내 곁에 없었다면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2:19-20에서 디모데를 빌립보로 보내기로 하면서 “너희 사정을 디모데보다 더 잘 진실하게 살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어서 빌2:2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디모데가 내게 그리고 나의 복음 사역에 그렇게 동참하였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이보다 더 의미 있는 발언이 가능하겠습니까? 바울은 그의 마지막 유언 같은 두 차례에 걸친 편지를 디모데에게 남깁니다. 그것이 바로 디모데 전후서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신약 성경의 적지 않은 부분이 바로 바울의 서신서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의 편지 중에 6개가 바울이 혼자 쓴 것이 아니라 디모데와 함께 공동으로 쓴 편지임을 아십니까? 고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 그리고 빌레몬서등입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 지난 주일에 이어 가정을 생각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됨에 있어 두 가지 유형을 생각합니다. 하나는 바울 형으로서 예수님을 모르는 상황 속에 살다오다 어느 날 갑자기 바울처럼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영향권에서 자라오며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또 다른 사례를 말할 때 대표적으로 디모데 형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가장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자녀들이 디모데 같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입니다.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루스드라 지방에서 걷지 못하는 지체 장애인을 치유하는 등의 기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마도 그 때 거기서 바울이 처음 디모데를 만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면서 이 여행의 목적을 1차 전도여행을 했던 곳을 다시 방문하며 복음을 받아드린 이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함에 두었습니다. 행15:36입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그래서 이번에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육로로 루스드라에 도착합니다.(지도 참조) 그리고 본문이 시작됩니다. 행16:1-2을 다시 읽겠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자, 여기 디모데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1절에는 제자 디모데라 했고 2절에는 칭찬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이런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자녀들도 디모데처럼 칭찬받는 주의 제자로 자라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칭찬받는 제자 디모데로 자라가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1. 홈 스쿨링의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디모데가 좋은 제자로 성숙해간 첫째 배경은 그의 가정, 홈이었습니다. 물론 디모데의 경우 그의 어머니의 신앙의 영향이 깊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성경은 디모데의 어머니의 경우 ‘믿는 유대 여자요’라고 강조한 것을 지나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제 바울 사도가 딤후1:5에서 디모데에게 직접 보낸 편지에서 기록하는 바를 주목해 보십시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의 신앙의 유산은 그의 외조모 때부터 시작되고 있었고 바울은 그들의 믿음을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이 대목을 ‘성실한 믿음’(sincere faith)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실한 믿음의 어머니, 외조모가 디모데를 있게 한 배경이었던 것입니다.


사실상 홈은 우리가 인생으로 태어나 첫째로 경험하는 학교이며 어머니와 아버지는 인생의 첫 번째 교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위 학교 교육은 대체로 만 5세가 되어야 시작되지만 심리학자들은 그때 이미 교육의 80는 이루어진 상태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인생의 영향은 바로 우리 부모에게서 유래하고 있다면 이런 부모의 가르침이야 말로 오늘의 내 인생의 기초이었음을 확인해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 날 우리 시대의 부모들이 교육의 책임을 학교나 교회, 사회에게만 전가하고 가정에서의 일차적 교육의 책임을 기피하는 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직무유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가정에서의 교육에 책임을 다하려는 홈 스쿨링을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적지 않은 분들이 이제 홈 스쿨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 교육을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대안을 찾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이미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 성서적인 교육의 대안으로 홈 스쿨링에 참여하는 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대의 부모님들이 조금만 헌신하면 적은 비용으로 가족들이 헤어져 사는 비교육적이요 비 성경적인 기러기 교육의 대안으로 이 홈 스쿨링이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로 이런 홈 스쿨링의 산물이었습니다. (홈스쿨링 학생의 간증)


2. 멘토링 교육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또 하나 제자 디모데의 삶과 신앙을 만든 요인은 멘토링이었습니다. 이 멘토링은 디모데가 바울같은 스승을 만남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세 가지 만남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모와의 만남, 또 하나는 배우자와의 만남,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첨부한다면 좋은 스승과의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들은 우리 자녀들이 좋은 스승, 좋은 배우자를 만나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바울과의 만남은 얼마나 중요한 만남이었는지요?

바울은 이미 제1차 전도여행을 통해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제2차 전도여행 때 다시 루스드라에서 그를 만나 그를 그때부터 제자로 삼고 전도여행에 동반자로 삼습니다. 아마 그때 까지 경과된 한 이년의 기간동안 그의 가능성과 신뢰성을 성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2절의 말씀처럼 그가 그의 삶의 마당에서 ‘칭찬 받는 자’임을 확인하고 그를 제자로 영입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디모데에게 바울은 바로 멘토였고 디모데는 바울의 멘토링의 수혜자가 된 것입니다.


멘토라는 단어의 유래를 아시지요? 멘토(Mento)는 본래 그리스 신화 오딧세이에 나오는 이름입니다. 주전 1200년경 고대 그리스 이타이까 왕국의 왕 오딧세이가 유명한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며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왕자)을 자기가 가장 믿을만한 친구에게 맡기고 떠나는데 그의 이름이 바로 멘토였습니다. 오딧세이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약 10년간 멘토는 왕자의 친구로 스승으로 그리고 상담자와 부모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후로 멘토라는 이름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주는 지도자를 통칭하는 단어가 됩니다. 따라서 멘토링(Mentoring)이란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그 사람의 인생을 세워주는 일련의 과정을 뜻하는 말이 된 것입니다. 학교나 교회는 이런 멘토를 만날 수 있는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부모들은 부모로서의 약점이나 한계를 넘어서서 우리의 자녀들이 좋은 영향을 받기 위해서도 자녀들의 멘토링 교육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좋은 멘토를 만나도록 기도하십시오.


3. 쉐마-성경 교육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디모데의 어머니가 혹은 바울이 디모데의 멘토로서 그를 양육할 때 무슨 교과 과정으로 영향을 끼쳤을까요? 그 정답은 성경 교육이었다고 확신합니다. 바울이 딤후3:14이하의 말씀에서 말한 바를 확인하십시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라” 디모데는 누구에게 무엇을 배웠을까요? 딤후3:15을 읽겠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절까지 읽겠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여기서 모든 성경은 무엇을 뜻할까요? 사실 바울이 이 말을 기록할 때 아직 신약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로 구약이었고 이 구약의 교훈을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쉐마’라고 불렀습니다.

 

만일 우리가 유대인들에게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들은 지체없이 신6:4-7을 말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쉐마)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오늘 날 내가 네게 명하는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 이 달의 추천도서로 올린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으라”는 책에서 저자인 현 용수 목사님은 이 말씀을 ‘수직적인 지상명령’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수평적 명령인 이웃들에게 전도하는 명령에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 만큼 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수직적인 제자훈련 곧 쉐마 교육에 무관심했다고 지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제자 디모데를 데리고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할례를 받게 한 것도 한편으로는 그가 앞으로 유대인들에게 전도할 때 장애요인이 되지 않게 위해서 였지만, 또 한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중시한다는 간증을 낳기 위해서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현 용수 목사님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수직적 선민 교육은 대부분 구약 성경의 쉐마와 관련이 있다. 유대인은 가정에서부터 부모가 혈통적 자녀에게 율법(말씀)을 전수시켜 그들을 말씀 맡은 자로 키워 영적인 말씀의 제자로 삼는 선민 교육을 가장 잘 실천한 민족이다. 이것이 그들의 생존의 비밀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의 중심 주제가 구원을 위한 복음이라면 구약의 중심 주제는 선민 교육, 쉐마 곧 기독교 교육이라고 말할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신약의 중심 주제인 복음이 구원의 열쇠라면 구약의 중심 주제인 쉐마는 자녀 교육의 열쇠라고 말할수 있다.” 바로 이런 쉐마 교육을 등한히 한 것이 오늘 날 많은 기독교 가정이 자녀들을 믿음으로 세우지 못한 원인이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라도 쉐마-성경 교육이 우리들의 가정에서 시급히 회복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국의 영향력있는 부흥 전도자 M.B. 윌리암스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가 어느 날 큰 신앙 대회를 앞두고 <가정과 성경>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기에 앞서서 찬송 인도자였던 찰스 틸만(Charles Tillman)에게 주제가 작곡을 부탁하자 그러면 “목사님이 작사를 해 주시지요”라는 요청을 거꾸로 받게 됩니다. “제가요?” 하고 눈을 감은 순간 그 앞에는 어린 시절 자기를 무릎위에 올려놓고 성경을 읽어주고 기도하던 어머님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의 눈에는 하염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는 바로 성경책 뒷장에다가 떠오르는 시상을 글로 쓰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나의 사랑하는 책’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4)그때 일을 지나고 나의 눈에 환하오 어머니의 말씀 기억하면서 나도 시시때때로 성경 말씀 읽으며 주의 뜻을 따라 살려 합니다. (후렴)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교우 여러분, 우리 자녀들을 성경으로 교육한 부모들에게 감사하면서 우리도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부모가 되기를 결심하는 오늘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동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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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어찌하든지
여호수아 24:15

우리의 신앙 기준은 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의 신앙은 시대마다 다릅니다. 말씀을 지키려 목숨을 내건 사람들도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며 자신의 영달(榮達)을 꾀하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성경이 믿음의 선조들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건 지조 있는 신앙인들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공동체가 말씀에 바로 서 있는 공동체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나의 신앙의 기준을 다른 지체들의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찾을 때 우리의 신앙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등진 공동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섬길 자를 택하라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의 일입니다. 정복을 완전히 마치지는 못했지만, 강력하게 버티고 있던 가나안 원주민들은 산으로 도망가거나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습니다. 이전에 요단을 건너기 전까지만 해도 별명이 '이주민'이었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명실공히 국토와 주권과 국민을 가진 국가(國家)가 된 것입니다.
이미 포도원이 있고, 과수원이 있고, 농작물을 가꾸는 밭이 있고, 망대가 있고 집이 지어져 있는 번화한 땅이었는데 그 땅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심지 않은 밭에서 소산을 먹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적적인 역사로,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전쟁 속에 뛰어 들어 정복을 해 나갔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을 의뢰하고 매달렸던 것과는 달리 이제 농토를 차지하게 되자 만나가 없이도 살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기적적인 공급함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여유로운 때가 되었는데 덩달아 이들의 믿음도 함께 점점 식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즘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신앙의 정절을 찾아 볼 수 있을까요? 믿음에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거는 믿음의 용사들이 얼마나 딜까요? 모든 것은 기도 없이도 부모로부터 수월하게 공급되고 풍요롭게 공급됩니다. 애타게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얼마든지 나의 필요를 채울 수 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마음에 아름다운 소원을 품고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신앙을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의 신앙입니다. 오늘날 학생들은 학원선생이 무서워 교회 안나옵니다. 좀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고 주일도 없고 하나님을 예배함도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도 바벨론에 끌려갔지만 3년 동안 채식(菜食)만 하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웰빙 때문에? 다니엘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그 인생의 성공의 길이며 축복의 길임을 알았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만 섬기십시오 바로 섬기십시오. 미국의 대통령들은 다 이스라엘을 방문합니다. 유명한 과학자 두뇌들은 다 유대인들에게서 나옵니다. 아랍 32개국 정상들이 모여 이스라엘을 치려해도 당해내지 못합니다. 이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들은 말씀이면 세상 모든 게 변해도 말씀을 지키는 것은 변하지 않아요. 철저히 지킵니다.

우리는 너무 자유스럽습니다. 믿음이 소중한지 모르는 거예요. 세상에 너무 많은 양보를 하며 살아갑니다.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고리타분합니까? 세상은 변해도 복음은,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도 섬겨할 분도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십 년 전의 신앙이 다르고 작년신앙이 오늘신앙과 비교하여 변질되어선 안 됩니다. 목숨 걸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대장부들이 되십시오.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믿음만은 양보하지 않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와 내 집은….
우리는 우선 여기에서 '나'와 결탁되어 있는 '가정'을 보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점에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정을 장악하고 있는 가장이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만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수고한 영웅이 아니라 자신 속에 불붙고 있는 신앙을 가족들에게 잘 전파하고 가슴에 그 신앙을 불붙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하나님을 등지고 참사랑을 배반하고 불순종과 죄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그 시대를 향하여서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고, 가족들이 모두 자신 속에 불붙고 있는 마음에 동참해 줄 것을 굳게 믿고, 그렇게 선언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러 주셨다면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가족을 구원하라는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가정의 영적 제사장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불신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죄를 대신 슬퍼하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울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 불경건한 시대에 노출된 자신만 아니라 가족의 모든 식구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부모님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영적인 가장을 세워주신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선은 여러분들이 좋은 신앙으로 가정을 장악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집안에서 서열이 어떻게 되든지 나이가 어떠하든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하고 고백할 수 있는 대표자의 자리에 여러분을 앉혀 주신 것입니다.
뛰어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모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려고 먼저 믿는 가장 삼아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라고 고백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를….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여호수아가 이런 고백을 하였던 당시의 상황입니다. 그 시대를 대변하는 신앙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아니라 이방 신을 섬기고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의 고백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만을 섬겨야 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이 문제가 아니라 내 신앙이 문제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그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든지 나는 변질된 수많은 신앙인들을 바라보지 않고 말씀대로 철저히 그 시대의 사조와 풍조가 어떠해도 나는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다는 고백처럼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분명하게 신앙의 지조와 절개를 굳게 하고, 모두가 돈으로 살고, 재주로 살고, 나쁜 방법으로 살고, 지식으로 좋은 대학으로 살려고 해도 나는 순결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으로 살겠노라고 작정한 사람의 신앙고백은 사람들 가슴에 불을 지르고, 냉담한 사람들의 마음에 확신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잠자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기회와 좋은 선택의 조건들이 놓여 있지만 그 속에서 신앙을 택하고 믿음을 따라 살아가려고 할 때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는 참다운 신앙의 불을 당기시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시고 이 시대에 쓰시는 것입니다.

 

맺음말
성경에는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우상 섬기기를 좋아하는 육욕을 좇는 삶을 살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기우는 신앙의 역사의 비탈길에 서서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는 고백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가족을 살리고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를 살리게 됩니다.
이러한 신앙으로 여러분의 교회공동체 지체들의 믿음을 불붙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을 믿음으로 일으키십시오.
오늘 여호수아의 고백이 바로 여러분의 고백이 되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 어찌하든지 나는 주님의 군사 되어 주님을 섬기는 참된 신자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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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공격들에 대한 대적기도

 

1.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마음이 심란하고 우울해질 때가 있습니다.

이 우울함은 마귀가 가장 많이 사용하여 우리를 속이는 무기입니다. 우울함을 대적하십시오.

우울함은 하나님의 생각도 아니고 나의 생각도 아닙니다. 마귀의 생각입니다. -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밝고 맑게 살아야 하며 어두운 마음과 우울한 마음을 쫓아내야 합니다.

2.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반대로 악한 영이 우리 안에 있을 때 드는 생각은 마음의 불안입니다. 불안감을 대적하십시오. 불안감은 악한 영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불안하면 어떤 일도 되지 않습니다.


 3. 주로 내성적인 사람, 혼자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외로움과 고독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외로움과 고독은 마귀로부터 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고독과 외로움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4. 사랑이 어떤 대상을 끌어당기는 것이라면 분노는 이와 반대로 어떤 대상을 공격하고 밀어내는 것입니다.

분노를 대적하십시오.

분노는 마귀로부터 오는 아주 강한 감정입니다. 분노의 기운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며 죽이고 파괴하는 영입니다.

분노할 때 첫째는 자신이 죽고, 둘째는 가까이에 있는 가족이 피해를 당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은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5. 많은 슬픔과 눈물이 어두운 곳에서 옵니다.

슬픔을 대적하십시오. 천국은 슬픔과 눈물의 장소가 아니고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곳입니다.

6.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이 많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복수심인데, 그것은 약자들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악한 영은 연약한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서 복수심을 자극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복수심에 빠지면 그것은 마귀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복수심을 대적하여 물리치십시오. 원수를 오히려 사랑하게 될 때 영적으로 강한 사람이 됩니다.

7. 과거의 아픈 기억은 두고두고 고통의 근원이 됩니다.

그것은 그 당시 우리 안에 들어온 악한 영이 지금까지 떠나가지 않고 자리를 잡고 사는 것입니다. 그 상황으로 가서 그때 들어온 악한 영들을 부르고 대적하고 초토화시키십시오. 그것들을 깨끗이 처리하십시오. 더이상 과거의 어떤 기억들 때문에 고통을 겪지 마십시오.

8. ''말이 비수와 같이 꽂힌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사람의 말에는 어떤 형태의 에너지가 있습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말을 할 때는 구름과 같은 몽실몽실한 에너지의 형태가 상대방의 영혼을 부드럽게 감싸주어서 행복감을 줍니다.

그러나 비난하며 공격하는 악한 말은 문자 그대로 비수와 같습니다. 날카로운 화살이나 칼과 같은 것이 상대방의 가슴을 그대로 관통하는 것입니다.

9. 항상 근심에 잠겨 사는 이들은 어두움의 창조자들입니다.

이들은 근심의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상 나쁜 일을 끌어당겨, 어디에 가든지 안 좋은 일을 만나게 됩니다. 근심은 지옥에서 옵니다.

천국에는 근심이 없습니다. 평소에 두려움과 근심이 임할 때 그것을 시인하고 고백하지 말고 그것을 물리치십시오.

10. 주님의 은총이 온 우주 안에 가득합니다.

모든 만물이 그 하나님의 생명과 생기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신이 나른하고 기운이 없고 몸이 찌뿌등하고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은 무력감은 주로 조용하고 내성적인 기질의 사람들이 마귀의 공격을 받을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무기력 해질 때마다 거기에 빠지지 말고 대적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생기를 빼앗기지 않겠노라!"


11. 교만은 지옥의 중심에 속하는 악입니다.

모든 종류의 죄를 짓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나 교만한 사람들은 아주 어렵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본질과 거의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질병에 자각증상이 있지만 교만에는 자각증상이 없어서 교만한 사람일수록 자기가 겸손하다고 생각합니다.

교만을 증오하고 저주하십시오. 사람에게 높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미움 받는 것입니다. 교만의 영을 물리치고 이길 수 있다면 다른 대부분의 마귀의 공격은 쉽게 분별하여 물리칠 수 있습니다.


 12. 주님께로부터 온 사람은 남을 판단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남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남의 약점과 죄와 잘못된 것을 보는 것은 비판의 영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남들을 함부로 비판하면서 자기의 미래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비판의 도구가 되지 마십시오. 오직 사람을 축복하고 격려하며 모든 심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13. 비난의 영은 비판의 영보다 더 악질입니다.

교만과 비판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을 높이는 것이라면 비난은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서 자신의 영을 살인하는 것입니다. 모든 비난은 날카로운 창과 같고 화살과 같아서 사람들의 가슴과 영혼에 깊은 상처와 충격을 줍니다. 비판은 주로 논리적인 논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비난은 비판 위에 정죄가 더해져서 나중에는 저주에까지 이릅니다.

14. 짜증과 신경질을 잘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짜증과 신경질은 악한 영들입니다. 내 안에 있는 짜증과 신경질을 대적하십시오. 그들은 내 안에서 나를 피곤하게하고 지치게 하는 영들입니다.


15.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왕따 당하고 천덕꾸러기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도 없고 잘못한 일도 없기에 본인은 이런 대우를 받는 게 억울하기만 합니다. 학대의 영은 어릴 때 부모를 통해서 들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가 자식들을 꾸짖고 미워하고 구박하고 미워하면 아이의 마음 안에 그런 것들을 담는 그릇이 생겨서 평생토록 사람들에게 그렇게 미움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반대로 부모가 자식을 맘껏 사랑하고 축복하면 사랑을 담는 그릇이 생겨 평생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16. 꿈은 영적인 상태를 보여줍니다. 잠을 자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쉬고 영혼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이 든 사이에 우리의 영혼은 영계로 올라가서 영계의 빛을 받으며 에너지를 얻고 영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잠들기 전 나쁜 영들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영은 빛의 세계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루의 3분의1을 자는데, 잘못하다가는 하루의 3분의 1을 악한 영에게 눌려 악몽 속에서 보낼 수 있습니다. 잠들기 전 5분간을 조심하십시오. 기도하는 상태에서 잠이 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17. 음란하고 난잡하고 더러운 생각이나 공상을 일으키는 것은 귀신이 하는 짓입니다.

주님께서는 생각으로만 간음하여도 그것은 실제로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음란죄를 이기기 위해서 음란한 생각과 충동을 대적하여 내 안에서 몰아내십시오. 그런 영을 공급하는 매체와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다윗도 솔로몬도 삼손도 이 문제로 넘어졌음을 기억하십시오. 간절하게 순결함과 거룩함과 아름다움과 깨끗함을 허락하여 주실 것을 구하십시오.

18. 악한 영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억울하다는 마음을 심어 줍니다.

억울하다는 마음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는 마음이며 반성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남을 많이 비난하여 상대방이 화를 내자 그것이 억울하다고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 억울한 사람은 없습니다. 억울한 영이 내 안에서 나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억울한 영은 나가면서 ''억울하다'' ''억울하다''하고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19. 주님으로부터 오는 죄책감은 우리를 주님께 나아가게 하며 그러한 죄의 고백과 자신의 부족함을 이야기 할 때 그 공간과 분위기가 아름답고 포근하며 달콤해집니다.

그러나 마귀로부터 오는 죄책감은 우리를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자신의 사악함과 부족함을 고백할 때 어떤 경우에는 그 공간의 분위기가 우울하고 침침해집니다.

20. 모든 질병이 다 귀신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경우의 질병과 질병의 고통은 악한 영으로부터 옵니다.

이 경우에 악한 질병의 영을 대적해보면 놀라운 효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질병의 고통이 있을 때 그 질병과 고통을 꾸짖으며 대적하십시오. 많은 경우에 곧 회복될 것이며 예수 이름의 놀라운 권세에 대해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21. 갑자기 아플 때, 갑자기 괴로울 때, 갑자기 마음이 심란해질 때, 갑자기 서러울 때, 갑자기 무서운 마음이 들 때, 갑자기 고독해질 때, 갑자기 절망스러운 마음이 생길 때, 그럴 때 그것들을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그것은 악한 영들의 장난입니다. 오직 주의 이름으로 깨어 있어서 악한 영의 침투를 느끼고 쫒아내십시오. 당신의 몸과 영혼을 지키십시오.

22. 특별한 이유도 없이 지나치게 피로감이 몰려올 때 , 정신이 멍~ 하고 혼미하며 하루 종일 잠이 쏟아질 때, 몸도 무겁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정신 차리십시오.

악한 영의 공격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현상을 대적하여 기도하면 피로감은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23. 예배를 시작하기만 하면 졸음이 오고 눈이 감기는 사람, 설교를 시작하기만 하면 눈이 감기는 사람,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면 마음속에 딴생각이 가득하여 혼미한 사람은 악한 영들이 그렇게 머리 속에 혼미함과 졸음을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졸음과 혼미함을 대적하십시오. 자연적으로 잠이 부족해서 오는 잠은 아주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마귀로부터 오는 졸음은 아주 찝찝하고 불쾌한 것입니다.


 24. 지나치게 많은 잠은 묶임입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피곤이 몰려오고 잠이 쏟아진다면 당신은 그것을 대적해야 합니다. 그것은 잠의 영이 당신을 묶고 있는 것입니다.

25. 여성들이나 내성적인 사람들 가운데 공상에 자주 잠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상의 대부분은 죄에 가까우며 건강한 영성을 훼손합니다. 공상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공상은 현실에 있어서 무능하고 약한 사람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을 강하게 하여서 현실에 적응해야 합니다. 현실의 삶을 잘 감당하고 누릴 수 있는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혼자만의 세계로 도망가서는 안됩니다.


26.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대적하십시오.

생각이 많고 복잡한 것은 중대한 증상입니다. 극단적으로 가게 되면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란 단순한 것입니다. 진리도 단순하고, 명쾌하고 신선하고 아름다운 것이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복잡한 영을 대적하십시오.

27. 불면은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일으키는 악한 영을 대적하여 쫒아버리면 생각이 멈추어지고 잠이 오게 됩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반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28. 병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파괴하고 깨뜨리는 악한 생명입니다. 만성병을 대적하십시오. 만성병은 들어와서 자리를 잡은 지 오래 된 것들 입니다. 질병이란 근본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병을 대적하고 증오하고 미워하십시오

29. 주님의 영이 제한없이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아주 쾌적하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기운이 개입되면 우리의 몸은 피곤하고 무거워지고 아프고 열이 나고 눌리고... 여러 가지 증상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마다 기도함으로 그 악한 에너지, 악한 기운을 대적하십시오. 그리고 쫒아내십시오.

30. 사람들은 흔히 많은 결심을 하지만 당초의 결심대로 그것을 이루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결심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미루게 하고 싫어하게 하고 의지를 방해하는 악한 영을 대적하십시오.

선한 결심을 하거나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하려고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방해하는 영의 작용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나는 원래 이래... 나는 의지가 약해... 나는 원래 작심삼일이야..." 하고 인정해 버리면 그 사람은 평생을 그런 식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게 됩니다.


 31. 가난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가난이란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이 복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과 궁핍의 영들은 고통스러운 것이며 지옥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물질에 집착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가난을 좋은 것으로 여기면 안됩니다. 영적인 풍성함이 있을 때 사람, 물질, 천사가 따릅니다.

 


 32. 채무의 영을 대적 하십시오.

채무의 영은 사람들을 빚지게 하고 빚에 묶여서 살아가게 합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한탕주의나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하는 생각은 바로 채무의 영이 불어넣어주는 생각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서는 채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주님께 물어야 하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33. 밤에 갑자기 무서운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밤엔 육체의 힘이 약해지고 영의 감각이 깨어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주위에 있는 어떤 영의 감각을 느끼는 것입니다. 무서움은 그 사람의 영이 약하여 마귀에게 눌리는 현상입니다.

무섭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면 억지로 싸우려 하지 말고 불을 켜고 찬양을 크게 틀어놓으십시오. 그것은 마귀에게 폭탄을 퍼붓는 것과 같아서 그 공간에 있던 악한 영은 정신없이 도망을 칩니다.

34. 악몽은 깨어있을 때에 접촉한 악한 세력이 꿈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악몽이란 낮에 경험한 악한 일의 기운이 남아있다가 육체가 약해지는 밤에 드러나는 일종의 영적 배설과 같은 것입니다. 꿈을 잘 관리하십시오.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서 깨어있을 때 접촉하는 것들을 주의하십시오.


35. 새로운 곳에서 잠을 자게 될 일이 있을 때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공간에는 그 공간을 지배하는 영들이 있는데, 생소한 사람이 오면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생각하고 공격을 합니다. 예민한 사람들은 막연하게나마 이러한 기운을 느끼기 때문에 무서운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대적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악한 영들에게 떠나가라고 명령합니다.

36. 사랑이 있는 곳에 그리움이 있으므로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면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에 잠기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자연스러운 그리움을 넘어서 지나친 그리움에 사로잡혀 삶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한 그리움은 본인 스스로 절제할 수 없으며 그것이 깊은 슬픔과 무기력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영이 개입된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에 가까운 그리움은 생명을 포기하게 하기까지 합니다. 그러한 그리움을 대적하십시오.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절망스러운 그리움, 그 처철한 느낌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포하고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37. 과식이란 몸이 필요한 것 이상의 음식을 먹는 것인데, 이것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몸의 건강을 나쁘게 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 배가 터지게 먹는다던가, 끊임없이 뭔가를 먹는 것,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것 그렇게 입의 쾌락을 즐기는 사람은 영혼이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필요 이상의 음식이 몸 안에 있으면 썩게 되는데 그 썩은 냄새는 악한 영들이 좋아하는 냄새며 그 냄새를 맡고 악한 영들이 몰려오게 됩니다. 부디 과식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38. 지나친 쇼핑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애정에 대한 욕망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자신 안에 채워지지 않으면 내면의 공허함을 느끼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쇼핑 탐닉에 빠집니다.

39. 도박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도박 중독은 도박의 영에게 사로잡힌 것입니다.

도박의 영은 가정을 파괴하고 삶을 파괴하고 엄청난 재앙을 일으킵니다. 도박의 영에게 사로잡히면 자기의 의지로는 절대로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도박의 영을 대적하고 결박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야 합니다. 도박장에는 일정한 액수의 돈을 내면 자신을 도박장에 절대로 들여보내주지 않는 제도가 있다고 합니다. 자기가 자기 돈을 내고 도박장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40. 지나친 승부욕을 대적하십시오.

여성들은 이기는 것보다 사랑받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에 남성들은 사랑도 승부로 생각합니다. 승부에 대한 집착은 사람을 사납고 악하고 거칠고 교활하게 만듭니다. 그 배후에는 악령들의 장난이 있습니다. 승부에 대한 집착과 욕심은 영혼을 어둡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한 승부를 다투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41. 지나친 애정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애정에 대한 욕구는 당연한 것이지만 지나친 애정의 욕망은 재앙의 시작입니다. 과도한 애정은 종종 소유욕과 집착으로 발전해갑니다. 인간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영들의 장난에 속지 마십시오. 일반적으로 악령들은 여성들에게는 애정의 집착을 남성들에게는 무책임하고 한사람에게 성실하지 않게 하는 영을 집어넣어줍니다. 오직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으십시오.

42. 수다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언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귀한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의 인도 속에서, 영혼의 감동 속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언어는 많은 경우 해로운 것이 됩니다. 자칫 말이 악한 영의 통로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주님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십시오.

43. 취미, 기호, 습관에 주의 하십시오. 사람이 무엇에든 미치고 빠지는 것은 그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를 아름답고 행복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은 기도의 취미이며 예배의 습관입니다. 주를 바라보고 주를 얻으며 그 임재 안에 사로집히는 것입니다.

44. 고집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이것은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영인데 오기라고도 합니다.

아이들이나 또 다른 사람이 이처럼 고집을 부리고 있다면 우리는 조용히 그들의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고집의 영들을 결박해야 합니다.

45. 공중의 권세 잡은 악령들은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안에서 움직이고 역사합니다.

그러한 불순종의 대표적인 것이 거스르고 대적하는 영입니다. 권위를 거스르고 반항합니다. 순복, 순종을 싫어하고 권위자를 대적합니다. 이들은 교사이든 목회자이든 정치적 지도자이든 모든 권위에 대해서 거스르고 분노합니다. 그리하여 질서를 무너뜨리고 파괴하고 싶어합니다. 이들은 자기 안에서 움직이는 그 기운이 자신인줄 알겠지만 그것들은 지옥의 영이며 지옥의 기운입니다.

46. 폭력과 파괴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어떤 이들은 이 폭력의 영을 촉발시키는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비난하거나 비웃거나 흥분시켜서 폭력의 영이 바깥에 나오도록 환경을 조성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폭력의 피해자가 됩니다. 폭력의 영은 지옥의 영입니다. 폭력의 영을 통해서 두려움이나 공포의 영이 들어오고, 자학의 영이 들어오고, 분노와 증오의 영이 들어옵니다.

47. 혼미케 하는 영을 대적하십시오.

진리를 깨닫는 것을 방해하는 영이 혼미의 영입니다. 혼미의 영은 마치 기생충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속에서 기생충이 그 영양분을 다 흡수해버리면 그 사람은 영향실조가 될 것입니다.

좋은 영적인 분위기에 접하고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교제가 있어도 혼미한 영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48. 죽음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죽음의 영들이 찾아와서 빨리 우리의 삶을 마치도록 하라고 유혹합니다. 죽고 나면 모든 고뇌가 사라지고 평안할 것이라고 속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죽는다고 고뇌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이른 것을 볼 때 우리는 죽음의 영을 대적해야 합니다. 낙심하여 삶을 포기하려는 이들에게 우리는 죽음의 영을 결박하고 대적할 것을 권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오래 살면 뭐하냐고 합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우리는 살아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49. 길이 막혔을 때 대적하십시오.

사단은 우리의 길을 막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일을 방해하며 우리를 통한 영적인 사역을 방해합니다. 이유없이 길이 막힐 때, 자연스럽지 않은 어떤 막힘을 경험할 때 그때 마귀를 결박하며 명령하는 기도를 사용하면 길이 뚫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50. 어떤 사건 이후에 갑자기 사람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건을 통해 들어온 악한 영이 그 사람 안에 자리를 잡고 계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해결하는 방식은 간단합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당시로 돌아가서 그때 들어온 악한 영을 대적하고 결박하고 쫒아내면 됩니다.

51. 속이는 영을 대적하십시오. 진리는 단순한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 임할 때 우리는 겸손해지며 영혼들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의 아름다운 통로가 됩니다. 속이는 영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겸손하고 순전한 영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 남들보다 우위에 있고 싶어하는 이들은 이러한 영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52. 자살의 영을 대적하십시오.

악한 영들의 최종 목적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입에서 ''죽고 싶다''는 말은 절대로 꺼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죽겠네''하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무척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영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53.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적으로 천국의 영과 지옥의 영에 의해서 영향을 받습니다.

천사들은 영혼들을 천국으로 이끌려 하고 지옥의 악령들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끌어당기려 합니다. 이 땅에 살면서 좀 더 강한 악령의 공격을 받는 사람이 있고 비교적 약한 공격을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영들의 공격이 강한 곳에는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54. 한계를 느낄 때 대적하십시오.

특별한 이유가 없이 일이 잘 안 풀릴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대적기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적하는 기도는 영적, 정신적, 육적, 환경적인 장애물을 제거해주며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올려줍니다. 그것은 더러워진 창문을 깨끗이 닦았을 때 바깥의 경치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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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의환 칼럼] 시련을 넘는 축복 
  
▲김의환 총장(칼빈대학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따르고 있는지 시험해 보시기 위해 믿는 자들에게 시련을 주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은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시험과 다르다. 다시 말하면, 사탄은 우리에게 시험(temptation)을 주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험(testing)을 주신다. 우리말로는 두 낱말이 시험이라는 한 단어로 번역되어 있어 그 의미의 차이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시험은 시련, 곧 testing이다.

 

하나님은 마귀와 같이 악으로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시기 위하여 연단의 시련을 주신다. 마치 연금술사가 순금의 순금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금덩어리를 풀무불에 던지듯이, 대개 시련은 우리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찾아온다.

 

예컨대, 창세기 2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가정에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가정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계집종 하갈과 접촉한 후 생긴 여러 가지 가정의 복잡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시켜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가정 내의 문제뿐만 아니라 외적인 문제도 해결시켜 주셨다. 그를 위협했던 아비멜렉의 군대 장관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화해를 청한다.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안팎으로 평화가 찾아왔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제 만사 형통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보내 주시더니 이제는 가나안 땅을 주시려는가 보다 생각하며 극도의 성취감을 맛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잠깐 기다려라. 내가 너에게 한 가지 요구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이어 “네가 사랑하는 네 아들을 바쳐라”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너무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계시면서도, “네가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신다. 늦둥이 아들, 얼마나 귀여울까? 백 세에 난 외아들을 바치라! 이 얼마나 큰 시련인가.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찾아오셔서 우리를 시험하신다.

 

오늘날 우리도 무엇이 잘 되어 가는 것 같을 때, 이만하면 내 신앙이 반석 위에 선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지기 쉽다. ‘이만하면 내 사업이 안전 궤도에 올라섰어! 이제는 집도 마련하고 직장도 안정성이 있고, 자녀들은 좋은 학교에 보내고, 교회에서는 인정을 받을 만큼 봉사하고 있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만족하고 있는 그 순간 때때로 네가 의지하는 것, 네가 사랑하는 것을 내게 바치라고 요구하신다. 이렇게 요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한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인지.

만약 하나님께서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시련을 주셨다면, 우리가 시험을 통과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더 큰 축복을 준비하고 그것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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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환자접근 방법 (MINISTRY TO THE SICK)

 

목회자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을 방문하게 될 때 여러 상황들을 만나게 된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환자, 통증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환자, 수술하고 회복기에 있는 환자, 또는 교통사고를 당한 환자나, 산부인과 병동에서에서 아기를 분만한 산모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또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고 있는 가족들을 만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한 병실에 여러 명의 환자들이 함께 입원해 있는 병실일 경우에는 여러 환자와 더불어 그들의 가족들까지 만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회자는 의료진이나 사회사업가와 다르게 환자들의 영혼을 돌보는 사람이며, 그들의 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가장 고민하고 관심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들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인도해 주어야 하는 사람이다.

 

이 장에서는 목회자가 병상에 있는 환자를 돌봄에 있어서 필요한 기도사역에 관해 두 가 지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는, 목회자가 환자와 만났을 때 언제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가? 둘째는. 어떤 유형의 기도가 제공되어야 하는가?

 

환자를 위한 기도의 때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한다고 믿었지만 제자들에게는 언제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에 다양한 상황들을 고려하는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남겨두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기도를 요청하는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병실에 있을 때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병실에 있을 때에는 마음이 병에 점령되어 있어서 기도하기가 쉽지 않으며,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지 못한 사람은 기도하는 것을 더욱 힘들어 한다.

 

아픈 사람들은 목회자들이 하나님과 늘 소통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기도로써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목회자는 환자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환자를 잘 알아야만 한다. 환자와 그의 개인적인 욕구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할뿐만이 아니라, 그전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관계에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환자를 위해서도 결코 기도해 준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병실에서의 기도의 내용들은 그의 필요들에 맞게 지어진 그 환자의 식단의 내용과 같아야 한다. 수술 후 회복기 환자에게는 묽은 즙과 차로 구성된 단순한 유동식이 도움이 되듯이, 병실에서의 기도도 비슷한 접근이 사용된다. 목회자는 환자의 병의 정도, 그의 감정적인 안 정 상태,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계의 정도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개인적인 인물과 그의 상황에 적합한 맞춤이 필요하다.

 

기도에 대한 생각들이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도가 아스피린과 같아서 문제가 있을 때에는 기도하지만, 문제가 없을 때에는 결코 기도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시나 음악처럼 기도도 피상적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사이에 진정한 의사소통은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인격적인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절대 기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는 기도를 해왔지만 어떤 비극적인 일들로 인해 기도하기를 멈춘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직도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가끔 기도하는데, 목회자가 방문할 때는 항상 기도해 주기를 기대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자주 기도하고 매일 감사 찬양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기도가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기도도 적절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도의 한 종류가 적당할 것이다. 그래서 환자가 여러 명이 있는 병실에서 모두를 포함하기 위해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유능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환자들에 대한 통찰력을 얻어야만 하고 개개인의 인간에 적응하기 위해 유연해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축복을 나누어 주거나 환자에게 기도해주는 것이 우리 사역의 일부라고 쉽게 생각하는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환자의 필요보다는 우리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될 수 있고, 우리의 기도가 쉽게 일반화되고 피상적이 되기가 쉽다.

 

반대로, 환자들이 직접요청하지 않을 때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진정으로 환자에게 가장 최선인 것을 행하지 않은 것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용기가 없어서 요청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가 당연히 기도해 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요청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성직자의 종파나 소속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요청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해주어야 한다거나 결코 기도해주면 안된다고 하는 절대적인 규칙을 가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관심은 환자가 언제 직, 간접적으로 기도를 요청하는지, 그리고 기도가 언제 목회적인 대화로부터 자연적으로 흘러나와야 하는지에 대해서 환자와 함께 하는 기도에 접근해야 한다.

 

그러면 환자들은 언제 어떤 식으로 기도요청을 하고 있는가? 어떤 이들은 때때로 방문 끝에 직접적으로 기도를 요청한다. 어떤 이들은 목회자가 가려고 할 즈음에 손을 잡는다든지,

 

머리를 숙인다든지, 십자가 싸인을 만드는 준비를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기도를 부탁한다. 환자가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그를 돕기를 원하고 기대한다는 것은 명백한 암시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기도하려고 했는데 실패한 경험들을 말함으로써 기도의 필요성을 말하기도 하고, 자기의 지난 고통들을 설명하면서 자기의 병이 이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 표현함으로써 기도의 필요성을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상황에서 목회자는 신적인 치료자를 요청하는 환자를 도와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제공되는 기도의 유형

 

병실에서는 기도가 목회자와 환자의 주의를 집중하게 될 것이라고 추측된다. 우리의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방의 분위기를 예민하고 급하게 매우 의식적으로 흐트러뜨려 놓게 되는데 이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에 집중하는 것 때문에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는 다른 환자들의 주목을 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들의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공되는 기도의 유형에는 네 가지의 지침들이 제안된다.

 

첫째, 우리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갖기 위해, 그리고 환자가 그의 마음속에 있는 다른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기도 전에 약간의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 순간에 숨을 돌리게 되고 역할을 하게 되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둘째, 환자는 약하고 쉽게 피곤을 느끼기 때문에 긴 연설과 같은 기도는 병실에서 필요하지 않다. 또한 하나님과 종교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조용히 있는 다른 환자들을 위해서도 고려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셋째, 기도에 환자의 이름을 넣는 것이 좋다. 점점 비인간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환자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공동체내에서 환자가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넷째, 기도는 환자의 필요를 깨닫게 해주고 그가 동경하는 것과 갈망하는 것들을 표현하 는 것으로 적용할 수 있다. 여러 사례들 속에서, 목회자는 환자의 죄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강조하는 기도를 제공할 수 있지만, 그것이 환자의 주요한 관심이 아닐 때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은 적용이 된다. 좋은 적용은 환자와의 대화를 요약하는 것에 의해 성취되었다. 이 요약은 목회 상담가가 목회상담 중에 결론에서 하는 것과 비슷하다. 목회적 방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환자가 가장 중대한 감정을 가지고 공유하는 중심문제를 특별히 여기고 강조한다. 또 환자의 욕구와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상황 속에서 분별되고 사리에 맞는 적용들이어야 한다. 수술 후의 환자에게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 달라는 기도는 비사실적이다. 더 좋은 접근은 환자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치유를 확신시켜주고,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신 그리스도의 힘을 주도록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좋은 적용은 병실에서의 기도가 환자의 필요에 의해 적합하게 맞추어져야한다는 것과, 자연스러운 기도여야 한다는 것이 장려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이 공식적이고 상투적인 기도이거나 암기하는 기도에 대한 효율성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의심할 필요 없이 상투적인 기도가 자연스런 기도보다 좀 더 적당한 경우가 있다. 때때로 교회나 기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이 기도에 대한 말을 잊었을 때 주기도문을 제공하게 되면 가장 좋은 기도가 될 수 있다. 그가 주기도문을 기억하는 데 도움을 받아서 스스로 기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서 가장 유익한 기도가 종종 주기도문이나 성모송, 그리고 몇몇 절규가 된다. 또 특별히 성경말씀을 좋아하거나 확신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기도는 시편23편이 것이다.

 

현대의 병실은 성직자가 축복을 빌어주는 장소이다. 성직자의 축복은 그가 기도할 때나 환자를 방문할 때 언제나 그것을 필수적으로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초라한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목회적인 돌봄은 환자를 방문할 때 성령께 열려있으며, 어떤 고정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상황에 맞추고, 만남에서 기도하거나 기도하지 않거나 간에, 그리고 기도의 유형에 관한 상황이 나타나졌을 때 목회자 자신이 아니라 환자의 필요를 도우시는 성령을 인정하는 것이다.

 

신체 절단된 환자를 위한 목회

 

일반적으로 상실을 말할 때는 가족들의 죽음에 관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실제로 상실은 가까운 누군가를 잃어버리는 것이며, 많은 물질을 잃는 것이고, 중요한 감정적인 가치의 어떤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포함한다. 이것은 소중한 친구들과 익숙한 환경을 떠나는 거주지 변경으로서의 이동일 수도 있고, 인생의 완성에 있어서 상실일 수 있으며, 자연적 재앙 혹은 화재에 의해 파괴된 가정, 그리고 소중한 일자리를 잃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장에서는 신체의 중요한 부분이 손상되는 것, 즉 팔다리 절단, 유방제거, 신체 장기 제거나 혹은 일종의 손상시키는 상처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상해들 중 어느 하나 때문에상실을 경험하게 되면 신체 이미지와 자아개념은 위협을 받게 된다. 신체의 변화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미 일어난 일은 뒤집을 수 없다, 치료 될 수도 없고, 온전해 질 수도 없는 것이다. 신체를 상실한 환자들을 어떻게 이해하며, 그들을 위한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신체 이미지와 자기 개념 계발하기

 

신체 이미지는 초기 삶에서 시작해서 유년기로부터 성인기까지 점차 넓혀진다. 처음 유아의 세계는 혼란스러우며,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 의지하면서 어머니와 하나가 된다. 아이는 어머니와 동질성을 느끼면서 처음으로 안전을 느끼고 신뢰감을 발전시킨다. 점차적으로 어머니로부터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인식하게 된다. 아이의 세계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과 환경 안에서의 대상들이 아이의 인생에서 최초의 충격들을 만들어 준다. 그는 만족스럽거나 혹은 열등한 느낌을 갖기 시작한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한사람으로서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들, 즉 그의 부모님이나 형제자매들로부터 그를 향한 태도들의 표현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관계들이 유쾌했을 때 그 자신에 대해 마음의 그림을 긍정적으로 그리게 되며 그는 자기 개념과 신체 이미지를 구성하게 된다. 그는 점차 인생에서 주고받는 것을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유일한 인간 존재인 한 사람으로서 인정받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생에서의 이러한 초기 경험은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다음의 경험들을 해석하는데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초기경험을 긍정적인 관계들 안에서 경험한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믿게 되고, 그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따뜻하고 친근한 관점을 갖는다. 그는 차츰 자신이 사랑스런 존재임을 인식하면서 신체이미지와 자기개념을 계발해 나간다. 청년기는 신체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때이며 모습의 변화와 더불어 자아의식을 찾아가는 시기이다. 또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을 받아들일 능력이 있는 능숙한 개인으로서 성인기로 옮겨간다.

 

한편 부모로부터 받아들임을 느끼지 못한 청소년들은 바로 그 외상성의 경험으로 고통을 받는다. 만약 그가 불충분하다고 느끼게 된다면 그의 자기개념은 낮아지고 자기 신체를 열등하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기 신체 모습의 어떤 왜곡을 경험할 수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는 인정받기 위한 노력으로 그의 신체 안에서 비정상적인 관심을 발전시킬 수도 있다.(옷이나 헤어스타일, 지나친 신체적 건강, 근육상태)

 

이렇게 개인이 무기력하게 하는 병이나 손상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심각하게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번번이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대처하지도 못한다. 상실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한탄하며 움츠러들게 된다. 의기소침해지며 완전하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SchoenbergCarr신체 모습은 하나의 자아 완성의 기본적인 생김새들에 의해 상상되어진 흠없음과 완전함을 가지고 있다. 이 자아 완성이 약해졌을 때 수술 혹은 상처를 통해서 신체 이미지가 무너질 때 심한 정신병자 혹은 피해망상적인 행동을 촉발할 수 있다. 그러나 잘 이겨냈던 사람들일지라도 그와 같은 손실은 슬픔의 상실로서 거의 모든 사람들의 반응으로 나타나고 우울과 걱정을 수반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모든 사람들은 몹시 슬프게 하는 상실의 인생에서 격렬한 변화를 겪게 되지만, 그가 적응을 향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움직일 때는 그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그의 능력에 의존할 수 있다. 그런 변화는 감정의 위기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더 이상 예전에 늘 했던 것처럼 동일하지 않다. 그의 몸은 지금 다르다. 그는 인생의 새로운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그 상실한 몸이 늙었든지, 삶의 오래된 습관이든지간에, 그가 새로운 방법을 배우게 될 때에 그는 상실에 대해 슬퍼하게 된다. 대처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상실에 관한 그의 감정을 어떻게 쉽게 표현하는가에 의존한다. 상실에 대한 비탄은 고독한 진행이며 완전히 홀로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를 도우려고 하지만 그가 자기의 무기력한 기능에 관하여 절망적인 감정과 생각들을 표현했을 때만 상실의 고통이 어떤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병이나 상처를 통해 상실한 다른 유형들

 

쇼크로 인한 충격이나 개인적으로 믿기지 않는 일을 당한 사람은 그의 팔이나 다리가 없어진 것을 보고나서야 없어짐을 느끼는 경험을 한다. 그의 극복하는 능력은 한 사람으로서의 본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에 의존하게 된다. 그가 긍정적인 자기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새로운 신체 이미지에 극복을 행한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그는 지각과 생각들을 언어로 나타내어 상실에 대한 요구들을 표현할 수는 없다. 다리나 팔이 없는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여전히 한사람으로서 개인에게 위안을 주는 일이다. 사회적응훈련 그룹의 목표들을 강화하는 목회자가 건강한 모임과 함께 일하는 것은 인내심을 갖게 한다. 목회자는 사람을 격려해 주는 것이 기본이다. 그리고 들어주고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제도에 관해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가족에 대한 상담은 그의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변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만들어야 한다. 가족 구성원들은 가족 부양뿐 아니라 그들이 변화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 상실에 관한 대안점들을 제공해 주는 것은 그들이 노여움이나 죄에 대한 감정이 있을 때 특히 유용하다. 그들에게 감정을 표현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픔과 좌절을 느꼈을 때 목회자는 그들에게 힘의 근원이 된다. 환자와 그의 가족은 그 변화를 수용하고 새로운 것을 발전시키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

 

어느 한 부분의 마비나 심한 타격으로 인하여 몸을 깁스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환자와 그 가족들도 포함된 성공적인 사회적응 프로그램을 장려하기 위한 심리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환자의 변화에 때라 반응하는 상황의 필요성을 강조하라. 환자는 건강이 악화됨과 그의 삶에서 한 번 뿐인 생명에 대해 슬퍼한다. 그는 자기가 필요한 것을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음과 스스로 자신의 무능함을 알아가는 것으로 인해 깊은 좌절감을 느낀다. 이러한 환자의 체험과 심지어는 환자 스스로 분명하고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는 느낌까지도 이해해야 한다.

 

환자가 의사소통을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천천히 말하라. 환자가 알고 있는 것을 오직 하나의 방법으로 표현하는데 거부반응 없이 용이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질 때 환자는 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게 된다. 목회자는 환자가 스스로 사회에 복귀하려고 하는 노력에 힘을 북돋아주고, 건강한 모임 안에서 세워진 목표를 성취하도록 동기를 유발시켜주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의 질병을 걱정하고, 화를 내고, 실망하고, 자책하면서 그의 생명을 제어하는 능력의 부족을 느끼게 된다. 신앙 상담가는 극복하기 불가능한 성냄과 자책감으로 빈정거리는 사람의 말을 골똘하게 그리고 적절하게 반응하며 경청해야 한다. 목회자는 환자의 병과 관련하여 환자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를 통해 적절히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는 환자에게 감정적인 도움을 주고 환자가 다시 걸을 수 있고 잘 들리도록 말하며 시도하는 것들로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마비환자나 척추계열의 환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슬픔을 입어 상처를 받는다. 그것은 사회복귀프로그램에서 부정적으로 대우를 받는 것과 그들이 얻을 수 없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육체적으로 제한을 가지고 있으며 남의 도움이 아니면 스스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치료하면서 알게 된다. 그는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그에게 지금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환자가 스스로 그의 무능력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는지 들어보라. 특별히 여전히 저항하고 말하고 듣는 행위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있는 그의 사회복귀프로그램에서 나타내는 것들을 포함해서, 그가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행동들과 그의 느낌을 어떻게 표시하는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목회자는 위기 상황(우울, 퇴보, 자살 충동)에 있는 환자들의 상황을 인식하여, 그의 느낌들을 표현하는 일을 계속해서 도우며, 그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젊은 사람이 불구가 된 상처와 질병 안에서 성기능 장애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들이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어떻게 지각하느냐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목회 상담가는 환자가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받은 남성다움이나 여성다움 또는 성적인 것들에 관한 관심들을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 이해하고 그의 관심들을 말로 표현하도록 도와주어야한다. 그 환자는 자신의 신체를 이미지화하고 있는 것의 분열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특별히 성기능 장애를 가진 환자에게 이러한 개인적인 일을 살피는 것은 참 중요하다. 그들이 새로운 몸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인공항문수술 환자들은 발병과 환경의 변화에 따른 변화된 자기 생각을 받아들이도록 조절하고 도와주는 것을 필요로 한다. 마음의 불안을 가진 환자에게 수술전 면담은 중요하다. 의사의 언급들로부터 변화된 마음을 억제하고 유지하도록 도움 받는 환자는 건강한 그룹의 또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마음의 채비를 갖추게 된다. 마음이 불안한 환자와 간호사들에게 목회자의 계속되는 긍정적인 말을 통하여 영적인 면이 더하여져 마음의 채비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수술실에서의 환자의 반응은 그의 어린 시절 몸 상태의 경험에 대해 전적으로 의존한다.(몸의 배설물이 유쾌하고 시원하거나 더럽고 수치스럽다고 느낌) 그의 어머니가 어릴 때 가르쳤던 것에 영향을 입어 배우게 되는데, 배설물에 대한 취급은 그에게 반감을 갖게 하고 그 자신만의 경험이 열등한 것으로 여겨지는 원인이 된다. 인공항문성형술 모임들은 환자들에게 반영구적인 기구를 통하여 그들의 삶의 목표를 돕고 그들의 삶을 스스로 건강하게 받아들이도록 돕기도 한다. 신앙 상담가는 지역적인 장을 통해 협력적인 접근으로 교제하려고 하는 인공항문성형을 한 사람들의 사회복귀에 열중해야 한다.

 

결론 

계속적인 무력감이나 질병으로 인하여 상실을 경험하는 이는 예민하게 고통을 받는다. 그의 분열의 실재적 영향은 심한 감정적인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건강을 위한 모임의 구성원들은 가능한 최선의 돌봄을 위해 노력한다. 그들의 목표는 뜻밖의 삶의 변화에 직면한 이들을 도움을 주기 위함이며, 희망적이게도 회복은 성공적이다.

 

목회자들은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을 이루어주기 위해 특별한 기여를 한다. 그것은 영적인 위로이다.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치료는 환자의 영적인 필요들을 민감하게 다루는 것이요, 또 하나는 환자의 이전 기능에 대한 무력감을 그 스스로 보완하는 한에서 발전하려는 지역들이 있는 사람들의 성장을 높여내기 위해 서로의 필요한 만남을 중재하는 것이다.

 

신체이미지가 손실된 환자의 회복 안에 관계되는 존재는 무능력을 받아들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고민의 과정을 경험함으로써 영적 강건함을 주는 신앙상담가를 필요로 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각인시켜주고 영적인 위로를 나눈다. 사람들은 고통과 질병과 죽음의 문제에 구체화된 존재이다. 그것은 사랑이 없는 인생을 변화하기 위한 삶을 매우 우울하고 복잡하게 한다.

 

신앙인의 목표는 사랑하는 것이고, 삶 속에서 직면한 변화들이 일으킨 질병과 부상으로 인하여 극심한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즉 추하고 불쾌한 자신을 보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요, 사랑을 결코 누리지 못해왔기에 인간들로서 자기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생명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신앙인은 사랑의 경험에 들어가며 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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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마특강] 노벨상 30%의 비밀

유대인의 창의교육 창의인재 양성 교육법

Ⅰ. 여러 조건에 앞서는데 왜 유대인에게 뒤지는가?
한국과 이스라엘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닮아 있다. 나라와 민족이 수많은 고난과 박해와 침략을 받은 것이 그렇고, 지정학적으로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 있는 것이 그렇다. 작은 땅과 소수의 인구가 유사하고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디아스포라가 그렇다. 모두 자녀교육에 매우 열심인 것이 그렇고 단기간에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보인 것도 그렇다. 두 나라 모두 국방비와 교육비에 가장 많은 돈을 쏟아 붓고 있고, 나라가 독립을 선포하고 정부를 세운 것이 1948년으로 동일하다.

 

유대인과 한국인은 비슷한 점이 많으면서도 크게 다르다. 유대인들은 통틀어 1500만 명 정도로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하지만, 우리 한국인은 8000만 명이 넘어 1.2%를 차지한다. 이스라엘의 땅 넓이는 우리나라 한반도 전체의 11분의 1정도, 남한의 5분의 1정도다. 우리 한국인은 평균 지능지수가 106으로 세계 최고의 IQ이지만, 이스라엘은 94로 세계 45위이다. 국제성취도평가(PISA)에서 우리는 1-4위로 세계 최상위권이지만, 이스라엘은 OECD 34국가 중 30위 정도에 머문다. 세계올림피아드에서도 우리는 최상위권의 성적을 거두지만, 이스라엘이 최상위권에 들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시간으로 보면 우리는 유대인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공부한다. 유대인들의 교육열이 높다지만, 기러기 아빠를 자처하는 우리에 비할 바가 아니다. 교사 수준도 우리나라가 단연 세계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은 지능도 세계 최고이고, 공부하는 시간도 세계 최고이고, 교육열과 교사 수준도 가히 세계 최고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인물이 가장 많이 나와야 하고 노벨상도 가장 많이 받아야 한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노벨상이 평화상 1명이지만, 유대인은 현재 스스로 유대인이라 밝힌 경우만 해도 200명이 가깝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 입학하는 한국계 학생이 1% 될까 말까 하지만, 유대인들은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왜 우리는 최고의 지능과 최고의 열심과 노력, 그리고 최고의 교육열을 가지고서도 유대인을 따라잡지 못하는가? 우리의 교육은 한 마디로 ‘듣고 외우고 시험보고 잊어버리고’의 반복이다. 우리의 교육은 그 어디를 가나 강의나 설명을 계속 듣는 교육이다. 교실에서 10년이 넘도록 선생님에게 설명을 듣는다. 도서관에서도 칸막이가 되어 있는 자리에 혼자 앉아서 책을 죽어라 하고 읽으면서 죽어라 하고 외운다. 열심히 듣고 공부하고 외운 것을 바탕으로 시험을 본다. 시험을 보면 그것으로 끝이다. 다 잊어버린다. 열심히 듣고 외우고 공부했던 지식들은 모두 컴퓨터 안에 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만 있으면 그렇게 외운 지식들은 쓸모가 없다.

 

우리 교육의 패러다임을 뿌리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하나의 정답, 지식, 듣는 교육, 성적을 다양한 해답, 지혜, 묻는 교육, 실력으로 바꿔야 한다. 계속 학원에서 공부만 하고 밤에 잠을 못 자고 책상에 앉아서 달달 외우는 것이 정말 효과적인 교육이라면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 유대인보다 한국인이 훨씬 많이 진학해야 하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 많이 나와야 설득력을 갖는다. 가정을 중심으로 대화와 토론을 하는 유대인 교육이 비효율적이고, 한국처럼 학교와 학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면 인구 비례로 보아도 유대인보다 한국인이 좋은 대학에 많이 가야하고, 사회적으로 더 많이 성공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가 유대인에 비해 거의 모든 조건이 앞서는 데도 성과에서 뒤지는 것은 우리가 단 하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교육방법, 공부방법이다. 유대인의 공부방법이 하브루타다.

Ⅱ. 뇌를 격동시켜 최고의 창의인재를 만드는 하브루타

1. 하브루타란 무엇인가?

이스라엘이나 미국 유대 사회에 가면 토라와 탈무드를 공부하는 유대인 전통학교인 예시바가 있다. 예시바에서는 수백 수천 명의 학생들이 둘씩 짝을 지어 매우 시끄럽게 논쟁하면서 공부한다. 이렇게 친구와 짝을 지어 토론과 논쟁을 하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하브루타’라고 한다. 즉 하브루타는 보통 2명이 짝을 지어 프렌드십(friendship), 파트너십으로 공부하는 것(study partnership)을 말한다. 때에 따라 여러 명이 하는 경우도 가끔 있으나, 보통이 두 명이고 거의 4명을 넘지 않는다. 이것은 학생들이 짝을 지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앉아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논쟁 수업 방식이다. 즉 친구를 통해 배우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파트너와 함께 토라와 탈무드를 연구해 왔다. 두 사람은 함께 앉아서 본문을 큰소리로 읽고 그것을 토론하고 분석한다. 또 다른 본문과의 관계를 살피고,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고 그들의 삶과 관련지어 생각해 본다. 그들이 동의가 되지 않을 때는 자신들의 이유를 차근차근 제시한다. 하브루타를 통한 공부는 우리의 지평을 넓히고 서로간의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우리는 매일 일상 속에서 하브루타의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존재한다. 신문에도 있고, 수선공과의 대화 속에도 있고, 나이든 부모와 학생 간의 문제 속에도 있다. 하브루타의 개념은 현상을 보는 한 가지의 옳은 방법보다 수많은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에 기초한다.

 

출처 : 안병만 박사 한국 교육개발원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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