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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금요철야예배설교] 하나님의 리듬에 장단 맞추라 Friday Night Sermon

하나님의 리듬에 장단 맞추라
본문 / 전도서 3:1~11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본문을 보면, ‘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때에 대한 개념을 바로 이해해야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에 대한 감각을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열심보다 때가 중요합니다. 열심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를 알아야 멋진 인생,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혜는 때와 항상 연결되어있습니다. 전도서의 여러 곳에서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삶은 때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야 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때를 맞추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간 관리를 많이 말합니다. 시간 관리에 관한 책도 많습니다. 그런 책이 도움이 됩니다.
저도 시간 관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시간 관리를 잘 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시간 관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신자는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때에 대한 감각을 길러야 합니다.
때에 대한 감각은 24시간, 1주일 등 시간에 대한 개념보다 더 큰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때에 대한 감각을 가지려면, 시각(視覺)을 가져야 합니다.

농부는 밭을 갈고 밭에서 일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계절감각을 갖는 것입니다. 계절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계절에 맞게 일해야 합니다. 무슨 계절인가도 알지 못한 채 열심히 일한다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봄에 해야 하는 일이 있고, 여름에 해야 하는 일이 있고, 가을에 해야 하는 일이 있고, 겨울에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와 거둘 때에 맞게 일하려면, 계절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계절에 맞는 행동 패턴이 있어야 하고, 계절에 맞게 스케줄(schedule)을 조정해야 합니다. 봄의 일상과 겨울의 일상은 전혀 다릅니다.

인생의 계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별로 때에 대한 강조점이 다릅니다. 강약(强弱) 조절이 필요합니다.
성실하게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늘 성실하게 자기관리를 잘하지만, 인생 전체를 들여다보는 눈이 없으면, 나중에는 크게 후회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2장 5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일의 일기예보는 확인하면서 시대에 대한 분별력을 갖지 못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외식주의자들은 시대를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시간 관리를 잘하고, 종교적으로 활동을 많이 했을지는 모르지만, 시대에 대한 감각이 없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때를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므로 영적 기상도가 완전히 바뀌었는데, 외식주의자들은 일기(日氣)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고, 눈 먼 자가 눈을 뜨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쫓겨나는 등 영적으로 거대한 폭풍이 불어 닥치는데, 외식주의자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천지의 기상은 잘 아는데, 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계속해서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영적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에 눈이 가려져있었던 것입니다. 분별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니까 때에 대한 감각이 없었습니다. 영적 흐름이 어떠하며, 영적으로 바람이 어떻게 불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열심히 제사 드리며 의식을 행하는데,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지 않으니 딴 짓만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솔로몬은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말했습니다. 농부도 그렇지만, 어부도 때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썰물의 때가 있고, 밀물의 때가 있습니다.

호주에 있을 때, 성도 중에 낚시를 좋아하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낚시 장비가 좋고, 낚시 기술이 훌륭해도 때를 맞추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끼가 아무리 좋아도, 물고기가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때가 있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오는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때를 맞추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때를 정확하게 맞추면, 낚싯대를 내리기만 하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때와 타이밍(timing)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때에 대해 말씀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간에 있어서 핵심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간 관리 안에는 이런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관리하고, 자기의 스케줄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time table)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성실보다 하나님의 열심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행동보다 하나님의 행동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움직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움직이시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무엇을 하시려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殿)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가 왕이 될 때까지의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은 따로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충동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를 따라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성령께서 일하시는 방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성령의 타임 테이블에 따라 종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중요한 곳에 세우셔서 거대한 바람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성령의 주도하심 속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려고 하는데,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유럽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신 마스터플랜(master plan)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아무리 가려고 해도 갈 수 없었습니다. 온갖 고생을 하고도 아무 열매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게 하시는 대로 가면,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표와 다른 시간표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중요합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가 꿈을 꿨지만, 현실은 꿈과 전혀 달랐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셉이 생각한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실이 반대로 가는 이유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진행될 때, 가장 멋지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을 할 때, 시간에 대해 정확하게 생각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시간을 미세하게 들여다보고 분석하면,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보면, 큰 덩어리의 시간 개념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정확하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면, 큰 덩어리의 시간 개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시간표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조급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었으나, 관원장은 요셉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며 자신을 생각해달라고 말했는데, 술 맡은 관원장은 감옥에서 나간 후에 요셉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는 잊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소망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했을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으나, 왕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죽을 것 같은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힘든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때입니다. 일이 빨리 진행되어야 하는데,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다가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힘듭니다.
우리가 세워놓은 야심찬 프로젝트가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진전이 없습니다. 시간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때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흘러야 하는데, 1초도 흐르지 않고, 멈춘 것 같다고 느끼면, 숨이 막히는 듯합니다.
시련은 계속됩니다. 마치 터널 속을 지나는 것 같습니다. 어려운 순간, 미동조차 일어나지 않을 때,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런 순간을 맞이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가장 혹독한 시간이 찾아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어려운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약한 상태로 만드신 후에 일하십니다. 우리가 약해질 대로 약해졌을 때, 하나님의 강한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바로 직전이 매우 어렵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우 약해져있을 때, 하나님의 때가 임박해있습니다.

임산부는 만삭이 되었을 때가 가장 힘들다고 합니다. 바로 누워 잘 수도 없고, 여러 모로 불편합니다.
그때가 가장 어려운 때입니다. 그리고 위험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 직전입니다.
그때는 시간이 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빨리 흘러서 아기가 빨리 태어났으면
 좋겠는데, 하루가 길게 느껴집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임박하면, 그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는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하나님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기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때는 불확실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수중(手中)에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알지 못합니다. 예측할 수는 있지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 대한 계획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앞에 일어날 일을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개인의
 삶에서 디테일(detail)한 것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신실하신 분이시고, 우리의 인생에 대해 우리보다 더 세심하게 아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의 삶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계시고, 신실하게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이 완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기다리면서 겸손해져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잠히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옵니다. 그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모험과는 다르지만, 모험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믿음을 갖지 않는 사람들도 모험을 많이 시도합니다.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모험합니다. 모험하지 않으면, 기업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기업의 CEO들은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망하기 때문에, 새로운 결단을 하고, 모험을 해야 합니다.

믿음과 모험은 비슷합니다. 그런데 믿음과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은 대상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을 믿는가에 따라 도박이 되기도 하고, 믿음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험은 도박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고 하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이 머리 좋은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다른 사람보다 크면, 그 사람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 좋은 사람들이 앞서 나아가는 것을 따라갑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믿음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행동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을 때에는 숨죽여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때 잘못하면, 사고를 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고를 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는데, 섣불리 행동하다가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아닌데 행동하면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면, 용감해져야 합니다.

기다려야 하는 때에는 잠잠히 있어야 합니다. 그때 나서면 안 됩니다. 그러나 때가 왔다면, 확신을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를 보세요. 하나님의 때가 오기 전,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드러내실 때,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갈멜 산 정상에서 850대 1의 싸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었습니다.
숨어있어야 할 때에는 숨어있었지만, 하나님의 때가 왔을 때에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믿음으로 행동하는가에 모든 것이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때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이 왔다면, 대담해져야 합니다. 민첩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하나님의 때에 여러분의 삶을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기회는 더 이상 기회가 되지 않습니다. 기회는 기회를 알아보고, 기회에 반응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됩니다. 기회에 반응하지 않으면, 기회는 기회가 되지 않습니다. 기회는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때는 나와 상관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믿음이 강화되면, 때가 왔을 때에 두려움 없이 반응하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때가 와도 용기가 생기지 않아서 기회가 지나가버립니다.

에스더를 보세요.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 4:14)”라고 말했을 때,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고 반응했습니다.
에스더는 때에 맞게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유대 민족을 살렸습니다. 하루만 늦었어도 유대민족이 말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에스더는 때를 정확하게 맞춰 행동했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자칫하면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믿음으로 용기를 내고 나아갔을 때, 반전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때가 오면, 몸을 사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몸을 던져야 합니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놓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삶에 기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타이밍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허비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때에 맞게 반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때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모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다른 차이는 없습니다.
가슴 설레는 일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주저하면 안 됩니다. 기회를 잡으셔야 합니다.

본문 전도서 3장 1절에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감각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생활을 할수록 영적으로 날이 서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영적 깨달음이 쌓일수록 우리 안에 영적으로 날이 서야 합니다. 영적으로 예민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징조가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징조를 느낍니다. 영적 감각이 탁월하면, 징조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느낍니다.
징조는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도 있습니다. 영적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압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한가운데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 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습니다.
그런 때에는 시간이 무지하게 빨리 지나갑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어마어마한 일들이 지나갔는데,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한 시간을 가리켜 ‘크로노스(χρόνος)’라고 하지 않고, ‘카이로스(καιρός)’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때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는 시간, 하나님께서 관여하시는 특별한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시간이 오면, 시간이 매우 빨리 흐릅니다. 전운이 감돕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시간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면, 우리가 알지 못한 일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한국 역사 속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5천 년 한반도 역사 가운데 늘 시련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니 1907년 평양에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970년대에는 여의도광장에 2백만 명의 성도들이 모인 것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민족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한국은 경제적으로도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변화가 일어났고 성장했습니다. 그로 인해 한국은 2만 7천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가 중요합니다. 믿음의 촉수를 곤두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경거망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자칫하면 유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한 박자라도 늦거나 앞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행동하면, 기회는 지나가버립니다.

서핑(surfing)을 하는 사람들은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추어야 합니다.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물속에 빠집니다. 타이밍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영적 생활에 있어서도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파도를 타야 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위험천만한 일이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추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정확하게 맞추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주신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때 믿음으로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힘을 써도 잘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때가 오면, 자신은 수고하는 것 같지 않은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오지 않았을 때는 밀물의 때에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 같습니다. 맞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습니다. 매우 힘듭니다. 열매는 없습니다. 될 듯 될 듯하다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에는 힘을 쓰지 않고 있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대세’라고 합니다.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기 때문입니다.
목회와 사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에 있을 때에는 모르는데, 하늘을 날 때에는 바람을 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모든 일이 그러합니다.
인생을 복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에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기회를 기회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회를 기회로 알아보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준비되어있고, 실력을 갖추었다 해도 기회를 알아보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기회는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미리 신호를 보낸 후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영적 감각을 길러야 합니다.
때에 대한 분별력을 갖는 것은 영적 활동에서 매우 핵심적인 것입니다. 영적 감각이 있으면, 하나님의 때가 온 것을 알아차립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지만, 만족하기보다는 내적으로 결핍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서 만족하게 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느끼게 하십니다.

모든 바람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십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면, 그곳에는 분명히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바람을 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로 이끄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때라고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바람이 불기를 바랍니다. 그 바람에 여러분의 몸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성실하게 사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늘 제자리에 머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밧줄에 묶인 듯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밧줄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 새로운 차원을 여시기 위해 바람을 일으키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고, 우리의 몸을 맡길 때,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때를 영원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본문 전도서 3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구절은 전도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영원’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헛되고 헛되다고 말한 전도서 안에 ‘영원’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영원을 향해 맞추어져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을 향해 기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을 사모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무엇을 이루려고 하면서 왜 허무함을 느낍니까? 전도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전도서에 ‘헛되다’라는 말이 몇 번 나올까요? 총 29회 나옵니다.

지금은 중요하게 여기지만, 얼마 가지 않아 마음이 식어버립니다. 미용사가 머리를 마음대로 잘라버리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당장은 분노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갖고 싶은 것을 가지게 되면, 매우 감격하고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며칠 가지 않아 그 마음이 식어버립니다.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새로운 지식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구입해도, 금방 또 다른 새로운 브랜드가 나옵니다.

잠언 31장 30절에 보면,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을 지금 시대에 맞게 바꾸어 말하면, “몸짱도 거짓되고, 얼짱도 헛되나, 영짱만 영원하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목마릅니까? 세상에는 새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새것이 없습니다. 대단한 것 같아 보여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 많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데도 기도하러 나오시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대단한 분입니다. 없는 것이 없이 다 갖추었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기도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권세도 있는데, 기도하러 나온 사람에게는 비밀이 있습니다. 쉽게 비밀을 터득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깊은 것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 비밀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기도하러 나올 수 없습니다.
돈만 많이 번 사람이라면, 돈을 원 없이 써본 후, 끝지점에서 허무함을 맛보기 전까지는 기도하러 나올 수 없습니다.

돈이 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대개는 대가를 지불한 후에야 깨닫습니다. 대가를 지불하기 전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돈이 있고 건강하다면, 나를 부르는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 많고 잘 나갈 때에는 기도하러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좋아합니다.
돈 냄새를 풍기면, 사람들이 몰려와서 아첨하고 기분을 돋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마음껏 쓰게 할 것입니다.
돈이 바닥나기 전까지는 그 재미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돈이 바닥나고, 친구들이 떠나기 전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허무하고 식상하고 지루해진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권력을 가지든, 돈을 끌어 모으든, 지식을 쌓든, 성적 쾌락에 빠지든 그것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결국 허무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것이 영원과 연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허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참된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영원한 목적과 빨리 연결시켜야 합니다.
영원한 목적을 찾으면, 삶의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면 삶에 불이 붙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잠 1:7). 하나님을 경외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금방 나옵니다.
인생이 빙빙 돌지 않습니다. 방향 감각이 생기고, 시간 개념이 분명해집니다. 지금 자신의 나이에 맞게,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분명해집니다. 때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늦을수록 후회합니다. 믿음의 눈이 떠지고, 영안이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유치한 일에 매여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기회가 지나가고 난 후에 “이 몸, 주를 위해 불태우겠나이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허무해집니다. ‘때’는 늘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놓치면 허무해집니다.

시편 1편에 보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3). 인생의 계절에 맞게 열매를 맺어야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것이 ‘철든 인생’입니다. 철든 인생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춤추는 인생입니다. 뒷북을 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때를 놓치면, 나중에는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계절을 보는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복된 인생을 살려면, 허무한 것에 굴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성령의 이끄심에 민감한 삶을 살아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금방 알아차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새 길을 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박자에 따라 춤추는 인생을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일에만 빠져 살지 마세요. 부지런히 산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안테나를 뽑아 올려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매일 매일 타임 테이블을 체크하는 것도 좋습니다. 열심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눈을 감고 잠잠히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바람을 느끼세요. 지금도 하나님의 바람은 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바람을 느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바람에 자신을 맡기세요.

지금도 영적 파동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지루한 일상의 리듬을 깨고, 하나님의 리듬 속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속으로 여러분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분명한 목적에 따라 살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곳에는 강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하나님의 강한 바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강한 바람을 일으키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목적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흐르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힘을 들이고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우리가 힘쓰고 노력한 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단에 맞춰 춤추시기 바랍니다. 엉뚱한 곳에서 힘 빼지 마세요. 여러분이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을 수 있는 곳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세요. 하나님께서 부르신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고 신나고 부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파도를 타면, 꽉 찬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에 반응하고 사는 사람들은 꽉 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꽉 찬 인생을 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때에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가버렸습니다.

허접한 인생이 아니라, 꽉 찬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파도를 타야 합니다. 하나님의 리듬에 맞춰 춤춰야 합니다.
나의 타임 테이블에 맞춰서 나의 열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파도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저는 사역자로서 늘 그것을 느낍니다. 내 힘으로는 별 짓을 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에 내가 덩달아 춤추며 ‘이것이 하나님의 때구나.’라고 느낍니다.
그때 기이하고 놀라운 일, 새로운 일을 경험합니다. 광야에 길을 내시는 역사를 맛보게 됩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아주 짧습니다. 후회함 없이 멋지게 살다가 주님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전도서는 허무로 가득 차 있습니다. 허무로 가득한 가운데서 허무하지 않은 인생으로 우리를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준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에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우리의 방향을 정확하게 맞출 때, 우리의 인생은 날아오를 것입니다. 파도칠 것입니다. 춤출 것입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위대한 역사가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든지 다가오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다시 한 번 도약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기대 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촉각을 곤두세우세요. 영적으로 예민해지시기 바랍니다. 민감하게 반응하세요.

지금 하나님께서 흔들고 계십니다. 지루하게 밋밋한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삶을 계속해서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숨지는 날까지 하나님의 거대한 파도를 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사용해주실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승부를 거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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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금요철야예배설교 / 형통한 삶의 원리 Friday Night Sermon

제목 / 형통한 삶의 원리
본문 / 창세기 49:22~26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복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복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복만 확실하게 붙잡아도 복된 인생입니다.
다른 복을 다 받았다 해도 구원의 복을 받지 못했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구원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복입니다.

성경은 미래적인 의미의 구원, 장차 우리에게 닥칠 천국만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지상(地上)에서의 삶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백성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구원 받은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 것인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구원 이전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이 끊어진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이 세상적으로 잘나간다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기 때문에,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축복이 그 삶 속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복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백성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 때에 잃어버린 것을 구원 받음으로 되찾는,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의 복을 받을 뿐 아니고, 우리의 삶의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구원 받은 백성이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 살아갈 때에 누리는 복이 있습니다. 미래에 천국에 가는 복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묶여있는 것들이 풀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은혜를 받으면,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의 삶과는 다른 일상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주일에 은혜를 받고, 월요일에 출근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금요일 저녁부터 놀다가 주일 저녁에는 지쳐버립니다. 세상의 낙을 좇아 살아가기 때문에 생활의 중심이 잡혀있지 않습니다. 술 마시고 복잡하게 살다 보면, 몸도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기 때문에 맑은 정신으로 생활할 수 있습니다. 삶에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규칙적으로 생활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실해집니다. 새벽기도에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성실하다는 의미입니다. 시간 관리(time management)가 되어야 새벽기도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쓸데없이 객기(客氣)를 부리지 않습니다. 과욕(過慾)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욕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그런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 지수가 낮아졌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삶의 질서가 생겼습니다. 성실해졌습니다. 게으름이 사라졌습니다. 객기가 사라졌습니다. 정신이 맑아지고, 몸도 건강해졌습니다. 열 받을 일도 적습니다. 웬만한 일에는 열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에 안정감이 생깁니다. 삶의 규모가 생깁니다.
신앙인들이 장수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찬양대 봉사를 하시는 분들이 장수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묶여있던 것들이 하나씩 풀립니다. 그래서 집안 전체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물론 힘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생활을 하면서 질서 있고 안정된 삶을 살면, 불필요한 일과 어려운 일들이 점점 사라집니다. 꼬였던 관계가 풀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변한 것이 많아집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편안해지고 자연스러워집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꼬인 것이 풀립니다. 나쁜 습관들이 제거됩니다.
염려하고 근심하며 살던 사람이 은혜 생활을 통해 평강을 얻게 됩니다. 어두웠던 가정에 웃음꽃이 핍니다. 그래서 일의 능률이 오릅니다.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
은혜를 받고, 기도하다 보면, 모든 것이 처리됩니다. 힘 있게 찬양하다 보면,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게 됩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문제와 응어리들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가 풀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 없이 살았던 때에 우리를 감고 있던 족쇄들이 하나씩 풀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싸움이나 갈등이 이전보다 훨씬 적어집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면, 삶의 전반에 걸쳐 혁명이 일어납니다.
저희 집안을 보면, 그것을 느낍니다. 예전에는 형제들끼리도 싸우고 정신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 그런 모습이 없어졌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관계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백성에게 따라오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삶에 축복이 됩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자손들을 향한 야곱의 축복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유언이면서도 예언입니다. 그리고 축복입니다.
본문은 요셉에 대한 야곱의 축복입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참으로 멋진 그림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샘 곁의 무성한 가지에 비유했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샘 곁에 있는 나무는 가뭄과 상관없습니다. 기근이 와도 상관없습니다. 주변의 상황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땅이 말라있으면, 그곳에 있는 나무는 비가 올 때 잠시 파릇해지다가 다시 말라버립니다. 그러나 샘 곁에 있는 나무는 언제나 푸르고 무성합니다.
이집트의 사막은 매우 덥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곳곳에 나무가 있습니다. 싯딤나무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나무는 샘 곁에 있습니다.

경기(景氣)가 좋으면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가, 경기가 좋지 않을 때에는 표정이 굳어버리는 사람은 샘 곁에 있는 나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때 잘 나갈 수는 있지만, 계속해서 잘 나갈 수는 없습니다. 결과를 보면, 한때 잘 나간다고 해서 계속해서 그럴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은 매우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가끔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반짝 축복이 아닙니다. 지속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련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비가 오지 않아 매우 메마릅니다. 잎사귀가 바짝 마를 만큼 태양빛이 강렬하지만, 샘 곁에 있는 나무는 살아납니다.
햇빛이 너무 뜨거우면, 햇빛이 나무를 말려 죽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샘 곁에 있는 나무는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결과적으로는 살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를 뛰어넘는 파워가 있습니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 문제를 이겨낼 힘이 없는 것이 인생의 불행입니다.
샘 곁에 심어진 나무는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샘 곁의 나무는 뿌리가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샘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가뭄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뿌리를 강화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뿌리는 신앙의 기본기를 의미합니다. 복음, 신ㆍ구약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2장 7절에 보면,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 위에,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신ㆍ구약성경,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후에 허공에 뜹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 구원을 받습니다.
누가 구원에 이르는 복을 누립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정확하게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왜 죽으셨고, 그분의 죽음이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는가 하는 복음의 중요한 메시지가 우리 안에 뿌리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에 대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기본적인 것이 내 삶에 뿌리내려야 합니다.
삶에서 근원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이 흔들린다 해도, 뿌리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삶이 요동치는 이유는 뿌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중심이 잡혀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트경기장에 가면, 요트를 볼 수 있습니다. 요트의 바닥에 보면, 납덩어리로 된 축이 있습니다. 납덩어리로 된 축이 요트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그래서 바다에서 파도가 쳐도, 요트가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작은 배는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 뒤집어집니다.
요트는 아주 날렵한데, 납덩어리가 요트의 중심을 잡고 있어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크지 않은 요트를 타고 태평양까지 항해하기도 합니다. 흔들렸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중심이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뿌리를 지키면 나무는 삽니다. 그러므로 샘 곁의 나무는 뿌리가 중요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형 교회에는 건성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보험 든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 진리 안에서 뿌리를 확고하게 내려야 합니다.

시편 1편에 보면,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3).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끊임없이 빨아 당기는 사람은 뿌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을 읽을 때에도 마치 성경에 구멍을 낼 듯이 집중하여 읽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갈망과 사모함이 매우 큽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먹습니다.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말씀의 핵심을 기록하여 그것을 묵상하고, 그것을 놓고 기도하여, 말씀을 강화시켜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킵니다. 그렇게 하면, 믿음의 뿌리가 강화됩니다.
그 사람은 샘 곁에 뿌리내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지가 무성해집니다. 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뿌리가 중요합니다. 뿌리를 보아야 합니다.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면 큰 일 납니다. 영혼이 힘을 잃습니다. 환난과 시련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고, 말씀 안에 살면, 어려움이 와도 말씀이 나를 지켜줍니다. 진리의 힘은 굉장히 큽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신 후에 빵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빵 앞에 조금도 요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4: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받으면, 우리의 영혼이 튼튼해집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오는 환난과 시련과 고난을 넉넉히 이겨냅니다. 그리고 고난이 축복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의 한가운데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박고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점점 자랍니다.

바울의 신앙의 핵심은 ‘in Christ(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뿌리를 확고하게 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샘 곁의 무성한 나무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샘 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집회가 열립니다. 매일 새벽에 세 번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매일 저녁 9시에 예배를 드립니다. 매일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혼자서 신앙생활하기 힘들면, 교회에 오시면 됩니다.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듣고 쓰고 외워서 말씀이 내 안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가지가 무성해집니다.

그러면 ‘무성한 가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삶의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샘 곁에 심긴 나무는 자연스럽게 가지가 무성해집니다.
무성한 가지는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가지에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은 요셉의 삶을 연상시킵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곡식을 창고에 모아들였습니다.
그 후에 주변 나라에는 기근이 들었지만, 애굽은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가족 70인을 다 먹여 살렸습니다.
주변 나라에서는 기근이 들었지만, 요셉은 끄떡없었습니다. 요셉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기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요셉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나라에서 도움을 요청하러 애굽으로 왔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도움을 요청하러 애굽으로 왔습니다. 나중에는 야곱도 애굽으로 왔고, 모두 고센 땅에서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정에서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면, 여러분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살게 됩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는 기근이 와도 끄떡없습니다. 여러분이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샘 곁에 서 있으면 됩니다.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해 요셉 가(家)의 모든 사람이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가족은 기름진 고센 땅에서 거대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은 부요합니다. 풍요합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할 수도 있지만, 영적으로 부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사람은 물질적 가난을 이겨낼 만큼 영적으로 부요하면 됩니다. 영적으로 부요하면,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해도 항상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질적으로도 부요하고, 믿음도 좋다면,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물질의 유무와 상관없이 영적으로 부요한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함을 이야기할 때, 기쁨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한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진짜 복입니다.
사랑이 충만하지 않으면, 다른 것이 소용 있겠습니까. 몸은 건강한데, 사랑이 충만하지 않고 기쁨이 충만하지 않다면,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0).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은 구원의 복을 의미합니다. 더 풍성히 얻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현재적 삶 속에서 누려야 하는 부요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바닥을 긁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늘 끙끙 앓고 힘들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바울을 보세요. 인간적으로는 힘들게 살았습니다. 감옥생활도 했고, 쫓겨 다니기도 했고, 굶주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불편한 삶을 산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 있었지만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빌 4:4).

그리고 바울이 쓴 서신을 보면, 감사로 넘쳐납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했습니다(고후 6:10). 이것이 복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많이 맺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구원 받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믿음의 백성들, 제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는 샘 곁의 무성한 가지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요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은 어려웠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쪼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영적 여유로움이 항상 있습니다. 영적 부요함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넉넉합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와 같습니다.
복음 안에 사로잡힌 부활의 신앙이 바울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고,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본문 창세기 49장 22절에 보면,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풍성함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습니다. 요셉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영향력을 끼쳤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요셉으로 인해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직장에서 매출이 신장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만 먹고사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가지가 담을 넘어야 합니다.
요셉은 자신만 잘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 가족만 먹여 살린 것이 아닙니다. 애굽과 주변의 나라까지 먹여 살렸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3). 여기서 ‘복’은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의미입니다.

우리가 복 받은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나누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을 나눌 때, 복이 나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갑니다.
채워지지 않은 사람은 나눌 것이 없습니다. 채워진 사람이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가졌어도 결핍 증세를 느낀다면, 아직 채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결핍 증세를 느끼는 사람이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나눌 수 없습니다. 더 채워야 하는데, 어떻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데,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나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를 축복하신 후에 우리를 통해 복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구원의 복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는 내가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 우리는 받을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한 그릇이 차고 넘치면, 또 다른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흘려버리고 낭비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주는 것, 나누어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비 중심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쓰기에도 모자랍니다. 이 사회는 과소비를 부추깁니다. 그래서 아무리 벌어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지금은 연봉이 올라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삶을 규모 있게 정리하고, 욕망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모자랍니다.

사람들이 부족함을 느끼니까 나누지 못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축복 안에 있지 못합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상태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때 느끼는 충분함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충분함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함을 느끼게 되면, 부요한 자가 됩니다. 흘려보낼 수 있게 됩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재앙과 같습니다.
신앙의 최고 레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감사하는 삶입니다. 신앙의 절정에 감사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왜 문제가 생겼습니까? 에덴동산은 완벽한 환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완벽한 곳에서 아담과 하와는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감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것이 인류의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십니까. 무슨 죄를 지을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고를 칠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으로 만족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천국의 삶이 시작됩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한다면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서 살게 하시므로 우리의 삶을 뻗어나가게 하십니다. 남을 섬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까지 빛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그늘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위로 받고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 다시 일어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고통 받는 사람이 위로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축복하시며 내가 받은 축복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는 여러분이 빨리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내가 샘 곁의 가지가 되어 담을 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통 속에 있는 주변의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아 위로 받고, 소망을 얻고, 구원 받고,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샘 곁의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라 비틀어져서 뿌리 뽑힌 나무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어 담을 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복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우리의 즐거움과 행복이 흘러가야 합니다.

본문 창세기 49장 23~24절에 보면,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셉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요셉의 주위에 많았습니다. 그들은 적개심을 가지고 요셉을 학대했습니다. 마치 활을 겨누듯 요셉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더 강했습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변에 불신 세력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셉은 전능자의 손을 힘입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요셉을 붙들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도 아니고, 환경도 아닙니다. 우리가 전능자의 도우심을 경험하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데서 신앙의 묘미(妙味)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시련의 파도를 타고, 목적지까지 항해하는 법을 체득해야 합니다.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가 깊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함으로 인생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순풍에 돛단 듯 순탄하게만 흘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애물과 복병이 생기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세요. 전능자의 손길이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어려움들을 우리의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실력으로는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 없습니다. 온갖 술책과 간교함으로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말씀을 붙들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리숙합니다.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간교와 술수, 중상모략 등 온갖 죄악이 가득합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 속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세상 사람들을 이기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을 이기려면, 그들보다 한 수 위여야 합니다.
우리의 방식으로는 세상 사람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리 떼 가운데 있는 양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보세요. 요셉의 형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요셉의 힘으로는 그것들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요셉을 빼내셨습니다.

전능자의 손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을 보면, 전능자의 손이 항상 있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손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말씀의 원리와 방법대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본문 창세기 49장 24~25절에 보면,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24절에 보면, 하나님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야곱의 전능자’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26절에 보면, “네 아버지의 축복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요셉을 축복하는데, 야곱의 이름이 등장하고, 하나님을 가리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셉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야곱의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야곱은 문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약점 투성이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복을 얻으려고 발버둥치고, 잔꾀를 부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기로 결정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고치고서라도 그를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소망 없는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구원을 안겨주시고 그를 축복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보면, 하나님께서 왜 야곱을 축복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함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보다 나아서 구원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중에도 훌륭한 사람이 많습니다. 성격 좋고, 매너 좋고, 매력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도 성격이 까칠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격이 까칠해도 구원 받았습니다.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면, 오십보백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예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은혜 받게 하시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야곱은 실패 투성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후에 야곱이 요셉의 자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는 것을 보면, 야곱은 두 팔을 엇바꾸어 얹었습니다. 야곱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었습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시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편에서 주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될 것이 안 되고, 안 될 것이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일반적인 은총을 넘어 특이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구동성으로 안 된다고 말하던 사람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야곱의 인생처럼, 무엇인가 안 되고, 일이 꼬여 힘들게 살아가는 분이 계십니까? 하는 일마다 어렵습니까?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그것을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절에 보면,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의 머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합니다. 사람의 머리로는 야곱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말이 되지 않는 야곱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시는 데 있습니다. 인간 야곱은 실패해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려 하셨습니다.
우리의 실수로 인해 우리의 인생이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임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 하나님과 우리는 공동 운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편들어주실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실력대로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력으로 우리의 인생이 결론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의 편이 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조금 느긋해질 수 있습니다. 별 일이 일어난다 해도, 죽는다고 앓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창세기 49장 24절에 보면,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반석이 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요동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환경으로 인해 요동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반석 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시 23:1).
우리는 이스라엘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의 삶에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을 지키셨습니다. 망할 것 같았지만, 망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야곱의 삶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요셉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그래서 안 될 것 같았던 것을 되게 하셨습니다.

열심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야 합니다. 아주 잘 될 것 같았는데,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 될 것 같았는데, 막판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잘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99% 될 것 같았던 일이 안 되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그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안 될 것 같아서 눈물 흘리고 금식하며 기도해서 잘 되었을 때에는 우리의 입술에서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열심으로 사는 삶을 끝내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재주와 능력과 열심으로 살던 것을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살려주십니다.

우리의 열심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열심히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열심 안에는 불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재주와 능력으로 살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손길 아래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안정감과 여유로움을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전능자의 손길 아래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이 절대 가질 수 없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전능자 야곱의 손에 우리의 인생이 달려있다는 것을 믿으면, 별 일이 일어난다 해도, 끄떡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붙들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아버지의 자녀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사고를 친다 해도 아버지가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배짱이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야곱이 한두 번 사고 쳤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두 번 도와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문제를 뛰어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 자신만 복을 받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믿음의 거장(巨匠)으로 세우셔서 그들의 자손들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쫓기는 인생이 아니라 이끌어가는 인생, 헤매는 인생이 아니라 길을 제시하는 인생, 남의 덕을 보는 인생이 아니라 남에게 덕을 끼치는 인생, 꼬이는 인생이 아니라 풀리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야곱의 생애를 추적해보면, 결론은 하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인생의 결론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손길로 우리를 붙들어주십니다.

전능자의 손을 의지하세요.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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