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4:16~18)

 

고난을 극복하는 세 가지 길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곡의 울음소리를 내고 어머니 배총(배꼽)에게서 떨어져 나올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고난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고난은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는가 생각하고 보면 그 배후에는 고난이 있고 고난밖에 없는 줄 생각하고 보니 좋은 일도 있고 항상 밤낮이 바뀌는 것처럼 좋은 일과 고난은 바뀌면서 수레바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문제지 고난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다 당하는 것이니까.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되겠습니까? 고난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에 걸려서 넘어지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혹은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고난의 돌인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걸림돌이 되고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면 디딤돌이 되어서 더 나은 길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오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고난을 다 겪어보았습니다. 고난이 삶을 파멸시킨 일도 있고 고난을 잘 이겨내서 고난 동등 이상 혹은 큰 축복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대개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1. 고난에 대한 인본주의적 태도
 첫째로, 고난에 대한 인본주의적인 태도인데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가지는 태도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동등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저나 똑같다고 하나님이 홀로 선악과를 구별한 것처럼 저도 홀로 선과 악을 구분하고 살아가겠습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려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와 같이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어서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 사람 말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고 나쁜 것을 결정한다. 인간의 능력으로 고난과 대결하여 이겨도 상처투성이고 지면 패가망신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신론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자기가 자기 주인이 된 사람, 이러한 사람은 자기의 능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하다가 패가망신 당하는 사람입니다. 고난을 자기 이외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항상 원망, 불평, 분노, 정죄가 따릅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믿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된 사람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입니다. 왜,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 하나님이 지어주신 하와가 먹으라고 하니 내가 따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책임은 내게 있지 않고 하나님이 하와를 만들어서 내게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있고 하와가 나를 꾀어서 먹였기 때문에 하와에게 있고 나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하와야!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 ‘뱀이 나를 꾐으로 먹었습니다.’ 자기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습니다. 마음이 깨어진 사람은 자기를 뒤돌아 보고 자기의 책임을 느끼고 회개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다 돌리는 것입니다. 너 때문에 그렇지 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너 때문’이 굉장히 힘든 말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다가올 때 그 고난이 나 때문에 다가오지 않았나 깊이 살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자기가 아무 일을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나빠서 그렇다고 교만을 부리면 결국 교만으로 말미암아 자기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고난에 대처하는 낮은 신앙의 단계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낮은 단계의 신앙이 있고 높은 단계의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하여 낮은 단계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해결하려고 하되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일은 내가 해결하겠습니다.’ D. L. 무디 선생이 늘 이야기할 때 그 말 했습니다. 키가 굉장히 크고 몸이 거대한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딸내미를 데리고 얼음을 지치러 가면 딸내미 손을 꽉 잡으면 자꾸 손을 틀어버려요. “내가 걸을 수 있는데 아버지가 왜 자꾸 손을 잡느냐. 내가 걷는다.” “아버지가 붙잡아 주면 좋지 않으냐.” “필요 없다.” 그래서 얼음 위를 걸어가다가 미끄러져서 꽝 엉덩방아를 찧으면 그다음에는 엉엉 웁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손을 잡고서 “봐라! 아버지가 곁에 있어서 잡아 주겠다고 하는데 왜 고집을 부리고 가다가 넘어지느냐. 손 내놔!” 그러면 손가락 하나 딱 내놔요. “이것만 잡으면 돼!” 그래서 손가락 하나를 잡아서 미끄러지니까 또 엉덩방아를 찧습니다. 그래서 상처투성이가 되어야 비로소 그때는 울면서 손을 내놓는데 그러면 아버지가 손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몸통을 안아서 얼음 위를 걸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이 아니고 자기 힘을 의지해서 나가는 사람은 기도는 합니다. “하나님 이 고난에 나를 붙들어 주시고 지켜 주십시오.” 기도는 하면서 맡기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도움은 받았지 하나님께 맡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고난에 대하여 인간적인 힘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니까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우려고 해도 내 뜻대로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하나님 뜻대로 나를 끌어가지 마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 보조로 삼았지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고난에 대처하는 낮은 신앙의 단계는 자기 인본주의가 꽉 서서 하나님을 보좌관으로 삼지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보좌관이 되지 않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신앙적인 시련을 겪고 깨어졌습니다. 낡은 사막의 잡초 가시넝쿨 안에 불이 활활 붙었을 때 모세가 그 앞에 가니까 그 불길 가운데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신발을 벗어라.” 그 말은 뭐냐면 신발은 자기가 신고서서 걸어가는 자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중심을 벗어서 하나님께 던지고 의지하라. 자기 신발을 신고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같이 서서 대화하려면 하나님이 상대해 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들은 신발을 신어도 종은 신발을 벗습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의 주권을 넘긴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어서 던지니까 그때부터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서 모세를 이끌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여리고 평지에 여호수아가 났을 때 한 군대장군이 칼을 뽑고 여호수아 앞에 섰습니다. 여호수아가 “당신은 우리 원수 편입니까? 우리 편입니까?” 장군이 말하기를 “나는 편들러 온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파견되어 나온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다. 네 발의 신을 벗어라.” 하나님의 군대 장군이 왔어도 여호수아가 신발을 벗고 자기 주권을 내어 놓았었을 때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모든 정치적인, 군사적인 방법을 말씀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전체 다 맡기든지 아니면 전체 여러분이 다 책임지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반쯤 맡기고 반쯤 안 맡기고 하는 엉거주춤한 그러한 생활은 원치 않습니다. 오늘 주님은 여러분에게 와서 말씀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네 신발을 벗어라. 네 주체성, 네 중심의 생각을 벗어서 내게 맡겨라.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내게 맡겨라. 그러면 여러분 스스로 맡기면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하나님, 내가 할 테니까 와서 도와만 주십시오. 나는 보좌관 하러 오지 않았다. 네 마음대로 하라. 네가 충분히 깨어졌을 때 다시 오마.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깨어지면 신발을 벗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반드시 나쁜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3. 고난을 극복하는 높은 신앙의 단계
 고난을 극복하는 높은 신앙의 단계를 우리는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모든 고난이 올 때 내 인생을 하나님께 내어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물에 뛰어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맡기면 물이 그 사람을 띄워주는 것처럼 자기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쇠하든지 하나님께 내어 맡겨버립니다. 맡겨버리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모든 고난도 하나님께 맡겨버리자. 편안할 때는 참 아멘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진짜 고난이 다가와서 불길이 타오르는데 내어 맡긴다는 것은 참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3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홍해가에 왔는데 군인도 없고 배도 없고 빈손 들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맡길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돌아서서 애굽 군대에게 항복할 것이냐. 기로에 서 있습니다. 백성들은 다 모세야, 이곳에서 우리는 전멸 당한다. 돌아서서 애굽에게 항복하고 나가자. 그러나 모세는 서서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자. 오늘 네가 본 애굽 군대를 다시는 안 볼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맡긴 것입니다. 엄청난 담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내어 맡긴 것입니다. 모세는 정말 자기 자존심을 다 벗어버리고 자기를 의지하는 모든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지식과 재능을 벗어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홍해수를 갈라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 절대 쉽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엄청난 결단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죽을 각오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각오를 하고 하나님 앞에 인생을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에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예수님께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얼마나 십자가 걸머지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주님은 하나님께 그 잔을 옮겨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잔을 받아 마셨습니다. 먼저 죽음을 내놓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당할 때 주님의 도움을 구하면 주님이 우리 자신을 내놓을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9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자기가 선한 일을 선택하고 도모하면서 생명을 하나님께 맡겨라. 하나님께서 영혼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55편 22절에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맡기는 것은 전적으로 내어 맡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하나님은 맡은 것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맡은 것을 책임 못 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일단 맡기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 해 보시라고요. 여러분이 어려운 고비에 당했었을 때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세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책임을 져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극복하는 높은 단계의 신앙에는 항상 고난이 다가오면 마귀가 그 앞에 서서 춤을 추고 야단법석을 하더라도 우리 믿는 사람은 그 고난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조차도 우리에게 유익 되게 하시지 손해되게 안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 잔이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다가오면 우리에게는 고난과 마귀가 보이지만 한 단계 더 멀리 바라보면 하나님이 고난을 이용해서 우리에게 유익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모든 것이 합력하여 좋은 일, 어려운 일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러므로 고난은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축복을 반드시 가져오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큰 만큼 영광도 다가오고 고난이 적으면 적은 만큼 하나님의 은총도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하게 왔다가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고난은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축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고난이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손해를 가져오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멀리서 바라보면 굉장한 유익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선생은 고린도후서 12장 7절로 9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선생이 얼마나 계시를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받고 사람으로서 셋째 하늘까지 올라가서 하나님과 대화한 사람입니다. 사람이니까 교만해지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래도 셋째 하늘까지 올라갔다 온 사람인데 무슨 잔소리냐? 교만해질 수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사탄의 사자를 보내서 가시 채처럼 몸을 찌르게 했습니다. 바울 선생은 몸에 지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고통스럽고 괴로웠습니다. 그 병이 떠나기 위해서 세 번 기도했으니 바울 같은 위대한 신앙인이 세 번 기도 드렸으니 얼마나 깊은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무나 내게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네가 교만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가시 채를 보내어서 사탄이 너를 괴롭히므로 네가 교만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고난을 보내어서 나를 약하게 만들므로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고 더욱 하나님께 바라보게 해서 하나님이 사용하는 귀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그랬다고 하나님 대답하시므로 고난이 오히려 고맙게 느꼈다고 했습니다. 고난 때문에 내가 더 은혜를 받고 더 큰 능력과 계시가 오는 것이니까 오히려 하나님 더 많은 고난을 주셔도 좋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받는 고난이라면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겸비하게 낮아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운 고난이 다가오면 반드시 고난이 여러분에게 괴로움만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길을 가르쳐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무슨 길이냐. 금식기도 해라. 고난이 내게 다가와서 괴로우면 고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고난 없을 때는 아무 말 해도 소용이 없는데 고난이 다가오면 금식기도 해라. 금식기도를 하다니요? 오산리기도원으로 가라. 그래서 금식기도를 하게 되고 고함을 쳐 하나님께 부르짖기도 하고 헌신적인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편안하면 금식기도하고 기도원에 가서 철야기도하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 좀처럼 없습니다. 고난에 고통을 당하면 고난을 이기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신령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이 다가올 때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가 그것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 의미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반드시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고난은 의미가 있습니다. 의미 없는 고난이 여러분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이 다가오면 제일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내가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징계를 받은 것이 아닌가 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잘못하면 부모가 꾸짖지 않습니까? 옛날에 우리 어릴 때는 우리 어머니 부지깽이가 징계의 채찍입니다. 들어오라고 해서 부엌 앞에서 부지깽이로 장딴지를 얻어맞은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 이것은 네가 받아야 될 징계라고 하면 회개하고 우리가 변화돌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8절로 11절에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아버지가 너희들 잘되라고 징계하는데 영의 아버지가 영원히 잘되라고 징계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훗날에 의롭게 되고 더 평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채찍을 들어 때리고 몽둥이로 종아리를 때린다는 것입니다. 징계는 우리가 그를 통해서 회개하고 변화받기 위해서 주는 징계라는 것입니다. 징계를 안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학교에 가서 공부할 때도 선생님에게 징계를 받아야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학교에서 선생이 징계를 못 한데요. 학생이 선생님에게 막 달려들기 때문에 징계를 못 하는데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 당연히 징계하면 벌벌 떨고 꿇어앉습니다. 제가 중학교 공부할 때는 중학교에 우리 영어 담당하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선생님의 이름이 콩코드입니다. 콩코드라는 것은 문장의 시차가 같도록 만드는 것을 콩코드라고 하는데 이만한 대나무 장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교실에 들어와서 숙제 내놓고 콩코드가 맞지 않으면 나오라고 해서 때리는데 대나무 막대기로 때리니 얼마나 아픕니까? 그러니 그 선생님 시간에는 죽도록 외워요. 죽도록... 당장 잊어버릴 지라도 죽도록 외워요. 그래서 그 선생님 앞에서는 통과가 되었어요. 요사이 돌아보면 그 선생님이 대나무로 때렸는데 그때 외운 것 지금도 알아요. 안 잊어버렸어요. 징계는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발전을 할 수 있고 향상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징계로써 어려움을 주실 때는 회개하고 도와달라고 하면 평강의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욥기 5장 17절에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와서 고통당할 때 업신여기지 말고 그 징계를 받아들여서 변화 받기를 구하면 내게 큰 유익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매를 맞을 때 하나님은 회개하라고 때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온전히 다 의롭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의만 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야훼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야훼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8-19) 많은 고난이 있으나 하나님은 그 고난에서 건지기도 하시고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잘못해서 당하면 징계를 내리시고 회개하도록 꾸짖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를 맞을 때 회개를 합니다. 평안할 때 좀처럼 회개하기가 곤란합니다. 고난은 아플 때 회개하고 변화를 받으려고 애를 많이 쓰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 신앙이 자랄 때 더 고난을 주셔서 회개케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자라는 것이 그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있으면 하나님이 아직까지도 인격적으로 변화 받으라고 회개를 시키는 것이므로 오히려 장성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엘서 2장 13절에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야훼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재앙을 안 내리기 위해서 재앙 오기 전에 변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비가 와서 언덕이 무너지기 전에 복구하고 수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격적으로 무너지게 된 것을 회개하고 수리해 놓으면 어려움이 다가와도 극복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기 위해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인내의 훈련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참지 못하면 이기지 못합니다. 어떠한 고난도 참고 어려움도 참고 견디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하는 것이 굉장히 괴로워도 이를 참고 계속해서 노력을 하면 거기에 통달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내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인내를 가진 인격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3절로 4절에 보면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삶에 참는 마음 이것이 신앙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면 신앙이 온전하지 못하게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해도 참고 좋을 때도 참고 넘치지 않게 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인내를 가르쳐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정 참지 못하고 아이고 나 못 견디겠습니다. 나 내려가야 되겠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버렸으면 우리는 구원을 못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다 청산할 때까지 참으셨습니다. 마지막 우리의 빚을 다 갚으셨을 때 내가 다 갚았다. 그리고 주님이 세상을 뜨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갚아진 거예요. 예수님이 인내가 없었으면 중도에 포기하고 나 내려가야 되겠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셨으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가 다 갚아졌어요. 허물도 다 청산되었어요. 여러분의 질병과 고통도 다 청산되었어요. 저주도 갚았어요. 낭패와 실망도 갚고 죽음과 지옥도 갚았어요. 주께서 다 갚아놓고 난 다음에 내 영혼을 주께 맡기나이다. 청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청산할 수 있는 인내를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 시련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서 여러분 인내가 되면 여러분이 비로소 지역장도 구역장도 장로도 집사도 목사도 책임을 지고 일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책임자는 온전히 구비하여 모자람이 없게 위해서 인내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내 없이 성격이 급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자가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신앙이 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시련을 겪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소련 소치 땅에서 올림픽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올림픽 때문에 잠을 못 자는 우리 성도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 올림픽 하면 단거리 선수들이 뛰는 것 그렇지 않으면 올림픽 거기에서 춤을 춘다고 말합니까? 뭐라고 말합니까? 그것을 볼 때 얼마나 다리 힘줄이 강한지 몰라요. 그 다리의 힘이 그렇게 붙어야 단거리도 뛰고 장거리도 뛰는 데 그 힘이 하루 만에 붙습니까? 하루 만에 힘이 생기지 않아요. 꾸준하게 열심히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병원에 신체검사 하러 가면 제 담당 의사선생님이 항상 나를 보고 다리에 힘을 실으십시오. 다리에 힘을 기르십시오. 그래서 다리에 힘을 어떻게 기릅니까? 매일 만 보를 걷든지 안 그러면 아령을 들고 세수하고 난 다음 이것을 매일같이 하십시오.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람은 다리에서 힘이 생기고 다리에서 힘이 빠집니다. 다리의 근육이 힘이 빠지면 저항력이 없어서 다른 병도 다 걸립니다. 그리고 난 다음 나하고 같이 서서 나를 밀어서 자기가 뒷걸음질 치는지 내가 뒷걸음질 치는지 보자고. 그런데 지금은 자기가 뒷걸음질 치지요. 왜냐하면 아직은 내가 젊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내가 뒷걸음을 치게 되면 곤란하지요. 그러므로 세수할 때 항상 앉았다 일어났다를 항상 30번 하라고 합니다. 30번 하면 다리가 굉장히 힘줄이 서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대신 근육이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다리가 튼튼해지면 감기도 안 걸린대요. 모든 저항력이 생겨서 튼튼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한가지입니다. 연단을 받아야 돼요. 어려운 일을 당해서 기도와 믿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연단을 받아야 나중에 어려운 문제도 척척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절로 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이 연단을 받게 되면 환난 같은 것 다가와도 능히 이겨낼 수 있고 소망을 가지고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이기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로 14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즐거워할 수가 없지요. 시험과 고난이 다가오면 즐거워 안 합니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고난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우리가 고난을 당해도 예수 이름으로 꾹 참고 이겨나가면 그 영광이 주님 앞에 설 때 상급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우리가 고난을 참는다는 것은 신앙이 그만큼 자란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조그만 일만 해도 성을 내고 화를 내고 발버둥을 치면 그것은 신앙이 자라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에 연단을 받으면 많은 은구슬, 금구슬 많은 영적인 구술을 마음속에 보배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장에 가서 보면 진주가 있지 않습니까? 진주가 아름다운데 그 파란 색깔이 흰색에 섞여서 있는 것을 보면 굉장히 아름답게 보이는데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자연적으로 진주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진주는 광물성 보석과는 달리 생명체가 만들어내는 보석인데 진주조개 혀 밑에 모래알을 넣어주면 혀를 갉아 먹으니까 아프잖아요. 그러니까 혀에서 물질이 나와서 그 모래알을 감싸요. 자꾸 감싸고 감싸고 감싸고 감싸니 나중에는 동글동글하고 아름답고 영롱한 진주가 되어서 진주조개 혀 밑에 저렇게 되어서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보석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의 신앙이 진주조개같이 되는 것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볼 때 야! 빛난 진주가 반짝거리는구나. 저것 내가 가지고 사용해야 되겠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여러분이 참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는 것을 전부 다 참지 않고 변명을 하고 싸우고 원수를 갚고 하면 진주가 될 시간이 없어요. 그러나 고난을 내가 받아들여서 참고 견디면 내 속에서 진주가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고난을 참는 것보다 더 위대한 신앙은 없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존귀롭고 아름다운 것은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탓이요.’라고 하고 내가 깨어지고 내가 참는 것 이것이 보배입니다. 가정생활도 한가지입니다. 남편이 조금만 참으면 아내를 수용해주고 가정에 불화가 없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내는 남편을 조금만 참고 이해해 주면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고 견딘다는 것, 이것이 가정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절대적인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깨어지지 않는 사람은 참지 못합니다. 대항합니다. 싸웁니다. 깨어져야 마음속에 진주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진주는 광물성 보석이 아니라 생명체가 만들어내는 보석이므로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래 깨어지고 참으면 아름다운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인해 고통과 아픔을 겪지만, 그 고난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하고 잘 극복하면 오히려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이 다가오면 고난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긍정적인 태도를 취합니까? 고난이 다가오는데 긍정적인 태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이 내게 좋게 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이 긍정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 일부러 좋은 일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고서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태도라는 것은 많은 고난이 다가오는데 사람들은 고난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울고 가슴을 쳐야 될 곳에 여러분 기도할 때 이 고난조차 하나님이 내게 유익되게 할 줄 믿습니다. 고난을 하나님 통해서 내가 더 나은 내일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유익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부어 잔이 넘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인내하고 참으면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일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한 이태(두 해) 동안에 저는 50년의 목회생활을 해오는 중에 가장 어려운 고난을 겪었습니다. 시련을 겪고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만 제가 여태까지 신앙해 온 중에 가장 하나님이 제게 유익된 날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많은 고통이 다가오고 내가 변명을 하고 싶고 사람이니까 대항하고 싶고 복수를 하고 싶고 여러 가지 착잡한 잘못된 생각들이 마음에 많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회개할 수 있고 성령의 변화를 받을 수 있고 그리고 진주조개가 되는 것을 바라볼 수도 있고 좋은 일이 많았었습니다. 제가 고난을 당할 동안에 우리 성도 여러분들께서 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신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저를 사람으로 만들고 주의 종으로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 배운 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오늘이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주의 나라에 갈 것인데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돈도 건강 이외에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길에서 조그마한 일도 하나님께서 다 좋게 만들어 주실 것이니 이 시험과 환난도 제게 크게 좋게 만들어 줄 줄 믿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당회장으로 들어온 이영훈 목사 좋은 사람입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보고 길러 온 사람인데 성격이 착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자기 혼자 힘으로 안 돼요. 여러분이 기도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많이 해주시고 또 선배 된 제가 끌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우리 당회장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제가 선배로서 잘 끌어줘서 훌륭한 주의 종이 되고 한국을 세계에 나타내는 일꾼이 되게 만들어 주십시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고난은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유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난은 반드시 그 배후에 영광을 주는 것입니다. 영광은 고난보다 견줄 수 없이 큰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국무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비관론자는 매번 기회가 찾아와도 고난을 본다. 그러나 낙관론자는 매번 고난이 찾아와도 기회를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면 고난이 오히려 유익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이 다가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춤추고 즐거워하고 고난이 다가오면 하나님께 엎드려서 주님이시여 이 고난이 좋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나쁘게 될 것을 믿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좋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는 기쁨이 될 줄 믿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이를 받아서 좋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점점 육신의 세계가 멀어지고 천국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육신의 모든 것이 허무하기 짝이 없거든요. 하루아침에 재산 다 날아갈 수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벌어 놓은 것 다 놓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지고 있는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영원한 세계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므로 고난은 육신의 세계를 이기고 천국을 마음속에 깊이 모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18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겉사람이 고통으로 찌그러지고 낡아지면 속사람이 더 새로워지고 생기발랄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모하기 때문에 변화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이 지극이 크고 중한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는 세상 것은 잠시 있으면 다 지나가고 안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영원히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시고 굳건하게 만드시고 강하게 만드시고 견고하게 만드셔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좋은 일은 좋아서 좋고 나쁜 일은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니 좋습니다. 이것이 긍정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나쁜 것은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니 좋다. 그러므로 감사와 찬양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크게 기뻐하시고 여러분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고난은 피할 수 없으나 고난을 대하는 태도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보았습니다. 옳은 태도를 가지면 고난은 크게 유익된 훈련이 되지만 잘못된 태도를 가지면 심신의 깊은 상처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감사로 약으로 변화시키든지 불평으로 독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좋은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태도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고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크고 작은 고난은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디딤돌이 되기도 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하나님이 같이 일해 주셔서 그 고난을 통해서 영혼이 더 잘되고 더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원망, 불평, 탄식을 하면 더 나빠지고 더 고약해지고 더 고난이 거세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내일을 변화시키는 것인데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지 옆에서 보고 계시고 도와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은 좋습니다. 좋은 것을 가져오기 위해서 인격적으로 연단해 주시고 징계해 주시고 강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고난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통해서 좋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은 좋은 것입니다. 좋은 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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