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상담] 조상 제사를 금하는 이유가 뭔가요?
조상 제사를 금하는 이유가 뭔가요?
한국 교회의 복음전도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는 조상제사문제이다. 지금도 특히 시골 지역에서는 「예수는 믿고 싶으나 조상제사 때문에 곤란하다.」 「나는 장손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하며 교회에 대해서 관심은 있으나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이 문제는 한국교회의 고민거리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제사는 단순한 문화가 아니라 우상이나 귀신 숭배적 요소를 명백히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조상제사에 대하여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1.조상제사의 유래
조상제사 문제를 말할 때 우리는 유교와 제사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 대하여 우리 고유의 종교와 문화가 있는데 왜 남의 나라 종교를 믿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 술 더 떠서 서양 종교인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서양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어불성설이다. 사실은 기독교가 사대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교가 사대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때에 당나라의 학제인 국학을 받아들인 것이 그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유교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교가 본격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제25대왕인 충렬왕 때 안향이 중국에서 주자전서를 입수해 온 후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을 세우고 대성전을 건립함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통하여 유교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
그러니까 유교는 우리 고유의 종교가 아니라 증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나라에서 토착화되어 발전한 종교인 것이다.
또 제사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에 조상을 극진히 섬기는 고유의 제사가 있는데 왜 서양식으로 하느냐고 말을 하지만 사실 제사도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다.
중국의 문헌에 보면 중국의 공자 이전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는데 이때는 부모에게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고 황제에게만 제사를 지냈다. 그러니까 어떤 유명한 황제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추모 제사를 지낸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일반인들도 자기 조상들이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하여 부모에게 제사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자기 조상을 위대한 영웅으로 만듦으로써 결국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사제도는 점점 성행하게 되어 평민까지도 제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유교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처음에는 특별한 왕에게만 제사를 지내다가 고려말부터 유명한 사람들의 사당을 짓기 시작하여 위패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태조가 조상 제사를 장려하게 되어 일반화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조가 조상제사를 장려한 것도 사실은 조상을 숭배하고 복을 빌려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 정치적으로 백성을 교육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평민들은 별 관심이 없었으나 점차 조상제사가 자신의 신분과 관련지어 짐으로써 성행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유교나 제사는 본래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니며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특별히 제사는 처음에는 한편으로는 조상을 추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의 가문을 과시하기 위하여 드리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조상을 마치 신처럼 모시며 제사를 잘 드려야 조상이 복을 준다는 사상까지 곁들여지게 되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2.기독교에서 조상제사를 금하는 이유
1)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제사는 명백히 조상숭배적인 요소가 있다. 조상의 영혼을 신격화하여 죽은 조상을 잘 받들어 모셔야 조상이 기분이 좋아서 후손들을 축복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조상제사를 모시지 않으면 죽은 조상의 혼이 노하여 화를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죽은 조상의 혼을 섬기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말할나위없이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드리고 섬기라(출20:3-5)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제사를 드릴 수 없는 것이다.
2)사후의 영혼은 세상 사람들과 교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으면 흙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창3:19) 또 전12:7에서는 육신은 흙으로 되었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더구나 그렇게 한번 각각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면 그 이후로는 절대로 이 세상과는 다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즉 세상을 떠돌 수도 없고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말씀하고 있다.
한 부자가 있었고 나사로라하는 거지가 있었다. 이 사람은 부자집에서 나오는 음식찌꺼기를 먹고 살았다. 어느날 모두 죽어서 부자는 음부로 가고 거지 나사로는 낙원으로 갔다. 부자가 음부에서 뜨거워 고통을 받다가 낙원을 보니까 거기는 얼마나 시원하고 아름다운지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애원을 한다. 나를 거기로 보내주지 못한다면 제발 물한방울이라도 손에 찍어서 내 혀를 좀 서늘하게 해달라고....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한다. 너희와 우리 사이는 큰 구렁이 있어 오고갈 수 없노라고... 그러자 부자가 말한다. 그럼 제발 살아있는데 내 형제에게 가서 이 소식을 전해주어 이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그러자 아브라함이 다시 말한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듣게하라고....
그러자 부자가 다시 요청한다. 죽은 자가 그곳에 가서 전하면 저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한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나서 가서 이러한 상황들을 전해준다고 해도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또 시49:17-19에서는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잠21:16에서는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사람은 죽으면 흙에서 온 육신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혼은 하나님께로 간다. 그리고 한번 이 세상을 떠나가면 이 세상과는 완전한 결별이다. 어떤 형태로든 교통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꿈에 죽은 조상이 와서 무슨 말을 하였고, 어떻게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더니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들을 하는데 다 허무한 이야기다. 꿈은 그냥 꿈일 뿐이고, 설령 조상이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해서 그대로 했더니 그대로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조상이 와서 말한 것이 아니라 마귀가 말했거나 아니면 다만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꿈에 의하여 혹은 일이 그렇게 되려고 하니까 그렇게 된 것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대하게 제사를 드려도 조상이 그것을 결코 받을 수 없으니 우리는 헛된 제사를 드릴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조상을 섬기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3)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어떤 사람은 묘자리를 잘써야 복을 받는다고 한다.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일이다. 묘자리는 그냥 보기 좋은 곳에 쓰면 된다. 너무 험하고 너무 질지 않고 그저 사람들이 외관상 보기에 너무 민망하지 않는 곳에 쓰면 되는 것이다. 땅은 암만 파봐야 땅이다. 거기에 무슨 정기가 있다거나 거기에 무슨 화나 복의 기운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무기물에 불과한 것이다. 흙은 흙이요, 물인 물인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택일을 잘해야 한다고 한다. 이름도 무슨 획수를 따져가며 이름을 잘지어야 복된 사람이 된다고 한다. 모두가 어리석은 미신에 불과하다. 날짜는 그냥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연의 질서대로 지나가는 것이다. 시간은 지구가 태양을 돌면서 생기는 것이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태초에 부여하신 자연의 질서대로 유지되고 발전되어가는 것이 땅이요, 시간이다. 그 자체가 무슨 능력이 있다거나 서기(瑞氣)가 있다거나 액운이 있다거나 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름은 부르기 좋고 기왕이면 아름답게 좋은 의미를 갖게 지으면 되는 것이다. 이름을 잘지어야 복을 받는다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에 불과하다. 글자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의사소통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지가 만들어 놓고 거기에 얽매어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자기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것을 섬기는 것이다. 자기가 만들었으면 자기보다 못한 존재인가, 나은 존재인가? 물론 못한 존재지. 그런데 서로 통하기 위하여 글자를 만들어 놓은 것데 그걸 잘해야 복을 받는다고 하니 이런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는가?
또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조상제사를 잘 모셔야 후손이 잘된다고 한다. 정성껏 제사를 잘 모시면 죽은 조상의 혼백이 돌아와서 마음이 흐뭇해서 후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조상을 홀대하면 죽은 조상이 왔다가 노가 발동하여 후손들에게 재앙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죽은 조상은 이 땅위에 올 수 없다. 하나님께서 정해준 그 장소를 결코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 자리에 머물면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려야하는 것이다.
설령 만에 하나 올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먹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후손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능력도 없고 권한도 없다. 더구나 지금은 갇혀 있는 상태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제사는 우상숭배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올 수도 없는 조상의 혼에게 무엇인가를 차려 준다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할수 없는 조상에게 복을 빈다는 것도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므로 우리는 제사에 찬성할수 없는 것이다.
3.그리스도인의 대응
위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조상제사 문제는 단순한 문화가 아니라 미신적이고 우상숭배적인 요소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 목적도 지극히 미신적이고 성경의 말씀과 합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두가지 방법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1)살아생전에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현실적인 종교, 생명의 종교다. 물론 옛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옛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옛것은 벗어버리고 새것을 찾는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
그러나 유교는 다분히 무덤의 종교이며, 과거 지향적인 종교이다. 과거에 집착한다. 옛것을 고집한다. 그래서 무덤에 신경을 쓴다. 제사에 관심을 갖는다. 옛것을 고집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식하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현실이고 미래이다. 물론 과거를 거울로 삼아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며 오늘에 적용시켜야 할 것은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중시해야 한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온갖 격식과 예를 다 갖추어 경배한다해도 사실은 아무 소용없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이기심을 위한 것이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혹은 그럴듯하게 해야 양반인 것 같아서, 혹은 부모님의 묘를 크게하고 제사를 거창하게 드려야 무슨 대단한 집안처럼 여겨지므로...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실상은 겉치레요,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오늘 여기서 그리고 현생에서의 미래와 영원한 미래에 얼마나 생명의 은총을 누리느냐하는 것이다. 얼마나 사랑과 은혜를 나눌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부모님에게도 그렇다. 정말 부모님께 효도하려면 살아생전에 잘해 드려야 한다. 살아생전에 효도해야 한다. 돌아가신 뒤에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중에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계명중에서 첫 번째 계명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던 것이다. 아무리 제사를 거창하게 드리고 묘를 어마어마하게 단장해 놓아도 살아생전에 효도하지 않으면 다 헛일이다.
또한 아무리 거창하게 제사를 잘드리고 제사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도 살아생전에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그리스도인을 보면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추도예배를 드리며 부모님의 뜻을 기린다.
물론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 우리는 추도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사실 추도예배는 한국교회만 있는 것이다. 사실 성경에서는 죽은 사람을 추도하라거나 죽은 자에게 예를 갖추라고 한 곳이 없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도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아무리 위대한 성웅이었다고 해도 결코 추도예배를 한 일이 없다.
즉 성경에서 추도예배를 언급한 사실도 없고, 죽은 사람에게 예를 갖추라고 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죽은 자와 관련되어서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더구나 산사람과 죽은 사람과는 더 이상 만날 수도 없고 다른 방법으로 교통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추도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제사를 기독교식으로 토착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한국교회가 제사문제로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있게 되자 추도예배라는 이름으로 제사를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추도예배를 드림으로써 조상의 뜻을 기리며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 함과 동시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조상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사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이나마 교회에 나올 수 있는 돌파구를 만들어주고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고 제사대신에 추도예배를 드림으로써 조상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덜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어쨌든 추도예배는 사실 성경적인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덕을 위하여,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한국교회가 처한 사회와 문화상황속에서 만들어진 기독교문화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교나 조상제사가 우리 고유의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 젓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실은 그것이 아님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하겠고, 조상제사의 부당함에 대해서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것, 사후 인간의 영혼은 세상이나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는 만날 수도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교통할 수도 없다는 것,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제사를 배격해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이야기해 줄 수 있어야 하겠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불신자보다 살아생전에 더 부모님께 효도함으로써 그들에게 비난거리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비록 성경적인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덕을 위하여, 복음의 진보를 위하여 추도예배를 정성껏 드림으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아름답고 덕스러운 모습도 함께 보여줌으로 조상제사문제로 유발되는 모든 문제들을 신앙과 지혜로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