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의 훈련, 인성, 영성(1)

 

전형구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선교사 훈련에 있어서 2가지의 중요한 면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나는, 선교사의 양적인 면이다. 요즈음 선교단체에서는 선교훈련 지원자가 점점 감소하고 있음을 크게 염려하고 있다. 한국선교연구원(원장:문상철목사)은 “선교사 증가 추이가 빠른 속도로 둔화되고 있다. 선교단체 대표들을 인터뷰해 봐도 2007년 이후로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는데 공감하고 있으며 이런 추세라면 3만 명 파송은 어렵지 않겠는가. 생각보다 정체 현상이 빨리 올 것으로 보고 있다. 이제 수직상승기는 지났다. 질적 성숙을 꾀해야 할 시기”라고 진단했다. 지난 11월 14, 15일 광림세미나하우스에서 개최된 한국선교지도자포럼 모임에서 KWMA 사무총장인 한정국 목사는 다음과 같이 한국 선교계에 긴급히 드리는 제안을 내놓았다. “한국교회가 어렵다고 합니다. 교세도 많이 줄어가고 있고, 개혁하자는 말은 많아도 정작 개혁되기 힘든 상황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교세가 줄어가니 헌금도 비상이고, 일부 교회는 선교비를 재조정하겠다고 합니다. 선교에 그렇게 너그럽던 한국교회가 몸살을 심히 앓고 있는데, 선교지를 방문해 보면 한국선교사님들은 이런 본국의 추세에 다소 무딘 반응을 보입니다. 막연한 낙관주의가 한국 선교계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2013년 가을을 보내는 요즈음, KWMA는 한국교회의 어려움을 예사롭게 보지 않습니다. 강 건너 불이 우리에게도 붙을 가능성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선교훈련의 질적인 면이다. 우리 한국 선교는 선교사 파송 숫자에 비하면 선교훈련의 질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에 한정국 KWMA 사무총장은 “한국 선교계에 긴급히 드리는 제안”을 통해서 위기를 만난 한국선교의 자구책 노력으로서 “양적성장을 배제할 순 없으나 질적 성숙을 가속화 시켜야 한국선교의 미래가 보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의 확신과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만 가지고 있다고 하여 선교지의 문화, 언어, 종교에 대한 단편적 지식만 제공하여 파송하는 것은 마치 전선의 긴급한 요구에 이끌려 소총사격하는 방법만 가르쳐 장교들을 전쟁터에 보내는 것과 같다. 선교사 훈련의 중요성을 백번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은 바르고 철저하게 훈련하는 것이 사역의 극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교지에서 발생되고 있는 많은 문제의 주 원인은 선교 훈련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선교훈련 기간과도 무관하지 않다. 주요 선교사 파송단체별 장기선교사 훈련 기간을 보면, 교단은 길게는 7개월, 짧게는 5주간이며 선교단체는 대체로 교단보다 길어 길게는 2년, 짧게는 3개월이다. 훈련기간이 제일 긴 선교단체는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국제선교회로서 선교사훈련대학(MTC)과정이 6개월~2년이다. 다음은 우리 바울선교회로서 국내훈련 6개월, 해외훈련 8개월 합 14개월이다. 우리 바우리 중에는 드물게 훈련기간이 너무 길다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가 기간에 대해서는 만족해 하고 있다. 우리 바우리가 바우리되게 하면서 바우리로서의 긍지를 잃어버리지 않은 이유는 바로 선교훈련의 기간이라고 본다.

선교훈련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선교 훈련 내용 또한 중요하다. 케냐의 임종표 선교사는 선교훈련을 내용에 따라 선교현지의 진입을 위한 “현지 진입 전 훈련(Pre-field orientation)”과 현지에 도착해서 받는 “현지훈련(On-field orientation)” 그리고 “선교사 계속훈련(On-going orientation)”의 3종류로 분류하였다.

 

우리 바우리의 “현지 진입 전 훈련(PFO)”은 총 14개월이다. 6개월의 국내훈련은 선교사 기본훈련 1차 과정이며 영성훈련과 선교학을 중점적으로 훈련한다. 나머지 8개월의 해외훈련은 선교사 기본 훈련 2차 과정으로 타문화 적응 훈련과 언어훈련 및 공동체훈련을 중점적으로 훈련한다. 그리고 바우리의 “현지훈련”(OFO)은 1~2년간으로 견습 선교사가 선교지로 부임하여 오리엔테이션과 언어 및 적응훈련을 받는다. “현지훈련”은 “현지 진입 전 훈련”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 기간 동안 해당 지부장과 총무, 지부원들은 깊은 관심을 갖고 성실하게 지도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견습선교사가 현지에 도착하면 적어도 2~3일간은 지부원들이 견습선교사와 함께 숙식하면서 그 나라의 문화, 종교, 관습, 교회, 언어 등을 강의하고 가능하다면 지부원들의 선교지를 순회하거나 그 일이 불가능할 경우는 지부원들의 사역 현장을 영상으로 소개한다면 견습선교사의 현지훈련에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지부원들과의 친밀한 관계형성에 있어서도 효과있는 일이라고 본다. 물론 필리핀지부, 일본지부, 대만지부 등 몇 개의 지부 외에 사역자들이 분산되어 있는 지부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선교사 계속훈련”(OGT)은 대개의 경우, 선교사 자신의 재충전을 위한 훈련으로서 선교사 자신들의 발전을 위하여 안식년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때는 학위를 위해 연구의 기간으로 혹은 각종 세미나를 통하여 재훈련기간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이 기간에는 자신의 지금까지의 사역을 돌아보고 재조명을 통하여 정리하면서 앞으로의 발전적 선교를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우리 바우리에는 아직 실시되지 않고 있지만 안식년 중인 선교사들을 위해 본부에서 재교육 혹은 가족 캠프 등의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 바우리는 정책적으로도 선교사 계속훈련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두나미스선교관이라는 좋은 시설이 있지 않은가.

선교훈련의 질을 높이기 위한 과제의 해결은 선교사의 인성과 영성의 조화있는 훈련에 있다. 여기에 대하여 박기호 선교사는 “선교사가 인성과 영성을 모두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서양, 동양을 막론하고 선교사의 인간성보다는 영성을 계발시키는 데 치중해 왔다. 기도와 성경 말씀을 강조하다 보니 사람과의 관계성이 부드럽지 않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유능하고 누구보다 헌신도 많이 하지만 영성과 인간성을 구분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바나바를 성령이 충만한 자요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성은 영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성령의 열매가 삶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좋은 인성으로까지 발전하면 풍성한 결실이 열릴 것이다”라고 인성과 영성의 조화있는 선교사 훈련을 강조하였다.

 

최근에 바우리를 지원한 헌신자들의 지원동기를 들어 보면 아직도 우리 바우리는 선교단체로서의 신뢰를 잃지 않고 의외로 바우리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우리 바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고 있다. 우리가 이 축복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이사회와 본부, 전주안디옥교회를 비롯한 1000개의 후원교회들 그리고 세계의 선교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는 바우리 모두가 함께 적극 협력해야 한다. ♣

 

선교사의 훈련, 인성, 영성(2)

전형구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2013년 경희대와 중앙일보 취재팀이 도시와 농촌의 중학생 2,171명을 골고루 섞어 설문을 통해 중학생의 인성을 조사한 적이 있다. 인성의 세 영역 ‘도덕성, 사회성, 정직성’을 구성하여 10개 지표별로 점수를 매긴 결과 인성이 좋은 학생은 5명 중 1명꼴, 학생 중 절반가량의 인성이 기준미달로 나온 점에서 중학생들의 인성론은 위기라고 보았다. 이 조사에서 정직(61.7)은 10개 지표 중 가장 낮았다. 만일 인성에서 낙제점을 받은 중학생들이 인성이 바뀌지 않은 채 사회에 진출한다면 그들이 있는 공동체, 가정, 심지어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심히 우려가 된다.

 

인성위기의 중학생, 왜 그럴까. 아이들의 인성 수준이 낮은 것을 아이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과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좋은 인성으로 몸소 본을 보였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남을 밟고 이겨야 성공한다는 그릇된 가치관, 온갖 불법과 비리,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 도덕 불감증, 지나친 자식 과잉보호, 지나친 입시위주 교육 등 소위 사회 지도층이나 어른들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행태를 청소년들에게 보여주지는 않았는가. 어른들의 이런 잘못된 심성과 행동 양식이 청소년들에게 그대로 이식된 결과가 이렇게 낮은 인성 수준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최근에 발생한 세월호의 침몰 사건에서 선장과 다른 어른들의 행태에 대하여 한양대 정진곤(교육학) 교수는 “가장 신뢰받아야 할 어른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데 대한 실망과 분노가 큰 상황”이라고 말하였다. 아이들이 앞으로 어른 말을 믿겠는지 심히 염려스럽다.

 

한일장신대 총장 취임 100일을 맞이하여 “인성교육은 올바른 신앙생활의 토대”라는 주제의 취임사를 발표한 오덕호 총장에게 “대학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는 무엇을 꼽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대학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인성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사람들의 학식과 기술이 부족한 게 문제가 아니라 부정 부패와 인격 미숙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성교육이 가장 시급합니다” 라고 답변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론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목회자나 성도의 영성인가? 아니면 인성인가? 또한 선교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많은 문제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선교사들의 영성인가? 아니면 인성인가?

 

오늘날 선교사의 영성훈련에는 집중하고 있지만 과연 인성훈련에는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는가. 선교사의 인성훈련의 중요성에 대하여 박기호 선교사는 “서양, 동양을 막론하고 선교사의 인성보다는 영성을 계발시키는 데 치중해 왔다. 기도와 성경 말씀을 강조하다 보니 사람과의 관계성이 부드럽지 않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유능하고 누구보다 헌신도 많이 하지만 영성과 인성을 구분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행 11:24)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성은 영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성령의 열매가 삶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좋은 인성으로까지 발전하면 풍성한 결실이 열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해외선교사에게 영성만큼 중요한 것은 인성이다. 한기총 총무인 최희범 목사는 “선교사들에 대한 훈련으로 놓치기 쉬운 것 중 하나가 인성 훈련이며 선교마인드는 충분한 반면 인성에 대한 의식의 부재가 문제를 일으키는 주요 요인이 되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한국 선교사는 믿음도 훌륭하고 기도도 많이 하여 개인의 사역 결과는 뛰어난 데 비하여 팀 사역의 열매가 신통치 않거나 실패하는 경우, 혹은 현지인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의 주요한 원인에 대하여 직접 선교사로 활동했던 이들은 “선교사의 인성의 문제”라고 꼽았다.

 

2008년 7월 28일부터 시카고 휘튼대학에서 개최된 제6차 한인세계선교대회(KWMC) 둘째 날에는 “선교사와 선교사의 인성”이라는 제목으로 패널토의가 진행되었다. 먼저 선교사의 “인성의 정의”에 대하여 박기호 선교사(전 필리핀 선교사, 풀러신학교 교수)는 “인성은 인간됨의 실제와 자질”, 조동진 목사(GMS)는 “선교사의 인성은 선교사로서 영성과 지성, 심성을 모두 포함한 성품, 성격”이라고 정의했다. 이어서 “선교사의 인성의 중요성의 이유”에 대하여 김영관 선교사(브라질, 베트남 선교사)는 “우리를 통해 복음이 증거된다. 복음은 좋은 인간 관계를 맺어가는 가운데 전해진다. 선교사에게는 인성, 영성, 전문성이 필요하다. 이 중에 인성은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이다”. 김정웅 선교사(태국 선교사)는 “인성과 인격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놀랄만한 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인격을 성장시키는 데만 신경 쓰다 보니 인성의 성장은 이루지 못했다” 라고 설명했다.

 

또한 “선교사가 갖춰야 할 이상적인 인성”에 대하여 강성일 선교사(브라질 선교사)는 “성품은 선교사로서 갖춰야 할 자격 중 하나다. 선교사나 교회 모두 인격을 계발시키는 사역은 많이 실시하고 있다. 훈련 받는 현지인도 선교사의 인격을 닮기도 한다. 그러나 선교사는 전도 대상자에게 선교사 개개인의 인격이 아닌 그리스도의 인성을 심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인성, 이것은 인격보다 우선돼야 한다. 인격은 학문과 이성, 사회적 지위, 소명 등을 말한다면 인성은 용서, 사랑, 희생, 배려와 같은 항목이다. 그리스도의 인성, 이 이상적인 성품을 전도 대상자에게 심어주는 선교사역을 펼쳐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한국인의 인성적인 특징이 선교활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박기호 선교사는 “한국인은 사랑과 헌신, 희생, 말씀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하다. 영성 계발 사역은 강하지만 인성 계발 사역은 약하다. 보수주의자들은 영성을 강조하지만 인성은 약한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인성을 강조하는데 영성은 덜 강조한다는 장단점을 갖고 있다. 하비칸 교수는 영성과 인성의 겸비를 강조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서 “목사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영성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삶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영성은 보이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인성이 반영된 영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영성뿐만 아니라 인성을 겸비하지 않으면 결핍된 인성 때문에 복음전파에 방해가 된다” 라고 설명했다.

 

이영숙 박사는 저서 “한국형 12성품 교육론”에서 성품이 실제 삶에서 드러내는 구체적 모습을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성품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나타난다. 성품은 삶의 위기와 갈등, 어려운 상황이나 삶의 압박에 대해 반응하는 모습이 바로 그 사람의 성품이다. 성품은 평상시의 말과 생각, 표현하는 방법과 태도를 통해 그대로 나타난다.

둘째, 성품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여러 가지 관계로 나타난다.

셋째, 성품은 습관을 통해서 나타난다.

넷째, 성품은 예의 바름을 통해서 나타난다.

다섯째, 성품은 말을 통해서 나타난다.

 

한국선교의 위기는 양적인 면에만 치중한 나머지 질적인 면에 소홀한 점에서 찾고 있다. 여기에서 질적인 소홀함이란 영성과 인성의 훈련의 부조화를 말한다. 한국인은 이신득의만 강조해서 인성교육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우리 바우리의 인성의 수준은 어떠한가 각자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아울러 우리 바우리는 영성에서 흘러 나오는 인성을 강조하되 이젠 말이 아닌 실천하는 것을 가르쳐 ‘영성과 인성을 겸비한 선교사’로 훈련해야 한다.

 
/바울선교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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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 훈련의 중요성

'전 세계 모든 교회가 국가와 종파를 초월하여 연합하자'는 교회연합운동은 선교연합운동에서 출발했으며
에큐메니컬운동의 출발점이 된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출발점이 되었다
1910년 에딘버러 대회에서 제출된 토의내용'에딘버러세계선교대회 연구 총서 제5권: 선교사 훈련'에서 소개된
보고서 목차는 서론인 1부는 서문과 2부'오늘날 선교사 훈련 현실에 대한 설명과 검토'는 선교사 선발기준,
선교회의 선교사 후보생의 자질 함량을 위한 과정,오늘날 선교사역을 위한 일반적 훈련방법,오늘날 전문적인 훈련방법,
오늘날 신학대학과 훈련원의 선교사 훈련, 오늘날 여성을 위한 선교사 훈련을 하는 대학과 기관의 훈련방법으로 구성되었다

제3부 선교사 사역 훈련의 원리와 그 적용 제4부 전문적인 선교사 훈련등이다.

국내 선교사 파송 단체와

주요교단의 선교사 훈련 현황을 알아보면,
현재 한국교회의 주요 8개 교단의 선교사 훈련 현황을 간략하게 알아본다
각 교단의 선교사 훈련 주체,인준절차 및 훈련기간을 중심으로 소개하면:

대한예수장로회(통합)
1)훈련주체 :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세계선교부
2)인준절차와 훈련기간: 각 노회에 있는 세계선교대학에서 13주 동안 훈련과정(선수과목)을 이수한 사람에게만 지원 자격이 주어진다.
  지원서류는 세계선교대학 이수증명서,현지선교회 파송요청서,후원교회약정서가 기본 서류이며 건강검진결과지와 심리검사결과지도
  첨부한다. 그 후에 지원자들은 총회세계선교부에서 열리는 합숙훈련(1달)을 거쳐 세계선교부의 심사를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추천을 받아 확정된 사람들이 교단 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파송 후 2년 동안은 현장교육과 수습기간으로 두고 있다.

대한 예수교장로회 (합동)
1)훈련주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세계선교회(GMS)
2)인준절차와 훈련기간 : 선교사후보생 자격 - GMS의 훈련과정(GMTI,LMTC)훈련 수교, GMS본부 오리엔테이션 후 파송교회가 교단 산하 노회 소속이면 GMS 선교사로 인준 /임명 신청이 가능하다. GMTI(정규과정12주, 특별5주과정)수료생은    장기선교사(4년이상)으로 지원 가능하며, LMTC 수료생은 단기선교사(1-3년)로만 신청이 가능하다. 단기사역 3년 이후에는    GMTI특별과정을 지원할 수 있고, 훈련 이수 후 장기선교사로 재인준 받을 수 있다.

한국기독교 장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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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란 1장과 파티하를 중심으로

1. 서론

 

이슬람 국가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슬람 사원에서 들려오는 매일 5회의 아잔(adhan: 기도에의 부름) 소리에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경건한 무슬림들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기도시간마다 쉼 없이 사원을 찾는다. 그들과 더불어 오래 살아가면서 친구를 사귀고 교제를 나누면서 이들의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거짓말, 절도, 부도덕한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정작 이들은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나누며 대화를 하면 할수록 복음과 예수에 대한 이들의 무지와 맹목적인 불신, 거부감, 세뇌에 가깝게 되풀이되는 꾸란과 모하메드 찬양, 원죄 개념의 부재에 따른 무딘 죄의식을 경험하게 된다.

 

이슬람교는 기독교 불교 힌두교와 더불어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이다. 전 세계 이슬람 국가 수는 약 58개국이며 인구는 약 13억이다. 이들 중 아랍어권은 23개 국 약 3억 정도이며, 비 아랍어권은 35개 국 약 10억 정도로 추산된다. 이슬람교는 610년 9월 무하마드가 첫 계시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무슬림들은 예언자 모하메드가 약20년 동안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 준 계시를 받아 꾸란을 완성했다고 믿는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을 무슬림이라 부른다. 무슬림은 꾸란과 하디스를 경전으로 믿으며,하루 다섯 번씩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드린다. 무슬림들의 세계관, 사고 체계는 꾸란에 기초한다. 꾸란은 이들의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사회, 문화, 가정 등 모든 영역을 지배하며, 이슬람의 모든 사상을 담고 있다. 무슬림들은 알라, 천사, 예언자, 거룩한 경전(토라, 시편, 복음서, 꾸란), 최후 심판과 부활을 믿는다. 무슬림은 이슬람의 다섯 기둥을 신앙 근간으로 여긴다. 이슬람을 지탱하는 다섯 기둥들은 신앙 고백, 기도,구제, 금식, 순례이다. 이슬람의 첫째 기둥인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무하마드는 알라의 예언자이다’ 라는 신조를 두세 증인과 더불어 아랍어로 암송하면 무슬림이 된다. 기도는 하루 5회 정해진 시간에 일련의 몸동작과 암송을 반복한다. 구제금으로 부자들은 수입의 2.5퍼센트(1/40)를 가난한 자들에게 기부한다. 매년 라마단 한 달 동안 전 세계 무슬림들은 해 뜨기 전부터 해질 때까지 금식한다. 메카 순례는 일생동안 한 번만 하면 효력을 발생한다.

 

무슬림들의 세계관, 정체성, 사고 체계는 크리스찬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무슬림들이 매일 드리는 예배, 기도, 꾸란의 가르침은 크리스찬의 예배, 기도, 성경의 가르침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이슬람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인 질문들이 본고의 출발점이다. 본고에서는 먼저 무슬림 예배를 살펴보고, 꾸란 1장 파티하의 본문을 소개하고 주해를 한 후에 무슬림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 파티하를 중심으로 무슬림들의 신론, 인간론, 구원론, 종말론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파티하를 어떻게 이슬람 선교에 적용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언급한 후, 본고의 결론을 맺을 것이다.

 

2. 무슬림 예배

 


무슬림 예배는 이슬람의 다섯기둥들로 구성된다. 신앙 고백, 기도, 구제, 라마단, 성지순례. 결국 이들의 예배는 온 생애 동안 이루어지는 자신의 모든 삶으로 확장된다.이들의 예배를 좁은 의미로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매일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일정한 형식과 순서에 따라서 몸동작을 취하며 구절을 암송하며 드리는 기도가 곧 이들의 예배다. 이들의 기도 형식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암송되는 기도문이 꾸란1장 즉 파티하이다. 이들은 기도를 통해서 매일 적어도 17회씩 파티하를 암송한다.파티하는 이슬람 신앙의 모든 원리들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파티하는 짧은 일곱 절로 구성되는데, 이것이 전체 꾸란의 1/3에 해당한다고 할 만큼 중요하다. 이바다 이븐 사미트는 ‘파티하를 암송하지 않는 예배는 무효’라고 주장했다.

 

3. 무슬림과 파티하

 

성경이 총1,189장으로 구성된 반면, 꾸란은 총 114장 6,616절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114장 중에서86장이 메카에서, 28장은 메디나에서 계시된 것으로 믿는다. 무슬림들은 꾸란이 ‘책들의 어머니’이며, 꾸란의 축어적 계시를 믿는다. 무슬림들은 또한 꾸란을 알라의 마지막 계시라고 믿는다.

 

꾸란 1장은 꾸란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고 있으며 개경장으로 불린다. 꾸란 1장을 아랍어로 ‘파티하’라고 부르며 개경장, 즉 문자적으로 ‘책(꾸란)을 여는 장’이란 의미이다. 파티하는 일곱 절, 29단어의 아주 짧은 장이지만, 무슬림들은 이슬람 사상의 진수를 담고 있다고 믿는다. 무슬림들은 매일 5회 기도 시간을 통해 최소한 17회씩 암송하고 있다. 곧 새벽 기도에서 2회, 해질녘 기도에서 3회 그리고 정오기도, 오후기도, 저녁기도에서 각각 4회씩 반복한다. 따라서 파티하는 무슬림들에게 이슬람 신앙의 전부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파티하는 알라의 성품과 속성을 말하며, 인간의 의무로 알라를 예배하며 바른 길로의 인도를 요청하고 있다. 파티하는 종종 기독교의 주기도문에 비유되지만, 주기도문과는 달리 윤리적인 요구나 실천을 요구하진 않는다.

 

파티하는 메카에서 계시된 7절로 자주 낭송되는 코란의 진수다. 꾸란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을 일곱 절’이라고 언급한다. 파티하는 이슬람의 기본 원리를 비롯하여,우주 만물의 운행 질서를 주관하는 알라에 대한 인간의 태도, 내세관, 경배와 구원의 유일한 대상인 알라, 인류가 걸어야 할 바른 길,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수여자인 알라의 속성, 알라의 노여움을 받았던 민족과 방황했던 민족에 대한 역사적 사건 등을 언급한다. 꾸란1장의 명칭은 ‘알 파티하’ 외에도 ‘책 중의 책’, ‘찬양’, ‘질병의 치료’, ‘무궁 무진한 지식의 창고’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모든 예배는 파티하가 제일 먼저 암송됨으로써 시작되고 예배의 효력이 발생한다.즉 파티하가 암송됨으로써 신앙의 문이 열린다는 의미에서 ‘개경 장’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본 장이 서두에 있지만 그것은 계시된 순서가 아니라 편집상의 순서일 뿐이다.

 

1) 파티하 본문과 구조

먼저 파티하의 본문을 우리말 번역, 영어 번역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⑴ 알라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God,

자비롭고 긍휼하신 분

the Compassionate, the Merciful

⑵ 찬양은 알라에게 있도다.

Praise be to God,

온 세계의 주

Lord of the Universe.

⑶ 자비롭고 긍휼하신 분

The Compassionate, the Merciful,

⑷ 최후 심판 날의 주인

Sovereign of the Day of Judgement

⑸ 우리는 당신만을 예배하며

You alone we worship,

당신에게만 도움을 구합니다.

we turn for help.

⑹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Guide us to the straight path,

⑺ 당신께서 축복하신 자들의 길로

The path of those whom You have favoured,

당신의 분노를 초래하는 자들의 길이 아닌

Not of those who have incurred Your wrath,

길 잃어버린 자들의 길도 아닌

Nor of those who have gone astray.

 


파티하는 아래와 같이 기원, 고백, 간구의 3중 구조로 되어 있다.

① 기원 (1a-4절)

ⓐ 호칭 (1b)

ⓑ 찬양 (2a)

˙ 신의 섭리 (2b)

˙ 신의 자비 (3절)

˙ 신의 정의 (4절)

② 고백 (5절)

ⓐ 예배 (5a)

ⓑ 신의 도움 (5b)

③ 간구 (6-7절)

ⓐ 신의 안내 (6절)

ⓑ 세 그룹 (7절)

 

2) 파티하 주해

1a절의 ‘비스밀라’(알라의 이름으로)는 무슬림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주문처럼 선언되는 공식들이다. 사업상 거래를 시작할 때, 방문해서 집에 들어갈 때, 음식을 먹기 시작할 때, 부부관계를 시작할 때,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등 ‘비스밀라’ 는 반드시 선언해야 하는 무슬림들의 관행적인 공식 구절이다.

 

1절의 ‘비스밀라 알 라흐만 알 라힘’ (알라의 이름으로, 자비롭고 긍휼하신 분)은 코란 114장 중 9장을 제외한 모든 장들 첫 머리에 후렴처럼 등장하는 구절이다. 이슬람의 상표처럼 여겨지는 어구들이다.

 

1b와 3절에서 두 번 반복되고 있는 ‘알 라흐만 알 라힘’ 즉 ‘자비롭고 긍휼하신 분’에서 알라의 자비와 긍휼은 꾸란에서 자주 언급되는 알라의 핵심 성품들이다. 일반적으로 비 무슬림들에겐 이슬람의 알라는 무섭고 이신론적이며 초월적인 존재로 이 세상 역사엔 무관심하고 인간들에게도 비인격적인 존재로 알려진 반면, 무슬림들에겐 알라의 자비가 최고의 핵심 덕목으로 믿어지고 있다.

2절의 ‘함둘릴라’는 1a절의 ‘비스밀라’처럼 자주 사용되는 관행 구절로. 크리스찬의‘할렐루야’에 해당되는 뜻이지만, 일상 생활에선 ‘Thank God’의 의미로 사용된다.온 세상의 주(2b), 자비롭고 긍휼하신 분(3절), 최후 심판날의 주인(4절)이기 때문에 알라에게 찬양을 돌림이 마땅하다.

 

5절에서 유일신 알라에 대한 예배를 고백하고, 6절에서 이슬람의 길을 바른길로 규정하며, 7절에서 알라의 축복을 받은 자들을 길 잃어버린 자들, 알라의 분노를 초래한 자들과 대비하고 있는데, 각각 무슬림들, 크리스찬들,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4. 무슬림 신학

 

1) 신론

이슬람의 신론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적 유일신론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단일(Unitarian) 유일신론(Oneness, Unity)이다. 꾸란 112장은 이슬람 신론의 핵심을 담고 있다.

알라의 이름으로, 자비롭고 긍휼하신분,

In the Name of god, the Compassionate, the Merciful

① 한 분 하나님이며,

God is on e,

② 영원한 하나님이다.

the Eternal God.

③ 그 분은 태어나지 않았고 낳지도 않았다.

He begot none, nor was He begotten.

④ 그 분과 같은 자가 없다.

None is equal to Him.

 

2) 인간론

이슬람의 인간 창조는 기독교의 창조론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창세기에서 인간은 흙으로 창조되었지만, 꾸란에서 인간은 흙 정액 자궁의 체세포 등으로 창조되었다고 언급한다. 꾸란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약한 존재로 지음받았고, 악에 빠지기 쉬운 존재이지만, 알라의 대리자로 묘사된다. 꾸란은 아담이 타락 후 회개했고, 알라는 그의 회개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원죄를 부정한다.

 

 

3) 구원론

무슬림들은 원죄를 부정하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부정한다. 꾸란에도 예수님의 출생과 생애, 기적이 등장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꾸란엔 성령도 언급되지 않는다. 무슬림들도 꾸란에 기록된 최후 심판을 믿지만, 구원의 방법이 기독교와 다르고 구원의 확신도 없다. 선행을 통해서 마지막까지 알라의 뜻에 따라 낙원에 갈 수 있을 뿐이다.

 

4) 종말론

이슬람의 종말론은 기독교의 종말론과 유사하다. 꾸란은 성경처럼 종말의 징조들,트럼펫 소리, 예수의 재림을 언급한다. 그러나 마흐디(Mahdi)라는 또 한 인물이 종말에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최후 심판 때에, 책에 기록된대로 사람들의 선행과 악행이 저울에 달리게 된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도 유사하다. 다만 꾸란은 기독교의 천국(Heaven) 보다는 낙원(Paradise, Gardens)을 선호하며, 낙원의 보상 중에 숫 처녀의 시중등 물질적인 차원의 보상이 강조된다.

 

5. 이슬람 선교전략

 


이슬람 선교는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뿌림을 전제로 한다. 성령의 사역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완악하고 강팍한 무슬림들의 영혼을 예수의 십자가 사랑과 성령의 기적 없이 그 누가 만질 수 있겠는가? 이슬람 선교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이슬람 지역에서 여러 다양한 사역들이 펼쳐지고 있다. 예를 들면, 고아원, 장애인 센터 등 국가 시설들을 통한 긍휼과 구제 사역, 의료 사역, 개발 사역, 여행사, 섬유 직물, 학원, 태권도장 등의 비즈니스 사역, 교회개척 사역, 친구 삼기등 우정과 교제를 통한 개인전도, 제자 삼는 사역, 단기팀을 활용한 문서전도, 땅 밟기 사역, 중보기도 사역 등, 가능한 모든 방법들이 동원되고 있다.

 

이 모든 사역들의 출발점은 무슬림들을 만나는 일에서 시작된다. 이들과의 접촉점을 만드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학원, 클럽 등에서 동일한 관심사, 취미 등을 나누며 친구를 만들 수 있다. 파티하는 이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는 아주 탁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 무슬림은 아니지만, 무슬림들을 이해하는 사람 혹은 무슬림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여겨져서 그들에게 좋은 호감을 줄 수 있다. 파티하는 복음을 나눌 수 있는 우정의 친밀한 단계로 넘어가도록 돕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고, 이들과의 토론에서 이슬람 신앙의 오류를 잡아줄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이용할 수 있다.


6. 결론


이슬람은 분명히 강한 사탄의 요새이며 진지임에 틀림없지만, 반드시 성령의 권세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모래성일 뿐이다. 이슬람 영의 특징은 거짓과 불신과 음란과 분리와 두려움의 영으로 알려져 있지만, 성령과 보혈의 역사로 정결케 될 수 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 영에 붙들린 불쌍한 영혼들로 우리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다(마 9:35-38).

 
 출처 :바울선교회지//다니엘 선교사(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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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의 영적전쟁(1)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화,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의 대화는 가능할까?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미 모든 무슬림들이 선지자로 추종하고 있는 무함맏과 그가 대화했던 무수히 많은 무함맏과 동시대의 아랍인들, 유대인 및 기독교인들 사이에 있었던 관계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꾸란에는 무함맏이 아랍인들과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과 논쟁했던 핵심적인 주제들과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꾸란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진짜 유일신이 누구인가, 무함맏이 진짜 선지자인가 아니면 거짓말쟁이이며 가짜 선지자인가, 무함맏은 성경의 선지자들의 전통을 물려 받았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참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에 관한 것들이다. 이러한 토론을 했던 당사자들 자신들을 살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무함맏 당시의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꾸란에서 말하는 것처럼 책의 사람들이었다. 즉 그들은 항상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무함맏은 꾸란과 모든 무슬림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문맹이었다.

 

따라서 무함맏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한 번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였던 타우랏, 자부르, 인질을 자기 눈으로 직접 읽은 적이 없었고,읽을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무함맏 당시에는 아직 성경이 아랍어로 번역되기 전이었다. 꾸란에는 성경에서 다루는 수 많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은 틀림 없지만,꾸란의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읽어보고 성경과 대조해 보면 무함맏이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말한 것들은 거의 하나도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무함맏은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자기가 주워들은 선지자들과 성경 이야기들을 자기 멋대로 꾸며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무함맏이 꾸란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가 바로 ‘무함맏 자신이 꾸란을 스스로 지어냈느냐 아니냐’에 관한 문제였다는 것을 꾸란을 한 번 만이라도 주의깊에 읽어본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그런데 꾸란에서는 누가 거짓말쟁이가 되었을까? 성경을 항상 읽었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문맹이어서 그것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던 무함맏 앞에서는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성경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사람이 항상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내용이 무엇이고,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상관없이 자기 식대로 우겨댔는데도, 모든 무슬림들은 오늘날까지도 성경을 직접 읽었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왜곡하여 무함맏에게 거짓말을 했고,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무함맏이 성경과 선지자들에 대해 진리를 말했다고 믿는다. 오늘날 이슬람 지역들이나 무슬림들이 사는 곳에서 우리가 무슬림들과 대화를 나눌 때 겪게 되는 문제가 정확히 이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거의 모든 무슬림들도 전혀 성경을 읽지도 않으면서 성경의 내용들을 자기 방식대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무슬림들은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고자 할 때, 항상 근본적인 내용을 가지고 해답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주로 상황(context)이나 인물이나 신학적인 주제를 가지고 대화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 유명한 어떤 학자가 무슬림이 되었다. 어떤 스타가 무슬림이 되었다. 무슬림의 인구가 세상에서 몇 퍼센티지이다. 한편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관점에서 신학적인 주제를 열심히 설명하려고 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무슬림들과 대화를 하고, 그들에게 해답을 주려는 시도는 지나치게 기독교적인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무슬림들과 토론을 할 때 상황에 관한 문제를 놓고 서로 옳다고 주장하려 할 때에는 결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논쟁은 끝없는 나락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문제의 발단이 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리이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누가 진리를 대변해 줄 수 있느냐에 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답변은 무슬림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신학적인 해명을 하는 식이다. 우리는 먼저 세상에 그 어떤 누구도 진리를 대변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어야 한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선언한다.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고 단지 선한 선생으로만 알았던 젊은이에게 “네가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진리란 모든 것의 옳고 그름을 보여줄 수 있는 표준일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된 사실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 밖에 없음을 알려 주어야 한다.

 

만일 어떤 것이 항상 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도, 믿고 의지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진리가 무엇이냐는 문제를 가지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은 무수히 많은 거짓에 속고 살아가고 있는 무슬림들에게 가장 잘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진리이냐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도록 도와야 한다. 즉 꾸란이 참된 진리이냐 아니냐, 성경이 참된 진리이냐 아니냐에 관한 문제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하고, 무슬림들의 관심도 이 문제에 집중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다행히 오늘날 우리는 문맹이었던 무함맏과는 달리 대부분 글을 읽을 줄 아는 무슬림들을 상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억지로 서로 자기 주장을 할 필요 없이 그 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는 꾸란과 성경을 읽어가면서 비교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감히 이슬람과 무슬림들의 근본이 되고 있는 꾸란을 성경과 대조해 가며 꾸란의 허구성을 송두리째 드러내어, 꾸란 자체를 통해 무슬림들을 거짓에서 진리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구원할 방법을 모색해 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도전적인 방법을 나라에 따라서는 적용할 수 없는 지역도 있을 수 있겠지만, 성경과 꾸란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전도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국면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각국 각처에서 이슬람의 전면적인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서 꾸란의 허구성을 만방에 알려 사람들을 거짓 종교에 속지 않도록 미리 경계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다. 사실상 무슬림 선교에 있어서 토론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인 만큼 토론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논쟁의 발단이 되고 있는 꾸란을 파헤치고 분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느꼈다. 이러한 작업은 무슬림들의 세계관과 사고 구조를 깊이 있게 아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 그들과 효과적으로 대화하는데에도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내가 읽어본 대부분의 이슬람에 대한 책들은 이슬람의 허구성과 모순들을 드러내는 일에 조심하고 있다. 무슬림들을 가능한 한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 종교에 대한 비판에 대해 무슬림들의 반응을 고려해 볼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신학적인 주제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기독교와 거의 대부분의 주제들을 공유하는 이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속을 위험성이 있다. 비록 신학적인 주제들은 공통 분모를 갖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이슬람과 기독교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에는 심지어는 기독교인 선교사도 함정에 빠뜨리는 수 많은 사탄의 간계들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혹자는 영적 전쟁을 단순히 불신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어두운 영들의 세력과 신자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대립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로 작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이다. 절대로 영적인 전쟁에서 이와 같은 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불신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어두움의 영들을 대적하는 것만으로는 불신자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영적인 전쟁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와 사탄의 악과 불의의 통치, 천사들과 타락한 영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순복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순복치 않고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대적하는 세상 사람들, 사람들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와 영혼을 지배하는 두 세계라고 하는 매우 복잡하고 전면적인 전쟁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기독교인들은 다양하고 복잡한 세상의 세계관들과 부득이 하게 맞부딪히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회복해 가고, 멸망해 가는 세상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일이다.

 

이러한 영적인 싸움의 가장 큰 원인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세계관의 현저한 차이점 때문에 발생한다.

특히 이슬람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은 서로 유사한 점들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면 거의 하나도 닮은 것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언뜻 보기에 비슷하게 보이는 많은 신학적인 주제들도, 그 내용에 들어가보면 철저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유사성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탄의 음흉한 계략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슬람이 신, 구약 성경과 그 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선지자들 또는 인물들을 언급할 때, 우리는 피상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 보다는 그들이 왜 그렇게 말하고, 어떠한 의미와 목적으로 선지자들과 성경의 말씀들을 인용하는 것인지를 잘 분석하고 있어야 한다.

 

무함맏은 왜, 어떠한 목적으로 꾸란에서 선지자들의 이름과 행적들을 거론하는가?

무함맏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선지자들을 어떻게 평가하였는가?

무함맏이 사용한 신학적인 용어들은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이슬람의 용어들이 우리의 용어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어떤 식으로 무함맏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는가?

왜 모든 무슬림들은 무함맏을 본받고 따르고 있는가? 이들이 근본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함맏이 다루고 있는 신학적인 주제들의 논리적인 상관성은 무엇인가?

이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효과적으로 복음 진리를 설명할 수 있는가?

이들의 배후에는 어떤 영적인 존재들이 역사하고 있는가? 등 많은 질문을 해 보고,관찰하고 연구해야 진짜 무슬림들의 필요를 볼 수 있고, 또한 채워줄 수 있다

 

우리는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 즉 성령, 그리스도(메시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말씀, 선지자의 사역과 역할, 죄, 정결과 부정함,회개, 믿음, 기도, 구원, 천국, 지옥, 종말, 심판 등 많은 단어들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슬림들의 생각과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면서도 의미를 전혀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칫 잘못하면 무슬림들이 사용하는 단어들 때문에 그들이 이미 그 용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오해 때문에 그들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반대로 그 단어들이 사용되는 의미의 차이점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 그 모든 단어들이 정말로 중요한 전도의 접촉점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단순히 그러한 단어들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많은 복음의 핵심들을 전하는 것이다.

 

이슬람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의 영적전쟁(2)

 

 

무슬림들이 말하는 선지자들에 관한 사상이나 사용하는 용어들의 의미와 차이점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반대로 우리가 전하는 성경 이야기나 용어들이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이해가 되어지는 가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무슬림들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들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하나님의 형상은 어떠한 존재일까를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할 때, 또는 삼위일체에 대해 우리가 언급할 때,무슬림들의 마음속에는 무함맏과 꾸란이 계시하고 있는 단일신 알라와 그들이 강력하게 배척했던 메카의 다신교 우상들, 즉 다신교 사상을 우선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의 신을 상상할 때,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쉬르크, 즉 알라에게 동료를 초래시키는 이슬람의 가장 큰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세 인격으로 존재하시는 한 분 하나님을 그들에게 소개해 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 외의 또 다른 신이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하게 하는 원인은 하나는 우상숭배자들 때문이고, 하나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 자신을 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육체적이고도 기계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요한복음 1장과 창세기 1장, 그리고 잠언 8장, 시편의 메시야 예언들 중에 특히 2편과 89편 등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능력의 말씀이 왜 메시야로 세움을 받고, 왜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지어야 했는지, 왜 인자가 되셔야 했는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논리 능력과 설명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성령의 조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영적인 전쟁은 세계관의 전쟁이다.

 

또 성령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 무슬림들은 가브리엘 천사나 무함맏과 같은 영적 존재나 꾸란과 같은 특별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언급하는 성령이 곧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구별하여 말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능력의 말씀을 인격적인 창조주로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그들은 인간의 말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단순한 의미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한다.

 

무함맏과 꾸란이 메시야라는 단어를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꾸란 어디에도 메시야의 의미와 성격 또는 사역에 대해 설명을 해 놓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언급할 때 무슬림들은 이것을 결코 육체적인 의미의 출생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 부분, 즉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로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되어 세워지는 면을 시편을 통해 설명해 줄 수 있다. 동일하게 죄에 대해서 말할 때에 무슬림들은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깊이있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죄의 심각성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담이 단 한 가지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존재와 영원한 낙원과 천국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설명해 줄 수 있으며, 또한 인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성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회개에 대해서 말하지만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회개, 단지 “회개한다” 라고 입과 마음으로 고백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그들에게 참된 회개란 자신의 타락한 본성대로 살아가는 삶 전체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율법적인 정결과 부정에 대해 저들이 언급할 때, 우리는 의와 불의, 거룩과 죄,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꾸란에 무함맏은 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전혀 지적하지도 않았다.

 

꾸란에서 알라는 아담이 회개를 하지 않았는데도 그를 용서해 주었다. 꾸란에서 나오는 용서와 구원은 사실상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합법적인 근거나 절차가 거의 필요 없다.

 

천국을 정욕적이고 세속적으로 소망하는 저들의 소망이 거짓됨을 지적해 주고, 천사와 같은 거룩한 삶과 부활체로서의 영광스럽고도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삶을 영원토록 유지하는 영생에 대해 가르쳐 주어야 한다.

 

지옥을 말할 때 저들은 모든 사람들이 일단 지옥에 가서 형벌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헛된 소망을 버리도록, 지옥에서 천국으로 전혀 옮겨갈 수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경고해야 한다.

 

또한 인간의 헛된 노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야 한다.이 외에도 구체적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무슬림들이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들이 대단히 많은 사실을 알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에도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착각하도록 하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이 숨겨져 있다.

 

지금까지 나 자신도 무슬림들과 상당히 많은 부분을 서로 공감하지 못하는 가운데 대화를 많이 했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역자들을 살펴보아도 무슬림들의 세계관에 대해, 즉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시키는 꾸란과 하디스와 기타 이슬람의 의식 및 신념들에 대해 일반적인 것 외에는 꽤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이슬람의 다섯 기둥과 같은 것들을 주제로 삼아서 그들과 대화할 수 있을까? 그럴 경우 그들의 무엇을 변화시켜 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기독교인 사역자들이 이슬람의 일반적인 교리들을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그것들을 사용하여 무슬림들을 진리로 인도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상 이슬람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들이 체계적으로 세워 놓은 교리들이 아니라, 꾸란 자체에 관한 문제로 귀결된다. 무슬림들의 교리들과 종교 의무들은 꾸란의 허구성을 감추기 위해 치장해 놓은 장식품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은 그런 것들을 알 필요는 있어도, 결코 다룰 필요가 없다.

 

꾸란을 연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코 흥미로운 작업이 아니다.

꾸란을 읽는 것은 심지어는 무슬림들에게도 어려운 중노동이다.

 

꾸란을 읽는데 가장 큰 어려운 점은 꾸란 자체 내에 있는 논리적인 모순들과 비약,무의미한 반복들, 심지어는 어두움의 영들의 세계에 대한 무수한 언급들 때문이다.

 

오늘날만 해도 수억의 인구가, 역사상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무슬림들이 자기들의 무지 때문에 지옥에 가고 있다면, 그들 모두가 우리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뭐든 해야 한다.

 

따라서 꾸란 자체에 대한 연구는 지옥으로 가는 무수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것들에 속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그들을 그 속에서부터 끌어내 구원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경고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위의 본문을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자기 자신에게 적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이 말씀은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이다.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인간의 구원과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작정,그리고 인간의 자유 의지와 의무와 책임 등에 관계된 것들이지만,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을 깨우치기 위하여 얼마나 다양하고 창조적인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모든 생명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구원과 멸망을 마치 우리들의 손에 모두 맡겨 놓으신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사역이 얼마나 의미있고, 위대한 것인가를 알게 해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무슬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이 앓고 있는 영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슬람 지역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은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가능하다면 꾸란을 직접 읽어보고, 꾸란과 성경의 내용상 차이점들을 논리적으로 숙지하고 있으면 전도의 접촉점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무슬림들이 어떤 말을 어떤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순히‘말도 안되는 엉뚱한 이야기, 비성경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다’고 간주해 버리고 만다면 깊이 있는 대화를 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의 접촉점을 스스로 포기하고 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주로 형성하는 것으로는 꾸란, 하디스, 순나, 세속적인 가치관 등이다. 무슬림들이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들인 것은 틀림없지만, 동시에 극도로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된다.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영적 전쟁이 치열한 장소는 각 사람의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는 자리이다. 세계관의 변화와 영적 전쟁 사이의 상관 관계를 별도의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영적 전쟁을 단지 기도와 성령의 능력의 대결만은 아니다. 그것들도 매우 중요하지만 더 심각한 영적 전쟁의 현장은 사람의 지식과 성품과 가치관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다.

 

(고후 10:3-6)“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세계관의 배후에는 그 세계관을 지배하고 형성시키는 보다 근본적인 영적인 세력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영적 세력은 추종자의 전인격, 즉 지, 정, 의 모두를 통제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감동과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과 유사하게,무슬림들도 전인적으로 어두움의 영들의 지배와 통치를 받고 살아간다.

 

이슬람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의 영적전쟁(3)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원하는 것처럼 무슬림들도 전인격적으로 자신들의 종교에 충실한다. 무슬림들도 나름대로 지적인 면 뿐만 아니라 의지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에서 그들을 어느 정도는 만족시켜 주는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사탄적인 종교나 이단 종파를 사람들이 왜 그토록 열정적으로 믿고 있는가 의아해 할 수 있지만 그들에게도 매우 강렬한 그 무엇이 있다.

따라서 영적인 감동과 같은 것이 단지 기독교 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 영역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지만,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도 스스로는 매우 강렬한 영적인 현상을 체험하고 있다. 때로는 그러한 체험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보다 더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매우 온유하고 친절하게 자기 백성들을 권면하시고 인도하시는 반면, 사탄은 매우 강력한 독재와 위협으로 자기 세력 안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읽을 때, 기도를 드릴 때, 찬양을 할 때, 기타 종교적인 일들이나 선행을 할 때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을 통한 감동을 자주 체험한다. 동일하게 무슬림들도 꾸란을 읽을 때, 사원에서 예배를 드릴 때, 종교적인 의무를 지키고, 선행을 할 때 악한 영으로부터 감동을 체험한다.

 

따라서 무슬림들이 아무런 영적인 감동도 없이 단순한 인간적 열심에 의해 그들의 종교에 깊이 심취해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체험들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동의 경험일 수 있지만, 근원이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요일 4:1-6; 딤전 4:1), 때로는 대단히 강렬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자기 신념을 위해 생명도 아깝지 않게 희생하기도 한다. 우리는 비슷한 현상들을 사회 전반에서 많이 경험한다. 때로는 전혀 종교적이 아닌 심지어는 악한 일들 가운데서도 감동을 받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며, 이러한 광경은 스포츠 활동이나 영화와 같은 매스 미이디어나 독서, 테러리즘, 기타 열광주의에서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세계관으로 빠져 들어갈 때, 그들이 그 속으로 깊이 몰입되는 그럴듯한 계기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때로 이러한 감동은 무함맏에게서 알 수 있듯이, 또는 사탄 숭배자들에게서 알 수 있듯이 두려움과 공포를 동반한다.

 

이슬람 교리와 의식에 깊이 감동되어 있는 무슬림들을 구원하는 것은 덜 감동되어 있는 무슬림들을 구원해 내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 이슬람에 헌신되어 있는 무슬림을 구원하는 것은, 이슬람에 실망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보다 훨씬 힘들 것이다. 이슬람 지역에서 무슬림들과 함께 살고 있다면 우리는 영적 전쟁의 최전방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단순히 지적인 논리 싸움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 싸움은 하나님과 마귀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아무리 강한 무슬림일지라도 하나님의 계시를 체험하고 능력을 체험하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다. 그렇다고 불신자가 꿈에 예수님을 보고,그분의 음성을 듣고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그 순간부터 과거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부정해 버리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꿈의 계시나 치료나 귀신 축사를 통해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일지라도 지식과 신념과 삶의 태도와 방식이 변화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며 집중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한 가지의 전도 방법만을 가지고 모든 무슬림들을 구원해 낼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전도 방법은 다른 방법에 비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어찌되었든 우리가 무슬림들을 상대한다면, 우리는 무슬림들의 영적인 세계를 송두리째 파악하고 있어야 영적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세계관의 변화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통해 발생한다.

 

먼저 부정적인 측면은 자신이 기존에 옳다고 믿었던 것의 거짓됨을 발견하고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긍정적인 측면은 새로운 세계관이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쉽게 표현하자면, 무엇이 거짓인 줄 알게 되면 무엇이 진리인지도 쉽게 알 수 있게 되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게 되면 무엇이 거짓인지도 쉽게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이 거짓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버리기를 원한다면,그들이 믿고 있는 신념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를 그들보다 더 명확하게 알아서 그들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깨우쳐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꾸란이 거짓인 것을 발견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결코 꾸란을 손에서 던져 버릴 수 없다.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면 적어도 꾸란의 어떠한 점이 잘못되었는지, 무함맏이 누구인지, 이슬람의 역사적, 종교적 배경은 어떠한 것인지 등 기본적인 상식들을 알고 있어야 하며 계속해서 그들을 연구해야 한다.

또한 복음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으로의 변화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경험이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세계관의 변화에 있어서 긍정적인 측면이다. 즉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진리를 소유하기 위하여 거짓을 버릴 수 있게 된다.

 

설령 다양한 기적적인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계속 진리의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결과는 이단에 빠지든지 거의 성장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진리의 말씀에 믿음의 뿌리를 넓고 깊고 강하게 내릴수록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아가게 된다. 물론 이것은 기도와 성령의 역사를 배제하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슬림들이 꾸란과 이슬람의 거짓됨을 인정하지 않고 온전한 계시를 통해 참된 하나님과 만난 후 그 분께 돌아오는 결단이 없다면 결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와 조우(만남)를 경험하고, 그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려는 열망에 가득차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생각하며 살아가려는 거룩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초대해야 한다.

 

우리는 무슬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하게 이슬람 신념으로 세뇌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몸 속에는 이슬람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할 만큼 철저하게 이슬람 세계관으로 세뇌되어 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능력은 그 어떠한 것보다 위대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운명에 맡겨 살던 무슬림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무슬림이 일단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운명에 맞서 싸우고,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랑하며 충성하는 삶을 살도록 지도해야 한다.

무슬림 중에 혹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이전에 믿던 여러 선지자들 중의 하나로서 영접하는 수준이거나, 혹은 무함맏과 동일한 수준으로 놓기도 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시키는 기도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한 사람을 완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일에 비하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주 체험한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과정을 ‘해산의 고통’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해산의 고통은 단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일시적으로 체험한 사람이 전적으로 변화되기까지의 전 돌봄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끝임 없는 관심과 사랑과 모범과 기도와 가르침을 통해 한 사람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서 가는 것을 보았을 때, 즉 완전한 성경의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한 사람을 해산했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이 영광스러운 해산의 기쁨인 것이다.

 

꾸란의 내용 전체를 다룬 이 글의 목적은 이슬람과 무슬림의 세계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며, 또 그것을 통해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하는 접근방법을 스스로 발견해 나가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어두움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빛을 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비진리의 어두움 가운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이 진리인지, 거짓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영적 소경으로서 어두움의 영이 이끄는 대로 이끌리며 살아간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대로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자기에게 없기 때문이다.심지어는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단순히 말해 주었을 때에도 일반적인 무슬림들은 그것이 단지 꾸란의 이야기로만 이해를 하지 실제적인 차이점을 구별해 내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무슬림들에게 선지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꾸란에 있는 내용들을 이야기 할 때, 반드시 성경과 꾸란의 차이점을 명료하게 드러내 주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조심스러운 일이고 많은 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진리의 빛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 즉 세상의 빛으로 세움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참된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면, 다시 말해 참된 진리를 설명해 주면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흑암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인지에 대해 반응을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이 믿고 있는 내용들이 거짓이고 어두움이라는 사실을 진리를 통해 조명해 주고 그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 꾸란의 주제를 통해서 복음의 내용을 전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꾸란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사실상 꾸란에는 복음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꾸란은 복음의 핵심이 되는 내용들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을 이용하면 복음을 전할 접촉점이 많다.그 이유는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세계관의 유사성 때문이다. 즉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을 모방한 옷을 입고 있는데, 우리는 그 진짜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꾸란과 성경을 동시에 사용해야 되는 이유이다. 따라서 꾸란과 성경은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약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무슬림들 가운데는 복음 자체를 듣고 싶어하고, 또 복음을 들으면 의외로 좋은 반응을 보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편 많은 무슬림들이 현지인 그리스도인이나 외국인 사역자들에게 꾸란에 대해 질문을 해 온다. 그런데 과거 무슬림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지라도 꾸란을 어떻게 사용할 줄 모르고,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답변을 해 주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처 : 바울선교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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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종결자라는 단어가 유행인 것 같다. 낯선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분명 신조어는 아니다. 외래어긴 하지만 terminator라는 단어가 더 친숙하다. 굳이 다른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끈질긴 자’, ‘끝을 보고야 마는 자’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선교에도 이런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선교의 종결자’. 좀 더 문학적인 표현으로 ‘선교의 마침표’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 시대에 선교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선교의 종결자가 있다면 누구일까?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선교를 유언으로 명령하시고 2천 년이 훨씬 넘어선 지금에도 선교는 미완성 과업으로 남아 종결되지 않을까? ‘선교는 하나님이 종결자다’라는 말은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는 정답 같은 오답이다. 선교의 종결자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선교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자는 바로 교회다. 선교사도 아니고 선교단체도 아니다. 교회다. 예수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대상은 바로 제자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인 교회가 바로 그분의 명령을 받들어 사명을 성취해야 한다. 선교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기차가 하나님이라면 교회가 철로이기 때문이다. 철로 없이 기차는 달릴 수 없다. 그렇다면 선교의 종결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 것이다. 머리의 명령을 받아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선교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1 개정개역)

 

 선교의 목적(종결)은 무엇인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개정개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온 땅의 사람들이 승리와 기쁨의 상징인 '종려 가지'를 들고 순결을 의미하는 '흰 옷'을 입고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찬양하는 모습이다. 얼마나 장엄한 모습인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지만 온전한 화음은 아니다. 사람들과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의 소리를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22). 구원받은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어린 양의 희생의 사랑을 노래해야만 하는 합창제가 남아 있다. 그 장엄한 노래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울려 퍼지는 그날 드디어 선교의 마침표가 찍히는 것이다.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사 42:10) 그 때 역사의 막은 내려진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이것을 말씀하시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개정개역)

 

1) 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너머로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셨다. 눈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사람들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그들이 나아간 것이 아니라 흩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맞서다가 강제로 흩어지게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프셨다. 원래 하나님의 의도는 인류가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종족마다 제각기 독특한 컬러를 가지고 서로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이었다. 이것이 샬롬이다. 하나님은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신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양성 가운데 통일과 조화를 이룬 샬롬공동체를 꿈꾸신다. 이것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하신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창 10:5 개정개역)

 

2) 예수님의 첫 사역지

예수님께서 첫 사역지로 정하신 곳은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 예루살렘이 아니었다.고향 나사렛도 아니고 태어나신 곳이요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도 아니었다. 이방의 갈릴리였다.(마 4:12-16)

 

왜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메시아로 선포된 이후의 첫 사역지로 정하셨을까? 단지 다른 지방보다 더 멸시 받고, 영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인 갈릴리 사람들이 불쌍해서일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같다.

 

3) 예수님의 오신 목적

구약에서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 때문에 원심적 선교가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요나 선지자가 이방인을 향해 나아갔지만 어디까지나 떠밀려 억지로 나아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심적선교를 스스로 펼치셨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을 듣고 이스라엘의 언약 속으로 들어왔다(수2:9-10). 이방 여인 룻도 인애의 사랑으로 이스라엘의 한 사람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 아래 들어왔다. 모두 하나님께서 스스로 행하신 구심적인 선교였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주어진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출 19:6). 그러나 하나님은 열방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꿈을 포기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역으로 선교의 도구로 이용하셨다. 그들을 바벨론 포로와 앗수르의 포로가 되게 하심으로 당시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나라에 당신의 백성을 심으셨다.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로 그들과 함께 거기 머물면서 스스로 당신을 이방인들 가운데 나타내셨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통해 그리고 에스더를 통해 스스로 나태내시고 당신의 구원을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시었다. 예수, 그이름은 여호와 삼마의 신약적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개정개역)

 

이 말씀은 어떤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명절을 지키기 위해 왔다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는 성경구절이요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위해서 오셨다.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인가? 유대인만의 전유물인가? 죽기로 예정된 하나의 밀알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죽음으로 맺게 될 많은 열매는 바로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이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선민 의식에 절어 있던 유대 제자들에게 이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제자들을 향하여 뜬금없이 밀알(죽음과 열매)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한 종족만이 아니라 온 땅의 모든 족속이라는 많은 열매를 맺는 바로 그 때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이다.” (요 12:23)

 

이것이 복음의 특징이다. 모든 죄인, 모든 인류에게 기쁨의 큰 소식 말 그대로 복음인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개정개역) 이것을 깨닫는 것이 곧 성경을 바로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는 것이 참된 헌신이다.

 

4) 교회의 태동 목적

지상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성령을 보내 주시었다. 이제는 또 다른 보혜사를 통해서 천상사역이 시작되었다.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성령은 교회를 태동하게 하였다. 갓 태어난 교회의 울음소리는 함께한 모든 이방인들이 들을 수 있는 각기 다른 방언으로 울려 펴졌다. 교회가 무엇을 위해 태동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는 사건이다. 교회는 모든 방언으로 복음의 나팔을 불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 개정개역)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단어

 

왜 그럼 이토록 중요한 개념을 교회는 오랫동안 몰랐을까? 우리의 성경해석이 너무 이기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전후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내게 유익이 되는 한 구절만 쏙 뽑아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빌 4:13의 말씀을 우리는 좋아한다. 그러나 그 참 의미는 헤아려 보지 못하고 무작정 좋아하는 것 같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개정개역)

 

이 말씀은 11절과 12절의 연속성 속에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개정개역)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은 가난, 궁핍, 핍박, 환란, 죽음을 다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런 것들은 모두 뺀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것들만이다. 그는 가난해도 비참하거나 비굴하지 않으며 부해도 교만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도 항상 기뻐할 수 있다. 환란과 죽음이 그를 대면하여서도 그는 감사할 수 있다. 그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28:18-20 이러한 우를 범하는 예라고 생각한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 종족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교회는 오랫동안 이 말씀을 잊었다. 오직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라는 말씀만을 기억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족속으로 가라’는 선교의 명령에는 관심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평범했던 한 사람, 구두 수선공이었던 ‘윌리암 케리’에게 세계를 바라보게 하셨다. 개신교선교는 그렇게 무명의 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어렵게 불씨를 지필 수 있었다(William Carrey, Pere des missions moderns, 1761~1834).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어렵게 시작된 근대선교도 한동안 이 ‘종족’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했다. 교회가 보지 못하던 이 ‘종족’이라는 단어를 보게 한 사람이 바로 도날드 맥가브란이라는 선교사이다.

 

도날드 맥가브란 (Donald McGvran, 1897)은 인도의 하다에서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콜롬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은 후 다시 20년 정도 더 인도에서 사역하면서 대중운동(Mass Movements)에 대해 연구하였다. 오래전부터 그는 현재와 같은 선교사들의 사역을 통해서는 세계복음화라는 목표의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전략이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부터 여러 기독교학교들에서 선교학에 대해 강의하였고 1961년에는 기독교 역사상 선교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유명한 교회성장연구소(Institute of Church Growth)를 세웠다. 그에게 있어 개선책은 대중운동이었다. 즉 부족 전체나 혹은 동질성집단(Homogeneous Units) 전체를 기독교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 집단-개인의 개종은 개별적인 회심보다 훨씬 더 안정되고 교회성장을 지속하게 해준다. 동질성집단의 원리라고 명명한 맥가브란의 대중운동 개념은 1974년 로잔회의에서 발표된 후 세계에 널리 퍼졌다. 그는 1955년 이전까지 모든 선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전통적이고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선교방법을 뒤흔들어 놓았다. 맥가브란이 그처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몇몇 신학교에서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렀던 선교학을 전문적 연구 차원으로 부상시켰다는 데 있다. 그 이후 교회는 종족이라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단어를 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들을 향해 가는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종족이란 공통의 역사와 한 언어와 문화로 연결된 사람들의 그룹을 의미한다.) 오늘날 세계 선교사들의 3%만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사역한다는 통계는 이것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목적(목표)과 전략의 혼돈

 

종결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선교의 최종목적은 무엇인가?

목적은 한 가지이다. 그러나 전략은 여러 가지이다.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략은 변한다. 목적은 전략에 선행한다. 목적이 없는 전략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우리는 목적과 전략을 혼동해 왔다. 선교의 목적과 전략을 혼동했던 것 같다. Peter Wagner, 풀러신학교 교수는 전략을 이렇게 정의했다. “전략이란 하나의 분명한 목표(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다. 선교전략이란 그리스도의 몸(교회)이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 그리고 그분이 맡기신 일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방법이다.”

목적과 전략의 혼동이 선교사역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퍼즐의 한 조각만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전체를 보아야 한다.모든 종족을 보아야 한다.

 

 

미전도종족 선교의 역사

 

1970년대에 전세계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바로 미전도종족들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떤 선교학자들은 믿었다. 만약에 그들을 겨냥한 어떤 효과적인 선교운동이 전개되었다면 2000년 말에는 선교의 사역이 종결될 것이다.

1974년 로잔대회에서 랄프 윈터박사는 참가자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16,750 종족의 알려지지 않은 혹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했다. 세계선교의 새로운 도전을 주었다. 사람들이 그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었지만 그도 알지 못했다. 아직은 자세한 자료도 없는 실정이다.

1980년 영국의 에딘버러 선교대회에서 랄프 윈터는 다시 지구상의 미전도종족에 대한 도전을 하였다. 그때 스칸디나비아 출신 그린랜드에서 사역하고 있던 한 선교사가 강단에 올라와 “2000년까지 모든 사람에게 교회를!”라고 외쳤고 함께 자리한 수천 명의 전세계의 교회 선교 지도자들이 함께 구호를 외쳤다. 예정에 없던 돌발적인 상황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외침을 따라 했지만 그다지 심각하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십 년 후에 AD2000운동이 출발하였다.

Patrick Johnstone(Operation World 편집자이며 WEC선교회)의 선교사는 그간의 십 년간의 노력의 결과를 발표한다. 이른바 ‘세계 복음화의 현재와 미래’라는 보고서이다.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하면서 13,000여 종족에 대한 리서치를 하였다. 그들은 인구가1만 명 이상 되는 종족중에 2% 미만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혹은 5%미만의 신자를 가진 종족을 교회개척이 시급하게 필요한 종족으로 규정했다.

두 번째 성과로는 이 연합운동의 결과 1900년 5개 단체에서 2000년에는 73개의 단체가 주로 종족을 중심으로한 연합사역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도표가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이유가 있다. 엄청난 인구가 사는 사람들 속에 단지 하나 교회는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 반딧불 하나로 넓은 홀을 다 밝힐 수는 없다. 소금 농도는 3.5%이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바로 3.5%의 소금의 힘이다. 100미리 리터의 물에 3.5그램의 소금만 있으면 그 물은 웬만해서 썩지 않는다.티스푼 하나가 5그램이라고 한다. 3.5그램은 스푼의 위를 깎아낸 정도의 분량이 아닐까? 적어도 한 종족에 3.5%의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 'FTT 운동이란' 639개 종족 복음화 추진

빌리그레이엄 전도협회가 암스텔담 2000 선교대회를 주최하면서 대회에 참여한 한 소그룹 지도자들이 모든 종족에게 교회 개척을 목적으로 하는 전략적 관계를 형성했다. 이 그룹은 ‘테이블 71’이라고 칭했다(그분들이 자리했던 테이블 번호). 2004년 가을에 이들은 다시 모여 남은 비접촉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남은 과업 완수’(Finishing The Task) 운동을 시작했다. FTT운동의 목표는 3400여 미전도종족 중 10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639개의 미개척 종족을 우선 복음화시키는 데 있다.또 미전도종족 입양뿐만 아니라 현지에 교회를 세우고, 이 교회가 자립 및 재생산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이를 위해 지역교회와 현장 선교사, 선교단체의 유기적인 네트워크 구성이 필수요건이다. 특히 지역교회가 선교에 주체가 되고 선교단체는 정보와 전략을 제시하는 협력기관으로 활동한다.

 

* Target 2020

예수전도단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모든 나라, 모든 도시, 모든 족속에 복음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고 제자화하기 위하여 서기 2020년까지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을 우리는“Target 2020”이라고 부른다.

‘Target2020’은 최소복음화된 국가와 인구 백만 이상이나 관문되는 대도시, 미전도종족 내에 토착적인 교회를 개척, 제자화하고 스스로 배가 되게 하여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완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를 갖는다.

1.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 나라 50개 국을 개척한다.

2.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된 인구 백만 이상의 대도시와 관문도시 130개를 개척 혹은 참여한다.

3.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된 인구 백만 이상의 미전도종족과 관문종족 170개를 개척 혹은 참여한다.

 

넘어야 할 장벽

 

오늘날 선교의 완성이라는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벽도 많고 싸워 이겨야 할 적들도 많다. 가장 큰 적이 무엇일까?

전년도(2010년) 통계에 따르면 전세계 20억의 인구가 아직도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종족이라고 한다(크리스챤 투데이 2011.10. 23). 2010년 10월 3차 로잔대회에서 20일 ‘세계의 종교’(World Faith)란 주제하에 열린 미싱피플 : 복음을 듣지 못한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란 세미나에서 미전도종족 네트워크인 ‘에슨 투 에슨’(Ethne To Ethne)의 선교 지도자들이 한 발표이다. 수많은 세계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세계 선교에 열정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1만 6천여 가량의 미전도종족 중 3천7백여 종족이 복음을 접하지도 못한 채로 남아 있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교회들의 주저함이 영향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교회, 선교회, 선교사들이 주저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현재 전 세계로 파송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단지 3%만이 미전도 종족에게로 파송되고 있다는 것을 미국 언리치드피를즈 대표 켄트 박사는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교회가 미전도종족 선교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실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그 바탕에 깔려 있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 이라는 생각 때문에 투자하길 원치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스도인 리더들이 갈렙의 정신이 아닌 메뚜기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수 14:12개정개역)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33 개정개역)

 

또 하나의 주저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는 편견도 작용한다. 이 편견에 대해 15년간 미전도종족을 대상으로 사역을 해온 에디오피아 출신의 아리킬룸 베예네선교사는 소말리아에서 복음을 듣고 신실한 기독교인이 된 미전도종족 출신 청년의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는 겉으로 보면 달라 보이고 무서워 보이기까지 한다.그러나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겉으로는 무서워 보일지 몰라도 안으로는 진리를 갈급하게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개정개역)

이 고백은 하나님을 아는 자만의 고백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개정개역)

 

미전도종족선교의 목표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끔 인도하는 일이다. ‘에슨 투 에슨’의 남아공 디렉터 피터 탄탈 선교사는 아프리카 교회의 기독교인들이 배우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는 거리가 있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프리카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독교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1900년에 아프리카에는 8백만여의 기독교 인구가 있었지만 지금은 5억이 기독교인이다.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은 기독교인구가 90%를 넘는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또한 가장 높은 에이즈 감염률과 빈곤, 부정부패와 같은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미전도종족 선교를 행함에 있어서 이겨야 할 도전은 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성경적인 가르침으로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 가르치고 또한 보여줘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19 개정개역)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개정개역])

 

본문에서 본 동사는 ‘제자를 삼아라’이다. ‘세례를 주다’와 ‘가르치라’는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세례를 베풀면서 그리고 가르치면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다. 이 분사형 단어들은 제자를 삼는 방법(전략)과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세례는 예수님과 더불어 죽고 살았음을 선포하는 의식이다. 종교인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한 새생명의 사람을 낳아야 한다. 참된 제자가 되는 첫 걸음이다. 가르치되 머리에 지식만을 넣어주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가르침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과 발로 내려 가야 한다. 삶으로 실천된 지식이 아니면 율법처럼 죽이는 의문이 될 수 있다. 진리가 실생활에 적용되도록 해야만 한다. 아비의 심정으로 가르치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가르치시지 않으셨다. '행하시고 가르치셨다'. 순서에 주목해 보자. '가르치고 행하신 것'이 아니라, '행하시고 가르치셨다'(행1:1).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으면 생명 없는 종교로만 남게 된다.

 

나가는 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개정개역)

 

그 동안 우리는 선교의 쉼표는 찍었다. 많은 선교 전략들이 유행처럼 등장하고 사라졌다. 느낌표도 찍었다. 선교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슴 절절히 외쳤고 그 결과 선교사 이만 명 시대를 열었다. 선교의 말 줄임표도 찍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땅끝으로 남아있는 많은 종족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행진해야 할지 머뭇거렸다.이제는 유행에 휩쓸리지 말자. 이제는 전략과 목적에 혼란을 갖지도 말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께 부를 그 영광과 환희의 송가를 부를 그날을 향해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자. 3%는 부끄럽다. 적어도 십일조, 1/10 선교사는 미전도 종족, 복음이 시급한 사람들에게 나아가 제자를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이다. 임마누엘 주님의 마라나타를 꿈꾼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출처 : 조승호 선교사(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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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의 훈련, 인성, 영성(1)

 

선교사 훈련에 있어서 2가지의 중요한 면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나는, 선교사의 양적인 면이다. 요즈음 선교단체에서는 선교훈련 지원자가 점점 감소하고 있음을 크게 염려하고 있다. 한국선교연구원(원장:문상철목사)은 “선교사 증가 추이가 빠른 속도로 둔화되고 있다. 선교단체 대표들을 인터뷰해 봐도 2007년 이후로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는데 공감하고 있으며 이런 추세라면 3만 명 파송은 어렵지 않겠는가. 생각보다 정체 현상이 빨리 올 것으로 보고 있다. 이제 수직상승기는 지났다. 질적 성숙을 꾀해야 할 시기”라고 진단했다. 지난 11월 14, 15일 광림세미나하우스에서 개최된 한국선교지도자포럼 모임에서 KWMA 사무총장인 한정국 목사는 다음과 같이 한국 선교계에 긴급히 드리는 제안을 내놓았다. “한국교회가 어렵다고 합니다. 교세도 많이 줄어가고 있고, 개혁하자는 말은 많아도 정작 개혁되기 힘든 상황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교세가 줄어가니 헌금도 비상이고, 일부 교회는 선교비를 재조정하겠다고 합니다. 선교에 그렇게 너그럽던 한국교회가 몸살을 심히 앓고 있는데, 선교지를 방문해 보면 한국선교사님들은 이런 본국의 추세에 다소 무딘 반응을 보입니다. 막연한 낙관주의가 한국 선교계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2013년 가을을 보내는 요즈음, KWMA는 한국교회의 어려움을 예사롭게 보지 않습니다. 강 건너 불이 우리에게도 붙을 가능성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선교훈련의 질적인 면이다. 우리 한국 선교는 선교사 파송 숫자에 비하면 선교훈련의 질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에 한정국 KWMA 사무총장은 “한국 선교계에 긴급히 드리는 제안”을 통해서 위기를 만난 한국선교의 자구책 노력으로서 “양적성장을 배제할 순 없으나 질적 성숙을 가속화 시켜야 한국선교의 미래가 보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의 확신과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만 가지고 있다고 하여 선교지의 문화, 언어, 종교에 대한 단편적 지식만 제공하여 파송하는 것은 마치 전선의 긴급한 요구에 이끌려 소총사격하는 방법만 가르쳐 장교들을 전쟁터에 보내는 것과 같다. 선교사 훈련의 중요성을 백번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은 바르고 철저하게 훈련하는 것이 사역의 극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교지에서 발생되고 있는 많은 문제의 주 원인은 선교 훈련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선교훈련 기간과도 무관하지 않다. 주요 선교사 파송단체별 장기선교사 훈련 기간을 보면, 교단은 길게는 7개월, 짧게는 5주간이며 선교단체는 대체로 교단보다 길어 길게는 2년, 짧게는 3개월이다. 훈련기간이 제일 긴 선교단체는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국제선교회로서 선교사훈련대학(MTC)과정이 6개월~2년이다. 다음은 우리 바울선교회로서 국내훈련 6개월, 해외훈련 8개월 합 14개월이다. 우리 바우리 중에는 드물게 훈련기간이 너무 길다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가 기간에 대해서는 만족해 하고 있다. 우리 바우리가 바우리되게 하면서 바우리로서의 긍지를 잃어버리지 않은 이유는 바로 선교훈련의 기간이라고 본다.

선교훈련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선교 훈련 내용 또한 중요하다. 케냐의 임종표 선교사는 선교훈련을 내용에 따라 선교현지의 진입을 위한 “현지 진입 전 훈련(Pre-field orientation)”과 현지에 도착해서 받는 “현지훈련(On-field orientation)” 그리고 “선교사 계속훈련(On-going orientation)”의 3종류로 분류하였다.

 

우리 바우리의 “현지 진입 전 훈련(PFO)”은 총 14개월이다. 6개월의 국내훈련은 선교사 기본훈련 1차 과정이며 영성훈련과 선교학을 중점적으로 훈련한다. 나머지 8개월의 해외훈련은 선교사 기본 훈련 2차 과정으로 타문화 적응 훈련과 언어훈련 및 공동체훈련을 중점적으로 훈련한다. 그리고 바우리의 “현지훈련”(OFO)은 1~2년간으로 견습 선교사가 선교지로 부임하여 오리엔테이션과 언어 및 적응훈련을 받는다. “현지훈련”은 “현지 진입 전 훈련”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 기간 동안 해당 지부장과 총무, 지부원들은 깊은 관심을 갖고 성실하게 지도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견습선교사가 현지에 도착하면 적어도 2~3일간은 지부원들이 견습선교사와 함께 숙식하면서 그 나라의 문화, 종교, 관습, 교회, 언어 등을 강의하고 가능하다면 지부원들의 선교지를 순회하거나 그 일이 불가능할 경우는 지부원들의 사역 현장을 영상으로 소개한다면 견습선교사의 현지훈련에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지부원들과의 친밀한 관계형성에 있어서도 효과있는 일이라고 본다. 물론 필리핀지부, 일본지부, 대만지부 등 몇 개의 지부 외에 사역자들이 분산되어 있는 지부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선교사 계속훈련”(OGT)은 대개의 경우, 선교사 자신의 재충전을 위한 훈련으로서 선교사 자신들의 발전을 위하여 안식년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때는 학위를 위해 연구의 기간으로 혹은 각종 세미나를 통하여 재훈련기간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이 기간에는 자신의 지금까지의 사역을 돌아보고 재조명을 통하여 정리하면서 앞으로의 발전적 선교를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우리 바우리에는 아직 실시되지 않고 있지만 안식년 중인 선교사들을 위해 본부에서 재교육 혹은 가족 캠프 등의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 바우리는 정책적으로도 선교사 계속훈련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두나미스선교관이라는 좋은 시설이 있지 않은가.

선교훈련의 질을 높이기 위한 과제의 해결은 선교사의 인성과 영성의 조화있는 훈련에 있다. 여기에 대하여 박기호 선교사는 “선교사가 인성과 영성을 모두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서양, 동양을 막론하고 선교사의 인간성보다는 영성을 계발시키는 데 치중해 왔다. 기도와 성경 말씀을 강조하다 보니 사람과의 관계성이 부드럽지 않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유능하고 누구보다 헌신도 많이 하지만 영성과 인간성을 구분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바나바를 성령이 충만한 자요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성은 영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성령의 열매가 삶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좋은 인성으로까지 발전하면 풍성한 결실이 열릴 것이다”라고 인성과 영성의 조화있는 선교사 훈련을 강조하였다.

 

최근에 바우리를 지원한 헌신자들의 지원동기를 들어 보면 아직도 우리 바우리는 선교단체로서의 신뢰를 잃지 않고 의외로 바우리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우리 바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고 있다. 우리가 이 축복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이사회와 본부, 전주안디옥교회를 비롯한 1000개의 후원교회들 그리고 세계의 선교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는 바우리 모두가 함께 적극 협력해야 한다. ♣

 

 선교사의 훈련, 인성, 영성(2)

 

2013년 경희대와 중앙일보 취재팀이 도시와 농촌의 중학생 2,171명을 골고루 섞어 설문을 통해 중학생의 인성을 조사한 적이 있다. 인성의 세 영역 ‘도덕성, 사회성, 정직성’을 구성하여 10개 지표별로 점수를 매긴 결과 인성이 좋은 학생은 5명 중 1명꼴, 학생 중 절반가량의 인성이 기준미달로 나온 점에서 중학생들의 인성론은 위기라고 보았다. 이 조사에서 정직(61.7)은 10개 지표 중 가장 낮았다. 만일 인성에서 낙제점을 받은 중학생들이 인성이 바뀌지 않은 채 사회에 진출한다면 그들이 있는 공동체, 가정, 심지어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심히 우려가 된다.

 

인성위기의 중학생, 왜 그럴까. 아이들의 인성 수준이 낮은 것을 아이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과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좋은 인성으로 몸소 본을 보였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남을 밟고 이겨야 성공한다는 그릇된 가치관, 온갖 불법과 비리,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 도덕 불감증, 지나친 자식 과잉보호, 지나친 입시위주 교육 등 소위 사회 지도층이나 어른들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행태를 청소년들에게 보여주지는 않았는가. 어른들의 이런 잘못된 심성과 행동 양식이 청소년들에게 그대로 이식된 결과가 이렇게 낮은 인성 수준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최근에 발생한 세월호의 침몰 사건에서 선장과 다른 어른들의 행태에 대하여 한양대 정진곤(교육학) 교수는 “가장 신뢰받아야 할 어른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데 대한 실망과 분노가 큰 상황”이라고 말하였다. 아이들이 앞으로 어른 말을 믿겠는지 심히 염려스럽다.

 

한일장신대 총장 취임 100일을 맞이하여 “인성교육은 올바른 신앙생활의 토대”라는 주제의 취임사를 발표한 오덕호 총장에게 “대학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는 무엇을 꼽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대학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인성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사람들의 학식과 기술이 부족한 게 문제가 아니라 부정 부패와 인격 미숙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성교육이 가장 시급합니다” 라고 답변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론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목회자나 성도의 영성인가? 아니면 인성인가? 또한 선교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많은 문제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선교사들의 영성인가? 아니면 인성인가?

 

오늘날 선교사의 영성훈련에는 집중하고 있지만 과연 인성훈련에는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는가. 선교사의 인성훈련의 중요성에 대하여 박기호 선교사는 “서양, 동양을 막론하고 선교사의 인성보다는 영성을 계발시키는 데 치중해 왔다. 기도와 성경 말씀을 강조하다 보니 사람과의 관계성이 부드럽지 않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유능하고 누구보다 헌신도 많이 하지만 영성과 인성을 구분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행 11:24)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성은 영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성령의 열매가 삶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좋은 인성으로까지 발전하면 풍성한 결실이 열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해외선교사에게 영성만큼 중요한 것은 인성이다. 한기총 총무인 최희범 목사는 “선교사들에 대한 훈련으로 놓치기 쉬운 것 중 하나가 인성 훈련이며 선교마인드는 충분한 반면 인성에 대한 의식의 부재가 문제를 일으키는 주요 요인이 되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한국 선교사는 믿음도 훌륭하고 기도도 많이 하여 개인의 사역 결과는 뛰어난 데 비하여 팀 사역의 열매가 신통치 않거나 실패하는 경우, 혹은 현지인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의 주요한 원인에 대하여 직접 선교사로 활동했던 이들은 “선교사의 인성의 문제”라고 꼽았다.

 

2008년 7월 28일부터 시카고 휘튼대학에서 개최된 제6차 한인세계선교대회(KWMC) 둘째 날에는 “선교사와 선교사의 인성”이라는 제목으로 패널토의가 진행되었다. 먼저 선교사의 “인성의 정의”에 대하여 박기호 선교사(전 필리핀 선교사, 풀러신학교 교수)는 “인성은 인간됨의 실제와 자질”, 조동진 목사(GMS)는 “선교사의 인성은 선교사로서 영성과 지성, 심성을 모두 포함한 성품, 성격”이라고 정의했다. 이어서 “선교사의 인성의 중요성의 이유”에 대하여 김영관 선교사(브라질, 베트남 선교사)는 “우리를 통해 복음이 증거된다. 복음은 좋은 인간 관계를 맺어가는 가운데 전해진다. 선교사에게는 인성, 영성, 전문성이 필요하다. 이 중에 인성은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이다”. 김정웅 선교사(태국 선교사)는 “인성과 인격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놀랄만한 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인격을 성장시키는 데만 신경 쓰다 보니 인성의 성장은 이루지 못했다” 라고 설명했다.

 

또한 “선교사가 갖춰야 할 이상적인 인성”에 대하여 강성일 선교사(브라질 선교사)는 “성품은 선교사로서 갖춰야 할 자격 중 하나다. 선교사나 교회 모두 인격을 계발시키는 사역은 많이 실시하고 있다. 훈련 받는 현지인도 선교사의 인격을 닮기도 한다. 그러나 선교사는 전도 대상자에게 선교사 개개인의 인격이 아닌 그리스도의 인성을 심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인성, 이것은 인격보다 우선돼야 한다. 인격은 학문과 이성, 사회적 지위, 소명 등을 말한다면 인성은 용서, 사랑, 희생, 배려와 같은 항목이다. 그리스도의 인성, 이 이상적인 성품을 전도 대상자에게 심어주는 선교사역을 펼쳐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한국인의 인성적인 특징이 선교활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박기호 선교사는 “한국인은 사랑과 헌신, 희생, 말씀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하다. 영성 계발 사역은 강하지만 인성 계발 사역은 약하다. 보수주의자들은 영성을 강조하지만 인성은 약한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인성을 강조하는데 영성은 덜 강조한다는 장단점을 갖고 있다. 하비칸 교수는 영성과 인성의 겸비를 강조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서 “목사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영성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삶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영성은 보이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인성이 반영된 영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영성뿐만 아니라 인성을 겸비하지 않으면 결핍된 인성 때문에 복음전파에 방해가 된다” 라고 설명했다.

 

이영숙 박사는 저서 “한국형 12성품 교육론”에서 성품이 실제 삶에서 드러내는 구체적 모습을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성품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나타난다. 성품은 삶의 위기와 갈등, 어려운 상황이나 삶의 압박에 대해 반응하는 모습이 바로 그 사람의 성품이다. 성품은 평상시의 말과 생각, 표현하는 방법과 태도를 통해 그대로 나타난다.

둘째, 성품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여러 가지 관계로 나타난다.

셋째, 성품은 습관을 통해서 나타난다.

넷째, 성품은 예의 바름을 통해서 나타난다.

다섯째, 성품은 말을 통해서 나타난다.

 

한국선교의 위기는 양적인 면에만 치중한 나머지 질적인 면에 소홀한 점에서 찾고 있다. 여기에서 질적인 소홀함이란 영성과 인성의 훈련의 부조화를 말한다. 한국인은 이신득의만 강조해서 인성교육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우리 바우리의 인성의 수준은 어떠한가 각자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아울러 우리 바우리는 영성에서 흘러 나오는 인성을 강조하되 이젠 말이 아닌 실천하는 것을 가르쳐 ‘영성과 인성을 겸비한 선교사’로 훈련해야 한다.

 

전형구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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