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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설교. <범사에 감사하는 은혜 >

 


범사에 감사하는 은혜  (데살로니가전서 5:18)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한해 동안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인간다운 삶은 영위하게 하시며,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은혜를 돌이켜보면서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이런 주일을 맞이하여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지 돌이켜보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합니다. 감사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건강지수와  행복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간의 행복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충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대의 마음 속에 감사하는 생각이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젓고 있는 사람이다. 부디 다른 공부보다도 먼저 감사하는 공부를 배우라." 그만큼 감사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인간의 근성은 감사에 인색합니다. 심지어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두발 달린 동물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쉽게 동감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요즘같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부모들은 자식이 원하는 것이라면 대부분 거절하지 아니하고 다 들어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키운 자식일수록 나중에 부모님의 은혜를 망각한 채 살아갑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말세가 가까워 질수록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어진다고 예언하신바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에 보면, 말세에 나타나는 삭막한 인간성 중 하나가 감사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50년 전, 100년 전 그 혹독한 가난가운데 힘들게 살았던 우리 조상들에 비해 훨씬 감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점점 감사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교훈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범사에 감사할 때, 영과 육이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범사에'라는 말은 헬라어로 '엔 판티'(en panti)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영어 성경에서는 크게 3가지로 번역합니다. 곧 '어떤 형편에서든지', '모든 일에', 마지막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사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다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범사에'라는 말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 보면 3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에도 감사할 뿐 아니라 안 좋은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감사할 뿐 아니라 큰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인생의 양지에 있을 때도 감사할 뿐 아니라 음지에 있을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하나도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의 참뜻입니다.

실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부담감을 줍니다. 어떻게 이 말씀을 실천하라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감사의 내용을 알면 그 고민은 한층 더 무거워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감사는 막연히 느끼는 고마운 감정이 아닙니다. "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소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116:2-1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감사에는 적어도 3가지 요소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첫째로 감사에는 마음이 담겨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나님께서는 이런 간절한 마음이 담긴 감사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보답하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 드릴 수 있을까? 이런 간절한 마음을 담는 것이 감사요.

 

둘째로 궁극적인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물론 고마운 사람에게 감사할 수 도 있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고 그 앞에 경배하는 것을 일컬어서 감사라고 합니다.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제사장을 찾아가는 도중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9명은 "우와! 내 병이 나았네. 아이고, 고마워라." 하며 고맙다는 느낌을 가졌지만 그 이상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명, 바로 사마리아 사람은 병이 낫자,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가던 길을 돌이켜 예수님에게로 다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앞에 넙죽 엎드려 주님을 경배하면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셋째로 진정한 감사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예물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소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소원이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약속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정말 응답해주시면 너무나 감사해서 자기가 서원한 것을 그대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던 중 정말로 아들을 얻자 그 은혜에 감사하여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평생 기도한 것을 다 받고 나니 너무나 감사해서 말년에는 자신이 쌓아 놓았던 모든 재산을 성전을 짓는데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할 때 그 감사에는 마음이 담겨야 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 감사의 예물을 들고 나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고맙다고 느끼는 것으로 머물면 안되고, 감사하다는 말로 끝나서도 안됩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로 드려지는 감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범사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이처럼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가지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첫째는 좋은 일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악해도 좋은 일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무더운 여름에 소낙비를 주시듯 가끔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주십니다.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이 엄청난 수고요, 희생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좋은 일을 자주 맛보곤 합니다. 평생 부부로서 사는 것이 굉장한 희생과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좋은 일을 주십니다. 한 생을 살면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각자에게 좋은 일이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경험하게 된 좋은 일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지 못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감사헌금을 잘하시는 것에 늘 하나님 앞에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헌금을 보면 감사에 대한 성도들의 정성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몇 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입니다. 그런데 몇 백 명 모이는 교회에 비하면 감사헌금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감사할만한 좋은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좋은 일 하나하나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뜨거운 심정으로 손에 헌금을 들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좋은 일이라고 자연스럽게 감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긍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마땅히 감사해야 될 좋은 일을 감사 없이 넘겨버릴 때가 많이 있음을 인정하고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는 나쁜 일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란을 너희에게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살전3:4) 바울은 전도하면서 이제 예수를 믿게 되면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미리 예언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 믿고 나니 엄청난 환란과 핍박이 그들에게 덮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핍박이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다 포기해야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중국에 가보면 정부와 결탁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삼자 교회는 버젓하게 교회 문을 열어놓고 예배를 드리지만, 공산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을 들고 투쟁한 지하교회들은 지금도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공 셍리앙(Gong Shengliang) 목사님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종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신도만 해도 2, 3만 명에 이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구원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면서 집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자 중국 정부에서 핍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핍박의 구실을 만들고자 그 교회에서 예수 잘 믿고 인물이 있는 여 집사 몇 명을 끌고 가, 공 목사가 성폭행한 사실을 인정하도록 고문을 해서 허위자백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공 목사를 잡아 들여 재판을 치루고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세계인권위원회는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고 결국 사형선고에서 종신형으로 감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핍박이란 예수 한번 바로 믿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형편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핍박 받는 것도 감사하고, 매 맞는 것도 감사하고, 가족들이 끌려가서 죽는 것도 감사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것도 감사하고, 굶는 것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쁜 일을 많이 보고 마음에 원치 않는 일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핍박을 받는 사람에 비하면 가벼운 것입니다. 핍박 받는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다면,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언짢은 일에도, 손해 보는 일에도, 내 몸이 망가지게 되더라도, 사랑하는 이가 일찍 죽는 것을 보고도 감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기 쉬운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숨쉬고 있는 공기로부터 시작해서 마시는 물,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내 몸의 모든 기능, 하나님이 주신 내 자녀, 일용할 양식, 어느 것 하나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날마다 풍성하게 주시니까 우리가 소중한 것을 받고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가 쉽습니다. 당연하게 여길 때는 감사가 따라오지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 문명은 무엇이든지 당연하게 여기도록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왔다는 빚진 감정을 갖지 못하도록 합니다. 1세기 전만 해도 사람들에겐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빚진 의식 또는 의존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고 모든 것이 풍족해지면서 서구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은 모든 나라들이 이제는 빚진 감정 대신 권리 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의존 의식보다도 자율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나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인기 있는 만화 작가 바트 심슨(Bart Simpson)이 한번은 어느 레스토랑에서 식사 기도를 부탁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이 모든 음식을 위해서 친히 값을 다 지불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감사합니다." 얼마나 방자하고, 거만하고, 교만한 태도입니까? 내가 누리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내 능력으로 얻었는데, 무슨 감사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범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서 받았기 때문에 일일이 감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할렐루야이다." 입니다. 그 어느 것을 보아도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너무 풍족한 세상을 살아서 많이 오염되었습니다. 그래서 빚진 의식보다 권리 의식에 은근히 더 오염된 것 같습니다. 70년 전만해도 우리는 식민지에서 겨우 벗어난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6·25전쟁이라는 끔찍한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런 나라가 불과 반세기도 되기 전에 OECD에 가입할 정도로 세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보다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냉랭한 마음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를 보면 60억 인구 가운데서 1/10에 해당하는 6억 인구의 하루 생활비가 1달러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기가 없는 사람들의 수가 20억이 넘습니다. 식수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아무데서나 퍼 마시는 사람들의 수는 10억이 넘습니다. 인간다운 삶은커녕 이렇게 끔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한반도에서 우리가 이만큼 먹고 마시며 여유를 가지고 살수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히 여겨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한번 종합병원에 가서 진료과목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의사가 다루고 있는 병이 몇 가지나 되는지 살펴 보십시오. 병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병에 걸리지 않고 이렇게 당당하게 걸어 다니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정범진이라는 사람은 교통사고로 평생을 전신마비로 살아야 되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각고의 노력 끝에 미국 브루클린 검찰청의 부장검사까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단 하루만 걸을 수 있다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앞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는 것이다." 그는 전신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는데 2시간동안 사투를 벌일 때도 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절대로 당연시 하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체스터튼(G. K. Chesterton)이라는 사람의 말에 공감합니다. "나의 주된 인생관은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연습하는 것이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려면 이와 같은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좋은 일에도 감사해야 하지만 나쁜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누리는 당연한 것들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허황한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것은 아무런 근거 없이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인 줄 뻔히 아시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반드시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은혜까지 준비하십니다.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은혜의 산물이지,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받아야 가능한 것이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뛰어넘어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당하는 모든 일을 앞에 놓고 "할렐루야" 할 수 있는 은혜가 내 안에서 치밀어 오를 때 가능한 것이지, 내가 노력하고 결심하고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읽어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핍박 중에서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나옵니다. 바로 구원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난후 이렇게 변했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 말하니."(살전1:9-10)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과거에 우상숭배하던 것을 다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배후에는 이런 구원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힘입으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자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시며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세상에 있을 동안 너희들이 어디에 가든지 내가 동행해주마. 불 가운데로 지나갈 때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하마.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하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내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너를 안위하리라. 원수들 앞에서 너희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높여주리라. 좋은 일이 생기든, 나쁜 일이 생기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마. 그리고 너희들이 어려울 때마다 나에게 기도하여라. 그러면 내가 언제든지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마. 환란 중에 내가 너희를 건져주리라. 악한 자가 와서 만지지도 못하도록 내가 너희를 보호해주리라."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가 되셔서 나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날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기만을 간절히 고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핍박을 받기에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그분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황홀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눈 앞에 그려보면서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장차 그 나라에서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이런 일 저런 일이 땅에서는 중요하게 보이는 일이지만, 하나님나라의 영광에 비추어 보면 잠깐 지나가는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난 3월에 6가족을 포함한 25명의 탈북자들이 북경에 있는 스페인 대사관에 몰려들어가 한국행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며칠 동안 그들은 엄청난 절망에 빠져있었고, 처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으니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사관 안에서 기다리면서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서 죽을지, 아니면 한국으로 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지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한국행이 결정되었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바로 그 때 그 사람들의 마음에 제일 먼저 찾아온 감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살았다. 이제는 한국으로 간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 동안 마룻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추위에 떨면서 자던 것도 감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대사관 직원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던 과거의 모든 일도 다 감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행기가 늦어져 며칠 더 기다려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도 오히려 감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살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으로 가게 되니까 모든 것이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한국이 아닌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가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으며 살기에 세상에서 좋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나쁜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하찮은 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샘 솟을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구원의 은혜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있으면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구원의 은혜를 충만하게 주시옵소서. 구원 받은 은혜에 취해서 살게 해주시옵소서. 내가 예수님 때문에 얼마나 큰 구원을 얻었는가를 알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때문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날마다 바라보면서 흥분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이런 구원의 은혜가 있으면 세상에서 겪는 어려운 일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일로는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의 은혜에 우리가 흠뻑 젖어 있을 때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시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를 향해서 명령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큰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는 하나님나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이 큰 구원의 은혜를 우리가 값없이 얻었기 때문에 이 은혜 안에서는 좋은 일도 감사하고 나쁜 일도 감사하고, 큰 일도 감사하고 작은 일도 감사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구원 받은 자의 행복과 기쁨을 다시 한번 회복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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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감사의 생활화

 

 

 

제목 : 감사의 생활화

말씀 : 엡 5:15-21

어떤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두 눈이 모두 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직장이나 다른 모든 꿈들도 접어 둔 채 실의와 좌절 속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동안 실의 속에서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이 청년은 결국 특수 맹인 학교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학교에 도착하여 교장선생님의 따뜻한 영접을 받은 후에 자세히 학교 생활에 대한 안내를 받게 되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학교에 대한 소개를 한 후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학교 건물과 교정을 자상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학교 현관에 서 있습니다. 이 현관은 모두 열 개의 계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 천천히 열 개를 세면서 내려가세요. 불안하면 내가 당신의 바로 옆에 서 있으니 나를 잡으십시오. 이제 열 개의 계단을 다 내려 왔습니다. 이제 오른쪽으로 돌면 화단이 있습니다. 꽃향기가 나지요? 여기가 화단입니다. 이제 조금 더가면 긴 등받이 의자가 있습니다. 나는 종종 이 의자에 앉아서 꽃향기를 맡으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쉬곤 한답니다.」

이런 식으로 학교 교정을 한바퀴 돈후에 교장 선생님은 식당을 거쳐 청년이 기거하게 될 방으로 안내하여 방의 구조, 화장실, 가구의 위치 등등을 자상하게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교장 선생님은 이제 좀 쉬라고 하면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맹인이 된 청년은 교장 선생님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매우 친절하시고, 앞을 못 보는 저의 입장을 너무나 세심히 이해하며 도와 주시는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은 선생님 덕분에 정말 오래만에 기분이 좋은하루였습니다. 이곳에 있으면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예, 물론이고 말고요. 저는 당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누구보다도 잘 도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당신과 같이 두 눈을 못 보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정상인과 다를 바 없이 만족하며 살고 있거든요. 이곳에서 당신은 바로 그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비록 두 눈이 없어 앞은 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틀림없이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란 결코 어떤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란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맹인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비록 두 눈이 없어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없었고, 또 실제로 생활하는데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를 좌절시키거나 원망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혹시 건강한 사지와 정상적인 이목구비를 가지고도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았던 것은 아닙니까? 이렇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이렇게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주시고, 때를 따라 따뜻한 태양과 비와 바람과 눈과 신선한 공기를 주셔서 우리에게 이처럼 귀한 생명을 주시는데도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과 짜증속에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까? 헬렌켈러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걷지도 못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제대로 말하지도 걷지도 못하면서 발가락으로 시를 쓰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1.감사의 당위성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로 지키면서, 이제 한해의 농사도 거의 마무리 되어가고 벌써 이해도 한달 남짓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 보며, 감사하며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두 눈을 잃고도 감사하며 기뻐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데 사지가 멀쩡하고, 밝은 두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고 이 좋은 삶의 터전들이 있는데 감사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앞에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꼭 추수한 것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꼭 무언가 물질적으로 많은 것들을 거두어 들여서도 아닙니다. 때로는 힘이 들고 어려울 때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추수한 것이 많건 적건, 어렵고 힘들 때가 있었건 없었건 사실 오늘 이 순간까지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기에, 그리고 실제로 이 좋은 계절에 많은 것들로 채워 주신 것도 사실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어떤 특별한 날들을 정해서 그 절기를 지키라고 하면서 하나님앞에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23:14절에 보면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무교절을 지키라, 맥추절을 지키라, 수장절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과 같은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아 해방을받게 된 것을 기념하여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맥추절은 이른 곡식을 거두어 들이고 감사하는 절기로 우리가 지키는 맥추감사절을 말하는 것이며, 수장절은 늦 곡식을 거두어 저장한 다음에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로 오늘날 우리가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에 해당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특별한 절기를 정해주시면서까지 감사의 절기를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기를 정해 줌으로써 당신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삶을 통해서 더욱 당신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아 누리게 하려는데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 신앙인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요구하며, 간구하는 것들은 많지만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것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물론 기도할때나 기타 어떤 대화를 할 때는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겠노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속에서는 감사의 모습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뻐하며 찬양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그저 내 욕심이나 채우며, 불평하며, 원망하며 사는 모습이 많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저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것은 그다지 많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주십시오, 저렇게 해 주십시오하는 것은 왜 그렇게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교회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요, 여기 서 있는 이 목사를 향하여서도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 교회가 내게 대해서 이렇게,저렇게 해 주어야 한다고 하는 요구 조건은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은 그다지 많지를 않습니다. 우리 목사는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우리 목사는 나에게 이렇게 해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목사가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데 있어서 이렇게 협력해야 되겠다, 저렇게 도와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은 그다지 많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아직도 감사가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감사와 은혜가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나 교회나 목사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는 요구는 그렇게 많지를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이미 받은바 은혜가 족한데 무엇을 더 요구하겠습니까? 내가 이미 받은 바 은혜가 많은데 뭐가 또 부족해서 자꾸만 달라고 하겠습니까? 오히려 내가 이렇게 많은 것을 받았으니 이제는 나도 무언가 이 은혜에 좀 보답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은혜가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나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목사가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어떻게 좋은 협력자가 될 것인가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며 우리가 받은 바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면서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정성껏 예물을 드리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많은 은혜를 받았으니 나는 앞으로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드릴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앞부분의 말씀들과 연결해서 보면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봉독해 드린 말씀을 보면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지혜 있는 자가 되어 세월을 아끼라,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나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며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아 주의 뜻을 따라 세월을 올바르게 사용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이렇게 주의 뜻을 따라 성령 충만함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목석도, 금수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이성적 존재요, 감성적인 존재요, 인격적 존재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생각할 줄 압니다. 생각할 줄 아는 자는 은혜를 입으면 고마움을 느끼게 되고, 고마움을 느끼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에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없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 잘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감사가 없는 사람을 죄인 취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1:21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말씀하시면서 감사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또 딤후3:2절에서는 말세에 배도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모습을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다.”고 하시면서 역시 감사치 아니하는 자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앞에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앞에 감사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은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앞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며,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 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맛본 사람은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어서 영벌에서 영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성도가 입은 이 은혜는 너무나도 커서 눈물로도 갚을 수 없고, 온 세상 만물을 가지고 다 갚을 수 없는 은혜요, 갚고 또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은혜를 입고 사는 우리가 금수가 아니라면 어찌 그 생활 속에 감사가 없을 수 없단 말입니까?

물론 우리에게도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도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길에서 때로는 지치고, 실망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입고 있는 이 은혜는 너무나 큰 것이기에 우리에게 고통이 있다고 해도,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덥고도 남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다. 우리에게 조그마한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그 보다 훨씬 큰 기쁜 일이 생긴다면 조그마한 어려움은 쉽사리 사그러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이 구원받고,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복된 삶의 터전들, 이 아름다운 땅, 자유, 평화, 일용할 양식, 정말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많은 감사의 조건들을 찾으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더욱 충만하신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감사의 실제적 생활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느끼며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는데 이렇게 감사의 생활을 하고자 할 때 실제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감사의 생활이겠습니까? 물론 마음이 중요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마음으로 감사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이 감사도 그저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만 그쳐서는 안됩니다. 마음속에 진정한 감사와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또한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모양으로든 표현되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닙니다.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요, 사랑은 표현하고 실천 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며, 축복은 감사 할 때까지 축복이 아닙니다. 감사는 생활 속에 나타날 때까지 감사가 아닙니다. 노래는 불러야 노래이고, 사랑은 실천해야 사랑이며, 축복은 감사 할 때만이 축복이요, 감사는 삶 속에서 나타날 때 진정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은 밖으로 표현되어질 때에 그것이 진정한 것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물질을 드리는 것이든 시간을 드리는 것이든 육신을 드리는 것이든 어쨌든 그 마음속에 진정한 감사가 있는 사람은 무엇으로든 어떤 방법으로든 그 받은바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 보답하려는 마음에 따라 어떤 행동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의 전 생애를 주님을 위해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주저 없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향해서 갔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주님의 그 구원의 은혜를 증언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원망하지도 저주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 루디아는 자신의 집을 교회로 제공하고, 복음 전도자 바울을 공궤하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그들의 집과 재물을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드렸으며, 바울을 위하여 그들의 생명이라도 내 놓을 각오로 함께 복음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 뵈뵈 자매는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바울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폴리갑은 주님을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스스로 불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향하여 의연히 걸어가 불에 타 순교를 하였습니다.

이 위대한 신앙인들은 모두가 우리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을 느끼며 감사하며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복음이, 주님께서 주신 이 영원한 생명이,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기에 그것을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의 모는 것을 드리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교회의 실상은 그러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많은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 같아 정말 안타까울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의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는, 육체적인 안일함과 만족과 기쁨과 욕구 충족을 위해서는, 자녀를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정열을 쏟아 부으면서도, 있는 것 없는 것 다 동원하여 투자하면서도 주님을 위해서는 정말 인색하기 그지 없는 모습들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드리는 시간도 정말 보잘 것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드리는 물질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시간들도 얼마 되지를 않습니다. 복음 전도도, 사랑의 실천도, 교회를 위한 봉사도 그저 귀찮고 나의 사생활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주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깨닫고 느끼는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주님께서 주신 이 영원한 생명이 정말이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면 우리는 세상 무엇보다도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고 있는 이 은혜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감사하는 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 더욱 우리의 삶속에서 감사가 넘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마음에 감사가 있고, 그 마음속의 감사가 생활속에 나타나는 것이 은혜를 받은 증거입니다. 그것이 구원을 받은 증거이며, 성령이 충만한 증거입니다. 감사 할 줄 아는 자가 진정한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감사가 없는 성도나 감사 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자녀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서 건져주신 그 구속의 은총을 생각하여 보아도, 오늘도 우리에게 변함없이 일용할 양식과 삶의 터전과 이 모든 삶의 환경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감사하지 아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저 영광의 나라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거할 그 순간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감사하지 아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은혜를 기억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육체를 드려서 또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특별히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보내면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되새겨 보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영광과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구원의 은혜와 오늘 이 순간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으로 감사하고,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감사하며,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한한 기쁨과 은혜와 보람 속에서 넘치는 축복을 누리면서 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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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추수감사절설교 / 감사의축복

 

 


말씀 : 잠3:9,10

제목 : 감사의 축복

여러분,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아십니까?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세계적으로 공신력을 가지고 있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전 세계 나라를 대상으로 치안상태를 조사했는데 우리 대한민국이 100만점에 83.1을 기록하여 1등이고 그 다음에 싱가폴, 카타르, 일본 등이고 서유럽이나 미국은 6,70점대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나 남미 지역은 2,30점대가 수두룩하고 가장 치안이 불안한 나라는 베네수엘라인데 15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83점으로 당당히 1등입니다. 한마디로 가장 안전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범죄율은 가장 낮고 범인 검거율은 1위라고 합니다. 그래서 밤 늦은 시간에도 밤거리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 술에 취해 길바닥에 누워 있어도 안전한 나라, 식당이나 편의점이나 심지어 술집에서도 휴대폰이나 카메라를 두고 나와도 누가 가져가지 않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도 제법 오래전에 제 스마트폰을 식당에 두고 왔는데 사모님에게 전화가 왔더라고요. 폰 두고 가지 않았느냐고.... 제 폰에 저장 되어 있는 아내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어림없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 누워 있으면 어떻게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뭐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술에 취해 밤거리를 혼자 돌아다니거나 길거리에 누워있는 것을 보며 저 사람 저러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저라나 싶어서 깜짝 놀란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여러분, 우리나라 좋은 나라입니다. 치안상태만 좋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자유와 평화가 보장 되어 있습니까? 얼마나 풍요로습니까? 올해도 농사가 대풍이어서 올해 쌀생산량이 약434만톤으로 최근 6년간 최고의 풍작이라는 것입니다. 해마다 풍년이라 쌀이 남아돌아 정부 창고에 쌓여 있는 쌀이 140만톤이나 되어 처치 곤란이라는 것입니다. 또 요즘에는 우유가 남아돌아 난리입니다. 그래서 젖소 수를 줄이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젖소를 도축하고 그래도 안되어 분유를 만들어 처리하는데 분유 재고가 쌓여 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입니까? 어느 나라를 먹을 게 없어 난린데 우리는 남아돌아서 난리인 것입니다.

뭐 그밖에 감사할 것을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60년대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2만8천불 약300배나 부자가 되었습니다. GDP 그러니까 국민총생산량이 세계 11위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마음껏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완전히 안정되어 있고 풍요롭고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남보다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다해도, 혹 힘든 일이 있다해도 그래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있고 게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인데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그런 절기입니다. 비록 때때로 어렵고 힘든 일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귀하고 복된 삶의 터전을 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그래서 이렇게 자유와 평화와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려드리고 우리도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구원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렇게 일부러 추수감사주일을 제정해 두시고 이를 지키며 살라고 하신 이유는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구원의 기쁨과 능력을 확실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시50:23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일단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주시고, 예수님은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십자가의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으로 저 흉악한 마귀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을 생각할 때에 어찌 기쁘지 아니하며 어찌 감사 찬양하지 않으며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당연히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그렇게 구원의 은총과 감격가운데 살다보면 당연히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에 대한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게 됩니다. 또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볼 때에 세상의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됩니다. 무슨 원망 불평 미움 질투 시기 따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평안과 소망과 기쁨 속에 살게 됩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 더욱 믿음과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능력으로 채워주심으로 그 삶에 더욱 생동감이 넘치고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돈과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과 욕망과 시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절망과 한탄 따위는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믿음과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으로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감사가 넘쳐나고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자로서 이 땅에서의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6:11절에서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감사하면 할수록 점점 은혜가 넘치고, 감사하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면 할수록 은혜는 점점 멀어집니다. 아니 원망하고 불평하면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자녀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었을 때 정말 감사하며 그것을 잘 사용해서 자신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주며 산다면 준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얼마나 더 주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맨 날 받기는 받는데 감사할 줄도 모르고 자꾸만 더 달라고만 하고 도리어 적게 준다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준 것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다면 준 것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누가 그런 사람에게 더 주고 싶겠습니까? 아니 더 주기는커녕 주었던 것마저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눅19:24~26절 보십시오.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잘 활용할 줄 알며 그래서 자신도 남도 기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너무 좋아서 더 많은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감사하지도 않고 올바르게 활용할 줄도 모르면서 자꾸 불평이나 하고 더 달라기만 하는 사람은 준 것도 아까워 주었던 것도 도로 빼앗아 감사와 기쁨으로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이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주신 하나님, 게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때에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기쁨과 평강으로 채워주심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우리 사회가 더욱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능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자에는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감사하는 자는 세상을 이기고, 마귀사탄을 이기고 대적자들을 이기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감사가 뭡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아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과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어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찌 능력있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대하20:21절을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이 말씀은 여호사밧 왕때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족속이 연합군을 이루어 침공했을 때의 일로 이때에 여호사밧은 성가대를 앞세워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적국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며 자멸해 버리고 이스라엘은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전리품만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까? 찬송하며 감사할 때, 감사하며 찬송할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라도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을 믿으며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고 감사하며 찬양할 때 어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해결하지 못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섭리와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이후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약하고 부족한 것들과 모든 도전과 유혹과 모든 어둠의 권세와 기타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은총을 고백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심으로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며 더욱 많은 은총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물질적으로도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영혼의 복도 주시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시고 그러면 육신도 더욱 건강해 지고, 더불어 물질의 복까지도 주십니다. 그래서 감사하면 할수록 자꾸만 감사한 일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기뻐하는 하는 사람에게 기쁜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불평 불만하는 사람에게는 자꾸만 불평 불만할 일이 생깁니다. 원망하면 자꾸 원망할 일이 생깁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기고, 투덜거리며 투덜거릴 일이 생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도 한번 두번 안오면 자꾸 교회에 못 올 일이 생깁니다. 마귀사탄이 자꾸만 이래서 못가고 저래서 못가고 하면서 가지 못할 일만 보이게 만듭니다. 교회에 오려고 하면 꼭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 못 올 일이 생긴 게 아니라 얼마든지 교회에 올수 있는 상황인데 내가 교회에 가지 못할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에 열심히 오면 자꾸만 교회 갈 일이 생깁니다. 이래서 가야 되고, 저래서 가야 되고 그러면서 교회에 계속 가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도 그렇습니다. 십일조헌금 감사헌금 한번 두번 안하다보면 자꾸만 헌금을 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래서 할 수 없고, 저래서 할 수 없고... 그런데 실은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아 내가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점령을 앞두고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가서 똑같은 장소를 보고 왔는데 10명은 거기 들어갈 수 없는 상황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못 들어가고 저래서 못 들어가고...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갈 조건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가고..... 그래서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열명의 정탐꾼과 그들에게 동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동안 실컷 고생만하다가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간다며 들어갈 조건만 헤아렸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꾸 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자꾸 감사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자꾸 사랑해야 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교회에 올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헌금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사랑하고 주고 드리며 자꾸 복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자꾸 은혜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더욱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왜요? 그게 믿음이니까요. 그게 하나님께 대한 신뢰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신뢰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는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9절,10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그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본래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주셨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니까,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네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찰 것이다.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칠 것이다. 농사가 잘되고, 곡식이 풍성하고, 장사가 잘되고, 직장에서 인정받게 되고 그래서 물질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면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릴 줄 아는 인생에게 어찌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늘 감사하며 사는 인생에게 어찌 복이 찾아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죠. 부모님께 감사하죠. 이웃에게 감사하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대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성실하게 일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복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 아니 지금까지 살아 숨쉬는 동안 모든 은혜로 채워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감사한다면 내게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축복거리를 하늘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올림으로 여러분의 삶에 더욱 은혜가 쌓이고 기쁨이 쌓이고 축복이 쌓여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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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설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 

제목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

고린도후서 9:8-15

 

8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모든 일에 필요한 것을 언제나 다 가지고 모든 선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 모든 은혜를 베풀어 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9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후하게 나누어 주었으니, 그가 행한 의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10 씨 뿌리는 자에게 씨를 주시고, 먹을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씨앗을 주시고 그것을 성장시키셔서 여러분이 거둘 의의 열매가 많아지게 하실 것입니다.

11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부유하여 넉넉하게 헌금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친 헌금을 우리가 전달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12 여러분이 행한 이러한 봉사는 성도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웠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13 여러분이 낸 구제 헌금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한다는 것과 여러분이 그들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을 너그럽게 도와 주었다는 증거이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14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이신 놀라운 은혜로 인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15 말로 다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쉬운 성경)

오늘은 추수감사절 주일입니다. 우리 옆에 분들과 “Happy thanksgiving!” 하고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감사의 마음은 금방 낡아 버린다이런 말을 했습니다. 감사의 마음은 쉽게 잊혀집니다. 감사의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은 늘 찾아 옵니다. 쉽게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감사에는 세가지 차원의 감사가 있습니다. 첫 번째 감사는 조건적인 감사입니다. 제일 낮은 차원의 감사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조건적인 감사의 차원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감사를 하는 사람들은 감사의 조건이 있어야 감사합니다. 그러나, 감사의 조건이 생각나지 않거나 감사의 조건이 없다고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감사는 역경 중에서 하는 감사입니다. 조건적인 감사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감사입니다. 1620년에 102명의 사람들이 Mayflower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서 지금 우리가 사는 메싸추세츠 남쪽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청교도들(Puritans)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박해를 받아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던 중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102명의 사람들이 모두 청교도들은 아니었습니다. 또 이 사람들의 개척정신을 존중하여 필그림 파더스 (The Pilgrim Father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620119, 지금의 케이프 카드 (Cape Cod)에 도착한 이들은, 주변 정세를 살피다가 정박을 하지 않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지금의 플리머스 (Plymouth)에 정박을 합니다. 그 때가 16201225, 크리스마스였다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신대륙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절만 가량이 죽습니다. 그러나, 무덤을 만들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적이 알고 기습을 해 올까봐 무덤 대신 그 자리에 옥수수 씨앗을 심습니다. 정말 운 좋게도 이들은 착한 인디언 부족이었던 왬파그노 (Wampagnoag)를 만나게 되어 농사 짓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지금 플리머스에 가면 플리머스 락 (Plymouth Rock)” 건너편 언덕에 왬파그노 인디언 추장 마싸소이트 쎄이첨 (Massasoit Sachem, 1581-1661, sachem"chief"라는 뜻)의 동상이 대서양을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필그림 파더들이 드렸던 감사는 역경 중에 드린 감사였습니다. 기후가 맞지 않고,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이 땅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땅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 집보다 교회를 먼저 지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짓고, 그 다음에야 자기들이 살 집을 지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decrees).” (시편 119:71) 이 시편의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이 시인은 무슨 생각에서 고난이 자기 인생에 약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나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주목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이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 사람에게 고난이 없었고, 모든 일이 순조로웠더라면 그 때도 “pay attention to God’s word”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pay attention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성공을 자기가 이룬 것처럼 교만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 번째 감사는 존재론적인 (ontological) 감사인데, 가장 성숙한 감사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이렇게 고백했던 다윗의 고백은 존재론적인 감사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무슨 감사의 이유가 딱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딱히 무슨 역경 중에서 드린 감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 속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10에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라고 고백했던 것도 존재론적인 감사였습니다. 단순히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우연히 송명희 시인이 쓴 감사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참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참 아이러닉하지 않습니까? 송명희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제가 송명희가 쓴 글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니 말입니다. 마치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이 감옥 안에서 바울이 써 보낸 항상 기뻐하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빌립보서 4:4, 6)” 이 말씀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는 것과 같은 아이러니라고 하겠습니다.

 

그 글의 제목은 감사를 잃게 하는 문화였습니다. “산소 호흡기 안 달고도 숨쉬며 의식이 있고 살아 있으니 감사해야지! 힘겹고 고된 삶을 살면서 날마다 다짐하는 나의 생각입니다. 6년동안 투병생활을 하다 보니 무엇을 보아도 즐겁지 않고 뭘 먹어도 맛을 모릅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나는 감사할 수가 있을까요? 사람들 앞에선 웃고 있지만 항상 제 눈가엔 눈물이 묻어납니다. 있어야 감사하고 무언가 받아야 감사하는 이 시대, 우리에게서 감사를 빼앗아가는 문화적 원인을 생각해봅니다. 현란한 불빛에선 한 자루 촛불이 초라하듯 예쁘고 잘 생긴 외모의 연예인들만 보면 자신의 건강은 안 보이고, 멋진 집과 자동차만 보면 자신이 초라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세상 속에서 감사보다 범죄가 늘고 있는 뉴스를 보며 탄식합니다. 예쁘고 잘 생긴 것만 추구하는 세상 문화가 교회 안에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신앙 생활이나 진리 탐구는 사라져가고, 가볍고 예쁜 것을 선호하는 시대라서 예수님이 오셔도 맞출 수 없는 까다롭고 개인주의적인 교회 문화로 변해 가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모든 것이 다 있다고 감사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시지만 감사하는 본인에게도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금세 싫증 내고 금방 없어지는, 인내가 존재되어지지 않는 환경에서 감사는 인사일 뿐입니다. 유전공학으로 송아지를 우량 소로 키우고 하우스 재배로 항상 채소와 과일을 먹다 보니 인내의 결실은 점차로 사라져 그에 따르는 감사도 그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사는 삶이 행복입니다.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가장 평범하고도 특별한 감사를 아는 사람입니다. 서로 함께 살게 하심을 감사하며 만족스런 남편과 아내가 아닐지라도, 훌륭한 부모와 똑똑한 자녀가 아니더라도 그들을 인해 감사하는 생활은 감사가 메마른 현대에 필요한 활력소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 해마다 돌아오는 추수 감사주일! 우리는 무엇을 감사하며 언제까지 감사하고 있는지....... 그 무엇보다 감사가 축복이며 천국입니다.”

 

그렇습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추수감사절 주일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두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라는 것입니다. 1620년에 필그림 파더스들이 드린 감사절을 “The First Thanksgiving”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을 도와주었던 왬파그노 인디언 부족들을 초대해서 같이 예배 드리고, 같이 축하를 했습니다.

 

지금 미국인들에게서 “The First Thanksgiving"의 정신이 퇴색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인들에게 감사절은 family reunion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평소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추수감사절이 되면 한데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절의 본 정신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웃들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외로운 이웃들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와 관심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오늘 우리는 바울이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써 보냈던 편지를 읽으면서 베푸는 삶에서 오는 감사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마케도니아는 지금의 그리스 북쪽에 있는 지역인데, 그동안 유고연방에 속해 있다가 마케도니아라는 나라로 독립했습니다. 바울은 제 2차 전도 여행 때 이 지역에 빌립보교회와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하나님께서 루디아라는 한 여자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시작한 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처음부터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습니다. 짐을 싸서 고린도를 떠나려고 하는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 백성이 이 도시에 많다. 너는 계속해서 말씀을 선포해라.” (사도행전 18:9-11) 바울은 유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려 18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마케도니아에 있는 두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무렵에,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워서 구제사업도 중단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바울은 마케도니아 교회들에게 헌금을 요청합니다. 그 말씀이 뜻 밖에도 로마서 15:25-27에 나옵니다. “나는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구제 헌금을 전하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도우려고, 기쁜 마음으로 구제 헌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로 부터 영적인 복을 나누어 가졌으므로, 물질적인 것으로써 유대인들에게 나누어 줄 의무가 그들에게 있습니다 (They were glad to do this because they feel they owe a real debt to them. Since the Gentiles received the spiritual blessings of the Good News from the believers in Jerusalem, they feel the least they can do in return is to help them financially).”

 

아니? 왜 그 교회가 어려운데 우리가 도와야 합니까?” 충분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했고, 바울은 지금 그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교회로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감격합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9:15에 이렇게 나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NLT 성경에는 이 말씀이 “Thank God for this gift too wonderful for words!”이라고 나옵니다.

 

여러분, 목회자의 보람과 기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 통해 복음을 들을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변화는 다른 것 아닙니다. 자기만 알던 이기적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아 보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는 것이야말로 목회자의 최고의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 이런 감사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는 베푸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 설교를 마치면서 저의 조그만 간증 하나를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낮에 집에 있을 때 전화 벨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도 쓸 데 없는 전화가 많이 오기 때문에 발신지를 보았더니 오레곤 (Oregon)주입니다. 거기는 제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곳이어서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몇 번 벨 소리가 더 울리는데, 왠지 받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수화기를 들었더니, “김태환 목사님세요? 저는 오레곤에 사는 김에스더 선교사라고 하는데요. 갑자기 어디 도움을 청할 데도 없고 해서 인터넷에서 목사님 교회를 보고 전화를 드립니다. 제가 아파트 렌트비가 없거든요. 좀 도와 주셨으면 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좀 황당한 전화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 못 알아 듣겠는데요? 좀 자세히 말씀해 보시지요그랬더니 제가 남편과 함께 미국 교회에 초청을 받아 왔는데 비자 문제가 잘 해결이 안 되어서 맘 고생을 하다가 이제 그 문제는 해결이 되었는데요. 그 와중에 남편이 병을 얻어서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아파트 렌트비 800불을 당장 내지 않으면 갈 곳이 없어요. 이렇게 염치 없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저는 퉁명스럽게 그런 얘기를 전화로 하면 어떻게 합니까? 좀 자세하게 이메일로 사정을 써 보내세요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한 시간이나 흘렀을까요. 그 선교사에게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열어 보니까 남편과 찍은 사진이 있고, 남편의 병원 진단서가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사기꾼들이 하는 수법이구만!” 하고 무시해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귓전에 , 진짜면 어떻게 할래?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면 어떻게 할래?”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주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마음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그 선교사에게서 받은 이멜을 프린트해서 재정부로 가지고 갔습니다. “이 이멜을 어느 선교사에게서 받았는데, 마음에 부담이 됩니다. 혹시 사기꾼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구제금에서 얼마를 보냅시다이렇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800불을 다 보내지 않고 400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선교사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오늘 400불을 보냈습니다. 당신이 사기꾼이라면 이 돈을 가지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지 마세요. 정말 돈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우리교인들이 헌금한 돈이니까 필요한 곳에 쓰세요이렇게 쓰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쓰지 못하고 오늘 400불을 보냈습니다. 필요한 곳에 귀하게 쓰세요이렇게 써서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라면 내 이메일을 받고 연락이 올 것이다. 그러나 사기꾼이라면 아무 연락이 없겠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며칠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는 것입니다. 3일이면 편지가 도착할텐데, 3일이 지나고 4일이 지나고 5일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습니다. 저는 속았구나!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400불을 교회에 헌금을 해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6일째 되는 날에 그 선교사에게서 이멜이 왔습니다. 제 이메일을 늦게 봤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남편이 수술을 해서 병원해 쫓아 다니느라고 경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도 받았답니다. 저는 내심 반가워서 이메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쓰세요이렇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일을 모두 잊어 버렸는데, 며칠 후에 저에게 카드 한장이 교회로 왔습니다. 그 선교사에게서 온 감사 카드였습니다. “김태환 목사님, 진심으로 정말 감사 드립니다, 도움 주신 것 정말로 귀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저희 필요한 렌트에 사용하겠습니다. 저희 가정이 그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 주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많은 은혜와 도움 속에서, 여러가지 것들이 해결되어 가고 있지만, 그래도 도움이 필요해 용기를 내서 목사님께 연락을 드렸는데, 따뜻하게 이해해 주시고 선뜻 도와 주시니, 감사의 마음을 글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제 남편 김다윗 선교사의 건강도 회복 중에 있습니다만, 몸의 면역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목사님께 감사 드리며, 목사님과 가정 위에 기쁜 성탄절 되시기를 미리 인사 드립니다.” - 김다윗, 에스더, 엘리야 선교사 가정 올림

 

저는 이 카드를 받고 얼마나 제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 내가 너무 쪼잔했구나. 800불을 다 보내 줄 걸....... 그걸 반으로 쪼개서 400불만 보내다니! 내가 너무 쪼잔했구나!” 이런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번 추수감사절에 나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을 보내 주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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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설교:감사의 축복(잠3:9,10)

 

말씀 : 잠3:9,10

제목 : 감사의 축복

 

여러분,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아십니까?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세계적으로 공신력을 가지고 있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전 세계 나라를 대상으로 치안상태를 조사했는데 우리 대한민국이 100만점에 83.1을 기록하여 1등이고 그 다음에 싱가폴, 카타르, 일본 등이고 서유럽이나 미국은 6,70점대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나 남미 지역은 2,30점대가 수두룩하고 가장 치안이 불안한 나라는 베네수엘라인데 15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83점으로 당당히 1등입니다. 한마디로 가장 안전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범죄율은 가장 낮고 범인 검거율은 1위라고 합니다. 그래서 밤 늦은 시간에도 밤거리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 술에 취해 길바닥에 누워 있어도 안전한 나라, 식당이나 편의점이나 심지어 술집에서도 휴대폰이나 카메라를 두고 나와도 누가 가져가지 않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도 제법 오래전에 제 스마트폰을 식당에 두고 왔는데 제 안 사람에게 전화가 왔더라고요. 폰 두고 가지 않았느냐고.... 제 폰에 저장 되어 있는 아내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어림없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 누워 있으면 어떻게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뭐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술에 취해 밤거리를 혼자 돌아다니거나 길거리에 누워있는 것을 보며 저 사람 저러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저라나 싶어서 깜짝 놀란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여러분, 우리나라 좋은 나라입니다. 치안상태만 좋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자유와 평화가 보장 되어 있습니까? 얼마나 풍요로습니까? 올해도 농사가 대풍이어서 올해 쌀생산량이 약434만톤으로 최근 6년간 최고의 풍작이라는 것입니다. 해마다 풍년이라 쌀이 남아돌아 정부 창고에 쌓여 있는 쌀이 140만톤이나 되어 처치 곤란이라는 것입니다. 또 요즘에는 우유가 남아돌아 난리입니다. 그래서 젖소 수를 줄이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젖소를 도축하고 그래도 안되어 분유를 만들어 처리하는데 분유 재고가 쌓여 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입니까? 어느 나라를 먹을 게 없어 난린데 우리는 남아돌아서 난리인 것입니다.

뭐 그밖에 감사할 것을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60년대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2만8천불 약300배나 부자가 되었습니다. GDP 그러니까 국민총생산량이 세계 11위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마음껏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완전히 안정되어 있고 풍요롭고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남보다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다해도, 혹 힘든 일이 있다해도 그래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있고 게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인데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그런 절기입니다. 비록 때때로 어렵고 힘든 일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귀하고 복된 삶의 터전을 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그래서 이렇게 자유와 평화와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려드리고 우리도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구원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렇게 일부러 추수감사주일을 제정해 두시고 이를 지키며 살라고 하신 이유는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구원의 기쁨과 능력을 확실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시50:23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일단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주시고, 예수님은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십자가의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으로 저 흉악한 마귀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을 생각할 때에 어찌 기쁘지 아니하며 어찌 감사 찬양하지 않으며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당연히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그렇게 구원의 은총과 감격가운데 살다보면 당연히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에 대한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게 됩니다. 또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볼 때에 세상의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됩니다. 무슨 원망 불평 미움 질투 시기 따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평안과 소망과 기쁨 속에 살게 됩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 더욱 믿음과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능력으로 채워주심으로 그 삶에 더욱 생동감이 넘치고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돈과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과 욕망과 시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절망과 한탄 따위는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믿음과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으로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감사가 넘쳐나고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자로서 이 땅에서의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6:11절에서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감사하면 할수록 점점 은혜가 넘치고, 감사하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면 할수록 은혜는 점점 멀어집니다. 아니 원망하고 불평하면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자녀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었을 때 정말 감사하며 그것을 잘 사용해서 자신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주며 산다면 준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얼마나 더 주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맨 날 받기는 받는데 감사할 줄도 모르고 자꾸만 더 달라고만 하고 도리어 적게 준다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준 것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다면 준 것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누가 그런 사람에게 더 주고 싶겠습니까? 아니 더 주기는커녕 주었던 것마저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눅19:24~26절 보십시오.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잘 활용할 줄 알며 그래서 자신도 남도 기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너무 좋아서 더 많은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감사하지도 않고 올바르게 활용할 줄도 모르면서 자꾸 불평이나 하고 더 달라기만 하는 사람은 준 것도 아까워 주었던 것도 도로 빼앗아 감사와 기쁨으로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이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주신 하나님, 게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때에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기쁨과 평강으로 채워주심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우리 사회가 더욱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능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자에는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감사하는 자는 세상을 이기고, 마귀사탄을 이기고 대적자들을 이기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감사가 뭡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아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과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어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찌 능력있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대하20:21절을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이 말씀은 여호사밧 왕때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족속이 연합군을 이루어 침공했을 때의 일로 이때에 여호사밧은 성가대를 앞세워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적국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며 자멸해 버리고 이스라엘은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전리품만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까? 찬송하며 감사할 때, 감사하며 찬송할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라도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을 믿으며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고 감사하며 찬양할 때 어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해결하지 못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섭리와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이후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약하고 부족한 것들과 모든 도전과 유혹과 모든 어둠의 권세와 기타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은총을 고백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심으로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며 더욱 많은 은총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물질적으로도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영혼의 복도 주시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시고 그러면 육신도 더욱 건강해 지고, 더불어 물질의 복까지도 주십니다. 그래서 감사하면 할수록 자꾸만 감사한 일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기뻐하는 하는 사람에게 기쁜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불평 불만하는 사람에게는 자꾸만 불평 불만할 일이 생깁니다. 원망하면 자꾸 원망할 일이 생깁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기고, 투덜거리며 투덜거릴 일이 생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도 한번 두번 안오면 자꾸 교회에 못 올 일이 생깁니다. 마귀사탄이 자꾸만 이래서 못가고 저래서 못가고 하면서 가지 못할 일만 보이게 만듭니다. 교회에 오려고 하면 꼭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 못 올 일이 생긴 게 아니라 얼마든지 교회에 올수 있는 상황인데 내가 교회에 가지 못할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에 열심히 오면 자꾸만 교회 갈 일이 생깁니다. 이래서 가야 되고, 저래서 가야 되고 그러면서 교회에 계속 가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도 그렇습니다. 십일조헌금 감사헌금 한번 두번 안하다보면 자꾸만 헌금을 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래서 할 수 없고, 저래서 할 수 없고... 그런데 실은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아 내가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점령을 앞두고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가서 똑같은 장소를 보고 왔는데 10명은 거기 들어갈 수 없는 상황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못 들어가고 저래서 못 들어가고...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갈 조건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가고..... 그래서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열명의 정탐꾼과 그들에게 동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동안 실컷 고생만하다가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간다며 들어갈 조건만 헤아렸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꾸 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자꾸 감사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자꾸 사랑해야 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교회에 올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헌금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사랑하고 주고 드리며 자꾸 복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자꾸 은혜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더욱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왜요? 그게 믿음이니까요. 그게 하나님께 대한 신뢰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신뢰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는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9절,10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그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본래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주셨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니까,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네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찰 것이다.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칠 것이다. 농사가 잘되고, 곡식이 풍성하고, 장사가 잘되고, 직장에서 인정받게 되고 그래서 물질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면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릴 줄 아는 인생에게 어찌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늘 감사하며 사는 인생에게 어찌 복이 찾아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죠. 부모님께 감사하죠. 이웃에게 감사하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대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성실하게 일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복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 아니 지금까지 살아 숨쉬는 동안 모든 은혜로 채워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감사한다면 내게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축복거리를 하늘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올림으로 여러분의 삶에 더욱 은혜가 쌓이고 기쁨이 쌓이고 축복이 쌓여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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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감사충만한 인생

말씀 : 대상29:10~17

1.감사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미국의 유명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이 분은 1954년에 미시시피 주의 어느 시골에서 사생아로 태어나서 외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손을 전전하며 상처투성이로 자랐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9살 때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역시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14세에 아이를 출산했는데 아이는 2주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그 충격으로 가출하여 마약을 복용하며 한동안 지옥같은 삶을 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고통 속에서도 끝내 주저앉지 않고 다시금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성경을 읽으며 위로를 받고 희망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학교에 들어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며 책을 많이 읽는지 선생님이 더 좋은 학교의 장학생으로 추천해 주어서 좀 더 좋은 학교에서 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열심히 성경을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을 나오고 박사과정을 마치고 1983년에 시카고에서 시청률이 제일 낮은 에이엠 시카고(AM Chicago)라는 토크쇼의 진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 프로를 맡은 지 한 달 만에 이 프로그램이 시카고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되었고 그러자 이 토크쇼를 아예 ‘오프라 윈프리 쇼’로 바뀌어 전국적으로 방영되자 미국 전역에서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이 되어 전 세계 140여개 나라로 배급이 됨으로 세계적인 토크쇼가 되었습니다.

이 후로 그녀는 미국 뿐 아니라 세계적인 명사가 되어 1985년 미국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조연상, 2004년 유엔이 주는 올해의 세계지도자상, 2005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명사 100人 중 최고의 명사, 2010년 케네디센터 평생공로상, 2012년 아카데미 시상식 평생공로상, 2013년 포브스 지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명인사 100인 중의 한 사람이 되는 등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명사 중 한명이 되었고 그러 사이에 재산도 불어나 7억 달러가 넘는 억만장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불우한 처지를 이기고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습니까? 세가지 정도를 볼 수 있습니다. 우선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녀는 절망 중에서도 성경을 읽으며 위로를 받고 희망을 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공부입니다. 그는 그 서러운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를 악물고 공부했던 것입니다. 남보다 몇 배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감사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몇 년동안 방황하긴 했지만 다시 시작하며 감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수치스럽게 하던 모든 기억들을 지워버리고 그래도 그런 가운데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미움과 원망과 절망이 점점 사라지고 열심히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녀가 계속해서 과거의 상처와 아픔과 미움 속에 빠져 있었더라면 그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점점 더 깊은 절망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로 방황을 바꾸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감사의 습관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그녀는 그 바쁜 일과 중에서도 매일 하루 일과를 마치고나면 감사한 일 다섯가지를 적으며 감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음에도 그녀의 감사의 조건은 그렇게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적어 놓은 감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①오늘도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②오늘은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③오늘 점심때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④오늘 얄미운 짓을 한 동료가 있었는데 잘 참고 화내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⑤오늘 책을 한권 읽었는데 너무 좋은 책을 써준 작가에게 감사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생각할 것은 감사 거리는 그렇게 먼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감사거리는 항상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것들이 감사거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냥 당연히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것들이 실상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오늘 하루 살아 숨 쉴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 아무 걱정 없이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 하루 일과를 마치고 편히 누워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누군가 함께 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잠을 자며 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길을 가다가 국수 한 그릇 사먹을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목마를 때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다는 게 정말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렇게 마음껏 숨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더군다나 오늘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껏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더 감사한 일입니까? 영원한 천국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더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은 바 은혜는 죽을 때까지 말해도 다 못할 만큼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살전 5: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성도와 이웃과 교회와 국가와 회사와 동료와 공무원과 농사짓는 분과 장사하시는 분과 여하튼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고, 모든 환경에 감사하고, 밥 한 그릇에 감사하고, 냉수 한 모금에 감사하고, 숨한번 쉬면서 감사하고, 따뜻한 잠자리에 감사하고, 일어날 때 감사하고 그저 앉아도 감사 서서도 감사 집에서도 감사 나가서도 감사 우리 곁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이 감사거리를 생각하며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감사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런 감사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2.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료로 주셔서 마음껏 누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지을 예물 드리기를 마친 다음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장면 중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앞 부분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예물들이 나타나 있는데 그 중 3,4절에 보면 다윗은 개인의 사유의 금 3천달란트와 순은 7천달란트를 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금 3천달란트와 은 7천 달란트는 지금 돈으로 따지면 몇십조원 되는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엄청난 예물을 드리면서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덩이를 주셔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금덩이를 드리고 너무 너무 감사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드리면서 감사할 수 있었습니까? 좀 길지만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왕이 되어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어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고 하나님께서 주셨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그 동안 누린 것이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믿음과 마음을 주신 것이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이 고귀한 일에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하고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해서 영광과 찬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 중에서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짜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내 생명과 몸과 마음과 시간과 재능과 지혜와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삶의 터전들을 공짜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내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무료로 공급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윗은 그걸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누릴 수 있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지혜를 짜내고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뛰어 놀고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놀고 하는 그 모든 것 중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도 공짜로 그냥 주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조도 넘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 정말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자기 힘과 지혜로 된 것인양 여기며 살아가는 그래서 감사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몸, 내 생명, 내 시간, 내 재능, 내 능력, 내 지혜, 우리가 밟고 살아가는 땅, 숨쉬는 공기, 마시는 물, 따뜻한 태양, 쉴 수 있는 집, 먹는 밥,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온전한 신앙고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게 해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총과 능력과 기쁨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주님께 드리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면 우리는 마땅히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진정 감사함이 있다면 드림도 늘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이 엄청난 것들을 주셨는데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고, 이렇게 받은 바 은혜가 큰 줄을 알고 감사드린다면 어떻게 드리지 않고 배길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14절을 보겠습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나와 백성 즉 우리들 모두는 너무나 부족한 존재인데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까? 하면서 정말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지금 엄청난 예물 들을 드리면서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예물을 드리면서 그저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을 바쳤을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내 것을, 내가 노력하고 힘써서 벌은 것을 바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을 바쳤을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바쳤을 뿐이니 그 많은 것을 주셨으니 감사할 뿐이요, 그걸 그동안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할 뿐이요, 그걸 드릴 수 있는 믿음을 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면 정말로 기쁨으로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많은 것을 주셨는데 어찌 감사가 없겠으며, 그런 감사가 있을 때 어찌 기쁨으로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우리가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찌 기쁨으로 드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기쁨으로 자녀에게 줍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감사와 기쁨으로 줍니까? 그렇다면 주님에게는 어떻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이십니다. 천지만물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을 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마저도 내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의 그 끔찍한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얼마나 더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고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사랑한다면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 주는 기쁨을 맛보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랑한다며 줄 수 밖에 없고 주면서 너무너무 기쁘고 행복하게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얼마나 기쁨으로 줍니까? 주면서 얼마나 행복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기쁨으로 줍니까? 주면서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얼마나 기쁨으로 드리겠으며, 드리면서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받는 게 행복합니까? 주는 게 행복합니까? 물론 받는 것도 행복합니다. 그러나 주는 것이 더 행복하고 몇 배 더 기쁩니다. 줄 수 있을 때 자신이 자랑스러워집니다. 뿌듯해집니다. 자부심과 긍지가 생깁니다. 자신이 자신을 보아도 웬지 흐뭇해집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기쁘고 행복하게 합니다. 더구나 주님께 드리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주님의 역사를 이룹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너무나 귀한 도구가 됩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고 귀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일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더구나 우리 주님은 당신의 그 고귀한 생명까지 바쳐서 우리에게 영생복락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정말로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여러분 자신도 정말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정말 감사하면 정직하게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감사와 기쁨으로 드려야 하는데 드릴 때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정직하게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7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다윗은 지금 엄청난 예물을 드리면서 정직한 마음으로 즐거이 드렸다고 했습니다. 정직하게 드린다는 것은 원문의 뜻은 충만하게, 완전하게, 마음의 중심을 다해... 이런 뜻입니다. 즉 조금치의 거짓이나 불성실이 없이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온전한 마음으로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정말 마음과 정성과 믿음을 담아서 드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 생각이나 감정이나 환경이나 상황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고 진정 하나님께서 우리 내면에 들려주시는 그 음성을 따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진정한 정직이란 내 생각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짓이나 위선이나 변명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내 생각 처지 환경의 모든 주변적인 것들을 벗어던지고 다만 나와 하나님 사이에 일대일로 대면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고 그 뜻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 속에 들려주시고 요구하시고 권면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가감없이 솔직하게 내 생각이나 환경에 영향 받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내 생각을 첨부하거나 상황과 환경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첨부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게 되고 그러면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잘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꾸 하나님의 말씀에 세상의 다른 것들을 섞어서 혼잡하게 만듭니다. 특히 하나님께 드리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런 왜곡과 혼잡이 심각합니다. 자기 편의대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받을 것은 크게 생각하고, 드릴 것은 적게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할 일은 내 믿음과 형편보다 더 많이 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할 일은 내 믿음과 형편보다 훨씬 작게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반대로 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은 적게 생각하고 감사할 것은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받아야 할 것은 적게 생각하고 드려야 할 것은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이 넉넉해지고, 인생이 풍요로워 지고, 진정 자유하게 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의 신앙의 고백이며, 그럴 때 그 인생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랑스러운 인생이 되며 잘했다 칭찬받으며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주셔서 누리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기쁜 마음으로 드릴 줄 아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인이요 부요한 인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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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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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영성(시100:1-5)  


제 목 : 감사의 영성

말 씀 : 시100:1~5

1.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현대를 ‘더(more)의 시대’라고 합니다. 더 많은 돈,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많은 지식, 더 날씬한 몸매, 더 젊고 예쁜 얼굴 등등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더, 더, 더’ 타령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더 더 더’가 언제 나오는 소리인지 아십니까? 음주 측정할 때 하는 소리입니다. 술 먹은 사람은 어찌하든지 음주측정기를 안 불려고 하지요. 어쩔 수 없이 불때도 알콜 농도가 적게 나오게 하려고 살짝 불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경찰 아저씨가 더 불라고 더 더 더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더 더 더와 음주측정 할 때 더 더 더는 좀 다른 차원의 더더더이긴 합니다만 여하튼 ‘더, 더, 더’하는 소리는 결코 좋은 소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건 뭔가 모자란다는 뜻이거든요. 뭔가 모자라니까 자꾸 ‘더 더 더’하게 되고 그렇게 자꾸 더더더하다보면 결국 감사도 기쁨도 은혜도 누리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불평과 갈등과 싸움을 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사람들이 자꾸 더 더 더 하며 살아가니까 많은 것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쌀밥만 먹을 수 있어도, 아니 때로는 죽이라도 한 그릇 먹을 수 있으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멋지고 근사한 곳에서 진수성찬을 먹으면서도 감사 할 줄을 잘 모릅니다. 오히려 맛이 있네 없네 하면서 타박을 하기가 일쑤입니다. 또 옛날에는 자전거만 타고 다녀도 얼마나 근사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우리 집 앞 신작로로 한 멋쟁이 신사 아저씨가 삐까뻔쩍 빛나는 신사용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곤 했는데 저는 그게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좋은 자가용을 타고 다녀도 감사가 없고 더 좋은 것을 바라봅니다. 옛날에는 초가삼간에 살아도 먹을 것만 있으면 행복했었는데 지금은 30평 40평 50평 호화주택에 살면서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바보 같은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런 바보같은 인생이 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적은 것을 가지고도 주어진 것에 행복할 줄 아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자꾸만 더 더 더 하는 인생은 아무리 많은 것을 주어도 늘 불만 불평 속에서 자신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게 만들고 하나님 마음도 아프게 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딤전6: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보십시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받은 바 은혜가 얼마나 많은 지를 되새겨보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데 오늘 말씀을 함께 되새겨보며 저와 여러분은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할 줄 아는 삶을 통하여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만들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드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교회 안에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지만 뭐니뭐니해도 우리가 지금 교회 안에 앉아 있다는 것만큼 감사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 안에 앉아 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러분, 보십시오. 감사함으로 그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문이란 물론 성전 문입니다. 즉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으로 들어갈 때에 큰 감사와 기쁨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 교회 문을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찬양하며 이 땅에 사는 동안에서 주님의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는 것, 이보다 더 감사하고 기쁘고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교회가 세워졌어도 우리가 마음이 완고하고 강퍅해서 복음을 거부했다라면 어쩔 뻔 했습니까? 그러면 영원한 고통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었던 비참한 인생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을 알고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하고 영광돌리고 찬양해야 할 일입니까?

제가 제법 오래 전에 대구의 한 큰 마트 같은데 들어갔다가 물건을 좀 사 가지고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회원권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없다고 하니까 여기는 회원권이 있어야 물건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야, 이 놈들아 물건만 팔면 되지 무슨 얼어 죽을 회원권이냐? 회원권 없으면 내 돈 주고 물건도 못 사냐?’ 그러고 그냥 놔 둬 버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좀 창피하기는 했습니다.

즉 세상에서도 뭔가 그럴듯한 곳에 들어가려면 출입증이나 회원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와대나 안기부나 기타 중요한 공공 기관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은 웬만한 큰 회사에도 들어가려면 출입증이 있어야 되고, 무슨 큰 아파트에도 들어가려면 무슨 카드 같은 게 있어야 들어가고, 골프장이나 기타 그럴듯한 곳에 다니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출입증이 있는 것입니다. 영광의 나라의 시민권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사실 따지고 보면 별 것도 아닌데 뭐 좀 잘난 곳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든지 무슨 시험을 치든지 뭐 이것 저것 따져 묻고 난린데 하나님께서는 그저 우리 믿음 하나 보시고 천국 출입증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시민권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세상의 무슨 출입증, 허가증, 회원권 그까짓 별거 아닙니다. 그런 것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뭐 대단한 특권이라고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길지 모르지만 그래서 뭐 얼마나 행복하고 기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까짓것 하루 아침에 다 다 날아갈 것들인데.. 그것만 믿고 까뿔다가는 영원한 진노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나 천국 시민권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평안과 소망을 보장합니다. 그 어떤 어둠의 세력으로부터도 완전히 보호해 줍니다. 그야말로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초특급 출입증, 허가증,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들어와 앉아서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고 할 수 있는 이 일이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하고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늘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우리를 길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선 감사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이고, 다음에 감사할 것은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 뿐 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고 하나님은 신, 전능자라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만이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참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예비해 주시고 인도해 주셔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기르시는 주인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양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베풀어 주시는 은총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께 지으시지 않고는 우주만물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때를 따라 채워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존재하고 나아가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심으로 존재가 가능한 것입니다. 먹고 입고 잠자고 쉬고 활동하고 하는 모든 행위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좋은 옷에 좋은 집에 좋은 차에 좋은 것을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물론 우리도 힘써서 일 했지만 우리가 힘써 일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생명도 지혜도 능력도 없습니다. 숨조차 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태양과 물을 주시지 않으면 도로 아미타불입니다. 땅이 없으면 헛일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까마귀가 어미가 늙으면 다 큰 새끼들이 먹이를 먹고 돌아와서는 도로 뱉어서 어미에게 먹여 준다는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까마귀는 어미새가 늙어 힘이 없어 스스로 먹이를 구할 수 없게 되면 다 자란 어른이 된 새끼 새가 먹이를 잡어 먹고 와서 도로 뱉어서 어미의 입에 넣어 준다고 합니다. 이게 반포(돌이킬反, 먹일哺)입니다. 먹었던 것을 도로 뱉어서 먹여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새끼가 먹었던 것을 도로 뱉어 어미 새에게 먹여줄 만큼 지극 정성으로 부모님을 섬기는 반포지효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한갓 미물에 불과한 까마귀도 이렇듯 부모를 섬길 줄 아는데 인간이 부모님을 섬길 줄 모른다면 미물인 까마귀만도 못한 인간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시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성장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온갖 사랑과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으신 부모님도 당연히 정성으로 섬겨야 하지만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우리를 직접 창조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생활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는 얼마나 더 그래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사실 육신의 부모는 어느 정도 성장하면 우리 곁에 계시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육신의 부모는 우리가 다 성장할 때까지만 키워주시면 그것으로 의무를 다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장을 하고 백살 천살 만살이 되어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은혜가 없이는 단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육신의 부모에게 감사하며 섬기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이라면 모든 인류와 우주만물의 아버지가 되시는, 우리가 살아 숨쉬는 모든 동안에 아니 지금 여기서 살아 있는 동안만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는 얼마나 더 감사하며 극진히 섬겨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론 육신의 부모님께도 감사드리며 잘 섬기시되 특별히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우리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주시고 섭리하심으로 이와같이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진정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더욱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음을 감사하고, 동시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그러나 감사할 것이 그 뿐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사람에게도 감사하고, 동물에게도 고마워해야 하고, 식물에게도 고마워해야 하고 그밖에 땅, 태양, 물 등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 고마워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모두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들입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입니까? 가족이 없으면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아니 가족이 없으면 내가 있지도 못하지요. 또 이웃도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입니까? 내 주변에 이웃이 하나도 없으면 얼마나 적막하겠으며,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비록 혹시 사람들 보기에 번듯하지 못하다해도 직장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우리가 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밥은 얼마나 고맙습니까? 마시는 물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어디 가다가 음식 한 그릇 사먹을 때 그 식당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좀 그렇긴 합니다만 심지어 화장실에 앉아 마음 놓고 볼일을 볼 수 있는 것도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와같이 감사의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의 습관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감사의 습관은 자신도 기쁘게 하고 남도 기쁘게 합니다. 그래서 건강과 행복도 가져다 줍니다.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함으로 힘차게 능동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불평의 습관은 자신도 남도 어둡게 만듭니다. 부정과 어둠의 에너지를 방출하여 자신도 힘들게 하고 남도 힘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살전5:16~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보십시오. 항상 기뻐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유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은총 속에 살고 있는지 다시 한번 기억하며 정말 감사의 영성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되어 이와 같이 마음껏 주님의 몸된 교회를 출입하며 예배드리며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은총을 누리고 있음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되새기며 우리를 길러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과 동료와 친구와 여러분 곁의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주변의 모든 물건들에게까지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심령이 그야말로 감사로 넘쳐날 때에 기쁨과 평안과 행복이 가득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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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설교 /  감사의 축복(잠3:9,10) 


말씀 : 잠3:9,10

제목 : 감사의 축복

여러분,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아십니까?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세계적으로 공신력을 가지고 있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전 세계 나라를 대상으로 치안상태를 조사했는데 우리 대한민국이 100만점에 83.1을 기록하여 1등이고 그 다음에 싱가폴, 카타르, 일본 등이고 서유럽이나 미국은 6,70점대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나 남미 지역은 2,30점대가 수두룩하고 가장 치안이 불안한 나라는 베네수엘라인데 15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83점으로 당당히 1등입니다. 한마디로 가장 안전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범죄율은 가장 낮고 범인 검거율은 1위라고 합니다. 그래서 밤 늦은 시간에도 밤거리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 술에 취해 길바닥에 누워 있어도 안전한 나라, 식당이나 편의점이나 심지어 술집에서도 휴대폰이나 카메라를 두고 나와도 누가 가져가지 않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도 제법 오래전에 제 스마트폰을 식당에 두고 왔는데 사모님에게 전화가 왔더라고요. 폰 두고 가지 않았느냐고.... 제 폰에 저장 되어 있는 아내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어림없다는 것입니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 누워 있으면 어떻게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뭐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술에 취해 밤거리를 혼자 돌아다니거나 길거리에 누워있는 것을 보며 저 사람 저러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저라나 싶어서 깜짝 놀란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여러분, 우리나라 좋은 나라입니다. 치안상태만 좋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자유와 평화가 보장 되어 있습니까? 얼마나 풍요로습니까? 올해도 농사가 대풍이어서 올해 쌀생산량이 약434만톤으로 최근 6년간 최고의 풍작이라는 것입니다. 해마다 풍년이라 쌀이 남아돌아 정부 창고에 쌓여 있는 쌀이 140만톤이나 되어 처치 곤란이라는 것입니다. 또 요즘에는 우유가 남아돌아 난리입니다. 그래서 젖소 수를 줄이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젖소를 도축하고 그래도 안되어 분유를 만들어 처리하는데 분유 재고가 쌓여 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입니까? 어느 나라를 먹을 게 없어 난린데 우리는 남아돌아서 난리인 것입니다.

뭐 그밖에 감사할 것을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60년대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2만8천불 약300배나 부자가 되었습니다. GDP 그러니까 국민총생산량이 세계 11위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마음껏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완전히 안정되어 있고 풍요롭고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남보다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다해도, 혹 힘든 일이 있다해도 그래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있고 게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인데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그런 절기입니다. 비록 때때로 어렵고 힘든 일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귀하고 복된 삶의 터전을 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그래서 이렇게 자유와 평화와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려드리고 우리도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구원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렇게 일부러 추수감사주일을 제정해 두시고 이를 지키며 살라고 하신 이유는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구원의 기쁨과 능력을 확실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시50:23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일단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주시고, 예수님은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십자가의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으로 저 흉악한 마귀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을 생각할 때에 어찌 기쁘지 아니하며 어찌 감사 찬양하지 않으며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당연히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그렇게 구원의 은총과 감격가운데 살다보면 당연히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에 대한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게 됩니다. 또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볼 때에 세상의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됩니다. 무슨 원망 불평 미움 질투 시기 따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평안과 소망과 기쁨 속에 살게 됩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 더욱 믿음과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능력으로 채워주심으로 그 삶에 더욱 생동감이 넘치고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돈과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과 욕망과 시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절망과 한탄 따위는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믿음과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으로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감사가 넘쳐나고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자로서 이 땅에서의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6:11절에서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감사하면 할수록 점점 은혜가 넘치고, 감사하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면 할수록 은혜는 점점 멀어집니다. 아니 원망하고 불평하면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자녀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었을 때 정말 감사하며 그것을 잘 사용해서 자신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주며 산다면 준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얼마나 더 주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맨 날 받기는 받는데 감사할 줄도 모르고 자꾸만 더 달라고만 하고 도리어 적게 준다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준 것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다면 준 것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누가 그런 사람에게 더 주고 싶겠습니까? 아니 더 주기는커녕 주었던 것마저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눅19:24~26절 보십시오.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잘 활용할 줄 알며 그래서 자신도 남도 기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너무 좋아서 더 많은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감사하지도 않고 올바르게 활용할 줄도 모르면서 자꾸 불평이나 하고 더 달라기만 하는 사람은 준 것도 아까워 주었던 것도 도로 빼앗아 감사와 기쁨으로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이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주신 하나님, 게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때에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기쁨과 평강으로 채워주심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우리 사회가 더욱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능력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자에는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감사하는 자는 세상을 이기고, 마귀사탄을 이기고 대적자들을 이기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감사가 뭡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아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과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어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찌 능력있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대하20:21절을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이 말씀은 여호사밧 왕때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족속이 연합군을 이루어 침공했을 때의 일로 이때에 여호사밧은 성가대를 앞세워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적국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며 자멸해 버리고 이스라엘은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전리품만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까? 찬송하며 감사할 때, 감사하며 찬송할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라도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을 믿으며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고 감사하며 찬양할 때 어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해결하지 못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섭리와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이후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약하고 부족한 것들과 모든 도전과 유혹과 모든 어둠의 권세와 기타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은총을 고백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심으로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며 더욱 많은 은총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물질적으로도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영혼의 복도 주시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시고 그러면 육신도 더욱 건강해 지고, 더불어 물질의 복까지도 주십니다. 그래서 감사하면 할수록 자꾸만 감사한 일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기뻐하는 하는 사람에게 기쁜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불평 불만하는 사람에게는 자꾸만 불평 불만할 일이 생깁니다. 원망하면 자꾸 원망할 일이 생깁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기고, 투덜거리며 투덜거릴 일이 생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도 한번 두번 안오면 자꾸 교회에 못 올 일이 생깁니다. 마귀사탄이 자꾸만 이래서 못가고 저래서 못가고 하면서 가지 못할 일만 보이게 만듭니다. 교회에 오려고 하면 꼭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 못 올 일이 생긴 게 아니라 얼마든지 교회에 올수 있는 상황인데 내가 교회에 가지 못할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에 열심히 오면 자꾸만 교회 갈 일이 생깁니다. 이래서 가야 되고, 저래서 가야 되고 그러면서 교회에 계속 가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도 그렇습니다. 십일조헌금 감사헌금 한번 두번 안하다보면 자꾸만 헌금을 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래서 할 수 없고, 저래서 할 수 없고... 그런데 실은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아 내가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점령을 앞두고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가서 똑같은 장소를 보고 왔는데 10명은 거기 들어갈 수 없는 상황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못 들어가고 저래서 못 들어가고...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갈 조건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가고..... 그래서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열명의 정탐꾼과 그들에게 동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동안 실컷 고생만하다가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간다며 들어갈 조건만 헤아렸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꾸 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자꾸 감사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자꾸 사랑해야 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교회에 올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헌금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사랑하고 주고 드리며 자꾸 복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자꾸 은혜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더욱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왜요? 그게 믿음이니까요. 그게 하나님께 대한 신뢰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신뢰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는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9절,10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그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본래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주셨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니까,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네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찰 것이다.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칠 것이다. 농사가 잘되고, 곡식이 풍성하고, 장사가 잘되고, 직장에서 인정받게 되고 그래서 물질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면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릴 줄 아는 인생에게 어찌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늘 감사하며 사는 인생에게 어찌 복이 찾아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죠. 부모님께 감사하죠. 이웃에게 감사하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대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성실하게 일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복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 아니 지금까지 살아 숨쉬는 동안 모든 은혜로 채워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감사한다면 내게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축복거리를 하늘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올림으로 여러분의 삶에 더욱 은혜가 쌓이고 기쁨이 쌓이고 축복이 쌓여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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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감사하는 은혜  (데살로니가전서 5:18)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한해 동안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인간다운 삶은 영위하게 하시며,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은혜를 돌이켜보면서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이런 주일을 맞이하여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지 돌이켜보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합니다. 감사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건강지수와  행복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간의 행복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충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대의 마음 속에 감사하는 생각이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젓고 있는 사람이다. 부디 다른 공부보다도 먼저 감사하는 공부를 배우라." 그만큼 감사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인간의 근성은 감사에 인색합니다. 심지어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두발 달린 동물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쉽게 동감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요즘같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부모들은 자식이 원하는 것이라면 대부분 거절하지 아니하고 다 들어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키운 자식일수록 나중에 부모님의 은혜를 망각한 채 살아갑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말세가 가까워 질수록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어진다고 예언하신바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에 보면, 말세에 나타나는 삭막한 인간성 중 하나가 감사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50년 전, 100년 전 그 혹독한 가난가운데 힘들게 살았던 우리 조상들에 비해 훨씬 감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점점 감사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교훈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범사에 감사할 때, 영과 육이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범사에'라는 말은 헬라어로 '엔 판티'(en panti)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영어 성경에서는 크게 3가지로 번역합니다. 곧 '어떤 형편에서든지', '모든 일에', 마지막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사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다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범사에'라는 말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 보면 3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에도 감사할 뿐 아니라 안 좋은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감사할 뿐 아니라 큰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인생의 양지에 있을 때도 감사할 뿐 아니라 음지에 있을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하나도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의 참뜻입니다.

실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부담감을 줍니다. 어떻게 이 말씀을 실천하라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감사의 내용을 알면 그 고민은 한층 더 무거워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감사는 막연히 느끼는 고마운 감정이 아닙니다. "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소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116:2-1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감사에는 적어도 3가지 요소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첫째로 감사에는 마음이 담겨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나님께서는 이런 간절한 마음이 담긴 감사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보답하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 드릴 수 있을까? 이런 간절한 마음을 담는 것이 감사요.

둘째로 궁극적인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물론 고마운 사람에게 감사할 수 도 있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고 그 앞에 경배하는 것을 일컬어서 감사라고 합니다.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제사장을 찾아가는 도중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9명은 "우와! 내 병이 나았네. 아이고, 고마워라." 하며 고맙다는 느낌을 가졌지만 그 이상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명, 바로 사마리아 사람은 병이 낫자,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가던 길을 돌이켜 예수님에게로 다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앞에 넙죽 엎드려 주님을 경배하면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셋째로 진정한 감사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예물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소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소원이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약속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정말 응답해주시면 너무나 감사해서 자기가 서원한 것을 그대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던 중 정말로 아들을 얻자 그 은혜에 감사하여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평생 기도한 것을 다 받고 나니 너무나 감사해서 말년에는 자신이 쌓아 놓았던 모든 재산을 성전을 짓는데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할 때 그 감사에는 마음이 담겨야 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 감사의 예물을 들고 나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고맙다고 느끼는 것으로 머물면 안되고, 감사하다는 말로 끝나서도 안됩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로 드려지는 감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범사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이처럼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가지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첫째는 좋은 일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악해도 좋은 일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무더운 여름에 소낙비를 주시듯 가끔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주십니다.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이 엄청난 수고요, 희생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좋은 일을 자주 맛보곤 합니다. 평생 부부로서 사는 것이 굉장한 희생과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좋은 일을 주십니다. 한 생을 살면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각자에게 좋은 일이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경험하게 된 좋은 일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지 못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감사헌금을 잘하시는 것에 늘 하나님 앞에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헌금을 보면 감사에 대한 성도들의 정성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몇 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입니다. 그런데 몇 백 명 모이는 교회에 비하면 감사헌금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감사할만한 좋은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좋은 일 하나하나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뜨거운 심정으로 손에 헌금을 들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좋은 일이라고 자연스럽게 감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긍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마땅히 감사해야 될 좋은 일을 감사 없이 넘겨버릴 때가 많이 있음을 인정하고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는 나쁜 일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란을 너희에게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살전3:4) 바울은 전도하면서 이제 예수를 믿게 되면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미리 예언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 믿고 나니 엄청난 환란과 핍박이 그들에게 덮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핍박이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다 포기해야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중국에 가보면 정부와 결탁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삼자 교회는 버젓하게 교회 문을 열어놓고 예배를 드리지만, 공산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을 들고 투쟁한 지하교회들은 지금도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공 셍리앙(Gong Shengliang) 목사님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종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신도만 해도 2, 3만 명에 이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구원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면서 집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자 중국 정부에서 핍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핍박의 구실을 만들고자 그 교회에서 예수 잘 믿고 인물이 있는 여 집사 몇 명을 끌고 가, 공 목사가 성폭행한 사실을 인정하도록 고문을 해서 허위자백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공 목사를 잡아 들여 재판을 치루고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세계인권위원회는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고 결국 사형선고에서 종신형으로 감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핍박이란 예수 한번 바로 믿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형편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핍박 받는 것도 감사하고, 매 맞는 것도 감사하고, 가족들이 끌려가서 죽는 것도 감사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것도 감사하고, 굶는 것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쁜 일을 많이 보고 마음에 원치 않는 일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핍박을 받는 사람에 비하면 가벼운 것입니다. 핍박 받는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다면,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언짢은 일에도, 손해 보는 일에도, 내 몸이 망가지게 되더라도, 사랑하는 이가 일찍 죽는 것을 보고도 감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기 쉬운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숨쉬고 있는 공기로부터 시작해서 마시는 물,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내 몸의 모든 기능, 하나님이 주신 내 자녀, 일용할 양식, 어느 것 하나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날마다 풍성하게 주시니까 우리가 소중한 것을 받고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가 쉽습니다. 당연하게 여길 때는 감사가 따라오지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 문명은 무엇이든지 당연하게 여기도록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왔다는 빚진 감정을 갖지 못하도록 합니다. 1세기 전만 해도 사람들에겐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빚진 의식 또는 의존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고 모든 것이 풍족해지면서 서구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은 모든 나라들이 이제는 빚진 감정 대신 권리 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의존 의식보다도 자율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나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인기 있는 만화 작가 바트 심슨(Bart Simpson)이 한번은 어느 레스토랑에서 식사 기도를 부탁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이 모든 음식을 위해서 친히 값을 다 지불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감사합니다." 얼마나 방자하고, 거만하고, 교만한 태도입니까? 내가 누리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내 능력으로 얻었는데, 무슨 감사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범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서 받았기 때문에 일일이 감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할렐루야이다." 입니다. 그 어느 것을 보아도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너무 풍족한 세상을 살아서 많이 오염되었습니다. 그래서 빚진 의식보다 권리 의식에 은근히 더 오염된 것 같습니다. 70년 전만해도 우리는 식민지에서 겨우 벗어난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6·25전쟁이라는 끔찍한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런 나라가 불과 반세기도 되기 전에 OECD에 가입할 정도로 세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보다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냉랭한 마음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를 보면 60억 인구 가운데서 1/10에 해당하는 6억 인구의 하루 생활비가 1달러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기가 없는 사람들의 수가 20억이 넘습니다. 식수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아무데서나 퍼 마시는 사람들의 수는 10억이 넘습니다. 인간다운 삶은커녕 이렇게 끔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한반도에서 우리가 이만큼 먹고 마시며 여유를 가지고 살수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히 여겨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한번 종합병원에 가서 진료과목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의사가 다루고 있는 병이 몇 가지나 되는지 살펴 보십시오. 병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병에 걸리지 않고 이렇게 당당하게 걸어 다니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정범진이라는 사람은 교통사고로 평생을 전신마비로 살아야 되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각고의 노력 끝에 미국 브루클린 검찰청의 부장검사까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단 하루만 걸을 수 있다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앞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는 것이다." 그는 전신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는데 2시간동안 사투를 벌일 때도 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절대로 당연시 하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체스터튼(G. K. Chesterton)이라는 사람의 말에 공감합니다. "나의 주된 인생관은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연습하는 것이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려면 이와 같은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좋은 일에도 감사해야 하지만 나쁜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누리는 당연한 것들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허황한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것은 아무런 근거 없이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인 줄 뻔히 아시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반드시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은혜까지 준비하십니다.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은혜의 산물이지,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받아야 가능한 것이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뛰어넘어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당하는 모든 일을 앞에 놓고 "할렐루야" 할 수 있는 은혜가 내 안에서 치밀어 오를 때 가능한 것이지, 내가 노력하고 결심하고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읽어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핍박 중에서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나옵니다. 바로 구원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난후 이렇게 변했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 말하니."(살전1:9-10)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과거에 우상숭배하던 것을 다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배후에는 이런 구원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힘입으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자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시며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세상에 있을 동안 너희들이 어디에 가든지 내가 동행해주마. 불 가운데로 지나갈 때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하마.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하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내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너를 안위하리라. 원수들 앞에서 너희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높여주리라. 좋은 일이 생기든, 나쁜 일이 생기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마. 그리고 너희들이 어려울 때마다 나에게 기도하여라. 그러면 내가 언제든지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마. 환란 중에 내가 너희를 건져주리라. 악한 자가 와서 만지지도 못하도록 내가 너희를 보호해주리라."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가 되셔서 나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날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기만을 간절히 고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핍박을 받기에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그분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황홀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눈 앞에 그려보면서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장차 그 나라에서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이런 일 저런 일이 땅에서는 중요하게 보이는 일이지만, 하나님나라의 영광에 비추어 보면 잠깐 지나가는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난 3월에 6가족을 포함한 25명의 탈북자들이 북경에 있는 스페인 대사관에 몰려들어가 한국행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며칠 동안 그들은 엄청난 절망에 빠져있었고, 처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으니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사관 안에서 기다리면서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서 죽을지, 아니면 한국으로 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지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한국행이 결정되었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바로 그 때 그 사람들의 마음에 제일 먼저 찾아온 감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살았다. 이제는 한국으로 간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 동안 마룻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추위에 떨면서 자던 것도 감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대사관 직원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던 과거의 모든 일도 다 감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행기가 늦어져 며칠 더 기다려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도 오히려 감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살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으로 가게 되니까 모든 것이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한국이 아닌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가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으며 살기에 세상에서 좋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나쁜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하찮은 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샘 솟을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구원의 은혜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있으면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구원의 은혜를 충만하게 주시옵소서. 구원 받은 은혜에 취해서 살게 해주시옵소서. 내가 예수님 때문에 얼마나 큰 구원을 얻었는가를 알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때문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날마다 바라보면서 흥분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이런 구원의 은혜가 있으면 세상에서 겪는 어려운 일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일로는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의 은혜에 우리가 흠뻑 젖어 있을 때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시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를 향해서 명령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큰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는 하나님나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이 큰 구원의 은혜를 우리가 값없이 얻었기 때문에 이 은혜 안에서는 좋은 일도 감사하고 나쁜 일도 감사하고, 큰 일도 감사하고 작은 일도 감사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구원 받은 자의 행복과 기쁨을 다시 한번 회복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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