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전예배설교] 살아있는 교회

 

 

 


제목 : 살아있는 교회

말씀 : 행 2:1~4

1.혼이 담겨 있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6, 70년대에 영국에 '비틀즈'라는 락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Yesterday, Let it be, Love me do 등의 수많은 곳을 히트시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수십억달러의 돈을 벌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965년 이들의 외화획득의 공적을 인정하여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틀스가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할 때의 일입니다. 공연장에는 수만 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한참 공연이 무르익어 열창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무대위로 뛰어올라서는 권총을 겨누면서 빨리 노래를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쏘아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삽시간에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다행히 경찰의 침착한 대처로 이 사람은 잠시 후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범인을 잡아놓고 보니까 이 사람은 괴한도 깡패도 아닌 유명한 음악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경찰이 어이가 없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묻자 그 교수는 비틀즈를 보면서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 음악에는 혼이 배어 있질 않아. 그런 혼도 없는 속된 노래를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라.’

즉 이 음악교수는 노래에 자신의 진실과 마음과 혼까지 담아 음악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그런 순수한 음악, 그런 영혼이 담겨있는 음악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틀즈라는 락 그룹이 그러한 혼이 담겨져 있는 순수한 음악이 아니라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노래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그래서 순수음악을 더럽힌다고 여겨 그런 과격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건속에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에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진실이 있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고 그저 상업적으로 그린다면 그 그림은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웅변술을 가지고 열변을 토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있지 않고 진실성이 없다면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회사에 다닐 때 한 2,3년동안 서예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서예도 마찬가집니다. 글씨에도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가 있고, 그저 기교적으로 쓴 글씨가 있습니다.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져 오고, 힘이 있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기교로만 쓴 글씨는 왠지 천박해보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기에 혼을 담고, 진실을 담고, 정성을 담을 때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신앙생활은 더더욱 혼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담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아무리 귀한 직분을 가졌어도, 아무리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영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찬양을 잘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세상적인 노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 혼을 담지 못하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혼이란 내 자신만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주관하시고, 성령님께 붙들린바 된 그러한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근원이신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그러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속에 그 살아있는 영혼을 담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 생명과 은혜가운데 거하며 참된 가치를 누리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4:24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146:1절에서는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진정 혼을 담아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 바 된 그 영혼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가정 생활하고, 직장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온전히 진정성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영위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감동시킴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존중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삶에 진정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매사에 영혼을 담아 하려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로잡힌 바된 진정 살아있는 영혼으로 무엇을 할 때 그게 진정한 혼으로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내 정성만 담는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인격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혼을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기 때문에 그 혼만을 담아서는 진정으로 나를 드리는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 사로잡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전체에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영위함으로 진정 살아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인데 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에 힘쓸때에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힘써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우리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진정한 생명력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때에 그러한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그 일을 기억하며 오늘에 되살려보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날의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오늘 우리도 경험하며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보자는 그러한 취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영혼속에 담고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는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질때에 우리는 복음의 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최권능목사님은 본래의 이름은 최봉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얼마나 권능이 많으신지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유의 은사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별명으로 최권능목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전도할 때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돌아다니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무슨 교리나 말씀이나 원리나 이치 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치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어떻게 보면 정말 무식하게 전도했는데 이분의 전도를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시냇물을 건너려는데 어떤 양반 하나가 담뱃대를 길게 물고 둑에 점잖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이때도 예외없이 둑에 앉아 잠시 쉬고있는 영감님에게 귀에다 대고,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징검다리를 건너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점잖은 양반이 깜짝 놀라서 「저, 저 저런 고얀놈이 있나.」하면서 소리를 쳤지만 목사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징검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도 어쩔 수 없이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집에 도착해서 지내고 있는데 자나깨나 자꾸만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고, 잠을 자면 꿈속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양반이 예수 귀신 붙었다고 하면서 그 지방에서는 제법 용하다고 하는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굿을 해도 계속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양귀신은 서양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야된다고 해서 교회를 찾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누구냐 하면 그분이 바로 고당 조만식 선생님의 부친인 조을선씨였고, 이 한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해서 조만식 선생이 믿게 되고, 조만식 선생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이라는 말속에 무슨 철학이 있습니까?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그럴듯한 웅변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들을 불러모을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최 권능 목사님은 그 말 한마디로 수천명의 사람을 전도하였고 수십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천당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야, 세상은 참 어수룩 했으니까. 그때야 가난하고 못배워 사람들이 좀 단순하고 순진했으니까. 그때야 무슨 재미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냥 예수천당만 해도 믿었지 지금 세상은 그렇게 안됩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오늘 최권능 목사님이 이 안강땅에 오셔서, 저 시장 바닥과 저 일터를 다니면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라고 다니신다면 분명 이 안강지역에도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저 서울 바닥에 가서, 저 부산 바닥에 가서, 저 유흥가와 환락가에 가서 최권능목사님이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쳐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그 단순한 말속에는 비록 철학도 이론도 교리도 없지만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예수의 혼, 예수의 영,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최권능 목사님 속에 주의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유치한 말이지만 그가 혼을 다해서, 영혼을 다바쳐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안 믿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그 안에서 차 있을 때 그의 삶은 성령이 담겨져 있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성령이 인도하는 그러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기에 그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았고 동시에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이라야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살아 있어야 생육하고 번식을 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것은 자체로서도 별 의미가 없거니와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사로잡힌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신앙인만이 참된 생명의 가치를 누리게 되거니와 동시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어떻게 성령충만함을 받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이처럼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살아서 펄펄 뛰는 물고기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차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쓰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속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정녕 살아있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충만이 무엇입니까? 충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와 생명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인격을 지배하고, 내 자아를 지배하고, 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넘쳐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 가득하니 이제는 내 욕심, 내 못난 자아, 내 짧은 소견, 내 미련한 인생관 이러한 것들은 죽고 맙니다. 그 대신 성령님안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과 은혜와 진리가 나를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배하니 내 인생의 가치관, 내 성품의 기질이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혼이 나를 지배하니 나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살리겠습니까? 무엇이 우리 교회를 더욱 힘있게 하겠습니까? 무엇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속에 진정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가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릴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렇게 생명력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성령에게 붙들릴 때, 속된 말일지 모르지만 거룩한 영이신 성신으로 신들릴 때 우리안에 우리 가정안에 우리 교회안에 이 지역사회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쁨과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려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진리안에서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되며,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 모든 헛된 욕심들을 버리고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가운데 정녕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에 충만할 때 봉사하며, 전도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속에 진정으로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속에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에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요, 생명의 영이요, 은혜와 사람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과 우리의 모든 가정들과 모든 성도들 생명 속에 이 하나님의 혼이 살아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속에 그리고 우리의 가정속에 교회속에,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혼이 살아서 역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생명이 역사합니다. 은혜와 사랑이 역사합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모든 우고와 질환이 물러갑니다. 추하고 더럽던 것이 아름답고 깨끗하게 됩니다. 혼돈된 것이 질서를 찾게 되고, 죽어 가는 것들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얼어붙은 동토에도 생명의 싹이 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성령충만함을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데는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함을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과 어둠과 미움과 욕심과 저주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우리 가정안에서 우리 교회안에 생명의 역사가 은혜의 역사가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기 위하여 더욱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덧입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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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말씀 /주일낮설교 : 감사 충만한 삶

 

 

 

제목 : 감사 충만한 삶

말씀 : 신16:13-15

 

1.우리는 감사할 것이 너무 많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시골 사람이 서울 구경을 갔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에 들어가 설렁탕 한 그릇을 시켜놓고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게 하시고, 좋은 날씨 주셔서 구경도 잘하게 하시고, 또 때가 되어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먹고 건강해서 더욱 하나님 일도 잘해서 해 주시고, 돌아가는 발걸음도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드리고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식기도가 좀 길었는지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조롱하듯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보아하니 시골 양반 같은데 촌에서는 다 그렇게 음식을 놓고 졸다가 먹습니까?’ 그러자 이 시골사람이 말했습니다. ‘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런데 물론 다 그렇지는 않지요. 우리 집 돼지우리에 있는 돼지들은 음식을 갖다 주면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게걸스럽게 먹는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감사할 줄 모르는 자는 돼지와 같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가 너무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생각해봐도 감사의 조건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약 내가 돼지로 태어나 돼지우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사육당하다가 잡혀먹는 신세가 되었다면 어쩔번 했습니까? 사람으로 태어났다해도 저 헐벗고 굶주리는 땅 그래서 병들어 죽고, 배고파 죽는 그런 곳에 태어났더라면 그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고 비참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버젓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으로, 그것도 이 복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에서 먹을 것, 입을 것이 지천으로 쌓여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이 어찌 큰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이 자유, 이 평화, 이 질서, 사랑하는 가족들, 편히 쉴 수 있는 집, 수고 할 수 있는 일터,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 그 밖에 온갖 종류의 문명의 이기들, 게다가 나 같은 것이 어찌 이렇게 큰 은혜를 입었는지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백성이 되었으니 이 어찌 크나큰 축복이 아니며, 이 어찌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이 많은 은혜들 가운데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가진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다 하나님의 은혜요, 다 너무나 귀한 우리 가족이나 이웃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감사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올바른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 하겠습니까?

 

물론 살다보면 어렵고 힘든 일들도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 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입니다.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고, 내수가 침체되어 장사가 안되고,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고, 그래서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로 먹고 살기가 힘든 것입니까? 아니면 뭔가 우리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는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훌쩍 넘겼고, 무역규모와 GDP가 1조 달러가 넘는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강타하여, 우리나라 드라마가 세계 여러나라의 안방을 차지하고, K팝이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조차도 열광시키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많이 낙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만큼 정치적인 안정과 자유를 누리는 나라도 많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자유와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세계10대 교회중 절반 가량이 한국에 있고,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선진국수준에 이르고, 반만년의 역사 이래로 가장 융성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못 먹고 못살 때보다 더 불평과 원망이 많고 힘들어 못살겠다고 아우성입니까? 그럴 바에야 뭐하러 정치, 경제,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기를 쓰고 애를 써왔습니까? 아니, 정치 경제 문화 다 행복하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렇게 발전시키려고 기를 썼고, 그래서 이만큼 해냈으면 행복해야지 왜 더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냐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룬 부나 문화들이 너무 일부 계층에 편중되어 있고, 아직도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과거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물질적인 풍요와 자유와 평화와 질서를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여건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전5:18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우리가 받은 바 은혜가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특별히 민족의 큰 명절인 한가위를 맞이하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가족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에게 초막절을 정해 주시며 감사의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초막절은 수장절이라고도 하는데 가을에 곡식을 수확하여 창고에 저장한 다음에 일주일동안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굳이 이런 절기를 일부러 제정해 주시면서 지키라고 하신 이유가 뭐겠습니까?

 

첫째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 아름답고 복된 땅, 따사로운 태양과 신선한 공기와 때를 따라 내리는 비와 풍성한 열매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며 가꾸어 풍성한 결실을 맺었다해도 하나님께서 그 씨앗과 땅과 태양과 비를 주시지 않았다면 그것이 어떻게 자라겠습니까? 우리가 그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습니까? 또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고 일하여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해도 그 생명과 지혜와 재료와 힘을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혹자는 그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하는데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서 그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우리에게 공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신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많은 은혜가운데 삶으로 도리어 은혜를 알지 못하고 감사는커녕 도리어 원망 불평속에 살아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같은 자극을 받다보면 그 자극에 둔해 집니다. 그래서 너무 많으면 귀한 줄을 모르고, 좋은 일만 계속되면 좋은 줄을 모르고, 계속 향기속에 있으면 향기를 잘 못느낍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늘 곁에 있으면 소중한 줄을 잘 모릅니다. 평소에는 천지에 공기가 충만하니까 공기가 귀한 줄 모릅니다. 저수지에 물이 가득하고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나올 때는 물이 귀한 줄 모릅니다. 그러나 공기가 없는 곳에서 5분만 있어보면 공기가 얼마나 귀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저수지가 말라붙고 수도꼭지에서 물이 안 나오면 물이 얼마나 고맙고 귀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때가 너무나 많아 하나님께서 일부러 감사의 절기를 정해놓고 감사를 회복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내셔날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아프리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한 예닐곱 살 된 꼬마들이 한말쯤 들어갈 듯한 물통을 들고 물을 길러 맨발로 두 세시간씩 걸어갑니다. 그러면 소와 야생동물들이 목욕도 하고 마시기도 하는 그래서 더럽고 오염되고 기생충이 우굴거리는 물웅덩이가 나오는데 그 꼬마아이들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 물을 벌컥 벌컥 마십니다. 그리고 더러운 물통에 오염된 물을 담아 다시 두어 시간을 걸어서 집으로 갑니다. 집에서 물을 사용할 때도 대야에 물을 떠서 한방울의 물도 흘리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한 사람이 씻습니다. 그리고 나서 몸을 씻은 그 물로 빨래를 합니다. 그리고 그 빨래한 물을 마지막으로 소에게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 먹을 것이 없어 쓰레기 장에서 생활하는 아이들, 진흙에다 설탕 같은 것을 약간 넣어 진흙 파이를 해 먹고,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그냥 하염없이 바라만 보아야 하는 어머니, 눈가에 파리 떼가 우굴 거려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아이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수지에 물이 그득하고,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어디를 가나 먹을 것이 지천으로 쌓여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정말 이 풍성한 계절, 이 아름답고 복된 땅, 이 자유와 평화, 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 이 모든 것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가족에게 감사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이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가족과 이웃간에도 아름다운 사랑과 은혜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4절 말씀 보겠습니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즉 수장절에는 가족과 이웃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서로 사랑하며 기쁨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에서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가운데 사는 자의 마땅한 도리이고, 동시에 그것이 우리가 서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동시에 서로의 행복을 보장받는 길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많은 것을 거저 받았기 때문에 조건없이 거저 주어야 하고, 동시에 내 가족이나 이웃이 불행해지면 나도 불행해 지고, 그들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진다는 것을 기억하며 서로 사랑하며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 주변의 사람들이 잘못되어 전부 지지리 못살고 그래서 거지와 도적이 우굴 거리고, 서로 빼앗고 속이고 싸우고 때리고 죽이고 하면서 살아간다면 난들 어떻게 평안하겠습니까? 반대로 내 주변의 사람들이 잘 되어 서로 사랑하고 풍요롭고 그래서 서로 나누고 사회가 안정이 되면 나 또한 행복해지지 않겠습니까? 가정이 잘 되어야 내가 잘 되고, 기업이 잘되어야 취직이 잘 되고, 다른 사람이 잘 살아야 장사가 잘 되고,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와야 나라가 잘 되고, 나라가 잘 되어야 복지혜택도 늘어나고 자유와 평화와 질서도 유지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남이야 어떻든 아니 남을 짓눌러서라도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러면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남이 잘되기를 바라고 귀히 여기고 사랑해야 하는데 특별히 가족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가족은 나와 가장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가족의 행복과 불행은 나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더구나 가정은 인류사회의 핵으로 가정이 깨지면 인류는 망합니다. 가정이 해체되면 사회가 해체됩니다. 반대로 가정이 사랑과 은혜가 넘치면 사회가 살아납니다. 가정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 속에 든든히 서서 자녀들이 올바른 영성과 인성을 가지고 성장하고, 자녀가 부모를 바르게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고 하면 저절로 행복이 넘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가정을 이루고, 가족 간에 진정 귀히 여기고 사랑하고 돌보며 가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밖에 나가서 무슨 큰 일을 하면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가사를 돌보며 자녀를 양육하는 것을 하찮은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자녀 하나 잘 키우는 것이 밖에 나가서 100억원 벌어오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 땅의 모든 가정들이 믿음과 사랑과 기도로 자녀들을 잘 양육하여 올바른 영성과 인성과 감성을 가진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한다면 이 땅은 한세기 안에 천국과 같은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발전을 한다해도 가정이 믿음과 사랑과 기도로 바로서지 못한다면 갈등과 아픔과 상처투성이인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5:8절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되 특별히 세상 누구보다도 가깝고 고맙고 소중한 존재인 가족을 진실로 서로 귀히 여기며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장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한 가정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이 명절에는 온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서로 감사하며 사랑을 나눌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한번 해보겠습니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여보 고마워요, 아들아 고맙다, 딸아 고맙다. 사랑한다. 이렇게 가족간에 정말 귀히 여기고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더욱 큰 은혜가 넘치는 여러분의 가정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이웃간에도 감사하며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감사해야 할 대상은 가족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웃도 동일하게 사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빚진 자들이고 동시에 이웃에게도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웃이 행복할 때 우리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누리는 이 많은 은혜들을 어떻게 누리게 되었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대 우선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물론 나도 열심히 살았지만 아무리 내가 힘쓰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여건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과 이웃의 은혜도 그에 못지않게 많습니다. 우리 이웃이 없다면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의 만분 일도 못 누립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이웃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많은 것들을 누리겠습니까? 아무도 없는 저 무인고도에 산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친구도 학교도 직장도 병원도 공장도 교회도 정부도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나 쓸쓸라고 외롭겠습니까? 아니 외로운 것을 고사하고 먹을 것인들 제대로 먹을 수 있겠습니까? 옷을 제대로 입을 수 있겠습니까? 편히 살 수 있는 집을 제대로 마련할 수 있습니까? 차를 타고 여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겠습니까? 냉장고가 있겠습니까? 영화를 보겠습니까? 농사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 뭐겠습니까?

 

여러분,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이웃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웃들은 그저 경쟁하고 싸워 이기고 밟고 넘어가야 할 존재들이 아니라 상부상조하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막12:31절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 다음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두 번째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박완서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녀는 지난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분의 남편은 그보다 23년 앞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고 불과 석 달 만에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던 27살 된 막내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위로 딸이 셋이 있고 이 아들은 늦둥이로 낳은 아들인데 하필이며 그 귀한 막내아들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그녀는 그야말로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일기를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으로 출간 되었습니다. 그 책에 보면 그녀는 하나님께 나도 남편에게 데려다 달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대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기에 남편으로도 모자라 그 귀한 막내아들까지 데려가느냐고 따지며 포악을 떨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기도시간에, 때로는 산책하면서, 또는 길을 걸으며 도대체가 내 죄가 무엇이냐고,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냐고 하나님께 조용히 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묵묵부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화가 안 되어 화장실 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속에 있는 것을 다 토하게 되었는데 이때 계시처럼 자신의 죄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나는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 가족 외에 타인에겐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이것이 나의 크나큰 죄악이었구나.’ 하면서 그때서야 이웃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 죄악임을 깨닫고 회개의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토록 많은 것을 거저 받았는데, 우리가 누리고 있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이웃과 함께 이룬 것들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는데 이웃에게 무관심하다면 어찌 죄가 아니라 하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가위를 맞이하여 이 아름답고 복된 땅, 이 풍요로움, 이 자유와 평화, 이 모든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사랑하는 가족간에 정말 서로 감사하며 사랑을 나누는 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이웃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주변의 모든 이웃에게도 정말 감사하며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또한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도 서로 귀히 여기며 감사하며 사랑과 기쁨을 나눌때에 정말 행복이 넘치는 한가위,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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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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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진정한 행복

 

 

 

제목 : 감사하는 자의 복

말씀 : 시107:1~7

1.감사는 현재를 행복하게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누굽니까?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굽니까? 그것은 권세나 지식이나 재물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키가 크고, 인물이 훤칠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정말로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요,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이요,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100여세대가 살고 있는 15평짜리 낡은 아파트 단지가 있다고 칩시다. 여기에 모여사는 사람들은 물론 특별한 경우도 있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기본 재산도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월급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재산도 월급도 많지 않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속극에 나오는 넓고 호화스러운 집과 멋진 청춘남녀들과 그들이 다니는 멋진 직장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무슨 복이 많아서 저렇게 좋은 집에서 좋은 직장을 다니며 너무나 멋지게 생긴 사람들과 사는데 내 꼴은 이게 뭐냐고 탄식하며 원망하며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집에 들어갈 때마다 감사할 것입니다. 비록 작지만 열심히 일하고 돌아와 안식할 수 있는 이 귀한 보금자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비록 많은 월급은 아니지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비록 넉넉지는 않지만 우리 가족 먹을 것, 입을 것, 편히 누워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엿새동안 힘써 일하고 주일 하루 쉬면서 예배드리고 가족과 함께 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똑같이 기본 재산이나 월급도 많지 않고 15평짜리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전자의 사람은 그나마 그 작은 아파트도 진정으로 소유하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가난뱅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이 많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누릴 줄 아는 부유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개를 가지고도 백가지를 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백개를 가지고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부자입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물론 한 개를 가졌어도 백가지 천가지를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백개 천개를 가졌어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만가지를 주어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하는 가난뱅이인 것입니다.

인터넷의 어떤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내 손에 펜 한 자루 쥘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펜으로 그림도 그릴 수 있고, 사랑의 편지도 쓸 수 있으니까요. 내 입으로 말 한마디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입으로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으니까요. 내 발에 신발 한 켤레가 신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신을 신고 집으로도 일터로도 갈 수 있고, 산책도 할 수 있으니까요.

내 귀로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내 코로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은은한 꽃향기와 맛있는 음식 냄새와 사랑하는 이의 체취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내 곁에 부모형제와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서로 의지하고 기대고 마음을 털어놓으며 따뜻한 위로의 말도 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해도 손에 펜만 한 자루 쥘 수 있어도, 말만 할 수 있어도, 들을 수만 있어도, 걸을 수만 있어도, 냄새만 맡을 수 있어도, 내 곁에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뭔가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기쁨을 찾는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가진 것을 진정으로 누릴 줄 아는 사람의 것입니다. 지식이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라도 감사할 줄 아는 자의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격언에는 천국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고, 지옥은 불평하는 자들로 가득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특별히 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없는 거, 모자라 거, 약한 것, 부족한 것 생각하며 원망 불평 낙심 절망하지 말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살전5:18절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풍성한 계절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멀쩡한 사지를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유와 평화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을 달라고 하기전에 먼저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저와 여러분은 감사와 은혜가 충만한 심령으로 기쁨이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감사는 행복한 미래를 보장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오늘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내일의 복을 보장해 주는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이기도 합니다. 감사할 때에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지만 감사할 때에 힘도 생기고 지혜도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긍정적 적극적 에너지 넘치게 됩니다.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게 됩니다. 그래서 앞길이 열리고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사지가 없이 머리와 몸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좌절과 원망이 아니라 이런 아들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열심히 키웠습니다. 그에게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반학교에 보내 정상적인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하고 그들과 함께 농구도 하고 축구도 했습니다. 대학에 가서는 정상적인 학생들보다 더 많은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히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으로, 잡지사 기자로, 방송사 캐스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 오토다케의 부모나 오토다케 본인이 없는 것을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 속에 있었다면 이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생에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아들을 주셨습니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왜 이런 꼴로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왜 남들 다 가지고 있는 팔다리도 내게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원망하고 불평하였다면 이 사람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보나마나 저 길거리 한 모퉁이에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얻어먹는 거지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토다케의 부모나 그 자신이나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불리한 여건보다는 그들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을 때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감사하며 위대한 일을 감당하며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원입니다. 감사는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께 대하여 만족감을 느끼게 합니다.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게 만듭니다. 사랑과 기쁨과 용기와 자신감을 가져다줍니다. 갈등과 미움과 저주와 불평과 원망 등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없애버립니다. 또한 감사는 정신적, 육체적 긴장을 완화시켜 줍니다. 면역력을 높이고 활력을 주어 육체의 건강을 지켜줍니다. 질병에 잘 걸리지 않게 하고 설령 질병이 와도 감사와 긍정속에 사는 사람은 치료가 잘 됩니다. 마음이 편해지고, 혈압이 떨어지고, 소화를 잘되게 만듭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런 사람은 잘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잘 되지요, 힘과 의욕이 생기지요, 마음이 편해지고, 육체의 신진대사도 잘 되지요, 옆에 있는 사람도 기쁘게 하지요, 어려움이 와도 낙심절망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헤쳐 나가지요, 모든 일에 긍정과 적극성과 성실성을 가지고 임하게 되지요, 그러니 어떻게 잘 안되겠습니까?

그래서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은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 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50:23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을 통하여 자신과 이웃에게 힘과 의욕과 활력과 기쁨을 주고, 매사에 적극성과 긍정과 열심을 가지고,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을 감동시키고 그래서 오늘이 행복하게 하고 내일의 축복이 보장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감사가 곧 믿음의 척도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서남북 사방에서 모아서 구속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심을 믿는다면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감사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로, 이렇게 신비한 존재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셔서 우리의 죄과를 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걸 알고 믿는다면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창조, 인도, 거룩, 의, 선, 구원을 믿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감사 곧 믿음이요, 믿음이 곧 감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죄는 감사하지 않는 죄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모른다면 어찌 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먹고 입고 잠자고 게다가 천국의 은총까지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이고, 믿음이 곧 감사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고, 믿음이 있는 자도 감사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주실 것에 대한 믿음으로 감사하며 사심으로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할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구원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감사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감사할 수 밖에 없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요건들이 있지만 설령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감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을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2절부터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들 즉 죄와 마귀와 어둠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우리가 주리고 목마름으로 피곤할 때 우리를 부르셔서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정 갈 바를 알지 못하던 인생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가 생명의 길인지, 어디고 천국길인지 천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살던 인생이었습니다. 죄와 무지와 어둠의 세력에 붙잡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치닫던 인생이었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커녕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다만 건져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거할 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마귀와 죽음의 권세에 억눌려 있는 자가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큰 은혜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나아가 저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은 더할 나위없이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오늘과 내일의 행복을 보장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은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이 있으면 감사하겠다하지 말고 지금 이미 주어진 것에서 감사거리를 찾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해지면 감사하겠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조금 힘든 일이 있어도 거기에 함몰되지 말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가운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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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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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제목 :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말씀 : 마1:18-21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의 가정위에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특별히 지역 주민 여러분과 함께 성탄절을 맞게 되어 너무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저희 교회를 찾아주신 분들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환영하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이 성탄절은 우주 최대의 명절입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니 이 지구 뿐 아니라 우주 공간 전체에 걸쳐서 아니 우주 뿐 아니라 저 하늘나라의 성도들이나 천사들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영원토록, 그리고 민족이나 혈통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전 우주의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큰 축복의 날이요, 은혜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죄와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주어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든지 죄와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세상의 어떤 날과도 비교할 없는 엄청난 축복의 날이요 기쁨의 날이요 은혜의 날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이땅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박수를 치겠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예수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서로 간에 사랑과 기쁨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 축복의 성탄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이 땅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와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복된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1.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

그렇다면 여러분, 도대체 오늘 성탄절이 어떤 날이기에 그렇게도 온 우주 최대의 위대하고 복되고 기쁜 날입니까? 그것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씻어주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탄의 핵심이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해방되고 평화를 누리고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억압받는 자를 해방시켜주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도 결국 다시 늙고 병들고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냥 늙고 병들고 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절대 상극이기 때문에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오늘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보십시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0:10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생명은 영적, 육체적, 정신적인 전인적인 생명입니다. 즉 죄에서 구원하여 먼저 천국백성이 되게 하고 그 다음에는 이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 누리게 하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물론 돈이나 권세나 건강이나 이런 것도 중요합니다.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땅에서 누려야 할 자유와 평화도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돈도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하여 열심히 운동도 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영원한 생명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생명보다 우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해도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가는 권세를 얻었다해도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다해도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가운데 처한다면 세상에서 누렸던 그 온갖 부귀영화가 무슨 쓸데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돈도 중요하고 명예도 중요하고 건강도 중요하고 사랑도 중요하고 다 중요하지만 생명이 제일 중요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결코 육체적인 생명만이 아닙니다. 영적인 생명이 있고, 육체적인 생명이 있고, 정신적 생명이 있습니다. 영과 육과 혼이 살아있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영역에서 온전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문제를 아무도 스스로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일평생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도 안되고, 죽도록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천개만개 따도 안되고, 세계 제일의 권세를 얻어도 안되고, 천하제일의 부자가 되어도 안 됩니다. 천하없는 성인군자나 영웅호걸도 할 수 없습니다. 달나라 별나라 우주 끝까지 갈 수 있는 과학 기술로도 안됩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누가 해결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지혜와 권능과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 뿐입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아시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과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들은 다 죄와 무지속에 있어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도 능력도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2012년전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없고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끔찍한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받을 죄의 대가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망에게 붙잡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영생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부활의 생명을 얻음으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이 자기 죄는 자기가 해결해야지 남이 대신 죽어준다고 어떻게 내 죄가 용서되느냐고 말씀합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평생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도 안되고, 죽도록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천개만개 따도 안되고, 세계 제일의 권세를 얻어도 안되고, 천하제일의 부자가 되어도 안 됩니다. 어떤 분은 내 마음만 똑바로 먹으면 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천하없는 성인군자라도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죄인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쩔 수없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천길만길 깊은 구렁 속에 갇혀 있다고 칩시다. 그 구렁은 말 그대로 천길 만길 너무 깊어서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올라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네 힘으로 올라오라며 내버려 둬야 합니까? 두레박을 내려 보내주든지 헬리콥터를 내려 보내든지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을 때는 그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올라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살 길인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 나올 수 없는 죄의 수렁에서 건져 주러 오신 것입니다.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어도 올라올 수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찾아오신 주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천국까지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 영광스러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님 품에 온전히 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유일한 구조선으로 보내주신 예수님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받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영원한 천국을 주신 예수님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이 죽으면 그만이지 천국이 어디 있느냐, 가 보았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여러분, 아닙니다. 천국은 반드시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으면 육신은 땅에서 왔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기 전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데 죄를 그대로 가지고 가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고 들어간 영혼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은 그럼 무슨 증거라도 있느냐고 묻습니다. 네,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너무나 확실한 것입니다. 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천국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4:17에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고, 또 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누구의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메시아이십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성령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다해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예수님을 석가모니와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세계3대성인이라고 부릅니다. 그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너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죄 용서받고 천국에 갈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성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말씀을 믿든지 만약 믿지 않는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산다든지 천국과 지옥이 있다든지 하는 말들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과학으로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말도 안되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어째서 성인이라고 부른단 말입니까?

그러면 또 어떤 분들은 나는 그 성경자체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베스트셀러입니다. 성경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읽혀진 책으로 세계 2,5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수십억의 사람들이 읽고 인간이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지 알게 되고, 천국과 지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들이 바보라서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부활과 천국과 지옥을 믿겠습니까? 아니 그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이나 학자들이 과학의 법칙을 몰라서 부활을 믿고 천국과 지옥을 믿겠습니까?

그러면 또 예수님 안 믿는 수많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은 바보라서 그 사실을 안 믿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을 안믿는 분들 중에도 정말 똑똑하고, 인격적으로 너무나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과 육은 차원이 다릅니다. 육적, 물적인 것은 세상의 원리와 법칙아래 있지만 영혼은 세상의 육적 물적 이성적 법칙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기껏해야 3차원의 세계지만 영적인 세계는 4차원 5차원 백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어두워져 있으면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몽매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훌륭한 과학자들이나 그밖에 위대한 분들은 세상 지식도 잘 알고 영적인 지식도 잘 아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세상적인 지식이나 인격적으로 아주 훌륭하지만 영적인 지식은 없는 분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떤 판단이 더 옳겠습니까? 세상적으로는 똑똑하지만 영적으로는 어두운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세상 지식과 영적인 지식이 모두 밝은 사람들의 판단이 더 옳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영적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결단코 여기서의 삶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로 말미암아 무지와 어둠 속에 있는 인생들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인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래서 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이 세계 역사상 가장 기쁜 날인 것입니다. 전 우주 공간에 걸쳐서 가장 기쁜 날인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인류를 진정으로 영원히 온전히 살리는 일이요, 행복하게 하는 일이요, 우리 인류가 진정한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축복속에 영원히 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눅2:10,11절에서는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에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그러면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진정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탄과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한 해방자, 자유가가 될 것입니다.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과 고통에서 해방 될 것입니다. 모든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욕심에서도 해방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진정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가정과 이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이 성탄절에 온전히 예수님을 모심으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여기서 누릴 천국을 마음껏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나이다.

그러나 하오나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세상에는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진정한 생명의 은총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여,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 인생이 얼마나 죄와 무지속에 있는지 깨닫게 하시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모든 죄와 무지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먼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모든 이웃들에게 이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생명과 사랑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나누어 줄줄 아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죽음의 길로 가는 이들에게 생명의 빛이 되고, 가난과 핍박과 억압 속에 있는 자들에게 소망의 빛이 되고, 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있는 곳에 사랑의 빛이 되고, 거짓과 모함과 술수가 있는 곳에 진리의 빛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진실로 이 땅 만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면서 참된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강 속에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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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고난을 받는 자세

 


제목 : 고난을 받는 자세
말씀 : 골 1:24


본문 :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믿음대로 살아도 고난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살아있는 것, 예수 믿게 된 것, 기도할 수 있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가장 큰 것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천국시민이 된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을 가짐으로 받는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자랄수록 말씀대로 살고 하루의 삶이 더 행복해지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살면서 행복하게 사는 삶이 계속 되면 참 좋겠지만 때때로 고민을 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이 말씀대로 사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있을 때입니다. 지금같이 은혜롭게 살고 지금같이 좋을 때가 없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더 말씀대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아도 전혀 생각 밖의 어려움이 생길 때가 있고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흉년이 와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삭,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정말 훌륭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일생은 고난이 정말 많았습니다. 욥과 같은 경우도 하나님이 칭찬하실 정도였지만 엄청난 고난이 닥치는 것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다 희생하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고난이 날마다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고난 없이 산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인생이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7) 엄마 뱃속에 있던 아기가 나올 때에도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고난 속에서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고난이 있습니다.

[애매한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은혜 받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 애매한 고난, 선한 일을 위하여 받게 되는 고난”(벧전 2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죄로 인해 당하는 고난은 당연합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난은 유익이 많습니다. 그 고난으로 인하여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 그 뿐만 아니라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이 고난 중에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고난 중에 예수 믿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찾아온 고난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축복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장 이 곳은 지옥이 될 것입니다. 이 고난 때문에 세상이 이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중에 고난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2. 또 선한 일을 하는 중에 고난을 받은 사람은 기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받은 상과 영광을 생각할 때 이 고난을 잘 참을 수 있습니다.

3. 그러나 문제는 애매한 고난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인 것입니다. 말씀대로 믿음대로 사는데도 왜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답답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기회로 만드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이런 고난이 올 때 화가 나고 원망 불평할 수 있습니다. 또 해결이 안 되어서 고민하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이 없어지기만을 바라면서 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4. 하나님께서 이런 애매한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이유는 첫째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이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 믿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혀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매한 고난이라도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유익을 주시려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라는 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 자세]

  믿음이 어린 사람과 성숙한 사람의 차이가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을 받는 자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고난 받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애매한 고난이 왔을 때 첫째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합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애매한 고난이 온 이유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무엇인가 내게 말씀하시고 알게 하시려는 것이 있기 때문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아니면 절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뜻을 알기 위해서 엎드리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크게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큰 믿음을 가집니다. 그러면 큰 축복을 받고 큰 일꾼이 됩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엎드리면 자신에게는 복이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고난은 기도하라는 사인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기 때문에 사자 굴에 들어가서 밥이 되는 고난이 왔을 때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변명도 하지 않고 오직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하나만 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눈을 여셔서 하나님의 엄청난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6-9) 이 시대는 포로로 끌려가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불타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그 비밀을 알았으니 참 행복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지역마다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왕이 쳐들어왔습니다. 밤새도록 엎드려 기도했을 때 18만5천의 군사들이 다 죽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히스기야의 이름이 더 높아지고 그 위기가 축복으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에게 죽음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15년이나 더 살게 하시고 증거로 해 그림자가 15도나 더 뒤로 물러나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힘든 일이 생길 때 낙심하지 마시고 히스기야처럼 엎드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삽니다.

  두 번째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만을 결심합니다. 이유는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만 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늘 복 받을 것을 믿습니다. 고민할 것 없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 말씀대로 살 것을 결심하고 애를 쓰면 반드시 축복하시고 책임지시는 것을 눈으로 볼 줄 믿습니다. 창세기 26장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삭에게 하나님은 애굽으로만 내려가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삭은 흉년 때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랄 지방에 갔습니다. 그 때에 100배의 축복을 주셔서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준행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갔을 때도 거룩하게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만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이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다니엘이 포로였지만 왕의 진미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 늘 3번 기도했을 때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결국 축복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서울에서 집회했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를 새로 잘 짓고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보통은 강사숙소를 호텔로 자주 정하는데 저에게는 교회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집사님 댁에 큰방을 주셨습니다. 제법 큰집이었지만 추운 날씨였는데도 방에 불을 떼지 않았고 물도 찬 물만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좀 기분이 나빴습니다. 장로님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집사님 남편이 왔습니다. 그 남편이 제게 공손히 인사하면서 ‘목사님, 저는 1년에 한 두 번 교회에 소풍갑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더 나빴습니다. 그 말은 결국 자신을 교회에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식사 후에 모두 교회에 가고 저는 조금 여유 있게 가려고 혼자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걸어가면 5분 거리를 고물 자동차에서 저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주 놀랐습니다. 저녁예배 드리고 나오니까 또 차로 저를 집에 데려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예배 때에는 5시 정각에 남편이 넥타이까지 매고 부인 성경을 들고 차에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새벽예배를 드린 후에는 제가 1시간 이상 기도하니까 그 분이 못 기다리고 먼저 가셔서 저는 걸어서 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집회를 계속 했습니다. 그 남편을 보면 귀하고 방을 보면 짜증이 나곤 했습니다. 목요일 새벽에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남편이 추리닝을 입고 뛰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차를 경찰이 몰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면허도 없이 새벽에 운전 연습한다고 자신이 끌고 돌아다니다가 걸린 것이었습니다. 사실 운전 연습한다고 저를 데리고 다닌 것이었습니다. 참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축복해주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가정이 축복을 받아야 주의 종이 대접받는 것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낮 공부 때까지 계속 기도할 때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집중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낮 공부를 마치고 점심을 시내에서 먹고 돌아오니까 대문을 활짝 열고 남편이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남편이 저를 데리고 소파에 앉더니 두 내외가 큰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면서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중동에 수출을 했는데 사업을 확장시켰다가 부도가 났습니다. 은행에서 압류하려고 결정을 내리는 상황에 부흥회가 있었고, 교회에서는 부흥강사를 위해서 호텔도 얻고 준비도 했는데 두 내외가 모시겠다고 하니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낙심할까봐 허락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예배 나가서 부인집사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십일조 생활을 했는데 회사가 잘 되니까 십일조의 액수가 커져서 떼먹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5분 거리에 살면서도 장로님, 목사님 아무도 대접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대접하지 못하고 집이 날아갈 상황이 되자 부흥강사를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제가 거기서 머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망한 사람이 결심하고 십일조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장로님들과 저를 대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목요일에 경찰에 걸리는 바람에 저는 기도했는데 그 시간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수출전람회 중에 그 회사도 전시를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그 회사를 보다가 1억 5천만원을 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1억이 얼마나 큰 돈입니까! 그래서 그 회사를 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수출 제품을 들고 교회에 가져와서 간증하고 설교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로 기도하기로 결심하십시오. 둘째로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하십시오.

3. 고난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욥의 문제는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한심스럽고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것이 났다는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만약 욥이 그 상황 중에 기뻐하고 감사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떤 고난이 있어도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

  그러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살겠습니까?

1.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고난은 위대한 사람을 만듭니다. 고난은 마치 뜨거운 불의 용광로와 같아서 금을 넣으면 모든 찌꺼기가 사라지고 정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유도 없이 고난을 주시는데 목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그 사람의 찌꺼기를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정욕, 혈기, 교만, 위선, 오만의 모든 찌꺼기들을 없애기 위해서 고난의 용광로 속에 하나님은 우리를 넣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그는 은혜를 받으면 위대해지지만 자신에게 고난을 준 사람을 원망하고 미움을 가지면 그 사람은 더 악한 사람이 됩니다. 고난을 받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자세가 무척 중요한 것입니다. 억울하게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은 생각지도 않고 사람과 세상을 원망하고 불평하면 더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반드시 전화위복이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요셉과 같이 억울한 고난은 반드시 더 큰 축복을 가져온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은 항상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믿으십시오.

3. 세 번째로 고난이 왔을 때 항상 기뻐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이런 믿음으로 사자굴에 들어가도 기도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고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기쁨이 충만했고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스데반의 그 모습으로 사도 바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성숙의 변화는 고난 받는 태도와 정비례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성숙해져가는 것은 고난 받는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는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과 목표가 주님을 위해서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계속 디모데에게 강조하는 것이 고난을 잘 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까지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다는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자세가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저와 여러분도 고난 많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고난 때문에 낙심하는 사람되지 말고 모든 고난을 자신에게 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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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밝은 인생 

 

 

 

참 빛을 받아야 밝은 인생이 됩니다.  
 
제목 참 빛을 받아야 밝은 인생이 됩니다

어느 날 해와 별이 서로 자기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해가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을 머얼리 비추며 봐라, 내 빛이 얼마나 밝으냐 하면서 뽐냈습니다. 그러자 별이 말했습니다. 네 빛이 밝긴 하다마는 어둠속에서는 내가 최고지. 나는 밤이 되면 온 하늘을 영롱한 빛으로 수놓아 사람들에게 꿈과 사랑과 희망을 심어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해가 말했습니다. ‘어둠이 도대체 뭐냐?’ 별은 그것도 모르냐면서 나를 따라오라고 하며 해를 캄캄한 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해가 찾아가자 그만 밤이 사라져 어둠을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별은 다시 해를 커다란 동굴 속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동굴안도 역시 해가 들어가자마자 어둠이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어둠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이야기가 있느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 태양은 어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태양 앞에는 어둠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별은 자기 빛이 태양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태양앞에서 빛을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 격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별빛이나 달빛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것은 태양을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어둠은 어디서 왔습니까? 태양 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깃드는 것이 어둠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은 그 어느 누구도 참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빛은 세상에서 유일한 한 절대자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둠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다. 절대자의 빛을 받지 못할 때 어둠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자가 비춰주는 그 참빛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리고 무엇인가가 그 빛을 가리면 가릴수록 그 인생은 어둠속에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인생도 자기 빛을 자랑하지 말고 진정한 빛가운데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빛을 찾아 빛 가운데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인생이 밝게 빛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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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성경:엡1:17-19


1.천국을 확실히 보아야 합니다.


부산의 한 변두리 달동네에 신실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시장 한 모퉁이 좌판에서 장사를 하며 오직 하나님과 두 아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육체적으로 고달픈 삶을 살았지만 그는 감사하며 자녀들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였습니다. 이런 권사님의 신실한 믿음을 보셨는지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복을 주셔서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하여 큰 아들은 중소기업 대표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대기업 이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신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커다란 아파트를 드리려고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그 달동네의 낡고 작은 집을 고집하며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두 아들은 정 다른 데로 이사 가시는 게 싫으면 어머니께서 사시던 이 동네에다 새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웬일인지 쉽게 허락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단 몇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들이 뭐든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해드리겠다고 하자 권사님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내 집을 지어주고 싶으면 이렇게 해라. 먼저 주춧돌은 열 두개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짓되 주춧돌은 모두 다른 보석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둥은 다이아몬드로 하고 벽은 황금으로 하라. 마루에는 자수정으로 깔고, 담장도 황금으로 할 것이며, 대문도 열두개로 하되 모두 진주로 해야 하고, 담장 밖에는 유리알 같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강가에는 다달이 실과가 맻히게 할 것이며, 집으로 들어오는 도로도 모두 황금으로 포장을 하거라.”

그러자 두 아들은 깜짝 놀라며 ‘에이 어머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런 집을 어떻게 짓습니까?’ 그랬더니 권사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너희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런 집을 준비해 두셨단다. 나는 머잖아 그곳으로 이사를 갈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집을 지어주지 못할 바에야 그만 두고 그 돈으로 정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나 더 도와 주거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크리스천이라면 적어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질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이런 영광스러운 저택을 준비해 두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장차 반드시 이런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런 영광을 누릴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그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까짓 세상 것 때문에 염려 근심 질투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얽매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보십시오. 마음의 눈을 밝히 떠서 무엇을 보라고 하였습니까?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무엇이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입니까?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이런 영광의 나라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소망가운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저 천국의 한량없이 풍성한 영광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영광의 기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영광의 기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영광은 한량이 없습니다. 영원무궁합니다. 조금치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이 영광의 기업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천국의 그 아름다움과 영광을 알지 못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무슨 철학적 신학적 과학적 이성적하면서 쩍쩍하면 유식한 줄 알고, 천국이나 지옥 이야기를 하면 유치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공자가 어떻고 맹자가 어떻고 소크라테스가 어떻고 하면 그럴듯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하면 시큰둥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거 큰일 날 징조입니다. 세상이 그만큼 인본주의에 흠뻑 빠져 들어있다는 증거입니다. 눈이 어두워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철학이나 과학이나 정치나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신학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심오한 철학을 가르치려고 오신 것도 아니고, 그저 윤리적 도덕적으로 조금 고상한 삶을 살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여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눅19:10절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향이 아니라 실재의 장소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라도 반드시 사 들여야할 가장 소중한 보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며 정말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가운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어 영의 눈을 활짝뜨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저 영광스러운 천국을 확실히 보는 가운데 세상의 작은 것들에게 얽매이지도 말고, 그것 때문에 낙심이나 좌절이나 원망이나 불평도 말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소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확실히 선명하게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밝고 환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가 밝히 보이고 천국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길거리에 매일 더럽고 해어진 옷을 입고 다 낡아빠진 검은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더듬거리면서 나와서 깡통을 앞에 놓고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며 먹고사는 맹인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불쌍하고 초라한 행색으로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하는데 그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동정을 베풀어 제법 많은 천원짜리 지폐들이 깡통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한 소년이 걸인의 곁에서 서성거리더니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걸인 앞에 놓여 있는 깡통을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맹인 거지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소년을 향해 날쌔게 쫓아가더니 금방 붙잡고는 숨을 헐떡이며 ‘이런 고얀 녀석 같으니라구, 앞길이 창창한 녀석이 어디가서 일을 도와주고 살든지 할 것이지 할 짓이 없어 남의 것을 훔쳐 먹고 사느냐 이 놈아,’하면서 발길로 막 차고 두들겨 패고는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걸인은 맹인 행세를 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두 눈이 멀쩡한데 일하기가 싫어서 맹인 행세를 하며 빌어먹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진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목적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마음의 맹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은 떴으나 진짜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보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저 돈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 세상의 나쁜 것만 보면서 원망과 불평과 투기와 향락과 죄악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밝은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눈이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과 이 아름다운 세상과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보고 천국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며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빛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6:22,2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냐? 네 눈이 감겨져 진리를 보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네 인생이 얼마나 어두운 인생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밝은 눈, 아름다운 눈, 깨끗한 눈,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진리의 빛,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을 듬뿍 받아들이면 우리 인생이 해와 같이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육신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물질에도 밝아야 하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더 밝은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눈, 과학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더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진장으로 제공해 주시는 생명의 빛을 듬뿍 받아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눈을 가지려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때만이 우리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달려가 그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진리이신데, 생명이신데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어떻게 진리를 알겠으며, 생명을 알겠습니까?

오늘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보십시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뭡니까? 물론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지혜를 얻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눈이 활짝 열려 그 나라를 바라보며 누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복되고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대통령을 아는 것도 좋고, 국회의원을 아는 것도 좋습니다. 과학을 알고, 문화를 알고, 윤리도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 진정한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을 알게 되고 그래서 세상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진정 복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7: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을 때에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박근혜대통령이 18대 대한민국대통령에 취임하며 취임사에서 경제 민주화를 이루고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대통령으로서 정말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헌신함으로 어느 정도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 갈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책임질 수도 없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고,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고, 아무리 과학이나 문화가 눈부시게 발달해도 참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해서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내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래서 진정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국민행복시대는 요원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성실하게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거기에 행복이 있고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의 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방법과 목적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과 방법과 방향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진실하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죄를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죄에 대해서도 밝은 눈을 갖게 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걸 바르게 알고 그래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 때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 사회는 죄에 대하여 점점 눈이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머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가 만연되어 있어서 죄에 대한 경계심도 두려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가 양심을 마비시켜 더욱 죄악 속에 빠져 들어가게 하고 그래서 죄에 대한 양심은 더욱 마비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3:1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알지 못하고, 죄를 깨우쳐 주어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속에서 자행자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는 입에 담기도 그렇지만 요즘 뉴스에 보면 이 땅에 성적인 타락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모릅니다. 성폭행 문제 너무 자주 나오고, 나아가 불륜의 관계도 너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강제성이 없으면 다시 말해 서로 좋아서 하면 뭔 짓을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아름답게 하나 되어 아름답고 복되고 경건한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서로 돕고 의지하고 존중하며 귀히 여기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서로 좋아서 엉뚱한 짓을 하면 결혼을 했건 안했건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죄와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예민한 감각으로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 인본주의, 이기주의, 외모지상주의, 편의주의, 향락주의, 종교다원주의 등 온갖 왜곡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정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정 우리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가치있게 하고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하는지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며 영적인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영적인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야 그런 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나아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기에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들 때문에 원망 불평 좌절 분노하지 않게 됩니다. 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밝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과 천국과 세상에 대하여 활짝 열려진 밟은 눈을 가지고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소망과 평강과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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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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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설교

본문 : 마태복음 1 : 18~25

제목 : "임마누엘"

 

오늘날 남아선호사상이 많이 퇴색했습니다만,

예전에는 유난히 아들을 많이 낳기를 소원하는 가정들이 흔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많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가정에서 아들을 낳기 위해 계속 임신을 하다보니

어느덧 딸이 많은 가정이 되었습니다.

연이어 세 딸을 낳고 네 번째 임신을 했을 때에 틀림없이 아들이라고 믿었지만,

낳고 보니 또 딸이었습니다.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산모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않고 죽든지 말든지

방 한 구석에 밀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죽지 않고 울기만 했습니다.

이 어머니는  “그래도 죽지 않고 빽빽거리는 것을 보니 명줄이 긴가보다” 생각하고

아기에게 젖을 물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춘기에 들어선 딸아이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다는 것과 아무도 기뻐해 주는 사람도 없었으며

죽기만을 바랐던 아이였다는 사실이 당사자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때부터 마음에 병이 생겼습니다.

엄마를 극도로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엄마가 아무리 사랑해주고 잘해주려고 해도 그 사랑이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는 

마음이 삐뚤어진 불행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상처를 많이 받게 됩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아도

상처 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큰 상처는 버림받은 결과 얻은 상처로,

특별히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크게 상처를 입습니다.

요사이 이혼률이 높아지면서 내버려지는 아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 아이들 중에는 6~7세의 아이들도 있지만 갓 태어난 아이들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평생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 해서 범죄한 인간은 노아 때에 와서 극도로 타락하여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렀습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후 노아의 여덟 식구를 제외한 모든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것도 불행한 일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10~12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들이 다 타락하여 악해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사람을 한 명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따라 우리를 멸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지어주신 그 이름에는 ‘구세주’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 자체가 예수님의 사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실을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전하면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 2:1~5).


그렇습니다!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8~9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14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가장 저주스럽게 죽으신 것입니다.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주스럽게 죽으셨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법을 어기므로 해서

저주를 받게 된 저와 여러분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까지도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받은 복 가운데 가장 큰복은 “언제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여 주시는 복”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절대주권을 가지신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복을 다 받습니다.

범사에 형통하는 복과 전화위복의 복을 받습니다.

고난이 오고 손해를 보고 누명을 쓰고 노예가 되고 감옥에 가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지나고 보면 더 잘되고 더 큰 축복을 받으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전화위복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창세기 21:22을 보면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라고 했고,

창세기 26:28에서 이삭에게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조차도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고 고백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뿐만 아니라 야곱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있었으며,

요셉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범사에 형통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고

그곳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 일 때문에 오히려 총리가 되고 축복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28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범사에 형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후로부터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갈 3:14,29).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면 구원을 얻은 그 사람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18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은 성령을 알뿐만 아니라

그 성령이 그 사람 안에 계시며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3:16).

옛날 러시아에 지혜롭고 선한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매우 사랑해서,

과연 이 나라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 종종 노동자나 거지

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가 방문한 사람들 중에 아무도

그가 황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황제를 잘 대접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문전박대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황제가 오두막에 사는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얼마나 극진히 대접을 잘하는지  음식만 먹고 가려고 했으나

주인이 간곡히 붙잡는 통에 하루 밤을 함께 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왕복을 입고 다시 그 사람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아니, 어제 밤에 나와 함께 잔 분이 이 나라의 황제였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황제는 "그대는 지난밤에 나를 정성껏 대접했노라.

이제 내가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 말해보라."

그러자 이 사람은 허리를 굽히고 "황제께서는 궁궐과 그 영광을 떠나

이 어둡고 비천한 장소에 저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제가 먹는 초라한 음식을 함께 드셨고,

저와 거처도 함께 하셨습니다.

황제께서 저와 함께 거하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달리 아무런 소원이 없습니다." 라고 겸손히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이 땅의 황제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 주님은 하루 밤만 주무시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떠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축복이야말로 축복 중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을 때,

이 사실을 모르고 낙심이 되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셨으나

이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지 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여주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중에 외로움을 느끼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홀로 있을 때에도 혼자가 아닙니다.

언제나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요한복음 5:24의 말씀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순간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다시는 정죄함을 받지 않게 되었고, 결단코 심판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하나님이 함께 하여주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임마누엘의 복을 받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기독교 외에 유교, 불교, 이슬람교 등등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나름대로 진리를 전파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믿게 된 어떤 분이 자신이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실수로 우물에 빠졌는데,

그 우물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사람 살려! 사람 살려!”라고 외쳐댔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이것을 보고 “아이고, 이 일을 어찌할꼬.

아무래도 당신은 전생에 죄가 많아서 이렇게 된 모양이니

참회하고 저승으로 가시오.”라고 말하고 안타까워하며 지나갔습니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그 곁을 지나가다가 우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사람은 누구나 아차하면 실수하는 법이지.

이번 일을 거울 삼아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게나, 쯧쯧." 하며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깊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점점 굳어오고 온 몸에 힘이 빠져

물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또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사람이 우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급히 어디론가 달려가 사다리를 구해가지고 와서

우물 밑으로 내려가 거의 다 죽게 된 이 사람을 살려냈습니다.


이 이야기는 비유로, 첫 번째 사람은 석가모니를 말하고,

두 번째 사람은 공자를 말하며,

세 번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왜 범죄했느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느냐,

“어떤 죄를 범했느냐”라고 절대로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책망하시지도 않으시며 조목조목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마 11:28).

그리고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계 3:20).


예수님은 죄가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묻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이 열리기만을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마음의 문은 결코 바깥에서 열 수 없기 때문에 본인이 문을 열어줄 때까지

주님은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보면,

비록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다 쓰고 돌아온 

이 아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무조건 받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라고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나오기만 하면, 예수님께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는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참 회개는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오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죄를 이길 힘을 주시고,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오시라고 권하면 “술 끊고 가겠다.”

​혹은 “담배를 끊고 가겠다.” 혹은

“지금의 죄된 생활을 좀 정리하고 교회에 가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앞서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우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도저히 자기 힘으로 살아나올 길이 없습니다.

내 힘으로 죄를 버리고, 내 힘으로 바르게 살고,

그 다음에 교회 가겠다는 사람은 영원히 교회에 나오지 못합니다.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가 있는 대로, 허물이 있는 그대로,

부족하지만 무조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한 성도가 됩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기만 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임마누엘의 복을 받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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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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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주일낮예배설교 / 강을 건넌 사람들 (October,Sunday Sermon)
 
제목 : 강을 건넌 사람들

말씀:수3:14-17


1.현실의 강을 넘어서야 합니다.

어떤 인터넷 매체에 보니까 박명수 어록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들이 있었습니다. ‘성공은 1%의 재능과 99%의 빽이다.’ ‘일찍 일어난 새가 피곤하다.’ ‘고생 끝에 골병난다.’ ‘가는 말이 고우면 얕 본다.’ ‘늦었다고 생각할때는 늦은 거다.’ ‘참을 인이 세 번이며 호구된다.’ 그리고 이런 말들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고, 이런 말들을 주옥같은 명언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지요? 공감이 가는 말들인가요? 물론 어떤 면에서는 오늘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공감이 되는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설령 그런 말들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게 진리는 아닙니다. 아니 도리어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다면 그것은 현실이 그만큼 왜곡되고 썩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사고 방식은 결코 인간의 삶을 가치있고 의미있게 하며,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갈등과 탈법과 술수와 상처와 아픔과 시기와 질투와 무질서를 초래하여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그걸 진짜로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말 뿐입니다.

여러분, 세월이 어떻게 변하고, 가짜가 어떻게 그럴듯하게 가장해도 거짓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세월이 변한다고 진리가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진리가 가짜가 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처음부터 진리가 아니었을 뿐이지 진리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너무나 왜곡된 가치관이 마치 진리처럼 가장하고 판을 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인본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무사안일주의와 쾌락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무슨 박명수 어록이니 뭐니 하는 이런 허접스런 말들이 나오고 그걸 또 무슨 주옥같은 명언이니 어쩌니하며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며 흘러가고 있는 이 왜곡된 가치관들 속에 끌려가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맨날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교제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신이 죄와 무지속에 있는 줄은 모르고 그저 자기중심, 자기 소견, 자기 의지, 자기 경험대로 물질주의, 이성주의, 이기주의 물결속에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거기에 휩쓸려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1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의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영혼이 변화되고, 마음이 변화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그 뜻을 좇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온전한 분별력을 가지고 모든 거짓되고 왜곡된 가치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다수라는 이름으로 진짜를 가장하고 있는 가짜를 바르게 분별하고 배격함으로 그런 것들에 결코 농락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오염되고 추하고 왜곡된 현실을 이기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현실의 강을 건넌 사람들

여러분,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런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 살 것을 계속 말씀하셨고, 또 그런 말씀을 따라 삶으로써 성공했던 많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아 할아버지도 그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죄가 세상에 관영하여 하나님께서는 땅을 홍수로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 할아버지 가정은 그런 현실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그 현실의 강을 건너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시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홍수를 피라하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즉각 순종하여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무려 120년 동안에 걸쳐 방주를 지었습니다.

여러분,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137m, 넓이가 23m, 높이가 14m의 3층짜리 배로 용적량이 3만톤이 넘는 거대한 배입니다. 물론 지금의 조선기술로는 이런 규모의 배 정도야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노아의 가족 여덟식구가 순전히 손으로 이 정도의 배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120년동안 그 엄청난 일을 하면서 얼마나 힘이 들었겠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었겠습니까? 이 배를 정말 우리가 완성이나 할 수 있을까? 정말 120년 후에 인류가 멸망할 비가 오기는 오는 걸까? 또 10년 30년 50년 70년 100년이 지나면서 내가 정말 말씀을 바로 듣기는 들은 걸까 등등 많은 생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전 세계의 홍수심판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믿고 배를 만드는 노아의 가족을 미치광이 취급을 하면서 노아의 가족을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런 모든 현실을 뿌리치고 배를 만들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오직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였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중단하지 않고 열심히 성실하게 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120년이 지났을 때 정말로 하늘에 구멍이 뚫려 밤낮 40일 동안을 양동이로 물을 퍼붓듯이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온 세상이 물에 다 잠겼고, 노아를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던 사람들은 하나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뭐라 그러거나 말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내부 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120년간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의 가족 8식구만이 방주 안에서 안전하게 대홍수의 강을 건너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12: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밑도 끝고 없이 무작정 가라는 것입니다. 떠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왜곡되고 죄된 문화가 판을 치는 이 땅과 이 사람들과 이 문화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떠나 내가 새롭게 시작할 그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버지와 고향산천과 그 모든 환경과 문화의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구원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애굽의 우상숭배의 문화의 땅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 멀리 가나안 땅까지 가게 하셔서 거기서 새역사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들이 뜻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죄와 무지와 왜곡과 어둠의 현실들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딛고 일어서든지 아니면 그곳을 떠나든지 여하튼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고, 거기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에덴의 모습들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렸고, 너무나 많이 변질되어 있어서 우리가 넘어야 산과 건너야 할 강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때로는 환경과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산입니다. 때로는 이성과 경험이 우리가 건너야 할 강입니다. 불신과 의심과 욕심과 욕망과 돈과 권력도 넘어서야 할 강입니다. 사람과 문화와 과학도 우리가 넘어서야 할 산 중의 하나입니다. 술과 담배와 향락과 무사안일은 말할 것도 없이 반드시 건너가야 할 강입니다. 물질주의와 인본주의과 종교다원주의와 개인이기주의도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요, 건너야 할 강입니다. 이러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모두가 원하는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정말 내가 지금 시급하게 넘어서야 할 산이 무엇인지, 빨리 건너야 할 강이 무엇인지 되새겨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인도하심과 능력 주심을 따라 그 산을 넘고 그 강을 건너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산과 강의 저너머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에덴의 축복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산과 강을 넉넉히 건너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말씀드리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어떻게 왜곡되고 오염된 가치관과 문화가 판을 쳐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푯대로 삼고 천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중요한 시점에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그때가 우기라서 요단강이 넘칠만큼 싯뻘건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요단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런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갔습니까? 오늘 1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이것은 6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으로 거기에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에 도착하면 무조건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요단강이 갈라질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은 제사장들이 멘 언약궤를 보고 건너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세상 물결이 어떻게 넘실 거려도 말씀을 따라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약궤가 뭡니까? 말그대로 약속의 말씀이 들어있는 상자입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따라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 생명의 말씀을 따라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아무리 사납게 덤벼들어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을 바라보며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요단강을 가나안복지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 때 그 사람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갈때에 사나운 강물이 넘실대며 그들을 방해하고 위협하고 낙심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갈때에 우리를 실망시키고 낙담케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환난과 풍파가 닥칠때도 있고, 때로는 환경과 상황 때문에, 때로는 물질과 건강 때문에, 때로는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말고 흔들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부여잡고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위협하고 유혹해도 그런 왜곡되고 죄되고 혼잡한 것들에게 눈길도 주지말고, 흔들리거나 낙심하지도 말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부여잡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든지,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상황과 환경을 그대로 두고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서 이기게 하시든지 여하튼 어떤 방법으로든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이 인도하십니다. 힘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환경과 상황을 변화시켜 주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그러실만한 능력과 권한과 사랑과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정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주님의 방법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때에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모든 세력들을 이기고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5,16절 말씀 보겠습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자 보십시오, 요단강물의 흐름이 언제 그쳤습니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물속에 들어섰을 때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이 덤벼들던 요단강의 흐름을 끊고 강바닥을 드러내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는데 그런 기적이 일어난 시점이 언제냐?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언약궤를 메고 사납게 요동치며 흐르는 요단강속으로 들어갔을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기적을 일으켜 놓고 건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의 경우 기적을 만들어 놓고 누리게 하시기 보다는 믿음으로 행동할 때 기적의 은총을 누리게 하십니다. 노아에게도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어놓고 타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가 만들어서 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실때도 먼저 그냥 무조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동안 반석에서 물을 내실 때도 모세에게 반석을 향하여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놓고 갖다 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물을 떠서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를 부활시킬때도 마르다에게 무덤 입구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 못가에 있던 맹인에게는 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말씀에 순종했을 때 결국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즉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갓난아기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과 순진한 마음을 보시고 은헤를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열심히 성실하게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따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따라가도 하나님이 아니라 하신 것,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버리고 넘어가고 떠나 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두말할나위도 없이 거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 사랑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 땅에서 누려야 에덴 동산이 있고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이어지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앞에 높게 서 있는 왜곡된 현실의 산들을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도도하게 흐르는 왜곡의 가치관의 강을 건너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푯대로 삼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넉넉하게 건너가게 하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도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다가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런 진정하고 영원한 승리를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우리 온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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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 십자가의 승리 (September,Sunday Sermon)

 

제목 : 성령 세례를 받읍시다.

 

말씀 : 1:4,5

 

1.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고 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재물도 얻고 싶고, 건강도 얻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권세도 얻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예쁜 부인이나 백마 탄 왕자같은 남편도 얻고 싶습니다. 평안도 자유도 즐거움도 기쁨도 사랑도 존중도 받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좋은 것을 누리며 사랑과 축복과 기쁨 속에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입니다. 또 그렇게 뭔가 좋은 것들을 누리고 싶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게 됨으로 좀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동기가 됨으로 이러한 것들에 대한 건전한 추구는 도리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도 열심히 노력해서 얻고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말로 이러한 것들보다 더 우선해서 받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도 우리 인생에게 보템과 유익과 기쁨이 되지만 그보다 더욱 보템과 유익과 은혜와 기쁨을 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우리는 인생의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인으로서의 인간 영혼은 죄와 무지속에 있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 인간 영혼이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으로서 누릴 수 있는 그 엄청난 축복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심령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심령속의 굳어지고 무지한 것들을 깨트려 버리고, 죄된 것들을 씻어 버려야 비로소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알게 되면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 되고 예수님 믿고 정말로 그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생명 은혜 기쁨 자유 평안을 마음껏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 천만금을 얻을 것보다도, 천하제일의 권세를 얻은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무엇을 기다리라? 아버지께서 약속한 것. 그게 뭡니까? 성령입니다. 14:1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바로 이 약속하신 성령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을 받아야 너희들이 나를 바르게 알고 사명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약속하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심령이 깨끗해져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리고, 천국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야 자신을 알고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알게 됩니다.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래서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위로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위협이나 유혹도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던 제자들, 심지어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부인했던 베드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믿지를 못했던 제자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곳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도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다가 성령 충만함을 받은 다음에는 완전히 180도 달라겼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고 하늘나라가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참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워서 걸어 잠갔던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어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나 부활하셨다. 이 분이 그리스도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힘차게 외쳤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게 옳으냐 너희들 말 듣는 게 옳으냐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세워졌고, 계속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헌신을 통하여 또 다른 교회가 세워지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까지 이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20:22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 받아야 죄사함 받습니다. 그래야 심령이 깨끗해 집니다. 그래야 눈이 밝아집니다. 천국이 밝게 보입니다. 선과 악을 바르게 분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똑똑하게 들립니다.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상황과 환경을 이깁니다. 죄와 유혹을 이깁니다. 능력있게 생명있게 담대하게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의 은혜가 풍성한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요, 지혜의 영이요, 능력의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생명과 진리와 능력이 충만한 복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까?

 

2.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려면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뭡니까?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1:23절이지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이 곧 예수 그리스도 곧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지혜, 예수님의 능력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지상교회는 온전치 못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교회 안에 만이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가 있습니다. 주님의 삶과 주님의 가르침과 주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곳은 오직 교회 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해야 성령 충만 받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앞에서 보았던 4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모리아 산입니다.(22:2) 다윗이 장막을 치고 언약궤를 모셔두었던 곳입니다.(대상15:1)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곳입니다.(대하3: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곳입니다. 즉 예루살렘은 인류구원의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거룩한 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있는 곳, 말씀이 있는 곳, 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가 있는 곳,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머물며 더욱 말씀 위에 서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금까지는 너희 연약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제자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예루살렘은 어디 입니까? 교회밖에 더 있겠습니까. 주님의 피값으로 세우신 곳,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예배와 기도와 말씀과 찬양과 전도와 섬김과 봉사가 있는 곳입니다. 이런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봉사와 섬김 등으로 주님과 교제하고 성도와 교제할 때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성령을 받게 되고, 이미 받은 자는 더욱 충만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충만하게 받은 사람은 생명의 은총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며 주의 사역 힘있게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된 교회,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섬김이 있는 교회, 그래서 이 땅에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유일한 기관인 교회를 가까이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곳을 가까이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보다도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섬기고 교제하는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말씀과 사랑과 은혜와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교제할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정말로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언제 참 제자가 되었습니까? 앞서 말씀드린대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나서부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까? 기도에 힘쓸 때였습니다.

 

1:14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많은 분들과 더불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 드디어 오순절 날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후 제자들은 능력있는 제자들이 되어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즉 기도할때에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았고, 기도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이후 능력있는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9:29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어느 날 예수님은 산에 기도하러 가시고 제자들만 남았는데 어떤 아버지가 귀신 들린 소년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하였지만 못고쳐 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아 나가가 한마디 하니까 귀신이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우리는 왜 못쫓았습니까, 그러니까 기도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너희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이런 모든 잡류들, 더러운 것들, 추한 것들, 유혹들, 마귀의 장난들 다 물리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수요기도회,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성도들과 신령한 교제를 나눌 때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히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이 대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깨어 기도하며 주님과 온전한 교제를 이룰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모든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을 물리쳐 버리고 더욱 큰 감사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겸손히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또한 말씀을 듣고 받기 위함입니다. 그럴 때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10:44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 말씀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온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놓고 베드로를 모셔옵니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밖으로 나가 발 앞에 절하고 모셔 들이고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자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오자 그 발아래 엎드려서 절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친척, 친구들까지 모아놓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엎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과 가치관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기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 능력의 말씀 앞에 조용히 무릅꿇고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다윗은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지 말씀이 송이꿀보다도 더 달다고 하였습니다.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저와 여러분은 더욱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 말씀의 은혜로 내 심령이 밝아지고 희망과 은혜가 넘치고 능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성령의 지배 속에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할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래야 믿음을 갖게 되고 나아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온전히 성령의 지배속에서 살면서 능력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능력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세상에서는 돈이 힘이고 권력이 힘이고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만 그게 진짜 힘이 아닙니다. 진짜 힘은 죄를 이기는 힘입니다.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힘입니다. 상황과 환경과 유혹과 핍박과 죽음을 이기는 힘입니다.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성령의 충만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죽음도 마귀사탄의 권세도 모두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돈과 명예와 권세가 있어도 결국 지는 자가 됩니다. 심지어 아무리 고상하게 종교생활해도, 교회가 아무리 웅장해도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면 힘이 없습니다. 환난풍파 몰아치면 무너집니다. 세상의 유혹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래서 엡5:18절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하지 말라. 술의 지배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술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혼란스럽게 만들고 분별력을 희미하게 만듭니다. 영적 도덕적 윤리적 감각을 무디게 만듭니다. 술 뿐아니라 세상의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향락과 오락은 말할 것도 없고 물질과 명예와 지식과 권세와 이런 것들도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에 취하면 마침내 감각이 무디어지고 영혼이 황폐해지고 그러다 마침내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성령은 살리는 영이니까. 지혜의 영이니까, 생명의 영이니까, 사랑의 영이니까, 은혜의 영이니까, 화평과 위로와 소망과 자비의 영이니까, 이런 영으로 충만해야 비로소 올바른 분별력이 생기고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충만해 지니까,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의 역사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다른 것으로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물밀 듯 쏟아져 내려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완전한 생명의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지식이나 그까짓 술이나 향락이나 오락이나 이런 것들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는 기쁨입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추한 것들과 죄와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고상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기쁨입니다. 그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퍼펙트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에 앞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위하여 교회를 가까이 하고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한분도 빠짐없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세상의 모든 죄와 추한 것들과 환난과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이기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평강과 위로 소망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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