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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이스라엘과 유대인들

 

 

 

 a) 이스라엘

면적은 2만 425㎢, 인구는 625만 8000명(2001), 인구밀도는 306.4명/㎢(2001)이다.
수도는 예루살렘이고 공용어로는 헤브라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 동쪽 팔레스타인 지방의 아랍 세계에 존재하는 유대인 공화국이다.
이스라엘이란 헤브라이어로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뜻으로, 구약성서(창세 32)에 나오는 이사악의 둘째 아들
야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일기 시작한 시오니즘 운동을 배경으로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하여
1948년 5월에 국가를 수립하였으므로 주변 아랍 여러 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으며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1967년의 중동전쟁으로 옛 예루살렘시(요르단령)를 비롯한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등 인접한 아랍 여러 나라
영토를 점령하였으나 점령지역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이스라엘화하려고 하는 노력은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 지역을 합치면 이스라엘 영토는 3배로 불어나고 133만의 아랍인 인구를 수용하게 된다.
 

 b) 가자지구

면적은 363㎢, 인구는 75만 5200명(1994)이다.
해안선 길이는 40km, 평균너비는 8km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며 남북으로 길쭉하다.
중심도시는 가자이고 가자 주변에 약간의 과수원과 경작지가 있다.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의 격전지가 되었으나, 1949년 UN의 이스라엘-이집트
휴전협정에 의하여 이집트 측에 편입되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랍 난민촌에 살고 있으며, 게릴라의 중요한 기지였다.
1956년 수에즈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하였으나 1957년 다시 이집트의 영토가 되었고, 1967년 중동전쟁에서
다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와 함께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는 1993년 9월 13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이스라엘 점령지의 잠정자치에
관한 원칙선언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94년 5월 가자와 예리코에서 잠정자치가 시작되었다.
 

 c) 팔레스타인

면적은 2만 6,300㎢이며, 영어로는 팔레스티나(Palestina)라고 한다.
동쪽은 요르단강(江), 남서쪽은 시나이반도, 북쪽은 레바논, 북동쪽은 시리아에 접한다. 

지중해를 따라 좁고 긴 평야가 펄쳐지고, 동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져 중앙은 구릉지대이다.
이 지역의 동쪽은 경사가 급한 계곡을 이루며, 그 계곡을 요르단강이 흐르고 있다.
남쪽은 네게브 사막지대이다.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이고 비는 적다. 

현재 이 지역의 80%는 이스라엘 영토이다.
1948년의 팔레스타인 전쟁 및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 결과 요르단 ·이집트령(領)이 되었던 요르단강 서쪽
연안지역과 가자 지구도 이스라엘이 차지하였다.
이 가운데 베들레헴은 1995년 12월 이스라엘로부터 반환되었다.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른 것은 BC 12세기에 팔레스타인인(人)들의 지배를 받게 된 뒤부터이다.
BC 11세기에 헤브라이인들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여 솔로몬왕 시대에는 찬란한 영화를 누렸으나 솔로몬이
죽은 뒤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열되었다.
그 후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BC 8세기), 유다 왕국은 신(新)바빌로니아에(BC 6세기) 멸망당하였다.

이 지역은 또한 BC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 군대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BC 1세기에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636년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뭉쳐진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한 이후 팔레스타인은 오스만투르크령 시대
(1516~1917)를 포함, 이슬람교도들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다만 그 동안에도 12세기의 제1차 십자군(十字軍)이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여 이곳을 통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으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에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聖地)가 함께 있는
복잡한 종교적 ‘숙명(宿命)’을 안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으나 세계대전 기간 중 팔레스타인 처리문제를
두고 영국이 두 가지의 모순된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을 둘러싸고 아랍 ·유대인 사이에 심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강력한 시오니즘을 바탕으로 삼아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移住)와 국가수립을 위한 준비를
실력으로 추진하고 미국의 지원도 얻어내어 1948년에는 이스라엘을 건국하였다.

1967년의 중동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역을 비롯하여 부근 여러 나라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약 20만 명의 아랍인들이 요르단 ·레바논으로 달아났으며, 1948년의 전쟁 이후 이곳을 떠난
사람들을 합하여 이른바 팔레스타인 난민의 숫자는 300만 명이나 된다.

이들 사이에는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가려는 강렬한 소망이 있다.
1964년 이후 그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통일적 모체로 삼고 여러 게릴라 조직을 만들어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나섰다.
1973년의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PLO의 싸움은 아랍세계의 석유전략과 결부됨으로써 비약적인 진전을 보았다.

같은 해 라바트에서 개최된 아랍 수뇌회의에서 요르단의 후세인왕은 요르단강 서쪽 연안에 대한 PLO의 주권을
인정하였으며, 1975년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의 민족자결권과 PLO를 준국가(準國家)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현재 108개국이 PLO를 승인하고 있다.

1979년 3월에는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조약이 조인되어 요르단강 서쪽 연안 및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
자치문제를 두고 양국간의 협의가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d) 유대인 (Jew)

보통 헤브라이인·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른다.
고대에 유대인은 원래 유다, 즉 유다 지파(약속의 땅을 점령한 12지파 중의 하나) 혹은 유다 왕국의(북이스라엘
왕국과 대비되는) 구성원을 의미했다.
바빌론 유수기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인을 모두 유대인이라 불렀고, 스스로 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그 후 유대교 신봉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예후디라는 용어(라틴어 Judaeus, 고대 프랑스어 Gyu, 현대 프랑스어
Juif, 독일어 Jude, 영어 Jew)가 사용되었는데, 유수 이후의 생존자들(과거 유다 왕국의 주민들)만이
이스라엘인으로서 고유의 주체성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10지파는 BC 721년 아시리아에게 정복된 후 뿔뿔이 흩어졌고 점차로 다른 민족들에게
동화되었음)

유대인이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유다이우스(Judaeus)와 히브리어의 예후디(Yehd)에서 비롯된 그리스어
이우다이오스(Ioudaios)에서 나온 말이다.
예후디라는 말은 〈구약성서〉의 뒷부분에만 나오는 형용사로서 이복형제인 베냐민의 자손과 함께 유다 왕국을
이루고 있던 야곱의 넷째 아들 예후다(유다)의 후손을 가리킨다.

디아스포라(離散)로 자손은 세계 각지로 유랑하여, 그 땅의 인종·민족과 혼교(混交)를 거듭하여 왔기 때문에
형질·문화·종교는 다종 다양하다.
즉 형질상 다수의 유대인은 백인이지만 일부는 유색인(有色人:인도의 Black Jews)이며, 흔히 유대코라고 불리는
갈고리 모양의 코도 지배적인 특징은 아니다.

종교적으로 유대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무신론자가 된 사람도 많다.
이디시어(語)·헤브라이어 사용자, 유대적 문화(유대曆, 시나고그, 특유의 풍속·요리 등)의 보존자는 점점 감소하고
있다.
또한 디아스포라 뒤에 가속화한 유랑 때문에 유대인은 민족을 구성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스라엘 국민 중에는 많은 아랍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대다수의 유대인은 전세계에 분산되어 있으므로,
유대인은 현재 민족이 아니다.
유대인이란 형질·언어·문화·국적을 막론하고, 비교적 최근까지 유대교도인 자의 자손이라는 조건을 첨가할 수도
있겠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자신을 유대인이라 생각하고 타인으로부터 유대인 취급을 받고 있는 자이다.

이스라엘도 유대인을 이와 비슷하게 규정한다.
따라서 유대인의 인구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약 1,300만∼1,400만으로 그 반수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다.
이것은 유럽의 유대인이 19세기에 세계 유대인 총수의 약 80%, 1930년에 약 60%였던 것과 대조적이며, 그 변화의
원인은 유럽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여 이주한 때문이다.
학자·예술가의 수는 상대적으로 많지만, 대부분의 유대인은 도시에 사는 노동자·중산계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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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국가별] '알라신'만 같을뿐 문화-사고방식 다양

 

이슬람 세계는 알라신을 신봉하고 마호메트의 예언을 실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다원적이고 복잡하다. 5대륙의 상이한 문화와 인종 수만큼 다양한 종교적·문화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현대 무슬림들의 서방에 대한 증오는 19세기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이것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다양한 이슬람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원한 이슬람은 13세기가 지난 후 중동은 물론, 북아프리카, 중앙·남아시아, 유럽에까지 진출해 있다. 정통 이슬람 국가가 중동에 많다면, 북아프리카의 이집트, 리비아 등은 중동에 비해 서구화, 개방화돼 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정교일치의 전통을 거의 상실, ‘세속화한 이슬람 국가가 돼 있다.

 

같은 중동 국가들이라도 페르시아인의 이란과, 아랍인의 사우디아라비아는 인종간 경쟁의식을 갖고 있다. 사우디나 쿠웨이트 같은 친미 국가도 있고, 이라크나 리비아처럼 미국과 원수지간인 나라도 있다.

 

이슬람 내부 갈등

 

종파적·문화적 차이로 이슬람은 내부 갈등을 겪는다. 여기에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돼 갈등의 양상은 한층 복잡해진다. 2차 대전후 아랍권내 주도권을 놓고 이집트와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간 경쟁이 치열했다.

 

이스라엘 문제를 놓고도 아랍권은 강·온파로 나뉘어 있다. 수니파 왕국 사우디는 이란의 시아파 정권을 싫어하고, 이란은 시아파를 탄압하는 이라크의 수니파 정권에 적대적이다.

 

리비아와 시리아는 아랍권의 여론과 달리 독자적 노선을 고수하고 있고, 아랍의 가운데에 위치한 요르단은 동서를 넘나드는 외교력으로 주목 받았다. 또 사우디나 요르단 등 왕국은 이집트 등 공화제 국가와는 거리감을 느낀다.

 

서구 지배가 남긴 유럽 문화와 근대화를 수용한 나라와, 정통 이슬람을 고집하는 나라 사이의 갈등도 잠복해 있다. 정통 이슬람문화와 서구문화는 국가내에서도 충돌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침공에 맞서 아랍권이 단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서구에 대한 불신·증오의 뿌리

 

이슬람이 갖는 서구에 대한 증오와 반감은 19세기 열강의 식민지가 되면서 시작됐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영국·프랑스 등 열강은 중동의 지정학적·경제적 중요성 때문에 서구 열강은 이슬람 세계를 수탈했고, 독립 움직임을 탄압했다.

 

하지만 무슬림들은 정치와 종교가 일치되는 공동체의 부활을 줄기차게 추구했고, 일부는 급진주의, 과격행동으로 나타났다. 이런 개혁 성향의 이슬람 부흥운동을 서구인들은 이슬람 원리주의라고 불렀다.

 

2차 대전후 아랍권은 옛 영토을 회복하면서 독립했다. 독립후 석유를 무기화한 아랍권의 자원 민족주의는 서구 열강에 대한 보복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가 물러난 자리에 미국이 대신 들어섰고, 이슬람의 눈에는 미국의 정책 역시 국익 우선으로 비쳤다. 반서방은 반미로 이어졌다. 그러나 나라마다 미국을 대하는 입장은 제각각이었다.

 

이슬람은 원래 관용의 종교,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였다는 지적은 그래서 아이러니다. 마호메트의 출현 이후 불과 100년만에 아라비아 반도는 물론,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던 것도 이 아닌 이민족·이문화에 대한 관용 때문이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이슬람 혁명과 탈냉전의 충격

 

1960~70년대 아랍권은 주도권 싸움과 친미·친소 국가간 대립이 있었지만 대 이스라엘 전쟁에서는 단결하고 협조했다. 그러나 1979년 이란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슬람 시아파 혁명,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사회주의권 붕괴를 계기로 중동 정세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이란-이라크 전쟁(1981~88), 걸프전쟁(1991)은 권력 공백 상태에서 발생한 아랍권 내부의 충돌이었다. 아랍권은 분열됐고, 이들 전쟁에서 보여준 미국의 힘과 이중성은 아랍인에게 또 다른 불신과 상처를 남겼다는 지적이 많다.

 

1990년대 들어와 이슬람 과격단체들은 이런 미국을 상대로 폭탄테러 활동을 증가시켰다. 하지만 이들도 이슬람의 전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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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바라본 꾸란의 오류와 모순들(2)

 

1. 성경의 변형들

 

1) 남자 갓난아이를 죽이라는 파라오의 칙령: 꾸란은 이스라엘의 남자 갓난아이를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령이 모세의 사역 도중 내려졌다고 말한다. “파라오 백성들의 우두머리들이 말하더라 폐하(파라오)는 모세와 그의 백성들이 지상에 해악을 퍼트려 폐하와 폐하의 신들을 우롱하도록 둘 것입니까?’라고 말하니 그(파라오)가 대답하였더라. ‘그들의 아이가 남아이거든 우리는 살해하여 단지 그들의 여자만 살아남게 하여 그들을 지배할 것이니라”(꾸란 7:127) 그러나 성경은 이 명령이 모세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려진 것이라고 말한다(1:16; 2:1-2).

 

2) 이집트에 내린 재앙들: 꾸란은 하나님이 이집트에 내리신 재앙들에 대해서도 성경과 다르게 말한다. 첫째, 10가지 재앙 중 일부만을 언급하고 있다. 둘째, 언급된 일부의 재앙들마저 성경과는 다른 순서로 등장한다. 셋째, 성경에 없는 재앙인 홍수를 언급하고 있다. 아랍어 타와판”(tawafan)은 문자 그대로 홍수를 의미하며, 다른 어떤 뜻도 담고 있지 않다.

 

3) 모세가 내리친 바위와 열두 개의 우물들: 꾸란은 모세가 돌을 치자 열두 개의 우물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는 열두 지파와 상응하는 수의 우물이었다(꾸란 2:60; 7:160). 그러나 엘림에서 있었던 일을 호렙에서 있었던 일과 섞어 놓은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먼저 엘림에서 묵었고, 그곳에서 그들은 12개의 우물과 70그루의 야자나무를 발견했다(16:1). 그리고 그들은 신광야에 도착할 때까지 여정을 계속했다. 그곳은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곳이었다(16:1). 그들은 르비딤에 도착할 때까지 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그들은 물이 필요했다(17:1). 그들은 목이 말랐고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모세가 바위를 쳤을 때, 그 바위는 물을 뿜어냈다(17:5-6). 열두 개의 우물은 엘림에 있었고, 바위에서 물이 솟아난 것은 호렙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4) 언약의 궤: 꾸란은 언약궤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다(꾸란 2:248). 먼저 꾸란에는 언약궤 안에 사키나”(Sakinah)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사키나라는 뜻의 아랍어와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그러나 이 아랍어 단어는 히브리어 쉐키나”(Shekinah)를 그대로 음역한 것일 뿐이다. “쉐키나”(Shekinah)는 언약궤 위에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 영광의 임재를 일컫는 단어이다. 두 번째로 꾸란은 언약궤가 모세와 아론의 가족들의 유품들도 담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언약궤는 십계명이 적혀 있는 두 개의 돌판을 담고 있었다(왕상 8:9). 또한 히브리서 94절을 보면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셋째로 꾸란은 언약궤가 천사들에 의해 운반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성경의 내용과 다르다.

 

3. 꾸란 안에서 모순되는 내용들

 

1) 사람이 어떤 물질에서 창조되었나?: 꾸란은 사람이 어떤 물질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하여 모순이 있다. “알라는 흙에서 너희를 창조하사 정액에서 너희를 재창조하셨으니”(꾸란 35:11) 어떻게 알라가 인간을 먼저 흙으로 만든 후에 정액으로 다시 만든단 말인가? 이 내용은 다음과 같이 변한다: “우리(알라)가 인간을 창조하사 검고 묽은 진흙으로 만드셨고”(꾸란 15:26) 그런데 다른 구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알라)는 그들을 진흙으로부터 창조하였느니라”(꾸란 37:11) 그런데 진흙에서 추가된 다른 구절에는 그분(알라)은 도기를 만들듯 인간을 흙에서 창조하였으며”(꾸란 55:14). 인간이 한 방울의 정액 또는 응혈로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있다(꾸란 16:4). “또한 인간이 물로 만들어졌다.”(꾸란 25:45) 그렇다면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는가 아니면 정액으로만 만들어졌는가? 흙으로 만든 다음에 다시 정액을 혼합해서 만들었나? 진흙으로 만들었는가? 아니면 묽은 진흙으로 만들었는가? 아니면 물로 만들어졌는가? 이에 대한 혼란이 꾸란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2) 이집트의 파라오는 바다에서 익사했나, 아니면 살았나?: 꾸란은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바다로 간 파라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다. 어떤 구절들에서는 파라오가 그의 군대와 함께 수장당했다고 말한다(꾸란 17:103; 28:40; 2:50). 반면 어느 한 구절에서는 이상하게도 파라오가 알라에 의해 살았으며, 다른 이들에게 알라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 우리(알라)가 너를 구해 줌으로써 네 이후에 오는 자들에게 예증이 되도록 함이라”(꾸란 10:92) 그러나 사실상 꾸란에 기록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3) 꾸란은 아랍어로만 기록되어 있는가?: 꾸란에는 꾸란이 순수한 아랍어로만 기록되었다고 돼 있다. “한 인간이 그를 가르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그들을 우리(알라)는 알고 있나니 그들은 외래인이 그(무함마드)를 가르친 것이라 하더라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아랍어이라”(꾸란 16:103) “우리(알라)는 꾸란을 아랍어로 계시하나니”(꾸란 12:2)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란은 많은 비()아랍어를 담고 있다(꾸란 16:103; 12:2; 41:44). 여러 예를 들 수 있다: “파라오”(Pharaoh) 이집트어; “아담, 이브”(Adam and Eve) 아카드어; “아브라함”(Abraham) 시리아어; “하루트(Haroot), 마르트(Marroot), 시라트(Sirat), 후르 안인(Huwariyeen), (Jinn), 피르다우스(Firdawa)”모두 페르시아어; “히버(Heber), 투라트(Turat), 게한님(Gehannim)” 모두 히브리어; “인질”(Injeel) 그리스어 등, 아랍어가 아닌 외래어가 이 외에도 꾸란 안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유해석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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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슬람교 중앙성원 한남동)

한국을 향한 이슬람의 다와’(선교)

 

경제·문화교류 통한 한국침투

 

한국의 이슬람화를 위해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 치밀한 전략으로 이슬람의 침투를 추진하고 있는 이슬람 세력의 움직임이 매우 활발하다. 특히 강력한 오일파워를 가지고 있는 아랍권 이슬람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정부차원이나 민간차원의 문화교류도 추진되고 있어, 이슬람교의 침투가 보다 더 용이해 지고 있다. 

 

지난 22일에는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인천시청 앞 대흥빌딩 3층에 마련된 한국중동문화원의 개원식이 열렸다. 아시아 지역에 이슬람과의 문화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상설공간이 마련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한국과 이슬람과의 문화교류의 물꼬를 트는 계기로 여겨진다. 동시에 이슬람교도 자연스럽게 더욱 활발하게 전파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중동문화원의 개원이 이슬람 세력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지는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인사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중동권 22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아랍의 최고 국제기구인 아랍연맹의 아무르 무사 사무총장을 포함해 수단, 이란, 쿠웨이트, 레바논,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카타르 등 중동 각국의 장관, 왕자, 경제문화계 인사 100여 명이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한국중동문화원이 생기게 된 이유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의 유치를 위해서였다. 안상수 인천시장이 중동국가의 지지를 이끌어 낼 아이디어를 찾자 한덕규 한국중동협회 회장이 인천에 중동문화원을 지으라고 조언한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인천이 국제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중동 자본을 끌어들이는 게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도 작용했다. 

 

이날 개원식에 참석한 카타르의 마르셸 빈 자심 알타니 왕자는 한국과 중동 국가들 간 문화, 문물의 지속적인 교류가 이뤄질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문화원의 개원은 단순히 건물 하나 들어선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문화원뿐만 아니라 아랍거리도 만들어졌다. 참석자들은 개원식에 이어 청라지구에서 서울의 테헤란로와 같은 아랍거리명명식을 갖고 높이 1m의 석제조형물을 세웠다 

 

무슬림의 한국 이슬람화 전략

 

이슬람세력의 한국 침투는 매우 전략적이다. 지난 2005년도에 한국이슬람연맹에서 출판한 한국이슬람 50년사에는 이들의 선교전략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사원 건립= 현재 있는 서울 중앙성원을 비롯해 9개의 이슬람 성원, 4개의 이슬람 센터와 50여개의 임시 예배처소를 점차적으로 확대하고자 한다. 

 

국제 이슬람학교 설립= 무슬림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한 교육시설이라는 명목으로 영어로 가르치는 초등학교, 유치원 및 어린이집을 만들어 어려서부터 이슬람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저렴한 가격에 운영된다면 많은 한국인 부모들이 자녀들을 그곳으로 보내고 싶어 할 것이다. 

 

이슬람 문화센터 건립= 이슬람 문화센터를 다와센터(Da’wah Center)라고 부른다. 이는 선교센터라는 말이다. 문화센터에서는 많은 이슬람국가들의 언어교육부터 시작하여 상설 이슬람 교리강좌 등을 통해서 한국 사회에 이슬람을 뿌리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꾸란 번역 위원회= 꾸란을 한글로 더 완벽하게 번역하기 위해서 꾸란 번역위원들의 정기 모임이 매주 열리며 비정기적으로 연구 토론모임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슬람대학 건립= 1970년대 말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사업으로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이 대학이 건립되면 한국 이슬람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고급 무슬림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며 이들은 삽시간에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들에 침투할 것이다. 

 

이슬람 관련 서적 출판위원회= 지금까지 많은 이슬람 서적들이 나와 있다. 이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책들과 인쇄물들을 만들어 홍보하고자 한다 

 

한국 여성들과 결혼 및 출산 전략= 이슬람권에서 한국으로 건너 온 근로자들이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 취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한국 여성과 결혼하는 방법이다. 한국 정부는 아내가 한국인이고 남편이 외국인이면 남편에게 체류허가를 발급해 준다.

 

 

그동안 불법체류를 한 사람일지라도 합법 체류자의 자격을 얻게 된다. 그들은 한국 여성과 결혼해 가능하면 많은 자녀들을 낳아서 무슬림들의 숫자를 늘리고자 한다. 이 방법은 이미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대로 가면 유럽의 무슬림 숫자는 2025년에 이르면 지금의 두배가 될 것이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이 출산 전략은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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