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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요약


제1장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대진경교유행비 : 781년(당 건중 2년) 중국 서안에 설립된 비로 중국에서의 경고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탁본이 서울의 한국기독교박물 관(숭전)에 소장되어 있다.88.8*177.8cm.

돌십자가 : 경주 불국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라시대에 전래된 경교의 흔 적을 증명한다.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24.5*24*9cm.

몽천포구 : 임진왜란 중(1594) 한국에 온 최초의 서야 신부 세스페데스가 상륙한 곳으로 추정되는 경남 웅천.

오다 쥴리아의 묘 : 임잰왜란 중 일본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 중에는 기리 시단으로 개종하여 순교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왕가의 딸로 고시니에 의 해 끌려 갔다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오다 쥴리아의 묘. 서울 절두산 순교성 지 소재.


1) 당나라를 통한 접촉
AD 431 에 에배소에서 기독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공유하지만 점진적 동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고 했다 가 에배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됨.
Netorius 퍼시아 에뎃사 AD635년- 인도와 중국을 전파. 중국에서는 경교라함.
nestorian 당시 중국 황제는 당태종. 당태종: 아라곤의 설교 감명, 파사사라는 교회 세워줌. 중국말로 아브라함. 왕이 관심을 가지므로 크게 번창
* 그때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삼국통일을 꿈꾸던때) 우리나라는 당나라 힘입어 통일 이루려함.(신라의 김춘추 여러번 방문)

* 불교의 고승들이 당나라 여러번 방문.

* 1635 - 중국 서안부(북경)에서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 같은수도 이 비문에는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36자(중국어, 시리아)로 기록되었음.

* 1917년에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의 모조품이 금강산의 절에서 발견됨.

*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발견됨

* 1988년 경북 경산 지인면 일원리에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발견됨.

* 마테오리치가 1595년에 어떤 서적을 대하게됨. 거기서 당나라에 경교 가 번창함을 알게됨.

* 이런 여러가지 종합결과 당대 어떤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음.


2) 몽고를 통해 접촉
징기스칸이 몽고를 세우고 지중해 근처 모슬렘 격퇴 할때 기독교 국가들은 당시 큰 골치거리 였던 모슬렘을 대신 물리쳐 줘서 고맙게 생각함.
몽고는 세계 제국을 제패하는데 모슬렘이 큰 장벽이라는 것을 깨달음.
* 당시 징기스칸은 야만인 - 그래서 서부 교회의 Innocent 4세는 1차로 선교사(카로핀)을 1246년에 보냄.

* Rubruc은 1253년 콘스탄티 노플을 떠나 몽고 수도 화림에 와서 사둔 탁(징기스칸의 아들)을 만남. 사둔탁이 기독교인인줄 알았으나 아니였다.

* 루부룩은 징기스칸에게 개종을 권유하나 거절 당함.
당시 몽고는 우리나라 통해 일본까지 침략할 야욕.

* 루부룩이 최초로 한국(Caulei)을 서방에 서신으로 알림.
Coree - Korea


3) 일본을 통해 접촉
*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루터교가 확장.
* Ignatiu Loyola / Francis Xavier
예수회 :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Francis Xavier 를 동방의 선교사로 파송함.
그는 인도의 고아 - 필리핀(80%이상이 카톨릭) - 일본으로가 구주에 상륙 1549년에 활공총이 복음과 함께 들어감.(1592년 임진란에 있어 타격적 무기)
* 그러나 일본을 통해 기독교 접촉.
오다노 부나가(일본 지도자) - 종교 관용책.
관용 이유 : 당시 불교가 강했기 때문에 한 종교가 커지면 강대해 지므로 한쪽 약화를 위해 신학교 부지까지 마련해 줌.
(17세기 당시 일본에 30만의 신자가 있었다고 함.)

* 도요또미 히데요시 : 오사까 (한국인이 제일 많은곳)에서 예수회 신부들 을 모아 놓고 중국을 침공한 후 예수 믿겠다고 말함.

* 1592년 임진연에 전쟁 일으켜 우리나라 쳐들어옴. (20-25만의 군인을 이끌고 쳐 들어옴. 명나라 가는 길을 확보하려는 명목으로.)

* 이때 일본의 1군단장(고니까 유찌나가)- 세례명 어거스틴,이 선두로 쳐 들어 왔는데 그가 이끄는 많은 군인이 기독교인이 었다.
이들이 20일 만에 서울에 다다르고 이들이 평양성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내려와서 경남 웅천으로 일본군은 퇴각을 해야했다.

* 고니찌 유찌나가는 군인중 기독교인이 많으므로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보내 달라 부탁하니 세스 페데스 신부를 보내줌.
그는 우리나라에 오자 고메쯔에게 2편의 편지를 보냈다.
내용 : 1. 웅천에 도착한 일과 여정내역 2. 고니찌 유찌나가가 반갑게 맞 아주었 다는 내용과 일본 군인이 힘들게 있다는 말을 전함.
* 세스 페데스는 6개월 수 일본으로 돌아옴.

* 도꾸가와 이에야그(새통치자 출현함) - 기도교 엄청 박해 이때 많은 순교자를 발생. 일본 신자와 조선인으로 끌려가 믿은자도 순교함.

* 이 임진란 때문에 우리나라는 쇄국 정책을 고수함.(특히 일본에 대해)
결론 : 당나라, 몽고,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는 일찍 간접적으로 기독교 접촉.

 

제2장 한국에 있어 카톨릭


북경 북천주당 : 중국 북경에 있는 북천주당은 조선사신들의 북경방문시 꼭 들려 보는 구경거리의 하나였다. 바로 이곳을 통해 많은 한역서학서들이 조 선에 전달되었고 그 속에는 천주교에 관한 서적. 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 다.


곤여전도 :예수회 신부 베르비스트 (F.Verbiest)가 제작 (1674년) 한 지도로 1722년에 국내에 유입되어 1860년 국내에서 중간 되었다. 8퍽 병풍. 한국기 독교박물관 4-5*173.3cm.


천진암터 :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초기 서학(천주교)의 신앙회의 주역이 었던 이벽, 이승훈, 권철신, 귄일신, 정약종의묘가 조성되어있다. 경기도 광주 군 퇴촌면 우촌리 소재. 1) 선교사 들어 오기 전에 나가서 만나서 받아들임.
*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1636년에 국호를 청이라한 만주의 여진족은 자기들의 요구를 안들어 준다고 10 만을 이끌고 임진란 40여년 만에 한국을 침공. 이때(인조14년)에 우리나라 조종 은 필사의 노력으로 대항 했지만 결국 남한산 성에 ?겨가서 투항했다가 1637 년 정월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서 삼정도에서 청 태종에게 3번 절하고 항복. 이때 인조의 소현세자와 대신들이 청의 심양으로 끌려감.
* 1644년에 끌려간지 7년만에 청이 명을 정복하고 수도를 심양에서 명 의 북경으로 천도(소현세자등도 같이 감)

* 그때에 베이징에 아담 샬(주교)이 묵고 있었는데 소현세자가 만나 친 분나눔.(2달동안) - 소현세자가 기독교 저술을 읽을 기회가 있었음.

* 아담 샬은 청나라 왕의 신임얻어 통감목사(벼슬)라는 위치에 까지감. 당시 예수회의 선교 정책은 어느나라에서 선교하든지 왕실과 고위층에 먼저 접촉하는 의도가 있었음.

* 소현세자가 귀국하게 됨. - 이때 서양문물, 기독교 서적을 아담 샬이 줌. 그것을 가지고 온 소현세자는 곧 죽게됨.

* 당시 척불 숭유로 인해 임진, 병자호란으로 당하자 조종에서는 이때부터 조선 경제의 개조책이라는 책도 만들고 새로운 학문들이 일어남.


2) 학자들의 교리연구
중국을 섬기던 조선에서는 사절단을 보내는 데 정초에 성절사, 원단사, 동지사, 천추사등을 북경에 파송했다.(사절단은 한 행차에 300- 500명 정도가 50일에걸 려 가서 50일 정도 머물고 돌아왔고 진상갈때에는 비단, 금, 은, 보석, 호피, 좋 은약 등을 가지고 갔다.)
* 1601년에 마태오리치가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남당이다.
아담 샬이 살던곳에 설립한 성당이 있는데 그것이 동당이다.

* 1603년 마태오리치가 쓴 '천주실의' 란 책을 그때 진상 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져옴.

* 조선조 시대에 주자학이 당쟁에 질리고 허례허식 하던때에 나라 기강 이 안 잡혀서 이때에 학자들이 '천주실의'를 가져오자 연구했다.

* 조선조 이 수광 이라는 사람이 '지봉유설'을 썼다.
지봉유설 - 천주교에 대해 설명함. 윤회를 부정하고 착한일에 보상이 있고 악 하자는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와 교황은 임기가 끝나면 좋은 사람을 투표로 뽑 고 이웃을 제 2의 나라고 하는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이수광은 마태오리치와 동 시대의 사람이다. 임진란 전후로 3차례의 명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과학책, 천 주교책을 가져옴.

* 당시 천주교를 서학이라 했다.(사람들이 서학에 관심을 많이 가짐)

* 유인용 - '어우야담' 제 1권에서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언급함.
허균이 천주교를 믿는 것을 말하고 그 교가 동남의 오랑케에게 퍼져 믿는 자가 많은데 우리만 모르고 있다고 밝힘.

* 허균은 만주국에서 언젠가 쳐들어 올지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처형 당했다 (그는 천주교인)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
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 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 (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강조)


3) 이승훈의 入信
한국 천주교의 발생지 : 경기도 광주, 양근(양평)
이벽, 이승훈, 권..가 여기서 모여 교리를 연구하였다.
이벽의 누이 : 양근 고을의 정약전과 결혼 하였다.
* 이벽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열화 같은 사람이다.
1777년 에 서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한강터에 외진곳 주어사라는 곳에서 교리 연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100리를 걸어 왔다고 함.

* 走魚寺에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는데 천주교 교리 서적이 너무 빈약 해 중국에 가서 도움 요청을 하자고 결정함.

* 이승훈은 아버지가 그당시 북경에 갈 일이 있어 같이 따라감.(이벽은 이때 이승훈에게 가서 이번에 갈때 천주교 교리서 많이 가져오라고 부탁함.)

* 이승훈은 북경에 가자마자 북경의 천주당에 갔다.
그래서 돌아올때는 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옴.

* 이승훈은 강원도 평창 사람으로 25세에 진사 급제하고 1789년에 평택 현감이 ?다.

* 이승훈은 북경의 남당에 찾아갔다.
(여기서 교리를 배우고 1784년에 예수회 신부였던 루이스 글라몽에게 영세를 받 는다.) 그래서 이승훈에게 영세명을 주었는데 베드로란 이름을 주었다.

* 이승훈이 영세 받고 돌아올때 성화, 묵주, 책 가지고 돌아옴.

* 이승훈의 전교 : 이승훈이 돌아온 5년만에 신도 4000명이 불어나고 이들은 1785년 봄 서울 진 고개에 중인(당시 천민, 중인, 양반) 김범우 라는 사람이 자기 집에서 교리 연구를 학자들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국 신부에게 안수 받을 신부를 요청함.

* 조선 정부 형조 판서는 진고개의 예배당을 급습하여 양반은 훈방하고 김범우 는 충청도를 유배하여 그곳에서 타계함. -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에 지금 의 명동성당이 서있음)


4)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 1785년 김범우 집 급습으로 많은 사람이 배교 하기 시작함. 이때 이승훈, 이벽도 배교함.
* 시간이 지나 핍박이 줄어들자 다시 돌아옴. 그리고 성직자의 필요성을 느낌. 그래서 북경의 주교에게 요청.
* 주베아 주교는 중국사람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 주 신부는 윤유일, 지향 의 인도로 밀입국함.(엽부로 가장)

* 1795년 1월 한성에 잠입해 들어옴. 한성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부활절 전날밤에 몇 사람에게 영세줌.

* 한영익이라는 개심을 가장한 자가 주 신부를 관가에 고발함. 그래서 조선 조정이 주신부의 체포령 내림.

* 믿음 좋은 신자 하나가 주신부를 가장해 자수함.(최이길 이라는 사람인데 턱수염이 없어 들켜서 처형당함.)

* 주 신부는 가장을 하는데 상복도 입기도 하고 남의집 헛간에서 있기도 하는 데 그러는 동안 신도는4천에서 1만으로 늘어남.

* 또 배교가 있자 주 신부는 국외 탈출 하려다 그냥 스스로 자수함. 1801년에 마침내 새해 남터에서 참수형 당함.

 

제3장 수난 당하는 카톨릭


명동성당 :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 자리에 1887년부터 10여년에 걸친 공사끝에 완성되었다. 사진은 1920년대 모습이 다. 1) 수난을 불러온 요소
a. 조상제사의 문제
유교 사상의 뿌리가 되는 사상은 효이다(효는 백행지본이다.)
그러므로 불효는 일천가지중에 가장 큰 죄이다.
그리고 효중에 큰 부분이 제사이다.
중국의 마테오리치가 중국에서 선교할때 조상제사는 정치적의식이요 기독교는 유교의 발전이라고 했다.(배타 방지위해) 그러다 보니 종교가 혼합적 이다.

후에 선교사 도미니크 일행이 잘못된 이런것을 보고하자 교황 이노센 트 10세가 제사금지를 내림.

* 조상제사 때문에 첫 희생자는 윤시충 이다.
윤시충은 전라도 사람으로 25세에 진사급제하고 서울에 올라와 김범우 집의 교리 연구에서 감화 받고 3년후 입교함.
그리고 모친이 별세 했을때 상복 입고 호곡하고 위폐를 모시지 않고 제 사도 드리지 않았다.
- 이사실이 관가에 알려지자 윤시충과 외종형 권상연은 같이 처형당함.-

* 그당시 천주교 믿는 자는 패륜 외도라 하여 박해 했다.

b. 붕당적 요소(당시의 당파 싸움으로 인한 박해)
영조때 부터 천주교가 들어 왔는데 해서, 관동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때 는 사색 당쟁이 극심하던 때이다.

영조왕은 당쟁 화를 절감해서 당쟁을 줄일려고 힘을썼고 정조 대왕도 성품이 어질어서 당쟁을 줄일려고 힘을썼다.

* 사도 세자문제 발생시
시파(세자 동정하는파) - 남인 이라는 천주교도가 많이 가입해 있었다.
숙종때 남인 세력이 약화됨. 남인에 속해 있으면 등용길이 막혔다.

* 이런 남인에게 우호적인 재상인 채재공이 있었는데 1799년 사망했다.
정조대왕이 또 사망하자 천주교 박해가 터졌다.

* 정조 아들 순조(11세)가 왕에 오르자 정순왕후(정조의 첩)가 순조 뒤에서 정 치를 함. 이때 천주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가 시작됨.

* 채재공이 죽자 죽은후 관직까지 박탈함.(1801년)

* 1801년 이때는 서학을 박해하는 교서를 발표함.(서학은 인륜에 반역하고, 교황 은 장가도 들지 않고 아들도 안 낳고 밑의 똑똑한 자를 뽑아 자기의 위치를 넘 겨 준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의 세습 윤리와 안 맞아 박해 해야 한다고 함.)

c. 황사영의 백서가 문제됨

한국 카톨릭의 4대 박해가 있었는데
1. 신유 박해(1801년) : 황사영(경상도 창원사람)은 정약전의 형 정약용이?
* 주신부에게 영세 받음. 17세에 진사 급제를 함.
박해가 시작되자 충북제천 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를 찾아온 황심을 만남.
(천주교 구하기 위해 북경의 주교에게 편지 보내자고 약속. 그 편지는 길이 62 센티 폭 38센티의 비단에다 작은 글씨로 만 삼천자의 글로 보냈는데 내용은 박 해와 참상을 보고 하는 것인데 그만 도중 들켜서 조선 조정에 밝혀짐)

* 이 백서가 들켜 카톨릭은 매국종교로 지탄 받게됨.
백서 내용 : 1). 조선 천주교의 실상을 기록하고, 그래서 많은 순교자가 생겼 다는 내용.

2). 당시 정계의 사색 당쟁의 실상을 기술. 박해의 이유는 당쟁 때문이 라고 말하고 이것 때문에 경제적으로 교인이 열악하다고 기술.
3). 중국의 신도 1명을 택해 북경 지대에 점포를 개설해서 청국과 조선 사이에 통신 연락을 하게하고, 북경의 청국 황제를 움직여서 조선 왕으로 하 여금 서교를 받아 들이게 하도록 압력 부탁, 또 중국의 공주를 조선조 왕자에 게 정략 결혼시켜 조선을 굴복 시키고 서학을 받아들이도록 부탁, 또 군함과 군수 물자를 실고 와서 이 나라를 치라고 부탁. 나라는 망해도 천주교는 전파 되야 한다고 함.

* 황사영은 1801년 27세의 나이로 모반죄에 의해 참수되고 이 사건으로 300명 이 순교하였다. 이것을 신유박해라고 한다.

* 신유박해 이후 서학의 창대를 염려하여 쇄국 정책을 조선에서는 실시. 북경 외의 모든 문을 닫아 버림.

* 헌조의 명을 따라 발표된 책들이 : 척사윤음이 나왔고 대외쇄국강저, 안정복 (천학고), 천학문답, 김치진(척사론)

2. 기해 박해(1839) * 신유박해 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북경 주교에게 성직자 보내 달라고 신자들 이 요청.
* 정약종 아들 정하상이 있는데 1816년 2차례 걸쳐 북경의 신부에게 요청 했 으나 여의치 않음.

* 1827년 정하상의 편지가 라틴말로 번역되 교황에게 알려져 그레고리 16세 (교황)은 조선교구를 북경 교구에서 분립 하기로함.

* 초대 주교로 브르기에를 임명함.- 1831년

* 그레고리 16세 교서에서
첫째로 교회를 양떼로 보지 않고 목장으로 봤다.
둘째로 성직자는 공고 교리, 성례전을 위해 파송한다.
(즉 천주교는 교리와 구역을 더 중시함을 알수 있다.)
* 브리기에는 부임 하지도 못하고 객사함.

* 1835년에 1대 주교가 객사하자 블란서에서 신부들을 파송하는데 그중 모팡이 라는 신부가 상복 차림으로 압록강 통해 상륙.

* 2대 주교로 앙베르가 우리나라에 잠입해 옴.
샤스텡이라는 블란서 신부가 그후 또 옴.

* 이 세사람의 신부를 통해 카톨릭 부흥.

* 헌종 5년 (1839)에 2차 박해 시작.
당시 영의정 이지현이 사학박멸을 주장하자 순원 황후가 허락.

* 정하상을 비롯한 100명의 교도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 당했고 나머지 세 신부는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 당했다.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
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 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즉 기독교가 불 교와 다르다는 것 말함-강조)

3. 병오 박해(1846)
이 박해전 1845년 앙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페레올 주교가 조선 사람으로 최 초의 조선 안수 받은 김대곤 신부와 한성에 잠입한다.
6개월후 김대곤은 외국인 신부 안내 신부라는 일을 하다 군교에게 잡혀 들어감.
1846년 김대곤 신부 처형(살려주려고 했으나 끝내 믿음 지킴) 이 이후로 많은 무서운 박해가 시작 되었는데 이것이 병오박해이다.


4. 병인 박해와 블란서(1866) 이때 우리나라는 동학 난으로 많은 시련을 격을때 동북쪽(두만강) 강변에 러 시아가 자꾸 통상하자고 압력을 가했다.
당시 대원근의 측근이 카톨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한성에 베르노 주교가 있었는데 로마 교황청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대 원군이 카톨릭에 관대한 생각이 있음과 대원군의 부인은 천주교에 상당한 지 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인은 아들 왕자가 황제에 등극할때 미사 드려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또 왕자의 유모는 영세까지 받은 여자였다 한다.
베르노 주교는 한성에서 열심히 전도한 결과 1865년에는 12명의 선교사와 평 신도 2만 3천으로 늘었다. 당시 상황이 이래서 김기호, 홍범주 등이 의논해서 조, 영, 블 의 3개국이 동맹하여 방하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민비(대원군의 며느리) 는 비밀리에 베르노 주교에게 블과 교섭해서 외세 에서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남종삼(조선의 독실한 카톨릭 지도자)을 대원군이 접촉하는 등 카톨릭과 많은 교제가 있었다.

그런데 희 소식은 오지않고 베르노 주교는 카톨릭은 정치적 개입을 원치 않고 방하 책이라는 자체도 부족하다 하여 묵살 하였다.
여기에 존심이 상한 대원군이 옛 감정이 살아나고 척외사상과 서학금지 상 소문이 빗발쳤다.
또 당시 우리가 존중하는 청도 천주교 배척 분위기 여서 더욱 그럼.
그래서 새남터에서 7명의 선교사와 베르노 주교가 죽는다.
서문에서는 조선의 신도들이 많이 죽음.
한국 통사에는 교도 12만명이 죽었다고 기록?으나 다른 자료 종합결과 8천명 정도라함.(3년 동안)
이것으로 인해 블란서 군대를 우리에게 보내 전쟁하도록 하는 원인이다.
니델이라는 선교사가 포교들을 피해 충청도 해안으로 빠져나가 2명의 신 부는 거기남겨 두고 니델과 조선교도들은 아산에서 어선을 빌려타고 중국 산동 성의 지프라는 곳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에 도착한 조선 교도들은 커다란 블란서 군함을 보고 이것으로 조선 을 위협하여 천주교를 널리 펼치자고 말했다.
이 조선인 11명중 4명은 중국 3대 도시중 하나인 천진의 블란서 공관에 찾아가 공사인 블란서 제독(로쓰)를 만나서 한국 박해를 보고했다.
이에 분개한 블의은 청국 총리에게 보고하고 니델을 통역삼아 군함을 몰고 강화도에 침공했다.(병인양요) 이것을 계기로 전국에 조서를 내려 어린아이까지 죽임.

* 병인박해와 미국 1866년 7월 평양 대동강에 국적이 미국인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 들어왔다.(군함이 아니라 상선) - 여기에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타고 있었다.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

한강인줄 알고 대동강에서 있다 물이 빠져 남아있다 평양 관군괴 제너럴 셔먼호가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평양 시민이 모두 합류하여 상선을 불태워 모두 죽였다.

이 일이 있은후 1871년에 북경에 주지하던 미국 공사 F 로 라는 사람이 청 국의 총리 아문을 통해 조선 정부에게 셔먼호 사건을 묻게했다.

- 조선정부는 조선은 외국 상선이라 해서 다 적대한 것은 아니다. 1855년, 1865년에도 미국 함정이 황해도, 평안 연안에 표류했을때 도와주고 헤어질때 술까지 했을 정도다.
따라서 우린 의심 받을것이 없다. 단지 우리 허락없이 통상 하려고해서 불가피 했다고 밝혔다.-

미국 극동 함대 소장 로져스는 군함 4척을 이끌고(1871) 강화도 해역을 통해 광성진 까지와 싸움 벌어졌다.(한성 수비대와)

이것으로 외교 문제 발생하자 대원군은 일본에게 쇄국을 다시 재천명 했다.
why? 당시 조선은 외교를 몰랐으며 일본 외에는 설명할 곳이 없었고 일본이 다른나라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헤밀턴 피시(미국 국무 장과)는 일본 정부를 통해 조선의 쇄국 정책을 듣고 이제부터 미국과 조선관계는 일본이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
-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합방의 배경이 됨.-

cf.여기에 대해 로빈슨이라는 유명한 역사학자는 고대 로마 기독교인들이 당한 고난보다 한국의 4대박해때 고난이 더컸다고 말했다.
스테판 나일 박사는 책에서 조선 카톨릭 역사는 가장 로멘틱하고 믿지 못할정 도의 수난시대라고 말함.

* 조선 천주교의 신앙 형태
조선 천주교는 철저히 수난과 박해로 얼룩져 있고 4대 박해를 거쳐오는 동 안 피맺힌 헌신과 형극을 거치면서 신앙형태가 생겼다.

(1) 이들 교회는 수난을 통해 오면서 상류에서 하류층으로 신앙의 계층적 구 조로 변모 되었다.
(2) 중류적인 감각에 호소하고 민족 주체의식이나 고유의 민족의식에 접촉함 으로서 조선적 기독교에 언문(한글)을 중시하게 ?다.(천주교 서적이 많이 한글 로 되있다.)
(3) 1850년대 와서 천주교가 하류층으로 파고들어 격정적이고 종말적인 위기 의식으로 변모됨. 그래서 마침내 저들은 박해로 인해 종교의 내면화 지향적이다.
(4) 1919. 3. 1일에 개신교 교도들은 많이 참여했으나(33인중 16명) 천주교 교 인은 전혀잠잠.(박해에 그동안 질림)

 

제4장 한국의 protestant church


귀츨라프 : 1831년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충청도 고대도에 상 륙하여 한국어를 배우고 주기도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토마스의 무덤 :1866년 병인교난 중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순교한 토마스의 시체가 묻힌 곳이다.


이수정의 개종 :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녀 간 이수정은 그곳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성서 번역과 선교사 초빙 및 유학 생교회 설립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진은 1883년 5월 개최된 일본 전국 기독교도 대친목회에 참석한 이수정(가운데 한복입은 이)의 모습을 보여주 고 있다.


로스역 성서 : 스코틀랜드연합 장로교회의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만 주 봉천에 머물면서 한국 선교에 관심을 두었고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 기 등의 협력을 얻어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사진은 1882년에 간행된 최초의 한글성서(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 이다. 1. 시대적 상황
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가졌으나 근래에 들어 종교적으로 심한 허탈감을 느낌.
(고려조 : 불교, 조선조 :유교)
그러나 기독교가 전래되기 약간 이전은 종교적 공백기 였다.
당시 멕킨지는 당시 서울에는 종교적 행사가 없었다고 보고한다.
1866년 전쟁이 일어나고 1871년 로져스 함대와 전투를 벌이고 운양호를 몰고 온 일본군이 무력시위하여 1876년 한일 강화조약을 맺으며 계속해서 미, 일, 러시아와 수호조약을 맺음으로 당시 조선이 운둔국(세계속에서 알려지지 않 은 나라)으로 알려지기 시작함.
* 1884년 갑신 정변을 계기로 해서 망명 생활후 돌아온 일본 수신사 박영효 가 일본 요꼬하마에서 조선 선교사로온 스크렌톤 목사(감리교)를 만남.

박영효는 당시에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선교사들이 와서 교육등 문화적인 필요를 채워달라고 부탁함.
우리 재래 종교는 한물 갔다고 말함.

* 1886년 한블 수호 조약에서 조약문 속에는 교회라는 말이 들어갔다. (나중 이단어 하나 때문에 미국 선교사들이 전도할때 쉬웠다.)

2. 유럽 christian들의 도래
1) 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이 오게됨. 1627년 네델란드 사람 벨트브레 일행 3사람이 동해안에 상륙함으로 시작.
이들은 동양에서 무역하고자 네델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파선하여 경주 앞 바다에 표류. 이들은 물을 얻기 위해 표류했다가 억류되게 ?고 살아가던 도 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 났을때 같이 상륙한 2사람은 참전했다가 전사했 고 벨트브레만 남았는데 전공이 인정되어 한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다.
벨트브레가 표류한지 이십몇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 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 았고 제주도에서 14년가 억류되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 였음을 알수있다. -
2) 바실홀과 멕스웰의 내한.
1816년 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송하는 William이라는 군함이 있었는데 Amhert 사절단이 있었다. 함장은 Maxwell, Bashall 사절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여 암 홀스트 사절을 내려놓고 본국에서는 한국 서해안을 탐사 하라 는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에 한국 해안에 와서 해도를 작성했다.

이들이 마량진 앞 갈곳에 들렸을때 문정의 임무를 띤 첨사 (조대복)이 가서 물어 볼때 이 조대복에게 성경을 줌.(King James Version) - 최초로 한국 에 전달된 성경. - 바실홀은 돌아가서 책을씀.-

3) 선교 개척자들의 한국인 접근
(1) 칼 큐츠라프 -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독일의 할례대학에서 졸업. 화란 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일하기 시작함.
자바 수마트라(인도네시아)중심으로 중국인 상대로 선교 함.
(중국옻, 음식 잘적응)
자바 수마트라에서 - 마카오로 선교지 옮김 - 네델란드 선교회를 떠나 프리렌쓰 미션네리로서 활동함.

1832년에 선교의 방향을 한국의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에 황해도 - 백령도 - 원산도에 도착( 만나는 사람마다 의약품, 병고쳐줌, 전도함)

홍주 목사 이민회를 통해 왕에게 성경과 서적 보냄.
홍주 목사 서생 양씨의 도움을 얻어 최초로 성경을 번역(주기도문을)
참고: 이것은 비공식. 공식 1884년

(2) 토마스 목사(정식적으로 안수 받아 오신 목사)의 내한

큐츠라프 목사가 아산만에 온지 33년만에 온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는 스코틀랜드 사람 토마스이다(런던 선교회에서 1863년 중국 상해 선교사로 파 송되어 왔는데 1865년 중국 지프로 옮겼다.
이때 한국 선교를 자청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간다는 소리를 듣 고 통역관으로 자청. 관군이 화공을 맞고 대동강에서 죽음)
이때 배가 타던때 한문 성경을 강 언덕에 던졌는데 관군중 1나가 한권을 가지 고 있는데 조카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이영태)
나중 이늘서 박사가 성경번역시 도와 주었다.

토마스 목사를 배에서 끌어내 한강 근처에서 목을쳐 죽임.
목을 친 사람은 박춘곤인데 나중에 회계하여 1899년 세례받아 평양 초대 교인 이됨. 그후 평양은 한국 개신교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짐.

(3) 로쓰와 멕킨타이어의 고려문 전도(런던 선교회 소속)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심양)에는 한국 교회 설립에 전초 기지 역할을 했다.
특별히 우장은 최초의 한인 수세자를 배출한 곳이다.
봉천은 최초의 한국 성서가 번역된 곳.

로쓰와 멕킨타이어는 처남 매부지간(중국 우장을 거점으로 한국 선교 연구함)
마침 조선의 의주 청년 4사람이 , 한약 약장사를 위장하여 중국을 방문했다.
의주에서 강건너 50킬로미터 떨어진 고려문(중국과 물품교환 하던장소)에 갔 는데(서양 무물을 배울려는 의도로)

마침 1873년 봄 로쓰 목사가 중국인 서기를 대동하고 고려문 방문.
(이때는 조선사람이 외국사람 만나는 것도 불법일때)
여기서 의주청년들을 만남.

로쓰는 그들에게 후한 급료를 주는 대신 한국언어와 역사를 가르쳐 달라고 함.

 

제5장 한국 기독교인의 발생과 집회


이수정의 성서 : 이수정이 일본에서 한문 성서에 이두토를 달아 펴낸 <신약 성서 마가전>(1884)이다. 이수정은 이외에도 마태.누가.요한복음 및 사도행 전을 같은 식으로 펴냈으며 한글성서로 <신약마가전 복음서언희>를 냈다


최초의 견미사절단 :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비로소 기독교선교의 길이 열리게 된 셈이다. 1883년 민영익(앞줄 중앙)을 단장으로 한 견미사절 단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미감리회의 가우쳐와 만나게 되어 한국선교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고종의 선교윤허 : 미국 감리회 선교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주재 감리교 선 교사 매클레이가 1884년 6월에 내한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교육 및 의료 선 교 윤허를 받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1934년 감리교 선교 50주년 기념으로 배재학당에서 공연된 연극의 한 장면이다.


광혜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최초로 내한(1884년 9월) 한 알렌이 고종 의 윤허를 얻어 설립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오늘의 세브란스병원 전신이 되었다. (1)백홍준과 서상륜의 수세와 전도활동.
우장으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4명이 따라감.
로쓰목사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 목사님은 이들에게 보수와 문물을 줌.
처음에는 4명이 잘 안받아 들였다.
왜냐면 그때 서학은 국법으로 사학이라 하여 핍박했기 때문이다.
로쓰목사는 1874년에 한영회화라는 책을 만들었고 1875년에는 예수 성교 문답 을 만들고 1879년에는 한국지 그 역사, 생활, 습관이라는 책을 씀.
만난지 3년째 1876년에 이들 4청년이 수세를 받음(우장에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세례자

이들이 세례 받은후 로쓰와 4청년은 한국 성서 번역에 착수해서 1882년 봄에 요한, 누가복음을 번역 1883년에는 마태,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이때 의주청년 서상륜이 찾아옴. 서상륜은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친척을 따라 홍삼 장사하러 중국을 따라오가다 콜레라에 걸렸는데 맥킨타이어가 그를 살게해 줌.
그래서 이후에 성경번역을 로쓰와 4명과 함께 귀한 역할을 함.

그때 공관복음서를 번역 출판 했는데 국내에 배포하기 힘든 상태였다.
서상륜이 이것을 짊어지고 여기저기 배포함.
이때 3000권 찍어낸 것을 로쓰역이라 한다.

이것이 관과에 알려져 위험해 지자 서경조(서상륜삼춘)과 둘이서 황해도 송천 으로 위험을 옮김. 여기서 송천 솔래 교회 를 개척함(1884년- 조선 최초의 개신 교회) 1884년 또 다시 성경을 만들었는데 로쓰목사가 쪽복음 6천부를 제물포 (인천)로 보냄
-최초의 밀수품이라 칭하기도...

조선은 당시 독일사람인 멜렌 도르프라는 사람을 현재 관세청장 이라는 자리를 줘서 이사람으로 하여금 관세 업무를 맡게함.(조선은 너무 외교를 못했기 때문)
이때 멜렌 도르프가 서상륜을 불렀다.(왜냐하면 제물포에 성경 6천권이 와있어 서) 로쓰는 백홍준과 이성하에게 편지써서 멜렌 도르프에게 잘봐 달라고 부탁.

폐지/노끈 성경 (성경을 안 들키기 위해 폐지처럼 하기 위해 제본 안하고 나 두고, 제본안하고 노끈처럼 꽈서 나둔것)

참고 : 김재준 박사 아버지는유학 자였다. 성경을 분배하는 상인이 하루는 그집 에 머물렀 는데 마땅히 줄것은 없고해서 성경을 한권 놓고 갔다. 김재준 박사가 중학교때 Y. M. C. A뒤에 승동교회에 갔다가 설교에서 성경을 읽어야 위대한 사람이 되고 영어 공부 한사람치고 킹제임스 버 젼을 안읽으면 안된다고 해서 그말에 집에 돌아가 그 책을 꺼내 읽고 훌 륭한 목사님 됨.
저고리 성경 : 당시 저고리에 솜을 넣는데 아예 성경을 넣고 꼬매서 가져옴.

1884년 솔레 교회가 세워 졌는데 그 마을이 58호 밖에 안되었는데 서경조, 서 경륜 형제가 열심히 전도해서 몇 달안에 50호가 교회에 나왔다. (서경조는 나중에 세문안 교회의 목사됨)
1년후에는(1885) 교인들이 자력으로 8칸짜리(8평) 교회 지음.

(2) 일본을 통한 전도
이수정의 개종과 성서 번역
이수정은 한국에서 임오군란(군인들의 월급안에 모래석은 사건)후 일본에 사절 단으로 파견 되는데 박영효, 이수정이 사절단으로 일본으로 가게 됨. 이수정은 현판 이라는 자리에 있었는데 가서 안돌아 오게됨. 일본 동경 대학의 조선과 교수로 눌러 앉음.
쓰다 목사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집에 가서 마태복음 산상설교 벽화보고 감명 받고 영접함. 쓰다는 이수정을 야스까와 목사에게 소개한다. 1883년 4월에 마침내 야스까와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음.

일본 성서 공회 루미스 목사가 이 소식에 기뻐함.
이수정을 만나 도움을 받아 성서 번역을 시작해서 1883년 - 4복음서와 행전 번역이 나왔고 1885년 마가복음이 출간 되었다.(이수정판)
일본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들이 본국에다가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부탁. 1885년 4월에 그래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오게 되는데 (그들은 제물포 도착당시 이수정판 성경을 갖고 있었다) 오기전에 일본에서 조선 성경을 보고 기뻐했다.
참조 : 우리나라가 장로교는 미국, 세계보다 더크다.

 

제6장 한국 프로 테스탄트의 형성과 부흥


아펜젤러(좌)와 언더우드(우) : 1885년 4월 5일 함께 내한한 두 선교사는 한국 개신교회의 개척자였으며 절친한 동역자였다.


선교사들의 순회전도 : 1891년경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의 서북지방 순회 전도광경이다. 마펫.게일.베어드 등의 모습이 보인다.


매서인들의 전도 :성경과 전도지를 파는 매서인(권서인)들의 활약으로 한국 교회는 크게 발전하였다. 1890년경 서울지방에서 활약하는 매서인.


소래교회 : 1884년 황해도 장연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사진은 1900년경의 교회건물)


새문안교회 : 조직교회로서는 한국에 처음 세워진 (1887년) 교회로 정동에 서 시작되었다.


정동제일교회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로 1887년 창설되었다.


장대현교회 : 1893년 평양에 설립된 장로교회로 사진의 ?자 예배당은 1900 년 건립한 것이다.

성공회 서울대성당 : 1890년 한국선교를 시작한 영국 성공회는 서울 정동에 대성당을 설립(1891)하고 로마네스크식 건물을 마련(1926)하여 성공회 선교 의 중심으로 삼았다.


강화성공회성당 : 1893년부터 시작된 성공회의 강화. 선교 결과로 1900년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채용한 성당을 건축하였다. 기독교 토착화의 단면 을 보여주고 있다.


구세군 선교 : 구세군의 한국 개전은 1908년에 이루어졌다 .개척 선교사 호 가드(중앙의 말탄)의 전도 광경(1912년)이다.


무교동 성결교회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란 이름으로 1907년 서울 무교동 에 설립된 이 교회가 오늘의 성결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동아기독교 :침례교회의 전신인 동아기독교는 캐나다출신 선교사 펜윅(가운 데 검은 옷 입은) 에 의해 1889년에 설립되었다


일본인 교회 :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본 교회(특히 조합교회)는 한국 선교 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병합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 다. 사진은 해방전까지 일본인교회로 사용되다가 해방후 덕수교회 예배당으 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서울 정동에 소재.


배재학당 :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교육 기관으로 1885년 8월에 설립되 었다. 1887년에 건축된 교사는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서양식 벽돌 건물이 기도 했다.


이화학당 : 1886년 스크랜톤부인에 의해 시작된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교육 의 요람이 되었다. (1) 개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내한
의료와 교육 사업(우리 나라는 의료와 교육이 필요함을 느꼈다)
중국에 의료 선교하던 알렌 박사가 1884년 9월 20일에 의료 선교사로 자청해서 우리나라에 옴.
같은해 1884년 10월 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갑신정변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을 세워놓고 낙성식을 하는데 내노라 하는 우리나라 인물들이 참석했는데 수구파(엣것 지키려는, 대장은 민비의 오라비 민영익)와 개화당(개혁으로, 대장으로 박영호, 김옥균)이 있었는데 개화당 사람 이 민영익을 칼로 찔렀음. 개화당이 3일 동안 천하를 이루다가 다시 흩어짐. 이때 알렌이 민영익을 고침.(한의사 14명은 실패했는데) 이것 때문에 알렌의 인기는 치솟음.

알렌은 그래서 궁중 시의가 되어 모든 왕족, 고관을 치료함.
민영익은 알렌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10만냥을 사례함.
이돈으로 알렌은 왕립 광혜원을 설립.
이 병원의 설립 2주후 고종황제가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줌.
제중원 - 나중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명.

당시 의대가 파리 날렸는데 백정인 白哥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아들이 콜레라 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세브란스 의사들이 살려 주었다. 의사들이 그 아들을 세브란스 의사로 만듬.

1885년 4월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선교사로 오는데 문을 열어주는 도움을 주게 되는 배경은 알렌이 병원으로 정부에 호의를 준 영향이 크다.

교육
멜렌 도르프 : 영어 강습소 생김.
우리나라 조정에서 외교관, 통역관 양성 목적.
한국정부 : 미국 정부에게 현대 교육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

헐버트 1884년에 육영공원(영재를 교육하는 공적인 학원)- 최초의 미국식 학교 인데 주로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다님.후에 나라에서 이런 학원을 닫게하자 선 교사들이 교육에 직접뜀.


(2) 선교 활동과 조직 교회의 출현
1885년 4월 5일(부활절)
알렌의 뒤를 이어 호레스 언더우드와 아펜 젤러가 우리나라에 도착함.(그때는 당장 전도할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1887년에 언더우드가 솔래 교회에 가서 7명의 신도에게 세례를베품. 1887년 9 월 27일에 언드우드가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림.(14명과 같이)- 이교회가 세문안 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10월 9일에 아펜젤러는 또 언더우드 처럼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정 동 제일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아펜젤러는 정동 자택에서 교회만 아니라 학교를 세움(2명으로시작) - 1주년이 되는때에 고종황제께서 배재학당(인재를 배출하는)이라는 이름을 줌.

(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들어온후 들어온 선교사) 스크렌턴(감리교 의료 선교 사)의 어머니 미세스 스크렌턴이 자기 사랑방에서 정부 고관 부인 2사람을 데 리고 학교 시작- 이화여대 전신(1885)

1886년에 고종 황비의 아내 민비가 이름을 줬는데 이화학당이라 했다.

이런 학교들에는 학생이 별로 없었는데 그 이유는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가 많 았다. 당시 선교사들은 모유보다 우유를 먹이는등 자기들도 먹고(악성 우유통 루 머번짐) 광이문(서소문)밖에 콜레라 환자들을 버렸는데 스크렌턴의 모친이 그중 1명의 소녀를 데리고 와서 아들이 고쳐서 이 학교 3회 졸업 소녀가 된다.

1886년 정동의 언더우드 사랑방에서 고아원 스타일의 학교를 시작했는데 1891 년에 와서 예수교 학교로 바뀌고 1905년에 경신 중고등 학교로 바뀜.- 나중에 정신 여자 중고등학교로 바뀜.

북한에는 숭실 전문학교, 숭의 전문 학교, 광성 중고등학교.

1892년에는 미구 남 장로교에서 파송한 레이놀즈와 6명의 선교사가 입국해 전 라도 쪽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예수병원"을 설립했다.

1893년 카나다 연합교회에서 와서 함경도 선교함.

동년 동양 선교회가 들어와 년 성결교회를 시작

동년은 영국 구세군이 들어와 선교 시작

1903년에서 1905년사이에 하와이로 이민가는 사람이 늘었다.(당시 7300명 정 도였는데 이중 윤은현, 손흥조가 일본에 들렸다가 안식교 전도사를 만나서 돌 아와 한국에서 안식교가 시작된다.)


(3) 성서와 성례전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 성서와 관련하여 출발했다고 얘기할수 있다.
1885년 4월에 인천에 처음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손에는 이미 한국어 로 번역된 성서가 있었다. 그당시 사람들은 성서 공부에 관한 열정이 대단하였 다. 한 선교사 왈 " 이세상의 모든 성서가 불타 없어져도 한국인 5명만 모이면 성서를 재구 성할 수 있을 것이다 "
교회란?
루터 :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어야 존재 가능 하다고.
칼빈 :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제 4부에 보면 루터와 마찬가지로 말씀과 성례전의 중요성을 얘기함.
우리 나라는 말씀에 대한 열정은 컸지만 성례전에 대한 의식은 약하였다. 오늘 날도 그런 경향이 있다.

* 교회에서의 말씀과 성례전은 균형 울 이뤄야 한다.


4. 선교지역의 분할과 선교 정책
한국에는 많은 선교회가 조직됨.
장로교 - 북 장로교 감리교 - 북 감리교
남 장로교 남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이러한 많은 교단에서 선교지 분할 정책을 쓰게됨.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선교. 이 외에 이미 선교가 시작된 곳은 북장로교 가 맡음. 부산(경상도)은 호주 장로교,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가 맡음.
1905년 을사보호 조약 체결. 장로교와 감리교 간에도 지역 조정이 있었다.
연변 중심의 지역은 북감리교, 평북 지역은 북장로교.
1908년 남감리교는 강원 북부 3분의 2와 경기도 서울 이북을 장로교로부터 모 두 떠맡게 됨. 북장로교는 강원 남부 3분의 1, 서울 동부, 서울의 남감리교 지역을 다 떠 맡음.
* 선교 정책을 보면,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 사상은 보수적, 경건주의자들 이었다.
저들이 한국에 왔을 당시 한국은 - 샤머니즘 : 무지함에서 생김.
유교 : 형식주의, 허례허식
불교 : 미신적임.
- 위의 3가지의 사상에 어느정도 젖어 있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중국에 주재하던 선교사 John Nevius를 초청하여(1890년) 그들 과 함께 지내면서 선교사업을 위한 원칙을 세웠다. -
'삼자(三自)정책'
1)Self-propagation 자력전도 : 스스로 전도하게 한다.
2)Self-goverment 자치제도 : 스스로가 교회를 관리, 운영하게 한다. 자치
제도 마련.
3)Self-suport 자치자립 : 자급목회를 하게 한다.

(5). 1907년대 부흥운동
1882년 임오군란(직업군의 군량미 부정 사건)
1884년 갑신정변(개혁파와 수구파간의 구테타)
1895년 청,일 전쟁
1905년 러,일 전쟁

이러한 일로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망이 없었고 의지할것도 없었다. 정치, 경 제, 도덕, 정신적으로 절망 가운데 빠짐. 그래서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95년 서울에 주재하던 선교사가 "한국의 실정을 변해가며 일반 백성들 사이 에 각성의 기미가 보인다"고 보고함.
1895년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가 530명 1896년에는 3276명, 1900년대 와서 는 7690명으로 늘어났다.
<교회성장 요인들> - 당시 황실 고위층과 선교사들 간에 친밀한 관계였다. 1895년 일본 자객에 의해서 민비가 살해되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피신을 하였는데 그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였지만 선교사들의 말만은 믿었다. 한국에는 미국인들이 250명이 있었는데 그 중 절반 정도가 선교사였다. 선교사들은 선교 사역 뿐 아니라 조선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그래서 일본인들 에게는 선교사들이 눈에 가시였다.

당시 배제학당의 교사였던 이승만을 비롯, 서재필, 윤치호를 중심으로 해서 배 제학당 안에 소위 '협성회'를 조직해서 애국운동을 벌였다.이 협성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청년 운동의 시발이었다. 그러나 좀더 체계적인 것은 1893년 10월 '황성 기독교 청년회'가 조직됨.(오늘날의 Y.M.C.A가 됨) 서울 종로 2가에 '황성 기 독교 청년회'는 3층 양옥을 건립하고 황태자(순종)가 여기에 참석해 낙성식을 치 뤘다. 황제를 비롯해 이또오 히로부미와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 었다. 이 청년회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 체육, 공업 교육에도 영향을 끼쳤다. 1896년에 서재필은 독립 신문을 발간한다. 그는 그 신문을 통해 대중계몽에 성 공을 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중국 사신이 오면 환영하던 모화관을 없애고 그곳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사상을 고취시킨다.
또한 서재필, 윤치호, 홍정우등은 주일마다 집회를 열어 자유사상과 민주주의를 고취시킴. 우국열사들이 정부의 부정부패를 공격하자 저들은 심한 불쾌감을 갖 고 마침내 1898년 12월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선교사들은 감옥을 방문해 그들에게 전도를 해서 1901년 3월에 17명중에 12사 람이 함께 세례를 받는다.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문서 전도와 문예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개화 운동에 힘쓰게 되는데 1899년 언더우드와 뜻있는 사람들이 '성교서회'를 건립 (후에 기독교 서회로 바뀜)하여 正音(한글)으로 문서를 발행한다. 1903년에는 이 기독교서회를 통한 출판부수가 25만부나 되었다. 마침내 1907년 우리나라에서 부흥회가 일어났다. 이 부흥회가 일어나기전 1903년에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 인 하디가 기도하던 중 영감을 받았다고 그 체험을 동료선교사들에게 간증을 했는데 이것이 평양선교사들에게도 퍼져 그 이후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가 함 께 모여 합동 집회를 연다. 그래서 이들은 마침내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집회를 연다. 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은혜를 사모한다. 블레오 선교사가 고전 12:27의 말씀을 읽자 불이 붙어서 - 길선주 장로의 간 증을 통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남.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상을 바꿔 놓았다. 인격적, 소박한, 공동체적신앙 으로 바뀌어 졌다.

1900년대 영국 웨일즈 지방의 탄광 - 무기력함과 무희망적인 삶을 살던 광부들 -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짐. - 180도 달라지는 그들의 삶이 일이 미국을 통해 우 리나라에 들어와 1907년 부흥운동을 갖게함.


(6). 교회 행정 기구의 설정
1907년 9월 평양에서 장로교 독노회 창설
그리고 이 때 평양 신학교에서 배출된 7 의 목사가 안수를 받는다.(서경조, 이기 풍, 길선주,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한승백)
1907년 - 1910년 사이에 한국 교회는 일본, 중국, 만주, 시베리아, 미국 등에 선 교사를 파송한다. 그후 100명 구령운동이 일어남.
감리교는 1901년 김창식과 김기방이 안수를 받는다. 감리교는 처음부터 남,북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들이 독자적인 노선을 걷다가 1907년에 합동해서 하나의 조선 감리교를 세우고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 신학교 를 세움. - '협성 신학교' 그 후에 와서 1930년대에 기독교 조선 감리회라 이름 을 바꿈.

 

제7장 일제 치하에서의 교회


옥중개종 :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민족운동에서 적극 참여하였다. 사진은 독 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된 민족지도자들인데 1907년 경 이들은 대거 기독교로 개종하여 기독교의 기도자들이 되었다.


문용기의사 기념비 : 3.1운동때 이리 만세시위를 주동하면서 순국한 기독교 인 문용기의 기념비. 이리 소재. 1. 십자가를 걸머진 교회
우리나라는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기독교의 교리 - 유일신 사상과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 문에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귀하게 여겼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일제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더 탄압했다.
그 당시 교회는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강력한 조직체가 되었고 이를 눈치챈 일 제는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음모를 꾸밈.
(기독교 말살 정책) - 1910년 12월 27일 일본의 데라우찌 총독이 압록강 철교를 놓고 그 준공식에 참석하러 갔다. 그곳에 가던 기차는 선천역에 한 번 정지하게 된다. 헌데 이 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데라우찌를 암살한 음모를 꾸몄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많은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당시 인구 2000만명중 크리스챤이 18만명이 넘었다.
700명을 체포하고 그 가운데서 105인을 유죄 판결을 내렸다. 105인은 여러차례 감형으로 형기를 마치고 나오게 된다.
105인중 9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저들이 평양역에 도착했을 때 9000명이 나와서 그들을 환영했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 운동.
1918년 파리에서 세계 평화 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 결 주의'를 내세웠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왜 우리가 일제의 압력 하에 살아야 하는가?' 라는 회의를 품게됨.
그후 1년이 지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33인중 16명이 크리스챤이었 다. 대부분 기독교인이 앞장섰고 이 운동은 비폭력 무저항 주의로 기독교 정신 에 의해 진행되었다. 일본의 헌병과 경찰들은 기독교인들을 투옥시키고, 체포, 교회를 파괴시킴. 이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4월 15일 12시경 수원 부근 제암리 교회에 일본헌병이 몰려와 교민들을 모이게 하고 창문에 못을 박고 교회 주변에 불을 지르고 나오려는 사람들은 칼로 찌르고 죽였다. 많은 교회가 이와 같은 일을 당함. 1919년 일본 보고에 의하면 파괴된 교회가 17개, 일부 파괴된 교회는24개, 그외에 교회에 큰 손해를 본 곳이 41개, 교회 재산 피해가 3만불이 었다. 장로교 보고에 의해 체포된 목사, 장로수가 134명 교인수가 3천 8백 4명, 사살된 신도수가 47명, 감리교 기타 다른 교회의 신도들을 합친수는 타 종교의 신도 숫자를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이일을 통해 교회는 많은 피해를 봤지만 또 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3. 선교사의 관여도.
일제는 독립운동 배후에 선교사들이 관여하고, 조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조선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평양 숭실학교에 모우리 모펫이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일제가 그를 잡아갔다. 피신하는 학생들을 은둔 시켜 준 죄였다. 호주에서 온 선교사들도 독립운동 시위에 동향을 미국 선교회 에 보고하고 총독과 일제의 잔악상을 세계에 알렸다.


제8장 한국 교회의 수난사


십자가 처형 : 일제는 민족운동지도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하였다. 사진은 철 도를 파괴한 독립투사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장면이다.


신사참배 : 일본에 가서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 (1943 년).


주기철목사의 묘 :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중 순교한(1944년)주기철 목사의 묘. 서울 국립묘지 소재.

철수하는 선교사들 :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선교사들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출옥성도 : 8.15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이 평양의 주기철 목 사 사택에 모였다.


출옥성도환영회 : 해방후 1945년 가을 서울남산 신궁터에서 출옥성도 환영회가 열렸다.


통일교 : 문선명의 통일교도 그 세력을 크게 확장시켜 나갔다.사진은 1963년에 서울에서 거행된 124쌍 합동 결혼식. 1. 신사참배의 강요와 박해
* 신사참배는 일본천왕과 전쟁 영웅들에 대한 경배이다.
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국 본토 침략 전쟁 :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내선 일체' 즉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될수 있는 방법은 신사참배라고 생각하였다.
평양부터 점령해서 신사참배 시작 1935년 11월 평안남도 일본 지사 야스다께는 도내에 있는 각종학교장 회의를 소집하고 모든 학교는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고 명령함. 이 회의에 참석했던 숭실전문 학교 교장 Mccune은 한국인 목사, 장로를 소집하고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단호한 결의를 하게된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야스다께는 Muccne를 면직시키고 미국으로 추방시킴. 그후에도 일제는 대대적인 신사참배를 강요함. 미션 스쿨에 대해 많은 간섭을 하고 교단 총회 소집도 경찰의 허락 없이는 소집 할 수 없었고 예배도 일본 국회에서 일본 종교 단체법이 통과하게 된다.
신사란? 종교의 범위를 초월한 것.
신도란? 절대의 도로써 모든 일본 국민은 반드시 신사 참배를 해야하는 것. 이 에 순종치 않는 자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함.

(이 법에 대한 반응) - 1. 로마 카톨릭 : 1918년 까지도 '나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입장에서 반대했는데, 1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애국 적 행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참배를 허락함.
2. 감리교 : 지도자의 대부분이 신사 참배가 국가적 의식이라는 것에 동의함. - 감리교 존속 가는케 함.
3. 장로교 :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1938년 9월 9일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여기에 참석한 사 람들 모두에게 압력을 가해 신사참배를 합법화하게 함.
주기철, 이기선등은 신사참배 반대. 일본 경찰은 총재를 만나 회유책을 쓰고 예 배당 분위기는 일본 경찰이 안팎으로 감시하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193명이 이 총회에 참석했는데 결론은 신사 참배를 하는 것으로 끝남. 그 후에 도 일제는 계속 교활한 방법을 씀. 평양신학교 패쇄, 2천여 신도 투옥, 50여 명의 성직자 순교.
각 교단이 일제에 굴복한 다음 한국 교회 전체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하는 양태를 보여줌.

전체 교회의 88%가 교회에다 일장기를 게양하는 탑을 세우고 일본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교회는 96%였고 동방 요배 실시 교회는 96%, 황국 시민 재창을 93%가 했고 예장은 애국 헌납 기성회를 조직해 그 기성회 이름으로 성금을 모아 일본 육군 비행기를 사주고, 총을 사주었으며, 교회의 종 1540개를 바쳤 다.


2. 일제의 단말마적 교회 탄압
1895년 청, 일 전쟁
1905년 러,일 전쟁
1930년 만주사변
1936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
일본은 여러차례 승리로 기세 등등해짐.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샌드위치'였 기 때문에 많은 피해를 봄. 이러한 때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 저항하면 투옥. 구 약의 모세 5경과 요한 계시록을 그들의 국시사상에 어긋남을 알고 읽지도, 가르 치지도 못하게 함. 사도신조 중에 '저리로써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라 라'를 뺌. 찬송가도 거슬리는 것 모두 빼버리고 예배 중에도 천와에게 목례하고, 일장기를 달고, 목사에게 일본 군복을 입도록 함.
1943년에는 주일 오후 예배와 삼일 예배를 막음. 침례교는 재림사상이 강한데 1942년 전국 모든 침례교를 폐쇄시킴. 성결교도 마찬가지로 재림 사상 때문에 1943에 문을 닫게함. 그래서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 다른 교단으로 옮김. 많은 성 결교 침례교 성직자들이 체포, 구금됨.
일제는 그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 탄압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3. 교회 분열의 징조
1930년대부터 분열의 징조가 생김.
* 징조는 지방적 요소와 신학적 요소
장로교 : 평양을 중심으로 관서지방이 장로교가 많았다. 이곳은 신학적으로 보 수적인 경향이었다.
1911년 연희전문학교 보조문제로 총회를 열었는데 평양 중심의 교회들은 이 학 교가 남쪽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보조를 반대했다.
1934년에 와서는 북쪽에서 남쪽의 총재들에게 진보 또는 근대주의자들이라고 비난 이에 맞서 남쪽은 북쪽교회에게 교회 전제주의자들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당시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은 신학의 깊이와 넓이가 달랐다.
이들은 너무나도 근본적인 한국신학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 그래서 평양 신 학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을 싫어함. 평양신학교는 같은 교단의 사 람이라도 유학생은 별과에 들어가 공부를 시킨후 목사로 만들었다.

감리교 : 1930대에 제 1차 총회를 소집하고 여기서 채택한 것이 "기도교의 근 본원리가 시대를 따라 다른 형식으로 표명되었고... 우리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교리적 체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 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그를 따르는 다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 회 조건은 신학적이기 보다는 도덕적이요 신령적인 면을 강조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감리교는 좀 더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신학교의 당시 교장이었던 박형용박사와 그리고 숭인 상업학교의 김재준 박사는 그 당시 신학논쟁의 거두들이었다. 박형용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극 보수적인 신학교수의 영향을 받아 성서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의 교육을 받았다. 김재준은 같은 곳에서 공부하였는데 박씨와는 달리 자유주의적이었다. 그는 한 국교회 신학의 부재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 논쟁이 계속되다가 1934년과 1935년 장로교 총회의 문제로 대두함.
김영주 : 모세 5경 저작설 부인 (박형용은 이에게, 스스로 목사됨을 거절하는 것 이라 함)
김춘배 : 여권운동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함.(박씨는 이를 징계에 처함이 옳다고 했다)

1935년 Abingdon 주석이 나왔을 때 감리교의 류형기 감독이 그것을 편집, 번역 하였다. 이 일을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이 같이 했는데 이 책이 아주 자유주 의적이어서 번역한 자들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하고 Abingdon주석을 교인들로 하 여금 사지도, 보지도 못하게 함. 점점 신학적으로 개방적이 되어갔다.


4. 교회내의 난기류
1920년대 부터 지적인 변화, 경제적 빈곤, 일제의 탄압심화등으로 목회자 양 성이 쉽지 않았다.
그당시 소설가 이광수 왈 " 기독교는 이성을 경멸, 종교외의 과학, 모든 다른 사상르 경시하는 풍조를 낳아서 현세를 무시하고 죽어서 천당만 가려고 든다"라 고 혹평. 그 때 사회는 소망이 없었으므로 목사들은 재림, 즉 이세상 보다는 저 세상을 바라는 설교를 했다.
이러한 때 신비주의자들 등장 - 소망을 심어줌.
1.이용도 목사 : 협성신학교 졸업. 감리교 목사. 교파 초월 부흥사역. 각교회를 돌아다니며 민족의 고난에 울었고 교회 형식주의를 비판. 전형적인 경건주의자 의 모델. 진리는 말에 있지않고 삶에 있다고함.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곧 삶이 다. 믿음보다 사랑에 진리가 있다. 요한 복음서를 제일로 생각. 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방했고 심지어는 사탄, 불경, 사회주의 책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 신학과 기독교 교리를 공격함으로서 신비주의 공통의 오류에 빠짐. 그의 절대적인 사랑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사랑의 융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혈관적 연관을 잇는다고 믿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여김.

이때 한국교회는 이용도 목사에게 금종령을 내렸고 평양 장로교에서는 그를 부 흥사로 초청하지 못하도록 함. 그리고 그가 속해있던 감리교는 1933년 그에게 휴직 처분함. 얼마후 결핵으로 사망.

2. 길선주 목사 : 계시록 1만 2백번을 독파. 신구약 성서를 30독. 절망과 고통 가운데 헤매는 사람들에게 주예수의 강림에 대해 말하고 설교의 주제는 항상 '마라나타'였다. 그에 의해 세례받은 자는 3천명 또한 그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 로 돌아온 자가 7만을 헤아렸다.

3. 황국주 : 백일 기도 중에 은혜의 체험을 했다고 함.
그는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차려입고 예수그리스도와 비슷한 풍채라 고 하기도 함.예수 그리스도와 영 육간의 합일이 이루어져 자기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왔고, 자기 목소리는 예수의 목소리로 변했다고 했다. 그 가 가는 곳마다 그를 보고 모여드는 신자가 많았다. 심지어는 가정을 버리고 따 라 다니던 유부녀들도 있었다. 그가 서울역에 왔을 때에는 전국 교회가 떠들석 했다. 그는 삼각산에 가서 기도원을 차리고 그곳에서 몸가름, 피가름을 하였다. 황국주가 죽은 후 그의 피가름 교리가 통리교로 이어짐.

 

제8장 한국 교회의 수난사


기독교도연맹의 박해 : 이북의 공산정권은 기독교도연맹을 앞세워 공 산당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교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기독교도연맹에 반 대한 박봉옥 전도사에게 전달된 지시문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재건운동 : 1945년 11월 평북 선천에서 열린 평북 목사수양대회에서 한국교회 재건원칙이 제시되었고 이로써 재건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6.25사변 : 6.25사변중 한국교회는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었다. 사진은 퇴각하던 공산군에 의해 학살된 우익인사들이 시체들이다.


포로선교 : 아군에 체포된 공산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피어스 박사(1952)


선명회합창단 : 전쟁고아들로 이루어진 선명회합창단은 음악을 통한 선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수족절단자복구회 : 토레이 선교사에 의해 대전에 설립된 것으로 전쟁 후 지체부자유자에 대한 사회 선교의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부활절연합예배 : 1953년 수복된 서울의 남산 옛 신궁터에서 초교파적 으로 부활절연합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남북통일기원예배 : 1955년 해방 10주년 기념 및 남북통일원 연합예배 에서 한경직 목사 통역으로 피어슨 박사가 설교하고 있다.


장로교 분열 : 1959년 예장 44회 총회는 NAE측과 에큐메니칼측으로 나 뉘고 말았다. 1. 해방과 교회 재건
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그동안 많은 수난을 겪은 기독교인들은 남다 른 감격을느겼다. 후에 남, 북 분단의 아픔을 가져오기도 함.
(교회 재건 운동)
1)장로교
교회 재건에 있어 선두를 달린 곳이 평양 중심의 관서지방이다.
일제 탄압에 의해서 투옥된 교역자 중 50명이 순교함. 평양 감옥에서 20명이 출옥하고 그동안 지하에 숨어있던 자들이 나와 교회 재건에 힘쓴 곳도 평양이 다. 이기선 목사를 중심으로 한 출옥성도들은 나오자마자 가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던 평양의 삼정현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갖고 교회 재건에 관한 협의를 함. 그리고 9월 20일 ' 교회 재건 5대 원칙'을 발 표함. 1.)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 신사에 참배 해 죄를 졌으니 통회 자복후 사역에 임할 것.
2) 권징을 자책하고 2개월 간 휴직할 것 등등...
그후 11월 14일에 선천 월곡교회에서 평북 5개 노회의 교직자 연합수련회가 있었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홍택기 목사 등 일제때 신사참배를 했던 많은 목사 들이 5대 원칙에 대해 반발하고 일어섰다. 그래서 출옥성도들과 싸움이 벌어졌 다. 교회안에 나기류가 생김. 같은 해 12월 초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북한 5개도 연합회를 조직하고 북한 교회와 남한 교회의 교류를 위해 북한 교회에서 이인식 목사와 김양선 목사를 서울에 파송함. 남한 교회에서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 상도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일어남. 이곳은 주기철 목사님의 출생?지이고 최상 림, 손양원, 한상동,등 이들의 영향력 때문에 부산이 중심지가 됨. 부산 진교회에 서 회의를 소집하고 경남 재건 노회를 조직함.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선출.

2) 감리교
재건 감리교회
부흥 감리교회 - 둘로 나뉨.
감리교도 해방과 함께 9월 8일 남부 교단 대회가 소집됨. 이 대회에서 변홍규, 이규갑, 윤성범, 나사행, 이봉구 목사들이 불법성을 지적하며 반기를 들었다. 왜냐하면 이 조직을 한 사람들이 일제 시대때 굴복하고 그들에게 동조했던 자 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건 감리회와 부흥감리화가 나옴. 이 두파들은 서로가 자기측 사람이 감독이 되길 원하고 서로 양보하지 못함.
힙동안이 나옴 - 일제 때 신사참배한 사람은 간부나 중요한 요직에서 제외시키 고 두 회에서 동수로 선출하여 간부를 뽑는다. 투표가 끝난 후 결과는 부흥 감리회에서 절대적인 숫자가 나오서 이에 불만을 품은 재건 측은 문제를 제기 또다시 갈라짐. 이때 평신도들이 양 파의 합력을 원하여 노력한 결과 분여? 위 기를 극복하고 다시 하나가 되어 감리교의 기틀을 마련함. 그 후로 평신도의 발언권이 높아짐.

3) 성결교
해방전 성결교는 약 5만 성도가 있었다. 그런데 성결교 교리중 4중 복음이라는 것(성결, 신유, 중생, 재림)이 있는데 이 중 재림에 관한 문제 때문에 성결교가 문을 닫았었다. 해방과 함께 폐쇄되었던 성결교회가 다시 문을 열었다.


2. 북한에서의 교회의 참화
해방되던해 11월 16일 , 북한의 많은 뜻 있는 기독교도들이 보다 더 좋은나라 를 건설하기 위해 기독교 민주당을 설립했는데 윤영하, 한경직 목사가 중심 인 물이었다. 공산당은 이것을 미리 알고 기독교 민주당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 창 당 대회에서 장로 1명을 살해했고 부근에 있는 교회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에 충격 받은 신의주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러시아의 전투기와 탱크를 동원해 학생들을 저지해 많은 학생들이 수난을 당함. (신의주 학생의거 사건) 2년이 지 난 1947년 11월 북한 평양에서 김화시 목사와 고한규 장로가 있었는데, 이들 이 기독교 자유당을 조직하려 했다. 그런데 역시 이들도 창당 대회 하는날 40여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 투옥되거나 러시아로 유배됨. 1948년 북한에서도 공 산 국가를 위해서 주의를 기해 선거일을 정하고 투표를 하는데 모든 기독교인 들을 선거에 동원 시킴. 여기에 반길를 들고 북한 기독교도의 입장을 발표하였 다.
1) 주일에는 어떠한 행사에도 불참한다.
2) 기독교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
3) 교회당은 예배 외의 어떠한 것에도 사용을 불허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구금된다. 마침내 50년 6.25사변 이 일어날 때 북한은 남침 준비를 끝내고 기독교인들을 먼저 검거해 투옥시켰 다. 이 때 기독교인들을 찾아볼수 없도록 만들었다.


3. 민족 분열과 교회의 분열
공산당에 대항해 투쟁하던 목사들 순교.
6.25때 여순 반란사건시 두아들을 잃은 손양원 목사, 김익두, 남궁 혁, 송창근 목 사,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이 납북됨.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고 손실된 교회 수가 장로교 152개, 감리교 84개, 성결교 27개 구세군이 4개 교회였고 순교자도 많았다.
6.25때 서울은 북괴에 동조하는 교인들이 몇 있었다. 경동교회에 출석하는 김욱 이라는 자는 기독교 민주 동맹을 Y.M.C.A 건물에 걸고 김일성이 서울에 왔 을 때 환영식을 함. 6.25가 나기전 기독교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던 최근식 목사 는 교도소에서 나와 목사들을 고발 해 북괴군에 의해 끌려가도록 했다.
1950년 4월 경남 부산을 중심으로 해서 장로교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있었다. 6.25가 터져서 모든 지방이 공산화가 되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부산으로 모임. 1951년 5월 당시에 정기 총회를 소집했으나, 이 때 출옥성도들과 일제 때 영창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들간에 의견 대립이 생김.
비고려파와 고려파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비 고려파가 고려파 장로교에서 갈라져 나감. 싸움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같은 해 7월 서로 무서운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고려파는 그 당시 국회의원 22명의 명의로 비 고려파를 용공단체라고 비 난함.
1953년 기장과 예장이 갈라짐. 조선신학교의 김재준목사의 신학이 신신학 이라고 해서 그 문제를 총회에 제출했고 신학생 51명이 학교를 나가 장신대를 세움. 1953년 정기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목사 안수를 예장에서 받을수 없다고 해서 갈라짐.
1958년에 같은 예장에서 통합, 합동으로 나뉘게 됨. 학교 부지 관계 때문에, 부정이 있었음을 들고 일어나서 박형용 박사를 지지하 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자들로 각각 나뉘게 되었다. 1977년 그 후 합동에서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짐 그후 사분오열의 분열이 이어져 많은 교단이 생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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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부흥운동

 

 

 

정의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부흥회와 그에 따른 한국 교회의 영적 각성운동.

개설

원산 부흥운동은 좁은 의미로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로버트 하디(R. A. Hardie, 1865∼1949)가 인도한 사경회와 부흥회를 지칭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1903년 하디 부흥회 이후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속된 한국 교회 부흥운동을 지칭한다.

역사적 배경

원산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시기(1903∼1906년)는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지 20년이 되었지만, 기대했던 선교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고, 중국 의화단사건(1900년) 여파로 선교사 배척 분위기가 확산되어 선교사들이 실망과 위기를 느끼던 때였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도 신축년 대기근(1901년) 이후 민중의 경제적 파탄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러일전쟁(1904년)을 앞두고 정치적 불안도 가중되던 상황이었다. 이처럼 정치사회적 불안과 신앙적 위기가 점증되던 시기에 원산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경과

원산 부흥운동은 1903년 여름 중국에서 사역하다 한국을 방문한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사 화이트(M. C. White)가 원산에서 사역하던 남감리회 여선교사 캐롤(A. Carroll)과 노울즈(M. Knowles), 하운셀(J. Hounshell), 그리고 캐나다장로회 여선교사 매컬리(I. H. McCully) 등과 함께 한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8월 24일부터 한 주간 동안 사경회를 갖기로 하고, 하디에게 성경공부 인도를 부탁하였다. 당시 한국 선교 13년 차였던 하디는 선교 실적 부진으로 인한 실망감과 피로감으로 지쳐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사경회를 인도하는 중 하디는 선교 실패와 부진의 원인이 밖에 있지 않고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따르지 않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는 순간 ‘성령 충만’과 믿음의 확신이 생겼다. 당시 하디와 함께 집회에 참석했던 선교사들도 같은 경험을 하였다.

선교사 사경회를 마친 다음 주일예배 때 하디는 한국인 회중 앞에서 자신의 교만과 실수를 공개적으로 자복하였고, 그것이 ‘회개의 본’이 되어 한국 교인들의 공개 자백을 이끌어냈다. 9월 초 하디가 인도한 원산교회 직원 부흥회, 10월에 원산을 방문한 미국 스칸디나비아선교회 지도자 프랜슨(F. Franson)이 인도한 부흥회, 그리고 프랜슨 부흥회 직후 하디가 인도한 특별 부흥회에서도 교인들의 공개적 자복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교인들이 자복한 죄는 주로 횡령과 절도, 간음, 강간, 위선, 미움, 증오, 질투와 같은 ‘윤리적’ 내용이었다. 그리고 미워하고 증오했던 교인들 사이에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졌고, 과거에 훔치거나 횡령한 것을 보상하거나 배상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김화 새술막교회 윤성근(일명 윤승근) 전도사는 원산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과거(기독교인이 되기 전) 인천주전소에 근무하던 시절 되돌려주어야 했던 회사(정부) 돈을 사용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 돈을 마련해 탁지부에 되돌려 줌으로 ‘양심전’(良心錢)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런 공개 자복과 윤리적 갱신이 원산 부흥운동의 특징적 현상이 되었다.

이렇게 원산에서 시작된 하디의 부흥운동는 1904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하디는 1904년 1월에 개성 지방 사경회를 인도하였고, 2월에 김화 새술막교회와 지경터교회, 4월에 서울 자골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여기서도 공개 자복 현상이 나타났다. 이때까지 부흥의 범위는 하디가 속한 남감리회 소속 교회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해 9월 서울 정동제일교회 부흥회를 시작으로 10월 평양 지방, 11월 인천 지방에서 연합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이곳은 교단이 다른 미감리회 구역이었다. 하디는 인천 지방 연합부흥회를 마치고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가 없는 사이 크램(W. G. Cram)과 캐롤, 하운셀 등 다른 남감리회 선교사들이 1905년 개성과 원산, 서울 등지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1905년 9월 장로교와 감리교 6개 선교부가 조직한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에서는 매년 연초에 각 지방별로 실시하는 사경회를 연합부흥회로 진행하기로 결의하였고, 그에 따라 1906년 1∼2월 서울과 원산, 평양 등지에서 초교파 연합 부흥회가 개최되어 원산부흥운동의 열기를 이어나갔다.

1906년 8월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귀환한 하디는 곧바로 평양에 가서 선교사 연합사경회를 인도하였는데, 거기 참석했던 블레어(W. N. Blair)와 그레이엄 리(Graham Lee) 등 장로교 선교사들이 ‘성령 충만’을 경험했다. 그리고 한 달 후 미국 부흥운동 지도자 존스턴(H. A. Johnston)이 평양을 방문해서 영국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소식을 전함으로 평양의 선교사와 한국 교인들은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개월 기도로 준비한 끝에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와 숭덕학교에서 개최된 연합사경회에서 교인들이 공개적으로 통회 자복하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초기 한국기독교사에 큰 획을 긋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의의와 평가

원산 부흥운동의 역사적, 종교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선교사의 회개로 시작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회개로 이어져 교인들이 회개와 중생(거듭남), 성화(성결)로 이루어지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체득하였다.

둘째, 처음에는 남감리회 선교구역인 원산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 미감리회와 장로회 선교구역으로 확산되어 초교파 연합운동을 촉진시켰다.

셋째, 회개한 기독교인들의 ‘양심전’ 같은 윤리적 갱신이 이루어지고,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같은 ‘토착적’ 신앙양태가 나타나면서 선교사들이 소개한 기독교가 한국의 토착 교회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원산 부흥운동이 전개된 시기는 러일전쟁(1904년)과 을사5조약 체결(1905년)로 인한 민족적 위기 상황이었는데, 기독교인들이 정치·사회적 현실을 외면하고, ‘초월적’ 신앙에만 집착함으로써 교회의 ‘비정치화’(非政治化)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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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이수정의 성서 번역

 

 

 

 

이수정이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버한 사람은 누구 보다도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성서공회 총무인 헨리 루미스(Henry Loomis)목사이었다. 기독교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나라 사 람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 용감히 신자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외 국선교사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루미스목사는 즉시 이수정을 방문하여 성서를 한글로 번역 해달라고부 탁하였다. 이수정은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성서 번역에 착수하게 되 었으며 세례받은지 겨우 두달만에 한문성서에 토를 달은 소위 [현토한 한신약성서]의 작성을 완료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마가복음부터의 성 서한글 번역을 시작하였으며, 현토한한신약성서는 1884년에 출판되었 고 마가복음도 같은 해에 요꼬하마에서 출판되었다.

 

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이수정은 상당한 경제적 난관에 봉 착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미국인 선교사나 일본인 목 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다. 가족들이 그 소식을 듣고 일본으로 건너갔 다. 동생은 형에게 일금 만량을 전달하면서 귀국하라고 권유하였다.

이수정은 그때 [나는 돈이 필요하지 않다. 또 돌아가지 않겠다. 나는 동포를 위하여 철도나 전신기나 기선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하였으니 까]라는 말로써 성서번역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귀국을 거절하였다. 이수정은 일본을 다녀와 자신에게 개화사상을 일깨워 준 이동인에게 전도하여 불교로부터 기독교로 개종케 하였으며 성서번역 사업을 위한 협조자가 되게 하였다.

 

또한 김옥균이가 기독교의 한국 도입을 정부에 진언한 일에 있어서도 이수정이가 배후에서 크게 노력한 사실을 잊어 서는 안될 것이다.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884,Vol, 1,p.336) 이수정이가 일본에 체류하면서 성서번역과 교회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기간에 국내에서는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정변은 삼일 천하로 실패하였고 개혁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일본 동 경에는 유학생들이 적지않게 있어 이들은 자연히 망명인사들과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못마땅히 여긴 본국정부에서는 유학생 전원에게 소환령을 내렸다. 유학생 20명중 3명은 곧 귀환하였으나 나 머지 사람들은 귀국을 불응하였다. 정부에서는 유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안종수와 박준우를 쇄환사로 하여 일본에 특파하였다. 이수정은 그때 다른 유학생 5명과 함께 1886 년 5월 28일 귀국하였다.

 

귀국할 당시 그가 기독교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는지에 관하여는 반론 이 우세하고 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파슨 (Ellen C.Parson) 은 자신의 저서 [Fifteen Years in the Korea Mission,P.7) 에서 이수정 은 귀국을 앞두고 부득이 신앙을 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정은 이미 기독교신자로서 여러해 동안 기독교활동을 한것 은 사실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있는 정부로서는 국법을 어긴 위험 인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개화인사였음이 분명하였는 고로 구는 귀국하자마자 보수파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촌단의 극형으로 생명 을 잃었다. 이수정은 일본에 체재하는 기간에 조국의 기독교 선교를 염원하여 열 렬히 활동하였다. 1884년 3월에 그리고 12월 31일에 [세계 선교 평논]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외국 선교지] (The Foreign Missionary)에 미국교회에 선교사를 꼭 한국에 보내야 한다고 애끓는 글로 기고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의 두 선교사는 한국으로 오는 도중 일본에 들 렸을 때 이수정이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2개월간 동경에 체 류하면서 이수정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웠다. (L.H.Underwood, Underw- ood of Korea,PP,37-38) 그러기에 이수정이야말로 [한국의 마게도니아사람]이라는 말로 불려져 아주 적합한 인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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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언더우드의 한국선교 소명 

 

 

 

1884년 봄에 의사 헤론(John H.Heron)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여 일본 에서 때를 기다리게 하였고, 9월에는 중국에 파송되어 있던 알렌(Alle- n) 을 한국으로 옮겨 일하게한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서는 그동안의한 국 선교에 대한 신중정책을 전환하여 본격적인 선교사업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서의 정세가 호전된 점 도 있었겠지만, 직접적으로 언더우드(H.G,Under wood)목사와 같은 인물 이 선교사를 지원 한국행을 희망하여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국을 찾게된 동기와 사정을 회상한 내용을 살표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 주재중인 올트맨(Allert Oltmans)이 1883년 겨울에 선교 지원 자들을 모아놓고 은사의 나라 한국에 관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의 주장 은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교회가 기도하고 있고 또 1882년에는 한미 조약이 체결되어 선교사가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었에도불 구하고 미국 교회가 무관심하여 1년동안을 허송세월 하였다는 내용이었 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으로 갈 사람을 찾고 있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나는 그때 인도에 갈 생각으로 의학공부를 했으며 한국에 갈 사람은따 로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였다. 교회 기관지들은 아직도 한국에 들 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기사로 나와있었다. 바로 이때에 나에게 하 늘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너는 왜 못가느냐(Why not go yourself?) 이 었다.

 

그러나 인도에 대한 선교 희망이 한국행을 막고있었고 또 실제로 한국의문은 닫혀있는것 같았다. 나는 두차례나 선교본부에 가서 한국행 을 간청하였지만 쓸데없는 말이라고 핀잔을 받았다. 이제 나에게는 본 국에 머물러 목회를 하거나 인도에 가는 길밖에 없는것 같았다. 나는이 렇게 머뭇거리는 상태에서 뉴욕의 어느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나는 이 청빙에 응하기로 하여 수락하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려고 하 였다. 그 순간에 [한국에 갈 사람은 없는가,(Not one for Korea)한국은 어찌할 터인가 (How about Korea?)라는 소리가 나의 귀에 쟁쟁하게 들 어왔다. 이때 나는 나도모르게 손에 쥐었던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 고 단숨에 중앙통에 있는 선교본부를 찾아갔다. 나는 수석서기인 엘린 우드(F.F.Ellin wood)를 만났다. 몇칠후 그에게서 받은 기별은 다음 회 의에서 내가 선교사로 일명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L.George Paik,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PP.100 101)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는 종래의 배외정책으로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 는 확정을 하였고,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한국을 위한 최초의 선 교목사로 임명하는데 합의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2월 3일미 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에 들렸다.

 

그가 일본으로 먼저 가게된 이유는 일본에서 한국말을 공부하기도 하고 또한 한국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여 만반의 선교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었 으며, 혹 여의치아니하여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때 에는 한국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수 있게될 시기까지 일본에서 영어 학교 사업이라도 하기 위함이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서 약 2개월동안 선배 선교사인 헤본(James C.H epburns)목사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그의 집에 기거하였다. 루미스목 사는 언더우드에 대하여 [그는 한국을 위한 적절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였 다. (The Foreign Missionary,Vol.44,No,1,P,34)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 있는동안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제하면서 한국풍 습을 익혔고 특히 이수정을 통하여 그의 번역서인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선고사가 피선교지에 들어가 그나라말을 배우고 또 그 성경을 번역하기 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것인데 언더우드 목사는 이미 번역된 성서를손 에들고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으니 그 감격이야말로 형언할 수 없으니 만 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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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발전과 확대

 

제1장 3.1운동과 교회의 주동역할
1. 십자가를 진 기독교인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활동
3. 3.1운동에서의 기독교정신의 결정

제2장 일제 탄압에 불굴한 교회의 진흥
1. 일제 종교정책의 시행 착오
2. 전국 교회진흥운동의 팽배
3. 성경.찬송가 발간에서 민족교회관 수립

 

제1장 3.1운동과 교회의 주동역할

 

*1.십자가를 진 기독교인들
한국의 민족 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불가분리의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하였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 사상을 기본으로 한 것이므로 기독교인드른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다른 민족의 부당한 구속과 압박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민족 자주정신이 크게 일어났으며 그것이 다시 독립 운동에로 약진되었다.

1910년 8월 22일,일본은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한국을 병참하였다. 나라 잃은 설음과 통분을 가장 뼈저리게 느끼고 깊이 체험하기는 그 누구보다 기독교인이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기독교인들은 일본 관헌이 잡아다가 취조하면서 주모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하나님이 시켜서 독립운동 하였다고 대답하였다.이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향유를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행동했다는 말이 되며, 이리하여 교회야말로 일본의 침략 정치에 항거하는 강력한 단체가 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아채린 일제 침략자들은 민족 활동의 정신적 원천이 되어있는 기독교 신앙을 없이하려고 온갖 흉게를 꾸미면서 한 걸음 두 걸음 목조르듯 박해의 손길을 뻗쳐 들였다.

일제의 흉계가 대규모적으로 조작된 것으로서 소위 '105인 사건'이란 것이 있다. 일본인 조선총독 대라우찌가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도중에 선천역에 정거하였을 때 한국 기독교인들이 그를 암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원래 날조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모순 당착이 너무나 많이 노출되어 완전히 허위가 드러났다.

결국,이 조작된 사건은 형식적으로나 윤치호등 6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 사태를 미봉하였다. 형고를 받은 인사들은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감형으로 1915년까지는 모두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어느 한 날,감옥에서 석방된 이들이 평양역에 도착하였을 때 역 앞에 운집한 8천명 군중들은 민족을 위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수욕을 겪은 교회 지도자들을 바라보면서 열렬한 환영을 퍼부었으나 그들의 모습은 슬픔과 울분이 뒤섞여 너무나 처절하였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활동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Thomas W.Wilson)대통령은 민족 자결론(Self Determination of Nations)을 내세워 이때야말로 한국 기독교인들은 민족의 살길이 트였다고 생각하고 일제의 기반을 벗어나 조국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호기회가 온 것으로 자각하였다.

근 10년이나 일제의 압박을 받아 온 우리 민족은 이에 자극되어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이 날을 기점으로 하여 온 겨레는 민족자결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자주 독립을 선언하면서 독립 만세를 힘차게 부르고 또 불렀다. 3.1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은 단연히 앞장섰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인임을 보아 벌써 이러한 애국심을 뚜렷히 알 수 있다. 운동의 진행은 시종일관하여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행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헌병과 경찰은 교인을 보는대로 짓밟았고 감옥에 가두고 매질했으며 교회당을 때려 부수고 불질렀다.

3.1운동이 한창 막바지에 이르렀던 4월 15일 낮 12시경,수원 부근의 제암리로 일본 헌병의 일대가 달려들었다. 그들은 총을 휘두르며 약 30명의 기독교인을 모두 교회당 안으로 모아 들였다. 교인들이 다 들어간 다음,헌병들은 문을 잠그고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견디다 못하여 창문을 부수고 나오는 교인들에게 총을 겨누어 쏘아 죽였다. 이러한 학살과 만행은 다른 여러 고장에서도 감행되었다. 강서 사천교회,정주교회,강계교회,위원교회의 학살 사건 그리고 서울의 시자가 사형 사건,북간도 노루바위교회의 학살 사건 등이 그것이며,이러한 모습은 한국 독립운동사상 너무나 참혹하고 잔인하여 감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일본 경찰이 그렇게도 심하게 경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전국적 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지 않았다는 점,그리고 기독교인의 주장에 의하여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사항이다. 그토록 우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교인들은 땅에 엎어지고 교회당은 불타 버렷으나 살아남은 교인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굳데 뭉치어 뒤로 물러서지 아니하였다. 3.1운동을 통하여 기독교인의 애국적인 참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였다. 이리하여 한국교회는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민족 교회로서의 걸음을 또 한번 힘차게 내딛었다.

기독교인들이 앞장서 기치를 높이 든 3.1독립운동은 한국 민족의 기개를 널리 만방에 떨쳤을 뿐 아니라 한국 민족이 독립된 민족임을 뚜렷히 세게에 알려 주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어떤 사람은 독립 운동이 실패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에 한국 민족의 독립성을 세계에 알려주지 아니하였더라면 1945년 8월 15일의 연합군에 의한 무조건 해방이 그렇게 쉽게 오지 아니했을 것만은 틀림이 없다.

*3. 3.1운동에서의 기독교정신의 결정
지금까지 3.1운동의 원인 및 동기,그 경과 그리고 그 결과등에 관하여 보았다. 다음은 3.1운동의 성격이라 할까, 3.1정신에 관하여 살피므로 귀중한 교훈을 얻고자 한다.

첫째로, 3.1정신에 있어서는 신앙심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일본의 철통같은 구속과 탄압 속에서 결코 굴하지 아니하였다. 반드시 한국 민족이 독립할 것과 국권을 회복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될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틀림없이 이를 신앙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신석구목사는 일제의 법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불의 불신한 일본 사람게 우리 민족을 오래 맡기시지 아니할 것으로 굳게 빋는다."
이러한 강한 신앙이 있었기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교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붉은 피를 아낌없이 쏟으면서 이 강토는 내 것이라고 소리치며 행동할 수 있었다.

둘째로는 협동과 단결심이 강하게 있었다. 3.1운동은 종파와 계급,남녀,노소의 장벽을 뚫고 온 교회와 겨레가 일치 단합한 거룩한 운동이었다. 이는 한국 민족사에서 일찌기 찾아보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실은 독립선언서가 2월 28일에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살폈으나 3월 1일에 거사가 있을줄은 전혀 탐지하지 못하였다. 한국인 밀정도 이 사실만은 일경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이는 민족이 하나로 뭉쳐 입을 꽉 다물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정의와 진실이 그 가운데 있었다. 독립은 한국 민족의 정의에 입각한 참된 소원이었고 3.1운동은 독립을 위한 진실한 행동이었다. 이 거룩한 운동에 누구도 명예나 욕심을 탐하지 아니하였다. 그토록 강포한 일본 침략자들은 이 정의와 진실의 발로를 그 무엇으로 당해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민족 대표 33인이 2월 28일 저녁에 손병희 댁에 최후로 모여서 거사를 의론하면서 "체포된 후의 모든 진술은 각자가 사실대로 말하기로 하자"고 최종적으로 합의하였다. 이 한가지만 보더라도 3.1운동이 진실과 정의로 일관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넷째로는 평화와 무저항으로 일관하였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3.1운동이 실패했다고 말하면서 그 중요한 원인은 비폭력화 평화운동이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천도교 측에서는 필요시에는 무력 행사도 불사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측은 완강히 이를 거부하면서 끝가지 비폭력과 무저항으로 운동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이때에 자칫 잘못하였더라면 제2의 동학란같은 것이 발생하여 죽도 밥도 안되었을런지 모른다. 3.1운동의 특출한 정신은 맨주먹으로 또 붉은 피로 물들이면서도 끝까지 평화의 정신으로 밀고 나간데 있다. 한 자루의 총검도 없이 재정의 후원도 없이 원조하는 우방도 없이 세계 최강국과 항쟁한 그 저력은 끝까지 평화의 정신으로 밀고 나갔다는 데 있었다. 그런고로 세계는 이 불상한 민족을 동정하였고 이 평화 운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다섯째로는 3.1정신 속에는 끊임없는 전진이 있었다. 손에 태극기 하나만을 들고 일제의 총칼 앞에서 제1진이 쓰러지면서 제2진이 뒤를 따랐다. 제2진이 쓰러지면 그 시체를 밟고 또 다시 제3진이 전진하여 끄칠 줄을 몰랐다. 이러한 불퇴전의 전진은 민족 자격 아니면 민족자멸의 양단간의 결단을 앞에 놓고 전국의 골짜기마다 어디에서나 일어나 계속된 것이었다. 일본, 만주, 시베리아,상하이,하와이,미국 등지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지면서 전개되고 그리고 또 계속 되었다.

3.1운동의 진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의 민족 정신과 독립 정신은 더욱 더 확고히 다듬어졌다. 한국교회는 3.1운동이래 한국 민족이 신뢰할만한 봉사자로 보다 더 뚜렷이 부각되었다. 이는 한국교회가 민족 교회로서 성장하는 속도에 가일층 박차를 가하였으므로 크나 큰 수확이 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제2장 일제 탄압에 불굴한 교회의 진흥

*1.일제 종교정책의 시행 착오
거족적인 3.1운동의 여파는 무단 일변도로 일관한 일본의 정책을 변경시켜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태로 몰고 갔다. 따라서 일제는 외형적으로나마 정책 노선을 변경하여서 기만과 가식의 방법으로 한국인에 대한 식민 통치를 진행하기로 방침을 바꿔 세웠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육.해군 대장에 국한하였던 조선 총독의 자격을 문관 출신으로 바꾸었고 새로이 부임한 사이또 총독이 곧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정책을 바꾼다고 선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고 한국인에게도 일본인과 같은 교육의 균등화를 기한다는 뜻을 언명하였고 언론의 통제도 철폐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가 한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수단 방법의 변형일 뿐으로 본질적인 면에서는 무단 정치와 전혀 다를 바 없었으며, 그런고로 얼마 안가서 그 술책이 속속 탄로나게 되었다.

종교 정책에 있어서는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교회의 교권을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탈취하려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서 일부 한국교회의 불평 분자들을 포섭하여 이간책을 사용하여 교회 분열을 획책하여 약체화 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잘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한 적극책으로 한국 기독교의 일본화를 꾀한 방법이 있었다. 일제는 정부의 어용 기구가 되어 있는 일본 조합교회를 시켜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회유하여 한국교회를 조합교회에 합병케 하여 단일 교회를 만들고 필경은 교회를 총독 문화 정책의 선전 기관으로 만들려고 기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조합교회의 와다세 목사는 한국인 목사 20여명을 재빨리 4월 18일에 조선호텔에 소집하여 성대한 만찬으로 대접하였다. 그리고 나서 동 회의에서는 특별한 시국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이기로 결의하였고 그 실천 방안으로서 선전 팜프렛의 발간 반포와 순회 강연 등을 시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3.1운동을 일종의 소요 사건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기독교인에 대한 일본 관헌의 만행과 박해를 규탄하는 선교사들의 언동을 크게 반박하여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장,감 양 기성교회의 교인들을 유인하여 자파 교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포섭하려 했다. 그러나 교인들은 호응하려는 기세를 보이지 아니하였다. 조합교ㅗ히는 날로 교세가 쇠퇴하였고 마침내 유명 무실한 교회로 전락하여 일제의 기만적인 교회 정책은 일단 실페하고 말았다.

일제가 아무리 수단 방법을 강구하려 한국 교회를 교란하려고 시도하였지만 끝내 실패로 돌아가자 드디어 법적으로 교회 탄압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이 소위 1920년에 발표된 '개정포 규칙'이란 것이다. 이러한 온갖 악조거 하에서 한국 교회가 일시적으로나마 낙심하여 침체상태에 빠졌음은 유감이라고 말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결코 완전히 후퇴하거나 쓰러지지 아니하였다. 한국교회는 모진 시련의 골짜기를 넘어서 칠전팔기의 신앙으로 다시 일어나 교회진흥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약세를 회복하였다.

*2.전국 교회진흥운동의 팽배
한국 백성의 반응이 새로와진 이 시기에 감리교와 장로회에 있어서는 모두 교세 확장을 위한 대규모 조직적인 운동을 추진하기에 인식하지 않았다. 감리교에서는 이 운동을 '백년 전진'(The Centuly Advance)이라 불렀고 장로회에서는 '전진 운동'(The Forward Movement)이라고 이름 붙였다.


장로회교세(1917-1930)
1917년 - 149,526명
1918   - 160,919
1919   - 144,062
1920   - 153,915
1921   - 153,915
1922   - 179,158
1923   - 193,850
1924   - 191,887
1925   - 194,408
1926   - 519,060
1927   - 194,678

1919년 장로회 총회에서 진흥위원회 위원장이 된 방위량(William N.Blair)목사는 10개 종류의 소 책자를 만들어 전국 도처를 순회하면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각 교회에서는 진흥 비교표를 배부하였고 성적을 노회에 보고케 하였다. 그 내용에는 전도,성경 공부,새벽 기도회 등 9개 종목의 진흥 방법이 포함되어 있었고 우수한 교회에 대하여는 총회에서 성장을 수여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부흥 운동에 가장 큰 성과를 올린 것은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 등이 전국적으로 부흥집회를 인도함으로 얻게되었다. 그들은 설교와 능력을 통하여 한국교회에 새로운 희망과 광명을 던져 주었고 한국 사회를 향해 새로운 시대 정신을 불러 일으켜 다대한 공헌을 남겼다. 그들은 언제나 "한국 교인들이여 일어나라""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라고 절규하여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였고 한국 민족은 모진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불멸의 찾아볼 수 있게 격려하였다.

1919년은 한국 민족에게 있어서 거족적인 3.1운동이 있은 중요한 해이기도 했지만 감리교에 있어서는 미국에서 해외 선교부가 발족한지 100주년에 해당하는 뜻있는 해였는고로 한국의 감리교는 '백년 전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던 것이다.편성된 전도대는 전도지와 쪽복음을 손에 들고 집집마다 방문하고 각처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달하였다. 교직자들은 청지기대회를 열어 사명자의 태도를 재확인하였으며 새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특별반을 조직하였다.

1923년은 동양 선교 75주년을 기념하여 특별 전도운동을 폈으며 그 다음해에는 남북 감리교가 합동하여 연합협의회를 조직하였고 전도,교육,문서 출판 등의 11개조의 진흥 방안을 구체화하여 추진하였다. 이때의 감리교의 유명한 부흥사로는 유한의 목사가 있었으며 그는 노방 전도와 함께 야시 전도의 특이성을 살려 전도의 성과를 크게 올렸다.

이 시기의 부흥 운동은 한국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 추세로서 전도단들이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1923년에는 미국의 비더울프 목사를 단장으로 한 부흥단이 내한하였으며 서울을 비록하여 평양,선천,대구,광주 등 12개 도시를 두루 누비면서 순회 전도를 하여 어디에서나 대성황을 이루면서 수많은 결신자를 획득하였다.

특히 3.1운동 이후에 출감한 기독교 인사들의 영향으로 조직된 대.소 전도단의 활동은 주목할만 하였다.이들이 하는 강연및 설교의 내용은 주로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과 구원의 역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인권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정신을 은연 중에 강조하였다. 그런고로 일제 경찰들은 이를 중지시키기 위하여 뒤를 쫓아다니면서 여러모로 위협하였다. 그러나 연사들은 열띤 어조로 언제나 군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으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한국 민족은 절망적인 시련의 골짜기를 능히 교회의 진흥을 통하여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전진을 계속하였다.


*3. 성경.찬송가 발간에서 민족교회관 수립
선교사업 진행에 있어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성경 및 찬송가의 역간이라 하겠다. 하물며 프로테스탄트 교회야말로 성경을 중심한 교회이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그 어디에나 선교지에 들어가기만 하면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케 하는 과업을 먼저 수행하였다.

한국에 있어서는 유독 선교사가 정식으로 입국하기 전에 국외에서 성경이 번역 출판되었고 이것이 국내에 반입 전포되었다는데 특색이 있다. 그러나 만주에서 출간된 로쓰 번역(Ross Version) 성경이나 일본에서의 이수정 역 성경은 단시일에 너무 급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역이 많았다. 또 지방 사투리의 표현이 섞여 있었다. 그런고로 표준어로 되는 정확한 성경의 번역은 필수적 요청이었다.

1887년 언더우드,아펜셀라,스크랜톤,헤론의 네 사람으로 조직된 성서위원회는,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않는 외국인들이면서 참고 서적이나 한글 사전도 없는 상황에서 고생을 다하면서 번역사업에 착수하여 20년이 지난 1906년에 신약성경의 결정본을 출간하였다.

1908년에 김정식,김명준,김창식의 한국인 세 사람이 번역 위원으로 가담되었음은 한국민족 교회사 상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 사실로서 기뻐할만 하다. 1911년에는 구약성경의 번역이 끝나면서 출간되었고 또 그해에 신구약의 합본 성경도 간행되는 거사를 만났다.

성경이 나오기 전 해인 1910년은 국가적으로 한민족이 일본에게 합방 당한 너무나 슬픔에 가득찬 해이었다. 그러기에 당시의 수백만 한국인들은 한글로 된 성경을 보자 열렬히 애독하였다. 나라 잃고 멸시 당하는 힘겨운 처지에 빠질수록 더욱 우리말과 우리 글의 귀중함을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교인들 뿐 아니라 일반 민중 사이에도 널리 보급되어 한글을 퍼쳐 한국 국문학사에도 불멸의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이 성경의 내용이 진리로서 무지와 몽매를 깨우치면서 겨레 사랑하는 마음을 함양하여 애국 애족심을 크게 일깨웠은 두말 할 것 없다.

찬송가의 편간도 한국교회의 문서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선교사들은 성경 번역과 거의 동시에 찬송가의 편간 사업에 착수하였다. 1896년에는 감리교 찬송가로 '찬미가'가 나왔고 1898년에는 장로회에서'찬셩시'를 출간하였다. 초대 교인들은 정확한 곡조로 유창하게 찬송가를 부르지는 못하였으나 나라 잃은 설음 속에서 그 얼마나 열심히 찬송을 불렀는지 모른다.

1.우리 황상폐하 천지일월 같이 만수무강
산높고 물고운 우리 대한국에 하나님 도우사 독립부강

2.이천만 동포난 한맘 한뜻으로 직분하세 사욕은 버리고 충의만 앞세워
임군과 나라를 보답하세

위는 초대교회에서 찬송으로 부른 애국가의 몇 절을 뽑은 것이다. 초대 교한국교회는 태극기와 십자가를 항상 걸엇으며 말하자면 태극기와 십자기는 애국하는 한국교회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찬송의 연창은 우리 민족이 도탄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새 희망을 찾으려고 애쓴 그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실로 이는 한국 민족교회관 수립에 있어서 크게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장로회교세(1884-1900)
1884-85 - 6 
1885-86 - 9  
1886-87 - 25  
1887-88 - 65  
1888-89 - 104   
1889-90 - 110  
1891-92 - 127     
1892-93 - 141  
1893-94 - 236 
1894-95 - 286 
1895-96 - 530 
1896-97 - 932 
1897-98 - 2079
1898-99 - 2804
1899-1900 -3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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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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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의 발흥과 기독교의 사회개혁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한국을 중국과 러시아의 지배로부터 분리시키고 영국과 미국의 양해 하에보호조약과 합병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일합방 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 “36년 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 황국신민화정책으로 그 통치방법이 변화되어 왔지만 식민지 지배와 수탈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어용사가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틴 대제의 통치에 아부했던 것처럼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일본의 한국 합병을 예찬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양심의 소리는 있었다. “조선합병이라는 글에서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를 잃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손실을 위로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일은 곧 또 하나의 폴란드를 합병한 일이며, 결국 이 먹이를 완전히 소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바랄 수 없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한일합방과 국권의 상실로 한국기독교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어려움 가운데도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간다. 이런 기독교의 활동은 일본 정부로 하여금 한국 개신교인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차가운 눈총을 보내기 시작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안, 밖으로 저항을 하면서 한국 기독교는 한국근대화와 민족계몽을 통한 민족주의 사상의 고취에 크게 기여한다.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본 정부는 통감부를 통해 새로운 학교령을 공포하고 신민지 교육시책을 강요함은 물로 관공립 보통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폐지시키고 사립학교 설립을 인가제로 전환시켜 일제의 관할 하에 두면서 학교 설립을 규제했다. 이에 대해서 한국에 파송 된 선교회는 내용적으로는 비정치화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예찬하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 선교사들은 일본의 한국 통치를 정당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일제의 기독교 탄압의 가속화로 한국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입장은 저항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과 일본의 무력에 의해 수난 당하는 현장을 목도하던 국내의 외국 선교사들 중에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무단정치를 우려하며 그것을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 감리회 소속 케이블 선교사는 1908년에 일제의 무단정치를 폭로하는 한 보고서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다. 일제가 한국기독교에 대해 가했던 폭행과 살해 사건은 일제가 교회를 어떻게 보았으며, 그들이 얼마나 반기독교적 탄압정책을 썼는지를 말해 준다. 일제는 선교사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그들의 선교구에 있는 한인교회들에게 박해를 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지를 전달했고 이와 같은 기독교 박해는 통감부가 설치된 후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105인 사건은 대부흥 운동을 거치면서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한국기독교가 일본 식민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적 반정부 단체라는 일제의 인식에서 기인되었다. 한국 선교의 개척자 제임스 게일이 전환기의 한국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은 정치적 존재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선교사들의 세계에서는 제일류의 세력으로 인정받을 만큼 세계 기독교계로부터 주목 받는 대상이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1909년 백만인 구령 운동을 통해 세계 선교지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놀랍게 성장한 데다 신학교 설립, 노회와 총회의 설립 등으로 하나의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큰 세력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1884년 알렌에 의해 시작된 한국선교가 과거 지배권 쟁탈을 다투는 강대국들의 포성이 두 번이나 진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25주년이 지난 후 “1910년대의 기독교는 정립된 종교요, 기독교회는 큰 능력을 내포한 민족적 기관으로발돋음한 것이다.

 

3·1운동 당시 마침 극동을 방문, 현장을 확인한 블랜드가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지적한 것처럼 3·1운동은 일본의 무단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민족국가의 출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선언에 자극 받아 일어난 한국 민족의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결집력은 민족 종교와 같은 특징을 지닌, 민족의 자유,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기독교에서 나왔다.

 

3·1운동 이후, 제임스 부컬크가 말한 반기독교 운동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여 1922년에 정점에 달했던 것이다. 특히 반 기독교적 성격을 지닌 휴머니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발흥으로 젊은이들 사이에는 반기독교적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었고,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젊은이들과 기성세대의 충돌, 자유결혼, 여권운동,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가 중요한 시재적 현안으로 부사했다. 또한 경제 공항으로 젊은이들의 심리상태는 극도로 불안했고,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어 교회의 영적침체가 더욱 심화 되었다. 더구나 진화론과 고등비평의 유입으로 전통적인 창조론과 성경관이 일대 도전을 맞기 시작했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조직된 조선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 김장호의 자유주의 사건은 그 전형적인 예다. 3년간의 미국 연구를 마치고 1912년에 돌아온 연희전문학교의 벡커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 청년들 사이에는 격세의 감을 느낄 정도로 커다란 사상적 변화가 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사조들의 유입과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는 일본의 한국 식민정책 속에서 교회는 이러한 대내외적인 문제들에 대처해야 했고, 동시에 변천하는 사회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적응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중적인 사명을 부여받았다.

 

한일합방 이후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되자 한국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인 소망 대신 종교적인 소망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한국교회에는 사회적인 책임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신앙을 내향화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교회에는 세대주의 종말론이 놀랍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성경 중심의 기독교가 더욱 강조되었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발흥은 한국의 개신교, 특히 선교를 주도했던 장로교, 성경교, 대한기독교, 동양선교회 등의 신앙을 타세적인 신앙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보의 아니게 하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3·1운동의 전후로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와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처럼 교회 밖으로부터의 기독교 비판이 강하게 일어나던 그 즈음, 교회 내부에서도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강한 도전이 일어났다. 그것은 자유주의 도전과 이단의 발흥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의 사회 경제적 혼란, 3.1운동의 실패,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발흥, 일제의 통치에 편승하는 어용 교단의 출현 등 끊임없이 계속된 사회적 혼란을 틈타 자유주의와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고 주류에서 벗어난 수많은 종파들이 태동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등장한 이단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마치 예일 대학의 교회사가 시드니 알스트롬이 그의 저서 미국의 종교사에서 미국 제 2차 대각성운동 이후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하는 그 시대를 가리켜 이단의 전성시대라고 명명했던 것과 같은 시대상이 출현한 것이다. ”

 

1919, 브라운은 자신의 극동의 정복에서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경을 사랑하고 구령의 열정에 불타고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교회라고 인정하면서도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사회적 적용에 비교적 무관심하고, “교회의 사상이 내세에 고정되어 있으며, “현 세상은 너무도 완전히 상실되어 이 세대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브라운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 선교사에게 사회 개혁의 방식에 대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질문하자 그는 전혀 못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에 너무 바쁩니다.” 라고 답변했다. 브라운은 한국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가 선교사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191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고 있었다. 원산부흥운동과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이어 진행된 백만인 구령 운동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를 주도했던 교회의 모습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1917년 춘원이 한국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촉구했고, 1922년 이후 동아일보가 사설을 통해 이 문제를 끊임없이 환기시켰으며, 1928년 예루살렘 국제 선교협의회에서는 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1918년 남감리교가 사회신경장정을 편입시켰고, 1920년 장감연합공의회는 사회봉사실현 프로그램을 확정했으며, 1912년에는 만주와 조선 주재 장로교 선교사 100명이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5일 간 회합을 갖고 조선인 교역자의 미국 유학 프로그램을 논의했고, 1925년에는 조선야소교 연합공의회에 사회부를 상설했고, 1·932년에는 사회신경을 채택했다. 그 시대 속에서 이와 같은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의식은 교회의 기독교문화 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전기가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간접선교와 직접선교의 균형의 필요성을 재인식한 것이다.

 

이렇듯 한국장로교회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도전, 교회 밖으로부터의 비판, 교회내부로부터 이단의 도전을 받고 있는 동안 한국에 파송 된 선교사들 가운데 특히 평양 주재 선교사들과 서울 주재 선교사들 사이에 뚜렷한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고 있었다. 이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곳에 학교를 옮기는 문제와 교단의 색이 반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교회와 사회의 계몽운동, 절제운동, 농촌운동, 진흥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에 이르러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로부터 시작된 영적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으로 한국교회는 엄청난 양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이와 함께 청소년운동과 주일학교운동에 관심을 갖기에 이른다. 이는 젊은이들을 깊은 영적 잠에서 깨워서 교회와 사회에 위대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복음 본래의 성격들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운동은 YMCA, YWCA등이 주도해 나갔다. 한편 주일학교도 활성화 하여 아이들 신앙교육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방학 중에 수련회를 통해서 이들을 교육하였다. 이밖에도 출판문화운동, 대 사회사업운동을 전개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 운영을 하였고 나환자들과 폐결핵 한자들을 위한 수용소와 병원의 설립 운영과 같은 사회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는 한국교회가 사회 속에서 단순히 복음만 전한 단체가 아니라 복음을 통한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책임의 실천을 통해 사회와 문화 속에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하나의 장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대 대사회적인 책임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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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1907년 평양서 일어난 대부흥

 

길선주 친구 돈 사취고백이 대부흥 불 댕겨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길은 평양, 개성, 서울, 목포 등지로 확산되었고, 19071월에는 평양 대부흥으로 발전하였다. 대부흥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다. 수많은 샛강이 모여 큰 강을 이루고, 큰 강물이 모여 대하(大河)를 이루듯 평양에서의 부흥은 그동안 간헐적으로 전개되어 왔던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결집된 것이었다.

 

 

<figcaption class="wp-caption-text">19071월 평양 대부흥의 불을 지핀 길선주 목사(앞줄 중앙)와 마펫(마포삼열) 선교사() 그래함 리(이길함) 선교사()</figcaption>

 

 

그해 1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개최되었다. 1000여명이 회집한 이 집회에서 그래함 리, 스왈른, 번하이젤, 윌리엄 헌트, 블레어 등이 강사였다. 길선주 또한 이 사경회의 강사이자 이때의 부흥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19071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개최되었다. 1,000여명이 회집한 이 집회는 그래함 리, 스왈른, 번하이젤, 윌리엄 헌트, 블레어 등이 강사였다. 길선주 또한 이 사경회의 강사이자 이때의 부흥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렇게 집회가 계속 되는 중 16일 저녁 집회에는 무려 1,500여명이 참석하였다. 당시 평양의 겨울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엄동설한이었으나 뜨거운 집회의 열기를 막지는 못했다.

낮에는 분반으로 나눠 성경을 공부하였고, 저녁에는 대중집회 형식으로 모였다. 16일부터 시작된 저녁 집회에는 1500여명이 참석하였다. 당시 평양의 겨울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엄동설한이었으나 집회는 계속됐다.

 

사경회가 회개기도회가 되기까지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때로 분위기는 냉담했고,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112일 밤 블레어 선교사가 고린도전서 1227절을 본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한 지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을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날은 더욱 분명했다. 영적 분위기가 회중을 압도했고 길선주 전도사가 맛을 잃은 말라빠진 사람들아라고 외치며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했음을 설교했을 때 회개의 기도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14일에는 정오기도회를 열고 성령의 역사를 간구했다.

 

오늘 우리가 평양대부흥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는 사경회 마지막 날인 14일과 15일에 일어났다. 14일 저녁 길선주는 회중 앞에서, 1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로부터 재산을 관리하도록 부탁받았으나 그 일부를 사취했던 죄를 고백했다. 이 고백이 회개의 역사를 불러일으켰고, 평양대부흥의 내적 동인이 되었다. 길선주의 회개에 이어 청일전쟁 당시 자기 아이를 죽였던 한 여인이 살인의 죄를 고백했다.

 

이때부터 죄의 고백은 계속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은밀한 창고 속에 숨겨 두었던 죄를 하나씩 고백하기 시작했다. 회개의 기도는 바다에 이는 파도소리 같았다. 김양선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인간이 범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죄는 거의 다 고백되었다. 사람의 체면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때까지 자기들이 배반하던 예수를 향하여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울부짖을 뿐이다. 국법에 의해 처벌 받는다든가 또 바로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래함 리는 115일자로 기록한 보고서에서 어제 있었던 집회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집회였다고 했다.

 

조지 맥쿤 또한 115일자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지난 밤 집회는 최초의 실제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모임이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스,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교회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것도 능가할 것이라고 썼다.

 

 

 

1907년 대 부흥은 뜨거운 구령(救靈) 운동으로 이어져 국내는 물론 만주 중국 등지까지 복음의 확산을 가져왔다. 사진은 1907년 당시 평양 장대현교회 앞에 모인 성도들이다

 

죄 고백이 행동으로 옮겨가다

 

15일 저녁에도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셨다. 선포된 말씀에 응답하여 교인들은 밤새워 눈물로 기도했고 온갖 죄악들이 숨김없이 고백되었다. 눈물은 가슴을 적셨고, 애통하는 회개는 격류를 이루며 평양의 거리를 파도치고 있었다.

 

 

 

이 회개의 물결을 목격한 여 선교사는 이렇게 썼다. “저런 고백들, 그것은 마치 감옥의 지붕을 열어젖힌 것이나 다름없다. 살인, 강간,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는 모든 종류의 죄가 고백되었다.” 블레어는 이 당시 회개는 진정한 의미의 죄의 청산이라고 보았다. “대부흥의 회개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은 그 손해를 끼친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는 사과를 하고, 과거에 남의 재물이나 돈을 훔친 사람들은 그것을 갚아 주었는데 비단 교인들에게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그렇게 하였다.” 18, 19세기 영국, 미국의 부흥사에서 예시된 바처럼 죄에 대한 회개는 부흥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는 평양 전역으로 퍼졌고, 교파를 초월하여 다른 교회로 그리고 학교로 확산되었다. 부흥의 불길은 곧 타 지방으로 번져갔다. 그래함 리에 의해 선천으로, 스왈른에 의해 광주로, 윌리엄 헌트에 의해 대구로 전파되었다. 길선주는 의주와 서울로 갔다. 또 평양신학교 학생들에 의해 부흥의 소식이 각지로 전파되었고, 부흥의 역사는 신의주, 선천 등 북한 지역과 대전, 공주, 대구, 목포 등 남한의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되어갔다.

 

성경연구와 기도, 전도, 봉사, 봉헌의 생활이 강조되었고 사경회가 열리는 곳에는 공적인 회개와 더불어 영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부흥은 19074월까지 계속되었다. 1908년에는 만주와 중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때의 부흥은, 한국교회의 수적인 성장과 내적인 신앙 성숙을 가져왔고, 전도운동과 선교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사회변혁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03년 이후 1907년 대부흥은 교회연합운동을 가능케 했고, 한국교회의 성격을 주형하였다.

 

이상규 (고신대 교수,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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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부흥의 불길(19031906)

 

대각성 불길, 원산개성평양목포로

 

1900년대 초 한국교회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선교사의 내한 이래 첫 10년간은 고투의 날들이었으나 청일전쟁 이후 수적 성장을 보이더니, 1900년 이후 도처에서 사경회(査經會)가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도 변화의 시기였다. 청일전쟁(19845), 을미사변(1895), 노일전쟁(19045), 을사늑약(1905), 그리고 1910년의 강점으로 이어지는 국권상실의 과정은 역사의 아픔이자 좌절의 시기였다. 감리교 선교사 무즈(J R Moose)는 자신의 관할지역에서 의지할 곳 도무지 없소”(Wei-chi hal kot tomochi oupso, There is altogether no place to trust)라는 조선인의 절망을 보았다며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기가 도래했다고 썼다. 암울한 역사현실로부터 탈출하려는 욕구와 무언가 새로운 역사의 변혁에 대한 기대가 뒤엉킨 1900년대 첫 10년 동안 한국교회에는 몇 가지 형태의 신앙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03년부터 1907년에 이르는 신앙부흥, 그리고 1909년의 100만인 구령운동(救靈運動)이었다.

 

부흥이란

 

부흥이란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인데, 근본적으로 부흥은 생명(life)과 각성(awakening)을 의미한다. 부흥운동사가인 에드윈 오르(Edwin Orr)는 부흥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나 신앙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초대교회에서와 같은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가운데 행하시는 특별한 역사로 정의되어 왔다. 이렇게 볼 때 성장(growth)은 인간의 계획과 의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점진적인 발전이라고 한다면, 부흥(revival)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의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현상으로서 혁명적인 요소가 있다. 부흥은 영적 각성과 함께 수적인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에 웨일즈부흥(1859) 기간 중에는 부흥을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들, 사람들로 충만한 교회라는 말로 정의하기도 했다.

 

이런 부흥이 1900년대 한국에서 재현된 것이다. 그 시원이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회개의 역사였다. 중국에서 일하던 남감리회의 화이트(Mary Cutler White)와 장로교의 매컬리(Louise H McCully)는 의화단(義和團) 사건을 피해 원산에 오게 되었는데, 이들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던 중 824일부터 1주일간 기도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때 캐나다 출신의 감리교 선교사 하디(Dr. R A Hardie)는 효과적인 기도에 대해 강의하던 중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었다. 회개는 자신에게도 큰 변화를 주었고, 회중 가운데서 회개의 역사를 불러 일으켰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였다. 이 작은 시작이 1903년 이후 이 강산을 부흥의 물결로 파도치게 만들었던 변화와 각성의 시작이었다. 부흥의 역사는 19038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해 10월 스웨덴에서 온 프란슨 목사(Rev F Franson)가 원산에서 장감침(長監浸) 연합사경회를 인도했을 때에도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한국에서의 부흥

 

이런 부흥의 역사는 1904년 봄 원산에서 다시 재현되었다. 이때의 초교파 사경회에서 장로교 선교사 롭(Alexander F Robb)과 장로교의 전계은(全啓恩), 감리교의 정춘수(鄭春洙) 목사도 성령충만을 경험했고, 부흥은 곧 개성 송도로 확산되었다. 그해 3월 서울에서 하디의 집회가 개최되었고, 여기서도 놀라운 각성이 일어났다. 1905년에도 개성을 중심으로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부흥이 일어나고 있을 때인 19059월 주한 네 장로교선교부와 두 감리교선교부 선교사들은 한국복음주의 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고,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기도달력(Prayer Calender)이었다.

 

1903년에 이어 1906년에는 또 한 차례의 큰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1906년 개성의 송도(松都)에서 부흥을 경험했는데, 크램(W G Cram)은 이때에도 회개와 죄의 고백이 일어났다고 증언했다. 평양주재 선교사들은 1906826일부터 92일까지 하디를 초청하여 평양선교사 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하디가 요한1서를 설교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했을 때 성령께서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증거 하였다. 이 집회에서도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셨다. 평양선교사 사경회 이후 서울에서 선교사연례대회(9. 29)가 개최되었다. 미국에서 온 존스톤 목사(Rev Howard Agnew Johnston)가 인도 카시아지방(Kassia hills)과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보고했을 때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에게 영적 깨달음을 주었다. 그 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의 사경회, 10월에는 목포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다. 부흥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사경회)과 죄의 고백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쯤 평양에서는 한국교회의 고유한 전통이 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이자 전도사였던 길선주는 동료 장로인 박치록과 함께 19069월경부터 교회에서 새벽마다 기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1907년 이후 교회의 공식적인 기도회로 발전되었다. 1907년의 대부흥은 이런 과정 속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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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기독교 전파와 초기 수용자들

 

 

·하층 중심 전도가 기독교 대중화 이끌어

 

한국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을까? 한국의 천주교는 양반중심의 공동체로 출발하였으나 조상제사 금지와 신해박해(1791)를 거치면서 차츰 중인층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문규현에 따르면 1784년부터 1791년에 이르는 기간 활동했던 권일신을 비롯한 12명의 지도층 인사 가운데 3분의 2가 양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791년부터 1801년 사이 활동했던 38명의 지도층 인사들 중 중인계급이 21명으로 55%에 달했으나 양반은 9명으로 24%에 지나지 않았다. 양반 중심의 구성이 점차 중인계급으로 이동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개신교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기독교(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주로 중산층과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점은 일본과도 대조를 이룬다.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지식층이라 할 수 있는 무사(武士) 계급으로 유입돼 주지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기독교는 중·하층민으로 유입돼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점차 상승운동을 통해 상류층으로 확산됐다. 물론 소수 엘리트 그룹의 기독교 영입운동이 없지 않았고, 이들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상류층보다 중·하층민이 타깃

 

이런 점은 당시 선교정책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장로교선교공의회는 1893년에 모인 첫 회합에서 네비우스 정책에 기초한 10가지 선교정책을 채택했다. 이 문서는 한국에서의 기독교 전수통로(transmission)에 대한 선교사들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 중심 사상은 제1항에서 명시하듯이 상류층보다 하류층을 일차적인 전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모든 종교서적은 한글로 출판한다는 점이었다. 성경번역도 그러했다. 천주교는 처음부터 국·한문 혼용 성경을 발간했으나 개신교는 처음부터 순한글로 성경을 번역해 한문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물론 점차적으로 상류층의 입교자가 생겨났지만 처음부터 중·하층민이 선교의 주된 대상이었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도 양반층보다는 전도가 비교적 용이한 중·하층민에 우선권을 두었다. 이것은 당시 보편화된 유가적(儒家的) 가치체계에서 불가피한 모색이었을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도 제목 중심의 간명한 설교가 중심을 이루고, 많은 예화가 사용되었던 것은 교회 구성원의 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구스타프 바르넥은 특정 계층을 주된 선교 대상으로 하는 것은 건전한 국민층(die gesunden Volkselemente)’ 교회를 설립할 수 없다 하여 이상적인 정책일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으나 한국에서의 경우 중·하층민 중심의 교회가 상당한 성장을 가져왔다. 이는 한국에서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1세기 기독교에서도 동일한 상황이었다(고전 1:2629 참고). 독일의 파피루스 학자인 아돌프 다이스만(Adolf Deissmann)은 초기 기독교는 절대 다수의 하층민들로 구성된 교회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에 따르면 어떤 집단의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은 그 집단의 종교적 성향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는 하층 계급의 집단일수록 새로운 사상, 이념, 종교에 보다 수용적이라고 분석했다. 그것은 새로운 이념이나 가치를 통해 신분 상승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기독교 신앙은 사회적 신분 상승을 추구하는 하층민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평양을 비롯한 관서지방이 서울·경기 등 중부지방보다, 서울·중부지방이 경상도나 전라도보다 복음에 대해 더 수용적이었던 것은 그 지역의 사회적 신분집단과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 근대화와 자주독립의 도구

 

초기 한국에서의 기독교 수용은 중·하위 계층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소수 엘리트 계층의 기독교 영입운동이 없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들이 주로 개화지향적 민족자강론자들이었다. 급진 개화론 혹은 온건 개화론(東道西器論)의 전통을 잇는 이들은 기독교를 서구문화에 대한 도관으로 보아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고자 했다. 이런 인식은 청일전쟁(189495) 이후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기독교를 근대성(modernity) 혹은 문명의 기호(a sign of civilization)로 인식했다. 이런 인물이 서재필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같은 엘리트들이었다.

 

기독교를 통해 입헌민주국가를 건설하고,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된 이후에는 자주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보았던 이들도 기독교를 도구로 인식했다.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을 중심으로 설립된 독립협회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독립협회는 다수가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었고 안창호, 길선주 등은 평양지부에 속한 인물이었다. 189811월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중심인물이 투옥되었는데, 이들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승만 이상재 이원긍 신흥우 김정식 등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들 외에도 개화지향적인 혹은 민족자립과 독립을 추구하던 조만식 김구 등 다수의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한국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대표적인 두 집단은 다수의 중·하위 계층과 개화지향의 민족자강을 추구하는 엘리트 그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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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금주·금연운동

 

 

초기 선교사들, ·담배 폐단 보며 운동 불붙여

 

한국에서 일했던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이를 금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가 소개된 초기에는 성탄절이 되면 술을 빚어서 교인들이 함께 나누어 마신 일이 있고, 예배당에 들어올 때 신발장 옆에 담뱃대를 정렬해 두었다가 예배가 폐하면 함께 담배를 피웠다는 기록도 있다.

   

선교사들 중에서도 음주나 흡연하는 이들이 있었다. 언더우드도 이 점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가 화란개혁파 계통의 신학교에서 교육받았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음주·흡연 문제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불간섭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일정기간 음주나 흡연에 대해 관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한국 교회가 금주와 단연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알렌이 입국한 후 10여년이 지난 때부터였다.

 

금주·금연운동의 시작

 

내한한 초기 선교사들이 금주(禁酒), 금연(禁煙)을 권고하게 된 것은 이의 폐단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도박과 축첩을 금하고, 혼인 장례 등에서의 구습을 타파하고 비합리적인 인습, 비과학적인 의식을 개조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금주·단연은 이런 측면에서 강조되었다. 한국 교회가 금주, 금연운동을 추진할 때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신앙상 유익하지 않다는 점, 건강에 해롭다는 의학적인 이유, 그리고 개화 혹은 국민의식계몽을 위한 의도가 있었다.

 

한국에서의 금주운동이 일어난 것은 1900년 이후로 볼 수 있지만 1895년을 전후한 때로부터 금주, 단연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계주론(戒酒論)을 펴기 시작했다. 감리교는 이미 1894년부터 금주정책을 견지하고, 그해 8월에 모였던 감리교선교회에서 금주를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당시 교회는 음주행위를 4중적 범죄로 규정하였다. 첫째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 둘째는 교회법을 어기는 일, 셋째 부모, 형제, 처자에게 광언지설(狂言至說)하는 일, 넷째 자기 몸을 망하게 하는 일로 보았다. 금연이 강조된 것도 동일한 이유였다. ‘그리스도 신문’ 189757일자에서는 담배 먹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편한 것시 만흐니라.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 병이 잇나니 힘줄이 약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념통이 더 벌덕 벌덕하고 슈전증이 나고, 안력에 대단히 해롭고 여러 가지 병이 만흐니라고 하면서 금연을 강조하였다.

 

금주·금연운동의 조직화

 

한국교회에서 금주, 단연운동이 조직화된 것은 1900년대 이후인데, 특히 절제운동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었다. 1907년 이후에는 금주, 금연으로 절약한 재화로 외채 청산에 기여하자는 민족적 동기도 있었다. 1911년에는 주한 선교사들이 기독교 절제회를 조직하고 금주, 금연, 순결에 관한 문서를 제작 배포하기 시작하였고, 1912년에는 평양, 황해도 황주(黃州) 등지를 중심으로 계연회(戒煙會)가 조직되어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계연회는 금연으로 절약한 돈을 모아 외지에 전도인을 파송하는 전도운동을 겸하였다.

 

1917년부터 1941년까지는 ·감 연합공의회가 발행하는 주일학교 장년 및 유년공과에 절제에 관한 내용을 삽입하여 교회학교에서 절제교육을 실시하였다. YMCA20년부터, 감리교는 1923년부터 금주, 금연회를 조직하여 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에 공포된 감리교회의 사회신경에는 심신을 패망케 하는 주초와 아편의 제조, 판매, 사용금지조항이 삽입되었고, 감리교인 임배세(林培世)가 작사한 절제 계몽가인 금주가31년 간행의 신정 찬송가에 포함되기도 했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가 늘 두렵다

 

2.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빗도내어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한푼 안 쓰려네

 

3. 전국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세워/ 자녀수양 늘 식히면 동서문명 잘 빗내리

 

4. 천부주신 네 제능과 부모님게 받은귀체/ 술의 독기 밧지말고 국가위해 일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우리나라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잇나니라.

 

한국에서 절제운동과 사회교육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교단은 구세군이었다. 구세군은 한국선교 직후인 191010월부터 연 1구세신문금주호를 발행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금주호에 첨부, 인쇄된 금주 서약서가 금주 결단을 촉발하였다. 이러한 금주, 단연운동은 1930년대 전국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35210일은 금주의 날로 선포되었고,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 기독교여자절제회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등이 주최하는 금주 가두행렬, 금주 강연회 등이 전개되었다. 이때 불리던 절제운동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꿈을 깨어라 동포여 지금이/ 어느때라 술먹나/ 개인과 민족 멸망케 하는 자/ 그 이름 알콜이라

 

2. 입에 더러운 담배는 왜대리/ 용단하라 형제여/ 몸과 정신을 마비케 하는 것/ 담배란 독약이라.

 

(후렴) 술잔을 깨치라/ 담배대를 꺾어 버려라/ 2천만 사람의 살 길은/ 절제운동 만만세

 

이와 같은 금주, 단연 운동의 결과로 한국 교회 초기부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술, 담배를 끊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한국 교회 전통에서는 주일성수, 조상제사 중지, 노름(도박)의 금지, 축첩반대 등과 함께 금주·단연은 세례 받을 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다짐이었다.

 

(고신대,이상규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26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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