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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더니즘과 개혁신앙

(Postmodernism and Reformed Faith)

 

1.포스트모던이란

 

1.정의의 문제

포스트 모던이란 말은 어느 뚜렸한 이데올로기를 지칭한다기보다 주로 시대에 대한 뜻을 언급하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관 뒤에 또 다른 세계관이 등장한다. 18세기 계몽사상은, 서구 문명을 지배하고 있던 성서적

통일성에 맞서고 나왔으며, 19세기가 되면서 낭만주의와 과학적 유물론이 동반해 왔다. 20세기는 우리에게 마르크시즘과 파스즘, 실존주의와 콩트의 실증주의를 가져다 주었다. 지금 21세기를 들어서면서 또 다른 세계관이 등장하고 있다.

2. 절대 진리는 없는가 ?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믿는 자들에게 진리를 증거 하기는 쉽지 않다. “예수가 당신을 도왔지만, 그녀에겐 보석이

도움이 되었다는 경우처럼 도덕성이라는 것이 상대적이므로 용서할 죄도 없다고 믿는 이에게 구속의 진리를 선포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66퍼센트가 절대 진리 따윈 없다고 믿는다. 초기 청소년 층으로 가면 그 비율이 더 커져서, 18세에서 25세의 미국인 72퍼센트가 절대 진리는 없다고 믿는다.

한 때는 모든 인간이 근본적인 기독교 사상을 인정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소수만이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도덕, 종교적 변동만 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순수주의자인 리스 앤더슨은, “우리는 국가와 세계에

엄청난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다. 그 변화는 인쇄술의 발명이나 산업혁명보다 힘이 클 것이다.”라고 말한다.

 

. 포스트 모던과 다원주의 문제

다원주의의 뿌리

영국이 다원주의 사회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러 인종적 배경과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면서 공적인 삶에 동참하고 있다. 이런 다원성은 다원주의 이데올로기와 구별될 필요가 있다. 다원주의 내에서도

문화적 다원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종교적 다원주의란 종교간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진리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있다고 믿은 신념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신념을 참이나 거짓의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한다. 종교적인 믿음은 사적인 문제다 우리는 각기 자기 신앙을 가질 자격이 있다. 이것이

종교 다원주의로서의 오늘날 영국사회에서 널리 수용되는 견해다.

 

2. 다원주의(pluralism)개념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

누군가 우리 다원주의 사회라고 말한다면 먼저 그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아야 그에게 제대로 반응할

수 있다. 이 말은 사실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우리 다원주의 사회’‘ 운운할 때 또

다른 종류의 무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경우도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문화적 장소‘’에 서 있다. 우리의 안목은

인종, 종속, 지역, 언어, 경제적 지위, 성 등과 같은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

 

3.결론

인류가 기초를 파괴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주권에는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 통치자는 여전히 하나님 이시다.

그분은 하늘에서 초월적이면서도 공의롭게 다스리신다. 게다가 그 분은 하늘에만 계시지 않고 이 땅에서도 계신다.

그 분은 하늘 보좌 위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성전, 즉 그의 교회에도 계신다. 문화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절대 보장을 받고 있다. 주께서 통치하시고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인들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덧없이 인간지식과 문화와 역사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13:8) 따라서 오직 주님을 사모하고

그를 향한 열정이 식어지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출처 : 총회 목회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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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슨(D.Martyn Lloyed - Jones) 목사 , 그 생애,사상, 목회사역과 영향

 

이제는 우리 한국교회에서 뿐 아니라 그의 책이 읽혀지는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로이드 존슨 목사는 특별히 주목하고 그의 영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제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한국교회 강단에서 고집스럽게 강해설교로

섬기고 있는 설교자들 중에 로이드 존슨 목사에게 감화를 받은 적이 없는 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로이드 존슨 목사에 대한 것을 알아보는 것을 알아보는 목적이 그에게 궁극적인 시선을 두려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평을 더 넓히고 더 공고히 하여 하나님의 소명에 더욱 충실하고 진정한 개혁주의자로서 주님을 섬기기 위함이다. 여기에 그를 섬기는 진정한 가치가 있다.

그의 소명과 정체성 모색

칼빈주의 (Calvinism)칼빈의 주의‘, ’칼빈 숭배주의가 아리듯이, 로이드 존슨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도

로이드 존슨 주이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다. 로이드 존슨 목사 본인이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조나단 에드워드의

글들을 읽을 것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도 설교자는 청중 모두 이 사람을 읽다. 그 이사람이

강조하는 것. 곧 하나님의 영광을 붙잡도록 하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어떤 이익 에만 머물거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체험에만 머물지 만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더 알도록 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주권을

알아야 하고 경외와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1) 당시 설교자들의 정체성 모색

교회의 강단에서 성경강해나, 개혁주의적 전통에 입각해서 설교하거나 목회 사역을 하는 것이 무시당하고 있다 -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는 구시대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있었다.교회가 사람들에게 매력을 끌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목회에 대해 갈망하였다. 설교자들은 현대에 맞는 정체성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인생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 밖으로 나가 일반 학문 영역으로 진입하며,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이나 문학이나 사회과학적인 이론들이 성경의

교리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설교자는 성경을 뒤로 던지고 그러한 학문적인 열매들을 강단으로 가지고 나오기

시작했다. 현대적인 설교자라는 평을 받고 싶어하는 설교자들의 형태는 오늘의 교회 상황과 흡사하였다.

2) 그의 확신

인간의 모든 난제의 근거에 대한 성경의 진술의 진정성을 확신하였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어그러짐이라고 확신한다.

-1세기에 처음 전해진 사도의 복음이 여전히 현대에도 인간의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오직 불변하는 방식이라는 확신이

그를 사로 잡았다. 하나님도 인간도 변하지 않았다고, 복음도 변하지 않았다- 성경은 항상 최신의 하나님의 책

-‘최신의 복음’ - 런던에서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성경이 말하고 있다. -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정확무오한

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 그런 확신을 자기 목회와 설교 사역에 과감히 적용 정말 당시의 상황엣어는 돈키호테식의

몸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3) 그의 소망

성경에 제시된 대로 사도의 복음의 능력과 그로 인한 회개와 믿음과 구원이 현대에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워을 위해 영적 부흥에 대한 열망 충만 부흥신학자라는 평을 들음- 그의 성령론도

그러한 줄기에서 이해해야 할 것임 칼빈 이후 모든 하나님의 진실한 자들의 바람을 충만하게 가짐 청교도들과

각성자들을 자기의 선생으로 삼아서.

4) 그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와 오늘도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가 소명을 받고 설교자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가 1927년으로 28세였다. 당시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타격을 받아 강단에 선 설교자들이 성경을 뒤로 던져 버리고 있었다. 기존 성경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경외감도 사라지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처방을 찾기 위해서 분주했다. 교회가 휴매니즘에 입각한 일반 인문학이나 정신의학 등에 영역에서 새로운 권위의 척도를 찾으려고 기웃거리고 있었다는 것이 아주 자연스런 일이 되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성경말씀 보다는 각계의 전문가들,학계의 교수들의 논지를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 회중에서 전하는 것이 시대를 아는 설교자의 임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속에서 그는 정 반대의 입장에서 확고하게 서서 아직도 성경은 예나

지금이나, 성경이 처음 쓰여질 때나 교회사의 어느 시대 속에서, 지금 이 20세기의 복잡한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동일한 권위를 가진 정확하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을 결코 시대에 뒤떨어진 것도 아니고 항상 최신의 진리이다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는 웨스트민스트 채플에서 설교할 때 성경은 오늘 이 밤 런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결론 개혁주의만이 진정한 기독교이다.

교회사를 통해 보듯이 모든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탄식하고 마음 상하고 신음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개혁주의적인 신앙을 견지하고 그것만이 하나님의 정하신 선한 길임을 알고 마지막 웃는 길은 이길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나갔다. 이제는 아직 땅에 있어 복음을 믿고 복음을 위하여 사역하는 소명받은 우리들에게 공이 주어졌다. 그가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고, 교회사 이전의 신앙의 선진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맛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확신하고 단호하게 자신을 거기에 던진 그 용기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출처 : 총회 목회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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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론 강의 ( doctrine of God)

 

1강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정

 

모든 정통교회가 하나님의 예정에 관하여 논의하고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예정론인데, 바로 이 부분들이 칼빈주의의 체계를 형성하게 한 기본적인 요소들이 되었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은 이 칼빈주의 정신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요소들이 한편으로 알미니얀주의를 막아내었을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 로마 카톨록 교회의 신학사상에 맞서는 데 있어서 큰 공헌을 해 준 요소들이 되어 왔다.

 

1)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장차 일어날 일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의 도모에 의해 영원부터 자유롭게, 변할 수 없게 정하신 사실을 하나님의 작정(Divine Decree)라고 부른다. 한편 이 작정에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온 우주적인 하나님의 뜻과 섭리뿐만 아니라 인류와 천사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의 작정도 포함되는데, 특별히 인류와 천사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우리는 흔히 예정이라고 부른다.

 

2강 삼위일체의 하나님

개혁주의 신학의의 대표적인 신조로서 가장 성경적이면서 강장 칼빈주의저ᅟᅥᆨ인 신조로 평가되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Westminster Confession of Taith)의 제23절에서는 성 삼위일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 신격의 단일성 안엘 삼위께서 계시니, 곧 한 실체요, 한 권능이요, 한 영원성이신 성부 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께서는 누구에게서도 기원하시지 않고, 아무게게서도 나시자 않았으며, 또 나오시지도 않는다; 성자께서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셨다; 성령께서는 영원히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15: 26)

'한 실체-세위격' 바로 이것이 기독교 역상 A.D.4 세기에 확립되어 그동안 1,600년 이상을 변함없이

지켜져 온 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과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기독교회들이

함께 공통으로 긍정하는 신앙고백이자 교리이다. 즉 로마카톨릭과 동방정교회, 러시아정교회를 포함하여

모든 정통적인 개신교들이 이 교리를 부정하지 않고 잘 붙잡아 지켜온 교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교리는 세계의 모든 종교들 중에서 유독 기독교교회만의 독특한 신앙고백이면서 또 기독교 내의

이단을 분별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되는 교리가 되는 셈이다. 이 교리는 어떤 철학적인 논리나 또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사색에서 나온 교리가 아니다. 이 교리는 오직 성경에서 나온 교리이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믿고 아멘으로 받아들여 더욱 더 확고하게 맏아들일 수 있는 교리가 바로 이 교리이다.

 

2.필리오께(Filioque)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나오실 (proceed) 뿐만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filioque) 나오신다.” 삼위일체 교리에 관해

역사적으로 유명한 A.D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결의에서는 성부와 성령의 관계에 관해서는 명시적인 진술을 했으나 성자와 성령에 과계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성부와 성령의 관계에 관한 질술이란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라는 고백이었다. 이 고백에 대해서는 동방과 서방의 모든 교회들이 동의하고 아멘으로 그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5세기를 거쳐 6세기에 이르자,성자와 성령의 관계에 관한 논란이 있게 되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입장에 큰 차이가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것이 주요 원인이 되어서 양 교회는 결국 나중에 (1054)분리까지

하게 되었다. 즉 서방교회는 성령께서는 성자에게서도(filioque) 나오신다라는 입장을 고백하였고, 동방교회는 그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결국 서방교회는 A.D. 589년 톨레도 공의회에서 이 명제를 받아들이고, 비록 A.D.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보다 200 여년이나 더 늦게 이 부분을 추가하기는 하였지만, 이 진리를 200년 여년 전으로

소급하여 적용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A.D.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선언된 신조를 오늘날 우리가 살펴볼 때,

‘filioque’라는 한 단어가 추가되어 소급 적용된 신조를 우리는 현재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1,000 여년이 지나 17세기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이 고백을 받아들인 서방교회의 입장에서 필리오께 교리를 그대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하여 동방교회에서는 아직도 이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3. 아타나시우스 (동방교회사람)신조 (420-450년사이, 또는 8세기 말 작성 추정) 중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그 자체로 존재하신다.성부께서도, 성자께서도, 성령께서도 결코 만들어지지 않으셨다. 그러나 세 영원이 아니며, 다만 한 영원한 이가 계신다.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우리의 이해를 초원하시는 오직 한 분만이 계신다. 성자께서는 성부에게서 나셨으나 지음받거나 출생하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나 지음을 받거나 출생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세 성부들이 아닌 오직 한 성부,

세 성자들이 아닌 오직 한 성자, 세 성령들이 아닌 오직 한 성령만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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