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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도전과 응전의 시대

 

한국교회협의회의 조직과 변천을 살펴보려면 1912년 한국개신교 복음주의연합공의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출발할 때에는 장감의 신앙은 어느 정도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연합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에 개신교 전체를 대변하는 연합운동의 협의체 구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또 선교의 목적이 같았던 블레어와 하디 선교사의 제의가 채택되었고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의 윌리엄 스캇이 적극적인 추진으로 교회협의회(FCC)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협의회가 공헌 한 것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복음운동에 한국의 각 교단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일본에 있는 40만의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본연합공의회, 입본의 캐나다장로교회와 협력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27년을 기점으로 북장로교선교회는 한국교회연합을 통한 장감의 연합운동에 깊은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고 결국 탈퇴하기로 결정하여 연합체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서 한국의 교회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어 나가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는 그동안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이었던 장로교와 감리교에 이어서 성결교가 한국교회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는 복음주의에 입각한 회개 운동과 부흥운동에 혼연일체가 되어 부흥운동에 전력투구하였기 때문이다. 성결교회의 복음전파 방식은 그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중생과 성결의 체험 교리인 그리스도의 보혈로 원죄의 씻음과 신유와 부활과 재림과 영생을 전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이 중점을 둔 것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은 놀라운 부흥운동을 경험한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더욱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과 죄에서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강조하는 성결교회의 가르침은 대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역동적인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주었다.

 

이 시대 한국교회가 만나 또 하나의 움직임은 신학적 변천이다. 한국교회는 1930년에 접어들어 이단, 신흥종교, 자유주의, 신비주의 부흥운동, 그리고 무교회주의의 등장으로 그 동안 견지해 왔던 신학적 통일성이 깨지고 다양한 신학사상들이 발흥하기 시작했다. 1934년 한국 북장로교 선교 희년을 맞으면서 블레어가 신학적 변천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던 것처럼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 이 시대의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상적 변천은 리더십의 전환과 별도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상호 깊은 연계성을 지니고 진행되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장로교의 남궁혁, 백낙준, 박형룡, 이서휘,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윤인구, 김치선과 감리교의 전영택, 임영빈, 변홍규, 정경옥, 류형기, 그리고 갈홍기는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55, 전성천 박사는 한국개신교의 분열과 일치라는 예일대학의 박사학위논문에서 한국에는 언더우드, 알렌, 헤론, 앨러스 등 4명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있었으며, 4명의 선교사들 주에서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에 동의했던 사람들은 언더우드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했다. 언더우드 외에 다른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북장로교 내의 주류 곧 구학파의 전통,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들의 4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은 선교사는 언더우드 밖에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의사나 간호사였기 때문에 좀 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이기는 하지만 다수의 개척 선교사들이 그 같은 입장을 가졌다는 것은 선교 초기 신학적 분위기를 꼭 보수적인 것 많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1889년 마포삼열을 비롯한 보수적인 맥코믹 출신 북장로교선교사들과 1892년 이눌서를 비롯한 남부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남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 국내에 대거 입국하면서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반적인 장로교 선교회의 신학적 성향은 보수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는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였고 한국교회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유주의 도전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1930년대 들어 지금까지 정통신학의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서 있던 한국교회에 진보적인 신학이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진보적인 세력은 얼마 후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조선신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교회에 깊숙이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까지 한 목소리를 내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적 통일성이 서서히 깨어지고 다양한 신학이 역사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정경옥의 자유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박형룡의 정통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그리고 이용도의 신비주의가 그것이다.

 

감리교 신학자 정경옥이 한국교회에 자유주의를 정착시킨 주인공라면 김재준은 한국교회에 진보주의를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김양선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파괴적인 성경비판을 감행하는 극단의 자유주의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성경의 완전무오를 거부하고 그 같은 사상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그는 정경옥의 자유주의와 박형룡의 정통주의 사이에 진보주의라는 중도적 입장을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인 색깔뿐만 아니라 삶의 스타일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김재준 목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김재준 목사가 개방적이었다면 박형룡 박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고 철저하게 칼빈주의 입장에서 정통주의를 변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김재준에게 정통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바로 신학을 사변적이고 객관적인 굴레 속에 가두어 두고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연계시키지 않는 데 있었다. 반면에 박형룡에게 진보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결국 기독교 유일성마저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었다.

 

1930년대 박형룡은 정통주의 대변자로 주로 교단 장로교회에서 만인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화려한 학력, 탁월한 근면성, 한국에서의 선교사 1세대와의 두터운 교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강력한 의지는 그를 일약 한국교회 정통의 대변자로 부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귀국 후 한국교회 안에 일고 있던 정경오류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신학과 김재준으로 대변되는 진보주의 신학,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이용도의 신비주의 부흥운동의 발흥은 기왕에 한국교회에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을 구축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기로 다짐했던 박형룡의 신학적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학 논쟁과 교회의 응전이 1930년부터 1935년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1935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사건은 신사참배 논쟁이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처했다. 호주장로교선교회가 보고한 것처럼신사참배문제는 한국의 교회가 직면하였던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신사참배는 1911년의 105인 사건이나 1919년의 3.1운동 탄압보다도 더 크고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위협을 가했던 문제이다. 그것은 105인 사건이나 3·1운동으로 인한 탄압이 민족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제의 탄압이었다면, 신사참배 강요는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신앙 양심을 유린당하는 본격적인 종교박해였고, 교회 전체가 당한 대 박해였고, 전 민족이 당한 일대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사참배 문제는 세속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으로 저이, 종교, 교육, 문화 등 여러 부분에 걸친 복합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순응 또는 타협함으로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신상참배의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키느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는 신앙의 본질과 그 해석, 더 나아가 그 적용과 실천에 관한 문제와 깊숙이 연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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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과 응전의 시대

 

한국교회협의회의 조직과 변천을 살펴보려면 1912년 한국개신교 복음주의연합공의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출발할 때에는 장감의 신앙은 어느 정도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연합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에 개신교 전체를 대변하는 연합운동의 협의체 구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또 선교의 목적이 같았던 블레어와 하디 선교사의 제의가 채택되었고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의 윌리엄 스캇이 적극적인 추진으로 교회협의회(FCC)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협의회가 공헌 한 것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복음운동에 한국의 각 교단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일본에 있는 40만의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본연합공의회, 입본의 캐나다장로교회와 협력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27년을 기점으로 북장로교선교회는 한국교회연합을 통한 장감의 연합운동에 깊은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고 결국 탈퇴하기로 결정하여 연합체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서 한국의 교회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어 나가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는 그동안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이었던 장로교와 감리교에 이어서 성결교가 한국교회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는 복음주의에 입각한 회개 운동과 부흥운동에 혼연일체가 되어 부흥운동에 전력투구하였기 때문이다. 성결교회의 복음전파 방식은 그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중생과 성결의 체험 교리인 그리스도의 보혈로 원죄의 씻음과 신유와 부활과 재림과 영생을 전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이 중점을 둔 것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은 놀라운 부흥운동을 경험한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더욱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과 죄에서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강조하는 성결교회의 가르침은 대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역동적인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주었다.

 

이 시대 한국교회가 만나 또 하나의 움직임은 신학적 변천이다. 한국교회는 1930년에 접어들어 이단, 신흥종교, 자유주의, 신비주의 부흥운동, 그리고 무교회주의의 등장으로 그 동안 견지해 왔던 신학적 통일성이 깨지고 다양한 신학사상들이 발흥하기 시작했다. 1934년 한국 북장로교 선교 희년을 맞으면서 블레어가 신학적 변천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던 것처럼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 이 시대의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상적 변천은 리더십의 전환과 별도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상호 깊은 연계성을 지니고 진행되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장로교의 남궁혁, 백낙준, 박형룡, 이서휘,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윤인구, 김치선과 감리교의 전영택, 임영빈, 변홍규, 정경옥, 류형기, 그리고 갈홍기는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55년, 전성천 박사는 “한국개신교의 분열과 일치”라는 예일대학의 박사학위논문에서 한국에는 언더우드, 알렌, 헤론, 앨러스 등 4명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있었으며, 이 4명의 선교사들 주에서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에 동의했던 사람들은 언더우드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했다. 언더우드 외에 다른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북장로교 내의 주류 곧 구학파의 전통,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들의 4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은 선교사는 언더우드 밖에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의사나 간호사였기 때문에 좀 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이기는 하지만 다수의 개척 선교사들이 그 같은 입장을 가졌다는 것은 선교 초기 신학적 분위기를 꼭 보수적인 것 많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1889년 마포삼열을 비롯한 보수적인 맥코믹 출신 북장로교선교사들과 1892년 이눌서를 비롯한 남부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남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 국내에 대거 입국하면서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반적인 장로교 선교회의 신학적 성향은 보수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는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였고 한국교회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유주의 도전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1930년대 들어 지금까지 정통신학의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서 있던 한국교회에 진보적인 신학이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진보적인 세력은 얼마 후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조선신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교회에 깊숙이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까지 한 목소리를 내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적 통일성이 서서히 깨어지고 다양한 신학이 역사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정경옥의 자유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박형룡의 정통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그리고 이용도의 신비주의가 그것이다.

 

감리교 신학자 정경옥이 한국교회에 자유주의를 정착시킨 주인공라면 김재준은 한국교회에 진보주의를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김양선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파괴적인 성경비판을 감행하는 극단의 자유주의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성경의 완전무오를 거부하고 그 같은 사상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그는 정경옥의 자유주의와 박형룡의 정통주의 사이에 진보주의라는 중도적 입장을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인 색깔뿐만 아니라 삶의 스타일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김재준 목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김재준 목사가 개방적이었다면 박형룡 박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고 철저하게 칼빈주의 입장에서 정통주의를 변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김재준에게 정통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바로 신학을 사변적이고 객관적인 굴레 속에 가두어 두고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연계시키지 않는 데 있었다. 반면에 박형룡에게 진보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결국 기독교 유일성마저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었다.

 

1930년대 박형룡은 정통주의 대변자로 주로 교단 장로교회에서 만인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화려한 학력, 탁월한 근면성, 한국에서의 선교사 1세대와의 두터운 교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강력한 의지는 그를 일약 한국교회 정통의 대변자로 부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귀국 후 한국교회 안에 일고 있던 정경오류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신학과 김재준으로 대변되는 진보주의 신학,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이용도의 신비주의 부흥운동의 발흥은 기왕에 한국교회에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을 구축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기로 다짐했던 박형룡의 신학적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학 논쟁과 교회의 응전이 1930년부터 1935년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1935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사건은 신사참배 논쟁이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처했다. 호주장로교선교회가 보고한 것처럼“신사참배문제는 한국의 교회가 직면하였던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신사참배는 1911년의 105인 사건이나 1919년의 3.1운동 탄압보다도 더 크고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위협을 가했던 문제이다. 그것은 105인 사건이나 3·1운동으로 인한 탄압이 민족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제의 탄압이었다면, 신사참배 강요는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신앙 양심을 유린당하는 본격적인 종교박해였고, 교회 전체가 당한 대 박해였고, 전 민족이 당한 일대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사참배 문제는 “세속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으로 저이, 종교, 교육, 문화 등 여러 부분에 걸친 복합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순응 또는 타협함으로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신상참배의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키느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는 신앙의 본질과 그 해석, 더 나아가 그 적용과 실천에 관한 문제와 깊숙이 연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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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박해의 역사

 

사도시대교회는 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하여 준비되어진 하나님의 교회 역사이지만 참으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사도시대에 이르러 수많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들이 인간으로서는 참아내기 어려운 지경의 각종 박해를 받았으며 때로는 십자가에서, 때로는 단두대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속절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그 모진 박해를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사나운 맹수들에게 찢기어 삼키 우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림으로서 박해자들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기독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는 기독교 역사가 본격적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던 로마교회를 통하여 시작되어 졌다. 우리는 사도시대의 기독교박해를 고찰하면서 그 박해가 발생하게 된 이유와 배경을 신학적으로 분석하며 또한 그 박해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신학적으로 정립한다.

 

1.유대인들에 의한 박해.

 

사도시대 기독교교회에 대한 박해는 유대교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유대교와 기독교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는 형편이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립은 이스라엘 본토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전체에 확산 되었다.

 

1.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립.

 

초기 기독교 당시 유대인들은 매우매우 혼란스러운 입장에 처해 있었다.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외세의 침략과 정복에 의하여 국가 없는 조국을 마음 속에 지키고 그리며 살았다. 그러 그들에게는 조상대대로 전승되어 온 메시야사상에 의한 시온니즘적 대망이 있었고 그 대망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리며 살았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출현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가난한 일개 목수의 아들이 메시야를 자처한 것도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는데 그 목수의 아들이 점점 오만방자해 지더니 이제는 아예 하나님과의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유대인들은 심히 분노하였고 그를 로마법정에 세워 처단해 버렸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줄 알았던 예수그리스도의 잔영<殘靈>이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되살아 났다.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점점 늘어가면서 상대적으로 유대교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미 국가의 멸망으로 민족 전체가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졌고 본토에 남은자 마져 교리적 문제로 사분오열되었으며 밀려들어오는 헬라니즘, 그레꼬로만니즘 등등의 이방문화로 인하여 전통적인 시온니즘이 와해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 가볍게 보았던 신흥종파가 유대인 사회 전체를 위협했다. 이러한 상황은 본토 예루살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로마, 그리스, 이집트, 팔레스틴 등등의 지역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 전체에 만연되었다. 특히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는 본토 유대인 사회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다. 여러 가지 사연으로 인하여 조국을 떠나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조상대대로 계승되어 온 시온니즘 하에서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적 삶을 살았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드디어 고대하던 메시야가 탄생하였다는 희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전해들은 소식들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보다 많이 오류 되어 있거나 무시되어 있어서 신경 쓸 것 없는 가벼운 이야기였고 어떤 때는 너무 과장되어 놀라운 소식일 때도 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처음 전해들은 이야가는 참으로 놀라우면서도 실망스러운 이야기였다.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에서 목수의 아내가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해서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했다. 이에 헤롯이 놀라 당시에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대인들은 한편으로는 놀라움과 기대감을 가졌고 한편으로는 실망하였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전해 내려온 구세주가 드디어 왔는가? 하는 점에서 놀라움과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구세주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의문과 실망을 하였다. 그들은 구세주가 헤롯왕조의 후예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닌 이두메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식대로라면 구세주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 다윗가문 중에 명망 있는 어느 집안에서 태어나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 후로 30여년이 흐르도록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음에 따라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잊어버렸다. 그러나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목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들려왔다. 그가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은 후 광야에서 시험받은 이야기를 비롯하여 각종 이적과 기적을 행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들은 크게 놀랐고 흥분하였으며 메시야에 의한 조국과 민족의 영광이 재현될 것을 열망하게 되었다. 특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했다는 대목에서 그들은 크게 고무되었고 새로운 시온니즘에 대한 정열이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시 실망스러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었다. 비록 그가 약속한 대로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함께 전해졌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믿을 수 없는 낭설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계속하여 전해지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으로 인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종교적 집단으로 나누어 졌다. 그들에게 전달되는 예수그리스도는 전해주는 자의 성향에 따라 크게 달랐고 경우에 따라서는 심히 대조적이었다. 민족적 시온니즘 자들이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에 허무하게 죽어간 허약하고 나약한 가난뱅이였으며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위선자이며 사기꾼이었고 매국노였다. 반면에 평화주의자들이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는 각종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죽는 순간까지 모든 죄인을 용서하는 사랑의 메시야였으며 사망권세를 물리치고 부활 승천한 왕중의 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오시어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였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전해주는 자들의 성향과 전해 받는 자들의 성향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전달하는 자나 전달받는 자가 모두 민족적 시온니즘자들인 경우에 그들은 유대교에 머물면서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후예들을 증오하고 적대하였다. 반면에 전달하는 자와 전달받는 자가 다 함께 평화주의자일 경우에 그들은 새로운 평화주의적 시온니즘을 형성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런데 또 다시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오순절 성령임재 사건이 전달된 것이다. 성경은 그 때에<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 사건에 동참했다-2:5>고 증거 한다. 그때에 천하 각 국으로부터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하여 성령임재 사건을 전해들은 유대인들은 민족적 시온니즘에서 탈피하여 평화주의적 시온니즘으로 돌아섰고 그리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수 십 세기 동안 계승되어진 시온니즘 주의자들은 여전히 그 소식을 낭설로 받아들였다.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는 유대인들을 반역자로 몰아 증오하고 적대하였다.

 

2.민족적 개념에 의한 대립.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야훼하나님이 세계의 하나님으로 전파되는 것에 분노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은 오직 히브리민족 이스라엘 뿐 이었다. 수천 년 간 조상대대로 계승되어온 선민사상과 자신들만의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로 살아온 그들에게 세계적인 하나님을 주장하는 기독교 유대인들은 이제 더 이상 동족이 아니라 매국노였고 역적이었다. 특히 같은 유대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는 조국과 민족의 멸망과 비극에 대한 역사관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조국과 민족의 비극적 멸망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처형한 유대교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책임을 다윗과 솔로몬에게까지 소급하였다. 이러한 개념은 일반인들에게서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성경에 밝은 지도자 계열에서는 단호하게 나타났다. 저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중심의 신정 국가적 정치체제를 세우지 아니하고 인간주의적 정치체제를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았으며 특히 다윗이 밧세바를 왕비로 취하기 위하여 우리야를 살해한 것과 밧세바가 낳은 솔로몬을 왕위에 앉힘으로서 이스라엘이 남북왕조로 분단되었고 솔로몬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 하는 이방여인들과 통혼함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국가와 민족이 멸망했다고 주장하였다.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의 그러한 주장에 크게 진노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다윗과 솔로몬은 이스라엘국가를 부국강병의 국가로 발전시킨 위대한 성군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주장을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배신행위로 간주하였고 기독교인들을 증오하고 저주하였다. 한편 유대교인들은 자신들의 조국과 민족적 패망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아니한 이단적 유대교 분파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기독교라는 새로운 이단분파로 인하여 유대민족에게 하나님의 더 큰 진노가 있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2.교리적 개념에 의한 대립.

 

유대교인들은 기독교가 조상대대로 전수되어 온 자신들의 신앙적 구심이었던 율법을 소홀히 여기고 함부로 간과하는 것에 크게 분노하였다. 그들은 이미 안식일 문제를 비롯한 율법문제로 예수그리스도를 공격하였다가 번번이 참패당한 상처와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바울이 아예 율법을<기독교를 안내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폄하 하였다. 유대교인들은 크게 경악하였고 무너진 자존심과 극심한 상처에 심히 분노하였다. 그들은 기독교를 그대로 방치하면 유대교 자체가 송두리째 와해 될 것이라는 위기감과 불안감에 전전긍긍 하였다. 이때의 유대교는 로마당국으로부터 공인받은 종교<religio licita>였던 반면에 기독교는 아직 신흥종교로서 그러한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때문에 유대교는 기독교를 사정없이 몰아 세워 로마정부에 고소하였고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정부의 보호를 요청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한편 로마정부는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은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 로마정부는 처음에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갈등을 유대인들 사이의 종교적 갈등 정도로만 이해하였다. 따라서 로마정부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에 관여 하려 하지 않았다. <18:12-17>에는 그와같은 당시의 상황이 증거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웠을 때에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핍박하기 위하여 아가야의 총독 갈리오<마르쿠스 안네우스 노바투스-Marcus Annaeus Novatus>에게 바울을 고소하였으나 갈리오총독은<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일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하고 그들을 재판정에서 쫒아내었다.<18:12-17> 로마정부는 폭동이나 난동이 생길 때에는 치안유지를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고 주모자를 색출하여 체포했지만 종교적, 민족적 갈등에는 되도록이면 간섭하지 않았다. 당시의 기독교는 오직 복음전파에 주력하였으며 따라서 로마정부의 심기를 거슬리는 일이 복음전파에 지장을 준다는 차원에서 로마정부를 자극하는 어떤 행동을 삼갔다. 반면에 유대교도들은 여전히 로마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려 했으며 기회만 있으면 로마에 저항했다. 때문에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다르다는 사실이 점점 들어나게 됨에 따라 로마정부는 기독교에는 어느정도 호의적인 반면에 유대교는 우려의 눈길로 예의 주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감정은 더욱 나빠지게 되었다.

 

로마의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저서<클라우디의생애-Life of Claudius>에 의하면 A.D.50년경에 로마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 폭력이 동원되는 마찰이 있었다. <18:2>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글라우디오의 명령에 의하여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이주한 것을 증거 한다. 이때의 글라우디오는 로마제국의 제4대 황제였는데 그는 이때에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시켰다. 수에토니우스는 글라우디오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시킨 것은 크레스투스<Chrestus>라는 사람의 선동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계속하여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증언한다. 학자들 중에는 크레스투스가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기독교인들이 유대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유대교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이해한다.

 

이토록 오랫동안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던 기독교와 유대교는 <A.D.70>에 일어난 예루살렘 붕괴와 성전의 파괴를 계기로 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기독인들은 그러한 민족적, 국가적 비극의 종말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불순종 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교에게로 돌렸다. 때문에 유대교인들은 더욱 분노하였고 그리하여 <A.D.85>년에 이르러 드디어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다. 유대교도들은 회당예배 의식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파문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들이 선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자렛인들(Nazarenes-기독교인들을 가리킴)과 다른 모든 이단들은 순식간에 멸망을 받고 생명의 책(Book of Life)으로부터 지워질지어다.>

 

이로서 기독교 유대인들과 유대교 유대인들은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결별을 이루었으며 로마에 의한 기독교 탄압의 와중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유대교인들의 박해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2.이방인들에 의한 박해.

 

로마를 제외한 지역들에서는 기독교가 다양한 종교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로마제국의 종교정책 하에서 다신론 종교사상이 만연되었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비록 기독교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특별성을 고집함으로서 다소 이상하기는 했지만 이미 디아스포라 유대교인들을 통하여 그들의 하나님 유일신앙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의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족끼리 서로 대립하고 마찰하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로마의 상황은 달랐다. 다른 지역의 기독교와 달리 로마의 기독교는 각종 이방민족들에 의한 박해에 시달려야 했다. 로마제국 정부는 두 가지 차원에서 다신론적 종교정책을 시행하였다. 첫째는 주변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다신론적 종교사상이다. 로마의 정복자들은 자신들 앞에 패배한 자들이 섬기는 신들이 매우 연약한 신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강한 능력을 소유한 신들의 후원이 절대 필요하며, 하나 또는 소수의 신들에게 의존하는 것보다는 많은 신들의 후원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또 하나는 정복지를 관리함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복지 주민들의 종교를 탄압하지 않고 오히려 장려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차원에서 로마제국 정부는 정복지의 종교와 신들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며 로마시에 만신전<모든 신들의 신전-Pantheon>을 설립하여 정복지에서 유입한 모든 이방민족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형상을 만들어 세우게 했다. 만신전에 세워진 신들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 신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만을 고집하지 않고 모든 신들과 어울려 사이좋게 지냈다. 로마의 종교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섬기던 신만을 고집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신들을 골라 섬기는 다신숭배적 신앙생활을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증오하게 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신의형상이 없었기 때문에 만신전에 그들의 하나님 신상을 세우지 않았고 신을 세우라는 종교행정 당국의 지시에도 절대 불응했다. 종교행정 당국은 유대교와 기독교에게 신의 형상이 없음으로 신을 세울 수 없다는 저들의 변명을 이해했지만 이교도들은 그것을 자신들에 대한 종교적 모독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유일신을 고집하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다신론적인 자신들의 신들과 자신들을 동시에 무시한 것으로 생각하여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된 것이다. 그들은 특히 기독교를 이상하게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대교는 이미 어느정도 알고 있었던 종교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동족인 유대교로부터도 배척되어진 종교로서 여러 가지 차원에서 생소했고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았다. 당시에 로마에는 기독교에 대한 오류 된 소문들이 많았다. 기독교에 대한 소문들은 주로 그들의 신앙적 생활에 대한 오해로 인한 것이었다. 기독교 신자들은 매일 같이 애찬<love feast>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그것은 성도들의 특별한 모임이었는데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세례를 받은 자들만의 모임이기도 했다. 모임에 참예한 기독교 성도들은 서로를 형제, 또는 자매라고 불렀으며 자신의 배우자들에게도 이러한 호칭이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 마음대로 상상하여 이야기하였고 그것들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가운데 이상한 소문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의 예배는 비밀리에 한데 모여 먹고 마시며 방탕을 즐기며 나중에는 불을 끈 다음 남녀노소가 어울려 혼음<club sex>을 하며 심지어는 근친상간까지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기독교에 대한 또 다른 나쁜 소문은 성찬식 때문에 생겨났다. 기독교신자들은 성찬식을 거행할 때에 예수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취한다고 했으며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새신자의 입교식 때에 유아를 커다란 빵 속에 감추어 두고 입교자에게 그 빵을 자르게 한 후 아직도 따뜻한 유아의 살을 함께 먹는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먹은 자들은 자신의 범죄가 탄로날까봐 침묵을 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기독교에 머무르게 된 다는 소문이 추가되었다. 이때에 로마에는 실제로 그러한 종교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 그러한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온 인류를 증오하고 저주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것은 유대교인들과의 갈등 때문에 생겨난 소문이었다. 사람들은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유대교적 유대인들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동족까지도 미워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온 인류들을 증오하고 저주할 것이라고 소문낸 것이다. 이러한 헛소문들에는 유대인들도 관여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처형한 유대인들을 경멸하자 그것을 기독교인들이 전 인류를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으로 오류 시켜 확산했다. 때문에 네로 통치시대에 로마에 화재가 나고 그것이 기독교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퍼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고발하거나 또는 직접 위해를 가하는 일이 도처에서 발생했다. 또 어떤 자들은 아기 예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와전시켜서 기독교인들이 당나귀 또는 송아지에게 예배한다고 소문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형편없이 무자비하고 무식한 종교집단이라고 믿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탄압받아 마땅한 자들이라고 비웃고 증오했다. 기독교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지식층, 또는 학자들에게서도 나왔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것을 다각도로 연구조사 했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소문과 같이 패역하고 부도덕한 종교 단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구세주로 오셨는데 그가 목수의 아들로서 마구간 말구유에 태어났고 십자가에 죽은 후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으며 나중에 세상을 심판하러 온다는 이야기는 그들에게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로마인들은 본래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힘을 강조하는 군사문화 속에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헬라문화를 받아들여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개념을 그들의 합리적인 라틴니즘과 연합시켰다. 때문에 그들은 신을 인식함에 있어서 강하고 능력 있는 신만이 최고의 신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로마인들에게 최고의 능력을 가졌다는 유일한 신의 아들이 마구간 말구유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식 밖의 일이었고 더구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는 이야기는 도저히 말이 않되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그렇게 변변치 못한 구세주란 용납되지 않는 것이며 그가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과 나중에 세상을 심판하러 온다는 이야기들은 모두가 허황된 거짓말 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들 중에서 가장 저급한 종파로 보았다. 로마인들은 원래 유대교와 기독교의 주장을 어불성설<語不成說>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이외의 모든 신들을 만들어 세운 가짜라고 무시하는 것을 종교적인 논리로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만약에 로마의 만신전에 있는 신들이 모두가 가짜라면 유대인들은 그 가짜를 무시하지 못하고 왜 두려워하여 그들 곁에도 가지 않는가? 그리고 또한 그토록 강하고 최고의 능력을 가진 신의 아들이 어찌하여 십자가에 죽었으며 그토록 전능하신 신께서 어째서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을 망하게 하고 돌아보지 않는가?>

 

로마의 지식인들은 기독교를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의 종교적 집단으로 규정하고 조롱했다. 그들 중에 가장 기독교를 무시하고 조롱한 자는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치세 기간 중에 명성을 날린 지식인 들 중 하나였던 켈수스<Celsus>였다. 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마리아와 로마병사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라고까지 하면서 기독교를 조롱했다. 그는<진정한 말씀-The True Word>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기독교를 조롱했다.

 

<개인들의 가정에서도 우리들은 옷감과 자갈을 가지고 일하는 자들, 즉 가장 무식하고 교양 없는 자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집안의 가장 앞에서는 이들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어린아이들과 혹은 무지한 여인들을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기로 꼬이기 시작한다.....따라서 내가 진정 진리를 알기 원한다면 스승들과 아버지를 떠나 여인들과 아이들을 쫓아 목공소나 철공소, 혹은 여인들의 사랑방으로 가라. 거기서 완전한 생활의 지혜를 배울 수 있으리라. 이것이 곧 소위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을 쫓는 자들을 기만하는 방법이다.>

 

<도대체 하나님이 이와같은 방법으로 지구를 방문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과연 인간들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을까? 그렇다면 그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지 못한단 말인가? 그렇지도 않다면 그가 아시기는 하지만 직접 내려오시기 전에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행을 처리하실 수 없기 때문이었을까?>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죽은 후에 다시 부활할 것을 믿으며 가르친다. 이러한 신앙의 기반 위에서 다른 이들이 믿을 수 없는 완강한 고집으로 죽음을 맞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공정하게 보아도 그 존재가 불확실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내세를 위하여 그 존재가 분명한 현세를 포기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더욱이 최후의 부활이야말로 기독교가 갖는 웃음거리 중 대표적인 것이다. 인간이 부활한다면 불에 탔거나 혹은 짐승이나 물고기 등에 의해 먹혀버린 시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체의 흩어진 부분을 찾아 세상을 헤매야 하실 것인가? 이를 다 찾아 꿰매지 못하는 경우에는 부활한 육체에 부족한 것이 생길 것인가?>

 

****

 

로마지식인들의 이러한 반박들은 기독교의 신학원리를 깨닫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것은 현대 종교학에서도 때때로 제기되는 질문들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분명하게 해주어야한다. 그것이 신학자들에게 주어진 변증의 책임이며 의무이다. 그러나 현대 목회자들 중에는 이러한 질문에 해답을 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더 많은 불신을 당하는 논리를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기독교인들은 부활해야 하기 때문에 사망했을 때 화장해서는 않되고 반드시 매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전쟁이나 화재 등등을 당하여 시신 자체가 완전히 훼손되어 버린 성도들은 결코 부활 할 수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수백 년 전에 사망한자들은 비록 매장했다 할지라도 완전히 사라져 흔적조차 없으며 비록 그들이 흙으로 남아 있다 할지라도 개발, 건축 등등을 통하여 이미 흩어져 버린 상태이므로 부활할 수 없다. 인간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죽은 자의 상태는 아무의미가 없다. 기독교성도의 죽음을 매장으로 고집하는 자들은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무식한자들이다. 저들은 초기 기독교시대의 로마인들과 같은 어리석은 자들인 것이다.

 

3.로마정부에 의한 박해.

 

기독교에 대한 행정적, 법적 구속력이 없는 유대교나 일반 종교들의 박해는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보다 확실한 박해는 로마정부 당국에 의한 박해였다. 로마정부 당국은 기독교에 대하여 수세기 동안 그리고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박해하였다. 로마정부 당국의 박해는 로마 통치 하의 전 지역에서 시행되었으며 그 유형과 사례도 매우 복잡하고 다양했다. 따라서 그것을 일일이 다 소개할 수 없기에 그 중에 대표적인 사례들을 선별하여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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