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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어 많은 이들이 그들의 일생을 역사를 연구하는데 바쳤지만 역사의 기본적인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질 수 없었다. 역사를 인식하려면 반드시 기본 원칙과 노선을 정해야 한다. 먼저 우리는 역사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이 인류의 모든 생존과 행동을 지배하고(행 17:26), 그 목적이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완성하기 위한 것임을 보아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셨으며, 또한 그분의 승천 안에서 면류관을 얻으셨고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인류와 만유의 주가 되시어 온 우주를 관리하고 계시며(행 10:36),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경륜을 완성하시고(행 2:36), 또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시어(계 1:5), 세상의 정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의 환경을 안배하시어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계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위대한 일을 완성하시도록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배경이 되는 로마 제국을  예비 하셨다. 열국은 바벨론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한편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득죄 함으로써 결국 주전 600년경에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헤파하고, 많은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가게 되었고 그들은 조국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바벨론의 패권은 메대 바사 왕조로 넘어갔다. 주전 300년경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메대 바사를 정복하고 그 당시의 통치자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삼십여 세의 나이에 불과하였다.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그의 제국은 분열되었다. 지중해 주위의 열국을 지배했던 제국이 없어지자 로마 제국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쟁과 동란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점진적으로 로마 제국은 특별히 줄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통솔 하에 주위에 있는 열국들을 패배시켰다. 줄리우스 카이사르의 생질의 아들이면서 양자였던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anus)는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이로 인하여 지중해 주변 모든 땅이 로마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주전 27년에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얻고 로마의 제1대 황제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아우구스의 통치기에 출생하였다. 누가복음 2장 1절은 "이때에 가이사 아우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은 첫 번째 정식 황제의 통치 하에 출생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로마가 난동을 일으킨 지역에 내린 명령은 주 예수님이 인류 가운데 평탄하게 출생하실 수 있게 하였다. 당시 흉악범에 대한 로마의 사형 방식인 십자가도 주님의 죽음에 대한 성취되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복음의 개척은 동일한 언어와 단일화된 통치, 그리고 사방으로 열린 도로와 로마가 세운 질서로 말미암아 매우 편리하게 진행되었다. 비록 신약은 거의 모두가 유대인이 쓴 것이었지만(누가만 유일하게 예외였음.) 헬라어로 쓰였지 히브리어로 쓰이지 않았다. 심지어 로마 제국이 일어나기 이전, 주전 3세기경에 히브리어로 쓴 구약도 이미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헤라어 70인 역(the Septuagint)"으로 불리는 이 번역본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70명의 학자들이 번역한 것이다. 주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수차 인용하신 성경 말씀이 바로 헬라어 70인 역이다.

                 

로마가 정복한 영토는 주 단위로 구분되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 주, 아시아 주, 아가야 주와 마케도니아 주이다. 이러한 주들은 로마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한받지 않고 자유롭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선박이 지중해를 오갈 수 있었다. 내륙의 운송 방면에 있어서도 로마인은 제국 전체를 관통하는 도로를 건축하였다. 동시에 약탈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여행은 매우 안전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타 지역으로 복음을 개척하러 나가는 것은 매우 편리하였다. 로마 시민들도 법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일찍이 이러한 권리를 표명한 적이 있었다. 그는 채찍질을 당할 상황에서 백부장에게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행 22:25)라고 정중하게 물었다. 이에 천 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 줄 알고는 그를 결박해 놓은 것을 두려워하였다(행22:29). 후에 바울은 자신의 동포인 유대인들이 베스도 앞에서 그를 고소할 때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권리를 내세워 황제에게 상소할 것을 요구하였다(행 25:11). 그는 이것으로 인해 보호를 받았다.

 

세계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설령 인류의 역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세상의 정세와 하나님의  움직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세계정세는 바로 하나님의 안배 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민족이든 그 민족의 시기를 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 일을 하거나 저 일을 하도록 정하시며, 각 나라의 영토를 확정하시고(행 17:26) 왕조를 흥왕 시키시고 멸망시키신다. 이것은 성경에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환경을 안배하시는 이유는 그분의 경륜을 완성하기 위한 것으로,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다음 네 가지를 위한 것이다. (1) 구속을 성취함, (2) 복음을 확산함, (3) 신약의 완성된 사역을 전파함, (4)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함.

 

1). 초기 교회의 배경-고대 로마 제국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은 주님의 위임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다 온 땅과 사마리아에서부터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중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에 맛디아가 사도 직분을 잇게 되었다(행 1:26). 초대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사도들은 후에 세 조로 분류되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마태와 바돌로매는 흑해 일대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도마와 시몬과 다대오는 중앙아시아의 파티아로 갔으며, 요한과 빌립은 소아시아로 갔다.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사도 도마가 파티아로 갔고 안드레는 수구디아로 갔으며 요한은 아시아에 남아 있다가 얼마 안 있어 에베소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비두니아 및 아시아로 돌아다니며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고 마지막에 로마로 돌아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고 한다.

2).간략하게 본 로마 제국사

로마는 이탈리아의 중부에 있으며 주전 753년에 티베르(Tiber) 강에 연접한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세워졌다. 교회사에서 로마는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천 년 동안 로마의 수도였던 이 도시의 구석구석에는 초기의 사도들, 믿는 이들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복음과 진리의 전파를 위해 흘린 피와 땀으로 얼룩져 있다. 주전 7세기에 에트루리아인들(Etrurians)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로마를 점령하고 왕국을 세워 왕정을 실행했는데, 역사는 이를 "왕정 시대"라고 칭한다. 왕정 시대의 사회는 귀족과 평민, 두 계급으로 나누어 있었다. 명의상 왕은 사법과 행정의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권은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Senate)이 쥐고 있었다. 주전 509년 경에 라틴인들이 에트루리아인들의 통치를 물리치고 왕정을 폐지한 뒤 공화정이 수립되었는데, 역사는 이를 "공화정 시대"라고 칭한다. 주전 264년부터 146년까지 로마는 계속해서 카르타고, 시리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을 정복하였고 빠른 속도로 영토를 확장하여 대제국이 되었다. 주전 54년에 줄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브리튼을 평정하고 훗날 제국의 전제 정치의 기초를 닦았다. 줄리우스가 죽은 뒤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일어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ukus Antonius)를 물리치고 혼란스러운 삼두정치(三頭政治)를 마감하였다. 또한 주전 27년에 원로원에서 명명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귀한 사람)"라는 칭호 하에 옥타비아누스는 정식으로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3). 로마 제국의 세 시기

로마 제국 시대는 세 시기, 곧 전반기 로마 제국, 위기의 3세기, 후반기 제국 시대로 나뉜다.

(1) 전반기 로마 제국(주전 30년~주후 193년)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주전 30년~주후 14년), 클라우디우스 왕조(주후 14년~68년), 플라비우스 왕조(주후 69년~96년), 안토니우스 왕조(주후 96년~193년)를 포함한다. 전반기 로마 제국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상업이 발달하고 통상 범위도 확대되었다.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한 대농장 제도는 후퇴하였고 대지주의 대농장이 소작인에 의해 경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 농의 수가 줄면서 변동이 심하여 사회 불안의 요인이 잠재되어 있었다. 이때 제국의 국경은 동으로는 유프라데스 강으로부터 서로는 스페인, 브리타니아(Britannia)까지 이르렀고 남으로는 북아프리카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다뉴브 강과 라인 강까지 이르렀다.

(2) 위기의 3세기(주후 193년~284년)

세베루스 왕조(주후 193년~235년) 및 그 후 분열된 시기를 포함한다. 이 당시 제국의 위기는 경제 방면에서 충분히 표출되었는데 농업과 수공업이 쇠락하고 상업과 도시경제가 불황이었다. 정치 방면에 있어서 통치계급 내부에 분열이 있었고 백성들이 봉기하였으며 이민족이 침입하였다. 기독교가 신속하게 발전하였다는 것은 위기가 사람들의 정신세계에까지 깊게 침투하였다는 것을 반영한다.

(3) 후반기 제국 시대(주후 284년~476년)

​이러한 제국의 위기는 결국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당시 로마제국은 원수제(Princeps)에서 군주(Dominus)로 전환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약 주후 243년~313년)와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약 주후 280년~337년)의 통치 시기에 황제의 권력은 강화되었고 두 사람은 노예제도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개혁에 힘을 다했으나, 노예제도의 위기는 날이 갈수록 더하였고 백성들의 봉기는 전국으로 퍼졌다. 395년에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주후 346년~395년)가 죽은 뒤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할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로마를, 동 로마 제국은 비잔티움(Byzantium)을 각기 수도로 정하였다. 4세기 이후 게르만 민족이 대대적으로 로마를 공격하였고 국내에서는 백성들의 봉기의 물결이 더욱더 높아졌다. 410년에 게르만 민족의 서고트족(Visigoths)이 지도자 알라리크(Alaric)의 인도 하에 이탈리아로 들어와 로마 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다. 성 내부에서 봉기를 일으킨 서고트족의 노예들이 성문을 열어 서고트족이 로마성을 공격해 들어왔다. 육일 밤낮 동안 서고트족이 로마 성을 약탈하여 즉시 모든 거리가 피로 물들었다. 일찍이 전 세계를 장악하였던 이 성이 이제는 오히려 약탈당하였다. 그 후 게르만 민족이 로마의 영토에서 많은 왕국들을 계속해서 세웠다. 이와 동시에 노예를 핵심으로 하는 백성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로마 제국은 멸망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게르만 출신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Odoacer)가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mulus Augustulus)를 축출하여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고 이후로 서유럽은 봉건사회로 들어가게 되었다. 동 로마 제국은 다른 역사적 조건 하에서 1453년까지 존속하였다.

4).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 제국의 열 번의 주된 박해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의 잔혹함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바이다. 5세기의 교회 역사학자인 오로시우스(Orosius)는 로마 제국의 박해를 네로(Nero),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트라얀(Trajan), 아우레리우스(Aurelius), 세베루스(Severus), 막시무스(Maximus), 데키우스(Decius),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us),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로 나누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네로 황제의 박해는 매우 잔혹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물의 가죽을 입혀 원형 경기장에서 야수에게 갈기갈기 찢기게 하거나 그리스도인을 건초와 함께 묶어 야외 파티 장소를 밝히는 횃불로 삼았다. 교부 클레멘트(Clement)의 기술에 따르면 바울과 베드로는 네로의 박해로 순교하였다고 한다. 네로가 죽은 뒤, 도미티아누스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는 동시에 백성들에게 자신을 주와 신으로 존칭할 것을 요구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도미티아누스의 재위 시에 밧모 섬으로 유배되어 계시록을 썼다고 한다. 그 후에 트라얀 황제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을 처형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의 통치기에 예루살렘의 감독인 시메온(Symeon)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안디옥의 감독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사자에게 물려 죽었다. 서머나의 감독인 폴리캅(Polycarp)도 피우스(Antoninus Pius)의 재위기에 순교하였다. 161년부터 222년까지 교회는 매우 큰 박해를 받았는데,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이 시기에 살해당했다. 그 후 30년 동안 박해가 잠시 중단되어 그리스도인들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250년에 데키우스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포기하고 로마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명을 내렸을 때, 많은 이들이 느슨하고 안일하게 되어 참된 믿음을 버렸다. 그러나 260년부터 303년까지 교회는 다시 급속히 발전하였고 인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303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로마 시민에게 통일된 신앙을 요구하였다. 그는 성경을 불태우라는 명을 내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거나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을 것을 강요하였고, 또한 제사에 드린 술을 시장에서 파는 음식에 뿌려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배반하든지 굶어 죽든지 한 가지를 선택하게 하였다. 이 박해 기간에 살아남은 교회 역사학자인 에우세비우스는 박해자의 폭행과 순교자의 사적을 친필로 기록하였다. (한국복음서원 교회사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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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초기 교회의 역사

 

 

 

 

1). 로마에서의 바울과 베드로의 발자취

오순절 이후로 교회들이 세워지고 복음이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일대에서 로마의 전 영토로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예루살렘의 큰 박해로 인해 제자들이 각지로 흩어졌는데, 먼저는 시리아의 안디옥에 이르렀고 이어서 시리아, 길리기아, 아시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등으로 확산되었고 결국 이탈리아의 로마에까지 이르렀다. 사도행전 18장은 아굴라와 부리스길라가 원래는 로마에 거했는데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의 박해로 인해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거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일찍이 두 번 로마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62년에서 64년 사이에 유태인의 고소로 인한 것이었다(행 28:17-20). 그 기간에 그는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그리고 빌레몬서를 썼다. 자신을 위한 변호에서 승리를 거두고 석방된 뒤 바울은 다시 에베소와 마케도니아를 방문하였고(딤 전 1:3) 그곳에서 디모데전서를 썼다. 바울은 67년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할 때 두 번째로 투옥되었고,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순교하기 전에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후서를 썼다. 교회사에 있어서 바울은 진리 방면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가 쓴 열네 서신은 하나님의 뜻을 매우 안전하게 계시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하는 그의 사역은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과 베드로의 사람을 얻는 사역과 함께 신약의 3대 사역이다. 진리를 변호하고 신성한 계시를 전파하는 사역에 있어서 바울의 일생은 향기로운 전제와 같이 후세 사람들의 믿음의 일에 부어졌다. 그리하여 주님의 일이 더욱 힘차게 전진하게 되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도 일찍이 로마를 방문하였고 또한 바울과 거의 동일한 시기인 네로의 제위기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클레멘트, 오리게네스(Origenes), 이그나티우스 등과 같은 많은 초기의 교부들은 그들의 서신 가운데에서 이 일을 언급하고 있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는 더욱 분명하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클라우디우스가 통치할 때 하나님의 인자와 은혜로운 안배로 위대하고도 능력 있는 사도 베드로가 로마 성으로 가도록 인도 받았고, 그는 그곳에서 용감하게 앞장서서 이 악한 무리들(사기꾼 시몬을 가리킴)을 대항하였다. 베드로는 신성한 군복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존귀한 장군과 같았고 당시 동방에서 서방으로 놀라운 계시의 빛을 가득 가지고 온 사람이었다. 그는 빛과 유익한 교훈을 전했고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였다."

 

2). 초기 교회의 신앙과 실행

초기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통 안에 견고히 머물며 지속적으로 이집 저집에서 떡을 떼며 기도하였다. 박해로 인해 믿는 이들은 대부분 소규모로 집에서 집회를 하였다. 바울이 교회에 쓴 서신에서 우리는 이미 "경륜', "분배" 등의 단어와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성화(聖化) 의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반기의 교부들의 저서에서 이러한 진리들에 언급이 점차 적어졌으며  심지어 사람들에게 잊히게 되었다.   초기 교회가 보편적으로 준행한 "12사도 유훈(遺訓)"에는 단지 생명을 얻는 길과 사망에 이르는 길, 그리고 침례, 금식, 만찬 등의 실행 상의 규례만을 기록하고 있고, 곳곳에서 그 당시 경건에 대한 가르침과 도덕을 중시한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12사도 유훈"의 제14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일에 여러분이 집회에서 떡을 떼고 축사할 때 여러분의 죄를 자백해야만 그 후에 여러분의 제물이 정결케 될 수 있다. 무릇 동반자와 다툰 자는 그들이 다시 화목하게 될 때까지 다른 이들과 집회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그러나 침례, 금식, 떡을 떼는 것등의 실행은 세부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의문과 형식에 치우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3).초기 교회의 내부적인 어려움

외부의 압력 이외에도 초기 교회는 이단의 해를 입었고 논쟁으로 인한 분열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 두 방면은 교회의 생명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반드시 과거의 이단을 인식함으로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하고, 동시에 과거에 있었던 분열이 가져온 피해를 경계로 삼아 하나의 간증을 유지하는데 노력을 다해야 한다. 교회가 가장 초기에 직면한 이단은 에비오니즘(Ebionism)이다. "에비오니"의 원문의 뜻은 '빈궁'이라는 뜻이다. 교부 터틀리안(Tertullian)의 해석에 따르면 그들이 에비오니파로 불린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너무 빈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에비오니파에 있어서 주된 것은 유태인의 신앙이었는데, 그들은 기독교를 유태화 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강조하였는데, 비록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으나 그분이 육체가 되신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종으로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수복과 성결함으로 인해 그분을 아들로 인정하셨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단지 신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지 실제적으로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도세티즘(Docetism)은 에비오니파와 거의 동시에 출현하였다. 이 파는 물질세계가 악하다고 믿었기에 성결한 본체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물질에 속한 육체를 취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육신에 대하여 매우 다른 견해를 가졌다. 그들은 성육신이 진정으로 발생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육신은 단지 하나의 환영(幻影)으로 사람들에게 일종의 환각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분이 실제적으로 물질세계 가운데 출현한 것과 세상 사람들이 본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환영에 불과하며,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고통받은 이는 실제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단지 환영일 뿐이라고 여겼다. 사도 요한이 쓴 복음서와 서신서에서도 항상 이들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이들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이상의 두 이단보다 더 체계적이고 깊게 영향을 미친 것은 그노시스주의(Gnosticism, 영지주의)이다. 그노시스주의는 기본적으로 동방의 이원론과 신비 신앙 및 헬라 철학의 혼합체이며, 후에 다시 기독교의 외투를 걸친 것이다. 바울 시대에 고린도와 골로새 교회에는 이미 그노시스파가 출현하였다. 그노시스파는 주후 80년에서 150년 사이에 형성되었으며 마지막에는 교회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한 계파가 되었다.

교회가 그노시스파의 해를 처리하는 데 분주할 때 또 다른 극단주의가 출현하였다. 이 극단주의는 몬타누스주의(Montanism)이다. 몬타누스주의는 140년 경에 일어났는데, 성령의 능력과 선지자의 강론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예수님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끊임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를 통해 인류에게 계시하고 있다고 여겼다. 성령의 실재성을 특별히 중시하였기에 그들은 스스로 완전한 성결의 생활을 살아야 된다고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거의 고행에 가까웠다. 그들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항상 금식하였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열렬히 기다렸고 또한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주님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단의 출현에 대응하기 위하여 교부들은 기독교의 기본 신앙을 체계적으로 표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세하게 해석하였다. 이처럼 교회의 정통 신학은 점진적으로 형성되었고 성경의 정경(正經)도 동시에 확립되었다. 약 1세기의 발전을 거친 뒤 정통 신학은 주후 325년에 이전에 없었던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하였는데, 이는 바로 아리우스주의(Arianism)의 출현이었다. 그것은 가장 격렬한 신학 논쟁 가운데로 빠지게 하였고, 신학도 이로 인해 이성화되고 분석화되었으며 논쟁으로 가득한 색채를 띠게 되었다. 당시 교회는 이로 인해 분열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논쟁을 거치면서 그 정기는 크게 손상받았다. 아리우스(Arius, 256년~336년)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는데, 그는 그리스도가 자존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며, 성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에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시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러므로 성자와 성부의 본질은 차이가 있기에 신성한 삼일성의 진리는 이로 인해 동요되었다. 이 이단을 처리하기 위하여 교회는 이전에 없었던 큰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는 325년에 니케아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적지 않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리우스를 지지하였으나, 결과는 정통 신앙이 승리를 거두었고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은 그 본질이 같고 동등하며 동일한 영광을 갖고 있다는 진리도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풍파가 가라앉자, 또 다른 풍파가 일어났다. 논쟁의 초점은 삼일성의 위격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로 이전되었다. 먼저 문제를 일으킨 이들은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s)였는데, 이들은 *경교(景敎)의 선구자였다. 네스토리우스파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분별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나누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성을 단지 신성을 담는 용기로만 여기는 데 있었다. 교회는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고, 그들의 신성과 인성이 나누어질 수 없으며 또한 이 둘이 연합한 것임을 믿는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리스도는 참된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참된 사람이시다. 네스토리우스파가 불러일으킨 논쟁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 대한 각종 논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에는 그리스도께서 육체가 되신 후, 그분이 한 분이신가 두 분이신가, 단지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사람이신가, 하나님과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논쟁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교회는 많은 정력과 시간을 쏟아부었고 수많은 회의를 소집하였으나 논쟁할수록 더 복잡해졌다. 451년에 교회는 칼케돈(Chalcedon)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논쟁을 철저하게 해결하였다. 회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절대적으로 진실된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는 오직 한 인격이며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은 서로 함께 연합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 후에 정통 신앙은 더욱 분명한 표현을 얻게 되었고 또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져 논쟁이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4).초기 교회의 유명한 교부와 저서

이 시기의 교부들은 사도 후반기와 니케아 전반기의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사도 후반기의 비교적 유명한 교부들은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서머나의 폴리캅(Polycarp), 로마의 헤르마스(Hermas) 그리고 순교자 저스틴(Justin)을 들 수 있다. 니케아 전반기의 유명한 교부들은 이레니우스(Iranaeus), 터툴리안(Turtulian),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그리고 오리게네스(Origenes)을 들 수 있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제3대 로마 감독을 역임하였는데, 일찍이 고린도인들에게 서신을 보내 그들 가운데에서 장로를 내쫓고 당파를 결성한 혼란을 책망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클레멘트 서신"이라고 칭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순교하러 가는 길에 일곱 서신을 써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높였고 믿는 이들이 자신들의 감독과 장로를 존중해 주기를 희망했다. 폴리캅은 일찍이 사도 요한의 제자였는데, 사도 시대와 니케아 전반기 사이에 있는 작가들 간의 중요한 교량이 되었다. 폴리캅은 견고하게 기독교를 보호한 사람으로 항상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당시 그노시스파의 이단인 마르키온(Marcion)과 논쟁을 벌였고, 주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86세의 고령으로 순교하였다. 로마의 헤르마스는 계시록의 형식으로 <헤르마스의 목자(The Shepherd of Hermas)>를 썼는데, 그 내용은 이상과 교훈 그리고 비유를 포함하면서 죄의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외에도 <바나바 서신(Catholic Epistle)>,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도들 서신>등이 널리 읽혔다. 폴리캅의 제자인 이레니우스는 로마 천주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이단에 반대하며(Against Heresies)>인데, 그는 여기에서 그노시스주의의 교훈에 반박하였으며 하나님의 삼일성에 관한 선구자가 되었다. 터툴리안은 북아프리카의 교부로 교리를 보호하는 수많은 작품들을 썼으며, 당시의 <아버지 하나님의 고난받음>이라는 이단에 반박하는유명한 <프락세아스에 반박하며(Against Praxeas)>라는 책은 삼일 하나님의 과점을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의 <인간론(De Anima)>은 성경 심리학에 관한 첫 번째 저서였다. 오리게네스는 교회 역사에 있어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신학자로서 그의 성경관과 삼일 하나님의 관점은 그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다. 오리게네스의 영혼론은 신비주의와 금욕주의의 영향을 받아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543년 콘스탄티노풀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한국복음서원 교회사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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