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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오후 설교-  지혜로운 사람

 

 

 

제목 : 참 지혜자의 삶

말씀 : 엡5:15-18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시 잠시 들러 복음을 전한 뒤 다시 3차 전도여행시에 와서 3년간이나 눈물로 목회 하여 세운 교회였다.(행20:31) 그리고 당시 에베소는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항구도시로 해상교통의 요충지기도 했고, 이 에베소에서 소아시아 전역으로 도로가 나 있어서 인근의 교통의 요충지기도 했다.

따라서 상업과 무역업이 발달하였고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어마어마한 아데미 신전이 있어서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에베소 교회도 소아시아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교회도 여타의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가 있는 교회이기도 했다. 물론 에베소교회만의 어떤 특별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교회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었고, 또한 신분적으로도 자유자와 종된 자들이 혼재해 있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아직도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었고, 이방인들은 헬라문화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세속으로부터의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말씀을 보면 1장에서 3장까지는 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적인 말씀을 한 다음에 4장에서 6장까지는 주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성도의 거룩한 삶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런 차원에서 주신 말씀이다. 우리가 이제 주님을 믿고 거듭난 존재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과연 이 악하고 혼탁한 세상속에서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세상 속에 살아야만 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세상 속에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세월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는 오늘 말씀의 첫 부분에서 우리가 세상 속에 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지혜롭게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15,16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그런즉?이라는 말은 이유접속사로써 바로 앞부분의 말씀들이 이제부터 논하고자하는 말씀의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즉 앞부분에서는 세상은 어두움이고 그리스도인은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에 참예한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런즉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는 것이다.

즉 이제는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살펴서 빛의 자녀처럼 살아가라는 말인 것이다. 세상을 따라 아무렇게나 살아가지 말고 참된 지혜를 따라 삶으로 말미암아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세상의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 빠져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1차원적인 욕구 속에 살아간다. 1차적인 욕구란 먹는 욕구이다. 좀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2차적인 욕구를 위하여 살기도 한다. 그것은 쉽게 말하자면 정신적,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사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좀더 고상한 사람들은 3차적인 욕구까지도 추구한다. 이것은 남을 위한 삶이다. 선을 베풀며, 남을 도우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충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거기에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이것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추구해야할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한가지 더 추구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과 관계이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할 부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죽음 이후에 우리가 가야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사람이 추구해야할 첫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만이 진실로 세월을 아끼는 삶인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의 생을 온전하게 준비하는 행위이다. 그것만이 인간으로써의 진정한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삶이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 얽매여 있는 삶이나 좀더 고상하게 문화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나 더 나아가서는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까지도 거기에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면 그것은 부족한 삶이다. 그것은 온전치 못한 삶이다. 반쪽 인생이다. 설령 돈과 명예와 부귀와 세상적인 영광을 누린다해도 그것은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삶을 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자. 물론 1차적인 욕구나 2차적인 욕구나 3차적인 욕구도 추구해야 되겠지만 거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며, 살아가자. 그리하여 여기서 누려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가운데 미래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가되자.

2.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의 뜻을 살피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지금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주님은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시는가? 오늘의 시간들을 주님은 어떻게 보내시기를 원하시는가? 나에게 재능이 있다면, 나에게 물질이 있다면, 나에게 건강이 있다면, 나에게 지식이 있다면, 나에게 권력이 있다면 주님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시는가, 이것을 살펴서 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지 트루엣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만이 온전한 것이다. 변함없는 진리이다. 영원한 것이다. 그 곳에만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영생이 있다. 그러므로 그 뜻대로 살 때만이 진정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나와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온 우주까지도 진정한 기쁨과 영광을 받으며 만족을 누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한다.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깨어 기도해야 한다. 물론 주님 뜻대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외롭고 고독한 길일 때도 있다. 고난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살길이기에 그것만이 생명의 길이기에 그것만이 궁극적인 승리의 길, 축복의 길이기에 우리는 가야만 하는 것이다.

3.성령 충만하여 사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가 참된 지혜의 삶을 사는 비결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오늘 18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당시 에베소는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소아시아의 중심적인 도시 중의 하나로 상업이 발달하고 농업 역시도 번창해 있었다. 아데미 여신의 커다란 신전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고, 그에 따라 향락의 문화도 번창해 있었다. 그래서 사도는 특별히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술이란 우리 인간의 정신을 빼앗아가는 대표적인 존재이다. 술은 인간의 윤리, 도덕성을 약화시킨다. 그래서 많은 죄악들이 술과 연관되어 있다. 또 평상시에는 얌전하던 사람도 술만 들어가면 떠들어대기도 하고, 난폭한 짓을 하기도 하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기도 한다.

또한 술은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육체적인 제어 능력도 상실하게 한다. 그래서 술은 인간의 혼미케하는 주범이다. 뿐만아니라 건강을 해치고 시간을 빼앗는다. 그래서 사도는 정상적인 인간의 활동을 방해하는 대표적인 존재인 술을 이야기하며 이러한 엉뚱한 것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물론 여기서 의도하는 것은 술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술은 사람을 어둠속에 빠지게 하는 주범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꼭 술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고 혼미케하며 육체와 시간과 건강에 해로운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 의미에서 배격하라는 의미이다. 여하튼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영혼을 엉뚱한 것에 빼앗기게하는 모든 것들을 다 배격하고 우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영생복락의 길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생명의 길을 걷게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으라는 말씀이다.

세상에는 우리를 취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중에는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끄는 것도 많다. 술, 노름, 담배, 마약, 향락 등은 우리를 결국은 파멸의 길로 이끈다. 심지어는 그 자체로서는 건전한 것들이 거기에 취해버리면 우리의 삶을 파괴하기도 많다. 건전한 취미생활, 돈, 명예, 사랑, 지식, 문화, 과학 등등은 그 자체로서는 건전하고 유익한 것들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으니 그러한 것들에 취하게 되면 우리의 정신을 빼앗겨 버리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결국은 생명의 길을 가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요청해야 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모든 악한 것들은 배격할 수 있고, 건전한 것들은 올바르게 사용하며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은 단 한번만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단일회적인 것이지만 성령의 충만은 지속적인 것이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면 다시는 성령의 세례를 더 이상 받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그렇지 않다. 지금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가도 내일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언제나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신다.

그러나 아무리 성령께서 내주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의지가 성령을 외면하고 성령과의 관계에서 멀리가고자 할 때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허용하신다. 물론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성령께서 역사하시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보통의 경우에는 우리의 이성과 의지와 함께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를 힘쓸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고넬료의 가정은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여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의 말씀을 따라 성령 충만함을 받기위하여 말씀을 묵상하며, 깨어 기도하자.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자.

이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이다. 이것이 진실로 승리하는 삶이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삶이요,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의 삶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우리 모두에게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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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오후 설교] 주일의 의미

 

 


제목 : 주일의 의미

말씀 : 출20:8-11

 


1.주일 성수

주일(主日)성수(聖守)는 성도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의무이며 특권이며 사명이며 권리이다. 가장 복된 일이다. 그렇다면 주일을 지키는 것이 왜 특권이고 사명이고 복인가?

1)안식일의 의미

주일은 안식일을 기본으로하여 그 정신을 이어받아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지키는 가장 거룩한 절기이다. 그러므로 주일의 의미를 살펴보려면 먼저 안식일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안식일의 의미는 십계명의 말씀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십계명의 말씀 중 안식일의 규정을 말씀하고 있는 출20:8-10에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안식일은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다가 제 칠일에는 모든 것을 중단하고 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수고해서 이룬 것들을 누리면서 안식하게 하기 위하여 세우셨다는 것이다.

그 말씀 중 우리는 특별히 11절 후반절의 말씀 즉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즉 안식일은 다른 날과 전혀 다른 날이라는 것이다. 다른 날과는 완전히 구별하여 세운 날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따로 세워놓으신 아주 특별한 날이라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구별되다, 성별되다, 다르다 뭐 그런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그날은 다른 날과는 완전히 다른 날이라는 것이다. 그날은 다른 날과는 완전히 의미가 다르게 따로 구분해서 세워주신 날이라는 것이다. 구별해서 따로 세워놓으신 날이니까 다른 날과 구별해서 다르게 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른 날들과는 전혀 다르게 세상에서 하던 모든 일들을 완전히 중단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목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우리는 안식과 기쁨과 은혜의 충만함을 누림으로 복되고 기쁜 날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날은 가장 복된 날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세상의 모든 일, 근심, 걱정, 수고에서 벗어나 하나님 존전에 나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은총을 누리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그 복을 어디에다 비교할 것인가? 하나님도 알지못하고, 주님안에 있는 안식도 누리지 못하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도 누리지 못하고 그저 죽자사자 일만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란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

그렇다. 안식일을 따로 구별해서 주신 목적은 바로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 복을 주고 은혜를 주고 기쁨을 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날이 될 수 있느냐하면 그날을 특별하게 구별해서 보낼 때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날과 구별하지 못하고 다른 날과 별로 다르지 않게 보낸다면 그런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안식일 즉 주일의 의미를 기억하며 이 날을 거룩하게 보내기 바랍니다. 정말 특별하게 보내기 바란다. 일상적인 삶과 완전히 다르게 보내기 바란다. 정말 몸과 마음과 정신과 모든 것이 주님앞에 온전히 나아와 몸과 마음과 영혼에 온전한 쉼을 누리기 바랍니다. 진정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돌려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고 여러분 자신들은 주님 안에 있는 은혜, 그 기쁨, 그 안식, 그 평안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란다.

2)주일의 의미

먼저 주일(主日)이라는 말의 뜻은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그 날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날이다. 앞서 안식일의 의미에서도 보았지만 그날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은 날이므로 내 맘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그날 주님의 날이다. 물론 모든 날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이 날은 더더구나 더 그렇다.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여기서 오늘 말씀과 좀 다른 차원이지만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는 일요일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요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냥 노는 날의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공일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주일과 전혀 다른 의미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절대로 공일이 아니다. 이날은 주일이다. 주님의 날이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주님안에서 안식하는 날이다. 주님께 드려야할 날이다. 그러므로 꼭 주일이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라.

그렇다면 주일 즉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주의 날은 두가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이기에 그 날을 주님의 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계1:10에 보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할때의 상황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계시를 받을 때가 주의 날 즉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안식후 첫날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주의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의미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날을 주의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살전5:2, 살후2:2, 벧후3:10 등에 나타나는데 벧후3:10절에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말씀하면서 주님께서 재림하셨을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주님의 날이라는 뜻인데 하나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라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말한다. 그러니까 주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날인 주님의 부활과 재림의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이란 한마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날이다. 완전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신 날이다. 동시에 이날은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날이다. 사망의 권세, 즉 인간을 억누르고 있는 가장 무섭고도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신 날이다. 모든 어둠과 고통과 연약함과 허무함의 대표라고 볼 수 있는 죽음의 권세를 벗겨주신 날이다. 동시에 주님이 오셔서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실 날이다. 광야와 같은 세상속에서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실 날이다.

3)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이유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주일은 그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날이요, 은혜의 날이요, 안식의 날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이유를 분명하게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일은 진정한 생명의 날이요, 은혜의 날이요, 안식의 날이므로 안식일의 의미를 완성한 날인 것이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안에서 안식하며 평강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제정하신 날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완전한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죄와 연약함과 부족함과 허물과 어둠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온전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안식과는 완전히 180도 다른 영원한 고통속에 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서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서는 인간의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즉 십자가를 통하여 완전히 죄로부터 해방되고, 부활을 통하여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진정한 안식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곧 안식일의 완성인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안식일의 완성이기에 당연히 예수님께서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이 안식일을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안식후 첫날 즉 주님이 부활하신 주의 날 에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먼저 요20:19에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제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말씀이다.

또 행20:7에 보면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떡을 떼려하여 모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애찬이 아닌 성찬을 겸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매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별히 매주일 정기적으로 모인 사실에 대해서는 고전16:2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에 보면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매주일 첫날에 예배드리러 모일 때마다 연보를 하여 그것으로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구제금으로 사용하라는 그러한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주일이 안식일을 대신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었고, 그 오신 목적을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안식일을 완성시키셨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약의 안식일의 의미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을 이룬 날이 바로 주일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것은 오늘 본문8절의 말씀인데 곧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안식일의 주인이라함은 한마디로 주님이 안식일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주님의 것이라는 말씀이다.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이니까 그날은 주님의 것이고, 그분의 뜻에 의하여 움직여야 되는 날이고, 그 분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주일은 안식일의 뜻을 완성한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복을 주시려고 구별해서 주신 날이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그 안식일안에서는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안식일을 완성시키셨다. 그 안에 진정한 생명의 풍성함과 안식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한다. 그날은 주님의 날이다.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어야 한다.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날이어야 한다. 주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주님의 날이니까. 그러면 더 큰 생명의 은혜를 누린다. 축복을 누린다. 모두 주일을 거룩하여 지켜 복된 삶을 살아가자.


 

[주일오후설교] 주일의 의미

 


제목 : 주일의 의미

말씀 : 출20:8-11

 


1.주일 성수

주일(主日)성수(聖守)는 성도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의무이며 특권이며 사명이며 권리이다. 가장 복된 일이다. 그렇다면 주일을 지키는 것이 왜 특권이고 사명이고 복인가?

1)안식일의 의미

주일은 안식일을 기본으로하여 그 정신을 이어받아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지키는 가장 거룩한 절기이다. 그러므로 주일의 의미를 살펴보려면 먼저 안식일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안식일의 의미는 십계명의 말씀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십계명의 말씀 중 안식일의 규정을 말씀하고 있는 출20:8-10에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안식일은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다가 제 칠일에는 모든 것을 중단하고 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수고해서 이룬 것들을 누리면서 안식하게 하기 위하여 세우셨다는 것이다.

그 말씀 중 우리는 특별히 11절 후반절의 말씀 즉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즉 안식일은 다른 날과 전혀 다른 날이라는 것이다. 다른 날과는 완전히 구별하여 세운 날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따로 세워놓으신 아주 특별한 날이라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구별되다, 성별되다, 다르다 뭐 그런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그날은 다른 날과는 완전히 다른 날이라는 것이다. 그날은 다른 날과는 완전히 의미가 다르게 따로 구분해서 세워주신 날이라는 것이다. 구별해서 따로 세워놓으신 날이니까 다른 날과 구별해서 다르게 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른 날들과는 전혀 다르게 세상에서 하던 모든 일들을 완전히 중단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목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우리는 안식과 기쁨과 은혜의 충만함을 누림으로 복되고 기쁜 날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날은 가장 복된 날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세상의 모든 일, 근심, 걱정, 수고에서 벗어나 하나님 존전에 나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은총을 누리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그 복을 어디에다 비교할 것인가? 하나님도 알지못하고, 주님안에 있는 안식도 누리지 못하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도 누리지 못하고 그저 죽자사자 일만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란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

그렇다. 안식일을 따로 구별해서 주신 목적은 바로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 복을 주고 은혜를 주고 기쁨을 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날이 될 수 있느냐하면 그날을 특별하게 구별해서 보낼 때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날과 구별하지 못하고 다른 날과 별로 다르지 않게 보낸다면 그런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안식일 즉 주일의 의미를 기억하며 이 날을 거룩하게 보내기 바랍니다. 정말 특별하게 보내기 바란다. 일상적인 삶과 완전히 다르게 보내기 바란다. 정말 몸과 마음과 정신과 모든 것이 주님앞에 온전히 나아와 몸과 마음과 영혼에 온전한 쉼을 누리기 바랍니다. 진정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돌려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고 여러분 자신들은 주님 안에 있는 은혜, 그 기쁨, 그 안식, 그 평안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란다.

2)주일의 의미

먼저 주일(主日)이라는 말의 뜻은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그 날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날이다. 앞서 안식일의 의미에서도 보았지만 그날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은 날이므로 내 맘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그날 주님의 날이다. 물론 모든 날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이 날은 더더구나 더 그렇다.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여기서 오늘 말씀과 좀 다른 차원이지만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는 일요일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요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냥 노는 날의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공일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주일과 전혀 다른 의미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절대로 공일이 아니다. 이날은 주일이다. 주님의 날이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주님안에서 안식하는 날이다. 주님께 드려야할 날이다. 그러므로 꼭 주일이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라.

그렇다면 주일 즉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주의 날은 두가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이기에 그 날을 주님의 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계1:10에 보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할때의 상황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계시를 받을 때가 주의 날 즉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안식후 첫날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주의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의미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날을 주의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살전5:2, 살후2:2, 벧후3:10 등에 나타나는데 벧후3:10절에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말씀하면서 주님께서 재림하셨을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주님의 날이라는 뜻인데 하나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라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말한다. 그러니까 주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날인 주님의 부활과 재림의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이란 한마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날이다. 완전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신 날이다. 동시에 이날은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날이다. 사망의 권세, 즉 인간을 억누르고 있는 가장 무섭고도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신 날이다. 모든 어둠과 고통과 연약함과 허무함의 대표라고 볼 수 있는 죽음의 권세를 벗겨주신 날이다. 동시에 주님이 오셔서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실 날이다. 광야와 같은 세상속에서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실 날이다.

3)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이유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주일은 그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날이요, 은혜의 날이요, 안식의 날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이유를 분명하게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일은 진정한 생명의 날이요, 은혜의 날이요, 안식의 날이므로 안식일의 의미를 완성한 날인 것이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안에서 안식하며 평강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제정하신 날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완전한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죄와 연약함과 부족함과 허물과 어둠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온전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안식과는 완전히 180도 다른 영원한 고통속에 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서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서는 인간의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즉 십자가를 통하여 완전히 죄로부터 해방되고, 부활을 통하여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진정한 안식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곧 안식일의 완성인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안식일의 완성이기에 당연히 예수님께서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이 안식일을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안식후 첫날 즉 주님이 부활하신 주의 날 에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먼저 요20:19에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제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말씀이다.

또 행20:7에 보면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떡을 떼려하여 모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애찬이 아닌 성찬을 겸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매 주일마다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별히 매주일 정기적으로 모인 사실에 대해서는 고전16:2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에 보면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매주일 첫날에 예배드리러 모일 때마다 연보를 하여 그것으로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구제금으로 사용하라는 그러한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주일이 안식일을 대신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었고, 그 오신 목적을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안식일을 완성시키셨기 때문이다. 다시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약의 안식일의 의미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을 이룬 날이 바로 주일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것은 오늘 본문8절의 말씀인데 곧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안식일의 주인이라함은 한마디로 주님이 안식일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주님의 것이라는 말씀이다.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이니까 그날은 주님의 것이고, 그분의 뜻에 의하여 움직여야 되는 날이고, 그 분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주일은 안식일의 뜻을 완성한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복을 주시려고 구별해서 주신 날이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그 안식일안에서는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안식일을 완성시키셨다. 그 안에 진정한 생명의 풍성함과 안식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한다. 그날은 주님의 날이다.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어야 한다.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날이어야 한다. 주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주님의 날이니까. 그러면 더 큰 생명의 은혜를 누린다. 축복을 누린다. 모두 주일을 거룩하여 지켜 복된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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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가장 안전한 길

 

 

 

제목 : 가장 안전한 길

말씀 : 잠3:5,6

 


사람이란 어차피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이나 능력이나 젊음이나 사람이나 여하튼 무엇인가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여하튼 나는 그냥 내 존재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의지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고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어떤 참람한 사람은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미련한 중에 미련한 인생이요, 불쌍한 중에 불쌍한 인생이다. 그까짓 주먹이 세면 얼마나 셀까? 오래가면 얼마나 오래갈까?

대통령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기라야 고작해야 5년인데 5년 임기가 끝남과 함께 그가 의지하는 것도 사라진다. 돈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돈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길어봐야 100년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도 돈과 함께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다. 지식이나 명예와 권세나 과학이나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까? 물어 보나마나다. 가장 큰 능력 자, 가장 지혜로운 자, 가장 사랑이 충만한 자, 가장 인자한 자, 가장 영원한 자 이런 자를 의지해야 가장 안전한 것이다. 그가 누구일까? 물어보나마나 하나님이시다.

1.하나님을 의뢰해야 한다.

오늘 5절 말씀을 보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네 길을 지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바라보며 사는 자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가장 안전한 길이요, 가장 복된 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인가?

1)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依賴하여야 한다.

본문 5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 방법론으로써 제시하고 있는 것이 마음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마음을 다하라고 했을 때 마음이란 아주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 중심」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또한 다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총동원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좀 풀어 말한다면 마음과 정신과 의지와 중심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 어느 한 영역이라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전인격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동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신, 우리의 감정, 우리의 지식, 우리의 이성, 우리의 육체, 우리의 능력 등 하여튼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부분을 총동원하여 그 어느 부분이라고 빠짐이 없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맡기고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인격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서로 믿고 의지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어떤 영역을 남겨놓고 어떤 부분은 맡기지 않는다면 이것은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돈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몸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시간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하면 이것은 무언가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부는 온전한 믿음의 관계속에 있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도 감정도 육신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다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런 오류속에 살때가 많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감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지적인 것과 이성적인 부분을 하나님께 의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긴 하면서도 세상에 나가면 자기의 지식과 이성과 감정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 많은 것이다.

이것은 사실은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은 아무튼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라는 것이다. 상황과 조건과 시대의 흐름도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영향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여하튼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그야말로 갓난아기가 하나님만 졸졸 따라 다니는 것 같이 우리의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온전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삶을 살자.

2)人間에 대한 信賴를 버려야 한다.

오늘 본문의 5절 말씀에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너무 지당한 말씀이 아닌가? 우리는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다. 마6:2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의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무엇인가를 반드시 의지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데 자기지식이나 자기의 지혜나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돈을 의지하고 권력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자기의 지혜와 경험을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둘 중에 어떤 것을 의지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그것을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비교해보면 너무나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인간은 무능하다. 하나님은 전지하시지만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있다. 하나님은 영화로우시지만 인간은 비천하다. 하나님은 권능자이시지만 인간은 약하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지만 인간은 미련하다.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인간은 죄로 오염되어 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세상의 것은 영원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 둘 중에 무엇을 따를 것인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보나마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 자기 지식과 자기 경험과 자기 능력과 자기 의지를 포기해야한다. 그래야만이 온전히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다. 그래야 만이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도 깊이 되새기며 나보다는 하나님 편을 택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3)凡事에 하나님을 認定해야 한다.

본문 6절에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했다. 이 말씀도 정말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한다. 모든 말씀이 다 그렇지만 정말 깊이 묵상해보자.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중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여기에 앉아 있다. 그러나 범사라는 말에 주목해 보라. 과연 범사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말을 따르는가?

여기서 범사라는 말이 우리말 성경에는 한단어로 되어 있지만 원문성경에는 범과 사가 각각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범이란 「모두, 전체, 완전함」을 의미하며 사는 「길, 도로, 여행, 태도, 습관, 인생행로, 행위, 일, 일의 방식」 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범사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걸어가야 할 모든 길, 인생항로의 전체, 인생길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인정하라고 하였는데 인정한다는 것은 「알다, 이해하다」라는 뜻으로 경험해서 이해하고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아는 것이란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해하고 경험해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완전히 이해하고 경험해서 안다면 그 아는 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안다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이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월등하신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와나 권력과도 비교 할 수 없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영역에서 완전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나의 생명과 영원을 책임져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정말 이해하는가? 이 사실을 정말 아는가? 정말 인정하는가? 그러면 맡기라. 정말 하나님을 알고 느끼고 깨닫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자. 어떤 부분은 인정하고 어떤 부분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자.

범사라는 말을 다시한번 주목하라.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가치기준이 어떻게 달라져도,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심지어는 교회가 어떻게 변해간다해도 우리는 범사에 그를 올바르게 알고 오직 그 뜻만을 좇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말씀만이 유일한 잣대가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2.하나님을 依賴하는 자가 받는 福

그래서 오늘 본문 6절 하에 보면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범사에 그를 인정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신다고 했다.

여기서 지도하다는 말은 「평탄하게 하다, 곧게하다, 똑바르게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지혜, 능력, 경험, 이성 의지하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셔서 평탄케해 주신다는 것이다. 인생을 고통스럽게 하고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모든 울퉁불퉁하고 뾰족한 것들을 평탄하게 하셔서 그러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의 현실들을 이기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인생의 구부러진 것을 똑바르게 하여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자이시다. 전지자이시다. 사랑과 능력의 은혜와 평강의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그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목자가 되신다. 그 분만이 완전한 목자요, 선한 목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완전한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자.

우리의 알량한 명철도 의지하지 말라. 경험도 의지하지 말라. 지식도 의지하지 말라. 그런 것들은 다 불완전한 것들이다. 다 연약한 것들이 오직 주님을 의지하라. 주님을 의지하되 마음을 다하여 의지하라. 전인격을 다 동원하여 의지하라. 부분적으로 하지 말고, 취사선택해서 하지 말고, 어느 한 영역만을 맡기지 말고 전영역을 다 맡겨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라. 그리고 그를 따르라. 그리하여 선한 목자되시는 주님의 지도하심가운데 은혜와 평강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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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예배설교] 말씀에 순종하면

 

 

 

 

제목 : 말씀에 순종하면

말씀 : 잠3:7-10

 


우리는 누구나 다 복을 받기를 원한다. 부요한 삶을 원한다.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복된 삶을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 어떻게하면 윤택한 삶이 될까?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복의 근원, 복의 주관자와 함께 하는 것이다.

백성은 폭군을 만나면 괴롭다. 고단하다. 아내는 무능하고 사납고 폭력적인 남편을 만나면 그 삶이 심히 고단하다. 근로자는 악덕 기업주를 만나면 피곤하다. 그러나 성군을 만나면 백성이 평안하다. 유능하고 인자한 배우자를 만나면 그 상대방이 평안을 누린다. 선한 기업주를 만나면 근로자는 평안하다. 모든 인생이 동일하다. 누구를 만나느냐, 누구와 가까이 하느냐에 의하여 그의 삶이 좌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완전한 성군은 누구인가? 가장 큰 능력자는 누구인가? 말하나마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복의 근원자는 하나님이시다. 생명의 주관자이시다.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이생에서도 그렇고 저생에서도 그렇다.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주관자이시며 심판자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을 가까이 해야 한다. 가까이하며 섬기며 의지하며 맡기며 그분의 말씀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복이 온다. 반드시 형통한 삶이 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하나님을 바라보라. 나를 의지하지 말라. 세상을 의지하지 말라. 세상의 지식도 의지하지 말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러면 복이 온다. 반드시 온다. 안올래야 알올 수가 없다. 내가 복을 마다해도 온다. 복을 주신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1.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7절 上)

오늘 7절 상반절에 보면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는 말씀이 있다. 즉 자기가 똑똑한 것처럼 생각하며 제 고집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자기 생각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세상 사람들의 목표가 옳은 것인양 여기며 그러한 가치관과 그러한 목표를 가지고 살지 말라는 것이다.

도리어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지혜의 근원이시며, 하나님만이 참 능력자이시며, 하나님만이 참 구원자이시므로 오직 그분앞에 겸손히 엎드려 그분의 지시를 따르라는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다고 내 놓을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비록 피조물들 중에서는 제법 지혜롭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우리 인생이 아는 게 얼마나 될까? 우리 인생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얼마나 될까? 우리 인생에게 선한 모습은 얼마나 있을까? 우리 인생에게 아름다운 모습은 얼마나 될까? 우리 인생에게 의로운 모습은 얼마나 되는 걸까? 거룩한 모습은? 너무나도 부족한 존재가 아닌가?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가 아닌가?

그러므로 참으로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것이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철저하게 낮아져야 한다. 이것이 안되면 올바르게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이것이 안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은혜받지 못한다. 내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엎드릴 때 하나님의 은혜는 임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겸손에 대하여 누누히 말씀하고 있다. 약4:6에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다. 또 잠16:18절에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이고, 겸손은 복을 받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교만한 자는 반드시 패망할 것이고, 겸손한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섬길 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빌3:7,8의 말씀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배설물 즉 똥오줌과 같이 여겼다는 것이다. 하나님앞에 서보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 비교해보니까 그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지식, 재물, 권세, 학벌, 가문들이 다 똥오줌처럼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만큼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겸손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앞에서 비추어볼 때, 하나님의 은혜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은 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그야말로 똥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낄 때 엎드러지고 깨어지고 부서져서 주님을 온전히 따르게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전적으로 엎드러져서 주님을 따를 때 복을 주시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겸손하라. 엎드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며 철저하게 그분 앞에서 낮아지라. 그리하여 진정 하나님을 만나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자. 그래서 진정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삶을 살아가자.

2.악에서 떠나야 한다.(7절 下)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또한 동시에 악에서 떠나야 한다. 오늘 7절하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진실로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악에서 떠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은 복을 안받을래야 안받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앞에 겸손할 수 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 정말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할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악을 멀리할 수 밖에 없다. 왜? 그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이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할 수는 없으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존경심과 두려움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나와는 비교도 안되게 훌륭하고 능력있고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기 때문에 내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그 엄청난 모습 앞에 완전히 압도되어 완전히 주눅이 들어서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완전히 압도되어 더 어찌할 수 없는 상태의 모습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경외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면 어떨까? 말할것도 그분의 뜻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어찌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어찌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가 있을까, 어찌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릴 수가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 중의 하나인 악을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서워서라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악이란 무엇일까? 물론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여러 가지 경우가 있겠지만 통합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악이다. 반대로 선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선이다.

즉 남에게 물질적으로 큰 손해를 입히거나,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가져다 준다거나, 육체적으로 큰 상해를 입히거나 하는 등의 적극적인 악만이 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하는 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악이지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악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선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위임으로 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되새기며 살아가자. 과연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는 행위일까?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일일까? 혹시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안타깝고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정말 어떠한 형태로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향하여 나아가자. 그렇게 할 때 결국 하나님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남도 기쁘게 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3.처음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9절)

오늘 9절에 보면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첫 열매는 모든 소산물에 대한 대표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첫 열매를 드리라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우리가 수확한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먼저 드림으로 결국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게하라는 그런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가 비록 열심히 수고해서 얻었지만 사실인즉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터전을 주시고, 하나님이 건강을 주시고,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이 때를 따라 햇빛과 비와 공기와 토지와 건강과 시간과 이 모든 것을 주시기 않았다면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해서 무슨 소득을 올릴 수 있겠는가? 아니 무엇인가 할 수나 있겠는가?

그러니 마땅히 우리가 무엇을 하든, 무엇을 얻든 가장 먼저,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우리의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유권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겠다고 하는 신앙 고백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의 모든 것의 원소유자는 하나님이시다. 내 생명도 내 건강도 내 재물도 내 삶의 터전도 내 자녀도 내 지식도 내 형상도 내 재능도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마땅히 가장 먼저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2:8) 또 대상 29:14..“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라.”

그러므로 기억하라.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중에서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내 생명도, 경작하는 토지도, 산도 들도 강도 태양도 공기도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다. 영혼도 건강도 지혜도 감정도 지성도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활용하여 만든 집도 차도 모든 문화와 과학의 이기도 다 원소유권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모든 물적,지적소유권자이시다.

그러므로 마땅히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겸손한 모습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아름다운 자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모습으로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갈때에 더욱 하나님께는 영광을 우리에게는 은혜가 풍성한 삶을 살아가자.

4.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결과(8,10절)

이렇게 겸손히 하나님을 섬길 때 나타날 결과에 대해서는 오늘 8,10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즉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는 말씀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는 말씀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겸손히 하나님앞에 무릎꿇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인줄 알고 그분앞에 드리는 삶을 사는 자에게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더 부요한 삶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먼저 8절 말씀을 보면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의미를 보자. 여기서 이것이란 물론 앞부분에서 말씀하고 있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나 사는 삶을 말한다. 바로 이러한 삶의 모습이 우리에게 약이 된다는 것이다. 약이 되어 우리를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적으로 건강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모든 고통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뜻을 따르려는데서 비롯된다. 모든 영적,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부조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이후 우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너무나 많은 부조화가 생겼다. 그래서 생명의 원천이신,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멀어짐으로써 영적, 육적, 정신적 고통이 왔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하나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며 경외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겸손히 섬기라. 그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따르라. 그러면 평안을 누린다. 위로를 받는다. 영혼도 정신도 육체도 평안을 누리게 된다.

또 10절의 말씀을 보자.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무슨 말씀인가? 앞절에서는 처음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다. 첫 번째 것으로 가장 먼저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라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니까. 이렇게 이러한 사실을 알고 그 말씀대로 준행하면 더 많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도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며,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태도이며 믿음인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드리는데 어찌 하나님이 감동하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감동하시면 어찌 더 큰 은혜로 주시지 않겠는가?

이제 말씀을 정리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라. 자신을 신뢰하지 말라.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라. 인간은 별 것 아니다. 약하다. 부족하다. 미련하다. 어리석다. 허물이 많다. 곧 무너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다. 전능자이시다. 생명의 주권자이시다. 구원자이시다.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다.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겸손히 그 앞에 엎드리라. 완전히 그분을 인정하라. 신뢰하라. 경외하라. 존경하고 두려워하며 그 분의 뜻을 따르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줄 알고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라. 시간도 몸도 재능도 물질도 능력도 그 모든 것의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앞에 드리는 삶을 살라. 그러면 반드시 복된 자가 된다. 복이 저절로 온다. 은혜가 온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강건하고 평안한 은총을 누린다.

우리 온 성도들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앞에 엎드리며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며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갈때에 오늘 말씀에서 약속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영적,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인 부요함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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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참 지혜자

 

 


제목 : 참 지혜자의 삶

말씀 : 엡5:15-18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시 잠시 들러 복음을 전한 뒤 다시 3차 전도여행시에 와서 3년간이나 눈물로 목회 하여 세운 교회였다.(행20:31) 그리고 당시 에베소는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항구도시로 해상교통의 요충지기도 했고, 이 에베소에서 소아시아 전역으로 도로가 나 있어서 인근의 교통의 요충지기도 했다.

따라서 상업과 무역업이 발달하였고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어마어마한 아데미 신전이 있어서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에베소 교회도 소아시아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교회도 여타의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가 있는 교회이기도 했다. 물론 에베소교회만의 어떤 특별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교회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었고, 또한 신분적으로도 자유자와 종된 자들이 혼재해 있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아직도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었고, 이방인들은 헬라문화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세속으로부터의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말씀을 보면 1장에서 3장까지는 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적인 말씀을 한 다음에 4장에서 6장까지는 주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성도의 거룩한 삶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런 차원에서 주신 말씀이다. 우리가 이제 주님을 믿고 거듭난 존재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과연 이 악하고 혼탁한 세상속에서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세상 속에 살아야만 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세상 속에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세월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는 오늘 말씀의 첫 부분에서 우리가 세상 속에 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지혜롭게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15,16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그런즉」이라는 말은 이유접속사로써 바로 앞부분의 말씀들이 이제부터 논하고자하는 말씀의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즉 앞부분에서는 세상은 어두움이고 그리스도인은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에 참예한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런즉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는 것이다.

즉 이제는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살펴서 빛의 자녀처럼 살아가라는 말인 것이다. 세상을 따라 아무렇게나 살아가지 말고 참된 지혜를 따라 삶으로 말미암아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세상의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 빠져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1차원적인 욕구 속에 살아간다. 1차적인 욕구란 먹는 욕구이다. 좀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2차적인 욕구를 위하여 살기도 한다. 그것은 쉽게 말하자면 정신적,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사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좀더 고상한 사람들은 3차적인 욕구까지도 추구한다. 이것은 남을 위한 삶이다. 선을 베풀며, 남을 도우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충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거기에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이것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추구해야할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한가지 더 추구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과 관계이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할 부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죽음 이후에 우리가 가야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사람이 추구해야할 첫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만이 진실로 세월을 아끼는 삶인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의 생을 온전하게 준비하는 행위이다. 그것만이 인간으로써의 진정한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삶이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 얽매여 있는 삶이나 좀더 고상하게 문화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나 더 나아가서는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까지도 거기에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면 그것은 부족한 삶이다. 그것은 온전치 못한 삶이다. 반쪽 인생이다. 설령 돈과 명예와 부귀와 세상적인 영광을 누린다해도 그것은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삶을 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자. 물론 1차적인 욕구나 2차적인 욕구나 3차적인 욕구도 추구해야 되겠지만 거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며, 살아가자. 그리하여 여기서 누려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가운데 미래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자가되자.

2.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의 뜻을 살피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지금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주님은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시는가? 오늘의 시간들을 주님은 어떻게 보내시기를 원하시는가? 나에게 재능이 있다면, 나에게 물질이 있다면, 나에게 건강이 있다면, 나에게 지식이 있다면, 나에게 권력이 있다면 주님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시는가, 이것을 살펴서 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지 트루엣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만이 온전한 것이다. 변함없는 진리이다. 영원한 것이다. 그 곳에만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영생이 있다. 그러므로 그 뜻대로 살 때만이 진정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나와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온 우주까지도 진정한 기쁨과 영광을 받으며 만족을 누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한다.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깨어 기도해야 한다. 물론 주님 뜻대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외롭고 고독한 길일 때도 있다. 고난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살길이기에 그것만이 생명의 길이기에 그것만이 궁극적인 승리의 길, 축복의 길이기에 우리는 가야만 하는 것이다.

3.성령 충만하여 사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가 참된 지혜의 삶을 사는 비결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오늘 18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당시 에베소는 매우 번창한 도시였다. 소아시아의 중심적인 도시 중의 하나로 상업이 발달하고 농업 역시도 번창해 있었다. 아데미 여신의 커다란 신전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고, 그에 따라 향락의 문화도 번창해 있었다. 그래서 사도는 특별히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술이란 우리 인간의 정신을 빼앗아가는 대표적인 존재이다. 술은 인간의 윤리, 도덕성을 약화시킨다. 그래서 많은 죄악들이 술과 연관되어 있다. 또 평상시에는 얌전하던 사람도 술만 들어가면 떠들어대기도 하고, 난폭한 짓을 하기도 하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기도 한다.

또한 술은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육체적인 제어 능력도 상실하게 한다. 그래서 술은 인간의 혼미케하는 주범이다. 뿐만아니라 건강을 해치고 시간을 빼앗는다. 그래서 사도는 정상적인 인간의 활동을 방해하는 대표적인 존재인 술을 이야기하며 이러한 엉뚱한 것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물론 여기서 의도하는 것은 술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술은 사람을 어둠속에 빠지게 하는 주범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꼭 술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고 혼미케하며 육체와 시간과 건강에 해로운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 의미에서 배격하라는 의미이다. 여하튼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영혼을 엉뚱한 것에 빼앗기게하는 모든 것들을 다 배격하고 우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영생복락의 길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생명의 길을 걷게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으라는 말씀이다.

세상에는 우리를 취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중에는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이끄는 것도 많다. 술, 노름, 담배, 마약, 향락 등은 우리를 결국은 파멸의 길로 이끈다. 심지어는 그 자체로서는 건전한 것들이 거기에 취해버리면 우리의 삶을 파괴하기도 많다. 건전한 취미생활, 돈, 명예, 사랑, 지식, 문화, 과학 등등은 그 자체로서는 건전하고 유익한 것들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으니 그러한 것들에 취하게 되면 우리의 정신을 빼앗겨 버리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결국은 생명의 길을 가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요청해야 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모든 악한 것들은 배격할 수 있고, 건전한 것들은 올바르게 사용하며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은 단 한번만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단일회적인 것이지만 성령의 충만은 지속적인 것이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면 다시는 성령의 세례를 더 이상 받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그렇지 않다. 지금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가도 내일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언제나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신다.

그러나 아무리 성령께서 내주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의지가 성령을 외면하고 성령과의 관계에서 멀리가고자 할 때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허용하신다. 물론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성령께서 역사하시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보통의 경우에는 우리의 이성과 의지와 함께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를 힘쓸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고넬료의 가정은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여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의 말씀을 따라 성령 충만함을 받기위하여 말씀을 묵상하며, 깨어 기도하자.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자.

이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이다. 이것이 진실로 승리하는 삶이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삶이요,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의 삶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우리 모두에게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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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 설교] 왜예수를믿어야하나

 

 


왜예수를믿어야하나

제 목: 새사람의 새습관

 

 
(에베소서 4:22~24)

17년도를 마지막 보내는 주일에, 지난해가 성공의 해가 되었든, 실패의 해가 되었든 망각의 바다에 흘려 보내고 87년 새해를 잘 맞이하고 잘 보낼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줄 압니다. 그래서 오늘 "새사람의 새습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 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좇아 가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반대로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즉 옛습관과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이 되어 새 습관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1.새 사람을 입으라

헌 옷을 벗어버리듯 죄악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듯이 새 사람을 입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낡은 옷 꿰매어 입듯이 사람이 노력으로 수양하고 교양을 쌓아서 새 사람이 되고 구원 받는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멸망할 옛 사람을 회개함으 로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새 생명을 얻고 예수그리스도를 옷입듯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새 생명이 되는 것이요, 새 사람이 시작되 는 것입니다.(요 1:12, 3:16, 6:47, 롬10:10등).

말씀은 생명있는 씨앗과 같아서 말씀을 들을 때 믿고 받아 들이면 옥토에 떨어진 씨 같아서 새 생명이 시작되지만, 말씀을 귀등으로 받아 넘기고 믿지 않으면 길바닥에 떨어진 씨 같 아서 새(마귀)가 와서 가로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 처음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었으면, 과거에 마귀의 유혹을 따라 육신의 욕심대로 행하던 옛 습관을 회개 함으로 벗어 버려야 됩니다. 또 밤송이가 영양분을 잘 빨아 들여 익으면 자연히 껍질이 벗겨지면서 탐스러운 밤톨이 쏟아지는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신령한 은혜를 받으면 과거에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마귀가 유혹하는대로 행동하는 옛 습관은 인간을 썩게 만들고 파멸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다음에는 말씀을 잘 받아먹고 은혜를 잘 받으며 회개하여 옛 습관을 벗어 버리고 끊어 버려야 합니다. 묵은 해를 보내며 썩고 냄새나는 옛사람의 못된 습관을 벗어 버리기로 결심하고 기 도해야 되겠습니다.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와서 핥아 먹듯이 예수님을 몇년씩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을 때 가졌던 못된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안되겠습니다. 술먹은 습관, 도박, 손장난하는 습관, 춤추던 습관, 음란한 습관, 부부싸움하는 버릇, 바가지 긁는 버 릇, 거짓말하는 버릇등 썩어져가는 더러운 습관을 끊어버리고,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새해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나쁜 습관 한가지 때문에 임금님 진지 그릇같이 귀한 그릇이 될 사람이 강아지 밥그릇처럼 천한 그릇이 되고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 서도 결단력이 있고 결심이 강한 사람이 성공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김 유신 장군이 젊어서 늘 주색에 빠지는 것을 보고, 하루는 그의 모친이 "치국평천하를 꿈꾸는 사람이 항상 주색에 빠져서야 어찌 큰 뜻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눈물로 타이를 때 그는 결심하고 술집에도 기생집에도 안갔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중 말위에서 졸다 보니 어느새 영특한 말이라 전에 잘다니던 기생집 앞에 와서 멈추어 섰습니다. 이때에 눈을 든 김유신 장군은 말에서 내려 "왜 나를 이리로 데려 왔느냐?"고 호통을 치고 긴 칼을 뽑아 그 애마의 목을 쳐서 떨어 뜨리고 뚜벅 뚜벅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목사는 설교도 잘하고 똑똑한데 말버릇이 나빠서 늘 교회에서 배척을 당하다가 어느 낙도 작은 교회에 가서 자기의 입 버릇을 고치려고 밤톨만한 조약돌을 주어서 입에 물고 3년동? 안을 지내고서 말 버릇을 고치고, 환영받는 훌륭한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습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성공자가 될 수도 있고 패배자가 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받을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묵은 해와 더불어 마귀가 유혹하는대로, 육신 의 정욕대로 행하던 썩어져 가는 옛 습관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사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2.새 사람의 새 습관을 가지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되었으면 새 사람다운 습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신 말씀대로 옛 사람의 습관은 십자가에 못박고 새 사람의 습관을 가지고 살 아야 되겠습니다.

1)모든 예배에 출석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시간마다 갈까 말까 망설이고 유혹받는 정도의 신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주일날 친구가 등산가자, 낚시가자, 유혹을 받을 정도가 되면 안됩니다. 감히 그런말도 못 꺼내게 엄한 신자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밤 예 배시간에 세계복싱 타이틀 매치를 한다고 해도 탁 꺼버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용기를 가져야지, 무슨일이 있을때마다 곶감 빼 먹듯 하면 아직 좋은 신자 되기는 늘린것입니다. 특히 일주일의 7분의 1, 그 하루는 주님의 날로 성별해 바쳐야 그 가정, 그 나라에 평강과 복을 주십니다. 이사야서 58장 13절, 14절에서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을 행치 아니하며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 후 토요일은 일요일로 바뀌었습니다.) 시편 84편에 보면 주의 제단에 집을 짓고 보는 참새 와 제비도 부러워하면서 "주의 집에 거하는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고 했고 "주의 궁정(교회)에서 한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하고 하면서 성전을 사모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눈물 골짜기로 다니며 슬픔과 고통을 만나도 때를 따라 위로의 샘물을 얻게 하고 은혜의 단비를 내려 주신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주일낮 예배는 물론 밤 예배도 열심히 출석하여 T.V앞에서 시간보내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종교가 그렇게 부패했는데도 규례를 따라 꼭 꼭 성전에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2)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의 가장 기초적이면서 중요한 것은 내 수입의 십분의 일을 정확히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를 하나님께 돌려 드리지 못하는 사람의 다른 헌금은 올바른 헌금이라고 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박사가 설교하는 중에 "오늘날 미국 사람의 가장 큰 죄악의 하나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께 대한 채무 이행을 기피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레위기 27장 30절) 마당히 갚아야 할 빚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기 전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헌금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강도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간신히 구원 받았으니 십일조를 여생, 구원에 갖다 부치지는 않습니다마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사람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것이며 진정한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순교자라고 불리우는 리차드 윔브랜드(Richard Wurmbrand)라는 사람은 공산치하에서 그 극 심한 고문을 받으며 감옥 생활를 할 때에도 일주일에 빵 한덩어리씩 주는 것과 매일 더러운 국한그릇씩 주는 것을 받아서 십의 하나씩 주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더 약한 형제에게 주며 십일조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맨솔래덤(mentholatum)의 주인공 알버트 하이드(Albert H yde)씨는 십일조를 드리기로 결심한 다음 언손에 바르는 약 맨솔래덤을 발명하여 돈을 많이 벌었는데 하나님이 삽으로 떠 넣어주면 반드시 잊지않고 하나님께 떠서 바치곤 했는데 마침 내 하나님께 가장 많이 바치는 신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YMCA에 수백만불을(당시 돈 으로)내 놓았고 일본에서 버는 돈만 가지고 일본 선교사업비 전부를 부담할 수가 있었고 그가 87세에 죽을 때는 150만불(현 150억도 넘는 액수)를 선교사업에 내놓았습니다. 십일조로 축복받은 윌리암 콜게이트(William Colagate)는 16세때 집이 너무 가난하여 집을 떠나가 다가 전에 알던 선장노인을 마나서 돈을 벌려고 뉴욕으로 가는데 자기는 비누와 양초 만드는 기술 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선장노인은 무릎꿇고 간절히 기도해 주고나서 충고하기를 "언제인가 뉴욕에서 가장 훌륭한 비누업자(maker)가 생겨날 것이다. 그 사람은 다 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네가 될 수도 있다. 부디 착한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께 네 마음을 바쳐라. 그리고 네 소유에서 주님의 것을 꼭 돌려 드려라. 또 정량을 속이지 않는 정직한 비누를 만들어라. 그러면 분명히 너는 번영하고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을 때 콜게이트(Colgate)는 말을 명심하고 교회 생활을 철저히 하며 십일조를 잘 드렸습니다. 처음 1달러를 벌었을때 10센트를 드리고, 점점 축복을 받아 정식 사원이 되고 동업자가 되고 결국 자기의 회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10의 5조까지 드리다가 최후에는 모든 것을 다 바쳤고 수억만달러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록펠러(Fockefeller)는 어려서 어머니를 도와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는데 첫 월급으로 주금 1불 50센트를 받아 왔을 때 그의 어머니가 그중에 10분의 1조를 하나님께 드리면 잘살게 된 다고 말씀할때 꼭꼭 하기 시작하여 엄청난 재벌이 되었는데, 부디 자녀들에게 십일조를 꼭 가르쳐서 충성된 청지기가 되도록 독자들에게 일러 달라는 부탁을 하더랍니다. 십일조를 안해도 부자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보장을 받지 못하며 언제 날아 갈지도 모릅니 다. 자자 손손 축복받는 재물이 되지 못합니다. 그외에도 전 세계에 얼마나 많은 간증자들이 있는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성경 가운데 다른 곳에는 하나님을 시험하면 무서운 죄가 된다고 했지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한데가 없습니다. 오직 말라기 3장 10절에만 시 험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여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되 바칠때 마다 이럴까 저럴까 시험을 받으면 아직 하나님께서 마음놓고 축복하실 수가 없고 의례히 무슨 수입이나 크건 작건 생길때마다 하나님의 것을 아까운 마음없이 바치도록 습관화 되어야 합니다. 십일조의 습관은 복 받는 습관입니다.

3)하나님과 대화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대화란 누구와 말을 주고 받는 것인데 매이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의논하는 것과, 매일 단 두장씩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그속에서 듣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육신의 양식을 꼭 찾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 영의 양식을 반드시 먹는 습관을 가졍야 합니다. 기도가 아침의 열쇠가 되어야 하고 저녁의 자물쇠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고 무슨 문제나 기도로 해결하도록 해야 됩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번씩 목숨걸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기 때문에 항상 승리했습니다. - 아 멘 -
출처:금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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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진정한 종교

 

 


제목 : 참된 종교

말씀 : 요3:10-17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왜일까? 그것은 두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는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심각한 죄와 무지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누구에게나 절대자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알든 모르든 어떤 절대자에 대한 갈급함으로 절대자를 찾게되고 그것이 종교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영적인 부분이 없다면 영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인간에게 도덕적인 관념이 전혀 없다면 도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영적 관념이 있기에 신을 생각하고, 도덕적 관념이 있기에 도덕적 삶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여러 가지 종교를 가지고 신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와 같이 영적인 존재이므로 무언가 절대자를 찾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참으로 올바른 것을 찾지 못하고 그저 나름대로 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찾아 섬기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하여 어둠과 무지 가운데 빠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쉽게 말하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말이다. 영적인 요소가 있어서 무언가 신을 찾기는 찾는데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엉뚱한 것을 찾아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와 어둠 속에서 나름대로 이것을 저것을 찾다보니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난립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신을 올바르게 만날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 우리에게 참 생명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

1.참된 종교의 조건

1)인간을 찾아와 자신을 계시해주고 구원해주어야 한다.

앞서 말씀드린바와같이 인간은 죄와 무지로 인하여 스스로는 참신을 찾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신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신이 인간을 찾아와 신과 세상과 인간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해 줄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신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신을 만난다는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는 신은 무궁무진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히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이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능력과 지식과 지혜가 도저히 따라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죄 때문이다. 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어두워지고 캄캄해져서 도저히 인간 자신으로서는 참신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정말 무지하고 연약하고 한계가 있고 죄가 있는 인간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도를 닦는다고 알 수 있겠는가? 천만의 말이다. 백날 연구해도 모른다. 인간이 아무리 궁리해봐야 도로 그 자리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크기나 능력이나 지혜나 의나 선이 우리보다 더 작은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능력보다 훨씬 큰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갓난아기가 어떻게 인간이 달나라에 간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본래부터 인간은 지혜나 능력이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작은 존재였는데 거기다가 죄로 말미암아 그 영혼까지 어두워졌으니 어떻게 하나님을 스스로 알겠는가? 그러므로 신을 알려면 신이 우리를 찾아와서 신 자신에 대하여 알려 주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물론 구원도 동일하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기 위하여 백날 연구하고 도를 닦아도 헛수고다.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의 길을 알 수 없다. 설령 안다고 해도 나 혼자 그 길로 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럴만한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란 신이 직접 인간을 찾아와서 자신에 대하여 알려주시고, 또한 구원의 손길을 뻗어 인간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종교이다.

2)우주만물의 기원을 분명히 제시해 주어야 한다.

참 종교라면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작을 알지 못하면 돌아갈 곳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처음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원위치로 돌아가겠는가?

종교란 결국 근원에 관한 문제이고 시작과 마지막에 관한 문제이다. 물론 현재의 문제도 포함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한 세상이다.

그런데 만약 모든 우주만물의 근원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면 그 종교가 어떻게 인간을 궁극적인 행복의 길로 이끌어갈 수가 있겠는가? 인간을 궁극적인 행복의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참 생명의 종교라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참된 종교는 인간을 비롯한 우주만물의 시작과 끝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3)인격적 만남과 올바른 윤리관이 있어야 한다.

신은 선을 전제로 한다. 물론 악신도 신은 신이겠지만 진짜 신은 절대 선과 절대 의와 절대 거룩과 절대 진실과 전능과 전지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신은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는 능력도 자격도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이라면 선이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하고 거룩해야 하며 따라서 진정한 종교라면 인류에게 진정한 선과 의와 거룩과 진실에 대해서 올바르게 말해주어야 한다.

또한 신은 인격적이어야 한다. 인격적이라 함은 영성과 지성과 감성 등을 말한다. 인격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 교제하는데 필요한 요소이다. 인격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통할 수 있는 것은 이성과 지성과 감성이라는 인격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신과 인간이 교제하기 위해서는 신도 인격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영성과 지성과 감성을 가지고 인간과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감동시킬 수 있고 하면서 교제할 때에 비로소 인간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라면 인격적인 신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4)인간의 실상을 정확하게 진단해 주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시작과 더불어 현재의 상태에 대한 명확한 진단과 그 진단을 바탕으로 한 처방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병에 걸렸을때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일단은 그 시작점 즉 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고 또 예방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는 현재의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를 알아야한다. 그래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단순히 약물로 할 것인지, 수술을 받아야 할 것인지, 입원을 해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제는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원인과 상태를 알아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도 동일하다. 인간 자체나 인간 속에 들어있는 죄의 기원이 어디서 온 것인지, 현재의 상태는 어떤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이것을 알아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종교는 인간의 실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그 해결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5)인간 생명에 관한 분명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세상에 있어서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중에서도 인간의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하셨다.

따라서 진짜 종교는 무엇이냐하면 결국 인간에게 진짜 생명을 줄 수 있는 종교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죄의 문제, 육체의 한계의 문제 등을 완벽하게 해결하여 진짜 생명을 얻게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진짜 종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윤리적인 종교라해도 이 문제를 해결하면 참종교라할수 없다. 아무리 인격적인 교제가 있다해도 마찬가지다. 천하보다도 귀한 인간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완전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그것은 결코 완전한 종교가 아닌 것이다.

6)내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다. 영은 죽지 않는다. 따라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참된 종교는 이 영원한 세계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아무리 윤리적이고 조직적이고 선하다고 해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을 해주지 못한다면 그런 종교는 가짜이거나 불완전한 종교이다.

2.참된 종교의 모든 조건을 갖춘 종교는 오직 기독교뿐이다.

그렇다. 이 모든 조건을 100%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 뿐이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참종교의 조건중의 한 부분을 말씀하고 있다. 그중에 가장 핵심인 인간의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오늘 13절에서는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심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또한 16절에서는 예수님이 내려오신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는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생명을 구원할 방법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말씀하신다.

그밖에 오늘 기독교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며, 하나님이 찾아오신 종교이다. 인간의 연구나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을 계시해주셔서 알게 하셨으며, 우리를 직접 찾아오셔서 구원해주신 종교다.

우주만물의 기원에 대해서 분명히 제시하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인격적 만남과 윤리관이 있다. 인간의 실상을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고, 그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결법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감히 타종교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는 방법으로 인간의 생명에 대한 분명한 해결점을 가지고 있다.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영광의 나라에 대하여 확실히 보장해주고 있다.

다른 종교들은 비록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건전하다고 해도 이러한 조건들 중 일부는 만족시킬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는 만족시키지 못한다. 또 미신이나 조상이나 자연을 숭배하거나 온갖 잡신들을 섬기는 행위는 이러한 참 종교의 조건들을 거의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종교들은 결코 참 생명의 종교라고 할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기억하며 오직 참된 생명의 종교인 우리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그 은총가운데 살게 된 것에 대하여 정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라. 누가 어떤 말로 미혹한다해도 오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흔들리지 말라.

인간 나름대로 생각한 것들은 다 부족하고 완전치 못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말씀위에 서라. 아무리 건전하고 윤리적인 고상한 종교라해도 인간이 스스로 고안해 낸 종교, 인간이 신을 찾아 올라가는 종교,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애쓰는 종교, 이런 종교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거기에 순복하고 그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때에 진정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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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예배설교] 악의 세력

 

 

 

말씀 : 잠9:13-18

제목 : 악의 유혹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서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오후 예배 시간에 예배당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것이냐, 아니면 좀 바쁜 일이 있는데 그것을 처리해야 할 것이냐, 지금은 매우 나른하고 곤한 시간인데 내 육신의 피곤함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앉아 졸 것이냐, 아니면 비록 나른한 시간이지만 주의 성령의 능력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것이냐 여하튼 우리는 언제나 선택 앞에서 살아가게 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 선택의 여지도 없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처럼 보이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실상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가 않다. 선택의 여지는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똑같이 나른하고 곤한 시간에 예배를 드려도 어떤 사람은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고, 어떤 사람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땅으로 떨군다. 똑 같은 설교를 해도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아 아멘으로 받아들이지만 어떤 무덤덤하게 앉아 있다.

사실 모든 선택의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 내가 선과 진리와 은혜의 선택을 했다면 그 결과는 은혜와 생명으로 다가올 것이요, 반대의 선택을 했다면 말할것도 없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어떤 상황이나 어떤 여건가운데서도 다른 어떤 것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내가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최선의 선택을 통하여 내 인생을 최선의 것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물론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하기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죄된 육신의 본성과 무지로 말미암아 판단력이 흐려져 있다. 우리의 지혜나 지식이나 경험도 온전치 못하다. 더구나 지혜의 소리와 악의 소리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그리고 세상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참된 지혜의 소리를 버리고 악의 소리에 끌려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많은 착각과 혼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는 잠9장의 말씀도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교훈의 말씀을 주신다. 지혜의 소리와 악의 소리가 오늘도 바로 우리 곁에서 들려오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올바른 선택을 하여 어떻게 응답하며 살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지혜자의 초청을 살펴보았다. 지혜가 최상의 잔치상을 준비해 놓고 우리를 부른다는 것이다. 지혜안에는 최상의 잔치가 준비되어 있으니 모든 어리석은 초청을 뿌리치고 지혜의 초청에 응답하여 생명의 은총을 누리라는 말이다.

이렇게 지혜의 초청에 대하여 말씀한 다음에 오늘 말씀에서는 악의 초청을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13-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미련한 계집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을 불러 이르되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1.우매자의 소리에 현혹되는 이유

먼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내용은 미련한 자의 특징이다. 미련한 계집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물론 직접적으로는 방탕한 여인을 말하지만 꼭 방탕한 여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유혹하여 죽음의 나락으로 몰고 가는 모든 악의 세력을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모습은 어떤가?

먼저 그들은 떠들며 어리석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떠든다는 것은 아무 생각없이 되는대로 천박하게 지껄이는 모습을 말한다. 그저 먹고 마시며 욕망의 노예가 되어 방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멋대로 생각없이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무지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심령속에 자리잡고 있는 심각한 무지 때문에 그 결과가 어떤지도 알지 못하는채 방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도무지 인생이 무엇인지,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명의 은총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인생의 결국이 무엇인지,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기에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죄로 인한 무지가 인생을 완전히 어둠의 나락 속으로 빠뜨려 아무런 죄의식이나 두려움이 없이 제멋대로 떠들어대며 먹고 마시며 방탕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먼저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기억하자. 무지가 큰 죄다. 무지가 사람 죽인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진리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또 호6:3절에는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러므로 더욱 힘써 말씀을 상고함으로 진리의 길로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2.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악의 세력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미련한 인생들이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가 추구하는 쾌락적인 삶이 마치 자유나 즐거움이나 기쁨으로 생각하며 다른 사람까지도 그러한 방탕한 삶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할 수만 있으면 다른 모든 사람을 유혹하여 함께 향락을 누리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함정에 빠뜨릴 자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미련한 계집으로 대변되는 악의 세력이 집문과 성읍의 높은 곳에 앉아서 지나가는 행객들을 불러 유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집문 앞과 성읍의 높은 곳에서 부른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장소를 불문하고 혹은 대상을 불문하고 유혹의 손길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집 문은 자기가 기거하는 집을 말하고, 성읍 높은 곳은 모든 사람들이 다니는 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문에서 그리고 성읍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불러 유혹을 한다는 것은 자기 집 문앞으로 스스로 향락을 위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성읍의 대로를 다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유혹의 소리는 장소불문, 인간불문이라는 것이다. 유혹의 손길은 모든 장소에 모든 사람의 곁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도시나 농촌이나, 교회 밖에나 교회안에나, 가정이나 학교나 여하튼 어느 곳에도 죄의 유혹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한다.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3.악의 달콤한 유혹

특별히 이 음녀의 유혹의 소리를 들어보라.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17절)“ 도적질한 물, 몰래먹는 떡, 이것은 물론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남의 이목을 피하여 행하는 악한 행동을 말한다. 악의 세력이 이런 표현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결국 악의 세력마져도 그런 행위가 옳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더 달고 맛이 있으니 같이 먹자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옳지 않은게 뭐 대수냐 달고 맛있기만 하면 되지, 진리가 다 뭐냐 선은 또 뭐냐 그저 내 육신 편하고 즐겁고 만족하면 되는 거지 뭐 그런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주 교묘한 사탄의 전술이다. 그야말로 양심에 화인 맞은 소리인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죄된 인간의 본성과 죄된 인간의 욕구를 부추기는 전형적인 사탄의 전략인 것이다. 달콤한 유혹으로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다. 죄의 욕망을 자꾸 부추겨서 결국은 죄의 나락 속으로 빠뜨리려는 것이다.

4.악의 초대에 응한 결과

정말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떳이 맛이 있을까? 물론 미련한 자의 소리다. 사탄의 소리다. 유혹의 소리다. 그 결과는 오직 죽음 뿐이다. 오늘 18절의 말씀을 보라.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가 그의 곳에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음부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무슨 말인가? 죽은 자가 그곳에 있다, 그의 객들이 그곳에 음부에 있다. 모두 같은 말이다. 한마디로 그곳에는 곧 그들이 좋다고, 즐거움이 있다고, 쾌락이 있다고 하는 그곳에는 오직 죽음의 그림자만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시체만이 즐비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객들 즉 그들과 함께 동료가 되어 함께 쾌락 속에 잠겨 있던 모든 사람들의 갈 곳은 음부 깊은 곳 곧 지옥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어리석은 자의 길은 오직 죽음뿐이다. 죄의 유혹은 달콤하게 다가오지만 그것은 오직 멸망뿐이다. 그런데 대단히 안타깝게도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육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죄의 소리에 너무 약하다. 그 길이 쉽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 길이 당장은 더 달콤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자의적으로 때로는 타의적으로 그러한 길로 간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죄는 지금도 우리에게 쾌락과 즐거움과 기쁨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사실 거기는 죽음뿐이라는 것이다. 거기는 후회와 절망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선택은 자유이나 결과는 결코 자유가 아님을 기억하라. 오직 진리의 소리, 생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따라 살아갈 때에 더욱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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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후설교 - 생명에 관한  과학

 

 


말씀 : 욥38:1-11

제목 : 신앙과 과학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크게 두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곧 무신론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모든 종교는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이 사람들은 다신론자들이거나 종교다원주의자들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신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또 어떤 이는 자신이 나름대로 섬기는 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다른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영이 완전히 죽어 있거나 조금 살아있다해도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이 죽어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오직 육체적, 정신적으로만 사고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영역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어서 올바르게 사고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인간이 만든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의 두가지 큰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그들의 영이 죽어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 오는 오류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라야 교제가 가능한데 영이 죽어있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과 교통이 안되니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고 그 은혜도 누리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알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오류는 과학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모습니다. 그러니까 영이 죽어 있는 인생은 인간의 모든 삶을 그저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이 완전히 죽어있으니까 그 영역은 부정하고 인간사의 모든 일들이 정신적, 물질적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그저 정신적인 측면으로 이해하여 그건 나약한 사람들이 마음에 위안을 받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저 물질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하나님을 어디 있느냐, 보았느냐, 천국에 갔다 왔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과학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눈으로 보았느냐, 귀로 들어보았느냐, 천국에 다녀왔느냐고 묻는 것은 결국 그게 과학적으로 맞는 말이냐,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하는 질문이고 이러한 질문은 바로 과학지상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여러분, 과학이 뭔가? 과학(科學, science)에 대하여 사전에서는 이렇게 나와 있다. ‘자연세계에서 보편적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 지식.’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과학이란 자연에 관한 것 즉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경험 가능한 세계에 대한 어떤 법칙과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과학은 인간과 우주의 모든 영역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아닌 것이다. 과학은 우주와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도 아니고 그것을 다 밝혀낼 수도 없고 그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도 없다. 그러니 과학의 범위 밖에 있는 하나님을 과학의 범주 안에서 이해하고 증명하고 알아내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마치 과학이 만능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과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으면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규명될 수 있는 사실만 인정할 수 있고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1.과학의 지식적 한계를 알지 못하는 오류

과학은 지식적으로도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말하면 과학으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죽음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류의 미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진정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선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 과학은 이런 인간의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나 해결점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또한 그런 근원적인 문제 말고 일반적인 지식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지식이 과학의 법칙에 의하여 실험될 수 있고 증명되어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국어 공부를 한다고 하자. 국어를 잘하려면 열심히 글을 많이 읽고 쓰며, 문법을 공부하고, 단어를 암기하고 하면서 하는 것이지 거기에 무슨 과학적 법칙을 적용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음악이나 미술 등의 예능 분야도 과학적 법칙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서로 만나서 교제하거나 사랑하는 일도 거기에 무슨 과학적 법칙을 적용해서 모든 것을 밝혀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분야들에도 부분적으로 과학을 도구로 사용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공부도 할 수 있고 좀더 긍정적인 발전을 모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원리가 과학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설령 과학의 범주 안에 있는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과학으로 다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이 광활한 우주와 생명은 분명히 과학의 연구대상이지만 그러나 절대로 그 신비를 과학으로 다 밝혀낼 수 없다. 즉 과학이 결코 인간과 우주와 이 세계에 대한 모든 것을 밝혀 낼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과학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할 수 있는 학문도 아닐뿐더러 설령 과학이 연구할 수 있는 분야라고 할지라도 그것도 다 밝혀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2.과학의 능력적 한계를 알지 못하는 오류

그뿐이 아니다. 과학은 이런 지식적인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능력적으로 한계가 많다. 즉 지식적으로 다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령 과학이 알고 있는 문제라도 그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생명에 관한 문제를 보자. 생명에 관한 분명 과학의 연구대상이지만 그러나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도 없으며, 죽은 생명체에게 다시 생명을 부여할 수도 없다. 인간의 노화 현상을 조금 지연 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불로장생의 길을 열어줄 수도 없다.

물론 이런 근원적인 문제 말고도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너무나 많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를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세상의 다른 학문의 문제도 과학으로 다 해결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나 혹은 과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 모두 지식을 제공할 수도 없고, 그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도 없는 과학으로 알 수 없다고 하여 하나님을 부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는 말이다.

3.과학을 말하면서 비과학적인 진화론을 믿고 있는 오류.

조금 공부를 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소위 진화론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우주만물의 기원에 대하여 성경의 말씀과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번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오늘은 간단히 언급한다. 진화론은 한마디로 우주 만물이 저절로 생겼다는 것이다. 땅도 바다도 하늘도 별도 나무도 동물도 사람도 저절로 생겼다는 것이다. 생물들은 처음에 무언가 단세포 생명체가 생겨나더니 자꾸자꾸 변화해서 마침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요, 가설에 불과한 이론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과학도 아니다. 증명된 것도 아니고 실험을 통해서 밝혀낸 것도 아니다. 무슨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과학의 법칙으로도 말도 안된다. 물리학적 법칙에도 위배되고, 생물학적 법칙에도 위배된다.

그들이 증거라고 내 놓은 몇몇의 증거들도 사실은 증거도 아니다. 전혀 연결고리도 없으며, 증거라고 말하는 화석이라는 것도 어떤 것은 조작된 것이고, 어떤 것은 처음부터 그냥 그런 동물일 뿐이다. 중간단계의 생명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진화론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주장되고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비과학적인 허구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4.과학의 방법을 무시하고 신을 거부하는 오류.

과학지상주의자들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엄청난 모순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과학적 방법론은 관찰 ․ 가설 ․ 실험, 입증 ․ 정설, 응용 등인데 신이 없다는 주장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단순히 자신의 신념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이 없다고 과학적으로 말하려면 관찰과 가설과 실험의 과정을 거쳐서 신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실험도 입증도 하지 못하고 그저 단순히 자기의 신념으로 신이 없다고 주장하니까 과학적으로도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원래 과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감각으로 경험 가능한 세계만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과학은 인간의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고 정신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밝혀 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영역은 그 이상의 것이기에 과학적으로는 본래부터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을 과학적인 잣대에 의하여 판단하려고 하고, 그래서 당연히 과학적인 법칙으로 관찰하고 실험하고 증명할 수도 없는 영역임에도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이런 모순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여러분, 과학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과학적으로는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이나 과학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겸손한 태도이다. 그런데 마치 과학적으로 신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무지와 교만과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일일 뿐인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라.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38:1-3)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을 퍼부어 대신다.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있었느냐, 네가 바다 속을 속속들이 다 알 수 있느냐, 광명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느냐, 누가 비를 만들었고, 누가 하늘의 일월성신을 만들었느냐, 너의 마음 속에 지혜는 누가 주었느냐, 네가 그 근원을 아느냐, 네가 거기에 있었느냐 하시면서 네가 알거든 한번 대답해보라고.....

그러니까 앞부분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아는 양, 마치 자신이 판단자가 되는 양 여기며 말했던 욥에게 그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며 그 무지와 어둠 속에서 함부로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과학을 맹신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마치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양 말하지만 실상 그들이 아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작은 지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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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저녁설교]말씀과 삶

 

 


말씀 : 잠7;1-5

제목 : 말씀과 삶

인간에게는 생존하기 위하여 혹은 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한 욕구가 있다. 인간의 욕구는 1차적인 생리적 욕구와 2차적인 사회적 욕구로 분류된다. 생리적 욕구는 경험이나 훈련이 필요치 않은 본능적인 욕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욕, 식욕, 성욕과 같은 것이며, 사회적 욕구는 물론 본능적인 성격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로 사회생활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명예욕, 소유욕, 성취욕, 지배욕, 권력욕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욕구들은 인간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다. 그 모든 욕구들 하나하나가 모두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인간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들이 된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욕구들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 인간의 삶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할 우려가 있는 욕구는 소유욕과 성욕, 명예욕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모든 부조리와 갈등과 고통의 현상들이 바로 이러한 소유욕과 성욕과 명예욕에 의하여 발생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관련된 범죄에 대하여 많은 경고를 하고 있다.

물질적인 욕망으로 인한 범죄와 관련해서는 십계명중 제8계명에서는 “도적질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또 제10계명인 출20:17에서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하시면서 남의 물건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것을 족한 줄로 여기며 살 것을 말씀하고 있다.

또 성적인 범죄에 대하여 십계명중 7계명인 출20:14에서 “간음하지 말지니라.”고 하셨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레20:10) 이러한 내용들은 인간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욕망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잘못 사용될 경우 인간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함으로 일어날 수 있는 죄악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씀안에 굳게 서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를 모든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것이다.

1.말씀이란 무엇인가?

먼저 1-4절에 나타난 ‘말씀’에 대한 표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절의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간직하며, 2절에서는 내 '법'을 눈동자처럼 지키라고 말한다. 그리고 4절에서는 '지혜'에게 누이라하고, '명철'에게 친족이라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물론 말이나 명령이나 법이나 지혜나 명철은 모두가 같은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곧 명령이고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명령이고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니까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여러 가지 각도에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다양한 기능을 말해준다. 즉 말씀을 법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삶의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의 기준, 행동의 기준, 준거가 곧 법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법이라고 표현할 때는 이 말씀이 인간의 행동의 모든 기준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말씀을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말씀이 인간에 참된 진리의 세계를 알려주는 올바른 지식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와 진리가 들어있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인 진정 지혜인가? 무엇이 진정한 지식인가? 물론 생명을 주고 더 나아가서는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지혜요, 지식이 아닌가?

생명을 주는 지혜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는 지식은? 오직 말씀, 오직 예수, 그러므로 그 지식을 알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그러면 그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곧 지혜가 되는 것이다.

또 말씀을 ‘명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절대적인 규범으로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지혜 이것은 결코 단순한 권면이나 그럴듯한 종교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지시요 명령이라는 것이다. 명령이니까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1절에는 내 ‘말’이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씀이라는 말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혹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혹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등등의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임으로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감히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경홀히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그것이 법이고 지혜이고 명철이고 율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래서 정말 그것을 잣대로 삼자. 참지혜가 거기 있음을 알고 그 말씀을 따르자.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엄중히 다루자.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말씀의 인도를 따라 참 생명의 은총의 길을 걸어가자.

2.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이요, 명령이요, 계명이요, 지혜인데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하는 것이다. 어쩌긴 어쩌겠는가? 그것이 법이고 지혜라면 그 말씀을 지켜야 하지. 지키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1-4절에서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말씀을 간직하고(1절) 지키고(2절) 가까이하라(3절 上) 새기라(3절下) 친근히 여기라(4절)는 것이다. 여기서 ‘간직한다’는 것은 「숨기다, 비축하다, 저장하다」는 의미이다. 또 ‘지킨다’는 것은 「지키다, 보호하다, 망보다」는 의미이다. 가까이한다는 「곁에 두다, 떠나지 않다, 함께하다」라는 의미이며, 또 ‘새기라’는 것은 「기록하다, 명부에 올리다, 등록하다」는 의미이다. 또 친근히 한다는 것은 「가까이 하다, 좋아하다, 기뻐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우선은 말씀을 마음에 새겨넣고, 새겨 넣으려면 가까이하고 친하게 지내야 하며, 그 다음 다음에는 잘 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간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들이 침범하여 마음속에 들어 있는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말이다.

특히 지키라는 말씀속에서 2절 후반부에서는 눈동자처럼 지키라는 말이 있다. 눈동자처럼 지켜라. 사람이 어떻게 눈동자를 지키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민첩하게 지킨다. 반사적으로 지킨다. 눈에 무엇인가가 가까이 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깜박여져서 눈꺼풀이 눈동자를 덮어 보호하는 것이다. 눈은 그만큼 중요한 기관으로 반사적으로 지키는데 이와 같이 무엇인가가 말씀을 침범하려고 하면 다른 어떤 것을 지키는 것보다도 중요하게 잽싸게 지키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말씀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돈을 지킴보다, 내 육체를 지킴보다, 내 명예를 지킴보다 말씀을 지키는가? 돈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서 우리는 무엇을 택하는가? 육체의 생명이냐 말씀이냐하는 기로에 선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명예이냐 말씀이냐하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하나님은 무엇을 지키기를 원하실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지식보다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생명보다 물질보다 명예보다 권력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욕심장이라서? 독재자라서? 폭군이라서? 물론 아니다. 그게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가장 풍요롭게 가장 가치있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지키기를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기를 원하시는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래서 4절에서는 말씀한다.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하라.”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친근히 하라는 말이다. 가까이 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누이와 친족을 구별해서 말씀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친족처럼 형제처럼 그렇게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라는 것이다.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가까워지고 함께 있게 되고 떠나지 않게 된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함께 있으면 나의 삶에 은혜가 충만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까이 하라. 즐거워하라. 좋아하라. 사랑하라. 묵상해야 하라. 교회를 가까이하라. 예배를 가까이하라. 적용하기를 가까이하라. 그리하여 더욱 은혜 가운데 살아가자.

3.말씀을 지킨 결과는 무엇인가?

말씀을 새기고 간직하고 지키고 가까이하라고 경계하신 다음에 5절에서는 그 결과를 말씀하고 있다. 왜 그렇게 말씀을 지켜 살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그 말씀들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5절 말씀을 보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 즉 그 말씀을 네가 네 마음속에 지키면 이제는 반대로 그 말씀이 너를 지켜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너를 모든 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많은 시련들가운데서도 오직 말씀으로 승리한 사람이다. 형제들이 자신을 죽이려다가 팔아넘긴 악행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 들여 형들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원수를 갚지도 않았다. 또 물질적으로도 신앙양심에 입각해서 살았고, 육체적으로 성결한 삶을 살았다. 창39장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요셉은 말한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당신은 보디발의 아내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범한다면 그것은 물론 당신의 남편 보디발에게도 악이 되겠지만 그보다 앞서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니 난 그럴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가 그러한 유혹 앞에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심령 안에 말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의 모든 순간 순간 속에서 말씀이 그를 인도했기 때문이다. 혹시 죄를 저지를 만한 상황이라고해도 그의 심비에 새겨져 있던 말씀이 즉시 그를 인도하여 그가 죄악 속에 빠지지 않도록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축복을 받았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인간에게는 많은 욕구가 있다. 생욕,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승부욕 등등.... 이러한 욕구들은 물론 건전하게 사용하면 인간에게 약이 된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들을 잘못 분출시키면 그것은 독이 된다.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들을 잘못 사용하면 결국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방법은 한가지다. 말씀을 심비에 새기고 사는 것이다.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다. 가까이하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은 우리를 지킨다. 그러므로 말씀안에서 살아가자. 간직하고 살자. 새기고 살자. 가까이하며 살자.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용하여 복된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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