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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금요철야예배설교] 하나님의 리듬에 장단 맞추라 Friday Night Sermon

하나님의 리듬에 장단 맞추라
본문 / 전도서 3:1~11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본문을 보면, ‘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때에 대한 개념을 바로 이해해야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에 대한 감각을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열심보다 때가 중요합니다. 열심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를 알아야 멋진 인생,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혜는 때와 항상 연결되어있습니다. 전도서의 여러 곳에서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삶은 때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야 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때를 맞추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간 관리를 많이 말합니다. 시간 관리에 관한 책도 많습니다. 그런 책이 도움이 됩니다.
저도 시간 관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시간 관리를 잘 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시간 관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신자는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때에 대한 감각을 길러야 합니다.
때에 대한 감각은 24시간, 1주일 등 시간에 대한 개념보다 더 큰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때에 대한 감각을 가지려면, 시각(視覺)을 가져야 합니다.

농부는 밭을 갈고 밭에서 일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계절감각을 갖는 것입니다. 계절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계절에 맞게 일해야 합니다. 무슨 계절인가도 알지 못한 채 열심히 일한다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봄에 해야 하는 일이 있고, 여름에 해야 하는 일이 있고, 가을에 해야 하는 일이 있고, 겨울에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와 거둘 때에 맞게 일하려면, 계절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계절에 맞는 행동 패턴이 있어야 하고, 계절에 맞게 스케줄(schedule)을 조정해야 합니다. 봄의 일상과 겨울의 일상은 전혀 다릅니다.

인생의 계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별로 때에 대한 강조점이 다릅니다. 강약(强弱) 조절이 필요합니다.
성실하게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늘 성실하게 자기관리를 잘하지만, 인생 전체를 들여다보는 눈이 없으면, 나중에는 크게 후회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2장 5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일의 일기예보는 확인하면서 시대에 대한 분별력을 갖지 못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외식주의자들은 시대를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시간 관리를 잘하고, 종교적으로 활동을 많이 했을지는 모르지만, 시대에 대한 감각이 없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때를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므로 영적 기상도가 완전히 바뀌었는데, 외식주의자들은 일기(日氣)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고, 눈 먼 자가 눈을 뜨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쫓겨나는 등 영적으로 거대한 폭풍이 불어 닥치는데, 외식주의자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천지의 기상은 잘 아는데, 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계속해서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영적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에 눈이 가려져있었던 것입니다. 분별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니까 때에 대한 감각이 없었습니다. 영적 흐름이 어떠하며, 영적으로 바람이 어떻게 불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열심히 제사 드리며 의식을 행하는데,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지 않으니 딴 짓만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솔로몬은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말했습니다. 농부도 그렇지만, 어부도 때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썰물의 때가 있고, 밀물의 때가 있습니다.

호주에 있을 때, 성도 중에 낚시를 좋아하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낚시 장비가 좋고, 낚시 기술이 훌륭해도 때를 맞추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끼가 아무리 좋아도, 물고기가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때가 있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오는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때를 맞추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때를 정확하게 맞추면, 낚싯대를 내리기만 하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때와 타이밍(timing)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때에 대해 말씀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시간에 있어서 핵심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간 관리 안에는 이런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관리하고, 자기의 스케줄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time table)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성실보다 하나님의 열심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행동보다 하나님의 행동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움직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움직이시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무엇을 하시려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殿)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가 왕이 될 때까지의 하나님의 타임 테이블은 따로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충동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를 따라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성령께서 일하시는 방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성령의 타임 테이블에 따라 종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중요한 곳에 세우셔서 거대한 바람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성령의 주도하심 속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려고 하는데,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유럽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신 마스터플랜(master plan)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아무리 가려고 해도 갈 수 없었습니다. 온갖 고생을 하고도 아무 열매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게 하시는 대로 가면,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표와 다른 시간표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중요합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가 꿈을 꿨지만, 현실은 꿈과 전혀 달랐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셉이 생각한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실이 반대로 가는 이유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진행될 때, 가장 멋지고 아름답고 풍성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을 할 때, 시간에 대해 정확하게 생각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시간을 미세하게 들여다보고 분석하면,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을 보면, 큰 덩어리의 시간 개념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정확하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면, 큰 덩어리의 시간 개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시간표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조급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었으나, 관원장은 요셉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며 자신을 생각해달라고 말했는데, 술 맡은 관원장은 감옥에서 나간 후에 요셉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는 잊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소망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했을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으나, 왕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죽을 것 같은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힘든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때입니다. 일이 빨리 진행되어야 하는데,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다가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힘듭니다.
우리가 세워놓은 야심찬 프로젝트가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진전이 없습니다. 시간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때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흘러야 하는데, 1초도 흐르지 않고, 멈춘 것 같다고 느끼면, 숨이 막히는 듯합니다.
시련은 계속됩니다. 마치 터널 속을 지나는 것 같습니다. 어려운 순간, 미동조차 일어나지 않을 때,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런 순간을 맞이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가장 혹독한 시간이 찾아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어려운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약한 상태로 만드신 후에 일하십니다. 우리가 약해질 대로 약해졌을 때, 하나님의 강한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바로 직전이 매우 어렵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우 약해져있을 때, 하나님의 때가 임박해있습니다.

임산부는 만삭이 되었을 때가 가장 힘들다고 합니다. 바로 누워 잘 수도 없고, 여러 모로 불편합니다.
그때가 가장 어려운 때입니다. 그리고 위험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 직전입니다.
그때는 시간이 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빨리 흘러서 아기가 빨리 태어났으면
 좋겠는데, 하루가 길게 느껴집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임박하면, 그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는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하나님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기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때는 불확실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수중(手中)에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알지 못합니다. 예측할 수는 있지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 대한 계획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앞에 일어날 일을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개인의
 삶에서 디테일(detail)한 것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신실하신 분이시고, 우리의 인생에 대해 우리보다 더 세심하게 아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의 삶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계시고, 신실하게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이 완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기다리면서 겸손해져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잠히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옵니다. 그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모험과는 다르지만, 모험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믿음을 갖지 않는 사람들도 모험을 많이 시도합니다.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모험합니다. 모험하지 않으면, 기업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기업의 CEO들은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망하기 때문에, 새로운 결단을 하고, 모험을 해야 합니다.

믿음과 모험은 비슷합니다. 그런데 믿음과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은 대상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을 믿는가에 따라 도박이 되기도 하고, 믿음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험은 도박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고 하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이 머리 좋은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다른 사람보다 크면, 그 사람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 좋은 사람들이 앞서 나아가는 것을 따라갑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믿음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행동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을 때에는 숨죽여야 합니다.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때 잘못하면, 사고를 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고를 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는데, 섣불리 행동하다가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아닌데 행동하면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면, 용감해져야 합니다.

기다려야 하는 때에는 잠잠히 있어야 합니다. 그때 나서면 안 됩니다. 그러나 때가 왔다면, 확신을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를 보세요. 하나님의 때가 오기 전,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드러내실 때,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갈멜 산 정상에서 850대 1의 싸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었습니다.
숨어있어야 할 때에는 숨어있었지만, 하나님의 때가 왔을 때에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믿음으로 행동하는가에 모든 것이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때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이 왔다면, 대담해져야 합니다. 민첩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하나님의 때에 여러분의 삶을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기회는 더 이상 기회가 되지 않습니다. 기회는 기회를 알아보고, 기회에 반응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됩니다. 기회에 반응하지 않으면, 기회는 기회가 되지 않습니다. 기회는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때는 나와 상관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믿음이 강화되면, 때가 왔을 때에 두려움 없이 반응하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때가 와도 용기가 생기지 않아서 기회가 지나가버립니다.

에스더를 보세요.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 4:14)”라고 말했을 때,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고 반응했습니다.
에스더는 때에 맞게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유대 민족을 살렸습니다. 하루만 늦었어도 유대민족이 말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에스더는 때를 정확하게 맞춰 행동했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자칫하면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믿음으로 용기를 내고 나아갔을 때, 반전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때가 오면, 몸을 사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몸을 던져야 합니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놓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삶에 기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타이밍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허비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때에 맞게 반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때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모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다른 차이는 없습니다.
가슴 설레는 일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주저하면 안 됩니다. 기회를 잡으셔야 합니다.

본문 전도서 3장 1절에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감각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생활을 할수록 영적으로 날이 서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영적 깨달음이 쌓일수록 우리 안에 영적으로 날이 서야 합니다. 영적으로 예민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징조가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징조를 느낍니다. 영적 감각이 탁월하면, 징조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느낍니다.
징조는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도 있습니다. 영적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압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한가운데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 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습니다.
그런 때에는 시간이 무지하게 빨리 지나갑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어마어마한 일들이 지나갔는데,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한 시간을 가리켜 ‘크로노스(χρόνος)’라고 하지 않고, ‘카이로스(καιρός)’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때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는 시간, 하나님께서 관여하시는 특별한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시간이 오면, 시간이 매우 빨리 흐릅니다. 전운이 감돕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시간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면, 우리가 알지 못한 일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한국 역사 속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5천 년 한반도 역사 가운데 늘 시련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니 1907년 평양에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970년대에는 여의도광장에 2백만 명의 성도들이 모인 것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민족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한국은 경제적으로도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변화가 일어났고 성장했습니다. 그로 인해 한국은 2만 7천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가 중요합니다. 믿음의 촉수를 곤두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경거망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자칫하면 유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한 박자라도 늦거나 앞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행동하면, 기회는 지나가버립니다.

서핑(surfing)을 하는 사람들은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추어야 합니다.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물속에 빠집니다. 타이밍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영적 생활에 있어서도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파도를 타야 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위험천만한 일이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추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정확하게 맞추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주신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때 믿음으로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힘을 써도 잘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때가 오면, 자신은 수고하는 것 같지 않은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오지 않았을 때는 밀물의 때에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 같습니다. 맞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습니다. 매우 힘듭니다. 열매는 없습니다. 될 듯 될 듯하다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에는 힘을 쓰지 않고 있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대세’라고 합니다.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기 때문입니다.
목회와 사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에 있을 때에는 모르는데, 하늘을 날 때에는 바람을 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모든 일이 그러합니다.
인생을 복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에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기회를 기회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회를 기회로 알아보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준비되어있고, 실력을 갖추었다 해도 기회를 알아보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기회는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미리 신호를 보낸 후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영적 감각을 길러야 합니다.
때에 대한 분별력을 갖는 것은 영적 활동에서 매우 핵심적인 것입니다. 영적 감각이 있으면, 하나님의 때가 온 것을 알아차립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지만, 만족하기보다는 내적으로 결핍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서 만족하게 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느끼게 하십니다.

모든 바람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십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면, 그곳에는 분명히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바람을 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로 이끄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때라고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바람이 불기를 바랍니다. 그 바람에 여러분의 몸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성실하게 사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늘 제자리에 머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밧줄에 묶인 듯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밧줄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 새로운 차원을 여시기 위해 바람을 일으키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고, 우리의 몸을 맡길 때,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때를 영원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본문 전도서 3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구절은 전도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영원’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헛되고 헛되다고 말한 전도서 안에 ‘영원’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영원을 향해 맞추어져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을 향해 기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을 사모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무엇을 이루려고 하면서 왜 허무함을 느낍니까? 전도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전도서에 ‘헛되다’라는 말이 몇 번 나올까요? 총 29회 나옵니다.

지금은 중요하게 여기지만, 얼마 가지 않아 마음이 식어버립니다. 미용사가 머리를 마음대로 잘라버리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당장은 분노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갖고 싶은 것을 가지게 되면, 매우 감격하고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며칠 가지 않아 그 마음이 식어버립니다.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새로운 지식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구입해도, 금방 또 다른 새로운 브랜드가 나옵니다.

잠언 31장 30절에 보면,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을 지금 시대에 맞게 바꾸어 말하면, “몸짱도 거짓되고, 얼짱도 헛되나, 영짱만 영원하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목마릅니까? 세상에는 새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새것이 없습니다. 대단한 것 같아 보여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 많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데도 기도하러 나오시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대단한 분입니다. 없는 것이 없이 다 갖추었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기도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권세도 있는데, 기도하러 나온 사람에게는 비밀이 있습니다. 쉽게 비밀을 터득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깊은 것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 비밀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기도하러 나올 수 없습니다.
돈만 많이 번 사람이라면, 돈을 원 없이 써본 후, 끝지점에서 허무함을 맛보기 전까지는 기도하러 나올 수 없습니다.

돈이 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대개는 대가를 지불한 후에야 깨닫습니다. 대가를 지불하기 전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돈이 있고 건강하다면, 나를 부르는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 많고 잘 나갈 때에는 기도하러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좋아합니다.
돈 냄새를 풍기면, 사람들이 몰려와서 아첨하고 기분을 돋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마음껏 쓰게 할 것입니다.
돈이 바닥나기 전까지는 그 재미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돈이 바닥나고, 친구들이 떠나기 전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허무하고 식상하고 지루해진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권력을 가지든, 돈을 끌어 모으든, 지식을 쌓든, 성적 쾌락에 빠지든 그것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결국 허무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것이 영원과 연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허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참된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영원한 목적과 빨리 연결시켜야 합니다.
영원한 목적을 찾으면, 삶의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면 삶에 불이 붙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잠 1:7). 하나님을 경외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금방 나옵니다.
인생이 빙빙 돌지 않습니다. 방향 감각이 생기고, 시간 개념이 분명해집니다. 지금 자신의 나이에 맞게,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분명해집니다. 때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늦을수록 후회합니다. 믿음의 눈이 떠지고, 영안이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유치한 일에 매여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기회가 지나가고 난 후에 “이 몸, 주를 위해 불태우겠나이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허무해집니다. ‘때’는 늘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놓치면 허무해집니다.

시편 1편에 보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시 1:3). 인생의 계절에 맞게 열매를 맺어야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것이 ‘철든 인생’입니다. 철든 인생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춤추는 인생입니다. 뒷북을 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때를 놓치면, 나중에는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계절을 보는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복된 인생을 살려면, 허무한 것에 굴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성령의 이끄심에 민감한 삶을 살아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금방 알아차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새 길을 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박자에 따라 춤추는 인생을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일에만 빠져 살지 마세요. 부지런히 산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안테나를 뽑아 올려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매일 매일 타임 테이블을 체크하는 것도 좋습니다. 열심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눈을 감고 잠잠히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바람을 느끼세요. 지금도 하나님의 바람은 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바람을 느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바람에 자신을 맡기세요.

지금도 영적 파동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지루한 일상의 리듬을 깨고, 하나님의 리듬 속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속으로 여러분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분명한 목적에 따라 살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곳에는 강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하나님의 강한 바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강한 바람을 일으키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목적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흐르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힘을 들이고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우리가 힘쓰고 노력한 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단에 맞춰 춤추시기 바랍니다. 엉뚱한 곳에서 힘 빼지 마세요. 여러분이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을 수 있는 곳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세요. 하나님께서 부르신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고 신나고 부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파도를 타면, 꽉 찬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에 반응하고 사는 사람들은 꽉 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꽉 찬 인생을 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때에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가버렸습니다.

허접한 인생이 아니라, 꽉 찬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파도를 타야 합니다. 하나님의 리듬에 맞춰 춤춰야 합니다.
나의 타임 테이블에 맞춰서 나의 열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파도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저는 사역자로서 늘 그것을 느낍니다. 내 힘으로는 별 짓을 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에 내가 덩달아 춤추며 ‘이것이 하나님의 때구나.’라고 느낍니다.
그때 기이하고 놀라운 일, 새로운 일을 경험합니다. 광야에 길을 내시는 역사를 맛보게 됩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아주 짧습니다. 후회함 없이 멋지게 살다가 주님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전도서는 허무로 가득 차 있습니다. 허무로 가득한 가운데서 허무하지 않은 인생으로 우리를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준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에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우리의 방향을 정확하게 맞출 때, 우리의 인생은 날아오를 것입니다. 파도칠 것입니다. 춤출 것입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위대한 역사가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날 것입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든지 다가오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다시 한 번 도약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기대 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촉각을 곤두세우세요. 영적으로 예민해지시기 바랍니다. 민감하게 반응하세요.

지금 하나님께서 흔들고 계십니다. 지루하게 밋밋한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삶을 계속해서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숨지는 날까지 하나님의 거대한 파도를 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사용해주실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승부를 거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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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예배설교] 영적 상승기류를 타라 Friday Night Sermon

제목 / 영적 상승기류를 타라
본문 / 이사야 40:27~31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말세가 되면 피곤합니다. 이것이 말세의 특징입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빨라지기 때문입니다. 교통이 발달하면, 편리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피곤합니다.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예언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피곤’, ‘곤비’, ‘무능’, ‘넘어짐’, ‘쓰러짐’이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개역한글성경에 보면, ‘쓰러지다’라는 단어 대신, ‘자빠지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자빠진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본문 30절에 보면,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소년은 쉽게 피곤해지지 않습니다. 남자 아이들은 지칠 줄 모릅니다. 힘이 넘칩니다. 아침이 되면 벌떡 일어납니다. 청년도 마찬가지입니다. 밤을 새도 끄떡없습니다.
그런데 소년과 장정이 지쳤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지치고 피곤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가진 힘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대단해보여도 한계를 넘어서면 무너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모든 면에 있어서 한계에 도달하면, 모두 무너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늘 경험합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고 난 후, 전반기가 지나가기 전에 무너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름이 지나고 나면 무너지기 시작하여 12월이 되면 만신창이가 되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희생자가 많습니다. 부상자가 늘어납니다. 가정적으로, 영적으로 무너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1월에는 마치 천국에 도달할 것 같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합니다.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나면, 뭐든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몇 개월 지나고 나면, 삶이 힘들다고 구시렁거립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신다는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본문 31절에 보면, ‘새 힘’이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왜 ‘새 힘’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지금의 상황은 다른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지쳐버린 이스라엘 민족을 새롭게 회복시켜줄 수 있는 힘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를 쉽게 지치게 만듭니다. ‘피곤하다’는 말은 이 시대의 유행어입니다.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사람들은 무너져버립니다. 지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는 것이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이전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는 것은 피곤의 연장일 뿐입니다.

오늘 하루를 힘 있게 산 사람은 내일에 대한 기대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오늘 피곤하고 지쳐있는 사람에게 내일은 절망적입니다.
삶이 피곤한 이유는 떠밀려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삶의 주도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삶을 자기 스스로 이끌어나갈 에너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두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들은 떠밀려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식이 없고, 자유가 없고,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으면, 침체(depression)를 경험하게 됩니다. 침체(沈滯)는 생각보다 강력합니다. 우울증도 일종의 침체입니다.
침체의 덫에 걸리면 무섭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보내며 고통스러워합니다. 낙심과 절망,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울증이 되고, 심해지면 자살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습니다.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위험한 인생이 되어버립니다.

본문 이사야 40장 27절에 보면,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다.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돌봄을 받지 못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모르신다. 내 삶은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났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침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돌봄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일들이 많이 보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갑자기 바닥을 쳤습니다.
엘리야는 굉장히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전천후였습니다. 갈멜 산에서 850대 1의 싸움을 치를 정도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굉장히 강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힘이 빠져버렸습니다. 심각하게 지쳐버렸습니다.

엘리야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시편 42편에 보면, 다윗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이 낙심하여 매우 불안한 상태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울증의 증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요나 선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적으로 굉장한 침체 상태에 빠졌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너져버렸습니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모델로 삼았던 사람이 주저앉아버렸습니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칩니다. 인간은 다 무너집니다.

본문에 보면, 소년과 장정이 그런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런 상태에 빠지면, 영적으로 침체되지만, 의심과 절망, 분노와 적대감이 생깁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삶이 추락합니다.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매우 위험해집니다. 앞으로 치고 나아가는 힘이 없습니다. 삶에서 공회전을 반복합니다.
어느 순간 우리의 삶이 주저앉아버릴 수 있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고, 정체(停滯)에 빠질 때, 사람들은 의욕을 상실합니다.

오늘날 사회에 이런 현상이 많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인생이 쉬웠던 적이 있습니까. 굉장히 어렵습니다. 다양한 사건과 일들이 일어납니다.
30대까지는 무엇인가 시도해봅니다. 그래도 30대는 희망적입니다. 40대가 되면, 불안이 가중(加重)됩니다. 30대일 때는 희망이 남아있습니다. 젊음도 있습니다. 기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40대가 되면, 불안이 커집니다. 그 고비를 넘지 못하면 삶이 힘들어집니다. 50대가 되면,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쪼그라듭니다. 50대가 되면, 새로운 것을 시도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듭니다.
청년들에게는 취업과 결혼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결혼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쪼그라듭니다. 마음이 위축됩니다. 피곤해지고 자신감이 사라집니다.

영적으로든 육체적, 사회적으로든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다 보면, 영적으로 새로움과 감동이 줄어듭니다.
관록이 늘수록 주변의 기대도 늘어납니다. 책임이 많아졌습니다. 직분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갈망할 만한 영적 에너지가 풍성하게 없으면, 모든 것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에너지가 계속 나오고 흘러 넘쳐 파도쳐야 합니다.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변화가 전혀 없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면, 처음 1년 동안은 희망을 갖습니다. 무엇이든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 아무 변화가 없다면, 절망에 빠집니다. 목회자로서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 무너집니다. 목사가 맞는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맞는지 의심합니다.
5년이 지나도 아무 변화가 없으면, 소명감마저 의심합니다. 소명감이 흔들립니다. 그렇게 되면, 가정도 흔들립니다. 그렇게 되면 침체됩니다. 우울해지고 바닥을 치게 됩니다.

본문 이사야 4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고,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느끼는 피곤, 곤비(困憊)와 대조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힘이 고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은 고갈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힘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현재이십니다.
하나님은 한때 우리를 너무 열심히 돌보셨기 때문에 이제 기력이 쇠해지셔서 우리를 도우실 수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를 도우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에너지원(源)이십니다. 원자는 아주 작은 것인데, 분열이 일어나면 엄청난 파워(power)가 나옵니다. 그것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힘의 원천(源泉)이십니다.

왜 소년이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 넘어지며 쓰러집니까? 힘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힘을 공급해주십니다. 하나님의 공급은 마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실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배터리(battery)와 같습니다. 계속 충전해야 합니다. 에너지를 계속 채워야 합니다.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힘이 계속 공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힘을 우리에게 공급해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난 후에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계속 돌보십니다. 계속 우리에게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유지하게 하십니다.

본문 이사야 40장 29절에 보면,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주어(主語)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피곤해지신다면, 그것은 큰일입니다. 우리는 갈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곤을 모르시고, 지칠 줄 모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께서 우리의 길을 모르시겠습니까. 아무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매우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태를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명철이 한없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당황합니다.
가끔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 인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때 우리는 명철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하는 길로만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철하신 분이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명철하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무지합니다. 한 치 앞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명철을 믿고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힘이 없고 빨리 지치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힘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한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빨리 힘이 빠져 쓰러집니다.
본문에 보면, 영원히 힘이 넘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능력이 있으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능력이 있으면 즐겁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능력이 있어서 감당할 수 있으면 신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피곤을 몸에 달고 살 것인지, 능력 있는 삶을 살 것인지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이 무엇입니까?

본문 이사야 40장 31절에 보면, “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독수리는 유일하게 수직상승하는 새입니다. 바람을 이용하지 않고, 스스로 날갯짓하여 상공으로 상승하는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여느 새들과 다릅니다. 다른 새들은 수직상승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날개’는 힘을 상징합니다. 강력하고 용맹스러운 이미지와 연관이 있습니다. 공군, 비행기라는 단어도 히브리어 날개와 어근이 같습니다.
전투기의 모습은 대단합니다. 순간적으로 날아오릅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독수리가 언제 수직상승합니까? 위기의 상황에 수직상승합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는 수직상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위기의 상황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독수리같이 날아올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위기 속에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곤란 속에서 우리의 날개에 힘을 실어주십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상공을 날아오르는 것 같이 날아오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에 애굽의 군사들이 따라오고, 앞에 홍해가 놓여있는 답답한 상황 속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사건은, 마치 독수리가 날개 치며 하늘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위기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삶의 위기 순간을 내 힘으로 극복하려 하면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수직상승하게 하시면, 의외로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위기의 순간에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독수리같이 날아오르는, 수직상승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위기의 상황입니다. 그때는 솟아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의 신앙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둘째, 본문 이사야 40장 31절에 보면,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달음박질’은 최선을 다하는 삶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열심히 삽니다. 다른 어느 민족보다 열심히 사는 민족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순발력은 있는데, 뒷심이 부족합니다. 이어령 박사는 “한국 사람들은 머리도 좋고, 순발력도 탁월하고, 능력이 많은 반면, 스태미나(stamina)가 부족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뒷심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지구력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단거리 경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순발력만 있어서는 안 되고, 지구력이 있어야 합니다.
한때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한때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멈추어버립니다.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달려가야 승산(勝算)이 있습니다. 나중에는 지구력의 싸움입니다. 힘을 언제까지 지속적으로 꾸준히 낼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한 해의 시작부터 끝까지 동일한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멋진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기준과 목표를 정확하게 세우고, 꾸준히 달려간다면, 엄청난 인생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이 유지되면, 인생이 날아오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구력이 없습니다. 하다가 그만둬버립니다. 용두사미(龍頭蛇尾)가 이런 때를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뱀 꼬리처럼 의지가 스르르 식어버립니다. 에너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10년, 20년 변함없이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에너지를 유지해서 동일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도중하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에 돌발적인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삶이 변칙적(變則的)입니다. 가족이 아플 수도 있고, 사고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나는 잘하고 싶은데, 인생을 피곤하게 하고, 힘들게 하고, 곁길로 빠지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내 힘으로 버틸 수 없는 일이 닥칩니다. 많은 변수(變數)가 발생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도록 우리를 잡아당기는 듯한 상황이 발생할 때가 많습니다. 사건과 일들이 불가피하게 계속해서 발생하면, 한계를 느끼고, 삶을 포기해버립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수많은 변수 앞에 주저앉아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만으로 버티기에는 어려운 상황이 우리의 삶에 수없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전 같으면, 벌써 끝났을 텐데, 하나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용기를 주셔서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비, 고비를 넘어가게 하십니다. 이겨내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삶에 별별 일이 일어나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고비와 위기와 여러 가지 사건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셋째, 본문 이사야 40장 31절에 보면,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일상에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반복해서 일어나면 힘들어집니다.
아무 감동 없이 살다 보면 피곤해집니다. 피곤이 쌓이고 쌓이면, 인생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일상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상의 무게가 만만치 않습니다. 매일 우리에게 밀려오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듭니까. 남자 아이 둘을 키운다면, 전사(戰士)가 됩니다. 집은 전쟁터가 됩니다.
직장인들은 얼마나 힘듭니까. 이제 막 취직한 사람들은 얼마나 힘듭니까. 정신없습니다. 말단직원으로 코피가 터집니다.
간부가 되면 힘들지 않습니까. 간부가 되어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다루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일상의 삶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감당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일상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일상에서 승리하면, 모든 일에 승리합니다. 일상을 사랑하고, 매 순간 찾아오는 압박감을 이겨내는 것도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저의 일상은 거의 똑같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냅니다. 이전에는 사무실에서 가끔씩 바다를 내다보기도 했는데, 요즘은 사무실 블라인드를 내려놓았습니다.
사무실에서 책 읽고 설교를 준비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 데 30시간을 투자한다면, 좋은 설교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사무실에 있는 것이 즐겁습니다. 사무실에서 책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것도 즐겁지만, 설교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강단에 서는 것도 즐겁습니다.

일상은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지만, 오늘이라는 평범한 일상을 잘 살아야 좋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매일 일상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일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즐겁게 생활한다는 것은 보통 은혜가 아닙니다.

일상에서 지치지 않는 사람은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일상의 삶 속에서 피곤해하지 않고 즐겁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여러분의 일상 속에 궂은 일,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위로부터 부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녀들을 공부시킨 것을 감사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죽지 못해 할 수 없이 지겹게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우리에게 와 닿는 최고의 명 문장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입니다(사 40:31). 여기서 힘의 근원, 파워의 출처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어디에 플러그 인(plug in)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집에 가면,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습니다. 배터리를 오래 사용하면 방전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집에 가면,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힘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질 때,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노력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수렁에 빠집니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문제를 만나면,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힘들면, 더 좋은 방법, 더 좋은 묘수(妙手), 더 좋은 수단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힘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라고 말했습니다(고후 12:10). 사도 바울은 왜 약한 때에 강함이라고 말했습니까? 우리에게서 힘이 빠질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힘이 빠질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해도 괜찮습니다.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능력에 따라 적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적당히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기관리를 너무 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잘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자신의 힘이 다 빠진 한계상황을 경험해야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후에 인간의 절대 한계를 느껴봐야 합니다.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재능과 능력만 믿고 살아가지 마세요. 한계에 도전하세요. 밀고 나아가보세요. 끝이 어딘지 경험해보셔야 합니다. 우리의 힘이 소진되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새 힘은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새 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입니다. 그 힘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섭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일하면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체험해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힘이 없다, 나에게 능력이 부족해서 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가 연약하고, 우리에게 한계가 있다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 자신을 믿었다가는 큰 일 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머물러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세요. 에너지가 넘치고, 열정이 흘러넘치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믿고 살았다가는 한 방에 무너집니다. 누가 봐도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한 방에 무너집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에는 약해 보이고, 힘든 것처럼 보이는데, 무슨 일이든 잘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모습이나 자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에 연결되어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에너지 공급처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우리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할수록 더 좋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접속되어있으면, 하나님의 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흘러옵니다. 우리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달려가려면, 항상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매일 매일 충전해야 합니다. 충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려면,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날마다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경건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꾸준히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하려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틴 루터는 “나는 바쁠수록 더 기도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일이 많으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이 많고 바쁠수록 기도 시간을 더 늘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데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할 일이 많아지면,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금방 방전되어버립니다. 일이 많으니 잠시 충전한 후 다시 일에 몰두합니다. 이렇게 하면, 금방 지쳐버립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지 않고, 일에 몰두하면,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힘으로 하려다 보니 힘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부어주시는데, 하나님께 접속하지 않기 때문에 힘듭니다. 우선순위(priority)가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은 절대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 31절에서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기다리는 것(wait)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릴 때, 기다림을 통해 채워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평안이 옵니다. 안정감이 옵니다. 염려가 사라집니다. 근심이 물러갑니다. 참된 자유가 옵니다.
나를 짓누르던 무겁고 어두운 생각이 떠나가고,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평강과 자유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하늘로 오르는 것 같은 새 힘이 채워집니다.

우리를 누르는 잡다한 생각이 우리를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염려입니다. 내가 하려는 대로 되지 않으니까 악을 쓰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짓눌려있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지쳐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으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립니다. 나를 끌어당기던 것이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끌어올리시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에게 새 힘이 생깁니다.

독수리가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면, 다른 것이 더 이상 방해하지 못합니다. 독수리가 날개치며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기막힌 표현입니다.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날아오릅니다. 제한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을 때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까. 내 안에서 힘이 흘러넘치기까지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새 힘을 얻는다는 동사의 실제적 의미는 더 좋은 것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대체(代替)하다, 교환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대체될 때, 우리에게 새 힘이 주어집니다. 완전히 방전되었는데, 새로운 배터리로 갈아 끼운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영혼에 솟구치는 힘이 생깁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은혜 받고 나면,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매일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생활을 꾸준히 한 사람은 에너지가 방전되는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나 충전되어있습니다. 언제나 충만함이 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신다고 할 때, 그냥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충만히 주십니다. 풍성하게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엡 3:8).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어느 순간 솟아오릅니다. 비상(飛上)합니다. 수직상승합니다.
왜 염려하는 삶을 삽니까? 날아오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왜 스트레스 속에 살아갑니까? 비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눌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실 때에는 그냥 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두시고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 없이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새 힘을 얻으면, 독수리가 됩니다. 땅을 기어 다니지 않습니다. 바닥을 치며 헤매지 않습니다. 영원히 피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 받으시기 바랍니다.

삶의 출력을 높이세요.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를 느껴야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플러그 인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끊임없이 공급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지치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의 에너지는 방전됩니다. 영원히 힘이 넘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든지 절망적인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본문은 복음을 소개한 것입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말해줍니다. 소진되고 방전되고 침체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무너지고 깨어지고 낙심하고 바닥을 치고 기어 다니는 것이 죄 아래에 사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했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삶에 짓눌려서 꼼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숨어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힘이 빠질 때마다, 지칠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세요. 지치기 전에, 충만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세요.
방전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넘치는 힘을 공급받으면, 날아오르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고출력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수직상승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흔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을 것입니다. 무한한 힘이 위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연결되어있으면, 충만한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새 힘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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