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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피즘]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와 객관적인 이해

 

 

수피즘: 무슬림의 새로운 포교 방식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아랍 무슬림들은 이슬람에서 더 깊고 실질적인 의미보다는 형식적인 의례를 더 강조하고 있다.

수피즘은 인간의 마음과 지성에 관심을 갖는다. 이슬람에 대한 이해는 아랍 무슬림들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무슬림은 우리처럼 온건하고 어떤 무슬림은 알라의 이름으로 과격한 테러를 행하고

어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와 알라를 부르며 알라에게 가까이 가려고 한다.

 

꾸란과 이슬람에서는 알라가 영이라고 하지 않는다.

아랍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영에 대한 개념으로 “알루후(또는루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아랍 무슬림들에게 “알루후(혹은 루흐)”가 뭔지를 물었더니 “나프스(혼)”라고 답하였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알루후가 뭔지를 물으면 금방 답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무슬림들이 알라allah의 말이라고 믿는 꾸란(코란이라고도 함)에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에게 알루후에 대하여 묻는다. 알루후는 우리 주님의 문제라고 말하라. 너희에게 주어진 지식은 조금일 뿐이다(꾸란 17:85)”.

 

무함마드 시절에 사람들이 무함마드에게 알루후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니까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알루후의 문제는 알라의 문제라고 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지식은 조금이어서 알루후에 대해서 인간이 잘 모른다고 했다.

아랍 국가에 있는 모스크(무슬림들이 기도하는 장소)의 이맘(기도 인도자)에게 알루후가 뭐냐고 물으니 그는 알라만 안다고 답했다.

꾸란은 루후 알꾸두스는 지브릴 천사라고 한다.

그러나 아랍어 성경에서 알루후 알꾸두스는 성령(하나님의 영)이라고 한다.

결국 아랍 기독교 커뮤니티와 아랍 무슬림 커뮤니티 안에서 동일 어휘가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무슬림들이 왜 무함마드의 이름을 부르며 알라를 찾을까?

그 대답은 분명하다. 꾸란에 답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알라 이외에 신이 없다. 알라술(무함마드)에게 순종하는 자마다 이미 알라에게 순종한 것이다”(꾸란 4:80)라고 말한다.

 

아랍어로 된 꾸란(한국말로 번역된 꾸란은 번역의 오류들이 많다)을 보면 이슬람이 잘 보인다.

꾸란은 무함마드에게 순종하는 자마다 알라에게 순종한 것이라고 하므로 <무함마드⇨알라>의 관계가 이슬람 신앙의 기본이 된다.

그래서 전 세계 무슬림들이 “알라 이외에 신이 없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라술이다”라고 신앙 고백한다.

그렇다면 꾸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할 곳이 없다.

꾸란 112장에서 “그(알라)는 (누구를) 낳지 않았고 그가 태어나지 않았다(꾸란 112:3)”고 하여

꾸란의 알라는 성경의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을 꾸란이 분명히 해 주고 있다.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무슬림들에게 알라는 너무나 먼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수피 무슬림들은 알라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종단마다 독특한 수행을 계속했다.

 

수피 무슬림들이 무함마드를 통하여 알라에게 향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데 반하여,

이슬람의 샤리아(이슬람 율법)는 겉으로 드러난 무슬림의 행동을 규제하는 알라의 명령과 금지 사항이 주요 내용이다. 수피 무슬림들은 샤리아와 수피즘을 구분한다.

샤리아는 인간의 몸에 해당한다고 하고 수피즘은 인간의 혼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슬람의 혼이 수피즘이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슬람 율법(샤리아)이 무슬림의 겉에 드러난 행동에 관심을 갖는 반면,

수피즘은 무슬림의 내면세계를 다룬다.

수피즘은 정통 이슬람의 율법적인 생활에 또 다른 다이내믹한 힘을 넣어 주려고 한다.

수피는 그의 마음(깔브)을 깨끗하게 하려는 사람이었기에 수피 무슬림의 혼을 정화하고 신을 찾아가는 학문이 수피즘이다.

샤리아(몸)와 수피즘(혼)은 결국 육체의 법과 마음의 갈망을 찾아가므로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work와는 전혀 다르다.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그리스도의 영이 인도하는 은혜의 삶이다.

 

꾸란은 알라가 영Spirit이라고 하지 않아 전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따라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수피즘은 8세기부터 시작하여 14세기까지 그 이론이 발전하고 있었다.

하루 아침에 수피즘이 등장한 것이 아니다. 7세기 초 일부 무슬림들은 참회를 상징하는 털옷(wool)을 입고 다녔다.

털옷은 세상의 쾌락을 버리고 오직 수행에만 힘쓴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 뒤 1세기 뒤에는 이라크에서 "수피야"라고 불리는 금욕 수행자ascetics들이 나타났다.

그당시 상당수 무슬림들이 세상의 즐거움을 쫓아가고 알라를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900년 경에는 바그다드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수피들이 번성했다. 수피즘은 초기에는 금욕적인 수행이 지배적이었고 후기에는 범신론적인 신비 수행으로 바뀌었다. 초기 수피들은 그들의 마음이 장차 다가올 것에 소망에 두었고 후기 시대의 수피들은 알라와 결합하여 무아지경에 다다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오늘날의 수피들은 이슬람의 윤리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이슬람 신학자들이 그들의 정통 신학을 발전시키면서 알라의 개념도 더욱 추상화되고 비인격화되었다.

이슬람력 2-3세기를 지나면서 칼리파(순니 무슬림들에게 이슬람 종교를 수호하는 이슬람 제국의 최고 통치자)와 사회 지도층들이 이슬람 확장의 결과로 사치와 탐닉에 빠지고 알라를 생각하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초기 수피즘의 주창자로는 알바스리(728년 사망)가 있었는데

그는 세상의 쾌락에 빠져 있는 세태를 비난하고 끊임없는 참회를 하라고 했고 알라를 두려워하라고 했다.

그는 진정으로 알라를 두려워하는 것이 금식(이슬람에서 금식은 라마단 달에 한 달간 낮에만 금식하는 것)과 기도보다 더 낫다고 했다.

그러나 곧 수피들은 알라를 두려워하는 것에서 알라를 사랑하는 것으로 그 초점이 바뀌어갔다.

예루살렘에 무덤이 있는 바스라의 라비아(801년 사망)는 여성 수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사랑에서 신에 대한 사랑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했다.

그녀는 꿈에서 무함마드(이슬람의 예언자)를 만났는데 무함마드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니

라비아는 "내가 알라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압도하고 있어서 그 어떤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이나 증오가 내 마음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이처럼 수피 무슬림이 알라를 사랑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다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에베소서 2:4-5).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다. 그러나 복음이 아닌 것은 “복음”이 아니라고 말해줘야 한다.

 

오늘날 수피 무슬림이 아닌 무슬림들은 수피 무슬림의 길이 잘 못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의 여섯가지 믿음(알라, 천사들, 메신저들, 경전들, 종말, 운명론)과

다섯가지 기둥(신앙고백, 기도, 메카 순례, 금식, 종교 구빈세)을 실천하고,

매주 목요일(또는 다른 날) 모스크에서 수피들이 수행을 따로 하는 것을

비수피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일상적인 삶의 복잡성을 회피한 수피들을 현실도피자라고 부르고,

가족과 사회에 무심한 수피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더구나 주관적인 체험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수피들은 간혹 미신이나 허풍떠는 사람 혹은 범신론자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집트에는 76개 수피 종단이 있고 8,000만 인구 중에서 1,100- 1,500만 명의 수피 무슬림들이

매주 따로 모이고 있다. 오늘날 서구에서는 수피 무슬림이었던 알루미Rumi에 대한 저서들이 시중 서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구 사람들에게 수피즘이 소개되고 있다.

수피즘은 율법적이지도 않고 테러를 부추기지도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구인들은 수피 댄스와 수피 음악, 수피의 시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수피즘이 이슬람의 정통 교리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긴 무슬림들은

수피들의 길이 참 이슬람의 길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미국은 2001년 9.11테러 이후 이슬람의 여러 종파 중에서 가장 온건한 색채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는 수피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알아즈하르 대학교에서는 몇년 전에 수피학에 대한 정규과정이 생겨났다.

수피들의 꾸란 주석은 꾸란의 글자 뒤에 숨겨진 내밀한esoteric 뜻에 관심을 갖는다.

수피가 꾸란을 주석할 때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슬림들 안에서도 꾸란 어휘 의미에 대한 인식과 이해에서 그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실제로 수피즘 연구에서도 어휘 의미에 대한 해석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음은 수피즘의 특징이다.

(1) 수피는 외형중심의 무슬림 신앙을 거부한다.

(2) 수피는 감정적인 체험을 강조한다.

(3) 수피즘에서 인간이 알라 속에 소멸한다.

(4) 수피즘은 메타피직스의 관계가 아니라 종교 윤리적인 변화이다.

(5) 이슬람 율법(샤리아)와 수피즘은 서로를 비난한다.

(6) 수피즘은 이슬람 율법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7) 살라피 운동은 이슬람 율법을 적용하여 종교를 정치화하기를 바란다.

(8) 수피 수행에는 마음의 정화 혹은 자아 소멸 혹은 무아 지경(무상의 상태) 등이 있다.

 

영국의 무슬림 인구가 지난 10년(2001-2010) 동안 거의 배로 증가했다는 사실을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인터넷 판이 2011년 1월 4일 보도했다.

2001년에는 영국 무슬림이 6만 699명이었는데 2010년에는 10만 명에 달했다.

이들 대부분이 수피즘을 통해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물론 수피즘과 반대로 이슬람 율법 하에 놓인 경직된 삶을 좋아하는 무슬림들도 있고 또 많은 무슬림들이 아랍어로 된 꾸란을 읽을 수 없어서 꾸란을 잘못 해석한 내용들을 맹신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슬람의 다양성과 복합성 때문에 이슬람의 경계론과 포용론이 등장해 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슬람이 율법 종교이고 포교 중심의 종교라는 것이다.

지금은 무슬림들이 상당히 정치화되어있다.

 

역사를 보면 수피 무슬림들이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이슬람을 전하는 주된 수단이 되었고

오늘날 이슬람 산유국의 오일머니는 세계인의 관심사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수쿠크와 수피즘은 무슬림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알라를 믿느냐와 어떻게 무슬림이 살아가느냐를 연결해 주고 있다.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와 객관적인 이해가 쉽지 않다.

아랍인 무슬림들과 동남아시아 무슬림들이 다르고

아랍 국가 안에서도 요르단 무슬림과 사우디 무슬림이 다르다.

더구나 국제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해석도 무슬림마다 다르다.

예를들면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나던 날 밤 필자가 만난 아랍 무슬림 이웃들은

무역센타를 공격한 무슬림들을 가장 훌륭한 무슬림이라고 했다.

그리고 2005년 요르단의 세 호텔에서 테러가 일어나기 전까지도 이라크의 알카에다 조직을 테러리스트라고 하지 않다가 그 일이 일어난 뒤에는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대항하여 싸우는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레바논의 히즈불라를

아랍 무슬림들은 저항세력이라고 하지 테러리스트라고 하지 않는다.

자기네 아랍인들의 대의를 위하여 싸우는 그들은 저항세력이고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상당수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는 무슬림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태생이 무슬림이고 부모가 무슬림인데 테러를 자행한 그들이 어찌 무슬림이 아니란 말인가?

이슬람 중심의 세계관이 우리의 시각과 동일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특히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슬람에 대한 연구는 이슬람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무슬림들도 이슬람의 율법에 머무르는 경직된 외형 중심의 삶이 싫어서 수피즘을 찾는 무슬림들이 있다.

수쿠크가 우리에게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은 무엇인지 국민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위와같은 논의에 참고할 만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 <이슬람 문명의 이해>(예영)는

오늘날의 이슬람과 고전 이슬람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해 주는 책이고

 <코란의 의미를 찾아>(예영)는 샤리아와 파트와(이슬람학자들의 법률적 견해)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책이다.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대한 전체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는 <이슬람율법>(살림)이란 책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고

수피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수피들의 꾸란 주석은 <꾸란의 이해>(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란 책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다음 달에 출간될<수피즘과 수쿠크>는

최근 아랍 세계와 한국에서 논점이 되고 있는 주제이다.
출처: 공일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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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이슬람철학

 

알 파라비(950 사망)는 철학과 이슬람의 계시가 하나라고 주장했고 이 세계는 하느님이 思考를 통해 창조했다고 가르쳤다. 이븐 시나(1037 사망)는 하느님은 제일원인이며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지식 속에 본질적으로 선재한다고 했다. 그는 알-가잘리의 비판 을 받았다. 이 세상의 것들이 태초부터 하느님의 지식 속에 본질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의 영원성을 전제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불멸성 부정한 것도 비판

 

철학적 지식과 신적 계시가 일치한다는 사상

 

이븐 루쉬드(1198 사망, 서구에는 아베로에스로 알려짐)는 철학은 예언자가 전한 진리를 세련된 형태로 설명해야 하며, 인간은 각자 자신이 지닌 이해력에 따라 이 방법, 혹은 저 방법이든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중의 진리'라고 잘못 번역되어 유명해지고, 그로 인해 비판받았다.

 

그는 물질에는 시작이 없으며 창조는 매순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인간존재의 목적은 물질적 이성이 능동적 제일 이성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서, 앞서가는 정신들은 이렇게 불멸성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최초의 사회학자라 불리는 이븐 할둔(1406 사망)은 아사비야(무리의 혼, 공공의 호라기, 혹은 집단정신) 개념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사회,심리학적 요소로, 이것이 종교적 열정과 결합되면 한 민족으로 하여금 다른 민족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과학과 의학

 

그리스 유산을 번역, 재구성, 확장하여 근대적 정밀과학의 초석을 놓았다. 아비센나의 의학서는 수 세기 동안 유럽에서 사용되었다. 수많은 과학용어, 별자리 이름, 수학용어 들을 정립했으며, 광학, 기하학도 이슬람의 유산이다.

 

신비주의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논리적 입장보다는 직접적, 현실적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다섯기둥의 실천과 종교의식의 거행, 예배의식과 일상생활에서 알라의 '약속 및 위협'을 통해 알라의 현존을 신비적으로 체험하는 것, 알라를 진정으로 믿는 인간의 삶과 인격 속에서 이슬람의 생명력과 현실성을 확신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인격적, 감정적 체험의 욕구룰 반영한다.

 

초기 신비주의자들

초기의 신비주의자들은 이슬람이 시리아로 확산될 무렵 출현했다. 신약의 영향을 받았으며, 초기 신비주의자들은 금욕주의적 측면이 강했다. 수피 Sufi(수프, 양모)란 양털로 된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의미했다. 이는 금욕적 성격의 운동이었음을 반증하는 명칭이다. 수피들은 8세기에 출현했는데, 지옥의 공포에 대한 영향으로 참회, 금욕의 기풍을 진작시켰다. 중심 개념은 나프스(저급한 영혼)와 끊임없이 씨름하는 지하드(聖戰)였다. 이 나프스와의 투장은 가난, 단식, 침묵, 지속적 자기반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일일이 또 끊임없이 통제하는 기술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과학으로 연마되어 개인의 삶 전체를 완전한 이흘라스(순수한 헌신)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체계적 명상을 실천했으며, 금욕주의는 메소포타미아, 이란 동부 호라산 지역에서 발전했다. 동부지방 최초의 금욕주의자는 이브라힘 이븐 아드함(777년 사망)이다. 그는 종교적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타와쿨)라고 믿었다.

 

청빈주의도 중심주제였다. 파크르(가난)에 대해 "나의 가난은 나의 자랑이다."(파크리 파흐리) 라고하면서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한 소유도 멀리할 것을 요구했다. 후대에는 이 타와쿨, 파크르 모두 내면화된다. "가난이 완벽해지면 곧 하느님이다."라는 관념이었다. 따라서 파크르는 모든 좋은 것을 포기하는 의미로, 더 나아가 저승에 대한 바람과 희망을 포기하는 의미가 되었다. 절대적 가난 속에 있는 피조물은 그의 모든 것이 되어주는 창조주의 영원한 풍요로움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신비주의자들은 명예와 칭송에 대한 애착도 부정했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신경 쓴다는 것은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리다(만족), 즉 무엇이 주어지든 그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 되었다.

 

수피즘은 쿠란에 근거하지만 철학적 면에서는 신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 조직적 면에서는 기독교 수도원 제도의 영향을 받았다. 정기적 명상과 철야기도, 금욕적 생활 하다가 12세기에는 독특한 음악과 의식 갖춘 공동의 종교의식을 행하는 단체로 발전했다. 이들의 관심은 현세에서 알라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무슬림 둘-눈 알-미스리 Dhul-Nun al-Misri(859 사망)의 영향도 컸다. 그는 "이집트에서 온 어부"라 불렸는데, 인간은 신비적 합일에 의한 결혼으로 알라에게 먹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스리와 추종자 수피들은 영혼이 알라에게 먹히기 위한 준비단계를 상정했다. 수피는 진리로 향하는 길을 가는 순례자이다. 회개,금욕,자제,가난,인내,알라에 대한 신뢰,만족의 단계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진리와 지식의 초월적 영역에 도달하면 알라의 자비를 확신하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도취의 체험을 한다.

 

사랑의 신비주의

바스라의 라비아(801년 사망)로 대표된다. 그는 물동이와 횃불을 들고, 사람들이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천국에 대한 희망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기도하도록, 지옥에는 물을 붓고, 천국에는 불을 질르겠다고 선포했다. 즉 지옥의 형벌이나 낙원의 기쁨과 무관한 절대적 사랑을 추구한 것이다. 라비아 사후 1세기 반 경과하며 사랑의 이론 더욱 정교화되고 확대되었다.

 

다양한 신비주의자들

 

바그다드의 심리학자 무하시비(857년 사망)는 냉철하게 자신의 영혼(무하시바)을 탐색했고, 하라즈(896년 사망)는 신비주의적 신앙고백으로 "오직 하느님만이 ''라고 말할 권리를 지니셨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 포괄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후기의 타우히드(하느님의 유일성 고백), "하느님 외에는 달리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말의 기초를 닦았다. -(859년 사망)은 마리파(그노시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식)를 언급했고, 자연을 하느님의 놀라운 활동을 증거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는 피조세계의 가치를 부여한 최초의 수피였다. 바예지드 비스타미(874년 사망)는 페르시아 출신으로 수브하니(나에게 찬미를, 나의 위엄은 얼마나 위대한가!)를 외쳤다. 세상과 자신으로부터 결별한 인간의 神化를 표현한 것인데 인도 베단타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브라흐만과의 합일에 이르기까지 아트만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적인 모든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편 자신이 체험한 황홀경을 묘사함에 있어 천상으로의 여행이라는 상징을 최초로 사용했고, 파나를 향한 갈구, 자신의 체험끝의 알 수 없는 실망감을 시적 언어로 그려냈다. 여기에서 파나는 우선 윤리적 개념이다. 즉 인간적 요소가 점차 소멸하고 영성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윤회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이 아니다. 즉 니르바나와 무관하다. 오히려 자신이 존재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피조물의 노력과 관련된다. 바그다드의 주나이드(910년 사망)는 정신의 신비주의를 주창하여 이란과 후기 수피주의, 특히 마그립(북아프리카) 지역의 수피 전통에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불교의 영향으로 무신론적 신비주의도 존재했다. 이런 입장은 자아 헌신이나 진정한 존재에의 완전한 몰두를 궁극의 목표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보수적 무슬림들은 무신론적 신비주의자들 zindig 과 극단적 수피들 ecstatics 까지 이단으로 취급하여 박해했다.

 

-할라즈 al-Hallaj

페르시아의 수피로 922년 체포되어 "나는 진리이다" al-Haqq 라고 외치며 참수형을 당했다. 그는 알라와의 신비적 합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하느님과 자신 사이의 베일 거두어주기를 청했다. '키탑 앗-타와신'이라는 시에서 등잔불에 자신을 던지는 나방의 비유를 구사했다. 그는 드디어 "나는 신이다, 나는 진리(하크)이다."라고 외쳤다. 할라즈의 죽음은 主意主義的 신비주의라 할 수 있는 1기 고전적 수피주의 시기를 마감한 사건이었다. 그후 온건한 수피들은 다음 2세기동안 수피의 입장이 쿠란과 하디스에 근거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며 정통주의자들과 타협을 추구하며 수피즘을 체계화했다.

 

 

후기

 

잘랄 알-딘 루미 Jalal al-Din Rum는 쿠란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했다. 그는 알라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생각했고, 어떤 종교이든 근본적 문제는 종교적 체험이라고 확신했다.

 

-가잘리 al-Ghazali

 

신비주의자들이 내재성과 편재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정통주의자들이 알라의 초월성 전능성을 강조하는 입장과 상반되므로 절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것을 대표한 사람은 알-가잘리이다.

 

무이 알-Muhyi al-Din(종교부흥가)이라고 불리우기도 한 알-가잘리는 페르시아에서 1058년 출생하여 샤피 학파의 법학을 공부했고, -아샤리를 추종하는 이맘의 지도 아래 신학을 공부했다. 아샤리의 사상이 지배적인 니잠이야 Nizamiyah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4년간의 강의 중 정신적 위기 맞아 회의주의를 거쳐 수피즘에 빠져들었다. 그후 대학을 떠나 시리아로 가서 2년간 명상과 기도를 했으며, 정통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수피 신비주의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헸다.

 

-가잘리는 무함메드가 받은 계시에 근거하고 있는 한 법과 이성도 인정했다. 그러나 이성과 역사, 실천의 용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오직 시적 상징적 언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직관적인 통찰력의 타당성도 주장했다. [-문키드 민 앗-달랄](과오로부터의 구원자)은 철학, 스콜라학, 바티니야 등 당대 신학사조와의 정신적 투쟁이었으며, [이흐야 울룸 앗-](종교학문의 부흥)은 하느님 보시기에 바람직한 삶울 제시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절대복종(이슬람)과 이만(신앙) 외에도 이흐산(하느님을 대면하듯이 그분께 봉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고, 극히 비종교적 행위에 몰두할 때도 하느님께서 항상 자신 앞에 계시다는 느낌을 가져야 함을 주장했다. 마지막 40장은 죽음을 맞이하는 구도자의 자세에 대해 가르침이다. 한편 [미슈카트 알-안와르](빛을 위한 벽감)은 기존 수피주의에는 다루지 않았던 이슈라크()의 신비주의를 표방했다. -가잘리의 빛의 신비주의는 1191년에 처형당한 수흐라와르디에 의해 명료화되었다. 그것은 영혼이 자신의 망명지인 서방 물질세계로부터 순수한 빛으로 이루어진 동방의 정신세계로 되돌아간다는 내용이다.

 

[이슬람사상의 부흥]에서는 우주는 영원한게 아니라 알라의 창조적 의지를 통해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라고 주장했고, 인간과 창조주, 인간이 사는 세상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도덕적, 체험적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논리적 이성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겸손한 영혼은 쿠란의 상세한 해석이나 신학을 몰라도 충분히 종교적일 수 있다고 했고, 수피들의 자기 훈련과 명상의 방법이 적절히 수행되면 대단한 가치가 있음을 강조했다. 다섯가지 기둥도 올바른 정신상태와 올바른 마음에서 스스로 우러나와서 준수되어야만 하며, 그 때 비로소 최후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다. 그는 쉬아의 비의 사상과 철학자들의 합리주의를 모두 반대하고 순니 주류의 입장을 옹호했다. 그의 사상은 지성우월주의와 보수학풍에데 비판을 담고 있었고 주관적 종교체험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종교에 대한 지식 일므 ilm 과 실천적 행동 amal 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립했다. 지식과 정서, 행동의 인과적 상호작용 주장한 것이다. 이는 순니의 형식주의를 공격함과 동시에 수피적 영적 상태가 이단으로 향하는 것을 방지했다. 알 가잘리에 의해 수피 사상은 순니 신학의 공인을 받게 되었다.

 

수피교단(타리카)

 

수피즘의 교단은 압둘 카디르 알-질라니(1166 사망)와 더불어 시작했다. 그는 한발리파 설교가로 그의 제자들이 형제단을 조직했다. 공식적 이슬람의 교리주의와 율법주의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한 무슬림들이 갈구하던 감성적 종교성이 수피교단으로부터 얻어졌다. 수피 교단은 공동예배, 음악행사를 실천했으며 엄격한 스승(피르) 제자(무리드) 관계를 특징으로 보여주었다. 특히 디크르 전통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일정한 양식의 말을 정기적으로 수천 번씩 반복하는 영적 기술이었다. 예를 들면 '알라'라는 단어나 신앙고백문, 주에대한 찬미, 주에게 용서를 구하는 형식이다. 스승의 의무는 제자에게 그의 영적 수준에 적합한 디크르를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성한 명칭을 수천번씩 반복하는 경우 심리적으로, 심한 경우 생리적으로도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수피 교단의 종교적 실천은 대중운동으로 성장했다. 대중은 교단 창시지의 기일-성인의 영혼이 하느님과 하나 된 '결혼 기념일'-에 열리는 축제(우르스)에 참여했다.

 

수많은 교단이 압둘 카디르 질라니를 기원으로 하는 카디리야 교단을 모형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카다리야 교단은 현재도 가장 많은 지역에 분포한다. 그 창시자는 49명의 아들을 두었다는 점에서 금욕주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라 쉬코흐(1659년에 처형) 는 무갈제국의 후계자로 카다리야 단원이었다. 그는 신비주의에 바탕을 둔 이슬람과 힌두교의 만남을 제시했다.

 

리파이야 교단의 창시자는 아흐마드 알-리파이(1183년 사망)이다. 이 교단은 디크르를 큰 소리로 외치는교단이어서 '괴성을 지르는 더비쉬들'로 알려져 있다. 자해행위와 기괴한 기적행위를 주로 실천했다.

 

수흐라와르디야 교단은 정치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했고, 낙슈반디야 교단은 디크르를 침묵 속에 행했다. 쿠브라위야 교단의 창시자 는 나즈무딘 쿠브라(1220/21 사망)로 수피들이 수행 중 체험하는 색깔에 관한 심리학적 해석을 시도했다. 메블레비야 교단은 잘라루딘 루미(1273 사망)의 아들이 조직하여 오스만 제국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활동한 교단이다. 회전무 더비쉬로 알려져있는데 그것은 일종의 음악적 디크르였다. 하지만 체제순응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도시민, 중상층을 주 추종자들로 삼았다. 벡타쉬야 교단은 쉬아적 요소를 수용했는데 오스만 정예군(예니체리)의 종교적 대들보 역할을 했다. 이 교단은 단순하나 강렬한 음률적 시를 특기로 했고 회합에 여성들의 참여를 허락했다. 치슈티야 교단은 무이누디 치슈티(1236 사망)가 창시했는데 현재 인도에서 가장 활동적 교단 중 하나로 음악과 시에 뛰어나다.

 

이처럼 다양한 수피 교단들은 이슬람 지역 변두리에서 이루어진 개종 과정에서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13세기의 수피주의는 몽골 침략과 그로 인한 재난에도 불구하고 수피주의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후기 수피주의

 

후기 수피즘의 최고의 거장은 스페인 태생의 이븐 아라비(1240 사망)이다. 그는 메카에서 영감 얻어 [푸투하트 알-마키야](메카의 계시)를 저술했다. 그는 와흐다트 알-우즈드(존재의 융합) 개념(본인이 직접 사용한 용어는 아님)으로 유명하다. 그를 범신론자로 보는 경향도 있었지만 아라비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의심한 적이 없다. 하느님의 본질은 단일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숨겨진 보물이었으니, 알려지기를 원했느니라. 그래서 이 세상을 창조했느니라.", "우리 자신은 하느님을 묘사하는 속성이며, 우리의 존재는 그분의 존재가 객체화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하느님이 필요한 반면, 하느님에게는 당신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필요하다."

 

신비주의의 체계화

 

잘라루딘 루미(1207-사망연도 불명)는 신비주의 신학자였던 아버지 바하우딘 왈라드 사망 후 아버지의 한 제자를 통해 신비주의 전통에 입문했다. 그후 1244년 동년배의 더비쉬 샴수딘 만나 신비적 사랑을 체험했다. 그러나 샴수딘은 루미와의 관계를 시기한 루미의 측근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후 금은세공가 살라후딘 자르쿠브(1258 사망)과의 우정을 나눴고, 제자 후사무딘 첼레비(1284 사망)과 교류했다. 그는 첼레비의 요청으로 26,000 소절에 달하는 신비적이고 교훈적인 이행시 [마트나위]를 남겼는데, 13세기 모든 신비적 관념과 사상 총망라한, 예언자를 찬양하는 내용의 신비주의 시들이었다.

 

수피주의의 특징

 

수피주의는 쉬아파와는 달리 순니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고,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수피즘은 순니 신앙의 엄격함과 울라마들의 냉담한 율법주의를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신의 계율을 준수하는데 소홀함을 조장한다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셀주크조와 오스만 제국 통치 아래서는 수피들의 반란이 있기도 했다.

 

쉬아의 분파

 

 쉬아파 the Shiites

   

657년 시핀 전투는 이슬람 교리 발전의 출발점이자 여러 종파 출현의 계기였다. Shia"알리 추종자의 무리"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무함메드의 직계 자손만이 합법적 칼리프이며 이슬람의 최고 통치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에서 출발했으나, 알라는 알리와 그 자손을 후원하며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어서 언젠가는 쉬아파를 승리로 이끌 메시야 역할을 하도록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발전했다. 또한 알리에게 초자연적 지위를 부여했다. 쉬아파의 교리는 알라와 무함마드와 그의 가르침, 쿠란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쿠란의 오류없는 해설자로서의 이맘의 존재를 믿었다. 쉬아파는 알리에 반대하던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을 지금도 금요예배 의식에서 저주하고 있다. 쉬아파는 우마이야조에 대항한 압바스조의 반란을 지원했지만 압바스조는 쉬아파를 우대해주지 않았으므로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

 

6대 이맘 Jafar al-Sadiq 시기에는 이맘들은 법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과 순결성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스 nass의 원칙에 입각해 선임 이맘이 다음 이맘을 임명했다. 한편 일름 ilm의 원칙은 권력을 행사하고 규율을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지식이었다. 쉬아파에는 메시야 기대가 있다. 이맘 가운데 한 사람이 알라의 명으로 메시야 mahdi로 출현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만큼 이맘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 쉬아파는 박해나 탄압에 대한 taqiyah(신앙을 감추는 행위)를 인정하며, 순니파와의 적대관계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에 동조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쿠란의 영원성을 믿지 않으나 자유의지는 인정했다. 또한 알라는 정당하며 인간은 오직 자신의 행위에만 책임지면 된다고 믿었다.

 

자이드파 the Zaidites

 

순니파와 가장 비슷한 입장이다. 나스의 원칙이 초자연적 의미 지닌다는 사실을 부인했고,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가 칼리프로 선출 된 것 당연한 처사였다고 주장햇다. 무함마드에 의한 알리의 후계자 지명을 부정하고, 이맘위는 상의에 의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보았다. 그러나 알리가 가장 적절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이맘위의 세습권과 이맘의 완전무결성을 부인했다.

 

12이맘파 the Twelvers

 

쉬아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분파이다. 12대 이맘 무함메드 알-문타자르 Muhannad al-Muntazar에서 유래했다. -문타자르는 878년 다섯 살 때 바그다드의 강 상류의 사마라 Samarra의 모스크에 있는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이를 12이맘파는 '숨은 것'으로 이해하며, 마흐디로써 도아올 것이라고 믿음. 그의 대리인은 샤 shah 라고 생각한다. 12이맘파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시간을 지배하고 있는 숨은 이맘에 대한 믿음에 바탕해 있다. 그가 부재중인 동안 그의 신학적 입장은 종교학자(무즈타히드)들에 의해 해석된다고 믿는다. 12이맘파는 이즈마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스마일파 the Ismailites 또는 일곱 이맘파

현재는 온건한 집단이다. 과거에는 여러 분파를 파생시켰다. 여섯 번째 이맘의 첫째 아들 Ismail에서 유래했다. 이스마일은 폭음을 이유로 다음 이맘직을 박탈당했는데, 이를 이스마일파는 음모라고 믿는다. 이들은 이스마일은 죽은 것이 아니라 숨었으며 마흐디로 다시 나타날 것이며, 이스마일은 알라의 화신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의 근거를 찾기 위해 쿠란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비의적 교리를 도출했다. 이스마일파는 페르시아나 기독교 및 유대교 배경을 가진 마왈리 Mawali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이들은 정통주의, 칼리프를 부정했고 산발적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스마일파에서 파생한 분파들로는 멕카를 공격하고 유혈 반란을 일으키기도 한 콰르마트파 Qarnatians, 무슬림 통치자들을 암살한 암살단파, 11세기 알-다라지 al-Darazi가 조직한 드루즈파가 있다. 드루즈파는 파티마조의 칼리프 al-Hakim이 알라의 마지막 화신이며, 곧 마흐디로 출현할 것이라고 믿었다.

 

 

쉬아파에 속한 모든 종파는 일반적으로 초대에서 3대까지의 칼리프를 거부(타바라)한다. 그 이유는 알리에게 예정된 칼리프 위를 찬탈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순니파와의 지속적 분열의 핵심 원인이다.

 

쉬아파 요약

 

쉬아파의 특징은 한편으로는 교의의 정착을 위해 순니파보다 더 광범위하게 철학의 범주 개념과 변증법을 필요로 한 반면, 한편으로는 이맘위에 대한 믿음과 같은 형이상학적 선결조건을 내세운 대한 다른 모든 종교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매우 과민하여 피해의식 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맘에 대한 지나친 숭배와 순교자의 무덤을 성지로 받들어 순례지로 격상시킨 점은 순니파 모두에게 아직까지 반발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쉬아파는 순니파의 신조(알라의 전능성과 쿠란의 영원성)에다 진정한 신앙의 보증자로서 이맘을 세 번째 신조에 포함시켰다. 그것은 쿠란은 창조된 것이 아니고, 영원하다는 두 번째 신조를 밀어내기 위함이었다. 현재 쉬아파가 중심인 국가는 이란으로 사파위조 시대(1501-1722) 이란족 절대 다수가 순니에서 쉬아로 개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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