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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개신교, 한국과 접촉하다


1832년 ‘짧은 방문’은둔의 땅에 복음 씨앗

서양인들은 한국에 대한 두 가지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해 왔다. 첫째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 Calm)’였다. 한국의 옛 이름 ‘조선’(朝鮮)의 영역(英譯)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19세기 조선에 대한 사실적 표현이었다. 다른 하나는 ‘은둔의 나라(Hermit Kingdom)’라는 표현이다. 일본 동경제국대학 동양학 교수였던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Griffis)가 처음 사용한 이 표현 또한 폐쇄적인 조선에 대한 외국인들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조선말기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렀던 서양 선박이 출몰하였고, 탐험 혹은 측량이라는 이름으로 외국 함선이 한반도 연해로 접근해 오며 통상을 요구하자 쇄국은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방아책(防我策)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 확신을 더해 준 사건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병인양요(1866),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기화로 미국의 아시아 함대를 강화도에 파견함으로 조선 관군과 충돌한 신미양요(1871),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사건(1869) 등이었다. 천주교의 박해도 따지고 보면 이런 서양을 배척하는 척양(斥洋)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방아책의 일환이었다. 

대원군은 척화교서(斥和敎書)를 발표하고 서울 종로를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의 성을 쌓았으나 은둔의 나라로 향하는 복음의 빛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조선은 약 10여 년간 지켜오던 쇄국의 녹슨 빗장을 열고 개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가 1876년이었다. 이 개국(開國)은 한국역사에서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의 변화의 시작이었다. 천주교에 이어서 기독교(개신교)가 서서히 한국으로 전파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개신교 복음의 사도 한국으로  

비록 한국에서 개신교와의 보다 구체적인 접촉은 개항 이후에 이루어지지만 그 이전에도 조선으로 향하는 복음의 사자들이 없지 않았다. 그 첫 인물이 1832년 7월 우리나라 해안으로 들어온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51)였다. 그는 우리나라에 온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 내한 당시 귀츨라프는 중국 선교사였으나 그의 사역지는 중국만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태국, 일본, 티베트와 중앙아시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그는 한자문화권에서는 곽실렵(郭實獵)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중국을 사랑한 자(愛漢者) 혹은 선한 덕을 행하는 자(善德者)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귀츨라프는 독일 북부 프로이센 제국의 프리츠에서 출생한 유태계 독일인으로 루터교 목사였다. 경건주의의 지도자였던 프랑케가 설립한 학교에서 수학했다. 19세가 되는 1821년 4월부터 18개월 동안 베를린 선교신학교에서 공부했던 그는 경건주의의 깊은 영향을 받게 되고 선교에 대한 이상을 갖게 된다. 그가 접한 ‘바젤 선교잡지’도 그의 선교적 삶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후에 베를린 대학에서도 짧은 기간 공부하게 되지만 언어적 재질이 있어 6개 국어를 작문할 수 있었고, 12개국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루터교 목사로서 선교사의 길을 갈망했던 그는 영국에서 모리슨 목사를 만난 이후 동양선교에 관심을 가졌고 1823년 ‘화란선교회’ 소속 선교사가 되었다.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다

1826년 7월 이후에는 현재의 자카르타인 바타비아(Batavia)에서, 1828년에서 1831년까지는 현재의 태국인 사이암(Siam)에서, 그리고 1831년 이후에는 중국선교사로 일생 동안 봉사했다. 중국선교사인 그는 1831년과 1832년 그리고 1833년, 세 차례에 걸쳐 중국 해안을 탐색하였는데 한국 해안에 도착한 시기는 그의 두 번째 항해 때인 1832년 7월이었다. 상당한 의술까지 겸비했던 그는 동인도회사의 통역 겸 선의(船醫), 선목(船牧)으로 영국 상선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를 타고 우리나라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1832년 2월 27일 광둥(廣東)을 출발하여 타이완, 상하이 및 산둥반도를 거쳐 황해도를 가로질러 7월 17일 오전 10시경 황해도의 서해안 장산곶(長山串)에 도착하였다. 22일에는 녹도(鹿島)와 인근의 불모도(不毛島)를 거쳐 7월 25일 충남 보령시 오천면의 고대도(古代島)에 정박했다. 

귀츨라프는 홍주목사 이민회 등 조선 관리들에게 조선국왕에게 통상을 청원하는 서한과 선물을 보냈다. 선물은 한문으로 번역된 두 권의 성경과 전도책자로 추정되는 26종의 도리서(道理書), 그리고 망원경 등인데, 이를 순조왕에게 진상하도록 전달했다. 이들은 조정의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곧 7월 25일부터 8월 11일까지 17일간 고대도 내항에 체류하면서 주민들에게 한문성경과 전도 문서를 배포했다. 또한 감자를 심어주고 재배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특히 이때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단편적인 것이지만 이것이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이었다. 이것이 한국과 개신교 간 최초의 접촉이었다. 

조정으로부터 통상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은 귀츨라프 일행은 이곳을 떠나 남하하여 8월 17일 제주도 연안을 지나 오키나와를 거쳐 마카오로 돌아갔다. 귀츨라프가 우리나라에 체류한 기간은 꼭 한 달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이때의 방문 기록은 그의 ‘항해기’(Journal of the three voyages along the cost of China, in 1831, 1832 and 1833. With notices of Siam, Corea and Loo-Choo island)에 잘 나타나 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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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외국 점령기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기 

 

포르투갈은 동인도와의 향료무역을 위한 접근로를 확보하고, 당시까지 아랍상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향료무역을 탈취하기 위해 말라카를 점령하였다. 1511년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으로 말라카 왕국은 급작스런 퇴조를 맞게된다. 말라카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는 남쪽으로 도망하다가 결국 싱가포르 남부의 빈딴이란 작은 섬에 왕국을 세웠다. 마흐무드는 말라카를 제외한 반도 전역에 대한 명목상 통치자로서 지위를 고수하였지만 반도는 대부분 농촌지역으로 빈곤하였다. 무역과 부의 중심인 말라카를 회복하기 위해 마흐무드는 여러차례 공격을 가하지만 포르투갈인들이 철저히 말라카를 요새화한 탓에 이는 실패로 돌아가며, 오히려 역공을 취한 포르투갈 군에 의해 1526년 빈딴이 함락된다. 빈딴을 빼앗긴 마흐무드의 아들들은 다시 말레이 반도 서북부의 뻬락과 남부의 조호르에 조그만 봉국을 세우며 조호르 왕조(Johor Sultanate)는 말레이인에 의해 말라카를 계승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 조호르 왕국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명목상 말레이 반도의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포르투갈이 말라야의 말라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자 이슬람 상인들은 북부 수마트라로 이동했으나 계속되는 포르투갈의 공격으로 수마트라 서쪽의 아체국으로 옮겨가며 그 결과 아체가 이슬람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체 왕국은 1641년 네덜란드가 말라카를 점령하면서 패망하였다. 

 

. 네덜란드의 진출 

 

네덜란드의 동남아 진출은 1596년부터 시작되었다. 1602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어 무역을 독점하였으며, 네덜란드는 1602-1607년 사이에 조호르 왕국 및 아체 왕국 등과 협력하여 말라카에 주둔하던 포르투갈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네덜란드는 1619년에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 근거지를 세우고 포르투갈의 향료무역과 동남아시아 무역에 도전하였다. 네덜란드는 1640-1641년 조호르 왕국의 협력을 받아 말라카를 6개월간 포위하며 다시 말라카 점령을 시도한 끝에 마침내 포르투갈을 축출하고 말라카를 차지하였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과 달리 영토나 종교의 포교보다는 무역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와 상업을 분리하여 통치하였다. 네덜란드는 중계무역을 독점하였으며 말레이 반도에 있는 주변국들과의 조약을 통해 뻬락지역의 주석채굴 및 판매에 관한 이권을 획득하였다.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17세기 동남아시아 무역을 장악했으나 18세기 들어서 점차 그 세력이 약해져 1799년에 해체되었다. 

 

네덜란드의 말레이 반도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을 배경으로 조호르 왕국은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일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17세기 말 조호르 술탄이 보르네오섬 동부의 부기스족을 군인으로 기용하면서 조호르 왕국은 오히려 부기스족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8세기 들어 왕국내부의 무기력과 함께 내분이 일어나 조호르 왕국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많은 권력은 외부세력에게 넘어갔다. 조호르 왕국의 쇠퇴로 일부 지역에는 빠항, 뻬락, 끌란딴, 뜨렝가누, 끄다 등 새로운 소국들이 독립국으로 등장하였다. 한편 슬랑오르는 부기스족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말라카 후면의 내지에 있던 소국가들은 후에 느그리 슴빌란이라고 불릴 국가로 통합되어 가고 있었고 말라카는 여전히 네덜란드령으로 남아 있었다. 

 

영국의 진출과 식민화과정

 

말레이 반도는 말라카 왕국의 멸망 (1511) 이후 반도 전체를 장악한 중앙집권적 단일국가가 형성되지 못한채 지방을 중심으로한 술탄들의 통치시대가 계속되었다. 16세기 초엽부터 이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한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경략정책에 따라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차례로 이 지역을 자국의 영향권하에 편입한데 이어, 19세기 들면서 말레이 반도는 다시 영국의 영향력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영국은 1784년 자국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Kedah와 남부 Riau 지역에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곧 화란에 의해 축출당하였다. 한편, 1782년 시암과 전쟁상태에 있던 Kedah의 술탄이 페낭과 페낭의 반도쪽 연안지역을 영국 동인도회사에 할양하는 대신 영국으로부터 군수품과 기타 필요한 지원을 받기로 합의함에 따라 영국의 말레이 반도 진출이 시작되었다. 1819년, 조호르 왕국 왕위계승자인 Tunku Hussein 과의 조약으로 영국은 전략적 중심지이자 새로운 무역항구인 싱가포르를 할양받게 된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지배권 때문에 경쟁관계에 있던 영국과 화란은 1824년 말라카 해협에서의 양국 세력범위를 확정짓는 영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말라야를 인도네시아와 교환하는 이 조약에 따라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남쪽과 서쪽은 네덜란드가, 북쪽과 동쪽은 영국이 지배권을 행사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이후부터 말라카는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화란은 말라카로부터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로써 말라카, 페낭, 싱가포르에 대한 지배는 화란으로부터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대신 영국은 수마트라 지역에 대한 모든 권한을 화란에게 양도하였다. 

 

(가) 해협식민지 (1826-1873) 시기 

 

영국은 1826년 페낭, 말라카, 싱가포르, 그리고 중서부 해안의 빵꼬르 (Pangkor) 섬을 묶어 해협식민지 (Straits Settlements)라 불리우는 단일 행정체제를 구성하였다. 해협식민지는 주변의 여러 지역들을 잇는 무역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영국은 이전의 포르투갈이나 화란과 마찬가지로 주로 페낭, 말라카, 싱가포르 세 개의 항구도시에서만 주로 활동하였고 내륙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동인도 회사아래 편입된 이들 해협식민지가 영국령 인도정부의 재정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해협식민지의 주민들은 영국인을 중심으로한 유럽인과 (회사원 및 그 가족, 개인상인, 목사 등), 중국인, 수마트라에서 이주해온 자바인, 부기스인, 인도인들로 구성되었다. 인도정부는 당초 말라야 (말레이 반도)로의 노동력 이동을 금지하였으나 해협식민지의 저임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죄수나 병사들을 보내게 되었다. 한편 해협식민지 인구의 과반수를 점하는 화교들은 상인, 노동자, 무역업자 등으로 해협식민지 경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해협식민지의 주요 항구들은 자본주의 기업의 성장, 상업 및 농업의 확대, 국제무역에서 주석 수요의 증가, 중국 기업가 및 노동자의 유입 등으로 새로운 발전기회를 잡게 되었다. 또한 영국의 불간섭 정책은 해협식민지의 독립적 발전을 보장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나) 말레이 연합주의 형성과 영국의 중앙집권적 통제체제 강화 

 

19세기 중반까지 말레이 반도는 농업중심의 봉건사회였으나 주석이 국제무역의 주요 교역상품이 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는바 영국은 주석의 채굴 및 무역을 통한 이익을 확보하고 반도내 자국 사업가들을 보호하기 위해 말레이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특히, 광산개발을 위한 저임노동력 수요에 따라 중국 남부지역으로부터 많은 수의 중국인들이 유입되게 되었는데 이들은 후일 말레이시아가 복합민족 국가로 특징지워지게 되는 원인이 된다. 1873년 세계적으로 주석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되자 영국은 이를 계기로 이전까지의 불간섭 정책을 간섭정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Penang과 Malacca, Singapore를 점령한 영국은 말레이 반도의 주요 산품인 주석거래의 독점을 시도, 1874년 주석 생산의 중심지인 Perak 내전에 개입하여 반도내륙의 지배를 추진하였다. 이무렵 해협식민지와 주석광산 개발지로의 중국인 노동자 이주가 늘어나면서 1860년대 들어반도 서해안의 주석생산은 대부분 말레이인으로부터 중국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1862년 주석광산 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Perak의 Sultan 왕위계승 문제와 복합되면서 Larut 지역에서 폭동이 발생하였고 한때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던 Larut 폭동이 1872년 재발하자 영국이 개입하게 된다. 해협식민지를 지배한후 말레이 반도 내륙으로의 진출구실을 찾던 영국은 Larut 내란이 해협식민지의 무역활동을 저해한다는 이유를 들어 내란을 군사력으로 진압하고 1874년 Pangkor 조약을 맺었다. 빵꼬르 조약에서 영국은 술탄의 권한을 종교 (이슬람)의 해석과 말레이인의 관습에 관한 사항들만으로 제한하는 한편 모든 일반행정의 권한은 영국의 주재관 (Resident)이 갖는다고 규정하였다. 이에 술탄이 크게 반발하고 초대 주재관으로 부임한 J.W. Birch가 말레이인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영국은 군사력을 동원 술탄의 저항을 진압하고 Perak에 무력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영국은 Perak과 같은 방식으로 1874년 Selangor, 1886년 Negeri Sembilan, 1887년 Pahang의 주왕들과 조약을 맺고 1896년 이들 4개 지역을 통합하여 영국 지배하의 말레이 연합주로 통합하였다. 

 

영국은 1896년 서부 해안지역의 Perak, Selangor, Negeri Sembilan과 중부의 Pahang등 4개 주를 통합하여 "말레이 연합" (Federated Malay States)를 구성하였다. 말레이 연합은 총독제도를 도입하여 정부를 하나로 통합시키고 행정 및 경제활동을 강화시킴으로써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연합주 성립에서 2차 대전에 이르는 시기는 (1896-1941) 말라야의 정치, 경제, 사회변동에 가장 중요한 시기로서, 정치적으로는 식민정부가 구체제를 버리고 근대국가의 기초를 다진 시기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주석과 고무의 호황으로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영국은 말레이 연합 성립에 이어 반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1909년 프랑스와의 교섭을 거쳐 당시 태국의 보호령으로 되어 있던 Kedah, Perlis, Kelantan, Terengganu의 북부 4개주를 할양받아 각 주별로 조약을 맺고 고문관 (Advisor)을 파견하여 비연합주 (Unfederated Malay States) 형태로 통치하였다. 1914년에는 반도 남부의 Johor가 비연합주 형태로 흡수됨으로써 말레이 반도의 12개 주는 연합주 (Perak, Selangor, Negeri Sembilan, Pahang), 비연합주 (Perlis, Kedah, Kelantan, Terengganu, Johor), 해협식민지 (Penang, Malacca, Singapore, Pangkor) 등 3가지 형태로 영국 영향력 하의 행정적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영국은 1896년 말레이 연합을 말레이 반도에 발족시킨 이래 일본군이 상륙한 1942년 사이에 말레이 연합을 중심으로 각 주 중심의 분권화된 통치형태를 쿠알라룸푸르를 중심으로한 중앙집권적 통치구조로 전환시켰다. 1차대전의 전후 복구와, 같은 시기 구미 각국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자동차 산업은 말레이산 고무와 주석에 대한 폭발적 수요를 가져와 말레이 반도는 2차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동남아에서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구가하였다. 

 

영국의 지배아래 말라야는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도시의 성장, 서구식 교육의 보급 및 행정관료층의 등장, 계급구조와 경제구조의 변화 및 다종족 사회의 형성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식민세력에 대한 민족주의적 의식은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영국은 말레이인 엘리트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식민정부의 행정관리로 채용하는 등 말레이인 우대정책을 펴는 일방으로 중국인과 인도인들은 이민사회로 엄격히 규정하여 통치하는 인종별 분리통치 즉 divide & rule 로 일관하였다. 


 

 일본 점령기 (1942-1945) 

 

1941년 12월 "아시안인을 위한 아시아"라는 구호를 앞세운 일본은 진주만 공격을 시작으로 말라야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1942년 2월에는 싱가포르도 일본군의 점령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은 해협식민지, 말레이 연합주, 말레이 비연합주의 구별을 폐지하고 말라야를 단일 보호령으로 통치하는 한편, 말레이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술탄을 종교적, 정신적 지도자로 인정하는 등 말레인들을 우대하였다. 반면 중국 본토에서 국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일본은 중국인들의 반일감정과 대일저항을 의식, 중국인들을 가혹하게 박해하였다. 말레이인에 대한 우대는 말레이인들의 민족의식을 환기시켜 반영, 반식민 감정을 고취함으로써 일본의 전세에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목적에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인도인에 대해서는 인도인들의 반영태도를 고려할 때 일본과의 협력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인도 본토의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등 대일 저항요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인도계 주민에 대해서도 우호적으로 대하였다. 일본 군정의 차별정책은 중국인 사회에 심한 반일 감정을 남겼으며, 말레이인과 중국인 사이에 심한 적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항일 지하운동은 주로 영국의 지원과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중국인들이 중심이 된 말라야 항일 인민군 (MPAJA: Malayan Peoples' Anti- Japanese Army)은 영국 원조하의 지하운동을 통해 일본의 신 식민정책에 반대하는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후 말라야 인민공화국 (Peoples' Republic of Malaya)의 건설에 있었으며, 이를 위하여 점령군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면서 일본의 패배 뒤에 따를 것으로 예상되는 공백상태를 이용하여 나라를 혁명적으로 인수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1945년 9월 영국이 다시 말라야에 돌아왔을 때에는 복합적인 인종문제와 아울러 이데올로기적인 공산주의 문제가 국내 갈등의 주요 요인으로 떠올랐다. 3년간에 걸친 일본 점령의 가장 큰 폐해는 말라야 경제의 피폐화에 있었다. 점령통화 (군표)의 남발과 고무 및 주석의 생산, 수출 시스템이 붕괴됨에 따라 말라야 경제는 몰락하게 되었다. 또한 식량자급계획의 실패와 식량 운송체계의 붕괴로 말미암아 주민은 극도의 곤궁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전후 영국의 복귀와 독립과정 (1945-1957)

 

일본의 패망과 함께 복귀한 영국은 1945년 10월, 싱가포르를 제외한 말레이 반도의 모든 주 (4개의 Federated Malay States, 5개의 Unfederated Malay States, 페낭과 말라카 등 2개의 해협식민지) 를 말레이 총독하의 강력한 중앙정부와 함께 하나의 식민 행정단위로 통합하는 것과 말라야의 비 말레이인들에게 말레이인들과 동등한 자격의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말라야 연맹" (Malayan Union)안을 발표하였다. 연맹안의 주요 내용은 첫째, 말라야를 모국으로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한다; 둘째, 페낭과 말라카는 계속 영국의 해협식민지로 잔류한다; 셋째, 싱가포르는 영국의 직할식민지로 잔류하여 보르네오 북부의 영국령 사바와 사라와크에 대한 행정을 통제한다; 넷째, 각 주의 술탄은 그들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되 이들의 영향력은 종교문제만으로 국한한다 등이었다. 연맹안은 1946년 4월 시행에 들어갔으나 곧 말레이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반발의 주된 이유는 중국인 및 인도인 등 이민족에 대한 시민권 부여로 말미암아 원주민으로서 그간 말레이인에게만 주어져 왔던 기득권이 침해받을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41개에 달하는 말레이인 단체는 1946년 3월 현재 말레이시아 연립여당의 중심세력이 된 "통일 말레이 국민조직" (UMNO: United Malays National Organization)을 결성하고 말라야 연맹에 관한 협정에 일체 응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영국은 결국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연맹안을 포기하고 자치정부를 위한 조기선거 공약과 함께 1948년 2월 말레이인들의 의견을 전촉적으로 수용한 "말라야 연방" (Federation of Malaya)을 탄생시켰다. 새로운 연방안은 말레이인들의 특별한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시민권 획득을 위한 자격요건을 강화하였으며 각 주의 자치적 기능을 대폭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라야 연방안이 당시의 세계적 조류와는 정반대로 영국 식민통치의 사실상 부활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일본 점령기간중 민족주의 세력의 명맥을 유지해온 말레이 공산당 (MCP)는 영국의 식민통치 반대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국인들이 주축이 된 말레이 공산당 세력의 식민통치 반대운동과 이에 맞선 영국과 말레이인의 반공운동은 종종간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게 되었다. 

 

MCP의 무장봉기가 발생된 직후 공포된 비상사태하에서 영국 식민정부는 말라야에 있는 모든 반영 정치단체를 불법화함과 동시에 이에 연루된 정치인사들을 체포, 구금함으로써 혁명적인 반 식민지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한편, 말라야 공산세력과의 게릴라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관건이 민심의 동향 (식민정부를 지지하는) 달려 있다고 판단한 영국 식민정부는 온건, 보수적인 중국인 정치 지도자들을 설득해 중국인 사회와 식민정부간의 유대를 강화시키려는 전략을 수립하게 되었다. 정부당국은 민심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지역 의회 선거를 서둘렀으며 이를 계기로 1946년 "말라야 인도인 회의" (Malayan Indian Congress)와 말레이시아 중국인협회 (MCA: Malaysian Chinese Association) 등이 결성되었다. UMNO와 MCA는 1952년 실시된 쿠알라룸푸르 지방자치 선거에서 공동전선을 구축, 12개 의석 가운데 9석을 차지하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같은 UMNO와 MCA의 성공적인 선거연합에 MIC도 참여키로 결정함으로써 1953년 초 "동맹당"(Alliance Party) 체제가 결성되었다. 동맹당은 1955년 실시된 초대 연방의회 선거에서 전체 52석의 의석 가운데 51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으며 그 결과 UMNO의 의장인 Tunku Abdul Rahman이 초대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55년 선거에서 동맹당이 압승을 거둔 것을 계기로 말라야의 정치 지도자들은 독립 획득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계획마련에 착수하였다. 1955년 12월 개최된 UMNO의 총회에서 라만을 중심으로 하는 말레이 정치 지도자들은 늦어도 1957년 8월 31일까지는 말라야의 독립을 획득할 것을 서약하였다. 라만 내각은 영국과 독립을 위한 협상에 착수하여, 1956년 1월 런던에서 열린 말라야 연방 헌법회의를 거쳐 동년 6월 독립 말라야의 헌법을 마련할 Reid 제헌위원회 (Reid Constitutional Commission)가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가 Merdeka 헌법의 최종안을 준비하는 동안 독립후 말라야에서 말레이인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계속적으로 보장하는 문제, 언어 및 시민권 등의 민감한 쟁점들이 표면으로 부각되었으나 동년 2월 6일 합의에 도달하였다. 1957년 2월 공포된 새 헌법에 따라 마침내 독립을 획득한 말라야 연방은 영국과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는 한편 독립 말라야는 영연방의 일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한편 독립헌법 (Merdeka Constitution)의 주요 내용은: 말레이인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며; 시민권을 포괄적으로 적용하고 (탄생, 거주, 사용언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 주왕회의에서 선출되는 Yang di-Pertuan Agung이 5년 임기의 국왕으로 국가원수가 되며; 선출제의 하원 (Dewan Rakyat)과 임명제의 상원 (Dewan Negara)으로 구성되는 양원제 도입; 독립후 10년 이내에 말레이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확정한다는 등으로 되어 있다. 1957년 8월 15일 입법위원회의 헌법인준에 따라 동년 8월 31일 말라야 연방이 독립국으로 출범함으로써 영국이 말레이 반도에 발을 들여놓은지 170여년만에 말레이 주민들은 주권을 되찾게 되었다. 말라야의 독립은 20세기 중반 세계 도처에서 생겨난 많은 신생 독립국들이 대부분 식민종주국과의 폭력적 갈등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국과의 협의와 평화적 상호협력을 통하여 단계적, 시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특징적 양상을 지니고 있다. 
 

 말라야 공산당의 준동과 비상사태 (Emergency) 선포

 

일본의 패전 이후 다시 말레이 반도로 돌아온 영국은 1948년 2월 말레이인들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반영한 말라야 연방 (Federation of Malaya)를 탄생시켰다. 새로운 연방안이 말라야의 독립보다는 오히려 영국식민 통치의 부활에 목적이 있다고 판단한 말레이 공산당 (MCP)은 영국의 식민통치 반대와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말라야 공산당은 당의 폭력 전위조직인 말라야 민족 해방군 (Malayan Races Liberation Army) 을 중심으로 말레이인들의 부를 착취하는 대농장 (Plantation)과 광산제도를 폐지하고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폭력투쟁을 전개하였다. 

 

말레이 공산당의 무력투쟁 양상이 격렬해지자 말라야 정부는 1948년 7월 18일 전국에 비상사태 (Emergency)를 선포하였다. 이전까지 주로 영국인 관리와 부르조아 농장주들의 암살, 태업과 스트라이크 조장 활동을 벌이던 말라야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은 비상사태 선포를 계기로 정글지역으로 후퇴하여 본격적인 게릴라 활동에 들어간다. 이들의 게릴라 활동은 당시 회복세에 놓여 있던 말레이 경제의 발전과 독립 획득을 지연시키게 되었다. 영국 식민정부는 비상사태 선포를 계기로 말라야에 대한 독립허용을 미루는 한편, 우선 공산 반란군을 일반 시민들로부터 고립시켜 나가는 정책을 펼쳤다. 이같은 고립화 정책이 직접 군사력 사용을 통한 토벌작전과 함께 효력을 발휘함으로써 말라야 공산당의 무장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비상사태는 1960년 해제되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까지 잠잠하던 공산당 활동은 1975년의 인도차이나 반도 공산화를 계기로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말레이 반도 북부지역 즉, Kedah, Perak, Kelantan, Pahang 등을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한 말라야 공산당은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등에 업고 체제동요를 위한 테러 행위를 강화하였다. 말라야 공산당은 이후 1989년 말, 무력투쟁의 종식을 공식 선언하기까지 인종갈등과 더불어 말레이시아 국내정치의 가장 위험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말레이시아 정부는 말라야 공산당 격퇴를 위해 취했던 1948-1960년 사이의 "비상사태"를 "국내보안법" (Internal Security Act)으로 대체하고 이를 통해 공산주의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공산주의 이념의 전파를 막았으나 후일 국내보안법은 야당 탄압의 도구로 변질되게 되었다. 

 

한편, 공산주의와의 갈등을 계기로 신생 독립 말라야 연방은 외교와 내치에 있어 반공을 주요한 국시로 삼게 되었다. 라만 수상은 독립 직후 반공주의의 월남과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던 태국, 공산 반도들과의 게릴라전에 시달리던 필리핀을 방문, 국제 공산주의에 대한 공동 대처방안을 모색함으로써 독립 말라야 연방의 외교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말레이시아 연방 (Federation of Malaysia)의 탄생 

 

1955년 선거에서 동맹당의 압승을 이끈 라만은 말라야 연방의 초대 수상이 되어 비상사태를 해제하고 이때부터 싱가포르, 북보르네오 (사바), 사라와크, 브루나이 등을 포함하는 '말레이시아' 구상을 발표하였으며, 1961년 5월 싱가포르를 방문한 라만은 말레이시아 연방 구성안을 정식으로 선언하는 한편, 이의 논의를 위한 영국과의 협의회를 구성하였다. 1962년 7월 31일 마침내 영국이 자국령인 북 보르네오 (사바)의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을 허용키로 동의함으로써 연방 성립을 위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라만의 구상을 강력하게 뒷받침한 것은 영국이 상기 4개의 지역에서 공히 원만한 협력관계를 구축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구상은 내외로부터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1962년 브루나이에서는 연방결성 저지와 브루나이-사바-사라와크를 연결하여 별도의 독립국을 결성하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필리핀과는 사바의 영유권 문제로, 그리고 새로운 거대 연방의 탄생을 영국을 등에 업은 신식민주의 국가 건설로 판단한 수카르노 정권의 인도네시아와는 상호 무력을 사용한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Konfrontasi] 그러나 말레이시아 연방 참여에 대한 보르네오 주민들의 찬성도를 조사한 유엔은 대다수의 주민들이 연방 참여를 찬성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림으로써 1963년 9월 13일 마침내 싱가포르와 사바, 사라와크가 포함된 말레이시아 연방이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한편, 다른 지역들과 더불어 연방에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를 논의하던 브루나이는 석유이권에 대한 이견으로 연방에 참여치 않게 되었으며, 이어 1963년에는 싱가포르가 연방에서 탈퇴, 영연방내의 독립국으로 복귀함으로써 현재의 말레이시아가 형성되게 되었다. 


 

복합민족 사회의 형성과 1969년 인종폭동 사태 

 

말레이시아의 복합민족 사회의 형성은 16세기 초엽 식민지 시대 개막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외부로부터의 대규모 이주가 있기 전에는 말레이인과 토착 원주민들이 반도 전체에 고루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으며 일부 해안 지역에 소수의 인도인과 중국인, 인도네시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대규모 이주는 세 갈래로 이루어졌다. 


 

(가) 인도네시아인들의 유입 

 

초기단계의 이주민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식민통치의 발전과 더불어 차와 향료, 커피, 담배 등 열대작물의 수요가 급증하고 대규모 미작을 위한 농경지가 조성되자 인도네시아인들의 유입이 활발해졌다. 대부분의 인도네시아인들은 농업에 적합한 Negeri Sembilan, Selangor, Perak 등 반도 서해안의 저지대에 정착하였다. 문화와 종교, 인종적 유사성으로 인해 인도네시아인들은 말레이인 등 원주민들과 큰 갈등없이 결혼 등을 통하여 그들의 사회에 동화될 수 있었다. 


 

(나) 중국인 사회의 형성 

 

19세기 중엽에 이르자 영국 식민당국은 주석 광산에서 일할 중국인 노무자들을 대거 수입하였다. 근대사회로 발전해 가면서 주석의 다양한 쓰임새를 알게된 영국인들은 말레이 원주민들을 주석광산에 동원하였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자 이들을 대체할 노동력을 외부로부터 조달하기로 하고 당시 청조 말기 아편전쟁의 여파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중국인들을 대규모로 끌어들였다. 중국인들은 특유의 근면성을 발휘하여 주석광산의 본격적인 개발에 참여한 것은 물론 상업과 농업분야로 활동범위를 넓혀 나갔으며 이들에 의해 대규모의 사탕수수 농장과 고무농장 등 플란테이션 산업이 본격화되었다. 중국인들은 슬랑오르와 뻬락의 주석 광산지대로부터 세력을 확장하여 말레이 반도뿐만 아니라 사바와 사라와크의 상업지역에도 손을 뻗쳐 경제활동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다) 인도인의 유입 

 

1차 세계대전의 전후 복구와 같은 시기에 구미 각국에서 불붙기 시작한 자동차 산업은 말레이산 고무와 주석에 대한 폭발적 수요를 가져왔으며, 이에 따른 국가 세입의 증대로 말레이 반도에서는 철도와 항만건설 등 공공사업이 급속도로 전개되었다. 이에 따른 노동력 수급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식민당국은 인도인 노무자들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인도인들은 유입 초기 경제활동의 중심지인 뻬락북부 지역에 주로 거주하다가 고무농원의 발전에 따라 조호르, 슬랑오르, 뻬락 남부 등지로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 


 

(라) 이질적인 민족문화의 형성 

 

세 갈래로 말레이 반도에 이주한 외래인들은 (인도네시아,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의 문화를 이질적인 복합문화로 특징지우게 되었다. 즉, 인도네시아인들은 현지인들과 쉽게 동화하여 말레이 사회로 편입된 반면 중국과 인도인 이주민들은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생활양식을 포기하고 이슬람 종교와 말레이식 전통을 따르기를 거부함으로써, 말레이 사회에 동화되는 대신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수한채 말레이시아 사회의 일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로써 말레이시아는 원주민과 중국인, 인도인들이 각각의 문화적 전통과 관습, 종교, 언어 등을 유지한채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이질적 복합민족국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마) 민족간의 경제적 기능분화 

 

-주거지역의 분화: 원주민과 말레이인, 그리고 중국인, 인도인 이주자들은 그들의 종교, 문화적 행동반경에 따라 점차로 이질적인 군거지를 형성해 나갔다. 대부분의 말레이인들은 농촌지역이나 도시 근교의 비상업지역에 거주하며 전근대적인 경제활동에 종사한 반면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도시의 상업지역이나 해안의 무역지대에 자리잡았다. 또한 인도인의 대다수는 고무농원 등 열대작물을 대규모로 상업재배하는 플란테이션 지역에 집단으로 거주하였다. 

 

-경제활동의 분화 (경제적 이질성): 각기 별개의 군거지를 형성하고 있는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들은 또한 각기 다른 형태의 경제활동을 영위하여 왔다. 도시근교 농장지역이나 기타 농어촌에 거주한 말레이인들은 생산성이 낮은 전통적 부문의 농민경제와 어업에 종사한 반면 유럽인과 중국인, 그리고 인도인들은 생산성이 높은 근대적 부문의 공장, 농장, 그리고 무역회사의 기업가로 관리인으로, 고용인으로 종사하였다. 중국인과 인도인들은 근대적 부문에서 유럽인들 바로 다음의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발전으로 인한 보다 많은 혜택을 누렸고 또한 독립이후 영국인들이 철수한 다음에는 그들의 지위를 곧바로 물려받을수 있었다. 

 

반면 근대적 부문에서 말레이인들이 활발히 진출한 분야는 영방정부와 주정부의 공무원 직업부문이다. 영국 식민정부는 이 분야에 말레이인을 고용하기위해 일정한 비율을 할당하였고, 군대와 경찰부문은 민간부문에 비해 임금이 낮아 비말레이인들이 진출하기를 꺼려하였다. 반면 비말레이인이 장악하고 있는 상업과 산업분야에서 말레이인들은 사회경제적 차별을 받았다. 이는 영국과 중국계통 은행의 거래거부 (말레이인 사업가는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도소매업 및 무역업 등의 경우 조합에 가입시켜주지 않거나 민간부문에서 직장을 찾는 경우에도 친족이나 언어, 혹은 문화적 장벽과 선호에 의해 이들의 취업을 가로막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며 중국인과 인도인이 경영하는 점포들도 말레이인을 고용하려 하지 않는다. 최근까지 인도인들이 경영하는 점포에 사람이 필요하면 인도에서 사람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다.


 1969년 5월 13일 인종폭동사태 발생 

 

(1) 발단 

(2) 사건의 배경: 복잡한 인종구조 

(3) 사후처리 

-정권교체 

-국민통합을 위한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Rukunegara (인도네시아와 비교) 

-부의 공평분배를 통한 분배정의, 인종간 격차해소 위한 경제정책 시행 (NEP), 마하티르의 말레 이 딜레마 

-인종문제의 민감성 고려, 안정해치는 발언과 언행은 엄격히 법으로 금지, 의회에서도 터부 

1. 1969년 5. 13 인종폭동사태

 

(1) 사건의 성격 

 

May 13 인종폭동사태란 1969년 5월 9일의 총선에서 집권여당인 동맹당의 지지율이 현저히 떨어진 반면 비말레이계 야당들의 지지율이 크게 상승한 것을 계기로 비말레이계 주민들이 (대부분 중국인) 승리의 행진을 벌이자 이에 반발한 말레이인들이 비말레이인들을 공격함으로써 촉발된 인종폭동사태를 말한다. 이 사고로 196명의 사망자 (정부 공식통계)가 발생하였는데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비말레이계의 중국인들이었다. 

 

(2) 발단과 원인 

 

가. 1969년 총선결과 

 

인종폭동사태의 근원적 이유는 영국식민통치로부터 말미암은 복잡한 인종구성과 인종간의 갈등이었으며, 사건을 촉발한 직접적 원인은 1969년 선거에서의 동맹당의 지지율 하락에 있었다. 동맹당은 비록 정부를 구성하기에는 충분한 다수의석을 확보하였으나 득표율이 10%나 하락하였으며 이에따라 2/3의 의석을 얻지 못하였다. 특히 동맹당내의 중국계 정당인 MCA는 1964년 총선때 얻은 27석에 비해 절반이 줄어든 13석의 연방의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UMNO역시 지지율이 크게 하락한 반면 말레이계 야당인 PAS (Parti Islam Se-Malaysia: 범 말레이시아 이슬람당)와 중국계 제 1야당인 DAP (Democratic Action Party: 민주행동당)와 Gerakan (Gerakan Rakyat Malaysia)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나. 동맹당 패배의 원인과 선거운동과정 

 

동맹당의 선거패인은 선거전략의 실패와 민심의 이반에 있었다. 동맹당이 다수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말레이인의 지지가 매우 중요하였으나 과거 선거에서 보여졌던 말레이인들의 전폭적 지지와 야당의 분열에 안주하여 적극적인 선거전략을 펼치지 않았다. 반면 동맹당 정부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에 미흡하다고 판단한 말레이인들, 특히 전통적 속성이 강한 Kelantan, Trengganu, Kedah, Perlis 등 북동부 해안지역의 말레이인은 더 강한 이익대변정당을 찾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우파의 말레이정당인 PAS와 UMNO로 표가 분산되었다. 

 

반면 비말레이인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 언어와 문화를 지켜야겠다는 결의를 굳게 하여서 동맹당이 아닌 다른 인종적 정당을 적극 지지하였다. 특히 DAP와 PPP (Peoples' Progressive Party: 인민진보당)는 공히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를 주창하여 중국어와 타밀어의 공용어 채택, 이를 매개로 한 자유로운 교육의 실시를 주장하면서 이같은 국민통합정책의 성공적 사례로 스위스와 소련을 들었다. 특히 PPP는 말레이인의 특별한 지위를 비난할 정도로 극단적이었다. 

 

-동맹당의 소극적 선거전략 

-동맹당 특히 UMNO에 대한 말레이인들의 실망감 

-야당의 적극적 선거전략 

-선거구 협상을 통한 야당간의 유기적 협조 

 

다. 동맹당 체제의 약화 

 

1969년 총선의 결과는 몇가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선거를 계기로) UMNO, MCA, MIC가 각각 그들이 대표하는 인종집단의 지지를 실제적으로 유지하여야 하며, 각 인종집단 지도자들간의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유지되어져야 한다는 동맹당 체제의 전제가 무너지게 되었다. 즉, UMNO, MCA, MIC의 3개 인종연합정당인 동맹당은 UMNO의 경우 PAS의 강력한 도전, MCA의 경우 총선대패로 말미암아 그 존립 자체가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또한 말레이인중 상당수가 비말레이인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말레이계의 정치적 우위확보에 필수적 요건이었던 인종내 통합성과 단결성이 크게 약화되었다. 총선 패배후 UMNO내의 극단주의자들은 말레이인의 정치적 우위, 동맹당 설립과정의 제협정, 그리고 동맹당내의 UMNO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대첵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연방의회 선거에서 UMNO가 67명의 후보자중 51명을 당선시킨 반면 MCA의 대패로 말미암아 동맹당이 크게 타격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이제까지 MCA에 할당되던 내각의 통산산업부 장관과 재무장관직을 UMNO가 담당할 것과 Syed Nasir, Ghafar Baba 등 말레이 민족주의자들의 입각을 주장하였다. 


 

(3) 사건의 발생과 의회기능 정지 

 

-주의회 선거의 우려할만한 결과 

-특히 Selangor주 

한편 주의회 선거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연방수도인 K.L.이 위치해있으며 전통적으로 말레이인들의 아성으로 여겨지던 Selangor주의 선거결과였다. 총 14/28석을 차지하는데 그친 UMNO의 Harun bin Idris 주수상은 재집권을 위해 Gerakan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추진하였으나 Gerakan은 오히려 DAP와의 연립에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총선 결과를 자신들의 승리로 받아들인 Gerakan과 DAP의 지지자들은 K.L.에서 승리의 행진을 벌이면서 Selangor주의 주수상인 Datuk Harun Idris의 관저로 몰려가 그의 사임을 촉구함으로써 말레이인들과 충돌을 빚었다. 닷새간 전국적으로 계속된 인종간의 유혈충돌로 인해 수 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희생자의 대부분은 비말레이계 주민들이었다. 사태가 더욱 악화될 것을 우려한 국왕은 국가긴급사태를 발령하고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4) 사후처리과정 

 

5. 13 사건 다음날 국왕이 비상사태를 선포함에 따라 헌법과 의회의 기능이 정지되고 동 말레이시아에서의 선거가 연기되었다. 이에 따라 비상사태 기간동안 행정권을 담당할 NOC (National Operations Council: 국가운영회의)가 구성되었으며 의장으로 Tun Abdul Razak 부수상이 임명되었다. 위원장과 말레이계 위주의 8인 위원으로 구성된 NOC는 사실상 내각의 기능과 권한을 수행하였다. NOC의 구성원이 대부분 말레이였다는 사실은 말레이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우위를 굳게 지키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NOC는 1969년 10월 9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5. 13 사건의 주요 원인으로 말레이인의 특별한 지위에 관계되는 헌법의 "침해될 수 없는 조항"이 위협받은 탓이라고 지적하였다. 

 

NOC는 말레이인의 정치적 우위를 지속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국민들, 특히 비말레이인들에게 "침해될 수 없는 조항"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한편 집단간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분열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법제정을 추진하였다. 

-정치적 집회 및 국내외 출판물의 사전검열을 통해 말레이인들의 특별한 지위, 공용어, 시민권, 통치자들의 주권과 같은 인종간 감정을 해칠 수 있는 민감한 문제의 논의를 금지. 

-시민권 재론: 헌법 제 30조에 의하여 시민권을 획득한 사람들에게 정부의 재심을 위해 증명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는 포고령 발표. 시민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비말레이인들에게 심리적 압박. 이는 일부 과격분자들에 대한 시민권을 재고할 수도 있다는 말레이 정부의 경고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말레이인들에게는 그들의 이익을 보호받을 수 있다는 신뢰감을 주는 한편 말레이계내 극단주의를 진정시키는 의미. 

-말레이인을 위한 법 개정: 정당이나 개인이 인종적 감정을 자극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금지하는 치안법 (Sedition Act) 제정. 이를 무기로 헌법 제 152조 국어, 153조 말레이인의 특별한 지위, 제 181조 말레이 군주의 주권 및 지위에 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치안방해죄로 규정. 

또한 사회단체법 (Societies Act) 개정을 통하여 그 단체의 구성원이 치안법을 상습적으로 위반한 경우 해당단체의 등록을 취소할 수 있도록 명문화. 

-국가이념에 관한 선언 (Rukunegara) 채택: 

질서가 안정되고 인종적 감정이 다소 가라앉자 1970년 9월 라만은 라작에게 정권을 이양하였으며 라작 정부 출범과 함께 의회가 재개되었다. 의회는 곧 민주적 절차를 제약하고 그러한 제약을 통해 사실상 말레이인의 정치적 우위를 보장하는 헌법개정안을 채택하였다. 

 

◆ 국가통합을 위한 신경제정책의 시행 

 

신경제정책은 1969년 인종폭동과 경제분야에서의 종족간 불화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극약처방이 필요하다는 정부의 인식이 나은 대응조치였다. 정부공식통계에 의하면 1971년 당시 자본 소유비율은 외국인 63%, 비말레이인 34%, 말레이인 3% 미만으로 나타났다. 

-목표: NEP는 1970-1990년의 20년 사이에 말레이인들의 자본소유비율을 30%, 중국인 40%로 끌어올리는 한편 외국인 소유비율은 30%로 낮추는 것으로 되어있다. 

-시행방법: 이를 위해 (목표달성 수단) 기업소유권, 세금감면, 투자보상, 고용비율, 교육기회 등에 있어 말레이인들에게 특혜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시행과정 및 결과: NEP는 1990년 끝났다. 그러나 말레이인들의 자본소유는 약 20% 수준으로 밖에 향상되지 못하여 애초에 목표한 수준에는 훨씬 못미치는 것이었으며 새로운 문제 (인종내의 계급갈등)도 발생하였기 때문에 정부는 새로운 20개년 정책을 기획할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성과와 부작용

-사회변동

-1990년 NEP 잇는 NDP와 Vision 2020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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