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혜사 성령님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장 25∼26절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
성령님을 매일같이 인정·환영·모셔들여야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제일 이해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공기 없이 살 수 없는 것 같이 성령님 없이는 영적으로 태어나지도 못하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성령과 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의 무디 목사는 초등학교만 나와서 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히 봉사하다가 주의 부르심을 받아 위대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나오자 어느 여성도가 “목사님!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하는데 나는 한시간 내내 졸고 앉아 있다가 갑니다. 목사님 말씀은 잘하시는데 은혜가 없어요. 지금부터 목사님 은혜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하고 떠나버렸습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무디 목사는 “하나님이여,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시옵소서”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의 나이 34살 때 11월에 뉴욕 거리를 걸어가면서 “하나님이여 저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그때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후에 미국과 영국을 뒤흔드는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어 수천만명을 주께로 이끌어 들이는 위대한 종이 된 것입니다.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전에는 말씀을 전할 때 성도들을 졸게 만드는 목사였는데, 성령을 받자마자 세계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1. 인격을 갖고 계신 성령님


 우리는 성령께서 인격을 가진 하나님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뚜렷이 알아야 합니다. 인격을 가지려면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즉 지·정·의를 가지고 있어야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의 구성요소를 다 갖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지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27절에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이 우리 생각과 양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내 마음속에 성령이 생각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성령은 다 통달하고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전지하신 지성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령이 가슴을 치면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것을 알지 못하고 다른데서 방황을 합니다. 성령이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라’는데 이것이 뭔지 모르고 ‘저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갑자기 기도가 하고 싶은데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지 모를 때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우리교회 권사님 한 분이 지역장으로서 구역예배를 인도하러 가다가 종로 사거리에서 가슴에 기도가 솟아오르는데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지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왔다갔다 하고 기도할 자리도 없는데 가로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만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얼마나 큰소리로 방언기도를 했던지 나중에 정신차려 보니까 사람이 인산인해로 둘러싸서 구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슴은 시원해졌습니다. 그래서 구역예배를 잘 인도하고 집에 돌아와보니 도둑이 왔다 갔습니다. 현금을 서랍 속에 넣어 놓았는데 만일 그 돈을 도둑 맞았으면 큰 곤란을 겪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둑이 그것은 훔쳐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도둑의 눈을 막아 버린 것입니다.

 성령님은 근심, 걱정을 하는 감정을 가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령은 결의한 의지를 가지십니다. 성령이 결정하면 우리가 성령의 마음을 변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니까 성령이 못하게 했습니다. 성령은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성령님이 은사를 주실 때도 우리가 원하는대로 주시는 것 아닙니다. 성령이 보아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지·정·의를 가진 성령으로서 우리에게는 보혜사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보혜사란 곤고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부름을 받아 와서 곁에서 도와주는 자입니다. 어렵고 곤고한 사람을 도와주는 변호사로서 곁에 와서 도움을 베푸는 분이 보혜사입니다. 또 그 사람을 위해 변호하고 권고하며 위로하므로 그 사람을 굳세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보혜사로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가르치고 위로하고 대언하시고 상담해 주시고 대속해 주셨지만 예수님이 가시고 난 다음에 온 분은 똑같은 보혜사인데 다른 보혜사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은데 예수님 몸을 가지고 오시고 보혜사는 영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을 모시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2. 성령님의 역사


 모든 일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일체가 되어 일하시나 그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만물을 계획하시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좇아 그 만물을 만드시고 구속하시고 성령님은 만물을 유지하시고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똑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지만 맡은 직분은 다르면서 또 함께 계시고 함께 계시면서 다릅니다. 아버지 안에 예수님과 성령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아버지와 성령님이 계시고 성령님 안에 아버지와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는 아버지 하나님 시대로 예수님과 성령님은 아버지 안에 있었습니다. 신약초기 예수님 시대에는 아버지와 성령님이 예수님 안에 계셨습니다. 지금은 성령 시대니까 아버지와 예수님이 성령 안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절대로 서로 분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사역을 합니다.

 우리와 함께 성령님이 계시고 우리 속에 지금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성령을 통해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마음문을 열어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교수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부인은 열심히 예수를 잘 믿는데 본인은 안 믿습니다.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면 글자가 하나도 안보인다는 것입니다. 신문은 잘 읽는데 성경은 못읽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만든 것 입니다. 나중에 회개하고 예수 믿은 다음에는 성경을 잘 읽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계셔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가르쳐주는 영이십니다. 그리고 기억나게 해주십니다. 나이 먹으면 제일 걱정 되는 것이 치매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붙들어서 기억나게 해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뇌세포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성령이 기억나게 하시는 능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꾸짖으러 오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꾸짖으십니다. 예수 안믿는 것이 죄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모든 죄도 다 많지만 예수를 믿으면 그 피로써 다 씻음을 받고 청산을 받습니다. 우리가 지옥 가는 것은 우리 죄로 말미암아 가는 것이 아니라 안믿어서 지옥가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생활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안내하는 사람이나 안내견이 꼭 있어야 되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도 내일 일어날 일을 모르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성령이 우리 눈을 밝혀 주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2절로 14절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진리도 가르쳐 주시고 세상의 진리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 충만하면 세상 공부도 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머리도 좋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에도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장래 일을 가르켜 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미국 선교를 시작하면서 저는 미국에 많은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주의 종을 초청할려고 하니까 그당시만해도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신학교를 세워서 학생들을 양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기도할 때마다 집중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할때마다 신학교 설립에 대한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저녁 집회 설교때 그 부분을 언급했습니다. 신학교를 세우자면 땅도 건물도 돈도 있어야 하는데 답답한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후에 한 젊은 사업가가 오더니만 “자기가 안쓰고 비워 놓은 집이 한 채 있는데 쓰면 어떠시겠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이구나’ 생각하고 그 집에서 신학교를 시작한 것이 오늘날 베데스다대학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해서 성령의 생각을 우리 마음속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생각지 않게 마음에 뜨거운 소원이 일어나고 생각이 자꾸 그곳을 통해서 나오며 양심에 거리낌없이 생각이 나오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 마음에 소원과 생각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뜨거운 소원과 생각을 통해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뜨거운 소원과 생각이 내 양심을 통해 걸러나올 때 부끄러움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말씀한다고 우리가 작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환상을 보고 계시를 볼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또, 귀에 음성이 들려오면 더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오지 않고 생각이 자꾸 계속해서 머리에 남고 마음에 소원이 줄기차게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줄 알고 성경을 다시 살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와 같이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성결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부패한 자식들인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부패한 심신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거룩함과 의로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거룩하신 분으로 우리에게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들어와서 우리 속에 있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우리도 거룩하고 깨끗하게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할 수 있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우리 힘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이 우리는 부패한 인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성령님에 의지하고 성령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라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는 또한 우리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도 능숙하게 하지 못합니다. 전도도 잘 못합니다. 말씀 증거는 더 힘듭니다. 많은 사람이 저에게 늘 묻습니다.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 그래서 “한평생 걸립니다. 뭐 엎드려서 연필 들고 종이 위에 적으면 설교가 나오는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온 과거를 말씀 속에서 현재에 비춰보고 주의 성령님께 인도해 달라고 간청을 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말씀을 증거한다는 것은 혼신을 다하여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요, 뼈의 기름을 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마음대로 농담식으로 만담하는 식으로 해가지고 하나님의 영혼을 어떻게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 스스로가 못하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도와주는 분이 옆에 와 계신데도 불구하고 그 도와주는 분을 무시해 버리고 도와달라고 하지 않고 자기 혼자 발버둥 치다가 실패하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도와주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나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내게 힘을 주시옵소서” 라고 간절히 원할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도우심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의 임재


 성령님은 끊임없이 우리와 교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있어도 그냥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늘 함께 와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잘못 먹으면 속이 쓰리지만 만족하게 먹고 나면 속이 편하듯이 성령이 들어와 계시면 우리 맘속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7절에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 성령님이 와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면 속에 계신 성령이 우리 위에 임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곁에 계시고 안에 계시고 위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 곁에 있고 믿는 사람은 속에 중생의 영으로 와 있고 성령 침례를 받으면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체험을 하면 성령 충만을 체험하게 되고 그 결과로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거듭나게 하시고 생수의 근원이 되어서 천국 갑니다. 그러나 권세와 능력을 받으려면 성령 침례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증거로써 우리가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어린 소년과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들이 예수님을 믿고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어떻게 제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성령님을 믿으라고 합니까?” 그러자 전기공이던 아버지는 “내가 그 방법을 가르쳐 주마”하고 아들을 데리고 발전소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전기가 나오는 동력기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여기가 우리에게 빛을 주고 우리의 집을 따뜻하게 해주는 힘이 나오는 곳이 바로 이 기계란다. 우리는 전기를 직접 볼 수 없지만 그 힘이 기계 속에서 나온단다” 그러자 발전소와 동력기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아들이 “아∼ 전기가 있다는 것을 이제 믿을 수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물론 믿을 수 있지. 네가 전기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전기를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전기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았기 때문에 전기가 있는 것을 알지 않느냐”고 말해주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 자신들의 삶 속에서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에 성령이 와 계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시면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과 즐거움이 초자연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오면 우리 마음에 비정상적으로 불안, 고통, 좌절, 분노 등이 생기지만,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 마음에 기쁨, 평안, 믿음, 소망, 사랑 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귀가 오면 마음에 평안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심한 스트레스로 혈압이 오르고 심장이 뛰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다가옵니다.

 야고보서 3장 14절로 16절에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고 말씁합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와서 이와 같은 것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쁨과 평안과 믿음, 소망,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같이 계셔서 우리 생각을 통해서 생각하시기 때문에 내 생각인지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기도할 때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주시는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가 알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점령하시면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들어오면 기도가 달라지고 설교가 달라지고 은혜로운 분위기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면 우리에게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유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모두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성령님을 매일같이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성령께 의지해서 사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오늘도 하늘나라 역사를 나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살아계시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주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주님께서 오늘 교회로 모아주시고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아무리 무능하고 보잘 것 없이 보이더라도 성령께서 임하시면 모세의 마른 지팡이가 권능의 지팡이로 변하듯이 변할 수가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도록 성령충만한 역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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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예수님을 믿느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4절∼21절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살지만, 나는 예수님 없이는 결코 살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을 믿음으로 삶을 더욱 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 안에서 내가 누군지 알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본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것을 가르쳐 주시고 하나님을 경외하셨으므로 우리가 따라서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고 계신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 있고 사랑을 받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사는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다가 육신의 장막집을 벗어 버리고 하늘나라 집으로 가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땅에 있는 육신은 장막집이 되어서 언제 거두어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천국에 아름다운 집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천국은 아름답고 영화로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있는 것을 확실히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처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허무하게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쳐다볼 때 내가 누군지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며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의로운 사람, 거룩한 사람, 건강한 사람, 축복받은 사람, 영생복락을 얻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 안에서 희망과 꿈을 갖게 된다

 사람은 희망과 꿈이 없으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으면 오늘 어떤 고생이 있어도 참을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을 살아도 그 가운데 희망과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재앙을 예수님이 담당하셨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어떠한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내일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용서받은 사람이 되고 거룩하게 되고 예수님 은혜로 치료받고 축복받고 부활 영생 천국을 얻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것이 되었습니다. 죄를 용서받은 의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더러움이 씻어진 거룩한 사람인 것입니다. 병은 명령하여 내쫓아야 합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병이 다가와도 저항을 안합니다. 병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쫓아야 합니다. 마귀와 싸울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면 새사람은 마귀에게 집을 허락해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병에서 해방되고 건강하게 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편 23편 1절에서 6절까지에 선한 목자로써 내 삶을 자비와 긍휼로 채워주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사사건건 안되는 일만 있었는데 나중에 그 길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좋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풍성한 삶을 주님께로부터 받는 이유는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목숨까지 버렸기 때문입니다. 목숨까지 버려서 우리를 풍성한 삶으로 이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사는 차원 높은 삶

 감각적이고 이성적이고 체험적인 물질세계를 뛰어넘는 믿음의 세계에 살수가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믿음의 세계를 모릅니다. 죽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물리학자 홉킨스 박사도 사람이 죽으면 컴퓨터가 꺼지는 것처럼 뇌가 죽으면 아무것도 없이 죽어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믿음의 세계가 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운명을 바꾸고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에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믿으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기쁘고 행복하게 된다고 믿으면 기쁘고 행복한 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바라보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켜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 올해보다 나은 미래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안된다. 못한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하나님을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마귀의 공격속에 살면 우리는 실패하고 패배하고 마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믿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인데 마귀의 텃밭입니다. 두려워하면 마귀가 춤추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병을 두려워하면 병이 오고 가난이 두려우면 가난이 오고 실패를 두려워하면 실패가 옵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같이 계시므로 강하고 담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난처 되시며 우리의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이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극한 염병에서 건져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합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폴 투르니에 박사는 노이로제나 우울증 환자들에게 하루에 두 번 아침 저녁으로 시편 23편을 묵상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환자들이 노이로제에서 나았습니다. 미국의 하워드 캘리 박사도 “성경 말씀은 매우 훌륭한 의술이 되기 때문에 성경의 처방대로 했을 때 한 사람도 치료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치료하고 우리를 승리와 평안의 분위기로 다스리는 능력이 있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심으로 사는 이유도 알고, 희망과 꿈도 가질수 있고, 강하고 담대하게 창조적인 믿음으로 마음과 환경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희망과 꿈을 꾸며 믿음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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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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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희망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중략)…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장 1~11절)

 

 사람들은 마음속에 고통과 절망의 늪에 빠졌을 때가 가장 슬플 때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절망의 어두운 환경과 마음의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최선을 다해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위로를 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은 우리 인생의 쓴물을 달게 하는 기적적인 응답인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하나님 앞에 “지금 내 생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라고 호소했었습니다. 신약의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도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잃은 줄 알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두가 위로와 희망을 받아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언제나 위로와 희망을 주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새로운 생기를 얻게 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버림받아야 마땅한 죄인들이 와서 위로와 희망을 얻는 곳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통하여 위로와 희망을 얻고 인생을 새롭게 살아갈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 다른 사람이 우리를 위로해 주지 않더라도 내가 나를 위로해 주면서 살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나라의 한 대형서점에서 책과 함께 꽃을 배달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주문자의 23%, 즉 4명 중 1명이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꽃을 선물한답니다. 아무도 꽃을 선물해주는 사람 없으니까 자기가 책방에 부탁해서 자기 이름으로 꽃을 배달하게 하고, 그 안에 메시지를 적은 카드를 동봉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용기를 내라. 파이팅!”이랍니다. 남이 위로해 주기만을 바라지 말고 이런 방법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좋은 방법입니다.


1. 부정적 생각을 버려라 (생각이 부정적이면 꿈도 믿음도 다 물거품)


 생각이 부정적이면 꿈도 믿음도 다 물거품입니다. 광야 생활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나쁜 모습은 생각이 부정적이어서 늘 불평과 원망의 밧줄에 포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2절로 3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야훼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민수기 14장 26절로 30절에 “야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단호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 앞에 파수꾼을 세워서 생각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격려하고 칭찬하십시오.
 잠언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구절을 많이 외우라는 것은 성경구절 속에 담긴 의미를 묵상하고 준행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외우면 성경 안에 우리를 구원하고, 힘을 주는 말씀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칭찬하고 보호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보호를 받아야 됩니다. 내 마음과 생각을 아무데나 내뒹굴어 놓으면 온갖 부정적인 것이 마음과 생각을 부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 간의 위로와 격려를 해야 됩니다. 내가 나를 격려하고 “용기를 내어라. 파이팅!”을 할 뿐 아니라 가족끼리 서로 시간을 내어서 위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결혼한 사람이 혼자 사는 사람보다 몇 년 더 오래 살겠습니까? 결혼한 가족은 결혼 안한 것보다 8년을 더 오래 산답니다. 빨리 안 죽으려면 가족을 이뤄야 됩니다. 자녀가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보다 2년 정도 더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갖가지 스트레스를 겪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둔 부모가 더 오래 사는 것은 자녀로부터 받는 위로 때문이라고 합니다. 키우기에 고달프지만 귀엽잖아요? 그 자녀들이 부모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그것이 부모가 2년이나 더 오래살 수 있는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배우자나 자녀가 주는 위로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됩니다.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생각을 잘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시기를 지날 때에는 서로 격려하고 지지해 주는 것이 더욱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위로를 등한히 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가족이나 친구의 위로가 큰 힘이 되기는 하지만, 때로는 사람의 말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었을 때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최근에 저의 친구 몇 사람이 자동차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 미망인에게 위로의 말을 하러 갔는데,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렇게 하시느냐? 우리는 버림받은 사람이다. 살 필요가 없다.’라고 탄식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 위로할 수 없어요.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시겠다고 했음으로 짧은 인생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되겠다.’라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기도를 해 주었으나, 사람의 말로써는 온전한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또 며칠 전 발생했던 소래 어시장 화재 사건을 보더라도 평생을 바쳐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이 순식간에 몽땅 재로 변하였는데 그런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어떤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사람의 말로써 말해봤자 아무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극한 고난을 당할 때,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을 두고 섭리하시고, 만물을 가지고 위로하여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19편 7절에 “야훼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때에 뿐 아니라 평소에 늘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위로로 삼아야 됩니다. 매일 아침 성경을 펴고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루를 시작하면, 그 하루가 위로가 넘치는 하루가 될 수 있습니다.


 2. 용서하고 사랑하라 (용서와 사랑을 마음을 치료하는 효과가 크다)


 용서와 사랑은 마음을 치료하는 효과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용서하고 사랑을 하면, 우리도 위로를 받고, 우리가 용서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도 위로를 받습니다. 스스로 위로하고 희망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2절로 5절에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을 통한 위로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어 위로의 힘을 주십니다. 요한복음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는데,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위로자’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성령께서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장 29절~31절)라는 말씀을 이루어 주십니다. 때문에 그 성령의 위로를 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저는 부흥회를 가게 될 때 언제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게 위로를 주시옵소서.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성령의 위로를 받아야 부흥이라는 이 큰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매 주일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굉장한 부담입니다. “60년간 복음을 전했는데 무슨 부담이 되느냐? 조 목사님이야 입만 열면 하나님 말씀이 술술 나올 것인데.” 모르는 소리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매 순간이 부담스럽습니다. 수많은 생명에게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이니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면 전할수록 그 중요성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에 중압감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성령님의 위로를 믿기 위해 성령님 도와달라고 부르짖어서 기도해서 내가 먼저 은혜를 받아야 성도들이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을 통해 주시는 위로도 우리가 등한시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엄청난 고난과 괴로움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 고뇌와 괴로움을 당하신 것은 자기에게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 불의, 추악, 저주, 절망을 예수님이 대신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시면서 이걸 감당해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면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프셨나 못 박힌 그 손과 발 죄 없이 십자기에 매달리신 예수님
하늘도 모든 땅도 초목들도 다 울고 해조차 힘을 잃고 온누리 비치잖네
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넘치네’

 오래 전에 제가 지은 찬송입니다만, 기도할 때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과 모든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니 성령께서 이 찬송을 주시더라고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배신하는데도 선구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는 찾아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며 용납하고 사랑하시며,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사건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던 베드로에게 평생 잊지 못할 위로와 격려가 된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이 되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찾아가서 “이 자식아, 3년 반 동안이나 내 밑에서 밥을 먹고, 배우고, 따라다녔는데, 그렇게 무참하게 비난할 수가 있느냐? 내가 살아 나왔다. 어떻게 할래?”라고 책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거기에 사용한 사랑이라는 말은 ‘아가페’라는 말하고, ‘필레오’라는 말로 쓰는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 나를 아가페(사랑) 하느냐?” 즉 ‘아가페’는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내가 아니요. 나는 예수님을 필레오(사랑)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을 하지, 영원한 사랑은 못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그냥 필레오하면서 사명을 감당하라.”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사도직이 복구된 것입니다.
 시편 103편 8절에 “야훼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103편 12절로 14절에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야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용서하기 원하셔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로마서 5장 6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로마서 5장 10절)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약하고, 죄를 짓고, 하나님을 원수로 행할 그런 못된 처지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버림받은 그대로를 끌어안고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3. 꿈을 격려하라 (목적 있는 꿈을 격려하라)


 꿈을 주심으로 주님이 또 격려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꿈을 주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후에, 형의 보복을 피해서 집을 떠나 어머니 친정집에 피신을 갔습니다. 외삼촌이 사는 머나먼 땅으로 길을 떠난 야곱은 밤이 되자 하늘을 지붕 삼고, 돌을 베게 삼아 들판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때에 야곱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자기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얼마나 두렵고 불안했을까요.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시어 야곱에게 미래에 대한 꿈을 말해주심으로 그를 격려해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28장 13절로 14절에 보면 “나는 야훼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꿈을 이룰 때까지 야곱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28장 15절에 보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장래에 대한 약속을 꿈으로 확인한 야곱은 ‘내가 이 들판에서 자도 사나운 짐승이 나를 공격 못 할 것이고, 외삼촌 집에 가면 외삼촌이 나를 환영해주겠구나.’라는 위안을 얻게 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꿈도 귀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적인 꿈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예언적인 꿈을 많이 꾸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꿈을 주시면 마음에 그것이 큰 위로가 되고, 의지하는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꿈을 주심으로 격려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십자가가 주는 위로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같은 고난을 당해 본 사람의 위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이 겪는 고난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배고플 때 먹이고, 아플 때 치료해 준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셨고, 수년 동안 함께했던 제자들에게도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다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답답함과 막막함을 주님께서 이해하시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청산하시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됩니다. ‘자비의 아버지시요 위로의 하나님께서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고린도후서1장3절)’이신 것입니다.

 

 4. 믿음을 가져라 (믿음은 꿈과 말씀에서 주어진다)


 믿음은 꿈과 말씀에서 나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장 17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자꾸 의심이 생기는데 어찌할까요?’ 의심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 반대인 의심도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한 방울도 없는 사람은 의심도 한 방울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난 다음 ‘정말일까? 정말일까?’ 그런 의심이 생기면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의심이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여러분 말씀을 입으로 자꾸 시인하면 의심은 말씀에 부딪혀 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의심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기면, 마귀는 곧 와서 의심을 자꾸 던져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술로 말씀을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마귀가 던져주는 의심이 우리 말씀의 고백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등불처럼 우리가 들고서 걸어야 됩니다.
 시편 119편 50절에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로 24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수르 광야로 들어와서 사흘 길을 가되 물을 얻지 못하다가, 물을 발견하여 백성들이 허둥지둥 물을 마시다보니 그 물은 독이 있는 쓴물이었습니다. 백성들이 통곡하고 낙심하였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 쓴물이 있는 주변에서 나무를 꺾어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의 생활에도 시험과 환난의 쓴물을 마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나무를 던지면, 그 물이 달아집니다. 죄악의 물이 위로 달아지고, 부정부패한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역사로 쫓겨나가고, 질병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우리의 생활에 부요함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축복을 주시기 때문에 부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죽어서 ‘예수 부활 내 부활’이 되고, ‘예수 승천 내 승천’이 되고, ‘예수 천국 내 천국’이 되니 굉장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면 수많은 고통을 당하지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최고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를 앙망하고 기다리면, 주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마음에 부어주심으로 쓴마음이 달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매달리신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축복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이 십자가를 놓치지 말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 없이는 우리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주 안에서 위로와 희망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 이 땅을 사는 동안 수많은 위기와 환난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모든 저주와 죽음과 질병과 가난을 청산하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과 소망과 위로와 축복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긍정적인 사람으로, 의심의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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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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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저는 “즐거운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확실히 차원이 다른 점이 무엇이냐면 다른 종교처럼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해탈과 도덕적인 훈련과 공부와 명상과 고행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주님께 나와서 믿기만 하면 예수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다른 점인 것입니다. 불교에서 어느 훌륭한 스님이 10년을 누워서 주무시지 않고 앉아서 주무시고 고행을 했으나 세상 마지막날 죽음 마지막날 오셨을 때 나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탄식하는 것을 제가 신문에서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한 인생이지만 오늘 죽더라도 주님 감사합니다. 나는 천당갑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도를 가르치는 선각자나 선생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2,000여 년 전에 우리의 구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과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다 부활 승천하여 구원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 크리스마스인데 크리스마스날은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기념일인 것입니다.


1. 예수님의 탄생
첫째로, 예수님의 탄생은 미리 예언된 것입니다. 주먹구구식으로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주의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 오시기 전 7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보통 출생한 것이 아니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나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도 이사야 9장 6절로 7절에 분명히 말했습니다. 보통 어린 아기가 아니에요.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야훼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러분,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아이 핏덩어리를 강보에 싸서 엄마가 안고 있는데 그 어린 아기를 보고 당신은 이름이 기묘자요, 묘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오, 평강의 왕이라고 해 보십시오. 기막힌 일 아닙니까? 상상을 초월한 일입니다. 기묘자라는 것은 기묘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보통 사람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묘한 일을 행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말하시는 것입니다. 모사는 지혜의 근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핏덩어리 어린 아기를 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영존하시는 아버지, 여러분과 나를 지으시고 있게 해주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평강의 왕,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써 전쟁을 그치게 하고 싸움을 그치게 하고 평강을 가져오는 임금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역사 이래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어린 아기가 없었어요. 예수 이외에 이와 같은 이름을 갖고 태어난 이가 없었고 이것도 예수님 탄생 700여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된 일인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사야 32장 2절의 말씀은 굉장한 위로가 됩니다.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광풍을 피하는 사람, 폭우를 가리우는 사람이 바로 그 어린 아기였다는 것입니다. 마른 땅에 냇물 같은 분이고 곤비한 땅에 바위 그늘 같이 그림자가 이루어지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2. 예언의 성취
둘째로, 바로 예수님의 탄생은 예언된 것 뿐 아니라 그 성취가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막연히 상징적으로 예언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지금부터 2천년 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됨을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겠다고 했으니까 진짜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요셉하고 정혼을 했으나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속도위반을 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요사이 같으면 속도위반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때는 그런 것 했다가는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들은 정결한 청년이요, 처녀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잉태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0절로 35절에 보면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상상으로 생각만 해도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마리아가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배가 불러옵니다. 요셉이 가만히 보니까 큰일났습니다. 자기 약혼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배가 불러지니까 일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했기 때문에 마리아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기를 원치 않아서 어찌하든지 조용히 마리아하고 헤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사람들은 요셉보고 저 나쁜 놈의 자식 기다리지 못하고 속도위반을 해서 마리아를 잉태하게 만들었다고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그 책임을 걸머지고라도 뒤로 물러가기로 작정을 하고 마리아하고 약혼을 파혼하기로 작정을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꿈에 천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로 25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참 요셉은 칭찬할만 합니다. 그의 약혼녀가 아무리 성령으로 잉태했다 하더라도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서 얻을 모욕과 정죄의 시선을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몸서리칩니다. 그런데 밤에 꿈속에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 사연을 설명하니까 두말하지 않고 그 천사의 말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은 다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왈가왈부 말을 하고 이유를 대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하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수하게 따르는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해할 수 없어도 무조건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믿고 순종하여 마리아를 데리고 와서 마리아가 무사히 해산하도록 전력을 다하여 도와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로마의 황제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고향땅에 가서 호적하라고 했습니다. 등록을 하라.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는 다윗의 혈통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가 불러오는 만삭된 아내를 데리고 그는 베들레헴으로 서서히 걸어갔습니다. 늦게 도착하니까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온 사람들이 다 미리 와서 여관을 다 점령하고 민가도 다 점령하고 올데갈데 없어요. 그런데 베들레헴에 도착하자마자 마리아는 해산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큰일났습니다. 급하니까 올데갈데 없으니까 짐승의 우리가 하나 비어 있어서 짐승의 우리에 들어가서 해산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양의 우리에서 태어나서 제일먼저 누인 곳이 양의 여물먹는 여물통에 누인 것입니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물통에 누인 것은 우리 모든 인류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구원 얻는다고 하신 것처럼 태어나서 제일 먼저 뉘인 곳이 밥그릇입니다. 짐승의 밥그릇에 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도 부드러운 자리에 드러눕지 못하시고 짐승의 여물통에 누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들판에서 양무리를 치고 들판에 양무리 사이에서 잠을 자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누가복음 2장 8절로 20절에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목자들만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한 것이 아니라 동방박사 세사람도 방문했습니다. 동방박사니까 그 당신에 오늘날 이란이나 이라크에 있는 박사인데 이 사람들은 베들레헴까지 오는데 몇 달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나타난 별은 벌써 몇 달전에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을 이끌어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쯤 되어서 그들이 유대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헤롯궁을 찾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까 틀림없이 임금님의 궁전에서 태어나신 줄 알고 헤롯궁에 찾아가니까 헤롯이 놀래서 반역자가 태어날 것을 생각하고 이 사람들에게 만일 그 아기가 태어난 곳을 발견하거든 내게 말하면 나도 가서 경배하기를 원한다고 부탁을 했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왕궁에서 나오니까 별들이 또 인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간곳이 짐승의 우리에서 말구유에 누워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들이 선물을 가져온 것을 드렸습니다.


유향과 황금과 몰약을 들렸었습니다. 황금은 임금을 상징했습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태어날 것을 상징한 것이고 유향은 선지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선지자를 말하는 것이고 몰약은 쓰지 않습니까? 몰약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재물이 될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미 주님께 드린 선물이 임금이요, 선지자요,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는 희생양으로써의 그리스도가 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들의 꿈에 하나님 사자가 나타나서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마라. 다른 길로 고향으로 가라.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서 빨리 이곳을 떠나라. 헤롯이 어린 아이의 생명을 찾는다.


그래서 어린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어린 아기를 어느 정도 길렀는데 그 세월은 얼마나 걸렸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하심을 성경이 말한 대로 알 수 있는 것은 기적적인 탄생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난 것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리스도는 그 태어난 현장에서 예언대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고 목자들이 와서 경배한 것은 예수님이 목자장인 것입니다. 야훼는 우리의 목사시니 우리가 부족함이 없다고 목자장이기 때문에 목자의 부하들인 일반 목자들이 와서 절을 했고 그 다음 동방박사들이 와서 예수님의 생애를 예언적으로 이미 선물을 하신 것입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주어서 왕이요, 선지자요, 희생제물이 될 것을 예언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예수는 오늘날 우리의 구원과 희망의 빛으로 오신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3. 구원과 희망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첫째,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였지 않습니까? 아담, 하와를 통해서 우리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하나님께 버림받아 죽음을 가져온 조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운 조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로 온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혈통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인류조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로 47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으로써 예수님 이후에는 인류 조상이 있을 수 없어요. 첫 아담은 우리에게 사망을 가져왔으나 마지막 아담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어 그리스도는 사람들 생명의 빛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마지막 아담으로써 우리 조상으로 왔는데 그를 믿는 자마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경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기의 의로운 행동으로 구원 받으려고 하는 자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점은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걸머지고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병든 적도 없습니다. 저주받은 적도 없습니다. 죽을 필요가 없는 분인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재물이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몸찢고 피흘려서 여러분과 나를 구원하기 위한 거대한 희생을 하시고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림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고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몸찢고 피를 흘려서 그 핏값으로 우리 죄를 용서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인 우리 인류의 조상들에게 주님께서 재물을 드릴 때 그냥 드리지 말고 꼭 양을 잡아 피를 흘려 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장차 예수님이 우리의 희생제물로 오셔서 피를 흘려 우리 죄를 속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종살이 하다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양을 잡아 피를 흘려 문설주에 바르고 난 다음에 나왔던 것입니다. 문설주에 피가 있는 집은 하나님이 멸하지 않고 그대로 다 나오게 했는데 문설주에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의 모든 장자들은 다 멸하고 만 것입니다. 그 피를 보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보혈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믿음으로 여러분 마음의 문설주에 피가 뿌려지고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는데 이 죄사함이라는 것은 그냥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한번도 죄를 안 지은 것처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투성이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마음속에 뿌려지면 한평생에 한번도 죄를 짓지 않은 죄를 전혀 안 지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어서 의롭다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럼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피를 믿으면 죄를 한번도 안지은 사람으로 부끄럼없이 하나님 앞에 설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 백성이 되므로 삶의 목적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 모든 일이 끝나면 이 땅을 떠나서 우리는 천국에 가는 삶의 의미와 가치가 알려지고 죽음이 오지만 겁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은총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십자가를 통해서 놀라운 것은 새생명을 받을 뿐 아니라 새생명의 보조인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주셔서 성령이 온 증거로써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당신 이 시간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시라고 하면 이 사람 미쳤나?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이렇게 하노? 구원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나는 요사이 텔레비를 보고 놀라운 것은 개를 가지고 이름을 붙여서 내가 너 엄마다. 내가 너 아빠다고 하는데 개하고 사람하고 어떻게 생명이 같습니까? 생명의 질이 다른데...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조금도 이질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 내 아버지의 그 자녀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와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나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마음에 이상하게 느껴집니까? 아니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15절로 16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하나님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보증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는 성령이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다 그 속에 성령이 들어와 있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그 속에 마귀의 영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영이 들어와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끌고가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이 들어와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믿음, 소망, 사랑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 전인치료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우리 마음속에 쓴물이 가득합니다. 왜, 이 세상에 살면서 늘 쓴물을 마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악의 쓴물을 마시고 미움과 원한의 쓴물을 마시고 질병과 고통의 쓴물을 마시고 저주와 가난과 낭패와 실망과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의 쓴물을 마시고 죽음의 공포와 좌절의 쓴물을 마십니다. 천지가 쓴물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쓴물이 가득하므로 불행합니다. 이 쓴물을 달게 해보려고 우리가 얼마나 애를 쓰는 것입니까? 지위, 명예, 권세, 돈, 교육, 아름다운 집, 좋은 옷, 좋은 환경을 만들어서 마음속에 쓴물을 없애려고 하는데 쓴물이 없어지나요? 옛날에 우리가 자랄 때는 6.25사변 때이기 때문에 정말로 가난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밥먹고 산다는 것이 모든 삶의 가장 중심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여러분 보면은 뭐 노숙자가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러나 그때는 모두다 헐벗고 굶주렸는데 지금은 그래도 밥은 먹고 옷은 다 입고 그때보다는 훨씬 잘 삽니다.


그런데 그때 사람하고 비교해서 지금 훨씬 행복하냐. 훨씬 덜 행복하거든. 왜, 그때는 죽도록 살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날은 하루에 41사람이 자살합니다. 그중에 우리가 들어가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41명이 자살합니다. 환경이 아무리 아릅답게 되어도 마음속에 쓴물이 달아지기 전에는 행복해지지 않아요. 돈이나 지위나 명예를 가지면 행복할 줄 알아도 마음에 그것이 행복을 갖다주지 않습니다. 행복은 무엇이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모실 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쓴물이 달아지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영혼에 쓴물을 달게 하시고 마음에 행복을 갖다주시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나가면 매일같이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쓴물을 달게 하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쓴물은 매일같이 달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밖에는 우리 마음에 쓴물을 달게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육신의 병을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저가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실로 우리 질고를 지고 우리 슬픔을 당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법적으로 보면은 2천년 전에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병을 담당하셨어요. 이것은 법적인 것입니다. 실제적으로는 아직 내가 병이 들었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나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할까요? 법을 가지고 싸워야돼요. 여러분, 여러분 법적으로 여러분이 마땅한데 고소를 당하면 변호사를 사서 대응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주의 종에게 찾아가든지 다른 성도들과 합쳐서 병의 원수마귀를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저가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네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내가 네게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라고 했었습니다. 단호한 결심을 해야 돼요. 병 안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병이 듭니다. 병이 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병을 이기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안에서는 이기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병을 짊어지고 갔기 때문에 병하고 매일같이 싸워서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병을 극복해야 돼요. 오늘도 여러분 교회왔으니 예수 이름으로 병을 극복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혼의 쓴 물도 달게 해주시고 육체의 질병에서도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시편 103편 3절로 5절을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우리 육신의 조상 아담은 타락해서 우리에게 영적으로 죄로 말미암아 죽게 만들고 육신적으로 병들어서 죽게 만들고 환경을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 속에 뒹굴게 만들었는데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오셔서 그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병을 대신 짊어지고 그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우리에게 전인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 소망 있네. 영원한 영적인 치료와 육신적인 건강과 환경에 가시넝쿨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하여 아브라함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 우리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의 복이 뭡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네게 복주고 복주며 번창케 하고 번창케 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새해에는 복주고 복주며 번창케 하며 번창케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충만을 항상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시므로 음부와 지옥을 멸하신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에서 천국 낙원으로 여러분을 가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께서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천국 올라가셔서 2천년 동안 천국에 올라오는 당신의 자녀들의 거처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나의 거처도 주님이 예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을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하사 함께 이미 승천해서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있는 우리 처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놀라운 하나님 말씀대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의 새로운 모습을 마음속에 확실히 바라보고 믿음으로 타협하지 않고 나가면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깨달아 알고 바라보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나가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신앙에 승리하려면 목표가 분명해야 돼요. 나는 예수님 안에서 결코 이기겠다. 목표가 분명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겨도 좋고 안 이겨도 좋다. 이길는지 안 이길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나는 승리하는 삶을 살겠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삶을 살겠다.


목표가 분명하고 꿈이 선명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죄악과 마귀와 질병과 저주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을 마음속에 상상하고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불퇴전의 믿음을 가져야 돼요. 뒤로 물러가면 안됩니다.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절대로 물러가지 말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입술의 고백을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당당한 입술의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여러분 것이 되고 마귀가 다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희미한 신앙은 안됩니다. 싸움은 치열한 싸움인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데 희미하게 싸워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싸움은 너죽지 너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의 싸움이기 때문에 영원히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목표가 뚜렷하고 꿈을 확실히 가지고 물러가지 않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시인하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보통 싸움 같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왜 십자가를 걸머졌어요? 십자가가 여러분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시고 6시간 매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그 고통 가운데 죽음을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과 대항해서 싸우는데 그만한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애쓰고 힘써서 싸워야 주님이 우리를 구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워서 이겨놓은 것도 우리가 취하기 위해서는 그런 결심이 있어야 돼요. 새해에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된다는 목적을 꼭 가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새롭게 된 모습을 항상 마음속에 상상 하십시오. 늘 꿈꾸십시오. 그리고 절대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한발자국 물러가면 두발자국 전진하고 두발자국 물러가면 세발자국 전진하더라도 물러가면 안됩니다. 물러가면 주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강하고 담대하고 용감하게 말하십시오. 할 수 있다고 말하십시오. 이긴다고 말하십시오. 나는 안 죽는다고 말하십시오.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하십시오.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패배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마음을 통해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떠나서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필요하고 여러분과 함께 주님께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무효가 되지 말고 효과를 발생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솔제니친이라 하면 여러분 위대한 문학가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탄분으로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솔제니친은 구 소련의 작가로서 당시의 체제를 비판하다가 반역자로 몰려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시베리아 감옥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강제 노역을 당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고통 가운데 암에 걸렸습니다. 춥고 헐벗고 굶주리고 배고프고 중노동을 하는데 암이 걸렸으니 이제는 죽은 목숨인 것입니다. 그는 좌절 가운데 정신력이 희미해지고 삶의 의지를 상실하고 탈진하여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눈도 희미하고 정신도 아물아물하고 말도 더듬고 걸음도 잘못걸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철창을 이렇게 잡고 있는데 어떠한 사람이 앞에 오더니만 자기를 가만히 눈을 맞춰 보거든요. 보더니만 발로써 그리는데 보니 십자가를 크게 하나 그려요. 그려놓고 난 다음 손으로 십자가를 가르키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지나가버립니다. 말을 한마디도 안했어요. 솔제니친이 철창 밖에서 하는 그것을 보고 꿈인지 생시인지 그 사람이 천사인지 사람인지 구별을 못했습니다. 그 사람이 지나고 난 다음 발로써 그리던 그 자리에 십자가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갑자기 십자가를 통해서 큰 생기가 그 몸속에 들어왔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했던 마음속에 용기와 희망이 생기고 살 수 있다. 살아가야 되겠다는 힘이 생기고 암을 이길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간수에게 부탁을 해서 성경을 하나 갖다달라고 해서 성경책을 넣어주기 때문에 그는 그때로부터 주야로 성경을 읽고 성경 가운데서 용기와 희망을 얻고 난 다음에 8년 동안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얻게 되고 암이 깨끗이 나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우리에게 갖다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있는 말씀대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짐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죽음 내 죽음으로 받아들이면 예수 생명 내 생명으로 부활도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미국으로 추방당했는데 미국에서 추방되어서 그가 시문학 활동을 했고 그 문화 활동중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책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탔었습니다. “러시아의 양심”으로 오늘날도 존경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곤비하고 참담한 땅에서 고통 받을지라도 십자가를 생각하고 예수님을 의지하여 새 생명을 얻으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얻고 육체의 질병에서 치료 받고 저주에서 해방되어 아브라함의 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각오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 다 잃어버려도 보배인 성경 하나 가지고 있으면 사지에서 다시 부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인간이 황무지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받아들인 여러분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긍정적인 고백만 있으면 하나님이 그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하나님은 변역치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걸머진 것은 우리 육신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우리 인생을 망쳐 놓은 것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마귀가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풍성히 얻게 하려 왔노라. 풍성한 기쁨, 풍성한 평안, 풍성한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입니다. 2천년 전 크리스마스에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여러분 가운데 와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행위로써 얻는 대가가 아닙니다. 구원이신 예수님을 믿고 모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내 손녀와 손자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지고 왔어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갖다주는데 받으니까 기분이 참 좋더라구요. 대가를 좀 줄까하다가 안줬습니다. 왜냐하면 선물은 대가를 주면 안되기 때문에... 선물은 선물로 받아야 되므로 공짜로 받았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구원은 대가를 통해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대가없이 무조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리스마스의 선물로 그 아들 예수님을 주셨고 그 아들 예수가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가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예수가 바로 영광이요 승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구원받고 난 다음에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일인 것입니다. 변화와 성장은 구원을 받고 난 후에 시작되는 것인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로 오신 것을 기억하고 찬양해야 될 날인 것입니다. 이날보다 즐거운 날이 사실 없어요. 사람들은 모두다 죄와 정죄감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죄없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조용한 시간에 자기 마음속에 죄책이 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삶이 허무하고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인생이 무엇이냐 잠시있다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러한 헛된 생활 속에서 고통 당하고 죽지요. 안 죽는 것같이 생각하지만 죽는 공포도 있고 죽음의 괴로움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자가 왔으니 얼마나 큰 선물이요 위대한 은혜인 것입니까? 죄에서 건져 주시고 허무와 무의미에서 건져 주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영원한 희망으로 우리 앞날을 비춰주시는 주님이 여러분의 구주로 오늘 오셔서 여러분과 함께 계신 것입니다. 볼찌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 너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노라. 이 자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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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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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2:1-10)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좋은 인간 관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부모와 자식, 부부, 형제자매, 친구, 이웃 등 모든 삶은 인간관계에 의해서 시작되고 인간관계에 의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가 있을까요? 삶의 행복과 불행도 인간관계가 좌우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버드대학교의 위간(A. E. Wiggan) 박사는 직장, 가정, 사회생활 등 각 분야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조사했습니다. 왜 두드러지게 실패를 하는가. 그 결과 전문적인 지식이 모자라 실패한 사람들은 전체에서 불과 15%밖에 안 되었습니다. 교육이 부족해서 노하우가 없어서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해서 그는 인생에 실패했다. 그 사람들은 전체 15%밖에 안돼요. 나머지 85%의 사람들은 모두다 인간관계를 잘못했기 때문에 인생에 실패하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미국의 카네기 재단에서는 5년간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사람 1만명을 대상으로 ‘성공비결’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는데, 위간 박사와 동일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즉 85%의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잘했기 때문에 인생을 성공했다고 그렇게 결론이 나왔습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경영자 수업(MBA) 과정에서 유수기업 CEO들 즉, 사장들을 대상으로 ‘성공의 주요 요건’을 조사했는데 여기서도 85%의 사람들이“원만한 인간관계 및 다른 사람과의 공감 능력”에 의해서 성공을 했다고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여러 연구를 통해서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 이렇게 앉아서 같이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하고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는데 계속해서 우리가 함께 행복하게 살려면 옆에 있는 사람하고 인간관계가 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의해서 삶은 시작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부부, 형제 자매, 친구, 이웃 등 우리의 삶은 인간관계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설이 곧장 다가오는데 설이란 무엇입니까? 인간관계입니다. 오랫동안 안만났던 부모님, 형제, 자매가 서로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가까운 이웃끼리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주고 받느냐. 인간관계를 원만히 갖기 위한 것입니다. 받아 맛이 아니라 먹어 맛이 아니라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삶의 행복과 불행도 이와같은 인간관계가 좌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한 가정에서 부부간에 결혼해서 사는 것도 다른 여러 가지 행과 불행의 요건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인 것입니다.


1. 이해하라

그러면 첫째로, 우리가 좋은 인간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상대를 잘 이해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 같이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면 이해를 해야 되는데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굉장히 많아요. 상대가 갖고 있는 생각을 이해해야 되고 상대가 느끼는 감정을 느껴야 돼요. 내 감정대로만 해서는 안되지요.


로마서 12장 15절로 16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 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 대단한 명령이십니다. 즐거워 하는 자에게 가서 울면 안되고 우는 자에게 가서 하하하하 웃으면 모욕을 주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상대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하고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타대학에서 실행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좋지 않은 부부관계가 건강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부부가 나이를 먹으면서 건강이 굉장히 중요한데 부부간에 인간관계가 좋지 않으면 그것이 나쁜 건강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 보면 히브리서 11장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당연히 눈에 보이는 그 자체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니라 안보이는 것이 그 원인이 되어서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물질은 이 물질 자체로써 된 것이 아니라 안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럼 부부관계의 건강도 눈에 보이는 밥을 얼마나 먹느냐. 영향을 어떻게 섭취하느냐. 그런 것 보다도 그 배후에 안보이는 파워가 있어서 그것이 건강을 이끌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안보이는 것이 무엇이냐. 연구팀은 150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아내들이 화가 났을 때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안으로 삭혔을 경우, 화를 낸 사람보다 심장병으로 쓰러질 확률이 매우 높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편에게 불만이 있거든 그 자리에서 한바탕 하라고 그것을 속에 눌러 놓으면 남편은 끄덕 없는데 아내는 심장병으로 쓰러진다는 것입니다. 화를 풀어놓는 것이 좋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밤낮으로 큰소리하고 싸우면 안되고... 꼭 속에 있는 것 풀어 놓고 싶으면 풀어 놓고 또 남편 된 여러분 아내가 불평을 말하고 원망을 하거든 이해하고 동정해서 그것 들어주라는 것입니다. 들어주기 참 힘듭니다. 그래도 심장병 걸려서 쓰러지지 않게 하려면 들어주는 것이 좋아요. 안들어주고 심장병 걸리면 얼마나 돈이 날라간다고... 들어주는 것이 돈버는 것입니다.


반면, 아내가 남편과 상의하지 아니하고 자기 독단적으로 일을 행했습니다. 은행 저금이라든지 주식이라든지 부동산 투자라든지 남편하고 의논도 하지 않고서 자기 독단적으로 해놓구선 나중에 남편에게 이야기하면 대개 그런 아내를 거느린 남편이 기절초풍을 하고 심장병으로 쓰러진다는 것입니다. 나이 먹으면 심장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심장이 중요하고 뇌일혈, 뇌병이 중요한데 그 부부관계가 좋지 못하면 눈에 안보이는 그 관계가 눈에 보이는 심장병이나 뇌졸증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실행된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결혼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12년 동안 연구한 결과 적대적인 인간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건강에 문제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서로 미워하고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관계를 가진 공무원들이 병이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결혼한 공무원들 가슴에 통증을 느끼거나, 심장 마비를 느끼고 심장 질환에 걸리는 공무원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부부간에 관계가 나쁜 사람이 그렇게 걸리는데 한 34%가 일반 사람보다 많이 심장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우리는 먼저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존중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럴 때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존중해야 되는 것입니다. 상대가 어떤 생각을 가졌느냐.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 그것을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와 오늘 조 목사 거창스러운 소리하네. 여러분 나도 그렇게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제가 여러분께 설교하는 것 여러분 들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날 들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날 보고 설교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담대하게 여러분에게 설교하는데 우리 아내 된 여러분, 남편 된 여러분 우리 함께 이해하고 동정하고 생각을 같이 해서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행복하게 한번 살아보십시다.


방송인인 이숙영 씨는 <맛있는 대화법>이라는 책에서 대화의 요령을 잘 설명하고 있어요. 특별히 저자는 방송인으로서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송을 하니까 말을 많이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무엇보다도“잘 듣는 것이 최고의 대화”라고 그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을 잘하는 비결에 대해 “1, 2, 3의 법칙”을 강조하는데 1대 2대 3의 법칙이란, 하나를 이야기 했으면, 둘을 듣고, 셋은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라는 것입니다. 말은 하나만 하고 두 번은 듣고 세 번은 옳소. 옳치거리, 옳치거리~ 그렇게 맞장구를 치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말을 했을 때 맞장구를 쳐 주는 것은, 내가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참 남의 말을 들어주기가 힘이 듭니다. 남의 말 이야기하는데 자기는 공중 쳐다보고 오른편 보고 왼편 보고 손톱 만지고... 이렇게 되면은 나하고 대화하러 온 사람에게 모욕을 가하는 것이라 말입니다. 그러면 뭐 어떻게 하느냐. 맞장구를 쳐줘야 돼요. 말하면 그래요~ 아, 그렇고 말고...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정말 수고했네요. 참 훌륭하네요. 참 좋으네요. 자꾸 맞장구를 쳐야 돼요. 별로 그렇지도 않아도 그렇게 맞장구를 쳐줘야 돼요. 우리가 맞장구를 쳐주면 대화는 더욱 깊은 유대와 공감의 분위기를 형성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좋은 인간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내 주장만 하지 말고 상대의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는 요사이 설교집을 하나 읽고 굉장히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 설교집 제목이 뭐냐면 “사랑의 배달부”입니다. 우리 어릴 때는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이 있는 핸드폰도 없고 전부 다 배달부가 갖다 나릅니다. 편지도 소식도 배달부가 갖다 나르는데 사랑의 배달부... 거기에 보니까 굉장히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있어요. 여러분 오늘 찬송을 부르는데 제가 옛날에 안하는 짓 하는 것 봤지요? 옛날에는 조용히 앉아서 점잖게 불렀는데 이제는 손도 흔들고 이렇게 하고 그게 왜 그러느냐. 그 책을 읽고 난 다음 내가 변화 되었어요. 왜, 찬송은 곡조있는 기도라고 했는데 그 책은 찬송은 곡조있는 설교다.


야~ 찬송이 설교다~ 그 이야기에 보면은 선교회에 갔는데 한 택시 기사가 한 2, 3일 동안 집회 장소에 모시고 왔다갔다 하는데 굉장히 침울한 사람이에요. 아무말도 안해. 그러니까 아~ 이 사람은 영어를 모르는구나 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영어도 유창하게 잘하고 일본말도 잘하고 몽고말도 잘하고... 그런데 왜 말을 안했느냐. 아마 마누라하고 싸운 것 같아요. 안 그러면 남자들이 아무 말도 안할턱이 없어요. 안 믿는 사람들은 부인하고 싸우면 술 안마시면 우울하니까 말 안하잖아요. 그런데 마지막날 막 웃고 교회 나오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러냐고 하니까 마지막날 찬송을 했어요. 찬송을 막 하니까 몽고말로 찬송을 하니까 이분이 찬송을 듣고 같이 찬송을 부르고 난 다음에 예수 믿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찬송이 설교가 되었어요 그분에게는... 곡조있는 기도가 될뿐 아니라 곡조있는 설교가 되었어요. 찬송에 있는 설교를 듣고 변화를 받았어요. 나는 그것 읽고 난 다음에 야~ 찬송을 우울하게 앉아서 들어서는 안되겠구나. 저도 늘 생각하기를 찬송이 조금만 길어지면 쓸데없이 너무나 찬송을 길게한다. 내가 설교를 해야 되는데 시간 다 빼앗아 먹는다. 찬송 좀 짧게 하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 그것 아니구나. 찬송이 곡조있는 설교구나. 성령께서 내 설교보다도 찬송까지 보태서 곡조있는 설교를 하니 듣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변화 되겠느냐. 그래 그 다음부터 나도 곡조있는 설교할 때 나도 따라서 춤도 추고 곡조에 붙여서 즐겁게 찬송해야 되겠다.


제가 1년 동안 읽은 책 중에 가장 감동을 입은 책이 사랑의 배달부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것을 읽고 있는데 내가 이 설교를 하나님이 하라고 하니까 이 설교하고 딱 궁합이 맞는다고... 우리가 서로 대화를 하고 이해와 동정을 하자면 상대의 태도를 자세히 살펴서 그 태도에 우리가 합쳐줘야 되는 것입니다. 상대의 자리에 보려고 노력해야 되구요. 무슨 일할 때 내 생각만 하면 안돼요. 저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 하겠는가. 내 입장에서만 자꾸 내가 말하면 안되잖아요.


누가복음 6장 36절로 37절에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이것 내 말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상대의 자리에 서보려고 노력하라는 그 의미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 의미가 깊은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은 겸손과 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로 8절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삶은 우리 인간의 삶을 다 이해하고 동정하고 품어서 우리를 대변해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으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요사이 젊은 신학생들에게 늘 말할 때 “너희들이 강단에 서서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이 세상에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병들고 고통스럽고 실패하고 낭패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불안과 초조, 좌절과 절망 이러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 사람들의 고통을 들어주는 설교를 하라.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설교해라! 네가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말라. 너가 재미있다고 너 재미있는 식으로 하면 사람들이 너 얼마나 잘한다고 구경하러 오겠노? 사람들을 도와주는 설교를 하라.” 여러분 저는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서 하나님 시간을 가지고 그 귀한 성도들의 시간을 빼앗는데 내가 하고 싶은말 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성도들의 그 필요한 것을 알아서 그것에 대한 해답을 말씀하게 해주시옵소서.’


제가 설교하는게 여러분 도움이 되지요? 경험이 적은 목사일수록 자기 소리를 자꾸 한다고... 그러나 경험이 많을수록 성도들이나 교회 참석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을 말씀으로 해결해 주려고 노력한다구요. 대답은 여기에 있었는데 우리가 주의 종이 되는 것은 평신도보다 성경을 더 잘 알고 있고 많이 알고 있고 공부하기 때문에 대답은 성경에서 드려야지 인간의 생각으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공감할 때 성공적인 인생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상대의 마음의 생각과 형편을 이해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2. 동정하라


둘째로, 좋은 인간관계는 동정을 해야 돼요.


냉정한 마음을 가지고는 좋은 인간관계가 안되는 것입니다. 동정을 해야 돼요. 내 주장만 하지 말고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바쁜 세계에 이기주의적인 세계에 사람들이 남의 말 안들으려고 해요. 자기말만 일방적으로 자꾸 하지요. 그리고 상대의 말을 듣는데도 방법이 있어요. 여러분, 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입은 하나를 주셨고 귀는 두 개나 주셨습니까? 입보다도 두배나 더 많이 들으라 그 말인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에게 말하는 것보다도 두배나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남편이 자기 아내 좋아할 것입니다. 대개 아내는 여성들은 말 잘하잖아요. 남편이 입열기도 전에 몇 배로 말을 하니까 정신이 아뜩해지고 말거든요.


제일 불안한 것은 집에 들어가서 부인이 원망, 불평, 탄식할 때 남편이 불안합니다. 마음에 공포심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집에 일찍이 안들어오려고 변명을 하고 오늘 뭐 일이 많은데 잔무가 많은데 특별한 손님을 만나는데... 그런 것 참말도 듣지만 내가 보기에는 90%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집에 들어와서 부인하고 많은 시간 안가지고 빨리 자려고... 왜냐하면 부인의 말을 듣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주장만 하지 말고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두배나 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말도 더디 하고 성도 더디 내고 듣는 것은 속히 귀를 기울여 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되도 않는 소리해도 들어줘야 해요. 사람들이 말을 듣는데는 약 17%의 사람들은 자기 선입관을 정해 놓고 판단하며 듣습니다. 상대방이 이야기하면 자기가 이미 딱 결정해 놓고 난 다음 말만하면 너 이것도 틀렸다. 저것도 틀렸다. 틀렸다. 입으로 말 안해도 이미 판단을 하고 들으니까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을 듣는 사람들이 17%나 되는데... 그 다음 대화를 하면 자꾸 질문을 해요. 그 사람 말하는데 자꾸 질문을 하니까 그 사람이 상대방이 자기 이야기를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대화를 하는 사람이 26%나 되는 것입니다. 상대 이야기의 맥을 끊어요. 계속 질문함으로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 조언하며 듣는다. 상대의 말에 간섭을 하고 조언을 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상대의 말을 잘 못 듣습니다. 자꾸 간섭을 합니다. 말을 하는데 말을 도와 주려고 해요. 약 35%의 사람들이 그렇게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5장 2절로 3절에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잠언 10장 19절에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그러므로 말을 아끼라고 성경은 많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감정까지 동정하며 듣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대화하는 사람의 22% 사람인 것입니다. 말하는 것을 아 그래요? 같이 눈물을 흘리고 같이 탄식을 하고 좋아하면 같이 좋아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경청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상대와 대화를 하되 판단하지 말고, 질문하지 말고, 평가하지 말고, 조언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의 입장과 느낌을 동정하면서 듣고 결론은 하나님 말씀으로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결론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상대와 대화를 하고 결론 내리기를 원할 때는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은 이럴 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리석게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놀랍고 지혜로운 책이 어디 있나요?


동정은 마음 뿐 아니라 행동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대화를 할 때 우리가 마음에 동정함과 동시에 내가 실제로 도와줄 수 있으면 행동까지 따라서 도와줘야 되는 것입니다. 짐을 함께 걸머져 주면 참된 동정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8절로 9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여 형제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겸손하고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것은 동정을 말만 가지고 하지 말고 행동으로 동정을 하라는 것입니다.


생텍쥐베리가 쓴 <어린 왕자>에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내가 얻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세계적인 CEO 즉, 사장들이 꼽는 분 중에, 유명한 제약업체인 화이자(Pfizer)의 사장 제프 킨들러 씨가 있습니다. 저분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 마음을 얻는데 세계적인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하여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가를 알아 보니,‘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습관’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듣는 데 많은 노력과 시간을 기울인 것입니다. 이것이 화이자를 세계 최대의 제약회사로 성장시킨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박노환 씨는 <경청으로 시작하라>는 책에서 “듣기는 의사소통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잘들어야 의사가 서로 소통을 한다는 것입니다. 경영 컨설턴트이자 리더십, 라이프 코치인 허병민 씨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인데, 이것은 “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듣는 데서 나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귀가 너덜너덜하도록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들으라는 것입니까? 한 가정에서도 부부간에 가장 들어줘야 되는데 참 미안하게도 우리가 잘 안들어 주기 때문에 그게 부부간에 언제나 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들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말씀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좋은 인간관계를 갖고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열 번, 백 번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는 것은 바로‘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좀처럼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동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어요. 어느 집에 부인이 남편이 담배를 많이 피워요. 늘 담배연기가 가득하고 남편 담배 안 피우게 하기 위해서 아무리 부탁을 해도 남편이 들은체 만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 대문 밖에 신문을 픽업하러 가서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담배를 많이 피우면 암에 걸린다. 그 기사가 걸렸기 때문에 부인이 뛸 듯이 좋아했습니다. 자기 말은 안 들어도 이러한 전문가가 신문에 이렇게 냈는데 얼마나 좋으냐. 그래서 남편에게 그 신문을 들고 가서 “여보 오늘 신문에 크게 났는데 담배를 많이 피우면 폐암에 걸린다고 해 놓았어요.” 그러니까 그 남편이 “그래? 싸인펜 가지고 오세요.” 그 부인이 뛸 듯이 좋아했습니다. 금연이라고 싸인을 할 줄 알고... 그래서 싸인펜을 가지고 오니까 남편이 뭐라고 적냐하면 신문사절! 그리고 이것을 대문가에 붙이라고... 부인이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얼마나 다릅니까? 부인은 금연이라고 쓸줄 알았는데 남편은 이런 신문은 사절한다. 사람들이 서로 해석을 다르게 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우리가 남의 신을 신고 보름 동안 걸어보기 전에는 남을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일을 하지 말게 하옵소서.” 상대방의 신을 보름 동안 신고 다녀 보면은 발에 맞는지 안맞는지 알고 비난할 것이냐 안할 것이냐 마음에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어보지 않고 난 다음 상대방을 비난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와 대화를 하되 판단하거나 질문, 평가, 조언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과 느낌을 동정하면서 듣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를 기울여서 동정을 하라.


3. 사랑하라


셋째, 좋은 인간관계는 사랑을 하라.


우리는 막연한 하나님을 알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 어떤 분이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어떻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내셔서 우리 위해서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려 죽기까지 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막연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뚜렷한 우리가 체험을 하고 알 수 있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냐. 죄인을 정죄치 않으시고 사랑하는 하나님이다. 언제 하나님이 죄인을 정죄하지 않고 사랑하는 하나님이신 것을 보았느냐? 우리는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라.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치 않으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졌지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이런 희생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 하나님은 사랑이시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죄와 허물을 당장 심판치 않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덮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 알아요. 우리 예수님께서 죄인을 당장 심판하거나 그 자리에 정죄하지 않고 오래 참으시고 기회를 주시고 기회를 주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자를 다 돌로써 쳐서 죽이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오래 참으시고 이 여자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집에 돌아가서 다시 죄를 짓지 말라.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3절로 5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여 영적으로 다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 죄를 다 청산하게 하고 사흘만에 부활하게 하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받은 우리는 이제는 이 빚을 갚아야 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값없이 은혜를 받았으니 우리도 이웃에 이와같은 은혜를 베풀어야 되겠다. 하나님의 자녀와 같이 하나님께 배운대로 행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10절에 참 이 말씀은 너무 좋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로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구원을 받았으니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들을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으니 왜 구원해 주셨느냐. 우리도 이웃을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베풀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는 우리도 하나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는 자식들이 아버지를 닮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는 닮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사랑의 자녀들이 되어서 이웃에 사랑을 베푸는 우리가 되어야 될 것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7절로 28절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요한일서 3장 17절로 18절에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부메랑이란 기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든 나무 무기인데 탁 던지면 공중의 새를 딱 맞춰서 새를 떨어뜨리고 부메랑은 휙 도로 내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난 다음 그것이 도로 내게로 돌아오는 것을 부메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미국 대사를 지낸 제임스 레이니 교수는 미국 에모리대학교의 켄들러 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 건강을 위해서 매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면 고급 주택지를 지나가게 되는데 거기에 벤치에 노인 한 사람이 늘 앉아 있습니다. 아무도 대화를 하지 않아요. 이 레이니 박사가 가다오다 이 노인과 같이 이야기를 해주고 그 노인을 모시고 집에 데려다 주고 정원의 잔디도 깎아주고 그랬는데 얼마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아침에 지나가면서 보니까 노인이 없어요. 저녁에도 보니까 벤치에 안 앉아있고... 그래서 이상해서 물어 보니까 노인이 세상을 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이 세상을 떴으니 참 안됐다고 그 장례식 날짜를 알아서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가니까 그 벤치에 앉아있던 노인이 누군지 몰랐어요. 2년 동안을 서로 대화를 했는데도 그 노인은 자기 신분을 안가르켜 줬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그 노인이 누구냐 코카콜라 회사 회장이라. 보통 부자가 아닌데 아마 고집이 셌던지 부인도 없고 자식들도 같이 안 살고 혼자 외롭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그 비서에게 유언장을 써서 레이너 박사에게 이분에게 유언장을 주라고 했는데 그 유서를 펼쳐 보니까 뭐라고 했느냐면 “당신은 2년 동안 내 집앞을 지나면서 나의 말벗이 되어준 친구였소. 나의 친구 레이니 고마웠소. 내가 당신에게...” 기절초풍할 만합니다. “25억 달러 코카콜라 주식 5%를 유산으로 드립니다. 받아서 쓰십시오.” 25억 달라면 우리 한국 돈으로 2조 5천만원입니까? 왔다갔다 친구해주고 이만한 돈이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이 레이너 박사는 한국에 대사로 있을 때도 저는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저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이 제임스 레이니 교수는 그 돈을 자기가 쓰지 않고 대학에 기부하여 노인의 유산을 값지게 사용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에모리대학교는 급성장하며 남부의 유명한 대학이 되었고 에모리대학은 16년 간 이 레이너 박사를 총장으로 모셨습니다. 이게 부메랑입니다. 내가 심은데로 거두는 것입니다. 내가 친구가 되어주었더니 그분은 돌아갈 때 그 모든 유산을 그에게 돌려 주었다. 부메랑인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꼭 좋은 일을 많이 하십시오. 그 좋은 일이 여러분에게 돌아옵니다.


내가 이름은 기억이 안나는데 남부의 어떤 자매님 한분이 암을 수술 받았습니다. 병원에 가서 암을 수술했는데 그 돈 전체가 5만불인가 돼요. 그 부인이 혼자 사는 과부인데 도저히 돈을 갚을 수가 없어요. 큰일났어요. 암은 수술을 잘했는데 갚을 도리가 없어요. 그런데 이제 병원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쪽지 하나가 왔어요. 아주머니의 병원값은 내가 다 갚았습니다. 기억 나시지요? 옛날 내가 학생시절에 너무 어렵고 가난해서 집집마다 물건을 판매하고 다녔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하루는 음식을 좀 얻어먹고 싶으나 부끄러워서 빵 달라는 말은 못하고 아주머니 집에 가서 물한컵 달라고 했는데 아주머니가 내 배고픈 것을 보고 큰 컵에 우유를 잔뜩 담아서 나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그날 그 우유를 마시고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이 병원의 병원장으로 있습니다. 내가 우유 한컵의 값을 갚습니다. 부메랑, 내가 한 좋은 일이 내게로 돌아온다. 안돌아올 것 같지만 꼭 돌아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러므로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안보이는 과거의 일이 열매를 맺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메랑을 꼭 믿으십시오. 좋은 결실을 이 부메랑을 통해서 맺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며 살면은 여러분 인생에 행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생은 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병중에 가장 나쁜 병이 외로움을 가진 고독의 병인 것입니다. 고독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희로애락을 인간관계에서 만들어 내야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안좋은 것은 또 그 때문에 기도도 하게 되고 회개도 하게 되고 오산리 기도원에도 가게 되고 좋게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난 늘 내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은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좋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좋게 만들어 주실 것이니 좋고 종국적으로는 다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좋은 것은 좋아서 선을 이루고 나쁜 것은 합동하여 유익을 얻기 때문에 좋고 결국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좋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꿈꾸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 문제의 숙제가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는 이 법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꼭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고 난 다음에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것처럼 여러분의 삶이 아무리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지라도 성령이 운행하시는데 성령이 안보이잖아요. 여러분 안보이는 여러분의 가슴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생각이 안보이지요? 여러분의 꿈이 안보이지요? 여러분의 믿음이 안보이지요? 여러분의 말이 안보이지요? 성령은 그것을 통해서 역사하여 여러분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가를 해결하면 할수록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 함께를 잘 할 수 있는 길이 이해와 동정과 사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도 이해와 동정과 사랑을 금년도에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함께 열심히 하십시다. 결국 인생은 한번 밖에 못사는 것인데 하나님이 주신 이 한번 밖에 못사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돼요. 행복하게 살고 행복을 만들어 가면서 살아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면 행복을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상대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합시다. 내 아내를 내 남편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합시다. 그렇게 되면 행복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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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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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8:1~8)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기도를 해본 사람은 응답이 속히 오지 않아서 낙심한 적이 한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얼마 동안 응답되지 않는다고 낙심치 말고 끈기 있게 버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지난 오십여 년의 목회생활 동안 수많은 사람과 신앙상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대개 이렇습니다.“우리 가족은 주일성수를 꼭하고 십일조도 하나님께 바치는데 왜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해 안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또 혹은“저는 몇 년 째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은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어떤 분은“저는 병 낫기를 위해 늘 기도하는데 왜 병이 낫지 않습니까? 무엇 내가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무엇을 회개해야 됩니까?” 그런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노력하고 기도하는데 속히 응답되지 않아서 낙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한번도 기도생활에 낙심 안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인 것입니다.


몇 년 전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 교회 성도들의 하루 기도 시간이 평균 24분 25초라고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 전에는 평균 기도 시간이 27분이었는데, 점점 기도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E. M. 바운즈는「기도의 능력」이라는 책에서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마귀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마귀는 기도가 빠진 성경 공부, 기도가 없는 봉사 등 기도가 없는 종교는 하나도 겁내지 않습니다. 마귀는 오직 우리가 기도할 때 두려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데도 응답이 속히 오지 않는다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찌하든지 응답될 때까지 인내하며 고집을 부리고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1. 과부의 호소


오늘 읽은 성경말씀을 보면 첫째로, 과부의 호소가 있습니다.


이 성경에 기록한 과부는 아무도 도와줄 자가 없어요. 남편 세상 뜨고 일가친척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그 억울함을 풀 수가 없어요. 마음에 원한이 되었습니다. 그냥 한번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원한이 되어서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에 그 과부는 재판관에게 나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갚아 주십시오.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재판관이 속으로 너털웃음을 웃었어요. 네가 누구기에 나보고 와서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 달라고 하느냐? 네가 무슨 지위나 명예나 권세가 있느냐? 배경이 있느냐 돈이 있느냐 교육이 있느냐.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내가 무엇 때문에 너 위해서 애를 쓸 필요가 있느냐. 그래서 재판관은 이 여인의 간구를 무시해버렸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너무나 이 원수가 힘겨웠습니다. 여러분 우리로 이럴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사람이 아니고 그 배후에 있는 마귀인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이 악의 영들이 사람 뒤 배후에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사람 배후에 마귀가 조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인 이상 예수님 안에 있지 아니하면 언제든지 마귀의 밥이 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통해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배후에 있는 원수 마귀를 예수 이름으로 내어 쫓고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귀가 우리 기도를 막습니다. 내 기도를 못하도록 막을 뿐 아니라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는 것을 막습니다. 그러므로 이 마귀는 아주 인내력이 강한 놈입니다. 우리는 마귀와 싸울 때 마귀보다 더 굳센 결심을 가지고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말한 것은 원한 맺힌 과부의 소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한이라는 것은 쉽게 물러서지 않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소원이 아닙니다. 원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원한이 좋게 포기되지 않는 소원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음에 그런 원한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생각으로 응답해 주셔도 좋고 안해주셔도 좋고 어쩌다가 응답해주면 다행이고 안해주면 그뿐이고... 이러한 속마음이 있으면 마귀가 절대로 그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원한이란 마음을 콱 굳게 먹고 뒤로 물러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사무엘상 1장 10절로 12절에 한나라는 여인의 간절한 기도와 간구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한나는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의 아내로써 오랫동안 아기를 낳지 못하자 이 엘가나는 브낫나라는 첩을 구해가지고서 곧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한나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천대했던지 한이 사무쳤습니다. 그냥 소원이 아닙니다. 한에 사무쳐서 성전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너무 한에 마음이 꽉 들어찼기 때문에 말이 안나와서 입만 들썩 거립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 되어야 말이 나오지 너무 답답하면 말이 탁 막혀서 말이 안나옵니다. 엘리 제사장이 가만히 보니까 여자가 와서 입만 덜썩덜썩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여자여, 왜 대낮부터 술을 먹고 와가지고서 하나님 성전에서 추태를 부리느냐. 술 끊어라. 그러니까 한나가 하는 말이 제사장님, 내가 술이 취해서 와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원한이 사무쳐서 마음에 원한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내게 아들 하나를 주시면 그 아들의 머리에 삭두를 대지 않고 헌신해서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기도 좀 해주십시오. 그러니 제사장이 안심하고 가라! 여러분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축복을 하나님 대신하면 그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들도 복을 빌면 그 복이 임합니다. 저주하면 저주가 앞길을 막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국가에서는 복을 비는 것이 항상 습관이 되어서 사람만 만나면 “GOD bless you!” 하나님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또 헤어질 때도 “GOD bless you!”하나님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꼭 축복을 빕니다. 저도 제일 처음 해외에 부흥회를 나갔을 때 날 만나는 사람마다 날 보고 “GOD bless you!” 지가 날 언제 안다고 날보고 자꾸 복을 빈다고 그러냐. 보니까 기독교 전통에서 하나님이 복을 빌도록 우리에게 명령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모두다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외국인 만나면 꼭 “GOD bless you!”하나님 복을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을 하는데 한국 사람에게는 전통과 문화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못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잘 가십시오 그렇게 말하지 하나님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꼭 그렇게 말 안하게 되니 죄송한 일입니다.


여러분 더구나 주의 종이 축복을 하면 복이 임하고 주의 종이 저주하면 저주가 임합니다. 이 엘리 제사장은 신령한 제사장이 아닙니다. 좀 기도도 안하고 좀 영이 무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분이 한나에게 편안히 가라. 안심하고 가라. 그 말을 듣자 한나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때부터 얼굴을 씻고 눈물을 닦고 몸을 단장하고 음식을 먹고 기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자 어린 아기를 낳았는데 아들인 그 유명한 선지자 사무엘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너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라 하신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경에는 보면 내가 너 말을 듣고 네가 말한대로 시행하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원한 맺힌 기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 기도, 이러한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십니다. 이 재판관도 이 여자가 돈도 없고 교육도 없고 빽도 없고 집안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빈손든 여자인줄 알고 무시했으나 한가지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원한에 사무쳐서 밤낮으로 부르짖고 기도합니다. 아침에도 점심때도 저녁때도 이 여자가 부르짖으니 처음에는 무시했으나 나중에는 그 여자만 보면 간이 덜컹 내려앉습니다. 아이구 또 왔구나. 나중에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 여자를 위해서 정의로운 판단을 해주겠다는 소원, 정의감으로 해준 것이 아니라 밤낮 와서 부르짖으니 견딜 수가 없어서 응답해 주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이 아주 막감당하게 호소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 불가능하게 보이는 호소


불가능하게 보이는 호소, 이 호소를 무지막지한 재판관도 나중에는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2절에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기가 막힌 여인의 호소에 항복하고 만 것입니다. 기도가 기막히게 힘든 상황에서도 절망적인 부르짖음으로 나가면 얼마동안 응답이 없는 것 같아도 반드시 그는 흑암의 세력을 뚫고 담을 넘어 응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성경에 보면은 이 과부의 기도에 얼마동안 듣지 아니했다고 말했습니다. 재판관이 얼마동안 안들었으나 영 오랫동안 안 들을 수가 없어요. 견딜 수가 없어요. 왜 이여자가 죽든 살든 뒤로 안물러가니까. 응답받기 전에는 뒤로 물러가지 않겠다는 마음의 각오와 결심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께 크게 축복을 받고 성도들이 큰 기적을 체험한 것은 뒤로 물러가지 않는 억척같은 기도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외국에 새벽기도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있었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새벽기도가 없습니다. 억척같은 기도를 안하고 늦잠자기 때문에... 철야기도 좀처럼 안하지요. 더구나 외국에 가면 기도원이 없습니다. 기도원이라는 것은 산간벽지에 기도처소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올라가서 부르짖고 기도하는데 그런 곳이 없습니다. 우리 한국은 새벽기도, 철야기도, 기도원 기도가 있어 사람들이 억척같이 하나님께 나가서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응답해 주시고 마귀도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억척같은 기도에 그 호소에 이기지 못하고 두손을 들고 항복하고 만 것입니다. 얼마동안 응답 안해도 그것이 응답 안한다는 조건은 아닙니다. 마귀의 저항이 있어 믿음의 시험 기간이 있을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위대한 종 다니엘이 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간절히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를 첫날 할 때 응답을 했습니다. 다니엘이 첫날 기도할 때 기도가 이미 응답 되었으나 21일 동안 기도가 나타나지 않았었어요. 그 성경에 보니 내부사항을 보니까 다니엘이 기도할 때 첫날에 기도가 상달되어서 천사에게 응답을 시켜서 보냈으나 21일 동안 마귀하고 공중에서 대치해서 밀고 당기고 했어요. 마귀가 기도를 21일 동안 막을 수가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계속 부르짖어 기도하고 낙심치 않고 뒤로 물러가지 않으니까 나중에 마귀의 진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여리고성이 한번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여리고성이 매일 한바퀴씩 돌고 제7일에는 일곱바퀴를 돌고 난 다음에 부르짖으니까 무너진 것처럼 여러분 기도를 한번에 해서 응답 안받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즉시 들으시지만 원수 마귀가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병자위한 기도를 많이 할 때 그날 즉시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전날에 하나님께 몇시간이고 엎드려 기도를 미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미리 마귀를 붙잡아 놓고 매어 놓고 그리고 와서 병자위한 기도하면 병자들이 척척 낫는데 그날 즉석해 병자위한 기도해서 좀처럼 병이 낫지 않습니다. 마귀가 막으니까. 기도를 막으니까 기도가 가다가 마귀의 저항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다니엘서 10장 12절로 14절을 굉장히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 왕국의 군주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 왕국의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 주므로 이제 내가 마지막 날에 네 백성이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21일 동안 바사 나라를 지배하는 배후에 귀신 원수 마귀가 막고 있었으므로 그가 계속해서 다니엘이 기도하니 하나님이 응원군인 미가엘은 군대장관입니다. 하늘이 군대장관 미가엘을 보내어서 협조해서 마귀의 진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귀는 여러분을 어찌하든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나 예수님이 오신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주신 공로가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보혈의 능력이 막강한 우군이 되어서 우리가 기도할 때 주의 보혈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마귀의 진이 허물어 지는 것입니다. 에수님의 이름과 보혈이 아니고는 그냥 기도해서는 마귀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귀와 싸워서 마귀의 진을 훼파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내가 다 이루었다고 외치지 않습니까? 마귀의 진을 다 멸한 것입니다. 마귀의 정사와 권세를 빼앗은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께 의지하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결심하고 나가서 기도하면 마귀의 진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실 때 왜 하나님이 나를 무시하시느냐. 왜 응답 안하시느냐? 왜 하나님이 나를 못본체 하느냐. 그렇게 생각할 때 많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자꾸 말을 해요. 너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너를 무시한다. 멸시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여러분의 기도를 막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이기냐 내가 이기냐 한번 해보자. 예수의 이름과 보혈을 의지하고 나가는 이상 우리가 반드시 이깁니다.


시간은 걸릴 수 있습니다. 일주일이 걸릴 수도 있고 20일이 걸릴 수도 있고 한달이 걸릴 수도 있고 1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고 뒤로 물러가면 안되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참고 견디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에서 낫기 위해서 저에게 안수 기도를 받으러 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기도하고 낫는 분들의 공통된 점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병들어서 온 사람이 기도 받아서 병이 나으면 좋고, 안 낳으면 할 수 없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면 절대 병이 낫지 않아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마음을 가지면 병이 낫지 않아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나는 더 이상 이 병에 끌려 다니지 않겠다. 더 이상은 이런 삶을 살지 않겠다.”는 단호한 마음의 결단으로 원한을 가지고 병낫기 위해서 오는 분들은 안수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조금 덜 한 것 같지만, 예전부터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너무 시끄럽게 기도한다고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과거에는 우리 교회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사람만 단체를 지어서 온 것 같았습니다. 우리교회는 전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모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면 배부른 사람 조용히 기도하듯이 하지 않고 너무 답답하니까 얼마나 고함을 치는지 몸부림을 치고 야단법석을 했었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 종종 좀 조용해 주십시오 하는 것은 설교를 하는데도 그냥 막 고함을 치고 기도를 하기 때문에 설교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런 기도를 했기 때문에 우리 기도가 장성하고 우리 교회가 커지고 많은 기사와 이적이 교회에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 성도들이 통성으로 기도하고 난 다음에 박수치고 찬송을 불렀는데 그때도 비난 많이 했어요. 교회가 거룩한 곳에 고함을 치고 기도하고 박수를 치고 요란하게 세상에서 놀이하는 것처럼 한다고... 제가 그때 말리지 않은 것은 얼마나 속이 답답한데 와서 부르짖고 기도하고 난 다음 박수라도 실컷쳐야 마음에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보고 야~ 한걸음 우리 성도들이 더 나갔구나 이제는 박수만 치는 것이 아니라 춤을 막 추어요. 막 춤을 추어요. 그래서 요사이 무대에서 노래할 때 그냥 가수들이 노래하는 법 별로 없잖아요. 전부 몸을 움직이고 춤을 추는데 우리 교회도 저렇게 해서라도 마음에 스트레스가 풀리면 좋지 않으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스트레스를 갖고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에 짓눌리고 살면은 불행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마음의 슬픔은 뼈로 마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지 절망을 가지고 살면 사망의 세력에 붙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몸부림치고 부르짖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죽더라도 나는 더 이상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겠다. 나는 기어코 이 가난에서 이 좌절과 절망에서 이 질병에서 놓여남을 받겠다. 비장한 각오와 결심을 하고 한서린 마음으로 부르짖으면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마귀가 막아도 안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이 여인을 아무리 무시해도 밤낮으로 부르짖으니까 감당을 할 수가 없었어요. 오늘 여러분께서 하나님께 그와 같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나가서 기도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으로 유명한 존 뉴톤은 50세까지 예수를 믿지 않는 노예 선장이었습니다.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잡아 가지고서 미국에 가서 파는 노예 선장이니 흉악합니다. 술먹고 도박하고 사람치고 노예 잡고 비참한 일을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노예를 실고 대서양을 건너가다가 큰 풍파를 만났습니다. 배가 침몰하게 되니까 예수님께 부르짖기 시작한 것입니다. 등따수고 배부를 때는 예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풍랑이 일어나고 고난 다가오니까 예수님을 찾았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좋을 때 예수님을 못찾으면 큰 시련과 환란을 당해서라도 찾으면 좋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은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가 좋을 때는 나를 안찾더니 어려울 때 나를 찾느냐. 두고 보아라. 용용 죽겠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고난 당할때라도 주님을 부르짖으면 주님은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존 뉴톤은 태평양 한 가운데서 대서양 한가운데서 큰 파도 속에 회개하고 주님을 믿고 난 다음에 마음에 평안을 얻고 기쁨을 얻어서 그 감격으로 지은 노래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라는 이 노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그에게 나오게 될 때까지 뒤에서 기도해준 것은 어머니와 아내였습니다. 그 어머니와 아내가 예수를 믿고 기도한 기간은 3일도 아닙니다. 3주간도 아닙니다. 석달도 아닙니다. 30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30년 동안 요사이 그런 아내 좀처럼 없습니다. 30년 동안 집을 돌보지 않고 배만 타고 돌아다니며 방탕한 생활을 하면 요사이는 벌써 이혼하고 도망쳤을 것입니다. 30년 동안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그 어머니는 30년 동안 그 아들의 구원을 위해서 며느리하고 합쳐서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대서양에서 풍파를 만나게 하여서 회개시킨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풍랑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풍랑을 통해야 우리가 깨어지는 것이니까. 마귀는 주로 풍랑을 주지만 어떤 때는 지옥에 보내려고 풍랑을 안줄 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께 믿음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결국에는 해를 받지 않습니다. 주께서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가 날개로써 여러분을 덮어 주시고 그가 진실하고 거짓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를 의지하면 우리는 밤에 놀랠 일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여러분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위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지 말고 물러나지 마십시오. 성경은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라고 말했었습니다. 기도를 그냥 놀이삼아 하지 말고 원한서린 기도를 하십시오. 대단히 답답한 마음으로 피맺힌 소원을 가지고 원한으로 기도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밤낮 부르짖는 원한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 안하시겠느냐. 응답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의 친한 친구인 한기총 회장인 길자연 목사님은 아버님의 병이 너무나 위중해서 결국 장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장례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히스기야 왕의 기도가 생각이 났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 통곡하고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서 15년 생명을 연장해 주었다는 그 말이 기억이 나서 장례준비를 그만 두고 무조건 도봉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에서 길자연 목사님은 담요 한 장을 덮어쓰고 바위 위에 앉아서 비를 맞으며 간절히 원한에 맺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히스기야 왕의 생명을 15년 연장해주셨으니 우리 아버지도 생명을 15년만 연장해 주옵소서.” 야~ 참 효성스러운 아들입니다. 아버지 위해서 담요 한 장 덮어 쓰고 응답받을 때까지 도봉산 그 바위 위에 앉아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그런 아들은 효성스러운 아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이 길자연 목사님을 크게 축복해 주셔서 큰 교회의 목회자요, 한기총 회장까지 되시게 한 것입니다. 바위를 붙잡고 부르짖어 그는 계속해서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일주일 동안 외롭게 앉아서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니까 아직까지도 마음에 응답이 안와서 다시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2주일을 하나님께 금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15일째 되는 날 그는 마음에 넘치는 평안이 오고 하나님이 나았다는 레마를 주시는 것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내려왔는데 장례준비를 해야할 정도로 위중하던 아버님이 완쾌되어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아버님은 길자연 목사님이 기도한 대로 15년 연장을 받으셔서 정확히 15년 3개월을 더 사시다가 천국에 가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얼마나 정확하게 응답해 주셨습니까? 우리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님께서“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러한 믿음은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꿈을 가지고 간절히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길자연 목사님이 일주일 기도해서 응답 안한다고 그만 담요 말고 도봉산에서 내려왔다면 아버님은 세상 떴겠지요. 2주일 동안 마음에 평안이 올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응답했는지 안했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러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적으로 기도하면 어느날 갑자기 마음 속에 큰 평안이 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마음에 평안과 확신이 오면서 고요하고 잠잠한 성령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네 기도가 응답받았다. 네 소원이 성취되었다. 그런 레마가 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많이 체험합니다. 집에서 많이 기도하고 적어도 5시간 이상 엎드려 기도하고 난 다음에 집회 나가서 설교하고 병자위해 기도하면 마음에 큰 기쁨과 평안과 함께 레마가 다가옵니다. 사람들이 왜 어떻게 알고 무슨 병이 나았다. 병이 나았다고 말을 하느냐. 어떻게 나았는지는 나도 몰라요. 마음 속에 그 깨달음이 오거든요. 아주 확신이 오고 깨달음이 오기 때문에 그런 담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런 병자가 낫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실 때 마음에 평안이 오고 고요하고 잠잠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까지 부르짖으십시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레마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3. 응답받는 기도


셋째로, 응답받는 기도를 할 때는 목표가 분명하고 구체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 구체적인 꿈을 가지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과부가 기도할 때 불의한 재판관이 와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내 원수라고 말했습니다. 분명히 내 원수지 그냥 왔다갔다 하는 불쾌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내 원수에 대해서 나는 원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 주소서. 목표가 분명하고 구체적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하니까 예수님께서 바디매오 앞에 서서 내가 네게 무엇해주기를 원하느냐? 분명한 목표를 물으셨습니다. 그때 맹인이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목표를 분명히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곧 보게 되어 예수를 따랐다고 말한 것입니다.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꿈을 가지고 한서린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막연한 기도를 하지 마십시오. 기도가 정확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 글에 적는 것이 참 좋습니다. 저는 명확한 기도를 하려고 할 때 언제나 종이에 적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1,2, 3. 명확히 적고 그것이 이루어진 모습을 마음 속에 그리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기도에 훨씬 힘이 있습니다. 막연하게 이런 말 저런말 주섬주섬 주워서 좌왕우왕 하면서 기도를 하면 기도에 힘이 없어요.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이 과부의 기도와 같이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서 구체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번거롭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번거롭게 하느냐. 자주자주 부르짖고 간구하는 기도 즉, 집중적인 호소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두번 하다가 그만 두면 안되는 것입니다. 아주 번거롭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애들이 선물 사달라고 할 때 한두번 엄마 선물 사줘. 안돼! 지금 돈 없어. 참아 기다려! 그렇게 하면 애가 알았습니다 하고 가버리면 그는 선물 다시는 못받아요. 어머니에게 핀잔을 먹으면서도 부엌에도 따라가고 안방에도 따라가고 건너방에도 따라가고 엄마 계속 사달라고 계속 고집을 부리면 엄마가 안사줄 수가 없어요. 엄마를 번거롭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에 번거로움을 느낄 정도로 외쳐야 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기도원기도 등 이러한 것이 번거롭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4절로 5절에 보면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번거로움과 괴로움 때문에 이 재판관이 과부의 호소를 들어줬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여러분의 기도가 번거로울 정도로 하나님이 아이 괴로워서 더 이상 못견디겠다 하실 정도로 억지를 부리면서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억지를 부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저도 내 제자들이 저에게 도움을 청하러 올 때 착한 제자들이 아무것도 못보고 가요. 와 가지고서 저에게 목사님, 개척교회 하는데 돈이 얼마 필요하고 땅을 사고 집을 사고 지금은 내가 은퇴했으니까 그런 걱정 안하지만 내가 실제 일할 때는 교회는 크지요. 속으로는 돈이 별로 많지 않아도 제자들 생각하기에는 돈을 쌓아놓고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그래서 와서 도와달라고 할 때 내가 여보시오 우리 교회도 쓸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돈이 없으니 안됩니다 하면 목사님 안도와주면 나는 안떠나겠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가라니까! 나는 못가요.


앉아가지고서 고집을 부리면 굉장히 속으로 미워요. 저놈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냐. 가라니까! 나중에 내가 전화로 연락할테니까 좀 가라니까. 전화 연락 안올줄 내가 알고 있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억지를 부리면 할 수 없이 원하는대로 못도와 주더라도 얼마는 도와주고 안되면 약속 종이에 적어서 싸인을 해서라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착한 제자는 와서 요사이 우리 교회 재정도 좋지 않고 어려움이 많으니까 안되니까 나중에 보자 하면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가는데 가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다리기는 뭘 기다려... 우리 제자들이 이 방송 듣고서 그랬구나! 그렇게 오해를 하지 마시고 여러분도 교회가 커지면 나와 같은 고통을 당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1장 5절로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가 기도를 계속 하라고 하냐면 밤중에 친구가 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요. 떡 세덩어리는 있어야 되겠는데... 그런데 벌써 시간이 밤중이라 하니까 12시에서 밤 1시, 2시쯤 되는가 봅니다. 이웃집은 떡이 있고 부자인데 자기집은 떡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웃집에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 이웃에 있는 친구인데 내 친구가 밤중에 왔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떡 세덩이만 빌려 주십시오. 그러니까 나는 애들과 함께 일 다 끝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으니 내일 아침에 오세요. 그러면 내일 아침에 줄테니까...


그러나 지금 친구가 못먹어 굶주려 있는데 지금 떡을 좀 주세요. 못 줘요 나는 자는데... 안돼요.. 그러니까 지금 주세요. 돌아가라니까! 떡 세덩어리만 주세요. 떡떡떡떡.... 아이구 잠이 다 날라가 버리고 애들도 잠에서 다 깨고 이것 떡을 안주었다가는 밤새도록 떡떡해서 절단강산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친구로 말미암아 떡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혀를 차면서 떡 세덩어리를 가지고 당신이 이웃 친구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시끄러워서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 떡을 주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성경 읽을테니까 들어 보세요.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간청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기에 이렇게 불의한 재판관에 나온 과부의 이야기, 밤중에 온 친구를 위해서 떡 세덩이를 구하는 사람의 이야기. 이 이야기를 했을까요? 우리 기도가 인내력이 있고 간청으로 억지를 부리면서 물러가지 않는 기도를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7절로 18절에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오는데 비가 오도록 기도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엎드려서 기도를 하는데 얼마나 기도가 간절했던지 배 창자가 오그라들어서 머리가 다리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앉아 기도하면 배창자가 당길 이유 없어요. 여러분도 배장차 당기는 기도 해본적 있지요? 막 부르짖으면 배창자가 당겨서 허리가 자꾸 구부러져 가지고서 다리 사이로 머리가 들어갑니다. 얼마전에 내 사랑하는 제자 한 사람이 목사님 젊을 때는 어깨가 빡 펴서 똑바랐는데 요사이는 왜 구부정합니까? 그래서 너 때문에 내가 기도를 많이 해가지고서 허리가 굽어졌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을 했는데 실제로 기도를 많이 하게 되면 허리가 구부러지고 머리가 두다리 사이로 들어가요.


엘리야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제자보고 산 위에 올라가서 무슨 증상이 일어나는가 보라. 한번 올라갔다 내려와서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또 올라갔다 와서 보라. 또 올라갔다 내려와서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일곱 번까지라도 올라가라! 그래서 일곱 번째 내려오더니만 손바닥 만한 구름이 떴습니다. 되었다. 이제 하나님 응답이 온다. 큰 비의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한번 기도해서 엘리야 같은 사람이 응답 안받는다고 포기 안했습니다. 배 창자가 당겨서 머리가 다리 사이로 들어갈 때까지 부르짖어 기도한 것을 계속해서 그 제자보고 일곱 번이 산꼭대기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정상에 올라가 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기도해서 안되거든 일곱 번 기도하십시오. 여리고성을 한번 돌아서 안되거든 일곱 번 도십시오. 계속해서 부르짖어 기도하면 응답받습니다.


예레미야서 33장 3절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묵상하는 것도 좋고 고요한 생각으로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최 결과로 좋습니다. 시장에서 장사하면서 부르짖어서 온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조용한 말로 기도하고 차타고 갈 때도 마음으로 생각으로 기도할 수 있지만 여러분 답답한 일을 당해서 새벽기도, 철야기도, 기도원 기도 나갔을 때는 부르짖어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목이 콱 메이도록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주 여유가 있으면 목이 메이도록 기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마귀가 와서 너는 기도할 자격이 없다고 자꾸 말하는 것입니다. 너 같이 죄많은 놈이 기도한다고 응답 받느냐. 너 구원은 받았지만 형편없는 놈이 기도한다고 응답하겠느냐. 그렇게 자꾸 낙심을 주는 것입니다. 저도 요사이 기도할 때 제일 어려운 것은 옛날과 다름없이 마귀가 와서 너 기도 하나님이 응답 안한다. 너가 하나님이 원하는만큼 충성스럽게 살았느냐. 올바르게 살았느냐. 하나님 보시기에 너는 죄가 많고 허물이 많은 사람인데 기도 응답 안된다. 하나님이 죄인의 기도는 응답 안해준다. 자꾸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해야 돼요. 마음에 담대하게 나가야 돼요.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우리가 죄와 허물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가 있고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 허물을 인함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 죄악을 인함이라 죄와 허물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죽으시면서 여러분의 죄와 허물을 영원히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의 피를 의지하면 죄를 한번도 안지은 것처럼 허물이 한방울도 없는 것처럼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아무리 장난을 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보혈을 의지하고 나가면 가슴펴고 하나님 앞에 부끄럼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 앞에 부끄럼없이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아멘! 할렐루야~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주 못났을 때 사랑해서 구원해 주었는데 이제 구원받아서 교회까지 나오는 여러분 얼마나 더 사랑하겠습니까? 여러분 너무나 훌륭하고 잘나서 예수님이 여러분을 구원한 것 아닙니다. 죄 가운데 있을 때 세속에 빠져 있을 때 마귀의 종이 되어 있을 때 그때 사랑해서 여러분을 건져주신 예수님이 이제는 주님께 나와서 구원받아 중생하여 성령의 전이 되어 있고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을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습니까?


이사야 43장 1절과 4절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내가 너를 구속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속한 것 아닙니다. 내가 너를 지명해서 불렀고 너는 내 것이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였은즉 여러분 주님 앞에 여러분 여간 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격지심에 빠지지 마시고 마귀의 참소에 겁을 집어먹지 마십시오.


요한복음 15장 16절에도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마귀가 참소를 하더라도 예수님이 나를 택했고 예수님이 나를 불러서 내게 열매맺기를 원하기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 안해줄 리가 없으니 사탄아 물러가라!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닙니다. 나쁜 재판관이 아닙니다.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간절한 호소에 나중에 항복하고 응답해 주었는데 하물며 좋은 하나님, 여러분을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어찌 성도의 기도를 안들어 주겠습니까? 오래 참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누가복음 18장 6절로 8절에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런 것을 안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해서 부르셨고 응답해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안믿는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말을 듣고 의심을 가지고 불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응답이 안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시간에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큰 사랑과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으십시오.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나 같은 인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나는 능력이 없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열매 맺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므로 열매 맺는 것이 정상적이고 기도응답으로 열매 못맺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응답받는 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낙심하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응답받기 위해서는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끈질기게 믿고 인내하며 문제가 해결되고 원한은 풀어 주신다고 입으로 시인하며 담대하게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희망찬 꿈을 버리지 마십시오. 응답은 온다. 반드시 꿈은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된다. 그리고 여러분 그런 꿈과 희망을 믿으십시오. 믿음이라는 것은 현재 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는 것입니다. 지금 환경을 바라보면 도저히 그런 것이 없습니다. 환경은 비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고 도저히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믿으십시오. 아브라함은 믿음의 용사인 것입니다. 백살이 되었을 때 아들 낳을 것을 믿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은 85살에 받았으나 15년을 기다린 것입니다.


여러분 나이가 90이 되었다고 아브라함이 아들 낳았는데 나도 낳을 것입니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었거든요. 여러분도 말씀을 받았으면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말씀이 없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자가당착이지요.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이면 그 말씀을 따라서 믿으셨으면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믿고 입술로 자기를 스스로 격려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격려해 주지 않아도 자기가 자기를 격려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하면 된다. 나는 해보자. 응답해 주신다.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난다. 자꾸 긍정적인 입으로 시인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인할 때 희망찬 꿈은 더 찬란해지고 믿음은 더욱 강해지고 확신은 더욱 두터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술의 말로 묶이고 입술의 말로 사로잡힙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혀를 사용하기 좋아하면 그 열매를 반드시 먹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반드시 응답받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5천명 남녀 어린아이 합쳐서 기만명이 왔을 때 주님은 어떻게 할 줄 알고 계셨습니다. 이미 다 마음에 알고 계시면서 빌립을 시험했습니다. 빌립아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빌립이 과연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희망찬 꿈을 갖고 있느냐. 빌립이 믿느냐. 믿는다고 시인하느냐. 시험을 쳐 보았습니다. 빌립이 시험에 낙제했으니 빌립은 못 먹였어요. 그러나 열 두 제자 중에서 조금 아이큐가 모자란 안드레는 그 옆에 듣고 있다가 아~ 주님이 먹이라고 하니까 못 먹일 것 없다. 그는 인간생활은 사람의 힘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플러스 알파 주님이 오시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많은 사람이 먹고 기뻐할 것을 꿈꾸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니면서 누가 먹을 것 있어요? 먹을 것 있어요? 찾았습니다. 어린 아이가 예수님 병고치고 기적이 행하는 것을 본다고 정신이 없어서 어머니가 도시락 싸준 것을 잊어 버리고 점심 안먹었다가 혼자 먹는다고 하는 것을 안드레가 가서 덥쳤습니다. 야, 너 혼자 먹지 말고 주님께 드리면 주님이 이것을 축복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이 모든 사람이 다 먹을 수가 있다. 빌립은 안드레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아휴~ 평소에도 아이큐가 모지라더니만 이렇게 모지랄 줄 몰랐다. 몇만명이 모였는데 여기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먹인다고? 안드레는 예수님을 생각했으나 빌립은 예수님을 계산에 안넣었습니다.


여러분 모두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매일같이 계산하지 않아요.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계산에 넣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희망찬 꿈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계산에 넣었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희망찬 꿈을 가지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이 많은 사람에게 이것 가지고 무엇이 되겠습니까만은 이것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빌립도 물리치고 안드레와 함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축사하니까 떼어주니 열두바구니 남는 부스러기를 거둘 정도로 다 배불리 먹였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응답을 알고 계세요. 해답을 알고 계세요. 그러나 빌립과 같이 시험에 낙제하면 안돼요. 안드레와 같이 시험에 낙제하지 말아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나에게 좋은 하나님으로 응답해 준다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돼요. 응답받아 기적이 일어날 꿈을 가져야 돼요. 그리고 믿어야 돼요. 입술로써 자기를 자꾸 격려해야 돼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기적이 일어난다. 좋은 일이 일어난다. 합동하여 유익이 일어난다. 그렇게 하면 시험에 합격이 되고 그를 통해서 기도하면 마귀도 물러가고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일들이 기도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믿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없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믿음으로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성경에 말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가만히 있는데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자녀가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면 뱀을 줄 부모가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 줄줄 알거든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 좋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모두 다 응답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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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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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5:12~18

 오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옛날 우리가 일제 강점기 때, 그 후 6.25전쟁으로 피난민 생활할 때는 누더기 옷을 입고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찢어지고 구멍 뚫린 옷을 몇 번이고 기워 입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그런 옷을 입고 학교를 가거나 친구들 집에 가면 우리 자녀들이 울고불고 야단을 칠 것입니다. 그때는 옷 한번 입으면 찢어져서 못 입을 때까지 입는다 말입니다.


나는 오늘 이 설교를 하려고 앉아있다가 작년에 세상 뜬 내 짝꿍 생각이 납니다. 내 짝꿍이 옷을 입고 오면 내가 시간만 나면 그 찢어진데를 잡아서 더 찢어지게 해서 옷 물어내라고 울고불고 하던 그 옛날이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멋을 내려면 내찌께 라고 해서 이렇게 방바닥에 옷을 싹 깔아놓고 요를 살짝 덮어놓고 그 위에서 누워잡니다. 잘 내찌께가 되면 앞에 옷의 줄도 서고 제법 멋있는 옷을 입을 수 있는데 잘못 뒹굴어 놓으면 줄이 수십가지가 나와서 옷이 망쳐지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형제간이 많으니까 형제들 중에 옷을 깨끗이 그렇게 입으려고 했으나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옷이 더 망가져서 울면서 학교를 안 가고 옷 바로 세워 달라고 한 것이 오늘같이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되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 신앙생활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전도서 1장 9절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다 있던 그것이 또 있고 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일상적으로 되풀이될 뿐,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기에 새것이라는 헬라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시간적 의미에서의 새로움은 네오스입니다. 옛날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서 오늘 것이 새로워지고 이것은 네오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질적인 새로움, 완전히 속이 달라져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카이노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생활이란 네오스, 세월이 흘러가서 어린 사람이 나이 먹은 사람으로 변하여 자랐다. 그런 크리스챤의 체험을 새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카이노스라고 질적으로 새로워 예수를 믿고 속이 달라져 버리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할 때 카이노스를 사용합니다. 이는 우리가 질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 믿고 교회 등록해서 종교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확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나라가 바뀌듯 인격이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을 입게 되며,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4차원의 영성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원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 하나님께 쫓겨나갈 때는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냥 사람이 되었어요.


그냥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쫓겨나오니까 마귀가 덥썩 잡았습니다. 그래서 마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은 다 마귀 사람인 것입니다. 마귀의 죄악을 그대로 옮겨놓고 마귀를 따라 사는 마귀 사람이 되었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우리 죄를 청산하시고 우리를 끌어안아 주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마귀가 쫓겨나가고 다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되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그냥 사람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있어서 예수님이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그리스도와 똑같은 능력을 행하는 4차원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4차원이 그들 속에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3차원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와서 앉아있어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람입니다. 여보, 잠을 깨어나세요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래요? 하나님의 사람이면 다른가요? 다르고 말고요. 하나님의 사람은 4차원의 영성을 가진 사람으로 환경을 다스리고 변화시키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은 그런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패와 부정으로 도덕적으로 누더기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그냥 사람으로 세상에 나가서 세상 사람들을 본받아 삶으로 누더기 인생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질적 발전이 도덕적 뒷받침이 없으면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놀라운 발전을 하지요. 우리 대한민국은 올해는 평균 국민 소득 3만 달러가 된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깜짝 놀랄 만큼 잘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변화되느냐. 더 변화되지 않고 더 부정하고 부패하고 거짓된 것이 사회에 꽉 들어 차 있습니다. 일본에서 더 사용하지 못해서 내버리는 고철덩어리를 사와서 정부의 허락을 받아 그 배로써 제주도로 거제도로 왔다갔다 하다가 물에 빠져서 그 많은 희생을 가져왔지 않습니까?


이것은 도덕적으로 부정과 부패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누더기를 입은 잘사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누더기 기워 입듯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땜질하듯이 사회를 고쳐서는 새롭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아나도 통째 새로워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어서 그것이 우리 가정과 사회와 우리 생활에 행해질 때 비로소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9절로 10절에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예수 믿는 것은 새사람을 입었다.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까지 새롭게 되었다. 엄청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냥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좋은 일하는 것이 예수 믿는 신앙생활이 아니다. 전적으로 새롭게 되었다. 생각이 새로워지고 꿈이 새로워지고 믿음이 새로워지고 말이 새로워지고 온통 새로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를 갖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근본적인 변화를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변화되느냐’하면, 애벌레가 이전보다 더 잘 기어가는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꿈틀꿈틀 기어가는 애벌레가 어떻게 자극을 받아서 꿈틀꿈틀 조금 빨리 걷는다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새벽기도 안 나오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기도 나가는 것 보면 참 용한 일이다. 그래도 생각하는 것 보면 변화 안 되고 말하는 것 보면 욕지거리하고 거짓말하고 믿음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의심 투성이고 거짓말하는 그러한 새것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새롭게 되느냐면 예수 믿는 사람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으며,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새로 믿은 우리 신앙생활을 옛날 생활에 짜깁기하는 그것 아니고 낡은 포도주 바구니에 그것 바구니라고 합니까? 포도주를 담아놓는 가죽 주머니에 새 포도주를 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포도주가 확산하면 가죽이 다 터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누더기를 기워 입듯,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땜질하듯 해서는 새롭게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범죄한 인간의 생각은 항상 악할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5절에 “야훼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야만,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고 해서 그럼 때려 잡아 죽이자. 그래서 새 사람이 되어서 부활하기를 기다리자. 그것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고 장사지내고 사흘 만에 부활한 그 모든 극적인 행동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신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상상하고 꿈꾸고 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 내가 바로 저를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당하고 피 흘려 죽고 내가 장사지내서 무덤에 들어가고 내가 예수를 통해서 부활하고 내가 승천했다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꿈꿔 보고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나와 하나가 되는 이러한 꿈과 신앙이 일체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 속에 깨달아 알고 그것을 꿈꾸고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서 죽고 장사지낸 것을 꿈꾸고 그것을 믿고 여러분이 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장사 지낸 바 되고 함께 부활하고 승천해서 하나가 되었다고 그것을 바라보고 믿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그 때문에 여러분은 내적 상상이 대단히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을 늘 생각해야 돼요.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은 것은 날 위하여 죽으셨다. 예수 죽음 내 죽음, 그 다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탁월하게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는 이것이 따라야 예수 믿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 좀 나눠주고 한푼 달라는 사람에게 천원 짜리 한 장 주고 아침 일찍 배고픈 사람에게 밥 먹여줬다.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될 선한 행위이지 그 자체가 예수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를 쳐다보고 저기에 달린 저 예수님이 바로 나다. 내가 예수님을 통해서 달려있다.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내가 장례식에 예수님과 함께 들어간다. 내가 함께 부활해서 내가 함께 승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당한 고난 전체가 여러분을 위한 하나의 극적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상상하지 못하면 신앙이 발전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생각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음에 바라봐야 돼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서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 믿고 말해야 돼요. 나는 예수와 같이 죽고 같이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해서 함께 승천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잘 이해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이해가 되어야 해요.


2.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성경에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누더기 옷을 대신 받아 입으신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삶 그 자체가 탐욕에 젖은 누더기 옷인데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누더기를 예수님이 받아 입었습니다. 자기의 의롭고 깨끗한 옷은 여러분에게 내어 주시고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누더기 옷을 대신 입고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보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아담을 통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기독교 신앙은 대표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아담 안에 우리가 다 죽었고 아담 안에 버림을 당했는데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 처음 아담이 아니고 마지막 아담, 둘째 아담이라고도 하고 마지막 인류의 조상으로서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은 처음 아담이 가지고 온 죄와 죽음을 마지막 아담으로서 다 인수 인계해서 당신이 죽고 당신을 통해서 용서와 의와 거룩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깨달아 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돼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자기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나의 누더기 인생을 인계 받아가지고서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로 15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죄에 빠져서 탐욕의 누더기 옷을 입고서 자기 힘으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집에서 농주를 담그곤 했습니다. 메주 같은 것을 쑤고 쌀을 쪄서 그 속에 넣어 두면, 누룩이 퍼져서 완전히 발효되어 술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라는 누룩이 그 안에 있어서 가만히 있어도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 아담의 죄의 누룩이 어머니 뱃속에서 생겨나는 자식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기 전에 벌써 누룩이 기다리고 있어요. 응아하고 태어나자마자 발효해서 온갖 죄를 짓습니다. 선은 가르쳐도 잘 안하는데 죄는 안 가르쳐 줘도 전부 짓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누룩이 그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죄를 짓습니다. 먹을 것을 주면, 하나는 입에 넣고 또 하나는 손에 쥐고 좀 달라고 해도 안 나눠주는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탐욕에 젖은 누더기를 입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죽어서 좋은데 간다. 그런 말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어린 아기 뱃속에서 떨어져서 응아~ 우는 그때부터 죄인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아담의 핏줄을 통해서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 되어서 죄의 값은 사망이라. 사망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 행위를 해서는 구원을 못 받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우리를 끌어안고 우리의 누더기 옷을 당신이 갈아입고 대신 죽어주므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랑할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 오늘 마음에 죄 값으로 말미암아 괴롭고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적은 죄나 큰 죄나 할 것 없이 전부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못을 박아 내가 다 이루었다 하셨는데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죄를 백년, 천년 용서해 버린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용서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은 영원합니다. 여러분 영원히 죄가 씻음을 받았어요. 영원히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참 이것 얼마나 좋은 구원인지 말로 다할 수가 없어요. 우리의 죄를 낱낱이 다 청산했을 뿐 아니라 영원히 청산해 주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입은 누더기는 죄의 누더기, 허물의 누더기, 질병의 누더기, 저주의 누더기, 죽음과 음부의 누더기. 이 휘황찬란한 누더기를 주님이 다 덮어쓴 것입니다. 다 짊어졌어요.


오늘날 우리는 세상에서 나 때문에 그렇지 않고 너 때문에 그렇다고 상대에게 죄를 덮어 씌우지만 예수님은 내가 다 짊어질테니까 내게 맡겨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주님께서 하나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때문에 다가온 죄악의 결과를 청산한 것입니다. 그가 처참하게 대못에 찔렸습니다. 양손과 양발에 대못을 쳤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그런 소리 마세요. 내가 언제 십자가에 못 박았노? 여러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깨달아 알면 그것이 진짜 여러분 신앙인 것입니다. 나 때문에 그런 것 아니요. 아니요. 그러면 안돼요. 어머니 물침례 받을 때 목사님이 누구 죄를 위하여 예수님이 죽었습니까 그러면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렇게 말하세요. 알았다 알았다. 목사님이 할머니,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었지요? 그것 모를 턱이 있어요? 우리 며느리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 그러면 안돼요. 그것은 잘못 깨달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나 때문에 내가 지은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 5절은 예수님 오시기 칠백년 전에 이미 예언한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로마서 5장 15절과 18절처럼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한 사람 아담 때문에 모든 세계인들이 죄인이 된 것처럼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은혜가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영원히 청산했으니까 은혜도 영원한 은혜인 것입니다. 아담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서 아담은 죄를 지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 사람,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죄를 받아 가지고서 온 세상 인류의 죄를 청산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는 말로다 할 수 없이 풍성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죄는 한사람을 통해서 온 인류를 휘어잡았지만 그러나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선물을 넘치게 받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고 허물을 다스리고 거룩하게 되며 병을 다스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가난을 다스리고 헐벗은 저주를 다스리고 죽음을 다스려서 부활 영생 소망을 갖고 이 넘치는 은혜와 축복은 한번 예수님만 모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러한 은혜가 있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 알고 그것을 꿈꿔 보고 믿고 입술로 시인하면 이 은혜가 여러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3.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보고 옛날 것은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완전히 새롭게 된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회개로 누더기 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주신 새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아이구 나는 아직 새것이 되지 못했는데요. 못해도 여러분이 새것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성령이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한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살아가면서 1년 동안에 어려운 문제가 당해서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으려고 할 때도 언제나 예수님이 이미 이루어 놓았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여러분이 축복을 받는 모습을 보고 믿고 맡기고 나는 복을 받았다고 입술로 고백을 하고 시인을 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면 옛다 떡 먹어라 하고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로 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지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그 역사적인 사실을 뼛속까지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침례 안 받았다고해서 구원 못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는데 왜 침례는 구태여 받느냐. 침례를 받으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은 죽고 지낸바 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해서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체험하므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더 뚜렷하게 새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새 옷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중복음의 옷이지요. 용서와 의의 옷을 받아 입고 성결과 성령충만의 옷을 받아 입고 치료와 건강의 옷을 받아 입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의 옷을 받아 입고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옷을 받아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눈에 안 보이는데 어떻게 받아 입느냐. 역시 4차원의 영성을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옷을 받아 입는 것이라. 여러분이 예수님 옷을 받아 입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꿈꿔 보고 그것을 믿고 입술로 말하면 말이 나가서 그것을 이루어주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로운 옷을 입은 사람이다. 나는 거룩한 옷을 입었다. 나는 치료의 옷을 입었다. 나는 축복과 형통의 옷을 입었다. 나는 부활 영생의 옷을 입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은 새 옷을 받아 입었기 때문이다. 입술로써 고백하면 성령이 와서 네 말한 대로 될지어다. 여러분이 생활에 새로운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삼중축복의 두루마기를 입고 이제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3절로 5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 것입니까? 여러분, 이 은총과 축복을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여러분의 모든 병을 고치시고 청춘을 독수리같이 활달하게 만들어 주시는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루 생활할 때 짜증나고 귀찮은 일이 있더라도 말을 하십시오. 나는 독수리같이 새롭게 될 축복을 받았다. 죄가 다 용서받고 나는 의롭게 되었다. 나는 형통함을 입었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적은 목소리로 여러분 자꾸 말하십시오. 여러분 말이라는 것은 속에 있을 때는 내가 콘트롤합니다. 그 말을 내가 다스리지만 그러나 일단 입 밖으로 나오면 그 말은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환경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결국 말하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멋도 모르고 여러 가지 말을 하지만 그 말이 다 나가서 에너지가 되어서 나중에 여러분에게 책임지게끔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에 보통 사람들은 오만가지 말을 한다고 합니다. 오만가지 말 중에 여러분이 긍정적인 말을 얼마나 하는 것입니까? 지극히 적게 합니다. 오만가지 말은 전부 비난하고 비평하고 욕하고 탄식하고 한탄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는데 이것이 나가서는 에너지가 되어서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여러분을 물고 찢고 짓밟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심해서 입술을 지키면 여러분의 많은 불행과 슬픔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로 해야 되고 꿈을 바로 꿔야 되고 믿음을 바로 믿어야 되고 자꾸 믿음을 의심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뭘 믿느냐.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지요?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요? 그런 그 예수님에게 내 문제를 맡겨 버려야 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내가 믿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을 내가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문제를 예수님께 맡겨버리고 랄랄라 휘파람 불고 나가면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맡겼다.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해주겠다. 내게 짐을 맡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맡겼다는 것을 입술로 자꾸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다 맡겼다. 나는 예수님께서 다 맡겼으므로 무겁지 않다. 나는 좋다. 말이 나가서 에너지가 되어서 여러분 짐을 다 주님께 맡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의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와서 종교적인 의식을 집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 와서 여러분 자유와 해방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와 질병, 저주와 절망에 속박에서 해방되고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떠나가고 의와 평강과 희락이 마음에 다가오고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므로 이와 같은 변화가 다가와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교회 오는 것이 정말 즐겁고 하나님의 신성한 능력이 여러분 속에 들어오는 것을 체험하고 목마른 자에게 생수를 주시듯이 은혜의 생수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러한 산 체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이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못 박혀 죽고 장사지내고 부활하셔서 손을 내밀고 내게 오너라. 내가 너에게 새로운 옷을 입혀주마. 의로운 옷을 입혀 주고 있습니다. 거룩한 옷을 입혀 주고 있고 치료의 옷을 입혀 주고 있고 축복과 형통의 옷을 입혀주고 있고 영생복락의 옷을 입혀주어서 내 아들, 딸들 참 좋다. 옷 입혀 놓으니 기쁘다. 자, 속옷 입었으니 겉옷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전인구원의 옷을 입어라.


주님이 여러분에게 옷을 입혀 놓고 좋아하고 아이고 내 아들, 내 딸 좋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상상으로 그 옷을 생각하고 그 옷 입은 여러분의 모습을 바라보고 저 옷이 내 옷이라고 믿고 그 입술로 고백합니다. 그러면 주님하고 딱 맞아떨어져서 그 모든 옷들이 여러분의 옷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이 옷을 다 입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새 옷을 입으라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생각이 새로워져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와~ 저 십자가 주님 고통이 나를 변화시키는구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꿈을 새롭게 하고 내가 언제나 마음속에 상상한 꿈입니다. 나는 못났다. 나는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구박받는다 하지 말고 나는 주님 때문에 새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나와 같이 계시고 저주가 다 물러갔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된 모습을 항상 바라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리고 믿음으로 산다고 입술로 고백하고 나는 믿음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사니 행복하다고 입술로 고백하고 그렇게 나가면 십자가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은혜가 넘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축복은 십자가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축복은 없습니다. 아담의 죄악은 예수님이 짊어지고 갈보리산에서 다 청산할 때 마지막에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주님은 영원히 여러분이 잘 살 수 있도록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하고 끊임없이 싸워서 결국은 이기는 영원히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결국은 이기는 것입니다. 허물도 결국은 다 벗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병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내 병을 대신 짊어지셨다는 것을 끝까지 믿고 참고 견디며 입술로 주장하면 병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축복도 내 것이라고 자꾸 주장하면 축복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은 말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므로 여러분 새 인생, 새 옷을 입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 속에 온 이후로는 누더기 옷을 다시 입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성경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다 방탕해 써버리고 기근이 들어서 굶어죽게 되니까 다 떨어진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올 때 아버지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 아들이 아버지께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하였으니 다시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종의 한사람으로 여겨 주소서. 아버지가 그 아들 목을 감싸고 환영을 하고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냄새나고 구역질나는 옷을 벗기고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그게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예수 믿고 나오면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죄가 하나도 안 지은 사람처럼 깨끗한 옷을 입혀라. 그만큼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철저히 십자가에서 대신 고통당한 것입니다. 머리카락 하나만한 죄도 예수님이 다 청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의로운 사람이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혔으니까. 그리고 성령이 같이 계실 정도로 거룩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령이 같이 계시면서 여러분에게 보혜사가 되셔서 도와주시고 그리고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절대로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이미 일생 살 것을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요사이 백세를 살면 육십세 은퇴를 하면 나머지 40년을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이 태산인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고 내게 맡겨라. 우리 주님 섬기고 주님께 십일조 심고 주님을 기뻐하면 필요할 때 다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 먹이고 열두 바구니 남긴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희한한 방법으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교도소에 갇혀있던 죄수가 임기가 다 끝나면 교도소에서 나오면 사복을 가져와서 입힙니다. 죄수복을 입고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 죄인의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혈로써 값주고 산 옷을 입혀서 우리를 돌려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의식을 집행하므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한분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불러 주셔서 내가 예수님 앞에 나가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드리면 예수님이 여러분과 나의 영과 혼과 육의 모든 죄와 병을 다 책임지는 것입니다. 다 내게 내놓아라. 다 내게 내놓아라. 걱정하지 말라. 내가 대신 짊어졌다. 그리고 주님께서 여러분 보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찔림은 네 죄 때문이요 내가 상함도 네 죄 때문이다. 내가 징계를 받은 것도 너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서 내가 채찍에 맞아. 보아라. 내 등허리, 채찍에 맞은 것은 너 고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너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매달렸다.


그러므로 너는 내 안에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사람이 된다고 깨닫고 그 꿈을 꾸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하라. 여러분 금년도에는 꼭 그렇게 하십시오. 생각이 변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생각이 변화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옛사람이 아닙니다. 저주가 다 청산되었습니다. 이제는 새사람으로써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요사이 핸드폰이 카메라 역할을 해서 가는 곳마다 핸드폰을 가지고 자기 사진도 찍고 남의 사진도 찍는데 그 핸드폰을 영적인 핸드폰을 가지고 자기 모습을 찍으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변화된 축복받은 모습을 마음속에 찍어서 걸어놓고 보십시오. 그리고 믿고 그리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사람도 여기에서 못난 사람 없습니다. 한사람도 버림받은 사람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9~10). 내가 말한 것은 성령의 말씀을 듣고 여러분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정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여러분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을 정도로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가면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맡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필하고 나갈 때 여러분의 모든 짐을 다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 맡기고 나가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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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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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4:16~18)

 

고난을 극복하는 세 가지 길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곡의 울음소리를 내고 어머니 배총(배꼽)에게서 떨어져 나올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고난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고난은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는가 생각하고 보면 그 배후에는 고난이 있고 고난밖에 없는 줄 생각하고 보니 좋은 일도 있고 항상 밤낮이 바뀌는 것처럼 좋은 일과 고난은 바뀌면서 수레바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문제지 고난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다 당하는 것이니까.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되겠습니까? 고난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에 걸려서 넘어지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혹은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고난의 돌인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걸림돌이 되고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면 디딤돌이 되어서 더 나은 길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오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고난을 다 겪어보았습니다. 고난이 삶을 파멸시킨 일도 있고 고난을 잘 이겨내서 고난 동등 이상 혹은 큰 축복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대개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1. 고난에 대한 인본주의적 태도
 첫째로, 고난에 대한 인본주의적인 태도인데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가지는 태도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동등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저나 똑같다고 하나님이 홀로 선악과를 구별한 것처럼 저도 홀로 선과 악을 구분하고 살아가겠습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려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와 같이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어서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 사람 말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고 나쁜 것을 결정한다. 인간의 능력으로 고난과 대결하여 이겨도 상처투성이고 지면 패가망신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신론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자기가 자기 주인이 된 사람, 이러한 사람은 자기의 능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하다가 패가망신 당하는 사람입니다. 고난을 자기 이외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항상 원망, 불평, 분노, 정죄가 따릅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믿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된 사람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입니다. 왜,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 하나님이 지어주신 하와가 먹으라고 하니 내가 따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책임은 내게 있지 않고 하나님이 하와를 만들어서 내게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있고 하와가 나를 꾀어서 먹였기 때문에 하와에게 있고 나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하와야!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 ‘뱀이 나를 꾐으로 먹었습니다.’ 자기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습니다. 마음이 깨어진 사람은 자기를 뒤돌아 보고 자기의 책임을 느끼고 회개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다 돌리는 것입니다. 너 때문에 그렇지 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너 때문’이 굉장히 힘든 말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다가올 때 그 고난이 나 때문에 다가오지 않았나 깊이 살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자기가 아무 일을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나빠서 그렇다고 교만을 부리면 결국 교만으로 말미암아 자기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고난에 대처하는 낮은 신앙의 단계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낮은 단계의 신앙이 있고 높은 단계의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하여 낮은 단계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해결하려고 하되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일은 내가 해결하겠습니다.’ D. L. 무디 선생이 늘 이야기할 때 그 말 했습니다. 키가 굉장히 크고 몸이 거대한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딸내미를 데리고 얼음을 지치러 가면 딸내미 손을 꽉 잡으면 자꾸 손을 틀어버려요. “내가 걸을 수 있는데 아버지가 왜 자꾸 손을 잡느냐. 내가 걷는다.” “아버지가 붙잡아 주면 좋지 않으냐.” “필요 없다.” 그래서 얼음 위를 걸어가다가 미끄러져서 꽝 엉덩방아를 찧으면 그다음에는 엉엉 웁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손을 잡고서 “봐라! 아버지가 곁에 있어서 잡아 주겠다고 하는데 왜 고집을 부리고 가다가 넘어지느냐. 손 내놔!” 그러면 손가락 하나 딱 내놔요. “이것만 잡으면 돼!” 그래서 손가락 하나를 잡아서 미끄러지니까 또 엉덩방아를 찧습니다. 그래서 상처투성이가 되어야 비로소 그때는 울면서 손을 내놓는데 그러면 아버지가 손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몸통을 안아서 얼음 위를 걸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이 아니고 자기 힘을 의지해서 나가는 사람은 기도는 합니다. “하나님 이 고난에 나를 붙들어 주시고 지켜 주십시오.” 기도는 하면서 맡기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도움은 받았지 하나님께 맡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고난에 대하여 인간적인 힘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니까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우려고 해도 내 뜻대로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하나님 뜻대로 나를 끌어가지 마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 보조로 삼았지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고난에 대처하는 낮은 신앙의 단계는 자기 인본주의가 꽉 서서 하나님을 보좌관으로 삼지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보좌관이 되지 않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신앙적인 시련을 겪고 깨어졌습니다. 낡은 사막의 잡초 가시넝쿨 안에 불이 활활 붙었을 때 모세가 그 앞에 가니까 그 불길 가운데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신발을 벗어라.” 그 말은 뭐냐면 신발은 자기가 신고서서 걸어가는 자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중심을 벗어서 하나님께 던지고 의지하라. 자기 신발을 신고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같이 서서 대화하려면 하나님이 상대해 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들은 신발을 신어도 종은 신발을 벗습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의 주권을 넘긴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어서 던지니까 그때부터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서 모세를 이끌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여리고 평지에 여호수아가 났을 때 한 군대장군이 칼을 뽑고 여호수아 앞에 섰습니다. 여호수아가 “당신은 우리 원수 편입니까? 우리 편입니까?” 장군이 말하기를 “나는 편들러 온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파견되어 나온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다. 네 발의 신을 벗어라.” 하나님의 군대 장군이 왔어도 여호수아가 신발을 벗고 자기 주권을 내어 놓았었을 때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모든 정치적인, 군사적인 방법을 말씀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전체 다 맡기든지 아니면 전체 여러분이 다 책임지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반쯤 맡기고 반쯤 안 맡기고 하는 엉거주춤한 그러한 생활은 원치 않습니다. 오늘 주님은 여러분에게 와서 말씀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네 신발을 벗어라. 네 주체성, 네 중심의 생각을 벗어서 내게 맡겨라.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내게 맡겨라. 그러면 여러분 스스로 맡기면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하나님, 내가 할 테니까 와서 도와만 주십시오. 나는 보좌관 하러 오지 않았다. 네 마음대로 하라. 네가 충분히 깨어졌을 때 다시 오마.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깨어지면 신발을 벗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반드시 나쁜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3. 고난을 극복하는 높은 신앙의 단계
 고난을 극복하는 높은 신앙의 단계를 우리는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모든 고난이 올 때 내 인생을 하나님께 내어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물에 뛰어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맡기면 물이 그 사람을 띄워주는 것처럼 자기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쇠하든지 하나님께 내어 맡겨버립니다. 맡겨버리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모든 고난도 하나님께 맡겨버리자. 편안할 때는 참 아멘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진짜 고난이 다가와서 불길이 타오르는데 내어 맡긴다는 것은 참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3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홍해가에 왔는데 군인도 없고 배도 없고 빈손 들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맡길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돌아서서 애굽 군대에게 항복할 것이냐. 기로에 서 있습니다. 백성들은 다 모세야, 이곳에서 우리는 전멸 당한다. 돌아서서 애굽에게 항복하고 나가자. 그러나 모세는 서서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자. 오늘 네가 본 애굽 군대를 다시는 안 볼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맡긴 것입니다. 엄청난 담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내어 맡긴 것입니다. 모세는 정말 자기 자존심을 다 벗어버리고 자기를 의지하는 모든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지식과 재능을 벗어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홍해수를 갈라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 절대 쉽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엄청난 결단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죽을 각오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각오를 하고 하나님 앞에 인생을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에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예수님께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얼마나 십자가 걸머지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주님은 하나님께 그 잔을 옮겨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잔을 받아 마셨습니다. 먼저 죽음을 내놓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당할 때 주님의 도움을 구하면 주님이 우리 자신을 내놓을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9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자기가 선한 일을 선택하고 도모하면서 생명을 하나님께 맡겨라. 하나님께서 영혼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55편 22절에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맡기는 것은 전적으로 내어 맡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하나님은 맡은 것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맡은 것을 책임 못 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일단 맡기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 해 보시라고요. 여러분이 어려운 고비에 당했었을 때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세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책임을 져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극복하는 높은 단계의 신앙에는 항상 고난이 다가오면 마귀가 그 앞에 서서 춤을 추고 야단법석을 하더라도 우리 믿는 사람은 그 고난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조차도 우리에게 유익 되게 하시지 손해되게 안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 잔이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다가오면 우리에게는 고난과 마귀가 보이지만 한 단계 더 멀리 바라보면 하나님이 고난을 이용해서 우리에게 유익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모든 것이 합력하여 좋은 일, 어려운 일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러므로 고난은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축복을 반드시 가져오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큰 만큼 영광도 다가오고 고난이 적으면 적은 만큼 하나님의 은총도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하게 왔다가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고난은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축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고난이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손해를 가져오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멀리서 바라보면 굉장한 유익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선생은 고린도후서 12장 7절로 9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선생이 얼마나 계시를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받고 사람으로서 셋째 하늘까지 올라가서 하나님과 대화한 사람입니다. 사람이니까 교만해지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래도 셋째 하늘까지 올라갔다 온 사람인데 무슨 잔소리냐? 교만해질 수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사탄의 사자를 보내서 가시 채처럼 몸을 찌르게 했습니다. 바울 선생은 몸에 지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고통스럽고 괴로웠습니다. 그 병이 떠나기 위해서 세 번 기도했으니 바울 같은 위대한 신앙인이 세 번 기도 드렸으니 얼마나 깊은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무나 내게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네가 교만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가시 채를 보내어서 사탄이 너를 괴롭히므로 네가 교만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고난을 보내어서 나를 약하게 만들므로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고 더욱 하나님께 바라보게 해서 하나님이 사용하는 귀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그랬다고 하나님 대답하시므로 고난이 오히려 고맙게 느꼈다고 했습니다. 고난 때문에 내가 더 은혜를 받고 더 큰 능력과 계시가 오는 것이니까 오히려 하나님 더 많은 고난을 주셔도 좋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받는 고난이라면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겸비하게 낮아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운 고난이 다가오면 반드시 고난이 여러분에게 괴로움만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길을 가르쳐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무슨 길이냐. 금식기도 해라. 고난이 내게 다가와서 괴로우면 고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고난 없을 때는 아무 말 해도 소용이 없는데 고난이 다가오면 금식기도 해라. 금식기도를 하다니요? 오산리기도원으로 가라. 그래서 금식기도를 하게 되고 고함을 쳐 하나님께 부르짖기도 하고 헌신적인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편안하면 금식기도하고 기도원에 가서 철야기도하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 좀처럼 없습니다. 고난에 고통을 당하면 고난을 이기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신령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다가올 때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가 그것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 의미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반드시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고난은 의미가 있습니다. 의미 없는 고난이 여러분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이 다가오면 제일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내가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징계를 받은 것이 아닌가 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잘못하면 부모가 꾸짖지 않습니까? 옛날에 우리 어릴 때는 우리 어머니 부지깽이가 징계의 채찍입니다. 들어오라고 해서 부엌 앞에서 부지깽이로 장딴지를 얻어맞은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 이것은 네가 받아야 될 징계라고 하면 회개하고 우리가 변화돌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8절로 11절에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아버지가 너희들 잘되라고 징계하는데 영의 아버지가 영원히 잘되라고 징계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훗날에 의롭게 되고 더 평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채찍을 들어 때리고 몽둥이로 종아리를 때린다는 것입니다. 징계는 우리가 그를 통해서 회개하고 변화받기 위해서 주는 징계라는 것입니다. 징계를 안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학교에 가서 공부할 때도 선생님에게 징계를 받아야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학교에서 선생이 징계를 못 한데요. 학생이 선생님에게 막 달려들기 때문에 징계를 못 하는데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 당연히 징계하면 벌벌 떨고 꿇어앉습니다. 제가 중학교 공부할 때는 중학교에 우리 영어 담당하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선생님의 이름이 콩코드입니다. 콩코드라는 것은 문장의 시차가 같도록 만드는 것을 콩코드라고 하는데 이만한 대나무 장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교실에 들어와서 숙제 내놓고 콩코드가 맞지 않으면 나오라고 해서 때리는데 대나무 막대기로 때리니 얼마나 아픕니까? 그러니 그 선생님 시간에는 죽도록 외워요. 죽도록... 당장 잊어버릴 지라도 죽도록 외워요. 그래서 그 선생님 앞에서는 통과가 되었어요. 요사이 돌아보면 그 선생님이 대나무로 때렸는데 그때 외운 것 지금도 알아요. 안 잊어버렸어요. 징계는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발전을 할 수 있고 향상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징계로써 어려움을 주실 때는 회개하고 도와달라고 하면 평강의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욥기 5장 17절에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와서 고통당할 때 업신여기지 말고 그 징계를 받아들여서 변화 받기를 구하면 내게 큰 유익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매를 맞을 때 하나님은 회개하라고 때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온전히 다 의롭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의만 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야훼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야훼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8-19) 많은 고난이 있으나 하나님은 그 고난에서 건지기도 하시고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잘못해서 당하면 징계를 내리시고 회개하도록 꾸짖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를 맞을 때 회개를 합니다. 평안할 때 좀처럼 회개하기가 곤란합니다. 고난은 아플 때 회개하고 변화를 받으려고 애를 많이 쓰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 신앙이 자랄 때 더 고난을 주셔서 회개케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자라는 것이 그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있으면 하나님이 아직까지도 인격적으로 변화 받으라고 회개를 시키는 것이므로 오히려 장성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엘서 2장 13절에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야훼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재앙을 안 내리기 위해서 재앙 오기 전에 변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비가 와서 언덕이 무너지기 전에 복구하고 수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격적으로 무너지게 된 것을 회개하고 수리해 놓으면 어려움이 다가와도 극복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기 위해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인내의 훈련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참지 못하면 이기지 못합니다. 어떠한 고난도 참고 어려움도 참고 견디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하는 것이 굉장히 괴로워도 이를 참고 계속해서 노력을 하면 거기에 통달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내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인내를 가진 인격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3절로 4절에 보면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삶에 참는 마음 이것이 신앙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면 신앙이 온전하지 못하게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해도 참고 좋을 때도 참고 넘치지 않게 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인내를 가르쳐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정 참지 못하고 아이고 나 못 견디겠습니다. 나 내려가야 되겠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버렸으면 우리는 구원을 못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다 청산할 때까지 참으셨습니다. 마지막 우리의 빚을 다 갚으셨을 때 내가 다 갚았다. 그리고 주님이 세상을 뜨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갚아진 거예요. 예수님이 인내가 없었으면 중도에 포기하고 나 내려가야 되겠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셨으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가 다 갚아졌어요. 허물도 다 청산되었어요. 여러분의 질병과 고통도 다 청산되었어요. 저주도 갚았어요. 낭패와 실망도 갚고 죽음과 지옥도 갚았어요. 주께서 다 갚아놓고 난 다음에 내 영혼을 주께 맡기나이다. 청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청산할 수 있는 인내를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 시련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서 여러분 인내가 되면 여러분이 비로소 지역장도 구역장도 장로도 집사도 목사도 책임을 지고 일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책임자는 온전히 구비하여 모자람이 없게 위해서 인내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내 없이 성격이 급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자가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신앙이 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시련을 겪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소련 소치 땅에서 올림픽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올림픽 때문에 잠을 못 자는 우리 성도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 올림픽 하면 단거리 선수들이 뛰는 것 그렇지 않으면 올림픽 거기에서 춤을 춘다고 말합니까? 뭐라고 말합니까? 그것을 볼 때 얼마나 다리 힘줄이 강한지 몰라요. 그 다리의 힘이 그렇게 붙어야 단거리도 뛰고 장거리도 뛰는 데 그 힘이 하루 만에 붙습니까? 하루 만에 힘이 생기지 않아요. 꾸준하게 열심히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병원에 신체검사 하러 가면 제 담당 의사선생님이 항상 나를 보고 다리에 힘을 실으십시오. 다리에 힘을 기르십시오. 그래서 다리에 힘을 어떻게 기릅니까? 매일 만 보를 걷든지 안 그러면 아령을 들고 세수하고 난 다음 이것을 매일같이 하십시오.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람은 다리에서 힘이 생기고 다리에서 힘이 빠집니다. 다리의 근육이 힘이 빠지면 저항력이 없어서 다른 병도 다 걸립니다. 그리고 난 다음 나하고 같이 서서 나를 밀어서 자기가 뒷걸음질 치는지 내가 뒷걸음질 치는지 보자고. 그런데 지금은 자기가 뒷걸음질 치지요. 왜냐하면 아직은 내가 젊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내가 뒷걸음을 치게 되면 곤란하지요. 그러므로 세수할 때 항상 앉았다 일어났다를 항상 30번 하라고 합니다. 30번 하면 다리가 굉장히 힘줄이 서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대신 근육이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다리가 튼튼해지면 감기도 안 걸린대요. 모든 저항력이 생겨서 튼튼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한가지입니다. 연단을 받아야 돼요. 어려운 일을 당해서 기도와 믿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연단을 받아야 나중에 어려운 문제도 척척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절로 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이 연단을 받게 되면 환난 같은 것 다가와도 능히 이겨낼 수 있고 소망을 가지고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이기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로 14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즐거워할 수가 없지요. 시험과 고난이 다가오면 즐거워 안 합니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고난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우리가 고난을 당해도 예수 이름으로 꾹 참고 이겨나가면 그 영광이 주님 앞에 설 때 상급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우리가 고난을 참는다는 것은 신앙이 그만큼 자란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조그만 일만 해도 성을 내고 화를 내고 발버둥을 치면 그것은 신앙이 자라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에 연단을 받으면 많은 은구슬, 금구슬 많은 영적인 구술을 마음속에 보배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장에 가서 보면 진주가 있지 않습니까? 진주가 아름다운데 그 파란 색깔이 흰색에 섞여서 있는 것을 보면 굉장히 아름답게 보이는데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자연적으로 진주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진주는 광물성 보석과는 달리 생명체가 만들어내는 보석인데 진주조개 혀 밑에 모래알을 넣어주면 혀를 갉아 먹으니까 아프잖아요. 그러니까 혀에서 물질이 나와서 그 모래알을 감싸요. 자꾸 감싸고 감싸고 감싸고 감싸니 나중에는 동글동글하고 아름답고 영롱한 진주가 되어서 진주조개 혀 밑에 저렇게 되어서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보석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의 신앙이 진주조개같이 되는 것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볼 때 야! 빛난 진주가 반짝거리는구나. 저것 내가 가지고 사용해야 되겠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여러분이 참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는 것을 전부 다 참지 않고 변명을 하고 싸우고 원수를 갚고 하면 진주가 될 시간이 없어요. 그러나 고난을 내가 받아들여서 참고 견디면 내 속에서 진주가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고난을 참는 것보다 더 위대한 신앙은 없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존귀롭고 아름다운 것은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탓이요.’라고 하고 내가 깨어지고 내가 참는 것 이것이 보배입니다. 가정생활도 한가지입니다. 남편이 조금만 참으면 아내를 수용해주고 가정에 불화가 없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내는 남편을 조금만 참고 이해해 주면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 견딘다는 것, 이것이 가정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절대적인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깨어지지 않는 사람은 참지 못합니다. 대항합니다. 싸웁니다. 깨어져야 마음속에 진주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진주는 광물성 보석이 아니라 생명체가 만들어내는 보석이므로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래 깨어지고 참으면 아름다운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인해 고통과 아픔을 겪지만, 그 고난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하고 잘 극복하면 오히려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이 다가오면 고난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긍정적인 태도를 취합니까? 고난이 다가오는데 긍정적인 태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이 내게 좋게 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이 긍정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 일부러 좋은 일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고서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태도라는 것은 많은 고난이 다가오는데 사람들은 고난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울고 가슴을 쳐야 될 곳에 여러분 기도할 때 이 고난조차 하나님이 내게 유익되게 할 줄 믿습니다. 고난을 하나님 통해서 내가 더 나은 내일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유익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부어 잔이 넘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인내하고 참으면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한 이태(두 해) 동안에 저는 50년의 목회생활을 해오는 중에 가장 어려운 고난을 겪었습니다. 시련을 겪고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만 제가 여태까지 신앙해 온 중에 가장 하나님이 제게 유익된 날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많은 고통이 다가오고 내가 변명을 하고 싶고 사람이니까 대항하고 싶고 복수를 하고 싶고 여러 가지 착잡한 잘못된 생각들이 마음에 많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회개할 수 있고 성령의 변화를 받을 수 있고 그리고 진주조개가 되는 것을 바라볼 수도 있고 좋은 일이 많았었습니다. 제가 고난을 당할 동안에 우리 성도 여러분들께서 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신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저를 사람으로 만들고 주의 종으로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 배운 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오늘이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주의 나라에 갈 것인데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돈도 건강 이외에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길에서 조그마한 일도 하나님께서 다 좋게 만들어 주실 것이니 이 시험과 환난도 제게 크게 좋게 만들어 줄 줄 믿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당회장으로 들어온 이영훈 목사 좋은 사람입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보고 길러 온 사람인데 성격이 착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자기 혼자 힘으로 안 돼요. 여러분이 기도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많이 해주시고 또 선배 된 제가 끌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우리 당회장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제가 선배로서 잘 끌어줘서 훌륭한 주의 종이 되고 한국을 세계에 나타내는 일꾼이 되게 만들어 주십시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고난은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유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난은 반드시 그 배후에 영광을 주는 것입니다. 영광은 고난보다 견줄 수 없이 큰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국무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비관론자는 매번 기회가 찾아와도 고난을 본다. 그러나 낙관론자는 매번 고난이 찾아와도 기회를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면 고난이 오히려 유익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이 다가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춤추고 즐거워하고 고난이 다가오면 하나님께 엎드려서 주님이시여 이 고난이 좋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나쁘게 될 것을 믿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좋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는 기쁨이 될 줄 믿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이를 받아서 좋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점점 육신의 세계가 멀어지고 천국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육신의 모든 것이 허무하기 짝이 없거든요. 하루아침에 재산 다 날아갈 수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벌어 놓은 것 다 놓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지고 있는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영원한 세계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므로 고난은 육신의 세계를 이기고 천국을 마음속에 깊이 모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18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겉사람이 고통으로 찌그러지고 낡아지면 속사람이 더 새로워지고 생기발랄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모하기 때문에 변화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이 지극이 크고 중한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는 세상 것은 잠시 있으면 다 지나가고 안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영원히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시고 굳건하게 만드시고 강하게 만드시고 견고하게 만드셔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좋은 일은 좋아서 좋고 나쁜 일은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니 좋습니다. 이것이 긍정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나쁜 것은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니 좋다. 그러므로 감사와 찬양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크게 기뻐하시고 여러분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고난은 피할 수 없으나 고난을 대하는 태도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보았습니다. 옳은 태도를 가지면 고난은 크게 유익된 훈련이 되지만 잘못된 태도를 가지면 심신의 깊은 상처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감사로 약으로 변화시키든지 불평으로 독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좋은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태도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크고 작은 고난은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디딤돌이 되기도 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하나님이 같이 일해 주셔서 그 고난을 통해서 영혼이 더 잘되고 더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원망, 불평, 탄식을 하면 더 나빠지고 더 고약해지고 더 고난이 거세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내일을 변화시키는 것인데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지 옆에서 보고 계시고 도와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은 좋습니다. 좋은 것을 가져오기 위해서 인격적으로 연단해 주시고 징계해 주시고 강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고난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통해서 좋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은 좋은 것입니다. 좋은 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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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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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고린도후서 5:16~17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는 나의 자화상을 본다” 그것을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죄와 허물을 벗어버리고 질병과 고통의 고침을 받고 축복 받고 형통하고 부활 천국의 백성이 된 나의 자화상을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간구 한다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그런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우리 마음속에 죄와 허물을 벗어버리고 질병과 고통과 괴로움을 정복하고 축복받고 형통하고 부활 천국의 백성이 된 나의 자화상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날 불행한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부모님에게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란 청소년들은 삐뚤어진 자화상을 가지고 평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아이의 성장 발달과 자화상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를 뒷받침해 주는 흥미로운 연구가 있습니다.


미국 UCLA 연구팀이 엄마의 사랑을 꾸준히 받은 3세 아이와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사랑받지 못한 3세 아이의 뇌를 CT로 촬영하여 두 사진을 비교 분석했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엄마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의 뇌는 크고 잘 발달된 반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의 뇌는 작고 검은 색깔을 띠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구팀의 주장에 의하면, 뇌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 아이는 마약 중독이나 폭력 등 각종 범죄와 연관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또 정신적 질병이나 각종 다른 질병에도 더 쉽게 노출될 우려가 있다고 합니다. 요즘 깨어진 가정이 급격히 늘어가고 그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병든 자화상을 가지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1. 옛 사람과 그의 자화상


우리는 옛사람과 그의 자화상을 벗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믿기 전에 사람과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자화상을 마음속에 가지고 그것을 늘 바라보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의 노예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고 죄책과 정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약하고 고통스런 자화상이 또 있습니다. 나는 항상 병들고 연약하다. 나는 못한다. 안돼! 부정적인 자화상인 것입니다. 가난하고 저주받은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안돼. 풍성하질 못해. 나는 항상 돈이 부족해. 항상 삶에 여유가 없어. 자화상을 부정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8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마음속에 부정적인 자화상으로 돋아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자화상이 아름다운 향기로운 꽃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시넝쿨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죽어서 천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만 천당 갈 자화상이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의 값은 사망으로 사망의 음부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2. 잘못된 바라봄의 법칙


자화상이 잘못되면 그 자화상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생애가 잘못되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바라봄의 법칙을 가지게 되면 정말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부정적인 자화상을 항상 바라보고 불안과 낙심과 좌절하고 탄식과 슬픈 말을 하면 그 모습이 생활에 실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큰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명의 부정적인 보고를 한 정탐꾼의 그 자화상을 보십시오.


민수기 13장 31절로 33절에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오라고 모세가 보냈는데 그들이 40일 40야를 가나안땅을 다니면서 본 것을 보고하는 것은 완전히 절망적인 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본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 메뚜기 자화상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보고를 받은 백성들이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야훼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2~3) 면서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저항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인데 불신앙도 들음에서 나며 적그리스도의 말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28절로 29절에 보면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사람들만 우리말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이 말하는 말을 듣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네가 말하기 좋아하는 그대로 만들어 주겠다. 항상 우리가 나는 못살겠다. 나는 안 된다. 나는 병들었다. 나는 패배한다.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내가 네 말을 다 듣고 있으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마. 왜 우리 집안은 이 모양이냐. 왜 나의 일생은 늘 슬픈 일만 생기느냐. 그것을 여러분 우리말을 통해서 걸러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말은 굉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을 입 밖으로 내놓으면 그 말이 에너지를 생산해서 말하는 그대로 되게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너에게 행하겠다고 했으니 우리 정말로 조심해야 돼요. 여호수아와 갈렙은 열두 정탐꾼과 같이 갔으나 보고하는 보고가 완전히 긍정적이었습니다.


민수기 14장 6절로 9절에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굉장히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과연 가보니까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더라. 여러분 땅이 젖과 꿀이 흐르도록 비옥하면 얼마나 좋은 땅입니까? 아주 용기와 힘을 주는 보고를 했는데 백성들이 그 보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돌을 들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쳐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보고 보다도 부정적인 보고를 좋아합니다. 잘된다는 것보다도 잘 안 된다는 것을 더 말하기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려면 힘을 쓰고 애를 써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꿈꾸고 긍정적으로 믿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말하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부부 관계를 연구한 워싱턴 대학의 존 가트맨(John Gottman) 박사는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대화가 부정적인 대화의 다섯 배가 되어야 된다는 연구발표를 했습니다. 부부간에 한 지붕 밑에 살면서 남편이 부정적인 말을 하든 아내가 부정적인 말을 하든 한마디 하면 아내가 한마디 부정적인 말을 하면 남편은 다섯 마디 긍정적인 말을 해야 그것이 상쇄가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부정적인 말을 하면 아내가 거기에 반대되는 긍정적인 말을 다섯 배나 해야 부정적인 힘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정적인 말을 한 번 했다면 최소한 긍정적인 말을 다섯 번 이상해야 가정에 평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긍정을 1로 하면 부정을 5로 가트맨이 비유로 따지는데 긍정적인 것은 한번밖에 없고 부정적인 것은 다섯이나 있는데 1대 5의 비율을 고치지 아니하면 그 가정은 올바르게 서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긍정적인 말을 한마디 하는데 부정적인 말은 25번 하면 그 가정은 무너지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뭐 특별한 조사 없이 부부가 이혼할 확률은 긍정적인 말 한마디에 부정적인 말 25번 하면 그대로 이혼에 돌입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도 긍정적인 말을 사용할 때 화목하지 긍정적인 말을 사용하지 아니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바버라 프레드릭슨 교수는 번창하고 있는 사업체 20개와 현상유지를 하고 있는 기업 20개,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 20개를 대상으로, 그곳 회사원들의 ‘말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매우 놀라웠습니다. 각 기업의 회사원들이 긍정적인 말과 부정적인 말을 사용하는 비율이 3대 1보다 높은 기업들은 번창하고, 3대 1보다 낮은 기업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사의 직원들이 잘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3명이고 안된다고 하는 사람이 1명이면 그러나 그것이 거꾸로 되어서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3명이고 그 회사는 망하는 길로 걸어 들어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가정이든 기업이든 긍정적인 말을 사용할 때 잘되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수가 적어도 서로 반가워서 손을 잡고 아이고 오래간만이다. 잘 계세요? 건강하지요? 저번 주일에 봤는데 뭘 건강하기는 건강해? 그러나 서로 만나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손잡고 흔들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안부를 묻고 그렇게 하면 그 교회는 됩니다.


긍정적인 것은 하나님이 그 배후에 있고 부정적인 것은 마귀가 배후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하면 그 배후에 주님께서 꼭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못 한다. 나는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죽는다. 나는 패한다. 그런 말을 하면 그 말 뒤에 마귀는 웃으면서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가정이든 기업이든 긍정적인 말을 사용할 때 잘되고 번창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이 돼요. 예수 믿기 전의 사람하고는 세상이 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라는 유대인의 학자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과 대화한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냥 종교적인 사람이 되어서 하늘나라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야 된다. 거듭난다는 말은 아노덴라는 헬라어를 사용했는데 아노덴이라는 것은 위에서 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래에서 난 사람은 어머니 몸을 통해서 나지 않습니까? 똑같이 아노덴인데 하늘나라 백성이 되려면 위에서부터 나야 된다. 하나님이 어린아기 낳듯 낳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적인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니가 자기가 낳은 자식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여러분을 낳았으니 하나님이 여러분을 뜨겁게 사랑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그 말을 듣자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거듭나라는 말 자체를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것처럼 또 어떻게 태어나느냐.


그때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 물은 회개를 말하고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영 아니십니까? 우리가 회개하면 성령이 오셔서 태어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드리고 입술로 시인하면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입으로 긍정적으로 시인하지 아니하면 중생하지 못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입으로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믿으면 의로운 사람이라고 지적을 해 주지만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의 말은 해주지 않습니다. 구원은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다. 나 구원 받았네. 너 구원 받았네. 우리 구원 받았네. 노래처럼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았어요.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입 딱 다물고 나는 몰라~ 그러면 모르는 지옥에 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4장 17절로 18절에 보면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해야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이 별들을 바라보고 자기 후손이 그처럼 많겠다고 믿으니까 하나님이 의롭게 여겼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별들처럼 자식이 많다는 것을 마음속에는 믿고 있었으나 자식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언제 자식이 생겼느냐. 입술의 말을 바꿨을 때... 네 이름이 아브람인데 많은 자식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으로 그리고 네 아내는 사래였는데 여주로 사라, 많은 자식의 여주로 이름을 바꿔라.


제가 해외선교를 하는데 교회는 서울에 와서 돌봐야 되겠고 선교는 해외 나가서 해야 되는데 하도 바쁘고 토요일날 서울에 와서 주일날 예배하고 주일날 저녁이나 월요일날 아침에 출발하고 그것이 가까운데 같으면 몰라도 아프리카에서 비행기 타고 와서 여기 주일에 와서 예배 보고 주일 저녁에 또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그러한 생활을 하다가 제가 내 팔자가 이럴 수는 없는데 너무 괴로워서 못 견디니 나도 이름을 바꿔야 되겠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그 아내 사래를 사라로 바꾼 것처럼 나는 만성천자 다윗의 이름을 빌려 가지고서 David, yonggi cho! 그렇게 불렀습니다.


다윗이 편안한 생활을 했다고 생각하고 보니까 사울에게 쫓겨다니기를 말로 다할 수 없이 고생을 하면서 쫓겨 다녔어요. 그처럼 제가 쫓기는 인생생활을 사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요. 권세와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가보다. 에라 이름 하나 보태자 바울을 보탰습니다. 그 다음 보니까 바울은 다윗보다 더 많은 고생을 했어요.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David, paul yonggi cho! 이름이 왜 이렇게 긴지 나도 잊어버리고 내 이름을 잘 모릅니다.


요사이도 세계 여러곳에 가면 세계 사람들이 내 이름을 몰라서 혼돈할 때가 많습니다. 날 소개할 때 David, Cho! Yes! Paul, Cho! Yes! Yonggi-Cho! Okay. 그래서 나를 두고서 한국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가 David, Cho라는 목사를 잘 안다. 다른 사람이 Paul, Cho 말이지? 아니 Paul, Cho 말고 Yonggi-Cho 말이지? 아주 혼돈이 되게 된 것입니다. 입술의 고백을 올바르게 하면 입술의 고백을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이 창조적인 역사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 가운데 늘 운행하는데 여러분이 기도하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있으면 성령이 곧장 역사하는 것입니다. 입의 말로 묶이고 입의 말로 사로잡히기 때문에 입술에 말을 하도록 성령이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령이 충만하고 있을 때 하나님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면 성령이 대번에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십니다. 그때 하나님께 빛이 있으라. 순식간에 빛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면 성령이 와서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그 운행하시는 성령님 앞에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입술의 고백이 그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했는데 우리의 자화상은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서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것을 여러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갈보리 산 언덕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그분이 예수님이 매달리신 것입니까? 여러분이 매달리신 것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 때문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누구 때문에 매달리신 것입니까? 나 때문에 여러분 때문에 예수님이 매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 십자가에 달려있는 여러분 자신을 봐야 됩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바라보고 내가 예수님을 통해서 죄값을 지불하고 허물을 청산하기 위해서 저렇게 매달렸구나. 내가 병에서 고침받기 위해서 예수님 등이 갈기갈기 찢어지듯이 채찍에 맞은 것은 내가 예수님 통해서 채찍에 맞았구나. 저렇게 못 박혀 매달려 있는 예수님은 나를 대신해서 나를 위해서 매달렸기 때문에 내가 저주에서 벗어나고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저렇게 매달렸구나. 예수님이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고 죽은 것은 내가 죽은 것이요 그가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내가 부활한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이대로 된 것이고 여러분이 바라보고 믿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을 통해서 깨닫고 바라보고 그리고 믿고 말하면 그것이 실제로 여러분 생활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용서와 의의 자화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저분이 바로 나에게 용서와 의를 주신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저기에 못 박혔다고 여러분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의 자화상을 보아야 되겠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자화상을 보아야 되겠고 심신을 치료받는 건강한 자화상,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자화상,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자화상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옛사람은 청산되어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산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이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마귀가 여러분을 보더라도 예수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보통 사람이 아니라 예수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것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과 하나같이 살며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도 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것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이 한결 같이 소원하는 바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은 잘된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내가 잘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범사에 잘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저주가 사라지고 아브라함의 복이 임하였으니 내가 잘된다. 내가 강건하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질병을 다 청산하고 건강하게 되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예수 믿는 신앙이라는 것은 나를 예수님과 분리시켜 놓고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리 내 승리, 예수 천국 내 천국. 그리스도와 여러분을 완전히 한 묶음으로 묶어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몸 찢고 피 흘려 이룩한 모든 것은 다 여러분 위한 것이므로 여러분이 그 모습을 옷 입고 여러분 스스로를 보게 될 때 그렇게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화상을 올바르게 보아야 승리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우리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들은 다 이와 같으니라. 바람같이 성령은 임하여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가자 아버지께 구해서 성령이 오순절날 임하셔서 여러분 속에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여러분이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며 보혜사 성령님 이끌어 달라고 하면 성령은 여러분의 생각을 통해서 여러분의 꿈을 통해서 여러분의 믿음을 통해서 여러분의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여러분 가운데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성령님은 하나가 되어서 역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로 18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영원은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를 합쳤을 때 영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하나님이 같이 계신 여러분이 고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3절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내주한 사람이라고 또 성경에 말씀한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예수 충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첫째 보혜사요, 성령은 다른 보혜사. 예수님 똑같은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질그릇 같은 우리 몸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7~9).


질그릇은 여러분, 이 세상에서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흙으로 버무려서 만든 그릇인데 이 질그릇인 우리가 왜 귀중하냐! 그릇 자체가 값이 나가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릇 속에 담아 놓은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면 깜짝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있기에 중요한지 들어 보십시오.


「관계 DNA」의 저자, 게리 스몰리 박사가 미국의 애리조나주에서 세미나를 주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백 명의 청중들 앞에서 열심히 강연을 하다가 갑자기 테이블 위의 낡은 바이올린 하나를 집어 들고 “이 바이올린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청중들은 기껏해야 몇 십 달러 갈 것입니다. 다 낡은 바이올린입니다. 몇 십 달러밖에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스몰리 박사가 바이올린에 새겨진 문구를 읽어주자 모두의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이 바이올린은요~ 1723년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유명한 악기 제조인이 만든 바이올린으로써 그가 만든 것은 오늘날 굉장히 값이 나가는 것인데 스몰리 박사가 바이올린을 청중석에 만져 보라면서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넘겨주자, 그는 마치 귀한 보배를 받은 것처럼... 사람들이 다 낡아서 상처투성이인 바이올린을 왜 저렇게 모시고 다니느냐? 그 바이올린을 만든 사람이 하도 유명한 사람이니까 몇십억 가치가 있는 바이올린이거든요. 아무리 낡았어도 내용이 그렇게 하니까 호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값은 얼마나 될까요? 천정 모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너무 얕잡아 보면 안 돼요. 여러분은 예수님이 만드신 분인데 값이 얼마나 고급입니까? 그러면 여러분 너무 낮게 자기를 취급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고상한 분으로 스스로를 고상하게 여기고 말도 고상하게 하고 생활도 고상하게 하고 꿈도 고상하게 꾸면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장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작품이며,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사람들인 것입니다. 게다가 ‘너는 내 것이라’고 하나님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해 성령의 인, 즉 성령의 도장까지 찍으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중 삼중으로 하나님 소유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보통 귀한 분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 저를 찾아와 편지 한 통을 내놓던 부형님이 생각납니다.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를 할 때 한 부형님이 내 보기에는 잘 생겼습니다. 옷도 깨끗하게 입고... 그런데 편지 한통을 주면서 설명할 필요 없이 읽어 보고 답장을 해 주십시오. 그리고 가 버렸어요. 그분이 주신 편지를 호기심이 나서 빨리 펴서 봤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교회를 왔다 갔다 하면서 소외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교회는 형식적으로 왔다 갔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돌볼 수 없다. 나는 세상을 따라 타락한 사람이고 변화되지 못한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나 같은 사람은 사랑을 받을 수 없다.’ 그러한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이판저판 사판이다. 교회와도 지옥 갈 것이고 교회 안 와도 지옥 갈 것이니까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고... 그런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편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뭐라고 답장을 쓸까요? 기도하고 난 다음 답장을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이 잘못 안 것이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 위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왔다면 십자가 걸머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 세상 사람들이 의로운데 죄인이 없는데 왜 십자가를 걸머져야 되는 것입니까? 부모가 잘 사는 자식이 아니라 실패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자식의 빚을 갚아주는 것처럼,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의로운 사람을 도와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당신 같은 죄인을 도와주려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걸머졌지 의로운 사람은 십자가 걸머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날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 편지가 왔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나같이 못난 놈은 하나님이 버린 줄 알았는데 이렇게 못난 놈을 찾아오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하다. 목사님 편지를 받고 난 다음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구만리장천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고 매일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맞았습니다. 하나님은 구만리장천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죄인인 것을 깨닫자 구원받은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어요? 나는 죄인 아닙니다. 자기가 죄인이 아니니까 용서해 줄 의인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것을 알면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 여러분들에게 필요하고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쓰고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렸을 때 영원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한두 가지 지은 죄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다음에 여러분이 지을 제사가 없어요. 주님은 한번 제사로 여러분을 온전케 하사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결론>


그러므로 우리의 자화상은 빛과 희망과 기쁨과 감사가 가득한 여러분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죄가 용서함 받고 허물이 씻음을 받고 성령께서 영원히 와서 같이 계시며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시므로 여러분을 질병에서 건져 주시고 오늘 내 설교를 들은 여러분 다 백살을 사십시오. 아멘! 그 다음에 우리는 십자가를 쳐다볼 때 나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저주와 가난을 다 십자가에 대신 짊어지고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자화상을 바라보고 나는 저 사람이라고 확실히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저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 자화상을 바라보고 사는데 자기 자화상이 뚜렷하고 보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고 살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저는 고생은 많이 했지만 David, Paul, Yonggi-Cho로 이름 짓고 그것을 바라보고 온 결과에 다윗과 같이 축복도 받고 바울과 같이 축복도 받고 조용기와 같이 축복도 받고 이름 세 이름을 가졌더니만 세 운명이 다 내게 찾아온 것 같아요. 우리가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입술로 고백을 하면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에 여러분 생각과 꿈을 여러분이 다스려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 속에 생각을 다스리고 그 생각이 이루어진 꿈을 꾸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많은 변화가 여러분에게 다가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그냥 신앙이 아닙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는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는 항상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 생각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못났다. 나는 안된다. 나는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자화상을 절대로 가지지 마시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긍정적인 자화상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용서와 의, 거룩함과 성결함, 치료와 건강,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 영생복락의 천국이 여러분 것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보고 믿고 말하는 여러분 되십시오. 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영광을 체험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빛과 희망과 기쁨과 감사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됨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말하고 노래하십시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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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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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기도문 ♡ 건강한생활 ♡offering parayer

 

 

능력의 하나님 아버지!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는 튼튼한 신체적 기능을 주시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해 주시며,

항상 주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지켜주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에 저회의 영혼과 육신, 시간과 소유물 전체를 주님께 드립니다.

저희들의 정성을 기쁘게 받으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생활 속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 주옵소서.

이로 인하여 저희들의 삶이 풍족하게 영글어서 어찌할 수 없어 기쁨을 토하는 석류알과 같이

풍성한 기쁨의 삶이 되도록 인도하옵소서.

 

주님 앞에 드려진 모든 것은, 벳새다 들녘에서 어린 소년에 의하여 드려진 오병이어와 같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그 기적이 주님의 사업에 긴요하게 사용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이 항상 기쁜 생활, 쉬지 않는 성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로 인하여 풍성한 삶을 영위하도록 인도하옵소서.

그리하여 다만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이라고 말하는 바울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예민하고 온순하게 응답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은 소망을 지니고 정성껏 준비한 예물을 바칩니다.

기뻐 받아 주옵소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일평생 충성할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옵소서.

우리에게 회개와 결단을 촉구하시며 하나님께로 향하여 서기를 기다리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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