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절의 첫 날 유월절로 그리고 종려주일을 맞이하여(4)

 

 


종려주일을 맞이하여(4).

 

이 날은 무교절의 첫 날 유월절로 양을 잡는 날이었습니다.
가나안력으로는 아빕월이라 하고 바벨론력으로는 니산월 14일입니다.
이때로부터 일주일 간 무교절로 지키고 무교절 첫 날은 유월절과 합쳐져서
유월절은 무교절 첫 날로 간주됩니다. 태양력으로 보면 요즈음인 3-4월에 해당됩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의 마지막 재앙 장자의 죽음이 있었던 날로
히브리인 가정은 명령대로 양 한마리를 잡아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르게 하였고
그렇게 한 집은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던 날 passover을 기념합니다.


유월절 저녁에는 일 년 된 수컷 어린 양을 잡고
뼈를 꺽지 않아야 하며 불에 구워서
무교절 기간에 먹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과 함께 먹으며
조상들이 황급히 애굽을 벗어나던 때를 기억하며 지키는 날입니다.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 드실 곳을 어디서 예비 하면 되는지 주께 여쭙고, 주께서는 제자 둘을 보내시며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이를 만나게 될 것이니 그를 따라가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고 지시하십니다.


1. 도대체 누가 주를..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갑자기 예수께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담아 그동안 함께 해왔던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어루만지며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십니다.


낡은 샌들을 신고 하루 종일 먼지나는 길로 다녔으니
때묻고 더러워진 그 발을 다른 사람에게 내밀기도 불편하지만,
더구나 주의 손에 그 발을 맡기기에는 참으로 송구스러웠을 것입니다.

더러워진 자기 발을
누군가에게 내밀고 닦아 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종을 거느린 상전들이나 할 일이었지요.
그런데 하물며 하늘같은 주께서 발을 내밀라 하시다니요.


예수님의 갑작스런 행동을 지켜보던 베드로는
자기의 순서가 되자 황급히 일어나며 말하기를

"주여,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시니
베드로는 곧 태도를 바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시면 안될까요?"~ㅎ

예수께서도 피식 웃음이 나셨을 듯 합니다.
베드로의 이런 넉살은 지금도 부럽기 이를데 없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닦으시는 주께서
그들의 발을 어루만지시며
함께 해 온 삼 년의 시간들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주의 이름으로 그들이 가야 할
그 험난한 길들을 걷게 될 그들의 발을 생각 하셨을 것입니다.

부디..
그 험한 날들을 이기고
승리하기를 축복하고 격려하시며 발을 닦으셨겠지요.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셨을까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에
또 얼마나 눈물이 가렸을까요..

주께서 정성스럽게 닦아 주신 발을 거두고
제자들은 마음 깊은 감동과 함께
조용히 떡을 떼고 있을 때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이 왠 청천벽력 같은 말씀일까요?

충격적인 말씀에 깜짝 놀란 제자들이
서로 그 사람이 자기인지 묻습니다.
물론 결코 아니라는 강한 부정의 몸짓이지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시니,
유다가 짐짓 태연한 척 말하기를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어떻게 그 일을 아셨을지 궁금하기도 했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지체할 일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겠지요.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나
다른 제자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팔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지.. 더 묻기도 난감합니다.

지금 그들의 머리 속에 채워진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은 지금 이 순간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이 순간에 대해 누가의 기록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이 긴장된 순간에.. 철없는 제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훗날 이들이 선택하고 걸어간 그 길은
대부분 순교자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 곁에 비스듬히 누워 듣던 요한은 이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베드로가 머리 짓으로 '주께서 말씀하신 자가 누군지 말하라'고 하실 때,
예수께서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는
곧 한 조각을 찍으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하시니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슨 뜻으로 하신 것인지 알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주를 따르는 이들이 헛된 곳에 마음이 팔리면 주의 말씀도 들리지 않지만
이런 헛된 마음은 무엇이든 자신의 생각을 믿어 버리는 습성이 생깁니다.

이어지는 기록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은 요한복음 15장의 기록을 통해 이 부분을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 기대어 들었던 요한이 가장 정확히 기억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2. 이를 기념하라

마태의 기록은 계속 이어집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마지막을 준비하시는 것이었으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제자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향하였다고..
거기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지 못한 채..
머리 속에는 여전히 누가 더 크고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지 내심 기대를 가지며..

누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붇는 것이라..
인자는 이미 작정한대로 가거니와.."

아마도 훗날..
이 기록을 남기는 제자들은 이날을 회상하며
뜨거운 눈물로 이 기록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이때 성질급한 베드로가 바로 한 마디 합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러자 모든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그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옅은 미소로 베드로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단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제자들도 함께 그렇게 말하면서
겟세마네라 하는 운명의 장소에 이릅니다.

아마 지금의 마음 같아서는
볏 단을 지고 불속에라도 뛰어들 기세였을 것입니다.
곧 있게 될 예루살렘의 영광을 꿈꾸며..

오늘 우리는 다른가요?


3. 처절한 겟세마네 기도

겟세마네에 이르자 제자들을 한 곳에 앉아 기다리게 하시고,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저만큼 더 가서 고민하고 슬퍼하시며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혼자 조금 더 나아가셔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기도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시던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시니
그 시간 제자들은 피곤한 눈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들었다지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께서는 다시 돌이켜 두 번이나 같은 기도를 드리시는데..

통한의 새벽은 점점 다가오고..


누가는 이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는지를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새벽이 다가오자 눈물과 땀에 젖은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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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려주일]예루살렘 입성

 

기념 ‘호산나주일’로 불리기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린 성화. ⓒ위키피디아

종려주일(棕櫚主日, Palm Sunday)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마 21:1-11, 막 11:1-11, 눅 19:28-38, 요 12:12-19).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의와 아름다움, 승리 등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날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다.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된 그대로였으며, 그래서 '호산나주일'이라 불리기도 했다.

종려주일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385년경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에 나오는데, 당시 동로마 교회에 속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축하의 의미로 종려 행렬이 나섰다. 반면 서로마 교회들은 축하 분위기 대신 애도의 성격을 띠었다고 한다. 6세기경 스페인 의식서를 보면, 5세기경 동로마 교회의 종려주일 풍습이 전해졌음을 볼 수 있다.

중세에는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다음, 가까이 있는 다른 교회로 걸어가는 것이 종려주일의 관습이었다고 한다. 성도들은 종려주일이 되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되새겼다.

 
축성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축성이란 성례에 쓰이는 물건 등을 정해진 의식을 통해 성스러운 것으로 구별하는 것으로, 구약의 성별 의식(출 40:9-15)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중세 교회에서는 종려주일에 사용하는 종려나무 가지에 축성 의식을 행했다. 축성된 종려나무 가지는 귀신을 추방하거나 질병의 치유와 재앙을 막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도 했다.

군중들은 이렇듯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메시아 또는 선지자, 왕을 맞아들이는 예식을 거행했지만, 5일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올해는 4월 9일이 종려주일이며, 다음날인 10일부터 부활절 전날인 15일까지는 '고난주간(苦難週間, passion week)'이다.

'수난주간(受難週間)'으로도 불리는 고난주간은 잘 알려져 있듯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절기로, 종려주일 다음 날부터 부활 직전까지의 1주간을 말한다.

예로부터 성도들은 고난주간이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냈다. 특히 최후의 만찬과 세족식을 기념하는 목요일, '세족목요일(洗足木曜日)'과 주님이 십자가 달려 돌아가신 금요일, '성금요일(聖金曜日, Good Friday)은 더욱 경건하게 보낸다. 오락을 금하고 금식을 하기도 한다.

마르틴 루터(Luther)는 종교개혁을 통해 고난주간에 행해지던 로마 가톨릭 의식들을 대부분 폐지했으나, 츠빙글리(U. Zwingli)의 영향 아래 부분적으로 회복됐다. 오늘날에는 교파에 따라 다양하게 지켜지고 있으며, 특별 새벽기도회나 저녁모임 등을 열어 경건하게 보내고자 노력한다.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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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예배설교] 십자가의 승리 (palm sunday 2018)

 

 

 

 


제목 : 십자가의 승리

말씀 : 갈3:13-14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고난주일이란 약2000여년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그 참혹한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온 인류에게 죄사함의 은총을 가져다주신 사건을 회상하면서 그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절기입니다.

또 오늘은 종려주일이라고도 하는데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실때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면서 주님을 환영한데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종려주일이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만 그 십자가의 죽음은 승리를 위한 죽음이었음을 상기하는 주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이었으므로 주님의 고난가운데서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며 희망과 소망을 갖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고난과 승리,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이라는 이 역설적인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주님의 십자가 속에는 어떻게 고난과 승리,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이라는 이 역설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까?

 

1.죄의 참혹한 결과를 보여주는 십자가.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선 죄가 우리에게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가장 참혹한 사형틀입니다. 요즈음에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차에 걸고 무슨 장식품이나 부적처럼 달고 다니지만 십자가는 본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혐오스러운 물건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가장 잔인하고, 가장 끔찍스럽고, 처절한 고통을 주는 가장 참혹한 사형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상에서의 고통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의 정도도 말로 할 수 없고, 고통의 시간 또한 많게는 40여일 동안 계속되는 너무나 잔인한 사형방법인 것입니다.

게다가 십자가의 사형은 먼저 채찍으로 때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채찍도 보통의 채찍이 아니라 끝에 쇠갈고리가 달려 있는 채찍입니다. 이것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니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이렇게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며 사형장소로 이동합니다.

사형 장소에 도착하면 십자가에 손과 발에 못을 박아서 세워놓습니다. 그러면 못박힌 손목과 발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밤에는 추위가 엄습합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당합니다. 심지어는 독수리가 와서 뜯어먹기도 합니다. 그것도 잠시잠깐이 아니라 목숨이 긴 사람은 40일 동안이나 그 끔찍한 고통을 당하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그러니 그 고통과 비참함과 참혹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끔찍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죄를 지은 인생은 그런 끔찍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셔서 그 참혹한 고통을 당하시지 않으면 우리 모든 인생이 그런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계2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그 고통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계9:6에서는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는 너무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 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영영토록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죄는 나중에 지옥에서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여기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와 고통과 미움과 저주와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원한 천국의 은총은 물론 여기서도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늘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통하여 빛과 같은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저주를 풀어준 십자가

여러분,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처절한 고통의 장소였기 때문에 십지가가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가 받을 그 저주, 그 참혹하고 처절한 고통을 대신한 대속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13절 말씀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죄없고 흠없고 티 없으신 예수님,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영화로우신 예수님이 내가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순전히 내가 받을 고통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내가 받을 지옥의 형벌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죄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구속함을 받아 죄에서 자유인이 되어 새생명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20:28절에서 예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서 요19: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여러분, 인간적으로는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사형을 당하면서 그것도 그 저주받은 그 끔찍한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니 이성적으로는 이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그야말로 다 이룬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저주받은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받을 저주를 풀어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처절한, 그 끔찍한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지옥에서 당할 그 처절한, 그 참혹한 고통의 굴레를 벗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죄의 저주에서, 지옥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죄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지식으로도 과학으로도 물론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그 끔찍하고 처절한 고통을 영원히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그 저주에 풀어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일 입니까? 영원한 고통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하셨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과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어도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 영원한 저주에서 해방된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기뻐하며 영광 돌리며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3.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십자가

여러분, 그렇습니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랑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이 너무나 큰 사랑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남의 자식을 살리기 위하여 여러분의 자식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실 용기가 있으십니까? 여러분, 내가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자식이 아픈 것은 차마 보지 못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까?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자식이 죽는 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이 천한 곳에 보내셨습니다.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가장 처절한 죽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기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요3:1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범죄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저주와 고통에서 해방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너무나 크나큰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이런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또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더욱 감사하여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축복을 가져다준 십자가

여러분, 오늘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느냐, 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느냐?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복이 뭡니까? 한마디로 영생복락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천국에 가는 복입니다. 그래서 눅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영원한 천국의 복을 주셨다는 말씀이고, 이 복이야말로 지고지선지은의 복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복복복하면서 복을 누리기를 원하지만 세상의 복은 온전치 못한 복입니다. 제 아무리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세상에는 걱정 근심이 있고, 질고가 있고, 불안과 외로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복은 완전한 복입니다. 100%입니다. 아니 200%, 1,000%입니다. 넘친다는 것이지요. 충만하다는 것이지요. 무엇으로 은혜와 기쁨과 평강과 행복이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들은 조금치도 깃들일 수가 없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요.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덧입은 우리는 바로 그 복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덧입어야만 죄사함을 받고,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만 이런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난주일이지만 동시에 종려주일인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승리의 주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부활하셔서 새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승리의 날인 것입니다. 주님의 처절한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절기를 보내며 그 저주 받은 십자가, 그 끔찍한 십자가, 그 참혹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지옥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루신 것처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만이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며 어떤 형태로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는 자신이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아름답게 이루어 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하강교회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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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스쿨의 2018년 교회력 안내

 

 

기독교인에게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

2월 14일이니 그다음 주일인 2월 18일 주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종려주일은 3월 25일

고난주간은 3월 26일부터 31일까지입니다.

부활주일은 4월 1일이고요

위의 표를 활용하시어 참고하시면 됩니다.

각, 교단의 공통 교회력을 기준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올해 처음으로 도입되는 어린이날 대체휴일로 인해

5월 5-7일까지 주일포함 3일이 휴일이 되었습니다.

토요일을 평소에도 쉬는 분이시라면

5월 7일 월요일 어린이날 대체휴일로

주일끼고 연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추석연휴가 9월 24, 25 월화요일입니다.

또 징검다리 휴일을 살펴보면

5월 22일 석탄일이 화요일

10월 9일 한글날이 화요일

12월 25일 성탄절이 화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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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의 중요성 및 각 절기의 기원과 의미 

 

I. 교회력의 중요성

 

기독교는 시간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독교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시간을 벗어나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하늘에서 떨어진 어떤 특별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이 살아가는 그 시간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일반적인 구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났던 하나님의 특별한 행동에 의해 성취된 구원을 증거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체적인 시간에,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바로 그 시간 안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시간을 중시하는 기독교의 태도는 예배에도 반영된다. 예배의 구조는 하루, 한 주, 혹은 한 해 동안의 리듬을 갖는다. 기독교 예배는 시간으로부터의 회피가 아니라 시간을 자신의 기본 구조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에 일어났던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행위와 만남의 장이 된다. 우리가 예배에서 경험하는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시간적 사건들에 근거된 실재이다. 시간을 구성하는 방식은 구원의 근거가 되는 행위들을 상기하고 다시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한마디로 기독교 예배는 시간 위에서 설립된다.

 

교회력은 이처럼 시간을 중시하는 기독교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즉 교회력은 특정한 시간 안에서 발생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일정한 주기에 따라 반복함으로써 그 구원사건을 회상1)할 뿐 아니라 다시금 새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력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위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교회력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II. 각 절기의 기원과 의미 

 

절기는 교회력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회상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 그러므로 각 절기들이 어떻게 만들어 졌으며, 또한 그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교회력의 중요성을 더욱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1. 주의 날

   

교회력은 주의 날(the Lord's day; 1:10)부터 시작된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이 6일간 창조하시고 7 일째 날 안식하셨다는 것에 근거하여 율법이 제시하는 안식일을 지킨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한 주의 첫 째 날을 예배를 위한 특별한 날로 제시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주의 첫날을 연보를 위한 날로 성별 시키라고 말했다 (고전 16:2). 바울은 또한 트로아에서 토요일 자정까지 설교한 뒤에 일요일 새벽까지 기독교인들과 대화하였다(20:7, 11). 계시록의 저자도 자신이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힌 날이 주의 날이라고 말한다(1:10). “주의 날1세기 말엽 한 주의 첫째 날로 이미 기독교인들에게 친숙해 져 있었다. “주의 날을 지키는 것은 초대교회가 자신의 신앙을 증거 하는 방식이었다. 복음서는 모두 빈 무덤이 발견된 날이 안식 후 첫날 아침이라고 증언한다(28:1-6, 16:2-6, 24:1-3, 20:1-8). 안식 후 첫날은 창조의 첫째 날로써 하나님이 어두움과 빛을 갈랐던 바로 바로 그 날이다.2) 복음서는 또한 부활한 그리스도가 한 주가 시작되는 첫째 날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증언한다(28:9이하, 24:13이하, 20:14이하).

 

AD 115년경 익냐시우스(Ignatius)는 매그네시아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식일을 금하고 주의 날을 기준으로 사는사람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2세기 초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디다케(the Didache) 역시 기독교인들에게 주의 날에 함께 모여서 떡을 떼며 성만찬을 행하라고 권고한다. 심지어 이교도들도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날(주의 날) 동트기 전에 성만찬을 위해 모이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또 주의 날의 다른 용어인 “Sunday"(태양의 날)2세기 중엽 등장했다. 순교자 저스틴은 155년 경 이교도 청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Sunday에 함께 모인다. 그 날은 하나님이 어두움을 물리치고 우주를 창조한 첫 날이며,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일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곧 이교도 용어이지만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로 해석하여 Sunday를 받아들였다. 바나바 서신은 Sunday8, 즉 그리스도가 죽은 자 들에게서 부활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날이라고 불렀다. 초대 교인들은 Sunday를 창조의 제 8일로 생각했다. 8일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뒤 새로운 창조를 시작한 날이란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의미가 여기에 들어 있다 (고후 5:17). Sunday는 휴식의 날이 아니라 예배의 날이었다.

 

Sunday는 다른 날들보다 상위의 개념을 지녔다. 그 날은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에서 Sunday는 주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회상하는 날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구세주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터툴리안은 기독교인들은 Sunday, “주께서 부활한 날에 무릎 꿇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Sunday는 부활의 신앙을 입증한다. 따라서 Sunday는 매주 지키는 부활절이라고 볼 수 있으며, 부활절은 한해의 가장 큰 Sunday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부활절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는 그가 유월절에 십자가형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을 에집트에서 구하여 안전하게 홍해를 건너게 하고 자유로운 백성으로 만들어 준 사실을 기억(historical anamnesis)하는 절기였기 때문이다. 초대 교인들은 자신들 역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으며, 따라서 더 이상 죄와 죽음의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자유로운 백성이 되었다고 확신했다. 유월절에 잡는 어린양을 가리키면서, 바울은 다음과 말한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으로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전 5:7-8). 이 말씀은 옛날 유대인의 구원 사건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노예와 구원의 도식은 같지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사역에 의해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대 교인들이 매 주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기념했지만, 연중 최고의 주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유월절3) 때가 적절했다. 한 주의 초점이 주의 날에 맞추어진 것처럼, 한해의 초점은 파스카(유월절)에 맞추어 졌다.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2세기까지 이 파스카를 지켰다.

 

2-3세기 교회 역시 이 파스카를 준수했는데, 이때 세례와 안수 그리고 첫 성찬을 통해서 새롭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예배를 드렸다. 파스카가 홍해를 건넘으로써 노예로부터 해방된 것을 회상하는 절기였던 것처럼, 교회 역시 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4-5).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은 파스카때 함께 회상되었다. 터툴리안은 유월절은 세례예식이 행해지는 날 보다 훨씬 더 엄숙하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우리의 세례의 근거가 되는 주의 수난이 이루어진 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초대 교인들 사이에서는 기독교의 파스카가 유월절에 대한 유대력을 좇아야 하는가에 대한 긴 토론이 있었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은 유대력으로 닛산월 14일에 일어났는데, 유대력은 음력이기 때문에, 유월절은 보름날 시작되었다.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교회는 결국 유대의 유월절과 달리 교회의 파스카는 항상 Sunday에 지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는 Sunday의 상징적 의미를 인식한 결정이었다. 나중에 서 유럽에서는 파스카가 보름 이후 혹은 춘분인 321일 이후의 Sunday로 고착되었고, 로만 캐톨릭과 개신교회는 부활절을 이 방식으로 설정하였다.4) 이것이 부활절이 매년 다른 날(322일부터 425일 사이)로 된 이유이다.5)

 

4세기 무렵, 예루살렘에서 지낸 예수의 마지막 사건들 전체를 회상했던 파스카는 몇 개로 구분되었다. 이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각각의 거룩한 장소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분리해서 예배할 필요 때문이었다. 유게리아(Eugeria, 스페인여성으로 384년 순례자중 한 명)의 노트가 한 예로 제시될 수 있다. 그녀의 순례 노트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수난/종려 주일, 혹은 수난 주간(Holy Week, Great Week으로 불려지기도 함)의 시작은 부활절의 시작이었다. 이 주일에 모든 사람들은 시편과 교창 성가집(antiphone)을 들고 감독 앞에 가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축복 있으라라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다음 3일 간은 작은 예배들이 있었는데, 수요일은 예외적으로 장로(평신도가 아닌 목회자를 가리킴)가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음모에 관해서 읽을 때, 사람들은 신음하며 한탄했다. 목요일은 성만찬을 행한 후 모두가 감독을 겟세마네로 이끌어 갔다. 금요일에는 골고다에서 예배가 이루어 졌는데, 거기서 모든 이들이 행진하면서 나무 십자가에 입 맞추었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와서 이런 방식의 수난주간 행사는 중단되었다. 어거스틴은 예수가 어느 날 십자가에 달렸고 어느 날 묻혔는지 그리고 어느 날 부활했는지 복음서에 분명하게 나온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날들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했고, 이때부터 고대의 파스카는 다음과 같이 분리되어 지키게 되었다: 성 목요일(Holy Thursday), 성 금요일(Good Friday), 성 토요일(Holy Saturday), 그리고 부활주일(Easter eve and Day), 또한 수난주간에 앞선 수난/종려 주일과 수난주간의 작은 날들.

 

  

3. 성령강림절(오순절)

 

 

파스카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절기는 오순절이다. 오순절은 레위기 23:15-16에 나오는 유대교의 추수 절기였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 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러나 1세기에는 때때로 오순절이 시내 산에서 토라를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기도 했다. 기독교인들에게 오순절은 성령이 강림하여 교회가 탄생된 기념일로 여겨졌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성령이 유대절기인 오순절날 강림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토라를 받은 것과 성령 받은 것이 대비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시내 산에서 완성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순절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계약을 맺었다고 그들은 믿었다. 적어도 2세기까지는 오순절이 세례를 위해 적절한 날로 여겨졌다. 미쳐 준비를 못해 부활절날 세례 받지 못한 자들은 오순절날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교회의 탄생 기념일인 오순절날 새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4세기까지는 오순절이 성령의 강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했다. 터툴리안은 그리스도가 오순절날 승천하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이르러 성령강림과 그리스도의 승천은 분리되어 기념되었다. “사도헌장”(Apostolic Constitution)에는 그리스도의 승천 기념일이 부활절 후 40일째 되는 날이 적절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을 40일간 가르쳤다는 사도행전 1:3에 근거한 것이다.

 

파스카(수난절/부활절)와 오순절(성령강림절)은 교회력에서 가장 오래되고 최고로 중요한 절기의 시작이며 마지막이다. 오순절은 부활주일부터 50번째 날을 지칭할 뿐 아니라 부활주일부터 시작하는 50일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유대력에서는 오순절, 첫 열매의 날”(the Day of First Fruits)을 유월절부터 시작된 한 주기의 결론으로 여겼다. 이 주기 동안 출애굽 자체와 그것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이 기념되었다. 오순절은 추수의 성별에서 시작되는 추수시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오순절이란 용어는 50일 주기의 마지막날과 50일 주기 전체를 지칭했다.

 

기독교인들 역시 오순절을 오순절의 날 하루 뿐 아니라 부활절에서 시작된 50일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즉 오순절은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하여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교회가 탄생된 때까지의 50일을 가리켰다. 어거스틴은 주의 부활후 이 날들은 평화와 기쁨의 기간이다. 그러므로 금식해서는 안되고 부활을 상징하여 서서 기도해야한다. 이는 매 주일 지켜져야 하고, 알렐루야 송을 불러야 한다. 알렐루야 송은 장차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위치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오순절은 부활절기의 일환으로 지켜졌고, 성령강림과 교회의 탄생은 부활절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니케아 공의회(AD 325)Lent(사순절)“40로 정했다. “40은 금식하고 사역을 준비했던 예수의 광야 40일과 비교될 수 있다. 어거스틴의 시대에 사순절은 세례를 위한 준비 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주의 수난에 동참할 준비를 하는 기간이었다. 사순절은 회개의 기간이었고, 영적인 훈련의 수단인 금식은 사순절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에도 매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했다. 주의 날은 사순절 기간보다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순절 기간 중 6번의 주일은 40일에 포함되지 않았다. 사순절은 따라서 재의 수요일(부활주일 전 7번째 수요일)에서 시작되어 부활절 바로 전날까지 총 46일이 되었다.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일러서 부활절 기간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교회력의 중심이다. 이 기간은 교인들이 재로부터 정화에 이르는 순례의 행진을 하는 동안 도전 받고 갱신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4. 성탄절과 주현절

   

 

또 하나의 중요한 절기는 성탄절이다. 성탄절은 부활절보다 오래되지 않았고, 또한 구약의 절기에서 유래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탄절은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주현절(epiphany, 16)은 오늘날 성탄절만큼 중요하게 취급되지는 않지만, 성탄절보다 오래되었고, 초대 교회력에서는 주현절이 부활절과 오순절 다음으로 중요한 절기였다. 주현절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2세기 후반 에집트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piphany"현현”(manifestation)을 의미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현현한 것을 지칭한다. 주현절은 예수의 탄생, 그의 세례, 그리고 갈릴리의 가나에서 행한 첫 기적 등을 기념하는데, 이 모든 사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종종 이날을 “The Theophany"(하나님의 현현)라고 명명했는데, 이 명칭은 지금도 동방 정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부활절과 마찬가지로, 주현절은 4세기에 몇 개로 나뉘어 졌다. AD 354년부터 그리스도가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날이 1225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날짜가 인정된 것은 아프리카에서는 312년 보다 앞서고, 로마에서는 336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점진적으로 크리스마스가 주현절의 일부로 지켜지게 되었다. 386년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에서 성탄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날은 최근 빠른 시간 내에 발전되어 절기로 지켜지게 되었다.” 뒤에 오는 주현절에 관하여 그는 왜 이날을 주현절이라고 부르는가? 예수가 모두에게 알려진 것은 탄생된 때가 아니라 세례 받은 때이기 때문이다. 세례 받기 전까지 그는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16일 지켜지는 주현절이 동방전통에서는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는 날로, 서 유럽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각각 지켜지고 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현현 하셨다는 사실을 이방에 알렸기 때문이다. 주현절과 성탄절을 분리해서 기념하게 된 이유는 예수의 생애 동안 발생한 사건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기념하려는 초대교인들의 열망 때문이었다. 성경에는 예수가 언제 태어났고, 어느 날 세례 받았는지, 또 동방박사들이 어느 날 방문했는지 등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16일과 1225일은 고대 이집트와 줄리안(로마) 달력에 따라 동지를 기념하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됨에 따라, 성탄절은 동지를 표시했던 이교도의 정복되지 않는 태양의 축제를 대신하게 되었다. 어두움을 정복하는 빛이라는 주제는 항상 주현절과 성탄절의 주된 개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날들은 예수가 죽은 날과 그가 잉태된 날을 일치시키는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부활절 준비를 위해서 사순절이 필요 했던 것처럼, 성탄절과 주현절 역시 준비기간을 필요로 했다. 스페인의 한 공의회는 1217일부터 주현절(16)까지 교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치 않았는데, 이는 대강절(Advent)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5세기에 가울(Gaul) 에서는 주현절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40일을 두었는데, 이것은 Lent 기간이 40일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고, 그 시작은 지금의 대강절 즈음이었다. 결국 로마는 1225일 보다 4주 앞선 주일부터 대강절로 정했다.

 

대부분의 중요한 기독교 절기들은 4세기에 마무리되었다. 존 크리소스톰은 386년 행한 설교에서 예배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리스도가 육체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것이고 (주현절), 그는 십자가에서 죽고 또한 부활하지도 않았을 것이고(파스카), 성령을 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오순절).” 4세기에 세 개의 중요한 초대 절기들-주현절, 부활절, 오순절-은 다시 다음과 같이 나뉘어 졌다: 성탄절, 성금요일, 승천일, 그리고 대강절, 사순절 같은 절기들. 4세기 이후 생긴 중요한 절기 가운데 하나는 삼위일체 주일(Trinity Sunday)이다. 삼위일체 주일은 오순절 후의 주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약 1000년 경 도입되었다. 여타의 절기들과 달리, 이 절기는 역사적 사건과는 무관한 신학적인 교리를 나타낸다

 

III. 성서일과 (Lectionary)

 

  

성서일과는 교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lectionary” 란 말은 넓은 의미에서 교회력에 있는 특별한 절기의 예배를 위해 선택된 본문들의 체계를 지칭한다. 이러한 성서일과에는 lectio continualectio selecta의 두 원리가 있다. 전자는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 까지 읽든지, 성서의 어느 특정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가는 방법을 가리키고, 후자는 절기에 따라 선택해서 읽는 것을 말한다. 유대교의 회당에서는 각 절기에 해당하는 성서의 본문들을 규정해 놓고 일상적인 안식일에 lectio continua의 원리에 따라 선택된 성서 본문을 읽는다. 이 원리는 개인적으로 성서를 꾸준히 읽을 때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성경의 각 구절들의 맥을 찾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더욱이 교회력에 따라 성서의 본문을 찾을 때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에 반하여 lectio selecta는 성서의 본문을 선택하여 읽는 방법이므로 교회력과 관련해 볼 때 유용한 원리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의 성서일과에 대한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유대교의 유월절에 읽었던 출애굽기 12장은 로마에서 200년 경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325년 이전에 이미 기독교의 주요 절기들을 위해 특별히 지정된 성서 본문이 있었고, 일반적인 주일에는 lectio continua의 원리에 의해 성서의 본문을 읽었다. 서 유럽에서는 다양한 성서일과들이 발달되었다. 9세기 초 성서일과들이 표준화되어 최근까지도 로만 캐톨릭, 성공회, 루터 교회 등에서 사용되었다.

 

   

성서일과는 3년 주기로 되어 있으며 그 본문의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강절

 

1) 첫주: 122 (1, 4, 7), 80:1-7 (2, 5, 8), 25:1-10 (3, 6, 9)

 

둘째주: 72:1-8 (1, 4, 7), 85:8-13(2, 5, 8), 126 (3, 6, 9)

 

셋째주: 146:5-6 (1, 4, 7), 1:46b-55 (2, 5, 8), 12:2-6 (3, 6, 9)

 

넷째주: 24 (1, 4, 7), 시편 89:1-4, 19-24 (2, 5, 8), 80:1-7 (3, 6, 9)

 

2) 첫주: 24:36-44 (1, 4, 7), 13:32-37 (2, 5, 8), 21:25-36 (3, 6, 9)

 

둘째주: 3:1-12 (1, 4, 7), 1:1-8 (2, 5, 8), 3:1-6 (3, 6, 9)

 

셋째주: 11:2-22 (1, 4, 7), 1:6-8, 19-28 (2, 5, 8), 3:7-18 (3, 6, 9)

 

넷째주: 1:18-25 (1, 4, 7), 1:26-38 (2, 5, 8), 1:39-55 (3, 6, 9)

 

2. 성탄절

 

1) 9:2-7 (매년), 시편 96 (매년), 디도서 2:11-14 (매년), 2:1-10 (매년)

 

2) 62:6-7 (매년), 시편 97 (매년), 디도서 3:4-7 (매년), 2:8-20 (매년)

 

3) 52:7-10 (매년), 시편 98 (매년), 1:1-12 (매년), 1:1-14 (매년)

 

3. 주현절

 

구약: 42:1-9 (1, 4, 7), 1:1-5 (2, 5, 8), 61:1-4(3, 6, 9)

 

복음서: 3:13-17 (1, 4, 7), 1:4-11 (2, 5, 8), 3:15-17 (3, 6, 9)

 

4. 재의 수요일

 

시편 51:1-12, 고후 5:20b-6:2, 6:1-6, 16-21 (매년)

 

5. 사순절

 

1) 첫 번 주일: 2:4b-9, 15-17, 3:1-7; 5:12-19; 4:1-11 (1, 4, 7)

 

9:8-17, 25:1-10, 벧전 3:18-22, 1:9-15 (2, 5, 8)

 

26:1-11, 91:9-16, 10:8b-13, 4:1-13 (3, 6, 9)

 

2) 두 번째 주일: 12:1-4b(4b-8), 33:18-22, 4:1-5(6-12), 13-17, 3:1-17 혹은 마 17:1-9 (1, 4, 7)

 

17:1-10, 15-19, 105:1-11, 4:16-25, 8:31-38 혹은 막 9:1-9 (2, 5, 8)

 

15:1-12, 17-18, 127, 빌립보서 3:17-4:1, 13-31-35 혹은 9:28-36 (3, 6, 9)

 

3) 세 번째 주일: 17:3-7, 95, 5:1-11, 4:5-26[27-42] (1, 4, 7)

 

20:1-17, 19:7-14, 고전 1:22-25, 2:13-22 (2, 5, 8) 3:1-15, 103:1-13, 고전 10:1-13, 13:1-9 (3, 6, 9)

 

4) 네 번째 주일: 삼상 16:1-13, 23, 5:8-14, 9:1-41 (1, 4, 7)

 

역대하 36:14-23, 137:1-6, 2:4-10, 3:14-21 (2, 5, 8)

 

5:9-12, 34:1-8, 역대하 5:16-21, 15:1-3, 11-32 (3, 6, 9)

 

6. 종려주일

 

50:4-9b, 31:9-16, 빌립보 2:5-11 (매년)

 

수난 이야기: 26:14-27:66 (1, 4, 7); 14:1-15:47 (2, 5, 8); 22:14-23:56 (3, 6, 9)

 

7. 성금요일

 

52:13-53:12 (매년), 4:14-16, 5:7-9 (매년)

 

8. 부활절

 

28:1-10 (매년), 16:1-8 (매년), 24:1-12 (매년)

 

9. 성령강림절

 

2:1-21 (매년), 고전 12:3b-13 (1, 4, 7), 8:22-27 (2, 5, 8), 8:14-17 (3, 6, 9)

 

20:19-23 혹은 7:37-39 (1, 4, 7), 15:26-27, 16:4b-15(2, 5, 8),

 

14:8-17, 25-27 (3, 6, 9)

 

10. 삼위일체 주일

 

4:32-40 (1, 4, 7), 6:1-8 (2, 5, 8), 8:22-31 (3, 6, 9)

 

33:1-12 (1, 4, 7), 29 (2, 5, 8), 8 (3, 6, 9)

 

고후 13:5-14 (1, 4, 7), 8:12-17 (2, 5 8), 5:1-5 (3, 6 9)

 

28:16-20 (1, 4, 7), 3:1-17 (2, 5, 8), 16:12-15 (3, 6, 9)

   

이상과 같이 살펴본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는 무엇보다도 설교와 예배를 준비하고 주관해야하는 목회자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교회력에 따르는 성서일과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일정한 기준 없이 설교자의 주관에 따라 본문이 선택되므로, 설교자 자신의 편견과 선입관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이런 경우 일관된 말씀의 진수를 맛보고 싶어하는 교인들의 불만을 살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예배의 경우에도 찬송가, 교독문 등을 임의로 선택하지 않고 교회력에 맞추어서 선택함으로써, 교인들이 미리 준비하여 생동감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성서일과에 따라서 설교하고 예배할 경우, 정장복 교수는 그 장점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첫째, 설교자의 개인적인 의도보다는 말씀 중심의 사역이 가능해 진다. 설교자 개인의 편견과 선입관을 배제하고, 일관된 말씀의 사역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교인들이 말씀의 맥을 짚을 수 있게 된다. 둘째, 교회력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그분의 구속의 은총을 실감하는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신앙생활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바, 교회력에 따라 설교할 경우,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갖는 깊은 의미를 새기게 되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재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셋째, 모든 교회가 성서일과를 사용할 경우, 동일한 말씀을 들을 수 있음으로써 교회 일치에 많은 도움이 된다. “모든 교회는 하나이다라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모토인데, 어디서나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교인들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넷째, 설교자들이 일정한 주기로 말씀을 연구할 수 있어서 말씀에 질서가 형성될 수 있다. 사실 설교자들의 최대의 고민은 이번 주에는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하는 가라는 것이다.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서 성서의 여기저기를 살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교회력에 따라 설교하게 되면, 이런 고민이 해소될 수 있다. 다섯째, 설교 뿐 아니라 목회의 전반적인 계획 수립에 도움이 된다. 교회력이란 일정한 기준이 주어지기 때문에, 임의로 목회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섯째, 교인들이 설교의 방향을 미리 알 수 있게 되어 준비할 수 있다.

 

교회력에 따라 목회계획을 세우고 설교하게 되면, 현장성이 약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할 수도 있다. 이는 목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따라서 말씀을 준비하기가 어렵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탄절, 수난절, 부활절, 오순절 등 중요한 절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목회자가 현장에 맞게 설교의 주제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력은 결코 교회가 서 있는 자리, 즉 문화, 사회, 환경을 제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력은 목회자가 목회 환경에 맞게 자유로이 목회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이점에서 성서일과와 목회현장의 갈등은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력에 따라 예배하고 목회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목회와 설교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최승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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