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설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
제목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
고린도후서 9:8-15
8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모든 일에 필요한 것을 언제나 다 가지고 모든 선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 모든 은혜를 베풀어 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9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후하게 나누어 주었으니, 그가 행한 의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10 씨 뿌리는 자에게 씨를 주시고, 먹을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씨앗을 주시고 그것을 성장시키셔서 여러분이 거둘 의의 열매가 많아지게 하실 것입니다.
11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부유하여 넉넉하게 헌금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친 헌금을 우리가 전달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12 여러분이 행한 이러한 봉사는 성도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웠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13 여러분이 낸 구제 헌금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한다는 것과 여러분이 그들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을 너그럽게 도와 주었다는 증거이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14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이신 놀라운 은혜로 인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15 말로 다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쉬운 성경)
오늘은 추수감사절 주일입니다. 우리 옆에 분들과 “Happy thanksgiving!” 하고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감사의 마음은 금방 낡아 버린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감사의 마음은 쉽게 잊혀집니다. 감사의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은 늘 찾아 옵니다. 쉽게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감사에는 세가지 차원의 감사가 있습니다. 첫 번째 감사는 조건적인 감사입니다. 제일 낮은 차원의 감사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조건적인 감사의 차원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감사를 하는 사람들은 감사의 조건이 있어야 감사합니다. 그러나, 감사의 조건이 생각나지 않거나 감사의 조건이 없다고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감사는 역경 중에서 하는 감사입니다. 조건적인 감사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감사입니다. 1620년에 102명의 사람들이 Mayflower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서 지금 우리가 사는 메싸추세츠 남쪽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청교도들(Puritans)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박해를 받아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던 중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102명의 사람들이 모두 청교도들은 아니었습니다. 또 이 사람들의 개척정신을 존중하여 필그림 파더스 (The Pilgrim Father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620년 11월 9일, 지금의 케이프 카드 (Cape Cod)에 도착한 이들은, 주변 정세를 살피다가 정박을 하지 않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지금의 플리머스 (Plymouth)에 정박을 합니다. 그 때가 162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다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신대륙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절만 가량이 죽습니다. 그러나, 무덤을 만들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적이 알고 기습을 해 올까봐 무덤 대신 그 자리에 옥수수 씨앗을 심습니다. 정말 운 좋게도 이들은 착한 인디언 부족이었던 왬파그노 (Wampagnoag)를 만나게 되어 농사 짓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지금 플리머스에 가면 “플리머스 락 (Plymouth Rock)” 건너편 언덕에 왬파그노 인디언 추장 마싸소이트 쎄이첨 (Massasoit Sachem, 1581-1661, sachem은 "chief"라는 뜻)의 동상이 대서양을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필그림 파더들이 드렸던 감사는 역경 중에 드린 감사였습니다. 기후가 맞지 않고,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이 땅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땅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 집보다 교회를 먼저 지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짓고, 그 다음에야 자기들이 살 집을 지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decrees).” (시편 119:71) 이 시편의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이 시인은 무슨 생각에서 고난이 자기 인생에 약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나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주목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이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 사람에게 고난이 없었고, 모든 일이 순조로웠더라면 그 때도 “pay attention to God’s word”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pay attention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성공을 자기가 이룬 것처럼 교만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 번째 감사는 존재론적인 (ontological) 감사인데, 가장 성숙한 감사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고백했던 다윗의 고백은 존재론적인 감사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무슨 감사의 이유가 딱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딱히 무슨 역경 중에서 드린 감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 속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10에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라고 고백했던 것도 존재론적인 감사였습니다. 단순히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우연히 송명희 시인이 쓴 감사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참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참 아이러닉하지 않습니까? 송명희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제가 송명희가 쓴 글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니 말입니다. 마치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이 감옥 안에서 바울이 써 보낸 “항상 기뻐하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빌립보서 4:4, 6)” 이 말씀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는 것과 같은 아이러니라고 하겠습니다.
그 글의 제목은 “감사를 잃게 하는 문화”였습니다. “산소 호흡기 안 달고도 숨쉬며 의식이 있고 살아 있으니 감사해야지! 힘겹고 고된 삶을 살면서 날마다 다짐하는 나의 생각입니다. 만 6년동안 투병생활을 하다 보니 무엇을 보아도 즐겁지 않고 뭘 먹어도 맛을 모릅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나는 감사할 수가 있을까요? 사람들 앞에선 웃고 있지만 항상 제 눈가엔 눈물이 묻어납니다. 있어야 감사하고 무언가 받아야 감사하는 이 시대, 우리에게서 감사를 빼앗아가는 문화적 원인을 생각해봅니다. 현란한 불빛에선 한 자루 촛불이 초라하듯 예쁘고 잘 생긴 외모의 연예인들만 보면 자신의 건강은 안 보이고, 멋진 집과 자동차만 보면 자신이 초라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세상 속에서 감사보다 범죄가 늘고 있는 뉴스를 보며 탄식합니다. 예쁘고 잘 생긴 것만 추구하는 세상 문화가 교회 안에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신앙 생활이나 진리 탐구는 사라져가고, 가볍고 예쁜 것을 선호하는 시대라서 예수님이 오셔도 맞출 수 없는 까다롭고 개인주의적인 교회 문화로 변해 가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모든 것이 다 있다고 감사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시지만 감사하는 본인에게도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금세 싫증 내고 금방 없어지는, 인내가 존재되어지지 않는 환경에서 감사는 인사일 뿐입니다. 유전공학으로 송아지를 우량 소로 키우고 하우스 재배로 항상 채소와 과일을 먹다 보니 인내의 결실은 점차로 사라져 그에 따르는 감사도 그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사는 삶이 행복입니다.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가장 평범하고도 특별한 감사를 아는 사람입니다. 서로 함께 살게 하심을 감사하며 만족스런 남편과 아내가 아닐지라도, 훌륭한 부모와 똑똑한 자녀가 아니더라도 그들을 인해 감사하는 생활은 감사가 메마른 현대에 필요한 활력소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 해마다 돌아오는 추수 감사주일! 우리는 무엇을 감사하며 언제까지 감사하고 있는지....... 그 무엇보다 감사가 축복이며 천국입니다.”
그렇습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추수감사절 주일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두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라는 것입니다. 1620년에 필그림 파더스들이 드린 감사절을 “The First Thanksgiving”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을 도와주었던 왬파그노 인디언 부족들을 초대해서 같이 예배 드리고, 같이 축하를 했습니다.
지금 미국인들에게서 “The First Thanksgiving"의 정신이 퇴색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인들에게 감사절은 family reunion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평소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추수감사절이 되면 한데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절의 본 정신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웃들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외로운 이웃들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와 관심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오늘 우리는 바울이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써 보냈던 편지를 읽으면서 베푸는 삶에서 오는 감사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마케도니아는 지금의 그리스 북쪽에 있는 지역인데, 그동안 유고연방에 속해 있다가 마케도니아라는 나라로 독립했습니다. 바울은 제 2차 전도 여행 때 이 지역에 빌립보교회와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하나님께서 루디아라는 한 여자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시작한 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처음부터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습니다. 짐을 싸서 고린도를 떠나려고 하는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 백성이 이 도시에 많다. 너는 계속해서 말씀을 선포해라.” (사도행전 18:9-11) 바울은 유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려 18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마케도니아에 있는 두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무렵에,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워서 구제사업도 중단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바울은 마케도니아 교회들에게 헌금을 요청합니다. 그 말씀이 뜻 밖에도 로마서 15:25-27에 나옵니다. “나는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구제 헌금을 전하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도우려고, 기쁜 마음으로 구제 헌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로 부터 영적인 복을 나누어 가졌으므로, 물질적인 것으로써 유대인들에게 나누어 줄 의무가 그들에게 있습니다 (They were glad to do this because they feel they owe a real debt to them. Since the Gentiles received the spiritual blessings of the Good News from the believers in Jerusalem, they feel the least they can do in return is to help them financially).”
“아니? 왜 그 교회가 어려운데 우리가 도와야 합니까?” 충분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했고, 바울은 지금 그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교회로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감격합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9:15에 이렇게 나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NLT 성경에는 이 말씀이 “Thank God for this gift too wonderful for words!”이라고 나옵니다.
여러분, 목회자의 보람과 기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 통해 복음을 들을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변화는 다른 것 아닙니다. 자기만 알던 이기적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아 보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는 것이야말로 목회자의 최고의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 이런 감사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는 베푸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 설교를 마치면서 저의 조그만 간증 하나를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낮에 집에 있을 때 전화 벨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도 쓸 데 없는 전화가 많이 오기 때문에 발신지를 보았더니 오레곤 (Oregon)주입니다. 거기는 제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곳이어서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몇 번 벨 소리가 더 울리는데, 왠지 받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수화기를 들었더니, “김태환 목사님세요? 저는 오레곤에 사는 김에스더 선교사라고 하는데요. 갑자기 어디 도움을 청할 데도 없고 해서 인터넷에서 목사님 교회를 보고 전화를 드립니다. 제가 아파트 렌트비가 없거든요. 좀 도와 주셨으면 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좀 황당한 전화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 못 알아 듣겠는데요? 좀 자세히 말씀해 보시지요” 그랬더니 “제가 남편과 함께 미국 교회에 초청을 받아 왔는데 비자 문제가 잘 해결이 안 되어서 맘 고생을 하다가 이제 그 문제는 해결이 되었는데요. 그 와중에 남편이 병을 얻어서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아파트 렌트비 800불을 당장 내지 않으면 갈 곳이 없어요. 이렇게 염치 없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저는 퉁명스럽게 “그런 얘기를 전화로 하면 어떻게 합니까? 좀 자세하게 이메일로 사정을 써 보내세요”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한 시간이나 흘렀을까요. 그 선교사에게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열어 보니까 남편과 찍은 사진이 있고, 남편의 병원 진단서가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사기꾼들이 하는 수법이구만!” 하고 무시해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귓전에 “너, 진짜면 어떻게 할래?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면 어떻게 할래?”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주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마음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그 선교사에게서 받은 이멜을 프린트해서 재정부로 가지고 갔습니다. “이 이멜을 어느 선교사에게서 받았는데, 마음에 부담이 됩니다. 혹시 사기꾼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구제금에서 얼마를 보냅시다” 이렇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800불을 다 보내지 않고 400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선교사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오늘 400불을 보냈습니다. 당신이 사기꾼이라면 이 돈을 가지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지 마세요. 정말 돈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우리교인들이 헌금한 돈이니까 필요한 곳에 쓰세요” 이렇게 쓰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쓰지 못하고 “오늘 400불을 보냈습니다. 필요한 곳에 귀하게 쓰세요” 이렇게 써서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라면 내 이메일을 받고 연락이 올 것이다. 그러나 사기꾼이라면 아무 연락이 없겠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며칠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는 것입니다. 한 3일이면 편지가 도착할텐데, 3일이 지나고 4일이 지나고 5일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습니다. 저는 “속았구나!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400불을 교회에 헌금을 해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6일째 되는 날에 그 선교사에게서 이멜이 왔습니다. 제 이메일을 늦게 봤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남편이 수술을 해서 병원해 쫓아 다니느라고 경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도 받았답니다. 저는 내심 반가워서 “이메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쓰세요” 이렇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일을 모두 잊어 버렸는데, 며칠 후에 저에게 카드 한장이 교회로 왔습니다. 그 선교사에게서 온 감사 카드였습니다. “김태환 목사님, 진심으로 정말 감사 드립니다, 도움 주신 것 정말로 귀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저희 필요한 렌트에 사용하겠습니다. 저희 가정이 그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 주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많은 은혜와 도움 속에서, 여러가지 것들이 해결되어 가고 있지만, 그래도 도움이 필요해 용기를 내서 목사님께 연락을 드렸는데, 따뜻하게 이해해 주시고 선뜻 도와 주시니, 감사의 마음을 글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제 남편 김다윗 선교사의 건강도 회복 중에 있습니다만, 몸의 면역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목사님께 감사 드리며, 목사님과 가정 위에 기쁜 성탄절 되시기를 미리 인사 드립니다.” - 김다윗, 에스더, 엘리야 선교사 가정 올림
저는 이 카드를 받고 얼마나 제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야, 내가 너무 쪼잔했구나. 800불을 다 보내 줄 걸....... 그걸 반으로 쪼개서 400불만 보내다니! 내가 너무 쪼잔했구나!” 이런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번 추수감사절에 나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을 보내 주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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