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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훈련 인도자가 갖춰야할 조건

 

제자훈련 인도자의 자격, 실력의 문제라기보다 자세의 문제다 
옥한흠 목사 _ 국제제자훈련원 원장 

 

목회 일선에서 물러난 후 나는 종종 제자훈련의 진미를 몰랐다면 내 목회 생활이 퍽 황량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제자훈련이 나의 목회의 행복도를 가늠하는 절대적인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훈련생들과 몇 시간씩 함께 둘러앉아 은혜를 나누던 그 순간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지금도 행복하다. 

예배 참석자가 만 명을 넘어서고 건강을 다쳐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나는 제자훈련에 이어 사역훈련까지도 부교역자에게 넘겨야 했다. 그때 가끔씩 남몰래 부교역자가 인도하는 사역훈련반 문 밖에 서서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너무 안타까워하곤 했다. 이제는 그런 일마저 그리운 추억이 되고 있다. 

아직도 나는 40여 년 전에 제자훈련을 통해서 만난 형제자매들과 또 훈련 이후에 함께 은혜를 나눈 수많은 영적 제자들과 끊임없이 교제를 나누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자훈련이야말로 나를 행복한 목회자, 후회 없는 목회자로 만들었다는 말을 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나의 이러한 입장 때문인지 종종 나에게 어떻게 하면 제자훈련을 잘 할 수 있는지 혹은 어떤 요건을 갖추어야 제자훈련에 성공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격을 논하자면 끝이 없다고 생각한다. 

제자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사는 온전한 자의 자리이기에 그 목적을 만족스럽게 충족시킬 만큼 모든 조건을 갖춘 지도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목표가 구름에 가리운 높은 정상인 것처럼 인도자의 자격도 거기에 걸맞은 것이어야 하는데 누가 여기에 완벽하게 부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도자의 자격은 실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세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훈련이 성공할 확률은 훈련에 임하는 지도자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느냐에 많이 좌우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시간 나의 경험을 살려서 자세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제자훈련은 예수님에게 빠져서 하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빠지는 것을 흔히 은혜라고 말한다. 은혜가 많으냐 적으냐는 나의 마음이 얼마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만족하느냐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나의 제자훈련 40년을 돌아보며 몇 번이든 반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제자훈련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가 한다는 것이다”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제자훈련에 임하는 지도자는 자기가 은혜 받은 스토리가 분명할수록 좋다. 

그렇다고 무슨 별난 체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이런 체험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럼에도 언제 은혜를 받았으며, 그 은혜가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내가 은혜에 취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은혜는 식지 않고 지속이 되었다. 성경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진하게 가슴을 울리는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황홀하게 만드는지, 나는 이 기간에 넘치도록 맛보면서 살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이 강렬한 은혜의 맛이 서서히 식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그 은혜의 경지를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때에 받은 은혜가 내 한평생의 신앙생활과 목회의 질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은혜 때문에 나의 제자훈련에 남다른 감동과 눈물과 기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은혜를 가슴에 안고 대하는 마음 자세가 제자훈련의 성공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제자훈련은 자격 미달자라는 자책감을 숨기고 하는 것이다. 

제자는 제자가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성경적인 진리이다. 지도자가 예수의 제자와 거리가 멀 때, 그를 통해 제자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지상 교회에서 성취가 불가능한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사실이 제자훈련을 남보다 큰 소리로 외치는 나의 기를 꺾어 놓았고, 항상 떠나지 않는 가책을 마음에 담고 살게 만들었다. 

은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모인 여순장반이었다. 나는 의도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 보았다. “우리는 25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옥 목사가 작은 예수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으면 손 한번 들어보십시오.” 손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예수님의 제자에 대해서 설득력 있게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지만, 나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작은 예수의 모습을 투영하는 데는 매우 미흡했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는 셈이었다. 이것이 정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내 마음에 숨겨놓고 있는 자격 미달의 지도자라는 자책감도 크게 탓하지는 않는다. 바울도 비슷한 데가 있지 않았나.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주님이 원하시는 기준에 많이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자신 있다고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갖는 지도자보다 실패의 위험을 훨씬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자훈련은 마음을 비우고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제자훈련을 하면서 마음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지도자들이 있다. 교역자라는 권위의식, 교회를 빨리 성장시켜야 한다는 성급함, 인기와 존경에 대한 갈급증 등 별로 건강하지 못한 소원을 마음에 담고 훈련을 시키려고 드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찌끼들이 계속 남아서 악취를 풍기면 십중팔구 제자훈련은 빗나가거나 실패하고 만다. 
지도자가 마음을 비우면 비울수록 훈련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 빈 마음을 통해서 성령은 말씀으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비었는지 차 있는지를 증명할 필요는 없다. 자연스럽게 알려진다. 

이상한 일이지만 훈련생들이 나의 마음을 너무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 하고 놀랄 때가 자주 있었다. 나도 한때는 마음을 완전히 비우지 못해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다. “천 명의 순장이 뛰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교인이 200명도 채 되지 않을 때 예배 시간에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내 입에서 튀어나온 기도였다. 이것이 한동안 교인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나를 향한 비아냥거림이 되기도 했다. 

내 속에 무서운 야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정도로 내가 야심에 들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마음 구석에 나도 모르게 자리를 잡고 있던 생각의 찌끼였던 것인데, 그것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가 망신을 당한 것이었다. 나는 정말 충고하고 싶다. 제자훈련의 열매를 넘치게 받고 싶은가?

마음을 비우고 시작하라. 

제자훈련은 함께 배우고 성장하려는 열정으로 하는 것이다. 
제자훈련은 지도자가 구름 위에 앉아 있거나 설교단에 서 있거나 수많은 청중 앞에 선 스타의 자리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소수의 사람 가운데 끼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함께 뛰어가는 것이 제자훈련이다.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소그룹은 ‘두세 사람’의 모임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주님이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은 두세 사람의 모임이나 제자들의 공동체뿐이다. 

작은 공동체의 한 사람이 되어 말씀을 나누는 것이 제자훈련이기 때문에 지도자는 자연스럽게 배우는 훈련생과 함께 모든 것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 은혜를 같이 나누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그를 위해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놀랍게도 많은 지도자들은 이 단순한 진리를 가볍게 알고 넘긴다. 가르치려고만 들지 배우려는 자세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은혜를 끼쳐야 된다는 의무감은 있어도, 눈앞에 있는 형제를 통해서 내가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부족한 것이다. 그 시간에 성령은 똑같이 역사하시는데 자기를 통하지 않고는 은혜가 임하지 않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착각할 때가 많은 것이다. 

내가 제자훈련을 하면서 두려웠던 것 중에 하나는 종종 나보다 앞서 뛰는 훈련생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남자 제자반을 인도할 때였다. 말씀을 적용하는 시간에 이성에 관한 각자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 마음으로도 간음할 수 있다는 말씀이 적잖은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마음으로 간음한 일이 한 번도 없는 남자가 몇 명이나 될까? 

그런데 그 시간 우리는 퍽 솔직해졌다. 나를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변화를 받은 형제들이 여러 명이나 있었다. 우리가 논한 것은 마음에 숨겨진 감정이었는데, 그 감정이 은혜를 받으면서 깨끗해졌다는 고백을 하는 형제를 보면서 내가 매우 부끄러운 지도자라는 죄책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나는 아직도 이런 사람이다라고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자훈련의 경륜이 쌓여가면서 훈련생들을 통해서 내가 받아야 할 은혜가 얼마나 많은가를 더 깊이 알게 된 순간이었고, 그것이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축복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신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평신도로부터 주님의 책망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제자훈련을 하라. 그게 싫으면 그만두는 것이 좋다. 

제자훈련은 집중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제자훈련을 중도에 포기하는 지도자들의 경우, 거의 대부분은 ‘집중’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집중이란 목회의 우선순위에서 제자훈련이 뒤로 밀리지 않도록 최선의 관심을 쏟는 태도를 말한다. 다른 사역이 지장을 받더라도 제자훈련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확고한 결단을 의미한다. 제자훈련에서 이 태도가 왜 성패를 좌우하는지는 1, 2년이라도 훈련을 해 본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생각이 여기저기로 흩어지거나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집중을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자연히 훈련의 강도가 떨어지고 힘이 드니까 쉽게 포기해버린다. 그래서 대부분 성경 공부 프로그램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나의 과거를 돌아보면 자화자찬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제자훈련에서 다른 데로 눈을 돌린 일이 한 번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외부에서 집회를 요청해도 열 중에 한 건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외부적인 행사나 조직에 참여하는 것도 최대한 절제했다. 심지어 가족들과 단란하게 시간을 가지는 것도 많이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목회를 위해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프로그램들이 많았지만 제자훈련에 도움이 되는 것들 한두 가지를 빼고는 거들떠보지를 않았다. 목회 콘텐츠를 할 수 있는 한 단순화 시키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이런 예들은 제자훈련에 집중하고자 하는 나의 결단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만일 내가 제자훈련을 부교역자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밖으로 돌면서 사역을 했든지, 싫증이 나서 이것저것에 손을 대었더라면 오늘의 사랑의교회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집중해서 개인적으로 치른 대가가 만만치 않았지만, 나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제자훈련이 목회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이 한 가지에만 전념을 하기에도 목회 인생이 너무나 짧다고 생각한다. 

제자훈련은 영적 전투를 치르는 것이다. 
교회와 대결해서 진을 치고 있는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일까?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일까? 교회의 양적인 부흥일까? 목회자의 탁월한 설교일까? 아니면 예배나 프로그램에 부지런히 출석하는 성도들의 열심일까? 나는 아니라고 믿고 있다.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가장 작아 보이는 자라도 천을 이루고, 가장 약해 보이는 자라도 강국을 이루는 놀라운 사건들이 교회 안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것이다. 기적을 구경하고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수만 명의 무리와 같은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는 마귀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은 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제자훈련만큼 마귀의 유혹과 도전이 격심한 목회 현장이 또 있는지 모르겠다. 지난 40년 동안 목회 하면서 제자훈련에 집중하는 나를 사탄이 얼마나 집요하게 시험하고 공격하고 또 자주 쓰러뜨렸는지 모른다. 이 모든 시험을 이겨야 제자훈련이 성공할 수 있다. 가끔은 패배하는 일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야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어떤 목회자는 너무 싱겁게 백기를 드는 것 같다. 몸이 좀 피곤하니까, 부끄러운 스캔들에 휘말려서, 교회가 좀 성장하니까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져서 등의 이유로 제자훈련을 내려놓는 것을 본다. 이런 지도자들은 그것이 사탄의 간교한 유혹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버리는 자와 같다. 

단적으로 말해서 제자훈련은 치열한 영적 전투이다. 지도자는 그 전투의 선봉에 선 장군과 같다. 적진을 환하게 꿰뚫어 보는 영안을 가지고, 때마다 적절한 대처를 하면서 자기도 지키고 훈련생들도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제자훈련은 최선의 모범이 되지 않으면 차선의 모범이라도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자훈련은 목회자에게 정말 두렵고, 어려운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는 청중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강의는 해박한 지식의 그늘에 자신의 진면모를 숨길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심방이나 상담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제자훈련은 열 명 내외의 소그룹 안에서 지도자의 모든 것이 노출되고 만다. 말씀 앞에서 모두가 벌거벗은 것 같이 자기를 드러내는데 지도자라고 해서 정장을 하고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좀 지나친 말인지 모르지만 티끌만큼도 숨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작은 예수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훈련생들이 알게 모르게 따르게 되는 최선의 모범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훈련 교재는 있는데 살아 있는 모범이 보이지 않는 죽은 훈련이 될 수 있다. 

내가 제자훈련을 하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이런 점이었다. 그동안 내가 모범이 되지 못해 영적으로 실족한 훈련생들이 얼마나 될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선의 모범이 못되면 차선의 모범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감히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던 것 같다. 나는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좋은 목사가 되고 싶은가? 제자훈련에 미쳐라.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온 교회가 존경하고 따르는 모범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훈련은 남을 위해 하는 것이라기보다 나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말이 더 솔직한 고백일 것 같다. 

제자훈련은 기막힌 행복을 누리면서 하는 것이다. 
목회자만이 아는 행복의 비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반 사람들이 누리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해도 남모르게 누리는 행복의 비밀들이 있다. 누가 나에게 목사로서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였는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제자훈련을 통해 영적으로 잠자던 자들이 깨어나고, 삶의 목적이 바뀌고 인격적인 결함이 치유되고 가치관이 달라지는,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아름답게 헌신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고, 그것이 한 번의 변화로 끝나지 않고 10년이 넘도록 지속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며 감격해 할 때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매우 행복한 목회자였다. 

흔히들 나를 보고 매 주마다 수만 명의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보람있느냐고 하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설교가 나에게 보람은 안겨주었을지 모르지만, 행복을 느끼게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설교의 부담감 때문이었다. 설교에 실망하고 돌아가는 숨은 군중들을 생각하면 두 번 다시 강대상에 서고 싶지 않을 때가 없지 않았다. 

나의 진짜 보람과 행복은 제자훈련의 현장에서 자주 체험했다. 설교를 통해서 은혜 받고 변화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구체적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자훈련은 누가 은혜를 받았는지 그래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 후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 이 말씀이 실제로 입증되는 사역이 제자훈련이다.
 
나처럼 모자라는 사람이 가르치는 자리에서 어떻게 저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이것은 사람의 머리로는 풀 수 없는 신비한 수수께끼다.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는가를, 제자훈련을 하면서 시간마다 경험하는 행복을 누려보지 않고 어떻게 이 신비를 알 수 있겠는가? 

그동안 나는 제자훈련을 통해 놀라운 열매를 거두는 목회자치고 행복해하지 않는 자를 한 사람도 본 일이 없다. 어떤 때는 은퇴해서 늙어가는 나의 처지로 보면 샘이 날 정도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왜 제자를 만들라고 하셨는지 나는 조금은 알고 있다. 우리 모두가 행복한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목회가 힘든가? 감격이 없는가? 스스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예수의 제자를 생산하는 제자훈련의 현장으로 찾아가라. 거기에 당신이 찾고 있는 정확한 해답이 있다.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당신을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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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Q,A] 교회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서 참석하기 벅찹니다


과하면 매너리즘 빠져… 필요한 것만 선택을… 교회도 한꺼번에 많이 가르치려 해서는 안돼

 

[Q] : 저는 초보신자입니다. 주일 청년부 예배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파, 성령수양회, 인카운터, 포스트 카운터, 금식기도, 셀 모임, 창세기 공부 등 숨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프로그램이 많은지요. 다 따라하자니 숨 막히고 힘이 듭니다. 부담도 되고요. 빠지면 믿음 없는 사람 취급당합니다.
 

[A] : 바울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온갖 유혹과 도전에 노출돼 있습니다.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선 다각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군에 입대하는 군인은 곧바로 일선부대로 배치되지 않고 훈련소에 입소합니다. 일정기간 여러 분야의 훈련을 받은 후 부대로 배치됩니다. 운동선수도 예외가 아닙니다. 경기장에 나가기 전 다양한 훈련을 거칩니다.


교회가 실시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은 교회 자체를 위한 게 아닙니다. 교인들의 신앙과 삶의 성장, 건강성을 위해 실시하는 훈련입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만 선택하면 됩니다. 대부분 교회들은 다양한 훈련프로그램을 연속적으로 진행합니다. 그 모든 프로그램에 다 참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훈련의 의미는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모 교회 교인을 만났습니다. 출석하는 교회에서 제자훈련, 전도훈련, 알파, 셀 훈련 등을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지방에 내려와 있는데 갈 교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설교, 교인들 수준, 교회 분위기 그 어느 것도 맘에 드는 교회를 찾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전전한다고 했습니다. 그 교인이 받았다는 제자훈련은 사범훈련이었고 귀족훈련이었습니다. 제자훈련은 나만 못한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을 씻기신 주님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인은 선생 대우받을 교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책임도 있습니다. 강한 병사는 강한 훈련을 통해 태어납니다. 그러나 과부하가 걸린 프로그램들, 직수입한 외래 상품같은 프로그램들, 교회 현실과 상황에 대한 고려나 검토 없이 아무개가 성공했다면 따라하고 기우는 쏠림 현상, 네가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무분별한 프로그램 등은 사려 깊은 점검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능력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각종 이벤트나 프로그램이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살리는 도구나 장치로 사용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주객이 바뀌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프로그램이나 이벤트가 주가 되고 복음이 그 뒤에 놓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성령과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기본정신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행사만 벌이다가 본질을 놓칠까 걱정됩니다. 교회 프로그램 참여는 선별하고 선택하십시오. 교회는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먹이려 하지 마십시오.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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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전도훈련을 해야 하는가?

 

1) 주님의 새벽 기도는 전도를 준비한 기도였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 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5-38)

주님은 새벽 미명부터 전도를 위한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는 전도를

위하여 왔음을 말씀하셨다.

새벽기도를 나만을 위한 기도 시간으로 가질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당부하신 이웃에 죽어가는

영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도 가져야 한다.

전도는 주님이 가장 소원하는 일이고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분이므로 년2회 이상 새벽예배 시간을

전도를 위한 “특별 새벽 전도 훈련”시간으로 계획하여 전교인이 새벽시간에 전도 훈련을 받고

낮시간에는 전도를 실천하는 하루가 되도록한다.

 

2) 주님의 삶은 제자들을 전도자로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자들을 택하신후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말씀하시고 12명의 제자들에게 전도 훈련을 시키셨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복음 전도를 위하여 오셨으며 이 땅에서 3년동안 주님의 발자취를 보면

공생애 대부분이 제자들을 전도자로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3) 교인들은 왜 전도를 못하는가

 

앙케트를 통하여 조사를 하면 교인들이 전도를 못하는 이유는?

1) 전도를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하는 마음

2) 전도 은사가 없고 전도할 성격이 아니며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

3) 막상 전도를 하려고 해도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대답이 나오고 있다.

 

4) “21일 생활 전도”통한 해결방법

 

위의 세가지 문제를 “21일 새벽 전도 훈련”을 통하여 해결한다.

첫째: 새벽 시간을 통하여 전도를 왜 해야 하는지 이유와 사명감을 깨닫도록 하고 그날 낮시간에

      실시할 구체적인 행동훈련을 지시 받는다.

둘째: 낮시간에 개인별로 지시 받은 사항을 실천하도록 함으로서 행동훈련을 통하 여 전도에 자신감을

      갖도록 한다.

셋째: 매일 전날 실시한 상항을 점검하고 격려와 독려를 하며 지속적인 실천을 통 하여 전도를 생활속의

      습관으로 만들도록 한다.

 

5) 전도하고자 훈련을 받아야 한다.

 

평소 전도를 안하던 성도들에게 설교 시간을 통하여 전도에 대하여 간절하게 당부하고 호소할 때에

“아멘” “아멘”이라고 입으로는 화답을 잘 하지만 나중에 집에 가서는 언제 그랬냐는 표정으로 전도를

잊어버리고 있다.

전도는 설교 시간에 듣는 당부와 교육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전도는 훈련을 통하여

 

1) 전도를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는 길뿐이며

2) 행동이 반복되어서 누구를 만나든지 즉시 자연스럽게 전도 행동이 나올 수 있도록 생활속의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훈련을 받지 않고 전도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은 마치 군대에 갓 입대한 신병이 총 쏘는

   법을 모르고 전투현장에 나가는 것과 같다.

   모든 평신도는 전도하고자 원하면 전도 훈련을 통하여서 실천하고, 반복하여 전도를 습관으로 만드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6) 유능한 전도자가 되기 원하면 훈련을 받아야 한다.

 

교회에서 전도 훈련이 없이 사람들이 “우리 교인들은 전도를 안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전도자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전도자는 처음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하여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전도 훈련을 실시하여 아무나 할 수 있는

쉽고 실제적인 전도 방법을 배우고,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반복하여 익히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교히는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으로 말씀에 양육을 받았으면 이제는 나가서 증거하는 후속조치로

전도 운동이 벌어져야 한다.

교회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해서는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다. 배우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나가서

증거하는 일이다.

많은 교인들이 성경을 몰라서 전도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증거하는 훈련이 안돼서 전도를

못하는 것이다.

 

7) 교회는 유능한 전도자를 양성하는 전도 훈련장이 되어야 한다.

 

교회 성장 비결은 평신도를 얼마나 전도 역군으로 잘 훈련시켰느냐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다.

교회는 전도 훈련으로 유능한 전도자를 많이 양성하여야 한다.

전도는 복음이란 소프트웨어(Software)와 전도인이라는 하드웨어(Hardware)가 균형있게 무장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소프트웨어적인 말씀연구는 잘 되었으나 하드웨어적인 전도자 양성

훈련을 등한시 함으로서 좋은 연장은 많으나 농부가 없는 격이 되었다.

교회는 유능한 전도자를 양성하는 전도 훈련장이 되어야 한다.

전도자의 능력이란 믿음생활의 연륜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1년에 한 두명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는 집사들이 너무 많다.

유능한 전도자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에서 실제적인 전도 훈련으로 다듬어지고

만들어지는 수고를 통하여 양성되어야 한다. 훈련의 수고와 노력이 없이 “우리 교인들은 전도를 못해”

라고 말을 하는 것은 씨앗을 심지도 않고 추수할 것을 기다리는 사람과 같다.

 

8) 10%의 핵심 멤버가 먼저 변해야 한다.

 

어느 단체든 그 단체를 이끌어 가는 것은 10%정도의 핵심멤버들에 의하여 움직이며 그들의 행동에

따라서 그 단체가 성장하느냐 후퇴하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단체가 변하고 성장하려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10%정도 사람들이 먼저 변하고

추진해 나가야 한다.

평소 전도를 안하던 교회의 성도들이 일순간에 사명감을 갖고 전도 역군이 되어서 전도하러 나서기란

쉽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장로, 권사, 구역장, 집사등 교회의 핵심적인 10%의 중직들이 먼저 변하여

전도하러 나설 때에 구경꾼 같은 나머지 성도들도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어느 교회든 그 교회가 놀랍게 성장한 이면에는 초기에 일부 핵심적인 멤버들의 피땀어린 헌신과

수고와 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10%의 핵심 멤버들이 영혼 구원을 위하여 변하고 솔선 수범을 보여 줄 때에 나머지 90%평신도들이

본 받고 따라 오는 것이다.

그러나 10%의 핵심 멤버들이 변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다면 아무리 새신자들의 전도열이 뜨거워도

교회 중직들의 텃세와 시기로, 은연중에 나오는 찬물을 끼얻는 언행들이 걸림돌이 되어서 결국 교회는

다시 조용해지므로 교회는 핵심적인 멤버들이 먼저 나서지 않으면 절대로 성장할 수 없다.

교회의 중직들은 비록 열매가 없어도 시작한 모습을 보여 전도의 불씨가 되어야 한다.

 

9) 제자 훈련 성경 공부는 전도 훈련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마28:19)는 말씀은 불신자들을 주님의 제자로 삼고

그들에게 복음 전파 즉 전도 훈련을 시키라는 말씀이다. 

아무리 수영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많이 알고 있어도 직접 물 속에 들어가 수영을 할 줄을 모른다면
알고 있는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제자, 훈련, 전도”세단어를 서로 분리시켜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제자란 말을 영어로 disciple로 표현하며 훈련을 discipline로 표현할 때 같은 언어적 어원을 갖고 있듯이

제자란 훈련을 통하여서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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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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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집회 /교회부흥을 위한 은혜의 시간 )

 

전도 방법 / 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1. 꿈꾸는 자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바버라 케디(Barbara Cady)가 쓴  「차이를 만들어낸 200인의 얼굴」(Icons of the 20th Century)이 지난 해 여름 두 권으로 나왔습니다. 20세기에 분명한 차이(differences)를 만들어낸 그들의 공통점(共通點)이 무엇일까요? 그들은 모두 꿈꾸는 자들입니다. 꿈을 위해 대가(代價)를 치른 사람들입니다. 이뤄지지 않은 꿈 때문에 우울해지기도 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꿈 때문에 실망하기도 하며, 너무 큰 꿈 때문에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꿈이 없다면 변화는 없습니다. 꿈이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불신자 전도로 유명한 미국 오렌지카운티의 새들백 교회를 방문했을 때 비전에 대한 릭 워렌 목사의 이야기는 감동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전을 갖기 전 까지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는 목회자의 비전 이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꿈을 꾸어 줄 수 도 없습니다.

저는 꽤 큰 꿈을 가진 자 입니다”(Nothing happens until someone has the vision. A church never outgrows over the leaders. You cannot delegate. I'm a pretty big dreamer.”) 릭 워렌 목사의 꿈은 하나님의 인준을 받았고, 하나님은 축복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꿈을 위해 꽤 많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21세기에 하나님께 더욱 크게 쓰임받으려는 우리 친교회의 꿈이 너무 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꿈을 이루기엔 너무나 어려운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무자비한 마귀가 들끓는 곳에서 일했고,

장애물이 많은 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하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변화(變化)시켰습니다. 1

세기에 가장 강력한 변화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누가  세상을 변화시킬까요?

꿈꾸는 자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은 능히 우리들의 꿈인 복음전도와 제자훈련, 세계선교, 민족치유의 꿈을 이루도록 도우십니다. 

 

2.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열정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과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물론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물론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 9장은 바울의 전도 전략(戰略), 열정(熱情), 정신(情神)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고전 9:24-27을 보십시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9:24-27).

  바울은 운동선수들의 헌신에 감탄했습니다. 선수들은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 모든 장애(障碍)가 되는 것을 버리고 포기합니다. 상을 타기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합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김연아 선수는 하루 8시간을 연습했고, 개그맨들은 5분짜리 프로그램을 위해 일주일에 50시간씩 연습합니다.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은 매일 15시간씩 연습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합니다!”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포기하고픈 유혹은 언제나 우리 모두의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는 '중도포기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경주(競走)에서 돋보이는 사람들은 근성(根性)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영무’라는 악바리 축구선수가 늘 기억에 남고, 박지성 선수는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기관차’처럼 지칠 줄 모르고 뛰어다니면서 기회를 만들어줌으로써 중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나이 든 선수들처럼 목회자들도 후반에 빨리 지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많이 뛴 선수일수록 빨리 지치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나 인생경주에서 이기려면 끝까지 잘 뛰어야 합니다. 피로가 누적되고, 지치는 일들 속에서 끝까지 잘 뛴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 됩니다. 운동선수들은 전반전에서와 마찬가지로 후반전에 강해야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끈기와 근성을 가졌습니까? 히브리서 12:1-3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근성 있는 믿음의 선수들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바울은 이 운동선수들의 근성(根性)을 자신의 영혼구원사역에 접목(椄木)시켰습니다. 바울의 정신은 챔피언이 되기 위해 권투선수가 링 안에서 펀치를 주고받으며 상대를 녹아웃을 시키려는 것과 같습니다. 허공을 치는 복싱은 안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장훈 선수는 이승엽에게 홈런에 욕심을 내라고 격려했습니다. 40개가 아닌 50개 이상을 쳐내라고 도전했습니다. 3관왕이 되라고 격려했습니다. 당당하게 꿈을 펼치라고 격려했습니다. 이승엽 선수는 자신의 슬럼프를 이기기 위해 매일 저녁 1천 번씩 방망이를 휘둘렀습니다. 그는 2007년 봄 시즌을 맞기 위해 지난 해 보다 더 많은 훈련량을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바울의 어떤 점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까?

영혼구원과 제자훈련, 세계선교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열정과 죽기 살기로 뛰어든 헌신입니다.

하나님,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하는 거룩한 열정을 가슴에 불질러 주십시오!

  열정과 헌신을 불어넣은 것은 구령의 열정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이루려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죽도록 싸웠습니까? 무엇에 자신을 온전히 바쳤습니까? 고린도 전서 9:16-18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우리들이 설교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기도회를 인도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목회를 하며 정신적 혹은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고 해서 우리들의 의무를 다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는 무슨 상(償)을 바랄 것도 없습니다. 복음증거를 위해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목회적인 의무를 넘어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복음전도의 거룩한 동기를 불어 넣어야만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직무태만(職務怠慢)입니다.

수해지역에서 골프를 친 정치인들이 당에서 제명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해가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권리와 자유를 희생했습니다. 바울은 먹고 마시는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바울은 결혼할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고린도에서는 사례비 받는 것도 포기했습니다. 스스로 돈을 벌어가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자유(自由)마저 반납했습니다. 종의 심정, 종의 대우를 받을지라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기꺼이 종의 모습을 택했습니다. 고전 9:19을 보십시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하나님이 주신 영혼구원의 꿈을 이루려면 그 꿈에 다시 헌신(獻身)해야 합니다.

꿈이 이뤄지는 것은 자기희생(自己犧牲)에 달려있습니다.

얼마나 자신을 바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발작적인 희생이나 충동적인 헌신 가지곤 안 됩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내 줄 수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복음을 위해 자신들의 목이라도 내놓았습니다. 게으르고 무관심한 자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교회의 디딤돌이 되려고 마음먹어야 합니다.

희생이라는 씨앗을 많이 뿌려놓고 피를 많이 흘려야 우리들의 다음 세대가 거둘 열매가 많아집니다.

복음전도의 벽을 만드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0교회의 강점을 세상에 알리고, 후배들이 자랑스럽게 복음을 전하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는 아직도 더 많은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3. 영혼구원을 위해서 죄짓는 것 빼고는 무엇이든지 합시다!

  바울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죄 짓는 것 빼고는 무엇이든지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같이 되었습니다. 이방인에게는 이방인 같이 되었습니다. 그는 초문화사역자(cross cultural missionary)였습니다. 이것이 구령의 열정(熱情)입니다. 바울은 파선을 두 차례 경험했으나 다시 세번째 배를 타고 선교지로 나갔습니다. 바울은 파선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번 매를 맞아 고통을 겪었으나 매맞는 일이 두려워 복음전도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 양심의 채찍으로 맞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 속에 들어가 전도하기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도 받게 했습니다. 영혼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첫번째 관심사입니다(마 28:18-20). 성령님이 오신 목적도 영혼구원입니다(행 1:8).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암 부스가 사역의 원리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제 전부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전 영역을 주장하시게 하지 않는 한 우리들은 지난 해와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본위, 자기중심, 자기고집, 자아만족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우주의 중심, 만유의 중심, 교회의 중심, 사역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오순절 이후에 베드로의 삶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는 항상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조차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서는 이렇게 달랍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그렇습니다. 주어가 성령님입니다. 이전에는 베드로가 주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수동태입니다. 사도행전 15:28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베드로는 성령님의 동의하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과연 우리들을 몇 퍼센트나 소유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제 전부를 소유했습니다"라는 철저한 Lordship이 우리에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영국 국교의 억압과 핍박아래서도 요한 웨슬레의 열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노팅햄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노상강도를 만났습니다. 나는 그에게 전도했습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이렇게 그의 구령의 열정을 표현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설교하듯이 나는 다시는 전도할 수 없는 심정으로 설교합니다.”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짓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열정, 이런 정신,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꿈을 꿉시다! 교회들마다 부흥하는 꿈을! 교회들마다 성령님과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꿈을! 죄인들을 지옥에서 구원하는 꿈을,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도로 세워지고 구령자로 변하는 꿈을 꿉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죄짓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지 합시다.

 

/함께 그리스도의 일꾼 된 김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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