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복음  십자가 복음을 전하자

 

오늘날 교회에서 외면 당하는 십자가 복음
 
 
성경은 십자가의 도를 기록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예수님도 십자가의 도를 말씀 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을 것이니라(마16;24)
 
 
사도 바울도 십자가의 도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가로 작정 하였음이라(고전2;2)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두 말할 것 없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믿음의 결국은 영혼 구원입니다(벧전1;9)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영혼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는
 
 
예수를 주로 믿은 자가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고(롬8;17)
 
좁은문으로 통과 하여야(마7;13)구원을 얻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당시 따르던 제자들에
 
직접 말씀 하시기를
 
예수를 주여 주여 불렀었어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2)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
 
 
위의 사람들이 분명히 예수를 믿었었고 예수 이름으로
 
여러가지 사역을 했는데도 왜 주님은 저들을 모른다고 하실까요?
 
 
그이유는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상태에서 사역을 했거나
 
아니면 십자가의 도를 누가 전해 주었어도 믿지않고 외면 하면서
 
자기 열심으로 사명을 감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십자가의 도가 교회안에서 외면을 당하고
 
믿는 자들로 부터 버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소수의 종들이 외치기를
 
예수는 그냥 지식적인 동의로 마음에 믿기만 해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 증거가 그 사람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요일5;10)

 
 
예수를 믿었으면 자기 안에 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는계명을 지켜야 하고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도 죄를 지으면 죄의종으로(롬6;16)사망에 이릅니다
 
 
어떤이는 말하기를
 
사람이 어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요일3;9)
 
예수를 주로 영접했다면 그는 하나님께로 난 자입니다(요1;13)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니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요일3;9)

 
죄를 짓지 아니하는 비결이 바로 십자가의 도 입니다

 십자가의 도 안에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불가능 하니
 
믿는 자가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에
 
죄 없으신 주님이 죄 있는 그 사람의 내면에 들어가셔서 능력으로 함께 하심으로
 
계명도 지키게 되고 죄도 안짓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십자가를 지고 죽지 아니하고
 
그냥 지식으로 믿고 동의 하는 상태에서는
 
주님은 믿는 자 안으로 들어오사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이 것이 십자가의 도의 원리입니다
 
 
죄인의 눈에 감추어진 십자가의 도

 
죄인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십자가의 도가 성경에는 이미 기록되어 있었으나
 
초대교회 이후로 시대마다 믿는 자들의 눈에 감취어져 있다가
 
 
하나님의 뜻을 쫒아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한 종을 통하여 십자가의 도를 열어 깨닫게 하시고
 
오랜 기간 하나님의 연단을 거쳐 완성된 진리로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지 않고서는 주님을 만날 수도 없고
 
죄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믿는 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십자가의 도의 진리를 외치니
 
오늘날 교회들은 믿으면 구원이지!! 무슨소리야 하며 듣기 싫어합니다
 
 
교회는 듣기 싫어하며 귀를 막아도
 
진리는 전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듣던지 아니듣던지 십자가의 진리를 외치는 것입니다(딤후4;2)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를 믿는 형제여러분 천국을 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도를 깨달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주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롬6;6)
 
예수를 주로 믿는자는 이 세상에 속하여 살면 안됩니다
 
 
십자가의 도의 기본은
 
이 세상의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버리세요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요일2;15)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면 간음하는 여자입니다(약4;4)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되어 지옥갑니다..라고 외치면서
 
 
현재 교회에서 가르치고 전하고 있는 복음은 잘못되었습니다
 
회개하십시요..라고 외치고
 
 
또 십자가의 도 외에는 구원이 없으니
 
만약 회개치 않으면 절대 천국은 못간다...라고 인터넷에서 설교나 글로서 전하니
 
 
초대교회 당시
 
스데반이 둘러선 무리들을 향하여 진리의 복음을 외칠때에
 
저들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저들이 마음에 찔려 저(스데반)를 향하여 이를 갈면서(행7;54)
 
저희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듯이(행7;59)
 
 
오늘날도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소수의 종들이
 
 
교회안에서 율법의 바리새인 같이 종교 생할에 머물고 있는 자들과
 
예수를 믿으나
 
무엇이 죄인지도 모르고 죄가운데 살고 있는 자들과
 
마귀에게 속한 이 세상을 쫒아 사는 무늬만 예수뿐인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은 마음에 짓는 것임에도 알지 못하고
 
예수 이름으로
 
교회를 크게짓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부 목사들과
 
 
예수믿고 이 땅에서도 복을받고
 
죽은 후에 천국도 가자 하는 세상과 간음하는 교인들에게는
 
십자가의 진리는 꺼리낌이 되어
 
 
주님이 십자가의 피를 흘려 세운교회로 부터
 
십자가의 도는 문전 박대와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심이 심히 가까운 이때에
 
교회는 마땅히
 
허리에 띠를 띄고 등불을 켜고 주님을 사모함으로 기다려야 함에도(눅12;35)
 
 
불구하고

이 세상의 쾌락과 안일함에 취하여 살고있는 목회 자들과 교인들에게는
 
십자가의 도는 눈에 가시처럼 여겨져
 
예수 믿는 자로 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단 하나 뿐입니다
 
죄인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진리는
 
바로 십자가 복음 입니다(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그 어떤 복음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복음는
 
예수믿고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땅에서 사는 날동안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질때에
 
 
주님이 그 사람의 내면에 들어오시어 그 분의 능력으로
 
능히 세상(마귀)를 이기게 하시고
 
또 죄를 그치게 되어 (점.흠)이 없는 자가 되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천국으로 들려 올라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웠음을 여러 징조로 알 수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마24;40)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기회를 놓치지 마시십시요
 
지금 기회 있을 때에 십자가의 도를 귀를 막고 외면하고 버리면
 
그 날에 주님으로 부터 버려둠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사람들에게는 외면 당할 수 있으나 별로 큰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장차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하면 어찌합니까?

 
 
기회는 항상 있지 아니합니다
 
오늘도 하루는 지나 가는군요
 
십자가의 복음 안으로 들어오시어 천국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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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올바른 신분 (Correct identity of Saints)

고린도전서 7:18-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자녀를 삼아주신 참뜻을 알게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즉 유대인이 기독교인으로, 그리고 이방인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게 되었을 때 야기된 신분의 문제에 대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곧 비기독교인이 기독굥ㄴ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자신에게 일어난 신분적 변화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는 우리들에게 부르심의 참뜻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불러 주셨을 때,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갖고 있던 세상의 신분을 과감하게 던져버리고 전혀 다른 새로운 가야하는지 아니면 어떤 자세로 기독교인이 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여 오늘의 제목은 "성도의 올바른 신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한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큰 깨달음으로 은혜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사도는 이때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할례를 받은 유대인도 있었고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많이 들어왔으며 자유인도 복음을 받고 교회에 들어왔으며, 종들도 복음을 받고 교회에 많이 들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가지 신분이 다른 분들이 신자가되어 교회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마도 서로 무엇인가 어색한 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다같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예수를 믿고 구원 얻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신분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1. 할례를 받았던지 안받았던지 동일하다는 것(18-19)

즉, 유대인으로 할례를 받았던 사람이나 이방인으로 할례를 안받은 사람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옛날 아브라함때부터 시작한 것인데 아브라함의 자손이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표로써 할례를 행했습니다.

유대인은 남자로서 출행후 8일만에 행하였으며 이방인 중에서 돈을 주고 사온 사람이나 또 개종한 사람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은 분들은 자기들은 선민이라고 우월감을 가지고 뽐내며 살아왔고, 반면에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천시되어 온 경향이 있는데 이 관습이 그대로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자는 할례 받았다고 우월할 것도 없고, 할례를 못받았다고 비굴할 것도 없고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2. 종이든지 자유자든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20-24)

그 당시 헬라의 정부나 로마의 정부는 종의 제도를 정해왔기 때문에 종이 많았습니다. 종들이 종으로 있으면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 자유자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이들은 다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죄에서 저들의 영혼을 꼭 같이 해방시켜 받았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의 종도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의 자유자가 되었고 육의 자유자도 물론 심령상 자유자임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종이니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의 종도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할 그리스도의 종이요, 자유자도 역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그리스도의 종이니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물론 육의 종된 사람이 남에게 매인바 되어 육신의 불편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을 섬기는 것 뿐이라는 직업의식을 가질 때 그 삶의 그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요 자유자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자유를 옳게 사용해 나갈때 그분은 그분대로의 삶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들어와 사는 사람에게는 차별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아무리 직업이 천차만별이라 하더라도 그 삶의 목적이 즉 직업을 지키는 목적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삶기위한 것이라 할 때 각기의 삶은 다같은 의의를 가집니다. T.V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 만개의 부속품을 끼우고 주부들은 셀수도 없는 자질구레한 집안 일로 하루 수 십리를 종종걸음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될 때 그 삶은 다 의의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이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며 사는 일이라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할례 받은자나, 무할례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양반이나, 상놈이나, 귀족이나, 천민이나, 부자나, 가난뱅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막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동일합니다.

여기에서 기독교는 인류에게 세가지 귀중한 진리(교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다는 교훈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그 사람의 신분의 고하, 직업의 귀천, 계급의 차별이 각각 있지만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다 같으며 인간적으로 차별이 없으며 다 같은 형제요, 자매요, 부모요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자들은 계급을 타파하고 계급없는 사회를 만든다고 야단하지만 그들은 입으로만 동무로서 통일했을 뿐 그것도 김일성일가에게는 동지라 부르고 사실상 그 당 조직 중에는 계급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안에 들어오면 물론 목사, 장로, 집사가 있지만 이것은 봉사직의 직분으로 구별하였을 뿐이요 인간적인 면에서나 주를 섬기는 면에서 조금도 차별이 없습니다.

목사라고, 장로라고 어느 교인 한분을 상대할 때 다 존중히 여깁니다. 조금도 하대하지 않습니다. 교회야 말로다 같은 형제입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진분도 교회에 와서는 다 같아 집니다. 오늘 민주의 국가의 법 앞에는 만민 평등이라는 기독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평등주의의 정신을 기독교는 인류에게 제시했습니다.

2) 기독교는 보잘것없는 인간을 고귀한 인간으로, 인간 가치를 높이는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가치를 높였고

② 인간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심으로 인간의 가치를 높였고

③ 옛 인간이 새로워짐으로 인간 가치가 높아졌습니다.

④ 그뿐아니라 정신과, 인격과 생활의 품위를 높여서 인간 가치를 높였습니다.

예를 들면, 노예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도 그리스도 앞에서 나오면 자유인과 동등하게 취급하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교회에 나오면 형제, 자매님, 선생님, 권찰님, 집사님이라고 불리우니 님자 벼슬을 다 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람을 고귀하게 만듭니다.

3) 기독교는 인간의 도리를 보여줍니다.

19절,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

23절, "너희는 값으로 산것이니 사람들의 종이되지 말라"

24절,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이 말은 다 하나님 중심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여 살라고 하는 공통적인 뜻이 있습니다.

인간의 도리는 인간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오늘날의 무신론적 인본주의 자들은 인간을 위한 인간의 우대를 부르짖는데 그렇게 되는 인간 속에서 나오는 본능의 작용이나 욕망을 억제할 수 없어서 마음대로의 향락적 죄와 기타 결과적으로 인도주의에서 짐승주의로 전락될 것입니다. 오직 인간은 먼저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영광을 전제로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데서 인간의 도리가 바로 수행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에는 인간의 도리가 전부 명시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에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우상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고 안식일을 잘 지켜 하나님께 예배 드리라는 계명들로써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도리입니다.
 

다음은 인간을 향한 인간의 도리입니다.

① 부모를 공경하고

②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③ 형제를 조금도 해하지 말고

④ 살인, 간음, 도적, 거짓증거, 탐내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듯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인간들의 자기 도리가 무엇인가를 바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교훈을 잘 지키고 살때 개인이나 국가나 온 세상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아름답게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진리의 교훈대로 만족하게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두가 다 성도입니다. 성도란 하늘나라 즉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대로 행해야 하고,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기에 고난도 함께 받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과 같이 우리 성도들은 부르심을 받은 위치에서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을 다하는 하나님의 올바른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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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적 경험에서 본 혼전 성관계 
 
 

인디애나에 Grace Theological Seminary라는 곳이 있다.  독일계 재세례파의 후예들이지만 칼빈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신학적으로 세대주의를 지향하는 독특한 교단이었다.  아카데미 한 것에 치중하기 보다는 철저하게 현장중심의 실천신학 중심의 신학이었고 교수들은 너무나 인격적이었으며 학생을 사랑하는 태도에 있어서 탁월하였다.  이곳에서 통역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 혼전 성관계에 대한 강의가 인상이 깊어 소개하고자 한다.

성경에는 혼전 성관계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다룬 곳이 거의 없다. 그러나 간음을 혼인의 언약 밖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성적 행위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혼전 성관계 역시 명백한 간음 행위로 간주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혼전 성관계를 그렇게 나쁜 행위로 보는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특히 결혼을 앞둔 사이라면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전자의 생각은 사랑 앞에서는 절대적인 예외가 없다고 보는데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현대 신학은 대체적으로 사랑을 하나님을 본질로 설명하면서 정의의 하나님을 부차적으로 만드는데 개혁주의 신학은 한 번도 정의의 하나님 혹은 법의 하나님을 부차적으로 다룬 적이 없다.

Soto 교수는 결혼 상담을 15년간 해 온, 결혼 상담의 베테랑이었다. 그에게 혼인 생활에 문제가 있어서 이혼을 염두에 두고 상담하기 위해 온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오면 Soto 교수는 제일 처음에 이 질문을 똑 같이 던졌다고 하는데, 놀라웁게 15년 동안 상담을 해온 모든 사람들의 대답이 한결같이 Yes였다. 그 질문은 바로 혼인 전에 성관계를 한 적이 있는가였다.

이 상담 결과에 근거하여 Soto 교수는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하였다. 1. 혼전 성관계는 상대방의 신뢰를 깨뜨린다.  2.  혼전 성관계로 깨드려진 신뢰를 잘 회복이 되지 않는다. 3. 부부간의 성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의 만족은 서로간의 신뢰감에 의해서 증진되기 때문이다. 성생활의 불만족으로 자연스럽게 부부간의 불화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Soto 교수의 상담 결과는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더 맞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서로간의 사랑의 행위는 일시적으로 육체적인 기쁨을 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것이 언약 밖에 있을 때는 그 사랑의 행위는 오히려 혼인을 파괴하는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상담 결과에 근거하여 Soto 교수는 젊은이들이 주례를 부탁할 때, 제일 먼저 그들에게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한다. 만약 없다면 혼인식 전까지 성관계를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면 철저히 회개하게 한 후 6개월 동안 교육을 받게 하는데 그 기간 동안 성관계를 하지 않을 것을 엄숙하게 맹세하게 한다고 한다. 만약 이를 어길 때에는 그 시점으로부터 혼인식을 6개월 연장시킨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속도위반"한 선배를 알고 있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 결혼식 이후 몇개월 되지 않아 출산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선배도 누구나 생각하기에 착한 신앙인이었고 자매도 아주 신실한 자매였다. 아니다 다를까? 얼마전에 들려 온 소식에 의하면, 선배는 다른 여자가 생겼고 이혼하기 위해서 이혼에 동의하지 않는 자매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이들의 결혼식 적에, 교회나 그를 아는 형제 자매가 그들의 혼전 관계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권징이나 죄의 고백없이 혼인식은 모두의 축하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제라도 목사는 젊은이들에게 혼인의 신성함을 잘 가르쳐야 할 준비를 해야 한다.

고전 13장을 보자.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혼인식 전까지 참지 못하는 사람이 평생 자기 아내가 될 사람을 혹은 남편이 될 사람을 신실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혼전 성관계를 심각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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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그리스도인의 가정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불가피 한 경우"에는 사람이 나눌 수 있느니라(?): 
                -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변질시키는 한국 교회 세태를 통탄하면서 -

                                                                이성호 목사

        혼인 주례식에서 목사들은 주로 다음의 성경 구절로 예식을 마친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마19:7). 오늘날 이 구절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혼인식 마지막에 첨부되는 한 구절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혼인이 얼마나 많이 사람들에 의해서 나뉘어 지고 있는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주의 말씀과 "사람이 나누고" 있는 이 모순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만족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삶이다." 이것이 "말씀 따로, 생활 따로"라는 한국교회의 고질병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현상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은 이러한 말씀과 생활의 분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하나의 노력이다.

천생연분?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구절이 한국 교회에서 그 강조점이 본문의 의도와는 달리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 구절을 세상 사람들의 "천생연분"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가 "하나님이 미리 짝지어 주셨다"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혼인을 앞둔 청년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이 구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미리 짝지어 준" 배우자를 위해 엄청난 열심을 가지고 기도한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본문의 강조점은 "천생연분"이 아니라 "혼인의 엄숙성"이라는 것이다.  비록 형식상 목사의 주례로 짝이 지어지지만 실제로 그들의 주례자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이 본문의 강조점이다.

        세상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를 묶는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이 식어지게 되면 더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다.  영화 '타이타닉'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감독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혼외 정사를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롬 1:23)" 버리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세상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남편과 아내를 하나로 묶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만"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부부의 사랑이나 기타 다른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그분을 대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성도들은 남편이 실직을 해서 경제적인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여도, 아내가 정신병이나 불치병을 앓고 있어도, 심지어 사랑이 없어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킨다.  왜냐하면 혼인을 유지시키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지식이나 노력,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 19:7은 혼인을 앞둔 청년이나 혼인식의 주인공들에게도 적합한 말씀이지만  보다 구체적인 대상은 "불가피한 경우"로 인해 이혼 서류를 앞에 놓고 있는 부부이다.  혼인식을 막 치룬 부부들은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라는 말씀에 이구동성으로 '아멘, 아멘'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아마 불신자들도 여기에 대해서는 참 좋은 말씀이라고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혼 서류를 앞에 둔 부부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교회당 안에서) 혼인했다고 생각한다면, 왜 이혼은 사람 앞에서 (법정에서) 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혼의 거의 불가능성

        오늘날 미국에서는 이혼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혼한 가정들이 "정상"적인 가정(숫자적으로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혼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들 중에는 정말 "불가피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낫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 어떤 남편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수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남편은 경제적인 지원을 거의 할 수 없을 것이고 자녀 교육에도 상당한 제약이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경우에 남편은 생을 자포자기하고 아내에게 오히려 거친 행동을 하게 된다 그의 아내는 앞으로 평생동안 성의 즐거움 없이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아내에게 엄청난 짐이다. 남편이 자기 스스로가 이혼을 요청할 때, 아내는 더 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판단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 대답 중의 하나는 "그들이 어떻게 혼인을 했는가?"이다. 그들은 혼인식에서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건강하거나 아플 때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로서의 대의를 지키겠다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자들이다.  "배우자가 건강하고 부유할 때"라는 조건이 혼인에 붙는다면, 우리는 혼인을 "언약"이 아니라 "계약"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만약 혼인의 본질을 계약으로 본다면 더 이상 우리는 할 말이 없다. 100번을 혼인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혼인은 비즈니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은 개나 돼지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뀌는 또 하나의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이혼 가능성을 열어 두고 계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음행"에서만 나온다. 요즘 많은 기독교 학자들이 이 음행을 확대 해석하려고 시도하지만 성경 본문을 보라. 아무리 살펴보더라도 그렇게 확대 해석할 근거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음행 보다 가정 폭력이 더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폭력이 이혼에 대한 더 중요한 근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같은 경우에도 어느 기간 동안 별거를 하든가 아니면 그 남편을 법에 호소하여 격리시키는 것은 가능할 지 모르지만, 이혼이 허락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대방이 다른 남자나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일은 부부생활에 없을 것이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셨기에 우리 주님은 이혼의 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허락"이지 "장려"나 "권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목사님들 중에는 이 말씀을 근거로 배우자 중 한 명이 음행을 하면 반드시 이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만, 이것은 본문에 대한 철저한 오해이다. 어떤 교인은 이 구절을 근거로 이혼하기 위해 의도적인 음행(비록 자신이 그것이 나쁜 줄 알면서도)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와 전혀 상반된 것이다.  예수님은 "음행"의 경우라 할지라도 상대편이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을 더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금방 드러난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들과 영적 간음을 수없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언약을 버리지 않으시고 인내하셨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 올 때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로 다시 받아들이셨다. 이것이야말로 부부관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혼의 불가능성에 대해서 강조해야 한다.

비록 이혼하더라도 . . .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혼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허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음행의 연고(불신자의 핍박)로 이혼을 하려는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이 명령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고전 7: 10, 11)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주목해 보다.  1) 이 말씀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엄격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 사도는 주님의 권위를 사용하고 있다.  2) 이 말씀은 혼인을 앞에 둔 사람이나 이혼을 이미 한 사람들이 아니라 혼인을 이미 한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이다.  3) 강조점은 역시 이혼의 가능성이 아니라 불가능성이다.  사도 바울에게 만일 이혼해도 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의 첫 번째 명령은 "안 된다"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하려는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결심하여야 한다: 독신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전 남편과 화합하려고 노력할 것인가? 이러한 결단 없는 이혼은 교회 안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결국 혼인은 우리 임의로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혼만큼은 우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볼 때, 교회 안에서의 이혼은 재 결합을 전제로 한 이혼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온다. 왜 사도 바울은 "갈릴 경우에는 좋은 사람 만나서 재혼할 수 있느니라"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이혼한 사람들에게 다시 전 배우자와 화합하라고 명하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본문에서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이혼이라는 법적 절차가 상대방 배우자로 하여금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보통 우리는 이혼은 혼인의 끝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이혼을 했더라도 그들의 하나됨은 어떤 유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나뉨은 사람에 의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여전히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버린 여자에게 장가가는 자마다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왜 "이혼한 사람"과 혼인하는 것이 간음이 될 수 있는가?  하나의 대답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혼하였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부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이 나눈 것"과 "하나님이 나눈 것"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혼을 허락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나누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나누고 계시는가? 이혼과 나눔의 동일시 할 때의 필연적 결과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있느니라"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하나님만이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누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두 배우자가 합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허락(혼인식)이 필요로 하듯이, 두 사람이 나누어지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 허락은 바로 죽음(장례식)이다.  한 배우자가 죽으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혼인해도 간음이 되지 않는다 (고전 7:39). 그렇다면 상대편이 죽으면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다른 사람과 혼인해도 되는가?  사도 바울은 배우자를 사별한 성도들에게조차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고전 7:40, 이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다음에 바로 사도는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성령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이 말씀은 혼인 적령기를 앞두고 있는 청년에게 권하는 독신(7:32-34)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목사들이 상처한 사람들에게 던져야 할 일차적인 권면은 재혼이 아니라 독신이며, 따라서 독신의 복됨을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 얼마나 세상 상담학과는 구별되는 말인가?

        이혼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두 가지를 권면하신다. 하나는 전 배우자와 화합하기를 노력하는 것, 다른 하나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혼은 혼인의 끝이 아니다. 혼인의 끝이 될 수도 없다. 혼인의 끝은 하나님만이 결정하신다. 사람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 재혼하기 위한 시작도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용서하기 위한 훈련과정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혼 기간 동안 원수사랑의 훈련을 하시기를 원하신다.  이 기간은 원수인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기간이다. 또한 자신을 버린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기간이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비록 힘이 들더라도 다시 화합하기를 노력하는 기간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원수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혼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비록 그 사람에게 뼈아픈 시간이 된다 할 지라도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복 있는 자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이혼자들이 교회에서도 동일한 취급을 받지 않도록 교회는 그들을 돌보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혼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이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이다. "혼인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듯이 이혼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네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혼한 사람들만큼 이 말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무시하고 이혼하더라도 무조건 다시 합하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만약 그렇게 명하셨다면 그 말씀은 이혼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짐이 되었을 것이다. 이혼한 사람들은 전 배우자와 다시 화합하기를 소망하는 가운데, 즉, 전 배우자가 회개하거나 자신이 그를 진정으로 용서할 마음을 준비하면서, 얼마든지 독신으로 지낼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그러한 노력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으로 나뉨을 허락 받을 때까지, 즉 상대방이나 자신의 죽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5).  결국 이혼 기간 동안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상대방에 대한 용서와 화합이다.

        많은 성도들이 이와 같은 혼인의 엄숙함에 고개를 저을지 모르겠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같은 말씀을 들었을 때,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마 19:10)"라고 불신의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 다른 말씀도 마찬가지지만 혼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도 아무나 받을 수 없다. 오직 귀 있는 자만이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받을만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목회자의 사명

        이번 이산가족 상봉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장기려 박사님을 한 번 보자.  그 분은 사랑하는 아내를 이북에 홀로 두고 이남으로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끝가지 재혼을 하지 않았다.  그는 통일이 되면 다시 한 부부로 살 것이라는 기대를 늘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갔다. 결국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분은 독신으로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부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 교회는 (배우자가 살아 있을 동안의) 재혼에 대해서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재혼은 이혼한 부부가 다시 합할 가능성을 현저하게 막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재혼은 혼인이 아니라 간음이다.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재혼을 허락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간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재혼을 옹호하는 입장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남편이 폭행이 심하다고 하자. 그 남편이 평생동안 그렇게 폭행이 심할지 아니면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 남편을 돌이키셔서 정말 훌룡한 남편으로 바꾸실지 누가 알겠는가?

        재혼이 더 나은 혼인 생활을 보장할 것인가라는 말에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통계적으로도 재혼한 가정의 85%가 이전 보다 더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재혼은 부모들의 죄의 결과가 자손들에까지도 미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어린 자녀들이 부모들의 이혼과 재혼으로 고통당하고 있는가? 우리는 인간이기에 장래의 일을 알 수 없다. 좋은 혼인 생활이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되어서도 곤란하다.  혼인의 일차적이 목적은 두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따라서 "좋은 사람만 있다면"이란 말을 교회는 삼가야 한다.  "좋은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전 배우자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혼한 사람들이 늘어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교회는 이혼과 재혼의 문을 쉽게 열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이 문을 쉽게 열어 버린 미국 교회들은 이혼과 재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거의 침묵하고 있다. 

        평신도는 고사하고 교회의 저명한 목사나 신학교수들이 자기 아내를 버리고 재혼하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물론 이유는 있으리라. 어떤 분은 아내가 정신병이 들었기 때문에, 어떤 분은 사모님이 너무 목회가 힘들어서 가정을 떠났기 때문에 재혼을 했다고 한다. 본인은 이러한 경우에도 그들이 목회나 신학 교수를 포기해서라도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병든 아내와 도망간 아내, 그리고 목회와 신학 활동, 둘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한가? 그들은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더욱 혼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어떠한 경우라도 "아내와 동거하라"는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에 순종하여야 한다. 목회자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 어떻게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고 목회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국 목회자들이여, 어떠한 경우에라도 아내를 버리는 것을 정당화하지 말라.  목회나 성도는 포기해도 된다. 당신들이 없어도, 하나님은 돌들을 일으켜서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포기한다면 누가 그녀를 보호해 주겠는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음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면 저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아내를 버리는 자는 "간음하게 하는 죄"를 짓는다. 간음하는 죄보다 더 큰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은 목회자들에게 더 이상 "간음하게 하는 죄", 즉 아내를 버리는 죄를 짓지 말라고 호소한다.

        이혼과 재혼,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기에 목사들은 말씀과 씨름해야 한다. "전 남편(아내)과 다시 화합하라"는 주님의 명령과 "도저히 서로 같이 살 수 없어 보이는" 인간적 상황! 이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넓은 길은 존재한다.  이혼한 사람들이 상담하러 왔을 때, 목사들은 "좋은 사람 만나서 혼인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대답은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의 답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은  그 상처받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치료할,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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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관점 / 구약에서의 성윤리


바알브올 사건(민25장)과 성적문란


모압 평지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싯딤지역에 진을 쳤다. 싯딤은 히브리어로 '아카시아 나무'란 뜻으로, 모압 평원 북단에 위치한 초원지대로서(민 22:1), 광야 생활 중 마지막으로 진을 친 곳이다.  이곳에서 모압 왕 발락과 술사 발람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내리기 위해 바알브올의 음행 사건을 일으킨다.  모압의 종교는 바알숭배였고 바알과 아세라와의 섹스를 통해 풍요와 다산이 온다고 믿었기에, 제사의식 과정에서 여사제가 남자와 행음하는 의식이 있었다. 


따라서 발람과 발락은 바알숭배 제사의식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모압 여인과 행음하면서 우상의 제물을 먹도록 유도한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모르는 모압 여자들과 더불어 바알 신 제의에 참석하고, 더러운 성적 음행을 일삼았다.  이처럼 구약에서 음행이나 성적문란은 주로 우상숭배와 가나안에 사는 족속의 타락한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기에 철저히 금지하였다. 


모든 성적인 문란은 애굽과 가나안의 풍속과 규례에 기인한다.  당시 애굽과 가나안 지역에는 우상 숭배와 더불어 제식(祭式)으로서의 음행(淫行)이 극에 달해있었다.   여기서 풍속과 규례는 우상종교에 근거하여 문란한 성적 행위들을 방조하는 가증한 행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철저한 단절을 명령하신다. 


레 18: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마아세, 행위, 행동, 일, 노동, 제작이나 공작) 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훅카, 규정, 법령, 법규, 관습)도 행하지 말고

레 20:23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토에바, 혐오하다,토하여 내치다) 여기노라

 

근친상간 금지


실제로 애굽, 가나안, 인도 파사등 고대 근동지역의 신화나 전설, 그리고 궁중 기록 등에 의하면, 남매 간의 결혼이나 모자(母子)간의 결혼 등 골육지친 간의 간음이나 결혼 행각이 종종 나타난다. 그 실례로 애굽인들이 섬기는 주요신 '오시리스'(Osiris)는 그의 누이 동생 '이시스'(Isis)와 결혼한 것으로 되어있다(Diodotus, Philo, Jerome).   여기서 범하다의 갈라는 [음욕을 품고 발가벗기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정상적인 성관계가 아니라 욕정을 품고 성폭행을 한다라는 의미가 강하다.

 

레 18:6 각 사람은 자기의 살붙이를 가까이 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갈라,음욕을 품고 발가벗기다)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8:7 네 어머니의 하체는 곧 네 아버지의 하체이니 너는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어머니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출애굽 당시 유대인들은 일부다처제의 가족 형태를 취했으며, 나이 많은 아들은 아버지의 젊은 첩들보다 나이가 많거나 비슷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 사통(私通)이 자주 발생하였다. 그 대표적인 성경적 예로는 계모 빌하를 범한 야곱의 첫째 아들 르우벤을 들 수 있다(창35:22).그러나 첩도 아버지와 동침하여 한 몸이 되었으므로, 계모와 동침하는 것은 곧 아비의 권위와 가정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큰 죄악으로 간주되어 엄격하게 금지 되었다(신27:20).

 

레 18:8 너는 네 아버지의 아내(에쉐트 아비카, 계모) 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아버지의 하체니라


친 자매 또는 이복 자매와의 사통을 금하는 규례이다(20:17;겔 22:11). 하나님의 창조 질서상 자매는 자기 자신과 동격(同格)이다. 그러므로 자매를 범하는 것은 곧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 자매를 범한 실례는 이복 누이 다말을 급간한 다윗의 아들 암논을 들 수 있다(삼하13:1-20).

 

레 18:9 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버지의 딸이나 네 어머니의 딸이나 집에서나 다른 곳에서 출생하였음을 막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레 18:10 네 손녀나 네 외손녀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하체니라

레 18:11 네 아버지의 아내가 네 아버지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레 18:12 너는 네 고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아버지의 살붙이니라

레 18:13 너는 네 이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어머니의 살붙이니라

레 18:14 너는 네 아버지 형제의 아내를 가까이 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숙모니라

레 18:15 너는 네 며느리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는 네 아들의 아내이니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형수나 제수와의 간통 및 결혼을 금지한 규정이다. 그 이유는 혈통상 형제는 자신과 동격이며, 형제의 아내는 형제와 동침함으로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규정은 계대 결혼법에 관한 한은 적용되지 않았다. 즉 만약 형이 자녀가 없이 죽은 경우에는 동생이 형수와 동침하여 형의 유업을 이을 자녀를 낳게 하는 계대 결혼법이 적용되었는데 이는 율법으로도 규정하고 있는 바이다(신 25:5-10). 한편 이 계대 결혼(levirate marriage)의 규례를 어기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은 대표적인 예로는 유다의 아들 오난을 들 수 있다.(창38:8-11)

 

레 18:16 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

레 18:17 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하지 말며 또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아울러 데려다가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들은 그의 살붙이이니 이는 악행이니라

 

성경의 대표적인 경우는 레아와 라헬을 동시에 취한 야곱의 경우를 들 수 있다(창 29장). 그러나 이와 같은 중혼(重婚) 제도는 본질상 인간의 기본적인 심성에 위배되는 것으로서, 가정 불화와 성적 타락의 원인이 되었으며 진정한 우애와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할 자매를 원망과 시기의 대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창 30:1).

 

레 18:18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의 자매를 데려다가 그의 하체를 범하여 그로 질투하게 하지 말지니라


간음의 금지


간음은 남의 것을 탐내서 훔치는 도둑질과 같다.  간음은 이웃 집의 아내나 여종을 탐하여 갈취하면서 자신의 욕정을 채우는 죄악된 행위다.

 

레 18:20 너는 네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여 설정하므로 그 여자와 함께 자기를 더럽히지 말지니라

신 22:22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우상숭배의 금지

 

우상숭배는 영적간음과 같다.  몰렉은 몰록(왕상 11:7), 밀곰(왕상 11:33), 말감(습 1:5) 등으로도 불리우던 고대 가나안 족속의 우상으로 유아 희생 제사로 특히 유명하다(20:2-5;왕상 11:7;렘32:35). 한편 이 우상의 재료는 놋이었고, 그 머리는 힘센 황소(bull)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팔은 마치 어린이를 맞아들이려는 듯이 앞으로 쭉 뻗어 있었다(Keil & Delitzsch, Vol. I. p.416). 또한 이 우상 바로 전면 좌 우측에 맹렬한 불길이 타고 있었던 듯하다. 이로 볼때 고대 이방 족속들은 가장 위대한 불인 태양을 섬기기 위해 이 우상을 만는듯 하며, 당시 부모들은 자식들 중 하나를 택하여 이 우상에게 바치면 남은 자녀들에게 복이 온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식을 이 우상에게 주었던 것 같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 p 516).

 

레 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남색의 금지


남색의 기원도 이방 신전의 제사의식에서 남성사제가 다른 남성과 관계 맺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건데 이성애든 동성애든 성적인 문란은 종교의식에서 출발하여, 당시의 가나안 지역에 널리 퍼진 것 같다.

 

레 18:22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토에바, 혐오하다,토하여 내치다)  일이니라

레 20:13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수간금지

 

고대 세계에서는 짐승과 성적 관계를 가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는데, 주로 문란한 제사의식상 그러한 패륜 행위가 종종 행해졌다고 한다. 고대의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애굽의 여자들은 종묘 숭배 의식상 수염소와 교합하였다 하며(Herodotus, Strabo), 로마에서는 개와 더불어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Aelian). 심지어 근대에 이르러서도 애굽 남자들이 악어 암컷과 교합했다는 기록도 있다(Sonnini; Keil & Delitzsch, Vol.I p. 418 참조). 이처럼 이교도들에게서나 이방의 우상 숭배 제사 의식에서 자주 행해진 수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짐승 이하로 전락시키는 패역한 행위다.

 

레 18:23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성매매 금지

 

신 23:17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신 23: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그들이 에덴 동산으로부터 쫓겨났듯이(창 3:24), 범죄한 백성이 구별받은 땅 가나안에서 그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  땅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인간을 또한 스스로 저버린다

 

레 18: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레 18: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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