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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의 발흥과 기독교의 사회개혁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한국을 중국과 러시아의 지배로부터 분리시키고 영국과 미국의 양해 하에보호조약과 합병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일합방 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 “36년 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 황국신민화정책으로 그 통치방법이 변화되어 왔지만 식민지 지배와 수탈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어용사가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틴 대제의 통치에 아부했던 것처럼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일본의 한국 합병을 예찬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양심의 소리는 있었다. “조선합병이라는 글에서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를 잃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손실을 위로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일은 곧 또 하나의 폴란드를 합병한 일이며, 결국 이 먹이를 완전히 소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바랄 수 없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한일합방과 국권의 상실로 한국기독교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어려움 가운데도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간다. 이런 기독교의 활동은 일본 정부로 하여금 한국 개신교인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차가운 눈총을 보내기 시작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안, 밖으로 저항을 하면서 한국 기독교는 한국근대화와 민족계몽을 통한 민족주의 사상의 고취에 크게 기여한다.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본 정부는 통감부를 통해 새로운 학교령을 공포하고 신민지 교육시책을 강요함은 물로 관공립 보통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폐지시키고 사립학교 설립을 인가제로 전환시켜 일제의 관할 하에 두면서 학교 설립을 규제했다. 이에 대해서 한국에 파송 된 선교회는 내용적으로는 비정치화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예찬하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 선교사들은 일본의 한국 통치를 정당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일제의 기독교 탄압의 가속화로 한국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입장은 저항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과 일본의 무력에 의해 수난 당하는 현장을 목도하던 국내의 외국 선교사들 중에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무단정치를 우려하며 그것을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 감리회 소속 케이블 선교사는 1908년에 일제의 무단정치를 폭로하는 한 보고서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다. 일제가 한국기독교에 대해 가했던 폭행과 살해 사건은 일제가 교회를 어떻게 보았으며, 그들이 얼마나 반기독교적 탄압정책을 썼는지를 말해 준다. 일제는 선교사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그들의 선교구에 있는 한인교회들에게 박해를 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지를 전달했고 이와 같은 기독교 박해는 통감부가 설치된 후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105인 사건은 대부흥 운동을 거치면서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한국기독교가 일본 식민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적 반정부 단체라는 일제의 인식에서 기인되었다. 한국 선교의 개척자 제임스 게일이 전환기의 한국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은 정치적 존재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선교사들의 세계에서는 제일류의 세력으로 인정받을 만큼 세계 기독교계로부터 주목 받는 대상이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1909년 백만인 구령 운동을 통해 세계 선교지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놀랍게 성장한 데다 신학교 설립, 노회와 총회의 설립 등으로 하나의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큰 세력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1884년 알렌에 의해 시작된 한국선교가 과거 지배권 쟁탈을 다투는 강대국들의 포성이 두 번이나 진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25주년이 지난 후 “1910년대의 기독교는 정립된 종교요, 기독교회는 큰 능력을 내포한 민족적 기관으로발돋음한 것이다.

 

3·1운동 당시 마침 극동을 방문, 현장을 확인한 블랜드가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지적한 것처럼 3·1운동은 일본의 무단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민족국가의 출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선언에 자극 받아 일어난 한국 민족의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결집력은 민족 종교와 같은 특징을 지닌, 민족의 자유,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기독교에서 나왔다.

 

3·1운동 이후, 제임스 부컬크가 말한 반기독교 운동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여 1922년에 정점에 달했던 것이다. 특히 반 기독교적 성격을 지닌 휴머니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발흥으로 젊은이들 사이에는 반기독교적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었고,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젊은이들과 기성세대의 충돌, 자유결혼, 여권운동,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가 중요한 시재적 현안으로 부사했다. 또한 경제 공항으로 젊은이들의 심리상태는 극도로 불안했고,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어 교회의 영적침체가 더욱 심화 되었다. 더구나 진화론과 고등비평의 유입으로 전통적인 창조론과 성경관이 일대 도전을 맞기 시작했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조직된 조선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 김장호의 자유주의 사건은 그 전형적인 예다. 3년간의 미국 연구를 마치고 1912년에 돌아온 연희전문학교의 벡커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 청년들 사이에는 격세의 감을 느낄 정도로 커다란 사상적 변화가 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사조들의 유입과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는 일본의 한국 식민정책 속에서 교회는 이러한 대내외적인 문제들에 대처해야 했고, 동시에 변천하는 사회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적응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중적인 사명을 부여받았다.

 

한일합방 이후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되자 한국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인 소망 대신 종교적인 소망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한국교회에는 사회적인 책임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신앙을 내향화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교회에는 세대주의 종말론이 놀랍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성경 중심의 기독교가 더욱 강조되었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발흥은 한국의 개신교, 특히 선교를 주도했던 장로교, 성경교, 대한기독교, 동양선교회 등의 신앙을 타세적인 신앙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보의 아니게 하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3·1운동의 전후로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와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처럼 교회 밖으로부터의 기독교 비판이 강하게 일어나던 그 즈음, 교회 내부에서도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강한 도전이 일어났다. 그것은 자유주의 도전과 이단의 발흥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의 사회 경제적 혼란, 3.1운동의 실패,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발흥, 일제의 통치에 편승하는 어용 교단의 출현 등 끊임없이 계속된 사회적 혼란을 틈타 자유주의와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고 주류에서 벗어난 수많은 종파들이 태동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등장한 이단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마치 예일 대학의 교회사가 시드니 알스트롬이 그의 저서 미국의 종교사에서 미국 제 2차 대각성운동 이후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하는 그 시대를 가리켜 이단의 전성시대라고 명명했던 것과 같은 시대상이 출현한 것이다. ”

 

1919, 브라운은 자신의 극동의 정복에서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경을 사랑하고 구령의 열정에 불타고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교회라고 인정하면서도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사회적 적용에 비교적 무관심하고, “교회의 사상이 내세에 고정되어 있으며, “현 세상은 너무도 완전히 상실되어 이 세대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브라운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 선교사에게 사회 개혁의 방식에 대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질문하자 그는 전혀 못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에 너무 바쁩니다.” 라고 답변했다. 브라운은 한국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가 선교사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191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고 있었다. 원산부흥운동과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이어 진행된 백만인 구령 운동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를 주도했던 교회의 모습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1917년 춘원이 한국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촉구했고, 1922년 이후 동아일보가 사설을 통해 이 문제를 끊임없이 환기시켰으며, 1928년 예루살렘 국제 선교협의회에서는 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1918년 남감리교가 사회신경장정을 편입시켰고, 1920년 장감연합공의회는 사회봉사실현 프로그램을 확정했으며, 1912년에는 만주와 조선 주재 장로교 선교사 100명이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5일 간 회합을 갖고 조선인 교역자의 미국 유학 프로그램을 논의했고, 1925년에는 조선야소교 연합공의회에 사회부를 상설했고, 1·932년에는 사회신경을 채택했다. 그 시대 속에서 이와 같은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의식은 교회의 기독교문화 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전기가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간접선교와 직접선교의 균형의 필요성을 재인식한 것이다.

 

이렇듯 한국장로교회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도전, 교회 밖으로부터의 비판, 교회내부로부터 이단의 도전을 받고 있는 동안 한국에 파송 된 선교사들 가운데 특히 평양 주재 선교사들과 서울 주재 선교사들 사이에 뚜렷한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고 있었다. 이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곳에 학교를 옮기는 문제와 교단의 색이 반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교회와 사회의 계몽운동, 절제운동, 농촌운동, 진흥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에 이르러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로부터 시작된 영적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으로 한국교회는 엄청난 양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이와 함께 청소년운동과 주일학교운동에 관심을 갖기에 이른다. 이는 젊은이들을 깊은 영적 잠에서 깨워서 교회와 사회에 위대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복음 본래의 성격들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운동은 YMCA, YWCA등이 주도해 나갔다. 한편 주일학교도 활성화 하여 아이들 신앙교육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방학 중에 수련회를 통해서 이들을 교육하였다. 이밖에도 출판문화운동, 대 사회사업운동을 전개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 운영을 하였고 나환자들과 폐결핵 한자들을 위한 수용소와 병원의 설립 운영과 같은 사회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는 한국교회가 사회 속에서 단순히 복음만 전한 단체가 아니라 복음을 통한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책임의 실천을 통해 사회와 문화 속에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하나의 장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대 대사회적인 책임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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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부흥의 불길(19031906)

 

대각성 불길, 원산개성평양목포로

 

1900년대 초 한국교회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선교사의 내한 이래 첫 10년간은 고투의 날들이었으나 청일전쟁 이후 수적 성장을 보이더니, 1900년 이후 도처에서 사경회(査經會)가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도 변화의 시기였다. 청일전쟁(19845), 을미사변(1895), 노일전쟁(19045), 을사늑약(1905), 그리고 1910년의 강점으로 이어지는 국권상실의 과정은 역사의 아픔이자 좌절의 시기였다. 감리교 선교사 무즈(J R Moose)는 자신의 관할지역에서 의지할 곳 도무지 없소”(Wei-chi hal kot tomochi oupso, There is altogether no place to trust)라는 조선인의 절망을 보았다며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기가 도래했다고 썼다. 암울한 역사현실로부터 탈출하려는 욕구와 무언가 새로운 역사의 변혁에 대한 기대가 뒤엉킨 1900년대 첫 10년 동안 한국교회에는 몇 가지 형태의 신앙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1903년부터 1907년에 이르는 신앙부흥, 그리고 1909년의 100만인 구령운동(救靈運動)이었다.

 

부흥이란

 

부흥이란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인데, 근본적으로 부흥은 생명(life)과 각성(awakening)을 의미한다. 부흥운동사가인 에드윈 오르(Edwin Orr)는 부흥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나 신앙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초대교회에서와 같은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가운데 행하시는 특별한 역사로 정의되어 왔다. 이렇게 볼 때 성장(growth)은 인간의 계획과 의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점진적인 발전이라고 한다면, 부흥(revival)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실 때 교회의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현상으로서 혁명적인 요소가 있다. 부흥은 영적 각성과 함께 수적인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에 웨일즈부흥(1859) 기간 중에는 부흥을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들, 사람들로 충만한 교회라는 말로 정의하기도 했다.

 

이런 부흥이 1900년대 한국에서 재현된 것이다. 그 시원이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회개의 역사였다. 중국에서 일하던 남감리회의 화이트(Mary Cutler White)와 장로교의 매컬리(Louise H McCully)는 의화단(義和團) 사건을 피해 원산에 오게 되었는데, 이들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던 중 824일부터 1주일간 기도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때 캐나다 출신의 감리교 선교사 하디(Dr. R A Hardie)는 효과적인 기도에 대해 강의하던 중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었다. 회개는 자신에게도 큰 변화를 주었고, 회중 가운데서 회개의 역사를 불러 일으켰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였다. 이 작은 시작이 1903년 이후 이 강산을 부흥의 물결로 파도치게 만들었던 변화와 각성의 시작이었다. 부흥의 역사는 19038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해 10월 스웨덴에서 온 프란슨 목사(Rev F Franson)가 원산에서 장감침(長監浸) 연합사경회를 인도했을 때에도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한국에서의 부흥

 

이런 부흥의 역사는 1904년 봄 원산에서 다시 재현되었다. 이때의 초교파 사경회에서 장로교 선교사 롭(Alexander F Robb)과 장로교의 전계은(全啓恩), 감리교의 정춘수(鄭春洙) 목사도 성령충만을 경험했고, 부흥은 곧 개성 송도로 확산되었다. 그해 3월 서울에서 하디의 집회가 개최되었고, 여기서도 놀라운 각성이 일어났다. 1905년에도 개성을 중심으로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부흥이 일어나고 있을 때인 19059월 주한 네 장로교선교부와 두 감리교선교부 선교사들은 한국복음주의 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고,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기도달력(Prayer Calender)이었다.

 

1903년에 이어 1906년에는 또 한 차례의 큰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1906년 개성의 송도(松都)에서 부흥을 경험했는데, 크램(W G Cram)은 이때에도 회개와 죄의 고백이 일어났다고 증언했다. 평양주재 선교사들은 1906826일부터 92일까지 하디를 초청하여 평양선교사 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하디가 요한1서를 설교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했을 때 성령께서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증거 하였다. 이 집회에서도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셨다. 평양선교사 사경회 이후 서울에서 선교사연례대회(9. 29)가 개최되었다. 미국에서 온 존스톤 목사(Rev Howard Agnew Johnston)가 인도 카시아지방(Kassia hills)과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 보고했을 때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에게 영적 깨달음을 주었다. 그 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의 사경회, 10월에는 목포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다. 부흥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사경회)과 죄의 고백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쯤 평양에서는 한국교회의 고유한 전통이 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이자 전도사였던 길선주는 동료 장로인 박치록과 함께 19069월경부터 교회에서 새벽마다 기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1907년 이후 교회의 공식적인 기도회로 발전되었다. 1907년의 대부흥은 이런 과정 속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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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한국에서 기독교 부흥 배경

 

기독교와 민족주의

 

앞에서 한국에서의 급속한 기독교 성장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고, 1895년 이후의 급속한 성장은 청일전쟁 이후 민족자강의식이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사실 교회 성장은 어느 한 가지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다. 한국이라는 동일 문화권에서조차도 지역에 따라 기독교 수용 정도가 달랐다는 사실은 이 점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성장의 원인으로 다음의 몇 가지가 지적되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설명이 선교정책설인데, 한국교회 성장의 주된 요인이 선교사들의 고유한 선교정책 때문이었다는 주장이다. 복음전도와 함께 시행된 교육, 의료 활동이 영향을 끼쳤고, 1890년대 이후 채용된 네비우스 정책과 선교지역 분담정책이 한국교회 성장의 주된 요인이라고 말한다. 소열도(Stanley T Soltau), 왕영덕(Alfred W Wasson), 곽안련(Charles A Clark) 등 선교사들이 이런 입장을 대변한다. 김양선 김재준 강근환 등도 이에 동조한다. 그러나 정대위(鄭大爲)는 선교사 중심의 선교정책설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한국교회 성장을 한국의 기층문화인 샤머니즘, 곧 무교적(巫敎的) 세계관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결과로 주장한다. 그는 예일대학교에 제출한 박사학위 청구논문 한국 사회에서의 종교혼합 현상’(Religious Syncretism in Korean Society, 1959)에서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샤머니즘과 기독교와의 종교혼합 현상의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박봉배, 스펜서 팔머(Spencer Palmer)도 비슷한 입장이다.

 

한국교회 성장의 몇 가지 원인

 

이와는 달리 감리교적 배경의 윤성범, 유동식 등은 한국인의 심성(心性) 혹은 종교성(宗敎性)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사회학자 정재식은 한국 개신교의 성장은 19세기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지형학적 위치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받아 왔고, 정치적 환경에서 조성된 사회적 불안과 혼란은 종교적 욕구를 강화시켜 왔다고 주장한다. 쉬리어, 왓슨(Alfred W Wasson), 서고도(William Scott), 라토렛(K. S. Latourette) 등도 이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이런 입장은 교회성장은 그 시대의 역사 환경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역사환경론(歷史環境論)과 동일하다.

 

정치적 정황론이 정치적 상황이라는 한 측면을 강조한다면 역사환경론은 정치적 상황뿐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요인을 포괄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주장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니지만 한국에서의 기독교 수용과 성장에 대한 논의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기본적 전제는 한국이 일제의 식민 지배 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직접적으로 일제의 통치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이후지만, 기독교가 전래될 당시 한국은 점증하는 일제의 침략 하에 있었다. 병자수호조약의 체결(1876)을 통해 조선 진출의 발판을 확보한 일제는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 한반도에서 청과 러시아 세력을 물리쳤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1910년에는 한국을 병합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흔히 ‘15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만주사변(1931), 상해사변(1932), 중일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전쟁(1941)을 거쳐 1945년까지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이와 같은 일제의 식민 지배 하에서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 수용되어 갔다. 말하자면 일제의 강압적 식민 지배와 수탈 과정에서 기독교는 서구 문화나 교육, 의료 활동 등을 통해 민족의 필요를 채워주고 있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혼

 

정리하면 우리나라는 아아(亞阿) 제국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기독교 국가의 식민 통치를 받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기독교 국가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에서의 민족주의는 대체적으로 반()기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은 어떤 점에서 반민족적 행위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인도네시아였다. 300여년간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는 두 가지 성격이 있는데, 첫째는 반 외자(外資)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반기독교운동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반대적 상황이었다. 우리는 반기독교적인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융합될 수 있었다. 일제에게 우리는 수탈을 경험했으나, 기독교는 우리에게 수혜자였다. 기독교 신앙은 반일적 국민의식의 정신적 기초를 제공하였고, 때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반일운동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래서 교회는 민족과 유리된 배타적 집단이 아니라 민족의 아픔과 고난의 동반자였다.

 

선교사였던 존스(G. H. Jones)기독교 신앙에 대한 실질적 집착보다 더 강력한 애국충군의 보루는 찾기 어렵다고 평가했을 만큼 서양인의 눈에도 이런 현실이 읽혀지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기독교와 민족주의는 결합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기독교적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을 형성하게 된다. 김세윤은 이런 특수한 상황을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결혼이라고 불렀다.

 

바로 이런 특수한 상황이 한국에서 기독교 수용을 보다 용이하게 했고, 일제 지배 하에서도 기독교가 건재할 수 있는 힘이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 역사에서의 일제의 현존은 기독교의 수용과 성장을 촉진하는 배후세력이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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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사 기독교의 수용과 성장

 

 

청일전쟁 이후 한국교회 들불처럼 성장

 

외래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전통과는 달리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수용(受容)은 아아(亞阿)제국의 다른 나라들과는 비견될 수 없는 특별한 경우였다. 기포드(Gifford)189691일자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에 보낸 서신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을 들판을 태워가는 들불(wildfire)’에 비유했다. 로이 쉬리어(Shearer) 또한 지역적 편차가 있었음을 고려한다 할지라도 한국교회의 성장은 요원지화라는 점을 인정했다. 이것은 서양 선교사들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고, 1910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IMC)에서도 한국교회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비교할 수 없는 한국교회의 성장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해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 첫 10년간(18841894)고투의 시기였다. 이 시기의 신자 증가율은 미미했다. 기독교에 대한 오해, 유가적(儒家的) 전통문화와의 갈등, 정치적 정황이 복음전도의 장애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도사라고 불린 노춘경(盧春京)의 세례(1886711) 이후 수세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886년 말, 수세자는 전국적으로 9명에 불과했으나 다음 해에는 25명으로 불어났다. 1888년에는 65, 1889년에는 100명에 달했다. 1890년 당시 11명의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해의 수세자는 장로교 119, 감리교 36명 등 155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895년부터 수적 성장이 현저해졌다. 1894년까지만 해도 신자는 불과 500명 전후로 추정되지만 1895년에는 746명으로 성장했다. 1895년에서 1896년 사이에는 2500여명으로, 18967년에는 3300여명으로 증가했다. 1900년에는 약 12000명으로, 1905년에는 26057, 1920년에는 92510, 1930년에는 125479명으로 성장했다. 민경배 교수는 1930년대 한국교회 신자가 38만명에 이르렀다고 분석한다. 물론 통계자료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한국교회의 성장은 아아제국의 다른 나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특별한 경우라는 점이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선교사의 입국 이후 첫 10년간의 성장은 미미했으나 1895년 이후 급속한 성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여세가 그 이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낙준은 특히 1897년부터 1906년까지 성장이 뚜렷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있어 커다란 숙제는 왜 이때 갑작스런 성장이 나타났는가 하는 점이다.

 

청일전쟁, 그리고 기독교 수용

 

1895년 이후라는 말은 청일전쟁(18941895) 이후라는 의미인데, 이 전쟁이 기독교에 대한 인식 변화에 유효한 의미를 주었음을 알 수 있다. 1894725일에는 일본군이 남양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에 포격을 가함으로써 시작된 청일전쟁의 전장(戰場)은 우리나라였고, 우리의 주권을 침탈하려는 싸움이었다. 이때 조야(朝野)는 일본의 승리를 예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두 달이 못돼 일본이 승기를 잡았다. 816일 평양전투에서, 다음 날은 압록강 입구에서 청의 육군과 해군을 격파했다.

 

청의 패배와 일본의 승리는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곧 그 원인은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인식은 당시로서는 중대한 발견이었다. 조선의 조야는 이제 세계질서, 그리고 극동의 새로운 정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점증하는 열강들의 야욕을 희미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도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민족적 자강(自强)을 이룰 수 없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서구와 손잡는 방법은 무엇인가? 당시로서는 기독교라는 통로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서양기술에 대한 인식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소수의 엘리트 그룹의 기독교 영입론은 그 시대의 요청이었다.

 

기독교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

 

코리안 리포지토리(Korean Repository)에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 가련한 조선인들은 고난과 불안의 와중에서 두 손을 뻗쳐 하나님을 찾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아직 미미한 서양종교로만 이해되던 기독교에 대해 새로운 관심이 일었고 청일전쟁이 끝난 1895년부터 신자 수는 급증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기독교는 서구문화의 도관(導管)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청일전쟁 이후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신자의 급증은 기독교를 통한 민족 자강의식의 발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호주의 역사가 케네드 웰즈(K M Wells)자강 민족주의(self-reconstruction nationalism)’이라고 불렀다.

 

적어도 1895년 이후 1910년대의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기독교를 통해 민족적 자강을 이루는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또한 이런 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1895108, 국모로 일컫던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된 것은 단순히 한 여인의 죽음이 아니라 국가 변란을 시도한 사변이었다. 일본의 조선침탈 야욕을 선명하게 노출한 이 사건은 심각한 국가적 위기였다. 이 위기에서 탈출하려는 의식은 서양문물에 대한 관심을 노출하였고, 고종은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기독교 집단 스스로 충군애국의 종교로 민족의 과제를 거부하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교회성장은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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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 토착화된 새벽 기도의 유래와 본질
1909년 전주교회에 종을 설치하기 위해 소달구지로 종을 나르고 있다. 수직성을 확보한 종탑에서 나오는 종소리로 전주시의 시간이 성화(聖化)하기 시작했다.

 

새벽 기도회는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의례다. 지금 50대 중반을 넘은 분들은 젊었을 때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교회에 나간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무교(여성의 새벽 치성)나 불교(남녀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되었다는 통설을 비판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새벽기도가 남자들의 선도(仙道) 수련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고 새벽기도의 기독교화 과정이 어땠는지도 서술할 생각이다. 유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초기 새벽 기도회에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초월성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한 역사성이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유래와 시작

(1) 한국교회 새벽기도가 불교나 무교에서 유래되었는가?

여러 글과 책에 초기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불교 사찰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했다고 한 다. 또 민간 무속의 여성들이 새벽에 정화수를 떠 놓고 샛별(계명성)이나 칠성신에게 빌던 성수(星宿) 신앙, 고목 앞에서 빌던 신목(神木) 신앙 혹은 조왕신 (부엌 음식 신)에게 빌던 데서 왔다고 서술하기도 한다. 새벽 미명은 신령한 존재와 영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여인들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하게 빌고 치성을 드렸다. 그 기복적 가족 기도가 그대로 기독교로 넘어와서 새벽마다 교회에서 가족의 건강과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기도하는 ‘무교적 기독교인’이 많다고 비판해 왔다.
옥성득 교수

 

그러나 필자는 초대 한국교회에 관한 기록에서 새벽기도가 그런 연관성을 가졌다고 언급한 자료를 아직 본 적이 없다. 1970년대 이후에 급성장한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글들이 피상적으로 그 연결성을 유추하고 짐작한 것뿐이다. 그러한 글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나 1차 사료(史料)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다.

(2) 도시 파루와 사찰 새벽종이 새벽기도 종의 기원인가?

대개 초대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4시 30분이나 5시에 드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새벽 4시 30분이라는 시간은 도성(都城)의 새벽 파루(罷漏)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큰 도시는 4대 문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세종 때 만든 자격루(自擊漏, 물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알았다. 따라서 같은 시각에 종을 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새벽 4시에는 파루(罷漏)로 33번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통행을 시작했다. 밤 10시에는 인정(人定, 인경)으로 28번 타종하여 우주의 일월성신 28개 별자리를 쉬게 하고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파루 때 했던 33번 타종은 불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는 33개의 하늘을 깨우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찰처럼 새벽 3시나 5시가 아니라 도성에서 4시에 파루를 친 것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노동을 해야 했던 농경시대의 산물이었다. 수천 년 간 그때 일어나 일하던 인간의 생체리듬에 맞춘 것이었다. 새벽 기도회를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것은 4시에 통행이 시작되던 습관을 따라 한 것이다. 도성의 종각에서 타종하지 않아도 4시에 일어나 예배당에 오면 4시 30분이 되었고 먼 곳에서 오는 자들이 많으면 5시에 모여 기도할 수 있었다. 즉 파루와 연관한 하루 일상의 시작 시간에 일어나 교회로 와서 새벽 기도회로 모였다.

그러나 절에서는 하루 다섯 번 범종을 울리고 예불을 드렸다. 초경(밤 8시), 이경(밤 10시), 삼경(자정, 108번), 사경(새벽 3시, 5번), 오경(새벽 5시, 28번 타종으로 28세계가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 등이었다. 사찰의 상가 공동체는 성(城) 안에 있지 않고 산속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예불, 다시 새벽 5시에 운판(나무판)을 치고 목어(목탁)를 울리고, 법고(북)를 울린 다음에 범종(梵鍾)을 28번치고 승려들이 함께 모여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기를 구했다.

사찰의 그것은 일과에 따라 기도했던 중세 유럽 수도원의 수도사들처럼 생체리듬에 반하는 시간에 일어나 묵상하고 잠과 욕망을 끊는 행위로 드린 염불이었다. 즉 사찰의 새벽종은 세속 도시의 하루를 시작하는 파루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종으로 속세를 떠난 수도승의 정좌와 묵상과 예불을 위한 시공간이었다. 그 피안의 공간에서 매일 자정과 새벽 3시에도 일어나 육체성을 거부하고 전문 종교인 집단의 집회를 만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새벽기도와 달랐고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적었다.

정리하면 새벽기도는 불교 사찰의 범종이나 전문 종교인들이 드린 피안적 예불과 상관이 없다. 오히려 세속 도성의 새벽 파루와 함께했던 하루 일상의 시작과 연관된다. 그와 같은 세속성 안에서 거룩성을 회복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신자들이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던 데서 창출되었다. 긴장감이 있는 성속(聖俗)의 경계에서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문지방과 같은 틈새 시간에 새롭게 넣은 기도시간이었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무교적 민속신앙이 그 유래인가?

1905년 초 송도(개성)서 열린 남감리회 부인사경회 때 캐롤(A. Carroll)이 경험한 내용을 보자. “아침 여섯 시가 되자 마치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건너에 있던 여자 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다음 날은 새로 몇 사람이 더 오더니 새벽 4시에 사람들을 깨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덕주 교수는 이 글을 해석하면서 과거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조왕신(竈王神)에게 빌던 여자들의 습관이 사경회 기간 중에 새벽 기도회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보았다.(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348~350쪽) 그런데 이 자료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부엌에서 조왕신에게 노래로 찬양을 드렸던가? 아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치성(致誠)을 드릴 때 옆 사람들과 한 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누었던가? 아니다. 자료에 나오는 일시적인 새벽 기도회와 무속의 조왕신이나 치성사이에는 시공간, 성격, 의례 모든 면에서 연속성을 찾기 어렵다.

2.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

새벽기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필자가 발표한 논문이 있다. 자세한 논의는 ‘평양 대부흥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한국기독교와 역사, 25호, 2006년 9월, 7~35쪽)을 보라. 필자는 이 논문에서 선도(仙道)의 수행자였던 평양의 길선주와 그의 동료들이 청일전쟁 후에 개종하고 평소 수행(修行)을 하던 새벽기도, 통성기도, 철야기도 등을 1905년 전후 사경회(査經會)에 도입했으며, 1909년 전후에 교회 프로그램인 기도회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새벽기도가 길선주와 그 친구들의 도교(道敎) 수행에서 유래했다는 나의 이 주장에 대해 아직 반론을 들은 적이 없다.

필자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길선주가 중심이 되어 선도(仙道)에서 기독교로 토착화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1910년 전후부터 한국교회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사적인 소원을 빌었던 도교(道敎)의 기도와 비교하면 개신교의 기도는 민족적 위기에 교회와 민족 공동체를 위한 공공성(公共性)을 지니고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또한 집단적인 ‘새벽기도’는 장로교회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1898년 2월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에서 일반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으며, 황해도의 다른 사경회(1901년 2월)에서도 교인들이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 것을 처음 소개했다. 이와 같이 사경회(査經會) 때 소규모 일시적으로 모이던 새벽 기도회가 1905년 평양 도(道) 사경회 때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었으며 1909년에 개교회의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다고 정리했다.

3. 1890~1905년 사경회와 새벽기도회

선교사들은 1892년 10명 정도의 한국인 남자 지도자들과 조사를 모아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성경, 교리, 전도법, 설교법, 교회 치리법 등을 가르치는 사경회(査經會)를 조직했다. 1891년 채택한 네비어스의 방법에 따라 본토인 목회자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1892년 11월 28일부터 12월 24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첫 신학반에 참석한 백홍준, 한석진 외 참석자들이 새벽에 일어나 자발적인 기도회로 모였다. 이후 이 조사 사경회(査經會)에서 새벽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임이 계속되었다. 조사 사경회의 새벽 기도회가 황해도에서 일반 사경회 새벽 기도회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말테의 논문 ‘한국 개신교회 새벽기도의 초기에 대한 연구’(신학과 실천 31호, 2012년 5월, 183~225쪽)에는 1892년 조사 사경회(査經會) 전 백홍준, 마포삼열, 한석진 등의 새벽기도 사례를 소개한 후 여러 사경회에서 행해진 새벽 기도(회) 사례를 잘 정리해 놓았다. 후자는 필자가 소개한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 새벽기도(1898년 2월)와 다른 황해도 사경회 새벽기도(1901년 2월)에 이어 평북 초산(1901), 원산(1903), 평양(1904), 서울 이화학당(1904), 송도(1905) 등의 사경회(査經會)에서 이루어진 새벽기도 사례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어서 필자가 정리한 1909년 길선주와 박치록 장로가 주도한 평양 장대현교회의 새벽 기도회를 마지막으로 언급했다. 이 가운데 1909년 새벽 기도회만 교회에서 광고한 후 일반 신도들이 모인 기도회였고 나머지는 사경회 때 이루어진 일주일 정도의 한시적인 기도회였다.

이말테는 새벽 기도를 남성들이 시작한 것에 주목했다. 여성들의 무속적 새벽 치성에서 새벽 기도가 유래했다는 통설을 비판했다. 또한 1893년 평양 지부를 개척하던 마페트(S. A. Moffett) 선교사와 조사 한석진 가정의 새벽기도를 근거로 마페트가 새벽기도 창시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페트가 새벽기도를 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더 검토되어야 한다. 만일 그가 새벽기도에 관심이 많았다면 1895년 이후 가정에서 새벽기도를 꾸준히 드리거나 평양 널다리교회 혹은 장대현교회가 준공된 1900년에 새벽 기도회를 창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페트가 남긴 글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또한 개인적으로 잠시 드린 새벽기도를 교회의 ‘새벽 기도회’의 유래로 보기는 어렵다.

(1) 길선주의 첫 장대현교회 새벽 기도회는 1906년 아닌 1909년

많은 책이나 온라인 블로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잘못된 글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새벽기도는 1906년 가을 길선주 장로의 주도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였다. 이 새벽 기도회는 1907년 평양에서 촉발된 한국 기독교 부흥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길선주 장로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당시 일제강점기)에 놓여 있는 것을 걱정하여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고 많은 교인들이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300~500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6년 가을에 시작했다.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7년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는 세 가지 주장은 오류다. 1906년으로 알려진 것은 김인서가 1930년대 ‘신앙생활’에 길선주 소전을 쓰면서 그렇게 잘못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새벽 기도회는 부흥운동이 끝난 후 열기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냉랭해졌을 때 다시 부흥의 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1909년에 시작한 새로운 부흥회 방법이었다. 또한 아직 한국이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기 이전이었다.

(2) 새벽 기도회가 정착한 것은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1907년 대(大) 부흥 이후 1910년대에 새벽 기도회가 한국교회에 널리 시행되고 매일 새벽에 모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런 기록은 없다. 이덕주 교수가 지적한 대로 1914년에 시작한 강화도 마리산 부흥회 때나 여러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 모두 일주일을 사경회(査經會)와 부흥회 때 드린 것이 전부 다이다. 그러므로 아직 개 교회 차원에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또 교회에 홀로 새벽에 나가 30일이나 100일 개인 기도를 드린 예들이나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신석구 목사의 개인 새벽기도 등에서 보듯이 1919년 이전에는 매일 새벽 기도회로 모이는 교회가 없었다.

1920년대 후반에 정착하는 새벽 기도회 자료는 더 수집해서 정리해야 할 주제다. 이때 새벽 기도회가 매일 드리는 일상의 기도로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자리 잡은 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더욱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하루하루가 종말인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3) 새벽 시간의 기독교화로 파루를 대신한 교회의 새벽 종소리

1910년대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는 도시의 새벽 시간을 기독교화하기 시작했다. 1910년 전후 일제 총독부는 문명의 발전과 도로 확장과 신작로 개설이라는 명목으로 서울과 다른 도시들의 성벽(城壁)을 다 허물었다. 사대문(四大門)을 지키는 일본 순경의 호각 소리와 칼 소리가 새벽 소리가 되었다. 성벽이 없는 경성(京城)에 보신각(普信閣)은 무용지물이라 폐쇄(閉鎖)되었다. 서울은 영혼(靈魂)의 종소리를 잃어버렸다. 성(城)이 없는 경성은 보신각 종소리(聲)가 사라진 경성이었고 종소리 없는 도시는 성스러움(聖)이 사라진 식민지의 경성이었다.

이러한 때에 도시와 시민들에게 다시 종소리를 준 것이 교회와 성당이었다. 명동성당에서는 아침 6시, 정오 12시, 저녁 6시에 하루 3번 종을 쳤다. 주일마다 각 도시 교회와 그리고 점차 교회마다 사경회를 다른 기간에 하면서 새벽에 종을 쳤다. 여러 교회에서 퍼져 나간 종소리는 다시 새벽시간을 구별하고 도시의 새벽을 살리는 영성(靈聲)이 되었다. 도시의 혼이 살아나는 소리였다. 성수주일이 일주일을 시작하는 안식일의 성화였다면 새벽기도는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의 성화였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성도들이 확보한 시공간

성(城) 안에 사는 시민들은 새벽 4시에 성문이 열리면 일어나던 습관을 따라 성(城)의 종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대개 4시에 거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교회에 도착하는 4시 30분이나 5시에 새벽 기도회로 모이고 이어 일하러 가면 시간이 적절했다. 따라서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격리된 산속에 있는 사찰에서 새벽 3시나 5시에 승려들끼리 모여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불을 드리는 것과 달랐다.

세속 도시 속에서 거룩성을 느끼고 영성을 유지하려는 노동자와 주부들의 기도회였다. 그 예배는 곧 다가올 일상의 무거움 앞에 하늘의 도움을 구하는 시간이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하루의 문지방과 같은 경계선의 시간의 사이(時間), 그래서 긴장이 팽팽한 틈새 시간, 변혁을 품고 있는 전이의 시공간에 새벽을 깨우는 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구했다. 새벽에 일어나야 생존할 수 있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들과 밤낮 쉼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잠자는 하늘을 깨우거나 중생을 계몽하려는 사찰의 예불과 달랐으며 여성들이 홀로 칠성신(七星神)에게 비는 민간신앙의 치성과 달랐다. 전자에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없었고 후자에는 남녀가 함께 하는 공동체성이 없었다. 양자 모두 공적(公的) 기도가 없었다. 새벽 기도회가 한국 개신교를 상징하는 의례가 된 것은 피안(彼岸)의 기도나 사적 기복인 기도와 달리 세속 안에서 일반 교인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公的)인 기도회로 기독교화 했기 때문이다.

소리가 세상을 구한다. 거룩한 영혼의 종소리가 사라진 한국교회에 다시 종을 치는 종지기들이 필요하다. 남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새벽마다 종을 치던 사찰 집사님의 매일의 헌신이 있던 교회 어릴 때 들었던 교회의 그 종소리가 그립다. 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새벽 미명에 무릎 꿇고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어머니들의 눈물로 지금 청년과 장년들이 그나마 살고 교회가 살아 있다.

진정한 새벽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한 손에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수직성을 담고 다른 한 손에는 세속 성자로서 민족을 위해 도고하는 수평성을 담아 두 손을 모아 함께 드리는 새벽 기도로 교회가 산다.(*) 글쓴 이 / 옥성득(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석좌 부교수, 한국기독교).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90세의 김창근 집사님 39년 거제 어구교회 종지기


뎅그랑 뎅! 뎅그랑 뎅! 김창근
집사님이 거제시 둔덕면 어구리 어구교회 종을 울리고 있다. 병 색이 엿보이나 그래도 종지기로 서의 소명의식만큼은 철저하다. 새벽 4시 반 여명을 깨우는 교회 종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며 부 드럽게 포구를 감싼다. 마을을 돌아 나온 종소리는 이내 남해 바다를 건너 갯내읍을 타고 이순신의 섬 한산도까지 뻗어나간다. 한산도까지는 뱃길로 15분 바닷가를 따라 70여 호가 옹기종기 몰려있는 작은 포구 경남 거제시 둔덕면 어구리의 하루가 이렇게 시작된다.

날마다 새벽을 깨우는 주인공이 바로 39년 종지기 김창근(90년 은퇴) 집사님이다. 1967년 마을에 어구교회가 들어선 지 39년, 교회를 거쳐 간 목사가 10명이 넘지만 종지기만큼은 늘 집사님 몫이었다. 김 집사님은 과연 몇 번의 종을 칠까? 이전에는 매일 정확히 50번 씩 종을 쳤다. 그러나 집사님 귀가 어두워지면서 요즘은 70번, 100번을 치기도 한다. 그렇다고 불평하는 주민은 없다. 270여명의 주민 중 교인은 30여명에 불과하지만 교회 종소리는 이미 주민들의 일상이 되었다. 시계도 없던 가난하고 힘겨웠던 주민들에게 김 집사님이 치는 교회의 새벽종소리는 논밭일의 시작과 출어(出漁)를 알리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김 집사님은 어구교회 설립 성도 중 한 사람이다. 1967년 그 때는 종 대신 산소통을 소나무에 매달아 두들겼다. 1999년 새 교회당을 짓고 종을 철거하려했으나 집사님은 자식들이 준 쌈짓돈 70만원을 내놔 오히려 종탑까지 세웠다. 그런데 요즘은 종소리가 울리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집사님 건강 때문이다. 머지않아 집사님이 천국으로 떠나시면 사람들은 더 이상 종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후계자가 없다. 하지만 김 집사님이 힘을 다해 쳤던 교회당 종소리를 주민들은 ‘천국의 소리’로 기억할 것이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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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발흥과 기독교 사회개혁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한국을 중국과 러시아의 지배로부터 분리시키고 영국과 미국의 양해 하에” 보호조약과 합병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일합방 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 “36년 간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 황국신민화정책으로 그 통치방법이 변화되어 왔지만 식민지 지배와 수탈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어용사가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틴 대제의 통치에 아부했던 것처럼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일본의 한국 합병을 예찬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양심의 소리는 있었다. “조선합병”이라는 글에서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를 잃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손실을 위로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일은 곧 또 하나의 폴란드를 합병한 일이며, 결국 이 먹이를 완전히 소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바랄 수 없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한일합방과 국권의 상실로 한국기독교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어려움 가운데도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간다. 이런 기독교의 활동은 일본 정부로 하여금 한국 개신교인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차가운 눈총을 보내기 시작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안, 밖으로 저항을 하면서 한국 기독교는 한국근대화와 민족계몽을 통한 민족주의 사상의 고취에 크게 기여한다.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본 정부는 통감부를 통해 새로운 학교령을 공포하고 신민지 교육시책을 강요함은 물로 관공립 보통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폐지시키고 사립학교 설립을 인가제로 전환시켜 일제의 관할 하에 두면서 학교 설립을 규제했다. 이에 대해서 한국에 파송 된 선교회는 내용적으로는 비정치화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예찬하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 선교사들은 일본의 한국 통치를 정당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일제의 기독교 탄압의 가속화로 한국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입장은 저항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청과 일본의 무력에 의해 수난 당하는 현장을 목도하던 국내의 외국 선교사들 중에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무단정치를 우려하며 그것을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 감리회 소속 케이블 선교사는 1908년에 일제의 무단정치를 폭로하는 한 보고서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다. 일제가 한국기독교에 대해 가했던 폭행과 살해 사건은 일제가 교회를 어떻게 보았으며, 그들이 얼마나 반기독교적 탄압정책을 썼는지를 말해 준다. 일제는 선교사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그들의 선교구에 있는 한인교회들에게 박해를 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지를 전달했고 이와 같은 기독교 박해는 통감부가 설치된 후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105인 사건은 대부흥 운동을 거치면서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한국기독교가 일본 식민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적 반정부 단체라는 일제의 인식에서 기인되었다. 한국 선교의 개척자 제임스 게일이 전환기의 한국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은 정치적 존재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선교사들의 세계에서는 제일류의 세력”으로 인정받을 만큼 세계 기독교계로부터 주목 받는 대상이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1909년 백만인 구령 운동을 통해 세계 선교지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놀랍게 성장한 데다 신학교 설립, 노회와 총회의 설립 등으로 하나의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큰 세력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1884년 알렌에 의해 시작된 한국선교가 과거 “지배권 쟁탈을 다투는 강대국들의 포성이 두 번이나 진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25주년이 지난 후 “1910년대의 기독교는 정립된 종교요, 기독교회는 큰 능력을 내포한 민족적 기관으로” 발돋음한 것이다.

 

3·1운동 당시 마침 극동을 방문, 현장을 확인한 블랜드가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지적한 것처럼 3·1운동은 일본의 무단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민족국가의 출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선언에 자극 받아 일어난 한국 민족의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결집력은 “민족 종교와 같은 특징을 지닌, 민족의 자유,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기독교에서 나왔다.

 

3·1운동 이후, 제임스 부컬크가 말한 “반기독교 운동”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여 1922년에 정점에 달했던 것이다. 특히 반 기독교적 성격을 지닌 휴머니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발흥으로 젊은이들 사이에는 반기독교적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었고,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젊은이들과 기성세대의 충돌, 자유결혼, 여권운동, 교회의 사회참여 문제가 중요한 시재적 현안으로 부사했다. 또한 경제 공항으로 젊은이들의 심리상태는 극도로 불안했고,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어 교회의 영적침체가 더욱 심화 되었다. 더구나 진화론과 고등비평의 유입으로 전통적인 창조론과 성경관이 일대 도전을 맞기 시작했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조직된 조선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 김장호의 자유주의 사건은 그 전형적인 예다. 3년간의 미국 연구를 마치고 1912년에 돌아온 연희전문학교의 벡커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 청년들 사이에는 “격세의 감”을 느낄 정도로 커다란 사상적 변화가 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사조들의 유입과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는 일본의 한국 식민정책 속에서 교회는 이러한 대내외적인 문제들에 대처해야 했고, 동시에 변천하는 사회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적응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중적인 사명을 부여받았다.

한일합방 이후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되자 한국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인 소망 대신 종교적인 소망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한국교회에는 사회적인 책임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신앙을 내향화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교회에는 세대주의 종말론이 놀랍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성경 중심의 기독교가 더욱 강조되었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발흥은 한국의 개신교, 특히 선교를 주도했던 장로교, 성경교, 대한기독교, 동양선교회 등의 신앙을 타세적인 신앙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보의 아니게 하회적인 책임을 간과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3·1운동의 전후로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와 춘원 이광수의 기독교 비판처럼 교회 밖으로부터의 기독교 비판이 강하게 일어나던 그 즈음, 교회 내부에서도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강한 도전이 일어났다. 그것은 자유주의 도전과 이단의 발흥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의 사회 경제적 혼란, 3.1운동의 실패,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발흥, 일제의 통치에 편승하는 어용 교단의 출현 등 끊임없이 계속된 사회적 혼란을 틈타 자유주의와 반선교사의 기치를 내걸고 주류에서 벗어난 수많은 종파들이 태동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등장한 이단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마치 예일 대학의 교회사가 시드니 알스트롬이 그의 저서 미국의 종교사에서 미국 제 2차 대각성운동 이후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하는 그 시대를 가리켜 “이단의 전성시대라고 명명했던 것과 같은 시대상이 출현한 것이다. ”

 

1919년, 브라운은 자신의 극동의 정복에서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경을 사랑하고 구령의 열정에 불타고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교회라고 인정하면서도 한국기독교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사회적 적용에 비교적 무관심”하고, “교회의 사상이 내세에 고정”되어 있으며, “현 세상은 너무도 완전히 상실되어 이 세대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브라운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 선교사에게 “사회 개혁의 방식에 대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질문하자 그는 “전혀 못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에 너무 바쁩니다.” 라고 답변했다. 브라운은 한국의 사회적 관심의 결여가 선교사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191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고 있었다. 원산부흥운동과 평양 대부흥 운동, 그리고 이어 진행된 백만인 구령 운동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를 주도했던 교회의 모습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1917년 춘원이 한국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촉구했고, 1922년 이후 동아일보가 사설을 통해 이 문제를 끊임없이 환기시켰으며, 1928년 예루살렘 국제 선교협의회에서는 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1918년 남감리교가 사회신경장정을 편입시켰고, 1920년 장감연합공의회는 사회봉사실현 프로그램을 확정했으며, 1912년에는 만주와 조선 주재 장로교 선교사 100명이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5일 간 회합을 갖고 조선인 교역자의 미국 유학 프로그램을 논의했고, 1925년에는 조선야소교 연합공의회에 사회부를 상설했고, 1·932년에는 사회신경을 채택했다. 그 시대 속에서 이와 같은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의식은 교회의 기독교문화 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전기가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운동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간접선교와 직접선교의 균형의 필요성을 재인식한 것이다.

 

이렇듯 한국장로교회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의 도전, 교회 밖으로부터의 비판, 교회내부로부터 이단의 도전을 받고 있는 동안 한국에 파송 된 선교사들 가운데 특히 평양 주재 선교사들과 서울 주재 선교사들 사이에 뚜렷한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고 있었다. 이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곳에 학교를 옮기는 문제와 교단의 색이 반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교회와 사회의 계몽운동, 절제운동, 농촌운동, 진흥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에 이르러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로부터 시작된 영적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으로 한국교회는 엄청난 양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이와 함께 청소년운동과 주일학교운동에 관심을 갖기에 이른다. 이는 젊은이들을 깊은 영적 잠에서 깨워서 교회와 사회에 위대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복음 본래의 성격들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운동은 YMCA, YWCA등이 주도해 나갔다. 한편 주일학교도 활성화 하여 아이들 신앙교육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방학 중에 수련회를 통해서 이들을 교육하였다. 이밖에도 출판문화운동, 대 사회사업운동을 전개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 운영을 하였고 나환자들과 폐결핵 한자들을 위한 수용소와 병원의 설립 운영과 같은 사회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는 한국교회가 사회 속에서 단순히 복음만 전한 단체가 아니라 복음을 통한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책임의 실천을 통해 사회와 문화 속에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하나의 장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대 대사회적인 책임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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