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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1884 - 1900)

 

1884년 들어서 한국선교를 위한 미국에서의 준비는 가속화 되었다. 감리교는 아편젤러와 스크렌톤을 한국 선교사로 내정하였고, 장로교는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알렌을을 한국 선교사로 전임시켰다. 그리하여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호레이스 알렌이 가장 먼저 한국에 입국하였고, 이어 1885년 4월 5일 북장로교 선교회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 선교회 아편젤러가, 5월 1일에는 미 감리교 선교회 스크랜톤이, 그리고 6월 21일에는 북장로교 선교회 헤론이 입국하여 북장로교 선교회와 미 감리교 선교회가 가장 먼저 한국선교를 개시했다.

 

그 후 ·1889년에 호주 장로교가, 1890년 성공회가, 1892년에는 남장로교가 1896년에는 남감리교와 침례교의 전신 동아 기독교가, 그리고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 러시아 정교회, 플리머스 형제단이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1904년에는 안식교가, 1907년에는 성결교의 전신 동양선교회가, 그리고 그 이듬해 1908년에는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이리하여 한국은 알렌이 입국하던 1884년부터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개시하던 1908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 개신교을 대표하는 장,감,성을 비롯한 수많은 개신교 교단들이 한국선교를 동시에 착수하는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1884년에 입국한 알렌이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그 이듬해 입국한 언더우드는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할 수 있는 선교사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해리로즈가 표현한 것처럼, 언더우드는 “한국선교의 아버지이자 많은 개별 선교사들을 한국에 오개 한 지도자 ”였으며, 스피어 박사가 그를 가리켜 언급한 것처럼 “매번 그가 미국에 올 때 선교의 횃불을 드높이 불태웠고,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참을성 있는, 불굴의 사람이었다.” 그는 실로 한국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예비하신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 한국의 근대선교의 아버지였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아편젤러, 한국을 시찰하기 위해 입국한 일본 장로교 선교회의 스쿠터박사, 테일러 박사와 나란히 전선에 입국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처음 얼마간은 알렌의 노력으로 개원된 제중원에서 화학을 가르치면서 한국선교를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 주신 위대한 선교사였다. 한국선교 반세기를 정리하는 1934년, 희년기념식에서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선교 초기 언더우드는 모든 면에서 끈기 있는 지도자였다.

 

1884년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알렌이 입국하고 그 이금해 같은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입국한 후 세계 각국의 선교사들이 은둔의 나라 조선에 속속 입국했다. 언더우드가 입국한 얼마 후 1885년 6월 의하 헤론부처가 입국했고, 1887년 7월 4일에는 후에 벙커의 아내가 된 앨러스가 입국해 한국에 이북구한 북장로교 선교사는 7명으로 늘어났다. 1887년 앨러스가 입국할 때, 뉴욕 유니온 신학교 출신 세 사람, 헐버트, 벙커, 그리고 길모어도 입국했는데 이들은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 정부가 파송한 선교사들로 후에 한국선교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개혁파 복음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맥코믹신학교, 프린스톤신학교,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 토론토대학, 그리고 호주의 신학교 출신 장로교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드루신학교를 비롯해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에서 카우만이나 길보른 모두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확신하면서도 복음의 열정에 투철한 복음주의자들었다. 이들은 19세기 “복음주의 전통”속에서 교육을 받았고, 당시 영미를 지배했던 복음주의 이상을 공유했으며, 그리고 그런 방향에서 한국선교를 이끌었다. 1905년 복음주의 연합공의회를 조직 이들이 교파를 초월해 한국개신교 복음주의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은 한국인에게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 문화전반에 영향을 미쳐 복음을 통한 문화 변혁의 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매켄지가 한국의 독립운동에서 한국에서 선교사들은 “기독교 개척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명의 개척자들이었다.”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일본은 한국 내의 개화파들을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고 하였고, 중국은 한국내의 보수주의자들을 지원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오랫동안 은둔의 나라로 알려진 한국을 자신들의 소유로 삼으려는 열국에 의해 한반도는 전에 없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한반도가 강대국들 사이의 전략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과 한반도가 스스로를 방어하기에는 너무도 작다는 것은 불행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은 더 강력한 이웃 국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침략을 당했고 강대국의 국제적인 권력 투쟁에서 힘없이 볼모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을 둘러싼 열국의 한국 쟁탈전은 19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반강제적으로 체결된 강화도 조약은 그와 같은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이 열국에 의해 침략을 당하기 시작한 출발이었다. 제임스 게일이 전환기의 한국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은 개항과 더불어 정치, 경제적으로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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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宣敎史)적 측면에서 본 한국교회 1백주년(4) 
   
▲김의환 총장(칼빈대학교)
 
II. 한국 교회의 외국 선교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전도에 힘쓴 교회로 출발하였다. 그 전도 열심은 해외선교 열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1. 일본 선교
장로회 독노회가 1907년에 조직되면서, 최초로 안수받은 목사 7인 중 1인인 한석진 목사를 동경에 파견하여 주로 유학생들을 상대로 선교사업을 시작케 하였다. 그 후 1911년에 장·감 연합 선교회에서 주공삼 목사를 파견하고, 1925년에 임종순, 오기선 목사를 각각 일본으로 파송했으며, 1924년엔 장·감 연합 선교회가 오사카에 박연서 목사를 파송하였다.

1927년엔 자유주의 신학 논쟁으로 캐나다 선교회를 탈퇴한 주한 선교사 영재형(L.L. young) 목사가 일본 관서 지방을 중심으로 교포 선교에 힘썼다. 1930년 이후부터 도쿄, 오사카, 고베, 나고야, 교토 등 대도시와 구주 지방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 한인 교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2. 시베리아 선교
금세기에 들어서면서 국운이 기울어지자 북만 국경을 넘어 만주,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찾아 이주하여 간 동포의 수가 급증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제3회 장로회 노회는 시베리아 선교를 결의하고 1909년에 최관홀 목사를 파송하여 2년 내에 2개의 조직 교회와 13처의 기도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1912년 대한감리교회도 손정도 목사를 시베리아에 파송하여 장로교 선교사업과 함께 연합 선교에 힘쓰는 등 교세가 급증하기에 이르렀다. 한인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성공적인 결실을 맺게 되자, 러시아 정교회는 이를 시기하여 국교인 러시아 정교회 산하에서 선교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불응하자 두 선교사는 체포되어 결국 투옥되는 박해를 겪게 되었다.

선교의 지속이라는 대명제 아래 최관홀 목사는 본국 교회의 양해도 얻지 않고 러시아 정교회에 가입을 단행하고 말았다. 장로교 총회는 최 목사의 개종을 계기로 그를 제적하여 버렸다.

손정도 목사는 끝내 정교회 개종에 불응하여 시베리아로부터 추방을 당하고 말았기 때문에 시베리아 선교 사업은 일시적으로 중단 상태에 들어갔다. 그 후에 러시아 정교회의 간섭이 약화되면서 시베리아에 있는 신설 교회들이 장로교 총회와 감리교 연회에 선교사 재파송을 청원함으로써 장로교 총회는 수차에 걸셔 현지를 시찰한 후 1918년에 김현찬 목사를 다시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계속하게 하였다. 마침 당시 러시아는 혁명의 정치적 변동에 휩쓸려 민심이 불안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1922년 교회당 34처, 목사 5인, 장로 8인, 소학교 6처, 야학교 35처, 주일학교 15처, 등록 교인 1,935명이 넘는 교세를 얻게 되어 드디어 시베리아 노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감리교회는 1918년 시베리아 선교를 재개하기로 결정하고 1921년 배형식 목사를 파송하여 선교 사업이 다시 크게 재건되었다.

3. 만주 선교
감리교회는 1920년에 양주삼 목사의 시찰 후 만주 선교를 결정하고 1921년에 정재덕, 최수영, 배형식 목사를 초대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1924년엔 최성모, 손정노, 동석기, 김응태 목사를 추가로 파송하여 만주 전역에 걸쳐 선교를 확장하였다. 장로교회는 1910년에 김진근 목사를 처음으로 파송한 후 1911년에 신천읍 교회 여전도회에서 김덕선 목사를 봉천에 파송했고, 1912년에는 평북 노회에서 최성주 목사를 서간도에 파송했다.

1912년엔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면서 총회 창립 기념으로 김내범 목사를 북간도에 파송하였다. 1918년 서간도 선교를 위해 이지은, 한경희, 최봉석, 김강선 네 목사를 파송했다. 이어서 백봉수, 양준식, 김병용, 조덕환, 이병하 목사를 만주 여러 지방에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만주 선교의 발전도 눈부실 만큼 급속도로 발전해서 1920년에 남만 노회가 설립되고 1921년엔 북만노회가 세워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4. 몽고 선교
몽고 지방에도 흩어진 교포들의 요청에 의하여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각각 선교에 착수하였다. 먼저 감리교회의 최성모 목사가 1925년에 화흥교회를 설립하여 선교를 확장하여 갔다. 10년 후 1935년에 장로교 총회의 지시에 따라 의산노회의 지원 아래 조보근 목사가 몽고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5. 중국 선교
장로교 총회는 1912년 총회 조직을 기념하여 중국 선교를 결의하고 그 다음해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세 목사를 선교사로 중국 산동지방에 파송하였다.

산동성은 공자의 출생지로 외국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인 심리 때문에 선교의 불모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선교 30년이 지난 1942년 통계에 의하면 교회 36처, 세례교인 1,716명으로 증가하여 중국 선교 사상 큰 기적을 낳았다. 1917년엔 방효원, 홍승한 두 목사를 증파(增派)하고 1918년에는 박상순 목사를 다시 파송하였다.

1923년에는 이대영 목사를, 1931년에는 김순효 여선교사를 파송하였고, 1937년에는 방지일 목사를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확장시켰다.

그 밖에 교포가 집결된 상해와 또 남경과 북경에도 한인교회가 설립되면서 독립 운동의 요람적인 역할도 감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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