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안의 창세기

유 윤 종*

I. 서 론

전도자는 그가 살고있는 이 세상을 뛰어난 통찰력으로 모든 각도에서 관찰하였다. 이에 대하여 구약 학자들 또한 솔로몬으로서의 전도자, 까뮈로서의 전도자, 전도서에 나타난 그리스 사상의 흔적들, 전도서에 나타난 아람어, 후기 편집자들이 잡동사니들을 모아 모자이크한 것이라는 등 가능한 모든 각도에서 전도자의 세계를 연구해 왔다. 아울러 전도서의 저자에 끼친 모든 영향들도 탐구되어 왔다. 전도자의 정신 상태에 대한 연구에서는 심지어 집착증 및 신경증 환자, 성 불구자로 전도자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면 어떤 연구분야가 아직 남아 있을까?

텍스트 상호간의 관계 (intertextual relations)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전도서의 텍스트 연구에 새로움을 더해준다. 광의적인 면에서, 텍스트 상호간의 연구란 각각의 텍스트를 저자, 독자,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문화적 배경에 잘 알려진 모든 텍스트에 대한 작용 및 반작용으로 다루는 분야이다. 전도서의 저자 및 독자는 유대인이었다. 그들의 삶속에 깔린 문화적 배경의 핵심은 모세오경(Torah)이었다. 토라는 전도자와 그의 독자들에게 공히 가장 중요한 의식 체계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유대 문화에 뿌리를 둔 문학세계에 개념, 예화들, 이미지(image) 등을 제공해 주는 샘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텍스트 상호간의 연구란 단지 어떤 특정한 책에 영향을 미친 이전의 자료들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자 하는 그 책이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책은 저자와 독자에 공통되는 모든 책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 월드 (Ellen van Wolde)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텍스트 상호간의 접근은 어떤 저자의 작품을 다룰 때, 어떤 텍스트를 그대로 편집 각색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관계의 복합이다…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게다가, 하나의 텍스트를 텍스트 상호간의 분석 또는 해석하는데 있어서, 관심의 중심이 되는 것은 독자이지 저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와 혼동, 방해받는 사람은 다름아닌 독자이기 때문이다.

본고는 전도서와 창세기 1-4장 사이의 관계 연구에 그 초점을 둔다. 전도서와 창세기의 자료들은 다양한 저자나 문서설과 같은 것을 고려하지 않고 각각 하나의 텍스트로 다룰 것이다. 많은 구약 학자들은 전도서는 창세기에 대한 많은 암시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이미 지적하였다. 전도서의 저자는 그의 독자들이 창세기의 창조, 타락, 그리고 아담과 그의 가족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전도서는 어떤 아이디어는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재해석하면서 창세기의 설명들과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전도서의 저자는 창세기의 뼈대와 신학에 매우 깊이 의존하고 있다. 포르맨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확신하고 있다.

창세기의 초반의 장들은 인간의 본질과 운명, 인간 존재의 성격, 하나님에 대한 전도서의 사상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II. 전도서와 창세기: 그 상호관계에 관한 연구

1.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성문서 뿐만 아니라 구약성서 전반의 중심적인 주제이다. 창세기는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근본적인 관점에서 서술하였다. 전도서는 독자들이 알고 있는 이 선지식을 잘 이용하여, 전도자 자신이 만든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 어쩔수 없이 던져진 수동적 참여자로서의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

 

1)창세기에서의 하나님과 인간

창세기의 시작은 적극적인 창조자인 하나님과 수동적으로 창조된 세계에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창조 작업이 하늘에서 땅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보아 창세기 1장의 방향은 땅을 향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창조의 각 문단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시작하여 창조의 결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영(םיהלא חור)은 “깊음 위에”(창 1:2) 있고, 또한 메리즘(merism)으로 사용된 “천지”는 창조작업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순서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우주를 정리하시고 구성하신다: 그는 나누시며(창 1:3, 1:6, 1:7, 1:14, 1:18), 이름에 따라 분류하시며 (창 1:5, 1:8, 1:10), 종류에 따라 구별하신다(창 1:11, 1:12, 1:16, 1:21, 1:24, 1:25). 창조 이야기는 행위에서 행위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날에서 날로 순환되면서 진행된다. 저녁에서 아침으로의 순환은, 넷째날 태양 창조 이전의 창조 작업에서도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 활동의 특징이다.

인간은 무대의 맨 마지막 주자이다. 인간은 그에 앞서 창조된 모든 것을 받는 수혜자이자 참여자이다. 인간은 음식으로 주어진 식물 (창 1:29), 동물에 대한 지배권 (창 1:26, 1:28), 창조된 세계 내에서 생육하고 번성할수 있는(창 1:28) 혜택을 받았다. 창세기 1장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았고, 창세기 2장에서 그의 창조자의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하나님은 나무와 식물을 자라게 하시고, 아담으로 하여금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신다. 하나님은 동물들을 만드시고, 아담은 그 이름을 지어줌으로 동물들을 구별한다. 아담은 그의 기원에 따라 이름 지어졌다 (그는 םדא 이라고 불리워졌다. 왜냐하면 그는 המדאה־ןמ “흙으로”지어졌기 때문이다). 아담은 또한 그의 돕는 베필에게 그녀의 기원에 따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녀는 השׁא 라고 불리웠다. 왜냐하면 그녀는 שׁיאמ “남자로 부터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은 인간에 앞서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새로운 상황에 도전하게끔 하시는 하나님을 자주 그려낸다. 하나님은 먼저 설계하시고 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그 동산을 잘 보살피라는 지시와 함께 아담을 그 동산에 두셨다 (창 2:8). 하나님은 당신께서 만드신 분류표에 따라 동물을 만드시고 이 동물들을 아담 앞에 불러 세우고 아담이 그들을 뭐라고 부르는지를 보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잠들게 한 후 아담의 베필을 창조하였다. 하나님은 동산 가운데 선악과를 심으시고 (2:9), 아담에게 그것을 먹지 말라고 지시하셨다 (2:17).

 

2)전도서에서의 하나님과 인간

전도자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인간의 각도에서 그려낸다. 하나님은 만물을 절대 주권으로 창조하셨고, 그의 작품들은 수정될 수 없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전 3:14).

그의 창조자에 대한 전도자의 태도는 겸허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체념적이며 비관적이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

 

절대 전능하신 창조자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감정, 이것은 창세기에 이미 암시되어 있다는 것을 전도서는 말해준다.

םדא אוה־רשׁא עדונו ומשׁ ארקנ רבכ היהשׁ־המ

ונממ ףיקתשׁ םע ןידל לכוי־אלו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전 6:10)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전 5:2)

그의 종을 사랑하고 변호하시며, 계약을 지키시는 다윗의 하나님은 전도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전도서에서 준엄하고 완고한 심판관으로서의 하나님과 직면하게 된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전 3:17)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전 4:17)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전 5:3)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 12:14)

 

전도서의 하나님은 단 하나의 잘못에 대하여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하신 하나님이다. 그는 가인이 만족시킬 수 없었던 분이셨다. 그는 인간이 동물보다 나을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인간을 시험하신 분이셨다 (전 3:18-21).

전도자는 창조된 세계의 순환적인 패턴에 관심을 기울인다. 전도자에게 있어 인생은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할 수 없는 다람쥐 쳇바퀴 돌기 같은 것이다. 인생의 순환은 냉혹한 것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 새로운 것이란 전혀 없다.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떳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 1:4b-7).

전도서 1:4-7은 물질로 구성된 세계를 전도서가 처음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구성 요소들 (땅, 태양, חור, 물)은 창 1:2의 혼돈된 질서 이전의 세계를 상기시킨다. 전도서의 이 구절에 대해, 페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한편에서 보아, 이 미묘한 암시는 전도자가 논박하기 시작하는 텍스트의 또다른 암시, 즉 창조 이야기를 제공한다. 둘째로, 그 암시는 전도자가 가장 부정적이고 위협적인 것으로 여기는 창조의 측면 (우주에는 가치 기준이 없으며 혼돈의 기슭에 떠다닌다…)에 집중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준다.

 

아담처럼, 전도자는 그의 창조자의 작업에 참여한다.

 

창세기 전도서

그는 동산을 만드신다. 2:9 2:5

잘 적셔진 곳에서 2:10 2:6

그는 가축을 늘리신다. 1:24, 1:25 2:7

그는 자신을 금과 귀한 보석으로

감싼다. 2:11, 2:12 2:8

그는 인간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신다. 2:23 1:1, 1:12

그는 그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지식으로 구분하고 분류하신다. 2:20 1:13, 1:17


전도자는 또한 창조를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완성해 놓은 것으로 파악한다. 하나님은 먹을 것과 마실것 (전 2:24), 낙을 누리는 것 (전 3:13), 지혜와 지식 (전 2:26), 재물과 부요 (전 5:19, 6:2), 장수 (전 5:18, 8:15)를 준비해 놓으셨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을 일하는 곳으로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현 세계의 물질들을 인간들이 정복할 수 있도록 해 놓으셨다.

וב תונעל םדאה ינבל םיהלא ןתנ ער ןינע או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악한 것들이다 (전 1:13).

וב תונעל םדאה ינבל םיהלא ןתנ רשׁא ןינעה־תא יתיאר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전 3:10).

전도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끌어들인다. 인간은 연극에서의 배우이고, 하나님은 작가, 연출가와 감독이자, 비평가이다. 하나님은 무대를 만들고 인간에게 공연할 수 없는 역할을 맡기신다. 인간은 혹평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그가 맡은 부분을 연기할 뿐이다.

 

2. 선과 악

전도서의 마지막 문장 ער־םאו בוט־םא “선악 간에”은 이 책의 중심 주제인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강조한다.

 

1)창세기에서의 선과 악

세상을 살펴보고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창세기의 가장 고전적인 주제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것을 보시고 (האר) 좋았더라 (בוט)라고 선포하신다. 빛(창 1:3), 마른 땅과 물(창 1:1), 식물(창 1:12), 천체들(창 1:17), 움직이는 생물들(창 1:21), 동물들(창 1:25), 그리고 아담과 그의 베필, 이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님은 “좋았더라”라고 선포하시며, 아담과 그의 베필을 추가한 뒤에는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선포하셨다. 창 2:18의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에서의 “좋지 못하니”와 2:17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된 악의 개념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좋지 못하니”의 개념을 이해시킨다. 동물들이 아담 앞으로 불려오고 아담은 무엇이 적절하며 좋은 것인지, 무엇이 부적절하고 좋지 않은 것인지를 결정하는 연습을 하게 된다. 아담은 그를 위한 적절한 베필을 찾지 못할 때, 그의 현재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하나님의 평가에 동의한다.

 

2)전도서에서의 선과 악

전도서에서 전도자는, 창세기에서의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무엇이 선하며 무엇이 악한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온 세상을 관찰한다 (전 2:3). בוט “선” 이라는 단어가 42번이나 전도서에 나타나며, 11번이나 동사 האר와 같은 절에서 발견된다. 전도서는 인생의 많은 부분은 “좋다”라고 선언한다: 먹고, 마시고, 일을 즐기는 것과 같은 단순한 쾌락 (전 2:24, 3:12, 3:13, 3:22, 5:18, 8:15, 9:7), 친구애 (전 4:9-12, 창 2:18),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전 7:18, 8:10, 12:13).

세상에는 좋은 일들이 있지만, 인생 그 자체는 어둡고 괴로우며, 공허하고 절망적이다. 전도서의 전도자는 그가 살고있는 세상에서 그가 발견한 악에 압도당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전 2:17).” 전도자가 악하다고 여기는 일들은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자주 연상하게 해준다.

 

창세기 전도서

어리석은 자들은 그의 희생제물이 악하다는

것에 무지하다. 4:3-6 5:1

의인은 그들의 의 때문에 죽으나, 아벨 7:15

악인은 오래 산다. 가인

즉각적인 응징이 없을 때 4:10-16 8:11

악은 증가된다. (창 4:23-24, 라멕의 뻔뻔함)

 

 

창세기의 관점에서 볼 때, 악은 창조된 세계에 뱀, 여자, 아담과 같은 창조물들의 개별적인 행동을 통하여 들어오게 된다. 전도서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에게 전가 시키는 아담의 관점 (창 3: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신 여자, 그가…”)을 표방한다. 아담의 주장은 하나님 당신께서 그의 앞에 선악과와 같은 악을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도서에서 인생이란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는 악한 일”이다 (전 1:13, 8:16, 8:17). 동사 הנע “종사시키다”와 “비천하게 되다” (Qal)가 “괴롭히다” (Piel)라는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구절은 더욱 더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וב תונעל םדאח ינבל םיהלא ןתנ ער ןינע אוה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들을 괴롭히기 위하여 주신 악한 것이다

(전 1:13).”

사실 하나님은 죽음, 살인, 미움, 전쟁과 같은 가장 악한 것들을 주셨다 (전 3:1-11). 하나님은 이 세상을 뒤틀리게 만드셨으며, 인간은 그것을 다시 똑바로 펼 수 없다 (전 1:15, 7:13). 전도자는 창세기에서 선포된 선과 악의 자료를 그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의 선과 악의 정보에 비추어 재평가하고 있다.

 

3. 인식론

전도서는 넓은 범주에서 보아 지혜 문학에 속한다. 어떻게 지식과 지혜의 가치가 획득되는가에 대한 전도자의 의견은 전도서와 창세기간의 인식론적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1)창세기의 인식론

창세기는 지식의 인지에 대하여 두 종류의 지식과 체계를 제시한다. 인간은 지식과 자기 인식의 능력을 가지도록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은 경험적 방법을 통하여 배울 수 있다. 에덴 동산은 아담과 하와에게 볼 수 있는 시력과 맛볼 수 있는 음식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었다 (창 2:9). 아담은 그 자신에 관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동물왕국을 조사한다. 그후 사회적 존재인 자신이 동물과는 달리 혼자 있음을 알게 되며,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창 2:18-20). 이런 경험에 의하여 얻어진 정보로 부터, 자신과 여자간의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아담은 자신과 여자 사이를 유비시켜 보기도 한다.

ירשׁבמ רשׁבו ימצעמ םזע םעפה תאז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 2:23)

아담은 그의 성공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실패를 통해 배운다. 복종의 실패를 통하여 그는 자신의 죄없는 상태를 상실하고, 자신에 대해 완전히 다른 관점을 얻게 된다. 즉 그는 자신이 벗었음을 인식한다.

창세기는 지식의 정반대되는 두 측면을 그려낸다. 하나는 인간은 겅험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며, 또하나의 측면은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 한계 너머로 숨어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보고 알 수 있는 능력에 한계를 정하셨다. 아담은 정원안에 닫혀 있었으며, 특히 일반적인 세계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아담은 다른 방법으로는 알 수 없는 정보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 즉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그에 대한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아담은 선악과에 의해 보다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유혹에 굴복했지만, 그는 그 지식을 얻을 수 없었다.

지식에 대한 인간의 갈증은 창세기 3장의 타락 이야기에 깔려있다. 다른 어떤 동물보다 영리한 뱀이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무제한의 지식에 유혹된 여자는 선악과를 아담과 같이 따먹었다.

  

2) 전도서의 인식론

전도서는 창세기의 뼈대위에 그의 인식론적 틀을 짜고 있다. 전도자는 지식 욕구에 목말라 한다. 전도자는 아담처럼 그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경험적으로 조사하고 탐구하기 위해 그의 마음을 쏟는다 (전 1:12). 아담처럼, 그는 경험이나 지식을 추구하는 데 어떤 한계나 경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도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조사한다.

모든 행위 (전 1:14, 7:15, 8:9)

모든 억압, 학대 (전 4:1)

모든 수고 (전 4:4)

모든 인생 (전 4:15)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전 2:10)

전도자는 지혜를 찾는 일에 실패한다. 하나님이 정답을 인간에게서 숨기시는 것도 발견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여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7:23-24).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8:17)

 

전도자는 그의 실패로부터 배우고 있다. 그는 지혜를 얻으나 지혜안에서 어떤 중요성이나 유익을 찾는데 실패한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1:18).

그는 보고 알 수 있는 것들로 가득찬 세계에서 자신이 공허가운데 있음을 알게된다. 따라서 모든 것이 חור תוערו לבה.

 

4. 인간조건

전도서의 텍스트는 창세기에 나타난 인간의 본질, 목적, 그리고 인간의 조건을 받아들이나, 약간의 각색을 거친다.

 

 

1)창세기에 나타난 인간조건

창조 이야기에서, 인간은 다른 창조물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류의 창조물이다. 모든 종류는 “종류대로” 재생산되며, 심지어 하나님 자신도 그 자신과 같은 것을 창조하고 싶어서,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 1:26) 창조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특별한 존엄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생명은 결코 모독될 수 없는 내적가치를 가지고 있다 (창 9:5-7).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은 땅의 먼지로 만들어졌으나, 그의 창조자로 부터 직접 생령을 받는다 (창 2:7). 인간의 목적은 명백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여자는 남자로부터 창조되었으며 그녀의 목적은 남자를 돕는 자가 되는 것이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창 2:18).

창세기 3장은 남성과 여성에 대해 다른 모습을 제시한다. 남성은 말이 없고, 수동적이며, 무죄하다. 여성은 대화를 이끌고, 선택하며, 남성을 선악과를 먹는 일에 끌어들인다.

인간의 조건은 “그들의 눈이 밝아” (창 3:7)지는 순간 급격히 변하게 되었다. 존엄과 무죄 (창 1:25)가 있던 곳이 죄와 수치가 있는 곳으로 변하였다.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일치하였으나 (창 2:23), 지금 남자는 여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킨다 (창 3:12). 세상이 좋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은 지금 죄를 짓는데 참여한 피조물과 무고한 피조물 모두에게 저주를 선포한다 (창 3:14-18). 인간과 하나되고, 그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를 인간과 분리시키시고 인간에게 죽음을 부여한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

2)전도서에서의 인간조건

전도자는 인간은 원래 존엄성을 가진 채 창조되었으나, 그 존엄성을 스스로 떠났다고 믿는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 (תונבשׁח)를 낸 것이니라 (전 7:29).

전도서는 여성에 대한 양면적인 태도에 있어서 창세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ןובשׁחו המכח שׁקבו… יבלו ינא יתובס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전 7:25)

ןובשׁח אצמל תחאל תחא

내가 낱낱이 살펴…(전 7:27)

전도서 7:25, 7:27, 7:29, 이 세구절은 전도서 7:26, 7:27 두절을 둘러싸고 있으며, 창세기 3장에 묘사된 계산적이고, 유혹적인 여인과 관련된다

 

.הבל םימרחו םידוצמ איה־רשׁא השׁאה־תא תוממ רמ     הידי םירוסא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7:26).

 

יתאצמ אלו ישׁפנ השׁקב־דוע רשׁא יתאצמ אל הלא־לכב השׁאו יתאצמ ףלאמ דחא םדא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7:28).

전도자는 왜 원래 정직한 자 (םדא)가 꾀를 생각해 내었는지, 이에 대한 이유를 낱낱이 살펴보았을 때, 그는 창세기 3장에 묘사된 여인의 유혹에서 답을 찾는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이러한 성 차별적 특징화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결혼 제도를 칭찬한다.

ךלבה ייח ימי־לכ תבהא־רשׁא השׁא־םע םייח האר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9:9a).

전도서는 여성에 대해 두가지의 관점을 유지한다. 즉 하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으로 유혹하는 자라는 것인데, 이는 창세기 2장과 3장에 나타난 두가지의 관점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창세기와 마찬가지로, 전도서에서도, 일은 인간에게 할당된 몫 (קלח)이다 (전 2:10, 2:18, 2:24, 3:13, 5:18, 5:19). 그러나, 모든 인간사에서, 인간은 죽음의 확신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전 9:9b-10).

인간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창세기의 설명은 전도자가 인간의 운명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형이 된다.

המדאה־ןמ רפע םדאה־תא םיהלא הוהי רצייו

היח שׁפנל םדאה יהיו םייח תמשׁנ ויפאב חפיו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7).

 

 

תחקל הנממ יכ המדאה־לא ךבושׁ דע

בושׁת רפע־לאו התא רפע־יכ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

 

היהשׁכ ץראה־לע רפעה בשׁיו

הנתנ רשׁא םיהלאה־לא בושׁת חורהו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 12:7).

 

전도서는 창 2:7과 3:19을 합하여, 몸과 영혼은 같은 운명-죽음-을 지게 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들이 같은 목적지를 지닌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도서의 이러한 주장은 다음의 구절에서 많이 희석된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 3:19-21)

창세기는 마지막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전도서는 남자와 여자, 삶과 죽음, 기원과 마지막 목적지에 관한 창세기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해 아래서 확실한 것은 단 하나뿐이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לבה).

 

5. 아벨과 לבה

아벨의 이름(לבה)은 창세기와 전도서를 연결짓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이다.

 

1)창세기에서 아벨의 역할

비록 인간은 불복종에 대한 벌로서 죽음이 선고되었으나 (창 2:17), 그 죄의 결과를 준비할 만한 어떤 유사한 경험을 이전에 겪은 적이 없었다. 창세기 3장은 현재 타락한 세계의 근본적인 작용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절망감, 무의미, 육체적 죽음이 바로 그것들이다. 인간은 계속해서 일해야 하며, 그것은 절망감에 빠진 하기 싫은 일이다 (창 3:17-19). 여자는 자식을 계속 낳을 것이나, 고통 속에서 그 일을 해야한다. 여자는 그녀의 베필과 계속적인 관계를 가질 것이나, 그 역할은 훨씬 힘들게 되었다 (창 3:16).

가인과 아벨이 밖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담의 후손들에 대한 저주가 실행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장자가 형제를 살해하고 도망자가 되었다는 것을 슬픔과 고통을 불러 일으킨다. 아담과 하와는 둘째인 아벨로 말미암아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아벨의 짧은 생애와 무의미한 죽음은 저주하에 있는 모든 인간 경험의 한 표상이 되었다. 창세기에서 아벨은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우리는 그가 이야기하는 것도, 그가 자녀를 가졌다는 이야기도 결코 들을 수 없다. 그는 단지 “땅에서 호소하는 핏소리” (창 4:10)만 남긴다. 창세기는 아담 가족의 이름에 대해 미드라쉬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아담(םדא)המדא와 관련됨 (창 1:25, 2:5, 2:6, 2:7, 2:9,

3:17,3:19,3:23)

여자(השׁא)그녀는 שׁיאמ 이기 때문이다 (창 2:23).

하와(הוח) 그녀는 יח־לכ םא 이기 때문이다 (창 3:20)

가인(ןיכ) 하와는 아들을 얻었기(הנק) 때문이다 (창 4:1)

셋(תשׁ) 아벨을 대신하여 주어졌기 (תיא) 때문이다 (창 4:25)

아벨 (לבה)을 제외한 모든 이름을 설명하고 있다.

 

2)전도서에 나타난 아벨

전도서는 아벨의 이름을 설명하고 있다. לבה 이라는 단어는 전도서에서의 빈도가 구약 성서의 나머지 책들을 합한 것보다 더 많다. 라이트(Wright)는 לבה 이라는 단어가 전도서의 구조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예시하였다. 전도서는 지혜서에 속한다. 하지만 그 주제는 지혜 (המכח)가 아니라 허무 (לבה)이다.

아벨의 짧은 생애와 그의 무의미한 죽음은 חור תוערו לבה 라는 문구로 잘 짜여져 전도서에 7번 나타난다. 모두 “숨, 호흡”을 의미하는 לבה과 חור의 조합은 추운 겨울날 아침 우리가 쉬는 숨을 보는 것처럼 짧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어떤 것을 나타낸다. 다른 한편에서 חור תוער “바람을 쫒는것”은 무의미하나 결코 끝나지 않은 활동의 생생한 그림을 그려준다. 또한 תוער 라는 단어는 아벨의 직업인 창세기 4장의 הער (목자)에 대한 말재간일 수도 있다.

לבה의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 단어의 수많은 의미 때문에 일부러 이 단어를 선택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벨이라는 이름은 전도서를 읽게 될 유대인 독자의 마음속에는 아마 첫번째로 떠오를 인물 중의 하나일 것이다. 텍스트 간의 관계는 저자와 텍스트를 읽게 될 독자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연상 작용의 회로망과 같은 것이며, לבה הנה 또는 לבה הו과 같은 어구들은 전도서의 저자가 창세기의 텍스트와의 문학적 관련성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사용한 문학 기법이다.

Ⅲ. 결 론

이상에서 우리는 전도서와 창세기간의 상호 관련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관련성의 표현은 쉽게 드러나도록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라, 실타래처럼 교묘하게 얽혀있다. 전도서의 저자는 그 독자들이 될 유대인들을 겨냥하여, 그들에게 매우 친숙한 창세기의 이야기를 잘 드러나지 않게 각색하여 그가 전개시키고자 하는 신학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전도서의 독자들은 난해하고 일관된 신학적인 사상마져 결여된 전도서의 텍스트에 익숙하게 작용과 반작용을 거듭했을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 상호간의 연구는 구약성서 내에서 독자들을 위해 저자가 그 당시에 이미 잘 알려졌던 특정한 텍스트를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작업까지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Abstract

Genesis in Ecclesiastes

Yoon Jong Yoo*

Recent studies in intertextual relations between Genesis and Qohelet present a fresh approach to the study of Qohelet. This paper focus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book of Qohelet and the first four chapters of the book of Genesis. The author of Qohelet assumes that his readers are aware of the Genesis account of creation, the fall, and Adam and his family.

The relationship between man and God is a central focus of the Old Testament. Unlike Genesis account, Qohelet presents the creation of the Genesis account from the perspective of man. Qohelet's attitude toward his creator is not submissive, rather it is resigned and pessimistic. By utilizing the creation account of Genesis, Qohelet develops the relationship of God and man in his own perspective: God has set the stage and cast man in an unperformable role. Man can do nothing but play out his part with the fearful anticipation of bad reviews.

The preacher in Qohelet, like God in Genesis, surveys the entire world with a view toward deciding what is good and what is evil. As a result, the preacher asserts that there are good things in the world, but life itself is dark and troubling, empty and frustrating. The pronouncement of good and evil in Genesis finds new expression in Qohelet's re-assessment of the sources of good and evil in the world which he knew.

Qohelet builds his epistemological framework upon the framework of Genesis. Qohelet sets his mind to empirically search and explore the world around him just as Adam had. Like Adam before him, he refused to acknowledge any limits to his search for knowledge or his experiences. Qohelet learns from his failure. He gains wisdom, but he fails to find any significance or profit in it.

The text Qohelet adopts and adapts the assertions of Genesis about the nature of man, his purpose, and the human condition.

The name of Abel(לבה) is the most obvious and powerful link between Genesis and the text of Qohelet. The word לבה occurs more times in the book of Qohelet than the rest of the Old Testament combined. The brevity of Abel's life and the pointlessness of his death are woven together in the formula חור תוערו לבה which occurs seven times in the book of Qohelet. The combination of לבה and חור, both of which mean “breath" conveys the idea of something as brief and transient. The name of Abel is one of the first associations that would have come to mind for the Jewish readers of the book of Qohelet.

In conclusion, the apparent relationship between Genesis and Qohelet cannot be found easily. Rather it is saturated in the text of Qohelet, so that the preacher of Qohelet may advance his theological perspective. He adopts and adapts the creation, fall, and Adam and his family account in Genesis. Qohelet interacts with these accounts, accepting some ideas and reinterpreting others; but overall, the author of Qohelet is heavily dependent on the framework and theology of Genesis in his own observ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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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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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열정 / 마음이 상하고 불행한 사람

 


  1973년 존 맥스웰 목사는 회심자가 없는 메마른 강단을 가진 그의 교회로 인해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토마스 로드 침례교회에서 열린 "말씀의 검 사경회"(Conference of the Sword of the Lord)에 참석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주님,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않는 주일이 결코 없는 교회가 되도록 해주십시오.”

맥스웰은 평균 418명이 출석하는 자기 교회의 모든 성도를 격려하여 한 해 동안 418명을 더 전도해서 836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만들어 보겠다며, 제리 포웰 목사와 사경회에 참석한 모든 회중들 앞에서 전도헌신카드를 작성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먼저 한 해 동안 200명 이상을 주님께 인도할 것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그의 회중들 역시 맥스웰 목사의 도전을 받아들여 강한 부흥이 일어나길 갈망하며 전도에 동참했습니다.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맥스웰 자신이 인도한 사람만 186명이 되었습니다. 그의 한 가지 꿈인 “주님,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않는 주일이 결코 없는 교회가 되도록 해주십시오”라는 꿈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침내 418명이 모이던 교회는 5천 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꿈은 이제 불가능해진 것일까요?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영혼구령의 꿈을 꾸는 자들을 축복하실 수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들의 헌신을 축복하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십니다.


  지난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저를 “김구령(救靈)”이라고 불러주셨던 청소년시절이 있었습니다. 전도를 많이 해서 마이크 페퍼 선교사님이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나를 김구령으로 불러주지 않습니다. 그 이름이 그립습니다. 아니 그 이름에 걸 맞는 삶이 그립습니다.


  저 뿐 아니라 많은 목사님들이 수많은 영혼을 주님 앞에 인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낮과 밤을 따지지 않고,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전도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시키던 감격의 날들이 있었습니다. 텅 빈 교회당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나는 마음이 상한 사람입니다. 나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누구의 고백일까요?  「Passion for Souls」에서 오스왈드 스미스(Oswald Smith)가 했던 탄식입니다. 그의 아픔이 담긴 기도를 끝까지 들어봅시다.


“나는 마음이 상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나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영혼의 고귀함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영혼들이 구원받지 않는다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오, 주님 제게 영혼을 주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옵소서(I am a broken-hearted man; yes, indeed, I am an unhappy man; not for myself, but on account of others. God has given me such a sight of the value of precious souls that I cannot live if souls are not saved. Oh give me souls, or else I die!”(Passion for Souls, 32).


이 고백은 영혼이 구원받지 않는 교회들을 향한 성령님의 고백이자, 전도와 부흥에 목말라하는  우리 성서침례교회 목회자들의 고백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는 아주 오래 된 일기장을 꺼내들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국교회가 100년 전 평양 대 부흥을 돌아보고, 회개와 전도의 부흥이 한국전역을 휩쓸었던 그런 부흥을 사모하듯이, 저에겐 제가 다시 경험해야할 저만의 부흥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33년 전의 전도일기 몇 토막을 옮겨봅니다.

 

00년 5월 12일  주일.  오후 1시 반. 맑음

5천원을 들여 「영혼구령」이라는 대형전도지를 만들었다. 예배를 마치고 빨리 점심을 먹고 우리는 모였다. 목사님, 장선생님, 서집사님, 어린이들, 나, 이렇게 모여서 서동시장으로 가서 양하흥 목사님께서 20분 정도 말씀을 전했다. 장소가 좁아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서 또 찬송을 부르며 어른들과 어린이들을 모았다. 뜨거운 햇빛아래 목사님의 말씀을 많은 영혼이 관심을 두고 듣고 있었다. 전도를 마치고 모든 어린이들과 함께 교회로 와서 3시 30분에 예배드렸다. 주님을 믿겠다는 어린이들 중 내가 이름을 기록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이하생략)  총 14명 전도.

 

00년 5월 13일 월. 맑음

교회에 6시에 모였다. 목사님, 서집사님, 만길 형제, 어린이들과 함께 어제 전도했던 그 다음 골목으로 나갔다. 더 많은 어른들이 관심을 쏟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목사님의 메시지를 많이 듣지는 않았다. 얼마의 어린이들이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마치고 어린이들을 데리고 교회 와서 주님을 믿고자하는 어린이들을 상담하고 이름을 적었다. 22명이 교회에 왔다. 집에 오니 저녁 8시 15분이 되었다.

나는 노방전도를 통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먼저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겠다. 전도할 것을 생각하면 먼저 두려운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다. 그가 자만하며 태만했기 때문이라 한다. 전도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준비하지 못했다. 절대적(으로)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어린이들을 통해 나는 너무나 놀라웠고 힘을 얻는다. 부끄럽고, 두려운 것도 없는 어린이들은 모든 사람에게 담대하다. 그들을 바라 볼 때 나는 새로운 힘을 얻을 수가 있었다.


00년 6월 24일, 월. 맑음.

목사님 댁에서 식사를 한 후 6시 15분 교회를 출발했다. 장소는 금사동, (전도)요원은 목사님, 사모님, 서집사님, 최자매님등이다. 나는 나 자신을 잊은 채 모든 사람에게 간절히 예수님을 믿도록 권면했다. 성백선이란 학생(중 1)을 구령했다. 장소를 옮겨 금사동 깊숙한 데서 찬송을 부르며 복음을 전했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였다. 결신자수는 어린이 56명, 장년 9명, 합계 65명이었다.

 

 

00. 6. 25 화 맑음.

반송교회 이봉윤 목사님도 (전도에 동참하러) 오셨다. 금사동 학교 뒤서 시작했다. 은혜스런 가운데 결신자는 어린이와 중학생 합쳐서 30명되었다. 그곳에서 떠나 금사동 사거리로 가서 내가 시작했다. 나의 부족한 탓으로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못했으나 나는 최선을 다했다. 주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어린이 결신자 25명, 학생 2명 이날 총 57명이 결신하였다. “감히 나 같은 것이, 배우지 못했으며, 악하고, 못난, 나 같은 것이 주를 증거하다니, 주를 위해서 사용 받다니 감사합니다.”


결산: 00년 5월 12일에 시작해서 그 해 여름방학까지 전도한 숫자 661명.


  하나님은 전도의 도구로 어린이들과 집사님들과 소위 신학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청소년이었던 저까지 사용하셨던 것을 봅니다. 하지만 과거(過去)를 돌아보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전도자의 삶이 다시 회복되길 소원합니다. 오늘 현재(現在)와 미래가 전도와 부흥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안교회 안강자 전도왕이 우리 00교회에서 전도 간증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분은 그 동안 총 10,844명을 전도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영혼이 그냥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며 <포기하지 않는 전도>를 강조했습니다. 안강자 전도왕의 경험을 들어봅시다. 

  “포기하지 마세요.”

  “저는 또 전도하러 갔습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다시 갔습니다.”

  “죽길 각오하고 가면 됩니다.”

  “은행이건, 시장이건, 어디서든지 간에 전도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물바가지를 두 번이나 맞았습니다.”

  “몸을 사리지 마세요!”

  “찾아가고 또 찾아가세요. 인내하고 희생을 참아야 합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불필요한 오해와 냉대를 당할 수 있으나 이것도 극복해야 합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우선 눈물의 미끼가 필요합니다. 눈물처럼 위대한 전도를 이루는 것은 없습니다. 깡패였던 청년을 주안역에서 전도를 하다가 많이 맞았는데 그 아픔을 참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전도하여 변화시켜 필리핀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이런 열정이 장로교도들에게 더 많이 있다는 것이 질투가 나지 않습니까? 감리교의 설립자 요한 웨슬레 역시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노팅햄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노상강도를 만났습니다. 나는 그에게 전도했습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이렇게 그의 열정을 표현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설교하듯이 나는 다시는 전도할 수 없는 심정으로 설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9장에서 말합니다.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짓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전도의 열정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  수백, 수천 명을 주님께 인도한 전도왕들이 나오길 사모합니다. 우리들이 먼저 회복해야 할 한 가지 일은 매주 한 영혼 이상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전도자(Soul Winner)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일주일 중에 단 하루 만이라도 온전히 전도에 헌신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전도에 헌신할 준비가 됐습니까? 하나님은 누군가의 헌신을 축복하실 준비를 이미 끝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도현장에서 구원의 능력을 입증해 보일 준비가 다 되어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상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나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영혼의 고귀함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영혼들이 구원받지 않는다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오, 주님 제게 영혼을 주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옵소서”(오스왈드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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