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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전략

이슬람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의 영적전쟁(3)

이 ㄱㄷ 선교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원하는 것처럼 무슬림들도 전인격적으로 자신들의 종교에 충실한다. 무슬림들도 나름대로 지적인 면 뿐만 아니라 의지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에서 그들을 어느 정도는 만족시켜 주는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사탄적인 종교나 이단 종파를 사람들이 왜 그토록 열정적으로 믿고 있는가 의아해 할 수 있지만 그들에게도 매우 강렬한 그 무엇이 있다.

따라서 영적인 감동과 같은 것이 단지 기독교 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 영역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지만,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도 스스로는 매우 강렬한 영적인 현상을 체험하고 있다. 때로는 그러한 체험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보다 더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매우 온유하고 친절하게 자기 백성들을 권면하시고 인도하시는 반면, 사탄은 매우 강력한 독재와 위협으로 자기 세력 안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읽을 때, 기도를 드릴 때, 찬양을 할 때, 기타 종교적인 일들이나 선행을 할 때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을 통한 감동을 자주 체험한다. 동일하게 무슬림들도 꾸란을 읽을 때, 사원에서 예배를 드릴 때, 종교적인 의무를 지키고, 선행을 할 때 악한 영으로부터 감동을 체험한다.

 

따라서 무슬림들이 아무런 영적인 감동도 없이 단순한 인간적 열심에 의해 그들의 종교에 깊이 심취해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체험들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동의 경험일 수 있지만, 근원이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요일 4:1-6; 딤전 4:1), 때로는 대단히 강렬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자기 신념을 위해 생명도 아깝지 않게 희생하기도 한다. 우리는 비슷한 현상들을 사회 전반에서 많이 경험한다. 때로는 전혀 종교적이 아닌 심지어는 악한 일들 가운데서도 감동을 받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며, 이러한 광경은 스포츠 활동이나 영화와 같은 매스 미이디어나 독서, 테러리즘, 기타 열광주의에서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세계관으로 빠져 들어갈 때, 그들이 그 속으로 깊이 몰입되는 그럴듯한 계기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때로 이러한 감동은 무함맏에게서 알 수 있듯이, 또는 사탄 숭배자들에게서 알 수 있듯이 두려움과 공포를 동반한다.

 

이슬람 교리와 의식에 깊이 감동되어 있는 무슬림들을 구원하는 것은 덜 감동되어 있는 무슬림들을 구원해 내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 이슬람에 헌신되어 있는 무슬림을 구원하는 것은, 이슬람에 실망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보다 훨씬 힘들 것이다. 이슬람 지역에서 무슬림들과 함께 살고 있다면 우리는 영적 전쟁의 최전방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단순히 지적인 논리 싸움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 싸움은 하나님과 마귀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아무리 강한 무슬림일지라도 하나님의 계시를 체험하고 능력을 체험하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다. 그렇다고 불신자가 꿈에 예수님을 보고,그분의 음성을 듣고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그 순간부터 과거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부정해 버리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꿈의 계시나 치료나 귀신 축사를 통해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일지라도 지식과 신념과 삶의 태도와 방식이 변화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며 집중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한 가지의 전도 방법만을 가지고 모든 무슬림들을 구원해 낼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전도 방법은 다른 방법에 비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어찌되었든 우리가 무슬림들을 상대한다면, 우리는 무슬림들의 영적인 세계를 송두리째 파악하고 있어야 영적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세계관의 변화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통해 발생한다.

 

먼저 부정적인 측면은 자신이 기존에 옳다고 믿었던 것의 거짓됨을 발견하고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긍정적인 측면은 새로운 세계관이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쉽게 표현하자면, 무엇이 거짓인 줄 알게 되면 무엇이 진리인지도 쉽게 알 수 있게 되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게 되면 무엇이 거짓인지도 쉽게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이 거짓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버리기를 원한다면,그들이 믿고 있는 신념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를 그들보다 더 명확하게 알아서 그들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깨우쳐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꾸란이 거짓인 것을 발견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결코 꾸란을 손에서 던져 버릴 수 없다.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면 적어도 꾸란의 어떠한 점이 잘못되었는지, 무함맏이 누구인지, 이슬람의 역사적, 종교적 배경은 어떠한 것인지 등 기본적인 상식들을 알고 있어야 하며 계속해서 그들을 연구해야 한다.

또한 복음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으로의 변화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경험이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세계관의 변화에 있어서 긍정적인 측면이다. 즉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진리를 소유하기 위하여 거짓을 버릴 수 있게 된다.

 

설령 다양한 기적적인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계속 진리의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결과는 이단에 빠지든지 거의 성장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진리의 말씀에 믿음의 뿌리를 넓고 깊고 강하게 내릴수록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아가게 된다. 물론 이것은 기도와 성령의 역사를 배제하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슬림들이 꾸란과 이슬람의 거짓됨을 인정하지 않고 온전한 계시를 통해 참된 하나님과 만난 후 그 분께 돌아오는 결단이 없다면 결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와 조우(만남)를 경험하고, 그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려는 열망에 가득차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생각하며 살아가려는 거룩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초대해야 한다.

 

우리는 무슬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하게 이슬람 신념으로 세뇌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몸 속에는 이슬람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할 만큼 철저하게 이슬람 세계관으로 세뇌되어 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능력은 그 어떠한 것보다 위대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운명에 맡겨 살던 무슬림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무슬림이 일단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운명에 맞서 싸우고,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랑하며 충성하는 삶을 살도록 지도해야 한다.

무슬림 중에 혹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이전에 믿던 여러 선지자들 중의 하나로서 영접하는 수준이거나, 혹은 무함맏과 동일한 수준으로 놓기도 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시키는 기도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한 사람을 완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일에 비하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주 체험한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과정을 ‘해산의 고통’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해산의 고통은 단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일시적으로 체험한 사람이 전적으로 변화되기까지의 전 돌봄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끝임 없는 관심과 사랑과 모범과 기도와 가르침을 통해 한 사람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서 가는 것을 보았을 때, 즉 완전한 성경의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한 사람을 해산했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이 영광스러운 해산의 기쁨인 것이다.

 

꾸란의 내용 전체를 다룬 이 글의 목적은 이슬람과 무슬림의 세계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며, 또 그것을 통해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하는 접근방법을 스스로 발견해 나가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어두움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빛을 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비진리의 어두움 가운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이 진리인지, 거짓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영적 소경으로서 어두움의 영이 이끄는 대로 이끌리며 살아간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대로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자기에게 없기 때문이다.심지어는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단순히 말해 주었을 때에도 일반적인 무슬림들은 그것이 단지 꾸란의 이야기로만 이해를 하지 실제적인 차이점을 구별해 내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무슬림들에게 선지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꾸란에 있는 내용들을 이야기 할 때, 반드시 성경과 꾸란의 차이점을 명료하게 드러내 주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조심스러운 일이고 많은 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진리의 빛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 즉 세상의 빛으로 세움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참된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면, 다시 말해 참된 진리를 설명해 주면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흑암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인지에 대해 반응을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이 믿고 있는 내용들이 거짓이고 어두움이라는 사실을 진리를 통해 조명해 주고 그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 꾸란의 주제를 통해서 복음의 내용을 전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꾸란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사실상 꾸란에는 복음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꾸란은 복음의 핵심이 되는 내용들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을 이용하면 복음을 전할 접촉점이 많다.그 이유는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세계관의 유사성 때문이다. 즉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을 모방한 옷을 입고 있는데, 우리는 그 진짜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꾸란과 성경을 동시에 사용해야 되는 이유이다. 따라서 꾸란과 성경은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약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무슬림들 가운데는 복음 자체를 듣고 싶어하고, 또 복음을 들으면 의외로 좋은 반응을 보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편 많은 무슬림들이 현지인 그리스도인이나 외국인 사역자들에게 꾸란에 대해 질문을 해 온다. 그런데 과거 무슬림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지라도 꾸란을 어떻게 사용할 줄 모르고,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답변을 해 주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울선교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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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강좌>

한국인들의 이슬람에 대한 이해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신약의 코이노니아

 

아랍 이슬람 국가에 적은 수효의 선교사들이 나가 있다. 그렇지만 정작 아랍 이슬람 세계를 잘 알고 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현실적으로 국내 사정상 교회와 신학교가 이슬람과 아랍을 잘 공부할 수 있는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간혹 이슬람 강좌를 선교단체나 신학교에서 듣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이슬람 전체의 모습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혹자는 충분하다고 할지 모르나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아랍 무슬림의 세계관을 아는데 상당한 세월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국내에서 이슬람에 대한 이해 역시 아랍 국가에서 이슬람과 편차가 있다. 사실 이슬람에 대한 이해에서도 아랍 무슬림끼리 서로 시각 차가 있다 2012년 이집트에서 이슬람주의자 무함마드 무르씨 대통령이 취임한 뒤 이집트는 이슬람주의자 무슬림과 비이슬람주의자 무슬림 간에 “무엇이 이슬람이냐”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달리하였고 이슬람주의자 무슬림 형제단과 이슬람주의자 살라피 간에는 “무엇이 이슬람 율법(샤리아)이냐”를 두고 의견이 달랐다.

한국도 여전이 무엇이 이슬람이냐와 무슬림에 대한 태도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갖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이해에서 무엇이 서로 다른가?

 

첫째, 이슬람의 뜻은 평화peace이다. 이슬람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복종을 드러내는 것”을 가리키고 전문용어로는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내려준 종교”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이란 말에는 평화라는 의미가 없다.

둘째, 이슬람은 삶의 양식 a way of life이다. 이슬람은 법과 정치, 경제,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무슬림들이 믿는다. 그러나 실제 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들의 삶은 이슬람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 무슬림들이 더 많다. 일부 이슬람학자들은 오늘날 무슬림들의 행태를 보면 무함마드가 기겁을 할 것이라고 했다.

셋째, 이슬람은 종교이고 국가이다. 이 부분에서는 무슬림들끼리 의견이 갈린다. 이슬람주의 무슬림은 이슬람이 종교와 국가가 포함되어 있어서 이슬람은 종합적인 제도nizām shāmil라고 한다. 그러나 비이슬람주의 무슬림은 “종교는 알라에게, 조국은 모두에게”라는 구호를 내걸어 종교와 정치를 구별 지었다.

넷째, 이슬람은 영적인 종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을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꾸란에서 성령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고 본질상 하나님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3위로서 인격을 가진 분이다. 그래서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섭리하고 운행한다. 이런 정의에 따른 성령은 꾸란과 이슬람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무슬림이 이슬람을 spiritual이라고 쓴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성령과 다른 개념이다.

실제 꾸란과 성경간의 연속성은 없다. 특히 유대인들은 무슬림들이 무효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전의 경전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알라”라면 “알라”는 유대인들의 신은 아니라고 했다.

다섯째, 이슬람교는 인간완성의 정점이다.[1] 이슬람은 이 땅에 이슬람 국가를 세우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인간 완성에서 가장 좋은 종교는 이슬람이라고 했다.

이슬람은 알라- 무함마드를 빼놓고 성립이 되지 않는 종교이고

전 세계 무슬림들이 아랍어로 기도를 해야 하므로

세계 무슬림들은 아랍인 무함마드의 사상을 꾸란과 하디스에서 배우게 된다.

아랍어를 모르면 이슬람을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언어와 종교가 밀접하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한데 그러면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신약에서 partnership이란 말에 해당하는 키워드는 코이노니아koinonia이다. 코이노니아는 공동 참여joint participation, 교제fellowship, 커뮤니티community, 동역partnership 등으로 번역되었다. J.Y. Campbell은 “코이노스koinos로 표현된 주요 개념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참여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코이노니아는 단순히 다른 사람과 연결된다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70인역에는 코이노니아가 3번 나오는데 그 의미는 개인과 개인 간의 교제로서 수평적 관계를 가리켰으나

사도 행전 2:42 등 신약에 나오는 코이노니아는 인간과 하나님 간의 수직적 관계를 자주 나타낸다.

그 예로서 고후 6:14절의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에서 사귐은 코이노니아인데 교제(파트너십)과 동일어이다.[2]

그리고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에서는 communicate라는 말인데 “다른 사람과 가진 것을 나눈다”는 의미다.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삶과 봉사와 재산을 남과 나누는 것이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에서 코이노니아는 교제fellowship이다. 이 교제는 초대 기독교인들 간에 있었던 영적 교제이었다. 또 요한 1서에 나오는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와 공동참여와 다른 사람과 공동 참여를 가리켰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란 내적인 태도가 밖으로 나타나려면 희생이 요구된다.

그 동안 대개는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전도부터 해야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무슬림과의 새 패러다임은 먼저 그들과 좋은 관계를 열어간다는 것이다. 아랍인들은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 혹은 좋은 이웃이 되면 서로 허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이야기도 포함되고 꾸란과 성경의 공통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대화를 전개하면 좋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가 계속 이어지면 아랍인들의 문화와 세계관에 적합한 성경의 이야기들을 미리 준비하여 두었다가 대화 상황이 적절할 때 그들과 나누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코이노니아가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전에 우리들이 무슬림과 수평적인 관계에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전도의 첩경이 된다. 신약의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인 간의 신앙 교제를 말하지만 우리와 종교가 전혀 다른 무슬림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밖으로 표현되어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 공주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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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적으로 본 이슬람 세계

 

아랍과 이슬람 세계를 지칭하는 용어는 매우 다양하다. 아랍·중동·이슬람 세계는 각기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아랍세계란 아랍어를 국어로 사용하고, 이슬람을 국교로 정한 나라들의 집합체를 의미한다. 이는 언어적, 정치적 개념의 국가집단이다.

 

아랍세계에 속하는 국가들은 아랍연맹(1942년 결성)에 속해 있는 22개국(3억명)이다. 아랍세계로 분류되는 국가에는 시리아·레바논·요르단·팔레스타인·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바레인·카타르·아랍에미리트·오만·예멘·(남북예멘1991년 통합이집트·수단·지부티·소말리아·리비아·튀니지·알제리·모로코·모리타니·코모로 등이 포함된다.

 

이들은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아랍세계의 중요한 역할은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대륙을 잇는 교량 역할과 세계문화의 중심부 역할이다. 아랍세계에서 생성된 문명에는 고대 나일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리고 중세 사라센 문명이 있다.

 

중동이란 유럽중심주의 시각에 의한 지정학적 개념이다. 중동은 동양(East)·근동(Near East)·오리엔트(Orient: 라틴어로 동양의 의미레반트(Levant: 동양, 해뜨는 곳) 등으로 불렸다. 13세기 지중해 무역을 장악했던 이탈리아 상인들은 지중해 동부를 레반트라 지칭했다. 그후 16~17세기 서구유럽이 발칸반도 이남의 오스만터키 제국을 동양이라 지칭하였으며, 동시에 극동이라는 용어도 사용했다.

 

19세기 페르시아와 인도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의 개입이 증대되면서 오스만터키 지역은 근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후 1902년 미 해군 제독 앨프리드 마한이 페르시아만 주변 지역을 처음으로 중동이라 칭했으며, 1930년대 후반 영국 정부가 중동사령부를 설립하면서 중동이라는 용어가 공식화되었다. 이후 영국의 중동지역에 포함되었다.

 

1946년 미국 워싱턴에는 중동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미국도 공식적으로 중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미 국방부에는 공식 명칭으로 근동과(Near Eastern Affairs)가 존재하나 비공식적으로 중동이라는 용어가 더 선호되고 있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유럽중심주의 시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 지역을 서남아시아(Southwest Asia)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중동이라는 용어 속에는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대륙 사이의 중계 역할 개념과 지정학적 중심지 개념 그리고 전략적 요충지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중동에 속하는 국가는 이집트·터키·시리아·레바논·팔레스타인·이스라엘·요르단·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이란·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오만 ·예멘 ·사이프러스 등이며, 크레시·피셔 같은 학자들은 여기에 아프가니스탄과 리비아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슬람세계란 이슬람을 국교로 정한 나라와 무슬림이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나라(아랍세계 포함)의 집합을 의미한다. 현재 이슬람세계에는 이슬람 기구(Organization of Islamic Conference: OIC) 소속 56개 국가(13억명)가 포함되어 있다.

 

이슬람세계에는 아랍세계 22개국과 아프가니스탄·알바니아·아제르바이잔·방글라데시·베넹·브루나이·부르키나파소·카메룬·차드·코모로· 가봉· 감비아 ·기니비사우· 기니· 가이아나· 인도네시아 ·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말레이시아· 몰디브· 말리· 모잠비크· 니제르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세네갈· 시에라리온 ·수리남 ·이란· 타지키스탄 ·터키 투르크메니스탄 ·우간다 ·우즈베키스탄 등이 포함된다.

 

 

이슬람 국가들은 주로 아시아·중동·아프리카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슬람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일부 산유국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빈국에 속하며, 정치적으로도 대부분 제3세계 민족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13억명, 56개국의 이슬람 세계 분포

 

우리는 흔히 이슬람 하면 아랍을 떠올리게 된다. 아랍이 이슬람의 본산이며, 이슬람교는 아랍인들만 믿는 종교로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선입견은 무슬림(이슬람교 신자)들이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로 보는 무함마드(마호메트의 아랍어에 따른 표기)가 아랍인이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아랍이 이슬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랍이 이슬람의 전부는 아니다. 수적으로 보더라도 13억명의 무슬림 중 아랍인들은 3억명에 불과하다.

 

그 예로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큰 이슬람 국가가 어디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이슬람 국가는 바로 인도네시아다. 인도네시아 전체 인구 약22,000만명 중 18,000만 정도가 무슬림이다.그 외에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는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불교국가로 여기는 태국의 남부 5개 주도 그 숫자가 무려700만명에 이르는 무슬림 지역이다. 또한 태국 내 30여개 주에 500만명의 무슬림이 고루 분포되어 있다. 최근 서구인 인질 납치로 자주 외신에 오르내리는 필리핀 남부지역 민다나오 등도 이슬람 지역이다.

 

중앙아시아 역시 이슬람지역으로, 요즘 우리가 언론에서 많이 접하는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키르기스스탄·타타르·아제르바이잔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 지역들은 특히 옛 소련의 공산주의를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까지 이슬람 지역으로 남아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북부아프리카가 전부 이슬람화되었고, 남부아프리카 및 중부아프리카에서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대략 반 정도가 이슬람화되어 있다.

 

유럽에서는 서쪽으로 스페인 남부지역이 17세기 초까지 이슬람 지역이었으며 알함브라 궁전과 같은 훌륭한 안달루스 문화를 이룩해 놓았다. 동쪽으로는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보스니아와 코소보 주변이 이슬람화되어 있다. 이들 지역도 역시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처럼 공산주의를 겪고도 아직까지 이슬람 국가로 남아 있으며, 현재 주변 민족들과 심각한 분쟁을 경험하고 있다.

 

또한 교통과 통신의 발전과 더불어 기타 여러 유럽 국가들과 많은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이슬람교는 유럽국가들 사이에서도 급속히 번창해 유럽 제2의 종교로 부상하고 있다. 그 실례로 영국의 런던 한곳에만 300여개의 이슬람 성원(모스크 혹은 마스지드로 불림)이 존재한다. 이와 같이 이슬람교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몇 나라 및 남미쪽에만 낯선 거대한 종교·문화공동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거대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현재 그 분포는 어떤가. 이슬람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7세기 초엽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전파된 이슬람교는 100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을 잇는 광대한 영역에 뿌리를 내렸다.

무함마드, 새로운 종교를 열다

무함마드는 서기 570년 아라비아의 서부 지역에 위치한 메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당시 메카는 종교도시이자 부유한 상업도시였다. 메카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 건설한 카바 신전이 있었지만,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대상활동의 안녕을 기원하는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자리잡았고, 인도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중개무역의 거점이기도 했다.

 

이는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 간의 오랜 싸움과 적대 관계로 인해 동서를 잇는 시리아-페르시아 간의 교통로가 거의 폐쇄되자 예멘-아라비아 서부-시리아로 연결되는 동서교역의 새로운 통로가 열렸는데, 메카는 이 통상 교역로의 중간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랍부족 중 가장 유력하던 꾸라이쉬 족이 메카의 상권을 잡고 있었고 이 메카 상인들은 새 교역로의 개척에 눈부신 활약을 했다. 이러한 메카 꾸라이쉬 족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무함마드는 장성하여 청년시절 부유한 과부 카디자에게 고용돼 대상활동을 하면서 각지로 돌아다녔다.

 

그 후 여주인과 결혼한 그는 종교적 사색과 명상에 잠기곤 했는데, 610년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유일신 사상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한결같이 아랍사회의 기존 가치관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는 다신교적 우상숭배를 부정했으며 고리대금이나 도박, 음주, 난잡한 결혼 등 아랍의 고대 악습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기존의 종교관 및 사회관습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무함마드는 당시 지배층의 강한 반발에 부닥쳐 박해와 수난을 받았다.

 

박해가 심해지는 와중에 그는 622년 하나님(알라)으로부터 이주의 계시를 받고 그를 따르던 이슬람 신자들과 함께 메디나로 이주하였다. 이것을 히즈라라고 부르며, 그때를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았다.

 

메디나로 이주한 무함마드는 그곳에서 최초의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형성하는데 성공하고 이주 10년 후에는 메카에 무혈입성한다. 이때부터 이슬람 세력은 급속히 팽창했다. 이슬람은 아라비아반도에서 북으로 진출해 7세기 초반에는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그 결과 이 두 지역 사이에 있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방이 이슬람화되었고, 13세기에는 소아시아반도가 이슬람화되었다.그보다 앞선 7세기 후반에는 동쪽으로 이란고원을 석권했고, 8세기 초에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대륙의 북서부까지 진출했다. 8세기 중엽에는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중국의 당나라 군대를 키르기스스탄의 탈라스에서 격파함으로써 중앙아시아 전역이 이슬람권의 영향 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후 다시 동쪽으로 중국의 수도인 장안(長安) 및 내륙지방은 물론 만주와 한반도에까지 무슬림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이슬람이 전파됐다. 한편 해상 실크로드인 뱃길을 통해 남방으로 진출한 무슬림들은 13세기 이후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및 필리핀의 민다나오 섬에까지 그 위력을 떨치게 된 것이다.

 

북아프리카에서 코카서스 지방까지 진출

 

이집트에서 서쪽으로 진출한 이슬람은 7세기 후반 지중해 연안을 따라 리비아·튀니지·알제리 및 모로코에까지 전파됐다. 8세기 초에는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여 약 700년 이상이나 그곳에서 권세를 누리다 13세기부터 기독교 세력들의 재정복에 밀렸고, 17세기 초에는 그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게 되었다.

 

북아프리카를 석권한 이슬람은 이 대륙의 해안과 내륙지방으로 진출해 동쪽 해안의 소말리아·에티오피아·케냐·탄자니아·잔지바르·모잠비크·마다가스카르에 이르렀고 서쪽 해안으로 모리타니아·세네갈·감비아·니제르 및 나이제리아로 진출하였으며, 내륙으로는 차드·수단·우간다에도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북아프리카 일대로의 전파는 이슬람 초기에 달성되었으나 동서 해안 지역과 내륙 지방으로의 진출은 14~15세기 이후에 이뤄졌으며 아직 전통적 민속신앙 요소가 많이 섞여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15세기 중반,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터키제국의 이슬람 세력은 발칸반도로 진출하여 루마니아·불가리아·알바니아·옛 유고슬라비아의 남부지역 및 그리스 등에도 무슬림들이 산재하게 됐으며, 코카서스반도로도 뻗어가 옛소련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과 코카서스 지방도 이슬람화되었다.

 

주요 이슬람 국가의 무슬림 분포 현황은 앞쪽에 첨부한 지도와 같다(이슬람 국가들의 인구통계치는 정치·문화적 이유로 발표지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어 본 통계수치는 필자가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한 수치를 사용하였음). 현재 이슬람 세계가 세계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살펴 보면, 전 세계 영토의23%가 이슬람권이며, 전 세계 인구의 약 20%가 무슬림이다.

 

또한 미·소 냉전체제가 종식된 후 문화와 종교를 근거로 한 신냉전체제가 형성되고 있는 시점에서(새뮤얼 헌팅턴 주장) 이슬람의 세계사적 역할은 앞으로 더욱 증대될 것이다. 신냉전 체제의 주체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기독교 세력과 아랍 이슬람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세력이다. 서구 세계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런 연유로 이슬람 원리주의의 근본 배경에는 이슬람의 정교일치 사상이 내재되어 있다.

 

미국과 이라크의 갈등, 미국과 이란의 갈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미국과 리비아의 갈등,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갈등,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갈등, 소련과 체첸의 갈등, 소말리아 내전, 수단 내전, 레바논 내전, 프랑스와 알제리 이슬람 세력 간의 갈등,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카슈미르 갈등의 배경에는 바로 이슬람 세력과 서구 사이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이슬람 국가들이 수많은 나라와 민족, 언어로 나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문화권으로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믿는 이슬람교 때문이다. 현대 이슬람사회는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서구 열강의 압제를 경험한 신생 아랍 국가들이 독립후 채택한 사회주의 이념과 경제체제가 더 이상 국제경쟁력을 갖지 못하고 국민의 복지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자각이 일면서 서구와의 협력관계를 적극 모색하고 있다.

 

친서방 성향의 온건 왕정국가들조차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정치에서 서서히 민주주의와 인권의 문제에 보다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요르단과 모로코·바레인에서 젊은 국왕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이슬람권 전역에서 세대교체의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강경한 반미 국가인 리비아도 최근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경제제재 조치의 철폐에 주력하고 있고, 이란은 하타미의 개혁정책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무엇보다 하타미 대통령은 이슬람권과 서구의 갈등을 예단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을 서구의 제3세계 지배 음모론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고, ‘문명간의 대화라는 새로운 담론을 제창해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스스로도 이탈리아와 바티칸 교황청 방문을 시발로 유럽과 서구 국가들과의 관계 증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출처 :  이원삼 선문대 교수/이슬람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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