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설교
제목 /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본문 / 마태복음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설교 제목이 “‘더’ 얻을 것인가, ‘다’ 빼앗길 것인가”입니다. 설교 제목이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는 줄을 잘 서야 합니다. 더 얻는 쪽에 설 것인지, 아니면 다 빼앗기는 쪽에 설 것인지 잘 선택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아는 비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귀중한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만,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자기의 소유를 맡겼습니다. 종의 재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여기서 한 달란트의 가치가 매우 큽니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런데 6천 데나리온이라면,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수억 원이 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굉장한 배려입니다. 이것은 주인이 마음먹고 종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물론 주인이 그냥 떠날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자신의 소유를 반드시 종에게 맡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주인은 자신의 소유를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긴 것으로 보아 주인이 상당히 부자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겼습니다.
이 비유를 전체적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인이 돈을 더 벌기 위해, 돈을 모으기 위해 종들에게 맡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서 어떻게 했는가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더 남긴 종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한 달란트를 남긴 사람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분위기를 보면, 주인은 더 많은 것을 끌어 모으기 위해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오히려 종들을 배려하고, 종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만약 돈을 끌어 모으는 것이 주인의 목표였다면, 주인은 돌아와서 종들에게 맡긴 것을 다 거두어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긴 것은 주인 자신의 유익보다 종들을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29절에 보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있는 자’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기본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마어마한 것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어마어마한 잠재력, 가능성(possibility)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각각 재능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주도 많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지혜와 창의력이 무궁무진합니다. 우리 안에 매장되어있습니다.
그것을 얼마나 활용하고 개발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어마어마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물질도 주시고, 직업도 주시고, 열정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는 특별히 믿음을 주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작은 것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마당을 깔아놓으시고, “내가 준 것으로 무엇이든 해봐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껏 뛸 수 있도록 마당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나오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 받은 이후에 우리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 안에서,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지원 속에서 풍성한 구원의 세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옛날의 저주의 삶이 끝나고, 죄악으로 묶였던 노예 된 삶에서 자유를 얻어 성령 안에서 자유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죄의 권세를 끊고, 악습을 끊고,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들이 마음껏 꽃피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의 세계 안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구원은 잔치입니다. 풍성하고 넘치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넘치도록 더하여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맡겨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무엇이든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무엇이든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신 후에 우리를 간섭하시기보다 우리가 마음껏 해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마음껏 활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14~15절에 보면,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기의 소유를 맡긴 후,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기의 소유를 맡긴 후에 그것을 어떻게 하라고 설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자기의 소유를 종들에게 맡겨놓고 주인은 떠났습니다. 멋진 주인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습니다.
이제 공은 종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맡겼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신뢰를 의미합니다. 전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사실 주인은 모험을 한 것입니다. 종들에게 자신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맡겼다는 것은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모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주인이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면, 자신의 재산을 금리가 좋은 곳에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이자를 많이 주는 곳에 원금을 맡기고 떠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종들에게 맡겼다는 것은 종들을 신뢰했음을 의미합니다. 주인은 실패할 수도 있음에도 종들을 신뢰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길 때, 종들이 잘못하여 돈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100% 성공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인이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겼다는 것은 종들을 신뢰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대로 해보라는 의미입니다. 종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만일 실패하더라도 그것을 책임지겠다는 주인의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맡길 때에는 자신이 맡긴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자신이 종들에게 맡긴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기고 싶었습니다.
주인은 대단한 모험을 한 것입니다. 위험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종들을 신뢰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마음껏 해보라고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보답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남기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불려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신앙의 삶은 우리가 받은 것을 불려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는 열 달란트가 되고, 열 달란트는 스무 달란트가 되어야 합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네 달란트로 불려야 하고, 네 달란트 받은 사람은 여덟 달란트가 되게 해야 합니다. 받은 것을 늘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이 줄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비유를 통해 풍성한 이야기가 여러분의 인생에서 흘러나오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제와 다른 이야기를 써가야 합니다. 주인이 본래 원하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 네가 멋지게 해보라’는 것입니다. 선용(善用)해보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주인이 와서 재산을 늘린 사람들에게 칭찬합니다. 그리고 주인은 재산을 늘린 사람에게 재산을 더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산을 늘리는 것이 주인이 의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늘린 종들을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보너스도 주었습니다.
왜 주인은 재산을 늘리는 것을 원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우리가 사장(死藏)시켜버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선용하고, 투자하고, 배가시켜서 우리를 통해 나눌 것이 있는 인생을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목적은 그것을 늘려서 세상을 부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을 더 풍성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쪼그라들어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줄 것도 없고, 다른 사람과 나눌 것도 없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빼앗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늘려서 복과 은혜와 풍성함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면, 누가 나누겠습니까. 나눌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업이 잘되고, 우리가 하는 일이 갈수록 풍성하게 되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아야 합니다.
늘리지 않으면, 나누어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을 하나님의 종들에게 충분히 주셔서 세상을 섬기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구원하고, 아름답고 풍성하게 바꾸어나가는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활용하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려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배가시켜서 주변 사람들을 살려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을 불려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말씀을 불려야 합니다. 은혜를 불려야 합니다. 받은 은혜와 깨달은 것을 불려서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불려서 이 민족을 살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을 가지고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갈수록 늘어나야 합니다. 갈수록 더욱 쓰임 받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살다 보면, 여기저기서 나를 불러야 합니다. 내가 쓰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내가 늘렸더니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쓰임 받는 것입니다. 나의 간증을 듣고 싶어 하고, 내가 깨달은 것은 나누기 원하고, 내가 받은 은혜를 얻기 원하여 나를 불러주는 곳이 많아야 합니다. 이렇게 쓰임 받으면, 내 인생은 배가 됩니다. 최대화(maximize)됩니다.
명성과 칭송, 사람들의 인정(認定)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내가 가는 곳마다 내가 쓰임 받고, 내가 가는 곳마다 불이 일어나고, 내가 가는 곳마다 역사가 일어나면, 그 인생은 배가(倍加)의 인생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기는 인생입니다.
받은 것을 꿀꺽 삼켜버리고, 본전치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늘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주인은 기뻐서 더 주었습니다. 더하여 더 남겨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한 일을 위해 쓰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불리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했습니다. 여기서 바로 가서 장사했다는 것을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투자했다는 의미입니다.
투자는 언제나 위험합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위험이 느껴집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했다는 것은 모험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종입니다. 그러니 장사해봤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주인이 맡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그냥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가서 그것을 장사했습니다. 그들은 위험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투자했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어두었다가 나중에 주인이 왔을 때에 그것을 내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서 장사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가만히 있는 것도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둘 다 위험합니다. 그런데 해석에 차이가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장사하는 것이 위험하지만, 그것을 기회라고 여겼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장사하는 것이 위험하니까 그런 것은 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어느 쪽이든 위험합니다.
가서 장사하다가 잃어버리는 위험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만히 있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위험을 선택할 것인가, 가서 장사하다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위험이 있음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본문은 어느 쪽을 지지합니까? 둘 다 위험하지만, 성경은 투자하는 쪽, 시도하는 쪽을 지지합니다. 성경에서는 실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모험을 시도하는 쪽을 지지합니다. 본문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위험한 일임을 말합니다.
인생은 위험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안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은 안 됩니다. 죽을 때에 죽더라도 시도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메시지 속에 깔린 중요한 주제(theme)입니다.
지금 모든 것이 힘들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업이든 목회든 모든 일이 힘듭니다. 어느 직종이든 힘들지 않다고 일하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영역의 일이든 힘들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일이 쉬웠던 때가 언제입니까? 쉬운 일이 있습니까?
남의 일은 쉬워 보입니다. 그런데 쉬운 일은 없습니다. 다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안 될 이유를 찾으면, 안 될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으로부터 신랄하게 책망 받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혹독하게 책망 받는 것을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심하다 싶을 정도로 혹독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있는 것을 빼앗아버리고,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했습니다. 조금의 자비도 없습니다. 아주 심각하게 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혹독한 심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은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했습니다. 이 종은 한 달란트를 받아 한 달란트를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었습니다. 주인이 준 한 달란트를 그대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상종하지 못할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주인에게 받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돌려주었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현상유지를 한 것입니다. 현상유지를 한 것을 어떻게 보면 잘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관점을 달랐습니다. 주인이 보기에 이 사람은 가장 나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상유지는 어떤 면에서 보면 악한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에게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마이너스가 아닙니다.
그런데 주인이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주인에게 받았던 한 달란트를 다 써버린 것도 아닙니다. 한 달란트를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종에게 충격적인 선포를 했습니다. 주인에게서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었을 뿐인데, 주인은 종에게 악하고 게으르다고 책망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왜 악합니까? 주인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두었기 때문입니다.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생각하기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은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이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큰 잘못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실패를 두려워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주인은 따지고 있습니다. 주인은 종을 신뢰하여 그에게 기회를 주고 그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는데, 그는 몸을 사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생각하기에는 종이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최악의 경우입니다. 최소한 그렇게 하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는 것이야말로 주인이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을 생각이었다면, 주인이 직접 땅에 묻었을 것입니다. 주인이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을 줄 몰라서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겠습니까.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을 생각이었다면, 주인은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 27절에 보면, 주인은 한 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어디에 맡겼다면, 이자라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주인은 한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이 최소한의 시도도 하지 않은 것을 책망했습니다. 이처럼 주인이 맡긴 것을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고만고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과 사역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무난한 것이 최상(最上)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의 결론은 둘 중 하나입니다. 남길 것인가, 아니면 빼앗길 것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가만히 있을 것인가 뭔가 할 것인가, 안전이냐 모험이냐, 주인으로부터 더 얻을 것인가 아니면 다 빼앗길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장사했습니다. 이것은 투자했다는 의미입니다. 투자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져야 모험할 수 있습니다. 모험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험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위험한 일을 시도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달란트 비유는 우리의 믿음을 체크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믿음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주인은 종을 믿고 달란트를 맡겼고, 위험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믿음으로 시도해야 합니다. 모험해야 합니다. 도전해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시기 원하십니다. 믿음의 삶은 무엇일까요? 믿음의 삶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려면,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데,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쓸데없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 필요합니까? 위험한 일을 시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알 수 없는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이 엄청난 돈을 가지고 바로 가서 장사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은 모험입니다. 잘못하면 다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시도하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안전한 삶을 떠났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것을 맡기셔도,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빼앗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빼앗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쪼그라드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잠재력, 가능성 등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엄청난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의 기대는 엄청납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오리발을 내미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삶의 조건과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안전을 찾게 됩니다.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별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난하게 살아가려 합니다. 요령껏 적당히 살아가려 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본문의 비유에 의하면, 우리 인생은 기회입니다. 우리의 삶은 기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자체가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마당을 깔아주시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시며, 살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불려가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은혜를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혼자 가지고 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적은 것을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 일평생 우리가 만질 수 없는 금액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맡기셨습니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불리고 남겨야 합니다. 줄이면 안 됩니다. 쪼그라들면 안 됩니다. 세월을 보내며 그것을 땅에 묻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머리도 가만히 두면 안 됩니다. 머리도 자꾸 써야 합니다. 두뇌는 쓰면 쓸수록 좋아집니다. 자꾸 쓰면 두뇌가 발달합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써야 은사가 계발됩니다. 쓰지 않으면 은사는 없어집니다.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면, 계속 가르쳐보세요.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쓸수록 능력이 더 나타납니다. 쓰지 않으면 녹슬어 없어집니다.
하다 보면, 무엇이든지 어렵습니다. 시도하다 보면,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시도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옵니다.
가만히 있을 때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인데, 하다 보니 그곳에서 또 다른 기회의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되든 되지 않든, 어렵든 쉽든 해보아야 그곳에서 의외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인의 의도는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험을 두려워합니다. 어려움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마음이 그러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괜히 무엇인가 하다가 한 달란트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인에 대해 곡해(曲解)하고, 자기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의식의 차이로 인해 일어난 일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무엇이든 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무엇이든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식의 차이가 인생을 결정합니다. 능력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지능지수도 비슷비슷합니다. 능력의 차이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의 차이가 인생을 결정합니다. 의식의 차이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이었을까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그의 의식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하지 않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을 잘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땅을 파서 한 달란트를 묻어버렸습니다.
능력의 차이는 배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식의 차이는 백 배의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 장애물을 보지 말고, 기회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하는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기회보다 장애물을 더 크게 보았습니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면 모든 것이 문제입니다. 장애물이 많습니다. 그러나 장애물을 장애물로 보는 것에 그치지 말고, 기회로 보려고 훈련해보세요. 장애물은 기회이고, 문제에는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장애물 때문에 모든 것을 멈춰버립니다. 사람들이 얼어붙습니다. 그런데 장애물이 없는 곳이 있습니까. 문제가 없는 곳이 있습니까. 어디든지 문제는 있습니다. 어디든지 장애물은 있습니다.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기회가 됩니다. 일사천리로 쉬운 것은 기회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쉬운데, 그것이 어떻게 기회가 되겠습니까. 어려우니까 해볼 만합니다. 어려움이 있고, 문제가 있고, 장애물이 있으니까 해볼 만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태도와 각도와 의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안 된다 하고, 모든 사람이 문제와 장애물이 있어서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곳에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우리에게 그 일을 맡기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쉬운 길을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어려운 길을 골라 가면, 그곳에 기회가 많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장사하다가 어려움이 생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장사하다가 손해를 보거나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주인이 그 소식을 들었다면, 주인은 그들에게 어떻게 했을까요? 주인은 그들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주인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맡기고, 종들이 가서 무엇이든 해보려고 애쓰다가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주인이 들으면, 주인은 그들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제가 주인이라면, 종들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재산을 끌어 모으기 위해 종들에게 돈을 맡긴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종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종들이 잘되라고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긴 것입니다. 그러면 종들이 힘들어할 때에 주인은 종들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결코 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종들에게 기회를 더 많이 주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으로 우리가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도와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땅에 묻어두었는데, 어떻게 도와주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려고 애쓸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아무나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인해 염려하는 사람은 계속 염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려고 열심히 애쓰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공급해주십니다. 먹여주십니다. 책임져주십니다. 모자라면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인은 1차적으로 종들이 시도하기를 원했습니다. 주인은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것을 종들이 품고 있거나 땅에 묻거나 가만히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실패하거나 성공하는 것은 다음의 문제입니다. 주인은 종들이 가만히 있지 말고, 일단 시도하기를 원했습니다.
주인은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삶이 게으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선택에는 반드시 위험이 따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다가 무엇인가 선택한다면, 그 선택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면 선택한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게으른 삶, 악한 삶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과감한 결단과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일이 벌어집니다. 위험하지만 역사(役事)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관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땅에 묻어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실 일이 없는데, 무엇을 도와주시겠습니까.
누가 기도합니까? 일하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날마다 먹고 노는 사람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누가 강력하게 기도할까요? 일을 크게 벌여놓은 사람이 강력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는 순간, 기도는 뜨거워집니다.
그런 사람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기도할 수 없습니다. 내일 아침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심각한 일이 진행되고 있으니까 기도할 때에도 몸이 앞으로 기울어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할 것이 없는 사람은 등을 의자에 기댄 채 기도하다가 졸기도 합니다. 기도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기도할 수 있습니까?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 시간에 조는 분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조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뭔가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불이 붙는 기도제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서 시도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기도해도 기도가 맹숭맹숭합니다. 긴장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에 좁니다.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그냥 있지 마세요. 무엇인가 시도하세요.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사용하세요. 활용하세요. 머리를 쓰세요. “하나님, 아이디어를 주세요.”라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창의력이 살아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사업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고 싶습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해주십시오. 창의력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세요. 일을 벌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다보면 해본 사람만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꾸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제가 부임한 후, 특별새벽기도를 여러 번 했습니다. 몇 주간에 걸쳐 특별새벽기도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몇 주간에 걸쳐 특별새벽기도를 인도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설교 제목과 본문을 미리 정해놓고,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별새벽기도 기간의 핵심 주제가 정해져야 설교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평소의 스케줄을 다 소화하면서 매일 매일 설교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특별새벽기도 기간에는 부흥회를 인도하듯이 설교해야 합니다. 너저분하게 설교한다면, 누가 오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설교를 잘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제가 호주에서 목회하면서 훈련되어있어서 어렵지는 않습니다. 저는 호주에서 목회하는 동안 외부 강사를 교회에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제가 다 했습니다. ‘내 양은 내가 먹인다’라는 생각으로 제가 다 했습니다.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이 최고로 맛있습니다. 가끔 외식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때로는 입만 버렸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부 강사를 초청하지 않고, 제가 다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제 설교만 들었습니다.
물론 외부 강사를 초청하면, 저는 편해져서 좋습니다. 저도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 했기 때문에 힘든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다 했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다 보니 나중에는 힘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시간을 주고, 주제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무엇이든지 하세요. 일단 많이 하세요. 저는 쉬는 시간에 글을 씁니다. 글이 되든 말든 쉬는 시간마다 계속 쓰다 보니 매주 수영로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매주 글을 쓰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매주 설교 준비하고, 스케줄이 많은데도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글을 썼기 때문에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육전도사 시절부터 틈만 나면 글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오래되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뭐합니까? 노는 손으로 글 쓰고, 쉬는 시간에 생각하고, 쉬더라도 책을 가지고 놀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해보면, 자신에게 있는 재능을 발견하고, 재능이 살아납니다.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으면, 선택해보고, 그 일에 도전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로 다 해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경험이 생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20여 년 전, 수영로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에 1주일 동안 일곱 개의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소그룹 사역, 제자훈련에 있어서 잔뼈가 굵어졌습니다. 지금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꾸 해보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일단 일해야 합니다. 모험해야 합니다.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일하지 않는 사람은 일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일도 합니다.
힘에 부치도록 일하다 보니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하나님, 도와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능력 주세요. 역사해주세요.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는 죽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서울기도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부산에 있을 때에는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사람이 아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가면, 마치 개척 교회의 목사가 된 기분입니다. 기도모임 장소가 크지 않은 곳인데도 ‘오늘 이곳이 가득 찰까?’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채워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서울기도모임이 저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기도모임에 참석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귀중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서울기도모임에 가면, 제가 굉장히 친절해집니다.
부산에서는 성도들과 대화할 수도 없고, 성도들도 제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나면, 저는 들어가 버립니다.
그런데 서울기도모임에서는 그렇게 하면 큰일 날 것 같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인사합니다. 서울기도모임은 저를 겸손하게 만들고, 저로 하여금 한 영혼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서울기도모임을 통해 제 성품을 다듬어 가십니다.
화요일 저녁에 서울에 도착하면, 저는 저녁도 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여, 이곳을 채워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일을 벌이세요. 입을 크게 벌리세요. “하나님, 이번 일이 잘되어야 합니다. 잘되지 않으면, 저는 죽습니다.”라고 기도하는 지경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기도에 저절로 불이 붙도록 해야 합니다.
엘리야가 그냥 기도했겠습니까. 엘리야는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고, 머리는 양쪽 무릎 사이에 집어넣고 기도했습니다. 엘리야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세상을 보면 소망이 없으니까, 환경을 보면 불안하니까 머리를 양쪽 무릎 사이에 집어넣고 기도한 것입니다.
중언부언하며 기도하다가 끝내지 마세요. 피 끓는 시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할 때에도 맹숭맹숭합니다. 맹숭맹숭하게 살다가 인생이 끝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재다가 인생을 끝내지 마세요.
우리에게 내일이라는 시간은 없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고, 오늘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내 삶의 모든 것을 걸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금방 옵니다.
본문에 보면, 주인은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와서 결산했습니다. 그 날은 금방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활용하세요. 활용하시고 불리세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더 늘려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로 인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복음 안에서 문화명령을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의 한가운데로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야말로 팔을 걷어붙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축복과 자원과 재능과 가능성을 온 세상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바꾸어놓는 일에 우리를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누구에게 맡기셨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소극적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모험하셔야 합니다. 용기를 내세요. 부지런해야 합니다. 성실해야 합니다.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게으르면 안 됩니다. 잠을 줄이세요. 걸을 때에도 빨리빨리 걸으세요. 가만히 있지 마세요. 활발하게 적극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을 던지세요.
죽을 각오로 해보세요.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멋지게 쓰십니다. 그러므로 몸을 아끼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엄청난 것을 사장(死藏)시키지 마세요.
저는 원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계속 설교하다 보니 이렇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 앞에 서면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지금도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제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을 많이 하다 보니 이만큼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제 삶을 드리고, 말을 많이 하다 보니 이만큼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영로교회에 부임하여 3년여의 시간 동안 설교를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몸을 아끼지 않고, 계속 드리려고 합니다. 언제라도 후회함이 없는 순간순간을 만들어가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가진 것 이상으로 저를 쓰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저를 어떻게 쓰실지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지금보다 더 쓰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몸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면, 언제든지 던질 용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여한이 없이 주님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주인은 종들을 신뢰하고, 종들에게 많은 것을 맡겼습니다. 종들에 대한 주인의 배려가 눈물겹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엄청난 것을 맡겼습니다.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 교회에 중등부, 고등부, 청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깨어있는 한 사람, 자신의 삶에 모험을 거는 한 사람, 믿음으로 승부를 거는 한 사람, 몸을 아끼지 않고 불사르는 한 사람만 있으면, 그 사람이 역사(歷史)를 바꿉니다.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땅에 묻어둔다면, 그런 사람이 백 명, 만 명 있다 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작은 것을 받았다 할지라도 거기에 모든 것을 걸면,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가 덧붙여지면, 감당할 수 없는 역사가 여러분에게 일어날 줄 믿습니다.
본문 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받으시겠습니까? 다 빼앗기겠습니까? 시간이 갈수록 더욱 풍족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인은 최종적으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긴 종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맡겼을 뿐 아니라,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구원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지만, 주님을 위해 삶을 드리며, 주님께서 맡기신 달란트를 남겼을 때에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면, 시너지(synergy) 효과가 일어납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니 얼마나 신바람 나겠습니까. 더 놀랍고 강력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삶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얼마나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겠습니까. 주인이 이 종을 그냥 두겠습니까. 주인이 누리는 것을 함께 누리자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주님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과는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늘 부정적인 말만 하고, 남을 욕하고, 남을 탓하고, 억지 논리로 무장되어있는 사람과는 말씀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최선을 다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여 남기는 인생이 되면, 갈수록 즐거움이 넘칠 것입니다. 신바람 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밀어주실 것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잘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역하다 보면, 잘되면 잘되다 보니 더 잘되는 시너지 효과가 일어납니다. 안 되면 더 안 되어 곤두박질칩니다. 잘되면 더욱 잘되어 신바람 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쪼그라드는 사람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갈수록 기대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계속 진행형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기막힌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즐거움에 동참하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위험한 일을 시도하셨습니다. 우리를 믿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마음껏 사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충분히 실력발휘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실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는 89세까지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80세에 불후의 고전 〈파우스트(Faust)〉를 탈고했습니다.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는 90세까지 20세기를 대표하는 지휘자로 살았습니다. 피카소(Pablo Picasso)는 92세까지 창작활동을 왕성하게 했습니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은 92세의 나이에 발명에 몰두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여러분의 인생이 축소되지 않고, 확장되기를 축원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모험을 즐기세요. 나이를 탓하지 마세요.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마세요. 죽을 때까지 모험하세요. 죽을 때까지 피가 끓게 하세요.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뇌가 회전하는 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꿈꾸세요. 시도하세요. 도전하세요. 인생은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세요. 갈수록 부요해지기를 원합니다. 갈수록 풍성해지기를 원합니다. 갈수록 최대화(maximize)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책임지는 인생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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