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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주 예배 시간에 "거룩한" 카톨릭 교회(Holy Catholic Church)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거룩한 교회라기 보다는 오히려 더럽고 추한 교회인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중세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항상 교회 안에는 개혁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교회의 전반이 타락되어 있다. 자 어떻게 개혁을 실지로 가능하게 할 것인가? 중세 교회에서 개혁운동은 4가지로 이루어졌다. 첫번째는 교회의 수장이었던 교황이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개혁 운동을 주도한 경우이다. 이 경우 개혁의 효과는 즉각적이고 확실하게 나타났지만 장기적인 개혁은 불가능하였다. 개혁적인 교황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에는 개혁의 물결이 일었지만, 그 뒤의 교황은 너무나 자주 교권을 금방 타락시키고 말았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교권을 1인이 혼자 독점하게 될 때, 교회는 부패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번째 개혁이 가능한 경우는 경건한 황제가 교권에 개입하는 것이다. 중세 시대의 황제는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세우신 지도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명목상의 황제들은 자신의 세속 권력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 중에 하나님은 경건한 지도자를 세우셔서 교회를 개혁하도록 하였다. 이 개혁의 장점은 효과가 가장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무력을 통하여 교회 개혁을 할 때, 황제 앞에서 저항하는 세력은 미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개혁의 단점은, 황제가 언제나 교회 일에 신경을 쓸 수 없다는 것이고, 다음 황제의 입장에 따라 개혁이 개악이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다. 사실상, 황제가 교회에 깊숙히 개입하면 할 수록 교회는 타락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세번째 경우는 수도원 운동이다. 교회가 전반적으로 타락될 때 수많은 참된 신자들은 세속을 벗어나서 참된 신앙의 모임을 추구하였다. 곳곳에 수도원이 세워졌고 이 수도원들에서는 중세 시대 유일한 학문의 장이 되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수도원이 했던 중요한 일은 도서를 보관하고 손으로 필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수도원을 통해서 중요한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이러한 인물 중에는 나중에 교황으로 선출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교황은 수도원에서 가졌던 이상을 교회에 적용시키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수도원은 노력 역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수도원은 기본적으로 제도권 밖의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는 엄격한 규율과 질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일반 교회에는 적용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수도원은 교회에 개혁의 이정표로써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네번째 경우는 공의회 운동이다. 교황의 절대 권력이 교회를 부패하게 하기 때문에 교황을 공의회의 권한 아래 두어서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다. 중세 기간 동안 교황이 둘 혹은 셋으로 나누어서 서로가 싸운 적이 있었는데 이 들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공의회였다. 공의회란 모든 주교들이 함께 모여 최고의 권위로 교회 일을 결정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공의회도 한계가 있었다. 공의회는 각 나라가 모인 단체였기 때문에 각자 이해관계가 달랐고 명백한 문제가 아닌 한 한 목소리를 내기가 불가능하였다. 이들 중에는 순수한 의미에서 개혁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명백하게 이해 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꾼들도 많았다. 결국 공의회 운동은 교황의 공작으로 실패하고 만다.

 

자 이와 같은 4가지 관점에서 고신교회를 보도록 하자.

 

1. 우리에게는 교황이 없다. 총회장이 있기는 하지만 임기가 1년이기 때문에 강력한 총회장의 리더쉽으로 개혁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간혹 총회장이 우리 고신교단을 대표한다고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장로교 법상 총회장은 Moderator에 지나지 않는다. 즉 총회가 열리는 기간 동안 사회를 보며 중재를 보는 사람이다.

 

2. 우리에게는 경건한 국가 지도자도 없다. 김영삼 대통령이 있기는 했지만 한국 교회를 위해서 그가 한 일은 내가 알고 있는 한 아무것도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교단의 일부의 개혁은 국가기관인 교육부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앞으로도 우리가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교육부에 의해서 강제적인 조치들이 있을것이라고 한다.

 

3. 우리에게는 수도원도 없다. 물론 무척산 기도원과 같은 기도원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기도원은 반 지성주의에 물들여 있어서 중세 시대와 같은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기도원 같은 곳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 보면서 기도하는 분도 있겠지만, 교회의 개혁은 기도만 하면 된다는 반지성주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4. 우리의 총회는 개혁의 힘을 상실하였다. 한국 교회는 너무 개교회 중심적이기 때문에, 총회를 통한 개혁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 계파의 이익만이 대변되기 때문에 중세와 같은 개혁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고신의 개혁의 기치를 내건 고목협이라는 모임도 부정선거에 대해서 어떠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 모임이 어떤 이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해득실 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한 교회의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중세 역시 자신을 개혁하지 못함으로 인해 결국 참 교회를 분리시키고 말았듯이 우리 한국 교회도 교회를 분리하지 않고는 도저히 개혁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종교개혁의 시대와 다른 점은 우리에게는 바른 신학과 바른 교리와 바른 교회 정치의 원리가 있으나 그것을 현실에 적용시킬 힘이 없다는 것이다.

 

,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 개혁의 기치를 내 거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좀 한심스러운 것은, 그 사람이 바로 개혁의 대상인 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놓지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의 개혁은 자신을 개혁시키면 개혁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조심스럽게 쓰려고 한다. 이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교회 정치꾼들이 이 말을 쓴다면 "너나 잘해"라는 소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다운 교회 개혁을 꿈꾼다면 우리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인정하는데서 논의가 출발되어야 할 것이다. 중세 교회사를 보아서 알겠지만, 지금 우리 교회는 개혁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리 스스로를 개혁시키고 교회의 자녀들을 잘 교육시키고 자기가 속한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통해서 우리 교회 전체가 개혁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불쌍한 우리 교회에 임한다면, 우리는 종교개혁 당시의 참된 교회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품에 갈 수 있을 지 모른다. 성령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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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600만명이 살해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나?

 

 

본문말씀에 "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답변입니다.

해 아래의 부조리한 현실은 하나님이 부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숨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상과 같이 인간의 지식과 기대와 형상에 제한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 나뭇조각으로 조각된 신상이 아닙니다.

유한한 형상이 무한한 하나님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종교개혁가들은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스스로 숨어 계십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지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동행한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시내산에서 여호와께서 임재하실 때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온 산이 크게 진동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20:21). 하나님의 계신 암흑은 바로 죄인인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스스로 숨어 계신 하나님 자신을 말합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도 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중세나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성화를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주위에서부터 가운데로 가면 갈수록 점차 어둡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하나님의 범접할 수 없는 신비를 묘사한 것입니다. 일찍이 종교개혁가 루터는 중세 카톨릭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십자가신학을 부르 짖었습니다. 그는 중세 카톨릭교회가 하나님을 창조세계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 권능. 지혜, 선함만을 말함으로써 십자가의 고통과 모욕 속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도 물론 창조세계에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부인하지는 않았 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후서 46"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찬란하게 빛난 곳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슬픔의 얼굴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연적 이성이 신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영광과 권능이 아니라, 영광의 신성의 정반대인 인간예수의 모욕, 가난, 고통, 번뇌, 어리석음, 약함 그리고 죽음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계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은 계시 속에서도 스스로 숨어 계신 하나님이시라 했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영적인 소경인고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의 지혜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은 이 세상에서는 은폐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은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곧 무능과 비천함 속에서 계시된다. 이미 메시아가 이사야 53장에 예언처럼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고,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고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고 사람들이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는 그런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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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존 맥아더 목사님의 글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단회적 속성에 대하여 매우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4-28)

성경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최종성에 대하여 단호히 말하고 있다. 그는 죄를 위하여 절대로 반복되지 않을 단번의 제사를 드리고자 이 땅에 오셨다. 그것은 거의 끊임없이 제사를 드려야 했던 모세 언약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 드린 제사들 중 어느 것도 실제로 속죄하지 못했다. 그것들은 단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장차 오셔서 죄를 정복하실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희생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미사를 집전함으로써 반복된 제사라는 비성경적인 제도를 다시 만들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모독이며 그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왜곡하는 것이다.

 

가톨릭에서 미사가 얼마나 중요할까? 가톨릭 교회의 교리문답에서는 미사를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천이자 절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미사는 가톨릭 믿음의 근원이고 최고의 정점이라는 것이다. 가톨릭에서 미사는 주변적인 것이 아니다. 가톨릭의 전체 체계의 핵심이다.

가톨릭 사제인 존 오브라이언(John O’Brien)은 그의 책 The Faith of Millions에서 미사의 절차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제가 성찬식을 선언할 때, 그는 하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가 그의 보좌로부터 내려오게 하여 인간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다시 드려질 수 있도록 그를 우리의 제단으로 모셔오게 된다. 그것은 군주와 황제들의 힘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그것은 성자들과 천사들, 혹은 스랍과 그룹들이 가진 힘보다 더 강한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심지어 성모 마리아의 능력보다 더 강한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기 위하여 한 번만 매개적인 역할을 한 인간인 반면에, 사제는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모셔와서 인간의 죄를 위한 영원한 희생 제물로 제단에 세운다. 한 번이 아니라 수천 번을 말이다! 사제가 말을 할 때면, 보라! 영원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사제의 명령에 겸손한 순종으로 그의 머리를 숙이신다.”

간단히 말하자면,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벗어나시게 하지 않는다. 미사에서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실제 몸과 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반복적이고 불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게 한다. 그는 주(Lord)와 구원자(Savior)가 아니다. 즉, 그는 사제의 힘에 의해서 제단 위에 영원히 종속되어버린 영원한 희생 제물이다. 그것이 로마 가톨릭의 십자가 상에서 분명하게 상징되는 것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것은 로마서 6장 8-10절의 바울의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그리스도의 단회적 희생을 부인함으로써 가톨릭는 (성경적으로) 부적합한 사제들에게 인위적인 힘과 권위를 부여하였고, 그것을 믿는 신자들은 죄를 위하여 헛되고 사악한 제물들을 바치는 반복적인 제도의 노예가 되게 하였다. 본질적으로, 가톨릭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들의 구원을 이루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사람들을 확신시키며 그들을 속이고 기만시키는, 기독교적인 용어를 적당히 사용한 이교도인 것이다. 사실 미사는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소멸시켰다.

그의 저서 Light from Old Times에서 J. C. 라일은 가톨릭 미사가 갖는 신학적이고 영적인 의미와그것의 불완전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기를 좋아하든지 간에, 로마교회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실재의 교리(real presence)는, 만일 그 교리를 정확하게 해석한다면, 복음의 모든 주된 교리를 모호하게 혼동시키며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모든 것을 손상시키고 방해한다.

성찬식을 성사가 아닌 희생제사로 여기는 순간,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진짜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성찬 테이블에 있다고 말할 때, 성변화된 떡을 먹고 성변화된 포도주를 마시는 모든 사람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진짜 몸과 피를 먹는다고 인정할 때, 이 모든 것을 인정하는 순간에 이런 전제가 초래하는 중대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의 신성한 교리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다. 반복되어야 하는 희생 제물은 완벽하고 완성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부인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 이외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사장이 있다면, 그 위대하신 대제사장은 그의 영광을 빼앗기신다.

그들은 기독교 성직자에 대한 성경적인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죄된 인간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의 위치로 높이는 것이다. 그들은 성례의 요소인 떡과 포도주에 절대 돌려서는 안 되는 영예와 숭배를 돌리며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혐오하는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참된 교리를 넘어뜨리는 것이 된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육체가 동시에 여러 장소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갖지 않으셨으며 사실상 “마지막 아담”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미사는 기독교의 복음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독교 교회와도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죄와 구원과 속죄와 용서에 대한 참되고 성경적인 본질을 무시한다.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빼앗고, 그 자리에 피상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우상을 갖다 놓는다. 그것은 거짓말이고 사기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노예가 되게 하고 그들을 지옥으로 이끄는 저주스러운, 조작된 종교이다.

 

존 맥아더

출처 :  http://gracetokorea.org/

Available online at: http://www.gty.org/Blog/B130221/a-timely-critique-of-the-catholic-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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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존 맥아더 목사님의 글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이 본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영광에 대해 기록한 후 자신이 그 영광에 어떻게 압도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계 22 : 8,9)

 

로마 카톨릭 교회는 단지 천국의 시민에 불과한 한 사람을 합당치 않은 권위와 숭배의 자리에 올려 놓음으로써 요한이 범했던 것과 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마리아는 누가복음 1:38 에서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 외 수많은 성경의 다른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하나님 이상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비견되는 자리에 올려놓고 숭배하고 있다.

185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는 그의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 effabileuis Ds)이라는 회칙을 통해 마리아가 원죄를 물려받지 않은 무오한 상태에서 잉태 되었다는 무염시태(無染始胎, immaculate conception) 교리를 카톨릭 교회의 정식교리로 채택했다. 그가 내린 다음과 같은 결론적인 언급에서 마리아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견해가 잘 요약되어 나타나 있다.

우리의 소중한 카톨릭 교회 모든 어린이들 마음속에 이 교리를 심어주어야 한다. 경건에 대한 열정과 종교심, 애정을 가지고 가장 복되신 동정녀, 하나님의 어머니,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마리아께 소원과 기도를 올리며 그녀를 숭배하도록 가르치라. 어린 영혼들이 그들의 모든 위험과 어려움, 그들의 필요, 의심 그리고 두려움 가운데서 사랑스러운 자비와 은혜의 어머니에 대한 견고한 신심을 가지고 날아오르게 하라.

 

그녀의 인도와 보호, 친절과 후원 아래서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진실한 어머니의 사랑과 우리의 구원을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녀는 온 인류를 위해 간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나님에 의해 하늘과 땅의 여왕으로 임명되었으며, 천사와 성인들의 모든 찬송 위에 높임을 받고 있고, 나아가 그녀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의 우편에 서 계시므로 가장 효과적으로 우리의 청원을 전달하는 자이다. 그녀가 우리를 대신하여 구하고 간청하는 모든 것은 무엇이든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사실은 우리 로마 카톨릭의 역사 대대로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으며 확장되어 왔다. 우리의 전통이 우리에게 지시해주는 바는, 마리아는 하늘 왕조의 일부분이며, 죄인들을 대신하여 주님으로부터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자이며, 그녀의 은덕의 창고에서 우리에게 자비를 나누어주고 우리의 죄를 덮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십자가에서 고난당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구원자가 되었으며, 지금 하늘에서 예수와 함께 공동 중보자, 즉 본질적인 면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또 다른 길로서 존재하고 있다.

교황의 이러한 말은 성경이 마리아에 대해 말하는 바와 완전히 대조적이며, 심지어 그녀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말한 것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1:46~55 절은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 라” (눅 1:46~55)

 

 그녀가 찬양한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은 사람들이 간청하거나 온갖 고행을 다할 때까지 인색하게 축복을 베풀기를 주저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엄하시거나, 멀리 계시거나 무관심하지 않으시다. 그분은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고, 자비가 풍성하시다. 마리아는 자기 자신을 높이기보다 오히려 낮은 자세로 주님을 찬양했다.

성경은 사실 마리아에 대해서 매우 적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의 외형적인 모습에 대한 묘사도 없으며, 천사가 그녀에게 나타나기 전까지의 그녀의 삶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죽임 당하신 이후의 그녀의 삶이나 혹은 그녀 자신의 죽음과 장례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녀가 오순절 날 제자들과 다른 신자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잠깐 나올 때조차 그녀는 전혀 경배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녀는 단지 많은 신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아가 사람들이 그녀에게 기도했다거나, 그녀가 높임을 받았다거나, 그녀를 숭배했다는 성경의 사례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그녀가 어떤 역할을 감당했다는 기록도 나오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원의 교리에 대해 훌륭한 서술을 하고 있는데, 그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다윗의 자손”(롬1:3) 이었다는 것이 전부이다. 또한 참되고 순수한 복음에 대해 길게 설명하는 또 다른 책인 갈라디아서에서는 더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단지 그리스도께서 “여자에게서 나셨다”(갈4:4) 는 단순한 표현뿐이다. 이에 반해 카톨릭 교회는 마리아의 삶과 그녀의 기적들, 죽음, 출현 그리고 그녀에 관한 끝없이 서술한 책들의 목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카톨릭 교회 교인들이 종종 성경을 읽을 때 성경에 마리아에 관한 언급이 실제로 얼마나 적게 나오는지를 깨닫고 충격을 받는 이유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전통을 성경과 같은 수준에 올려놓거나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절대 무류한 속성을 인간에게 부여하고 인간을 높이는 비이성적인 일이 존재한다. 그것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시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과 사역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짓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속자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위로자이시자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분만이 경배를 받으시고, 찬양을 받으셔야 하며,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간구와 기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성경의 증거는 명백하다.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이니라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 4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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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존 맥아더 목사님의 글입니다


신약 성경은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8).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지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4-5).

성경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믿음으로만 이루어 지는 것이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님께서 당신이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당신이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의로움이 당신에게 전가되었고,그리고 그가 당신의 죄의 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지셨고 우리는 그의 의로우심을 받았다. 그것이 놀라운 칭의교리이다(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은 성경과는 극명하게 다르다.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아니라 그들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거짓 복음을 전하고 있다.

종교개혁에 대항하여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확증하고 성문화하기 위한 모임인 트렌트 공의회는 가톨릭이 만든 칭의교리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고 그 교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끝까지 선행을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에게 자비롭게 약속하신 은혜와 그들이 행한 선행과 공로로 하나님 스스로 약속하신 영생이 주어 질 것이다.” 가톨릭 시스템에서의 구원은 우리가 얻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행한 바로 그 행위에 의해서 이 삶에서 하나님의 법을 충족시키고 그리고 진정으로 영생의 공덕을 쌓음으로” 우리가 얻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절대적이로 그리고 완전하게 반대이다. 그것은 완전히 가톨릭 교회가 만들어 낸 이상한 복음이고 구원을 얻기 보다는 저주를 받게할 뿐인 복음이다. 기도들을 수없이 되뇌이는 일이나, 성인들이나 여러가지 교회 유물들을 숭배하는 일이나, 미사에 참여하는 일들이 죄인들의 영혼을 구속하지 못한다. 어떤 사제도 죄를 사해 줄 힘이 없고, 면죄부를 구입하는 일이 그 죄들에 대한 심판을 취소할 수 없다.

공로를 중히 여기는 가톨릭 교회의 핵심은 비성경적인 연옥의 개념이다. 사실 연옥의 발명이 가톨릭의 이론을 아주 매력적으로 만든다. 연옥이 없다면 가톨릭은 정말 전파되기 어려울 것이다. 가톨릭 교인들은 전혀 굳건한 영적인 바탕위에 서있지 않다. 그들은 그들이 진정으로 구원 받았는지 또는 천국에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심지어 확신한다고 하더라도, 경건한 가톨릭 신자도 하나님과 그들의 교회로 부터 은총을 입지 못할 치명적인 죄를 지을까 하는 끊임없는 걱정 가운데 살아간다.

거짓된 연옥의 교리는 가톨릭 신도들의 영적인 안전망이다. 이 교리는 소망이 없는 체제에 발이 묶인 사람들에게 거짓된 소망을 준다. 이 교리가 그들의 전적으로 행위로 의롭게 되는 죄에 지배되고, 불안에 지배로 부터 벗어나게 하는 길이다. 연옥은 행위로 의롭게 되는 교리 때문에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있는 단 하나의 위로이다. 그리고 이것은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이며, 수많은 영혼을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비극적인 터무니없는 희극이다.

사도 바울은 칭의의 진정한 본질을 더 이상 분명하게 정의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정의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이토록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복음이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거부되었고, 그들은 그것을부패하고, 비성경적인 구원으로 대치시켰다. 즉 행위로 의롭게 됨과 공로로 인해 얻는 구원으로 바꾸었다.

그 사탄의 왜곡된 제도를 관장하는 것이 교황이다.

 

출처 :  http://graceto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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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존 맥아더 목사님의 글입니다

 

지난 주에 교황 베네딕트16세가 곧 은퇴할 것이라는 중대하고 예상하지 못한 발표를 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쇄도하는 뉴스와 공개 토론의 홍수에 접하게 될 것이며 특히 새로운 교황이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앞으로 여러분은 친구들, 가족, 직장 동료들, 그리고 이웃들과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토론하게 될 것이다. 이 기회는 모든 사람이 말하는 주제에 성경적인 빛을 비출 수 있는 기회이다. 그리고 주님이 그러한 기회를 주셨을 때,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대해 권위있게 그리고 명료하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로마 가톨릭의 타락한 우상숭배에 대해서도 분명하고도 권위 있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이 가톨릭을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받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앞으로 로마 가톨릭과 화합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고 점점 더 많이 주장할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교황, 마리아 숭배, 우상 숭배로 가득찬 미사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모든 제도를 진실되고 성경적인 기독교라고 다시 분류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에는 아주 많은 문제들과  연루 되어있다. 수세기 동안의 교회 역사와 선교사의 헌신 그리고 순교의 수난등을 뒤집어 놓아야 하는 것이 포함된다.

진리를 대항하는 사탄의 오래된 전쟁에서 가장 강력하고, 끊임없고, 그리고 거짓에 가득찬 적이 로마 가톨릭이다. 

가톨릭은 배교자이며 부패되고 이교적인 그릇된 기독교이다. 가톨릭은 엷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 사탄의 얼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는 언제나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종교 개혁이 일어 나기 전 암흑의 시대에서 조차도 진정한 신자는 자기 자신을 가톨릭 신앙과 거리를 두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그릇된 가르침과 우상 숭배를거부하므로 잔혹한 핍박과 형벌을 받았다.

이 시대의 분별력있는 성도는 가톨릭에 대항해서 굳건히 바로 서야 한다. 우리는 저들의 그릇된 사제주의와 거짓 계시, 거짓 전통을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잘못된 성사들, 우상 숭배, 그리고 부패한 권위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만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는 사탄의 거짓말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틀리는 가를 알아야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방어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한다.

이번 한 주, 우리는 로마 가톨릭의 핵심이 되는 교리와 제도를 알아 보고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오도하고 있는지 살펴 보도록 하겠다. 이 짧은 시리즈로 그 잘못을 총망라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 글이 앞으로 여러분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러한 기회를 잘 이용할 수 있게 되도록 여러분들을 돕기 원한다.

존 맥아더

출처 :  http://graceto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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