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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한국기독교회사

 

1장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대진경교유행비 : 781(당 건중 2) 중국 서안에 설립된 비로 중국에서의 경고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탁본이 서울의 한국기독교박물 관(숭전)에 소장되어 있다.88.8*177.8cm.

 

 

 

돌십자가 : 경주 불국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라시대에 전래된 경교의 흔 적을 증명한다.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24.5*24*9cm.

 

 

몽천포구 : 임진왜란 중(1594) 한국에 온 최초의 서야 신부 세스페데스가 상륙한 곳으로 추정되는 경남 웅천

 

 

 

오다 쥴리아의 묘 : 임잰왜란 중 일본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 중에는 기리 시단으로 개종하여 순교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왕가의 딸로 고시니에 의 해 끌려 갔다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오다 쥴리아의 묘. 서울 절두산 순교성 지 소재.

 

 

1) 당나라를 통한 접촉 AD 431 에 에배소에서 기독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공유하지만 점진적 동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고 했다 가 에배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됨.

Netorius 퍼시아 에뎃사 AD635- 인도와 중국을 전파. 중국에서는 경교라함.

nestorian 당시 중국 황제는 당태종. 당태종: 아라곤의 설교 감명, 파사사라는 교회 세워줌. 중국말로 아브라함. 왕이 관심을 가지므로 크게 번창

* 그때 우리나라는 신라시대(삼국통일을 꿈꾸던때) 우리나라는 당나라 힘입어 통일 이루려함.(신라의 김춘추 여러번 방문)

 

* 불교의 고승들이 당나라 여러번 방문.

 

* 1635 - 중국 서안부(북경)에서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 같은수도 이 비문에는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736(중국어, 시리아)로 기록되었음.

 

* 1917년에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의 모조품이 금강산의 절에서 발견됨.

 

*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돌 십자가가 발견됨

 

* 1988년 경북 경산 지인면 일원리에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발견됨.

 

* 마테오리치가 1595년에 어떤 서적을 대하게됨. 거기서 당나라에 경교 가 번창함을 알게됨.

 

* 이런 여러가지 종합결과 당대 어떤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음.

 

2) 몽고를 통해 접촉 징기스칸이 몽고를 세우고 지중해 근처 모슬렘 격퇴 할때 기독교 국가들은 당시 큰 골치거리 였던 모슬렘을 대신 물리쳐 줘서 고맙게 생각함.

몽고는 세계 제국을 제패하는데 모슬렘이 큰 장벽이라는 것을 깨달음.

* 당시 징기스칸은 야만인 - 그래서 서부 교회의 Innocent 4세는 1차로 선교사(카로핀)1246년에 보냄.

 

* Rubruc1253년 콘스탄티 노플을 떠나 몽고 수도 화림에 와서 사둔 탁(징기스칸의 아들)을 만남. 사둔탁이 기독교인인줄 알았으나 아니였다.

 

* 루부룩은 징기스칸에게 개종을 권유하나 거절 당함.

당시 몽고는 우리나라 통해 일본까지 침략할 야욕.

 

* 루부룩이 최초로 한국(Caulei)을 서방에 서신으로 알림.

Coree - Korea

 

3) 일본을 통해 접촉 *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루터교가 확장.

* Ignatiu Loyola / Francis Xavier

예수회 :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Francis Xavier 를 동방의 선교사로 파송함.

그는 인도의 고아 - 필리핀(80%이상이 카톨릭) - 일본으로가 구주에 상륙 1549년에 활공총이 복음과 함께 들어감.(1592년 임진란에 있어 타격적 무기)

* 그러나 일본을 통해 기독교 접촉.

오다노 부나가(일본 지도자) - 종교 관용책.

관용 이유 : 당시 불교가 강했기 때문에 한 종교가 커지면 강대해 지므로 한쪽 약화를 위해 신학교 부지까지 마련해 줌.

(17세기 당시 일본에 30만의 신자가 있었다고 함.)

 

* 도요또미 히데요시 : 오사까 (한국인이 제일 많은곳)에서 예수회 신부들 을 모아 놓고 중국을 침공한 후 예수 믿겠다고 말함.

 

* 1592년 임진연에 전쟁 일으켜 우리나라 쳐들어옴. (20-25만의 군인을 이끌고 쳐 들어옴. 명나라 가는 길을 확보하려는 명목으로.)

 

* 이때 일본의 1군단장(고니까 유찌나가)- 세례명 어거스틴,이 선두로 쳐 들어 왔는데 그가 이끄는 많은 군인이 기독교인이 었다.

이들이 20일 만에 서울에 다다르고 이들이 평양성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내려와서 경남 웅천으로 일본군은 퇴각을 해야했다.

 

* 고니찌 유찌나가는 군인중 기독교인이 많으므로 교구장 피터 고메쯔에게 종군 신부를 보내 달라 부탁하니 세스 페데스 신부를 보내줌.

그는 우리나라에 오자 고메쯔에게 2편의 편지를 보냈다.

내용 : 1. 웅천에 도착한 일과 여정내역 2. 고니찌 유찌나가가 반갑게 맞 아주었 다는 내용과 일본 군인이 힘들게 있다는 말을 전함.

* 세스 페데스는 6개월 수 일본으로 돌아옴.

 

* 도꾸가와 이에야그(새통치자 출현함) - 기도교 엄청 박해 이때 많은 순교자를 발생. 일본 신자와 조선인으로 끌려가 믿은자도 순교함.

 

* 이 임진란 때문에 우리나라는 쇄국 정책을 고수함.(특히 일본에 대해)

결론 : 당나라, 몽고,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는 일찍 간접적으로 기독교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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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천주교, 언제 어떻게 한국 전래됐나

 

임란때 왜군 종군신부 한국 땅 처음 밟아

앞에서 우리는 경교의 신라시대 전래설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렇다면 천주교는 어떻게 한국에까지 전래되었을까? 일반적으로 한국과 천주교와의 가장 오래된 접촉은 임진왜란(1592-1598) 당시인 1593년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 천주교가 소개된 때는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30여년이 지난 1549년 7월이었다.

예수회(Jesuit) 선교사들은 로마 가톨릭 신앙 회복과 확산을 위해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아시아로 진출했는데, 그 결과로 자비에르(Francisco de Xavier, 1506-1552)에 의해 이미 16세기에 일본에 천주교회가 소개된 것이다.

자비에르는 1541년 이래로 인도 고아(Goa)지방에서 활동하던 중 일본을 ‘땅 끝’으로 인식하고 1549년 7월에는 일본 규슈(九州)에 도착했는데, 이것이 일본에서의 천주교회와의 첫 접촉이 된다. 이때로부터 약 40년 후인 1592년 4월 14일(선조 2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을 침공했고, 약 20만 명의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이 중 약 2000여명은 천주교도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의 주둔지가 진해 근처 웅천(熊川)이었다.

천주교도로서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세례명을 가졌던 왜장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조선에 와 있는 천주교도들을 위해 일본 예수회의 코메즈(Pierre Comez)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했고, 이 요청에 의해 내한한 신부가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였다. 스페인 신부였던 그가 조선의 남해안에 도착한 날이 1593년 12월 27일이었고, 웅천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28일이었다.

그는 한국 땅을 밟은 첫 천주교 성직자이자 임진왜란을 목격한 유일한 서양인이었다. 이것이 한국과 천주교와의 첫 접촉이었다. 세스페데스는 종군신부의 자격으로 내한했으나 약 1년간 체류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경상도 일대의 해안지방에 머물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4통의 서간문을 남겼는데, 이 편지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철 총장에 의해 발굴되어 당시의 정황을 헤아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7년간 계속된 전화 속에서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포로 혹은 노예 중에 천주교에 입교한 이들이 많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 치하에서 천주교가 심한 탄압을 받았을 때 다수의 조선인들이 신앙을 지키며 순교자의 길을 선택하기도 했다. 더 세심한 연구가 요구되지만 임란 중에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 중의 한 사람은 이탈리아로 가서 신학을 공부했다는 주장도 있다.

임진왜란을 통해 천주교, 그리고 천주교 신부와 접촉하게 되었지만 그 이상의 접촉이나 발전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때부터 조선의 상황은 극동으로 진출했던 예수회 신부들에 의해 서구사회에 점차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또 조선에서도 서양에 대하여 그리고 서양 기독교에 대해 점차 눈을 뜨기 시작한다. 제한적이고 일부의 계층이라 할지라도. 이 점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를 17세기 중엽의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서양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보편적이지 못했지만 적어도 1653년 이전에 우리나라 관계(官界)가 그리스도교를 알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 한 가지 흥미로운 단서를 하멜 일행의 내한과 그 심문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네덜란드의 마르코 폴로’로 일컬어지는 하멜(Hendrick Hamel)과 그의 일행 64명이 1653년 7월 30일 대만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예상치 못한 암초에 부딪혀 표류하던 중 그해 8월 16일 36명이 제주도에 상륙했다. 이들은 8월 21일 조선인 ‘총독’의 심문을 받았는데 하멜이 ‘총독’으로 칭했던 이가 다름 아닌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이었다.

이원진은 이들을 조사한 보고서를 조정에 올렸는데, 이 보고서가 효종실록 제11권, 효종 4년 8월 6일(戊辰)조에 기재되어 있다. 이 날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653년 9월 26일이었다. 이 보고서에는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나와 있다. 배가 좌초한 경위, 언어와 풍습의 차이, 선적물, 화란인들의 복장 등에 대해 보고한 후, “왜말 하는 자들을 시켜 ‘당신들은 서양의 길리시단자들인가?’라고 물어 보았더니 일동 모두가 ‘야야’라고 대답했다.”(使解 倭語者問之曰 爾是西洋吉利是段者乎 衆皆曰 耶耶)고 보고했다. 사실 이들은 암스테르담 출신으로 기독교신자였으니 이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흥미를 끄는 부분이 바로 이 ‘길리시단자’(吉利是段者)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크리스천을 의미한다. ‘다시 읽는 하멜 표류’를 쓴 강준식씨에 의하면 이 단어는 포르투갈어 ‘크리스땅’의 음가를 복사한 일본어 기리시딴(吉利支丹)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그 기원이야 어떻든 길리시단이라는 말은 야소(耶蘇), 곧 예수라는 말과 임진왜란 후 왜나라 관계의 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라는 점에서 한국의 조정이나 관리들이 기독교의 실체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원진이 ‘서양의’라는 수식어를 쓰고 있는 것을 그가 기독교를 서양에서 기원한 종교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원진이 천주교와 개신교를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이 있었는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조선 관리들이 기독교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는 알렌이 입국하기 231년 전의 일이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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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신교 전래이전 서양종교와의 관계

 

한국이 서양문화와 언제 접촉하였으며 언제 서방에 알려졌는가는 많은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사이다. 특히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세계 역사의 큰 흐름에 한국이 등장한 시기에 대한 고찰은 세계사뿐 아니라 오늘의 한국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고 바른 역사관을 갖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방 문화와의 접촉은 서양 종교와의 접촉과 결코 뗄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한국기독교회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16세기 후반 유럽 열국이 종교개혁으로 심각한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동안 성격은 다르지만 한반도는 전에 없는 도전을 만나고 있었다.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 1627년과1653년 표류로 인한 박연과 하멜의 입국, 그리고 1826년 머리 맥스웰 대령과 바실 홀 대력의 서해안 탐사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이들 사건들은 종교사적으로만 아니라 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스페데스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종국 신부로 내한하고, 일본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가운데 상당수의 예수회 신자가 생겨나면서 지극히 세속적인 임진왜란은 단순한 전쟁을 넘어 기독교와의 접촉점을 제공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박연과 하멜의 입국과 맥스웰과 바실 홀의 서해안 탐사 역시 은둔의 나라 조선이 서양문화, 종교와 접촉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갑작스런 배의 난파로 조선에 입국했다 돌아간 하멜이 출간한 표류기, 서해안 탐사를 위해 입국했다 돌아가 맥스웰과 훌이 출간한 조선 항해기는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서방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비록 공식적인 선교사 입국 이전에 있었던 이와 같은 복음의 접촉은 직접적인 선교의 결실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복음 전래의 길을 예비하는 준비였다. 한반도에 공식적으로 복음이 전래되기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조선에 복음 전파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동양의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서양종교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천주교를 통해서였다. 일찍이 예수회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1601년부터 중국 북경에 선교 거점을 마련하고 활동하며 중국 정부와 민중으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았던 이탈리아 귀족출신 마테오 리치 였다. 1582년 중국에 도착해 1601년 북경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8년 동안 중국 선교에 헌신했던 마테오 리치가 이와 같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서양 과학에 대한 식견이 풍부한 데다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동양문화와 민족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의 문화를 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유교의 경전 시경과 서경에 있는 천제와 천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주와 동질의 개념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후 기독교와 유교는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

 

명나라 정부와 북경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던 마테오 리치의 작품 다수가 중국에서 출판되었고, 이 중 일부가 중국북경에 파송된 조선국왕의 사절인 부연사를 통해 조선에 입수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단순히 신앙만 전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과학도 함께 소개했기 때문에 북경주재 신부들로부터 부연사 일행은 천문, 지리, 역법 같은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후 세 번이나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이 처음으로 서양 과학과 천주실의를 조선에 소개하고 1625년 인조 3년에 국왕에게 경제 개혁을 통한 국가 재건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이에 앞서 1575년에는 홍길동전의 저자인 교산 허균이 북경에서 세계지도와 게십이장을 가지고 돌아와 연구하고 실천에 옮긴 적이 있다. 1631년 부연사의 일행으로 명나라에 파송된 사절 중의 “한 사람인 정두원이 과학 서적, 서양의 화포, 천리경, 자명종 등을 비롯한 서양 풍속, 지리, 천문학에 관한 서적들과 함께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 후, 한 세기 동안 서학은 주자학과 쌍벽을 이루는 하나의 학문으로 조선 지식인의 사상계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영조시대에 서학은 전성시대를 맞았다. 특히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는 남인계 학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이들에 의해 서학은 조선에서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되었다. 성호 이익과 그의 제자 순암 안정복은 서학을 대변하면서 주자학 주도의 조선 사상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서양사상은 동양의 유교 사상과 근본적으로 배치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또한 종교나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 학문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금기시하지 않았다. 이처럼 서학에 대한 관심은 공리공론만 일삼는 주자학과는 달리 근대지향적인 자의식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것은 실학운동을 태동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박지원, 홍대용, 홍양호, 박제가, 이덕무로 대표되는 실학자들은 매년 3,4차례씩 파견되는 부연사의 일행에 끼여 북경를 방문하여 천주교 성당을 찾아 서양 신부와 교제하는 기회를 갖고 이들을 통해 서양 과학의 지식을 배우는 한편 천주교 교리에 대한 연구를 100년 이상이나 계속해왔다. 따라서 천주교는 이와 같은 남인계 실학자들을 토해 서학, 천주학, 천학, 양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지식인 사이에 뚜렷한 한 부류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북경을 통해 전래된 후부터 불란서와의 조약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허락받을 때까지의 조선천주교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국내의 수용과정에서 조선천주교는 처음부터 종교로서 수용된 것이 아니라 서학이라는 학문의 한 조류로서 수용되어 오다 천주학을 거쳐 천주교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왜 천주교가 선교사가 한 명도 없는 가운데서도 조선에 소개되고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었는가를 자연스럽게 설명해 준다. 그것은 사회적 영향력이 강했던 조선의 양반계층에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소개되었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논리적인 비약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초대교회 때 기독교가 유대교의 보호를 받으며 저변 확대되었던 현상과도 유사하다.

 

둘째, 그러다 조선천주교는 천주의 신앙과 제사 제도가 배치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대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는 사리이다. 처음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그 저변 확대에 주도적인 역활을 했던 이들이 배교하고, 지도자의 공백 상태에서 조선천주교는 한편으로는 박해에 대처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의 배도를 극복하여야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전과 위협 속에서도 신앙적인 이유로 제사를 거부하며,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던 이들이 생겨나면서 비로서 조선천주교는 신앙 단체로서의 자리를 굳힐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이와 같은 조선천주교의 제사 금지는 토착화 선교 정책을 택했던 예수회의 전통부다는 카톨릭 내 프란스스칸 및 도미니칸 선교회 전통을 따른 것으로, 1936년 5월 25일 신사참배 문제가 제기되면서 일본, 독일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교황청이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국가적인 예의이기 때문에 신사에 참배해도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선언이 나올 때까지 조선천주교는 신사참배와 제사 제도를 수용하지 않는 것을 공식적인 입장으로 하였다.

 

넷째, 황사영이 전형적으로 보여 주듯이 조선천주교는 외세의 개입, 정치적인 압력, 심지어 전쟁을 통해서라도 종교적인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 정부로부터 반정부단체, 반미족단체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천주교의 태도는 기왕에 갖고 있는 제사 제도 거부로 인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한층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초기에 천주교의 박해가 제사 제도 거부라는 순수한 신앙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면, 후기에 접어들면서 야기된 천주교의 박해는 종교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 발단되었다는 사시이다. 그리피스가 언급한 것처럼 황사영으로 대변되는 “로마 카톨릭의 조선 전도방식의 도덕적 약점”은 조선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닌 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는 분명히 개신교와 다른 선교 정책이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조선 천주교인들이 교황의 권위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지상의 최고 권위에도 순종하도록 그들을 바르게 가르쳤어야 했다.

 

복음의 전래라는 측면에서 고찰 할 때 확실히 천주교는 개신교와 달랐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침략군을 지원하기 위해 입국했던 일본의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가 보여 준 것처럼 선교가 정치적 패권주의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성격과 정도는 다르지만 이 점에서 조선의 천주교도 어느 정도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벨로네가 1866년 7우러 13일 불란서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어떤 귄세도 인정하지 않습니다.”라고 밝힌 것처럼 조선의 파송된 선교사들은 정부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조선 천주교의 패권주의적 선교 정책이 직, 간접적으로 1866년에 발생한 불란서 원정과 연계되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순수복음에서 출발하기보다는 학문으로, 후에 예전과 제도로 출발한 조선 천주교가 정치적인 성향을 띠면서 이들을 보는 정부의 시각이 달라졌고, 그 결과 정부로부터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조선천주교 전래 과정에서 우리는 조선천주교가 얼마나 복음에 충실했는지를 평해야 할 것이다. 성경 번역은 고사하고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고, 지나치게 정치적인 활동에 관여했으며, 제도적인 교회 조직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조선천주교 지도자들과 천주교 선교사들은 조선천주교 교세 확장과 세력 확장이라는 면에서는 생명을 아끼지 않았지만 복음을 충실하게 전달하려고 한 면에서는 너무도 미흡했다. 해리 로즈가 지적한 것처럼, “조선 개종자들에게 외국 세례명을 부여한 것, 서구로부터 외국의 간섭을 끌어들인 것, 비밀스럽고 때로는 거짓된 방법으로 선교 활동을 펼친 것, 신자들에게 성경을 배포하지 않은 것”등 초기 조선천주교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박해와 옥에 갇히는 것과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천주교인들이 영웅적인 순교적 신앙에 찬사를 보내야 하지만 순교가 일종의 공로적인 수단으로 전락하고, 또한 그 결과 천주교 선교는 자연히 믿음으로 만의 구원이라는 성경과 개신교의 근본 이라는 물론 교회 복음 본래의 사명과 대 사회적 문화적 책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때문에 성경적 신앙을 그 모토로 했던 개신교 선교와는 처음부터 차이가 있었다. 비록 당시의 사회적인 제약과 장벽으로 한계가 있었겠지만 조선천주교가 천주교의 순수 신앙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고 복음에 충실했다면 조선에서의 천주교 선교는 아마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후에 개신교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에게 조선개신교 선교의 방향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겨 주었다. 그것은 기독교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성향을 배제하면서 복음 본래의 순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거이었다. 후에 조선개신교는 정치적인 성향을 처음부터 자제하고 복음 전파, 교육, 의료사역, 그리고 자선사역과 함께 복음 본래의 사명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성경 번역 및 복음 전파라는 직접선교뿐만 아니라 교육 및 의료선교 등 간접 선교를 통한 문화 변혁을 동시에 추구하였다는 의미이다. 그 결과 조선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성경 번역과 직, 간접 선교의 균형을 통해 왕실의 마음과 민중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는 가운데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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